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체크 메이트
* * *
“…….”
밖을 지키던 요한과 도균은 조용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굳게 닫힌 실장실 문 넘어 상황에 귀를 기울여 보니 분명 뭔가 고성이 오가는 듯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확히 뭐라고 대화하고 있는지 들리진 않았다.
그리고 한 사람, 저 두 사람과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남자. 마치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듯 오싹할 정도로 냉정한 얼굴을 하고 제 할 일만 하는 게 요한의 눈에 들어왔다.
“…팀장님, 그게, 좀 말려 주시는 게…….”
“이요한, 낄 데 안 낄 데 구분해.”
“네, 죄송합니다.”
요한은 긴 한숨을 쉬며 조금 의아한 시선으로 재민을 보았다. 차연호가 미주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직감했지만 말이다. 보통 저들이 죽겠다고 싸우면 언제나 재민이 나서서 중재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보다 이 일에 깊게 개입된 인물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의아했다.
‘역시 실장님한테 다이렉트로 보고 드렸어야 했을까?’
뉴욕에 있던 재민이 제가 보내 준 자료를 알아서 잘 정리해 진우에게 알렸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상했다. 요한이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를 몇 번 도리질을 치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때였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진우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밖으로 나와 말했다.
“안에 있는 거 빨리 치워.”
“…….”
소름 끼치도록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형형한 눈빛까지 내었다. 근거리에서 진우를 보필하는 비서실 직원들은 흉흉한 기세에 뭐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실장님, 저한테는 분부가 없으신가요?”
서슬 퍼런 얼굴을 한 진우에게 재민이 눈치 없는 척 안경을 한 번 치켜세우며 물었다.
“정 팀장, 너도 알아서 잘 처신해. 내 말 뭔 뜻인지 알지?”
“…아, 네…….”
재민의 태도가 재밌는 듯, 진우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자꾸 감싸고돌면, 너도 똑같이 될 거야. 그러니 잘 생각해 보고 선택해.”
재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진우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진우는 알 만하다는 얼굴로 한 번 웃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26층을 빠져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재민은 이지적인 얼굴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침묵 속에서 시간이 짧게 흐르고 있을 때였다.
“팀장님, 미주 씨가 아직 안에……”
“이 과장, 미주랑 나랑 같이 나가면 분명 이상한 말이 돌 수 있으니깐 난 지하 주차장으로 먼저 내려가 있을게. 거기로 조금 있다가 데리고 와.”
“…아, 알겠습니다.”
요한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주가 있을 사무실을 흘낏 보았다. 그리고 믿는다는 듯 요한의 어깨를 한 번 강하게 쥐었다.
자리를 정리한 재민이 브리프 케이스를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퇴근하는 모양새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면서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알지? 방금 있었던 일, 입 다물어야 하는 거.”
재민까지 완전히 사라지자 요한은 여전히 남아 있는 몇몇 비서실 직원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그 뒤 열려 있는 실장실 문 앞에 서서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인기척을 낸 후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미주에게 다가갔다.
“미주 씨, 팀장님이 시간 차 두고 모시고 내려오라고 했어요. 알죠? 회사니깐……!”
요한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왼쪽 뺨이 붉게 물들어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입술도 조금 터진 것 같았다. 진우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 주는 상흔 앞에서 요한은 퉁퉁 부은 눈을 한 미주가 왠지 가여웠다.
“괜찮아요?”
“아니요, 너무 아파요. 오빠 손맛이 이리 맵다니.”
이 와중에도 유머를 아는 미주가 웃으면서 하는 말에 요한은 조용히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이거…….”
미주는 손에 쥐어진 손수건을 한 번 보고 요한을 보았다. 조금 놀랍다는 표정을 한 미주의 머리 위로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가 보면 좀 그렇잖아요? 뺨 맞은 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요한이 양복 재킷을 벗어 제 머리 위로 씌워 주자 미주가 작게 소리 내면서 웃었다.
“이러고 가다가 혹시 아는 사람 마주치면 그게 더 수상한 거 알죠?”
“아, 그러면 차라리 완전히 뒤집어쓰고 가면 되겠네. 마주쳐도 미주 씨라는 거 아무도 모르게.”
“비서실 엘리베이터는 비서실 직원 말고는 아무도 못 타잖아요? 그런데 누굴 만나겠어.”
“그 말은 맞는데 주차장에서 누가 볼 수 있으니깐. CCTV도 있으니.”
미주는 요한의 마음 씀씀이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쓰개치마를 쓰듯 옷을 뒤집어쓴 미주가 요한을 뒤따랐다. 재민이 기다리고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최대한 사람들 눈을 피해 내려갔다.
“미주야, 미안하다. 내가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밖에서 보고만 있었는데…….”
“아니야, 괜찮아. 내가 자처한 일인걸.”
소리를 질러 그런지 조금 쉰 듯한 미주의 목소리가 물기 없이 갈라졌다. 재민은 조수석에 탄 미주를 보며 한숨을 쉬면서 시동을 걸었다.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 좀 하자. 나도 사실은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너한테 먼저 사정 청취하려고 했는데 형이 이렇게 난리를…….”
