24. 날 위해 노래를 불러 줘
* * *
“새끼, 여자 만나서 즐기니깐 좋아? 아, 부럽네.”
진우는 제 옆에 앉아 바텐더를 부르는 재민을 보면서 능글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재민은 제 말을 싹 무시하면서 술을 주문하고 있었다.
“맥켈란, 두 잔으로.”
바텐더가 싱글 몰트 위스키를 내려놓았다. 재민은 앞에 놓인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진우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산 다녀온 날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딴소리 마세요.”
재민이 제 몫으로 주문한 위스키를 한입에 탁- 털어 넣은 진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부산 집에 있는 책은 또 왜?”
“미주 변덕이 뭐 어제오늘 있던 일도 아니잖아요? 갑자기 문학소녀가 되고 싶었대요.”
진우는 입꼬리를 한 번 올리고는 바텐더를 불렀다. 같은 술을 하나 더 내올 것을 주문한 뒤 말했다.
“내가 그 말 믿을 거로 생각했다면 너도 참 어지간하다.”
“…이제 곧 출산하니깐 뭔가 부모님이 생각났나 봐요. 나한테는 어른들 손때 묻은 물건이 갖고 싶었다고 하던데. 뭐, 진짜 속마음까진 저도 몰라요.”
재민도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담담하게 미주의 일을 알렸다. 진우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새 잔에 담긴 술만 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고, 조카 태어나면 같이 보러 가요.”
“…….”
“석 달 뒤에 낳는다니 그동안 형도 이제 마음 좀 푸시고. 아니, 사랑싸움 5년이나 했으면 인제 그만할 때도 됐어요.”
“닥쳐, 새끼야.”
“그 정도 했으면 됐어요. 진우 형, 정녕 미주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죠?”
꽉 쥔 진우의 주먹이 살짝 부르르 떨렸다. 미주의 마음을 모를 리가 있을까?
지난 5년간 셀 수 없을 정도로 재민이 미주를 대신해 그녀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렇지만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았다.
저를 배신한 미주의 행동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내 생각하곤 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숨겨진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를 미워했다. 아니, 증오했다. 연호의 곁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는 듯해 너무나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미주야, 네가 날 버린 거야.’
미주와 연호를 함께 파멸시키리라 매일 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다짐했었다. 왜냐면 인간성을 버리고 꿈도 버리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살았으니깐.
미주만이 인생의 전부였다. 사랑해서, 너무 사랑해서 감히 사랑할 수도 없었던 그녀에게 존재를 부정당했다 여겼다.
오빠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굴레로 그녀를 제 옆에 영원히 속박해 두려 했는데 미주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친오빠도 아니잖아.’
‘오빠’라는 말은 진우가 스스로 건 주술과도 같았다.
미주의 오빠니깐, 미주의 오빠라서, 미주의 오빠이기에 저는 절대 남자이면 안 됐기에 죽을 때까지 ‘오빠’이고자 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이별한 희주의 빈자리까지 미주를 위해 채워 주려 했는데.
그녀는 과거에서 벗어나 스스로 미래를 선택했다.
그래서 미웠다. 아니, 원망했다. 여전히 매일 밤 제가 저지른 죄악들이 온몸을 칭칭 감아 죄어 오는데 말이다. 저는 끔찍한 피로 물든 과거에 남겨 두고 미주는 미래가 되어 줄 남자의 손을 잡았다.
‘미주야, 나를 네가 있는 천국에 함께 데려가 줄 수 없다면, 너희가 내가 있는 이 지옥으로 끌려 내려와야 해.’
지난 시간 동안 연호를 완전히 없애 버릴 힘을 키우면서 머리를 숙인 채 발톱을 숨겼다.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벼랑 끝까지 몬 다음 연호는 밀어 버리고 미주는 벼랑 끝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으려 했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느끼기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영겁의 고통을 미주에게 주리라 수천 번 다짐했건만.
“형님, 회장님은 그냥 두실 겁니까? 이 판을 짠 게 다 늙은 여우의 계략인데.”
