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별편 - 요한 가라사대 (21/53)

특별편 - 요한 가라사대

* * *

남자로 태어나서 한 번쯤은 영화 같은 인생을 꿈꿔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제임스 본드나 제이슨 본 같은 멋지고 섹시한 스파이면 좋을 텐데. 슈트를 빼입은 스파이, 비밀 요원. 스스로 생각해 봐도 멋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첩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전형적인 한국식 조폭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내 인생이 깡패 영화라면 이왕 비트의 정우성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토바이도 멋지게 타고 고소영 같은 여자와 찐하게 연애도 좀 해 보고.

슬프게도 나는 그저 그런 삼류도 아니고 한 오류쯤 되는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흔하디흔한 공부를 잘하던 모범생의 인생이 꼬이게 된 계기.

엄마, 그리고 도박.

아, 인사를 먼저 해야지.

내 이름은 이요한.

차현 그룹 본사 비서실 과장.

일명 서진우의 왼팔이라고 불리는 남자.

흠흠, 아무튼 다시 내 과거로 돌아오자면 말이다.

그러니깐 내가 과학고 2학년이었던, 카이스트 조기 입학을 앞뒀던 때였다.

우리 엄마는 정말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자식을 똑똑하게 잘 키워 내 동네에서 ‘과학고 다니는 요한이 엄마’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그냥 아줌마.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전반적으로 여유가 조금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였다.

팔자 좋은 아줌마들이 남편 출근시키고 애들 학교 보내고 집안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그네들끼리 모여서 재미 삼아 고스톱을 쳤다고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비슷비슷한 형편의 아줌마들끼리 고스톱을 쳐 봤자 뭐 얼마나 크게 판돈을 걸고 쳤겠는가? 점심 내기, 커피 내기, 저녁에 술 한잔 사기, 이런 거였겠지.

그런데 동네 아줌마들의 시간 보내기 화투에 전문적인 꾼이 스며들었다.

내가 엄마한테 들었던 기억이 맞는다면 말이다. 우리 앞 동에 새로 이사 온 아줌마가 자연스럽게 동네 목욕탕에서 기존의 우리 아파트 아줌마 무리와 친해지면서 화투판에 끼어들었다고 했다.

“여보, 글쎄 있지, 지금은 남편이 배 타러 나가서 혼자 심심하다고 우리랑 어울리는데 사람이 괜찮더라고.”

언제고 식탁에서 엄마가 그 여자에 대해 아빠한테 이야기했던 게 기억났다.

얼마 후 배 탄다는 그 여자의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음 일까지 시간이 남는 동안 아내를 따라다니며 동네 아줌마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 남편이라는 남자는 아줌마들의 고스톱 판에 끼여서 저도 같이 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남편의 친구라는 작자도 나타났다고 했다.

그렇게 스리슬쩍 아줌마들의 놀이에 스며든 전문적인 타짜, 또는 꾼들.

그들이 이사를 오고 불과 1년 만에 우리 아파트는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노름빚을 지게 된 아줌마들.

가족들 명의로 대출을 받거나 집을 담보로 잡은 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 우리 엄마처럼 악질 사채업자의 돈을 빌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엄마는 ‘미안하다’라는 네 글자만 남기고 거실에서 뛰어내렸다.

하필이면 우리 집이 17층이라 엄마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즉사해 버렸고 엄마의 빚은 고스란히 아빠와 내 몫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죽었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다. 그냥 사채도 아니고 악질인 놈의 돈을 빌린 덕에 엄마가 죽었어도 우리는 그 채무를 갚아야만 했으니 말이다.

법에 호소해 보려고 해도 세상은 생각보다 나쁜 놈들의 손을 들어 주는 경우가 많아 아빠와 나는 절망했었다. 구둣발로 집 안으로 들어와 돈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통에 경찰을 불러도 그네들은 이미 다 한통속이었다.

그렇게 집을 팔고 차를 팔고 전 재산을 팔아도 엄마의 빚은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심지어 놈들은 내가 아직 팔팔한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이용해 이렇게까지 말했다.

“신장 하나 떼 주면, 원금에서 2,000 제해 줄게. 한번 생각해 봐.”

솔직히 정말 진지하게 신장을 팔까 생각하긴 했었다.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집도 없이 찜질방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면서 겨우 죽지 못해 살고 있었으니깐.

