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그리고 7년 후, 서울 (8/53)

7. 그리고 7년 후, 서울

* * *

요새 진우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사내에 그가 왜 하이 텐션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유를 아는 진 회장은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서 실장, 내가 듣기로는 미주가 자력으로 우리 회사 신입으로 붙었다고 하던데, 정말 거기에 서 실장 입김이 들어간 건 아니겠지?”

“회장님도 알다시피 미주 걔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라 제가 만약에 뒤에서 몰래 손을 써서 합격했다고 하면 저를 죽일지도 몰라요.”

“하핫, 정 팀장이 해 준 이야기가 진짜 사실인가 보네.”

이번에 차현 호텔 레스토랑에 새로운 외국인 셰프를 영입해 바다 건너온 손맛도 볼 겸해서 세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커트러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회장님, 서 실장님이 만약에 미주를 회사로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바로 어디 자리 하나 내줬겠지요. 물론 미주는 낙하산이라고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했겠지만.”

진우를 거드는 재민의 말에 진 회장은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잔에 담긴 술을 입에 댔다.

“회장님, 정말 저는 서류 전형부터 일절 관심 끊고 진짜 미주가 해내는지 지켜봤는데, 우리 미주가 또 그걸 해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조금 자랑스럽기도 하고.”

진우가 한껏 치솟은 광대를 씰룩거리면서 동생을 치켜세우는 말에 재민이 진 회장의 빈 잔을 채우며 조용히 웃었다.

“그 집안에 공부에 소질 있는 놈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야. 내 친구 놈도 그렇고 희주도 공부랑은 담쌓았던 놈이었는데 미주가 윤씨 집에서는 특출 난 인재였구만.”

“그게 다 저랑 정 팀장을 보고 커서 그런 거지 않겠습니까?”

누구를 칭찬하는 건지 모를 진우의 말에 진 회장이 껄껄 소리 내 웃었다. 덕분에 세 사람이 앉아 있는 레스토랑 VIP 룸의 분위기는 훨씬 화기애애해졌다.

“동생 바보가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에 서 실장이 있었네. 아무튼, 미주한테 내가 축하한다고 전하고 아무쪼록 회사에 들어온 이상 열심히 해서 차현에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꼭 전해 주게.”

“네, 제가 꼭 전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좋지. 아니다, 어디 보자. 흠, 내가 직접 축하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미주 얼굴 못 본 지도 몇 년 된 것 같고.”

뜻밖의 말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던 재민이 끼어들었다.

“회장님, 겨우 신입 사원입니다. 축하는 나중에 직급이 오르게 되면……”

“아닐세, 생각해 보면 사적으로 내 친구 딸이지 않은가? 아빠 친구가 회사 취직한 기념으로 밥 한번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진우가 보기엔 호의가 담긴 뜻을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듣고 보니 회장님 말씀, 틀린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희주 형도 미주, 지금 이렇게 제힘으로 뭔가 해낸 걸 보면 기쁠 테고요.”

“내가 늘 바쁘다는 핑계로 주변 사람들 챙기지 못한 거 자네가 제일 잘 알잖나? 이번에 미주 좋은 일은 함께 축하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럼 회장님 스케줄 체크한 뒤에 시간과 장소 정하겠습니다.”

진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분 단위로 약속이 있는 대기업 회장의 일정상 그렇게 쉽게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다.

미주의 차현 그룹 입사라는 기쁜 소식이 생겨도 이제는 각자 바쁜 세 사람이다 보니 그들끼리도 모여서 아직 자축을 못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억지로 서로 시간을 맞추고 맞춰서 겨우 약속을 잡았다.

“우리 모개, 뭐 먹고 싶어? 오늘은 오빠가 다 사 준다. 망설이지 말고 마음껏 말해 봐.”

“오빠, 쌀이 먹고 싶어…… 요새 어쩌다 보니 며칠 내내 밀가루 파티 중… 어흑, 밥 먹으러 갑시다! 밥, 밥! 따뜻한 고슬고슬 흰쌀밥!”

제가 혼자 사는 아파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차에 껑충 올라탄 미주가 밥 타령을 하자 질렸다는 듯 진우가 말했다.

