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나만 몰랐던 이야기 (25/53)

23. 나만 몰랐던 이야기

* * *

늦게 귀가한 연호의 표정이 어째 좋지 않아 미주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오늘 접대한다고 하더니, 무슨 일 있었어요?”

연호는 태연한 미주를 보면서 뭔가 속에서 비틀리는 심사를 느끼고 있었다.

며칠 전 진 회장이 점심때 밥이나 같이 먹자며 불러냈었다. 생각해 보니 매형과 독대하는 자리는 오랜만인 것 같아 부름을 거절하진 않았다.

진수오 회장은 몰아내야 할 적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현재 차현 그룹 회장이니, 그를 존중하고 있다는 걸 대내외적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아직 제가 회장이 되기에는 연륜이 없고 나이마저 어리다고 생각하는 주주들이 있기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했으니깐.

‘매형, 반주는 가볍게 하세요. 오후에 일정 있으신데.’

이빨과 발톱을 숨긴 야수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연호야, 딱 한 잔만 하자. 누나한테는 말하지 말고.’

‘이래서 절 낮에 부르셨군요.’

연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벌써 반병이나 드셨어요. 안 됩니다. 누나가 안 그래도 매형 건강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에잇, 처남 앞이라 예전처럼 소주 좀 편하게 마셔 보려고 했는데. 텄네, 텄어.’

‘다음에 제대로 같이 마셔 드릴게요.’

진 회장은 입맛을 다시며 넉살 좋은 얼굴로 연호를 향해 손을 몇 번 털더니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소싯적에는 깡소주에 빨대 꽂아서 마시곤 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객기인지 모르겠지만. 민철이, 아니 너한텐 장인어른이겠구나. 미주 애비랑 어울리면서 나쁜 짓도 참 많이 하고 다녔지.’

‘참, 재미있는 인연인 것 같아요. 매형 친구분 딸이랑 제가 결혼을 할 줄.’

묻지도 않은 일을 은근슬쩍 꺼내는 천년 묵은 능구렁이를 보면서 연호는 적당히 그의 기분에 맞춰 줬다.

‘진짜 어릴 때 농담 삼아 우리 서로 사돈 맺자, 이런 이야기 한 적 있었는데 내가 자식이 없으니 그런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현실이 되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러게요, 인생 참 재미있는 거 같아요, 매형.’

연호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생각했다.

‘웃겨. 마치 순수했다는 듯이 말하는 걸 들어 주는 거 정말 엿 같아.’

5년 전, 저를 의도적으로 불러 미주를 만나도록 판을 깔아 준 자가 진 회장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수를 뻔히 알았기에 역으로 미주를 이용해 진우와 진 회장을 잡으려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진 회장의 수에 제가 넘어간 것과 다름없기는 했다. 그녀를 진짜로 사랑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으니깐.

‘하지만 아직 나한텐 패가 남아 있으니 이겼다 환호하기는 아직 일러.’

늙은 여우의 치밀한 계략에 넘어갔음을 연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는 휘둘리지 않으려 그간 자세를 낮추고 살았다.

그런데 인생이 재미있다는 제 말에 진 회장이 빙그레 웃더니 말이다. 사람 좋은 얼굴로 연호가 애써 못 들은 척하려 했던 말을 또다시 꺼냈다.

‘미주가 처남을 만나서 다행이지. 나는 사실 예전에 진짜로 미주 괜찮은 혼처 어디 없는지 알아볼까 했거든.’

‘…….’

‘그런데 서 전무가 기겁을 하더라고. 미주는 정 실장이랑 결혼할 거니깐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날 말리더라고.’

‘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진 회장의 웃는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내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진 회장의 말에 맞장구쳤다.

‘둘이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낸 사이라 소꿉장난하듯이 잘 지냈나 보던데. 어디 사랑이 장난인가? 이렇게 임자 만나서 우리 미주도, 아니 처남댁도 팔자 펴고 잘살고 있으니 내가 다 다행이야.’

‘그러게요.’