고개를 끄덕이는 미주가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숨기는 듯했다. 재민은 많이 운 것 같은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서 그렇다 여기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
재민이 운전하는 차가 움직이는 방향을 보아 하니 집으로 가는 듯했다. 미주는 창밖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재민의 진짜 속내를 알지 못했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의 배려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워,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어두운 밤거리를 달리는 고급 세단 옆으로 네온사인들이 휙휙- 지나가지만, 미주는 모든 게 흑백처럼 보였다. 멍하다 못해 그냥 육신만 남은 기분으로 영혼이 반으로 쪼개지는 고통이 있다면 아마 이럴 거로 생각할 때였다.
핸드백 안에 있는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징징-거리며 울렸다.
“왜, 받아.”
“아니, 나중에. 지금은 그냥 다 힘들어서 귀찮아.”
재민은 누가 저렇게 집요하게 미주에게 전화할지 짐작됐다. 미주 역시 발신자가 누구인지 아는 듯 굳이 재민 앞에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느새 제가 사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다다른 차는 조용히 멈춰 섰다.
“아까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하자고 했지? 집에 올라가서 차 한 잔 마시고 가.”
“그냥 요 앞 카페에 가도 돼.”
“아니야, 집에 가서 얘기해. 솔직히 울 것 같은데 밖에서 질질 짜긴 싫어.”
“그래, 그러면 집이 낫지. 보는 눈도 없으니.”
미주가 일부러 밝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재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에 내렸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흥미로운 걸 봤다. 장난을 제외하고는 제가 알기로 지금껏 단 한 번도 미주의 몸에 손댄 적 없던 진우가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손자국과 터진 듯한 입술.
하얀 뺨에 붉게 새겨진 그 흔적에서 재민은 아주 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마치, 가학적인 섹스를 즐기고 난 뒤 여자의 몸에 남은 흔적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미주의 몸에 흔적을 남긴 건 제가 아니라 진우였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좋은 원두를 구했거든. 알지? 요 앞의 내가 알바했던 카페.”
“……응? 아, 거기. 응. 거긴 왜?”
“뭐야, 딴생각하고 있었구나.”
재민이 뭔 생각을 하는지 꿈에서도 모를 미주가 그를 집으로 들이면서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사장님이 원두 좋은 거 들였다고, 나 줄 거 챙겨 놨다 해서 조금 얻어 왔거든.”
미주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와 TV를 틀면서 말했다. 재민도 진우와 미주를 걱정하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척했다. 익숙한 소파에 앉아 갑갑했다는 듯 양복 재킷을 벗은 후 TV로 시선을 옮겼다.
거실에 틀어 놓은 9시 뉴스는 듣는 이 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TV 속 앵커의 말은 미주의 재잘거림에 곧 파묻혔다. 미주가 주방에서 한참이나 지금 그들이 마실 커피의 기원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런 쓸데없는 수다에 재민은 적당히 대답해 주면서 미주가 커피를 내어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척할 뿐이었다.
“난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미주 네가 좋은 거라니 잘 마실게.”
“엄청 비싼 거래. 비싼 거면 뭐, 맛있겠지.”
재민은 꽃무늬가 그려진 금테를 두른 예쁜 커피 잔을 손에 들고는 살짝 후후 불어서 입술에 댔다. 미주 말대로 좋은 커피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좋다고 생각돼서 그런 것인지 확실히 향부터 다른 느낌이었다.
잠시 호로록거리는 소리만 집을 가득 채웠다.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를 마시던 재민이 조용히 소파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자 미주가 저를 한 번 흘깃 보았다. 망설이는지 잔을 조금 더 세게 쥐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 재민이 먼저 던졌다.
“내가 지금 널 도우려면 무슨 일이 생겨서 형이 저렇게 화가 났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
90은 알고 있지만 남아 있는 10은 당사자인 미주와 진우, 그리고 연호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민은 그녀를 돕는다는 핑계로 마지막 퍼즐 조각을 채우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오빠가 아는 게 어디까지인지 물어봐도 될까?”
“네가 아는 만큼 나도 알아. 그러니 내가 모르는 걸 너한테 묻는 거고.”
미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척 뜸을 들이며 최근에 간과하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재민의 안경 너머 숨겨진 서늘한 이성은 진우의 불같은 면을 희석시켜 주는 냉철함이었다.
‘묻기 전에 먼저 실토하라는 오빠 특유의 화법, 내가 잘 알지. 변호사를 어떻게 말로 속이겠어?’
미주는 손에 쥔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은 재민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모른 채 말이다.
“처음부터 이야기하자면, 진우 오빠가 나보고 캐나다를 가래. 그것도 내일 당장.”
“뭐? 캐나다?”
“응. 비행기 티켓이랑 토론토에 내 거처까지 준비했다고 내일 가라고 하길래, 당연히 안 간다고 했지.”
재민은 뭔가 짐작이 된다는 표정으로 계속 미주의 말을 경청하는 척하며 몰랐던 걸 알아내고 있었다.
“캐나다라, 누가 준비해 줬는지 대충 짐작은 가고. 그래도 형이 널 손찌검할 정도로 화를 내다니, 조금 이해가 안 돼.”
“오빠도 알잖아. 거기에 차연호가 있는 거.”
재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주는 망설임 없는 표정으로 일부러 거짓을 섞어 말했다.
“말 나온 김에 이거부터 말하자면, 나 차연호 싫어해. 물론 죽을 만큼 혐오한다, 이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절대로 좋아하거나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네가 차연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진우 형은 왜 저렇게 화가 난 걸까?”
