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지울 수 있다면
* * *
요한은 룸미러로 미주를 흘깃 쳐다봤다.
‘분명히 실장님이 미주 씨가 속이 안 좋다고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면 그 말은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리 창백하게 질려 있는 얼굴을 보니 짚이는 바가 있어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운전만 했다.
“요한 씨, 죄송한데 가다가 편의점 있으면 저 잠시만 내려 주세요. 물 좀 마시고 싶어서…….”
파리한 얼굴로 부탁하는 미주의 말에 요한은 차선을 변경해 시야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편의점으로 차를 움직였다. 비상등을 켜고 정차한 세단으로 생수를 손에 든 미주가 다시 올라탔다.
“고마워요. 이건 오빠한테 말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늘 그렇듯 저는 입이 무거우니까요.”
“제가 그래서 요한 씨, 아니 이젠 이요한 과장님 의지하는 거 알죠?”
“네, 윤미주 사원.”
요한이 따스한 미소로 대답하며 룸미러로 미주를 보고 짧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미주는 안심이라도 된 듯 생수 뚜껑을 열었다. 한 모금 갈증을 해소하더니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다시 물을 길게 마셨다.
물론 요한은 최대한 미주의 행동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너무나도 평범한, 물을 마시는 행위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냐마는 요한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했다.
‘내가 개입할 일이 아니야. 미주 씨한테 뭐라 말할 처지도 아니고.’
그저 묵묵히 핸들을 잡고 액셀을 밟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말 없는 두 사람과 무거운 정적이 감돌던 차는 어느덧 미주의 아파트 앞에 도착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졸기라도 한 건지, 그저 눈만 감고 있었던 건지. 미주는 집에 도착했음을 알고는 본능적으로 눈을 떠 요한에게 감사를 표했다.
“오늘도 저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어떻게 보면 오빠의 사적인 일인데. 아무리 같이 일하는 사이라도 이런 것까지 다 해 주시고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몇 번이나 말했지만, 실장님 개인적인 일에 동원되는 거 나쁘지만은 않거든요.”
“월급이나 많이 달라고 하세요, 수당까지 붙여서.”
요한은 늘 그렇듯 미주에게 진우를 포함한 차현 비서실의 실체를 숨기고 마치 회사 일의 연장선인 듯 말하며 그녀를 속였다. 진우가 지시한 대로, 재민이 만들어 준 대본대로 말이다.
“그럼, 집에까지 들어가는 거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알다시피 그냥 여기서 내뺐다가 실장님 아시면 저 죽어요.”
“아, 진짜 오빠도 어느 정도껏 해야지.”
미주의 볼멘소리를 들으며 뒤를 지키는 요한은 오늘도 그녀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간 걸 눈으로 확인한 뒤, 메시지를 보냈다.
[팀장님,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형님, 미주 잘 들어갔답니다.”
“그래, 요한이한테 고생했다고 전하고.”
“네.”
진우는 한시름 놓으면서 혼자 피식- 웃었다. 다람쥐처럼 두 볼 빵빵하게 음식을 먹던 미주가 생각났다. 귀여운 놈, 어지간히도 먹어야지. 당연히 그녀가 체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옆에 앉은 진 회장에게 양주를 기울였다.
“으으으.”
미주는 집에 오자마자 비틀거리며 거실 소파에 털썩하고 앉았다. 집으로 오는 내내 식은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속옷까지 모두 젖은 것 같았다. 휘청거리며 옷을 벗어 바닥에 하나씩 던지지만 말이다. 홈 웨어를 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침실로 들어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아까 차에서 먹었던 약 기운이 이제 도는구나.’
그리고 깜빡 잠들었을까?
“으음…….”
으슬으슬 온몸에 돋는 소름에 눈이 떠졌다. 속옷만 입은 채 반나체로 누워 있는 제 몸이 눈에 들어왔다. 맞아, 약 먹었지.
“…….”
