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그 남자의 여동생 (9/53)

8. 그 남자의 여동생

* * *

“어, 알았어. 나중에 문자로 다시 보내 줘, 응. 그때 봐.”

며칠 뒤 재민으로부터 전에 진우가 말한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때마침 진 회장의 저녁 일정이 취소된 게 있어 그때 보기로 했다는 말을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아, 이 카드를 정말 써야 하나? 쓰려니 미안하고 안 쓰면 또 안 썼다고 한 소리 들을 수 있고.”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한 듯 살짝 웃었다.

“어차피 첫 출근도 앞두고 있으니깐 원피스 하나 눈 감고 지르는 거야.”

백화점으로 가 고심 끝에 네크라인에 아일렛 레이스가 달린, 단정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심심하지도 않은 푸른색 원피스를 샀다.

미주는 제 방 화장대 거울 앞에서 화장하고 머리를 매만지고 옷을 입으며 오늘의 만찬을 기대하고 있었다.

[요한이 갈 거니깐 5시까지 내려와.]

재민의 문자를 확인한 미주의 손놀림이 조금 느려졌다. 저를 데리러 차가 온다면 좀 더 느긋하게 여유를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차가 조금 밀립니다, 미주 씨.”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차가 약간 막히기 시작했다. 요한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미주를 한 번 쳐다보고는 시간을 확인한 후 말했다.

“아슬아슬하겠지만 늦지는 않을 거예요.”

“괜찮아요, 천천히 가 주세요.”

멋진 턱수염을 기른 요한이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짓자 같이 웃었다. 미주가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해 볼 때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모개야, 지금 어디야? 난 도착했어.]

진우였다.

[나도 거의 다 왔어. 요한 씨가 지금 엄청 열심히 나 데리고 가고 있는 중.]

[요한이한테 전해. 너 늦으면 1분당 한 대씩 나한테 맞는다고.]

진우의 텍스트를 확인하며 웃는 목소리로 요한에게 가감 없이 전했다.

“오빠가 늦으면 요한 씨 때린다는데요?”

“미주 씨가 서 실장님 말려 주시겠지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알잖아요? 이게 오빠의 애정 표현이라는 거. 사실은 요한 씨 엄청나게 아끼고 있는 거예요.”

요한은 룸미러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갸름한 윤곽을 가진 청아한 미인을 보면서 웃었다. 하긴 미주의 운전기사로 보내진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진우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 애정은 사양하고 싶은데요, 미주 씨.”

“앞으로 오빠가 더 괴롭힐 건데 어쩐다나.”

이미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에 친한 요한과 쓸데없는 잡담을 하는 사이 차는 약속 장소에 당도했다.

“시간이 빠듯하니 그럼 저 먼저 올라갈게요. 나중에 봐요.”

혼자 올라가 보겠다, 미주가 말을 하자 요한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진우에게서 언제나 늘 신신당부로 듣는 말이 있었다. 절대로 낯선 곳에 미주를 혼자 두지 말라는 지시.

“엘리베이터만 타고 가면 되는데요, 뭘. 걱정 마요.”

“……그럼 저는 주차하고 따로 실장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그래요. 여기까지 오신다고 수고하셨어요.”

“즐거운 저녁 되세요, 미주 씨.”

“근데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존댓말 안 하기로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그죠?”

차에서 반쯤 내린 미주가 얼굴을 장난스럽게 찡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 세 살이나 많은 요한이 깍듯이 존댓말을 쓸 때마다 항상 이런 것이 익숙지 않다는 듯 진저리쳤다.

“회사에서 마주치면 그때는 반말할게요.”

“맞아, 요한 씨도 이제부턴 회사 선배였어. 아무튼, 선배님, 고마워요.”

밝게 웃으면서 요한에게 손을 흔들었다.

또각, 또각, 또각. 이번에 새로 산 원피스에 맞춰서 신은 하이힐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 어딘가 모르게 걸음이 불안했다.

‘멋 부릴 생각에 너무 높은 굽을 신었나 봐. 평소에는 맨날 운동화만 신으니.’

발뒤꿈치가 쓸려 조금 걷기 힘들었지만 하이힐이 주는 아찔한 라인을 포기할 순 없었다.

