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Deal?
* * *
월요일은 더없이 평화롭지만 늘 그렇듯 제일 바쁜 하루였다.
아침에 출근하면 같은 프로젝트를 맡은 선배들과 일주일 치 파이팅을 외쳐 보기도 했다. 회의실에 모여 각자가 열심히 준비한 아이디어에 대한 의견을 나눌 때는 말이다. 미주도 전략실 막내로서 열심히 경청하며 메모도 하면서 회사원으로서 성장하는 중이었다.
마치 2주 전에 제게 있었던 일이 아득한 과거라도 된 듯 꽤 담담히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 있었다. 연호의 세컨 하우스에 살면서 들이닥칠 태풍을 그의 그늘에서 피해 보고자 했는데 말이다.
연호가 적극적으로 저를 보호해 주는 건지, 진우가 더는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고통스러운 배신의 대가는 잠잠해졌다. 아니, 수면 아래에서는 두 남자가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인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굳이 연호에게 물어보진 않았다.
‘아마도 진우 오빠가 발버둥을 쳐도 현재로선, 그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 차연호가 저리 의기양양하게 날 승리자의 눈빛으로 보곤 하잖아?’
지난주 월요일 점심시간에 사람들 눈을 피해 차현 그룹 본사에서 걸어서 20분이나 걸리는 곳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재민을 만났었다.
* * *
“미주야, 주말에 너 연락이 안 돼서 엄청나게 걱정했었어.”
“왜? 차연호랑 같이 있었는데. 나한테 미인계라도 써 보라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미주가 웃는 얼굴로 돌려서 재민에게 한 방 먹이듯 대꾸했다.
“형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독하게 손썼을 줄은 몰랐어. 미쳤지, 너 사는 집을 빼 버리다니.”
“덕분에 빨간 망토 차차랑 확실히 연대하게 되었으니 당분간 오빠는 이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어 주면 고마울 것 같아.”
정말 재민이 몰랐던 건지, 알면서도 방관했던 건지. 미리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던 재민은 의외로 무서운 지략가인 듯했지만, 그와 척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차연호가 갑자기 나한테 흥미를 잃을 경우의 수도 생각해야 해. 그럼 남은 사람은 재민 오빠뿐이니깐.’
이렇게까지 계산적으로 머리를 굴리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줄다리기할 줄 미주는 몰랐다.
어떻게 보면 저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남자들의 싸움에 얼떨결에 끌려들어 가고 말았으니 말이다. 저를 이용하려는 남자들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차연호는 몰라도 어린 시절, 희주가 살아 있을 때부터 함께 지냈던 재민을 한번 믿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소중한 오라버니였으니깐.
“오빠까지 진우 오빠한테 미움 사면 누가 날 도와주겠어? 그리고 진우 오빠 화가 풀렸을 때 옆에서 오빠가 살살 좀 달래 주는 역할도 해 줘야지.”
“그래, 너도 가능하면 차연호 신경 긁지 말고 얌전히 여자 친구 흉내 내고 있어.”
“글쎄, 여친이라… 되게 웃긴 단어야, 그거.”
더는 착하지 않은 얼굴을 한 미주가 하는 말에 재민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어른이 됐구나, 미주야.’
더는 상상이 아닌 손에 직접 잡히는 현실로 미주를 원하는 욕망을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맹수들 틈에서 몸을 낮추고 욕망을 감춰야만 했다. 마치 한나라의 원제라도 된 양 미주를 왕소군으로 만들어 흉노인 연호에게 보낸 것과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 판을 짰는데 설계자인 내가 패배를 하다니.’
이번 게임은 진우와 연호에게 완벽하게 졌음을 재민은 인정했다. 아니, 예상치 못한 미주의 행보 덕분에 판이 깨졌다, 보는 게 맞았다.
연호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미주는 이미 그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정말 미주가 연호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용만 하고 버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연호 역시 미주를 핑계 삼아 진우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놈이 미주에게 흥미를 느낄 때까지의 일이긴 하겠지만 재민은 직감할 수 있었다. 연호가 절대로 미주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소유욕과 집착 속에서 과연 사랑이 피어날 수 있을까?
재민은 끝까지 목적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두 사람의 증오 어린 시선을 보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넌 부정하겠지만 내가 봤을 때…… 차연호는 너한테 이미 빠졌어.’
다음 게임에서는 꽤 치밀하고 촘촘하게 전략을 짜 다시 말들을 판 위에 세워야겠어. 두 번은 질 수 없으니 배수진을 치고 덤벼야 널 다시 내 걸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재민은 미주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연호한테 마음 붙이고 잘 지내 봐. 누가 알겠어? 네 덕분에 형이랑 차연호가 화해하고 손잡을지.”
