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One Night (16/53)

15. One Night

* * *

“내일 매형이랑 서진우가 들어온다지?”

“새벽 비행기로 온다니 공항에 몰래 마중 나가 볼까 했는데, 그만두기로 했어요.”

“누가 너랑 서진우 아는 사이라는 걸 알까 봐?”

“아니요, 새벽잠이 많아서 못 일어날 것 같아서요.”

정말 뜻밖의 대답에 연호가 미주를 보며 살짝 귀엽다는 듯 속으로 웃었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철저히 계획된 만남을 가졌다. 미주도 연호의 작전에 어느 정도 동의해 퇴근 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내 연애 해서 결혼하는 거로 스토리를 짜려고.”

“하긴, 재벌 3세가 뜬금없이 고아 여자애랑 결혼한다면 정말 이상하게 보긴 하겠네요.”

“말 지어내기 좋잖아? 같은 부서 선후배로 시작했다가 자연스럽게 연애해서 결혼했다.”

미주는 연호의 계략을 비웃으면서 말했다.

“거기에 차연호 씨가 일반인과 평범하게 사내 연애를 했다니, 재벌답지 않은 소탈한 면이 보인다는 이미지까지 얻게 되겠지요.”

“역시, 우리 전략실 인재다워.”

“뭐,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차연호 씨는 이 결혼에서 얻는 게 많아서 좋겠네요.”

“손해 보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거든.”

두 사람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마치 데이트를 하는 듯한 모습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나름대로는 치밀하게 일부러 회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식사하지만, 굳이 몸을 숨기진 않으면서.

“언론 쪽은 걱정하지 마. 외삼촌이 꽉 쥐고 있으니 쥐새끼가 뭔 냄새를 맡고 너에 대해서 알았다고 한들 절대 공표되는 일은 없을 테니깐.”

“그건 고맙네요.”

“뭐, 외삼촌이 진짜 날 좋아해서 그러는 거는 아니지만.”

“…….”

신문사를 운영하는 차연호의 외가는 차현이 커 가면서 야금야금 언론을 장악하는 중이었다. 사주인 외삼촌은 당연히 진 회장이 아닌 연호에게 우호적이었고 그에게 벌써 줄을 대고 있었고.

미주는 왜 진 회장이, 그리고 진우가 이토록 차현을 장악하려 하지만 쉽사리 함락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룹 밖으로 뻗어 있는 연호의, 차씨 남매의 영향력은 진 회장이 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잠시만요, 커피는 마저 마시고 일어날게요.”

연호는 뜨거운지 후후- 불면서 커피 잔에 입술을 대는 미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직 그녀의 마음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비밀을 공유했다는 동질감이라도 느낀 건지 호의적이진 않아도 적대감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다.

물론 그게 미주의 계략일지도 몰랐지만, 연호는 가시를 돋우지 않는 독을 품은 복어가 조금 귀엽기도 했다.

“서진우가 눈치채고 지금 이 상황에 관해서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거지?”

연호가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미주도 지지 않고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응수했다.

“친구랑 저녁 먹었다고 말할 거예요.”

“친구라…….”

제 말에 묘한 표정을 짓는 연호를 보자니 한 방 먹인 것 같았다. 미주가 괜히 뿌듯해질 때 연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까닥거렸다.

“다 마셨으니 일어나. 빨리 가야지.”

“…….”

미주는 슬쩍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은 남자를 보았다. 그날 이후로 연호는 털끝 하나도 저를 건드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뭔 생각인지 빤히 보이긴 하는데, 무턱대고 잠자리를 갖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친해진 상태로 하는 게 나으니깐.’

요 며칠 제 눈에 비친 연호는 생각보다 훨씬 유머 감각도 있고 배려심도 많은 편이었다. 일부러 살살 긁어 보기도 했고 대놓고 성질도 부려 보았지만,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웃기만 할 뿐, 화내진 않았다.

‘완전 악당 그 자체면서.’

그러다 문득 저를 보는 연호의 눈빛이 이상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언제나 여유로운 척, 머리 위에서 우위를 점령하는 척해도 가끔 스치는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모든 건 계산된 행동일 거야. 섹스하기 위해서 그 전에 구워삶는 거지.’

미주가 연호의 행동에 최대한 동요하지 않고 담담한 척할 때였다. 고개를 돌려 네온사인이 흐드러진 밤거리에 빠져 보다, 문득 목적지가 다름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우리 집.”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보름이니깐, 많이 참았다 저 인간은 생각하겠지.’

