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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처음에는 오빠 동생부터 (11/53)

10. 처음에는 오빠 동생부터

* * *

미주가 여전히 인간 복사기로 일한 지 한 달 하고도 열흘 남짓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 깜짝이야.”

금요일 저녁,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과 함께 퇴근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차현 그룹 본사가 큰 도로변에 있어 자주 듣는 소리라 미주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종종걸음으로 걸으며 코너를 돌 때였다.

계속 신경 쓰이게 느껴지는, 도로를 따라오는 슬렁거리는 검은색 기운에 슬쩍 한 번 돌아보니 짙게 선팅된 차가 있었다.

‘오빠 차랑 비슷하네. 다들 왜 그렇게 시커멓게 해 다니는지, 원…….’

아무 생각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갈 길을 갈 때 목소리가 들렸다.

“퇴근하는가 봐.”

제게 말을 거는 이가 차에서 내린 듯했다.

“윤미주 씨? 왜 보고도 못 본 척하고 갈까?”

한 마리 재규어처럼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자는 등 뒤로 바짝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차장님. 오늘 외근하신다고 들었는데 어쩐 일로?”

몸을 돌려 저를 부른 이가 누군지 확인한 다음 떨떠름한 표정으로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그게 못마땅한 듯 연호는 약간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아, 우리 신입 사원 잘 계시나 궁금해서.”

미주는 마치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대답 대신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미주를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던 연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긴 다리로 성큼 걸어가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미주의 어깨를 잡았다.

“윤미주, 잠시…….”

미주는 이런 식으로 살짝이라도 남자가 자신의 몸을 터치하는 게 죽도록 싫었다. 그래서 어깨에 손을 얹는 연호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손을 탁- 하고 쳐 버렸다.

“…….”

불쾌함과 언짢음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저를 빤히 보는 미주의 행동과 눈빛에 연호도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이거 완전히 벌레 보는 눈빛이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누가 제 몸에 손대는 걸 매우 싫어하거든요.”

“아, 쏘리. 내가 실수했어.”

잠시 인상을 쓰던 연호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표정으로 입으로만 미안해하지, 얼굴에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말했다.

“그럼 내가 실수했으니 밥이나 살까 하는데.”

“괜찮습니다, 굳이 제가 차장님한테 밥 얻어먹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럼 네가 밥을 사든가. 이왕이면 비싼 거로.”

“네? 저 돈 없는데요.”

뭔 소리야, 이 미친놈이. 내가 왜 밥을 사.

동그랗게 토끼 눈을 뜨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는 미주에게 연호는 계속 능글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천하의 서진우 동생이 돈이 없는 게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럼 재벌쯤 되시는 분이 저 같은 사원 나부랭이한테 밥 사 달라고 말하는 거 미안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내가 미안해서 밥 사려고. 타.”

“…….”

순간 연호에게 말린 것 같았다. 미주가 뭐라 받아치지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고 있을 때 그가 재차 말했다.

“타, 퇴근하고 나오길 꽤 오래 기다렸어.”

“아뇨, 싫어요. 그냥 갈 길 가셨으면 하는데요.”

“싫은데? 난 오늘 꼭 윤미주 씨랑 밥을 먹어야겠거든.”

“저도 싫은데요? 그냥 혼자서 식사하세요, 차장님.”

연호는 저를 밀어내는 미주의 말에 대답 없이 정차해 둔 차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동차 조수석 문을 직접 열어 고개를 한 번 까딱거렸다.

“여기서 계속 싸우다가는 서진우 눈에 띌 텐데.”

“그냥 오빠한테 걸리는 걸 선택할게요. 죄송합니다, 차장님.”

퉁명스레 대꾸하는 미주가 그럴 줄 알았기에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귀찮은 일 나도 만들고 싶지 않지만, 너도 만들고 싶지 않을 테니까, 일단 타. 타서 얘기해.”

진퇴양난이었다. 여기서 끝까지 연호를 밀어내면 그가 무슨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두려울 때였다.

