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4. 말할 수 없었던 비밀 (15/53)

2권

14. 말할 수 없었던 비밀

* * *

미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차연호와 결혼이라.

소설로 따지자면 기승전도 없이 바로 결로 점프해 버리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연호가 진우의 살인까지 알고 있다니, 바늘구멍이라도 빠져나갈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울면 안 돼. 절대로 울지 말자. 지금부터 내 앞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울지 않을 거야.’

고개를 들어 조금 전 어마어마한 말을 뱉은 연호를 뜨거운 눈시울로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오른손에 쥐고 있는 나이프로 그의 손이라도 찍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진우와 재민의 안위를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이걸로 내 목을 찌를까? 아니면 내 얼굴이라도 그어서 보기 싫은 흉측한 모습이라도 되면 그가 날 포기할까?’

지금 차연호 앞에서 죽을 방법은 많았다. 이 호텔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려도 괜찮았고, 수건이라도 구해 목이라도 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같은 게 살아서 그래. 죽어야 했는데. 더 빨리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냈어야 했는데. 결국 희주 오빠한테도, 진우 오빠, 재민 오빠한테까지 나라는 존재는 짐이구나.’

8년.

8년만 차연호의 인질로 살면 우리 모두를 놓아주는 걸까?

미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8년 안에 오빠랑 끝장 보겠다는 뜻이겠지.’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라면 말이다. 차라리 연호가 죽었으면 했다.

‘차연호 옆에서 그가 쓰러지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지키고 싶었다. 진우도 재민도 모두 저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의사가, 판검사가 되어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순간 결심했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앗아 간 자에게 치욕을 당하더라도 살아서 꼭 보고 싶었다.

‘지금 나를 협박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미주는 일부러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살인이라, 살인 증거 있는 걸 증명해 보여야 내가 믿지 않을까요?”

“……넙치라고 알지?”

미주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렸다.

얼굴이 넙데데해서 ‘넙치’라고 불리던 동네 오빠. 희주를 형님이라고 불렀던, 그리고 진우와 함께 오랫동안 불량한 짓을 잔뜩 했던 제가 아는 부산 남자.

진우가 손에 피를 묻히던 그날, 넙치 오빠도 그곳에 있었던 걸까?

“좋아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연호는 마치 그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며 미주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우리가 다음에 하기로 한 거, 그거부터 해야지.”

제 말에 미주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아, 키스. 그 정도는 여기서도 해 줄 수 있어요. 결혼할 사인데, 뭐.”

오히려 세게 받아치는 미주에게 하룻강아지 보듯 딱하게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입술을 뗐다.

“아니, 섹스.”

스테이크를 썰던 미주가 손을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한 조각을 입에 넣고는 오물거렸다. 하지만 귀부터 빨갛게 달아 오는 동요된 마음을 감출 순 없었나 보다. 표정이 굳어 가고 있을 때, 연호가 한마디 더 보탰다.

“바로 갈 거니깐 잘 먹어 둬, 방 잡아 놨거든. 아니, 오늘은 아침부터 거기 있긴 했어. 원래 내가 여기에 오면 쓰는 룸이니까.”

그 뒤로 미주는 저를 보지 않았지만, 연호는 괜찮았다. 처음부터 갖고 싶었던 걸 이제 겨우 손에 넣은 거니, 그간 많이 참아 줬다 싶었으니 말이다.

꽉 다운 입술에서 그녀의 분노와 고통이 느껴졌지만 연호는 모르는 척했다. 미주가 제 앞에 앉던 순간부터 뻐근하게 피가 몰렸다. 욕정을 풀 생각에 머릿속은 이미 음란함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깐.

의미 없는 식사가 끝나고는 연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주를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따라오라는 신호.

미주는 주먹을 꽉 쥐고 어금니를 깨물며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어차피 더러운 몸이야. 두 번 더럽힌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하지만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님에 미주는 절망하며 울음을 삼켰다. 원나잇도 아니고, 결혼이라는 구두로 계약한 8년간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두려웠다.

이제 와 못 하겠다 도망쳐 봤자 그를 더 자극할 게 뻔했다. 그래서 하데스에게 납치당한 페르세포네의 심정으로 호텔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연호가 제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조금 전까지 겁을 상실한 윤미주는 어디 있는 거지?”

연호는 벌벌 떨고 있는 미주를 품에 안고는 뺨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러지 말고 빨리해요.”

“뭘?”

“섹스요. 그냥 빨리해요.”

미주가 겨우 용기 내 하는 말에 연호는 속으로 웃었다. 천천히 손을 그녀의 턱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가느다란 목덜미를 어루만져 보았다. 손끝에 톡톡- 닿는 동맥이 뛰는 느낌. 분명 흥분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말이다. 그녀의 불행한 과거와 상처를 완전히 모르는 척 제 욕구만 채우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닿은 미주의 몸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 연호는 생각을 조금 바꿨다. 미주를 직접 마주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지는 기분이니까. 연호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아니, 천천히.”

연호가 입술을 살짝 제 입술에 스치며 대답하자 미주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윤미주, 눈 떠서 날 봐.”

