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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뜻밖의 선물 (23/53)

21. 뜻밖의 선물

* * *

“나이를 서른일곱 살이나 처먹고 무슨 생일 파티라는 건지.”

연호는 아침부터 기분이 언짢은 듯 출근 준비를 돕고 있는 미주를 보면서 인상을 썼다.

“사돈 남 말 하시네요. 자기도 서른일곱 살이면서. 심지어 내가 만약 당신 생일 안 챙겨 줬다면 삐쳐서 당장이라도 땅 파서 날 파묻을 양반이.”

“그래도 싫어. 정재민 그 새끼가 서진우보다 더 싫단 말이야.”

진우와 재민을 향한 연호의 끔찍한 미움이 살짝 결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긋 웃으면서 넥타이를 매어 주며 어린아이 투정을 달래듯 대답했다.

“파티도 아니고, 그냥 재민 오빠 생일쯤이라 반년 만에 만나는 건데. 다다음 주쯤 만나서 밥만 먹고 들어올 거예요.”

“…….”

“딱 밥만. 그것도 저녁도 아니고 점심때. 아, 이토록 건전할 수가.”

괜한 질투심 때문에 그녀에게 생떼를 부린다는 걸 연호도 알고 있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차연호는 여기까지. 이제부터 차현 그룹 상무이사님 나가십니다.”

와이셔츠를 입은 제 가슴을 미주가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면서 나가서 밥 먹자는 눈치를 보냈다. 주방으로 향한 두 사람은 익숙하다는 듯 각자의 할 일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전날 특별히 연호의 코멘트가 따로 없으면 미주는 아침마다 빵을 적당히 썰어서 토스트기에 넣어 두고 차를 끓였다. 연호는 그날그날 제 입맛에 당기는 잼이나 치즈, 버터 따위를 꺼내 식탁 위에 늘어놓으며 테이블 세팅을 했고.

누군가가 봤으면 그냥 평범한 결혼 5년 차 30대 부부의 아침이겠지만 말이다. 재벌 3세가 사는 집에 집안일을 돕는 분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연호가 오래 외국 생활을 해 아침은 보통 간단히 때우는 걸 선호해서 진수성찬을 차려 줄 필요가 없었다.

“나 이제 집에서 노는 것도 지겨운데 일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마주 앉은 식탁에서 미주가 따뜻한 빵을 오물거리면서 하는 말에 연호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잖아? 지금은 그냥 놀 수 있을 때 신나게 놀고 있어. 나중에 때가 되면 자리 만들어 줄 테니깐.”

“그렇긴 한데, 진짜 노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안 되면 갤러리에 뭐라도 명함 하나 파 주면 관장님 따라다니면서 그림 보는 안목을 좀 배울까 싶은데.”

연호가 말하는 ‘그때’라는 것이 제가 차현 그룹 회장이 되면, 이라는 뜻인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데렐라도 몇 달이지, 유산하고 몸을 추스른 후부터 지금까지 맨날 소일거리 하나 없이 빈둥거리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해, 미주는 가끔 연호를 졸랐다.

“누나가 은퇴하고 싶다고 말하면 그때 열심히 따라다녀. 안 되면 복지 재단이라도 만들어 줄 테니깐.”

“…너무해. 이러려고 죽어라 공부하고 토익 성적 만든 거 아닌데.”

“작년에 임원으로 승진했으니깐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 말은 연호가 회장 자리를 거머쥐는 게 머지않았다는 것과 더불어 진우와 진 회장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편이 원하는 걸 얻게 되었을 때 제 운명과 다른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일단 나는 둘 중에 하나야. 그와 이런 식으로 계속 함께하든지, 아니면 계약 종료로 쿨하게 각자의 길을 가든지.’

우습게도 연호가 저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았던 지난 시간 동안,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어떤 마음.

하지만 연호가 진우와 재민을 살려 둔다는 보장은 없었다. 저와의 계약은 인질이 되는 대신 살인죄를 덮어 두겠다는 거였지, 죽이지 않겠다는 게 아니었으니깐.

물론 글자 그대로 죽여 버리겠다는 뜻도 아주 조금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두 사람의 사회적인 생명을 끝내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단 한 번도 연호에게 두 사람의 구명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때가 임박했을 때 처음으로 꺼내는 그 말이 큰 힘이 될 것이라 여겼다.

미주 역시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연호를 보면서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좋겠다, 초고속 승진. 에스컬레이터 타고 그냥 쭉쭉-”

“서진우도 똑같잖아? 매형이 일부러 나보다 더 위인 전무로 만들어 주다니. 사람 열 받게.”

미주는 1년 내내 똑같은 소리를 하며 투덜거리는 연호를 보면서 달래듯 말했다.

“오빠가 한 살 더 많으니까.”

“편들지 마. 사회에서 한 살은 친구야, 친구.”

“네, 네, 친구 씨.”

이게 참, 어떻게 시각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진우를 극도로 싫어하는 연호가 그만큼 진우를 의식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가끔은 둘이 친구가 된다면 정말 톰과 제리처럼 은근히 환상의 커플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아니면 환장의 커플이거나.

동족 혐오이긴 하지만 반대로 서로를 이해할지 모른다는, 미주가 지난 5년간 숨을 죽이며 그려 왔던 큰 그림.