“아직은 일러. 좀 더 칼을 날카롭게 갈아야 한 번에 쓰러뜨릴 수 있으니깐.”
진우의 대답에 깊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의 재민이 골똘히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알아보라 하신 거, 형 예상이 맞았어요.”
“역시, 그때 미주 전략실로 발령 낸 게 차연호 이전에 영감이 먼저였어.”
“차 상무가 전화 넣기 전에 이미 윗선에서 비밀리에 지시가 내려왔었답니다.”
진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가운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그건 정말 뜻하지 않게 우연히 알게 된 일이었다. 저보다 더 치밀한 눈을 가진 정훈이 진 회장의 차명 계좌를 관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지금은 실장이 된, 그 당시 인사과의 박 과장은 진수오 회장의 비자금 계좌를 제 명의로 하나 맡고 있었다. 그런데 5년 전부터 그의 아내 통장으로 한 달에 한 번씩 꽤 수상쩍은 입금 기록이 있다는 걸 하 변호사가 눈치챈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저희가 보내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박 실장 재정 입출입을 다 살펴봐도 저 돈이 나올 만한 곳이 전혀 없고요.”
진 회장의 비자금 차명 관리에 따른 대가는 모두 진우의 손에서 체크되어 나가고 있었는데, 보낸 적 없는 출처 불명의 돈이 또 있었다.
진우와 하 변호사는 신중히 그 자금의 출처를 역으로 알아보았다. 하도 여러 번 세탁되고 명의가 바뀌어 좀처럼 꼬리를 잡기 힘들었다. 그래서 박 실장이 연호 쪽으로 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거꾸로 거슬러 올라 찾아낸 뜻밖의 인물에 처음에는 놀랍다가 점점 차가운 분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박 실장 말이 그 누가 물어도 그 일은 차연호가 지시한 거라고 대답하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차연호마저 속였다고 하더군요.”
“역시 처자식을 볼모로 삼으니 술술 다 부는구나.”
“그래도 형님, 너무 지독히 굴지는 마세요. 제가 적당히 박 실장 달래 놔서 지금쯤 목숨은 부지했다 안도하고 있을 테니.”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이제 대충 그림이 다 그려졌네.”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을 때 재민이 제 말을 이어받아 읊조렸다.
“형이 일부러 탈락시킨 미주를 합격시키고 형한테 한 마디 말도 없다가 그날 차연호를 부른 이유를 알 만하네요.”
“차연호가 미주한테 관심 보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당했네요, 천년 묵은 독사한테.”
진우는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진 회장이 정말 무섭고도 음흉한 인간이라는 건 가장 근거리에서 지켜본 제가 잘 알았는데, 등잔 밑이 어두웠다. 그 능구렁이가 치밀하게 뿌려 놓은 덫에 걸려 넘어가 그가 짜 놓은 각본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니. 저도 재민도 심지어 연호마저도 그의 장기 말에 불과할 줄이야.
“나랑 연호를 싸우게 만들어서 둘 다 자폭하길 기대했을 거야.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했는데 미주가 변수로 작용할 줄, 영감탱이도 몰랐겠지.”
재민은 뒤늦게 알게 된 진 회장의 계략 때문에 제가 미주와 진우를 부추겼던 걸 감출 수 있다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이런 말 형은 듣기 싫겠지만, 저도 포함해서 남자 셋이 질투로 눈멀어 서로 죽고 죽이길 바랐겠죠.”
“거기에 왜 날 넣어?”
“이제 와 발뺌하지 마세요. 아무튼 미주가 차 상무와 다른 의미로 엮인 게 변수였을 테고, 형이 미주를 끊어 낼 줄 저도 몰랐듯이 회장님도 그럴 줄 몰랐겠죠.”
“이거 참, 미안하게 됐네.”
진우가 술잔을 들고 재민의 잔에 쨍- 소리가 나게 부딪치고는 남은 술을 남김없이 마셨다. 그러고는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재민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빈 잔을 오른손에 쥐어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재민아, 차연호가 지금 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걔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는 것 같다.”
“…….”