‘참자, 참아. 이왕이면 예쁘게 보이면 좋지.’

오늘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약속 시각에 늦어서는 절대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불편한 걸음으로 나름대로 사력을 다해 엘리베이터로 빨리 걸어 저 멀리 닫히려고 하는 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어어어, 잠시만요!”

“…….”

“아, 감사합니다.”

세이프!

아마도 먼저 타고 있던 사람이 문을 다시 열어 준 것 같았다. 미주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약간 고개를 까닥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엘리베이터 뒤쪽에는 먼저 탄 사람이 있었다. 그랬기에 미주는 자연스럽게 가장 문 앞에 서게 되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레스토랑이 있는 층수 버튼을 누르기 위해 시선을 옮길 때.

‘어? 아…… 문 열어 준 사람, 레스토랑으로 가나 봐. 버튼이 눌러져 있네.’

이미 빨갛게 들어와 있는 숫자를 힐끗 봤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고 조금은 가빠진 숨을 살살 골랐다.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남자 한 명이 먼저 타고 있었다. 밀폐된 공간과 낯선 남자. 도망칠 곳이 없는 메탈색 사각형 안. 싫었다.

‘빨리빨리.’

차현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높은 곳까지 굉장히 빠르게 올라가는 중이었지만. 왠지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발을 까딱거리며 무의식중에 지금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 통에 그런 저를 보고 있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매형이 너도 오래.”

“나는 또 왜?”

“이참에 서 실장이랑 좀 친해지라고 나한테 닦달이거든?”

“회사가 친구 사귀는 곳도 아니고.”

연호는 누나로부터 진 회장이 며칠 뒤에 서 실장과 가볍게 저녁을 먹을 예정이니 참석해 달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굳이 불편하다 못해 서로 껄끄러운 사이인 진우와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나도 갈 거야. 일단 서 실장이 우리 차현의 충실한 개가 되어 주고 있으니깐 가끔 잘했다, 상도 좀 주고 치하도 해 주면 좋지 않겠니?”

“집 지키는 개한테 안 물리게 누나나 조심해.”

“그건 당연한 거고. 그치만 너도 배워야지. 물리기 전에 맹수를 길들이는 방법에 대해서.”

연희의 고상한 협박에 연호는 마지못한 얼굴로 떨떠름하게 승낙을 했지만,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늙은 여우인 매형과 꼴도 보기 싫은 진우와 우아 떨고 앉아 있을 누나를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짜 내가 꼭 가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약속 당일, 호텔로 향하는 연호가 계속 차 안에서 투덜댔다. 어지간히도 가기 싫은지 계속 뭐라 뭐라 짜증 내는 연호 앞에서 운전기사는 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평소에 고용인들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트집을 잡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관대한 편도 아니었다. 차갑고 냉정한, 감정보다 늘 이성이 먼저인 차현의 3세는 인자함보다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평가받곤 했으니까.

“차장님, 모시겠습니다.”

호텔 로비에 연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호텔 직원들이 깍듯이 인사를 했다.

“오늘은 사적인 자리이니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과잉 의전을 하겠다고 보필을 자처하는 호텔 고위직에게 연호는 정중하게 사양하고 저 혼자 레스토랑을 향했다. 다행히 연호 말고는 타는 사람이 없어 전세라도 낸 듯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다급한 째지는 하이 톤에 열림 버튼을 눌렀다.

“감사합니다.”

간신히 들어온 여자가 숨을 쌕쌕 몰아쉬면서 들릴 듯 말 듯 인사를 했다. 층수 버튼을 누르려고 움직이던 손가락이 연호가 먼저 눌러 놓은 층수에서 멈칫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레스토랑은 오늘 우리만 받을 텐데…… 매형이 오는 날에는 싹 다 비우고 대기하고 있을 테니.’

연호는 한 걸음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번쩍거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통해 살짝 반사된 모습으로 천천히 봤다. 여자는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발만 까딱거리고 있어서 저를 훔쳐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뭐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연호는 약간 갸웃거리면서 여자를 위아래로 훑으며 스캔 아닌 스캔을 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가 이내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앞서 있던 여자는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먼저 총총 걸어갔다.