“안 타면 내일부터 회사 생활 많이 힘들어질 텐데 괜찮겠어?”

“…….”

“내가 너라면 이쯤에서 그냥 탈 것 같은데.”

“…….”

이게 협박이라면 사실상 미주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뭐,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엄청 비싸고 맛있는 거 사 주세요.”

“비싼 건 걱정 안 해도 돼.”

빨리 타라는 듯 한 번 더 고개를 까딱거리는 연호를 보며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 더는 나불대지 말고 조용히 타라는 뜻이겠지?’

머뭇거리긴 했지만 설마 죽이기라도 할까 싶었다.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연호의 차에 타면서 과연 지금 이게 잘하는 짓인지 헷갈렸다.

‘그래도 분명히 어디선가 날 보는 눈들이 있을 거야.’

흘깃하고 옆에 앉아 운전하는 연호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대로 이 남자를 따라다가 뭔 일이 날지라도 진우의 눈들이 저를 구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그리고 설마 연호가 제가 누군지 아는데 함부로 할까 싶기도 했고.

각자 다른 생각에 잠겨 차 안에는 온통 무거운 공기만 감돌 뿐이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너무 멀리 가는 것 같은데…….”

“아, 내가 잘 아는 곳이 좀 먼 곳이야.”

“…….”

또다시 시작된 침묵, 그리고 침묵.

미주는 본디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데 지금은 정말이지 상대하기 힘든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트레스였다.

게다가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그날 밤 악몽의 작은 조각들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는 듯한 기분까지 느껴지고 있어 심정적으로 힘겨워질 때였다.

‘하아, 미치겠다, 정말…… 타라고 해서 탄 내가 미친년이지.’

마치 일부러 먼 곳으로 데리고 간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에 약이 오른 미주는 연호 근처에도 가기 싫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가 쪽에 바짝 붙어 앉아 최대한 눈동자를 굴려 가며 밖을 내다보며 머리를 굴렸다.

‘누군가 따라오고 있을 거야. 그래, 이러려고 지난 몇 년을 숨도 못 쉬고 살았나 보네. 별일 없을 거야. 그리고…….’

역시 인생은 실전이었다. 상상과는 달리 이 모든 게 실제 상황이 되자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 약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중이었다. 왠지 모르게 이 남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가 말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모르겠다,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어졌어…….’

미주가 이런저런 잡생각을 할 때 연호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슬쩍 시선을 돌렸다.

‘뭔 생각을 그리하는지.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안 좋은데.’

시무룩하게 온몸으로 가기 싫은 표정을 짓는 미주가 웃기기도 하고 아주 조금 귀엽기도 했다.

‘잘난 척해도 생각을 감추는 게 영 어리숙한 거 보니 아직 멀었어, 윤미주.’

각자 다른 꿍꿍이를 가진 남녀를 태운 영국제 세단은 도심을 약간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어머, 차장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시다니!”

지배인인지 사장인지 이곳을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년 여자가 예쁜 한복을 입고 버선발로 쫓아 나왔다. 아니, 꽃신을 신고 뛰쳐나왔다가 더 맞으려나.

“제가 안 와도 여긴 워낙 장사가 잘되잖아요?”

“어머, 차장님, 무슨 말씀을. 차장님 덕분에 우리가 먹고사는 거 다 아시면서, 호호호… 그런데, 어머나! 오늘은 웬일로…….”

약간 경북 억양이 묻어나는 여사장이 연호를 향해 간드러지게 웃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는 미주를 슬쩍 보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

미주가 한복을 입은 여자에게 눈인사했다. 여자가 다시 한번 더 의미심장하게 연호를 쳐다보며 웃고는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하려 할 때였다.

“저는 잠시, 화장실 좀…….”

“아, 저기 왼쪽으로 가시면 돼요, 아가씨.”

“그럼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테니 다녀와.”

먼저 자리로 가면 될 것을 굳이 기다리겠다고 하는 연호의 쓸데없는 매너에 짜증이 났다.

“아가씨라니, 아, 뭔가 오글거려.”