연호의 손이 미주의 머리카락으로 방향을 바꿔 긴 머리를 손으로 만졌다. 간신히 눈을 뜨고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느낌 속에서 바로 코앞의 남자를 보았다. 연호가 엄지손가락으로 미주의 아랫입술을 슬쩍 쓸며 귓가에 속삭여 왔다.

“넌 모를 거야. 네가 성질부릴 때마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게 얼마나 날 흥분시켰는지를.”

허리를 잡은 연호의 손이 더 강하게 저를 당겼다. 이미 밀착된 몸이 더 타이트하게 붙었다.

“그냥… 빨리…….”

육체는 위험했다. 미주는 이 남자와 쾌락을 나눌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고 쾌락이 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제게 성욕이란 부산에서의 악몽 이후로 사실상 거세된 욕망이었으니깐.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된 강제적 협상의 결과물 속에서 뭔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뭘 빨리해 달라는 건지 말해.”

“그게…….”

그녀가 당혹감 속에서 어버버 거릴 때였다. 연호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한쪽 다리에 힘을 주며 미주의 두 다리 사이를 침입했다.

“…….”

갑자기 느껴지는 남자의 단단한 허벅지에 놀랐다. 연호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더 연호의 몸이 깊게 파고들 뿐.

입술을 만지던 연호의 손이 미주의 머리 뒤로 넘어갔다. 그대로 얼굴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럽고 뜨거운 입술이 입에 닿자 미주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각에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배우지 않아도, 알지 못해도 인간이라는 동물 안에 숨겨진 본능이 꿈틀거렸다.

“…아…….”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떨어진다고 생각할 때였다. 다시 연호의 입술이 포개져 왔다. 살살 달래듯 부드럽게 미주의 입술을 빨다가 살짝 깨물었다.

이가 입술에 닿자 놀랐는지 살짝 벌어진 미주의 입술 사이로 다시 연호가 침입했다. 그의 혀가 강하게, 또는 느리게 천천히 농락했다.

어쩔 줄 모르는 미주의 혀는 자꾸 도망가지만, 연호가 개의치 않는 듯 입천장을 건드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조금 전, 이 프레지던트 룸으로 들어서며 떨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떨림.

미주는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연호에게 끌려가는 키스에 자꾸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연호도 그걸 느꼈는지 더 강하게 미주의 허리를 휘어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하…….”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소리에 연호가 느리게 움직이더니 입술을 떼어 냈다. 가만히 미주를 바라보다가 살짝 웃고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안아 들었다.

“아, 안 돼요.”

“빨리해 달라며?”

“아니, 그게…….”

미주의 말이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연호가 입술을 다시 덮치며 떼지 않은 채 침대에 눕혔다.

“아……!”

미주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섭고 두렵고 여길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그의 육체가 주는 이 야릇한 감각이 마구 엉켜 머리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바르르 몸이 떨리긴 해도 자꾸만 괜찮다는 듯 연호는 능숙하게 달래며 노련하게 리드하고 있었다.

처음 하는 키스가 이토록 달콤할 줄 몰랐다. 심지어 정말 사랑해서 나누는 스킨십도 아닌데 너무나도 아찔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그냥 하는 건가? 어쩌지? 도망가고 싶어.’

겉옷을 벗겨 낸 연호가 반쯤 몸 위에 올라타자 미주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콘크리트의 한기가 떠올라 몸이 식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일.

연호의 손이 제 허벅지에 닿아 원피스를 말아 올리는 순간 끔찍한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미주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피가 날 정도 세게 물었을 때였다.

“너……?”

연호가 멈칫하면서 아래에 깔린 미주를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치 모든 욕구가 일순간 사라진 것 같은 얼굴을 한 그를 보며 미주는 몇 초간 눈을 깜빡였다.

뭐 때문에 연호가 손을 멈췄는지 알고는 죽을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흐트러진 제 모습은 아랑곳없다는 듯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연호가 팔을 붙잡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놔요. 놔요, 이거.”

“…….”

“놔! 놓으라고! 네가 뭔데!”

연호는 아무런 말 없이 발광하다시피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미주를 보았다. 그녀는 지금 섹스 때문에 화난 게 아니었다.

숨겨진 비밀을 들킨 얼굴.

“차연호, 이거 놓으라고!”

“…윤미주…….”

“놔! 개새끼야! 이 씨발놈, 씨발 새끼! 놔! 놓으라고!”

미친 것처럼 욕을 하며 난동을 부리는 저를 연호가 뚫어질 듯 쳐다봤다. 미주는 켕긴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윤미주, 가만히 있어!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연호가 미주를 힘으로 제압하며 다시 침대에 눕혔다. 미주는 처음과는 달리 격렬하게 반항했다.

만약 누군가 이 상황을 봤다면 마치 연호가 미주를 겁탈이라도 하는 듯 보였을 것이다. 물론 몇 분 전까지는 일방적으로 합의된 척하는 성관계를 시도했지만, 지금은 정말 달랐다.

연호는 조금 전 터질 것 같은 색욕으로 만졌던 그녀의 허벅지를 강제로 벌려야만 했다. 그리고 미주는 절대로 보여 줄 수 없었다.

차라리 섹스가 나았다.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은 걸 세상에서 가장 껄끄러운 남자에게 보이다니.