아, 그 중간에 아빠가 화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했었나? 깜빡 잊고 안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데 이런 말 있지 않은가?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계속 각막이나 신장을 팔자고 말하는 그들에게 나를 팔기로 마음먹었다.

“아저씨, 나 과학고 다녔어요. 아이큐 150도 넘고 엄청 똑똑하다는 이야기 많이 듣고 살았어요. 신장보다는 내 머리가 더 크게 아저씨한테 돈 벌어다 줄 것 같은데 어때요? 차라리 내 머리를 사는 거는요?”

대체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보던 그 얼굴이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랐다.

“토토, 주식, 이런 거 할 줄 알아요. 고등학생 모의 주식 투자 대회 같은 것도 경험 있고.”

나는 그렇게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만에 엄마 빚의 몇 배를 그들에게 벌어다 주었다. 불법 토토 승률 예측이라든지, 주가 조작을 하는 세력을 파악해 은근슬쩍 티 안 나게 따라붙는 이런 거.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실체 없는 어마어마한 돈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이미 나를 저들과 한패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놈들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언젠가 놈들의 뒤통수를 치고 한탕 크게 해 먹고 해외로 도망갈 생각이었으니깐.

엄마를 자살로 내몰고 아빠를 죽게 만든 원한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여겨 몸을 낮추고 그들 몰래 내 몫을 챙기면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렇게 책상에 앉아 그래프를 열심히 보던 그 시절에, 꽤 흥미로운 포물선을 발견했었다.

‘차현 중공업, 주가가 좀 이상하게 흐르는데?’

그때만 해도 차현은 큰 기업이긴 해도 재벌이라고 부르기는 좀 모호한 포지션을 가진 회사였다. 10대, 20대 재벌에는 아예 명함도 못 내밀었고 30대까지 확장해서야 겨우 끼워 줄까 말까였으니깐 말이다.

‘이것 봐라, 누가 이거 장난질하고 있어.’

차현 그룹 산하 차현 중공업이 이제 막 상장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3일 정도 차트를 분석하면서 차현 중공업에 대한 정보, 일명 찌라시를 모았다. 차현 중공업 주식에 작전 세력이 붙었음을 눈치채고는 개미들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개미들이 주식을 살 때 나는 팔고, 팔 때 샀다.

당연하겠지만 저쪽에도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 나보다 더 똑똑한, 나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 내가 그들이 바라는 흐름대로 따르지 않고 분탕질을 치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보다 무서운 놈들을 건들고 말았다는 걸 나도, 엄마의 도박 빚을 씌웠던 쩐주들도 몰랐다. 아무리 지하 세계에서 날고 기는 놈들이라고 해도 권력의 힘으로 보호받고 있는 놈들은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툭 까놓고 말해 그 작전 세력이 차현 중공업의 대주주이자 차현 그룹의 회장인 남자인데 어떻게 도박판과 불법 토토에서 깔짝거리는 놈들이 대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정말 뜻하지 않게 죽이고 싶었던 원수들을 남의 손을 빌려서 죽이게 되는 통쾌함을 맛봤다. 물론 저들이 보기에는 나 역시 놈들과 한패였으니 말이다. 나도 어디론가 끌려와 거의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는 지옥 문턱 바로 앞에까지 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 남자를 만났다.

“잠시 이 친구랑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 남자는 한 마리 자칼과 비슷해 보였다. 그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투성이가 된 내 얼굴을 가볍게 닦아 주고는 말했다.

“묶어 놓은 것도 풀어 주고. 재민이 빼고 다 나가 봐.”

의자에 결박되어 있던 나는 겨우 신체의 자유를 얻었을 때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남자를 그제야 자세히 보았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을 가진 그 사람의 왼쪽 눈 밑 점이 그의 무서움을 희석해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였다.

“담배 한 대 피울래?”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죽기 전에 담배 한 대 피우고 죽는 것도 꽤 멋질 것 같았으니깐. 그가 건네는 담배를 입에 물고 린치를 당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한 모금 깊게 연기를 마셨을 때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나처럼 학창 시절에 공붓벌레였을 것 같은 안경을 쓴 이지적인 남자. 나를 왜 살려 뒀는지 궁금해질 때 앞에 앉은 눈물점이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요한, 네 이력이 독특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 너도 피해자인데 결국 가해자가 된 아이러니가 꽤 흥미로웠어.”

