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작전상 후퇴 (19/53)

18. 작전상 후퇴

* * *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솔직히 다 느껴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눈이 붓다 못해 그냥 사라지다시피 해 어쩔 수 없이 안경을 쓰고 출근했는데 말이다. 처음 보는 제 모습에 전략실 선배들이 몰래 눈빛을 주고받는 걸 미주는 알고 있었다.

‘아, 뭐라고 생각할까? 다들 뭔가 실연이라도 당했냐고 막,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겠지?’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 해도 침울하고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이 꽃처럼 화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전략실 모든 사람이 저를 보고 쩔쩔매는 게 웃기기도 했다. 심지어 사수인 최 대리는 뜬금없이 커피를 타서 주고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주 씨. 힘들면 차라리 조퇴해. 내가 차장님한테 잘 말해 줄 테니깐.”

제가 이렇게 전략실에서 애지중지, 모든 선배에게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어제 진우의 일방적인 캐나다 강제 추방 통보에 그대로 알겠다며 차현을 그만두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자리 지킬 거야. 이제 겨우 낙하산이라는 아니꼬운 시선이 사라졌는데, 정말 열심히 해서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설령 진우의 철퇴에 얼마 못 버틴다고 해도 최대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든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 짓겠다고 마음먹으며 제자리에서 열심히 할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에 메시지 알람이 떴다.

[조금 있다가 최 대리 통해서 부를게.]

오전 내내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한 연호에게서 온 텍스트에 미주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짧게 마주친 남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누군가와의 전화를 끊더니, 사무실을 벗어나고 있었다.

미주가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보며 반쯤은 딴생각을 하면서 손을 움직이고 있을 때, 최 대리가 다가와 책상을 두 번 톡톡 두드렸다.

“대리님.”

“미주 씨.”

저를 따라오라는 고갯짓을 하는 최 대리의 뒤를 따라 탕비실로 향했다. 최 대리는 탕비실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걱정이 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차장님이 미주 씨 찾는데 나랑 미리 말 맞추고 들어가.”

“아, 네. 네?”

“차장님이 자꾸 미주 씨 뭔 일 있냐고 왜 저렇게 풀이 죽었냐고 묻길래 내가 적당히 둘러댔어.”

“아…….”

“내가 아침에 미주 씨 실수한 거 있어서 조금 혼냈다고 거짓말했어. 그러니깐 절대 사생활 이야기하지 말고. 알잖아? 차장님, 개인적인 일 회사까지 끌고 오는 거 싫어하는 거.”

아마 최 대리는 제가 진짜 애인이라도 있어 헤어진 줄 알았나 보다. 뭘 모르는 사람 좋은 사수의 배려가 담긴 선의의 거짓말에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네, 고마워요, 대리님. 그렇게 말할게요.”

“차장님 앞에서 눈치 없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우리 맡고 있는 프로젝트, 자료 조사가 미흡해서 혼냈다고 했으니깐 그렇게 말해, 알겠지?”

“넵.”

“나한테 혼난 미주 씨를 차장님이 좀 풀어 주겠다고 불러 달라 했으니 회의실로 가 봐.”

최 대리의 따뜻한 배려에 차현을 그만두지 못할 한 가지 이유가 더 늘었다고 생각하면서 연호가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안경을 쓴 미주가 샐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보고 싶네. 이리 와서 얼굴 좀 보여 줘 봐.”

함께 밤을 보낸 이후 처음 가까이에서 보는 미주에게 연호가 다가서며 웃었다.

“이런 얼굴 봐서 뭐 하게요?”

“안경 쓰니깐 있지, 뭔가 또 달라 보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제 허리를 끌어안는 연호에게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뒷걸음질 쳤다.

“회사에서는 이러지 마요.”

“왜? 누가 본다고.”

“안 그래도 솔직히 나만 회의실로 불러내는 거, 선배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려면 얼마든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생각 안 해 봤어요?”

“왜? 그게 뭐 대순가?”

“…….”

미주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중얼거리며 회의실 책상 위로 걸터앉았다.

“한번 같이 잤다고 갑자기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세요.”

“내가 그랬어?”

“방금도 막 허리 만졌잖아요. 그러지 마요. 진짜 싫으니까.”

“뭐, 일단은 알았어.”

슬그머니 미주 옆에 따라 앉으면서 건성으로 대답한 연호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옆에서 다리를 앞뒤로 흔들고 있는 걱정 어린 미주의 표정을 보면서 슬쩍 말을 꺼냈다.

“어제 상황은 대충 알고 있어. 그래도 어떻게 된 건지 알려 주면 혹시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와줄게.”

미주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연호를 보면서 뭔가 재밌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도 비슷한 질문 받았어요. ‘미주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하니깐 나한테 말해 봐’.”

미주가 안경을 올리면서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연호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정재민. 그래서 어제 집에 같이 있었던 거야?”

“이쪽도 날 감시하긴 매한가지네.”

“서진우랑 같은 선상에 날 두지 마. 기분 나빠. 난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똑같은데, 뭘.”

역시 연호가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 것처럼 환한 덕에 미주가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뭔가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조금 허물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나란히 앉아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재민 오빠가 퇴사는 어떻게든 막아 주겠대요.”

미주가 아무렇지 않은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걱정하지 마. 내가 안 이상 서진우 때문에 회사 그만두는 일은 없을 테니.”

제 말에 살짝 묘하게 웃는 미주를 보면서 연호가 재차 물었다.

“서진우랑은 어떻게 된 거야? 나라고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는 않다고.”

“…오빠가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싸웠고 우린 깨졌어요.”

마치 연인과 결별이라도 한 듯한 말투로 미주가 담담히 내뱉는 사실에 연호는 잠시 뭔가 생각한 뒤 말했다.

“우리 거래, 네가 서진우한테 어제 말했으면 지금쯤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하지 못했겠지?”

미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약속은 지킬게. 그러니 서진우가 주제 파악할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네, 인질이 되어 드리죠. 살인…… 덮어 주기로 한 거 잊지 말아요.”

알겠다는 듯 연호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자 미주도 조금 편한 얼굴로 어제 있었던 일을 알렸다.

“오빠가 회사 그만두고 캐나다에 가라고 해서 못 간다고 버티다가 홧김에, 오빠한테 질렀어요.”

연호와의 계약 때문에 일부러 진우와 인연을 끊는 고육책을 썼다는 걸 숨겼다. 마치 다투다가 말실수를 한 것처럼 말했다.

“내일, 그러니깐 오늘이네요. 토론토로 가라는데,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싸우다가 말해 버렸어요.”

“우리 일?”

“아니, 오빠가 날 보호하고 통제하고 있었던 거 안다고, 숨 막히고 짜증 난다고 막 던지니 오빠도 열 받아서 나 이제 안 본대요.”

“서진우 입장에서는 열 받을 만했겠어.”

저와의 관계에서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데 말이다. 심지어 미주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으니 진우가 길길이 날뛰는 그 심정을 왠지 알 것 같았다.

“서진우랑 끝났다니 난 솔직히 좋은데?”

“그래, 이 나쁜 놈아, 내 불행이 그렇게도 좋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반은 진심인 듯, 반은 농인 듯 반말 속에 섞여 있는 미주의 마음에 연호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덕분에 이제 너한텐 나밖에 없잖아?”

미주의 안경을 벗겨 낸 연호가 마치 해치지는 않겠다는 듯 그녀의 턱 끝을 살짝 잡고는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하지만 제 다음 행동이 뭔지 알 만하다는 듯 오히려 더 빤히 보고 있었다. 연호는 미주의 입술에 닿을락 말락 할 때쯤 움직임을 멈췄다.

“키스 정도는 좀 봐줘.”

미주는 바로 코앞에서 저를 뜨겁게 내려다보고 있는 연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잘난 척 마요. 재민 오빠는 중립인 것 같긴 한데 아마 내 편일 테니깐.”

“…중립은 보통 병신들이 제일 잘하는 짓이지.”

거의 닿기 직전까지 온 연호의 입술을 미주는 고개를 살짝 돌려 피하며 중얼거렸다.

“…키스는 무슨, 회사에서는 절대로 내 몸에 손대지 마요.”

미주가 저를 밀어내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긴, 누가 볼 수도 있으니.”

연호는 아쉽다는 듯 책상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미주를 마주 보면서 섰다.

“일해야지. 이왕 회사 끝까지 다니기로 한 거 열심히 해 봐.”

상사의 얼굴로 돌아간 연호를 보면서 미주도 그가 벗겨 놓은 안경을 다시 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네, 차장님.”

“오늘은 금요일이니깐 야근 없이 퇴근해.”

“우와, 역시 차장 빽이 좋기는 좋구나.”