차현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야근이다 뭐다 몸이 너무 피곤하니 더는 이런 짓도 할 생각조차 못 했다. 잡생각도, 망상도 피로 앞에서는 장사 없다 여겨서 솔직히 웃기기도 했는데.

그래서 제 몸을 연호가 만지고 본다 한들 말이다. 어디까지나 부끄럽고 두려운 섹스에 대해서만 생각했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허…….”

연호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미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흘렸다.

허벅지 안쪽에 나 있는 무수한 자해의 흔적들.

켈로이드 살성 때문에 상처는 지렁이처럼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오래된 것과 오래되지 않은 것들이 섞여 있는 이 흉측스러운 흉터가 마치 미주의 몸을 숙주라도 삼은 듯 잠식한 것 같았다.

“보지 말아요, 제발.”

제가 삭인 고통의 시간과 아픔들을 육체에 새겨 놓고 있었던 걸 들키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연호에게 말이다.

“제발…… 보지 마…….”

여자에게만 생기는 한 달에 한 번씩 일어나는 마법, 생리가 오래전부터 끊겼다는 걸 진우와 재민이 알 리 없었다.

서울로 올라와 이젠 모든 걸 다 잊고 새 출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무렵부터 시작된 불규칙한 주기. 들쑥날쑥하던 날짜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1년에 한두 번도 겨우 할 정도였다.

여자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간다고 생각하면서 절망하던 순간에 벌어졌던 실수였다.

그동안 매일매일 죽고 싶다는 자살 충동을 느끼면서 살아왔었다. 그래서 언젠가 작은 과도를 쥐고는 식탁에 앉아서 한참이나 울었었다.

손목을 그을 용기가 없어서 우물쭈물 눈물만 흘렸는데 말이다. 실수로 떨어뜨린 칼에 허벅지가 베였다. 그때 느껴졌던 고통과 함께 흐르던 붉은 피가 저를 살렸다.

‘나는 이미 죽은 게 아니었어…… 나는 살아 있었구나! 이것 봐, 나는 아플 수 있고 이렇게 피를 흘릴 수도 있어! 하하하, 나는 살아 있다고!’

그때부터였다. 생리를 하지 않은 달에는 제 몸에 칼을 대며 피를 흘렸던 게. 그러면 왠지 이제 저도 자연의 섭리대로 평범한 여자가 된 것 같아 안심할 수 있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몸의 가장 은밀한 부위에 잔뜩 칼자국을 내야지만 살아 있음을 느꼈던 시간. 누적될수록 쌓여만 가는 흉터는 하필이면 살성마저 켈로이드라 점점 더 흉해지고 있었다.

그런 행위를 반복할수록 마음은 무너지고 정신은 점점 피폐해져 결국 영혼이 서서히 망가지는 중이었다.

“울어, 차라리 시원하게 엉엉 울어 봐. 한 번 봤으니 두 번은 참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연호는 옆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눈물만 흘리고 있는 미주에게 제 방식의 위로를 건넸다.

“…….”

전에 집에서 봤을 때와는 다르게 미주는 훌쩍이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이 눈물이 미주의 진짜 눈물일 것 같아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 문득 제가 함부로 흩트려 놓은 미주의 옷매무새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짓 하려고 한 거, 정말 미안해.”

“…….”

“방금 전에 한 행동은 네 상처, 내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그랬던 거야. 물론 네 말대로 내가 개새끼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유야 어쨌든 네 몸에 함부로 손댔으니 그것도 사과할게.”

“…….”

“나를 용서할 수 없다 해도 이해해. 그래도 너랑 자고 싶은 건 진짜였어.”

연호는 이불을 끌어다가 미주의 몸을 덮어 주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나라도 괜찮으면 뭐,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어.”

“…….”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날도 네 술주정 끝까지 들어 준 전적이 있으니깐 실컷 울어 봐.”

“…….”

“밖에서 기다릴게. 더는 내가 먼저 침실로 들어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천천히 울고, 펑펑 울어.”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손을 내려 낯선 천장을 보았다. 아마도 연호는 거실로 나간 듯했고, 더는 저를 억지로 취할 생각이 사라진 듯했다.

미주는 연호가 덮어 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려 뒤집어썼다. 울음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흠.’

연호는 왠지 따가운 시선에 눈을 살짝 떴다. 일단 미주를 혼자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거실로 나와 소파에 잠시 눕다시피 기댔는데 살짝 잠이 든 모양이다. 그런데 눈을 뜨니 시선의 끝에 미주가 서 있었다.

“괜찮아?”

“나쁘진 않아요.”

“서 있지 말고 앉아.”

언제 침실에서 나온 것인지, 소파에 기댄 저를 바라보고 있는 미주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제가 앉은 소파와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에 살짝 걸터앉은 미주가 멋쩍은 미소를 짓다가 뜻밖의 부탁을 했다.

“저 물 한 잔만 주세요.”

“……직접 일어나 냉장고에서 꺼내 마셔.”

“차장님이 냉장고랑 가깝잖아요.”

저를 부려 먹으려는 미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바싹 마른 입술이 곧 찢어질 것처럼 보였다. 온몸에 수분 하나 남지 않은 것처럼 말라비틀어져 보여서 안쓰러웠다. 연호는 몸을 일으켜 미니바 냉장고에서 생수를 하나 꺼냈다.