“…죗값은 죽어서 치르겠습니다.”

그래, 나 역시 알고 있었다. 빚을 갚기 위해 저질렀던 일들이 누군가의 가정을 파탄 내고 죽음으로 이르게 했을지 모른다는 것. 차라리 몰랐다면 이토록 괴롭지 않았을 텐데, 나쁜 놈이 되기에는 조금 물렀던 걸까?

나를 죽이겠다는 절대 권력을 가진 것 같은 이들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뜻밖의 제안을 그가 해 왔다.

“우리 일을 망쳐 놔서 솔직히 너도 죽이고 싶은데, 이대로 죽이기는 좀 아까워서 말이야. 어때? 나랑 같이 일해 보지 않겠어?”

지나서 생각해 보면 말이다. 서 실장이 그때 나를 살려 준 건 아마 내게서 자신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이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정 팀장의 도박꾼 아버지 이야기.

내 능력을 높이 평가한 동시에 내 짧은 인생에서 그들의 고단하고 치열했던 부산에서의 과거를 보지 않았나 싶었다.

나는 그가, 아니 서진우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죽기에는 세상에 너무 미련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서 실장의 사람이 되어 어둠을 벗어나 햇빛이 쏟아지는 여기 차현 그룹 비서실에 앉아 있게 되었다.

“요한쓰, 밥 먹었쓰?”

“…….”

“웃기라도 좀 해라, 새끼야. 이러면 내가 민망해지거든?”

물론 처음에는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던 서 실장이 이제는 나를 너무 괴롭혀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서 실장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어 나는 어떤 의미로 그의 총애를 받는 게 뿌듯하기도 했다.

* * *

그렇게 내가 그를 위해 일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였을까?

“요한아, 네가 내 동생 뒤치다꺼리 좀 해 줘야겠다.”

“아, 네, 알겠습니다.”

“동생이 이사한다고 해서 힘 좀 쓸 놈들이 필요하거든.”

아니, 이사를 해야 하면 이삿짐센터를 부르면 될 것인데 말이다.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들었다면 회사 부하를 사적으로 부려 먹는 악덕 상사라고 다들 서 실장을 욕할 것이다.

우리 비서실 직원들은 말만 회사원이지 사실상 서 실장의 용병단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랬기에 충성을 하며 밤낮없이 그를 위해,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서초동으로, 재민이가 주소 알려 줄 거야. 가시나, 어찌나 툴툴대는지.”

그에게 동생이 있는 줄 처음 알았던 그날, 그녀를 처음 만났다.

‘배다른 동생인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는 얼굴은 매우 예쁘지만 조금은 우울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사연이 가득한 무표정한 얼굴. 솔직히 그녀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돌을 보듯 담담하게 대했다.

‘미주 씨는 윤씨고 실장님은 서씨인데, 동생이라.’

서 실장의 부모님 재혼으로 생긴 동생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에게는 동생이라고 속인 서 실장의 여자이지 않을까 하는 소설을 써 보기도 했었다.

‘설마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여자랑 실장님이?’

상사의 사생활을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에 서 실장은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성숙한 여자를 더 선호하는 타입이라 여겼기에 나는 그녀와 서 실장이 뭔 사연이 있겠지 싶어서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미주 씨에게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왜냐면 그때 왜 그렇게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가졌었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처음 봤을 때 그녀에게 살갑게 대해 주지 못한 게 뭔가 가슴에 남아 지금은 정말 친해진 그녀에게 잘해 주려고 늘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막 이렇게 커졌는데 있죠.”

가끔 서 실장의 지시에 따라 미주 씨와 만날 때면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는 명랑한 모습으로 나와 수다를 열심히 떨곤 했다. 그래서 나는 서 실장과 정 팀장이 그녀를 볼 때마다 처음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가 나중에는 시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게 이해가 되어 웃기도 했었다.

아무튼, 내가 윤미주라는 여자와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주, 영화 보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이 없단다. 요한쓰, 출동.”