“가시나, 밥도 안 챙겨 먹고 맨날 빵이니 과자니 먹어 댔네, 알겠어. 상다리가 휘어지게 나오는 한식당으로 가자.”

“어께이! 역시 나는 한국 사람인가 봐. 밥심으로 살아야 되는…….”

진우는 미주의 수다를 가볍게 넘기면서 재민에게 전화했다.

“재민아, 오늘 우리 동생님께서 밥이 잡수시고 싶단다. 어, 거기 알지? 전에 너랑 갔던. 거기로 넘어와. 우린 30분 정도 걸릴 것 같아.”

그리하여 미주의 바람대로 오랜만에 모인 세 명은 한식으로 저녁을 배불리 먹은 후 자리를 옮겼다. 물론 배가 터질 정도로 많이 먹는 건 미주뿐이었고, 둘은 미주의 수다를 귀가 터지도록 들어야만 했다.

“간단히 와인 한 잔씩 하고 헤어지는 건 어때요, 형님?”

“나는 뭐, 술이면 다 좋고.”

“역시 2차는 술이지, 오빠.”

미주도 어느새 20대 중반, 스물여섯 살이 되었다.

이제는 오빠들과 술잔을 같이 기울일 정도로 나이가 충분히 찼으니까. 멋진 오빠 두 명과 함께 요즘 서울에서 가장 힙하다고 하는 와인 바에 들어섰다.

“자, 우리 미주가 차현 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가 되길 바라면서, 건배하자.”

진우의 말에 세 사람은 서로의 잔을 부딪치며 셋만의 자축을 했다.

한두 잔씩 기분 좋게 오가는 와인은 분위기를 점점 무르익게 해 주었다. 약간 발그레한 볼을 가지고 흥분한 채로 면접 본 이야기, 합격 연락을 받았을 때 기쁨을 눈을 빛내면서 말하는 미주를 재민은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최종 면접 볼 때 이렇게 있잖아, 무테안경 쓰고, 머리 약간 희끗희끗했던 분이 막 나한테 질문하는데……”

“그래그래! 내 동생, 내 새끼 고생 많았다. 한때는 말썽만 부려서 저게 인간 구실은 하겠나 싶었는데…… 너 취직도 했겠다, 이 오빠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형님은 정말 미주한테는 꼼짝도 못 하네요.”

“재민아, 네가 그런 말 할 자격 없는 것 같은데?”

“아, 잠시 내 얘기부터 좀 들어 봐. 그래서 내가 딱 자신 있게 영어로 차현 그룹의 비전에 관해 이야기했지! 내가 또 캐나다 어학연수도 다녀와서 영어는 좀 하니깐, 아무튼 내 대답에 그분이 막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주야, 오빠 귀에서 피 나올 것 같다…… 벌써 그거 세 번째 이야기하거든?”

“우리 동생, 우리 모개 최고!”

다들 분위기와 술에 조금씩 취한 건지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아무 말 대잔치 속에서 진우는 미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세웠다. 미주도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세우며 화답했다. 이럴 때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면서 재민은 조용히 와인 잔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아, 맞다. 미주야, 진 회장님이 너 회사 들어온 거 축하한다고 전해 주래.”

“우와, 이젠 우리 회사 회장님인데. 뭔가 떨린다, 떨려.”

미주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너 취직하니깐 희주 형 생각도 나는 건지, 영감님이 한번 밥이나 먹잔다. 뭐, 어려운 자리는 아닐 거니깐.”

“어, 알았어. 그때 나, 캐나다 돌아와서 한번 밥 사 주신 적 있었잖아.”

“아, 그랬네! 그걸 잊고 있었어.”

“형님, 그런데 식사 자리에 회장님만 오시는 것인지.”

재민은 손에 들린 와인 잔을 천천히 빙글빙글 돌리면서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다, 느낌은 관장님까지 불러서 같이 밥 먹을 것 같기는 해. 미주도 이제 크게 보면 회사 식구니깐…….”

“그렇긴 하죠. 아, 미주가 자기 힘으로 입사 성공하면 우리 비서실로 발령 내실 거라고 저한테 말한 거 기억하시지요?”

진우는 묘하게 웃으며 미주를 한번 슬쩍 보고는 대답했다.