갑자기 눈물이 터지면서 다시 부들부들 온몸이 떨리는 듯했다. 추운 건지 더운 건지 이미 무감각해지고 있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간신히 팬티와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물에 몸을 적셔 보지만 도무지 젖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몸에 코팅이라도 된 것 같아. 아니, 너무 바싹 말라서 스펀지처럼 물을 흡수하는 건가.”
조금 이상한 말을 지껄이며 물만 뿌리는 건지 씻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이 샤워기 앞에 멍하게 서 있었다.
“냄새가 나, 썩은 냄새. 몸이 썩고 있어.”
코끝에서 느껴지는 실체가 없는 저만 맡을 수 있는 이상한 냄새가 욕실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더러워! 더러워! 다 씻어 낼 거야! 다! 모두! 전부! 다 지울 거야!”
샤워기 레버의 방향을 더운물 쪽으로 돌리자 따뜻한 게 아니라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그 아래 빨갛게 마치 몸이 익고 있는 듯한 미주가 눈물인지 물줄기인지 모를 것을 쏟아 내면서 흐느꼈다.
“없애 버릴 거야! 없어질 거야! 씻어 내면, 모두 사라질 거야! 없어졌으면, 제발, 사라졌으면…….”
샤워 볼에 흠뻑 묻은 바디 워시가 풍성한 거품을 냈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있는 힘껏 피부를 박박 문질렀다. 마치, 병적인 결벽증인 것처럼 히스테릭하게 제 몸에 고통을 주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손톱에 날을 세워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 붉은 줄을 그으며 절규했다.
“이렇게 씻어 내는데도 왜 사라지지 않는 걸까? 왜!”
한참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온몸을 긁어 대던 미주가 간신히 정신 차렸다. 제대로 닫지 않은 욕실 문 넘어 들려오는 핸드폰 벨 소리 덕분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제 몸에 저지른 짓을 보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수건을 찾아 대충 물기만 닦았다.
“오빠? 어, 씻고 있어서 전화 소리를 이제 들었어. 아, 괜찮아. 집에 와서 소화제 먹으려고. 좀 누워 있으니깐 다 나은 것 같네. 그래, 오빠도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주말 잘 보내. 어, 안녕.”
억지로 쥐어짠 밝은 목소리로 진우의 전화를 받았다. 제 꾸며진 밝음은 다행히도 상대방을 잘 속여 넘긴 것 같았다. 진우는 술에 취했는지 혀가 약간 꼬부라져 있었으니깐 지금 격양된 제 감정을 느낄 순 없었을 것이다.
대충 몸에 묻은 물기만 털어 낸 후 수건을 두르고 냉장고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을 살피지만, 음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술이 냉장고 속에서 차갑게 주인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문을 닫았다.
“이거 말고 쎈 거.”
주방 상단 수납장을 열자 양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래, 너로 정했다.”
이미 반쯤 마셨는지 찰랑거리는 영어가 잔뜩 쓰인 양주병을 손에 쥔 미주가 다시 침실로 향했다. 침대 옆 작은 서랍장에 들어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퍼백 속 플라스틱 통에서 작고 하얀 둥근 약 몇 알을 꺼냈다.
“얘랑 얘랑 믹스하면 알아서 뿅 가겠지.”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입에 털어 넣고는 손에 쥔 양주를 마치 물을 마시듯 꿀꺽거리며 삼켰다.
* * *
‘으, 머리야…… 지금이…… 아침인 건지 밤인 건지.’
잠에 빠진 건지 아니면 술에 취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남용한 약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몽롱한 상태로 눈이 떠졌다. 손을 뻗어 침대를 더듬거려 보니 핸드폰이 근처에 있었다.
“토요일이라 다행이야.”