저를 불러낸 진 회장의 저의가 무엇인지 아주 분명해 그의 속셈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미주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말실수인 척 그녀와 재민 사이에 뭔가 있다는 식으로 떠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진 회장이 분 미풍에 태산처럼 요지부동하려 했으나, 다른 이도 아닌 미주의 일이니 자꾸 마음이 동요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정재민이 감히 턱밑까지 기어 오다니.

알고 있었다. 진짜 두 사람 사이에 과거가 있고, 켕기는 일이었다면 미주가 이렇게 대놓고 재민을 집 앞까지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부정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도, 저에 대한 감정 또한 이미 느끼고 있었기에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할 여지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미주는 어릴 때부터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자랐기에 오빠들을 대할 때 격의 없다는 걸 여러 번 본 적도 있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건 오로지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질투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재민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저를 반겨 주는 미주의 얼굴이 어쩐지 밝았다. 최근 얼마간 얼굴이 어두워 그간 뭔가 문제가 있나 유심히 보고 있었기에 달라진 미주의 태도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아, 재민 오빠한테 부탁한 게 있었는데 오늘 오빠가 가져다줬거든요.”

“부탁이라. 나한테 말해도 웬만한 건 다 내가 해결해 주잖아?”

어딘지 모르게 연호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미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부산 집에 있는 물건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거라서요. 당신은 부산 집에 대해선 전혀 모르니까, 아는 사람한테 부탁한 거예요. 그리고 때마침 희주 오빠 기일쯤이라 진우 오빠, 재민 오빠가 부산에 내려가니.”

“그놈의 오빠 소리.”

“오늘 왜 이래요?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당신한테 말하고 부탁하든지 할게요.”

연호가 지금 배배 꼬여 있는 게 느껴져 자극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일부러 숙이고 들어갔다. 괜한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았고, 지금은 홑몸도 아니니 굳이 스트레스받을 일을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최근에 희주의 출생 비밀을 혼자 안고 있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마음을 다잡았는데 말이다.

“오늘 최 여사님이 당신 좋아하는 거 만들어 주셨어요. 내일 아침은 간만에 밥을…….”

일부러 주방으로 발을 옮기며 연호와 생길지도 모를 충돌을 피하고자 했는데. 그런 저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연호가 어깨를 잡았다.

“전에 한 번 말했는데. 정재민, 이제 더는 만나지 마. 농담 아니고 진짜 진심이야.”

진 회장이 던진 미끼를 물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자가 만든 파문에 일렁인 건 사실이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어 왔던 작은 의심의 씨앗이 있었다. 서울에서 미주를 처음 보았던 날 미주와 재민이 서로 반짝이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눈매를 휘던 걸 지금껏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미주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했던 말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 잘 알았다.

“아예 안 만날 순 없어요. 당신이 싫다 해도 오빤 내 가족과 다름없는……”

“전에는 서진우가 가족이라더니, 끈 떨어지니 이젠 정재민이 가족이네?”

“알았어요, 그만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깐.”

표정은 점점 굳어 가지만, 목소리를 애써 밝은 척 쥐어짜며 답했다.

미주는 연호가 지금 뜬금없이 시비를 건다 여겼다. 지난 5년간 서로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에 대해 꼬투리를 잡고 성질을 낼 때가 있었다. 저 역시 그냥 특별한 이유 없이 짜증을 내며 연호를 긁었던 적이 있었고.

결혼 생활이라는 게 다른 삶을 살았던 둘이 만나 도를 닦는 심정으로 수양하듯 살아도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한 발짝 물러서려고 했다. 연호도 잠시 열이 오른 머리를 식히면 분명 지금 일을 사과할 테니,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연호가 제 팔목을 잡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잠잘 준비 해 놓을 테니, 씻고 와요.”

“다시는 안 만나겠다고 말해.”

“…….”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으면 만나든지.”

“…….”

“네 가족은 그놈들이 아니라, 바로 나야. 법적으로도 그렇고.”

미주는 붙잡힌 팔목을 비틀어 빼내려고 했지만 남자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연호의 말투는 더없이 차분하고 상냥했지만 말이다. 그 속에 담긴 뜻은 무서울 정도의 집착임을 느낄 수 있어, 일단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알았어요. 안 만날게요. 그러니 이거 놓고 우리 얘기해요.”