아쉽게도 종과 과마저 다른 맹수를 타협시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제가 연호의 옆에서 노력했던 동안, 재민 역시 진우 옆에서 노력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 소득 없이 벌써 시간은 5년이나 흘러 있었다.

* * *

미주가 약속 시각보다 조금 먼저 나와 혼자 레스토랑에 앉아 있을 때, 반가운 이가 저를 보면서 나타났다.

“오빠, 잘 지냈어?”

“나야 똑같지. 넌 요즘 어때?”

“나도 똑같지, 뭐. 가정주부의 삶이 다 그렇듯 말이야.”

“네가 자신을 평범한 아줌마라고 말하는 거, 웃긴 거 알지?”

재민은 자리에 앉으며 미주의 근황을 웃으면서 물었다.

30대가 된 뒤부터 느껴지는 안정된 모습의 미주가 행복해 보였다. 재민은 그녀가 재벌 사모님 역할에 너무 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루트로 들려오는 정보에 의하면 차연호 부부의 행복이 쇼윈도가 아닌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네가 끝까지 차연호를 이용하길 바랐는데. 결국, 너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구나.

미주를 쌉싸름하게 쳐다보면서 오늘도 오빠 역할을 충실히 해 볼까 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한 두 사람이라 굳이 대단한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었다. 미주와 재민은 편안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미주가 커트러리를 내려놓으면서 눈을 조금 가늘게 뜨더니 이렇게 물었다.

“나 뭔가 들었어. 오빠 요새 만나는 여자 있다고 하더라.”

재민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냅킨으로 입가를 살짝 훔친 뒤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우리 차연호 상무님께서 입이 이렇게 쌀 줄이야.”

제 말에 미주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상무님 아니고요, 관장님.”

묘하게 제 남편 욕을 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미주를 보니 말이다. 어쩌면 완벽하게 연호의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그렇듯 능숙하게 숨기면서 놀라는 척 대답했다.

“관장님이라는 말은, 회장님이 범인이라는 뜻이네.”

제가 부정이 아닌 시인을 하자 미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조금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뭐야? 진짜야? 그동안 오빠가 여자를 안 만났을 거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인정한 거 처음이잖아.”

“내가 그랬나?”

“어떤 사람일지 엄청 궁금해졌어. 한번 소개해 줘! 결혼도 할 거야?”

“미주야, 넌 가끔 너무 점프해 버릴 때가 있다니깐.”

“뭐 하는 여자야? 나이는?”

“노코멘트. 사생활 좀 지켜 줘, 미주야.”

그저 성욕만 푸는 여자는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우연히 타인에게 여자가 있음을 들켰을 뿐.

밝히고 싶지 않고 밝힐 생각도 없는 취향과 욕망만큼은 아직은 미주가 몰랐으면 했다.

“이럴 줄 알았어. 평생 비밀주의. 이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오빠 좋아했을 때도 여자 있었지? 응? 맞지?”

“그것도 노코멘트.”

“아, 진짜 싫다. 차라리 없었다고 하얀 거짓말이라도 해 줘.”

“이것도 노코멘트.”

“아, 짜증이야. 아무튼, 너무 막 재지 말고 좋은 여자면 그냥 결혼해.”

고상한 척하는 재벌 사모님이 아니라 제가 알던, 한동네에 살았던 미주를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수다쟁이 말괄량이에다가 푼수기도 있고, 깡패 오빠 덕분에 입도 거칠었던 한복집 할매 손녀 미주.

그랬던 미주가, 세상에. 재민에게 나이가 찼으니 장가를 가야 한다고 들들 볶다니. 이런 말을 들을 줄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재민은 격세지감을 느끼는 듯 오랜만에 그 시절처럼 웃고 있었다.

“그래도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형이 먼저 가야지.”

“진우 오빠는 내가 봤을 때 절대로 결혼 못 해. 내가 결혼해 보니깐 뭔가 딱, 그런 느낌이 있어.”

“그게 뭔데?”

재민이 궁금하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이자 미주도 몸을 숙여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오빠도 알잖아? 진우 오빠 여자 엄청나게 많은 거? 숨겨도 이젠 다 보여. 나쁜 놈, 서진우.”

“마지막까지 노코멘트 해야겠어. 우리 형 내가 보호해야지.”

“뭐랄까? 오빠는 여친한테 잘해 줄 것 같은 이미진데, 진우 오빤…… 어마어마한 나쁜 놈일 것 같아.”

미주가 과장된 몸짓으로 싫다는 듯 몸서리를 치면서 웃었다.

“아무튼, 진우 오빠는 여전한 거지? 내가 미워 죽겠고?”

“설마 널 진짜 미워하겠어? 그냥 아직도 삐진 거로 해 두자.”

그간 진우가 어떻게 지냈는지 재민을 통해서 듣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을 통해서도 들었었다.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우는 지난 5년간 꽤 잠잠히 있었고, 연호와 부딪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연호보다 직급이 높아졌지만 말이다. 연호를 더 깍듯이 대하는 통에 그가 곤란해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진우가 예전처럼 저를 도발해 줘야 연호도 그를 자극할 핑곗거리를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진우가 몸을 낮추고 있으니 연호도 발톱을 숨기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주는 전혀 모르겠지만 재민 역시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가 임원으로 승진하면서 제가 이어받은 ‘비서실장’ 자리에서는 전보다 조금 더 쉽게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은밀히 손에 거머쥐게 된 정보와 비밀을 바탕으로 성골과 진골을 싸움 붙여 놓고는 말이다. 육두품인 재민이 반反차현을 외치는 검찰 세력과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규합하고 있었다.

