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건 다음에
* * *
미주는 오늘도 일부러 제 자리의 모니터만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신입 사원인 저에게 이제 조금씩 일을 알려 주는 열의 넘치는 사수 최 대리 덕분에 주어진 일이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말이다. 첫 사회생활을 단단히 각오했어도 예상보다 훨씬 높은 업무 강도와 야근의 연속은 확실히 힘들었지만, 미주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일이 많아서 감사합니다. 일이 힘들어서 고맙습니다.’
딴생각할 겨를 없이 열심히 제 몫을 해내야 할 상황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여전히 인간 복사기였다면, 생각보다 일이 덜 힘들었다면 지금쯤 부끄러움에 죽었을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차연호 앞에서! 아으!’
골 때리는 여자, 그게 바로 연호 눈에 비친 제 모습이겠지.
미주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기억이 나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불을 돌돌 말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잘 보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추태를 보일 필요도 없었다고! 야, 윤미주 너 왜 그러냐? 응? 아, 미치겠네!”
아무래도 공황 발작이 온 것 같았는데, 처음부터 연호의 차에 탄 제 잘못이었다. 돌아 버리겠네, 정말!
어쨌든 시간이 약이라고 그날의 부끄러움과 민망함의 콜라보는 점차 희석되고 있긴 했다. 물론 회사에서 연호를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해 애쓰면서 말이다.
오늘도 미주는 야근한 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고는 눈을 비비며 불 꺼진 방 천장을 보고 있었다.
“같은 부서라 도망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언제까지 피해야 할까?”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쉰 후 손을 하늘로 뻗고는 괜히 휘휘 저어 보다가 또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다 한들 그날이 없어지지도, 기억에서 사라지지도 않을 텐데. 미칠 것만 같았다.
“오빠가 몰라서 천만다행이지, 알았다면 지금쯤 강제 퇴사 당한 뒤 차연호를 따라가다 못해 심지어 집에까지 끌어들였냐고 세상에 있는 욕 없는 욕 다 먹다가 난 벌써 죽었을지도 몰라.”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다가 주먹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쾅쾅 쳤다.
“근데 오빠한테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수치사할 것 같아.”
제 헛소리를 군말 없이 들어 주던 연호의 얼굴이 떠올라 너무나 쪽팔렸다.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반쯤 정신이 풀린 채로 떠들어 댔는지 몰라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연호 앞에서 울던 게 떠올랐다. 세상에, 예쁘게 흑흑거리며 운 것도 아니고 대성통곡이라니. 그것도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코도 팽팽 풀어 가면서 말이다. 이 추태를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을까, 아악!
‘혹시 모르니깐 뭔가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 놔야겠어. 나중에 물어볼 수 있으니깐.’
머리를 열심히 굴리면서 적당한 핑곗거리를 생각할 때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자신에게 티슈를 건네 주던 연호가 또 떠올랐다.
‘일단 눈물부터 좀, 닦고.’
‘자, 코도 좀 풀면서 천천히 말해.’
짜증 섞인 고압적인 말투였지만 행동은 생각보다 다정했다. 연호는 저를 술주정한다고 여기며 경멸의 눈빛으로 보긴 했지만, 끝까지 제 말을 다 들어 주긴 했었다.
“일단, 회사에서 마주치고 도망갈 수 없다면 미안했다 사과하는 거야. 그쪽도 완전히 나한테 질렸을 테니깐.”
그러나 미주의 예상과 달리 연호는 질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안의 호기심을 자극해 버렸다. 윤미주라는 인간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차장님, 손님께서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지금 간다고 전해 줘요. 그리고 전 오늘 점심 생략할 거라 먼저 다들 식사하세요.”
연호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밥은 나중에 먹어도 되고, 오후 일정은 조금 밀려도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부산으로 사람을 보낸 일이 좀 더 중요했으니깐.
회의실로 들어서자 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어떤 소식 가져왔을지 궁금하네요.”