레스토랑 입구 앞에는 이미 연호의 눈에 익은 회사 사람들이 보였다. 매형을 보좌하는, 차현 그룹 회장 비서실 직원 몇이 제 앞에 있는 여자에게 아는 체하며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게 연호에게 포착될 때였다.

저를 발견하고는 깍듯이 인사하는 비서실 직원을 보고는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 엘리베이터 같이 탄 사람도 차현 직원이구나.’

미주가 뒤에 있는 키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남자가 저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저를 지나친 키 큰 남자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미주는 도균에게 슬쩍 물었다.

“도균 씨, 방금 들어간 사람, 저 사람 누구예요?”

“아, 차연호 전략실 차장님이네요. 미주 씨, 어쩌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요한이랑 같이 안 올라오고.”

“조금 늦을 듯해서 저 먼저 올라오고 요한 씨는 주차하고 대기한다 했어요.”

“일단 자리로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를 따라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미주야.”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먼저 앉아 있던 진우가 저를 불렀다. 미주는 웃으면서 손을 한 번 살짝 올렸다 내렸다.

그때 진우와 대칭되는 방향에 이제 자리를 잡고 앉고 있는 사람,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던 남자가 미주의 눈에 들어왔다.

‘입사 준비할 때 소소하게 이런저런 차현에 대한 소문들을 많이 듣고 공부하긴 했었는데 실제로 볼 줄이야.’

꼭 진우와 재민에게 듣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 봤을 이름이었다.

차연호. 차기 차현 그룹의 회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차현의 황태자.

일부러 차근차근 평사원부터 시작했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말이다. ‘차장’이라는 직함을 달기에는 아직 젊은 편인 차현의 로열패밀리는 제 피가 가진 힘으로 초고속 승진 중이라고 했다.

언론에 노출되는 걸 극도로 꺼려 사진 한 장 아직 공식적으로 공개된 적 없는 차연호가 지금 미주 앞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미주는 진우의 옆자리에 얌전히 앉으면서 연호에게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온 저 사람, 얼굴이 완전히 낯설지가 않아… 어디서 만난 적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잠깐 사이 불편한 공기가 공간을 채우고 있을 때 진우가 연호를 보면서 미주를 인사시켰다.

“차 차장이 올 줄 몰랐네, 아, 여기 내 동생. 미주야, 인사드려. 차연호 전략실 차장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네.”

짧은 연호의 대답에 진우가 묘한 표정으로 웃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이게 오빠가 말하는 어른들의 세계겠지? 우와, 숨 막힌다, 진짜. 설마 내 직장 생활 내내 이런 느낌으로 일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미주가 눈치를 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우와 연호는 날 선 인사를 주고받았다.

“내가 진짜 올 줄 몰랐던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알아서 빠질 줄 알았지, 이런 자리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잘 모르는 제가 봐도 지금 진우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느낌이 들어서 등골이 조금 오싹했다. 두 사람은 절대 친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오고 싶어서.”

“그래, 이왕 온 거 어쩔 수 없지, 아, 그런데 웬일로 시간을 다 지켜서 오셨나?”

“오늘은 서 실장처럼 한가해서 말이지.”

“나도 가끔은 바쁠 때가 있는데 차 차장이 잘 모르나 보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여유롭게 웃음을 머금은 두 남자가 서로를 도발하고 있었다. 미주는 긴장감에 테이블 위의 물만 계속 홀짝였다.

‘아, 정말 핸드폰을 꺼내서 만지작만지작할 수도 없고. 미치겠네. 이 공기 뭐야. 재민 오빠, 빨리 와! 아니면 누군가가 제발 술이라도 좀 주든가!’

미주가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만 왔다 갔다 굴리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연호가 저를 보는 것 같았는데 왠지 앞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오빠, 분위기가 계속 이런 식은 아니겠지?”

“네가 봐도 확실히 엿같기는 하지?”

“엿이면 차라리 다행이고.”

평소에 늘 그렇듯 미주와 진우가 조용히 속닥거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상황이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는 꽤 흥미를 돋우는 모습이라는 걸 미처 알지 못한 듯했다.