“내 후계자는 우리 미주이지 않겠어? 일단 적당히 대리 달 때까지는 딴 데서 굴리다가 데리고 올 생각이야.”

“뭐야? 왜 내 미래를 오빠가 마음대로 결정하는 분위기야?”

“모개야, 다 오빠가 너 좋게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 거니, 우리만 잘 따라오면 돼.”

가만히 두 남자의 말을 듣고만 있던 미주가 짜증 섞인 말로 퉁명스럽게 진우에게 대답했다.

“됐어, 처음부터 다 내 힘으로 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고 오빠도 동의해서 죽어라 노력해 회사로 들어온 거야! 토익 점수 만든다고 증말…… 그러니 일절 내 문제에 간섭하지 마! 내정 간섭이야, 이거.”

진우가 그녀의 이마를 톡 때린 후 재민을 보며 실실 쪼개면서 말을 이어 갔다.

“알어, 알어, 그래도 이왕이면 오빠들 옆에서 일하는 게 네가 편하지 않겠어?”

“참 내, 오빠들 옆에 있으면 사내 연애 같은 거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처녀 귀신으로 늙어 죽겠네요!”

“야, 재민이는 어쩌고? 사아내애 여언애애?”

갑자기 불똥이 이상하게 튄 미주가 얼굴이 새빨개져 진우를 보면서 소리를 내지 않는 욕설을 퍼부었다. 물론 그런 미주를 아주 잘 아는 진우는 입술을 읽어 내 뭐라고 욕하는지 대번에 알았지만 말이다.

‘야 이, 오빠! 진짜! 농담으로 한 말인데! 그걸 재민 오빠 앞에서! 아오, 눈치도 없이! 우리가 뭐! 아무 사이도 아닌데! 으으! 제발 좀 티 내지 마!’

아마도 이렇게 말한 것 같은 미주가 눈을 부라리면서 노려보지만, 진우는 미주를 계속 놀렸다.

“재민아, 미주 이러다가 결혼도 못 하고……”

“으아아아! 야, 서진우! 오빠는 오빠 앞가림이나 잘해! 오빠 주변에 여자들 바글바글한 거 나 다 알거든?”

미주가 진우를 놀리는 표정으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재민은 그런 미주의 모습에 그저 웃지만, 진우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모개야, 이 오빠는 말이다. 매력적이니깐, 아주 섹시하니깐, 여자들이 가만히 안 두는 거야. 그래서 사랑 찾아 떠돌아다니는 거지.”

“……!”

재민과 미주는 동시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면서. 서로 마주 보고는 썩어 들어가는 표정으로 웃었다. 피식거리면서 웃는 재민과 미주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진우는 계속 의기양양 잘난 척을 했다.

“내가 멋지고 섹시하다는 걸 이 지구상에서 부정하는 것들이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두 명이지.”

괜히 한 번 더 어깨에 힘을 빡- 주는 진우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재민과 미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에 서로 눈을 마주쳤다. 손에 든 와인 잔을 쨍- 하고 부딪치면서 잔에 남은 와인을 쭉 들이켰다.

“오빠의 저 근거 없는 자신감, 어찌 말리겠어?”

“형님 저럴 땐 그냥 우리 모르는 척하고 있자.”

“서진우가 섹시하다고? 섹시 다 죽었네.”

“일단 그렇다고 해 두자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저를 무시하거나 말거나 진우가 술도 조금 취했겠다, 마치 나르시스의 환생이라도 된 양 심취한 듯 포즈를 취하자 재민과 미주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못 살아 정말, 아으! 꼴불견이야! 안 본 눈 삽니다, 제발!”

질렸다는 외침에 진우는 일부러 더 미주를 괴롭히려고 장난을 계속 쳤다. 그렇게 한참을 투덕거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밤이 꽤 깊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자정이 다 되어 가니 이제 슬슬 자리를 파하지요.”

“뭐야? 재민 오빠, 신데렐라?”

“미주 너 너무 업된 것 같은데? 재민아, 얘 또 만취해서……”

진우가 염려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너무 과음을 한 건 아닌지 잔소리를 했다. 미주는 검지를 흔들면서 대꾸했다.