재민은 말하라는 듯 진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 그 새끼가 미주한테 어떤 마음인지 진짜 정확히는 몰라도 이거 하나는 분명해.”
“뭐가 말입니까?”
“미주를 이용하려고 했던 그 사생아 새끼가 되려 미주 때문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거.”
진우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말에 재민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영감탱이가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을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던 이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거였어.”
“…….”
“혹시 처음부터 미주가 차연호의 약점이 되길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던 게 아닐까?”
“…감정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더 깊어질 수 있는 거고, 솔직히 고슴도치처럼 말하자면 미주를 좋아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테니깐요.”
“우리 모개가 마성의 여자라니. 이거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제 말에 재민이 피식- 하고 웃었다. 진우도 따라 웃지만, 눈동자는 더 없이 푸른빛으로 식어 있었다.
“아마도 영감이 기회를 엿보다 미주를 가지고 연호를 제 편으로 끌어들일 것 같아, 날 견제하기 위해서.”
“설마, 차연호 평생의 숙원이 차현 회장이 되는 건데 진 회장이랑 손을 잡겠습니까?”
“내가 박 실장한테 했듯, 처자식을 가지고 늙은 여우가 압박하면 연호도 어쩔 도리가 없을 거야.”
진우의 생각이 완전히 맞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재민이 동의한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일 때 진우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 재민아. 설마 여기까지 이 능구렁이가 생각했겠냐만……”
진우의 눈동자는 더없이 형형하게 번뜩였지만,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부산에서 있었던 일, 기꺼이 내 손을 잡아 준 게 미주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런 건 아니겠지?”
“형… 설마요. 그건 어떻게 보면 희주 형 때문에 시작된 일인데…….”
“내 약점을 쥔 자가 나를 서울로 불러들일 때 미주를 부산에 혼자 두고 오리라 생각하지 않았겠지. 그때 미주는 반송장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진우는 지금까지 제 적은 차연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 진 회장의 개가 되고자 했으니, 훗날 저를 토사구팽시킬 거라는 것도 이미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복수할 힘을 빌려준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진짜는 바로 진수오였다. 진우는 그가 부산에서의 은인이자 더 큰 기회를 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밑에서 묵묵히 더러운 일을 기꺼이 도맡았다.
하지만 한번 피로 물든 손에서는 쉽사리 피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진수오의 도베르만이 되어 그를 위협하는 것을 물어뜯어 줬는데. 질투에 몸부림치다가 더 큰 그림을 놓치고 말다니.
안타깝게도 진 회장이 재민을 이용해 미주와 연호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걸, 진우도 당사자인 재민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재민의 핸드폰이 불길하게 울렸다.
[실장님, 큰일이 난 듯합니다. 미주 씨가…]
요한에게 온 급박해 보이는 메시지에 재민과 진우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 * *
“…위험한 상황입니다. 당장 수술을……”
“…….”
“…그래서, 아, 상무님, 지금 제 말 듣고 계시죠?”
“…네? 아, 네. 네, 박사님.”
연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하혈을 시작한 미주를 급히 병원으로 옮겼는데 말이다. 산모와 태아, 둘 다 위험하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다니.
정신이 자꾸 아득해지는 것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연호는 늦은 밤, 응급 상황 때문에 불려 나온 담당의 말을 듣고 있었다.
“태반 조기 박리라, 지금 응급으로 제왕절개를 하지 않으면 산모도 태아도 둘 다 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힌다는 산부인과 박사가 무어라 이야기해도 더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나 때문이야. 내가 미주를…….’
그녀를 그렇게까지 추궁하고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다. 미주가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민과 진우에게 언제라도 돌아갈지 몰라 매일매일 불안했다.
그래서 저를 도발하는 미주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 추악한 진실을 충동적으로 그만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사랑하는 미주를 상처입히다 못해, 아이마저도 잃을 수 있는 참담한 현실이 눈앞에 나타나고야 말다니.
‘미주야…… 문 열어 줘. 우리 얘기 좀 하자.’
일주일이었다. 제게 꺼지라던 미주가 문을 걸어 잠근 시간이 말이다.