미주는 제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점잖은 신사인 재민만큼은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면서 고민 끝에 우물쭈물 말했다.
“음…… 워딩을 그대로 말하자면 말이야.”
“말해 봐.”
“그게 좀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긴 한데… 원나잇, 해 보니깐 별거 아니라고 말했어.”
“진우 형이 그거 가지고 이 난리를 피우진 않을 텐데.”
섹스를 돌려서 말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재민이 당황하는 기색 없어 오히려 미주가 머쓱해지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고 뺨까지 때린 건 형이 잘못한 거로 생각해. 근데 내 생각에는 차연호 문제가 아니야. 네가 대체 뭐라고 했길래 형이 너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
“다 안다고 했어. 진우 오빠가 날 지켜보고 통제하고 있다는 거 말이야.”
제 말을 자르면서 대꾸하는 미주의 눈빛에 담긴 뜻을 읽었다.
“…….”
너 역시 진우와 똑같이 저를 감시한 공범이지 않냐는 듯 꿰뚫는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미주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진우 오빠가 날 위해 해 주는 모든 것들이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했어. 숨 막힌다고 나를 놓아 달라고 했어.”
“그런 말을 했다니, 나도 조금 놀랍기는 해.”
미주는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한 얼굴로 아직도 조금 부어 있는 왼쪽 뺨을 살짝 어루만지며 담담히 말했다.
“오빠가 내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오빠가 뭔데 참견이냐고 대들기까지 했더니…… 결과가 이거네.”
재민은 속으로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진우가 왜 이리 분노하고 화를 내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이건 차연호가 문제가 아니었다.
진우를 지금껏 살 수 있게 해 준,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인 미주가 저를 거부하고 부정하며 밀어내는 듯한 액션을 취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진우에게 더없이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미주에 대한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거고.
“그래서 오빠도 이젠 대충 눈치를 챘겠지만, 진우 오빠가 이제 나 안 볼 거래. 뭐, 일종의 버림을 받았다고 할까?”
제가 안배해 놓은 장기 말들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재민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미주의 말대로 진우가 절연이라도 선언했다면 말이다. 미주를 건드린 연호를 진우의 손을 통해 응징하려 했는데 사태가 계획한 것과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듯해 재민은 웃었다.
더 재밌어지거나, 더 복잡하게 휘말리거나. 그런데 만약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재민은 재밌는 걸 선택하고 싶어졌다.
연호와 미주의 관계는 생각했던 그대로라 오히려 괜찮았다. 차라리 트라우마가 있을 미주가 섹스에 대해 별거 아니라는 시각을 가지는 게 더 좋았다. 훗날 제가 그녀를 품었을 때 더 이런저런 짓을 하기 쉽다고 생각하면서 재민은 피곤하다는 듯 천천히 안경을 벗어 소파 테이블 위에 두었다.
“미주야, 일이 이렇게 된 거 나도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우리가 널 지켜보고 있다는 걸 네가 완전히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은 했었다만… 지금껏 아무 말 없길래 괜찮은 줄 알았어.”
“처음엔 괜찮은 것 같았는데, 그게 무려 7년이나 지속되면 멀쩡한 사람도 돌아 버리지 않겠어?”
미주는 착잡한 표정으로 다시 커피 잔을 들고는 조용히 한 모금 마셨다. 오늘따라 커피가 입에 너무나도 쓰게 느껴질 때 재민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진우 형 집에 찾아가서 내가 잘 말해 줄 테니깐……”
“아니야, 오빠. 그럴 필요 없어. 이미 끝났어. 진우 오빠 한번 마음먹은 거,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바꾸는 거 우리가 제일 잘 알잖아?”
“그래도, 미주야.”
“괜찮아. 오빠가 눈에 띄면 죽인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오빠 화가 풀릴 때까지 떨어져 지내는 게 맞을 듯해.”
판이 흔들렸다. 아니, 미주가 뜻하지 않게 판을 흔들어 버렸다.
그녀에게 또 다른 비밀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러니 재민은 생각했던 것과 어긋나 버린 결과에 허탈한 듯 웃었다. 제 계략과는 달리 연호와 미주가 갈라진 게 아니라 진우와 미주가 갈라서다니.
결국, 진우를 이용해 연호를 치려고 했던 계획이 본의 아니게 미주 때문에 비틀려 버렸다. 재민은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체크 메이트, 이러면 내가 좀 곤란해지는데.”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는 제 말을 미주는 오직 한 가지 뜻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대답하면서 온통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미안해, 오빠. 중간에서 오빠만 고생하게 생겼어.”
미주가 절대 알 수 없을 복잡한 생각 속에서 재민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을 때였다. 소파 저 언저리에 던져 놓았던 양복 품 안에서 작게 핸드폰이 떨리는 듯했다.
“오빠, 전화 왔어. 혹시 진우 오빠일지도 모르니깐…….”
그러나 미주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재민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화면에 뜨는 낯선 번호에 잠시 멈칫했다.
“네, 정재민입니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 너머 들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번호를 알고 전화한 걸까?
‘팀장님, 저 하정훈입니다. 갑작스럽게 이렇게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상황이 급해서 실례하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진우의 숨겨진 심복인 하 변이 전화를 하다니. 존재를 알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낸 적 없었던 놈이 재민에게 전화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그래,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직접 전화를 다 하는 건지 궁금하긴 하네. 혹시 형님 때문에 전화한 건가요?”