“그리고 당분간 집에는 내가 데려다줄게. 서진우가 빡쳐서 잠복해 있다가 너 납치라도 할 거 같거든?”

연호가 조금 장난스럽게 건네는 말에 미주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했잖아요. 우린 헤어졌다고.”

누가 들었다면 정말 연인과 헤어졌다고 생각할 말이었지만 연호는 그게 미주 나름의 유머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양다리는 끝났으니 이젠 나한테 올인해.”

“글쎄, 결혼한다고 했지, 연애한다고는 안 했는데.”

장난스럽게 제 말을 받아치는 미주가 안경 뒤로 표정을 숨기고 있지만 말이다. 그게 슬픔이라는 걸 느낄 수 있어 연호는 뭔가 명치가 찌르르한 기분이었다.

“네, 네, 마음대로 하시죠, 윤미주 씨.”

미주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피식거렸다. 연호는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한 번 쓰다듬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서진우라면, 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회사 계속 나오는 거 보면 배알이 꼴려서 가만 안 둘 것 같아서 그래.”

“…….”

“아무튼, 퇴근하고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편의점 앞으로 와. 거기서 기다려.”

“그래요.”

“뭐라도 비싸고 힘 나는 거 먹이려고 했는데 네 몰골을 보니 그냥 집에다가 얌전히 데려다줘야 할 것 같네. 오늘은 그냥 쉬어.”

연호는 미주의 어깨를 한 번 톡- 치고는 회의실 문을 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미주도 뒤이어 회의실 문을 닫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부었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안경을 안 써도 될 때쯤 되니 연호가 말했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조수석에 앉아 창문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퇴근 시간에 북적대는 도로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 밀릴 시간이니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신호를 받고 잠시 차가 멈췄을 때였다. 연호가 저를 보면서 부드럽게 건네는 말에 미주도 고개를 왼쪽으로 틀어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고 일어났는데 어디 지하실 같은 곳에 끌려가 있으면 어쩌지?”

“걱정하지 마. 감금시키더라도 펜트하우스에 감금시켜 줄 테니깐.”

“그건 좋다. 기대할게요.”

연호의 농담에 희미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는 제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비슷한 미소를 머금고는 다시 핸들을 움직였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연호의 말대로 눈을 감아 보았다.

어젯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해 그런지 머리가 빙빙 돌고 눈 안이 마치 모래가 서걱서걱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뻑뻑했다. 가슴속에 가득한 비밀과 불안한 걱정들에 짓눌려 미주는 짧은 잠을 청해 보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눈만 감은 채 복잡한 상념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을 때, 차가 멈춰 섰다.

“데려다줬으니 커피 한 잔 정도는 줄 수 있겠지?”

저를 따라 내리는 연호가 너무 대놓고 의도를 빤히 노출하니, 미주는 순간의 고민을 잊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커피 없어요.”

“저번에 다 봤어. 비싸 보이는 기계까지 있던데 거짓말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차에서 내려 연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미주의 바람과는 달리 연호는 옆에 슬쩍 다가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어색한 침묵도 잠시, 연호를 투명 인간 취급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미주는 능숙하게 집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를 해지하더니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진짜 커피만 마시고 가요. 그럴 기분 아니니깐.”

퉁명스럽게 말하지만 수줍음을 숨기고 싶어 그런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연호는 저를 째려보면서 들어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미주를 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무슨 소리야? 난 진짜 잠 깨려고 커피 달라는 거였는데?”

“…….”

“혹시 야한 생각 한 건 아니지?”

“아니거든요.”

“역시, 야한 생각 했네.”

“말을 말아야지, 내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치던 미주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연호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인기척에 자동으로 켜진 현관 센서 등에 비친 집이 어딘가 싸늘함이 맴돌았다.

미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실을 지나 중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조명을 켜자, 놀라워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섰다.

“왜 안 들어가고……!”

미주의 뒤에 선 연호도 눈이 커지면서 놀랍다는 듯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거실.

전에 미주가 뻗어 버리는 바람에 온 적이 있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아기자기한 공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사라도 나간 것처럼 먼지 한두 개쯤 떨어져 있는 거 말고 완벽하게 빈집인 형태로 말이다.

연호는 몸을 움직여 오른손으로 제 입을 가린 채 너무 놀란 표정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미주 앞에 섰다.

“서 실장 짓이네.”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미주를 가만히 보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발을 움직여 문이 열려 있는 방들을 하나씩 들어가 보았다. 하나같이 모두 짐이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연호도 뭐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입을 다물고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할 때 미주가 피식거리면서 웃었다.

“오빠가 내 흔적 지웠네요. 이게 오빠 방식이에요. 당한 만큼 두 배로, 복수는 처절하게.”

“이거 가택침입에 절도야. 경찰에 신고해도 서진우 할 말 없……”

“아니요, 오빠 집인걸요. 애초에 이 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는 걸,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네… 나는 그저 오빠가 지금까지 배려해 준 덕분에 이렇게 넓은 집에서 걱정 없이 호의호식하고 살았던 건데 이젠 오빠가 더는 날 위해 줄 필요가 없게 됐으니깐.”

“…….”

“그런데 이건 생각 못 했어요. 집 비밀번호 안 바꾼 건 들어와서 이 꼴을 보고 알아서 나가라는 오빠의 뜻이겠죠.”

울 것 같지만 울진 않는 미주가 담담하게 하는 말에 연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 그녀의 불행은 모두 제 탓이라는 걸 알기에 어설픈 위로를 건넬 수 없었다.

그래도 미주가 더는 예전처럼 손을 뿌리치면서 경멸의 눈으로 저를 보지 않았다. 연호는 이 정도라도 괜찮다고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내가 상황을 정리해 줄게.”

“왜, 인제 와서 나를 협박했던 게 미안해지기라도 한 거예요?”

조금 날카로운 미주의 말에 담긴 가시가 느껴져 이렇게 대답했다.

“너랑 서진우가 이렇게까지 될 줄은 예상 밖이었어.”

“그럼 차연호 씨가 생각한 예상은 어느 범위까지였나요?”

미주가 조금 처연하게 저를 올려다보고 있어 망설이다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서진우도 이걸 기회로 생각하고 널 이용하지 않을까 했어. 내가 널 건드리는 걸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했거든. 그놈이 이미 우릴 방관했다는 거 난 알고 있었어.”

“그래서요?”

“그럼 난 다시 그걸 역으로 보란 듯이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있지,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진짜 내가 나쁘게 마음먹었다면 한식당에 널 데려갔을 때 뭔 짓이라도 했을 거야.”

“그럼 진우 오빠 일을 알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날 가지고 놀 생각이었는데 오빠 일 알고는 계획을 바꿨다, 왜냐면 내가 제안을 절대로 거절 못 할 걸 계산에 넣고 어떻게 해 보려고 했는데 내가 이상한 애인 거 알아서 실패했다, 이게 맞나요?”

미주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제 추리가 맞는지 범인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추궁했다.

“결과론적으로는 성공했으니 실패라고 취급하지 마. 전에 말했지만, 너랑 자고 싶은 건 지금도 그때도 진짜 진심이었어.”

“지금도…라고요?”

“아, 커피 얻어 마시고는 라면 좀 달라고 해 볼까 했거든.”

“…그놈의 라면 먹고 갈래는 진짜, 어휴. 야한 생각은 이쪽이 하고 있었네. 아, 정말 싫다.”

“너무 진부했어?”

“너무 식상해서 탈락.”

질렸다는 듯 장난스레 몸서리를 치는 미주의 손을 더 세게 잡아 쥐고는 빙그레 웃으며 생각을 숨겼다. 미주가 무심결에 흘렸던 말 때문에 제 안의 그릇된 욕망에 불이 켜져 그녀를 협박했다는 말을 굳이 하진 않았다.

제가 가진 추악한 독점욕과 질투심 때문에 미주를 이 상황까지 몰았다는 진실을 알면 말이다. 안 그래도 저를 미워할 텐데 여기서 얼마나 더 그녀가 저를 끔찍하게 증오할지 잘 알았으니깐.

“아무튼, 속고 속이고, 난리도 아니네요.”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미주에게 이번에는 연호가 물었다.

“너도 날 속이는 게 분명히 있을 거야. 네가 그렇게 순진하게 나한테 끌려갈 거라고 난 생각하지 않거든.”

“역시 눈치는 빠르네요.”

“진짜 숨기는 게 있다면 끝까지 숨겨. 나한테 들키지 말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우리 계약 끝날 때까지 내가 모르게 해요.”

미주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대답했다. 그러자 연호는 잡고 있던 미주의 손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날 죽이고 싶겠지만 난 그리 쉽게는 안 죽어. 그러니 너도 나한테 너무 쉽게 당하지 마. 끝까지 버티고 머리 굴리고 날 괴롭혀. 그래야 내가 선택한 윤미주지.”