진우의 미국 일정이 예상보다 며칠 연장되는 바람에 달이 차오르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미주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차에서 뛰어내려야 되나 싶은 순간 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멈추라는 빨간색 신호. 그런데 이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친구라고?”

연호의 얼굴이 너무나도 손쉽다는 듯 제 영역에 가뿐히 들어왔다. 마치 짐승처럼 거칠게 한 손으로 미주의 얼굴을 잡았다.

터프한 움직임과는 다르게 제 입술을 빠는 남자의 입술은 굉장히 부드럽게 저를 녹이고 있어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미주의 머릿속이 하얘질 때,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

입술을 떼어 낸 연호가 미주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춘 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핸들을 잡았다. 액셀을 밟는 동작 뒤에 천천히 움직이던 차 안에는 뜨거운 침묵이 맴돌고 있을 때였다.

“오늘은 다음이 없어. 각오해.”

연호는 손을 뻗어 미주의 손을 잡고는 제 얼굴로 끌어당겼다. 마치 기사가 공주에게 키스라도 하듯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미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잡힌 손을 빼내지도 않았다. 타이밍이라는 것이, 분위기를 탄다는 게 지금 이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원수라도 짧았다면 짧은 시간 동안 얼굴을 맞대고 밥을 몇 번 먹고 이야기를 했다고 원한이 손톱만큼 풀어지기라도 한 걸까?

제 손을 꽉 잡은 남자의 손에서 전해지는 모호한 미열이 몸으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이 만나서 날을 세울 때마다 느껴지던 팽팽한 긴장감이 지금은 조금 다른 결로 야릇한 공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고, 그가 난폭하지 않을 때 하는 게 더 나을 거야.’

미주는 연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으려 태연한 척 제 마음을 다스려 보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도마 위의 생선인 신세를 이미 알고 있으니 차라리 저를 곱게 요리해 주길 바라면서 주문을 외웠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자. 호랑이 굴에 정신 차려. 호랑이…….’

아무리 염불을 외워도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뜨겁게 훑고 지나가고 있어 점점 몸이 굳어 갔다.

그때 차는 목적지에 다다른 것 같았다. 미주도 들어 본 적 있는 재벌들이 모여 산다는 동네에 2층으로 지어진 대저택의 차고가 열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차 문을 열고 도망치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요새에 갇혔다고 생각할 때였다.

연호가 고개를 돌려 미주를 보면서 마지막 기회를 줬다.

“싫으면 문 열어 줄 테니 여기서 돌아가. 그럼 모든 건 없던 일이 될 거야.”

“…우리 거래도 사라지게 되는 건가요?”

“아마도, 하지만 내일부터 전쟁이 시작되겠지. 서진우는 인천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바로 체포될 테니까.”

“내가 못 갈 거라는 걸 알고 하는 말이잖아요?”

조금 처연하게 저를 보면서 물기 젖은 목소리로 체념한 듯 살짝 웃는 미주의 모습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래, 서진우 엿 먹이려고 했는데 되려 내가 당하게 생겼으니 이젠 어쩔 수 없어.”

미주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못 알아챌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니, 놀랍다는 듯 연호를 보았다.

“내 귀에는 자기가 놓은 덫에 걸렸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미주는 진우와 재민에게 받았던 사랑을 보은하고 싶었다. 그게 설령 연호에게 몸을 주는 거라고 할지라도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가족을 지키고자 했으니깐.

하지만 저를 옭아매려는 남자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굉장히 이기적인 욕심 또한 있었다.

두 가지 토끼를 쫓고 싶은 미주의 어리석은 욕망. 그런데 어쩌면 그게 미주만 느끼는 감정이 아닐 수도 있다니.

“내가 말했잖아. 윤미주가 내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고.”

“아마 오늘부터 당신 생각만 하겠죠. 밉고 죽이고 싶은, 증오하는 상대가 될 테니까.”

미주의 날카롭게 날 선 대답을 들어도 어쩐지 화가 나지 않았다. 연호는 미주의 어깨를 살짝 어루만지며 낮은 울림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미워해. 죽을 때까지 용서 못 할 증오심으로 나만 생각해 줘.”

“…….”

“난 그거면 충분하거든.”

열아홉 살 때 처음 봤던 연호를 미주가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지 않았던 건 말이다. 그의 잘생긴 외모 때문도, 큰 키와 멋진 몸매 때문도 아니었다.

‘너 진짜 재밌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나중에 혹시 우리 다시 만나게 되면…….’