‘네, 팀장님. 지금 제가 길게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간단히 설명해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가 직접 팀장님께 연락을 취했다는 걸 실장님은 아직 모르시니까요.’
“알겠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지.”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지금쯤은 알고 계실 것 같아서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팀장님이 윤미주 씨 신변을 보호해 주셔야 할 것 같아서 전화드린 겁니다.’
재민은 하 변이 말하는 뜻밖의 이야기에 옆에 있는 미주를 한 번 보고는 대답했다.
“일단 들어 보고.”
‘금치산자, 실장님이 지금 윤미주 씨를 금치산자로 만들라고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뭐?”
‘그리고 정신병원을 알아보라 하셨습니다. 미주 씨가 미쳤다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일은 거절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실장님이 직접 움직이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재민은 하 변이 미주를 보호해 주려 위험을 무릅쓰고 전화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하 변이 미주를 어디서, 어떻게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감싸 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캐나다 건, 뒤에서 네가 준비한 거 알아. 그런데 뭐 때문에 지금은 미주를 도우려 하는지 모르겠네.”
‘때가 되면 아실 겁니다.’
“그래, 언젠가 네 정체를 아는 날이 오겠지. 아무튼, 알려 줘서 고마워. 덕분에 미주랑 머리 맞대고 궁리할 시간은 벌었으니 말이야.”
재민은 전화를 끊고 길게 한숨을 쉬면서 저를 걱정스럽게 보는 미주를 보았다. 대체 지금 진우가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
그보다 하 변이 대체 무슨 꿍꿍이로 자신을, 아니 미주를 돕는 건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진우의 숨겨진 칼이 항명하면서까지 미주를 비호하다니.
“방금 전화, 누구야? 내 이름이 거론되니 궁금해지네.”
미주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미주야, 너 혹시 하정훈이라는 사람 아니? 나처럼 변호사던데.”
“…아니, 진짜 몰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오빠,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모르는 이름이야.”
미주가 할리우드급 연기력을 가진 게 아니라면 말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표정을 보아 하니 정말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데 하정훈 그놈은 어떻게 미주를 알고 있는 걸까. 진우를 통해서 미주의 존재를 알고 있겠지만 제가 모를 진우와 하 변의 관계 때문에 완전히 그를 믿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대체 넌 정체가 뭐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 우리 일에 개입이 되어 있는 놈이냐…….’
재민은 머리를 한 번 털고는 벗어 뒀던 안경을 다시 집어 들어 능숙한 동작으로 썼다. 그리고 미주가 잘 알고 있는 얼굴로 차분하게 방금 들은 소식을 알렸다. 일단 하 변의 말을 믿어도 밑지는 장사는 아닐 테니까.
“나 말고 진우 형의 개인적인 일을 봐주는 변호사가 하나 있어. 그놈이 방금 전화가 왔는데, 형이 널 금치산자로 만들라고 지시했대.”
“뭐?”
“플러스로 정신병원도 알아보라 했다고. 내 생각엔 형이 미친 것 같은데. 하아…… 걱정이다, 미주야.”
불안정한 제 머릿속에 가득 찬 우울함과 마음의 병이 깊다는 걸 모를 재민이 질렸다는 듯 도리질 치며 말했다.
“다행히도 내가 변호사라서 그쪽은 잘 아는데 말이야. 진우 형이 널 완전히 이 사회에서 격리해 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
미주는 충격적인 진우의 행동에 손이 바르르 떨려 왔다. 재민이 진우의 생각을 예상하고 제게 설명해 주는 일들. 진우가 정말로 완전히 돌아섰다는 방증이기도 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재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네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법적인 꼬리표를, 형님이 법정 후견인으로 너한테 붙여 버리면 말이야.”
“…….”
“넌 이제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나쁘게 말하면 형의 인형이 되는 셈이지.”
미주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저를 향한 진우의 증오심이 이렇게 깊어진 건 제 탓이었으니, 그를 독하다 원망할 수도 없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 형이 아무리 날뛰어도 널 어떻게 하지 못하게 막아 줄 수 있어. 어떻게 애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을 생각을 했지?”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의 걱정을 덜어 주는 척 원래의 제 모습인 ‘오빠’로 돌아가 보면서.
지금 상황은 판이 흔들린 정도를 넘어서 판이 깨어진 거나 진배없었기에 재민은 진우와 미주 사이에서 제가 원했던 것을 더는 얻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말이다. 머릿속으로 상당히 위험한 아이디어가 문득 떠올랐다.
‘여기에 차연호를 참전시키면 어떨까?’
방법이 조금 달라지긴 해도 제가 원하는 결말이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미주에게 어떤 생각을 심어 놓는다면 말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그 씨앗이 뿌리를 내려 열매를 틔웠으면 하면서 간사한 혀를 놀렸다.
“차연호는 널 좋아하니?”
“설마, 날 좋아할 리가 있겠어? 미워서 죽이고 싶어 안달일 텐데.”
어깨를 으쓱이는 미주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재민은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를 하나 뽑아 건네면서 달콤한 속삭임으로 미끼를 던졌다.
“그렇다면 차연호가 너한테 접근한 이유는 나도 빤히 다 보이기는 해.”
“…….”
“그런데 있잖아. 차연호가 만약 널 진짜로 좋아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미주는 움직임을 멈추고 재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차연호가 싫다면, 놈을 증오한다면. 차라리 널 좋아하게 만들어 봐. 차연호라면 진우 형을 막을 수 있으니깐.”
