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20. 빨간 망토의 진심
* * *
“자기, 오늘 조금 늦었네?”
“죄송해요. 어제 늦게 잠들어서 아침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제가 잠 많은 거 아시잖아요?”
미주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희에게 팔짱을 끼면서 살짝 애교를 부렸다.
“그래서 늦은 벌로 제가 여기 선물 하나 가지고 왔어요.”
“어머, 이게 뭐야? 바지 새로 맞춘 거야? 원단 참 좋아 보이는데?”
“역시 우리 관장님, 안목이 탁월하시네요. 호호. 제 거랑 커플로 두 개 먼저 만들었고요, 관장님 보시고 좋다 하시면 관장님 이름으로 주지 스님 법의 한 벌 해 드리려고요.”
“어머, 미주 씨, 진짜 내가 못 당하겠어.”
저를 기특하다는 듯 보는 연희를 미주가 조르듯 재촉했다.
“저 때문에 늦었으니깐, 빨리요. 법회 늦겠어요.”
“그래, 빨리 가자.”
미주와 연희는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서 두 사람이 다니는 사찰의 본당으로 향했다.
“…….”
주지 스님의 목탁 소리를 들으며 두 여자는 자리에 앉아 차분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후 자리에 앉아 염주를 꺼내 빙빙 돌리면서 주지 스님이 나직이 법문 읊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눈을 감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 연희를 미주가 곁눈질로 살짝 보았다. 그녀는 법문을 가슴에 새기는 중인지, 다른 생각 중인지 아득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연호와 법적으로 부부가 된 이후로 말이다. 그 전부터 저를 좋게 보고 있었다는 연희가 이제는 가족이 된 미주에게 친밀감을 표시하며 다가왔었다.
사적으로 올케와 형님 사이이기도 하니, 연희의 접근을 밀어내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돈독하게 지내고 있었다.
지난날, 연호에게 잠시 몸을 의탁했을 때 저를 찾아왔던 연희와 만난 후 그녀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느꼈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적절히 처신하면서 시누인 연희를 깍듯이 대했다.
연희 역시 어떤 꿍꿍이를 가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남동생의 부인을 아끼고 예뻐해 주고 있었다.
“끝났네. 오늘은 살짝 지루할 뻔했어. 물론 스님 말씀 중에서 새겨들을 것도 많지만.”
“저도 비슷했어요. 사실, 졸 뻔했다니깐요?”
길었던 법회가 끝났다.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대웅전 근처를 산책하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침잠 많은 거 나는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해. 나이 들어 봐. 잠도 잘 안 오고 잘 깨고, 뭐.”
“제 평생 고질병이에요, 지각. 어릴 때도 학교 다닐 때 무진장 고생했거든요. 매일 뛰어서 학교 갔으니.”
미주는 한숨을 쉬면서 자책을 하듯 제 허물에 대해 연희에게 말했다.
“근데 있지, 자기 어제 왜 밤에 늦게 잠들었을까? 응? 연호가 안 재워?”
“…아니, 뭐. 그런 게 아니라. TV 보다가.”
뜬금없는 연희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면서 횡설수설했다. 그녀는 알 만하다는 듯 웃으면서 굳이 한마디 더 보탰다.
“아직 신혼이네.”
“네? 아이, 참. 관장님, 자꾸 왜 이러세요. 저 부끄럽게.”
“부부인데 왜? 노력해야지. 여자는 자식이 있어야 해. 그래야 나중에 나이 들어서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거야.”
“…….”
연희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미주 역시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우리 같은 남편을 둔 여자들은 더 그래야 해. 자식이라도 없어 봐. 언제 젊고 여우 같은 년한테 내 자리 뺏길지도 모르는데.”
“관장님은 아직 이리 젊으신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세요?”
“그렇지? 아직은 나, 그래도 쓸 만하지?”
미주가 웃으며 맞장구치면서 슬쩍 그녀를 치켜세웠다. 그러자 기분이 좋았는지 연희는 사람 좋게 웃었다.
“내가 일부러 한동안 이런 말 안 했는데. 미주 씨 벌써 올해 서른한 살이 됐잖아? 늦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빠른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솔직히 나, 조금 걱정하고 있었어.”
“마음 써 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는 거 아시죠?”
연희가 제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옛날로 따지자면 사람 좋은 중전이 세자빈에게 아들을 낳아 대통을 이으라 에둘러 압박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연희는 조카가 생기면 남동생의 자리가 더 굳건해질 수 있다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주는 굳이 그 앞에서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때 유산되고 아직 소식이 없어서… 이런 말을 시누이인 내가 하는 게 언짢을까 봐 말 못 했는데.”