연호가 조금 갑갑하다는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편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걸 확인한 백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자퇴해서 서울로 서진우와 함께 올라왔더군요.”
“자퇴?”
“네. 서울로 온 그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는데 다음 해에 검정고시를 보고 수능을 친 후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일종의 재수를 한 것과 비슷하겠네… 아, 그래서 저번에 한 번 찾았을 때 찾을 수가 없었구나. 졸업 앨범이 없을 테니.”
연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가 문득 회의실이 금연 구역임을 알고 담배를 내려놓으며 백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퇴 이유는 뭔가요? 서진우랑 서울로 오는 게 학교 졸업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건지.”
“차장님, 제가 알아본 바로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치료 때문에 자퇴한 거로 학교에는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교통사고?”
윤희주도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들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친오빠의 죽음과 미주의 교통사고. 그리고 향정신성 약물을 늘 가방에 지니고 다녀야 할 만큼의 불안정함과 술 때문에 진우가 걱정한다고 말하던 것까지.
“일단 다음에 또 부탁드릴 일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수고하셨고 이 일 비밀로 해 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네, 차장님.”
“비용은 차명으로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연결고리가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연호는 미주를 계속 주시할 때였다.
여전히 저를 피해 다니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할 순간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 * *
일단은 연호보다 한 직급 위인, 전략실 실장이 전체 회식을 하자고 통보해 미주는 도살장에 소 끌려가는 심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미주 씨, 회식인데 술이 없어서 섭섭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전혀요. 다만 제가 볼링을 못 쳐서 구경만 하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리님.”
전략실의 성비는 남자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다행히 몇 안 되는 여사원들에게 술을 강요하는 악습은 없었다.
사실 차현이 좋은 이미지로 취직하고 싶은 대기업으로 대학생들 사이에서 꼽혔던 이유 중 하나가 진 회장이 취임 후 시행한 ‘무분별한 술자리 회식 지양’이라는 슬로건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꼭 필요할 때만 다 같이 ‘회식’이라는 이름으로 뭉치되 조직의 결속을 위해서 단합할 때는 음주 대신 건전한 회식 문화를 지향하는 풍토가 차현에는 이미 뿌리내려진 상태였다. 물론 이 모든 건 진우가 발 벗고 나서서 만들어 낸 차현의 긍정적인 면모라는 걸 아는 이들은 알고 있었고.
미주는 볼링장에서 그저 꽃같이 웃으며 손뼉을 치고 선배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커피 내기 하는 걸 지켜보지만 말이다.
은근슬쩍 연호도 훔쳐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이런 자리에 참석은 하지만 내기에는 참여하지 않는 듯했다. 평사원인 척하지만, 차연호는 차연호일 수밖에 없겠지.
“자, 그럼 내일 점심 커피는 게임에서 진 전략 2팀이 쏘는 거로 하고 이쯤에서 해산하겠습니다. 우리 전략실 항상 파이팅합시다!”
“내일도 힘냅시다.”
“차현 전략실 최고!”
나서기 좋아하는 구 대리의 선창에 화답하듯 여기저기서 파이팅이 넘쳤다. 그리고 모두 삼삼오오 같은 방향인 듯한 직원들끼리 누구 차를 타고 가느니, 동네에 가서 한잔할까 하는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미주도 선배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두 개의 메시지 중 먼저 들어온 건 재민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미주야, 오늘 전략실 전체 회식이라고 소문났던데, 진우 형이 너 혹시라도 술 마실까 봐 전전긍긍이다. 집에 들어가면 연락해.]
그리고 방금 핸드폰을 울린 텍스트를 확인했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메시지를 확인한 미주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저를 보고 있는 연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연호는 제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란 듯이 다시 만지작거렸다.
[옆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와.]
미주가 올 것이 왔다는 듯 핸드폰을 보고 연호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아…… 심판의 날이 왔구나.”