온몸으로 수컷의 페로몬을 뿜어내는 연호에게 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면 왠지 그 서울 촌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사실은 몇 날 며칠 내내 연호를 생각했었다. 모의고사를 치고 친구와 떡볶이를 사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음악을 들으면서도 연호를 떠올렸던 건 어쩌면 그와 다시 재회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7년 뒤, 운명처럼 다시 마주한 그에게 미주는 이미 끌리고 있다는 걸 애써 온몸으로 부정했다.

어른 남자인 연호에게 성인 여자가 된 미주가 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겠지만 말이다. 아직은 그런 육체적인 끌림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미주였기에 연호에게 느끼는 묘한 성적인 끌림을 애써 지워 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미 흔들렸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도 제멋대로인 남자에게.

마치 제 마음을 읽어 내려는 듯 미주의 눈동자가 깊게 바라보고 있어 연호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건 조급함이었다. 진우가 돌아와 이 모든 걸 알고 미주를 영원히 제게서 떼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갖고 싶었다. 제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저를 미워하고 싫어서 관심조차 주지 않은 미주를 몸이라도 소유해 저만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재회한, 그 엘리베이터 안으로 미주가 뛰어들던 순간이 매일같이 생생했는데.

마음은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으니 저를 증오한다 말하는 여자에게 굳이 좋은 남자인 척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이미 되돌리기 힘든 못된 짓을 그녀에게 저지른 끝에 마침내 이 순간을 맞이했다.

“…오늘 우리가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뒤에는 전쟁 없는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평화라, 나도 바라는 바야.”

연호가 살짝 웃자 미주는 뭔가 결심한 듯 그에게로 몸을 조금 움직였다.

“……내 대답이에요.”

행동으로 보여 준 답은 그녀치고는 대담했다. 연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살짝 갖다 대며 입을 맞추고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저를 피하는 미주의 얼굴이 체념이나 단념이 아닌 수줍음에 좀 더 가깝다는 걸.

더는 참을 수 없어진 연호가 미주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입술을 부드럽게 탐하자 조금 말라 있던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타액에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놀랍게도 전과 다르게 미주도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 주고 있었다. 연호가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침입을 하자 미주의 작고 귀여운 혀가 숨어 버렸지만, 연호는 살살 달래며 뜨겁게 혀를 휘감았다.

몇 번의 키스가 오갔을까? 겨우 입술을 떼어 낸 연호가 열에 들뜬 미주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면서 마지막 유혹을 했다.

“정말 괜찮겠어?”

“…응…….”

미주가 망설이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연호를 보았다. 그는 지금껏 많이 참아 줬다는 얼굴로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급하게 열었다.

“이젠 마음 바뀌었다 해도 못 보내.”

연호가 미주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쾅- 소리가 나게 차 문을 닫았다. 차고에서 연결된 통로를 지나 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말이다. 아차, 정말 급했던 것 같았다.

“아, 번호를 틀리다니.”

“풋-, 천천히 해요.”

미주의 웃음에 연호는 고개를 저으며 이번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번호를 입력했다. 띠리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금 천천히가 되겠어?”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는 빈집 안의 차갑게 식은 공기가 두 사람을 싸늘하게 감쌌다. 뜨거운 숨소리에 잔잔했던 주변 공기에 서서히 파문이 이는 듯했다. 미주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릴 때, 연호가 몸을 숙여 귓가에 그윽하게 속삭였다.

“여유 부리는 것도 여기까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연호는 한 마리 야수같이 다가왔다. 하지만 입술에 닿은 그의 감촉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숨이 막히도록 입술과 혀로 농밀하게 탐하면서 허리를 끌어당겨 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하…….”

한데 엉킨 두 사람의 움직임에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는 현관 센서 등의 붉은 조명이 야하게 그들을 비추었다. 하이힐이 벗겨졌다고 생각할 때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던 발의 감촉이 갑자기 사라졌다.

“어?”

발이 공중에 뜨다니? 연호가 미주를 가볍게 안아 들고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나, 무거운데…….”

미주가 허공에서 살짝 버둥거려 보지만 제 의사는 깡그리 무시될 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연호는 이번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성큼성큼 미주를 안은 채 침실로 향했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부끄러운데…….”

두려움을 느꼈는지 연호의 목에 두른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그가 달래듯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게 뭐라고 그 순간 정말 사랑받는 기분이 든 걸까? 침대에 천천히 저를 눕히는 연호의 눈빛마저 이제는 사랑이 가득해 보여 제가 미쳤나 싶었다.

“부끄러워요.”

활활 타오르는 연호의 눈빛에 미주도 마음이 완전히 열렸는지 다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부끄… 읍.”