“제가 속으로는 친언니처럼 생각하고 있는 거 아시면서, 꼭 이럴 때는 시댁 사람인 거 티 내시더라?”
미주가 섭섭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흘겼다. 연희도 미주의 손을 맞잡으면서 말했다.
“답답하고 힘든 거 있으면 나한테 털어놔도 돼. 너무 속으로 삭이지 마. 내가 제일 잘 알아, 애가 안 들어서는 그 기분. 알다시피 나는 이제 더는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연희가 살짝 눈물이 맺힌 얼굴로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미주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잇, 이 무슨 청승이야? 아, 몰라. 우리 집에서 밥 먹고 집에 가. 자기 차는 나중에 갖다 놓으라고 할게.”
“네, 그래요.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관장님.”
“참, 2층 인테리어 바꾼다고 수리하고 있어서 조금 시끄러울 순 있어. 괜찮지?”
“네, 괜찮아요.”
미주는 가끔 방문하는 차현 그룹 회장 댁으로 향해 연희와 함께 즐거운 식사를 나누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어질 때 연희에게 안녕을 고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라, 그런 축복이 내게 또 생길 수 있을까?’
멍하게 연희의 기사가 운전해 주는 승용차 뒷좌석에 몸을 기댄 미주가 눈을 감고 지난 일들을 생각했다.
* * *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연호와 함께 동거가 아닌,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못 되었을 때,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있었다.
임신. 제가 임신을 했었다.
피임을 철저히 못 했다 할지라도 생리 주기가 워낙 엉망이니 말이다. 설마하니 그리 쉽게 생기겠냐고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둘이서 술을 진탕 마셨을 때나 뭔가 너무 급해 그냥 이성이 날아간 적도 꽤 여러 번 있었다.
한참 지나서 그때를 생각해 보니 말이다. 그즈음부터 연호의 도움으로 제 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 치료와 상담을 꾸준히 받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정된 상태가 된 것도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했다.
물론 술도 정말 많이 줄였다. 약도 의사의 지시하에 오남용 없이 복용하며 서서히 줄여 나가던 중이었다.
준비 없이 찾아온 새 생명이 얼떨떨하면서도 기뻤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느껴졌었다.
엄마라는 이름이 주는 힘.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크고도 단단하며 무엇도 해낼 수 있는 마법의 단어, 엄마.
“내가 아빠가 된다고?”
그리고 정말 예상 밖이었던, 너무나도 뛸 듯이 기뻐하던 연호의 모습에 미주는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했었다. 미움도 계략도 다 잊고 차연호의 아내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생겼지만 말이다.
하늘은 그런 제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던 것 같았다.
초기부터 유산기가 있으니 절대 안정을 취할 것을 강요받은 덕에 말이다. 연호가 일방적으로 회사를 휴직 처리 해 침대와 한 몸이 되게 만들었다. 미주도 유산기가 있다는 말에 회사원으로서 커리어를 챙기기보단 엄마로서 아이를 지켜 주고 싶어 연호의 행동을 말리진 않았다.
그런데 입덧이 슬슬 시작될 무렵 갑자기 하혈이 시작되더니, 제가 세상에 있었음을 심장 소리와 콩알 같은 초음파 사진으로 남긴 아이는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다.
“아이는 얼마든지 더 가질 수 있으니 지금은 너만 생각해, 제발.”
“내가 못 지켰어요, 우리 아이. 나 때문에, 내가 몸을 술이랑 약으로 엉망을 만들어 놔서.”
“아니야, 네 탓이 아니라고 박사님이 말했잖아.”
깊은 절망감에 자책하며 밤마다 눈물을 흘렸었다. 가슴을 쥐어뜯던 미주의 옆에는 늘 연호가 있었다. 끔찍했던 그 슬픔의 늪을 함께 견뎌 내 준 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미워해야 할 남자라니.
미주의 고통은 연호의 아픔이기도 했다. 슬픔을 함께 이겨 낸 시간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계약보다는 좀 더 평범한 모습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그게 아마 아기가 우리한테 해 준 일이었을 거야.’
그 뒤 종교가 없었던 미주는 연희가 저를 위로한답시고 데려온 이 사찰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마음의 안정을 느꼈었다. 그 후로 연희와 함께 종종 이곳을 찾아 지키지 못했던 첫 아이의 명복과 죽은 희주를 생각하면서 늘 기도를 올렸다.