“어허이, 그때 일은 그만 언급합시다. 오빠, 나 안 취했어. 나 술 센 거 다들 알잖아?”

“그래그래, 형님, 미주 안 취했으니깐 너무 혼내지 말고 이제 그만 일어납시다.”

재민이 미주를 살살 달래며 술자리를 정리했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로비로 내려온 세 명 앞에 두 대의 검은색 세단이 있었다. 미리 호텔 쪽에 요청해 둔 대로 대리 기사들이 운전석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음, 나는 볼일 좀 보고 가야 해서…… 미주야, 재민이 차 타고 집으로 들어가.”

“역시. 재민 오빠, 진우 오빠 여자 만나러 가는 것 좀 봐.”

“…….”

대답 없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거리던 진우가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마치 그만하고 잘 가라는 듯한 제스처에 미주가 굳이 한마디를 더 붙였다.

“어장 관리 좀 하지 마!”

차에 타려던 진우는 미주의 놀림에 냉큼 다시 돌아와 뺨을 한 번 꼬집었다.

“으이구, 이걸 진짜!”

“앗! 아파. 꼬집지 마.”

“재민아, 얘 빨리 집으로 치워 버려.”

“내가 물건이야?”

“정재민, 너한테 미주 맡기고 간다.”

“네, 잘 들어가세요.”

진우가 장난 섞인 눈짓을 했다. 재민은 살짝 취기가 오른 것 같은 미주를 살살 달래면서 빨리 가라는 듯 진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재민에게 윙크를 한 번 날리고는 제 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차에 타고는 잠시 말이 없던 미주가 옆자리에 앉은 재민을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빠, 내가 진우 오빠 너무 놀린 건 아니겠지?”

“뭐, 적당히 놀린 것 같은데?”

“역시 이럴 땐 오빠는 무조건 내 편이라서 너무 좋아.”

차에 타서도 여전히 종알거리는 미주가 귀엽긴 했다. 하지만 저녁부터 이어진 미주와 진우의 끝없는 수다 삼매경에 재민도 지쳐 웃으면서 말했다.

“하아, 미주야, 안 피곤하니? 난 정말 피곤하다. 어휴, 정말 두 사람…….”

재민이 살짝 미소 지은 채 저를 다정하게 보면서 하는 말에 미주는 괜히 툴툴댔다.

“알았어, 조용히 할게. 더는 안 떠들 테니.”

미주가 삐진 척 고개를 휙 돌리며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화난 게 아니라는 걸 아는 재민은 굳이 장난스러운 침묵을 깨지 않고 피곤한 눈을 잠시 감아 보았다.

재민의 차가 미주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재민은 눈을 뜨고 차창 밖의 익숙한 풍경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약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미주를 바라봤다.

미주도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묵직하고 정숙한 차 안에서 두 뼘 거리 정도 떨어져 앉아 있던 남자와 여자가 눈빛이 마주쳤다. 함께한 지 오래된 오빠와 동생이라는 익숙한 관계.

미주의 마음이 조금 복잡해질 때, 재민이 양복 슈트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를 하나 건넸다.

“입사 선물이기도 하지만 회장님 뵐 때 입을 옷도 하나 사 입어, 이왕이면 예쁜 거로.”

“괜찮아, 나 용돈 모아 놓은 것도 많고, 진우 오빠가 준 카드도 있고, 또 오빠가 비상금이라고 준 카드도 그대로 있어. 그러니 더는 안 줘도 돼.”

재민의 카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미주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곤란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재민이 타이르듯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미주야, 네가 우리한테 신세 지기 싫어한다는 거 잘 알고 있어.”

“알면 주지 마. 나 버릇 나빠져.”

“우리 사이에 버릇이고 신세고 그런 게 어딨니?”

“…….”

“그러니깐 내 말은 가족이 주는 거는 받아도 된다는 말이야.”

차분한 얼굴로 저를 설득하는 직업이 변호사인 남자의 말발을 이길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그의 호의를 거절해 보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음을 또 한 번 느꼈다.

“가족한테 받는 게 더 미안한 거 아닌가? 내 나이가 벌써 몇인데…….”

“미주 네 입에서 나이 타령이 나오는 날이 다 오다니.”

