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Plan B
* * *
“실장님, 오셨습니까?”
“요한쓰, 어때, 그간 서울은 별일 없었지?”
“아, 그게…….”
새벽에 인천으로 들어온 진우는 체력도 좋았다. 진 회장은 긴 출장에 피로가 쌓였다며 회사가 아닌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데 진우는 회사 근처 늘 다니는 호텔 사우나에서 샤워만 하고 바로 출근하다니.
덕분에 재민까지 잠시 쉬지 못하고 비서실로 끌려 나왔는데 말이다. 요한이 제 눈치를 보면서 진우에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주고받는 무언의 대화 후 재민이 살짝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요한은 이렇게 진우에게 대답했다.
“네, 조용합니다.”
“미주는 출근했고?”
“네, 늘 그렇듯 아슬아슬하지만, 지각은 안 하네요.”
“가시나, 용케 아직 버티고는 있네.”
진우가 웃자 재민 역시 미주를 말릴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튼, 보름 동안 요한이 네가 고생했다. 밀린 업무 확인해야 하니 정리해서 오후에 올려 주고.”
“네, 실장님. 준비가 다 되었으니 바로 드리겠습니다.”
재민은 진우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며 능숙한 연기를 펼치는 요한을 보았다. 진우를 속일 수 있는 건 아주 짧은 순간일 거라고 생각할 때였다.
“아, 재민아, 하 변 불렀으니 며칠 뒤에 올 거야. 방문자 리스트에서 지우는 거 잊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진우의 입에서 나온 ‘하 변’이라는 말에 재민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역시 여긴 한국이고 온 천지에 진우의 눈과 귀가 널려 있었다.
재민은 안경을 살짝 만지며 생각했다. 판을 뒤흔들 룰 브레이커가 나타나게 생겼으니 계획을 조금 변경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생각한 대로 미주도 연호도 그리고 진우까지 체스판 위에 세워야 할 시간이 필요한데, 아직은 너무 일렀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형님이 하 변을 회사로 불렀다니.’
늘 그렇듯 비밀을 숨기는 데 익숙한 재민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 * *
“미주 씨, 우리 좀 쉬자. 커피 마시러 고고.”
“네, 대리님.”
데스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사수 최 대리를 보면서 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하고 일을 하며 점심을 먹고 커피도 한잔하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곤 했다. 평범한 직장인의 피곤한 하루처럼.
이제 신입 사원 꼬리표를 뗄 때쯤이라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려 노력했다. 야근 역시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할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섹스하게 되면 뭔가 경천동지할 것 같았던 세상은 놀랍도록 아무 일도 없었고, 저 역시 생각보다는 담담했다.
‘나한테만 일어나는 마법 같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다행이고.’
함께 밤을 나눈 이후로 따로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지만, 회사 안에서도 늘 그렇듯 연호는 저를 사무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제는 온종일 연호가 외근을 나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다.
다만 몸을 섞은 뒤 조금 달라진 건 어쩐지 요 며칠 잠들기 전에 연호와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 잘 자라든지, 저녁은 뭐 먹었냐, 일이 있어서 술 마신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미주는 30분 정도 커피를 마시며 전략실 선배들의 수다를 조용히 듣고 있다가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사무실에 앉아 있는 연호를 슬쩍 한 번 보았다.
“…….”
그냥 흰 와이셔츠만 입고 자리에 앉아 뭔가 집중을 하는 듯 인상을 쓰고 있는 게 이상하게도 섹시했다.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를 벗던 긴 손가락이 제 몸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던 감각이 아직 아래에 아릿하게 남은 듯했다.
‘사내 연애, 두 번 했다가는 음란 마귀가 되겠어.’
연호와 제대로 된 사내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뭐.
미주는 고개를 한 번 털어 내고는 마우스를 흔들었다. 화면 보호기가 사라진 모니터는 조금 전까지 제가 하던 작업을 보여 주고 있지만, 왠지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귀국한 진우와 아무 일 없다는 듯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말이다. 이제는 저와 연호의 일을 진우에게 언제 들키게 될지 불안했다.
아직 진우가 뉴욕에 있던 며칠 전만 해도 비밀을 쥔 차연호 때문에 불안했는데 이젠 진우 때문에 걱정하다니. 고작 원나잇이었을 뿐인데 연호에게 믿음이라도 생긴 걸까?
‘그래서 육체는 위험한 거였어. 부부 싸움 칼로 물 베기가 뭔 말인지 이해가 된다, 정말. 같이 잤다고 이렇게 나도 태세 전환이 되는 걸 보면.’