* * *
‘자기야, 나도 내 속으로 낳은 자식 하나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연희는 진수오 회장의 트로피 와이프나 진배없는 여인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와 연호에게서 우연히 들은 것을 정리해 보면 말이다.
연희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후 아버지의 회사까지 가져간 진 회장에 대해 증오에 가까운 마음을 가진 듯했다. 그런데 진 회장이 많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딱히 그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차현 그룹 안방마님’이라는 타이틀이 곧 그녀의 자존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버티며 동생인 연호가 회장직에 오르는 걸 죽기 전에 보고 싶어 했다.
‘차연희를 잘 구워삶아 놓으면 나중에 나한테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어차피 저도 연호도 그리고 연희도 모두 각자의 욕망을 위해서 서로를 이용하고 있다, 늘 가슴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호와 제가 지금은 일종의 휴전 상태로 연합까진 아니더라도 말이다. 더는 적대적이지 않으니, 연희 역시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나도 참 나쁜 년이야. 사람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다행히 미주의 작전은 어느 정도는 성공인 듯했다. 연희와 친분이 깊어질수록 사적인 이야기들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연희는 진 회장의 사생활과 관련된 여자 문제들도 스치듯 말하곤 했었는데 말이다. 회장님에게는 놀랍고도 비밀스러운 취향이 있었다.
“안 팔리는 연예인이 그 인간 취향인데, 하드한 걸 좋아하나 봐. 여자들이 못 버텨서 자주 갈아치우더라고.”
상상도 못 했던 아버지 친구의 변태적인 섹스 라이프는 나름대로 철저한 합의하에 그리고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듯했다.
“놀라지 마. 글쎄, 남편이 마조히스트인 것 같더라고.”
“……네?”
“그래서 더 열 받아. 미친 새끼, 두들겨 맞는 거로 흥분하다니.”
“아… 전 그냥 못 들은 거로 하고 싶네요.”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자기한테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은 이런 얘기를 하겠어? 아무튼 연호도 몰라. 걔도 남자야. 단속 잘해야 해.”
“네…….”
사실 여자 문제 말고 차현 그룹 내부적인 문제 같은 것도 조금은 옆에서 듣고 있었지만, 백치인 양 바깥일은 모르는 척했다. 물론 그런 저를 연희가 다 간파하고 있는 것까지 계산에 넣어 두면서.
‘친하게 지내도 경계심을 너무 풀지 말아야 해. 나 역시 방심하다가 말실수라도 할 수 있으니.’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피곤했다. 차현 그룹 상무이사의 아내라는 자리도 이미 과분한데, 하루라도 편히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마음이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다.
“작은 사모님, 도착했습니다.”
“아,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5년 전 연호와 처음 밤을 같이 보냈던 다음 날 보았던 차씨 집안의 집사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호와 결혼한 뒤 자연스럽게 ‘도련님’의 집안 살림을 도맡아 주는 연호의 오래된 가신들.
연희와 구분 짓기 위해 저를 ‘작은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인상 좋은 박 집사에게 미주는 늘 깍듯이 인사했다.
“상무님은 오셨나요?”
“네, 조금 전에 들어오셨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저도 들어가 볼게요.”
“네, 작은 사모님. 쉬십시오.”
차고에서 집으로 올라와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섰다. 낯익은 남자 구두가 보였다. 오랜만에 남편이 저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오늘 늦는다더니 일찍 왔네요.”
미주가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연호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조금은 풀어진 편안한 일상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던 연호가 TV를 보다 들어오는 미주를 보면서 대답했다.
“일이 좀 그렇게 됐어.”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저녁 먹을걸. 연락하지 그랬어요?”
“아니, 누나 만난다길래. 둘이서 작당 모의하는 거 방해했다가 내가 무슨 소리 들으려고 간 크게 밥 차려 달라고 하겠어?”
“이야, 누가 들으면 정말 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주는 줄 알겠다.”
장난스럽게 저를 비난하는 미주를 보면서 연호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난 솔직히 아직 누나, 무서울 때가 있거든. 내가 어릴 때 누나는 다 큰 성인이었으니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총 쏘는 거 배웠는데.”
“들었어요, 돌아가신 회장님 취미가 사냥이셨다고.”
“우리 누나, 사춘기에 내가 말 안 들었던 시절에 열 받아서 날 쏴 버린다고 얼마나 무섭게 얘기했는데… 어머니가 혼내 주셔서 망정이지 그때 누나 얼굴은 완전히 귀신이었다니깐.”