미주를 연호에게 뺏겼다는 질투심으로 인해 각성했지만, 진우 때문에 자극받아 감히 탐해 보기로 시작한 권력은 살짝만 맛봐도 이미 너무 달콤했다. 그래서 더 가지고 싶었기에 은밀하게 힘을 키우고 있었다.

오늘도 욕망을 담백한 얼굴 뒤로 잘 감춘 재민이 손목시계를 보더니 아쉽다는 듯 말했다.

“점심시간 끝나 가. 차 상무님께서 분명히 어디선가 다 보고 있을 테니 그만 일어나자.”

“그래. 오빠, 조금 이르지만 생일 축하해. 한 살 더 먹고 내년에도 무사히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미주의 말 속에 담긴 뼈를, 재민이 모르지 않았다.

“너야말로. 어떻게든 잘 버텨 봐.”

재민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한 번 두드리자, 미주는 그저 웃었다.

“점심 먹고 집에 오니 잠이 와서 잤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너무 잤나 보다. 두통이 살짝 번져 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거실로 나왔다.

“뭐야? 혼자 마시면 반칙이지. 아…, 나도 한 번쯤 미친 듯이 마셔 보고 싶다.”

갑작스럽게 모임이 생겨 늦는다는 연호의 메시지를 보면서 웃다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원한 거 한 잔 마셔야겠어.”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를 꺼낸 미주가 TV를 틀며 소파에 앉아 캔을 따려고 할 때였다. 문뜩 방금 꿨던 꿈이 떠올라 손이 멈칫했다.

“흠, 그게 좀. 이상하기도 하고.”

전에도 이런 묘한 꿈을 꾼 적이 있어 잠시 고민했다. 맥주를 다시 냉장고에 넣고는 타이레놀을 찾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손이 움직이지 않아 한숨을 길게 쉬고는 침실로 향했다.

화장대 첫 번째 서랍 깊숙한 곳에 있는 다양한 제조사의 임신 테스트기.

“태몽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윤미주. 기대하지 마. 바라지도 마. 그냥 꿈이야.”

가끔 뭔가 예감이 들어서 그걸 확인해 볼 때마다 늘 언제나 실망만 했었다. 소위 말하는 ‘요물’인 그것을 들고 화장실로 갈 수 없어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결심했다.

“아, 몰라. 그냥 빨리 해치우고 실컷 울고, 술이나 진탕 마시고 자자. 어차피 남편도 없는데, 뭘.”

그런데 잠시 후 손에 들린 막대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선명한 두 줄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세상에, 임신일지도 모른다니.

미주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히 느꼈다. 배 속 아기 아빠에게 제일 먼저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말이다.

* * *

“안 자고 뭐 해?”

“당신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 처남 만나서 저녁 먹는다더니.”

“그게… 여보, 드디어 우리 집안에 경사가 생겼어요.”

피곤한 얼굴로 늦게 귀가하니 연희가 웬일로 밝게 웃으면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 회장은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경사?”

“네, 경사. 세상에, 미주 씨가, 아니 이제는 올케라고 해야겠지만 아무튼, 우리 연호가 이제 아빠가 된대요.”

“아, 그거 너무 잘됐네. 정말 잘됐어. 축하한다고 전해 주고 뭐 보약이나 챙겨 줄 거 있으면 당신이 알아서 잘 보살펴 줘.”

연희가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진 회장을 따라다녔다.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들은 이야기를 계속 전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올케, 친정엄마도 안 계시니깐 이번에는 잘못되지 않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옆에서 도울 거예요.”

“그래, 그래 주면 고맙지. 죽은 민철이도 당신한테 고마워할 거야.”

진 회장이 연희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신뢰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연희가 눈가를 훔치며 계속 떠들어 댔다.

“벌써 5개월이래요. 안 지는 좀 됐는데, 안정기 들어서면 주변에 알리려고 했다고 오늘에서야 말해 주는데… 어쩐지 그동안 내가 올케 좀 만나려고 해도 연호가 온갖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못 만나게 하더니.”

“처남이 엄청나게 기뻐하겠어. 아이, 은근히 기다렸잖아?”

“그러니까요. 걔가 말을 안 하고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전에 잘못됐을 때도 연호가 몇 달이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서 내가 다 마음이 아팠는데…….”

진 회장은 한참 동안 호들갑을 떨면서 떠들어 대는 아내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그녀의 기분에 맞춰 줬다.

평소에 이 중년 부부는 서로에게 살갑지 않았다. 진 회장도 알고 있었다. 연희가 사실 제 사생활을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한다는 것을.

하지만 괜히 조강지처의 성질을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연희가 가지고 있는 차현 그룹의 장녀라는 정통성이 아직 필요했고, 굳이 제 허물을 들추지 않는 아내에게 못되게 굴 필요도 없었다.