진우와 재민이 버드나무 같은 제 마음을 알면 얼마나 실망할지 두려웠지만, 연호에게 구두 약속을 받아 냈다.
‘덮어 두겠다 했으니 공소시효 끝날 때까지만 우선 오빠 안전을 생각해.’
미주는 텀블러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소리 없는 기합을 넣고 일에 집중했다. 물론 연호가 저를 빤히 보고는 살짝 미소 짓는 걸 보지 못했다.
“조금 늦었네요. 점심 접대가 늦어져서…….”
진우가 호출하는 이유를 이미 간파한 재민은 긴장한 표정을 애써 지우며 늘 그렇듯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맛있는 거 먹고 들어오는 길인가 봐? 씨, 나는 바빠서 아직 밥도 못 먹었다.”
의자에 앉은 진우가 다리를 까딱거리면서 하는 말에 재민은 이렇게 응수했다.
“한 끼 안 먹는다고 안 죽어요. 엄살은.”
“하아, 진짜 재민이 너무하지 않냐? 날 이렇게 막 대하는 건 우리 모개랑 재민이, 세상에 둘뿐일 거다.”
진우는 제 사무실 응접 소파에 앉아 있는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에게 윙크를 날리며 재민에 대한 섭섭함을 장난스레 토로했다.
하지만 재민은 그런 까불거리는 진우를 보며 같이 웃기보단 내심 섬뜩함을 느끼고 있었다. 말로는 더없이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진우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알고 지낸 이래로 몇 번 본 적 있었던 냉혹한 눈빛을 지금 형형하게 내고 있다니.
‘그래, 형이 알아 버렸구나.’
앞으로 진우가 저를 심문할 걸 예상하고는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진우가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에게 눈짓하면서 말했다.
“그럼, 하 변은 수고했고, 다음에 또 연락할게.”
“네, 실장님.”
‘하 변’이라 불린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재민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진우에게 한 번 가볍게 눈인사하면서 유유히 진우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재민은 인사를 고개만 까딱해 받아 주면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길게 쳐다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진우가 데리고 온 저와 같은 변호사. 그의 내력에 관해 물어도 진우는 조용히 미소만 머금고는 이렇게 말했었다.
‘오다가다 주웠어.’
‘형님, 무슨 말을 그렇게, 쯧. 사람이 물건입니까?’
‘뭐, 인마. 내가 주웠다는데 네가 왜?’
‘아, 됐어요. 말을 말아야지.’
진우의 동문서답이 회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게도 밝히지 않는 하 변호사의 정체가 궁금해 몰래 조사했었다.
일본인 아버지를 둔, 한국인.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일본계 혼혈인 줄 모를 남자는 그들과 똑같은 부산 사람이었다.
‘하정훈’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는 왜 진우와 연이 닿아서 가깝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멀지도 않는 위치에서 곁에 있는 걸까? 아무리 털어 봐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아 오히려 의문스러운 이 남자를 진우는 무슨 이유에선지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출신이, 혈통이 비슷해서 동질감을 서로 느끼는 걸까?’
제가 아는 한 진우의 생부도 일본인이라 들었다.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하 변도 역시 진우처럼 일본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후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고 했다.
만약 진우의 어머니가 애인에게 버림받지 않았다면, 진우는 일본인으로 살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옆에서 본 진우는 본인의 정체성을 언제나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형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 호적에 올랐다고 했어. 어머니가 서씨였다고.’
외국인의, 아니 이방인의 자식들.
아비에게 버림받은 자식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연대를 맺게 된 걸까? 재민도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기에 진우가 어린 시절에 저를 주워 줬던 걸까?
폭력과 도박을 일삼으며 병약한 어머니를 피 말려 죽인 아버지를 이제는 재민이 먼저 버리고 싶었지만 말이다. 끝끝내 천륜을 끊지 못했지만 정신병원에서 아버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내가 진우 형의 오른팔이라면 하 변은 왼팔이겠지.’
사실상 음지에서 일하는 저보다 더 어두운 곳에서 진우를 돕는 듯했지만 말이다. 정확히 하 변과 진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진우는 하 변에 대해 말을 아끼는 편이었고, 저도 괜한 의심을 사게 될까 봐 캐묻지는 않았다.
사실 이번 마카오 건에 진우가 하 변을 데려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이번 출장에 동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귀국과 동시에 하 변을 불렀다는 건 아마도 진우가 미주의 일을 알고 뭔가를 꾸미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였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지 내가 맞혀 볼까?”