* * *
그건 재민이 절대로 되지 않을 일이라 생각해 스치듯 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했다.
진우와 연호가 손을 잡는다.
만약 이 꿈만 같은 일이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엉망으로 엉켜 있는 네 사람의 운명을 풀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하고 일주일 내내 생각했다.
‘꼭 재민 오빠 말이 아니더라도 내가 차연호의 마음을 얻어, 그가 날 진짜 사랑하게 돼서 내 말을 조금이라도 들어준다면…….’
진우와 연호를 연결한다면 그 누구도 둘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 미주는 판단했다.
‘해 볼 만해. 만에 하나라도 가능해진다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나는 차연호를, 재민 오빠는 진우 오빠를 잘 설득시킨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을 맞을 수 있을지도 몰라.’
미주는 고개를 돌려 연호의 사무실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주일 동안 사실상 같이 살다시피 한 남자가 말쑥한 표정으로 어젯밤 음탕함은 어디로 갔냐는 듯 냉정한 얼굴을 하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자기 집으로 가라고 해도 도무지 말도 안 듣고.’
퇴근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연호와 함께 세컨 하우스로 돌아가면 현관문을 열기 바쁘게 안아 대는 통에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근데 거기서 그냥 이대로 눌러살 수도 없는데. 내가 나가는 건 또 안 된다고 난리를 치니깐.’
진우가 모조리 제 물건을 처분해 갈아입을 옷조차 없었지만, 연호가 사람을 시켜 전부 채워 준 덕분에 불과 하루 만에 그의 집이 마치 제집처럼 변해 버렸다.
“나를 못 내보낸다면 차라리 연호 씨한테 월세를 낼게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지니깐.”
“네 월급 가지고는 이 집 월세 감당 못 할 건데?”
“그럼 달아 놔요. 로또라도 걸리면 다 갚을 테니.”
“네 로또는 바로 난데?”
“재수 없어.”
이제는 제법 편해진 두 사람은 농담도 하고 서로를 비난하기도 하며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잠들고 있었다.
이렇게 몸을 섞고 살을 맞대는 원초적인 쾌락을 함께 나누는 일상이 미주는 두려웠다. 사랑하지 않겠다, 좋아하지 않겠다 아무리 마음먹는다 한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그를 알아 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된다면 서로 고민도, 생각도 그리고 감정도 점차 같은 빛으로 물들지 않을까? 지금만 봐도 저를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나쁜 남자인 걸 알면서도 이제 저 역시 나쁜 여자가 되어 그를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깐.
그런데, 이제는 연호도 저도 알고 있었다.
잘못된 시작이긴 했지만 뜻하지 않은 풍파 속에서 각자의 마음을 조금씩 엿보게 되었다는 뻔한 삼류 연애 스토리. 두 사람이 주인공인 그 로맨스 소설이 이제 조금은 서로에게 빠져도 된다는 페이지로 접어들고 있는 듯해 미주는 혼자 피식 웃었다.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클리셰를 좀 깨고 싶어진다.’
그러니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거야.
의미 없는 다짐을 계속하며 마음을 세뇌해 스스로를 속이고만 싶어진 미주가 고개를 돌려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일단 사랑이고 복수고 나발이고 계략까지 퇴근 후에 생각해야만 했다. 애석하게도 저는 아직 재벌 3세의 아내도 아니고 여자 친구도 아니고 그저 일반 사원이었다.
그래서 사수 최 대리가 오늘까지 검토를 끝내라고 지시한 일에 다시 집중할 때, 연호 역시 미주에게 알리지 않은 일들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장님, 지시하신 일은 말끔하게 해결했습니다. 이만하면 서 실장 쪽도 더는 어떻게 손쓰지 못할 겁니다.]
미주가 힌트를 준 덕분에 연호는 발 빠르게 진우의 쓸데없는 짓을 저지했다.
‘미친 새끼, 정신병원도 모자라 미주 계좌까지 동결시키려고 들어?’
금치산자, 아니 법이 바뀌었으니 피성년후견인이라 일컫는 게 맞을 것이다. 그녀의 후견인을 자처한 진우는, 미주에 대한 응징으로 물리적으로 그녀의 터전을 박살 낸 것도 모자라 사회적인 삶까지 송두리째 앗아 가려 했다.
생각보다 훨씬 깊은 것 같은 진우의 배신감이 너무 강하게 미주를 죄어 오니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것 같다, 연호는 여겼다.
