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노마크 찬스
* * *
“실장님,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입구에 재민과 진우가 들어섰다. 예약해 둔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요한에게서 연락이 왔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지와 함께 조금 풀이 죽은 모습으로 둘의 눈치를 살피는 퇴근한 미주가 나타났다.
“오빠…… 안녕.”
“그래, 일단 앉아서 주문부터 하고. 여기 너 좋아하는 느끼한 거 많으니까 골라 봐.”
진우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면서 미주 앞으로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미주가 메뉴판을 찬찬히 보다가 재민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봉골레.”
그리고 눈으로 재민에게 물었다.
‘진우 오빠 화 다 풀렸어?’
미주의 눈빛에 담긴 뜻을 간파한 재민 역시 눈으로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절망적인 재민의 반응에 미주는 진우의 심기를 살폈다. 크게 한번 혼나겠지 싶어서 불안함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때 메뉴를 고른 재민이 진우에게 물었다.
“형님, 술은요?”
“아, 간단한 거 시켜. 맥주 정도…….”
심드렁한 표정의 진우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재민이 미주와 다시 한번 더 눈빛을 교환했다. 간단한 거라는 뜻에 담긴 그의 의중을 보건대 아마도 미주를 완전히 봐준 게 아닌 듯했다.
미주가 계속 재민에게 눈짓하며 저 좀 살려 달라 부탁하고 있을 때 진우가 입을 열었다.
“미주, 너 술 끊어야겠다.”
“…….”
눈은 여전히 메뉴판을 보고 있지만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위압적이었다.
미주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뭐라 뭐라 대꾸하고도 남지만, 눈치가 없진 않았다.
진우가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지 오늘은 굉장히 고분고분했다. 이런 날이 자주 오지 않지만 한번 왔다 하면 미주는 진우에게 눈물 쏙- 나게 혼나곤 했으니 말이다.
싸해지는 분위기 속에 재민이 슬쩍 끼어들면서 교통정리를 해 주려 노력했다.
“형님, 미주도 반성 많이 했을 거니깐, 너무 혼내지 마세요. 미주야, 나도 형님이랑 똑같이 생각하니깐 어디서든 적당히 잘해, 알겠지? 오빤 너 믿는다.”
“네. 정말 줄일게요. 그리고 서서히 끊겠습니다.”
존댓말까지 하며 깨갱거리자 진우가 메뉴판을 탁- 소리 나게 덮고는 미주를 보면서 묵직하게 말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너 연호한테, 차 차장한테 한 소리 때문에 내가 고개를 못 들어.”
“오라버니, 죄송합니다.”
“꼴에 존댓말은… 쯧쯧. 미주 너, 연호한테 꼭 사과해라.”
“네.”
미주도 진우가 이해되었다. 제가 실수한 게 맞았다. 어쨌든 연호는 저보다 연상이었고, 제가 다니는 회사의 상사였다.
그런 사람에게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빨간 망토니, 차차차니 했으니 그의 체면이 분명 구겨졌을 것이다.
“미안해, 오빠. 진짜 술은 이제 줄일게. 그리고 차장님한테도 정식으로 사과할게.”
“그래, 너 믿는다.”
“네.”
미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고개까지 살짝 숙여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제 생일날 연호에게 왜 그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키스라도 할 것처럼 농락하던 연호가 죽도록 미워 진짜 눈물이 날 지경이었으니깐.
그리고 제 행동이 또다시 여러모로 좋은 빌미를 줬다는 걸 알아 미주는 가슴앓이하듯 혼자서 끙끙대고 있었다.
‘차라리 오빠한테 다 오픈해 버려? 차연호가 자꾸만 주변에서 맴돈다고.’
하지만 진우에게 털어놓기에는 꼬여 있는 상황이 많았다.
‘어떻게 말해. 집에 차연호가 왔다는 걸 말하려면 결국 약 얘기까지 꺼내야 하는데. 아, 난 못 해.’
어찌 감시를 따돌렸느냐부터 시작하면 진짜 복잡한 이 모든 것이 쉽게 풀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간 대책을 세우던 중에 결국 신나게 혼났다.
물론 진우는 미주가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고 있다고 여겼는지 꿀밤을 한 대 쥐어박았다.
“아야.”
“마지막이야. 너 한 번만 더 술 때문에 뭔 일 생기면 그때는 진짜 가만 안 둬.”