연호는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어도 좀처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잡힌 손목이 저릿할 때쯤 움켜쥔 손목을 풀어 주면서 연호는 머쓱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만나지 마.”

미주는 손목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글지글하고 피가 통하는 기분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작은 허울뿐인 계약이었다 해도, 함께하는 동안 결혼이 뭔지, 사랑이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았는데.

매번 화창한 날씨처럼 서로 웃으면서 살 수 없고 때로는 비바람 몰아치듯 핏대를 세우며 싸울 때도 있다는 걸 지난 시간 동안 몸소 느꼈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때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 또한 폭력이었다. 가끔 지금처럼 연호가 별일 아닌 일에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 때마다 어쩐지 무서워 온몸에 소름이 돋을 때도 있었다.

‘설마 내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맞아, 이 사람이 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러지 않겠지. 편해졌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계약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오빠 만난 게 그렇게 죽을죄인 줄 몰랐네요…….”

미주가 원망 어린 말투로 자조하듯 중얼거리자 아차 싶은 표정의 연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 좀 심했어. 착한 네가 못된 나를 너그러이 봐주면 안 될까?”

“몰라요, 안 봐줄 거야. 자꾸 나 힘들게 하지 마.”

연호가 다가오더니 등을 쓰다듬고,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미안하다는 듯 달랬다. 그래서 미주도 더는 화내지 않고 최대한 부드럽게 마음을 숨겼다.

“재민 오빠 만나는 거 싫어한다는 거 나도 알아요. 가능하면 안 만날 테니깐 당신도 더는 나한테 이러지 마요.”

“알았어. 꼭 정재민이 아니더라도 그냥 넌…, 아니야.”

연호도 완곡하게 저를 나무라는 그녀의 뜻을 알기에 더는 이유 없는 화를 내지 않았다. 미주가 살짝 눈가를 훔치면서 더는 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웃으면서 말했다.

“씻고 와요. 초록이 때문에 금연한다더니,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담배 냄새 은근히 나거든?”

그리고 지난 5년간 그랬듯 같은 침대에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하거나 TV를 보거나 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조금 전 팽팽했던 긴장감은 어디로 갔냐는 듯,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듯 말이다.

물론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핏대를 세우며 상대를 몰아세워 봤자 소득이 없으니 일단 괜찮은 척하며 덮어 두는 게 낫다는 걸 말이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미주가 억지웃음을 지은 채 침대에 반쯤 누워서 즐겨 보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연호를 기다리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TV를 틀고는 이렇게라도 웃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더는 복잡한 고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부산에서 뭘 가지고 왔는지 보여 줘 봐. 궁금해지네.”

살짝 물기가 남은 머리를 털고 제 옆으로 눕는 연호를 보고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냥 책이에요. 세계 명작선? 이런 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미주는 화장대 밑에 놓은 박스 안에서 낡은 책을 몇 개 가져와 연호에게 들이밀었다.

“이야, 헤밍웨이. 정말 오랜만에 보는데? 노인과 바다?”

“이건 어때요? 톨스토이.”

침대에 앉아 장난스럽게 책을 들어 연호에게 보여 줬다.

“전쟁과 평화, 러시아 하면 도스토예프스키지. 죄와 벌은 없어?”

“아마도 있을 거예요. 아니, 없나? 아직 확인을 다 안 해 봐서.”

미주는 오히려 이런 식으로 대놓고 별게 아닌 걸 보여 줘야 연호가 이 책 중에 섞인 문제의 책에 대해서 아예 신경을 끄지 않을까 싶었다.

‘파우스트는 따로 빼놨으니 적어도 오늘 밤은 안 들킬 거야. 그러니 내일 몰래 처리하자.’

미주와 연호는 웃으면서 서로 기억하고 있는 고전 문학들에 대해 경쟁하듯 ‘이거는 읽어 봤냐?’ 하며 즐거운 논쟁을 벌이며, 억지 평화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더는 수다 떠는 것도 지쳤을 무렵 연호가 미주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배를 만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어? 말해 봐.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다 해 줄게.”

“…….”

“알잖아? 내가 널 괴롭히고는 카운슬러인 것처럼 구는 개새끼인 거.”