하여 두 사람은 각자 꿍꿍이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적어도 앞에서는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늘 언제나 하하 호호 지내지도 않는, 쇼윈도 부부.

둘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자식조차 없으니 어쩌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일지 모르는 부부는 오랜만에 순수하게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아이고, 너무 떠들었더니 피곤하네요. 내가 당신 너무 길게 붙잡고 있었어. 나 먼저 자러 들어갈 테니까, 씻고 들어와서 쉬세요.”

연희가 하품하면서 침실로 향하자 진 회장은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과를 모두 마친 후 침실로 들어가 연희가 깊이 잠들었음을 확인하고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2층에 있는 제 서재와 1층 연희의 서재는 고용인들도 잘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가끔 집에서 업무를 볼 때가 있으니, 회사 기밀이나 중요한 결정 사항이 혹시나 고용인을 통해 누설될까 봐 노파심에 암묵적인 룰을 정해 뒀다.

물론 집에 손님이 왔을 때는 언제나 자랑하듯 이 넓고 높은 천장을 가진 멋진 2층 서재를 보여 주곤 했지만 말이다.

진 회장은 불도 켜지 않은 서재에 들어가 피곤한 듯 목을 한 번 부드럽게 돌렸다. 그리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손등으로 슥- 훑어보았다.

평생에 걸쳐 모은 것이 담긴 컬렉션.

어두워서 어디에 무슨 책이 꽂혀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책장에서 진수오는 찾는 책을 정확히 꺼내 최고급 1인용 리클라이너에 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너무 오래되어 바스러질 것 같은 누렇게 바랜 책.

“할머니가 된 걸 축하해.”

진 회장은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제가 펼친 곳만 뚫어져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다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켠 다음 문을 닫고 1층으로 내려왔다.

* * *

차현 의료원 산부인과 앞에서 뜻하지 않는 웃음꽃이 활짝 피고 있었다.

“무조건 널 닮아야 해.”

“첫딸은 아빠래요.”

“아니야, 우리 초록이는 무조건 널 닮아서 예쁠 거야.”

“그럼 내가 예쁘다는 말이네?”

“일단 뭐, 그런 거로 하자.”

“뭐야.”

농담을 주고받는 연호와 미주의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했다.

오늘 병원에서 배 속의 아이가 공주님이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말이다. 표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연호의 의외의 모습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재벌가에서 태어났기에 어릴 때부터 감정을 숨기고 표정을 감추는 법을 배웠을 연호가 이렇게 웃을 줄도 알다니.

미주는 연호의 이런 인간적인 면을 가끔 볼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냉혈한의 피도 뜨겁게 데울 수 있음에 감사해 보면서. 이제는 조금 봉긋해진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초록아, 너 아들이었으면 아빠가 실망했겠어.”

미주가 배를 만지면서 배 속 아이에게 말을 걸자 연호가 대신 대답했다.

“아들은 필요 없네요. 나를 보고도 아들이 낳고 싶어?”

“왜요? 난 아들도 좋아요. 물론 딸도 좋지만.”

연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미주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웃었다. 한번 아픔이 있었기에 매사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임신임을 확인한 순간부터 괜찮다 해도 저를 침대에 24시간 눕혀 놓기 시작한 극성맞은 연호는 검진일까지 꼬박꼬박 따라오는 정성을 보였다.

심지어 미주의 담당의, 차현 의료원을 넘어 국내에서 산부인과로 톱 텐에 드는 교수가 안정기에 접어들어 괜찮다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럼 둘째는 어떻게든 아들로 트라이해 봐야겠어.”

성별을 안 뒤 조용히 호들갑을 떨며 시끄러운 돈지랄을 하기 시작한 연호를 미주가 말려 보지만.

“흠… 이거 너무 핑크핑크 하지 않아요?”

배 속 아이의 성별을 알기 전부터 집의 가장 좋은 방을 아기방으로 떠들썩하게 꾸며 대더니, 딸인 걸 안 순간부터 온통 핑크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 솔직히 이런 레이스, 내 취향 아닌데.”

“공주님처럼 키울 거야. 토 달지 마.”

“…….”

온통 핑크색과 레이스로 꾸며진 동화 속 공주님 방을 보면서 미주는 속으로 걱정을 했지만 말이다. 또 금방 마음을 바꿔 먹고는 혼자 피식 웃기도 했다.

‘초록아, 엄마는 진짜 이러고 싶지 않은데, 아빠가 이 난리야.’

연호가 출근하고 혼자 집에 있을 때 아기방에 들어가곤 했다. 미주는 자그맣고 예쁜 것들을 보면서 울컥할 때도 있었다.

“그냥, 남편이 좋아하니깐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자.”

연호가 이토록 아이를 원했을 줄 몰랐던 미주는 손바닥만 한 배냇저고리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좋은 베이비 시터 구한다고 죽는 줄 알았어.”

“응? 아직 낳으려면 반년은 더 있어야 하잖아요?”

“해온 호텔 알지? 거기 사장이 늦둥이 둘째를 우리랑 비슷하게 출산하는데 실력 좋은 시터들 벌써 다 세팅했기에 빼내 온다고 진짜 돈 많이 들였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이건 누나가 진짜 힘써 준 거야. 나중에 감사 인사는 누나한테 해.”