방금도 제게 개인적으로 고용된 법무 법인이 진우에게 타인의 계좌를 열람하고 동의 없이 뭔가를 하려는 게 범죄 행위임을 강력하게 경고한 덕분에 비서실이 잠잠해졌다 알려 왔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빨리 처리하는 게 맞을 것 같네.’
미주를 이용하려 마음먹었을 때부터 생각한, 그녀를 제 옆에 옭아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되려 미주를 이 난관에서 구하는 길이 될 줄이야.
연호는 미주가 일단은 저와 동맹을 맺은 걸 알기에 급히 서두르려고 하지 않았던 일을 어쩔 수 없이 서둘러야 할 것만 같았다.
‘임신부터 하면 너도 더는 어쩔 수 없을 테니 그때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
그래서 처음부터 계속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피임하지 않았는데. 호락호락하지 않은 미주가 자꾸 콘돔을 찾으니 못내 아쉬웠지만 일단 바라는 대로 해 줬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이를 만들어서 그녀가 도망칠 수 없게 만들려는 이기적이고 못된 마음이 더욱더 커지고 있었다.
연호가 속으로 웃으면서 미주가 있는 쪽을 힐끔 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근데 이게 참, 새침한 표정으로 샐쭉해지는 모습에도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다니.
마음은 이미 어디 사람들이 없는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미주의 몸에 저를 박아 넣고 싶었지만, 간신히 사춘기스러운 욕구를 참아 내 보면서.
지금은 섹스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연호는 넥타이를 한 번 만지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외비입니다. 혼인신고 서류 좀 준비해 주세요.]
* * *
진우와 이별 아닌 이별을 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급한 일이 있어 이번 주말에는 오지 못한다는 연호 말에 미주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주말 내내 쉴 수 있겠다. 하루도 안 쉬고 밤마다 그랬으니.”
섹스가 아무리 좋다 한들 어떻게 매일매일 할 수 있는지. 연호가 너무 절륜해 미주는 그가 버겁다는 행복한 투정을 하며 금요일 밤에 오랜만에 혼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늘어지게 늦잠을 잔 토요일 낮에 울리는 뜬금없는 초인종 소리에 눈이 떠졌다.
‘이상하네. 벨 누르고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미주는 인터폰 화면에 나온 인물을 보며 순간 몸이 얼어 버렸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예상했지만 실제로 벌어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아무도 없는 척할까? 아니야. 다 알고 오셨을 텐데.’
급히 옷매무새를 살폈다. 누가 봐도 너무 심하게 잠옷임을 뽐내는 옷을 입고 있어 후다닥 침실로 들어갔다. 너무 차려입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후줄근하지도 않은 옷으로 진짜 몇 초 만에 갈아입고는 긴장된 마음으로 인터폰의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이야, 미주 씨.”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을 한 번 눈으로 훑더니 소파에 차분하게 앉은, 곱디고운 중년 여자를 보았다. 차현 그룹 진수오 회장의 부인이자 차현의 안주인이며 밝을 현 갤러리 관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그녀.
쉽게 말해 연호의 누나인 차연희가 미주의 앞에 불현듯 나타났다.
“차 한 잔 드시겠어요?”
그녀가 저를 왜 찾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차분하게 집에 온 손님을 접대하려는 호스트의 심정으로 건네는 말에 연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홍차 한 잔 줘요. 연호가 있는 곳이라면 늘 홍차가 있으니깐.”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연희의 말 속에 이미 그녀가 여기에 왜 앉아 있는지, 그 뜻이 충분히 담겨 있었다.
미주는 주방 선반에서 찻잔을 꺼냈다. 전기 포트의 전원을 올리고 물을 끓이는 동안 동그란 원통 틴 케이스를 열어 찻잎을 티팟에 담았다.
차를 준비하는 동안 연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고 노력 중인 미주가 준비된 티 세트를 연희 앞에 내려놓자 그녀는 저를 향해 고맙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땡큐, 잘 마실게요.”
같은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미주도 소파에 앉아 제가 내린 차를 한 입 음미해 보았다. 하지만 너무 긴장된 마음에 홍차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 연희가 말을 꺼냈다.
“미주 씨, 우리 연호 의외로 세심한 거 잘 알죠? 아까 차 준비하는 거 보니깐 딱, 연호가 하는 그대로 따라 하고 있길래 나 솔직히 속으로 웃었어.”
“…아, 네. 그랬나요, 제가?”