“자, 받아.”

연호가 500mL 생수병을 살짝 던지듯 건넸다.

“나이스 캐치.”

지금 이 어색한 분위기를 유연하게 풀어 보려고 하는 연호의 말에 미주가 살짝 웃었다. 고맙다는 듯 그가 던져 준 생수를 손으로 한두 번 흔들어 보였다. 생수병을 열고 물 한 모금을 마시던 미주가 결심한 듯 제게 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매우 차분한 얼굴을 한 미주에게 연호가 입을 뗐다.

“내가 물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안 해?”

“그럼 딜한 것도 있고 하니 하나씩 서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요?”

말없이 턱을 한 번 치켜드는 특유의 동작은 아마 승낙의 표현일 것이다.

“그때 집에는 어떻게 들어온 건지 궁금해요. 내가 열어 준 건지, 차장님이 어떻게 비밀번호를 알고 연 건지.”

연호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해 줬다.

“혹시 터치키가 있나 싶어서 핸드백 열어 봤어. 그리고 찾았지. 그 꽃 모양 열쇠고리에 달린 거.”

“역시, 내가 열어 줬을 리가 없었어. 이상하다 했거든요.”

“솔직히 그냥 문 앞에 던져 놓을까 하다가 참았어. 성질 같아서는 문짝이라도 뜯을까 했지만 늦은 밤이라 참고 조용히 들어온 거야.”

문을 뜯는다는 말에 미주가 피식하고 웃었다. 한바탕 울고 나서 뭔가 응어리가 내려가기라도 한 걸까? 그녀 특유의 날 세우는 느낌이 사라졌다.

“그럼 이제 내 차례.”

연호는 자세를 고치며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그리곤 몸을 살짝 비틀어 미주를 보고 말했다.

“적당히 해. 시작은 쉬워도 끊는 건 힘들어. 그래서 처음부터 안 하는 게 제일 좋은 거긴 하지만.”

오른쪽 검지를 관자놀이에 톡톡댔다. 미주의 머리가, 머릿속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이다.

미주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소파에 좀 더 편하게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봤군요.”

“어, 핸드백 열었을 때 우연히. 그리고 냉장고랑 주방 선반에 가득 찬 술도.”

미주는 고개를 숙여 제 발밑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서 상처를 만져 보고 바로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신 거네요.”

“비슷해.”

“아까 레스토랑에서 한 말, 부산에 있었던 일. 진우 오빠 일만 알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연호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주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 자체가 되게 우습다는 거 잘 알고 있어. 불과 몇 시간 전에 우린 꽤 흥미로운 거래를 했고, 또 조금 전에는 널 위력으로 안으려고 했던 놈이 갑자기 카운슬러라도 된 것처럼 구는 게 정말 앞뒤가 안 맞긴 하는데.”

“알고 있으면 됐어요.”

평소처럼 핀잔을 주는 미주라서 다행인 것 같았다.

“난 일단 들어 줄 준비가 되었으니, 말하고 싶으면 말해. 말하기 싫어도 괜찮고.”

미주는 연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 새카만 눈동자 속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면, 제가 미친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삼자인 연호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꽤 초연하게 느리지만, 천천히 들려주었다.

“오랫동안 잠을 잘 못 잤어요. 눈만 감으면 자꾸 그때 그 감각이 살아나거든요. 시멘트 바닥의 냉기와… 담배 냄새… 그리고 그 새카만 어둠… 한때는 집에 모든 불을 켜 놓고 살았던 적도 있었어요.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상태가 안 좋을 때는 꼭 모든 집 안의 조명이란 조명은 다 켜 놓고 있어요… 그래야, 그나마 안심이 되거든요.”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솔직히 내가 어설프게 위로를 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

제 말에 미주가 가느다랗게 웃었다. 왠지 처음 보는 담백한 웃음이었다.

“저는 가끔 미치도록 생각이 나요. 그때 왜 나는 늘 다니던 길로 갔던 걸까? 한 번 정도는 다른 골목으로 가서 집에 가면 되었을 텐데… 그러면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 보지만.”

“다른 길로 갔다면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 봐. 네가 산 덕분에 나는 다행히 지금 널 어떻게 잡아먹을지 잔뜩 궁리 중이니깐.”

“궁리한 게 그거예요? 오빠가 날 위해서 한 일 다 까발리겠다?”

“그렇게라도 해야 네가 순순히 내 말을 듣고 나랑 같이 잘 줄 알았거든.”

“비겁한 건 알죠?”

“어, 알아. 근데 너도 알아야 해.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하는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화장까지 다 번져 눈 밑이 새까매진 미주가 제 시선을 피하고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결국은 섹스를 하고 싶다, 그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너랑 섹스하기 전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미주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저를 흘겨보지만, 연호는 그저 웃었다.

뭔가 서로 한 겹씩 벗겨진 기분이랄까? 미주도 저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제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서 꽤 솔직하게 대답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서진우가 너 이런 거 알고 있어?”

미주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정재민은?”

“모를 거예요.”

“그럼 나만 알고 있는 건가?”

미주가 빙그레 웃으면서 알려 주는 말에 연호는 살짝 인상을 썼다.