서 실장이 그녀의 주변에 붙여 놓은, 비서실 직원들 때문에 이미 나는 미주 씨의 일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학교와 집만 오가는 단조롭고 단순한 일상.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학교 친구가 없었는지 언제나 혼자 다녔는데 차마 영화까지 혼자 보고 싶지는 않았던 걸까?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일이 일어난 지 채 3년도 되지 않았던 그즈음, 나는 미주 씨가 어두운 곳에 혼자 가는 걸 두려워하는 줄 몰랐다. 그저 영화 볼 친구 하나 없는 왕따나 당하는 여자애로 마음대로 생각하고 상사의 지시에 따랐다.

“그게 있죠. 원래는 오빠들이랑 같이 보기로 했는데 다들 바쁜데, 그러니깐 저는 이걸 또 영화관에서 꼭 보고 싶기도 했고.”

저 때문에 이곳에 끌려오다시피 한 내게 미주 씨가 미안한 마음에 주절주절 묻지도 않은 말을 앞뒤도 안 맞게 해서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콜라랑 팝콘 어때요?”

“…콜라 말고 사이다요. 팝콘은 캐러멜 뿌려진 거 좋아하는데 살찐다고 오빠가 맨날 뭐라 해요.”

그날 이후로 우리는 적당히 거리감이 있는 선에서 꽤 친해지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미주 씨’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녀는 나를 ‘요한 씨’라고 불렀다.

조금 편해진 우리 사이를 알았는지 서 실장은 가끔 바빠 그녀를 챙기지 못할 때 나를 그녀에게 보내 저 대신 챙기게 했다.

* * *

시간은 계속 흘러 우리 비서실이 점점 더 나 같은 흉악한 놈들로 채워지면서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어제 둘이 싸웠어?”

“완전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 미주 씨도 한 고집 하고 실장님도 똥고집 장난 아니니 죽어라 싸우는 통에 팀장님이 옆에서 눈치만 봤지, 뭐.”

나와 비슷한 시기에 비서실에 들어온, 서 실장이 나처럼 어디선가 주워 온 도균이 어제 저와 함께 넷이서 마셨던 일을 말하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서 실장이 지랄 염병을 하며 미주 씨를 쥐 잡듯이 잡았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난 못 보낸다! 우리 모개 캐나다고 나발이고 거기 못 가. 얘 아직 코 찔찔 어린앤데 어딜 혼자 간다고.”

“스물세 살 보고 어린애라고 하면 형은 그럼 사춘깁니까?”

“정재민, 이 새끼! 너 미주랑 편 먹었지? 이것들이 나만 빼놓고 지들끼리 이미 작전 다 짰어.”

“영어 공부하고 싶다는데,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1년 보내서 실력 늘어 오면 좋잖아요?”

누가 봤으면 미주 씨가 캐나다가 아니라 지구를 넘어서 어디 화성이라도 혼자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근 한 달간 이어진 정 팀장과 미주 씨의 합동 공격에 서 실장은 결국 꼬리를 내렸고 울며 겨자 먹기로 캐나다행을 허락해 주었다.

“모개야, 울지 마. 쪽팔려.”

고작 1년 외국에 나갔다 오는 건데도 이산가족이 헤어지듯 공항에서 뚝뚝 눈물을 흘리는 미주 씨의 등을 서 실장이 출국장으로 떠밀고 있었다.

“오빠앙…… 으앙! 잘 있어.”

누가 보면 다시는 못 만날 것처럼 보일 거창한 이별이라 이런 우리를 흘낏 쳐다보는 시선에 내가 다 쪽팔리고 있을 때였다.

“히잉, 우리 오빠들 잘 부탁해요. 사… 흐흑, 사고 못 치게 잘 감시…하고. 흑…….”

누가 누굴 보고 지금 감시하라는 건지. 눈물 콧물을 쏟으면서 미주 씨가 손을 흔들며 출국장으로 사라질 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우리 서진우 실장님의 소매가 눈가로 향했던 것을. 물론 그가 진짜 운 건지 땀을 닦은 건지 영원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거 가지고 이 난리면 미주 시집이라도 가면 아주 대성통곡을 하고도 남겠네요.”

“야, 내 눈에는 너도 아까워. 우리 모개가 시집이라니. 아이고, 미주야.”

두 사람이 별생각 없이 주고받았을 그 말에서 나는 그녀와 정 팀장의 관계가 서 실장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요한쓰, 이거 봐 봐. 우리 모개 나이아가라폭포 놀러 갔다고 사진 보내 줬는데 오래간만에 활짝 웃었네.”