“알면 됐네요.”

“그래. 있지, 누나 집 다녀온 이후로 계속 저기압인 거 알고 있었어. 혹시 누나가 너 괴롭히는 거면 말해. 어디서 시누이 짓이냐고 내가 그냥…….”

미주는 마주한 눈동자 속에서 제가 고민하는 게 있다는 걸 안다는 눈빛을 읽어 냈다. 그리고 제가 먼저 털어놓기를 바란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고.

사람이 완벽할 순 없으니, 가끔 연호가 보여 주는 소유욕과 집착 따위도 말이다. 어쩌면 저를 향한 조금 삐뚤어진 감정의 표현이라 감히 속단해 보면서.

‘뭔가 눈치를 채고 있는데, 여기서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거짓말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럼 더 싸움이 커질 수 있어. 차라리 오빠 일,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희주의 일이라면, 재민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느 정도 수긍하지 않을까 했다.

지금 저를 향한 연호의 눈빛을 보니 지난 5년간 쌓은 감정이 사랑은 아니어도 말이다. 독한 마음도 이제는 서로 말랑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을 해 버렸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제 배 속의 아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저는 차치하고 연호가 그저 쓰다 버릴 여자에게서 자식을 볼 리 없을 테니까.

“나한테 다 털어놔 봐. 누가 알겠어? 네 고민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지.”

“…….”

“이젠 나도 좀 믿어 줘, 미주야.”

잠시 말없이 연호를 그윽하게 보았다. 남편에게 고민을 말하는 건 아내로서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 너무나도 무겁고 충격적인 비밀을 혼자만 안다는 게 조금 버겁기도 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 있었어요.”

그래서 고통을 나누면 좀 더 홀가분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카운슬러를 자처하는 연호에게 5년 전에도 그랬듯 비밀을 말해 볼까 했다.

“네가 이렇게 뜸 들이니깐 뭔지 정말 궁금해지는데?”

연호는 미주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경청하겠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게 있죠. 놀라지 마요. 희주 오빠가, 사실은 제 친오빠가 아니었어요.”

“아…….”

“정말 우연히, 뜻하게 않게 알게 돼서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서 그동안 마음이 많이 심란했었어요.”

연호가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미주를 다독이듯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손등에 입을 맞추고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래도 나한테 오빠인 건 변함없으니깐 희주 오빠는 영원히 제 친오빠예요. 오빠도 이 사실을 생전에 알았으면 나처럼 똑같이 그랬을 테고.”

“그래, 같이 자란 정이 더 크지.”

그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자란 정이 크다는 연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솔직히 말하면요. 몰랐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알아 버려서 조금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뭐, 그래요.”

“그래, 아무래도 아직 우리나라 정서상 아버지가 다른…….”

언제나 여유로운 척하는 연호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황급히 입을 다물 때 미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는 분명히 희주가 그저 친오빠가 아니었음을 고백했다. 이복 남매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희주가 입양아일 수도 있는 선택지가 있는데.

연호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가 다르다는 말이 주는 두 가지 답에 안심이 되면서도 놀라웠다.

미주가 연호의 품에서 몸을 떼어 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을 때였다. 실수했다는 얼굴로 저를 따라 몸을 일으킨 연호가 입술을 꾹 다무는 게 보였다.

“…….”

뭐라 말하기 힘든 침묵 속에서 연호가 침대에서 내려와 카우치에 앉자 미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알고 있었네요.”

찰나의 순간에는 연호가 제 핸드폰을 훔쳐보고 진실을 알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찢어진 편지를 찍은 사진을 삭제하지 않고 여전히 핸드폰 메모리 어느 구석에 잘 숨겨 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비밀번호를 걸어 놓은 제 폰을 다양한 불법적인 방법으로 연호가 봤다 한들 희주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 순 없었을 것이다. 외우고 싶지 않아도 머리에 각인되어 버린 그 오래된 편지의 내용 어디에도 수신인에 대한 정보는 없었으니깐.

그리고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차분히 저를 보고 있는 연호의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에서 읽어 냈다.

“심지어, 그 아버지가 진수오라는 것도 알고 있었군요.”

“……그래, 이제 와 네가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해서 그간 아무 말도 안 했어.”