“총 쏘고 싶을 정도로 못된 짓을 했겠죠! 나라도 남동생이 지지리 말 안 들으면 진짜!”
저를 보며 웃는 연호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그를 지나쳐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피곤한 얼굴로 드레스 룸 안에 있는 거울 앞에 서서 귀걸이를 빼냈다. 목걸이를 풀면서 치장했던 저를 지워 내고 있을 때였다.
“윤희주가 널 보면서 똑같이 생각했을 수 있어. 말 안 듣는 여동생 진짜 쏴 버리고 싶다고.”
“하긴, 방금 내가 한 말, 오빠가 비슷하게 나한테 말한 적이 꽤 있는 것 같네요.”
“나이 차이 나는 누나랑 오빠를 둔 동생들의 비애지. 참, 절에 갔었다며?”
“응, 열심히 기도했어요. 이제 앞으로 3년 뒤면 계약이 끝나니 무사히 차연호한테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요.”
슬그머니 나타난 연호가 등 뒤에 서서 허리를 살짝 끌어안았다.
“부처님이 응답해 주실까? 내 생각에는 계약이 평생 갈 것 같은데?”
“아, 곧 공소시효가 폐지된다던데.”
미주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연호가 잔향만 남은 그녀의 향수 향을 음미하면서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나는 내일부터 이렇게 빌어야겠네. 제발 빨리 법이 개정되었으면 하고.”
“웃겨, 언제는 죽이니 마니 하던 나쁜 놈이.”
5년이라는 시간. 이제는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복잡한 이야기들을 농담처럼 나눌 수 있을 만큼 편안함을 가지게 되었다. 함께하는 시간 속에 여전히 불안함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만약 지금의 미주에게 누군가가 진우와 연호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하면 미주는 망설임 없이 연호를 선택할 것이다.
그는 이제 가족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주기도 했었던 아이와의 기억도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깐.
“내가 매일매일 널 죽이고 싶어 하는 거 알잖아?”
“유언장에 적어 놓을 거라면서요? 내가 죽으면 윤미주도 순장시키라고.”
“미친놈이 남편이니까.”
“알긴 아는구나.”
연호가 천천히 앞으로 손을 뻗어 와 거울을 보면서 미주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미주가 어깨를 살짝 비틀면서 거울에 비친 저를 째려봤지만, 연호는 아랑곳없이 손을 계속 움직였다.
“나, 씻어야 해요.”
“같이 씻지, 뭐.”
블라우스를 벗겨 낸 연호가 어깨뼈에 입을 맞췄다.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자 미주는 그 감촉에 짧은 숨을 내뱉었다.
“이미 다, …하앗, 씻었으면서.”
“며칠 바빴잖아? 하고 싶어서 급하게 집으로 왔는데 네가 없어 얼마나 빡쳤는지 아냐고.”
브래지어를 툭- 하고 연호가 풀어냈다. 그녀의 어깨에서 달랑거리는 속옷을 능숙하게 벗겨 내면서 양손 가득 가슴을 움켜쥐었다.
“흣……!”
그리고 일부러 보란 듯이 거울 속에 비친 미주와 눈을 마주치면서 가슴을 부드럽게 만져 댔다.
“그거 알아? 지금 너무 섹시한 거.”
뒤에서 밀착한 통에 살짝 앞으로 쏠린 미주가 턱을 조금 위로 치켜들고는 반응하는 게 몹시 색정적이었다. 그것도 거울에 비친 자신들을 보면서 음란한 행위를 한다는 것에 이미 아래는 온통 피가 쏠려 뻐근할 지경이었다.
연호는 미주의 바지를 급하게 벗겨 냈다. 손바닥만 한 레이스 팬티를 끌어 내리고 두 다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봐 봐, 이렇게 벌써 미끈미끈하게 젖었잖아.”
“하읏……!”
몸속에 들어온 두 개의 손가락이 익숙한 동작으로 저를 범하고 있었다. 미주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눈을 반쯤 감았다. 귀를 혀로 빨아 먹고 있는 거울에 비친 연호를 보았다.
저밖에 모를, 이성의 고삐가 풀린 야한 얼굴과 입에서 나오는 더티한 단어가 주는 묘한 쾌감. 늘 언제나 젠틀한 연호가 제 앞에서는 이렇게 짐승임을 숨기지 않아 좋았다.