미주가 연호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게 된 걸 꿈에서도 모를 진우가 웃으면서 제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알았어. 근데 있지, 아… 아니야.”
미주는 그 이상 뭐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뭔가 결심한 듯 진우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빠, 사실은 차연호가 나 괴롭혀. 자꾸 나 귀찮게 해.”
아무리 생각해도 제힘으로 연호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모든 걸 알리더라도 진우와 재민의 힘을 빌리는 게 맞는 듯했다.
“야, 나라도 새파랗게 어린 게 삿대질하면서 이상한 별명 지어서 부르면 가만 안 놔둬. 생각해 봐, 연호가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런데 진우는 미주의 말을 조금 다른 쪽으로 해석한 걸까? 아니면 일부러 미주의 투정 방향을 제가 원하는 쪽으로 돌려 응수하고 있는 걸까?
‘오빠가 진짜 모르나? 차연호가 내 주변에 어슬렁대는 거?’
미주가 눈동자를 굴리며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여길 때였다. 재민이 진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형님, 미주 너무 뭐라 하지 말아요. 미주야, 차연호가 너 어떻게 괴롭히는데?”
미주가 입을 삐죽이면서 말했다.
“아니, 그게 다시 복사 셔틀로 돌아갔거든. 다음 프로젝트를 안 줘. 은근히 치사해, 차차.”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을 삼키면서 연호를 원망하는 척했다. 결국, 빨간 망토 차차는 제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깐 가서 꼭 사과해. 연호 그 새끼 은근히 꽁하게 담아 두고는 너 두고두고 괴롭힐 수 있으니깐.”
“알았어. 월요일에 출근하면 꼭 정중하게 말할게.”
물론 속으로는 그가 제 사과를 받아 줄지 알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일단 머리를 숙였다는 팩트를 진우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는 오빠가 하지 말라고 한 거 하지 마. 제발 내 말 좀 들어.”
“네.”
“그리고 오빠 일요일에 회장님 모시고 홍콩에 들렀다 미국 간다. 한 열흘에서 보름 정도 재민이랑 자리 비워야 하니깐 딱 회사 집 말고는 한눈팔지 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우에게 물었다.
“갑자기 웬 미국? 일요일이면 당장 내일모레잖아?”
“일이 좀 그렇게 됐어. 홍콩 경유하는 건 대외비니깐 너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고.”
미주는 입을 삐죽이면서 말했다.
“어차피 사내에서 나랑 오빠랑 재민 오빠 관계 아는 사람 차연호밖에 없을걸? 말할 곳 없으니깐 걱정 붙들어 매세요, 서 실장님.”
“미주야, 진즉 알려 줘야 했는데 일정이 좀 당겨져서 그래. 아무튼, 형님이랑 나랑 동시에 움직이는 건 처음이니 우리 없는 동안 잘 있어야 해.”
재민의 다정한 말투에 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누가 들으면 초등학생 동생인 줄 알겠어. 왜? 불날 수 있으니깐 가스 쓰지 말고, 도둑 들 수 있으니 문단속도 잘하고 하지.”
“으이구, 이 모개. 지가 다 컸다고 또.”
“오라버니, 소저 벌써 4년 뒤에 서른이옵니다.”
“말투 재수 없어, 윤미주.”
말로는 삐진 척해도 미주는 왠지 모를 행복함 속에 이 순간을 기억해 두고 싶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두 사람과의 이런 소소한 일상이 앞으로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걸 느끼기라도 한 건지.
미주는 싱긋이 웃으며 진우와 재민을 보았다.
* * *
‘한 시간 전에 회장님과 서 실장, 정 팀장이 출국했다고 합니다.’
“누가 남았지?”
‘이요한 과장입니다.’
“그 턱수염?”
‘네, 차장님.’
진우의 출국 소식에 연호는 전화를 끊고 희미하게 웃었다.
웬만해서 서진우와 정재민은 같이 움직이지 않는 편이었다. 누군가가 자리를 비울 때는 둘 중에 한 놈은 꼭 자리를 지켰는데 말이다.
이번에는 큰 건이라 그런지 둘 다 고맙게도 한국을 떠났다. 아니, 떠나 줬다.
‘노마크 찬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비서실에 심어 놓은 제 라인이 전한 정보를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최소 일주일에서 길어져도 보름. 진우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다.