재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우와 제가 전략실에 스파이를 심어 놓았듯이 연호에게도 그의 눈과 귀, 손발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모르게 진우가 포섭한 사람들도 있을 테고.
“이요한 걔가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런데 정재민이 개입되어 있을 줄 몰랐어.”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은 사진을 손으로 쿡쿡- 찌르면서 물었다. 재민은 가까이 다가가 진우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사진을 봤다. 사진 속의 있는 인물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역시, 네 표정. 다 알고 있었네.”
“형님이 이럴까 봐 말 안 했던 겁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진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기운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재민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경우의 수대로 진우가 알게 되었을 때를 위한 플랜을 가동했다.
“요한이, 이 과장이 저희 뉴욕 도착한 날 소식 전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먼저 알렸을까요?”
“너희 둘이 설마 편 먹고 날 엿 먹이려는 건 아닐 테고.”
차라리 진우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길길이 날뛰는 게 오히려 더 나았다. 더없이 차갑게 냉정해진 진우의 모습을 보는 건 정말이지 살 떨릴 정도로 공포스러운 일이었으니깐.
7년 전, 하늘이 불타던 날이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했다. 재민은 최대한 차분히 진우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의 분노가 연호에게 향하길, 제가 계획한 대로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형님이 이 일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어요. 까딱하면 마카오 일도, 뉴욕까지 날아간 일도 다 공중분해 될 수 있는데 제가 어떻게 알립니까?”
“…….”
“저라도 차분히 냉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 말을 막진 않으니 잠시 뜸 들이던 재민이 천천히 말했다.
“형, 미주 더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저도 뉴욕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만약 차연호가 무슨 짓이라도 했다면 미주가 가만히 있겠어요? 우리 둘 다 걔 성격, 성질머리 잘 알잖아요?”
“그래서?”
“못 미덥긴 해도 미주를 좀 더 믿고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않겠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혹시라도 미주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개입하지 않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괜히 차연호랑 더 깊게 척을 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정재민, 네가 아직 뭘 모르나 본데.”
“…….”
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미주는 아직 애야. 자기가 뭘 해결하고 자시고가 안 되는 애라고.”
“그래서 어린애라서, 아직도 형 눈에는 철부지 동생이라서 뒤에서 손쓰셨던 겁니까? 저 다 알고 있었어요.”
웬만해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재민이 톤을 올리며 물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너도 공범이야.”
“네, 맞아요. 형님이 일부러 탈락시켰는데 거기서 회장님 힘이 나올 줄 저도 형님도 몰랐지 않습니까?”
“씨발, 영감탱이가 가만히 있지. 친구 딸이라고 프리 패스 시키라니. 고약해, 우리 진 회장님.”
진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두 사람이 알지만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진실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재민 역시 궁금해질 때 진우가 더는 듣기 싫다는 듯한 얼굴로 내뱉었다.
“차라리 네가 낫지, 차연호는 아니다. 더 빨리 그 개새끼를 떼어 냈어야 했는데.”
“미주 이용하신 건 아니고요? 역으로 차연호 치려고 미주한테 접근하는 거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습니까?”
재민의 뼈 있는 물음에 진우는 대답 없이 무서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불편한 진실이 주는 침묵이 서로의 어깨에 내려앉고 있을 때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주는 널 좋아해. 그러니 차연호한테 마음이 움직일 리 없다고 생각해서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미주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게. 그건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진우의 시선이 다시 책상 위 사진을 보고 있을 때 재민은 조용히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형님은요?”
재민은 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처음으로 말했다.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닌 척하기에 저도 모르는 척해 줬던 것들.
그거라면 진우를 자극하기 충분할 것 같았다.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미주를 돌려받기 위해 저는 빠지고 맹수들의 싸움을 붙여 볼까 했다.
“뭐가?”
“언제까지 저를 핑계 대실 겁니까?”
진우는 고요한 얼굴로 재민을 바라보았다.
“헛소리는 여기까지.”
진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양 웃으며 다가와 재민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곤 눈앞에서 책상에 놓인 사진들을 쭉쭉- 찢어 버리며 말했다.
“미주, 오늘 날짜로 퇴사시키라고 인사과에 전해.”
“형님, 그게 무슨… 설마 미주가 순순히 ‘응, 알았어. 그만둘게.’ 하고 나가겠어요? 다른 핑계로 살살 달래서……”
“정재민.”
진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감정 따윈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진우가 부탁이 아닌 지시를 내렸다.
“…싫습니다. 미주도 선택권이 있어요.”
“선택권이라… 좋지, 선택권. 근데 재민아, 미주는 안 돼.”