“연호가 아마도 미주 씨한테 가르쳐 주면서 물은 몇 도까지 끓이고, 찻잎은 얼마나 넣고 몇 분을 우리고 하면서 잔소리 엄청나게 해 댔을 건데 내가 누나로서 대신 사과할게요.”
스리슬쩍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호의 이야기를 꺼내는 연희가 범상치 않은 화법으로 말하자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역시 아무나 재벌 사모님 소리 듣고 사는 게 아니구나. 정말 고단수라… 이건 생각도 못 했어.’
저를 보는 미주가 웃고는 있지만 그게 진짜 웃는 게 아니라는 걸 간파한 연희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천천히 여기에 온 이유를 편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나타난 순간 미주 씨가 뭔 생각을 했을지, 한번 맞혀 볼까요?”
“…….”
연희는 아몬드 모양의 눈을 조금 크게 뜨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미주를 보면서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차연호 누나가 나타났으니 둘 중에 하나겠지? 내 동생이랑 헤어지라고, 이 돈 받으라고 소리치든가, 아니면 얼굴에 물을 뿌리든가.”
“…비슷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슬쩍 민망한 듯 웃으며 대답하는 미주에게 연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이래서 드라마가 문제야, 호호. 근데 있지, 미주 씨. 나 그러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
미주는 조금 의아한 듯 연희를 보았다. 솔직히 속으로 뜨거운 홍차를 부을까 봐 어떻게 피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연호가 집에 안 들어오고 있다길래, 좀 알아봤어요. 내가 누나잖아? 동생 사생활,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지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지만, 뭐. 우리가 좀 그래요. 입장이 뭐랄까? 주목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라…….”
연희가 에둘러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 보니 금수저인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걸 가진 대가로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없는 재벌가의 자식들에게 돈과 부귀영화는 과연 복일까? 독일까?
미주의 마음을 읽은 듯한 연희가 우아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나도 알아요. 서 실장이랑 미주 씨 관계. 그리고 연호까지. 정확히는 몰라도 동생이 뭔 생각인지, 뭔 꿍꿍이로 미주 씨 여기에 숨겨 놨는지.”
나이가 가늠이 안 되는 아름답고 고상한 중년 여인의 연륜은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일반적인 사람도 아니니, 아버지의 회사이자 남편의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마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미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연희에게 뭔가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최근에 제 신변에 꽤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차장님이 저를 도와주면서 어쩌다 보니 여기 눌러앉아 신세를 지게 되었고요.”
“괜찮아, 굳이 연호를 변호해 주지 않아도. 내 동생, 생각보다 못돼고 잔인한 면이 있는 거 내가 더 잘 알아. 분명히 다 털어놓을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뭔가가 있겠지만 말이야…….”
연희가 뜸을 들이듯 찻잔을 들고 한 모금 홍차를 음미하더니 듣던 중 가장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 이리된 거 난 미주 씨가 확실히 우리 사람이, 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난 사실 미주 씨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거든요.”
연희가 말하는 ‘우리 사람’이 되란 말은 아마도 자신들, 연호의 손을 잡고 진우와 그 뒤에 있는 제 남편을 배신하라는 뜻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미주는 연희에게 확실히 포지션을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차장님과 한배를 탔어요. 그러니 이 집에서 한 달 넘게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는 거고.”
“그래, 그거 잘됐네. 그러면 있죠. 같이 사이좋게 지내면서 연호 마음이 떠나지 않게 잘 붙들어 매 봐요. 누가 알아? 자식이라도 생기면 연호도 마음 붙이고 미주 씨랑 지지고 볶고 살지.”
재민과 비슷한 말을 하는 연희에게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진 회장과 연희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아이라는 존재를 언급할 때 스치는 슬픈 눈빛에 어쩐지 마음이 조금 아팠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랑 연호 열다섯 살 차이 나는 건 알죠? 그래서 걔가 나한테 약간 자식 같은 느낌이 있어요.”
“저도 죽은 오빠랑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나서, 오빠가 살아생전에 가끔 저한테 그런 소리 했었어요. 딸내미니 뭐니 하면서 말이에요.”
뭔지 모를 연희의 슬픔이 전해지기라도 한 건지 미주는 애써 웃으면서 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연희가 아무렇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미주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꺼냈다.
“연호한테 들었을 수 있고, 다른 사람한테 들었을 수도 있지만. 아직 아무에게도 들은 게 없다면 내가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을 꺼낼게, 미주 씨.”
“…네, 편히 말씀하세요.”
“하긴 자기도 오빠랑 열 살이나 차이가 났다니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겠네. 연호랑 나, 사실 친남매가 아니야.”