“아니요, 약에 대해서는 진짜 생각지도 못할 사람이 한 명 알고 있어요. 누군지 아마 못 맞힐걸요?”

“아, 네 비밀은 나만 알고 있어야 내가 계속 널 협박할 수단이 될 텐데, 이거 망했어.”

이젠 편하게 농담까지 던지는 연호에게 미주는 눈썹을 한 번 치켜뜨며 대답했다.

“그런데 사실상 차장님만 아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긴 해요.”

“참 고맙네. 나만 알아서.”

미주는 야윈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면서 물었다.

“너무 길어졌는데 이젠 내 차례인 것 같은데요.”

연호가 물으라는 듯 또 턱을 한 번 치켜들었다.

“정말 내가 그쪽이랑 결혼하면, 오빠 일 덮어 주는 거죠? 확답을 듣고 싶어요.”

조심스럽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미주의 표정은 결연했다.

“차연호, 이름으로 불러. 둘이 있을 땐. 남편 될 사람인데 그쪽보다는 이름을 부르는 게 낫지.”

에둘러서 답을 주는 연호에게 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의 눈을 피한 채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말했다.

“약속한 거예요. 그러면 나도 그쪽이, 아니 차연호 씨가 원하는 걸 해 줄 테니… 날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그게 뭐든 간에…….”

제 신체에 대한 권리를 준다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에 연호는 기분이 나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넌 한 번도 본인 생각은 안 하는 걸까? 나한테 이런 취급을 받아도 그저 서진우 그 새끼랑 정재민 그놈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니.”

어째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과 화가 난 듯한 말투에 미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알 듯 말 듯 한 게 있었다. 저를 괴롭히고 협박하며 결국 몸까지 가지려는 남자에게 어쩌면 다른 마음도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조금 전 레스토랑에서 저한테 이렇게 말했잖아요. 날 인질로 삼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처리하겠다고. 난 차연호 씨한테 그저 진우 오빠에 대한 견제 수단일 뿐이잖아요?”

“맞아, 정확해.”

이 남자한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걸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였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나한테 기대 같은 건 하지 마.”

“뭘요?”

“설마 널 사랑해서 지금 이러겠냐고.”

미주가 쌉싸름한 표정으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타는 목마름에 물을 마시며 대꾸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설마 당신 같은 사람을 내가 사랑하겠어요?”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연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나는 네 입에서 딴 놈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이상하게 머리가 도는 기분이거든.”

연호는 미주 앞에 바싹 다가가 상체를 숙인 후 그녀의 턱 끝을 잡고 제 쪽을 보게 했다.

“네가 나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그건 거절하고 싶은데요?”

“뭐, 결국 나만 생각하게 될 거야.”

“하긴, 증오심으로 들끓으면 종일 차장님 생각만 하고 있긴 하겠네요.”

미주는 고개를 치켜세운 모양으로 제 턱을 잡고 지그시 내려다보는 연호를 올려다보았다.

“바라던 바야.”

연호는 끝끝내 미주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내어 주진 않았다.

“데려다줄게.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야겠어.”

미주는 건조한 얼굴로 연호를 따라 룸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미주가 겨우 입을 뗀 순간 연호가 가로막았다.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을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치열하게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어.”

“…둘 중에 어떤 거요? 우리 계약? 아니면……?”

“너.”

역시 결혼을 이제 와 뒤집을 연호가 아니었다. 미주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 뜻밖의 말을 그가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좀 알아보고 실력 있고 입이 무거운 의사부터 섭외해 줄게. 상담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

“그리고 약은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갑자기 끊는 게 더 안 좋다는 거 정도는 알아. 그러니 당분간은 절대로 허용치 이상 네 마음대로 먹지 말고, 닥터 만나면 상의해서 조절하는 거로……”

“…제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이제부턴 네 문제는 내 문제야. 처지 바꿔서 생각해 봐. 남편 될 사람이 멘탈이 좀 그러면 너도 그렇잖아?”

“…….”

“그리고… 나도 네가 그 문제를 가지고 더는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얼굴에 살짝 경련이 나는 듯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차갑게 연호에게 되물었다.

“쓸모가 없어지면 처리할 거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물론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건 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해. 나도 네가 더는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이 남자는 선한 의도로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아니, 그 누구보다 가장 악한 마음으로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파멸시키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미주가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연호가 눈을 살짝 휘며 조금 웃는 듯이 말했다.

“단순히 말하면 결혼해서 네가 맨날 술 마시고 약 먹고, 정신 나간 채 주정 부리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럼 복잡하게 말하면요?”

연호의 손길이 피할 새도 없이 제 뺨에 닿았다. 그런데 살짝 어루만지는 남자의 커다란 손이 생각보다 따뜻해 살짝 멍하게 그를 보았다.

“오늘처럼 네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뺨을 만지던 연호가 미주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손을 넣어 쓱- 머리카락을 훑었다. 손가락 사이로 긴 머리가 지나가자 간질간질한 느낌이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쪽 때문에 절대로 울지 않을 거예요.”

“차연호.”

“차연호 씨 때문에 절대로 안 울 거야.”

“그래, 그런 거로 울지 마.”