먼 이국땅에서의 그녀는 한국에서보다 더 환하고 밝았으며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캐나다에서 미국인 마이클 씨라든지, 영국인 제임스 씨 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져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그럴 수만 있었다면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은 거기서 멈출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르바이트할 거야. 우리 아파트 앞에 카페 새로 생겼는데 알바 구하는 것 같더라고.”

“모개야, 너는 내가 용돈도 충분히 주는데 뭐 하려고 사서 고생이냐? 응? 미주야, 그냥 곱게 곱게 있다가 재민이한테 시집이나 가.”

“아, 정말 싫다. 온실 속 화초. 누가 내가 사는 비닐하우스 좀 찢어서 꺼내 줬으면.”

“말본새하고는. 싸가지없는 건 어째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냐?”

그녀가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그들은 싸우기 바빴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듬뿍 깔린 게 느껴져 어째 한층 더 격렬하게 싸우는 둘을 보면서 나도 정 팀장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러고 말겠지, 이런 표정으로 말이다.

* * *

그날은 서 실장이 심부름을 시켰던 날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전하고자 했던 게 뭔지 이제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말이다. 미주 씨한테 오늘까지 가져다줘야 한다고 안 주면 난리 칠 테니 저를 대신해 좀 가 달라는 거였다.

이제는 그날 서 실장이 피보다도 진한 인연으로 묶인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텔레파시 같은 게 느껴져 나를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쁜 예감, 불길한 느낌. 아마도 그는 그걸 느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진 회장 때문에 발이 묶인 저를 대신해 나를 보냈던 건데, 나는 보고야 만 것이다.

분명히 집에 있는데 그녀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한 시간 가까이 정말 골백번도 넘게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어, 결심하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거 너, 나, 그리고 재민이 셋만 아는 거다. 혹시라도 무슨 일 있을 때 열고 들어가야 하니깐.’

‘…그래도 어떻게 두 분도 아니고 제가 미주 씨 집에 마음대로 비번 눌러서 들어가…’

‘미주, 부산에서 납치당한 적 있다.’

내 말을 자르면서 그가 알려 준 놀라운 사실에 바로 수긍을 해 버렸다. 서 실장이 불법적으로 알아낸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내게 알려 준 건 나를 완전히 믿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늦은 밤에 들어간 그녀의 집에서 TV 소리가 시끄러운 거실 바닥에 쓰러진 모습으로 반쯤 눈이 돌아간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미주 씨를 보았다.

“미주 씨!”

“요한… 화장대… 위에… 약…….”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고는 물과 함께 하얀색 약통을 찾아 건넸다. 생각보다 약효가 빨리 돈 건지, 그녀가 초인적인 힘으로 정신을 가다듬은 건지.

나를 보는 그녀의 돌아갔던 눈동자가 생각보단 빨리 제자리를 찾은 듯해 한숨을 쉬면서 이불을 잘 덮어 주었다.

“내가 왜 이런지 궁금하지 않아요?”

만약 서 실장에게 그녀가 납치를 당했었다는 사실을 듣지 않았다면 분명히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미주 씨, 어디 아파요? 병원에 가요. 실장님한테 알릴게요.’

하지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내게 그녀는 왜 가만히 있는지 알겠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요한 씨 기다리면서 TV 보고 있었는데, 나는 몰랐어요. 그 영화가 그런 내용인 줄.”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녀는 그저 웃으면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한테는 절대 비밀로 해 주세요. 이거까지 알면 오빠가 감당 못 해요.”

“…….”

“세상은 몰라도 되는 일이 많기에 평화롭지 않을까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조금 편해진 얼굴로 잠이라도 자려는 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요한 씨가 내 친구라고 나는 늘 생각했거든요.”

“나도 미주 씨를 동생처럼, 친구처럼 늘 생각해요.”

“아, 맞아. 사실은 오빠지. 근데 진우 오빠는 내가 다른 남자한테 오빠라고 말하는 거 엄청나게 싫어해요. 그래서 다 누구누구 씨라고 일부러 오빠 앞에서 말하잖아요.”

“알겠으니 일단 자요. 오늘 일은 나도 모르는 일이니깐.”

