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파우스트의 비밀 (24/53)

22. 파우스트의 비밀

* * *

미주는 얼마 전에 퇴원한 연희를 만나러 갔다.

“병원으로 못 가 봐서 죄송해요.”

“내가 부르지 말라고 연호한테 단단히 일러 놨잖아. 괜히 임산부가 사람 많은 곳에 들락거리다가 병이라도 옮을까 봐 난 덜컥 겁이 나더라고.”

조금은 호들갑스럽고 유별난 연희의 걱정에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초기에는 허리가 끊어지기 직전까지 침대에만 누워 있었는데, 이제 입덧도 끝나고 살 만해지니깐 벌써 슬슬 낳을 때가 다 되어 가네요.”

“그래, 조금 있으면 이제 연호가 애 나온다고 돌아다니지 말라 지랄을 해 댈 테니, 그 전에 마음껏 나랑 놀아 놓자고.”

“네, 그래요.”

차연희가 사는 집, 그러니깐 차현 그룹 회장 내외가 사는 집은 이젠 익숙한 공간이었다.

지난 5년간 자주 들른 이 집에서는 말이다. 차를 마시거나 다과를 즐기거나 하는, 연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우아 떨고 앉아 있는’ 짓을 연희와 하곤 했었다. 그랬기에 더는 낯설지 않은 익숙한 곳에서 미주는 연희와 마주 보고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맞다, 우리 집 2층 수리한 거 아직 못 봤지?”

“어… 네. 생각해 보니 임신하기 전에 와 보고 오늘 처음 왔네요. 아, 맞아. 전에 2층 인테리어 바꾸신다고 하셨던 거 기억나요.”

“돈 좀 꽤 들였으니깐 온 김에 구경하고 해. 나중에 미주 씨도 사는 집, 인테리어 지겨우면 공사 한번 해서 싹 다 바꿔.”

“근데 있죠. 사실 연호 씨, 은근히 자기 취향 있고 고집이 있어서 제 마음대로 막 하지는 못해요. 거실 스탠드 하나 바꾸는데도 서로 취향이 달라서 얼마나 싸우는데요.”

“그치, 걔가 좀 그렇긴 해. 나도 알아. 내 동생이랑 같이 산다고 미주 씨가 고생이지.”

연희와 미주는 웃으면서 인간 차연호에 대해 비난을 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어머, 관장님. 이거 제 취향인데요? 여기 이 오크색과 회색이 섞인 파란색의 조화, 너무 예뻐요.”

2층에 있는 거실의 파란빛 벽면과 오래된 골동품 같은 손때 묻은 오크색 가구가 주는 밸런스에 미주는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

“그냥 돈만 들이면 돼. 디자이너가 알아서 해 주니까. 자, 여긴 남편 서잰데. 이번에 조명등을 싹 다 바꿨어.”

“아, 샹들리에. 너무 멋져요.”

“얘는 프랑스에서 배 타고 왔고, 얘는 미국 디자이너한테 주문 제작 한 거고… 책상이랑 책장은 거의 20년 전에 진짜 귀한 흑단 나무로 맞춘 거라 그냥 두고…….”

“전에도 책장이랑 책상 자랑은 하셨어요. 나무 귀한 거라고.”

연희와 함께 이미 몇 번 구경한 적 있는 진 회장의 서재에서 책 냄새가 가득한 곳을 둘러보았다.

“나중에 연호 씨도 이렇게 서재 꾸미면 좋을 것 같은데. 아시잖아요, 모던병 걸려서 이런 스타일 싫어하는 거.”

“나이 먹으면 취향은 바뀔 수 있으니. 아, 잠깐. 나 메시지가 들어왔는데 갤러리 일인데 좀 급한 것 같네. 일단 나 전화 좀 할게.”

연희는 서재 문 앞에 서서 등을 돌린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끔 여길 와 봐도 그냥 눈으로만 훑고 말았는데.’

연희가 통화하는 동안 미주는 한쪽 벽면에 가득한 책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5년 내내 이 자리에 붙박이구나. 내가 어릴 때는 이게 약간 부자의 상징 같았는데.’