각방을 쓰게 된 연호가 고용인에게 물으니 제가 없을 때는 집 안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고 했다. 침실에서 나와 밥도 잘 챙겨 먹고, 저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태연하다 하기에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미주가 저를 무시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더는 이런 냉전을 견딜 수 없어 문을 두드렸다. 미안하다 사과하고, 필요하다면 정말 무릎이라도 꿇을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했는데.
‘…연호 씨… 피가…….’
문을 몇 번이나 두드려도 반응이 없기에 안에서 잠갔나 싶어 손잡이를 돌리려고 할 때 미주가 먼저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녀의 다리 사이로 쏟아지던 피.
“…상무님, 그럼 수술에 동의해 주신 거로 알고…….”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 멍한 기분으로 앉아 있다가 제게 상황을 설명하는 의사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동의합니다, 교수님.”
연호가 ‘수술 중’이라고 불이 들어온 곳 앞에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 끝없이 자책하고 있을 때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전 상황을 설명해 주던 담당의가 나왔다. 침통한 얼굴과 무거워 보이는 발걸음.
모든 게 잘못됐음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말이다. 제 귀에 박히는 끔찍한 현실을 일러 주는 의사의 말에 점점 눈물이 고여 왔다.
“…상무님, 그게…….”
“설마…….”
“죄송합니다, 태아는 이미…….”
“미주는요, 박사님! 우리 미주라도 살려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아내까지 잃으면 저도 죽어요… 그러니 제발…….”
연호가 의사를 붙잡으면서 너무나도 간절한 목소리로 울먹이고 있었다.
“사모님은 출혈이 너무 심해 지금 수혈을 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발 미주라도 살려 주세요. 제발!”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수술실 앞에 울려 퍼졌다. 그렇지만 미주에게 닿지는 않았던 걸까?
연호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 *
이 감정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 연호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미주의 곁에서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정해진 면회 시간에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지만, 여긴 차현 의료원이었고, 저는 차연호였다. 잠도 자지 않고 거의 24시간 내내 옆을 지키고 있지만, 미주는 깨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갑갑할까? 이걸 풀어 주고 싶지만, 미주야, 깰 때까지는 절대 안 된대.”
혹여 의식이 없는 동안 몸부림을 치다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눈물을 머금고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연호는 결박된 그녀의 두 손을 보면서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이대로 미주가 영영 깨어나지 않을까 봐 너무나도 무서웠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행복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행복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저와 미주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늙은 구렁이의 속셈을 알면서도 유치한 질투심 때문에 이런 비극이 생기고 말다니. 너무나도 큰 죄책감과 절망 그리고 미주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었다.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태반 조기 박리는 일종의 사고와 비슷한 거라고.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은 분분하나 정확한 이유를 아직 밝혀내지 못한 증상이니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산부인과 박사가 하는 말만 들어서는 사산된 아이와 의식이 없는 미주와 참담한 저는 그저 불운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자식을 죽이고 아내를 사지로 내몬 자가 바로 자신임을.
그동안은 미주와 관련된 일이면 항상 한 템포 감정을 누르고 느리게 생각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눈엣가시였던 재민이 자꾸 엮이자 이성을 잃어버린 덕에 말이다.
미주와 저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주야, 제발, 날 용서하지 않아도 되니 제발, 살아만 줘.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연호가 눈물을 흘리면서 누워 있는 미주를 보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연호가 미동도 없이 미주만을 보고 있을 때였다.
미주의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
“미주야! 미주야……!”
천 근 같은 눈을 겨우 뜨자 사랑하는 남자가 수척해진 얼굴로 제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어 이상했다.
늘 언제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한 냉혈한이라고 생각했는데, 연호는 왜 울고 있는 걸까?
“다행이야, 미주야, 나야. 나 보여?”
“…….”
미주가 눈동자를 위아래로 힘겹게 움직이자 연호가 급히 의료진을 호출했다. 하지만 다시 깊은 잠에라도 취한 듯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계속 연호의 목소리만 들리는 듯하다가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 다시 어느 순간 간신히 눈을 떴을 때였다. 이번에는 그간 면도도 못 했는지, 지난 5년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까칠한 연호가 앞에 앉아 있었다.