고개를 다정히 모으고 둘이서 무언가 옥신각신하는 걸 조용히 지켜보는 연호는 알고 있었다. 진우에게는 친동생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분명히 진우는 미주를 ‘동생’이라고 소개를 했다.

‘근데 저 여자, 대체 어디서 봤을까? 분명 오늘 처음 본 느낌이 아니야. 어디선가 마주친 적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말이지…….’

너무 빤히 봤나 보다. 어쩌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미주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아 오히려 계속 눈길을 끌었다.

‘그만 좀 쳐다봐! 부담스럽게…… 짜증 나거든?’

물론 미주의 마음은 연호의 짐작과는 달랐지만 말이다.

“오빠, 재민 오빠 왔어.”

그때 조금 늦게 도착한 재민이 들어왔다. 미주가 금세 반짝이는 눈으로 웃었다. 재민은 눈웃음 지으며 미주의 어깨를 한 번 탁- 치고 진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고가 났는지 차가 엄청나게 밀려서 간신히 시간에 맞췄네요. 아, 차장님도 오셨네요.”

자리에 앉으며 건너편 연호에게도 인사를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이 오만한 남자의 모든 행동을 미주는 안 보는 척, 다 보고 있었다.

‘뭐야, 저 싸가지.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재민 오빠 인사 싹 무시하잖아.’

물론 재민은 그런 연호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사에 화답했다.

드디어 세 남자와 한 여자가 원형 테이블 위에 처음으로 마주 앉았을 때, 나직하고도 고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서 실장님. 옆의 이 아리따운 여성분은 누구실까요?”

“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옆의 이 못생긴 놈은 제 동생인데 처음 소개해 드리네요.”

“어머, 서 실장님한테 여동생이 있는 줄 그동안 전혀 몰랐어요! 여보,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난 알고 있었지. 우리 서 실장 동생 바보인 거 말이야.”

연희가 조곤조곤 호들갑을 떨며 진우에게 말을 건넬 때 진 회장이 뒤이어 나타났다. 진수오 회장의 등장과 동시에 먼저 와 있던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우리가 조금 늦었지? 자자, 자리에 앉아서 빨리 밥이나 먹자고. 오늘은 그냥 식구들끼리 밥 먹는 자리라고 생각하세.”

진 회장 부부가 자리하면서 분위기는 겉으로는 부드럽게 풀렸다.

“못생긴 놈이라고 했지?”

미주가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어금니 꽉 물고 진우에게 복화술처럼 입술을 달그락거렸다.

“모과한테 못생겼다고 하는 게 뭐?”

이런 대답이라면 진우에게 이런 짓을 할 만한 명분은 충분하겠지. 미주는 하이힐 뒷굽으로 진우의 구두를 짓이기면서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서진우 재수 없어.”

“윤모개, 아-, 야, 너 지금 뭔 짓, 야, 너도 재수 없거든?”

“쉿, 둘 다 좀. 회장님 앞에서.”

미주와 진우가 테이블 아래에서 서로 발을 밟고 밟힌다고 난리라서, 재민은 둘을 말리는 데 정신이 팔렸다. 셋이서 대체 뭔 짓을 하는지, 조용한 부산스러움을 연호가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진 회장 내외까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음식이 나왔다.

‘휴, 휴, 일단 침착하고 차분하게. 코슨 거 같은데 최대한 얌전히 티 안 나게 많이 먹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잔뜩 광대가 솟아 있는 미주를 연호가 재밌다는 듯 계속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애피타이저가 나오고 코스가 시작된 것 같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접시를 깨작거리던 연희가 슬슬 미주에게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난 진짜 서 실장님한테 이런 어리고 예쁜 여동생이 있는 줄 몰랐어요. 지금껏 전혀 내색도 없어서 깜빡 우리 진우 실장한테 속았지 뭐예요.”

몸을 앞으로 숙인 연희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미주는 그저 예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차연희, 밝을 현 갤러리 관장. 입사 준비할 때 오너 일가에 대한 정보는 기본이니까 미리 공부해 뒀는데 이렇게 실물을 볼 줄이야.’

한평생 고생이란 모르고 살았을 재벌 부인을 보면서 미주가 참한 아가씨인 척 내숭 떨고 앉아 있을 때였다.