미주는 화장실 거울을 보며 계속 투덜대면서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내가 도망갈까 봐 그러는 거겠지? 아오, 진짜. 욱해서 따라온 나도 바보 병신이다. 어쩌지? 이제…….”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안 그래도 좀 불안했는데 일단 약 하나 먹으면 괜찮겠지?”

핸드백 가장 안쪽 지퍼에서 작은 플라스틱 통을 꺼낸 미주가 잠시 망설이다가 약을 입에 물었다. 눈을 질끈 감고 세면대의 물을 손에 조금 받았다.

“수돗물 쬐끔 먹는다고 안 죽어. 약 삼킬 만큼만.”

꿀꺽- 하고 겨우 식도를 타고 무언가가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됐어. 이제 좀 괜찮아질 거야. 진정도 될 테고.”

플라스틱 통을 별생각 없이 늘 넣는 안쪽 지퍼가 달린 곳 안이 아니라 핸드백 안에 그냥 던져 넣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미주는 안내를 받으며 맨 뒤에서 걸어갔다.

‘혹시 모르니깐 여길 빠져나갈 때를 대비해야 해.’

그런데 여기선 차가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만약 도망가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릴 때였다.

지금 미주가 뭔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는지 빤히 보여 연호는 속으로 계속 웃는 중이었다.

‘얘는 역시 은근히 재밌는 캐릭터라니까.’

넓은 한식집의 구석에 있는 조용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룸 안은 정갈한 양반집처럼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진우와 재민 덕분에 좋은 곳은 많이 가 봤다고 자부하는 미주였지만 이런 곳은 또 처음이었다.

“차장님, 이쪽으로…….”

연호가 양복 상의를 벗자 중년 여자가 그의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어 두면서 미주에게도 겉옷을 벗으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듯했다.

“아, 저는 이게 편해서…….”

겉옷을 벗지 않겠다,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여자는 알겠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어색한 공간 속에서 연호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미주도 연호를 따라 자리에 앉으면서 괜히 바닥을 한 번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트렌치코트의 앞 여밈을 고쳐 쥐면서 핸드백을 몸에 밀착시켰다.

연호는 속으로 한 번 더 웃었다. 호랑이 앞에서 잡아먹히기 전 바들바들 떠는 토끼의 모습을 떠올려 보지만.

‘토끼가 아니라 작은 포메라니안 같은 게 사납게 짖기는.’

괜히 입맛이 다셔졌다. 작고 귀여운 포메라니안의 성질머리를 길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음식 앞에서 제사라도 지내는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미주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앞에 놓인 샐러드만 쳐다볼 때 연호는 청주를 혼자 먼저 마셨다.

‘그래, 술이라도 마시자. 이 분위기를 좀 벗어나야 해!’

청주 한두 잔을 먼저 마신 연호가 미주를 슬쩍 한 번 쳐다보고는 그녀의 잔을 채웠다. 연호의 행동에 잠시 망설이던 미주가 손을 뻗어 잔을 쥐고는 한입에 탁 털어 넣었다.

‘아니야, 정신 차려, 윤미주. 이럴수록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돼. 딱 두세 잔 정도만, 분위기 맞춰 줄 만큼…….’

두 사람의 신경전 속에서 늘 그렇듯 미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청주는 되게 오랜만에 마셔 보네요.”

“술을 좀 마시나 보지?”

연호가 다시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물었다.

“즐기지는 않지만 마실 줄은 알아요.”

새침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이봐요, 차연호 씨. 사실은 나 알코올 중독자 수준으로 밤마다 마셔 대요. 최소 알코올 의존증이랄까? 뭐, 네가 알겠냐마는.’

“그래? 잘됐네. 나도 좀 마시거든.”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리는데 술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미주는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잠시 연호의 눈치를 살피던 미주도 젓가락을 들어 눈앞에 놓인 요리를 몇 점 집어 먹었다.

‘명심해. 절대로 많이 마시지 말자. 이놈 앞에서 취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한참을 또 말없이 연호가 따라 주는 술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미주가 말을 걸었다.