“이제 회사도 다니겠다, 내 힘으로 내가 벌어서 뭐든지 다 하고 싶어.”

꼬맹이 미주가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철이 든 소리를 하는 건지. 재민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고집을 계속 꺾어 보았다.

“그래, 나도 네 생각 뭔지 다 알아. 하지만 내가 너 예쁜 옷 하나 사 주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너한테 부담스러운 일이야?”

“아니, 오빠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니깐 미안해하지 마. 이거 받아 뒀다가 내일이나 모레 백화점 한 바퀴 돌고 와.”

재민의 상냥한 설득에 미주는 두 손으로 공손히 카드를 받으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두 벌 살 거야. 하나는 회장님 만날 때, 하나는 처음 출근할 때 입을 거.”

“세 벌도 괜찮네요.”

“그럼 구두도 하나 좀 사 볼까나.”

재민은 미주가 말은 저렇게 해도 결코 돈을 함부로 휙휙 쓰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여운 사치 예고에 못 말린다는 듯 살짝 이마에 꿀밤을 때리는 척했다.

“아, 이마 맞았으니 가방도 하나 추가. 명품으로 살 거야.”

미주가 카드를 손에 쥐고는 팔랑거리면서 계속 종알거리는 사이 둘을 실은 세단은 미주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응.”

항상 미주를 데려다줄 때는 꼭 현관 앞까지 따라가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잊고 싶은 과거가 잊히지 않고 여전히 서울에서 두 사람을 옭아매고 있었다. 과도하게 미주의 안전에 집착하는 진우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미주.

재민이 진우의 편에 서서 미주를 이렇게 보호하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빠, 커피 한잔하고 가.”

망설임이 묻어 있는 미주의 말에 재민은 자연스러운 거절을 해 본다. 깊은 밤, 남자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많이 늦었어. 얼른 들어가서 쉬어.”

“그럼, 라면 먹고 갈래?”

“얘가 못된 것만 배워서.”

“칫, 됐어. 농담을 다큐로 받지 마.”

입이 댓 발로 나온 미주가 흥- 소리를 냈다. 등 돌린 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동작이 매우 터프해질 때였다.

“돌아갈 때 운전 내가 해야 하니, 술 깰 겸 한 잔만 줘.”

재민의 말에 미주는 빙그레 웃으며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역시 우리 바리스타님이시네.”

“내가 좀 해.”

오랜 세월 함께해서 그런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취향을 완벽히 알고 있었기에 미주가 내어 주는 커피는 언제나 맛있었다.

“미주야, 커피 믹스 줘도 되는데.”

“그래도 손님인데 인스턴트를 주면 되겠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좀 해 봤다는 미주가 집 안에 들여놓은 커다란 커피 머신을 보면서 재민이 웃었다. 그럴듯하게 맛을 낸 커피를 예쁜 잔에 담아 제 앞에 내려놓은 미주가 기특해 예뻐 보였다.

“오빠 바쁘니깐 먼저 마시고 있어. 나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편한 옷으로 갈아입겠다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 미주를 기다려 보면서. 재민은 커피 잔을 손에 쥔 채 미주가 사는 집을 찬찬히 눈으로 훑어보았다.

지난날, 두 사람을 따라 졸업 후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주도 검정고시 후 수능을 치고 대학에 막 입학했었다. 편하게 학교 다니라고 진우가 마련해 준 역세권에 있는 이 아파트에서 그동안 미주는 쭉 혼자 살았는데.

혼자 살기에는 너무 비싸고 넓기까지 한 이곳에서 미주는 진우에게 신세 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을 여러 번 받기도 했고, 아파트 앞 카페에서 꽤 오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기도 했었다. 물론 가끔 말을 안 듣고 사고 칠 때도 있었지만.

“아, 나도 너무너무 피곤해. 하이힐 좀 신었다고 이렇게 다리가 아프다니.”

“미주야, 저기 보니 액자는 역시 여전하네?”

“어, 내 보물인 거 오빠도 알잖아. 엄마가 갓난쟁이 나를 안고 찍은 사진에 직접 메모까지 써 놨잖아. ‘사랑하는 내 딸 미주’라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미주가 머리도 질끈 묶은 채 소파에 털썩하고 앉으며 기억도 없는 엄마와의 추억을 소중하다는 듯 끌어안았다.