미주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연호가 사라진 방향으로 10분 정도 서 있다가 뒤를 따랐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주차장은 반쯤 불을 끈 상태라 적당히 어두컴컴한 상태였다. 뭔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기분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때 미주의 귀에 들어오는 자동차 시동을 거는 소리. 낮게 웅웅 울리는 엔진 소리를 따라간 곳에 한 번 타 봤던 낯익은 연호의 차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서 있지 말고, 타. 데려다줄게.]
이제 와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한 번은 제대로 그에게 사과해야 함이 옳았고, 계속 이렇게 도망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됐든 직장 상사야. 일단 그것만 생각하자.’
미주는 손에 핸드폰을 꼭 쥔 채 약간은 떨리는 마음으로 조수석 차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지만, 최대한 운전석에 앉은 그와 멀리 있을 수 있게 차 문에 딱 붙듯이 앉았다.
“차장님,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미주는 죄인 아닌 죄인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발가락만 꼼지락댔다.
‘뭐야, 무슨 대답이라도 하라고!’
미주는 인기척도 없는 연호가 궁금했지만,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쪽팔려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사과드리려고 온 거니깐 제가 알아서 돌아갈게요.”
미주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제 뜻을 밝힐 때 연호가 입을 열었다.
“얼굴 좀 제대로 보여 줘 봐. 요새 회사에서도 맨날 나 피해 다니는 거 알고 있거든?”
연호의 손끝이 고개 숙인 미주의 동그란 턱을 살짝 잡고는 제 쪽으로 돌렸다.
“…….”
놀란 눈을 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당황하던 미주가 전보다 더 세게 제 손을 뿌리치면서 눈을 흘기며 노려보았다.
매섭게 자신을 째려보는 눈동자도 연호의 검은 눈과 마주치자 흔들리는 게 보였다.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는 미주의 모습에 연호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차 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미주의 볼이 약간 붉어진 듯한 건 연호의 착각이었으려나.
“나한테 미안한 거 알면 그냥 조용히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저 혼자 가도……”
“늦었어. 택시 타고 가나 내 차 타고 가나 똑같잖아?”
“…….”
택시보다 연호가 더 위험한 인물이지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그 순간 갑자기 연호가 몸을 제 쪽으로 밀착시키는 것이 아닌가!
‘헉, 뭐야. 이 인간이 지금 뭔 짓을!’
연호의 행동에 놀라 순간 양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이거부터 하고…… 어? 뭐야? 지금 설마 내가 너한테?”
연호가 키스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웃음을 꾹 참고 있는 연호가 달깍-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기어를 바꾸고 차를 서서히 움직이고 있지만, 미주는 그대로 얼음인 상태였다.
‘시벌탱, 진짜 망했다… 이젠 진짜 끝이야… 오 마이 갓…….’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착각도 유분수지, 이 인간이 나한테 키스를 한다고 생각하다니.
“차라리 비웃으세요. 차장님이 웃음 참는 게 더 비참하거든요?”
“진짜 웃어도 돼?”
“네, 차라리 그냥 화끈하게 웃으세요. 그게 나아요.”
거의 울먹이듯 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필터링 없이 중얼거리는 미주의 말에 연호도 조금 소리 내 웃다가 그녀를 슬쩍 보았다.
‘개진상이긴 하지만 왠지 하는 짓이 밉지는 않네. 좀 귀엽기도 하고.’
왠지 더 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연호는 미주의 아파트에 도착해 그녀가 내릴 때 한마디 덧붙여 보았다.
“그건 다음에 해.”
“……네?”
“키스, 다음에 꼭 하자고.”
물론 미주는 소리 지르며 인사도 안 하고 문을 쾅- 닫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긴 했지만 말이다.
“뭔 키스야! 차연호! 너 진짜 싫어!”
미주는 집으로 들어와서 털썩 소파에 몸을 던져 그대로 누워 버렸다. 차갑게 식어 버린 소파 가죽의 온기가 뺨에 닿는 게 서늘해서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면서 화끈거리는 뺨을 식혔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생각나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던져 놓은 핸드백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방금 집에 왔으. 걱정 마유, 술 안 마셨어. 우리 전략실 좀 짱인 것 같아. 암튼 잘 자, 오빠. 내일도 호윽시 회사에서 마주쳐도 늘 그렇듯 아는 척하지 맙시당.]