“살아남는 사람이 승자가 될 테니, 우리 끝까지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봐요.”

어쩌면 연호와 진짜 처음으로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은 건지도 몰랐다. 연호도 미주가 순순히 뜻대로 끌려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미주 역시 연호가 말하지 않은 비밀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그를 이용하기 위해 마음을 얻으려면 나긋하게 구는 게 맞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갑자기 순종적인 척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원래 그랬던 것처럼 조금 까칠하게 대화의 핑퐁을 이어 가고 있을 때 연호가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이왕이면 같이 살아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귓가에 속삭여지는 상냥한 말에 미주는 팔을 들어 저를 안고 있는 연호를 살짝 안으며 대답했다.

“그쪽이랑 싸우기 전에 내가 지금 당장 죽게 생겼어요. 이거 봐요, 오늘 당장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싸움은 뭔 싸움.”

“그쪽 말고, 차연호라고 부르라니까.”

연호가 살짝 미주를 떼어 내면서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둘만 덩그러니 있는 집 안을 훑어보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너무 심하네. 이렇게 홀라당 남의 짐을 다 빼 버리다니.”

“우리가 부산에 살았을 때, 오빠 별명 뭐였는지 모르죠?”

“…내가 그거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제 말에 미주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불도저 서진우.”

“알 만하네.”

“이제 시작이에요. 아, 내가 아까 회사에서 말 안 했죠? 오빠가 나 금치산자 만들어 버리고 정신병원에 가두려고 준비 중이라는 거.”

“뭐?”

연호가 인상을 쓰자 미주가 저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일단 재민 오빠가 당분간은 어찌 막아 줄 거 같은데, 나도 빨리 내 살길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말한 살길이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어 연호가 표정을 조금 풀며 기쁜 듯 반문했다.

“방금 말했잖아, 내가 상황 정리해 준다고.”

“차연호 씨한테 신세 지기 싫은데, 차연호 씨 아니면 날 도와줄 사람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나 좀 도와주세요.”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미주의 손을 잡았다. 저를 따라오라는 액션을 취하며 고개를 현관 쪽으로 까딱 움직였다.

“일단 내 집으로 가자. 당장 여기서 잘 수 없잖아? 세수도 못 하게 생겼는데.”

“아예 대놓고 집으로 가자고 하면 내가 바로 ‘네, 그래요.’ 이럴 거로 생각한 건 아니죠?”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넌 내 집에 있고 난 호텔 내 방으로 갈 거야.”

미주는 눈을 깜빡이면서 뜻밖의 배려에 조금 놀랍다는 얼굴로 연호를 보았다.

“아니면 반대로 해도 되고. 선택은 윤미주 씨가 하는 거로.”

잠시 생각을 하던 미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집이 나을 것 같아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차현 호텔에 있으면 분명히 어디선가 누군가 날 보고 말이 나올 테니깐.”

“그렇지. 서진우는 어차피 다 알 테니 어디든 부들부들하겠지만 평범한 회사 사람들 눈에는 네가 호텔을 들락거리는 게 확실히 이상하겠네.”

승낙이 떨어지고 연호가 그녀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어?”

그런데 어쩐지 저를 실은 차는 아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미주가 잠시 경계하는 눈치로 운전하는 연호를 빤히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살짝 틀면서 말했다.

“내 집이라고 했잖아.”

하긴, 그냥 부자도 아니고 재벌인데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할 듯싶었다. 미주는 우선 입을 다물고 조용히 제가 가는 곳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서울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타운 하우스.

‘이런 곳이 서울에 있다니. 여긴 어딜까? 세컨 하우스? 별장? 집들이 예쁘게 생겼는데… 드문드문 지어져 있어서 사생활 보호는 확실히 되겠어.’

고급 빌리지처럼 보이는 타운 하우스는 입구에서부터 차량을 수차례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보안에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는 이곳. 딱 봐도 평범한 사람들이 살 것 같지 않은 이곳에 미주가 발을 들여놓았다.

차는 빌리지 중앙의 멋진 전망을 가진 이층집 안으로 들어섰다. 연호와 밤을 보냈던 집은 전형적인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회장님 저택이었다면 말이다. 이곳은 굉장히 모던하고 세련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도착했어.”

“아, 네.”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고 내리니 말이다. 세상에나, 몇 걸음이나 된다고 주차장에서 집 안까지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걸까?

‘부자들은 한순간도 걷기가 싫은가 봐. 전의 그 집도 그렇더니.’

미주는 지금 서 있는 이곳에 약간 압도되고 있었다. 마치 동남아에 있는 풀 빌라에 놀러 온 것 같은 이상한 기분. 앞선 연호의 뒤를 따라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폐부로 스미는, 서늘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한 이질적인 공기 온도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여긴 차연호가 최근에 안 살았던 걸까? 어째 썰렁한 것이 좀 무섭기도 하고.’

건물에 축열된 온기가 전혀 없는 냉랭한 인테리어의 차가움에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그런 저를 보고는 연호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피곤하다는 듯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어딘지 궁금하지?”

“조금은요.”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여긴 내 집이야. 전의 그 집은 아버지와 누나랑 살았던 본가의 개념이면 여긴 내 개인 소유 하우스.”

“그런데 평소에 여기서 사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너무 온기가 없어서.”

“맞아. 평소에는 한남동 집에서 사는데, 거긴 사람들이 있으니깐 여기가 더 나을 것 같아서.”

그가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미주도 알고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와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려 넓은 정원을 지나 대문에 다다랐을 때, 일종의 집사인 듯한 점잖은 중년 남자가 별채 같은 곳에서 나타났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택시를 잡아 드리겠습니다.’

그 말 말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입이 무거운 대저택의 관리인에게 미주 역시 그저 고맙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여긴 케어해 주는 분들이 안 계시는 건가요?”

“있기는 한데 가능하면 여긴 내가 직접 치워. 누가 들어오는 게 싫어서.”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미주를 보면서 연호가 옆에 앉으라는 듯 소파를 손으로 두어 번 쳤다. 하지만 미주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연호의 바로 옆이 아니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연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걱정하지 마, 오늘은 안 잡아먹을 테니깐.”

“여기서 내가 왜냐고 묻는 것도 이상하겠죠?”

“솔직히 아예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나도 피곤하고 너도 복잡할 텐데 일단 오늘은 작전상 후퇴하려고.”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면서 슬그머니 웃는 미주를 보면서 연호가 말했다.

“주말까진 여기 있어. 월요일 새벽에 기사 보낼 테니깐 그거 타고 출근하고.”

“며칠만 신세 질게요. 살 곳, 빨리 마련할 테니. 아니다. 월요일에 어디 원룸이라도 구해서 나갈 테니깐.”

“다른 건 내일 머리 좀 식히고 따로 이야기하도록 해.”

제 말을 마친 연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듯 어깨를 살짝 돌리며 현관 쪽으로 향했다. 미주도 따라 일어나 배웅이라도 하는 듯 뒤를 따랐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감사 인사는 나중에 받기로 하고,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자. 알겠지?”

연호가 제 뺨에 살짝 손가락을 튕기면서 의외로 쿨하게 집을 떠나자 미주는 슬쩍 웃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벌어지는 뜻밖의 전개를 어떻게든 받아들이리라 생각하며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낯선 공간이 주는 묘한 긴장감에 주방이며 방이며 여기저기 기웃기웃했다. 살펴보니 확실히 최근에 거주하는 사람은 없었던 집인 게 분명해 보였다.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네.”

마실 물조차 없어 미주는 이 집으로 들어오기까지 왔던 길을 되짚어 보았다. 그렇지만 편의점 하나 근처에 없던 것 같았고, 있다 한들 여길 걸어서 나갔다가 다시 걸어서 들어올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오, 그래도 이건 쓸 만하겠어. 남자 거, 여자 거 구분할 상황도 아니고.”

침실로 들어간 미주가 방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서양적인 스타일의 욕실은 파우더 룸이 따로 있어 고가의 남성 화장품 몇 개가 오와 열을 맞춰서 즐비해 있는 게 보였다.

“그래도 씻고는 자야 하는데, 아, 갈아입을 옷도 하나 없고. 생각해 보니 화장할 것도 없잖아.”

욕실 문을 닫고 나온 미주가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중얼거렸다.

“가방에 팩트랑 아이브로랑 립스틱은 있고, 필요한 거는 내일 차연호가 다시 만나자는 뉘앙스를 풍겼으니 그편에 나가자고 해서 필요한 거 사 오면 될 것 같아.”

등에 닿는 바스락거리는 침구가 포근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어제 한숨도 자지 못해 머리가 멍할 정도로 피곤해서 그런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너무 무거웠다.

‘일어나 씻어야 하…….’