“형님, 미주가 진짜로 차연호를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차연호도 미주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고.”
“개소리 작작 해라.”
“솔직히 차연호 정도면 걔가 혹할 수도 있잖아요? 겉보기에는 멀쩡하니.”
진우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동네에서 가장 똑똑했던 재민이 미주를 보호해 주려 말을 듣지 않는다 여겼다. 설마 그 속에 다른 뜻이 있을 줄 정말 몰랐다.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기에 저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생각 따윈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 진우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재민은 일부러 미주를 위하는 척하면서 그의 말을 거역했다. 역시 진우가 길길이 날뛸 거로 생각했는데 제 계략은 다행히 통한 것 같았다.
‘이제 차연호를 완전히 미주에게서 떼 낼 수 있겠어.’
침착하려 애쓰는 진우의 포커페이스 안에서 재민은 그의 분노를 읽어 냈다.
“정재민, 더 길게 말 안 한다. 미주 퇴사시켜. 그리고 차연호 씨발 새끼가 미주 근처에도 못 오게 무조건 막아.”
“…….”
“대답해라. 난 지금 형이 아니라 네 상사로서, 네 윗사람으로 말하는 거다, 정 팀장.”
“…알겠습니다, 실장님.”
재민은 인사를 꾸벅하며 몸을 돌려 진우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제자리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선 전화를 들었다.
“박 과장님, 비서실 정 팀장입니다. 서 실장님 지시가 있는데… 아, 아닙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전화를 끊은 재민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핸드폰을 손에 쥐고는 메시지를 보냈다.
[미주야, 형이 너 회사 그만두래. 오늘 퇴근할 때 책상 정리하고 나와.]
핸드폰에 메시지가 들어온 건 알았지만 아무래도 막내다 보니 바로바로 쉽게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린 다음에 몰래 화면을 보다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왜? 갑자기?’
그러나 의문도 잠시, 진우의 이 말도 안 되는 일방적인 영향력 행사의 이유를 바로 알고는 입술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다 알았구나. 근데 어디까지 아는 걸까? 만난 거? 같이 잔 거?’
미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다 알고 있을 거야. 오빤데, 모르는 게 있을까?’
그렇다면 마음먹고 준비한 대로 진우에게 하얀 거짓말을 해야 할 차례였다.
‘차연호랑 거래한 걸 말할 순 없어. 내가 오빠 때문에 협박받은 걸 말해 버리면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깐.’
최대한 쥐어짜 낸 변명은 이러했다. 처음에는 싫어했는데 같이 일하다 보니 어찌어찌 정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리 나쁜 놈도 아니더라, 그래서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라고 말이다.
‘이게 오빠한테 통할 리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눈물로 호소라도 해 보는 거야. 내가 진심인 척 연기하면 넘어가 줄 수도 있다는 1%의 확률을 기대해 보면서 말이야.’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각.
연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오후부터 자리에 없었다. 미주는 목을 길게 빼고 연호의 자리를 훔쳐보면서 그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잘됐어, 차라리 그 사람이 없을 때 해결하는 게 나아. 오빠 앞에서 울면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퇴사해 버리면 나 때문에 전략실 직원들이 피해를 보니깐, 차라리 며칠이라도 유예를 달라고 빌어 보는 거야.’
한 시간 반만 있으면 공식적으로 퇴근 시간이니 말이다. 일단 퇴근하는 척하고 26층으로 올라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진우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26층 비서실은 회장님 때문에 따로 쓰는 직통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내가 그걸 탈 수는 없어. 그러면 비상구로 올라가서 문 열어 달라고 미리 오빠한테 얘기하면 되겠지?’
[오빠, 나 6시 조금 넘어서 퇴근하고 비서실에 올라갈게. 진우 오빠 좀 붙잡아 놔 줘.]
잠시 뒤 재민에게서 답장이 왔다.
[미주야, 그냥 형님 말 들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역시 재민도 다 알고 있다는 걸 확인한 미주는 결심한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미 나한텐 커졌어. 퇴사라니, 이렇게는 안 돼.]
재민은 핸드폰 화면 속 글자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부러 인사과에 진우의 지시를 전하지 않고 미주에게 먼저 통보했는데 말이다. 역시, 미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로 행동으로 보여 주다니.
말리는 척하는 계략에 이미 걸려든 미주는 아득바득 진우와 이야기를 하겠다고 끈질기게 제게 부탁했다.
‘형님이랑 미주가 만났다 하면 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니깐.’