“…….”
“배다른 남매야.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 연호거든.”
그때 미주의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진우가 얼버무렸던 ‘사생아’라는 말. 그때 진우가 그 말을 삼킨 이유는 그 역시 사생아이기에 제 얼굴에 침 뱉기 같은 단어를 욕설처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 진우도 연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니. 놀랍다는 얼굴을 한 미주를 보며 연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분히 연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것도 역시 드라마를 생각하면 안 돼.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지 연호를 정말 친자식처럼 사랑해 줬고, 나도 동생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니 얼마나 예쁘던지. 사랑 듬뿍 받고 자라서 걔가 그나마 덜 삐뚤어졌다고 난 생각해요.”
약간 팔이 안으로 굽는 듯한 연희의 말에 미주는 살짝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삼켰다.
‘덜 삐뚤어진 게 이거면, 삐뚤어졌으면 대체 얼마나 더 나쁜 놈일까.’
입술을 꾹 다문 미주가 그렇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연희도 조곤조곤 우아하게 말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연호가 자기 위치에 대해서 불안함이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더 집착하고 있는 거지. 차현 그룹 다음 회장 자리.”
“거기라면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온 거겠네요.”
“맞아. 알 만한 사람들은 연호에 대해서 좀 그런 시선들이 있거든. 사생아, 밖에서 낳아 온 자식, 뭐 그런 거. 그래서 나도 내 동생 더 늦기 전에 그 자리에 앉히고 싶어. 누가 알아? 갑자기 남편이 우리 아버지처럼 뒤늦게 밖에서 자식이라도 낳아서 후계자로 삼을지.”
“…….”
“그래서 나는 조금 조급하기도 하네. 누구도 감히 차연호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게 만들고 싶은데 말이야.”
너무 품위 넘치는 표정으로 나긋하게 저를 보며 권력을 탐한다는 걸 알리는 연희가 살짝 무섭다고 느낄 때였다.
“아이고, 이야기가 살짝 옆으로 샜다. 그치? 아무튼, 난 두 사람 방해할 생각도 없고, 오히려 응원하니깐 잘 지내 봐요, 우리.”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얼굴로 웃는 연희를 보면서 미주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 여기 온 거 일단 비밀로 해 줘요. 주말 지나면 연호가 알겠지만 노발대발 난리 칠 게 뻔해서.”
“네, 그럴게요.”
살짝 윙크하면서 비밀을 공유하자는 연희가 볼일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주도 덩달아 일어났다.
“그럼 이건 서비스로 내가 하나 더 알려 줄게.”
“…뭔지 되게 궁금해지네요.”
“내가 봤을 땐 우리 연호, 자기 그날 처음 봤을 때 아마 마음에 들었을 거야. 난 그날 연호 눈빛 보고 이미 딱, 각이 나오던데?”
연희의 말에 얼굴이 붉어져 애써 평온한 얼굴을 해 보지만 그런 저를 다 안다는 듯 그녀가 짓궂게 한마디 더 거들었다.
“아, 부럽다. 뭔가 신혼 같아서. 연호 이 자식, 누나한테는 맨날 틱틱거리더니.”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지만 미주는 어쩐지 부끄러워 땅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새빨개진 볼에 화끈거리는 열감이 느껴졌다.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생각지도 못한 제 편이 되어 조금 얼떨떨한 기분에 간만에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꺼냈다.
“혼자 있을 때 안 마시기로 약속했지만, 맥주는 뭐 물이니깐.”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가 아닌, 연호가 좋아하는 듯한 브랜드의 맥주지만 뭐, 뭐가 상관있겠냐 싶었다. 오랜만에 혼자 소파에 반쯤 기대듯이 누워 맥주를 마셨다.
연희가 던져 놓고 간 연호의 비밀의 무게.
왠지 저를 시험하기 위해 알려 준 것 같아 미주는 연희 역시 보통내기가 아님을 느꼈다. 앞으로 그녀와 어떻게 엮이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고,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그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하루하루 머리가 터지도록 궁리하고 있었으니 연호가 없는 오늘만큼은 그저 쉬고 싶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 갈증을 해소해 주는 이 시원한 맛을 느껴 보면서.
“그래, 이 맛에 산다, 내가.”
연희 때문에 긴장되었던 몸이 순식간에 노곤하게 풀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조금 취해 볼까 했다.
그런데 해가 지고 깊은 어둠이 찾아왔을 무렵 설마 연호가 돌아올 줄 몰랐다. 그때 저는 만취가 된 상태로 언제 잠이 든 건지, 필름이 끊긴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것 봐라… 내 이럴 줄 알고 와 봤는데, 역시.”