“육포는 진짜 맛있어요.”

“입에 잘 맞았다니, 다행이네.”

“부서 전체에 돌려서 저도 콩고물 좀 얻어먹었네요.”

“알고 있잖아? 너 때문에 내가 그랬다는 거.”

연호를 떠보려던 미주가 살짝 흠칫했지만 동요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게 말이야, 뭐랄까? 오빠의 마음이랄까? 윤미주 씨가 왠지 동생 같아서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뭔 소리래, 이 미친놈이.

‘오빠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미주는 참지 못하고 그만 풋- 하고 웃어 보이고 말았다.

“거짓말 마세요. 최 대리님한테 물어보니깐 원래 잘 쏘시는 분이라고 하던데요?”

“그렇긴 한데, 알잖아? 내가 최근에는 왜 그랬는지.”

“…….”

연호가 능글능글 웃어서 기분 나빴다. 일부러 원하는 답을 끌어내려는 듯한 고단수에게 왠지 말리는 기분이란.

‘오빠들 때문에 남자를 상대하는 건 자신 있었는데, 이건 또 다르네. 너무 힘들다, 이 남자.’

연호는 진우와 재민과 전혀 다른 남자라 상대하기가 버거움을 이제야 깨닫다니. 미주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난 솔직히 고맙다고 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제가 뭐,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요.”

“그럼 말해 봐, 나한테 달라고 하고 싶은 거.”

지금의 대화를 끌고 간다면 뭔가 이상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주는 괜히 환하게 웃으면서 딴소리를 했다.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나중에 말할게요.”

술이 몇 잔 오가니 끝까지 새초롬하게 아무 말도 안 할 것 같았던 미주가 연호에게 이것저것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물론 연호 개인에 관해서 묻는 건 아니었다. 이 음식이 맛있다, 이건 처음 먹어 본다, 이건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퀄리티가 좋은 것 같다, 뭐 이런 거.

밥 먹으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건 질색인 연호였다. 하지만 묵언 수행도 아니고 말 한 마디 안 하는 것도 질색이었다. 어쨌든 미주가 뭔 소리라도 지껄이는 게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는 좋았다.

“근데 그거 알아? 그쪽 꼬리 있는 거.”

“……어떨 것 같아요?”

역시 진우가 붙여 놓은 그림자 속에 숨은 감시자 또는 보호자를 눈치채고 있었구나.

“그런데 오늘 지금 네가 여기서 술 마시고 있는 거, 서진우는 아마 모를 거야.”

“…….”

“내가 좀 따돌려 놨거든.”

연호를 빤히 보던 미주가 아무렇지 않은 듯 젓가락을 집어 들면서 무심히 툭 던졌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미주의 행동을 따라 하듯 연호도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한 점 집었다.

“오빠는 아마 모를 거예요, 내가 아는 거. 그러니 나도 입을 다물게요.”

“뭘?”

“그쪽이 날 보호하는 사람들한테 뭔 짓을 했을 거라는 거.”

일부러 그간 미주에게 직접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존재를 파악하고 두 놈 중에 한 놈을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 제 편이 된 놈이 진우에게 거짓 정보를 넘길 테니 슬슬 행동을 시작한 연호는 외근 나간 날을 골랐다.

‘회사에서 내가 아예 사라졌으니 서 실장도 감시가 조금 소홀하겠지.’

그리고 목적은 달성되었고, 어쨌든 미주를 앞에 앉혀 놓는 데 성공했다.

“역시 똑똑해. 전략실에 올 만한 인재야.”

연호의 비아냥이 섞인 말에 미주도 비웃으며 대답했다.

“오빠 사람한테 그쪽이 뭔가 장난쳤다는 걸 알리면 내가 귀찮고 힘들어질 수 있어서 그냥 입을 다무는 거예요. 안 그래도 감시당하는 거 못 견디게 힘든데 여기서 더 심해지면 나 죽어요.”

“그렇지, 네가 사실은 다 알고 있고 모르는 척 서진우의 장단에 맞춰 주고 있다는 거 그놈이 알면 그렇긴 하네.”