미주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호와 같이 찍힌 사진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표정에 이미 질투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미주 특유의 담담한 얼굴이긴 해도 달랐다. 뭔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알 수 있을 미주가 제 사람들에게만 보여 주는 그 눈빛.
‘내 눈에 보이는 게 형님 눈에도 보이겠지.’
재민의 머릿속에 다음 상황이 그려졌다. 비서실까지 쳐들어온 미주와 진우가 대판 싸우고 난 뒤 진우는 강제로 미주를 퇴사시켜 버릴 것이다. 그리고 미주를 숨겨 둔 후 연호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테고.
물론 아무리 크게 싸워도 미주와 진우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둘이, 피보다 더 진한 끈으로 묶인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갈 리 없을 테니깐.
그리고 진우가 미주를 가지고 논 죄를 연호에게 물을 때, 저는 그저 옆에서 진우의 제갈량이 되어 주면 됐다.
마지막 피날레에서 울적해 있는 미주를 달래 주는 척하며 몸도 마음도 제 것으로 완전히 만든다면 말이다. 연호에게 잠시 미주를 뺏긴 이 울분이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싶었다.
현재로선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재민이 묘한 표정으로 시간을 체크하고 있을 때 비서실이 소란해졌다.
[나 퇴근하는 척하고 전략실 선배들 따돌리고 지금 24층 비상구 계단에서 26층으로 올라갈 거야. 문 좀 열어 줘, 오빠.]
비서실 말단 직원에게 비상구 문을 열라고 지시한 뒤 얼마 후 26층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실장님 만나러 왔어요. 들여보내 줘요.”
“그게, 미주 씨. 실장님이 안 만나겠다고 오셔도 돌려보내라고 지시가…….”
“안 돼요, 난 만나야 해.”
한참 옥신각신 요한과 도균이 미주를 뜯어말리고 있을 때 재민이 상황을 정리해 줬다.
“미주야, 들어가 봐. 내가 책임질게. 저기 왼쪽이야.”
고맙다는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 미주가 재민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그가 알려 준 곳으로 들어갔다.
“오빠, 미안. 회사에서 아는 척 안 하기로 했는데.”
“알면 누가 보기 전에 지금이라도 돌아가.”
사무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진우는 얼굴 한번 쳐다보지 않고 뭔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미주는 입을 다물고 처음 와 보는 진우의 사무실을 궁금했다는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묘한 기류가 흐르는 공간에서 숨 막히는 고요가 계속되고 있을 때, 일이 끝났다는 듯 진우가 입을 열었다.
“미주야.”
“……어?”
“너 가라.”
“오빠, 내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화났지? 알았어. 돌아갈 테니깐 우리 잠깐만 이야기 좀 해.”
“아니, 캐나다. 여기 티켓 준비해 놨으니 내일 바로 출발하면 돼.”
예상치 못한 진우의 말에 미주가 동공이 커지면서 재차 물었다.
“뭐? 캐나다? 갑자기 무슨… 오빠 마음대로 날 퇴사시킨다고 하질 않나, 내일 캐나다로 가라고 하질 않나. 오빠, 일단 내 얘기 좀 들어 봐.”
“요한이 붙여 줄 테니 지금 집에 가서 출국할 때까지 간단한 것만 캐리어에 챙겨. 나머지는 애들 시켜서 싹 정리해 바로 뒤이어 보내 줄게.”
“…말도 안 되는 거 알지? 오빠, 내 말 좀……”
“들을 거 없으니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좀 급하게 세팅해 놔서 그런데 토론토 도착해서 필요한 거 있으면 네가 알아서 필요한 거 사서 채워.”
제 말을 싹 자르는 진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은 것을 보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빠!”
“윤미주! 내 말 들으라고!”
진짜 화가 난 얼굴을 한 진우가 큰소리를 내며 인상 쓰고 있었다. 하지만 미주 역시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은 진우의 행동에 복잡한 생각이 들어, 지지 않고 말했다.
“오빠, 알았어. 알았으니, 일단 내 말 좀 듣고 캐나다든 미국이든 어디든 다시 얘기하자. 나 이런 식으로 회사 그만두면 같이 일하고 있는 직원들은 뭐가 돼? 하던 프로젝트 마무리 짓고 최소한 예의는 지키고 나가고 싶어.”
“전략실, 차연호가 꾸민 짓인 거 알면서도 지금 거기에 의리를 운운하는 거라면 너한테 실망이다.”
“나도 체면이 있어! 아무리 오빠 눈에는 내가 멍청하고 철부지로 보여도 맡은 바 책임감 있게 마무리하게 해 달라고!”