“근데 지금 보니 미주가 애기 미주를 안고 있어.”

“그렇지? 정말 핏줄은 무서워. 엄마한테서 지금의 내 얼굴이 보이니깐.”

뒤늦게 미주도 커피를 한 모금 음미하며 웃고 있을 때 재민이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미주야, 근데 여기 회사랑 멀지 않을까? 이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글쎄, 일단 다녀 보고 너무 힘들다 싶으면 그때 회사 근처로 이사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 그러면 되겠다. 참, 차는 필요 없니? 안 그래도 형님이 직장 다니면 차 필요한 거 아니냐면서 나한테 물어보던데?”

“차는 아직 필요 없어. 장롱면허라, 아직은 대중교통이 훨씬 편해.”

“그럼 형님한테 설레발 좀 치지 말라고 내가 말해 놓을게.”

“오케이, 셰셰, 따거.”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포권으로 주먹 쥔 손과 손바닥을 몇 번 흔드는 미주의 모습이 귀여웠다. 늘 무표정하고 조용한 재민마저 살짝 웃음기가 올라왔으니 말이다.

“뭐야,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어와 중국어의 콜라보는?”

“윤미주 언어야.”

재민이 조금 피곤하다는 듯 안경을 벗고는 눈이 휘어지게 웃는 걸 보면서 미주는 생각했다. 안경 너머 숨겨진 얼굴 속, 소년같이 해사하게 웃는 표정을 아는 여자는 오직 저 하나였으면 좋겠다는 미묘한 마음. 그런 달콤 쌉싸름한 감정 속에서 재민은 눈치도 없이 정말 커피를 번개같이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셨어, 미주야. 이제 가 볼게. 나도 내일 출근해야 하니 지금도 많이 늦었다.”

“알았어, 오늘 데려다줘서 고마워.”

“너도 일찍 자.”

이만 가 보겠다고 작별 인사를 하는 재민이 다시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 이지적인 외모로 늘 잔잔하게 제 옆에 있어 주는 사람.

돌아가겠다는 재민의 눈에 뭔가 불만족스러운 것 같은 미주가 보였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렇게 화가 났을까?”

“화를 내긴 무슨. 아니야.”

“아닌데, 내가 보니 너 지금 나한테 짜증 난 거 있는데?”

재민의 추궁에 미주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의외의 말을 변화구로 던졌다.

“나 이제 취직했어. 다 컸다는 소리야.”

“좀 더 커야지. 이왕 취직했으니 실수도 해 보고 칭찬도 받고 승진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러다가 결혼도 못 하고 늙어 죽겠네.”

“사내 연애가 꿈이라며?”

재민은 알고 있었다. 미주가 감정적으로 불안해지거나 힘들 때마다 마치 자신에게 도망치기 위해서 이렇게 한 번씩 돌려서 물을 때가 있다는 걸. 아마도 첫 사회생활을 앞둔 미주가 알게 모르게 많이 불안하고 긴장하고 있는 거로 생각했다.

“오빠도 같은 회사니깐 그럼 오빠랑 사내 연애 하는 건가?”

“너 하는 거 보고.”

“됐네요. 나는 오빠보다 더 멋진 남자나 찾아봐야지.”

오고 가는 농담 속에 섞인 진심을 재민도 미주도 모를 리 없었다. 저를 흘겨보면서 투덜거리는 미주의 마음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받아 줄 수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더는 들추지 않고 모르는 척하는 과거와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오빠와 동생이 아닌 남자와 여자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재민은 미주의 차갑게 식은 뺨을 한 번 사랑스럽다는 듯 만지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뒤돌아 현관문을 열고 미주의 집을 빠져나갔다.

미주는 재민이 떠난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침실로 들어갔다. 술도 마셨고, 저녁 내내 턱이 아플 정도로 오빠들과 수다를 떨어서 정말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재민 오빠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계속 나를 거절할 거면 차라리 확실히 밀어내 줬으면 좋겠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불 꺼진 침대에서 재민과의 관계를 되짚어 봤다.

‘뜨거운 물.’

분명 감정이라는 뜨거움은 있지만, 흐르지 못하고 고요하게 머물러 있다 여겼다.