종알거리는 미주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입술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밀착한 연호의 묵직한 몸이 야릇하게 저를 짓누르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압도적인 신체적 우위가 더는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였다.

두 손을 가슴 쪽에 모으고 있던 미주의 오른손을 연호가 침대로 내렸다. 그리고 왼손도 침대로 내려 반듯이 누운 자세가 되었을 때 남자의 손이 블라우스로 향했다.

“잠시만, 아니, 그게 잠깐만.”

의식을 치르듯 느리지만 다급히 단추를 하나씩 푸는 연호를 미주가 급히 제지해 보지만.

“안 돼, 잠시도 아까워.”

당연히 연호가 제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소중하다는 듯 단추를 풀던 손을 잠시 멈추고 제 뺨을 가져다 대면서 저를 달래듯 얼렀다. 차연호와의 섹스는 쓰디쓴 맛일 줄 알았는데, 달콤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미주는 눈을 감았다.

풀어 헤쳐진 앞섶 사이로 브래지어가 보였다. 연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블라우스를 완전히 벗겨 내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미주가 몸을 꼬며 자꾸만 허리를 틀려고 하자 다른 한 손으로 골반을 감아쥐면서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반항해도 소용없어. 어차피 다 벗길 건데.”

“…그래도!”

미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앙탈을 부려 보지만. 연호는 일부러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여린 피부를 만지며 말했다.

“다 벗길 거라고.”

“아…….”

연호의 손길에 목에서는 자꾸만 이상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브래지어 속으로 들어온 남자의 손이 조심스럽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수줍은 핑크색 돌기를 엄지와 검지로 살짝 비틀어 댔다.

“으흣…….”

제 목소리가 너무나도 부끄러웠지만 말이다. 어째 그 오묘한 신음이 점점 더 연호를 흥분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등 뒤에 다다른 연호의 손이 툭- 하고 훅을 풀어 버렸다. 그러고는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마치 뱀파이어가 된 듯 하얀 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 보는 뜨거운 혀가 목덜미에 닿아 간질이기도 하고 여리게 제 피부를 빠는 것 같은 느낌.

미주는 반쯤 홀린 표정으로 감았던 눈을 떠 보지만 나른한 육체의 감각에 모든 게 몽롱했다. 그때 목덜미에 있던 입술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봉긋한 가슴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연호는 탐스러운 복숭아 같은 여린 빛 미주의 가슴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달큰한 여자의 살 냄새. 미치도록 좋았다.

“…하읏… 으으…….”

제 몸을 부드럽게 만져 대는 손길 속에서 미주는 부끄러움과 쾌락의 중간쯤에서 자꾸 더운 숨만 토했다. 유두를 혀로 굴리며 깨물기도 하다가 혀를 세워 간질거리는 연호의 애무에 몸이 배배 꼬여 꽈배기가 될 것 같지만 사람은 쉬이 그리될 순 없었다.

연호는 미주의 가슴을 농밀하게 녹이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귀여운 배꼽쯤에서 장난스럽게 검지로 오목하게 팬 곳을 만졌다. 미주가 움찔거리며 반응하는 것이 좋았다.

“…간지러워요.”

공기가 반쯤 섞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쾌감의 키읔 정도는 느끼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움직임에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놀라지 마.”

스커트 안으로 들어간 연호의 손이 꽤 친절하게 스타킹을 말아 쥐자 미주는 슬쩍 허벅지를 세웠다. 긍정적인 협조에 벗겨진 검은색 밴드 스타킹은 침대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미끈하게 빠진 각선미를 잠시 음미하듯 보던 연호가 그녀의 복숭아뼈를 혀로 쓸었다.

“흐읏……!”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연호의 입술이 다리를 희롱하면서 점차 위로 올라온다고 느낄 때였다. 남자의 거침없는 손길에 제 한쪽 무릎이 살짝 접혔다.

“아, 거긴……!”

허벅지에 연호의 손이 닿자 다리 사이에서 덴 듯한 후끈한 열감과 오싹한 전율이 느껴졌다.

연호의 손이 느려지더니 손길의 감정이 바뀌는 순간을 미주가 느꼈다. 눈을 질끈 감고는 양손을 들어 비밀을 들켰던 날처럼 얼굴을 가렸다.

‘그가 상처를 봤구나.’

“괜찮아. 이젠 내가 아프지 않게 해 줄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연호가 하나씩 잡고 침대로 내렸다. 얼굴을 내려다보는 연호의 다정한 말투에 뭔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신을 증오해야 하는데…….’