구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 시터 때문에 졸지에 엎드려 절하게 생겼지만. 솔직히 도와줄 손이 많으면 그만큼 육아가 편해지긴 할 것이기에 굳이 마다하지도 않았다.

“고맙습니다, 관장님. 정말 저는…….”

“됐어. 그냥 나를 남편 누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친정 언니나 아니면 엄마라고… 아니다, 엄마는… 나 아직 젊어, 내가 싫네. 언니, 언니라고 생각해.”

차씨 남매는 또 이럴 때 쿵짝이 잘 맞았다. 연호와 연희가 배 속 아이를 위해 해 주는 모든 것에 대해서만큼은 저의를 의심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연호를 향했지만, 나중에는 누구를 미워하는지 알 수 없었던 분노와 복잡한 계략도 모두 다 녹아내려 스르르 사라진 것 같았다. 아니, 사라졌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어쩌면 초록이가, 배 속의 아이가 모두를 하나로 이어 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 진우 형, 네 소식 듣고 따로 코멘트는 없지만 분명히 신경 쓰고 있어. 나중에 낳으면 조카 보러 올 것 같아. 네 아이인데 설마 모른 척하겠어? 물고 빨고 얼마나 이뻐할지.”

재민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그가 기뻐하면서 해 줬던 말을 미주는 계속 곱씹고 있었다.

아빠로서, 삼촌으로서 사랑해 줄 두 사람이 아이 때문에라도 반목하지 않았으면 하는 달콤한 꿈.

미주의 행복한 바람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흘렀고, 어느새 출산까지 3개월을 남겨 둔 시점이 되었다.

이제는 꽤 배가 불러 누가 봐도 임산부임을 알 수 있어, 매사에 행동을 늘 조심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짧았던 첫 임신에 대한 기억 때문에 불안감을 완벽하게 떨쳐 낼 수 없었으니깐.

연호 역시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미주의 옆에 오래 있어 주기 위해 노력하며 쓸데없는 외출은 삼가고 있었다.

그런데 연호가 어제 매형과 함께 밥이라도 먹자는 누나의 연락을 단칼에 거절했다는 걸 알고는 미주가 핀잔을 줬다.

“나 임신하고 한 번도 회장님 못 뵀는데 너무 그러지 마요.”

“안 그래도 누나가 쌍욕을 퍼붓더라. 덕분에 내 입장이 좀 곤란해지긴 했어.”

“전화해서 약속 잡아요. 그 대신 우리 집 근처에서 뵙자고 하면 나도 멀리 안 나가서 좋잖아요.”

덕분에 가족 모임이 열렸다.

“어머, 회장님. 먼저 와 계실 줄 몰랐어요.”

차현 호텔 한식당 총지배인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VIP 룸으로 들어섰을 때, 미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연희도 아니고 진수오 회장이 제일 먼저 와서 기다릴 줄이야.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면서 혹시 하는 마음에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혹시 내가 약속 시각보다 늦은 건 아니겠지? 아니야. 일부러 엄청 일찍 출발했는걸. 혹시라도 늦을까 봐.’

연호가 집으로 와 저를 데리고 나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고, 그의 일이 빠듯한 것도 있었다. 재벌가 작은 사모님 소리 듣는 저를 여기로 데려다줄 운전기사 하나 없는 것도 아니기에 약속 장소에서 연호와 만나기로 했었다.

“미주야, 아니 처남댁, 빨리 편하게 앉아. 홑몸도 아닌데.”

진 회장은 여전히 미주가 귀엽다는 듯 웃으면서 손짓으로 앉을 것을 권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진 회장을 향해 밝게 웃으며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인 후 의자에 앉았다.

“하도 오랫동안 ‘미주’라고 불러서 그런지 아직도 나는 ‘처남댁’이라는 호칭이 입에 안 붙는구나, 허허.”

“편하신 대로 불러 주세요. 솔직히 말해서 회장님께 저는 처남댁도 맞지만, 또 어떻게 보면 친구 딸이기도 하잖아요.”

“그래, 미주라고 부를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애기 낳으면 이제 ‘누구 엄마’라고 불릴 테니.”

“그럼 회장님이라도 저한테는 늘 미주라고 좀 불러 주세요. 이름을 잃고 싶지가 않네요.”

사실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거물이 눈앞에, 그것도 다른 이들도 없이 단둘이 있으니 긴장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물론 진 회장은 이제 법적으로도 가까운 가족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지만 여러모로 어려워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이렇게 독대하게 된 이 상황이 살짝 당혹스러웠다.

미주는 슬쩍 앞에 놓인 물 잔을 손에 들고 입술을 축이며 진 회장에게 물었다.

“관장님은 오고 계시죠? 남편은, 아니 상무님은 조금 전에 퇴근하고 출발했다고 연락받았거든요.”

“아, 와이프도 오늘 클레이 사격 모임 갔다가 지금 오고 있어. 알다시피 나보다 더 바쁜 게 우리 와이프라.”

“예전에 들은 적 있어요. 제 시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을 때부터 취미로 계속하셨다고.”

“나도 장인어른 따라 몇 번 다녀 봤지.”