눈꺼풀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감긴다고 생각한 순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응…? 응?”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미주가 눈을 번쩍하고 뜨면서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잠들었던 건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깜빡이다가 손에 쥔 네모난 감각에 시선이 향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들었구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연호와 헤어지고 한 시간 정도 지난 시간이었다.

‘깜박 졸았어.’

정말 오랜만의 약 없이 꿈도 꾸지 않는 달콤하고도 깊은 토막잠을 깬 게 조금 아쉬웠지만. 미주는 이마를 짚고는 왜 잠에서 깼는지를 다시 떠올렸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어. 그렇다면?’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단 한 명.

‘뭐야? 빨간 망토 차차가 다시 돌아온 거야?’

연호가 돌아와 지금 같은 집 안에 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피곤하다며 그냥 간다고 하더니.’

순간 어찌할 바 몰라 어리둥절할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미주가 후다닥 이불을 뒤집어썼다. 한쪽으로 살짝 침대의 무게가 쏠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어떡해!’

아마도 연호가 침대 끝에 걸터앉고는 저를 보고 있는 듯했다. 미주는 갑자기 들이닥친 두 번째 위기에 곤란해하고 있었다.

‘숨도 쉬지 말자. 자는 척, 배에 힘주고, 숨 들이마시고.’

뻣뻣하게 자는 척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연호가 미주의 등 뒤에서 천천히 머리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살짝 내리고는 웃음을 머금은 말투로 귓가에 속삭였다.

“이불 쓰는 거부터 다 봤어.”

다정한 말투로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지며 연호가 나른하게 말했다. 그가 내뿜는 약간 더운 숨결에 미주의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모르는 척해 주면 좋을 텐데.”

미주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떴지만, 등 뒤에 있는 연호 쪽으로 돌아보지 않고 볼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걸 그랬나? 자는 줄 알고 물건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소리가 나서 들어왔어.”

“물건?”

일부러 부루퉁하게 대답했지만, 연호는 그런 미주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말투에서 연호가 지금 기분이 굉장히 좋다는 느낌까지 받자 혼자서 툴툴대는 게 왠지 어린애처럼 구는 것 같아 조금 민망했다.

“집에 가려고 차에 탔는데 이 집에 아무것도 없는 게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뭐 사서 온 거예요?”

“응, 이것저것. 내일 네가 목말라 수돗물 마셨다고 얼마나 뭐라 할지 아찔하더라고. 근데 씨발, 편의점이나 마트가 근처에 없는 게 이렇게 불편한 건지 그동안 전혀 모르고 살았더라고, 내가.”

날 때부터 사람을 부리면서 살았을 연호라 생필품을 직접 살 일이 그리 많았겠냐 싶어 미주는 피식- 웃었다.

“이래서 재벌도 현실 감각이 좀 있어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근데 계속 등 돌리고 나 안 볼 거야? 생각해 보니 확인할 게 좀 있어서.”

“깜빡 잠들었다 깨서 지금 못생김 300%예요. 그러니 안 보여 줄래요.”

유머가 담긴 미주의 말에 연호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에 코 푸는 것도 바로 눈앞에서 봤어.”

“…내가 죽어야지.”

“걱정하지 마, 다행히 불을 안 켜서 여긴 어둡거든.”

“참 나, 빈말이라도 예쁘다 해 주면 얼마나 좋아? 돈 드는 것도 아닌데.”

“거짓말 못 하는 성격이라.”

미주가 화가 난 척 일어나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며 연호를 노려보지만 눈 속에 웃음이 가득한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근데 뭘 확인해요?”

연호의 말대로 방 안이 어두운 덕분에 그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연호의 손이 미주의 얼굴로 다가왔다. 키스라도 하려고 다가온다고 생각한 미주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뜻밖에도 그건 착각이었다.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여기 왼쪽 뺨, 혹시 서진우 그 새끼가 뺨이라도 때린 거야?”

미주가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어 민망함에 살짝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연호가 인상을 찌푸린 채 화가 나 있다는 게 어둠 속에서도 느껴졌다.

“이 정도면 입안도 다 터졌을 것 같은데?”

조금 전 농담이나 하던 목소리와 다른 화를 억누르는 듯한 무거운 톤에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상황이 만화책이라면 연호 뒤로 어둠의 오로라가 피어오를 거라고.

“풉-”

“어? 웃어?”

“웃겨서 웃는데 왜요?”

“아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누군 지금 심각한데.”

“안 심각해도 돼요. 차장님 말대로 약간 터지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으니까.”

“차연호, 회사 아니잖아.”

“차연호 씨, 아니 연호 씨.”

처음으로 이름으로 불러 준 것 같았다. 그러자 화난 연호의 얼굴이 풀어지는 듯해 미주도 살짝 미소 지었다. 대답에 만족이라도 한 듯 연호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미주의 코를 살짝 꼬집고 조용히 속삭였다.

“원래는 내일 이야기할까 했는데 어쩌다 돌아왔으니 그냥 말할게. 여긴 내 집이니깐 내 법에 따라. 상태 안 좋다고, 머리가 복잡하다고 약 먹으면 죽여 버릴 거야.”

갑작스러운 연호의 살인 예고에 미주도 나긋하게 대꾸했다.

“가진 약도 얼마 없네요. 오빠가 다 털어 갔으니.”

“술도 끊어. 아니, 일단 당분간 마시지 마. 상황이 이렇게 안 좋을 때는 가능하면 취하지 말고 맨정신으로 있어야 호랑이한테 안 물려 가지.”

저를 잡아먹겠다는 호랑이가 물려 가지 말라니, 연호 특유의 이상한 포인트를 가진 농담에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뭐 사 왔는지 한번 봐요.”

연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미주도 침대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올려진 봉투에 간단한 먹을거리와 음료가 있어 오늘 저녁에 굶어 죽진 않을 것 같았다.

“삼각 김밥, 안 그래도 배가 좀 고팠는데.”

“그럴 것 같아서 사 왔어. 원래는 네 집에서 뭐라도 좀 얻어먹고 슬쩍 어떻게 해 볼까 하고 따라 들어간 건데.”

“잠 깨려고 커피 달라는 그 말을 반쯤 믿은 내가 바보지.”

“나는 그냥, 네가 야한 생각 하는 것 같길래 장단을 맞춰 줄까 했어.”

“됐네요, 대답도 하기 싫어진다, 이젠.”

저를 보며 눈을 흘기는 미주가 다행히도 침울하지 않은 것 같아 연호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집 비밀번호도 안 가르쳐 줬더라고. ####이니깐 잊지 마. 그럼 갈 테니 내일부터 주말이니 푹 쉬고 아침에 다시 올게.”

“네, 여러모로 감사해요. 조심히 가세요.”

“아, 월요일 새벽에 차 보낸다고 내가 말했던가?”

왠지 연호가 안 나가려고 용쓰는 것 같은 건 미주의 착각일까?

“네, 했어요. 그럼 이만.”

“너무 그렇게 귀찮은 표정 짓지 마. 알았어, 갈게.”

미주가 등을 떠밀자 연호가 살짝 웃더니 가겠다는 듯 손을 한 번 털었다. 철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는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미주의 귀에 들렸다.

‘아무리 슬퍼도, 오빠랑 끝나서 고통스러워도 나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건지, 배고프네.’

연호가 집을 빠져나갔다고 생각한 미주가 먹을 것에 잠깐 시선이 뺏겼을 때였다. 누군가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 강렬한 위압감을 내뿜는 수컷의 정체는 분명 연호일 것이다.

‘어? 돌아간 게 아니었어?’

연호가 나가려다가 다시 문만 닫고 다가온 것을 보지 못한 미주가 살짝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허리를 살며시 감싸는 남자의 손길. 연호가 저를 돌려세워 나른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얽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위험했다. 이 달콤한 느낌.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본능적으로 연호에게 끌리는 섹슈얼한 긴장감이 몸을 짜릿하게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한 번 닿았기에 알고 있는 이 남자가 주는 야릇한 감각. 볼이 달아올랐다고 미주가 생각할 때 연호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경계하지 않는 것도 좋지 않은 습관이야.”

“오늘은 안 잡아먹는다면서요?”

연호는 미주의 머리를 가볍게 잡아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려고 했는데 못생김이 300%나 된다는 여자가 갑자기 예뻐 보여서 발이 떨어져야지.”

연호가 더 가까이 다가와 미주에게 말할 때 거의 닿은 것과 마찬가지인 입술이 부드럽게 스쳤다가 다시 떨어졌다.

“…작전상 후퇴라고 해서.”

그녀의 예쁜 아치가 있는 입술 라인이 바로 눈앞에서 움직이며 말하자 연호는 뭔가 안에서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남자가 후퇴라니, 전진해야지.”