“미주야, 미주야!”
“…아…….”
목이 너무 아팠지만, 뭐라 굳은 혀로 웅얼거리자 연호가 기쁜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미주가 눈을 깜빡이면서 머릿속으로 아이가 잘 있는지 확인해야 할 듯해 손을 움직이려고 했는데 말이다. 팔이 어딘가에 묶여 있는 듯해 조금 의아하다는 듯 연호를 보았다. 그 순간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연호가 무섭게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당장 풀어 줘요! 이거 묶어 놓은 거 당장 풀라고!”
남편의 눈치를 보는 듯한 의료진들이 옆으로 와 부산스럽게 움직인 뒤 어쩐지 이제는 팔이 움직여질 것 같았다. 몸에 있는 모든 힘을 모아 손을 배꼽 쪽으로 움직일 때 연호가 제 손을 잡았다.
“미주야, 다 내가 잘못했어.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용서해 줘.”
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연호의 간절한 목소리에 가슴이 아플 때였다. 뭔가 이상함을 그제야 느꼈다.
“…아기… 초록이…….”
미주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어 중얼거렸다. 차가운 얼음 같았던 연호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연호가 더없이 슬프고 비통해 보이다니.
그리고 계속 용서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며 그제야 의식을 잃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이럴 순…….”
피였다.
침대에 누워 배를 쓰다듬어도 어쩐지 태동이 없었다. 자꾸만 배가 뭉쳐서 불안해질 때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연호 씨. 나 배가 너무 아파요…….’
일주일간 내쫓다시피 해 다른 방에 있을 연호가 문을 두드릴 때였다. 겨우 피 칠갑이 된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다음은 더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안 돼…….”
또다시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신이시여, 이제는 저를 죽여 주실 때가 되었다고. 그러니 제발 죽여 달라고.
하지만 절대자는 간절한 소원을 여전히 들어주시지 않았다.
몇 번 의식을 잃고 차리고를 반복한 끝에 간신히 이렇게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중환자실이 아니라 일반 병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아, 우리 아기가 여기에…….”
미주가 문득 또 배를 만졌다. 하지만 납작해진 복부는 더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지 않았다. 태동이 상당했기에 꽤나 활발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천사는 하늘의 별이 된 걸까?
마치 지금 아이를 잃었다는 걸 알았다는 듯 미주는 옆에 있는 연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연호 씨, 배가… 초록이가 없어요. 어디에 간 거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상에 누워 힘없는 손으로 배를 만지는 미주를 연호는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미주야, 아이는 또 가지면 되니깐. 우리 둘 다 아직 건강하니깐… 또 가질 수 있어, 응?”
연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간곡히 말하지만, 미주는 일순 표정이 변하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아악! 안 돼! ……안 돼!”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마치 기억을 잃었다가 다시 이 끔찍한 현실을 기억해 내는 것처럼 미주는 매일매일 울부짖었다.
꺽꺽- 소리 내며 피 토하는 마음으로 우는 소리에 연호의 가슴도 같이 찢어졌다.
지금껏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소리 내어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는데. 미주의 울부짖음이 연호의 가슴에 박혀 생채기를 내고 죄책감에 무게를 더했다.
“미주야, 다 내 탓이야. 내가 잘못했어. 모든 게 다…….”
연호가 참회의 심정으로 진심을 담아 사죄해 보지만, 미주의 눈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그러다 그간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미주가 처음으로 매섭게 안광을 번뜩이며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했다.
“날 죽여서라도 아이를 살렸어야 했는데! 왜 날 살린 거야? 왜!”
“박사님 설명 들었잖아? 병원에 왔을 때 이미 늦었다고. 이미 먼저 떨어져 버린 태반 때문에 산소 공급이 안 돼서…….”
미주가 차갑게 대답하며 잡힌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다.
“쉽게 말하지 마! 또 가진다고?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한 명뿐이었어!”
“너라도 살아서, 너만이라도 살려야 했어. 널 너무 사랑하니깐 네가 없이 산다는 게 나는…….”