집으로 돌아와 문득 생각나 검색해 본 그녀가 TV에서 봤다는 영화 제목. 늦은 밤에 그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고 미주 씨가 아팠던 이유를 검색해 본 뒤에 알게 되었다. 궁금했던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 나는 그날 밤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실장님이 모든 걸 오픈한 게 아니었어.’

서 실장은 그녀가 ‘납치’당했다고 했지, 그 뒤에 뭔가가 더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흘러나오던 그 영화는 남자 주인공이 강간당한 여자 주인공을 위해 아주 잔인한 복수를 한다는 내용인데 말이다. 여자 주인공이 강간당하는 신이 너무 리얼해 문제가 되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그녀도 그들도 모두 돌이킬 수 없는 과거 때문에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음을.

* * *

“이게 대체.”

“과장님, 혹시나 해서 일단 찍었고 애들 입은 잘 막아 놨습니다.”

“그래, 마카오에 계신 실장님께는 내가 알릴 테니 입단속 제대로 시켜 놔.”

서 실장과 정 팀장이 진 회장과 함께 마카오에 도착한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작정이라도 한 듯 차연호가 움직였다.

나는 그들이 마카오에 간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하기보단 그들이 태평양을 건넜을 때 알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주 씨가 차연호와?’

다만 이 사실을 서 실장에게 바로 연락해 알려야 할지, 그 점이 며칠간 가장 큰 번민이었다. 나는 차연호와 같이 찍힌 사진 속 그녀를 며칠 동안 뚫어지게 보다가 정 팀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얼마 후 걸려 온 국제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는데.

“네, 팀장님.”

정 팀장을 믿고 있었기에 그에게 이 일을 알렸다. 그런데 그 일이 훗날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가 될 줄,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처음부터 서 실장에게 메일을 보냈다면, 어쩌면 그들 모두와 나의 운명까지도 조금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과 죄책감. 미래를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녀가 더는 차연호와 엮이지 않기를 바라며 계속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상황은 그녀에게 불리한 쪽으로 전개되었다.

“…이거…….”

솔직히 서 실장이 그녀에게 손을 댈 줄 몰랐다. 얼마나 동생을 아끼는지 알았기에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처연한 눈동자에 마음이 아팠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쇳소리같이 쉬어 버린 목소리를 내며 의아하게 바라봤다.

어째서 아직도 이 손수건을 가지고 있냐는 눈빛.

대답 대신 살짝 웃으며 양복 재킷을 벗어서 그녀의 머리 위로 씌웠다. 그러고는 정 팀장이 기다리고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 *

며칠 뒤, 나는 조용히 불타고 있는 그녀를 봤다. 아니, 그녀의 흔적들을 보고 있었다.

정 팀장도 나도 심지어 도균까지 배제한 채 서 실장은 그녀의 모든 것을 지워 냈다. 아니, 그녀와 가까웠던 이들 모르게 윤미주의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그건 마치 차연호에게 그녀를 보낸 것과 다름없는 행위라, 솔직히 서 실장의 분노가 너무 감정적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훗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말이다. 일부러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차연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려고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서 실장은 차연호가 여색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길 바랐던 게 아닐까? 이건 뭐, 대놓고 잡아 잡수라고 친절히 내쫓기까지 해 줬으니 차연호가 홀랑 그녀를 먹어 치운 거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차연호는 여자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그런 암군暗君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놀란 건 서 실장이 복수하려는 대상에 미주 씨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수틀리면 인연을 끊는다고 한들,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도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 서진우라는 남자의 너무나도 잔인하고 냉혹한 면을 엿본 것 같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고, 진짜 서 실장이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는 영원히 알지 못하겠지만, 뭐.

아무튼 서 실장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것을 빼앗고는 화장을 하듯 모두 소각시켰다.

‘인간 서진우에게 윤미주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랑보다 더 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깊은 감정. 그 마음을 그녀가 부담스러워 버렸다 생각하는 듯했으니 상실감과 배신감이 얼마나 클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고맙다. 덕분에 다 타기 전에 여기 올 수 있었어.”