제 말에 미주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작별을 고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굉장히 사무적인 딱딱한 말투로 인사를 하는 미주가 어쩐지 얼굴을 감추듯 사라졌다.

연호는 비어 있는 조수석을 살펴보다 미주가 앉았던 자리를 손으로 쓸어 보고는 살짝 미소 지었다. 아직도 시트에 남아 있는 온기와 간질간질하게 손을 휘감던 머리카락의 감촉과 닿았던 입술의 달콤했던 맛.

“아직 기회는 많아. 내일이라도 불러내 같이 자면 되니깐.”

핸들을 천천히 움직이며 차를 돌렸다. 그런데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어쩐지 울렁거려 도무지 운전에 집중이 잘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한 거 같아.”

왜 거기서 손이 멈췄을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저와 관계없는 일이었고, 굳이 배려해 줄 필요도 없었다.

제가 사는 세상에서는 흔했다. 상대가 가진 아주 작은 흠집을 집요하게 괴롭혀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것들.

형제든 자매든 부모 자식이든 상관없었다. 돈 때문에, 지분 때문에 또는 명분 때문에 피를 나눈 혈육과도 죽고 죽이는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재벌가였으니깐.

그래서 손에 쥔 진우의 범죄 사실을 가지고 그들 모두 쓸어 버릴 책략을 세웠다 여겼다. 물론 갖고 싶은 걸 탐하고자 하는 흑심 또한 작용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더 일이 수월해질 수 있는데, 내 손으로 치료를 하자고 지껄이다니.’

어차피 쓰다 버릴 인질이 마음마저 병들어 있다면 더 처리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정신병원에 처넣어서 거기서 생을 마감하게 할 수도 있고, 약에 손을 써 약물중독으로 저세상으로 보내 버릴 수도 있었다.

이미 그녀는 반쯤은 약에 중독되었고, 알코올 의존을 넘어선 모습까지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더는 몸을 취하고 싶지도 않고 이야기를 들어 주며 심지어 도와주고 싶었던 걸까?

연호는 손에 남은 부드러웠던 감촉을 다시 떠올렸다. 처음에는 분명히 건방진 계집애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몇 달간 지켜본 미주는 항상 슬퍼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에게 더는 나쁜 짓을 할 수 없었다. 미주가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그녀 속에 깊게 뿌리내린 어둠이 사라졌으면 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감정들. 아니, 이해하면 안 될 것 같은 감정들이 조금씩 삐죽삐죽 마음속에서 가시가 되어 돋고 있었다.

제가 이토록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건 미주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껴서 그런 걸까?

‘그냥 얼굴이 내 취향일 뿐. 더는 아무 생각 하지 말자.’

연호가 애써 그 이상한 것들을 외면하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미주 역시 잠을 잘 수 없었다.

오늘 하루 만에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스펙터클한 상황이 저를 짓누르고 있었다. 제가 사랑하는 두 남자의 인생을 걸고 계약한 차연호와의 결혼. 그리고 죽을 때까지 혼자 안고 가려고 했던 비밀.

“그동안은 모두 덮어 두고 피하기만 했어. 나 역시 그랬고.”

진우는 네 탓이 아니라고만 말했다. 그건 그저 어쩔 수 없었던 나쁜 일이었고 너는 피해자였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제는 다 잊고 훌훌 털어 버리라고 말했다. 오빠가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다 잊고 새 출발 하자고.

그리고 그는 모든 걸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지만 모든 게 어찌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미주의 육체에도, 진우의 기억에도, 재민의 마음속에도 아직 여전히 남아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제 안의 고독과 고통 속에서 끝없이 싸우며 혼자 깊은 마음의 병으로 시들어 가며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못해 자신을 해치는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 그가 알고 말았다.

“그 새낀 개새끼야. 그런데 왜 그놈이 나쁜 놈이 아닌 것 같지?”

차연호, 과거의 우연이자 미래의 악연이 될 남자.

이 남자는 진우와도 재민과도 달랐다. 분명 불순하다 못해 적의가 넘치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왜 제가 당했던 고통에 대해서만큼은 공감해 주고 같이 아파해 주는 척이라도 한 걸까?

“아… 나는…… 모르겠어.”

미주의 눈에 고인 눈물이 방울이 되어 하나씩 떨어졌다.

지금 머릿속에는 진우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를 제안하던 차연호는 없었다. 제 입술을 훔치며 육체를 탐닉하려고 했던 무뢰한도 사라졌다.

스테이크를 썰던 저녁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차연호가 망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찰나의 거짓 상냥함에 마음이 움직이다니.

그래서 만약에 카운슬러인 척하던 그가 다시 달콤한 말로 저를 유혹했다면 말이다. 못 이기는 척 그와 침대에서 뒹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해 보면서.

“미친년, 가장 껄끄럽다고 생각했던 상대에게서 위로를 받으니깐 그놈이 어떤 놈인지 벌써 다 잊었지? 같이 자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다니.”

최후에는 제 뺨을 만지작거리며 울지 말라고 말하던 따뜻한 남자만 남아 있어 제가 환멸스러웠다.

아아, 다른 사람도 아닌 차연호에게 구원받다니.

* * *

“아, 확실히 피곤하긴 해.”