진 회장이 진짜로 읽었거나 앞으로 읽을 책을 이렇게 방대하게 모아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찬찬히 살펴보니 최근의 베스트셀러와 아주 오래된 책들이 혼재된 게 눈에 들어왔다.

‘역시 아무나 재벌 회장을 하는 건 아니구나. 이 책은 꽤 젊은 감각을 담은 책이니깐.’

‘아, 이건 나도 읽었는데. 의외야. 자기 계발서 이런 것도 보시나 봐.’

‘이게 진짜 의왼데? 이런 것도 보시나?’

마치 서점에 온 듯 슬쩍슬쩍 관심 가는 제목의 책을 빼서 휘리릭- 넘겼다가 다시 책장에 꽂는 행위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통화가 길어지는 연희를 보아 하니, 이번에 낙찰받았다는 그림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위치한 책이 하나 있었다. 색이 바랜 걸 보면 오래된 책이 분명한데. 익숙한 제목에 어쩐지 이끌리듯 운명처럼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다.

‘파우스트? 아, 하권이네.’

어쩐지 눈에 익은 듯한 기시감을 가진 책.

‘맞아, 그러고 보니 부산 집에 상권이 있었는데…….’

미주는 사춘기 시절 일종의 허세처럼 열심히 읽어 댔던 고전문학들을 떠올리며 책의 첫 장을 펼쳐 보았다. 그런데 책의 주인인 중년의 남자에게도 젊었던 날의 사랑이 있었던 걸까? 눈에 들어오는 동그스름한 필체를 읽어 보았다.

‘사랑하는 나의 베르테르, 수오 씨에게…… 라.’

파우스트를 두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니, 이게 무슨 괴테일까 싶었다. 하지만 누구나 지나왔었을 어린 시절의 뜨거운 사랑을 진 회장도 겪은 듯해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누렇게 바랜 책을 넘겨 보았다.

‘지금은 마조히스트 변태라도 옛날에는 순수한 로맨스를 했다는 거지? 웃긴다, 진짜.’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 때 뭔가 이상한 게 보였다. 마치 종이를 찢어서 책 사이에 나눠 끼워 둔 것 같았다.

편지지 같아 보이는 이것을 그냥 접어서 책 사이에 껴 두었다면 말이다. 접힌 부분이 주는 부피감 때문에 책이 벌어졌을 텐데.

편지를 들키고 싶지 않았던 이가 일부러 이렇게 조각을 내 책 사이에 넣어 두면 말이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책을 한 장씩 넘겨 보지 않는 이상 파우스트 안에 비밀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은 종이를 찢어서 하나씩 따로 책 사이에 껴 둔 것일까?

숨겨 둔 진 회장의 비밀.

미주는 이 파우스트에 숨겨진 비밀이 의도된 것인지, 그저 주인이 버리는 걸 잊어버린 단순한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이게… 뭘까? 어? 또 하나 발견했어. 응? 이거 편지잖아?’

슬쩍 고개를 들어 통화 중인 연희를 보았다. 서재를 빠져나가 복도에서 누군가와 계속 통화 중인 것 같았다.

제 귀에 들려오는 연희 말을 들어 보면 예상과 다르게 딱히 중요한 통화는 아닌 듯했다. 밝을 현 갤러리 관장인 연희에게 누군가가 그림에 관해 묻는 듯해 보였으니깐.

미주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 책에 숨겨진 편지 같은 종이 낱장이 더 있는지 찾아볼 때였다.

‘희주?’

잘려 있는 형태를 보아 하니 이건 4등분으로 나누어진 채 파우스트 책 안에 숨겨진 게 분명했다. 세 번째로 발견한 종이를 대충 눈으로 쓱- 훑는데 제 시선을 잡아끄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한 조각에 쓰인 내용을 읽다가 점차 얼굴이 굳었다. 독해하듯 자세히 보지 않아도 말이다. ‘희주’라는 이름이 적힌 조각을 사선 읽기로 그냥 쭉 봐도 보이는 지나칠 수 없는 몇 개의 단어.

‘희주를… 인정하, 여기까지고 다른 조각에 계속 연결되는 문장이 있겠어.’