연호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러나 더는 묻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아 무겁게 제 뜻을 전했다.

“그래도 우리 오빠 일인데, 진작 알았으면 나한테 말해 주지 그랬어요? 당신 말대로 내가 안다고 한들 달라질 게 없잖아요.”

“예전에 우리 이런 말 했었지? 숨기는 게 있으면 끝까지 서로가 모르게 숨기자고. 계약했었잖아?”

“그래요, 기억나네요. 우리의 시작은 계약이었다는 걸.”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사랑하게 된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과 모르고 있던 진실들이 주는 불쾌한 박동.

미주가 언짢은 표정으로 화를 삭이는 걸 보면서 연호 또한 점점 불쾌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저만 잘못했다는 듯 몰아세우는 미주가 자신은 깨끗한 척하는 게 순간 아니꼽게 보였다.

미주 역시 저를 이용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로가 알면서 이용하고 이용당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재민 때문에 질투에 눈멀어 감정적인 상태인 연호는 표정 없는 싸늘한 얼굴로 미주를 보았다.

“왜 이래? 너도 내게 숨기는 것들이 많잖아? 예를 들면 첫사랑 정재민을 아련해서 도무지 못 놓겠다는 거라든지.”

“…지금 여기서 또 재민 오빠 이야기가 왜 나와요?”

“그러니깐 만나지 말라고 누차 말했잖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가운 말투로 그녀의 가슴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을 꽂았다.

“물론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을지 내가 알 순 없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만, 선을 넘고 말았다. 아닌 걸 알면서도 끝끝내 의심을 지우지 못한 못난 질투심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렸나 보다. 연호는 해서는 안 될 말을 지껄이고야 말았다.

“사과해요, 그 말. 나에 대한 모욕이에요.”

연호를 뚫어질 듯이 보는 미주가 침대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켜 그의 앞에 다가가면서 말했다.

“질투라도 해 줄 때를 감사하게 생각해. 내가 너한테 흥미를 잃는 순간, 넌 두 번 다시 아이 얼굴을 보지 못할 테니.”

“뭐라고요?”

그래, 제가 아는 표정이었다. 더없이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 뜻에 따르지 않으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파멸시켜 버리겠다던 그 냉혹한 남자가 여기 있었다.

미주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잠시 몸이 휘청였지만, 연호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설마 아이를 볼모로 삼겠다는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아요. 내가 밉고 꼴 보기 싫으면 내 발로 이 집을 나갈 테니깐 안 쫓아내도 돼요. 하지만 아이는 안 돼요. 내 아이야.”

“아니, 내 핏줄이니 내 자식이지.”

마치 함께했던 지난 시간은 모두 잊기라도 한 듯 서로 지지 않고 점점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한테 오해받기 싫으면 오해받을 짓 자체를 하지 마. 내가 아니었으면 넌 지금쯤 무슨 꼴을 당했을지 모르니, 잠자코 내 옆에서 죽은 듯이 살아. 내가 널 이뻐하는 동안만은.”

“내가 무슨 물건인 듯 말하지 마.”

“맞잖아? 예전에는 서진우 거였다가 이제는 나한테 넘어온 장난감. 아, 중간에 정재민의 손을 탔을지도 모르지만.”

연호의 입에서 쏟아지는 끔찍한 말에 배가 한 번 강하게 뭉치는 게 느껴졌다. 인상을 쓰면서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해 보지만. 미주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있는 힘껏 연호의 뺨을 때렸다.

“나를 함부로 말하지 마. 아무리 당신이 아이 아버지라고 해도 더는 못 참아.”

작은 손으로 제 뺨을 때린 미주를 내려다보면서 연호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미주야, 그동안 우리 서로 꽤 그럴듯하게 연기하고 살았잖아? 사이좋은 부부인 척하면서. 그러니 다시 네 자리로 돌아가.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

“당신 같은 인간이 내 아이의 아버지라는 게 끔찍해.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 거예요.”

“너 같은 엄마도 마찬가지야. 혼자 고결한 척하지 마. 너도 나랑 똑같은 비열한 인간이면서.”