분명히 거실이 환한 걸 보고 들어왔는데 말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시끄러운 TV 소리만 반기고 있어 연호는 혀를 차면서 재킷을 벗었다.
거실 테이블 위를 살펴보니 3분의 1 정도만 남은 아이스 와인이 큐브 치즈들과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그리고 꽤 많은 맥주 캔. 미주가 신나게 맥주부터 시작해 홀짝이다가 취해 잠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주말에 못 온다고 했더니 완전히 마음 놓고 흥청망청 마셔 댔네.’
미주가 어질러 놓은 거실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자꾸 새어 나오기도 했다.
‘나랑 있을 때만 마시겠다 약속한 걸 지킬 거로 생각한 내 잘못이지.’
그녀가 조금 나아졌다 생각했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미주가 괜찮아졌다 여겼는데,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술이랑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서라도 빨리 법적인 부분을 해결하는 게 맞겠어.’
연호가 침실 문을 살며시 열어 미주가 새근새근 잠든 침대로 다가갔다. 이불을 덮지도 않고 이불 위로 그대로 엎드려 있는 모양새를 보니 꽤 취해서 그대로 비틀거리며 뻗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미주가 손에 뭔가를 쥐고 있는 듯해 살펴보니 세상에, 리모컨을 꽉 쥐고 있었다.
‘거실 TV 리모컨을 들고 침실까지 들어온 것도 몰랐다니.’
어떤 의미로는 참으로 재미있는 캐릭터라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끈적한 시선으로 침대에 엎드린 미주의 뒤태를 야릇하게 훑고 있기는 했다.
새것 같은 빳빳한 흰 티 한 장을 입고, 편해 보이는 회색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미끈한 다리를 무방비하게 내놓고 세상 모르게 자는 모습에 새삼 구미가 당겼다.
연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침대 끝에 앉아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인 채 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톱을 살짝 세워 척추를 따라 자국을 내면서 그녀를 깨웠다.
“…으응…….”
짜릿한 감각에 잠에서 살짝 깼는지 미주의 어깨가 옆으로 뒤틀렸다.
“나 없다고 혼자서 그렇게 가 버리면 안 되지.”
연호가 미주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살짝 귀를 깨물었다. 흐읏- 하는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 조금 막힌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미주가 답했다.
“연호 씨 없이도 완전히 뿅 가 버릴 수 있더라고요.”
손을 뻗어 미주의 볼을 만져 보니 아직도 뜨거운 열감이 남아 있었다. 일부러 묘한 화법을 쓰는 제 말을 되받아치는 미주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 아직 술이 덜 깨 여운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연호 입장에서는 야한 짓을 잔뜩 할 수 있어 반가운 일이었다.
손을 앞으로 뻗어 미주의 가슴을 움켜쥐고는 유두를 손끝으로 만져 대며 지분거렸다.
“정말 그럴까? 이래도?”
연호가 허리를 잡고 엉덩이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미주가 살짝 놀란 듯했다.
“아, 자는 사람 깨워 놓고는……!”
미주의 도발 아닌 도발에 연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뒤로 잡아당겼다. 짧은 반바지 덕분에 어디로든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손이 팬티 안으로 들어가 뜨거운 곳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 잡아먹어 달라고 다리를 내놓고 있으니, 나보고 어떡하라고?”
“읏! 아니, 오늘 못 온다…고 한 사람… 흐읏!”
손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체모의 감촉을 넘어 깊숙이 손을 뻗었다. 너무 무방비한 상태로 연호에게 습격을 당한 미주가 엎드린 채 손길을 피해 보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봐 봐, 벌써 젖었잖아? 꿈에서 야한 짓이라도 했어?”
“…하아…….”
반바지와 팬티가 동시에 발목으로 내려갔다. 질척이는 음부를 만지던 연호의 손가락이 몸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벌어진 둔부 사이에서 손목을 쓰며 저를 희롱하는 연호를 미주도 더는 제지하지 않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수치심과 함께 찾아오는 쾌락이 무서울 정도로 너무 좋았다.
꽉 잡힌 허리와 안을 휘젓는 남자의 섬세한 애무에 이대로 몸이 뜨겁게 타 버릴 것만 같아 미주는 이불을 움켜쥐고는 그저 신음할 뿐이었다.
“하아, 흣! 으응…….”