미주는 다시 열린 서재 문을 힐끔 보았다. 저와 눈이 마주친 연희가 마치 통화가 길어져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미주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가 등을 보일 때, 조금 대담한 행동을 했다. 책등을 잡고 바닥에 털듯이 세게 몇 번 털어 대니, 마지막 조각으로 보이는 종이가 삐죽 모습을 드러냈다.

미주는 재빨리 책 안에서 발견된 네 개의 종잇조각을 맞췄다. 책장 옆 협탁에 두고 다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안 들킨 것 같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찰칵- 하는 소리. 한 번 더 찰칵- 하는 소리에 연희가 통화하다가 빼꼼히 저를 보았다. 배경 삼아 셀카를 찍고 있는 척하자 그런 저를 못 말린다 생각했나 보다. 연희는 싱긋 웃고는 계속 그림 문제로 통화를 이어 갔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미주는 안도한 듯 습관처럼 배를 한 번 쓰다듬었다. 찢어진 편지를 원위치시킨 후 책을 다시 자연스럽게 제자리에 꽂아 뒀다. 연희에게 뭔가 이상한 걸 찾아낸 걸 들키고 싶지 않아 괜히 다른 책들을 살피는 척했다.

그런데 머릿속에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설마!’

미주가 다시 파우스트를 꺼내 첫 장을 펼쳤다. 어딘지 눈에 익은 듯한 글씨. 동그라면서도 끝을 조금 흐리게 쓰는, 여자가 쓴 것 같은 필체.

‘말도 안 돼.’

미주는 마지막으로 연희의 눈치를 살피고는 첫 장도 핸드폰으로 찍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파우스트 하권을 원위치시켰다.

“어머, 회장님 되게 의외신 거 같아요.”

연희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일부러 호들갑을 떨면서 큰 목소리를 냈다.

“응? 뭐가?”

“이거 보세요. 릴케 시집이라니. 우리 회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문학 소년이셨나 봐요.”

“뭐, 그이가 진짜 읽었을지 난 몰라. 난 이런 거 별로 취미가 없어서.”

연희가 도리질을 치자 미주가 자연스럽게 유도신문을 시작했다.

“미술 전공하셨어도 관장님도 왠지 문학소녀였을 것 같은데요? 여기 보면 괴테도 있고, 헤세도 있고, 심지어 브론테까지! 아, 폭풍의 언덕은 정말…….”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감격했다는 표정을 짓는 저를 보며 연희가 기겁하면서 짜증을 냈다.

“몰라, 남편 잘난 척하는 거 보기 싫어서 여기 근처에도 안 와. 잘난 차연호랑 윤미주는 고상하게 문학에 대해 토론하시어요, 네?”

“사실은 저도 이런 거 별로 안 읽었어요. 딱 봐도 견적 나오잖아요? 저는 할리퀸 소설 마니아였거든요.”

연희의 말에 거짓이 없다면 그녀는 남편의 서재에 숨겨진 비밀을 알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미주는 그녀의 팔짱을 끼며 계속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시선을 다른 쪽으로 자연스럽게 돌렸다.

“2층 다른 곳도 인테리어 구경 좀 시켜 주세요.”

“그래, 알았어. 아까 셀카 찍던데, 나중에 보여 줘 봐. 이런 거 은근히 궁금하다니깐.”

그리고 시간을 끌면서 한참 수다를 떠는 척하다가 살짝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어, 이상하네. 배가 조금 뭉치는 것 같아요.”

“어머, 어떡해?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요새 배가 계속 나오니깐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피곤해져서 그런가 봐요.”

배 속 아이를 핑계 대는 거짓말에 연희는 기겁하면서 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가서 편히 쉬어. 거리도 얼마 안 머니깐. 나중에 연호가 알면 나 총으로 쏠지도 몰라. 몸 상태 이상하면 저녁에라도 바로 담당의 불러서 봐 달라고 하고.”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집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거짓 핑계로 돌아온 집에서 미주는 부른 배를 잡고 화장대 앞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아니야, 이건 말이 안 돼. 어째서…….”