미주는 그렇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동자를 움직였다. 이번에 오픈한 이 한식당의 VIP 룸 인테리어를 훑어봤다. 진 회장의 뒤에 놓인, 화려해 보이는 병풍. 아마도 인간문화재급인 장인의 손에 만들어졌을 그것은 잘 모르는 제가 봐도 한눈에 명품인 게 보였다.

“안 그래도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여기 한식당, 입소문 소소하게 잘 나고 있더라고요. 블로그나 SNS 같은 곳에서도 고급스럽고 음식도 좋다고 해서 사실 와 보고 싶었어요.”

미주는 재벌 총수 앞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며 비위를 맞춰 주었다. 물론 진 회장 앞에서 읊은 그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기에 와 보고 싶었다는 제 말이 거짓은 아님을 그도 느낄 것이다.

“서 전무가 기획한 거야. 물론 아이디어만 내고 서 전무는 다른 일 한다고 바빴지만. 그게 먹혀들어 갈 줄, 솔직히 실무자들도 예상 못 했다고 하더군.”

미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서울에도 지방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깐요. 호텔 레스토랑에서 이렇게 이벤트성으로 부산 특산물 위주로 음식을 고급스럽게 내어놓으니, 우리처럼 고향이 그쪽인 사람들의 향수를 제대로 자극했죠.”

“그래서 미주 네 생각은 어떠냐?”

“앞으로 각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이런 이벤트를 자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충청남도 음식 대전’, 이런 식으로 SNS 셀럽에게 홍보도 하고, 그 지역 출신 연예인들을 섭외해서 협찬도 하고.”

“우리 처남댁, 집에서 태교만 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바깥일 돌아가는 거 잘 알고 있구나.”

진 회장의 말 속에 담긴 가시를 미주가 눈치채고는 재빨리 태세 전환했다.

“알기는요. 아시다시피 회사도 1년 겨우 다니고 사실상 그만둔 거나 다름없는데. 제가 뭘 알겠어요, 회장님.”

“왜? 이렇게 잘 아는데?”

“먹는 거라서 그래요, 회장님. 제가 또 잘 먹잖아요.”

진 회장에게 친구 딸인 ‘윤미주’와 처남댁 ‘윤미주’는 입장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는 친구 딸일 수 없음을 알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인 척하고 있었다.

진우와의 절연에 연호가 얽혀 있다는 걸 진 회장이 모를 리 없으니 말이다. 저는 그 앞에서 사랑에 눈먼 멍청한 여자를 연기하는 게 맞다 여겼다.

이 늙은 여우의 눈에 지금 이 상황이 그저 남녀 관계로 삐걱거리는 일종의 치정이어야 그의 개입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제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진 회장은 지난 5년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저 사람 좋은 아주버님(2011년에 발간된 국립국어원 ‘표준언어예절’의 가정에서의 호칭, 지칭에 근거했습니다.)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조금은 쓸데없는 대화 속에서 어색함이 사라졌을 때, 가벼운 애피타이저 같은 상이 차려졌다.

“아…….”

그때 핸드백 속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미주가 양해를 구한다는 듯 진 회장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거의 도착했어. 근데 누나, 사고가 났다네. 그래서 누나는 못 올 것 같아.]

미주는 연호의 메시지를 보면서 놀란 얼굴로 손을 움직였다.

[사고? 무슨 사고요?]

[교통사고. 가벼운 접촉 사곤데 그래도 병원에 가 보라고 했어. 혹시 모르니깐.]

[알겠어요. 지금 회장님 먼저 오셔서 둘이 있는데 빨리 와요.]

차분한 연호의 태도를 보아 하니 큰 사고는 아닌 듯했다. 미주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다시 핸드백에 넣고는 진 회장에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관장님께서 접촉 사고가 있으셨다고.”

“아, 그래? 걱정하지 마. 큰일은 아니니깐.”

“아, 네.”

미주는 살짝 어색해진 공기 속에서 테이블 위에 놓인 청주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상무님은 이제 곧 도착하신다네요. 기다리는 동안 회장님, 제가 한 잔 드릴게요.”

하지만 진 회장은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어허이. 여자가 남자한테 함부로 술 따르는 거 아니다. 홑몸도 아닌데.”

“아,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고. 연호가, 아니 처남이 곧 온다니 먼저 한 잔 해야겠어.”

술병을 향해 머쓱하게 뻗어 있던 손을 다시 품 안으로 거두어들이면서 미주는 진 회장에게 한 번 웃었다. 너무 호들갑을 떨었거나, 괜한 짓을 했거나.

진 회장은 직접 청주를 들고는 제 잔을 채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근황을 물으며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진 회장의 연륜이 담긴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쳐 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말이다. 속으로는 사실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교통사고.’

그 말은 죽은 오빠를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스위치나 다름없었다. 희주가 죽은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고, 저는 그 시절 오빠보다 이제 더 나이가 들어 있었다.

미주가 조금 아련한 얼굴로 오빠를 추억하고 있을 때였다.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진 회장이 희주에 대해서 먼저 입을 여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희주 녀석, 제 엄마를 많이 닮았었는데. 너도 점점 나이가 들면 들수록 네 엄마를 더 많이 닮아 가는구나. 뭐, 같은 배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저는 기억조차 없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기억하고 있는 남자.