미주의 눈에서 눈물이 천천히 흘렀다. 그간 서로 말한 적 없어도,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서로 사랑한다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저만 몰랐다. 연호와 나눴다고 생각한 마음이 이렇게 쉽게, 작은 일로 툭- 하고 건드렸을 뿐인데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모래성이었단 걸.

“차연호 씨는 항상 날 의심하고 있었네요. 단 한 번도 나를 믿은 적이 없었고. 바보같이 나는 그동안 당신을 믿었는데.”

“너도 날 완전히 믿지 않았으면서 나만 의처증 환자로 만들지 마. 내가 그랬으면 너도 그런 거야.”

연호가 성큼성큼 다가와 미주의 어깨를 꽉 잡고는 성난 목소리로 말을 쏟아 냈다.

“난 있지, 죽은 윤희주보다 살아 있는 네 주변의 남자들이 더 신경 쓰여.”

“뭐?”

“넌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지만 그때 여길 찾아온 턱수염 새끼, 그놈이 널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내 눈에는 다 보여.”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당신 마음대로 판단 내리지 마.”

“글쎄, 너도 어쩌면 어떤 여지를 줬을지 모르지. 그놈의 오빠, 오빠, 하면서.”

미주는 눈물을 연신 손으로 닦아 냈다. 연호의 말이 칼이 되어 가슴에 박혀 피가 흐르는 것 같아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동안 나를 그런 헤픈 여자로 보고 있었으면서 잘도 그 생각을 숨겼네요.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녀에게 모질다 못해 독하디독한 말을 쏟아 낸 연호 역시 미주의 눈물 앞에서 스스로가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긴 시간 홀로 켜켜이 쌓아 두었던, 미주가 저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성의 둑을 오늘 터트리고 말았다.

그녀는 영원히 제 것이었으면 했고,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여겼다. 아이를 낳으면 절대로 옆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나무꾼의 심정처럼 옷을 숨기듯 너무 많은 비밀을 숨겼다.

그게 바로 어그러지고 비틀린 너무나도 이기적인 연호의 사랑이었다. 너무 사랑해서 미칠 것 같은 감정이라는 무서운 독이 이성까지 마비시키고 마는 지독한 사랑.

처음부터 미주를 얻기 위해 끔찍한 협박까지 하면서 그녀를 옭아매서야 품에 안았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숨기려고 했던 희주의 비밀을 뜻하지 않게 알다니.

미친 듯이 널뛰는 엉망진창인 기분 속에서 연호는 미주의 어깨를 놓아주면서 노여운 듯 입을 열었다.

“윤희주 일은 나도 5년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일이야. 사람을 부산으로 보내서……”

“뒷조사했겠죠. 내 약점을, 우리 모두의 약점을 잡으려고. 그래서 다 알게 됐잖아요? 내가 강간당해 더럽혀졌다는 것까지.”

미주는 연호의 말을 딱 자르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래, 그래서 널 동정했어. 불쌍한 여자애가 불행하다 못해 불운하기에 값싼 동정심으로 널 측은하게 봤었어.”

“아, 네. 고마워요. 동정에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날 신데렐라로 만들어 줘서.”

“착각하지 마. 신데렐라는 처음부터 귀족이었어.”

“…….”

“그러니 감히 널 신데렐라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미주는 피식 웃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서 연호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비겁해. 늘 언제나 비겁했어.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으면서 그저 진우 오빠를 이기고 싶어서 남의 불행을 이용하는 겁쟁이야.”

“내가 겁쟁이면 너는 위선자야. 서진우를 위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지금 이 현실에 안주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면서.”

“맞아요, 그랬어요. 나 위선자 맞아요. 그런데 이젠 다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아… 당신이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됐으니…….”

“아니, 너는 필요 없어도 나는 필요해. 네가 볼모라는 걸 잊었나 본데, 우리 계약 절대 망각하지 마.”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조금 전의 흥분을 애써 가라앉힌 듯한 연호가 대꾸했다.

“3년 남았나요? 내가 인질인 걸 절대 잊지 않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죠.”

연호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파르르 떨리는 배신감을 애써 진정하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차연희……!’

5년 전, 기다렸다는 듯 연호가 없는 틈에 찾아와 함께 홍차를 마시면서 나눴던 대화.