어려운 퍼즐도 아닌 편지 조각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거기에 써진 글자를 읽어 내렸다. 중간중간 찢겨 나간 부위와 글씨가 바래 사라진 부분이 있었지만, 문맥을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침내 이 편지가 누구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였는지 미주는 알아냈다.

“희주 오빠가 진 회장의 아들이라고? 그렇다면…….”

물론 ‘누가’ 썼는지 이미 심증이 가고 있어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대 한쪽에 놓인 액자를 보았다.

요한이 아니었으면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뻔했던 이 세상에 단 한 장뿐인 저와 엄마가 같이 찍은 사진. 갓난쟁이 제가 속싸개에 싸인 채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사진 귀퉁이에는 본 적 없는 엄마의 사랑이 글씨로 남아 있었다.

‘사랑하는 내 딸, 미주.’

아빠도 죽은 희주도 그 사진에 글씨를 쓴 건 엄마가 맞다고 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이 필체는 엄마 거였다. 기억조차 없는 엄마가 그리워 이 사진을 늘 품에 안고 자기도 했었다. 너무 어루만져 귀퉁이가 해진 바람에 액자에 넣은 그 사진에 남은 글씨를 몰라볼 리 없었다.

진 회장의 서재에서 발견한 책의 첫 장에 적힌 동글동글한 글씨체와 대조해 보니 답이 나왔다.

“‘사랑하는’, 이 필체가 사진이랑 똑같아!”

그때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부산 집 할머니 방에 아빠와 엄마가 남긴 유품 중에 섞여 있던 책 중 하나가 떠올랐다.

“맞아, 그 책 상권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 내 기억이 맞다면 ‘사랑하는 미희에게’, 이런 글씨가 적혀 있었던 것 같아.”

저와 희주의 이름은 엄마의 이름에서 하나씩 따서 지었다고 죽은 아빠가 늘 이야기했었는데.

“엄마가 진 회장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우리 희주 오빠라고?”

미주는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최대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핸드폰 속 사진을 확대해 편지를 읽어 보았다.

★이탤릭이게 마 막 편지가 되 으면 좋 요.

당신이 아무리 전화 하 우리 찾아 도 희주는 나 민철 씨의 아이 요.

당 아들이 아닙 다.

그러니 더는 찾 오지 마세요.

희주를 아들로 인정하 다고 해도 우 는 이미 정했어.

민철 씨 아이로, 윤희주로 키우 로.

우리 사 에 있었던 일들은 는 이미 다 잊 어요.

행 하게 아요.

도 행복하게 살 요.★이탤릭

군데군데 사라진 글자가 있었지만 말이다. 앞뒤 정황이 짐작되니 충분히 무슨 뜻으로 적어 내린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이건 그냥 벼락을 맞은 것과 다름없는 충격이었다. 단 한 번도, 꿈에서라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저와 희주가 사실은 친남매가 아니라 이부 남매라니.

편지 내용대로라면 죽은 아빠도 희주가 친자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게… 허. 말이…….”

눈물도 나지 않고 그저 헛웃음만 자꾸 나왔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슬픈 것도, 가슴이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총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총이 아니라 대포, 아니 핵미사일급이었다.

그래서 얼이 빠진 얼굴로 계속 ‘허, 허.’ 소리만 내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나는 누구지? 설마 나도……?’

아니야. 아닐 거야.

우선 눈에 보이는 증거에만 집중하는 게 맞다 여기며 애써 의문을 털어 낼 때 연호가 집으로 돌아온 듯했다. 미주는 핸드폰 잠금 설정을 하고 침대로 올라가 옆으로 누워 이불을 덮었다.

“괜찮아? 누나 집에 갔다가 배가 뭉쳤다길래.”

퇴근하고 돌아온 연호의 표정이 상기된 걸 보니 말이다. 연희가 제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고 동생에게 전달한 것 같았다.

“괜찮아요. 집에 와서 좀 누워 있으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조금 전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된 얼굴을 완전히 감출 순 없었던 것 같았다. 연호도 제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바로 파악하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옆에 앉았다.