“그러게 말이야, 서 실장의 동생 사랑이 정말 보통이 아니지! 허허허. 나중에 미주 어떻게 시집보내려고 그러는지.”

“회장님. 미주, 사람 구실이라도 하게 만들어 놓고 시집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애? 그냥 딱 봐도 참하고 예쁘고 뭐 하나 빠지는 구석 없겠는데?”

연희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들며 미주를 보면서 웃을 때였다.

“여보, 이제 하는 말이지만 미주, 내 친구 민철이 딸이야.”

“어머, 그럼 서 실장님 친동생이 아니었구나!”

“당신도 알지? 민철이 아들, 7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그 희주 동생이 바로 미주야.”

희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미주와 진우, 그리고 재민까지 조금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희가 딱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서 실장님이 동기간처럼 보살펴 주고 있으니깐 지하에 있을 친오빠도 마음이 편할 거예요. 힘내요. 미주 씨라고 했지요?”

진심으로 저를 위로해 주는 듯한 연희의 따뜻한 말에 미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맙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미주의 정체가 탄로 나는 순간, 그들에게 관심 없는 척 샴페인을 음미하던 연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뭐? 윤희주? 쟤가 윤희주 친동생이라고?’

예전에 진우의 주변을 조사했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5년 전, 미국 유학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차현의 후계자로 발을 내디뎠을 때. 누나 쪽에 연줄을 대고 있는 이들한테서 들은 바가 있었다.

진수오가 귀국하는 저를 견제하기 위해 제2의 전략실을 만들었다고. 비서실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일명 ‘회장 특채’로 차현에 입사한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다. 비서실장의 이력이 좀 특이하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었다.

‘서 실장 수완이 꽤 좋습니다. 담도 크고, 밀어붙이는 추진력도 있고. 원래 의대를 다녔다고 하니 머리도 어느 정도 있고요.’

제가 귀국하기 전까지 진 회장 옆에서 회사 일을 배우더니 말이다. 제 귀국과 동시에 파격적인 인사로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을 단 부산 촌놈은 필시 매형이 저를 견제하기 위해 곁에 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공식적으로는 고졸인, 의대를 자퇴한 서진우라는 남자가 어째서 매형의 측근으로 수족이 된 걸까? 제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를 위험한 인물에 대해서 당연히 상세히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가족부터 시작해서 여자, 약점, 친구, 주변 인물 등등.

진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툼한 파일 하나가 사무실 책상 위에 올라왔었다.

그런데 그의 가족 관계에 올라와 있던 어떤 여자애가 있었다.

‘그때 갓 스무 살이었던가, 스물하나였던가.’

나이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진우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하나 있었다.

재미있는 건 진우와는 법적으로 남인, 혈육도 아닌 여자애라는 것이었다. 먼 친척도 아닌 정말이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인데 공식적으로 진우의 여동생이라고 인정받는 여자.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이 여자애와 진우가 서로 오빠니, 동생이니 하는 가족 놀이를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내용에 연호도 진우와 미주의 관계가 이해되었다.

[이 여자는 재작년에 죽은 윤희주의 친여동생이라고 합니다.]

이미 진우와 희주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이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단박에 그들의 관계가 수긍이 되었다. 따르던 형의 친동생을 거둬 주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직은 어린 진우의 여동생이 진 회장 라인과 저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 어떤 갈등이나 문제를 조장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판단했다. 그래서 미주에 대해서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대로 그녀는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 그랬어… 그게 너였네. 윤희주 동생이라…….’

연호가 생각이 많은 눈빛으로 미주를 한참이나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뱀처럼 입꼬리가 올라갔다.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웃더니 다시 미주를 빤히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혹시? 그때… 그 부산에서…… 설마 그 여자애가?’

5년 전,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부산에서 마주쳤던 건방진 여고생이 문득 생각나서 은밀히 찾아본 적이 있었다. 지금이면 성인이 되고도 훨씬 남을 나이일 거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단서도 없는 사람 하나 찾는 재미난 셜록 홈즈 같은 탐정 놀이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그때 백호한테 부탁해서 부산 시내 고등학교 졸업 앨범 몽땅 뒤졌었지.’

