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은폐된 진실 (13/53)

12. 은폐된 진실

* * *

“너무 힘들어, 일하는 거 정말 힘들다고!”

“이제 오빠가 얼마나 힘들게 돈 버는지 알겠지?”

“응, 돈 쓰는 건 쉬워도 남의 돈 버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거 진심으로 느끼고 지난날을 반성하는 중이야.”

조금은 시끌벅적한 클럽에서 미주는 조금 취한 목소리로 진우를 붙잡고 그간 쌓였던 울분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사회생활을 경험하는 게 긴 인생에서 보면 나중에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이것 봐, 재민 오빠는 또 여기서 이성적으로 나와. 회색 인간, 중립 성애자!”

“재민아, 너는 오늘 같은 날에는 무조건 미주 편을 들어 주고 해야지. 그러니 네가 연애를 못 하는 거야. 여자를 이리 몰라서는.”

둘이 합세해 저를 모함해도 재민은 그러거나 말거나 고요한 표정으로 혼자 조용히 술을 마셨다.

미주는 한 가족 같은 진우가 아끼는 비서실 직원들과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모여 각자 삼삼오오 테이블에 나눠 앉아서 같이 즐기며 웃고 떠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자, 오늘의 주인공 미주 씨에게 건배합니다.”

요한이 제 잔을 치며 흐트러진 시선을 한데 모아 미주를 위한 건배를 제안했다.

“윤똥개, 스물여섯 살 축하한다.”

“미주 씨, 생일 축하해요.”

“미주야, 태어나 줘서 고마워.”

각자가 저를 위해 한마디씩 해 주는 말에 미주는 제 잔을 높이 들며 화답했다.

“쑥스럽지만 다들 감사합니다! 자, 첫 잔은 알죠? 원샷!”

미주는 잔에 담긴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머리에 잔을 털었다.

“역시 모개, 저 초빼이(사투리로 주당, 술고래와 같은 술을 잘 마시는 사람) 짬은 어디 안 간다, 증말.”

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미주는 아랑곳없이 고삐 풀린 말처럼 달렸다.

테이블은 이미 술병들로 가득했다. 미주는 완전 흥이 났는지 음악 소리에 웃으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을 탔다.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으로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하고 몸에 쫙 달라붙는 원피스까지 입고는 내일이 없는 듯 오늘을 즐겼다.

물론 제 생일인 오늘은 진우와 재민이 곁에 있기에 마음 놓고 신나게 놀아도 되기에, 두 남자도 오늘만큼은 저를 딱히 말리지 않았다.

“오빠, 나 오늘 취할 거야, 말리지 마.”

“그래, 마음대로 해.”

이미 반쯤 눈이 풀리고 슬슬 혀도 꼬이기 시작한 미주의 말에서 고쳤다고 생각한 부산 사투리도 조금씩 섞여 나왔다.

“차 차장? 웃기고 앉아 있네.”

“연호가 너 괴롭히면 말해. 내가 가서 그 새끼 반쯤 죽여 놓을 테니깐.”

“아, 차라리 대놓고 괴롭히면 좋겠어. 앉아 있는 게 이미 가시방석이야.”

재민은 전략실에 심겨 있는, 비서실 쪽에 줄을 대는 자에게 보고받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연호가 미주를 힘들게 하진 않는다고, 그저 업무 중 필요할 때만 어쩌다가 한두 번 말을 섞는 게 다라고.

사실상 접촉이 전무한 관계. 그래서 조금 방심했다. 아니, 일부러 방심했던 건지도 몰랐다.

연호가 제 사람 중 하나를 매수했다는 걸 아직 알지 못한 재민은 미주의 푸념이 단순히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피곤해, 노는 것도 체력이 필요하구나.”

한참을 미친 듯이 떠들어 대던 미주가 한풀 꺾였는지 잠잠해졌다. 제 옆에 있는 진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눈을 감았다.

“그래, 모개야. 좀 쉴 때도 됐다. 그렇게 떠들어 댔으니 안 힘들겠어?”

진우는 제 어깨에 기대 있는 미주의 코를 괜히 한 번 꼬집고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그동안 일한다고 고생했다는 듯 진우가 미주를 다독이는 것 같아 재민은 살짝 웃었다.

미주는 잠든 건지 취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냥 가만히 진우에게 체중을 실어 기대고 있었다.

“모개야, 일단 올해만 좀 버텨 봐. 내년에 오빠가 있는 곳으로 발령 내 줄게. 아니면 차라리 재민이한테 시집이라도 가든가.”