“세상에… 당신 누나도 다 알고 있었어! 그날, 당신이 없었던 날에 나를 찾아와 말해 줬던… 당신과 자기가 친남매가 아니라던 말…….”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연희가 저를 시험에 들게 하려 연호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렸다고 말이다. 그래서 진우나 재민에게 말을 옮기는지 연희가 주시할지 모른다 생각했다. 하여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연호에게도 비밀을 안다고 말한 적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은 미끼였다. 제가 희주와 이부 남매임을 알고 있는지, 차연희는 가장 강력한 패를 던지면서 저를 떠봤던 것이다.

“그때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 자기 남편이 밖에서 자식이라도 낳아 오면 어쩌냐고 뭐라 뭐라 했던 그 말! 모두 내가 진실을 알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한 거였어!”

연호는 격양된 미주를 보며 코웃음을 치면서 같잖다는 듯 말했다.

“설마 누나가 세상 천둥벌거숭이인 너를 그냥 바로 내 여자로 인정해 줄 줄 알았던 거야?”

“…뭐?”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생각해 봐. 누나가 널 처음부터 눈여겨본 이유에 대해서.”

“설마…….”

“우리 누나 ‘차연희’야. 어디 동네의 돈 좀 있는 아줌마 아니고.”

처음에는 연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랐지만 말이다. 뭔가 알 것 같은 표정으로 놀랍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되물었다.

“설마… 나도 의심했군요!”

“매형한테 숨겨진 아들이 있었는데 걔한테 여동생이 있다, 당연히 의심해 볼 수밖에.”

조금 전 연호가 말실수하는 바람에 진수오가 제 친부가 아님을 이미 눈치챘다.

그런데 이건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저 인상 좋고 너그러워 보여도 연희가 보통이 아님은 진즉에 알았고 어느 정도 권력욕이 있다 여겼는데.

그녀 역시 재벌가에서 태어난 암컷 맹수임을 왜 잊었을까? 동생 머리에 왕관을 씌우기 위해 남편을 왕좌에서 몰아내려 한다는 걸 말이다.

“왜, 나 몰래 유전자 검사라도 했어요? 내가 진 회장 딸이 아니어서 안심한 거였어요? 아니면 나도 진 회장 딸인가?”

미주는 주먹을 쥐고 연호의 팔을 힘없이 때리면서 분노했다.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은 미주를 보며 연호는 깊게 한숨을 쉰 후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만하자.”

“미친 새끼, 지금 네가 한 짓을 봐……!”

연호는 눈썹을 한 번 꿈틀거리더니 미주의 동그란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알아, 할 소리 못 할 소리 구분 못 한 것도.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다 잊을 수 있을 거야. 우린 늘 그래 왔잖아? 말도 안 되는 작은 일로 오늘처럼 죽어라 싸우다가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웃었잖아?”

“늘 그랬으니깐 조금 전에 있었던 모든 대화를, 다 잊자고?”

미주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면서 연호를 밀어냈다.

“당신이 아까 말한 ‘아버지가 다르다’는 말 때문에 확신했어. 난 그놈 딸이 아니라는 걸.”

연호는 뭔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운을 뗐다.

“그러니까 넌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거야. 고작 이거 하나에 이렇게 천지가 진동할 정도로 떨다니.”

“이게 고작이라면 대체 뭘 얼마나 엄청난 걸 숨기고 있는 건데?”

미주는 제 배를 만지는 연호를 뿌리치며 붉어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증오 어린 시선을 연호는 당연히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어깨에 손 한번 올렸다고 저를 경멸하듯 쳐다봤던 그 눈빛. 뭔가 아랫배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화를 연호가 느낄 때였다.

“왜? 오빠 죄로 날 협박한 것도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화를 참지 못한 미주가 소리 지르며 내뱉는 말에 연호의 반응이 이상했다.

“…설마 이것도…! 차연호, 말해!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얼음보다 더 차갑게 식은 얼굴을 한 연호가 너무나도 다정한 말투로 다감하게 말했다.

“그러게. 내가 왜 서진우 살인죄를 가지고 너한테 결혼하자고 했을까?”