“미주야, 좋아? 응?”
“응, 좋아. 더 해 줘.”
질척거리는 소리도 소리지만 말이다. 이미 흥분하고 있는 제 얼굴을 본다는 수치심마저 자극적이라 점점 더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윤미주가 이렇게 야한 여자였다니. 여기가 흠뻑 젖어 음탕한 소리를 내는 거 알지?”
“으응, 너 때문에… 하으……, 네가 날…! 이렇게, 하흣! 만들…었잖아.”
한참을 음부에 손가락을 박아 넣던 연호가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렸다. 힘으로 저를 밀듯 욕실로 발을 움직였다. 미주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걸음을 떼며 욕실로 들어왔다.
“씻는다고 하니 모셔 와야지.”
웬만한 집 방 크기만 한 욕실 샤워 부스 안에 연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무드 등만 은은하게 켜진 욕실 안에서 미주의 피부색이 어쩐지 핑크색 같기도 하고 살구색 같기도 해 연호는 입맛을 다셨다.
“아아!”
미주는 떠밀리듯 욕실로 들어왔지만 말이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내벽에 닿는 연호의 손가락이 너무 자극적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힘든 듯 살짝 욕실 벽에 등을 기대자 차가운 타일의 냉기가 등줄기에 오소소 올라왔다.
연호는 미주를 지그시 보면서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그녀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샤워, 해야지.”
온수를 튼 연호가 미주의 허리를 잡고 고개를 숙여 입술부터 찾았다. 미주 역시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에 두 팔을 걸었다. 살짝 입술을 벌려 저를 헤집어 줄 촉촉한 혀를 맞이했다. 혀가 뒤엉키고 타액이 섞일 때 두 사람은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젖고 있었다.
“하아…….”
빨기도 하고 물어뜯기도 하면서 이제는 몸 일부처럼 가지고 노는 서로의 입술과 혀를 탐닉했다. 봉긋한 가슴이 저를 끌어안은 단단하고 너른 가슴팍에 눌러지면서 유두가 닿을 때 연호가 더 세게 안았다.
미주가 제 아랫배 어딘가에 닿는 뜨거운 물체를 목을 안고 있던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만졌다. 한 손에 다 잡히지도 않는, 잔뜩 발기해 있는 페니스를 쥐고는 천천히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흥분한 두 남녀가 내뿜는 열기에 더 불을 붙이는 온수의 습도가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벌써 커지면 어떡해?”
숨을 쉬기 위해 살짝 입술이 떨어졌다. 미주가 올려다보면서 반말로 도발하자 연호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내 좆은 너한테만 서니깐.”
“나한테만 서니깐 이렇게 만져 주잖아.”
“만지는 거로는 만족 못 하겠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주가 왼쪽 눈썹을 한 번 올렸다. 그러더니 페니스를 향해 몸을 천천히 아래로 숙이며 자세를 낮췄다.
“그럴 것 같아서 빨아 주려고.”
“음…….”
연호가 샤워기 레버를 잠글 때, 제 물건이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미주는 능숙한 동작으로 입술을 벌려 페니스를 담고는 몸을 앞뒤로 조금 흔들듯 움직였다. 목구멍 깊이 넣었다가 또 입술까지 빼며, 연호를 빨아 먹었다. 혀끝을 세워 부드러운 귀두를 사탕을 핥듯 핥기도 했고, 그 끝의 갈라진 틈을 괴롭히기도 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펠라티오를 연호가 황홀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손을 뻗어 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안에 갈무리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젊고 아름다운 부부는 두 사람만이 아는 육체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으, ……흡!”
연호가 머리카락을 움켜쥐자 미주는 입을 좀 더 크게 벌리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연호가 허리를 움직이면서 머리를 잡고는 입안으로 페니스를 깊게 밀어 넣었다. 입가에 그의 체모가 닿았지만, 연호는 마치 짓이기듯 미주의 머리를 아래에 비벼 댔다.
숨이 막힐 듯이 너무 깊게 들어온 페니스가 연구개를 건드리는 통에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말이다. 미주는 그의 허벅지를 잡고 견뎌 냈다.
“씨발, 이렇게 잘 빠는데 내가 어떻게 널 놔주겠어?”
미주는 속으로 웃으면서 딱 이 순간만 저를 함부로 대하는 남자의 일방적인 움직임에 기쁜 듯이 동참했다.
그와 함께하면서 알게 되고 느끼게 된 성애의 환락 속에서 연호는 결코 강압적인 섹스를 요구한 적 없었다.