“글쎄, 재민 오빠는 별생각 없어 보이던데?”

“그럼 네 말대로 회사에서 괜찮은 놈 하나 골라 보라고 말하고 싶지만, 감히 누가 우리 모개를 넘보려고, 응?”

“형님, 그건 오빠의 마음이 아니라 아빠의 마음인 것 같은데요?”

“야, 미주 애 그만 태우고 너도 확실히 태도를 정해, 좀.”

“됐어, 재민 오빠 앞길 내가 더는 안 막을 거야.”

“이런 이야기는 좀 다들 제정신일 때 했으면 좋겠네요.”

“계속 더 커야 한다는데, 뭘 커야 한다는 거야. 키가 2m가 돼야 하겠어?”

셋이서 각자 하고 싶은 말만 잔뜩 하는 이 아수라장이란.

그 와중에 진우는 제게 기대고 있는 미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저 역시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아, 그래. 이 느낌이 또…….’

재민의 눈에 진우와 미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치 그 둘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시끄러운 음악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깊고 고요했다.

제가 끼어들 수 없는 함께 자란 진우와 미주의 시간.

재민은 두 사람의 멈춰진 시간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셋이 아니라 둘과 하나였고 결코 셋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잠시 딴 세상에 간 것 같은 진우와 미주를 보며 재민이 씁쓸함을 느끼고 있을 때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여기에 다 모여 있다니.”

양복이 아닌 조금 캐주얼한 차림으로 삐딱하게 서 있는 연호가 그들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차연호, 그냥 지나가라. 분위기 깨지 말고.”

진우가 언제 취했냐는 듯 연호를 보며 날카롭게 말하자 연호 역시 진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 네가 전세 낸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네가 전세 낸 것도 아니지.”

“차연호, 말이 짧다. 내가 그래도 한 살 많은 거 잊지 마.”

연호는 진우가 앉아 있는 어지러운 테이블 위를 보았다. 어지간히도 마셨는지 뒹구는 양주병이 몇 개인지도 모르겠다.

기가 찬다는 듯 혀를 한 번 더 쯧- 하고 찼다. 아까보다 더 인상을 쓰면서 앉아 있는 이들을 훑어보았다.

“응?”

연호가 나타나 시비를 거는 바람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 갈 때였다. 별안간 하이 톤의 목소리가 툭 하고 끼어들었다.

“빨간 망토 차차.”

진우에게 기대고 있던 미주가 벌떡 일어났다. 연호를 검지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떠드는 말에 다들 무슨 소린가 싶어 시선이 쏠렸다.

“미주야, 앉아. 지금 네가 끼어들 때가 아니야.”

재민이 미주를 달래 앉히려고 해도 미주가 완강히 거부하며 연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차 차장이니깐, 차차.”

“미주야, 쫌……!”

“아니면 다 함께 차차차!”

“야, 윤미주!”

“빨간 망토 차차, 좋아했는데 이제는 극혐이야!”

“나가자, 빨리 나가…….”

세상에, 천하의 차연호 면전에 대고 저런 말을 하는 여자라니.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요한과 도균은 눈빛을 주고받고는 슬며시 웃었다. 역시 그녀는 진우 동생다웠다. 패기가 넘쳤다. 비록 본인은 기억도 못 할 듯하지만.

연호는 어이가 없없었다. 재민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미주를 보면서 진우에게 불쌍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동생 간수나 똑바로 해. 술만 마시면 저 꼴인데 잘하는 짓이다, 서진우.”

“우리 집안일은 내가 알아서 잘하니 걱정하지 마.”

“글쎄, 과연 그럴까?”

미주의 비밀을 안다는 우월감으로 연호는 진우를 비웃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튼, 나는 나가는 길이니깐 재밌게 놀다 가.”

연호와 같이 빠져나가는 무리의 얼굴이 낯이 익은 진우였다. 소위 말하는 대한민국 재벌 후계자들. 아마도 연호는 오늘 제 친구들과 어울리려 최근에 서울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이 클럽으로 온 거겠지. 진우는 깊게 한숨을 쉬며 요한에게 말했다.

“재민이한테 미주 데려다주라 하고 오늘 이쯤에서 끝내자.”

연호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한잔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꾸미니깐 또 다른 맛이 있네. 회사에서는 거의 무채색 옷만 입고 화장도 옅게 하고 있으니.’