“법적으로 날 묶어 두면 나중에 내가 필요 없어졌을 때 처리하기 쉽다면서? 어, 이거 놔. 내 몸에 손대지…….”

연호가 제 배를 또 한 번 만지자, 이번에는 미주가 몸서리를 치면서 그를 밀어냈다.

“미주야, 아이를 생각해서 흥분 가라앉혀.”

“미친놈, 또라이 같은 게.”

“칭찬 고마워.”

“미친 새끼, 사이코패스 같은 놈.”

연호의 불협화음 같은 행동을 보면서 기도 안 찰 때였다. 미주가 더는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충격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는 내가 진 회장 딸인 줄 알아서 결혼하려고 했구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달래듯 닦아 주는 연호의 위선에 미주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래. 네가 매형 딸이라면 죽은 아들보다 살아 있는 딸이 우선일 테니 내 옆에 두고 매형을 협박하는 인질로 쓰려 했는데, 아쉽게도 넌 매형 딸이 아니었어. 넌 네 아버지 딸이야.”

“그래서 그때 수틀리면 죽이겠다고… 하하하, 그래. 이제 생각해 보니 진우 오빠를 엿 먹이고 싶었다면 그냥 나랑 몇 번 잤으면 끝일 텐데, 그래, 그랬구나. 내가 진 회장 약점인 줄 알고 결혼을…….”

“너에 대해선 헛다리 짚었지만, 서진우 살인 증거는 지금도 유효하니 잠자코 아이 엄마로 최선을 다해 줘.”

“미쳤어. 다들 미쳤어. 하나같이 다들… 믿을 사람이 하나도…….”

이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주는 지지 않고 연호를 노려보면서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거 알아요? 당신도 틀렸고 나도 틀렸어요! 처음부터 우린 다 틀렸던 거라고요! 그래도 나는… 나는 당신을…….”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 당신을 사랑했기에 모든 걸 잊고 옆에 있고 싶었다는 그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저는 위선자이면서 비겁한 겁쟁이였다.

연호와 계약 결혼을 한 지금의 삶에 사실은 만족하고 있었다. 그의 협박 같은 제안을 진우와 재민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락하게 되었다고 여기면 말이다. 이기적이고 못된 제가 착한 희생양이 된 것 같아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제 인생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악역인 연호와 위험한 사랑에 빠졌다는 어느 삼류 연애 소설의 주인공도 될 수 있었으니깐. 심지어 연호는 로맨스 소설의 단골 소재인 재벌남이니 이보다 더 클리셰적이고 드라마틱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연호가, 제 남편이, 배 속 아이의 아빠가 이토록 치밀한 계략과 비밀을 숨겼다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밉고 증오스러웠다.

나는 선량하고 착한 여자였는데 나쁜 남자를 만나서 인생이 꼬여 버렸다고 연호에게 모든 잘못과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싶었다. 미주 역시 누구나 그러하듯, 저도 나쁜 년인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향해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이 갈 곳 없는 원망과 울분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더는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이제 그만하자. 초록이가 놀랐을지도 몰라.”

제 몸에 연호의 자식이 잉태되어 있으니 아무리 죽을 것같이 비통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아이를 먼저 생각하는 모성애가 발동된 걸까?

“네 말대로 우린 틀렸어. 그렇지만 오늘까지만 틀리고 내일부터 다시 제대로 시작하면 돼.”

“……미친놈.”

미주는 더는 연호와 소모적인 감정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아도 우선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 함이 맞으니깐.

“혼자 있고 싶어요. 나가 줘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말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자꾸 그러면 진짜 아이 얼굴 못 보게 될 거야.”

“…꺼져, 차연호…….”

미주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쓴 다음 옆으로 돌아눕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사랑에 눈멀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걸 제 뜻대로 통제하려는 연호가 이제는 포악한 군주처럼 보였다.

아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이렇게 바뀌니 늘 언제나 이랬던 연호가 이제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응? 초록아, 엄마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빠랑 엄마는 지금 사이가 너무 안 좋아졌거든.’

미주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배를 오래도록 쓰다듬으면서 배 속 아이에게 마음으로 계속 말을 걸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