재민은 호텔 객실의 조명을 켰다. 거실 소파에 양복을 대충 벗어 던지고 털썩 앉았다.

서울에서 홍콩, 홍콩에서 마카오 그리고 다시 홍콩에서 뉴욕. 이 일정이 여행이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출장이라니.

진 회장을 위한 중요한 거래가 성사되었으니 말이다. 이 위험한 거래를 성사시킨 진우는 이제 차현에서 입지를 완전히 굳힐 것이다.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오늘은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일했으니 이 정도는 쉬어도 될 것 같았으니까.

“하아…… 이게 사는 맛이지.”

미니바에서 차가운 맥주 캔을 꺼내서 시원하게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순식간에 꿀꺽꿀꺽 한 캔을 다 마시고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간접조명으로 은은한 색으로 물든 천장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제길, 메일 확인해야 해. 뉴욕으로 오는 동안 한국이랑 연결이 끊겼으니.”

한참을 소파에 반쯤 누워 있다가 여독이 채 풀리지 않는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따로 챙겨 온 노트북을 스위트룸 안에 마련된 책상 위에 올려 전원을 켰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지만 열리는 화면이 보일 때 익숙한 동작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도착한 메일부터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그런데 놀랄 만한 소식이 그들이 하늘을 나는 동안 전해져 있었다. 재민은 혼란스러움에 몇 번이나 메일을 읽고 또 읽어 보았다. 짧은 문장 속에 가득한 의문들.

“서울이랑 시차가 열네 시간… 그래도 전화를 해야겠어.”

상대방은 제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받았다.

“난데…… 그래, 뭐 때문에 전화했는지 알겠지?”

차연호가 미주를 밖에서 만났다는 소식을 요한이 알려 왔다.

진우와 제가 함께 자리를 비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한 관리는 요한에게 위임해 놓은 상태였다.

특히 그중에서 미주에 대한 건은 특별히 진우가 지시한 일이었다. 어쩌면 오래 나가 있을지도 모르니, 요한이 네가 직접 미주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으라고.

요한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연호가 미주에게 접근한다는 걸 그들이 한국을 떠난 바로 그 날 캐치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진우에게 다이렉트로 보고하지 않았다. 며칠 기다려 좀 더 자료와 정보를 모아 제게 먼저 알렸다. 요한도 오랫동안 진우를 봐 왔으니 그가 미주의 일에는 냉정하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 예의 주시 하는 거 잊지 말고…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거나 미주가 위험할 것 같으면 네가 판단해서 행동해도 되니깐 미주를 지켜 줘.”

‘네, 알겠습니다.’

요한이 보내온 사진만 보면 일단 뭔가 심각하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닌 듯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팩트만 체크해 보자. 차연호가 차를 보냈고, 미주가 타고 차현 호텔로 왔고, 스카이라운지에서 둘이 만났다. 그리고… 흠…… 집으로 차연호가 직접 미주를 데려다줬다.”

그런데 요한이 메일로 보내온 두 사람의 타임라인에 세 시간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연호가 사용하는 차현 호텔 프레지던트 룸은 사실상 그의 세컨 하우스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세 시간이라.”

재민의 머릿속에 이상한 그림이 그려졌다.

“말도 안 돼, 둘이…… 그랬다고?”

재민은 머리를 세차게 털다가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하고 웃었다.

“피곤해서 머리가 안 돌아가서 그래. 일단 좀 씻고 다시 생각하는 거야.”

노트북을 거칠 게 닫은 후 안경을 벗어 소파 테이블 위에 뒀다. 길게 한숨을 쉰 후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쏴아- 하는 물소리 아래에서 생각을 털어 내지 못한 굳은 표정으로 뭔가에 골똘히 몰두했다.

“차연호가 미주에게 접근했다면 이유는 단 하나, 형의 동생이라는 이유 때문이겠지. 그래서 굳이 전략실로 배치하더니…… 결국 일이 이렇게 되다니.”

연호는 아마 미주를 진우의 약점으로 보고 손에 넣기 위해서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바보같이 이미 두 번이나 회사가 아닌 밖에서 본의 아니게 미주를 노출시켰다.

연호가 회사에서 딱히 미주와 깊게 접촉하지 않는 것 같아 진우도 저도 주시하면서도 더는 개입하지 않았는데.

‘아니야, 어쩌면 형은 훤히 다 보고 있었을지도. 아, 모르겠어. 진우 형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과연 진우가 이 모든 일을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차연호의 수를 너무 꼬아서 생각했어. 그렇지만 그것 또한 차연호의 수였겠지.’

그게 연호의 연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으로 또 다른 연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보통이 아닌 연호는 분명 진 회장과의 만찬에서 이미 캐치했을 것이다. 진우가 얼마나 미주를 아끼는지.

그런데 요한의 메일을 보는 순간 딱 이런 직관적인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이 사적으로 밖에서 만나는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은 예감.

‘미주한테 붙여 놓은 애들한테서 이런 말이 없었는데.’

그렇다면 아마 연호한테 매수당한 놈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마도 두 놈 중에서 좀 더 리더 역할을 하는, 제게 보고하는 놈이 매수당한 거겠지.

“그럼 그동안 나랑 형이 몰랐던 것도 이해가 돼.”