진우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앉아 있던 책상에서 일어나 미주 앞으로 다가왔다.
“체면? 넌 내 체면은 생각 안 해? 차연호랑 뭔 짓 하고 돌아다녔는지 내가 한번 읊어 볼까?”
“……뭐?”
“나는 네가 차연호와 진 회장님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챘을 거로 생각해서 말 안 해도 알아서 처신할 거라고 믿었어.”
“…….”
“네가 차연호랑……. 사람들이, 회장님이 이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미주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지만, 진우는 아랑곳없이 계속 그녀를 압박했다.
“그냥 뭐, 원나잇 같은 거로 생각하겠지.”
“원나잇? 그래, 좋지… 원나잇. 근데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거야.”
“……?”
“차연호한테 내가 널 갖다 바친 건 아닐까 하고 뒤에서 떠들겠지. 그 사생……!”
얼굴에 실수했다는 듯 당혹함이 스치고 지나가며 그가 말끝을 흐리는 걸 미주는 보았다. 그렇지만 더 깊게 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진우가 화제를 전환하며 계속 위협적인 말투로 말했다.
“차연호가 좋은 놈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 그러니 더 나빠지기 전에, 그 새끼가 널 가지고 신나게 더 장난치기 전에 여기서 발 빼.”
“…….”
“널 생각해서 그러는 거 알지? 일단 캐나다가 있어. 어학연수 할 때 즐거웠다고 했잖아?”
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어깨를 잡으며 얘기했다.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제 뜻을 따를 것을 계속 종용하고 있었다.
“여기 일은 내가 정리해 줄게. 네 말대로 고작 원나잇이잖아?”
“오빠, 내 말 좀 들어 줘. 그러니까……”
“이참에 몇 년 거기서 쉬었다 와. 여행도 많이 해 보고. 로키산맥 못 가 봤다고 술만 마시면 투덜거렸잖아?”
“싫어, 이럴 순 없어.”
“미주야, 늘 말했잖아? 다시 가고 싶다고, 거기서 평생 살고 싶다고. 그래서 일부러 캐나다로 골랐으니깐 넌 나만 믿고…….”
미주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진우가 제 말을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우를 설득할 수 없다면. 그가 정한 걸 뒤집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플랜 B. 아니, 사실상 이게 플랜 A였다.
연호와 사랑에 빠졌다는 거짓말이 통할 거라는 것 자체가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깐.
‘아주 못된 동생이 되자. 배은망덕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한테 빠져서 가족을 버리는 천하의 나쁜 년.’
설령 연호가 저를 죽이겠다 진우에게 협박해도 더는 오빠에게 제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차연호의 계략은 물거품이 되는 거겠지?’
진우에게 버림받는다면 연호도 더는 저를 가지고 진우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빨간 망토 차차와 맺은 계약엔 허점이 있으니, 그걸 내가 잘 이용해야 해.’
연호와의 계약은 진우의 살인죄를 덮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하는 것이지, 진우와 계속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특약은 없었으니깐. 그러니 진우와 제 사이의 유대가 끊어진다 한들, 연호도 뭐라 한 입으로 두말은 못 할 것이다.
‘차연호가 날 죽이면 그냥 죽으면 돼. 그와의 계약은 복잡할 게 하나도 없어.’
이미 상황은 제가 어찌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받아들였다. 그래서 단단히 마음을 다지며 진우에게 입을 열었다.
“오빠, 왜 거기에 내 의견은 없는 거야? 오빠가 시키면 나는 무조건 ‘네.’ 하고 해야만 하는 거야? 오빠가 무슨 권리가 있다고. 나는 가기 싫어, 캐나다. 지금 이런 상태로 오빠한테 등 떠밀려서 가는 거 싫다고!”
“권리? 너 지금 권리라고 했니?”
“그래! 권리! 오빠가 대체 뭔데 이래라저래라. 난 오빠 인형이 아니야! 지금까지 오빠가 시키는 대로 살았잖아? 죽은 듯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오빠가 바라는 대로 오빠가 원하는 대로 말이야.”
“미주야, 웃으면서 얘기할 때 말 들어. 가, 지금 당장. 지금 안 가면 너…… 나 못 볼 줄 알아.”