첫 출근은 일주일 뒤니, 대략 남은 백수 생활은 열흘 정도 될 것 같아 그 기간이면 멘탈을 회복할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에 늘 하던 대로 주방으로 무거운 발을 질질 끌고 나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서랍장에서 필터를 꺼내며 한 손으로는 재빠르게 전기 포트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잠시 손가락을 까딱거리다 부글부글 김을 내뿜으며 뜨거워졌음을 알리는 소리에 아끼는 칼리타 드리퍼에 필터를 예쁘게 끼웠다. 행사처럼 꼭 주말마다 마시는 에티오피아 시다모에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부었다.
“하, 살 것 같아.”
뜨거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찌릿하게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야 겨우 저 멀리 날아가 있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지만, 미주는 어두운 표정으로 상념에 잠겼다.
“그날, 그 싸가지가 차연호라는 사람이었다니.”
연호가 무심히 던진 돌에 이제는 평온하다 믿었던 미주 마음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제가 겨우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모든 걸 기억하는 밤을 떠오르게 했다.
“납골당에서 뻐큐 날리고 도망치고 며칠 뒤였어. 모의고사를 치고, 수현이랑 떡볶이를 먹었지.”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희주 오빠도 그놈처럼 비싼 외제 차를 몰고 좋은 옷을 입으면 정말 멋질 거라고.”
늘 그랬듯 평범했던 하루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얼마 전에 우연히 마주친 서울말을 쓰던 재수 없는 남자를 떠올리며 죽은 오빠를 그리워하고 있었을 뿐이다.
“……흑.”
구슬픈 울음소리가 아무도 없는 집 안에 울렸다. 모든 걸 지우고 버리고 싶지만, 그날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육체는 죽었고 영혼은 지옥보다 더 깊은 심연 속으로 떨어져 영원히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간신히 잊었다고, 아니 잊혔다고 생각된 일이 차연호라는 남자로 인해 다시 어제 일처럼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고 있었다. 제 몸을 만져 대던 땀에 젖은 축축한 손길이 벌레처럼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담배 냄새와 피 냄새, 비릿하던 그 끔찍한 것까지.
미주는 마시던 커피도 내팽개치고는 침대로 뛰어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마치 엄마의 자궁 속 태아 같은 형태로 몸을 웅크리고는 눈을 감고 덜덜 떨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살려 주세요…….”
* * *
연호에게도 진 회장처럼 저를 위해서 일해 주는 일종의 수족들이 있었다.
그런데 제가 차현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바지로 앉힐 예정이었던 진수오가 이렇게 완전히 차현을 장악할 줄 저도, 누나도, 제 라인들도 몰랐다. 그 선봉에 서서 차현의 적통을 위협하는 자가 바로 서 실장, 진우였다.
“도대체 얘 뭘까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거칠게 책상에 던졌다. 검토해야 할 사안이 산더미 같은데도 은밀히 부탁한 자료부터 보다가 뭔지 모를 짜증에 성질을 부렸다.
“서진우가 비서실 인력을 사적으로 운용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연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앞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의외로 윤미주 씨를 보호하는 애들이 비서실 말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제가 확인해 본 결과 서 실장이 어느 정도 검증한 것 같은 애들이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수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고요.”
“그래도 돈으로 되지 않는 건 없으니 최대한 노력해 주세요.”
아무리 매형에게, 아니 진우에게 충성한다 해도,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니 그중에 하나쯤은 유혹에 넘어가리라 생각해 보면서.
“네, 차장님. 그리고 좀 더 지켜보니 윤미주 씨의 생활 패턴 자체는 굉장히 단조롭더군요.”
“그건 의외네요.”
“그래서인지 서 실장 쪽에서도 집에서 안 나오겠다, 확신이 들면 철수하더군요. 실제로도 소위 말하는 집순이 같은 스타일이라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네, 그럼. 서 실장 쪽 좀 더 지켜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건 일종의 직감이었다. 미주가 진우의 약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호는 오래전 미주를 찾는 놀이를 부탁했던 집안의 사설탐정에게 의뢰했다. 일명 백호라고 불리는 그자는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미주에 대한 비공식 정보를 최대한 알아내 줬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서진우는 윤미주를 그리 타이트하게 보호하는 거지? 그건 보호가 아니라 거의 감시하고 있는 수준인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우에게 친여동생이나 다름없다 해도 가족에게 그 정도로 사람을 붙이진 않았다. 저도 누나에게 그 정도로 사람을 붙여서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진 않으니 말이다. 그럼 도대체 왜 그 여자애를 그렇게 많은 인력을 움직이면서 과잉보호하는 것일까?