결혼 계약이든 살인 폭로든 미주는 이 순간만큼은 둘 사이에 놓인 복잡한 계략을 다 잊고 싶었다. 저를 따스하게 보는 연호의 눈빛만으로도 오늘 밤, 그와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후회로 남지 않을 것 같아졌다.

미주는 처음으로 저를 상냥하게 보고 있는 연호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었다. 손에 닿은 온도가 뜨거웠다.

‘지금은 어쩐지 그렇게 밉진 않아.’

미주가 연호의 얼굴을 끌어당기더니 먼저 입술을 찾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처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원하면서 격렬하게 뜨거운 숨을 나눴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 느리면서도 간절하게.

미주가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한 연호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이 속된 욕망을 꾹꾹 눌러 담아 왔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러니 다시 미주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온전한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아…….”

이제는 거칠 게 없는 연호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섬세한 손길로 미주의 몸을 천천히 두드려 열었다. 집요하면서도 뜨겁고 끈적한 애무를 받으면서 미주는 점차 희열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갑자기 연호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미주를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넥타이를 당겨 풀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만 벗겨 놓고는.’

조용한 방 안에 울리는 벨트를 푸는 듯한 소리. 저 보란 듯이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며 질 나쁜 웃음을 짓는 연호가 벗은 와이셔츠를 바닥에 던졌다.

약간의 두려움을 느낀 미주가 다시 눈을 꼭 감았다. 옷을 벗는 소리가 나는 방향의 반대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하지만 연호는 어림도 없다는 듯 다가와 귀를 핥으며 속삭였다.

“날 제대로 느껴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듯했다. 탄탄해 보이는 남자의 갈라진 근육을 보면서 미주가 부끄러운 듯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고 했지만 말이다. 연호가 한 손으로 가볍게 두 손목을 쥐고 저를 제압했다.

키스를 퍼부으며 목덜미부터 천천히 어루만졌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그녀의 몸에 일부러 흔적을 새겨 넣듯이 아주 강하게 입술로 피부를 붉게 멍들였다.

“미주야… 너무 예뻐.”

손안에 부드럽게 쥐어지는 탐스러운 가슴의 감촉에 연호는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속마음을 말로 표현해 보았다.

“으응…….”

여린 신음에 작게 섞인 쾌락의 한 소절에 연호는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서서히 침입했다. 그리고 스커트는 순식간에 벗겨져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

미주는 소리 없이 몸을 조금 떨었다. 끔찍했던 기억 속에서 육체에 남은 공포의 잔상이 아닌 처음으로 느껴 보는 뜨거운 환희가 긴장으로 다가왔다.

연호가 손을 아래로 내려 미주의 무릎 주변을 손톱을 세워 자극했다. 조금 간지러운지 그녀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연호는 허벅지 안쪽으로 깊숙이 손을 넣었다.

“…으읏… 아아…….”

손에 닿은 허벅지 안쪽 은밀한 곳이 매끄럽고 미끈하진 않았다. 연호는 미주가 새겨 놓은 고통의 시간을 하나씩 만져 보며 그녀와 함께 아픔을 나누고 싶었다.

“아……!”

미주는 난도질된 허벅지에 남은 상처에 키스하는 연호 때문에 깜짝 놀랐다. 보드랍고 도톰한 입술과 혀가 뜨겁게 상처를 치유라도 하듯 핥고 있어 생경한 아찔함에 침대 시트를 말아 쥐었다.

허벅지를 녹여 내는 연호의 어깨를 잡았다. 밀쳐 내려 해도 단단한 남자 몸이 제힘에 밀릴 리 없다고 생각할 때 연호가 팬티를 슬며시 끌어 내렸다.

“아, 거긴… 읏……!”

연호는 미주의 말을 삼키며 촉촉한 어깨를 깨물었다. 키스 때문에 조금은 부푼 듯한 그녀의 입술에 다시 한번 더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물론 아래에선 천천히 손을 그녀의 중심으로 뻗고 있었고.

“좀 더 긴장을 풀어.”

만년설같이 늘 얼어 있던 미주의 몸이 조금씩 녹아내려 물이 흐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충분치 않았던 것 같았다. 손에 닿은 그녀의 여린 살이 준비가 덜 됐음을 알리고 있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점성이 그리 많지도, 끈적하지도 않았다. 연호는 조금 더 공을 들여 미주를 열어 깨우려 했다.

“……아읏!”

그게, 말이 안 된다고 미주는 생각했다. 그곳은 저 역시 샤워를 할 때나 씻어 내기 위해서 손이 닿았던 곳인데 말이다.