예전부터 가끔 진 회장이 이런 말을 하곤 했었다. 미주 넌 네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마치 엄마를 잘 안다는 듯한 뉘앙스를 가진 진 회장의 말투.

“엄마를 잘 아시나 봐요.”

“아는 게 당연하지. 죽은 네 아버지랑 내가 친했으니. 그리고 너도 알고 있겠지만 네 엄마가 우리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기도 했고.”

“…….”

“특히 너네 할머니, 진짜 대단하신 분이었지. 늘 곱게 한복 입으시고 쪽 찐 머리 하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시면서 동네를 다니시던…….”

“할머니가 좀 셌죠.”

“말도 마라, 미주야. 옛날에 내가 네 나이였을 때는 더했어, 한복집 할매.”

미주는 아주 오래전 술주정뱅이에 약에 절어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지웠다. 제게 가족은 죽은 희주와 할머니, 그리고 진우뿐이라고 늘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았었는데.

조금은 울컥한 표정으로 진 회장을 바라보았다. 제가 모르는 젊은 날의 인간 진수오에게 아빠는 어떤 존재였을까?

아빠의 청춘과 엄마의 짧고 불행한 삶이 슬퍼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느낄 때, 연호가 나타났다.

“회장님, 조금 늦었습니다.”

“차 상무가 나 대신 회사일 해 준다고 고생이 많지. 빨리 앉아서 먹자고.”

“아, 누나 일은 와이프한테 들으셨죠?”

자리에 앉은 연호가 자연스럽게 진 회장에게 눈짓하며 연희의 소식을 알렸다.

“여기 오기 전에 연락 먼저 받았어. 자기 다친 거보다 오늘 같이 식사를 못 하는 게 더 신경 쓰이나 봐.”

“누나가 원래 좀 그런 구석이 있잖아요? 뭐랄까, 나이가 들어도 소녀 감성이라고 해야 할지.”

연호는 진 회장의 술잔을 채워 준 후 제 잔에도 술을 채웠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미주의 배로 손을 향했다. 살짝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마음에 미주는 따뜻한 시선으로 연호를 보았다.

“당신은 그냥 주스만 마셔.”

“당연한 소릴.”

“미주, 아니 처남댁 아쉽겠어. 술 좀 하잖아? 그런데 출산하고도 당분간은 못 마실 테니.”

분위기 메이커인 연희가 없어도 대화는 꽤 스무스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연호도 나이가 든 만큼 매형이자 견제 상대인 진 회장에게 웃으면서 자세를 낮출 줄 알게 되었다. 또 옆에는 미주가 있으니, 아무래도 남자들끼리만 있을 때 생기는 특유의 긴장감이 많이 희석되기도 했다.

오고 가는 술잔들과 맛있는 음식들. 남들 눈에는 가족들 간의 화목한 모습으로 비칠 저녁 만찬은 한 명이 빠져 조금 아쉽기도 했다.

“매형, 오늘 좀 과음하시는 것 같아요. 최근에 술 많이 줄이셨다 들었는데.”

“미주, 아니 처남댁 임신하고 처음 보는 자리인데 기뻐서 그래. 연호 너도 알다시피 난 자식이 없어서 이런 일, 정말 내 일 같고 너무 기쁘거든.”

연호가 술을 많이 권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진 회장이 조금 취기가 오른 얼굴을 하고는 꽤 말이 많아졌다.

“앞으로 기뻐하실 일, 힘이 닿는 대로 많이 만들어 드릴게요.”

연호가 슬그머니 테이블 아래로 손을 잡으며 하는 말에 미주는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를 두셋이라도 낳겠다는 말이야? 나랑은 전혀 어떤 협의도 없이?’

미주가 행복한 투정을 속으로 삼키고 있을 때였다.

“하아, 우리 미주. 나는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내 딸 같기도 하고 마음이 좀 싱숭생숭하기도 하다, 연호야. 미주가 너랑 이렇게 잘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 나는 당연히 정 실장하고 결……”

뭔가 실수를 했다는 표정의 진 회장이 황급히 제 말을 얼버무렸다.

“정 실장하고 서 전무가 어련히 알아서 좋은 데 시집보내지 않을까 했는데 말이야, 하하핫.”

“저랑 결혼했으니, 서 전무님도 그리 미주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째, 처남 자랑으로 들리는데?”

“네, 맞습니다, 매형.”

연호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진 회장의 빈 잔을 채웠다. 미주 역시 태연한 얼굴로 차분하게 앉아 남자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가끔 제가 끼기도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어느덧 후식이 나오고 저녁 식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갈 때쯤, 진 회장이 미주와 연호에게 의견을 구한다는 듯 말했다.

“와이프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술 냄새 풍기면서 가도 될지 모르겠구나. 괜히 갔다가 욕먹을 것 같기도 한데, 또 안 가면 안 갔다고 욕먹을 것 같고.”

“이러나저러나 누나한테 한 소리 들으실 거면 가 보시고 잔소리 들으세요. 안 가시면 두고두고 누나가 바가지 긁을 테니.”