‘내 생각보다 훨씬 적이 많은 걸까?’
사실상 진우와 가장 적대적인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도 두려워서 불특정 다수로부터 윤미주를 애지중지하는 건지.
“이거 생각보다 더 재미있겠는데?”
마치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진우의 눈을 피해 그놈이 가장 아끼는 걸 한번 흔들어 보고 싶었다.
만약에 고양이같이 예쁜 얼굴 뒤에 건방짐을 숨긴 그 발랄한 계집애가 제 손에 넘어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면. 진우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정말이지 진우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고 싶었다.
연호가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는 내선으로 인사과 박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입 사원 중 하나를 전략실로 발령 내라고 말이다.
“그런데 부서 바뀌는 거 미리 말하지 말고 그날 아침에 바로 바꿔서 통보하세요.”
* * *
미주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입 사원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각자 부서 발령이 났을 때, 절대로 신입 사원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전략실’에 배치되었음을 알았다.
“미주 씨, 전략실 거기 최소 타 부서에서 대리 직급 이상 달고 능력 인정받아야지만 들어갈 수 있다 하던데. 완전 축하해요.”
저를 보는 부러운 시선과 시샘하는 눈빛들, 그리고 일부러 들으랍시고 쑥덕이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윤미주 씨 낙하산인 거 아니야?”
“뭔 빽이래? 아무리 스카이 밑의 한국대 경영이라도 그보다 더 좋은 스펙 차고 넘치는데 왜 쟤가?”
익숙한 일이 다시 사회에서 시작된 것 같아 쓴웃음을 지었다. 부산에서 살았던 시절 저를 앞에 세워 두고 뒤에서 이상하게, 아니 추잡하게 돌던 소문들.
‘대학에서는 쥐 죽은 듯이 지내서 괜찮았는데.’
비서실도 아니고 전략실이라, 누군가 뒤에서 손을 쓴 게 분명해 씁쓸했다.
차현 그룹 전략실 차장이라는 차연호.
왜 여기 동기들도 없이 혼자 뚝 떨어져 앉아 있는지 알 것 같아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전략실은 여기 24층 전체 쓰는 거 오티 때 설명 들었죠? 아, 여기가 미주 씨 자리고… 저기가 탕비실이고…… 복사기나 이런 건……”
일명 ‘사수’가 된 전략실 최 대리가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저를 대하고 있었다. 새파란 신입이, 그것도 무려 여자 신입이 전략실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윤미주라는 여자의 뒷배경이 충분히 상상됐다.
차현의 오지랖 넓은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저를 향해 있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일 때 마침내 다시 연호를 만나게 되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여기 우리 전략실로 오게 된 이번 해 공채 신입 사원 윤미주 씨입니다. 자, 박수.”
붙임성 좋아 보이는 사수 최 대리가 모일 수 있는 전략실 직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미주를 소개했다.
“우리 전략실 실장님부터 소개하자면……”
최 대리가 직원들을 한 명씩 소개해 주자 미주가 잘 부탁한다,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차연호 차장님, 일명 차 차장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연호를 처음 보는 사람인 양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인사를 건넸다.
“아, 반가워요, 윤미주 사원. 최 대리가 신입 데리고 여기저기 소개하고 알려 준다고 고생했겠네요. 최 대리는 잠깐 쉬고, 윤미주 사원은 잠깐 제 자리로 오세요.”