이미 미주의 인적 사항을 통해 오늘이 그녀의 생일임을 알고 있어 넌지시 저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이곳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그냥 VIP도 아니고 V가 몇 개나 앞에 더 붙은 사람들이니 따로 출입하는 문으로 클럽에 들어왔고, 여기는 서진우의 힘이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 진우는 연호가 먼저 와 있었다는 걸 몰랐기에 마주침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진우가 진 회장을 등에 업고 차현의 실세라는 권력을 쥐어도 태생부터 이미 지배자 신분인 자들을 아직 뛰어넘을 순 없었다.

“서진우,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넌 어차피 나한테 안 돼.”

아직 힘의 논리로는 제가 우세하고 있음에 연호는 승자의 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게 어울릴 것 같았는데, 의외로 몸매도 괜찮아서 이거 진짜 기대되는데?”

화장이 다 번진 새까만 눈으로 자신을 째려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원피스를 입고 있던 살짝 드러난 몸매는 꽤 육감적이라 연호는 허벅지에서부터 작은 미열이 피어올랐다.

‘빨리 벗기고 싶어지잖아.’

아마 그녀는 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체념하게 될 것이다. 그럼 나는 잔뜩 고취된 정복감으로 너의 일그러진 얼굴을 위에서 바라보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먹어 뼈째로 오도독 삼켜 버리는 즐거움을 상상했다. 입맛이 다셔졌다. 목표한 사냥감을 절대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연호의 머릿속이 위험한 생각으로 가득 찬 날로부터 며칠 후 부산에서 백호가 돌아왔다.

* * *

“차장님.”

이미 아버지의 밑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백호는 늘 그렇듯 아들뻘인 연호에게 깍듯했다.

“그래서 부탁드린 건 좀 알아보셨나요?”

연호가 제집에서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는 눈짓하자 얼굴이 좋지 않은 백호가 잠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게, 차장님.”

백호가 뭔가 망설여지는 듯 두어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연호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여긴 둘밖에 없으니 편히 말하세요.”

연호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그를 부드럽게 종용했다.

“차장님, 혹시 예전에 부산에 가셨던 날짜가 정확히 기억나십니까?”

“…글쎄, 솔직히 기억은 안 나는데, 미국에서 학기 중에 잠시 들어왔을 때라는 건 알아요.”

“그럼 관장님 페라리가 조금 망가졌던 건 기억나십니까?”

“네, 제가 그랬거든요. 빌라 주차장에서 딴생각하다가 쿵- 하고.”

연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호가 말한 날을 대충 안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그날이 왜 중요한 거죠? 물론 그날 윤미주를 만나긴 했지만, 날짜까지 알아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네요.”

백호의 얼굴에 주저하는 빛이 역력해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대체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감정 하나 없는 차가운 눈빛을 가진 사내에게 백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윤미주 씨가 교통사고를 당한 날이, 알아보니 두 분이 우연히 마주쳤던 날 며칠 뒤였습니다.”

“…….”

담배를 피우던 연호가 손을 잠시 멈칫했다. 재떨이에 담배를 지그시 비벼 끄고는 소파에 허리를 깊숙이 묻었다.

“계속하세요.”

백호를 향해 짧게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도 점차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 놓기 시작했다.

“…얼마나 다쳤는지 알아보려 당시 입원했던 병원 기록을 찾아봤는데 윤미주 씨 차트만 내용이 없었습니다. 마치 누가 고의로 차트를 지운 것처럼 말입니다.”

“누가 차트를 건드렸다, 이 말이네요.”

“네, 병원 쪽에서도 불과 6~7년 전 자료가 사라지거나 말소되는 일은 없는데 이상하다 의아해했습니다. 의무 기록 보관은 법적으로 10년인데 말이죠.”

“윤미주가 교통사고 났는데 병원 쪽으로 누군가 손을 썼다, 교통사고를 왜 지워야만 했는지가 핵심이겠네.”

연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라이터로 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였다.

“그래서 이상하다 여겨 좀 더 알아보니 다행히 입퇴원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손댄 사람이 차트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찾았고요.”

“얼마나 입원했었나요?”

“4주였습니다.”

백호의 말을 듣는 연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지만, 재떨이에 담뱃재를 터는 손이 조금은 초조해 보였다. 대체 오래전 부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윤미주 씨가 학교까지 그만둘 정도의 큰 사고를 당했다면 신문에 작게 토막 소식이라도 나오지 않았을까 싶어 같이 찾아봤는데 그날에는 그 정도 큰 사고는 없었습니다.”

“날짜가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니고?”