연호가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너무 배려 넘치지 않게 갈라진 틈을 따라 속살을 위아래로 만져 댔다. 제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체액이 조금씩 연호의 손길에 몸 밖으로 빠져나와 주변을 적시고 있었다. 미주는 야릇한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미주야, 젖어야 안 아파.”

“……몸이 이상해요.”

‘젖는다’라는 말이 이렇게나 음란하게 들릴 줄이야. 입구에서 흘러나온 물기 덕분에 연호의 손가락이 지나는 곳이 쓸림 없이 아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을 때, 무언가 몸으로 들어왔다.

“충분히… 느껴 봐.”

미끄덩거리며 내밀한 곳으로 들어간 손가락 끝을 연호가 살짝 세우고는 내벽을 여리게 긁어 댔다. 좁디좁은 길이 꽉 맞물려 손가락을 조여 왔다.

사실상 처음일 여자의 몸. 연호는 절정까진 아니더라도 각인되어 있을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워 주고 싶었다. 그래서 느리지만 천천히,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주의 육체가 완전히 노곤하게 이완될 때까지 만져 댔다.

“하… 아! 으응…….”

미주는 뜨겁게 몰아치는 감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마음으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이 무섭다고 생각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와 정반대였다.

‘아, 어떡해. 미칠 것 같아… 아래가 이상해.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빨갛게 달아오른 열기를 느껴 보다가 점차 머릿속이 꿈결같이 몽롱해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연호가 손가락을 빼더니 살짝 분홍색 꽃잎을 벌리며 작은 돌기에 제 혀를 갖다 대었다.

“헉! 하지 말아요. 앗! 하지 마…요.”

충격적인 감각이 아랫배에서 서서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간질거리면서 꿈틀대는 것이 음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마비라도 된 듯 짜릿한 감각에 미주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연호의 어깨를 때려 보지만 말이다. 그럴수록 더 집요하게, 음탕하게 빨아 먹는 소리만 들렸다.

“미주야, 좋아?”

“안 좋아, 하지 마. 그만해. 무서워.”

“진짜……?”

“응, 몰라.”

눈가에 눈물이 맺힌 미주가 도리질 치지만 몸은 반대로 핑크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연호가 클리토리스를 빨기도 하고 혀로 건드리기도 했다. 입술로 비비면서 미주가 오르가슴을 느끼길 원할 때였다. 그녀의 발등이 유려한 고를 만들며 힘이 들어갈 때, 뭔가 터진 듯한 표정을 짓는 미주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으읏! 이상해… 나, 이상해. 몸이 뜨거워. 제멋대로…….”

혀를 떼어 낸 미주의 밀부가 불규칙적으로 움찔거리면서 엉덩이가 들썩였다. 제 노력이 헛된 것 같지 않아 연호는 그제야 고개를 흔들면서 쾌락의 비명을 지르는 미주의 몸 위로 올라왔다.

“이제, 진짜야. 아프면 얘기해야 해.”

절정을 느낀 미주의 눈에 연호의 커다란 페니스가 보였다. 그 순간 제 몸을 찢었던 악마들의 몸뚱이가 떠올랐다. 미주가 공포를 느낄 때 연호가 다정하게 키스를 해 주었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이젠 다 잊자는 듯.

“힘을 빼… 좀 더… 그래, 그렇게…….”

서서히 미주의 안으로 저를 밀어 넣었다. 좁기도 하지만 경직된 근육이 주는 밀폐감에 연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이 써졌다. 하지만 천천히 허리에 힘을 주며 안쪽으로 직진하자 뜨거운 질구가 페니스를 끝까지 받아들였다.

“으으… 으읏…….”

미주는 몸을 가르는 듯한 엄청난 느낌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육체가 세로로 쪼개지는 것 같고, 또 배 속이 뚫릴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고통과는 다른, 은근하면서 아릿한 감각은 아프다기보다 통과 의례 같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호의 달콤한 키스가 마치 마약처럼 은은한 통증을 무뎌지게 만들 때 그가 조금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프면 그만할게.”

“아니, 계속해요. 멈추고 싶지 않아.”

시트를 쥐고 있던 미주가 손을 놓으며 제 어깨를 꼭 잡았다. 연호는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을 다 얻지 못해도 저를 더는 밀어내지 않는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 이젠 내 차례야.”

그래서 조금 욕심을 내 보려 했다.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으니 쌓였던 욕구를 지금부터 풀기 시작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충분히 열렸다고 생각한 미주의 은밀한 곳은 아직 저항감으로 가득했다. 연호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너무 깊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얕지도 않게.