딱 한 가지, 오럴 섹스를 할 때만큼은 연호가 숨겨진 포악한 기질을 채우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수컷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제 암컷에 대한 정복욕과 소유욕, 그리고 집착을 이런 식으로 푼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그의 사심을 채울 수 있게 저를 잠시 놓았다. 입에 페니스를 거칠게 박아 넣는 행위에 미주는 완벽하게 동의해 주면서 이 터프한 시간을 즐겼다.
“읍……!”
연호는 미주의 머리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지만 말이다. 혹시나 힘들어하는 건 아닌지 계속 잘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이성보다 제 욕구가 조금 더 앞선 상태라, 미주가 조금만 더 견뎌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멋대로 굴었다.
“해도 돼?”
“…….”
미주가 눈을 깜빡이며 괜찮다는 사인으로 답했다. 연호는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타액이 턱으로 흘러넘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좀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래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주는 쾌감도 좋았다. 하지만 제 여자를 무릎 꿇게 하고 저만 바라보게 하면서 제 것을 쑤셔 넣는 포르노가 주는 아찔함도 좋았다.
“씨……!”
짧은 탄성을 중얼거리며 아내의 입안에 하얀 것을 쏟아 냈다. 끝을 본 덕에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된 미주가 여전히 식지 않은 채 빠져나가는 페니스를 보면서 꿀꺽하고 체액을 삼켰다.
“미안하다면서 어째 자주 입에다가 하는 사람은 누굴까나.”
“변태라서 그래. 어쩌겠어? 남편이 이런 놈인데.”
연호가 미주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미주가 저를 배려해 삼킨다는 걸 알기에 연호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키스를 다시 퍼부었다. 아래도 제 정액으로 늘 범벅을 만드는데, 입안에 비릿한 내음이 남는 게 뭐가 대수냐는 듯 연호가 미주의 혀를 삼켰다.
“음, 간지러. 으읏.”
“간지럽다고?”
미주는 다시 달뜬 숨을 토해 냈다. 연호는 천천히 동그란 턱을 빨다가 목덜미를 물기도 했다. 가슴으로 내려온 남자의 혀가 당연하다는 듯 유두를 살짝 핥았다.
“흐응…….”
핑크빛 작은 것을 이로 깨물자 그녀의 몸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풍만한 가슴을 혀로 쓸다가 유두를 계속 잘근 씹어 댔다. 미주가 살짝 몸을 떨면서 자극에 반응했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간 남자의 입술이 오목한 배꼽을 혀로 세워 날름거리자 여자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하아……!”
미주가 자세를 낮춘 연호를 게슴츠레하게 내려다봤다. 저도 모르게 갈증이라도 난 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내가 씻겨 줄게.”
뭔가 눈을 반짝이는 듯한 연호가 제 몸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또 무슨 야한 생각을 하는 건지. 제 팔을 끄는 연호를 따라 마지못한 척, 텅 빈 커다란 월풀 욕조로 향했다.
“욕조 물 받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그러니깐, 천천히 즐길 시간이 있는 거잖아.”
연호가 이끄는 대로 욕조로 들어온 미주가 자연스럽게 레버로 손을 뻗었다. 물을 틀자 그가 저를 욕조 가장자리로 슬쩍 밀었다.
“아, 뭐 하려고…….”
미주의 어깨를 잡은 연호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오른손으로 등을 지그시 누르면서 야한 목소리로 말했다.
“엎드려 봐.”
쏟아지는 물이 욕조를 채우고 있을 때였다. 미주는 몸을 타의 반 자의 반으로 기역으로 만들었다. 욕조 가장자리를 화려하게 감싸고 있는 차가운 대리석에 가슴이 닿았다. 상체를 완전히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 연호가 몸을 대어 왔다.
“아읏! 하아… 흣……!”
탄탄한 남자의 허벅지가 제 허벅지를 벌리더니 단단한 것이 비부를 비비면서 마찰시켰다.
“여기, 정말 부드러워.”
연호가 페니스를 잡은 채 귀두 끝만 갈라진 틈에 비비자 정말 자극이 심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나마 흐느낌 같은 신음도, 연호의 음탕한 말들도 쏟아지는 물소리에 어느 정도 묻히고 있어 다행이었다.
“아, 제발. 아으읏……!”