동시에 입술이 닿았다. 갈증에 살짝 말라 있던 미주의 입술이 연호로 인해 젖었다. 말캉하면서도 보드라운 감촉이지만 그렇다고 신사적이지 않은 남자의 입술이 거친 듯이 겹쳐 왔다.

제 뒷머리에 넣은 남자의 왼손이 뜨거웠다. 허리를 놓지 않겠다는 듯 감아쥔 연호의 오른손이 움직이는 자리마다 홧홧했다. 입술을 빨아 먹는 연호의 입술이, 혀가 끈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목마름을 채워 줘 미주는 눈을 감았다.

‘키스가 이렇게까지 야할 수 있다니.’

쪽쪽-거리는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운다고 생각할 때, 연호가 살짝 입술을 떼어 냈다. 제 이마를 미주의 반듯한 이마에 대면서 연호는 취한 듯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이 예뻤다. 오늘 안경을 쓴 모습도 신선했다. 쌍꺼풀이 풀릴 정도로 부어 있던 눈두덩이가 그저 귀여웠다. 미주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요 며칠, 내가 얼마나 널 보면서 참았는지, 넌 절대로 모를 거야.”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밤 이후 달라진 건 미주뿐이 아니었다. 연호 역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온통 그녀에게 사로잡혔었다.

바로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미주를 보면서 욕정을 참아 내는 것 자체가 고문이라, 일부러 핑계를 만들어 외근이라는 말로 도망쳤는데 말이다. 처음으로 미주를 전략실로 끌어들인 걸 후회할 정도 그녀를 미칠 듯이 품에 계속 안고 싶었다.

“지금 상황이 그러니깐, 나도 하루만 더 참아 보자고 간신히 버텼는데…….”

미주가 눈을 떠 눈꺼풀을 지나 뺨에 입을 맞추는 연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편의점은 돌아오기 위한 핑계였군요.”

“그래. 난, 개새끼니까.”

“알면 됐어요.”

“그럼 내가 왜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하는지, 네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다시 입술이 미주를 덮쳐 오면서 살짝 벌어진 틈으로 남자의 혀가 침입했다. 녹진녹진하지만 질척거리기도 한, 예민한 신경이 잔뜩 몰려 있는 혀들이 뒤엉키면서 느껴지는 감각이란.

짜릿했다. 감전되려면 전기가 통해야 하는데. 왜 남자와 여자의 육체가 닿는 걸 찌릿하다고 표현하는지 미주는 알 것 같았다.

“…….”

미주가 양팔을 들고 제 어깨를 붙잡자 연호는 그게 그녀가 보내는 긍정의 신호라는 걸 간파했다. 스킨십을 더 깊게 나눠도 될 것 같아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으며 서서히 침실로 들어섰다.

연호의 뜨거운 키스에 완전히 압도당하며 정신이 아찔해질 무렵, 등 뒤로 느껴지는 쿠션감에 연호를 살짝 밀어냈다.

“아…….”

불과 몇 시간 전에 제자리를 잃어 눈앞이 깜깜했다. 그런데 지금은 침대에 반쯤 누워 남자의 품에 안겨 야릇한 걸 느끼고 있는 제가 경멸스러웠다. 심지어 이 남자는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인데, 어느새 종착점이 되어 있었다.

뫼비우스의 띠.

안과 밖이 구별이 없다면 연호가 적이 될 수도, 제 편이 될 수 있겠지. 꼬여 버린 관계들 속에서 피어나는 뜻밖의 감정이라는 변수.

사랑하지 않겠다,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 남자를 이용하려 여기까지 못 이기는 척 따라왔는데 말이다. 저를 보는 미주의 수많은 질문과 고민이 담긴 숨소리의 뜻을 연호도 모르지 않았다.

“미주야.”

다정함이 듬뿍 담긴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너도, 나도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 돼.”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동물이니깐.”

제 말에 대답하는 미주의 목소리가 편안하게 들리는 건 연호만의 착각일까? 미주의 오른손을 잡아당겨 손등에 살짝 키스하며 말했다.

“그러니 지금은 좀 뻔뻔하게 굴어도 돼. 나도 너한테 억지 부려서 함께하는 거잖아?”

“당신 억지 때문에 내 처지가 어떻게 됐는지 알죠?”

“응, 그래서 책임져 줄게. 너도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나한테 기대 봐.”

미주가 대답도 하기 전에 연호가 입술을 핥았다. 남자의 강하고 단단한 너른 가슴이 은근히 상체를 압박하면서 저를 뭉근하게 짓눌렀다.

“…아까 집에서, 우리 집에서 내가 말했죠?”

겨우 한 번 떨어졌을 때, 숨을 조금 몰아쉰 미주가 말했다.

“나랑 차연호랑 둘 중에 누가 살고 죽을지, 아니 누가 이길지, 끝까지 지켜볼게요.”

“그러면 나야 영광인데…… 이왕이면 즐기면서 서로 지켜보자고.”

마주친 눈동자가 서로를 보면서 웃었다.

불티가 튀었다. 불꽃이 피어올랐다.

애절한 사랑의 마음 따윈 없어도 좋았다.

어차피 욕망을 더 많이 채워 주는 이에게 감정이 생기고 사랑이 피어나는 게 인간의 섭리겠지. 그 욕망이 섹스든, 돈이든, 권력이든 복수든 뭐든 말이다.

“즐기는 거, 나도 잘할 자신은 있는데.”

더는 수줍은 얼굴을 하지 않는 미주가 연호를 나른하게 올려다보았다.

“근데 섹스만큼은 내가 너한테 절대 질 리 없다는 걸 지금부터 확인시켜 줄게.”

이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듯 연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미주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흣…!”

뜻 모를 가느다란 신음이 미주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여린 피부가 입술에 빨리는 게 간질거리면서 야릇해 절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뱀파이어가 왜 목을 물어뜯는지 알 것 같아 미주는 손을 뻗어 연호의 등을 안았다.

죽음은 어쩌면 쾌락을 동반한 황홀경일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늘 말괄량이 동생이었던 윤미주는 죽고 이젠 차연호의 여자로 새로 태어나고 있었으니깐.

연호의 두툼한 혀가 마치 흡혈을 하기 전에 맛을 보듯, 미주의 목을 핥으면서 뜨거운 숨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아래로, 천천히. 목선을 따라 쇄골까지 내려온 입술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을 때, 다른 쪽이 꽤 급히 서두르고 있었다.

“직장인의 비애야. 이렇게 벗기 힘든 셔츠를 너도, 나도 입어야 하니깐.”

늘 언제나 포멀한 오피스 룩을 입고 있던 미주라 연호는 몇 개 달리지도 않은 단추를 풀어 헤치는 그 찰나도 갈급했다. 모든 잠금이 풀렸을 때 드러나는 하얀 상체와 스킨색 브래지어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꿀렁였다.

“못생김 300%가 이렇게 예쁘면 어떡해?”

“…그건 그렇긴 하, 흡!”

몸 위에 반쯤 올라탄 연호가 잠시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입술을 덮쳐 왔다. 혀가 넘나들고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두 사람의 두 번째 밤, 아니 앞으로의 긴긴밤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살짝 부푼 미주의 아랫입술을 연호가 깨물면서 동시에 브래지어 훅을 톡- 하고 풀어냈다. 잠시 떨어진 입술들 사이에 끈적한 선이 생겼다. 가슴을 가리고 있던 패브릭의 밀착감이 느슨해질 때, 미주가 부끄럽다는 듯 어깨를 틀었다.

“너무 보면…….”

미주가 연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며 옆으로 돌아누워 상체를 숨기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 덕분에 모아진 가슴의 볼륨감이 더 극대화가 되어 연호를 자극했다는 걸 몰랐다.

“이렇게 내가 안 보이면 그냥 하는 것보다 더 야해질 건데?”

“으읏!”

마치 뒤에서 끌어안은 듯한 자세가 되자 몸 뒤에 닿은 연호의 몸이 벌써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연호도 저도 아직 옷을 다 벗지 않았음에도 옷 위로 느껴지는 커다랗고 단단한 그 무엇. 민망한 기분에 연호를 떼어 내 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손이 더 깊이 가슴 사이로 파고들 뿐이었다.

“아니, 난. 하읏……!”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커다란 남자의 손에 아름다운 여자의 상징이 닿았다. 원래도 꽤 봉긋한 가슴이 옆으로 누운 탓에 더 탐스럽게 익어 연호는 엄지와 검지로 여린 빛 유두를 살짝 잡았다. 타고나길 저와 다른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손바닥 사이에 가득 차고 넘쳤다.

“미주야, 너 정말 예뻐.”

미주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면서 얼굴을 이따금 스치고 지나갔지만, 연호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혀로 농락하며 왼손으로는 가슴을 만지면서 미주를 녹이고 있었다.