재민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다시 소파와 한 몸이 되었지만. 멍하게 엎드려 있다가 주먹으로 소파를 쾅쾅 내려쳤다.
“차연호, 진짜. 착각할 수도 있지, 지가 뭔데 사람을 놀려, 진짜!”
차연호라는 남자.
자꾸만 미주의 마음에 장난스럽게 돌을 던져 온통 어지럽히고 있었다. 꼭 어떤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더라도 장난처럼 계속 저를 들어다 놨다 하는 건 분명해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물론 내가 떡밥을 던지긴 했어. 증말! 그렇다고 그걸 덥석 물어서 이때라고 사람 가지고 놀면 좋냐? 어? 차연호?”
한참을 버둥거리며 하이킥을 하다가 몸을 돌려 소파 팔걸이를 베개 삼아 돌아누웠다. 가만히 누워 숨을 고르며 천장을 보면서 저를 진정시킨 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그 사람이 키스하려는 줄 착각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모쏠인 거는 나중에 생각하고.’
냉정함을 되찾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최대한 차분히 격양된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날 차연호 차에 탄 뒤로 집에서 깰 때까지 기억이 완전히 날아가 있었어.”
아마도 연호는 그저 제가 술에 취하다 못해 뻗어 버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술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퓨즈가 나간 것처럼 눈앞이 흐려지다니.
“그 일이 생각나서 순간 공황이 온 거로 생각했는데, 조금 이상하긴 해.”
화이트아웃.
눈앞이 하얘지면서 기억이 날아가는 건 필름이 끊길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미친 듯이 괴로운 불면의 나날 속에서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죽을 것만 같을 때 매일 밤 마시던 술은 저를 하얗게 좀 먹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맹세코 그 정도로 취한 건 아니었다. 정말 딱, 두 잔만 마셨다. 그렇다면 아마 술 말고 다른 게 섞여서 그런 건 아닐까?
“약 먹고 술을 마셔서 그런가? 아니면 이제 안 취해도 정신이 날아가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공황 발작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는 걸까?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죽고 싶은데 여전히 죽지 못하고 있어 아직 이렇게 살아 있음을 눈물의 온기로 다시 한번 더 알게 된다니.
“죽으면 썩어 사라질 몸인데, 뭘. 아니다, 알코올 중독이라서 빨리 안 썩으려나. 아니야, 그때 차라리 죽었어야 했어. 아니, 그때 그냥 날 죽여 주지 그랬어. 개새끼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했다. 자신의 몸을 짓누르던 놈들의 무게감과 코끝에 풍기던 피 냄새와 찌든 담배 냄새. 몸을 만져 대던 땀으로 축축하던 더러운 손과 강제로 벗겨진 제 등을 차갑게 얼리던 콘크리트의 냉기까지.
‘남자는 모두 다 더러워, 불결해, 너무 싫어!’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지난날의 고통을 떠올리던 미주가 조금 전 착각 속에서 살짝 닿았던 연호를 다시 기억해 냈다. 저와는 다른 무겁고도 단단한 남자의 몸. 끔찍하게도 싫었다.
미주는 무표정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게 옷을 모두 벗은 후 샤워기를 틀었다.
“더러워. 나는 더러워. 다 씻어 낼 거야. 그럼 깨끗해질 수 있어.”
미친 듯이 웃으면서 울었다. 그러다가 결국 비명을 지르며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 부스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는 밤새도록 어깨를 들썩거렸다.
* * *
하루에도 몇 번씩 놀란 토끼 눈으로 입을 막던 미주가 떠올랐다.
요새 누군가가 저를 봤다면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차 차장이 자꾸만 혼자서 피식거리며 웃는 걸 보니 업무 스트레스가 과도한 것 같다고.
‘아니, 어떻게 생각이 그렇게 튈 수 있는 거지?’