“뭔 소리야, 그게. 오빠까지 날 이용하려고 드는 거야?”
미주가 살짝 굳은 얼굴로 말하자 재민이 오히려 반문했다.
“오빠까지라니, 혹시 누가 널 이용하고 있는 거야?”
순간 실언을 한 것 같은 미주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실수를 숨기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오빠가 방금 말했잖아? 차연호가 나한테 접근한 이유. 나도 알아. 진우 오빠 때문인 거.”
연호와의 비밀 대신, 재민이 가진 의심의 화살 방향을 공공연하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로 돌렸다. 그러면서 연호를 이용하라는 재민의 말에 질문하며 말실수를 덮었다.
“차연호는 진우 오빠만큼, 아니 진우 오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 사람한테 가서 나 좀 살려 달라, 도와 달라, 이렇게 말하라는 뜻이야?”
어느새 눈물을 그친 미주가 꽤 매서운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재민은 좀 더 노골적으로 미끼를 물게 덫을 놓았다.
“맞아. 아무리 진우 형이 난다 긴다 해도 솔직히 아직은 재벌 3세가 더 파워가 세. 물론 여기엔 회장님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야 하지만. 알다시피 차연호 말 한마디면 공권력도 어느 정도는 좌우할 수 있어.”
“…….”
“그리고 미주 네가 말했잖아? 차연호가 싫다고. 어차피 이 상황에서 진우 형이 널 매장하려 한다면 진짜 솔직히 나보다는 차연호가 더 확실히 널 보호해 줄 수 있어.”
“그래서 차연호의 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그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맞아.”
조금 놀랍다는 듯 미주는 재민을 보면서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동네 오빠이자 첫사랑인 재민이 어느새 이토록 무서운 지략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니.
어차피 연호와 결혼 계약을 맺었다는 걸 재민은 알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미주는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일부러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됐어. 빨간 망토 차차, 변덕이 유난이라 그 인간 비위 맞춰 줄 자신이 없네요. 같이 일해 봐. 은근히 사람 말려 죽이거든?”
“그래도 내 말 한번 생각해 봐. 차연호랑 같이 자고 싶어 하는 여자들, 한 트럭은 되고도 남아. 그런데 넌 어찌 되었든 해냈잖아?”
재민의 말 속에 담긴 뜻이 묘하게 기분이 나빠 미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앞으로 계속 몸으로 차연호를 꼬셔 보라는 뜻으로 들리네. 근데 있잖아. 어째 첫사랑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 기분이 좀 그래.”
미주가 언짢음을 숨기지 않았다. 재민은 노련하게 기분을 풀어 주면서 자연스럽게 제 의도를 말할 타이밍을 잡았다.
“지금 이런 말 할 때가 아니지만, 지금이라서 말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미주야.”
“…….”
“내가 볼 때 너, 차연호한테 관심 있어.”
“뭔 소리야? 싫다니까?”
부정하는 미주의 얼굴에서 거짓말을 읽어 낸 재민은 저 역시 그녀에게 새빨간 거짓을 말해 볼까 했다.
“우리가 서울에 없었던 그 짧은 2주 정도에 차연호가 아무리 환심을 샀다고 해도, 네가 설마 마음에 없는 남자랑 그랬을까?”
“…….”
“네 말대로 좋아하진 않아도 적어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 호감은 있겠지.”
미주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얼굴로 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미주 네가 날 좋아하는 거, 그건 어쩌면 알에서 깨고 나온 새끼가 처음 보는 사람을 어미라고 생각하고 따르는 거랑 비슷한 거라고 나는 그동안 늘 생각했어.”
“…왠지 삐약삐약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아.”
“자식, 농담은. 미주야, 나도 널 좋아해. 그런데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나도 늘 그게 고민이었어. 넌 동생이니깐, 언제나 내 여동생이니깐 이 이상은 어려웠던 것 같았어.”
한 치의 진실도 없는 거짓말로 능구렁이처럼 미주를 천천히 감아 옥죄는 재민의 세 치 혀가 교묘히 심고 있는 게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그 아련함이 주는 감정으로 인해 아마 미주에게 저는 영원히 손에 넣을 수 없었던 남자로 남을 테지. 그 쌉싸름한 여운을 이용해 훗날을 기약하고자 했다.
차현 그룹의 왕좌를 두고 벌어질 진 회장과 차연호의 싸움은 진우와 연호의 싸움이기도 했다. 재민은 아무리 진우가 미주를 짐짝처럼,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한들 그가 진심으로 그녀를 끊어 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연호에게 미주를 뺏겼다고 생각하는 건 저뿐만 아니라 진우 역시 똑같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진우가 독을 품고 지금보다 더 날카로운 칼을 갈 때, 옆에서 살살 부추겨 볼까 했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을 가진 놈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어라.’
전쟁에서 진우가 승자가 된다 한들, 그가 절대로 미주를 취할 수 없음도 잘 알았다. 결국, 어부지리로 미주를 차지하는 건 저일 테니, 지금 억지로 깨진 판을 이어 붙이지 않고 버리는 게 맞았다.
그리고 새 판을 짜기 위해 미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제 체스판 위에 말로 세워 놔야만 했다.
그녀를 차연호의 여자로 만들어야만 했으니까.