‘매형이 공들였던 사업이, 카지노라니.’
공식적으로는 진 회장이 미국 뉴욕으로 업무차 출장을 가는 거로 사내에는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뉴욕으로 가는 직항이야 얼마든지 많은데 굳이 홍콩을 경유해서 가다니.
연호가 그 점을 수상히 여겨 좀 더 뒤를 캐 보니 진 회장 이하 비서실에서 몇 년간 굉장히 심혈을 기울인 곳이 있었다. 홍콩 역시 페이크였고, 진짜는 마카오에 있었다.
“카지노라, 뒤로 얼마나 나쁜 짓 하기 좋은 사업이냐고.”
그랬다. 차현 그룹 회장 비서실은 말만 비서실이지 실제로 비서 업무를 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룹을 위해서가 아닌 진수오 회장 개인을 위해서 움직이는 조직, 그게 바로 회장 비서실이었다.
주가조작, 탈세, 횡령, 분식 회계 등 일명 화이트칼라 범죄들. 그렇게 불법적으로 취득된 재물은 모두 진 회장의 개인 주머니로 들어가 차명으로 암암리에 계속 차현 주식을 사들이고 있었다.
진 회장은 제 지배 체계를 견고히 하기 위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실한 차현 그룹 내의 지분을 확보하며 이사회까지 점점 장악했다. 그리고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비서실은 물리적인 힘까지 동원해 실제 범죄 집단 같은 모습을 보이는 듯했다.
“작년에 우리가 대광 중공업 인수할 때 노조 위원장 자살 뒤에 비서실이 있다는 말이 암암리에 있었지.”
연호가 그간 모은 정보에 따르면 회장 비서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원래 부산에서부터 진우를 따랐던 재민을 주축으로 어떻게 주워 왔는지 말이다. 하나같이 엘리트 교육을 받았지만,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놈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번에 진우가 제 자리와 미주를 지키기 위해 남겨 둔 이요한은 무려 과학고 출신 영재였다고 하니, 진 회장 용병단의 능력치는 가히 제 전략실과 비슷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진 회장에게, 아니 정확히는 진우에게 완벽하게 충성하고 있었다.
“내가 왕관을 쓰려면 비서실부터 박살 내야겠어.”
그런데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는 치밀한 진우가 딱 하나 애지중지하는 것을 고맙게도 제 앞에 데리고 나와 주다니.
“어차피 서진우 그 새끼가 페어플레이하는 놈은 아니니, 나도 그놈처럼 똑같이 더티하게 플레이해 보려고.”
첫눈에 알았다. 진우의 약점은 바로 미주라는 걸.
그래서 그 여자를 어떤 식으로든 제 손에 넣는다면 말이다. 진우와 진 회장이 저를 밀어내고 차현을 장악하려는 순간, 그들은 보게 될 것이다.
“본디 내 것을 뺏겠다는 것들은 사람 하나 죽어 가는 거 정도는 감수할 각오 하고 나한테 덤비는 거겠지.”
일부러 전략실에 있는 진우의 끄나풀에게 보여 줬다. 미주를 일로만 살짝 괴롭히고 그 외에는 접촉하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이미 사적인 영역에서는 눈을 가려 놨으니 그는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가 미주에게 접근하는 걸 알았다면 벌써 무슨 일이 터져도 터졌을 테니까.
“아니면 다 보고 있으면서 다른 꿍꿍이가 있어 모르는 척하거나.”
진우의 수가 무엇이든, 자리까지 비워 두고 판을 깔아 줬으니 대놓고 건드려 볼까 했다.
“진짜 모르든, 알고 모르는 척하든, 이쯤에서 서진우 귀에 들어가야 재미있어질 테니깐.”
이번 거래는 정말 큰 건이라 절대로 서진우와 정재민이 뭘 알았다고 한들 쉽게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못 봐서 아쉬워. 발을 동동 굴리다 못해 미쳐 날뛰는 걸 봐야 하는데.”
하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미주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저를 자꾸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연호는 승자가 되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하든, 어떤 죄를 짓든 방법은 중요치 않았다. 오직 결과만으로 평가되는, 무서운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이 세계의 왕이 되고 싶었다.
“짧아도 열흘이야. 그 안에 그 계집애를 함락시켜 망가뜨려 놔야 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생각했으면 바로 실천에 옮겨야지. 뜸 들이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니깐 말이다.