착각해도 때와 장소에 맞게 해야지, 그 상황에서 뜬금없이 키스할 리가 만무한데 말이다. 웃음을 지우고 본래의 차연호로 돌아가며 통화 중인 이에게 말했다.
“부산에 한 번 더 다녀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차갑고 냉정한 눈빛과 대조적인 웃는 듯한 눈꼬리로 지시를 내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는 시간과 돈이 얼마가 들든 최대한 모든 걸 알아봐 주세요. 진행비가 모자라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전화를 끊고는 제 사무실에서 나와 최 대리를 불러서 물었다.
“윤미주 사원, 회의실로 좀 오라고 전해 줘요.”
“네, 차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최 대리가 쓸데없는 오지랖을 펼치자 연호는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아시잖아요? 벌써 입사 석 달이니 한 번쯤 사정 청취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30분 정도 뒤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서 있는 미주를 보면서 연호는 살짝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일은 잘하고 있다고, 최 대리가 윤미주 씨 열심히 한다고 나한테 칭찬하더라고.”
“과찬이십니다. 최 대리님이 잘 봐주신 거뿐입니다.”
미주가 쌀쌀맞은 건 여전했지만 미묘하게 전과 다른 온도 차가 있다는 걸 느낀 연호는 살짝 갸웃거렸다.
“나한테 더 할 말은 없어?”
“차장님이 부르셔서 왔는데, 저는 당연히 할 말이 없지 않을까요?”
미주가 고개를 들고 빤히 보면서 대답하자 연호는 몸을 의자에 기댄 채 물었다.
“서진우 꼬리는 어떻게 알고 있던 거야?”
“…업무와 관계없는 사적인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네요.”
미주는 당당한 태도로 그의 궁금증에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술은 좀 적당히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이건 직장 상사로서 공적으로 하는 말이야.”
연호도 지지 않고 미주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제 할 말만 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만 다시 한번 더 사과드릴게요. 정식으로요.”
부러질망정 휘지 않으려는 미주가 회사라서 억지로 정중한 애티튜트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제 앞에서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미주의 손에 눈길이 갔다.
여기 보는 이 없는 곳에 저와 미주 둘만 있었다. 그리고 제가 여기에 있는 이상 누구든 노크 없이 들어올 수 없었다.
연호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미주 앞으로 다가섰다. 아마 훤히 들여다보이는 제 사무실이었다면 하지 못할 일을 지금 해 볼까 싶은 마음으로.
“근데 그거 알아? 윤미주 씨는 항상 손끝까지 예쁘게 하고 있는 거?”
미주의 오른 손가락 끝을 살짝 잡아서 제 쪽으로 당겼다. 마치 아름다운 작품을 구경이라도 하듯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튀지 않고 은은한 네일 색이 그녀와 어울린다고 생각한 순간, 미주가 황급히 손을 빼냈다.
“…하실 말씀 없으면 나가 보겠습니다.”
미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호를 피해 달아나려고 했지만, 그가 팔을 잡았다.
“너는 늘 나를 벌레 보듯이 보더라. 그런데 그런 눈빛을 느끼면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아.”
“차연호 차장님, 이거 놓으세요. 전에 누가 제 몸을 터치하는 거 싫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미주의 목소리에 담긴 노기를 느낀 연호가 팔을 놓았다.
“쏘리, 내가 또 실수했어.”
“차장님, 아까 저한테 할 말 있지 않냐고 물으셨죠?”
연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주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앞에 바짝 더 다가섰다.
“당신이 너무 싫어요. 죽어도 싫으니까 더는 날 괴롭힐 생각 말아요.”
조금 빨간 눈으로 연호를 올려다보면서 미주가 그간 하지 못했던 말을 토해 냈다. 그 순간만큼은 회사고, 진우고, 생각나지 않았다. 계속 저를 가지고 노는 듯한 연호가 견딜 수 없이 미워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알아. 그쪽이 날 싫어한다는 거 정도쯤.”