안으로 들어간 연호의 긴 손가락이 내부를 더듬으며 집요하게 내벽을 괴롭혔다. 미주가 우는지 웃는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흐느꼈다. 연호는 그녀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게 오직 세상에 저 하나뿐임에 이미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아!”
천천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깊이 몇 번 박히더니 도드라진 돌기를 살살 문질렀다. 미주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경련을 일으키며 부르르 떨었다.
“여기, 괴롭힐 거야. 더 울어.”
“아…… 으읏!”
미주가 겨우 신음을 토해 내자 연호는 그제야 붙잡고 있던 허리를 놓아줬다.
“못 참겠어. 널 죽이고 싶으니까 어디 한번 견뎌 봐.”
팬츠를 살짝 내리고 브리프 속에서 이미 하늘을 찌를 듯 발기된 페니스를 꺼내 입구부터 문질렀다. 끝에 충분히 닿은 점액질이 부드럽게 두 사람의 결합을 돕고 있었다. 제가 선사한 아릿아릿한 쾌감에 움찔거리는 은밀한 곳에 깊숙이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씨, 미치겠어, 진짜.”
“아아… 으응……!”
뒤에서 퍽퍽 박아 대는 연호의 힘에 미주는 앞으로 자꾸만 튕겨 나갈 것 같았다. 심지어 연호가 어깨를 잡고는 놓아주지 않는 통에 하체가 부딪힐 때마다 생기는 충격이 고스란히 자궁까지 전해져 진짜 죽을 것만 같았다.
‘연락도 없이 돌아와 놓고는 얼굴 한번 안 보여 주고 바로 하다니.’
하지만 미주는 솔직히 동물들이 교접하는 자세로 저를 마음껏 유린하는 연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이토록 음탕하게 맞춰 주는 것도 자신이니, 부끄러움에 그저 시트를 꽉 움켜쥐고는 젖은 소리를 냈다.
“하읏……!”
“씨발, 진짜 이렇게 좋다니.”
힘이 잔뜩 들어간 엉덩이를 뒤로 뺐다가 다시 넣을 때마다 뜨겁게 수축하는 압박감에 연호도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온갖 음란한 말로 미주의 혼을 쏙 빼놓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여겨 지금은 그저 속으로만 삼키며 저를 박아 넣었다.
“윤미주, 절대로 딴 새끼한테 못 줘.”
그녀의 엉덩이를 힘껏 잡고서 허리를 비틀어 끝까지 밀어붙였다. 가능하다면 자궁까지, 말도 안 되지만 더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있다면 미주의 몸속 모두 저로 더럽히고 싶었다.
연호는 한 손을 미주의 등으로 뻗어 브래지어 훅을 제거하고는 흰 티를 걷어 올려 가슴을 세게 움켜쥐면서 말했다.
“씨발, 넌 내 거야. 죽어도 내 옆에서 죽어야 해.”
미주는 그저 연호가 섹스 중에 흥분해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술기운이 조금 남아 있어 그가 대체 뭐라고 말했는지 드문드문 기억이 잘 나지 않기도 했고.
“알았으니… 좀 천천히… 읍……!”
섹스가 주는 쾌락으로 저도 모르게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연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미주의 뜨거운 혀가 어쩔 줄을 모른 채 도망가려고 하지만 좁은 입안에 도망칠 곳은 없었다. 제 혀가 본의 아니게 연호의 손가락을 건드리며 그를 더 위험하게 자극했다.
“아아… 너무 좋아…….”
앞으로는 혀, 뒤로는 강하게 조이는 느낌에 연호가 점점 기세를 올리자 미주는 다리 사이의 홧홧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연호가 저를 찢어 놓을까 봐 살짝 두렵기까지 할 때, 거친 숨을 쉬며 남자가 깊이 찔러 대더니 등에 이를 박아 넣으면서 파정을 했다.
“나, 목이 말라서….”
“안 돼, 내가 더 급해.”
“술 마시고 잤더니 갈증이.”
분명히 끝난 것 같은데 그가 쉽사리 몸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아 미주가 애원 아닌 애원을 했다. 그러자 연호가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더니 꽉 들어찬 아래에서도 묵직한 것을 빼내 줬다.
미주가 엎드린 채 간신히 팔로 상체를 지탱하고 있을 때 여운이 남아 여전히 움찔거리는 곳에서 정액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연호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제 여자의 음부에 하얗게 점철된 정액을 보면서 아주 질 나쁘게 웃었다.