물론 그 많은 앨범 속의 여고생을 일일이 본 건 아니었다. 차씨 집안의 일종의 사설탐정 같은 자에게 대충 인상착의를 알려 주고 비슷한 여자애가 있으면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라고 했었다. 재벌 3세의 돈과 권력으로 약간의 불법을 동원해 제게 손가락 욕을 날린 계집애를 찾아보려 했지만.

‘정보가 너무 없어서 결국 못 찾았는데.’

가물가물한 기억 속 여자의 얼굴이 제 취향이라는 것 말고는 모든 게 흐릿했다. 연호는 당연히 그 여고생을 찾지 못했고,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우스워 그만두었다.

그 뒤로 완전히 잊어버렸던 일이었는데. 그 여자애가 자기 눈앞에, 그것도 제 발로 나타나다니. 연호는 이 기가 막힌 우연에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오래전 길어 봤자 10분 정도 본 것뿐인데.’

무의식중에라도 미주가 깊이 각인이 되었던 걸까? 제대로 기억도 안 나던 얼굴이 갑자기 다시 몇 년 만에 생생해지면서 여고생 미주와 사회인이 된 미주가 겹쳐졌다.

‘그래, 맞아. 너였어. 네가 윤희주 동생이었다니. 신기한 인연이네.’

잠시 조용히 웃던 연호가 다시 미주를 찬찬히 살폈다. 기억 속 앳된 느낌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때 그 여자애의 얼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웃는 모습이 윤희주를 닮은 것 같았다. 특히 눈매가 그랬다.

‘천하의 차연호가 찾지 못할 사람이 없지.’

연호가 생각에 빠진 걸 알 턱이 없는 연희는 동생에게 눈치를 주며 괜히 한마디 거들었다.

“연호야, 음식 맛은 좀 어때?”

“샴페인은 좋네.”

이미 누이가 단단히 경고했었다. 진 회장 앞에서는 절대로 대놓고 진우와 대립하지 말라고. 꼭 누나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연호 역시 일부러 매형 앞에서 그의 충복과 맞설 필요는 없다 여겼다. 진우를 건드리는 건, 저를 건드는 것과 같다고 진 회장이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지금 모여 앉은 여섯 명의 분위기는 정말 좋아 보였다. 축하해 주고, 격려해 주는 자리. 오고 가는 값비싼 술과 음식과 분위기 속에서 각자 동상이몽을 펼치고 있을 때 미주가 넌지시 진우에게 말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 터질 것 같아.”

배를 한 번 쓰다듬는 동작을 하자 연희가 그것 보고는 미주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젊은 아가씨가 잘 먹는 게 좋지. 다이어트 같은 거 한다고 굶거나 하면 몸만 상해요, 호호.”

“관장님, 그래도 좀 작작 먹으라고 말해 주세요. 적당히 하고 스톱해야지, 얘는 꼭 체할 때까지 먹어서…….”

“오빠, 자꾸 그런 말 하면…… 내가 좀 민망해지는데?”

“아니야, 잘 먹으면 좋지. 이렇게 싸워도 내가 볼 때는 사이가 좋아 보여서 흐뭇하네요. 우리 연호도 나한테 좀 저랬으면 좋으련만.”

연희가 동생을 살짝 째려보지만, 연호는 누나의 시선을 완벽히 무시한 채 어깨만 한 번 으쓱거렸다.

“쟤가 늦둥이라 오냐오냐 커서 그래요. 나랑 나이 차이가 크게 나니깐.”

“아…… 네.”

“근데 미주 씨는 몇 살이에요? 서 실장님이랑은 몇 살 차이지?”

“저는 올해 스물여섯 살이고요, 오빠랑은 일곱 살 차이예요.”

“그치, 연호가 서 실장님보다 한 살 어리니깐.”

자연스럽게 연희는 미주와 다시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있었다. 그녀는 미주의 잠버릇까지도 알아낼 요량으로 열심히 신상에 관해 물어봤다. 덕분에 연호는 나서지 않아도 미주의 기본적인 데이터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어머, 한국대 경영학과면 공부를 잘해야 갈 수 있는 곳인데? 볼수록 우리 미주 씨 너무 맘에 드네요. 어학연수도 1년 다녀왔다고?”