움직임을 멈춘 단단한 남자의 중심에 이어 이번에는 섬세한 움직임을 가진 혀가 그곳에 닿았다.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음부를 향해 무릎을 꿇고 미주의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연호가 커닐링구스를 해 주었다. 엎드려 있어 아래로 위치한 클리토리스를 살짝 손으로 벌렸다. 연호가 혀끝에 힘을 주고는 조금 빠르게 빨자 미주는 발끝을 세우며 움찔거렸다.
“아, 너무 맛있어. 정말 예뻐, 미주야.”
“으흣… 좋아, 정말 죽겠…….”
위아래로 혀를 쓰며 깊게 속살 사이로 파고들기도 했다. 얕게 핥기도 하면서 연호는 미주의 혼을 빼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입구에 혀를 밀어 넣으면서 가장자리를 괴롭히자 미주가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쾌감을 느낀 듯했다.
연호는 혀를 떼어 내면서 두 손으로 엉덩이를 좀 더 넓게 벌렸다. 핑크빛 꽃잎이 파르르 떨리면서 움찔거리는 걸 보는 게 좋았다. 그리고 페니스가 박히는, 깊고 뜨거운 수렁을 숨긴 입구가 살짝 움직이면서 붉은빛 속살을 보여 주는 모습이 저를 미치게 했다.
물론 미주는 그런 저에게 변태니 도착자니 하면서 질겁을 했지만, 연호는 뭐 어떤가 싶었다.
“부부 사이에 못 할 짓이 뭐 있어? 네가 느끼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는데.”
“응? 뭔 말……?”
갑자기 혼잣말하던 연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혀를 갖다 대었다.
“아앗! 안 돼, 거긴. 흡!”
가끔 술을 마셔 살짝 이성이 느슨해진 채 섹스를 하다가 후배위를 취할 때, 그가 손으로 그곳을 만졌던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생경한 감각이 주는 낯섦과 미묘한 쾌감.
입구를 연호가 손으로 꾹 누르거나 만지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야릇함에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위험한 감촉이 지금 부드러운 피부 넘어 전해지고 있다니!
“으응, 으읏! 하아! 흣……!”
촘촘한 주름 사이로 뜨거운 타액과 더불어 도톰한 혀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미주는 정말 기절할 것만 같았다. 이미 욕조를 채운 온수는 허벅지까지 올라왔지만, 연호는 물을 잠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를 빠니깐 여기가 꿈틀대는 게 보여. 봐, 좋잖아?”
“아, 그만! 너무 세요, 느낌이…….”
‘여기’가 어디고 ‘여기’가 어딘지 모를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남편이 선사해 주는 희열을 만끽했다. 그러다 조금 아래로 내려간 연호의 혀가 ‘그곳’과 ‘그곳’ 사이에 있는 회음부로 향하자 미주는 이제 죽겠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그만! 그냥 넣어 줘. 더는 못 하겠어…, 아으흣……! 너무… 무서워.”
하지만 연호가 제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미주가 무서운 쾌락을 느끼자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연호가 몸을 떼어 냈다.
“이젠 나도 못 참겠어.”
물을 잠근 연호가 욕조 밖으로 나가더니 욕실 문을 열었다. 상대적으로 차가운 실내 공기가 욕실로 들어왔다.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열기가 조금 희석되고 있었다.
연호가 늘어지다시피 엎드린 미주의 허리를 안아 세우며 욕조 끄트머리에 앉았다. 녹아 흐물거리는 미주를 허벅지에 앉히고는, 땀인지 물인지 흠뻑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면서 물었다.
“미주야, 좋지? 널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나뿐인 거지?”
가끔 연호가 섹스하던 중에 어린애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었다. 뭔가를 자꾸 확인하려고 하는 그의 심리를 알 듯 말 듯 하지만, 미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확인시켜 주었다.
“응, 차연호 너뿐이야.”
그러면 기쁜 듯 연호가 꼭 눈꺼풀에 키스하고는 더 격정적으로 격렬하게 박아 넣었으니깐.
미주의 둔부를 살짝 들어 올린 연호가 빳빳하게 서 있는 페니스를 몸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도 만지고 빨아 댄 탓에 달아오른 그곳은 마치 용암 속같이 뜨거웠다.
“씨발, 이렇게 뜨거운데 조이기까지 하면.”
서로의 몸에 맺힌 수증기와 땀이 흘러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아래가 결합되면서 나는 소리만 못하고 있었다. 엉덩이를 잡고 미주를 사정없이 앞뒤로 흔들자 꿈틀거리는 내벽이 주는 감촉에 연호 역시 뒷골이 당길 정도로 짜릿했다.