“차연호랑 한번 잘해 봐. 누가 알아? 그 냉혹한 차현의 왕자님이 너를 공주님으로 만들어 줄지.”
미주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금 샐쭉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됐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오빠는 그저 내가 내일 회사 사람들 앞에서 강제로 회사 밖으로 끌려 나가는 것만 좀 막아 주면 돼.”
“회사는 절대 못 그만둔다, 이 말이지?”
“응. 이렇게 대책 없이는 안 돼.”
“알았어. 나는 솔직히 네가 이렇게까지 책임감이 강할 줄 몰랐어서 오히려 대견해.”
재민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더니 늦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어.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알았어.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래, 잠이 안 오겠지만 어떻게든 눈을 좀 붙여야 내일 또 새로운 사건이 터져도 대응할 수 있지 않겠어?”
“응, 내 옆에 오빠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고마워.”
“쑥스럽게. 갈 테니깐 자고 낼 연락하자. 나가는 길에 진우 형한테 한번 가 볼 테니까, 뭔가 다른 액션이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주의 어깨를 살짝 토닥이면서 이쯤 하면 되겠다 싶었다. 안녕을 고하고 그녀의 집을 나선 후 지하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타 시동을 걸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진우가 있을 만한 곳이 어딜지, 재민은 짐작돼 그곳으로 핸들을 움직였다.
“자자, 일단 자야 해.”
재민이 돌아간 뒤 미주는 대충 물을 끼얹듯 씻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루 만에 생긴 엄청난 일들이 꿈이 아니라는 듯, 여전히 터져 있는 입안에 비릿하게 도는 연한 피 맛이 느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진우와의 관계와 어쩌면 오늘로 끝난 것 같은 길었던 첫사랑. 그리고 비밀을 숨기기 위해 계약을 맺은 남자까지.
연호와 진우, 재민과 제가 서로를 속고 속이는 이 위험한 게임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게 될까?
“금치산자, 정신병원. 이건 시작에 불과할 거야.”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장 내일 아침부터 무슨 일이 터질지 몰랐다.
“복잡해,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너무 심하게 엉켜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나는 모르겠어.”
그러나 대책을 세우진 못하더라도 급작스러운 태풍에 이대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 휩쓸리고 싶진 않았다. 미주는 침대에서 일어나 깊게 숨을 쉰 후 하나씩 문제를 되짚기 시작했다.
진우는 자신에게 연을 끊자, 절연을 선언했다. 그리고 받은 상처를 곱절로 갚아 주려는 듯 단 몇 시간 만에 정신병원까지 보내려는 진우를 미주는 연호로부터 지켜야만 했다.
물론 재민도 보호하기 위해서이지만 어쩐지 그는 묘하게 누구의 편도 아닌 느낌이 드는 건 괜한 예민함일까?
“감정은 다 빼고 딱 팩트만 생각하자.”
연호는 저를 협박했고, 미주는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잠자리를 가졌고 그 대가로 두 남자의 추락을 잠시라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덤으로 제 비밀도 들켰지만 그건, 일단 논외로 쳐야 할 부분이겠지.
연호와의 하룻밤 덕분에 원하는 걸 얻었으니 미주는 이 모든 것의 인과관계 속에서 초연한 듯 웃었다.
“그래, 차라리 오빠 말대로 차연호를 꼬셔서 최대한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는 거야. 어차피 차연호도 목적을 위해 나를 이용하고 있잖아?”
재민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한다면 재민보다 연호가 훨씬 비바람을 막아 줄 튼튼한 나무임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나는 차연호와 계약했으니 이미 한배를 탔어. 같이 침몰하든 목적지에 같이 내리든 이제 그와 같이 갈 수밖에 없어.”
연호와 저 사이에 놓인 미묘한 감정이 잠시 말랑거렸다 한들, 순간의 쾌락일 뿐임을 이제는 안다. 역시 순진하면 결국 상대에게 먹혀 버리는 잔혹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한 번 더 느끼면서.
“Like와 Love의 차이 정도는 알잖아?”
그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겠다.
연호를 사랑하게 된다면 살인을 숨기기 위해 계약 결혼이라는 거래를 시작하게 된 이 모든 불행을 용서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으며 다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확인했다. 꽤 많이 쌓여 있는,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는 모두 연호로부터 온 것이었다.
‘일부러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는데…… 이젠 뭐든 상관없어졌어.’
미주는 부재중 전화를 남긴 등록되지 않은 번호를 연락처 주소록에 추가했다.
[차연호]
통화 목록에는 이제 오로지 ‘차연호’라는 이름만이 길게 나열되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손을 움직여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요. 내일 만나서 이야기해요.]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연호에게서 회신이 왔다.
[알았어. 일단 푹 자.]
미주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핸드폰을 베개 밑에 넣고는 중얼거렸다.
“자고 일어나면 내일 세상이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 * *
‘일단 연락이 왔으니, 괜히 오늘 나까지 들쑤시진 말아야지.’
연호는 지금 간신히 연결된 미주에게서 온 메시지에 살짝 웃으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매형이 중동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라고 지시한 날에 사고가 터지다니.
“차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비서실에 숨겨진 제 라인에게 뜻하지 않은 정보가 들어와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상한 대로 드디어 심판의 날을 미주가 맞은 것 같은데 말이다. 솔직히 진우와 있었던 일보다 왜 정재민이 지금 함께 그녀의 집에 있는 건지, 그 부분만 자꾸 신경 쓰이고 있었다.