20대 중반이 다 되어 가도록 뚜렷한 진전이 없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사이. 재민에게 가끔 마음을 표현해도 돌아오는 건 아직 어려서 안 된다는 대답뿐이었다.

“내 나이가 벌써 스물여섯 살인데, 이것도 어리면 대체 나이가 얼마나 더 들어야 한다는 걸까?”

부산에서의 그 일은 완전히 아물지 못한, 덮어 두고 모르는 척하는 상처였다. 좀 더 어릴 때는 재민이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 게 혹여 제가 더럽혀져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자괴감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 생각에 스스로 상처 입은 적도 많았지만, 재민은 절대 그리 생각하지 않으리라 믿으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무던히 노력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서서히 지쳐 가는 중에 오기가 생겨났었다.

“그래, 알잖아? 어쩌면 내가 다 망친 거라는 걸.”

* * *

언제였더라?

모두 다 같이 만나기로 했던 어느 날,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갑자기 진우가 일이 있어서 약속을 펑크 내는 바람에 재민과 둘이서 신나게 먹고 마셨던 그날.

무슨 바람이었는지 평소에는 절대 취하지 않을 정도로 절제하던 재민도 그날은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미주도 마찬가지였고.

아무리 연애에 경험이 없는 미주라고 할지라도 남녀 간의 연분홍빛 분위기 정도도 캐치하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성인이 되었고, 재민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의 존재도.

저보다 어렸던 대학교 여자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었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면 같이 자고 싶어 하는 거라고.

‘미주 언니, 아무리 수도승 같은 남자라도 여자가 벗고 유혹하면… 글쎄요, 난 솔직히 넘어갈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맞아요, 한번 사는 인생 맨날 남자가 먼저 다가와 주길 기다려야 하나?’

‘그래, 맞아. 때론 육탄 공세로 확- 내 남자로 만드는 거지.’

미주는 그저 대답 없이 눈만 깜빡이며 동기들의 이야기를 귀를 쫑긋 세워 듣고만 있었다. 이어지는 쓸데없는 음담패설들. 나는 몇 명이랑 자 봤느니, 걔랑 한 번 잤었다는 따위의 이야기들.

자신도 평범한 여자였다면 어쩌면 지금쯤 대학 생활을 만끽하면서 그 또래들이 하는 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캠퍼스 커플을 해 보거나 동아리의 멋진 남자 선배를 흠모해 보거나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열렬히 사랑에 빠졌을지도. 그리고 가슴 떨리는 첫 경험 같은 것.

정재민, 재민 오빠.

어린 시절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던 사람. 그의 아내가 되는 상상을 하면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이 지금 옆에 있었다. 아마도 비슷한 감정을 품은 채 오랫동안 곁을 지켜 주면서.

‘오빠도 아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날 원하고 있을 거야.’

그래서 그렇게 용기가 났을까? 정말 재민을 유혹해 보고 싶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왕 더럽혀진 몸, 남자랑 한번 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저를 집 앞에까지 데려다준 취해 있던 재민을 어설프게 유혹하다니.

‘오빠가 날 거부하진 않을 거야.’

아마도 재민은 제가 이런 행동을 하리라 상상했다면 집 문턱을 절대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재민의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에 미주도 술기운을 빌어 그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잠깐 들어왔다 가.’

어두운 거실에서 미주는 떨리는 손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열었다. 천천히 옷을 벗으면서 잠들어 있던 그 안의 남자를 일깨워 봤다.

‘오빠, 날 여자로 만들어 줘.’

‘……미주야,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니?’

놀라움과 당혹감 그리고 어쩌면 그 안의 욕망까지도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저를 보던 시선. 남자의 뜨거운 눈길이 얼굴을 지나 목덜미와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걸 느꼈다.

‘응, 알아. 나 이제 성인이니깐 괜찮아.’

재민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블라우스를 벗었다. 떨리는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안경을 벗겨 내며 숨겨진 사춘기 소년의 얼굴을 마주했다.

손을 뻗은 재민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미주의 턱 밑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연약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묘한 감각에 눈빛이 혼란스럽게 흔들리면서 살짝 입술을 벌리는 미주의 시선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재민이 천천히 얼굴을 숙이자 미주가 들릴 듯 말 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빠, 좋아해.’