“병원에 가자. 아무래도 내가 불안해서 안 되겠어. 박사님한테는 누나한테 연락받고 회사에서 바로 연락해 뒀으니 지금 출발하면 될 거야.”

“괜찮은데… 알았어요.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굳이 연호 앞에서 안 가겠다 고집을 피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뭔지는 몰라도 나도 뭔가에 굉장히 상기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을 거야.’

순순히 연호가 하자는 대로 병원에 가서 괜찮다는 소리를 들으면 말이다. 더는 오늘의 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듯싶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안정을 취하시다가 뭔가 이상하면 바로 병원으로 오시고요.”

의사가 괜찮다 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미주는 알겠다는 듯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의사도 괜찮다고 했으니.”

“병원 가기 전에 불안해 죽겠다던 사람은 어디로 간 거예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미주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멍하게 있었다. 연호는 제가 그저 컨디션이 안 좋을 뿐이라고 생각한 듯 손을 조용히 잡아 주었다.

“나까지 불안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연호는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서 한 말이었을 텐데. 마치 비밀을 안고 있는 제 불안감을 알고 있다는 듯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목소리에 뒤늦게 눈물이 차올랐다.

“맞아요. 우리가 불안해하면 안 되니깐.”

그건 연호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면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이를 위해서 더는 깊은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말이다. 가슴으로는 쉽게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연호는 그런 미주의 복잡한 상념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또다시 아이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 뒤로 매일 밤 이제는 꽤 배가 불러 바로 눕는 게 힘들어 옆으로 누워 자는 미주를 꼭 끌어안고는 아침이 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 * *

그리하여 미주는 연호의 품에서 시간을 두고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제 와 희주의 출생 비밀을 안다고 한들, 당사자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희주의 친부는 지금껏 비밀을 숨기고 있다. 그러니 일부러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 이상 진 회장이 지키고자 했던 비밀은 영원히 지켜지리라 생각하면서 겨우 마음을 다잡았을 때였다.

“올해는 절대로 안 돼. 무조건 집 안에만 있어.”

“안 그래도 갈 생각 없었어요.”

“윤희주도 지금 저승에서 나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야. 임신한 동생이 멀리 오는 거 반대라고.”

얼마 있으면 희주의 기일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미주는 부산행을 진즉에 포기했다. 연호가 말리지 않아도 어차피 안 갈 생각이었기에 웃으면서 제 뜻을 전했다.

“그 대신 내년에는 초록이도 같이 갈 거예요.”

“그래, 나도 같이 가자. 거기 우리 추억이 있는 곳이잖아?”

연호가 장난스럽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자 미주도 질 수 없어 화답하듯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서울 촌놈이랑 결국 이렇게 될 줄 그때는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거든?”

“됐고, 빨리 회사나 가요.”

출근하는 연호의 등을 한 번 후려친 미주는 침대로 돌아왔다. 못 다 잔 잠을 늘어지게 자다가 해가 중천을 넘겼을 무렵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가볍게 식사를 하고는 햇볕이 쏟아지는 거실 창가에 앉아 느긋하게 일광욕을 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언제 부산에 가?]

진우와 인연을 끊기 전까진 희주의 기일에는 늘 언제나 셋이서 시간을 맞춰 부산에 내려가곤 했었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은 연호가 함께해 주었기에 오빠에게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미주는 잠시 핸드폰을 옆에 두고 거실 창 너머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강을 봤다.

벌써 10년, 아니 정확히는 햇수로 12년째였다. 열아홉 살에 진우와 함께 온 서울에서, 부산에서 계속 살았다면 만날 수 없었을 남자의 아이를 가진 채 이 호화로운 집에서 살고 있었다.

‘희주 오빠 일, 진우 오빠한테 털어놓을 수 있었다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것은 어쩌면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힌 진우에 대한 절대적 맹종에 가까운 믿음일지도 몰랐다. 재민과 연호에게는 말할 수 없어도 진우에게는 희주의 출생 비밀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자란, 친남매와 다름없는 끈끈한 우애는 쉽게 사라질 유대가 아니었으니깐.

깊은 한숨을 쉬면서 배를 어루만지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 주 주말에 진우 형이랑 가려고.]