“네, 캐나다로 1년 정도 다녀왔어요.”

“그럼 영어도 잘하겠네? 우리 연호도 10년 넘게 미국에서 공부했는데.”

“못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잘하는 건 아니에요.”

미주가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연희는 몸까지 기울이며 계속 대화를 이어 갔다.

“미주 이번에 우리 회사 신입으로 들어와. 서 실장 말로는 자기 힘으로 붙었다고 하던데.”

“어머, 정말요? 당신은 그런 말 미리 좀 해 주지. 나만 모르고 있었네. 축하해요, 미주 씨.”

“관장님, 오늘 이 자리도 회장님께서 미주 축하해 준다고 만들어 주셨습니다.”

재민이 샴페인을 연희에게 한 잔 따라 주면서 하는 말에 연희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샴페인이구나. 축하하는 자리라서. 어쩐지 이이는 소주를 좋아하는데 오늘은 왜 안 보이나 했네.”

연희의 해맑은 호들갑에 조용히 웃고 있던 진우가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에 나오지는 않았을 테지만 뭐, 크게 상관있을까 싶었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에게 건배해 볼까요?”

진우의 주도로 모두 잔을 들고 각자의 방식으로 축하해 줬다.

“미주야, 네 아빠가 살아 있었으면 널 자랑스러워했을 게다.”

“우리 못생긴 미주, 이 오빠가 두 눈 부릅뜨고 너 일 똑바로 하는지 볼 거야.”

“미주 씨, 앞으로 우리 회사에서 열심히 해 줘요.”

“미주야, 축하해.”

그리고 한 사람.

“…….”

연호가 말없이 주인공을 보며 샴페인 잔을 슬쩍 위로 들었다가 놓았다.

미주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꾸벅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옆에 앉은 오빠들과 잔을 부딪치며 즐거워했다.

“근데 미주야, 사귀는 남자는 없니? 연애도 많이 해 봐야 좋은 남자 고르는 건데 말이야.”

“어머, 이건 나도 궁금해. 미주 씨 정도면 남자들이 줄을 서고도 남을 텐데.”

“네? 회장님, 제가 무슨. 없어요, 그런 거. 관장님 저 진짜 남친 없어요.”

뜻밖의 질문에 미주가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자 눈치 없는 진우가 끼어드는 게 아닌가.

“회장님, 얘 꿈도 야무지죠? 세상에, 일하라고 뽑아 놨더니 사내 연…… 으아, 아닙니다.”

“으빠, 그므해.”

미주가 어금니를 꽉 물고는 다시 하이힐로 지그시 진우의 구두를 밟으며 그의 입을 틀어막아 보았다.

‘죽을래?’

미주의 눈에서 무서운 레이저가 나오고 있어 진우도 일단 입을 다물었다.

‘남자 친구.’

진우를 제압한 미주가 고개를 살짝 돌려 재민을 슬쩍 한 번 쳐다봤다. 눈치 빠른 재민은 미주가 무슨 생각으로 쳐다보는지 아는 듯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여 귓속말을 속삭였다.

“원래 사회생활은 있어도 없다고 무조건 잡아떼야 하는 거야.”

“그럼 오빠도 사실은 여자 친구 있는데 없다고 지금 내 앞에서 잡아떼는 거지?”

“잡아떼는 건 내가 아니라 진우 형.”

“역시 서진우 나쁜 놈. 그럴 줄 알았어.”

미주와 재민이 눈을 맞추며 귓속말을 하다가 진우 험담을 하면서 웃는 게 연호의 눈에 들어왔다.

‘정재민 저 새끼랑은 또 무슨 사이라서 저리 친밀할까?’

진우와는 다른 친밀함이 두 사람에게서 보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속닥속닥 둘이서 웃는 걸 보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그래서 아직 저를 알아보지 못한 그녀를 약간 골려 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아니, 재민만 바라보고 있는 미주의 시선을 제 쪽으로 돌리고 싶었다.

“누나, 몇 년 전에 내가 잠시 학기 중에 한국에 나왔을 때 부산에 갔었던 거 기억나?”

“뭐,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는데.”