내 사회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건지 이번 건에 직접 서 실장의 지시를 받았던 비서실 직원 중 하나가 내게만 살짝 이곳을 알려 줬다. 덕분에 서 실장의 눈을 피해 간발의 차이로 그녀가 받게 되면 기뻐할 만한 물건 몇 개를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다. 보는 눈도 보는 눈이지만 차연호라는 엄청난 거물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 * *

그 후 그녀의 소식은 듣고 싶지 않아도 바람을 타고 산들거리며 들려왔었다. 아마 서 실장의 귀에도 다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마치 금기처럼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정재민 팀장만 빼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지금 하는 꼴 정말 볼 만하네요.”

가끔 뜬금없이 서 실장에게 정 팀장이 일침을 날리지만 서 실장은 언제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차연호의 곁에서 행복하길 바랐지만, 그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차현 그룹의 다음 후계자로 언급되는 차연호라는 인물을 선택했으니 미주 씨 역시 조용히 살 순 없었다.

“혼인신고?”

“어, 식 같은 건 안 하고 조용히 혼인신고만 했대.”

대내외적으로는 이렇게 언론에서 이야기되곤 했었다. 차현 그룹의 3대는 평범한 직장 후배와 사내 연애를 해서 소박하게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는 로맨스 소설 같은 이야기.

물론 주부들이 즐겨 보는 여성지에서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미주 씨의 과거를 캐고 다니긴 했다. 하지만 언론사를 가지고 있는 차연호의 외가가 기사를 잘 막아 준 덕분에 말이다. 차연호는 재벌답지 않은 소탈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서 대중의 호감도를 올렸다.

사실 차연호는 그간 공식적으로 자신을 미디어에 노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 후부터는 적극적으로 언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 비서실에서는 차연호의 언론 플레이를 지켜보며 그의 상승세를 저지하기 위해 피나게 노력했고.

나는 딱 한 번, 그녀가 면사포를 쓴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상상 속에서 미주 씨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요한 씨! 빨리 와서 같이 사진 찍어요!”

“이야, 예쁘네요. 역시 5월의 신부야.”

“5월이고 뭐고 더워 죽겠어요. 억지로 웃는다고 얼굴이 다 얼얼해. 빨리 옆에 서서 사진 남겨요, 우리.”

새로 산 더블 버튼 슈트를 입은 내가 신부 대기실에 앉은 그녀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도균이와 함께 사진도 찍으며 그녀의 앞날을 축복해 주면서.

“하나, 둘, 셋.”

우리의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은 정재민 팀장이었다. 서 실장은 지금 혼주로 하객을 받기 바쁘고 나와 도균은 사진을 찍고 신부 측 축의금 접수대에 앉아, 봉투를 꼼꼼히 챙겼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그냥 평범하디 평범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남자였다. 뭐든 그렇듯 평범한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일임을 느끼게 해 줄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식.

“행복하게 잘 살아요.”

“아이, 몰라. 그런 말 하지 마. 눈물 나잖아요.”

마음 약한 그녀는 살짝 눈물을 보이고는 눈꼬리를 달처럼 휘며 우리를 향해 웃어 주었다. 그동안 본 것 중에서 가장 우아한 웃음으로.

하지만 상상은 나와 그들 모두에게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너무나도 달콤한 꿈일 테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행복했던 그 시절에 우리 모두가 좋아했던 그녀.

꼭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나는 한 인간으로서 미주 씨를 좋아했었다. 그녀도 나를 한 인간으로서 좋아하고 따랐다는 걸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 * *

그래서 미주 씨가 아이를 유산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을 때, 드디어 그걸 건넬 때가 되었다 여겨 마음을 먹고 움직였다.

상처가 컸는지 더는 회사도 나오지 않던 그녀를 만나기 위해 차연호의 철옹성으로 핸들을 움직였던 날. 근 1년 만에 핸드폰 목록에서 ‘미주 씨’라는 이름을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30분 정도 뒤에 자택 앞에 갈 테니 잠시만 나와요. 혹시 집이 아니면 기다릴 테니 시간 되는 대로 나와요, 미주 씨.]

내가 재벌들만 산다는 빌리지 앞에 도착했을 때, 집 앞도 아닌 빌리지 입구 앞에서 미주 씨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 요한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나 완전히 놀랐잖아요. 갑자기 찾아온다길래 막 뭔가 두근두근하고 그랬어요.”

차에서 내릴 때 그녀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미주 씨, 여기서 기다릴 필요 없는데. 날도 춥잖아요.”