답장을 보내자마자 돌아오는 회신에 재민은 조용히 손을 움직였다.

[나는 이번에는 패스. 몸이 좀 무거워서. 희주 오빠도 이해할 거야. 그리고 있지, 오빠, 혹시 지금 통화돼?]

[15분 뒤에 전화할게.]

“여사님, 저 따뜻한 코코아 한 잔만 만들어 주세요.”

“네, 사모님.”

살림을 도와주는 나이가 제법 있는 최 여사는 연호가 ‘도련님’이라고 불릴 때부터 그와 함께 생활했던 분이었다.

미주가 남이 타 준 맛있는 코코아를 마실 때, 기다리던 전화가 울렸다.

‘어, 오빠. 있지,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부탁을 좀 할 게 있어서.’

“그래, 힘든 건 아니니깐 부산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들러서 직접 가져다줄게. 얼굴도 한번 보고.”

재민은 전화를 끊으면서 고개를 한 번 갸우뚱거렸다.

미주의 부탁은 이러했다. 부산에 내려갔을 때 제집에 가서 할머니 방에 있는 책을 모두 다 보내 달라고. 어림잡아 대략 적으면 열다섯 권 정도, 많아도 서른 권은 안 될 거라고 말했다.

미주의 부산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던 재민이라 할머니 방에 대충 무엇이 있었는지 가물거리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있었다.

“책은 또 왜. 어지간히 심심한가 봐.”

‘그냥, 엄마가 된다니깐 괜히 엄마 아빠 물건이 갖고 싶어진 것 같아.’

나이 드신 분이 그렇듯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해 그저 쌓아만 두셨던 한복집 할매는 아들이 남긴 것도, 며느리가 남긴 것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옷 같은 것은 아들과 며느리가 죽고 어느 정도 처분을 했지만, 아들 부부의 손때가 묻었다 판단한 것은 절대로 버리지 않고 집 안 구석구석에 두었다.

주말에 진우와 부산에 내려온 재민은 굳이 직접 미주의 집으로 가진 않았다. 사람을 보내 그녀가 원하는 물건만 찾아 보내도 충분했고, 옆에 있는 진우를 자극할 필요도 없었다.

진우가 미주의 임신 사실을 알고 뭔가 누그러진 것 같다 여기곤 있지만 말이다. 무엇이든 재촉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진우가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미주와의 매듭이기에 그저 여전히 방관하고 관찰하면서 관계의 움직임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되었다.

“형님, 잠깐 볼일이 있어서 여기서 저는 딴 데 좀 들렀다가 갈게요.”

“애인한테 가냐?”

“마음대로 생각해요. 아무튼 갑니다.”

아무리 비행기가 있다 한들 당일치기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건 확실히 조금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김포공항에서 진우에게 인사를 하며 차에 작은 박스를 싣고는 미주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 30분 전. 너 몸이 불편하니깐 미리 입구에 얘기 좀 해 놔, 차 들어갈 수 있게.]

[응, 알았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잠시 뒤, 오랜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이 운전석에서 내려 저를 보며 반갑다는 듯 웃고 있었다.

“우리 미주. 이렇게 보니깐 진짜 애기 가진 거 맞네.”

“생각해 보니 나 임신하고 오빠 처음 만나는 거 있지?”

캐시미어 니트 코트를 입은 미주가 겉옷으로 배를 가리고 있어도 이제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게 봉긋해 보였다. 재민은 조금 감격한 눈빛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뭔가 지금 약간 울컥하는 느낌이야, 미주야. 우리 꼬맹이 미주가 언제 커서 애기도 다 가지고.”

“오빠가 예전에 맨날 그랬잖아? 더 커야 한다고. 근데 이제는 더 안 커도 되겠지? 애기도 있는데.”

“그래, 이제 다 컸네. 하산해도 되겠어.”

그 순간만큼은 재민도 그들을 둘러싼 음모와 계략을 잠시 잊은 듯했다.

그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누이가 이젠 엄마가 된다는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기특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는 것 같은 얼굴로 미주를 보며 웃었다.

“진우 형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 엉엉 울었을지도.”