“아아… 아읏.”

육체가 주는 즐거움을 안 듯한 달뜬 미주의 신음 소리. 연호는 침대에 닿아 있는 허리 밑으로 손을 뻗었다. 지익-거리며 지퍼가 내려가는 느낌. 딱 맞는 핏을 가졌던 펜슬 스커트가 제 의지와 관계없이 몸을 벗어나고 있었다.

저를 은근히 찍어 누르는 연호의 허벅지가 가진 완력 탓에 꼼짝없이 팬티만 몸에 남았을 때였다.

“흐응, 아아…….”

팬티 안으로 침입한 남자의 손이 체모에 닿더니 미끄러지듯 갈라진 틈을 만져 대기 시작했다.

“이 정도만 가지고 젖어 있으면 어떡해?”

목덜미에서 입술을 뗀 연호가 그녀의 작고 앙증맞은 귓가에 속삭이면서 귓불을 한 번 깨물었다. 미주의 두 다리가 움찔거렸지만, 연호는 손으로 계속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여기 좋지? 응?”

“응, 몰라…….”

“맨날 모르니깐, 알 때까지 해야지.”

연호가 살짝 몸에 힘을 빼자 꽉 다물려 있던 미주의 허벅지가 수줍게 벌어졌다. 남자의 길고도 두꺼운 손가락이 속살을 벌려 클리토리스를 찾아내자 자꾸만 몸이 꾸물거리는 기분이었다.

압박하듯 클리토리스를 누른 손가락이 불규칙한 움직임으로 원을 그리듯 빙빙 제 속살을 만져 댔다. 배꼽이 간질거리고 뭔가 짜릿한 것이 속에서 생겨나 미주는 자꾸만 목이 타는 느낌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 간지러… 하지 마요. 거기 귀… 이상해.”

이번에는 귀를 치아로 잘근 씹었다가 혀로 귓바퀴를 훑는 통에, 귓속에 울려지는 철벅거리는 소리에 미칠 것 같았다. 그때 가슴을 움켜쥐고 만져 대던 손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는 게 아닌가! 엉덩이 쪽으로 내려간 연호의 손이 순식간에 팬티를 벗겨 내 미주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아읏!”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팬티를 벗긴 손이 엉덩이 아래로 내려오더니 축축하게 젖어 있는 입구 앞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당하는 야릇한 유린에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아 흐느끼듯 더운 숨을 토해 냈다.

“미주야, 느껴 봐. 내가 기분 좋게 해 줄게.”

연호는 애무로 녹진하게 녹아 나온 애액을 중지에 묻히듯이 질구를 천천히 만져 대다가 살짝 손가락을 넣었다. 뜨겁고 좁아터진 내부에 서서히 중지를 깊게 박아 보았다.

“아, 이상해요…… 몸이… 흣!”

여전히 클리토리스를 만져 대는 다른 손 때문에 느끼기라도 하는지 움찔거리는 내부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게 아니라, 그게 좋은 거야.”

연호의 움직임에 몸이 점점 핑크색으로 피어나는 듯했다. 미주는 연호가 알려 주는 성애의 세계 맛을 조금 본 것 같아 조금씩 저도 모르게 몸을 내어 주고 있었다.

마치 본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예열하듯 여자의 몸이 달아오르게 연호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미끈거리며 쑥- 들어가는 질구에 이번에는 검지까지 넣었다.

“으… 읏으…….”

조금 더 가득 차는 느낌에 미주가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오롯이 아래로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연호가 슬며시 제 몸을 돌렸다. 등에 다시 닿는 이제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시트. 미주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일에 집중하는 연호가 섹시하다고 느낀 건 꽤 오래된 일이었다. 이미 그와 같은 층,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종종 스치고 지나가는 어른 남자가 주는 섹슈얼한 모습을 훔쳐보곤 했었다.

‘7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결국은 이렇게 될 사이였을까?’

어쩌면 연호와 제가 악연이 아닌,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짙은 애무에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흐응….”

아마도 미주는 지금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밑에서 들쑤시는 손가락의 섬세한 움직임에 잔뜩 느끼는 얼굴을 하며 한쪽 팔을 올려 베개를 쥐었다.

연호는 흥건하게 시트를 적실 정도로 먼저 열어 놓은 동굴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흡족한 얼굴로 미주를 내려다보았다. 늘 언제나 눈을 세모나게 뜨고 경계하던 여자를 함락시켜 제 아래에서 신음하게 만드는 정복감에 웃었다.

“넌 내 거야. 이젠 그 누구한테도 못 줘.”

“…다들 하나같이 날 물건 취급이야.”

미주가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말에 연호는 와이셔츠를 벗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거라서 못 줘.”

제가 벗겨 놓은 채로 나른하게 다리를 벌리고 있는 미주의 배꼽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보란 듯이 팬츠를 벗고 브리프를 내렸다. 운동해 탄탄한 복근 위로 딱 달라붙은 엄청난 크기의 페니스를 보며 미주가 시선을 피한 채 얼굴을 붉혔다.

“이러면 있지, 더 귀여운 얼굴이라 울리고 싶어져.”

침대 위로 올라와 무릎을 댄 연호가 제 것을 잡고 미주의 비부 사이를 문지르면서 음란하게 속삭였다. 끝만큼은 부드러운 남자의 선단에서 흘러나온 게 미주의 것과 섞여 끈적끈적한 소리를 냈다.

“아, 연호 씨, 그게!”

그때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는 미주의 어딘가 모를 급한 목소리에 연호가 말해 보라는 듯 입구를 쿡- 찔렀다. 찔러 댈 때마다 눈썹을 찡그리는 미주가 팔을 세게 붙잡으며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었다.

“야! 차연호!”

물론 아쉽게도 절정의 비명은 아니고 저를 성난 듯 부르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연호가 상체를 숙여 미주의 입술에 귀를 갖다 대자 그녀가 무어라 말했다.

“…해야…….”

다른 의미의 레이저를 쏘는 미주의 눈빛에 연호는 몸을 일으켰다.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뭔가를 가져왔다.

“그 대신, 이거 다 써야 해.”

매트리스 위에 장난스럽게 던지는 작은 사각형 비닐의 개수란. 미주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아 눈을 크게 떴지만 말이다.

“아니, 내가 언제……!”

“말했잖아? 얼마나 참았는지.”

“편의점에서 설마……?”

“다른 건 구색 맞추기고. 콘돔만 사긴 좀 그렇잖아?”

비닐을 뜯고 참을 만큼 참았던 페니스에 콘돔을 씌운 연호가 그녀의 어깨를 밀치며 몸 위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힘들면 말하라고 하고 싶은데, 씨발, 솔직히 내가 너무 하고 싶어서 못 견디겠어.”

그의 말과 동시에 느껴지는 묵직한 것이 몸 안에 들어오는 느낌에 미주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직접 닿는 피부가 아닌 것이 주는 조금은 버거운 뻑뻑함. 그렇지만 고통이 아닌 묘하게 은근한 통증이 점점 야릇하게 변하고 있어 미주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여 보았다.

“하읏……!”

처음부터 서로가 짝이었다는 듯 꽉 맞물린 아래가 빈틈이 없었다. 퍽퍽-거리는 속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야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야한 건 제 무릎을 잡고 허리를 움직이는 연호의 입에서 드문드문 새어 나오는 탁성이었다.

미주가 몽롱한 시선으로 올려 볼 때 연호가 상체를 숙여 왔다.

“네 몸, 정말 너무 부드러워.”

두 손을 매트리스에 댄 연호가 미주의 부은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순脣이라고 불리는 여자의 몸 두 군데에 모두 저를 밀어 넣고는 아래도, 위도 모두 먹어 삼켰다. 너무 맛있었다. 그래서 연호는 더 깊게 저를 박아 넣었다.

미주의 혀는 자그만 것이 장난치는 맛이 있었지만, 그녀의 은밀한 곳은 뜨거운 맛이었다. 콘돔을 끼고 있어 마찰되는 감각이 조금 무뎌졌다 해도 내벽이 주는 자극이 너무나도 강했다.

“아…….”

연호가 입술을 떼어 내자 겨우 숨을 쉬는 듯한 미주가 깊게 한 번 뜨거운 숨결을 토해 냈다.

아랫배 전체를 쑤시는 것 같은 연호의 페니스가 점점 더 깊게 저를 공략하고 있었다. 약을 안 먹어도 이렇게 완전히 맛이 갈 수 있음에 섹스가 얼마나 위험한 미약인지 알 것 같았다.

“여기 어때?”

“으으응……!”

속도를 조금 늦춘 연호가 살짝 옆을 쑤시듯 페니스 끝을 틀자 미주도 허리를 틀었다.

“좋지?”