등잔 밑이 어두운 걸 일이 벌어지고야 알다니. 부산에서 이미 한 번 방심의 대가를 너무나도 혹독하게 치른 진우와 재민이었는데. 인간은 역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동물이었다.

“차연호의 손아귀로 미주가 굴러 들어가는 걸 뻔히 보면서도 그냥 놔뒀다니.”

미주가 전략실로 배치받았던 그날, 머리채를 잡고서라도 회사 밖으로 끌어내 퇴사시켰어야 함이 옳았다. 저와 진우가 만들어 준 온실 속에서 미주는 비바람을 피해 그저 1년 내내 따스하고 평온하게 지내야만 했다.

“진우 형이 문제야. 쓸데없이 취직하고 싶다는 애를 말렸어야지, 왜 오히려 도와주지 않을 테니 한번 해 보라고 애를 도발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모든 원망을 진우에게 돌리고 싶었다. 왜냐면 머릿속에 야릇하게 달라붙은 망상이 점점 그를 미치게 하고 있어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으니깐.

차연호 그 씨발 새끼와 미주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세 시간. 같이 있었던 건지 아닌지는 아직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직감했다.

“섹스하고 나왔다고 생각하기 딱 좋은 시간이잖아?”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눈을 감아 보지만 말이다. 두 사람이 교접하는 게 눈꺼풀에 달라붙어 그려지고 있었다.

벌거벗은 미주가 연호의 페니스를 빨고 있는 장면이 생생해졌다. 동시에 타액이 질척이며 범벅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이미 재민은 상상 속에서 두 사람의 섹스를 훔쳐보는 중이었다.

“하읏! 오빠, 맛있어……!”

미주의 머리를 거칠게 잡고 박아 대던 연호가 그녀의 입안에 정액을 뿌렸다. 미주는 아랑곳없이 맛있다는 듯 혀를 내밀고 놈의 좆을 빨아 먹었다.

연호는 제 좆을 빠는 미주를 뒤돌려 세워 엎드리게 했다. 이미 젖어 있는 핑크색 꽃잎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그것도 아주 저질스러운 멘트와 함께 말이다.

“벌써 질질 싸고 있는 암캐 같은 게, 네 보지에 더 많이 쑤셔 박아 줄 테니 어디 더 싸 봐.”

“으으, 하앙, 오빠, 더 박아 줘. 더 깊게, 더 세게.”

반쯤 풀린 눈을 한 미주가 엉덩이를 흔들어 대며 음탕한 목소리를 내고 있을 때였다.

어쩐지 재민의 시선이 둘을 훔쳐보며 관음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벌어진 하체로 향했다.

마치 연호가 된 것처럼 이제 미주는 재민의 아래에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제가 그랬던 것처럼, 페니스를 흔들며 그녀의 좁은 음부로 밀어 넣고 있었다.

“흐응, 좋아… 오빠, 너무 좋아.”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밀부를 제 남근으로 찌르면서 연호가, 아니 이제는 재민이 그녀에게 말했다.

“네 더러운 보지에 내 좆을 씹질해 줄 테니까 다리 더 벌리고 엉덩이 들어.”

마치 인형이라도 된 듯 제 말을 착실히 듣는 미주가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활짝 벌렸다. 재민이 피스톤질을 시작하면서 그녀를 섹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움찔거리는 질벽이 마치 실제라도 된 듯 자극적이라 재민은 발기된 페니스를 위아래로 문지르며 상상 속에서 매일 그러했듯 미주를 범했다.

“오빠, 하읏! 아응… 오빠…….”

누군가가 욕실에 스피커라도 튼 것 같았다. 서라운드 음향으로 쾌락에 젖은 미주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 더욱더 흥분됐다. 치솟는 사정감에 재민은 더 세게 허리 짓을 하며 그녀의 안에 파정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실제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얀색 배덕의 산물은 끝없이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무슨 짓을 했냐는 듯 씻겨 내려갔다.

“‘그 일’ 때문에 어쩐지 마음이 켕겨서 너무 아꼈나 싶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진작에…….”

아직도 여전히 검붉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제 성기를 내려다보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남의 손을 탔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미주를 연호가 정복했다면 다시 뺏어 오면 될 일이고, 굳이 제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감히 내 것을 가로채? 씨발, 두고 봐. 넌지시 언질만 줘도 진우 형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테니깐.”

재민은 레버를 잠그고 샤워 가운을 입었다. 밖으로 나와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안경을 능숙하게 다시 썼다. 천천히 발을 움직여 책상으로 향해 노트북을 열어 키보드를 두드렸다.

[일단 서 실장님한테는 비밀로 하고 우리가 입국할 때까지 매일 나한테 미주 동향 보고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니깐.]

전송 버튼을 누르고 의자에 몸을 나른하게 젖혀 보았다.

“일단 내가 먼저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에, 차연호 그 개새끼를 처리하는 거야.”

그 후, 재민은 연호와 미주가 마치 데이트라도 하는 듯 자주 만나는 걸 요한이 매일 보내오는 사진으로 지켜보았다.

물론 두 사람이 만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날에는 여전히 음란한 상상 속에서 미주를 탐했다.

점점 더 포르노틱하게, 하드코어한 섹스를 그녀와 즐겨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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