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며 도살장에 소 끌려가는 심정으로 유리로 사방이 막힌 ‘차장실’로 그를 뒤따랐다.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격리된 둘만 오롯이 있는 자리는 훤히 안이 들여다보였지만 말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듯했다. 만약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밖으로 들렸다면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을 연호가 쏟아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윤미주 씨, 오랜만이야.”
여유로운 표정으로 저를 세워 두고는 책상에 앉아 있는 연호가 이미 싫었다.
“안녕하세요.”
건성으로 대답하는 반응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연호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면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입을 열었다.
“전혀 반갑지 않은 기색이라 섭섭하네. 이게 몇 년 만인지, 교복 입고 있던 여고생이 사회인이 돼서 우리 회사로 들어오다니.”
“별걸 다 기억하시네요. 저는 다 잊었던 일인데.”
“내가 좀 똑똑하거든.”
“아, 네.”
미주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남자, 정말 재수 없어!
“근데 그쪽이 윤희주 동생이었다니, 나 정말 놀랐어. 그때 분명히 윤희주는 모른다는 식으로 딱 잡아떼더니.”
데면데면하게 구는 미주를 예상이라도 한 듯 전혀 당황하지 않는 연호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오빠를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건가요?”
희주 이름이 언급되자 경계하는 눈빛으로 연호를 보면서 오빠에 관해 물었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닌데, 그래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 정도의 관계랄까?”
연호의 말에 미주가 대답 없이 조금 묘하게 웃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던 걸까?’
미주는 입을 다물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연호가 저를 세워 둔 대로 그냥 서 있었다. 연호는 그런 미주를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시선은 따가웠다. 마음먹은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남자와 감히 그와 대등해지려고 하는 남자를 오빠로 둔 여자.
두 사람의 긴장감이 팽팽한 평행선을 달릴 때 이 뜨거운 기 싸움을 견디지 못한 미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략실로 절 보낸 게 차장님이시죠?”
미주는 항복 아닌 항복을 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니.”
연호의 표정만 봐도 100% 거짓말임을 알 수 있었기에 어이가 없는 듯 픽- 하고 웃었다.
“거짓말 마요.”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계속 말꼬리를 잡고 능글거리자 미주도 지지 않고 판에 박힌 미소를 지은 채 얘기했다.
“그쪽이 아니면 누가 절 여기로 보냈겠어요?”
“역시 바보는 아니네.”
“혹시 일부러 저 꼴 보기 싫어서, 그때 손가락 욕 하고 도망친 거 복수하려고 회사 내보내려 그런 거면 저 절대로 안 나가요.”
“그 정도로 속 좁은 놈은 아닌데.”
“내가 괴롭힘에 못 버틸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네요, 차 차장님. 벌써 저 낙하산이라고 소문 쫙 났던데 이런 거 별로 신경 안 써요. 이미 예전에 충분히 경험한 일이라 까딱없네요.”
연호의 의도를 완전히 잘못 짚은 건 아니었다.
‘분명히 오빠 견제하려는 생각도 있을 거야. 그리고 유치한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겠지.’
제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던 겁 없는 여자애를 이렇게 괴롭힌다고 이미 마음대로 생각했다. 그랬기에 설마 연호가 저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은 정말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까딱없으면 뭐, 견뎌 보시든지.”
“…….”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신입 사원 윤미주 씨.”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연호를 물끄러미 보았다. 조금 차가워 보이는 예민한 외모 속에서 새카만 흑요석 눈동자가 꿰뚫듯 보고 있었다.
미주는 잠깐 고민했지만,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차연호 차장님.”
일부러 유리 넘어 훔쳐보고 있을 다른 사람들 눈에 굳이 악수라는 스킨십을 보여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털끝조차 연호와 닿기 싫었고.
미주는 정말 깍듯이 90도로 몸을 접다시피 인사를 하며 차장실을 빠져나왔다. 제 자리에 앉아 속으로 화를 삼키면서 앞으로 연호가 얼마나 괴롭힐지 상상하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때였다.