“네, 혹시나 해서 앞뒤로 일주일 정도 확인했는데 여고생이 사고를 당했다는 기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학교를 그만둘 정도의 큰 사고인데 겨우 4주 입원.”

연호도 의아함을 느끼고 백호를 빤히 보면서 다시 담배 연기를 뿜었다.

학교에 남은 기록으로는 교통사고로 인한 치료차 자퇴. 근데 고작 입원 기간은 4주. 가볍게 운전하다가 접촉 사고만 나도 3주 정도 진단은 충분히 나오는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좀 더 은밀히 수소문을 해 봤는데 오래전 일이라 알아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찾아낸 게 있습니다. 그즈음 김 기사가 부산에 왔었습니다.”

“뭐? 갑자기 여기서 매형이 왜 튀어나오는 거지?”

진수오 회장의 김 기사는 그의 집사와 같은 존재였다. 매형의 수행 기사인 김 기사는 원래 돌아가신 아버지의 운전기사였었다.

서진우가 진 회장을 ‘차현 그룹 회장’으로서 보필한다면 김 기사는 ‘인간 진수오’를 24시간 옆에서 보좌하는 인물이었다.

누나에게 들은 바로 김 기사는 미주의 아버지처럼 부산에서부터 매형과 인연이 있었다.

‘그때 넌 미국에 있을 때라 잘 모르겠지만 매형 친구 동생인데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거둬 줬어.’

‘근데, 누나. 김 기사, 딱 봐도 매형 대신해서 뭔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사람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뭐, 남편이 어련히 그런 짓 시키지 않겠어? 자기가 하기에는 좀 위험한 거.’

‘그 말은 누나도 매형이 나쁜 짓 하는 거 안다는 말이네.’

‘그래, 연호야. 너도 더 크면 알게 될 거야. 차현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지를.’

김 기사가 그때 부산에 있었다면 미주의 교통사고에 대해 진 회장이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날짜가 일주일 후였습니다. 윤미주 씨가 교통사고를 당한 시점에서…….”

백호가 잠시 말을 끊고는 숨을 한 번 돌리더니 연호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차장님, 서진우가 연루되어 있습니다. 아주 단단히 손을 썼더라고요. 병원 일도 다 서진우가 한 짓이었습니다.”

“이쯤에서 그 이름이 왜 안 나오나 했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당시에 서진우가 의대를 그만두고 다시 깡패처럼 활보하기 시작했는데 아시다시피 윤희주가 죽는 바람에 일종의 그런 무리를 서진우가 떠안게 되었다고 합니다.”

진우가 서울로 오기 직전에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연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는 거 말고 모르는 일을 빨리 듣고 싶었다.

“…계속하세요.”

“그런데 윤희주가 살아 있을 때부터 충돌했던 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명 잔나비파라고, 우두머리 격인 놈이 잔나비라고 불려서 그런데 아무튼, 걔네들이 상당히 윤희주한테 원한이 깊었다고 합니다.”

급한 제 마음도 모르고 백호가 계속 묘하게 반 박자 늦듯 뜸 들이고 있었다. 본디 급한 성격도 아닌 연호마저 조급함을 가질 때였다.

“…그게…… 그러니깐…….”

“괜찮으니 말하세요.”

늘 언제나 무표정하던 백호도 감정을 드러낸 얼굴로 천천히 연호에게 진실을 알렸다.

“차장님, 그게 윤미주 씨가… 윤희주 살아생전에 관계가 안 좋았던 놈들한테…… 유, 윤간을…… 당했다고 합니다.”

백호가 침착하지만 조금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연호에게 미주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가감 없이 전했다.

그러자 냉정한 표정으로 백호의 이야기를 듣던 연호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진우가 그 새끼들 다 잡아다가 죽을 때까지 고문하고는 부산 앞바다에 수장시켰다고 합니다. 그 뒤처리를 회장님께서 김 기사를 보내서 도와주신 거고.”

“…그 대가로 매형의 사냥개가 된 거였어.”

“서진우가 확실히 입막음은 철저하게 했더군요. 여기까지도 진짜 겨우 알아냈습니다. 다들 아직도 서진우한테 보복당할까 봐 벌벌 떨고는 입을 열지 않더군요.”

“셋이라.”

“네, 남자 셋이었다고 합니다.”

“계장님께서 알아봐 주신다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 일은…….”

뒷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백호는 알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비밀로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연호의 심중을 헤아리고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눈을 반짝이던 백호가 연호에게 꽤 흥미로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이번에 윤미주 씨 일을 알아보다가 차장님께서 알면 요긴하게 쓰일 정보를 하나 알게 됐습니다.”