“굳이 회사가 아닌 따로 밖에서 만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설마, 정말 모르는 건 아니잖아?”

“네, 맞아요. 알아요.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오빠 된 마음으로 동생을 챙겨 주고 싶은 거라고.”

연호가 몸을 살짝 앞쪽으로 숙이면서 대답했다.

“다들 처음에는 오빠 동생 하면서 시작하는 거라고 하길래, 나도 한번 해 보려고, 오빠 동생.”

“글쎄요, 저는 딱히 뭘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요.”

조금 더 붉어진 얼굴을 한 미주가 한 톤 높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때 부산에서 봤을 때랑 넌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기억나지? 우리 부산에서 만나서 있었던 일.”

연호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일 것이다.

‘부산에서 있었던 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글쎄요, 부산에서 뭔 일이 있었나요?”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는 미주가 너무 뻔뻔했다. 연호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너무 당당해서 내 기억이 왜곡된 건가 싶을 정도야.”

“부산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

미주가 무언가 동문서답한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깨를 그저 한 번 으쓱였다.

“차장님, 술을 많이 드셔서 기억이 오락가락하시나 봐요.”

“누가 할 소리를.”

“전 별로 안 취했어요. 겨우 두 잔 마셨는데.”

샐쭉한 미주가 당돌하게 대답하지만, 사실은 잔뜩 굳은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 바르르 떨리는 손끝을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눈앞이 어지럽고 뱅글뱅글 도는 이 느낌이 빨리 사라지길 간절히 바라면서 미주는 자꾸 눈을 깜빡였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표정을 최대한 숨기면서 말이다.

“기억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니 오늘은 이쯤 하자. 너, 내가 봤을 땐 취했어.”

“아니라니까. 겨우 두 잔에 취할까 봐요?”

“다음에 술 없이 한번 얘기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연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슈트 상의를 다시 입으며 미주를 빤히 봤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안색이 매우 나빠 보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역시 눈치는 빨랐다. 미주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곤란하다는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은 문제가 있어요.”

“말해 봐.”

“진짜 취했나 봐요. 일어나지 못하겠어요.”

갑작스러운 미주의 태도 변화에 연호도 당혹스러웠다.

“나한테 술에 취했느니 마느니 하면서 센 척은 다 하더니, 네 말대로 겨우 두 잔에?”

“그러게요.”

차라리 술 취한 거로 보이는 게 낫겠다, 순간 판단했다. 마음속 어둠이 지금 육체를 지배하고 있어 옴짝달싹도 못 하는 지경이라는 걸 그가 몰랐으면 했다.

“죄송합니다, 차장님.”

“……잠시 기다려. 나도 술 마셔서 대신 운전할 사람 불러 달라고 해야 하니.”

“네.”

잠시 뒤 연호는 비틀비틀 제대로 걷지도 못하지만 제 몸을 누군가가 만지는 게 싫다는 미주를 옷만 잡아서 질질 끌고 나왔다.

“머리 안 부딪히게 조심해.”

“…….”

뒷좌석에 미주를 던지다시피 태웠다.

연호는 제 차를 운전하러 온 말쑥한 남성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참았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맛있다는 듯 깊이 마시며 생각했다.

‘트렌치코트를 벗지 않았던 네 선견지명에 박수를 보내야겠어.’

혼자서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이 여자한테 겉옷을 입혀 주려 했다면, 저를 건드리지 말라고 무슨 지랄발광을 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담배를 다 피운 연호가 눈짓하자 운전석에 남자가 앉았다. 연호도 미주 옆에 타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출발하라는 지시에 차가 낮게 으르렁대며 천천히 움직였다.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파묻고는 속으로 미주 욕을 실컷 해 대고 있을 때였다.

‘그래, 잠들었으니 너는 편하겠지. 아오, 이 여자 정말…… 응? 잠?’

뭔가 번뜩하는 기분에 살짝 미주를 흔들었다.

“윤미주 씨, 윤미주.”