처음으로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반항하며 저를 밀어내는 미주의 모습에 놀란 진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싫어, 안 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회사도 안 그만둘 거야. 나 일하고 싶어. 내 힘으로 열심히 일해서 월급 받는 거 재밌어. 이제 겨우 나도 뭔가를 해 보려고 하는데……”
“그게 진짜 너 혼자 한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설마. 미주가 놀랍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격양된 목소리로 진우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아니, 반대야. 난 널 서류부터 탈락시켰는데 누가 힘을 썼더라고. 나중에 물어보니 죽은 희주 형 생각나서 도와줬다고 하더라.”
“내가 차현에 오는 게 죽도록 싫었으면서 아닌 척 해 보라 등 떠밀었던 거야? 이 위선자!”
제 어깨를 잡은 진우를 뿌리치면서 눈물 젖은 얼굴로 소리를 쳤다. 진우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시작하긴 했지만 제가 알지 못했던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다니.
역시 진우가 모든 걸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이제는 말하기 쉬울 것 같았다.
그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진우가 상처받을까 봐 말하지 못한 비밀을 천천히 폭로하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해, 오빠! 숨 막혀! 끔찍해! 왜 오빠가 마음대로 날 통제하고 컨트롤하려고 하는 건데!”
“다 널 위해서야! 윤미주! 널 위해서라고!”
“핑계 대지 마! 오빠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거 다 알고 있어!”
미주가 울부짖다시피 진우를 노려보면서 그간의 진실을 토해 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 감시하고 있는 거. 오빠가 내 일거수일투족 모두 보고 있다는 거, 끔찍해.”
“뭐?”
“왜? 다시 말해 줘? 끔찍하다고!”
진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화를 참아 내려는 듯 입술을 꾹 다물다가 천천히 미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미주야, 다 널 지켜 주려고 한 거야. 왜 내 마음을, 이 모든 게 다 널 위한 거라는 걸 모르는 거니?”
“날 위하는 거……? 이런 게 날 위하는 거야?”
“그래, 나는 이게 널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미주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피가 날듯 세게 깨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보호가 아니라 감시야.”
“…….”
“나, 다 알아. 캐나다에서도 사람 붙였던 거. 홈스테이 레베카 아줌마, 꽤 어설펐어.”
진우가 다시 제 어깨를 꽉 잡으며 어르는 말투로 해명하려 하지만 미주는 듣지 않았다.
“외국이라도 다를 게 없을까 봐 그랬어. 그리고 그때는 일이 있고 몇 년이 안 되었을 때라 나도 많이 불안했었고…….”
“그래서 입 다물고 있었어.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아니깐. 오빠 마음 편하라고 말 안 했어.”
“…….”
“그런데 있지, 오빠, 그거 알아? 난 오빠가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아니야. 사람이라고.”
“뭐?”
어깨를 잡은 진우의 손아귀가 점점 더 강하게 저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이 온통 상처로 가득해 미주는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고작 나한테 반항하려고 생각한 게 차연호, 그 새끼야?”
“어, 맞아.”
“병신같이, 너한테 뭔 생각으로 접근하는지 알면서도 그랬다니.”
진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묵직하게 전했다.
“차연호 이용해서 네가 나한테 엿 먹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리도 자유를 사랑했다니, 내가 우리 동생을 너무 몰랐어.”
“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오만한 거라는 거, 오빠는 모르지?”
“아, 그래. 내가 너한테 졌어. 네가 못돼 처먹은 가시나라는 거 잘 알고 있었지만 나한테까지 이럴 줄 몰랐거든.”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모진 말로 진우를 할퀴지만, 미주 역시 제 입에서 나오는 칼날 같은 표독스러운 말에 찔려 너무 아팠다.
“그러고 보니 너랑 차연호,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
진우는 잡고 있던 미주의 어깨를 스스로 놓으며 질렸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왜? 차연호가 어때서?”
“네가 아직 그 쓰레기 본모습을 몰라서 그러나 본데.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 새끼 진짜 얼굴을.”
“글쎄, 오빠도 재민 오빠도 사실 여자한테 그리 좋은 남자들은 아니잖아?”
진우가 눈썹을 꿈틀대면서 점점 상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미주는 끝끝내 그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잤니?”
“응. 섹스, 해 보니깐 별거 아니더라.”
“너 진짜 미쳤구나. 내가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알던 미주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미주는 좀 더 확실히 진우와의 모든 걸 끝낼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하다 여겼다. 그래서 가장 끔찍한 최악의 수를 꺼내 들었다.
“그래, 나 미쳤어. 완전히 미친년에 맛도 갔어. 몰랐지? 나 미쳐서 약 먹는 거?”
“뭐? 약?”
진우가 눈을 크게 뜨다 못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뜨고는 저를 보지만 미주는 아랑곳없었다.