도돌도돌하게 달라붙는 주름진 근육이 강하게 페니스를 압박해 오자 연호도 점점 흥분되었다. 뻑뻑한 첫 느낌이 조금 버거웠다. 하지만 안에 가득 찬 그 부자연스러웠던 느낌이 점차 자연스럽게 변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들리는 차진 물소리. 미주의 몸에서 나온 꿀 같은 애액이 제 성기를 달콤하게 녹이며 두 사람의 처음을 매끄럽게 해 주고 있었다.

“흐으읏…….”

고통과 쾌락이 섞인 미주의 탁한 비음만으로도 이미 귀는 절정을 느꼈다. 연호는 상체를 조금 세워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지그시 허벅지를 누르며 조금 더 넓게 다리를 벌렸다.

“하으… 흣…….”

조금 더 깊게 닿는 깊숙한 동굴의 감촉은 뜨겁고 부드러웠지만 타이트하게 조여 왔다.

“미주야, 아…….”

저도 모르게 한 조각 더운 숨결을 토한 연호가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하아…….”

깊숙이 찔러 오는 연호의 육체가 조금 버겁기는 했다. 턱턱-거리며 음부에 닿는 남자의 단단한 몸이 주는 묵직한 힘이 배 속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몸 안을 가득 채운 연호의 남근이 마치 제자리를 찾은 듯 꽉 맞물려 뜨겁게 움직였다. 미주는 그저 그의 어깨만 붙잡고 몸을 맡겼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연호도 서서히 격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미주와 연호가 만들어 내는 쾌락적 관능의 첫날밤. 깊어 가는 어둠 속에서 열정과 한숨이 가득한 침실에는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핫, ……으응.”

연호가 끝까지 밀어붙이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미주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굵고도 기다란 붉은 페니스가 경부를 쿡쿡- 찔렀다. 자지러지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분이었다.

“어때? 좋아?”

언제나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연호가 나른한 표정으로 허스키하게 묻는 목소리가 야해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몰라…….”

연호는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허리를 돌리고 휘저으며 재차 물었다.

“모르면 내가 알게 해 줄게.”

“으읏……!”

연호가 속도를 점점 올리며 성난 야수처럼 거친 기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주는 그동안의 피스톤질은 몸풀기였다는 듯 푹푹 박아 대는 그의 페니스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몸은 반대로 더 움찔거리며 의사와 관계없이 고장 난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씨발, 너무 조여서 내가 죽겠어.”

평소에는 상스러운 욕 따윈 하지 않는 연호가 미간을 구겼다. 수축하다 못해 그냥 닫힌 것 같은 질구에 제 몸이 잡혀 버린 듯했다. 마음도, 육체도 미주에게만 반응하니 연호가 미칠 것 같을 때였다.

“하아…….”

짧은 탄성과 함께 깊게 박아 넣은 여자의 몸 안에 제 씨앗을 번져 냈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 속에서 연호는 끝났지만, 끝을 낸 게 아니었다. 빼지도 않고 허리를 다시 움직이려는 연호를 미주가 다급히 말려 보았다.

“저기, 차장님. 나 힘들어서 못 해요. 그만…….”

“차장님 말고, 차연호.”

“차연호 씨, 그만……”

애타는 눈빛으로 더는 할 수 없다며 제 아래에서 고개를 젓는 미주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오늘만 봐주는 거야.”

제 말에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미주의 얼굴은 쾌락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연호는 일부러 느릿느릿 페니스를 빼지 않고 다시 키스를 퍼부어 댔다. 물론 여운이 가득한 질구에서 여전히 허리를 움직이자 미주는 죽는다고 몸을 틀어 댔고.

“제발 좀, 제발!”

거의 울기 직전인 미주가 정말 힘을 실어 저를 때리기 시작했다. 연호는 아쉽다는 듯 천천히 아직도 화가 나 있는 페니스를 빼냈다.

“…….”

연호는 반쯤 넋이 나가 있는 미주의 옆에 누워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뜨거운 정사의 잔상을 음미하던 연호는 조용한 미주를 눈을 내리깔고 보았다.

‘잠들면 더는 손도 못 대잖아.’

연호는 잠든 미주의 송골송골하게 땀이 맺힌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더 깊게 끌어안았다.

* * *

‘으응?’

가물가물한 미주의 의식 속에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 나도 씻어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팔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근육들이 노곤하게 이완된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다시 감겨 가는 미주의 잔뜩 무거운 눈에 연호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출근해야…….”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잠꼬대 같은 소리를 작게 웅얼거렸다. 꿈인지 생신지 구분이 되지 않는 기분.

‘이대로 차연호랑 같이 자는 건가?’