재민이 입술 바로 앞에서 살짝 멈칫했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양손을 가슴께까지 올리고 이러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우리는 이러면 안 돼.’

‘왜? 오빠도 날 좋아하는데…….’

‘아직은 아니야.’

재민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미주가 벗어 놓은 블라우스를 집어 들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일은 없었던 거로 하자. 서로 취해서 실수한 거로 생각하는 거지.’

브래지어만 입고 있는 미주의 어깨에 블라우스를 걸쳐 주면서 몸을 가려 준 재민이 고개를 돌려 저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미주는 보았다. 늘 점잖았던 재민이 자괴감으로 무너지는 얼굴을 안경으로 가리며 본디 이지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후 재민과 미주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서로 언급하지 않고 없었던 일처럼 그렇게 묻었다. 물론 예전과 똑같이 사이좋은 모습으로 잘 지내고 있지만, 미주는 알고 있었다. 남녀 관계로는 재민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적어도 제가 포함된 술자리에서는 오만 핑계를 대면서 술을 마시지 않거나 마시더라도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다 단둘이 있게 되어도 재민은 절대로 선을 넘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 사이는 전과는 다른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미주도 재민도 그 벽을 무너뜨리려고 하진 않았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두려웠을지 몰랐다.

* * *

“이미 몇 년 전 일이고 서로 없던 일 취급 하던 날이었으니깐 더는 생각하지 말자.”

잠깐 재민과의 일을 생각하던 미주가 머리를 세차게 몇 번 저으며 생각을 떨쳐 냈다.

“남자라, 사랑이라. 대체 그게 뭘까?”

사실 재민도 그리 좋은 남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순히 저에게 잘해 주는 거로만 따진다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이겠지만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차현에서 진우 오빠랑 재민 오빠가 뭔가 이상한 걸 잔뜩 해서 돈 엄청나게 벌었다는 거 알고 있잖아?”

나쁘게 말하면 둘에게 기생해 돈 걱정 없이 편히 사는 자신에게 환멸이 느껴졌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내가 깡패 동생인 건 변하지 않네.”

그리고 진우가 저를 위해서 해 줬던 복수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똑같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천하의 나쁜 년이지.”

흠뻑 젖은 눈으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다시 제 침대로 돌아온 미주가 협탁 첫 번째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 후 물과 함께 마셨다. 이젠, 잠이 잘 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미주가 불면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재민도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씻기 위해 샤워기 아래 섰지만 이미 몸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가운 물로 이 갈 곳 없는 열을 식혀 보려 애써 보지만 쉽게 꺼지지 않아 괴로웠다.

미주를 여자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이리 오래전부터 그녀는 여자였다. 그래서 가끔 저를 붙잡는 눈빛에 간신히 막아 둔 이성의 댐이 툭- 하고 터질 것 같아 가능하면 미주와 단둘이 있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제 뜻대로 될 순 없었기에 오늘도 마음을 표하는 미주를 뿌리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 테스트였다.

“안 돼, 더는 생각하면 안 돼. 이러면 위험해.”

미주를 욕망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배덕함이었다.

하지만 고삐가 풀려 버린 제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백 번도, 수천 번도 미주와 몸을 섞었다. 아래로 피가 몰렸다. 눈앞에서는 음탕한 요부의 얼굴을 한 미주가 저를 유혹하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건데.”

끓어오르는 욕정 속에서 미주를 생각했다.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 때까지 쾌락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느다란 손목을 꽉 움켜쥐고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묶어 두고 싶었다.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과 뜨거운 한숨 소리와 질척이는 에로틱한 마찰음까지. 제 손에 젖어 든 여체를 핑크색으로 만들 수 있다면.

“하앗…….”

짧은 신음을 토해 내면서 주먹을 쥐고 욕실 벽을 몇 번 쳤다. 하지만 갖지 못하는 걸 원하고 있는 몸은 하얀색 욕망을 분출하고도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미친 새끼…….”

혐오스러운 자신에게 몸서리가 쳐졌다. 동생을 탐하는 배덕하고 모럴 없는 개새끼가 바로 저라는 걸 미주가 영원히 몰랐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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