“하하하! 뭐? 사랑?”
반쯤 미친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다가 붉어진 눈으로 일갈했다.
“차연호, 넌 사랑을 몰라…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착각하지 마! 하하하! 넌… 사랑을 모르는 놈이야. 아니, 너 같은 게 감히 사랑을 운운하다니…….”
“미주야, 날 용서해 줘.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일 테니…….”
연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진심이 닿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이미 미주는 너무 멀리 있었다.
“그거 알아요?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어. 모든 게, 다.”
그래, 모든 건 처음부터 어긋났다. 만남도 사랑도, 짧았지만 행복했던 기억도 모두 허상이었을 뿐.
“아니야, 난 널 사랑해. 시작은 잘못됐을지언정.”
하지만 미주는 연호의 말을 끊으면서 미친 듯이 감정을 쏟아 냈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차연호, 너도! 나를 이용하려고 했던 모두……! 다 죽여 버릴 거야!”
“…미주야.”
“사랑? 차연호, 웃기지 마. 넌 날 정복하고 싶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어.”
“아니야, 정말 널 사랑해.”
“아니, 거기에 진짜 당신 마음은 없어. 설령 우리가 했던 게 사랑이었다고 해도 나는 이제 더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증오스러우니깐.”
미주가 힘없는 주먹으로 연호의 어깨를 내려치면서 피를 토하듯 원망했다. 그녀의 눈물이 뺨을 타고 연호에게 흘러와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적시고 있었다. 연호는 실성이라도 한 듯 미쳐 날뛰는 미주를 품에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증오해. 미워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날 원망해. 하지만 그래도 널 잃고 싶지 않아. 절대로.”
미주는 연호의 품 안에서 눈물만 흘리다가 가만히 팔을 들었다. 그를 안으면서 바스러질 듯 속삭였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아, 연호도 이제 느껴지고 있었다. 저를 사랑했던 미주의 마음은 이제 어디에도 없음을.
* * *
연호가 완전히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 둔 덕분에 미주가 있는 VIP 병실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심지어 연희마저 연호가 오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말이다. 시누이는 올케의 안위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 채 여러 번 눈물을 훔치면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철통 보안 속에서 연호 나름대로 미주를 보호하고 있다 생각할 때 그가 나타났다.
[상무님, 서 전무님께서 병원에 오셨습니다.]
언론에서 뭔가 냄새를 맡고 취재하러 올 수도 있었고, 쓸데없는 면회를 오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현재 미주를 케어하고 있는 모든 차현 의료원 직원 및 경호원들에게 단단히 일러뒀다.
만에 하나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부부의 비극을 누군가가 언론에 팔거나, 또는 인터넷에 올리거나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말이다. 연좌로 죄를 물어 모두 해고 처리 하겠다고, 강경하게 입장을 전달해 둔 상태였다.
물론 아내가 몸과 마음 모두 무사히 회복되어 큰 문제 없이 퇴원하게 된다면 아주 두둑이 보너스를 따로 챙겨 주겠다는 당근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차현 의료원으로 진우가 제 오래된 별명인 불도저처럼 들이밀고 미주의 병실 앞에 섰을 때 소란이 조금 일었다.
“전무님, 죄송합니다만 여긴 상무님께서 외부인 출입 금지라고…….”
문 앞을 지키는 연호의 경호원에게 진우가 같잖다는 듯 말했다.
“누가 진짜 외부인인지는 잘 알 텐데.”
일부러 저 들으랍시고 진우가 큰 소리를 낸 덕에 연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는 미주를 보았다.
“전무님, 오셨다고 상무님께 제가 잘 전달할 테니 그만……”
“차 상무, 아니 매제. 나 왔는데 그냥 돌려보낼 건가? 미주가 알면 매제한테 썩 좋지 않을 텐데.”
저를 ‘매제’라고 부르는 말에 연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상을 잔뜩 쓴 채 병실 문을 열고 나와서 나직한 목소리로 도발에 응수했다.