분명히 진우는 제가 미주 앞에 얼쩡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미주에게 붙여진 진우의 사람 하나를 매수하긴 했지만, 그가 진짜 완전히 몰랐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제 예상이 맞다면, 진우가 눈치채고서도 그 어떤 액션도 보이지 않더니 갑작스럽게 이런 과민하게 발작하는 걸 보면 말이다.
‘역시 같이 잔 걸 알아서 저리 펄펄 뛰는 거겠지. 그 꼴을 내가 봤어야 했는데.’
그런데 여기까진 예측했던 상황인데 씨발, 정재민이 갑자기 튀어나오다니.
“차장님, 루이 13세로 어떠십니까?”
“아, 좋죠. 술은 상무님이 알아서 시켜 주세요.”
함께 귀빈을 접대하고 있는 임원이 묻는 말에 적당히 건성으로 대답하며 연호는 미주만 생각했다.
평소에 미주의 집으로는 재민과 진우 모두 다 왕래가 별로 없는 편이었는데 말이다. 오늘 재민의 움직임을 보며 뭔가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서진우랑 싸우고 정재민이 달래 주는 건가?’
물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오빠 동생이 아닌 어떤 남녀의 감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괜한 질투심보단 진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더 궁금했다.
미주와 섹스한 걸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망연자실할까?
레미 마틴이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굉장히 좋아 살짝 웃었다.
그날 새벽,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미주의 얼굴을 꽤 오랜 시간까지 자지 않고 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녀가 너무 예뻐 보였다.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없어 조금 상심했지만 말이다. 핸드폰에 들어온 메시지를 보며 피식- 웃었던 그 순간이 뭔가 좋았다.
‘내일 만나서 달래 줘야겠어. 맛있는 것도 잔뜩 먹이고, 기분도 별로 안 좋을 텐데 선물이라도….’
미주가 이미 제 사람이 되었다고 마음대로 판단 내린 연호는 그저 그녀를 어떻게 즐겁게 해 줄지만 생각해 보았다. 저도 누나가 있기에 형제들끼리의 싸움이 뭔지 잘 알았다. 그러니 내일 만나서 어찌 된 일인지 물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미주가 느낀 사태의 심각성과 제가 인지한 이 파란이 얼마나 온도 차가 큰지,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 * *
한강에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참으로 반짝반짝 예뻤다. 진우는 새카맣게 어둠이 물들어 있는 한강이 보이는 고급 빌라에서 거실 스탠드만 하나 켜 놓고 앉아 창밖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씨발, 술이 왜 맛이 안 나는 거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이미 부산에서 윤씨 남매들 때문에 느꼈었다. 한 번은 희주가 죽었을 때였고, 한 번은 미주에게 끔찍한 일이 생겼을 때. 마지막으로 제 손으로 살인을 저질렀을 때는 앞의 두 사건 때와는 조금 다른 희열도 느껴졌었다.
진우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라면 지금쯤 흰 가운을 입고 잘난 체하며 이 손에 메스를 쥐었을 텐데. 어쩌다가 저는 지금 서울에서 쓰리 버튼 슈트를 입고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는 걸까?
병째로 들고 있는 양주를 벌컥벌컥 마셔 보지만, 혀가 소태라도 된 듯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오른손이 따끔따끔해 살펴보니 언제 다쳤는지 피가 나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양주잔을 보며 미주를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잔을 깨 버렸지.
인상을 쓰며 양주를 손에 부어서 다친 부위를 소독하다가 아까 미주의 뺨을 때린 것이 떠올랐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는지.’
손에 들고 있던 양주병을 집어 던지자 큰 소리와 함께 병이 깨어지면서 마음도 산산이 부서졌다.
“다 널 위한 거였어. 정말 널 위해서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데, 네가 날 이토록 경멸할 줄이야.”
진우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을 때였다. 타인은 한 번도 들인 적 없었던 집으로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혹시 내가 살해라도 당하면 들어와 시체라도 수습해 달라고 알려 준 비밀번혼데, 아직 나 안 죽었다.”
“오늘 미주한테 죽지 않았습니까?”
재민은 깨어진 유리 조각이 널브러진 거실 바닥을 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래, 오늘 난, 미주 손에 죽었지.”
옆에 놓아둔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자 재민이 다가와 라이터를 갖다 대며 불을 붙였다. 들숨에 진우의 담배가 빨갛게 익어 갈 때였다.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저를 바라보던 재민이 천천히 낮은 목소리를 내며 곁에 바짝 다가갔다.
“손은 또 어쩌자고 다친 겁니까?”
재민이 진우의 오른손을 잡고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 냈다. 그러고는 대충 둘둘 말아서 지혈시키는 시늉하며 혀를 찼다. 진우는 그저 재민이 하는 행동을 말없이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었다.
“집은 또 이 꼴이 뭡니까? 다 큰 양반이 나잇값도 못 하고… 어휴, 화난다고 막 이렇게 물건 때려 부수는 것도 어릴 때나 하는 짓이지.”
“…….”
핀잔에도 진우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을 때였다. 재민도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는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일렁이는 불꽃이 손가락 사이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재민이 한 개비를 느긋하게 피우더니 말이다. 제가 앉은 소파 팔걸이에 일부러 보란 듯이 담배를 비벼 끄자 진우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씨발 새끼. 소파 얼마나 비싼 건데.”