[나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 7시에 차를 보내 줄 테니 전에 우리가 처음 봤던 레스토랑으로 와.]
* * *
미주는 핸드폰을 집어 던지며 성질을 부렸다.
“이 인간, 맨날 통보야.”
부글부글, 속이 끓어올라 미칠 것 같았지만 연호에게 지은 죄가 있기는 했다. 그래서 한참을 투덜거리다가 저 멀리 던져 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회신했다.
[네, 알겠습니다.]
화장대에 비친 말간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마치 전쟁에 나가는 심정으로, 누군가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제 얼굴을 꾸며 줄 베이스부터 손등에 짜기 시작했다.
“귀찮은 차차를 어떻게 떼어내지?”
일부러 스모키한 눈매를 연출한 미주가 붉은 립스틱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좋아, 이 정도면 완전히 세게 보이겠지?”
만족스러운 듯 화장대에서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향해 잠시 고민하다 원피스를 꺼냈다. 화려한 화장을 했으니 반대로 옷은 심플하게 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전신 거울에 비친 매무새를 확인한 뒤 다시 욕실로 가 머리 볼륨을 좀 더 살려 보았다. 마지막으로 향수를 귀 뒤와 양 손목에 가볍게 칙칙- 뿌린 후 백을 손에 들고 하이힐을 신었다.
“오늘 이후로 진짜 이제 밖에서 안 봤으면 좋겠어, 제발.”
익숙한 동작으로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중후한 얼굴을 가진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눈인사하며 승용차 문을 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차 안에서 미주는 문득 무릎 위에 편하게 놓여 있던 제 손을 한번 물끄러미 보았다.
‘아, 바보. 네일도 새빨갛게 아주 세게 발랐어야 했는데.’
습관처럼 발랐던 누드 톤의 네일 색을 속으로 원망하고 있을 때였다. 저를 태운 영국제 세단은 차현 호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차 문을 열어 주는 도어맨의 습관적인 친절에 인사하며 호텔 라운지로 들어섰다. 미주는 오늘 제가 끝내 버리고 싶은 관계에 대해서 한 번 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어쨌든 나쁘지 않게 잘 말하는 거야. 내가 너무 못되게 굴면 진우 오빠 체면이 상할 테니깐….’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웃음을 꾹 참았다. 사실 연호에게 이미 못된 걸 넘어서서 볼 거 못 볼 거 환장할 모습을 다 보여 줬는데 말이다. 이제 와 진우 오빠 처지를 생각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참, 오빠들 출국하자마자 날 불러내다니.”
* * *
[지금 자택에서 출발했습니다.]
연호의 시선이 왼쪽 손목시계로 향했다.
‘40분 전쯤에 출발했다고 하니 이제 슬슬 도착할 때도 됐네.’
느긋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한 후 앉아 있던 호텔 프레지던트 룸 거실 소파에서 일어났다. 여기 호텔 레스토랑으로 그녀를 불렀으니 저야 시간이 여유로웠다.
연호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다시 올 때는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일 테니까.
“차장님, 어서 오십시오.”
미리 준비해 둔 자리로 안내하는 머리가 이제는 조금씩 희끗희끗해지고 있는 지배인에게 고맙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자주 뵙네요.”
연호가 테이블에 앉은 지 10분 정도 지났을 때, 낯익은 얼굴이 문을 열고 VIP 룸으로 들어왔다.
“제가 해도 되는데…….”
미주는 의자를 빼 주는 지배인의 친절에 쑥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흐르는 묘한 침묵.
‘사람이 왔으면 먼저 와 있었으니 좀 아는 체해 주면 덧나나?’
어색한 기류 속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미주는 고개를 돌렸다. 호텔 가장 높은 곳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서울의 야경에 시선이 향했다.
‘늘 보던 모습이긴 해도 높은 곳에서 보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반짝반짝 별처럼 반짝거리는 도시의 야경을 멍한 표정으로 보다가 문득 부산의 밤 풍경이 떠올랐다.
‘아무리 서울이 살기 좋다 해도… 나는 부산이 좋아. 아니, 이제는 싫어. 그리우면서도 다시 내려가고 싶지는 않아.’
잠시 울적한 생각을 하는 미주의 우울한 표정을 연호가 캐치한 걸까? 한참 동안 이어지고 있던 두 사람의 침묵을 웬일로 연호가 먼저 깨뜨렸다.