제 몸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할 때 미주의 코끝에 물 냄새가 났다.

“출근하려면 멀었어. 더 자자.”

연호가 저를 안고는 이불을 덮는 느낌이 들었다.

‘팔베개? 아, 기분 좋다…… 근데 너무 잠이 와.’

* * *

‘아흑, 몸이 너무 무거워.’

미주는 눈을 비비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침잠이 많아서 평생을 지각과 전쟁을 했던 제가 동이 틀 무렵에 다 일어나다니. 겨우 눈을 뜨고는 일어난 곳을 눈동자를 굴리며 살펴보았다.

‘그래, 차연호 집이지. 그렇담 지금 내 옆에서 자는 남자는 차연호일 테고.’

엎드린 채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는 남자의 얼굴을 미주는 물끄러미 보았다. 간밤에 있었던 놀랄 만한 일.

‘내가 남자랑 섹스하다니.’

손을 살짝 뻗어 자는 연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만졌다. 아마도 깊이 잠든 것 같은 연호는 터치에 미동도 없었다. 살짝 미소 지으며 이불을 잘 덮어 주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삐걱삐걱하는 것 같은 이상한 근육통 속에서 처음 느껴 보는 비밀스러운 통증이 뭉근했다.

‘100m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리가 너무 뻐근해.’

몸에 남은 아릿하고도 쓰린 감각을 느끼며 지난밤을 떠올렸다.

‘세상에, 차연호랑 잤어. 그것도 완전히 거부 없이, 완벽한 동의하에.’

얼굴을 붉히며 침대에서 내려와 겨우 바닥에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아직 제 아래에 연호의 체액이 남은 것 같았다.

두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미끄덩거리는 감촉. 너무나도 이질적이지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그 느낌.

‘아, 기억나. 잠결에 그 사람이 닦아 준다는 걸 부끄럽다고 거의 주리를 틀었던 것 같아.’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제 옷가지들을 들고 발뒤꿈치를 든 채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이대로 집에 가기에는 너무 찝찝하니, 간단히 씻고만 가자.’

지금까지 가 봤던 집 중에서 가장 크고 넓은 저택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연호의 집에서 욕실을 찾아 들어갔다.

“다행이야. 온수 쪽으로 손잡이가 돌아가면 자동으로 뜨거운 물이 나오네. 우리 집은 보일러로 꼭 목욕 모드 만들어야 하는데.”

재벌가도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몰래 도둑 샤워를 하는 기분이라 미주는 급하게 물을 몸에 뿌리듯 서두르고 있었다.

“아, 맞아. 아으, 어쩌지?”

몸에 남아 있는 연호의 흔적들을 재빨리 씻어 내다 멈칫 고개를 들었다. 미친 듯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며 미주는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너 어쩌려고. 이 병신……!”

잔뜩 인상을 쓰며 머리를 쥐어뜯는 미주는 지금 미칠 것 같았다.

‘피임을 안 했어! 아, 정말 나도 무책임하지만, 그 인간도 왜 이렇게 무책임한 거야?’

깊은 자책을 하며 급히 샤워기 레버를 잠갔다. 날짜를 헤아려 보기 시작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계절이 바뀌기 전이었으니깐 아마 괜찮을 거야.’

평소에 생리가 불규칙적이다 못해 1년에 몇 번 할까 말까인 것에 대해 처음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날짜를 되짚어 보니 이미 3개월 이상 끊긴 것 같았으니 말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욕실 수납장 문을 슬쩍 밀어 보았다.

“꽤 깔끔하게 사는구나. 아니, 재벌인데 도우미 이모님이 여럿 있겠지.”

짙은 회색의 도톰한 새 수건을 꺼내 대충 물기만 닦아 냈다. 욕실 문 앞에 둔 제 옷을 입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식탁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이 보여 미주는 가장 오래된 날짜의 신문을 골랐다. 늘 핸드백에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볼펜을 꺼낸 후 손에 쥐고는 글을 썼다.

[도망간 거 아니에요. 집에 가서 옷 갈아입으려고요. 어제랑 같은 옷 입고 출근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귀퉁이를 찢어서 연호가 볼 수 있는 곳에 놓아뒀지만 그래도 혹시 이걸 못 보면 어쩌나 싶을 때였다.

“너 뭐니. 진짜 바보잖아.”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될 텐데, 대체 이 무슨 쌍팔년도냐고.

어이없는 듯 피식거리다가 혀를 끌끌 찼다. 핸드폰을 꺼내 똑같이 텍스트를 입력했다. 그리고 메모처럼 남긴 찢어진 신문 조각은 가방에 넣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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