연호가 불러도, 몸을 몇 번 흔들어 봐도 미주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잠이 깊게 들었다고 처음에는 생각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설마, 설마?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다행히 미주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바로 확인해 보니 마치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고 완전히 잠에 빠져든 상태처럼 보였다. 그녀가 의식을 잃었다는 가능성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윤미주, 미주야. 윤미주 씨. 야, 부산 가시나.”

부산 가시나에서 인상을 쓰는 미주의 모습에 일단 안심이 됐다. 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도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였다.

‘술 두 잔에 취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최대한 머리의 열을 식히면서 냉정한 목소리로 운전하는 이에게 말했다.

“서초동으로 가 주세요.”

어찌 되었든 미주를 집에 던져 놔야 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연호는 잠이 든 건지 기절해 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침대에 누워 숨소리를 내는 미주를 쳐다봤다.

“정말 가지가지 하네.”

방문을 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거실로 나왔다.

“술 세다는 쟤 말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겨우 두 잔에 뻗을 줄.”

열이 받아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이게 대체 뭘까?

“뭐야? 뭔 여자애가 집에 술밖에 없어?”

다행히 제가 마실 생수는 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광경에 안에 있는 걸 인상을 쓰며 보았다.

“얘는 술만 마시고 사는 거야? 뭔 맥주가 종류별로…… 여긴 소주에…….”

연호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일단 생수만 꺼내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근데 좀 이상하긴 했어. 술 취한 것처럼은 안 보였는데…….”

진짜 미주는 딱 두 잔밖에 마시지 않았고,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하긴, 취했다고 보기에는 발음이 꼬이거나 혀가 어눌해지지도 않았으니.”

설령 얼굴색은 안 변하는 체질이라고 하더라도 눈도 풀리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봤던 얼굴에서는 절대 이렇게 갑자기 뻗어 버릴 정도로 취해 보이진 않았는데.

“정말 두 잔에 취한 거야? 뭐지… 하아…, 미리 간파하지 못한 내 탓이다, 진짜.”

여자랑 단둘이 있어도 말이다. 조금의 야릇한 마음도 들지 않을 정도로 뒷골이 당겼다.

진우에게 하나밖에 없다는 여동생이 이런 캐릭터라니. 어쩌면 진우도 그동안 꽤 골치 아팠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연호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데 그건 대체 뭘까? 왜 그걸…….’

남의 집 소파에 앉아 갈증을 해소하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침실 문이 열리면서 미주가 눈을 감은 채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응? 왜 차장님이 여기 있어요?”

미주가 반쯤 뜬 눈으로 저를 멍하니 보았다.

“어? 여기 내 집인데……?”

이내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미주가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연호가 먼저 그 입을 막아 버렸다.

“이봐, 윤미주 씨! 소리 지르고 싶은 사람은 나라고! 갑자기 그렇게 쓰러져 버리면 나도 당황스럽다고! 술도 적당히 해야지, 원. 쯧쯧.”

연호의 조금 화난 목소리에 미주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완벽하게 제정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눈이 풀린 상태로 조금 몽롱하게 저를 바라보는 게 살짝 남자의 욕망을 불끈하게 하긴 했다. 하지만 좀비 꼴을 한 여자를 덮칠 정도로 짐승은 아니었기에 연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했으니 걱정하지 마.”

미주가 양손으로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를 꼭 여미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금 정신이 차려지는지 또렷한 초점으로 저를 보면서 말이다.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 제일 싫어하는 게 너처럼 술 마시고 정신 못 차리는 여자거든? 질색이야, 정말! 아무리 흔들어도 깨질 않으니.”

“그게…… 기억이 날아가서…….”

“성질 같아서는 길바닥에 그냥 둘까 하다가 집으로 얌전히 데리고 온 거야.”

“……감사합니다.”

미주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연호가 다다다 쏘아붙였다.

“아무튼, 인사받으려고 그런 건 아니고. 어쨌든 서진우 체면 봐서 나도 그런 거니깐.”

“오늘 일, 오빠들한테는 얘기하면 안 돼요. 꼭이요.”