“서진우. 너 올 자리 못 올 자리 구분 못 해?”
연호가 화를 꾹 누른 목소리를 내자 밖을 지키던 경호원들은 눈치 빠르게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덕분에 VIP 병실 복도에는 남자 셋만 기세등등하게 서 있게 되었다. 진우는 살짝 웃으면서 연호에게 대답했다.
“내가 항상 말했지, 차연호. 말이 짧다고.”
“내가 원래 그런 거 잘 알고 있잖아?”
“그래, 누구보다 잘 알지.”
연호의 시선이 진우의 옆으로 향했다. 어쩌면 진우보다 더 증오해 마지않으며 이 사달이 나게끔 빌미를 준 남자.
“너 이 새끼, 네가 어딜 감히 여기에.”
“제가 못 올 자리도 아닙니다.”
“이 씨발 새끼, 너 때문에 지금…….”
연호가 무섭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민의 멱살을 쥐며 노여움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재민 역시 지지 않고 연호를 매섭게 보면서 쏘아붙였다.
“차연호 상무님, 지금 그 말, 자신 있습니까?”
제가 알던 재민은 언제나 도발에 심드렁하게 반응했는데. 안경 너머 저를 보고 있는 눈빛에서 왠지 모를 살의까지 느껴져 연호는 코웃음을 쳤다.
“너는 나중에 내가 따로 손봐 줄 거야.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
“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상무님.”
재민이 처음으로 연호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도발에 응하고 있을 때였다. 진우의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차연호, 너야말로 빠져 있어, 우리 사이에.”
어쩌면 그 말이 연호가 가장 두려워했던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저들이 말하는 가족이니 오빠 동생이니 난리인 그 끈끈한 유대감 속에 제가 절대 끼어들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된 미주를 법적으로 매어 놓게 된다면 그들과는 다른 형태의 가족을 그녀와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리고 ‘가족’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모든 걸 망쳤다.
“미주 때문에 참는 거야…… 와이프는 분명 네놈들 보고 싶어 할 테니까. 그러니 조용히 보고만 나와. 지금 자고 있어.”
재민이 연호를 지나치며 닫힌 병실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다가 말이다. 어쩐지 진우가 조금 망설이는 듯해 조용히 말했다.
“형님, 알잖아요? 자고 있을 때 건드리면 미주 성질 더럽게 부리는 거.”
진우가 살짝 미소 지을 때 연호 역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문을 닫고 병실로 들어섰다.
“…미주야, 나 왔어.”
재민은 말없이 미주가 누워 있는 병상으로 다가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지난날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 있었는데 이 끔찍한 일이 다시 반복되고 말다니.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되는 상황 속에서 지금 미주의 고통을 나눌 수 없어 너무나도 한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그때 내가 네 등을 안 밀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연호와 미주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당연히 재민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질투에 눈멀어 진우를 이용해 미주를 가지려다가 실패했다고 지난 5년간 굳게 믿고 있었다.
어렸던 미주도 지켜 주지 못했는데, 철이 든 미주도 지켜 주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이 모든 슬픔 속에서 완전히 무혐의일 수 없음을 알기에 제 죄도 연호에게 덮어씌우고만 싶었다.
“…….”
연호의 마음은 지금 폭풍이 치고 있었다. 진우와 재민이 미주에게 조금 다른 의미일 테니. 재민의 목뼈를 수백 번도 부러뜨리고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떨어져 이 모든 걸 관망하는 듯한 침통한 얼굴의 진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 치워.”
진우가 마치 그간 고생했다는 듯 연호의 어깨를 살짝 다독였다. 그러자 연호가 그를 노려보면서 작은 소리로 일갈했다.
“…이러니 네가 뭘 모른다는 거야. 우리 모개가 지금 이러는 거 별로 안 좋아할 거다. 그러니 차연호 너는 그냥 조용히 있어.”
‘모개’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연호는 진우가 지칭하는 ‘모개’가 미주를 부르는 별명임을 캐치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만의 언어, 그들만의 추억과 이야기는 제가 절대로 낄 수 없는 세 사람의 기억일 테니까.