“내 말 거짓말인지 확인하려면 간단해. 요한 씨한테 물어봐. 내가 뭔 약을 처먹는지.”
“…설마 마약은 아니겠지? 아저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면서도 네가 왜 약을…….”
처음 듣는 미주의 비밀에 진우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난 그날 죽었어. 몸도 마음도 모두. 지금 오빠 눈앞에 있는 윤미주는 그냥 좀비라고 생각해. 오빠가 억지로 살려 낸 망령이라 죽고 싶었던 나는 너무나도 삶이 괴로웠어.”
미주가 말끝에 갑자기 진우 앞에서 입고 있던 펜슬 스커트를 말아 올렸다. 진우는 깜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선의 끝에서 보았다. 미주의 허벅지에 상상도 못 했던 기묘한 상처 자국들이 기괴한 배열로 불규칙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오빠, 이것 봐. 이거 보라고! 난 이런 애야! 자해라도 하지 않으면 난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었어!”
“미주야, 빨리 치마 내려라. 너 아무리 내 앞이라도…….”
“아니, 똑바로 봐.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오빠, 나는 말이야, 피를 흘리니깐 알 수 있더라. 아, 살아 있구나. 나는 좀비가, 시체가 아니라는 걸.”
“윤미주, 그만하자, 이제. 나도 더는 견디기 힘들어.”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늘 싱긋이 웃고 있던 진우의 가면 같은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파랗게 변해 있었다.
“아니, 끝까지 들어 줘. 아마 오빠한테 이런 이야기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니깐.”
미주는 속옷이 보일 때까지 걷어 올렸던 스커트 자락을 내리면서 눈물 섞인 고해를 시작했다.
“그때 그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울먹이는 미주의 목소리에 진우 역시 가슴이 다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오래된 죄의식과 죄책감, 그리고 피의 복수. 진우는 눈을 감으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너한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죽어서 희주 형 다시 만났을 때 당당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노력은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오빠는 날 지켜 주지 못했어.”
“그만해, 미주야, 제발.”
미주는 일부러 모든 게 진우 탓인 양 화살을 돌리지만, 저 역시 상처 주는 고통에 너무나도 괴로웠다.
“나 역시 나를 스스로 지키지 못했어. 그래서 더럽혀졌고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고……!”
눈앞이 갑자기 번쩍였다. 얼굴이 화끈거리더니 이내 입안에서 피 맛이 맴돌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진우는 상처받은 얼굴로 미주의 뺨을 때린 손을 떨구고는 정말 최후라는 듯 간청했다.
“정신 차려, 윤미주. 마지막 경고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 아니 이건 내가 오빠로서 명령하는 거야. 캐나다로 내일 떠나. 한국에서의 일은 다 없던 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오빠……? 친오빠도 아니잖아.”
“…….”
미주는 뜨겁게 불타는 것 같은 제 왼뺨을 만지며 눈물을 쏟아 내면서 중얼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쩌면 가장 금기라고 할 수 있는 그 말까지 결국 진우에게 하고 만 제가 증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이다. 진우를 정말 친오빠보다 더 사랑했기에 그의 죄를 숨기고 미래를 지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네 마음대로 살아. 네 말대로 난 친오빠도 뭣도 아니니깐.”
진우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미주를 살짝 껴안았다. 그가 저를 놓아 버리는 순간을 그저 눈을 질끈 감은 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주야, 잘 들어. 이제부터 너랑 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 내가 널 동생이라고 생각해서 해 줬던 모든 걸 끝낼까 해.”
눈물이 흘러 턱 끝에서 고여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미주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진우가 조용하게 마치 선고를 내리는 판사처럼 저에게 절연을 구형하는 순간을 듣고만 있었다.
“앞으로 내 눈에 더는 띄지 마. 널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깐. 미주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뭔 짓까지 해 봤는지.”
말을 끝낸 진우가 저를 놓아주더니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와 진우는 이제 영원히 남남이 되었다는 걸.
미주는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떴다. 혼자 남은 진우의 사무실에 발이 땅에 박힌 양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빠, 미안해. 날 용서하지 마. 언젠가 내가 오늘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게 된다면 그날까지만 날 증오하고 미워해 줘.’
사람의 마음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제가 부숴 버린 20년이 넘는 세월에 담긴 우정과 사랑이 오늘에서야 끝났다.
그리고 다시 잃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번에는 제 손으로 등을 떠밀다 못해 절벽 끝으로 몰아서 추락하게 만들다니.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모질 수 있음에 미주는 젖은 눈물을 흘려 보지만 진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