“싫은데?”

“제발 얘기하지 마세요. 걱정해요. 또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흑흑.”

“아니, 갑자기 왜 우는 거야? 아니…….”

갑자기 뭐에 복받쳤는지 미주가 울기 시작하자 뜬금없는 눈물 공격에 연호도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제발요.”

“아까 말했지만 어차피 서진우는 오늘 일 모르는데… 지금 여기서 네가 울면 내가 이상해지잖아? 정말, 아오!”

연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일단 미주를 달랬다. 여자의 눈물에 약한 남자의 무의식에 더는 못되게 굴기도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게, 그러니깐.”

훌쩍거리던 미주가 갑자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꺼냈다. 그러고는 혼자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예전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너무 걱정하고. 나는 너무 괴로워서 그런 건데, 말은 못 하고. 술만 마시고. 나는 다 잊고 싶은데…….”

연호는 직감했다.

‘얘 지금 술이 덜 깬 거야! 지금 이거 분명 술주정이잖아.’

미주의 말이 앞뒤가 전혀 안 맞았다.

‘미치겠군, 정말.’

진우가 알면 안 된다고 어린애처럼 펑펑 우는 미주를 연호도 이제는 완전히 포기했다. 흑심이고 나발이고 술주정 앞에서는 욕정도 장사 없었다.

“알았어. 일단 울지 말고. 응?”

“그래서, 흑,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자꾸 마시게 되니깐… 밤에 잠을 더 못 자서…….”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이젠 연호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지만 저까지 여기서 돌아 버리면 이 난장판을 누가 정리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그래그래. 어쩐지 냉장고에 술이 가득하던데… 어? 왜 이래? 야, 윤미주!”

“차장님… 나 속이 안 좋아요…….”

연호는 등을 두드리면서 생각했다. 다시 이 여자와 술을 마시면 미친놈이라고 말이다.

간신히 진정된 미주가 퉁퉁 부은 눈으로 잠이 든 걸 확인해 보면서. 연호는 완전히 질린 얼굴로 미주의 집을 빠져나왔다.

* * *

주말이 지나고 그 폭풍 같았던 일들을 다시 곱씹으며 미주의 말을 떠올렸다.

“괴롭고, 다 잊고 싶다…라…….”

사실 미주가 모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어떻게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왔는가 하는 문제를 그녀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현관 비밀번호 따윈 당연히 모르는 연호가 간신히 미주를 옆에 세워 두고 고민하다 취했던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키를 가지고 다닐 수 있으니깐.”

갖다 대기만 하면 문이 열리는 작은 직사각형을 찾았다.

“만약 없으면 어쩔 수 없이 호텔에 던져 놓고 나오는 수밖에.”

미주의 핸드백을 열어 이리저리 살펴보다 천만다행으로 귀엽게 생긴 열쇠고리를 발견하고는 유레카를 외쳤다. 그래서 미주는 호텔도 아니고 문 앞도 아니고 길바닥도 아닌 따뜻한 제 침대에서 잠들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연호가 간신히 미주를 침대에 짐짝처럼 올려 두고는 키를 제자리에 두기 위해 다시 핸드백을 열었을 때 작은 플라스틱 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딱 봐도 수상하게 생겼는데?”

순간의 호기심이었다. 남의 가방에서 뭘 훔치려고 열어 본 것도 아니었고 그저 윤미주가 궁금했다. 연호는 약병을 집어 안의 내용물을 하나 꺼냈다. 그런데 그것이 판도라 상자를 여는 행위였다니.

“그 약, 알아보니 흔하긴 하지만.”

불법적인 약물도 아니었고, 처방받으면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항우울제였다. 그런데 느낌은 그게 아니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예감.

소위 말하는 외국물을 먹은 연호라 유학 시절부터 주변에서 심심찮게 봤었다. 마약이 아니더라도, 합법적으로 처방받은 약물을 오남용하는 중독자들.

술과 약, 그리고 윤미주라는 이 이질감 넘치는 뜻밖의 조합에 생각이 점점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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