반응을 보아 하니, 절대 싫지는 않은 듯해 연호는 장난스럽게 허리를 앞뒤가 아닌 좌우로 흔들었다.

“아읏, 그게…….”

그녀의 입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 ‘좋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연호는 오른손으로 입술을 한 번 쓸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좋을 때까지, 느낄 때까지 박을 수밖에.”

연호가 정말 무서운 기세로 미주의 허리를 잡더니 제 쪽으로 몸을 퍽퍽 당기기 시작했다.

“아! ……흣! 으……!”

그러니깐 이게 질 내벽 안에서 엉망이 되길 바라며 박아 대는 페니스가 주는 쾌감도 엄청났다. 하지만 두 사람의 비부가 쩍쩍- 소리를 내며 부딪치면서 생기는 진동이 아랫도리로 전해지면서 주는 감각이 너무나도 짜릿했다.

미주가 거의 울듯이 흐느끼면서 신음을 넘어선 소리를 질러 댈 때 연호도 점점 아랫배가 당겨 오면서 사정감이 치솟았다.

“아, 씨발……!”

미주는 짧은 욕설을 지껄이는 연호가 야하다고 생각했지만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그 순간 몸속에서 폭죽이 터진 듯, 육체의 말단까지 전해지는 뜨거움에 저도 모르게 등이 휘고 있었으니깐. 연호 역시 오르가슴을 느낀 미주가 만들어 내는 어마어마한 수축감이 주는 타이트한 감촉에 더는 참지 못하고 파정을 했다.

하지만 콘돔을 다 쓰겠다는 연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미주는 처음 섹스를 했던 밤에 정말 연호가 극한의 인내심으로 겨우 한 번만 관계를 맺었음을 몸소 체험 중이었다.

“이제 그만, 나 좀…… 살려 줘요.”

“죽을 때까지 해도 모자란데, 무슨 소리야.”

절륜한 연호에게 말 그대로 몸이 섞여 버린 것 같았다. 그러다 섹스하다 죽겠다 싶을 때쯤 기절이라도 한 건지 기억이 그냥 사라져 버렸는데, 눈을 뜨니 어쩐지 혼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 목말라. 물도 한 모금 못 마시고.”

아니다. 마시긴 했다. 목마르다고 중얼거리니 연호가 생수를 입에 머금고는 제 입에 흘리며 채워 주던 게 떠올랐다.

“하아…… 정말…….”

아침이 되니 수치스러운 것들이 한둘이 아닌 데다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저녁도 먹지 못하고 밤새도록 섹스를 했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어제 차연호가 핑계 삼아 사 왔던 삼각 김밥이라도 먹고 이 짓을 할 걸 그랬어.”

일어나기도 싫었고, 일어날 힘도 없었지만, 솔직히 갈증이 너무 났다. 힘이 없으니 이불조차 무겁다고 느껴져 간신히 침대로 내려왔다.

아마도 연호가 가져다 놨을 로브에 팔을 대충 끼웠다. 벗은 몸을 가리며 입고 있던 옷들이 바닥에 마음대로 흩어져 있음에 실소를 터트렸다.

“팬티는 입어야지.”

그리고 어기적어기적 후들거리는 다리로 침실 문을 열었는데 말이다.

“어?”

연호의 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같이 밤을 보낸 미주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런데 이 인간은 잠이 없는 건지, 정말 피곤하지도 않은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젯밤, 내 기를 다 빨아먹어서 생생한 건지.

거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차를 마시면서 문 넘어 들려오는 미주의 끙끙 앓는 소리를 들으며 연호는 혼자 피식 웃고 있었다. 언제쯤 미주가 거실로 나올까 하고는 침실에서 새어 나오는 투정 소리에 감각을 집중하고 있을 때 그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있었어요?”

문을 열고 나온 미주가 저를 보고는 마치 못 볼 것 본 양 깜짝 놀라자 연호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가? 원래 내 집인데.”

“아, 그렇지. 근데 왜 출근 안 해요?”

눈을 끔뻑이는 미주가 여전히 잠이 덜 깬 소리를 하자 연호는 귀엽다는 듯 대꾸했다.

“토요일이잖아. 그리고 우리 같은 회사야. 심지어 같은 부서.”

“아, 그렇지.”

“뭐가 계속 ‘아, 그렇지.’야.”

“아, 그렇네요.”

여전히 어딘가 멍해 보이는 미주가 웃겼지만,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 저라서 그저 좋았다.

“일단 좀 씻고 정신 좀 차려. 밥 먹어야지.”

“…응.”

연호가 턱 끝을 치켜드는 방향으로 미주가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물소리가 나고, 조용해진 욕실에서 드라이기 소리가 들렸다.

조금 쭈뼛거리는 미주를 식탁에 앉힌 연호가 맞은편에 앉았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식탁 위에 차려진 뜻밖의 요리. 미주는 눈앞에 놓인 음식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연호 씨가 이거 다 만든 거예요?”

“아니, 사람 시켜서 사 왔어. 자, 이거 전에 맛있다고 했잖아.”

연호는 미주의 앞으로 샐러드 접시를 살짝 밀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물부터 좀 마시고요. 난 또, 혹시나 만들었나 했네.”

미주가 물을 꿀꺽꿀꺽 삼키며 하는 말에 연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네가 원하면 다음번에 만들어 줄게.”

그 말에 왠지 미주의 가슴 어디쯤이 뻐근해졌다.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인데 저를 위해서 요리를 해 주겠다는 남자에게 자꾸만 설레는 게 이상했다.

‘나대지 마라, 심장아. 난 이 남자를 이용할 뿐이야.’

미주는 고개를 슬쩍 저으며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찔렀다.

“어? 이거 전의 그 집이죠?”

“맞아.”

사실 미주는 미식가는 아니었다. 그냥 잘 먹고, 무엇을 먹어도 맛있다고 느끼는 그런 덤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치면서 아무 뜻 없이 뱉었을 ‘맛있다’라는 말을 그가 기억이라도 한 걸까?

연호는 천천히 커트러리를 손에 쥐면서 맞은편에 앉은 미주를 한 번 보았다. 다람쥐처럼 두 볼 가득히 오물거리는 게 너무 귀여워 자꾸 웃음이 나왔다.

미주는 그가 가진 뜻밖의 섬세함에 놀라면서 조금 부끄럽다는 듯 접시만 내려다본 채 깨작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둘이서 참 별짓을 다 했는데 말이다. 다시 멀쩡한 얼굴로 마주 앉아 있으려니 미주는 숨 막힐 것 같은 어색함에 입맛이 없었다.

‘배고파 죽겠는데, 입이 소태야.’

그래도 계속 이대로 굶을 수도 없으니 일단 억지로 입안으로 샐러드를 밀어 넣고는 미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리할 줄 아나 봐요?”

“미국에서 혼자 10년 넘게 살았거든? 잘하지는 못해도 나 먹을 거 정도는 만들 수 있어.”

저를 보는 연호의 표정이 딱 이거였다. 사람 뭐로 보고 이러시나.

미주는 의외라는 듯 입술을 내밀고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물었다.

“당연히 미국에도 집안일 도와주는 사람 있었을 거로 생각했으니깐요.”

“대학 가기 전에는 기숙사였고, 대학교는 혼자 나와서 살았어.”

“기숙사? 뭔가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올라요. 카르페 디엠.”

어쩌면 그녀와 나누는 정말 평범한, 서로를 알아 가는 대화가 처음인 듯해 연호는 이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아 자연스럽게 저도 질문을 던졌다.

“캐나다에선 어땠어? 전에 누나가 캐물었을 때 옆에서 들었거든.”

“음… 홈스테이를 1년 동안 했어요. 오빠가, 진우 오빠가 혼자 사는 건 절대로 안 된다고 해서…….”

“웃겨, 서울에서는 혼자 살아도 되고, 캐나다는 안 된다?”

“알다시피 서울에서는 오빠가 다 케어 가능하지만, 캐나다는 너무 멀잖아요? 그러니 아예 홈스테이 주인을 매수했죠. 날 지켜보라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게 말해도 그 속이 문드러졌음을 알기에 연호는 더 깊게 묻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어색한 침묵 속으로 돌아간 건 아니고, 각자가 경험했던 미국과 캐나다의 생활담을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동부? 서부? 어디에 있었어요?”

“하이 스쿨은 서부, 대학은 동부. 넌 계속 토론토에만 있었어?”

“아쉽게도 그래요. 바보같이 여행 좀 다녔어야 했는데. 아, 나이아가라폭포는 가 봤어요.”

수다를 떠는 사이 가벼운 아침 식사가 끝나 가고 있어 연호는 식탁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향했다.

“어? 집 안에서는 흡연 금지예요. 나가서 피워요.”