[미주야! 아오. 씨발, 차연호, 이 개새끼가! 분명히 내가 너 총무과로 배치받은 거 알고 있었는데! 이 새끼가 지 마음대로 너 전략실에 넣어서…….]
[윤미주! 너 그냥 가방 들고 그대로 도망쳐.]
[모개야, 뭔 일 있는 거 아니지? 일단 메시지 보면 나한테 연락 좀 해라, 어?]
진우는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핸드폰만 들고 부들부들하다가 결국 재민에게 큰 소리를 내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차연호, 이 씨발 새끼! 이게 완전히 미쳤네, 미쳤어! 미주 그런 식으로 전략실에 집어넣으면 걔가 그 뒷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리고 까딱하면 우리랑 어떤 사이인지도 밝혀질 수 있는데! 이 개새끼가!”
“형님, 우리가 너무 방심했었던 것 같네요. 역시 차연호, 보통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아무나 못 들어가는 전략실에 생뚱맞게 미주가 들어가면 분명히 뒷이야기가 나올 거 계산했을 거고…….”
재민은 차분한 말투로 분노가 극에 달한 것 같은 진우를 달래면서 연호의 공격에 대책을 세우고자 했다.
“그래, 나도 안다. 연호 그 새끼가 한 수 더 멀리 봤다면 미주 때문에 내가 빡쳐서 저한테 뭔 실수라도 하길 바라는 계산도 넣었겠지.”
“그러니깐 오히려 우리는 침착해야 해요. 이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차연호 도발에 절대로 응해선 안 되는 거죠. 미주한테도 단단히 일러 놓거나, 차라리 잘 달래서 회사 그만두게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고요.”
진우는 가슴이 답답했는지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재민이 너도 알다시피 사실 나는 처음부터 미주 들어오는 거 탐탁지 않았어. 이런 일 생길 것 같았는데 역시…… 그래도 어쩌냐? 미주가 저 혼자 힘으로 해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게 기특해서 그냥 내버려 뒀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되다니.”
세상에 둘도 없을 잔혹한 남자는 미주에게만은 한없이 약해지는 오빠였다. 그래서 그녀가 바라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척하며 지켜봤는데 오히려 적들에게 미주를 노출하는 꼴이 되고야 말았다.
진우가 깊게 담배 연기를 폐부까지 들이마시고 고민하고 있을 때, 재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약 미주가 어떻게든 잘 버틴다면 적당히 기회 보고 비서실로 데리고 오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어차피 사내 안에서 무슨 말이 돌든 미주는 어떻게 보면 회장님 빽이지 않습니까?”
“그래, 차라리 회장님 지시라면 연호도 어찌할 수 없을 테니 올해 안으로 미주가 퇴사 안 하고 버티면 내년에 일단 내 밑으로 데려오자.”
진우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전개가 된다면 차라리 미주를 내 옆에 두는 게 낫겠어. 이럴까 봐 내가, 후우… 됐어, 더는 생각지 말자.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
* * *
미주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 가방을 잠시 째려보다 조용히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했다. 벌써 세 번째다. 그가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보내온 게.
‘아, 이건 또 뭐야? 정말…….’
헛웃음을 지을 때 같은 사무실을 쓰는 선배들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오늘 홍콩에서 사람 왔다 갔다더니, 역시 육포는 비첸향이죠.”
“차장님이 선물받은 거 전략실에 다 돌렸나 봐요. 하긴, 재벌인데 이런 거 먹겠어요?”
“야, 재벌도 똑같아. 같은 사람인데 자기들은 뭐 금을 먹고 살겠냐?”
연호는 이따금 사업차 만난 파트너들에게 받은 선물이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가끔 이렇게 먹을 거나 현물을 직원들에게 선물하는 듯했다. 사수 최 대리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면 말이다.