연호는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사실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뭔가 아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보너스까지 두둑하게 챙겨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하지요.”

한때 경찰이었던 중년 남자는 깍듯이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연호는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계속 줄담배를 피우며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난 그저 네가 왜 그 약을 먹는지가 궁금했는데, 이런 엄청난 일들이 있었다니.’

백호를 부산으로 보낸 이유는 처음에는 단순했다. 본의 아니게 열어 봤던 핸드백 속에 있던 약이 궁금했다.

제가 알아본 바로 그 약은 불면증이나 공황장애 증세에 쓰이는 약으로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료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병원의 존재.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진우와 재민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짐작하건대 일반으로 진료를 보고 일반으로 약을 사겠지.’

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내고 나니 그 약을 멀쩡해 보이는 20대의 젊은 여성이 왜 먹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부산으로 백호를 보냈다. 과거를 알면 현재가 보이고 미래까지 알 수 있다 여겼는데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을 마주하다니.

제일 처음 백호는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그래서 오빠를 잃은 데다가 자신도 교통사고를 당해서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라고 그렇게 단정 지었다.

‘불면증 정도는 사실 흔하니깐.’

처음에는 자신의 추리가 앞뒤가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퍼즐이 제대로 안 맞는 기분이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묘하게 불쾌한 예감.

‘교통사고로 인한 외상 후 트라우마라면 굳이 두 놈에게 숨길 필요가 없을 텐데, 이상해.’

이상한 인연으로 엮인 여자가 꽤 흥미로워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궁금했었을 뿐이다. 그런데 백호가 알아낸 부산에서의 일들은 웬만한 거로는 꿈쩍하지 않는 천하의 차연호를 흔들리게 했다.

‘그래, 그러면 다 말이 돼. 서진우가 너무 과민하다 여겼던 일이. 그래, 그러면 말이 돼.’

제 손길에 깜짝 놀라며 손을 뿌리치던 미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얗게 질린 불쾌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게 경멸의 의미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공포나 두려움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던 걸까?

‘서진우가 이상할 정도로 그녀를 감시라고 해야 할지, 보호했던 것도 혹시라도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길까 노파심에 그랬던 거야. 그러면 다 이해가 돼.’

연호는 사실 진우의 과잉보호가 미주의 술버릇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과거 어디서 술 때문에 크게 사고를 치지 않았을까 했던 건 제가 직접 봤던 미주의 고약한 술버릇에서 충분히 유추된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또다시 납치당하지는 않을지, 또 끔찍한 몹쓸 짓을 당할까 봐 그랬겠지.”

쓴웃음을 지었다. 진우를 안 날로부터 처음으로 그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나라면 집 안에다가 CCTV까지 달아서라도 감시하고 보호했을지도 몰라.”

아니, 나중에는 목에 줄이라도 채워서 제 방 안에 감금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눈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치고 말 테니깐.

‘안 그래도 감시당하는 거 못 견디게 힘든데 여기서 더 심해지면 나 죽어요.’

미주가 지나가듯 했던 말. 이제 모든 것이 아귀가 딱 맞아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끔찍했던 과거 때문에 아마 약과 술에 의존한 미주는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진우가 제 목을 죄어 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서진우가 무슨 심정으로 그러는지 아니깐 반항도 안 하는 거겠지.”

그리하여 이 모든 게 섞여 미주를 점점 더 헤어 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회사에서 가끔 몰래 미주를 지켜보곤 했었다. 항상 어딘가 우울해 보이던 무표정한 옆모습과 대조적인, 굉장히 꾸며 낸 듯한 회사 사람들에게 짓던 웃는 얼굴.

그리고 저에게는 늘 언제나 뾰로통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린 채 퉁명스럽게 굴던 여자.

제 시선을 살짝 피하는 미주의 열이 받은 얼굴을 천천히 감상하는 것이 좋았다. 사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저를 째려보던 여자의 눈매가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제가 싫어서 죽겠다고 소리를 쳐도 어쩐지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었다.

새침한 요조숙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술만 먹으면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울고 웃고 콧물까지 흘리면서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걸 들어 주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왜일까? 우는 여자는 정말 딱 질색인데도 돌이켜 보면 미주에게는 늘 관대했었다.

‘어찌 됐든, 동정은 필요 없고, 나는 내 손에 쥔 패를 잘 이용하면 돼.’

연호는 담배를 비벼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인 고뇌의 흔적을 보며 번민하면서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