“다른 건 몰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러면 내 꼴이 우스워지잖아?”
“…….”
“차차? 참, 나. 날 미워하든 싫어하든 그건 그쪽 마음이지만 다음부터는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그 일은 미안하게 됐어요. 사과할게요. 죄송합니다.”
미주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다시 시선을 창밖에 두는 게 연호의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영혼 없이 건성으로 대답하네.’
연호는 속으로 미주의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비웃다가 뭘 저렇게 쳐다보나 싶어서 그녀의 시선 끝을 따라가 보았다.
‘아, 야경이라…… 너도 이런 거 싫어할 리는 없겠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의 미주가 야경에 취했다고 생각했지만. 미주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부산을 오래간만에 떠올리는 중이었다.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진우와 재민과 함께 있을 때는 그다지 생각나지 않는 부산인데 이 남자와 있다 보면 이렇게 가끔 그곳이 그리웠다.
‘그래, 이 사람을 처음 본 게 부산이라서 그럴 거야. 참 웃긴 인연이기도 하지… 하고많은 날 중에서 하필이면 학교 조퇴한 날에 딱 하고 마주치고는…….’
연호는 말없이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미주의 옆모습을 슬쩍 보았다. 찬찬히 살펴보면 아직도 여전히 그때 고등학생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네가 아무리 서울에 살면서 화려한 화장으로 꾸몄다고 해도 내가 그때 봤던 건방진 계집애가 어디 가지 않을 테니깐.’
여전히 밖을 보고 있는 미주를 빤히 보고 있었지만, 대체 무슨 생각에 빠진 건지 미주는 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거 같았다.
‘역시 자세히 보니 확실히 윤희주와 많이 닮았어.’
특히 미주의 눈매가, 아래로 눈을 내리까는 특유의 모습에서 영락없는 그녀 친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할 말이 있어서 불러낸 거야. 너랑 놀려고 부른 게 아니라.”
언제까지 말없이 둘 다 염불만 외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연호가 먼저 입을 열자 미주는 시선을 돌려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대꾸했다.
“놀아 달라 한 적 없는데요.”
제 말을 받아치는 미주의 눈이 살짝 올라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그녀는 자신을 경계했고, 의미 없는 농에도 도끼눈을 치켜뜨며 반응했다. 그게 연호는 그저 재미있었다.
“마음이 바뀌었어. 먼저 같이 노는 것부터 할까 하는데, 어떻게 놀아 줄까?”
“뭔 소리예요, 할 말 있으면 본론만 빨리 얘기하시지요.”
“그래서 어떻게 놀아 주면 되는 거지?”
“…….”
정색해도 연호는 아랑곳없이 이죽거리며 말꼬리를 계속 잡았다. 미주가 살짝 짜증이 났는지 대답 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연호를 흘겨보면서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퍼붓고 있을 때였다.
“좋아, 그럼 뭐라도 먹고 본론부터 이야기하는 거로.”
미주와 연호가 평행선을 달리며 대치 중일 때 애피타이저가 그들 앞에 놓이고 있었다.
“와인을 드시겠습니까?”
지배인이 다가와 미주에게 친절히 와인 리스트를 건네며 물었다.
“저는 와인은 잘 몰라서요.”
살짝 고민하던 미주가 연호를 슬쩍 한 번 보자 그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지금 우리와 가장 어울리는 거로 알아서 가져와 주세요.”
디캔딩한 뒤 잔에 채워진 와인을 미주가 한 모금 음미하고는 눈에 살짝 빛을 내며 놀라운 표정을 짓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역시 미주가 술맛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연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진짜 와인은 잘 모르나 봐.”
“…와인은 재민 오빠가 잘 알고 있어서 어쩌다가 옆에서 얻어 마시는 정도예요.”
미주의 대답에 연호가 잔을 테이블 위로 두며 말했다.
“뭐, 아무튼 목이라도 축여 두는 게 좋을 거야.”
“왜요?”
퉁명스러운 말투에 연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웃었다. 그리고 무심한 듯 엄청난 무게를 가진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오늘 너한테 무슨 말을 할지 알면 이렇게 여유도 이제 못 부릴 테니 말이야.”
미주는 앞에 앉아 있는 선이 날카롭게 떨어지는 차가운 남자를 보았다.
뭔가 아주 많이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