“그날, 내가 누나 페라리 몰고 나갔다가 뒤 범퍼 해 먹어서 엄청나게 욕먹었던 날이었는데, 기억 안 나?”

“그 말 들으니 언젠지 알겠네. 바보 같은 게 빌라 주차장에서 주차하다가 뭔 생각을 한다고 박았는지.”

‘부산’이라는 말에 미주의 시선이 드디어 제 쪽에 향하는 것이 느껴진 연호는 여기서 미주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연희에게 했다.

“누가 나한테 Fxxk you를 날리고 도망갔거든. 그래서 그거 생각한다고 그만. 뭐, 아무튼 간도 크지,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가 욕먹을 만한 짓을 했겠지. 아무 이유 없이 너한테 왜 그랬겠어?”

“글쎄.”

“난 네 편 안 들어 줄 거야. 네가 분명히 상대방한테 시비라도 걸어……”

연희가 한참이나 동생의 인간성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했지만, 연호는 누나의 말을 건성으로 넘기고 있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지?’

미주의 눈이 커지면서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연호가 놓치지 않았다. 느긋하게 몸을 의자의 기대면서 한 번 더 미주를 향해 샴페인 잔을 들었다. 그러자 미주가 처음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았다.

“…….”

온도 차가 분명한 시선이 서로 얽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는 낯빛이 어두워지면서 다시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빠 나, 속이 좀 안 좋아.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체한 것 같아.”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진 미주가 진우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진짜 많이 먹더라. 그렇게 많이 먹으니 당연히 체하고 소화가 안 되지. 이제 곧 여기 끝날 것 같으니까 조금만 참아 보고 안 되면 말해.”

“오빠랑 재민 오빠는?”

“우린 아마 회장님 모시고 2차 가야 할 것 같거든. 맥주 한잔 따로 해야 할 것 같아서.”

“아, 알았어.”

“혹시나 해서 요한이 스탠바이 시켰는데, 그 차 타고 집으로 돌아가. 아니, 병원 들렀다가 가.”

“아니야, 병원까지 안 가도 돼. 집에 가서 소화제 먹고 쉬면 될 것 같아.”

미주가 평소에도 병원이라면 질겁하는 이유를 잘 아는지라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주가 복통을 호소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진 회장이 타이밍 좋게 오늘의 작은 파티를 끝냈다.

“아무튼, 이 아저씨는 우리 윤미주가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네 아빠도 희주도 분명 나처럼 생각했을 테고.”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는 회사에서 한번 보자. 아니다, 너랑 나랑 아는 사이라는 게 소문이 나면 안 될 테니 지나가다 봐도 아는 척은 안 하마, 허허.”

“네.”

“아, 그리고 넌 어째, 점점 네 엄마를 닮아 가는 것 같구나. 허허.”

“그런가요?”

미주는 아빠 친구라는 재벌 회장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게 느껴졌다. 친구가 죽어도 그 딸을 이렇게 챙겨 주려고 하다니.

“그럼, 서 실장이랑 정 팀장은 나랑 맥주 한 잔 더 하러 가고. 당신은?”

“나는 미주 씨만 괜찮으면 커피나 한잔했으면 하는데, 어때요?”

“관장님, 사실은 미주가 아까 저한테 속이 좀 안 좋다고 해서…….”

눈치 없는 연희가 미주를 채어 가려고 하자 진우가 나섰다. 거짓은 아닌 말로 연희의 접근을 잘라냈다.

“너무 긴장해서 체했나 보네. 그럼 아쉽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한번 봐요.”

“네,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는 동생이랑 한잔하지, 뭐. 연호야, 너 이제 뭐 할 거야?”

“글쎄, 뭐 할지 생각 중이야.”

연호가 일부러 미주를 보면서 말했지만, 그녀는 끝끝내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피했다.

‘배가 아픈 건 핑계겠지. 쫄아서 도망가기는.’

모두가 떠난 텅 빈 테이블 위에 놓인 샴페인 잔을 집어 한 모금 삼키며 생각했다.

‘월요일부터 출근이라…….’

어쩌면 무료했던 회사 생활이 조금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연호는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누나와 커피를 마실까 했다. 아마 오늘 남매들끼리 나눠야 할 대화가 분명 있을 테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