연호를 가볍게 무시한 진우가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뭔가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미주의 야윈 손을 잡고는 그저 사랑하는 동생을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진우가 온 걸 미주가 알았던 걸까?
“…….”
목이 마르고 몸이 계속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 속에서 미주가 이상한 느낌에 살짝 눈을 떠 보았다.
환청과 환각이 들리고 보일 정도로 위험했던 섬망 증세가 겨우 진정된 후에도 자꾸만 의사는 저를 재우려고만 했다. 가끔 눈은 감고 있지만, 귀에 들리는 담당의가 연호에게 무어라 하는 말들.
‘…자해할 가능성이 높으니… 사모님이 괜찮아질 때까지는 진정제를 계속……’
오래된 마음의 병이 지금 제 발목을 잡고 있음에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떤 익숙한 기운에 억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살짝 뜨니 남자들이 보였다. 제가 사랑하는 두 명의 남자. 한 명은 첫사랑이었고, 한 명은 지금 끓는 듯한 애증으로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명. 다른 의미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여기에 와 있었다.
“…오빠, 오늘 무슨 요일이야?”
미주는 그리움을 듬뿍 담아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진우에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수요일. 이번에는 딱히 이벤트가 없는 날이네.”
진우 역시 두 사람 사이의 지난 시간이 무색하게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대답해 주었다.
“수요일은 술이 술술 들어가서 수요일인데.”
“야, 멘트가 너무 구식이다. 늙었어, 우리 모개. 술타령하는 거 보니 살 만하구나.”
진우는 옅게 웃었다. 미주의 창백한 뺨을 한 번 손가락으로 튕기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서로의 마음이 느껴져 미주의 눈에 눈물이 맺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 전에도 여러 번 본 적 있는 광경이야.’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진우와 미주, 두 사람만의 견고한 시간. 재민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방금 확인 사살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는 두 사람과 타인이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둘과 하나.
그리고 연호 역시 어쩌면 처음으로 제대로 보고 있었다. 남편인 저보다 더 깊은 유대로 묶여 있는,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진우와 미주만의 공간.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패배감에 연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 때 시선이 느껴졌다. 저를 보는 재민에게서 자신이 보였다.
“미주야, 잠시 형이랑 이야기 좀 나눠.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응, 오빠, 나중에 봐.”
재민이 인사를 하고는 병실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와 병원 밖으로 빠져나가 어느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 때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담배 하나 줘 봐.”
재민이 대답 없이 연호에게 담배를 하나 건네자, 그가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진짜가 나타났으니 가짜들은 빠져 줘야 할 것 같아서.”
같은 여자를 사랑하기에 느낄 수 있는 지금의 미묘한 감정. 연호와 재민이 침묵 속에서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모개 좀 더 자. 가만히 보니 너 눈뜨고 있는 것도 힘들어 보여.”
“응, 맞아. 사실 힘들어.”
“내가 옆에 있어 줄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푹 자.”
진우가 머리를 쓰다듬자 어쩐지 너무나도 편안해진 미주가 그를 조르기 시작했다.
“오빠가 노래 불러 주면 무서운 꿈도 안 꾸고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야, 지금 나이가 몇인데 자장가를 불러 달라?”
“뭐 어때? 마음만은 여전히 소녀거든.”
“뭐래, 징그럽게.”
미주가 아이처럼 웃자 진우도 오늘만큼은 소년같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쪼끄만 애기가 언제 다 커 가지고 벌써 엄마가 될 나이가 되다니. 언제 이렇게 컸을까? 우리 모개.”
“아, 됐어. 늙은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맨날 불러 주던 노래나 불러 줘. 오빠 엄마랑 우리 엄마가 듀엣으로 나이트클럽에서 같이 불렀다는 그 노래. 오빠는 어릴 때 우리 엄마한테 직접 배웠잖아.”
미주는 스스륵 눈을 감으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하지만, 표정만큼은 밝아 보였다.
“아, 정말. 알았어. 이번 한 번뿐이야.”
진우는 몇 번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오랜만에 불러 가사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노래를 허밍처럼 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