“넘칠 때까지 안에다가 계속해야겠어.”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페니스를 손으로 잡고는 일부러 위아래로 문질렀다. 갈라진 골짜기가 희뿌연 액으로 뒤덮일 때까지 음란하게 질척거리며 움직였다. 그러고는 미주의 다리를 좀 더 넓게 벌리더니 조금 전 삽입보다 더 깊게 몸 안으로 침입해 보았다.
“아, 잠시만. 나…….”
“오늘 온종일 네 생각만 한다고 좆이 터지기 직전이니깐 안 돼. 그러니 견디라고 했잖아?”
엎드린 미주가 고개를 간신히 뒤로 돌려 연호를 보지만 그는 제 시선을 완벽하게 무시했다.
“흐흣……!”
연호가 다시 허리 짓을 시작하자 미주는 거의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그의 체액이 섞인 내부가 아까보다 훨씬 질척거리며 음탕한 소리를 내고 있어 미주는 불안감에 목소리를 높였다.
“연호 씨, 마음은 알겠는데 안에다 더는 하면 안 돼요.”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말에 미주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밖에다가 하면 밤새도록 해도 되는 거지?”
“뭐야, 이 미친놈이!”
“기대에 부응해 줄게, 미주야.”
뭔가 섬찟하고 다정한 말투에 미주는 눈을 감으면서 생각했다. 오늘 밤은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도 잠시, 방금 전 한 번 끝을 본 연호의 페니스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아까보다 더 커진 듯했다. 깊은 곳을 더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어 미주는 그저 매트리스에 얼굴을 묻으며 즐거운 고통의 시간을 못 이기는 척 만끽해 보기로 했다.
* * *
“미주야, 같이 갈 데가 있으니 일어나 봐.”
“잠 좀, 잠이라도 좀 자게…….”
눈도 못 뜨는 미주를 연호가 억지로 깨우고 있었다.
“제발, 나 좀 그만 괴롭혀… 잠이라도 재우고 하든가…….”
미주가 눈도 못 뜬 채 주먹을 꽉 쥐고 제 가슴을 때리지만, 연호는 그저 웃으면서 미주를 계속 흔들어 깨웠다.
“아침에 가야 해. 빨리 일어나. 눈곱만 떼고 나가자.”
“나쁜 놈, 개새끼. 물도 못 마시게 하고 밥도 못 먹게 하고 잠도 안 재우면서 섹스만 하면 사람이 죽지. 이 천하의 색정광 같으니라고.”
미주가 일부러 잠이 덜 깬 척하면서 방언이라도 터진 듯 욕해도 연호는 급하다는 듯 저를 일으켜 세웠다.
“섹스 중독자랑 갈 데가 있으니깐 빨리.”
미주는 저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연호의 차 안에서 비몽사몽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저를 깨우는 연호의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뜨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일어나. 하필이면 날씨까지 좋아서 좋아.”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미주가 눈을 비비며 연호가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발을 움직였다.
“어? 여긴 또 어디예요? 이번에는 서드 하우스?”
너무 넓어서 휑한 느낌까지 드는, 햇빛이 쏟아지는 너른 창을 가진 이층집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며 연호에게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연호가 뒤에서 안으며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면서 묻자 미주는 계속 창밖만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한강이 이렇게 멋지게 보이니 당연히 마음에 들죠. 여기도 연호 씨 개인 소유 집인 거예요?”
“아니, 이제부터 우리 둘이서 살 집.”
“…….”
연호가 미주의 머리카락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 뭔가 결심한 듯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리고 한 발자국 떨어져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삐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 비즈니스 이야기를 좀 해 볼까?”
미주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는 집 안을 눈으로 한 번 훑어보고는 미주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비즈니스. 어디 한번 협상해 봐요. 이번에는 무슨 약점을 잡아서 날 협박할지 궁금해져.”
미주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살짝 째려본 후 최대한 도도한 표정으로 연호에게 물었다.
“우리 계약도 좋은데, 더 중요한 거래가 생각났거든.”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어요?”
“어, 있어.”
연호가 한 발자국 제 앞에 다가오더니 뺨을 어루만졌다. 마주친 눈빛이 주는 진지함에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미주가 생각할 때 연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가족이 되는 거.”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이 먹먹해졌다. 가족, 가족이라. 세상천지 혼자였던 제게 가족이 생긴다니.
미주의 눈가가 살짝 촉촉해지는 걸 느낀 연호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왕 결혼하는 거 가족도 되면 좋잖아?”
“…….”
“Deal?”
그건 어쩌면 저에 대한 감정을 연호 나름대로 표현한 거로 생각했다. 꼭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깐. 그래서 미주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Deal.”
두 번째, 계약 성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