오랜만에 보는 미주의 짜증이 가득 담긴 표정에 연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여기 내 집인데? 창문 열면……”

“오케이, 거기까지.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래도 나는 담배 냄새 싫어요. 나가서 피워요. 바로 앞에 발코니도 있는데 왜 안 나가?”

미주 역시 식탁에서 일어나 먹었던 접시를 싱크대로 옮기면서 투덜거렸다.

“그렇긴 한데, 한 대만 피우면……”

“됐고. 나가요.”

간접흡연이니 뭐니 레퍼토리가 줄줄 나오는 걸 보니 그동안 서진우와 정재민을 이렇게 들들 볶아 댄 것 같았다.

“…….”

연호는 미주와 말싸움을 하는 게 아무런 이득이 없지 싶었다. 졸지에 제집에서 쫓겨난 모양새로 재떨이를 들고는 테라스로 나갔는데 말이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다가 그냥 어이가 없어 혼자 피식거리다 흡연 욕구가 싹 사라졌다.

다시 거실 창을 열고 거실로 들어와 대충 식탁을 정리하는 미주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치울게, 그냥 둬. 아직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잖아.”

“됐어요. 그럼 진작에 치워 줄 것이지, 담배 피운다고 도망간 사람이 누구였더라?”

저를 한 번 째려보는 미주가 이상하게 섹시해 보였다면, 아마도 눈이 삔 거겠지.

사실은 미주가 식탁 앞에 마주 앉을 때부터 이미 허벅지로 피가 몰리고 있었다. 가져다 놓은 로브 안에는 속옷 정도만 입고 있을 미주라, 그게 상상이 되니까 말이다. 솔직히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밥 먹는 순간만큼은 그저 참아 주려고 애썼다. 이런 사춘기 소년 같은 불끈거리는 마음을 미주는 모르겠지만, 뭐.

연호는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고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침부터 이렇게 젖은 채 샴푸 냄새를 풍기니깐 내가 돌아 버리지.”

대체 무슨 영문이지, 몸 뒤에 닿은 연호의 페니스가 벌써 잔뜩 화가 나 있어 미주는 당황스러웠다. 민망한 기분에 연호를 떼어 내 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손이 더 깊이 로브 사이로 파고들 뿐이었다.

“아니, 난. 흣……!”

눈 깜짝할 사이에 연호가 어깨부터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뜨거운 손길로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척추를 타고 내려오는 짜릿한 전율에 소름이 돋아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연호는 미주의 몸을 당겨 거실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를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는 허리를 끌어당겨 가볍게 입술을 빨다가 키스를 퍼부었다.

놀란 마음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연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거침없이 그의 혀가 입술 넘어 깊은 곳까지 침입했다. 미주는 연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몸을 맡겼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촉촉한 소리가 흘렀다.

살짝 턱을 든 연호가 혀를 농락할 때 미주 역시 고개를 숙여 리듬을 함께해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어제 그렇게 물고 빨고 했는데 뭐가 이렇게 안달이 났을까 하고 말이다. 그때 연호가 딴생각을 하는 저를 느끼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 으읏……!”

연호의 긴 손가락이 미주의 가슴과 엉덩이를 부드럽게 만지더니 가슴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손만 살짝 갖다 대도 쉽게 흐트러지는 로브 덕분에 드러난 상체에는 제가 남긴 흔적들이 가득했다. 빨리고 깨물린 애욕의 상처들.

“이것 봐, 속옷도 안 입고. 이러니 네가 날 돌게 하는 거야.”

혀에 닿은 작은 유두를 연호가 살짝 잘근잘근 깨물면서 간질여 보았다.

“…응…….”

미주가 참았던 가쁜 신음 소리를 흘리자 연호는 더 집요하게 작은 것을 희롱해 보았다. 점점 더 물기가 더해지는 나른한 여자의 목소리.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소리에 만족스러운 듯 연호가 손을 천천히 아래로 뻗었다.

“아, 하지…….”

미주가 허리를 조금 틀면서 연호의 손길을 피하려고 했다.

“정말 하지 마?”

“…….”

하지만 이미 팬티 안으로 닿은 곳은 어제와는 다르게 충분히 젖어 있었다. 미주 역시 단호히 저를 끊어 내지 못했다. 섹스가 주는 쾌감이 뭔지 알게 된 미주가 확실히 지난밤과는 다른, 조금 더 발전된 반응을 보이는 게 좋았다. 그래서 이제 조금 더 욕심을 내 볼까 싶었지만 애써 욕구를 꾹 참았다.

‘미주는 부끄러워해도 내숭 떠는 성격은 아니니깐.’

머지않아 배꼽 아래에서 미주의 가르마를 보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참고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 주기로 했다.

“으응…….”

이제는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반응하는지 안다는 듯 움직이는 손목의 스냅이 젖은 소리를 냈다.

몸 안으로 들어온 연호의 손가락이 천천히 다음을 위해 길을 내고 있어 미주는 저도 모르게 자꾸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그러다 살짝 빠져나온 흠뻑 애액으로 젖은 손이 앞으로 움직였다. 클리토리스를 꾹 누르자 더는 참을 수 없어 연호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아.”

“다시 말해 봐.”

“…좋아.”

미주의 입에서 원했던 말을 듣는 순간 연호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려 거추장스러운 팬티를 벗겨 냈다. 그리고 그대로 제 아래로 찍어 눌렀다.

이제는 거기가 제자리라는 듯 몸속으로 들어간 페니스가 아래에서 저를 찔러 대기 시작해 미주는 연호의 어깨를 꽉 잡았다. 들썩이는 남자의 힘에 자꾸만 몸이 위로 솟구쳐 가슴이 출렁거렸지만, 연호는 가슴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내벽에 닿는 감촉에 미주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연호를 제지했다.

“안 돼요.”

뭐가 안 되는지 알면서 슬쩍 모른 척했던 연호가 아쉽다는 듯 미주를 올려봤다. 살짝 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알았어.”

“아……!”

저를 그대로 안아 든 연호가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다. 미주는 여전히 이게 결합될 수 있는지 놀라워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연호가 침실로 들어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한 손으로 골반을 잡고 미주를 위로 천천히 올릴 때였다. 침대 한구석에서 나뒹굴던 아직 뜯지 않은 콘돔을 연호가 집어 들었다.

“으읏….”

마지막에 빠질 때 입구를 페니스가 건드리는 통에 아래가 움찔거렸다. 미주의 무릎이 매트리스에 닿으며 몸이 세워졌을 때, 연호가 콘돔을 제 것에 씌웠다.

“여기, 이렇게 흠뻑 야해 빠졌어.”

다시 아래를 만져 대는 연호의 손길에 음부가 엉망으로 질척이고 있어 미주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이럴 때는 인내심이 없는 연호가 페니스를 잡고 저를 다시 주저앉혔다.

“흐으…, 아……!”

그런데 이게 또 느낌이 너무 야릇하고 이상해 저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꺾였다. 몸을 잡고 앞뒤로 그가 움직이니 안에 닿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 자꾸만 교성이 터져 나왔다. 찌걱찌걱- 하는 소리와 함께 클리토리스에 닿는 남자의 단단한 치골이 주는 접촉감에 미주는 죽을 것만 같았다.

“여기도 딱 내 손에 잡히는 게 말랑말랑.”

그러다 허리를 잡고 있던 연호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와 엉덩이를 잡았다. 엉덩이가 양옆으로 당겨지는 힘에 아래가 더 벌어져 마찰되니 미주는 속절없이 계속 위에서 흔들렸다.

“아, 흣! 아응…….”

“안 되겠어. 더는 내가 못 해 먹겠네, 씨발.”

연호가 미주의 등을 잡고 그대로 뒤돌려 매트리스에 눕혀 버렸다. 미끈하게 잘 빠진 여자의 두 다리를 어깨에 올리듯이 하더니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이제는 퍽퍽 박아 대기 시작했다.

“흐응! 아! 앗… 흣……!”

뚫어 버릴 기세로 피스톤질하는 페니스가 너무나도 가득 차, 미주는 비부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인간의 몸이 나약하지 않아 그저 연호를 견뎌 보았다. 어쩌면 저 역시 즐긴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에 남자의 어깨를 붙들고는 아래에서 신음해 보면서.

“하, 으응…….”

강하게 한 번 깊이 박히자 안쪽이 움찔거리며 빈틈없이 페니스를 감싸 쥐었다. 점점 강하게 움직이면서 깊숙이 들어오는 힘에 미주는 뭔가 모를 뜨거운 느낌이 아래에서 맺히는 듯했다.

“아…, ……읏!”

이윽고 터져 버린 무언가가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아다니고 있어 미주는 등을 휘면서 절정을 느꼈다. 물론 연호 역시 나직한 짧은소리를 내며 파정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뜨겁게 토요일 아침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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