“그럼 그냥 회사 후배로만 대해 주세요. 더는 사적으로 만날 일도 없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연호는 살짝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조금 전까지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미주를 나른하게 보면서 말했다.
“근데 어쩌지? 회사 후배, 별로 할 생각 없는데.”
물러서지 않는 연호를 보며 미주는 마른 입술을 깨물다가 마음먹고 말했다.
“차연호 차장님,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 사람이랑 나중에 결혼도 할 거예요.”
“그래서?”
“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안타깝게도 미주가 장고 끝에 내어놓은 수는 연호에게 통하지 않는 듯했다.
“자의식 과잉이야. 설마 내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
“근데 그런 건 있어. 내가 마음먹으면 윤미주 네가 딴 놈이랑 결혼했어도 그걸 깨뜨릴 수 있다는 거.”
“뭐라고요?”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다행이지만, 만약 저를 미워해 이렇게 괴롭힌다면 그것 또한 난감했다.
미주는 과거 했던 실수가 지금 제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놈의 뻐큐! 뻐큐!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데? 그 새끼랑 진짜 결혼할 거야?”
“알아서 뭐 하시게요.”
“거짓말도 적당히 해. 하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너는 거짓말을 했지. 윤희주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더니.”
연호는 미주가 한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저를 떼어 내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를 지켜보니 남자는커녕 여자 친구조차 만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던데 갑자기 좋아하는 남자라니.
아, 만나는 남자래 봤자 서진우 아니면 정재민뿐이니깐 남자를 아예 안 만나는 건 아니긴 하지.
연호가 느긋하게 미주의 잔뜩 골이 난 모습을 지켜보다가 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 때였다.
“여기 금연이에요.”
“알아, 근데 내가 담배를 피운다 한들 내게 뭐라 할 사람은 없어.”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입에 물었던 담배를 테이블에 놓아뒀다. 연호는 손목시계를 한 번 흘낏 보고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일어났다. 잔뜩 뿔이 난 얼굴로 눈을 세모나게 뜨고 있는 미주에게 바싹 다가갔다.
“누가 몸을 만지는 게 싫다고 했지?”
연호가 고개를 숙여 저보다 키가 작은 미주의 얼굴 앞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건 괜찮을 것 같은데, 만지는 건 아니니깐.”
닿을 듯 말 듯 한 입술의 간격이 너무 가까워 뜨거운 숨결이 서로에게 녹아들고 있었다.
미주는 연호의 행동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최대한 동요하지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금이 바로 그다음인가요?”
그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미주는 키스 따윈 아무렇지 않다는 듯 쿨하게 반응하는 척했다.
“……어떨 것 같아?”
“어떻기는요. 그냥 여기서 하는 거죠.”
거의 닿기 직전인 미주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말에 연호가 피식 웃었다.
“회사에서 이러면 안 되지.”
“잘 아시면서 왜 그랬을까요?”
“글쎄, 왜 그랬을까?”
닿을 뻔했던 입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어졌다. 느긋하게 웃는 연호가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이…! 아으……!”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미주가 씩씩거렸다. 화를 참지 못하다가 문득 회의실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얗고 가느다란 게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그가 피우려다가 내려놓은 담배 한 개비.
미주는 담배를 빤히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담배를 물었던 연호의 입술 감촉을 상상해 보았다.
키스라. 차연호와 키스를 한다고? 그것도 무려 첫 키스를?
“윤미주, 미쳤어. 너 지금 뭔 생각이야.”
기겁하면서 회의실을 빠져나와 제자리에 앉았지만, 그날 온종일 뭔가에 사로잡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는 미주를 제 자리에서 보던 연호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거부하고, 싫다고 대놓고 표현하는 짜증이 잔뜩 묻어난 얼굴을 한 여자가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감히 네가 내 앞에서 거짓이라도 딴 놈과의 결혼을 운운해?’
순간을 모면하려 했던 미주의 작은 행동과 지나쳐도 될 말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릇된 욕망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나쁜 쪽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