“커피 같은 거는 꽤 자주 돌리는 편이고, 외국에서 온 손님이 뭘 주거나 회장님 편으로 차장님께 뭘 보내면 꼭 우리한테 나눠 주시거든.”
전략실 막내 중의 막내인 미주는 현재 인간 복사기로 활약 중이었다. 인간 복사기는 가끔 탕비실에서 선배들이 모여 종종 이야기하는 연호에 대해 안 듣는 척하며 귀를 기울이곤 했다.
‘회사 안에서는 이미지 메이킹 잘하고 있나 봐. 다들 전반적으로 그 사람에 대해서 호감도가 꽤 높은 편이니깐.’
오늘도 종일 복사기 앞에 서서 기계적으로 복사를 열심히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딴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겨냥했다는 건 아무래도 내 착각이 맞는 것 같은데.’
미주는 슬쩍 고개를 돌려 유리 상자 같은 사무실 안에 앉아 있는 연호를 보았다.
악수를 청했던 날 이후로 벌써 한 달. 연호는 단 한 번도 일상적인 인사 말고는 말을 걸어온 적 없었고 눈도 마주친 적 없었다. 사실 그의 일이 바쁜 것도 있었지만 미주가 온종일 복사기와 한 몸이 된 것도 이유였다.
‘이거 일부러 나한테 보내려고 모두한테 돌린 건가?’
좀처럼 무슨 의민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벌이니 돈지랄하는 건 좋은데 이런 식으로 계속 먹잇감을 투척하는 건 신경 쓰였다. 그가 왜 이러는지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거나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니깐.
‘날 놀리고 있는 거야. 내 반응을 보고 더 신나서 괴롭히겠지.’
차장인 연호가 일반 사원인 미주를 힘들게 만들 방법은 아마도 수백 가지가 넘을 것이다.
‘이제 시작일 거야. 아직은 복사 셔틀이지만 조금 일이 익숙해지면 슬슬 어려운 일 시켜서 내가 못하는 걸 보고 즐거워하겠지.’
퇴근하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들어온 미주가 샤워를 한 후 샤워 가운만 두른 채 거실 커튼을 살짝 열었다.
오늘은 금요일 저녁. 주말에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원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에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래, 잘 가요. 월요일에 또 감시하러 오세요. 안녕.”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 시작된 진우의 보호가 정말 저를 위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몸을 숨긴 채 커튼 뒤에서 창밖을 보던 미주가 혼잣말을 하며 굳어 있던 표정을 조금 유연하게 풀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단숨에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보면서 문 앞에 던져 놓은 종이 가방을 째려봤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맛은 또 기가 막히잖아. 자존심 상하게.”
연호가 준 육포가 너무 맛있었다. 완벽한 맥주 안주, 술이 술술 넘어갔다. 소파에 반쯤 누워서 육포와 함께 맥주를 홀짝여 보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는 왜 접근하는 걸까?
‘아마 나에 대해서 조사를 다 끝냈을 거야.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짜증이 났다. 다 마신 캔을 괜히 손으로 찌그리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아무리 괴롭혀 봐, 내가 나가떨어지나. 나 다 알거든? 복사만 시키는 거. 다른 동기들은 벌써 일 배우고 있다던데, 나는 온종일 A4 용지만 만지작거리는 것도 다 차연호 네 계략인 거 알거든?”
지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오기가 생겨났다.
“어떻게 들어온 차현인데, 네가 뭔데 마음대로 날 전략실로 끌고 들어와서 이 난리냐고!”
진우와 재민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둘의 옆에서 뭔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응석받이 모양으로 오빠들에게 의지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노력해 차현으로 들어온 건데, 연호가 시작부터 모든 걸 망치는 걸 좌시할 수 없었다.
‘아, 화난다고 너무 마셨나? 그런데 취하니깐 잠이 와서 그건 좋네.’
벌써 몇 캔인지, 몇 병인지. 미주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약 대신 술이 차라리 나아.’
매일매일 잠들지 못해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느니, 차라리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게 훨씬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