“아… 하앗, ……흐읏!”
연호가 허리를 들썩이면서 페니스를 마구 찔러 대고 있었다. 조금 위험할 수 있는 욕실에서, 그것도 욕조 끝에 앉아 이런 짓을 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쩐지 묘한 불안감에 미주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잔뜩 야한 표정을 지으니 꼴려서 발딱 설 수밖에.”
들썩이는 어깨와 흔들리는 가슴, 그리고 눈썹을 찡그리면서 모든 감각을 섹스에만 쏟는 미주가 너무 좋았다.
“흐응, 아…… 으응……!”
그리고 쫄깃하면서 꽉 물기도 하고 느슨하게 푸는 척하면서 더 옥죄어 오는 은밀한 근육이 주는 쾌감이 엄청났다.
연호는 더욱더 그녀를 그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다 여겼다. 몸도 마음도 모두 저만 아는 것처럼 살아가길 바라면서 연호는 마지막 피치를 올렸다.
“아!”
몸을 쑤셔 대는 연호의 흉기 같은 페니스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면서 저를 먹어 댔다. 너무 오래 애무를 받은 탓인지 벌어진 틈으로 깊숙하게 찔러 대는 남근이 경부까지 닿았다. 그러다 연호가 허리를 꽉 잡고 하체를 비비듯 움직이자 맞물린 성기가 찔걱거리는 소리만 냈다.
“씨발.”
관자놀이가 튀어나온 연호가 더 세게 꾸욱 몸을 눌렀다. 고개가 제멋대로 뒤로 젖혀지며 뜨거운 파도 같은 절정이 몰려왔다.
“…아아, 으으흣!”
엉망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곳이, 페니스를 잡고 놓지 않았다. 연호 역시 더는 참지 못하고 허리를 위로 튕기듯 몸속으로 저를 박아 넣으면서 파정을 했다.
“…이러다 우리 죽겠어요. 욕실에서는 이제 안 할래.”
몸을 기댄 미주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연호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문 열어 놨잖아? 전에 한번 네가 숨을 못 쉬어서.”
“이럴 거면 욕조 물을 왜 받았어요? 물이 식는데…… 난 가끔 당신이 이해가 안 돼.”
“말했잖아. 씻겨 준다고.”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힘이 없는 저를 연호가 들어 올리자 페니스가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
미주가 엉거주춤 그의 어깨를 짚고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자세가 되었을 때, 안쪽에서 정액이 허벅지로 조금씩 흘렀다. 이어지는 연호의 나쁜 손이 그곳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이 제일 좋아. 내가 하고 난 뒤에 다시 만지는 거.”
“아, 하지… 너무… 너무 느낌이 세서, 힘들…….”
몽글한 점성을 지닌 정액이 그녀의 체액과 뒤섞여 희뿌연 빛을 띠면서 끈적였다. 비틀거리는 미주의 두 다리 사이에서 손을 움직이면서 짙은 후희를 선사해 주며 깊게 서로를 느꼈다.
사실, 유산한 이후로 뭔가를 이야기하고 합의한 건 아니었다.
아픔을 겪은 미주가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다시 저를 받아 주게 되었을 때부터 연호는 피임 따위를 해 준 적이 없었다. 미주 역시 그전에는 콘돔이든 무엇이든 피임을 요구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없었다.
계약이고 허울뿐이라 해도 부부이기에 슬픔을 이겨 낸 뒤 같은 것을 원하는 마음.
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처음엔 실수로 천사를 내려보냈다는 듯, 아직 다음 기회를 주지 않았으니깐.
차연호와 윤미주 모두 감히 ‘결혼’이라는 신성한 행위를 각자의 욕구와 욕망을 위해 이용하려 했다는 걸 하늘은 아직 용서하지 않은 듯했다.
미주는 기나긴 섹스를 끝내고 욕조에 몸을 반쯤 뉜 채 몸을 씻겨 주는 연호를 물끄러미 보았다.
‘난 차연호를 사랑하지 않아…… 그리고 사랑하지 않을 거고.’
매일같이 수십 번도 넘게 되뇌는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 말.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것같이 저를 속일 수 있다,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알고 있었다. 사실은 제가 빨간 망토 소녀이고 어느새 저를 유혹한 늑대인 연호를 사랑하고 말았다는 걸. 그래서 저를 구해 줄 사냥꾼인 진우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면 미주가 꿈꾸는 동화 속 빨간 망토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 될 테니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