“진우 오빠 울까 봐 나 안 만난다고, 내 마음대로 이미 정신 승리하는 중이야.”

두 사람이 짧은 시간 현관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재민이 뒷좌석을 힐끔 보면서 물었다.

“여기 사모님께서 필요하다 하신 거 가져왔습니다.”

“네, 네, 정 실장님. 잠시만 오빠, 박스 들어 줄 분 나와 달라고 말하고 올게.”

미주가 집으로 쏙 들어가더니 다시 나올 때, 뒤따라 나온 인상 좋아 보이는 중년 남자가 재민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여기, 잘 부탁드립니다.”

“박 집사님, 이거 제 화장대 아래에 우선 둬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재민이 건네는 박스를 옮겨 받은 박 집사가 집 안으로 사라졌다. 미주가 아쉽다는 듯 손을 뻗어 재민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 볼게. 너무 오래 밖에는 못 있어. 남편이 알면 분명 싫어할 거라서.”

“그래, 찬바람 더 쐬지 말고 빨리 들어가. 아 참, 출산이 언제라고 했지?”

제 손을 잡은 미주의 작은 손을 톡톡- 몇 번 치면서 아쉬움을 표현했다.

“석 달 뒤에. 차현 의료원 가서 낳을 거니깐 병원 들어갈 때 연락할게. 꼭 애기 보러 와야 해, 응?”

“그래, 오지 말라고 해도 갈 거야. 우리 조카 얼굴 보러 가야지.”

“고마워, 나중에 또 연락할게.”

미주가 손을 흔들면서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재민도 다시 차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남의 아이를 임신한 미주를 봐서 그런지 재민의 머릿속이 조금 멜랑콜리해지는 걸 느끼면서.

집으로 들어온 미주는 화장대 아래 놓인 박스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 달라고 해도 됐겠지만, 그건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누구든 이 글귀를 보면서 ‘왜?’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면 사태를 제 선에서 끝낼 수 없을지도 몰랐으니깐.

“너 때문이야, 파우스트. 나머지는 연막으로 부산에서 잘 쉬다가 서울까지 왔잖아.”

친구에게 말하듯 한때 겉치레처럼 읽었던 책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파우스트 상권에는 진 회장의 서재에서 봤었던 것처럼 책 사이에 뭔가가 숨겨져 있진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등을 잡고 털어 봤지만 역시나 나오는 것은 없었다.

“사실은 이거 확인하려고 오빠한테 부탁한 거니깐.”

미주는 책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나의 샤롯데, 미희에게’라고 적혀진 바랜 글자.

“사랑하는 미희가 아니라, 샤롯데였구나. 난리도 아니었네, 우리 엄마.”

조금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면서 책을 내려놓았다. 베르테르가 친구의 약혼녀인 샤롯데를 사랑해 결국 권총 자살을 했다는 걸 알고 엄마와 진 회장은 서로를 그렇게 칭했던 걸까?

“책을 안 읽은 게 분명해. 그냥 겉멋 들어 멋진 호칭으로 부르고 싶어서 이랬겠지.”

그 시절 어른들의 낭만이라 생각하며 이젠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진 회장이 또 다른 곳에 무언가를 숨겨 놓았다면 제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면 하면서.

미주는 당연히 진 회장의 죽은 혼외자에 대해 공표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얼마간 끙끙 앓던 비밀을 이제 하늘에 날려 보내도 될 것 같았다.

“다 묻어 두자. 회장님도 숨기고 있는 걸 내가 굳이 공론화시킬 필요는 없으니깐.”

물론 마음속에 떠오르는 물음이 아직 하나 남기는 했다.

“아니야, 나는 아니야. 아니, 아닐 거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한 궁금증을 남긴 채 미주가 문제의 책을 일부러 재민이 가져다준 책들 사이에 끼워 뒀다. 박스 안에 대충 얼기설기 들어가 있는 낡다 못해 삭고 있는 세계 문학 고전들.

연호가 이게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초록이한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손때가 묻은 책을 읽어 주고 싶어서 가져왔다고. 보다시피 하나같이 명작으로 유명한 책들이라 태교에도 좋을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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