“돈이야 나도 많으니 물어 주면 되죠.”
담배를 소파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 비벼 끌 때 재민이 말했다.
“일단 병원부터 가요. 병원 가서 소독하고 찢어진 거면 꿰매기라도 해야……”
“할 말 있으면 그냥 해라.”
재민이 대충 감아 놓은 손수건에 서서히 스며드는 핏자국을 보면서 진우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재민은 미주와 진우를 중재하는 척 늘 그랬듯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부탁했다.
“미주 봐줘요. 회사는 다니고 싶답니다.”
“…….”
“이렇게 감정적으로 일 처리하시면 더 차연호한테 빌미를 준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진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강물처럼 흐르는 도심의 네온사인을 보고 있었다.
“미주도 그간 많이 참아서 그냥 오늘 폭발한 거로 생각해요. 그래도 정신병원이라니, 그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하 변이 너한테 알린 죄를 자기한테 물으라고 하더라.”
“하 변은 형님이 알아서 처리하시고, 저는 미주 금치산자로 못 만듭니다.”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에 놓인 장식장에서 새로운 양주를 하나 꺼내 주방으로 향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담긴 잔을 건네는 진우를 빤히 보면서 재민은 부어 주는 술을 받았다.
“넌 아무렇지도 않니?”
재민은 손에 쥔 잔을 입에 대면서 한 모금 꿀꺽 삼켰다.
“형님도 사실 아무렇지 않잖아요? 차연호가 미주한테 접근하는 걸 방관했으면서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고 저한테 말하는 건 아닐 테니.”
예리하게 정곡을 찌르는 재민의 말에 진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양주를 마시며 제자리에 앉았다.
“제가 맞혀 볼까요? 형이 화난 포인트?”
“…못 맞혀도 넌 나한테 죽고, 맞혀도 넌 나한테 죽어.”
“네, 어디 한번 죽여 보세요. 미주가 차연호랑 잤다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
“미주가 형님 말 좀 안 들었다고, 반항한다고 이렇게 난리 치다니. 유치해요.”
재민이 잔에 담긴 얼음을 달그락거리면서 하는 말에 진우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경고하는데, 미주 그냥 놔둬. 지가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한 건지 알아야 내 옆이 천국이었단 걸 알게 되겠지.”
“그럼 지옥에 있는 미주를 형이 차연호한테서 뺏어 오면 되잖아요?”
재민은 일부러 농담처럼 진우가 진심으로 원하는 걸 살짝 건드려 봤다. 역시, 숨기는 데 익숙한 진우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면서 대꾸했다.
“낮에 말했지? 개소리 작작 하라고.”
“뭐, 그렇다면 나라도 그럴까 합니다.”
재민이 살짝 피곤하다는 듯 안경을 벗었다. 눈을 손으로 꾹 누르면서 하는 말에 진우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능력이 되면, 한번 그래 보든지.”
“됐어요. 미주는 차연호 좋아하니깐.”
슬쩍 흘리는 말 속에 담긴 뜻에 흔들린 진우가 다리를 꼬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양주를 홀짝였다.
“아무튼, 퇴사는 철회하는 거로 알고, 저는 이만 가 볼게요.”
“…….”
다시 안경을 쓴 재민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돌아가겠다는 듯 현관 쪽을 향해 몇 발자국 뗄 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형, 기억나요? 희주 형이 늘 했던 말?”
“……뭐가.”
“둘이 사랑싸움 좀 그만하라고 맨날 그랬던 거요.”
“꺼져, 정재민.”
“낼 회사에서 뵐게요. 그럼 진짜 갑니다.”
진우의 빌라를 빠져나온 재민이 어두운 시내를 유유히 통과하다가 신호에 걸려 차를 잠시 멈췄다. 창문을 내려 담배를 하나 품에서 꺼내 입에 물었다. 핸들을 잡은 손을 조금 느슨하게 쥐면서 생각했다.
“능력이 되면 한번 해 보라고?”
어쩌면 한 가지 계속 배제하고 있는 게 있었다. 서진우와 차연호라는 맹수의 싸움을 붙일 생각만 하고 있지, 왜 제가 그 맹수가 되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힘, 절대적인 힘. 진우는 제 손으로 거머쥐었고, 연호는 날 때부터 손에 쥔 권력.
‘만약 나도 그 힘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권력의 왕좌에 처음으로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의 뒤나 옆이 아닌, 그의 앞이라면, 부산에서의 일 때문에 이토록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늦은 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담배 맛을 더 맛있게 해 주고 있어 재민은 묘하게 웃었다.
재민이 떠난 후 진우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주를 뺏어 오라는 그 말을 계속 되뇌면서 말이다.
미주는 자신이 그토록 가지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는 단 하나였다. 때문에, 재민 옆에 둬서라도 그녀를 멀리 도망가지 못하게 제 옆에 묶어 두고 속박시켜 곁에 두고자 했었다.
하지만 제가 미주에게 남자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재민이 아닌 날 선택해 달라, 너를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는데.
“만약 차연호를 선택한다면 미주 너도, 선택의 결과를 책임져야 해.”
진우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면서 낮게 읊조렸다.
그동안은 이렇게 생각했다.
가질 수 없다면, 옆에서 평생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파멸시켜 버려 그 누구도 갖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