여전히 밝고 쾌활한 표정으로 어제 만나고 헤어진 것처럼 말을 건네는 그녀의 얼굴은 어쩐지 알던 것보다 더 성숙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여기 되게 웃겨요. 앞의 관리실 같은 곳에서 미리 약속된 차만 통과시켜 줘서 그냥 내가 나왔어요.”

“누가 나쁜 마음 먹고 올 수도 있으니깐.”

“그럼, 요한 씨는 나쁜 마음 먹고 온 걸까 착한 마음 먹고 온 걸까 궁금해지는걸요.”

정말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웃는 그녀에게 작은 종이 가방을 주었다.

“이거, 몇 개 못 건졌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게 갔거든요.”

그녀가 종이 가방에 든 물건을 보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봐, 나쁜 마음으로 왔잖아. 날 울렸으니까요.”

“울지 마요. 차연호가 지금 상황을 보면 난 바로 죽을지도 모르니깐.”

살짝 코가 맹맹한 목소리로 애써 이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는 그녀의 말에 나 역시 농담으로 화답해 주었다.

“걱정하지 말고 나 믿어요. 남편의 서슬을 피해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줄게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우리가 늘 그랬던 것처럼 실없는 말로 수다를 떨 때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미주 씨는 내가 내민 손수건을 가만히 보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이거 내가 캐나다에서 돌아올 때 면세점에서 사서 선물로 줬던 건데,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요?”

“친구가 준 선물이라 버리기가 아까워서.”

내 말에 그녀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잘 지내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린 후 다시 운전석에 올라탔다.

* * *

며칠 뒤 서 실장이 나를 찾았다. 그는 나를 불러 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30분째 그냥 세워 두었다. 그것도 빤히 쳐다보며 담배만 피우면서.

서 실장이 날 부른 이유를 알고 있었고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미주 씨를 만나고 온 것을 설마 모를 리 없겠지.

“이요한, 간도 크네.”

그저 이 한마디만 하고는 나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차현 그룹 인사이동 발표가 있었는데 말이다.

“어?”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차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비서실 직원에 대한 인사권은 모두 서 실장이 쥐고 있는데 승진이라니.

‘실장님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해 배신하지 않는 충실한 개가 되어 주면 되겠지.’

그는 상을 준 걸까, 벌을 준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서진우에게 미움을 받는 걸까, 사랑을 받는 걸까?

그 남자의 마음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나 같은 범인凡人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아, 수염 정리 좀 해야겠어.”

오늘도 힘든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와서 샤워 후 거울을 보다가 문득 그녀와 별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대던 때가 떠올랐다.

‘요한 씨, 수염 한번 길러 봐요. 완전 멋있을 것 같아. 약간 뭐지? 그 외국 모델 같을 것 같아요.’

‘갑자기 웬 수염?’

‘아니 그냥,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이렇게 턱수염을 기르면 엄청 남자답고 막 야성적인, 그럴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요. 또 누구 봤어요? 잡지? TV? 영화?’

‘…광고. 향수 광고하는 남자가 너무 멋있어서 반해 버렸단 말이에요.’

아주 오래전 기억 속 그녀의 말이 다시금 리플레이됐다.

그때 그 말을 듣고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어느새 턱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날 그녀가 박장대소를 하며 어울린다고 신나 하던 게 떠올랐다.

“그래, 그때 그랬지. 참 재미있었어.”

내 기억 속에 윤미주는 재벌가에 입성한 우울한 신데렐라가 아닌, 언제나 청바지 차림에 무채색 티를 입고 백 팩을 메고 다니던 여대생으로 늘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위험한 남자들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인생이 아닌 그저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살길 언제나 바랐다.

그들에게도 동생이었지만 내게도 그녀는 동생이자 하나밖에 없는, 말 그대로 여자 사람 친구였으니깐.

미주가 자신의 행복을 찾길, 더는 목숨을 건 남자들의 게임에 휘말리지 않기를 간절히 빌어 보지만……

뺨에 흘러내리는 이 뜨거운 감촉은 뭘까?

아, 피.

피다.

그래, 피가 흐른다.

닦아야 할 텐데, 어디 있어 보자.

…손수건이 어디 있더라?

왠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천천히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은데…….

어쩐지 오른쪽 눈이 더는 보이지 않…….

손수건이… 손수건을 꺼내… 닦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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