연호의 말에 진 회장이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처남이 이런 소리를 하는 거 보니 결혼하고 나이가 든 게 느껴져서 참, 뭐랄까? 격세지감이야.”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미주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능글맞은 말투로 진 회장에게 대꾸하는 연호를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돈 많은 교포 날라리 같았던 남자였는데. 어느 순간 젠틀맨인 척하더니 이제는 능구렁이가 다 된 모습으로 늙은 여우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늙은 여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도발에 전혀 반응하지 않은 연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겠지만 말이다. 보통내기가 아닌 진 회장은 겉으로는 그 어떤 티도 내지 않고 있었다.

진 회장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미주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는 연호를 조금 복잡한 시선으로 훔쳐보았다.

조금 전까지 진 회장 앞에서 떠들어 대던 차연호와 윤미주는 사라진 듯 두 사람은 조용히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상무님, 사모님, 도착했습니다.”

“유 기사님, 고생하셨어요.”

침묵을 깨는 목소리에 미주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늘 그렇듯 연호가 먼저 내려서 제가 앉은 쪽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조심해.”

“네, 알았어요.”

단단한 남자의 팔을 잡고 차에서 내려 부른 배를 안고 집 안으로 향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매일 반복되는 일상처럼 각자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머리까지 다 말린 미주가 침실로 들어왔을 때였다. 연호는 침대에 반쯤 누운 듯이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또 어려운 거 보네요. 나는 이제 독해도 안 될 것 같아서 원서는 못 읽겠어요.”

“언어는 꾸준히 공부하는 게 답이야. 모국어가 아니니. 나도 10년 넘게 미국에 있었지만, 가끔 기본적인 단어가 생각 안 날 때가 있다니깐?”

“그건 그래요. 나도 캐나다에 있을 때는 영어로 말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자막 없이는 영화도 못 보겠고. 아, 머리가 굳고 있어서 큰일이에요.”

“이거 큰일이네. 엄마가 바보라서 어쩌지, 초록아?”

연호는 책을 덮고 옆으로 누운 미주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배 속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연희의 안부를 재차 물었다.

“내일 나도 관장님 뵙고 올게요. 많이 다치셨는지 걱정되니깐.”

“아니, 안 가도 돼. 누나가 너 그럴 줄 알고 절대로 오지 말라고 했어. 그냥 내일 전화 한 통 해서 괜찮은지만 물어봐.”

“그래도 가 봐야…….”

“누나 말로는 큰 사고도 아니고 가벼운 접촉 사곤데 이참에 누운 김에 검진까지 받으신단다. 종합 검진이라니 말 다 했지, 뭐.”

“음… 그래도 전화는 좀…….”

“됐어. 그냥 전화만 해. 그만 자자, 미주야. 술을 마셔서 그런가 피곤해, 오늘.”

미주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연호의 조금 다른 태도를 이미 느끼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하면서 등을 보이며 자는 연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회장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편 앞에서 재민 오빠 이야기를 꺼낸 걸까?’

저와 재민이 그냥 오빠와 동생 관계가 아니었다는 걸 진 회장은 알고 있었다.

‘진우 오빠랑 재민 오빠가 회장님 근처에서 일하니 자연스럽게 얘기했을 수도 있고, 회장님이 눈치를 챘을 수도 있어.’

연호와 함께했던 5년간, 과거 재민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었는지 말한 적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재민과 정식으로 사귀거나 어떤 깊은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랬기에 첫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지녔던 남자에 대해서 굳이 먼저 연호에게 과거에 이랬다, 라면서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었다. 연호 역시 그런 걸 물어본 적 없었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도 없었고.

하지만 내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그때 내가 홧김에 말한 걸 아직 그가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야. 그때 그냥 한 귀로 흘려 버렸잖아? 너는 늘 거짓말만 한다고 오히려 날 몰아세웠으니깐.’

오래전, 연호와 기 싸움을 벌이던 시절에 이렇게 말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근데 뭐, 짝사랑, 첫사랑 좀 할 수도 있지. 아니,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말이야. 거기에 내가 재민 오빠랑 진짜 찐하게 연애라도 한 것도 아니고. 눈치 볼 이유가 없잖아?’

생각이 조금 뒤집히니 또 웃기기도 했다. 재민과 몰래 결혼했다가 이혼한 것도 아니고. 그냥 첫사랑, 짝사랑일 뿐인데. 그러니 연호 앞에서 당당하게 굴어도 될 것 같았다.

‘가만히 보니 질투하고 있었네. 웃겨. 애도 아니고. 참 나, 내가 자기 아이까지 가졌는데 아직도 질투해 주는 거 보면 뭐,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혼자 조용히 웃었다. 그제야 조금 마음이 편해지면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 눈을 감았다.

하지만 미주는 전혀 몰랐다. 그때 제 말이 연호의 자존심을 건드려 저를 차지할 덫을 놓게 한 도화선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남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일을 벌일 수 있는지,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알지 못했으니깐.

그래서 겨우 새벽녘쯤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옆에서 연호가 잠든 저를 빤히 보며 밤을 지새웠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다음 날 아침에 연호의 출근 준비를 도울 때 그가 이렇게 말했으니깐 말이다.

“눈이 왜 이리 빨개요? 어제 술을 그리 많이 마시지도 않았잖아요?”

“그러게, 피곤했나 봐.”

“오늘은 일찍 와요. 집에서 맛있는 거 먹고 일찍 자요.”

“그래, 그러자.”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이 내일도 계속 반복되길 미주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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