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늘이 불타던 날
* * *
으리으리한 옛 양반집 같은 고즈넉한 한옥 안에 그리 고운 얼굴은 아니지만 낭랑한 목소리를 지닌 여자가 한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여자는 앞에 앉은 중년 남성들에게 멋들어진 한 곡조를 뽑는 중이었다.
그 중년 남성 중 하나인 차현 그룹 진수오 회장은 술을 음미하며 눈을 감고 창기倡妓의 노랫가락을 감상해 본다.
‘그래, 모름지기 한국인이라면 이런 소리여야지. 암.’
문지방이 닳도록 자주 오는 이 요정의 좋은 점은 맛있는 음식도, 어여쁜 기생들도 아닌 이 멋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조선 시대에 태어난 주색을 밝히는 한량 양반인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한 번뿐인 인생,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흥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이제 슬슬 각자의 파트너들과 자리를 파할 무렵이었다. 요정의 깊은 안채 문 앞을 지키던 김 기사로부터 전갈이 들어왔다.
“회장님, 아까부터 계속 부산에서 왔다는 어떤 놈이 자꾸만 회장님을 뵙고 싶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무슨?”
“그게 사실은 희주랑 친했던 놈이라 저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회장님께 알려는 드려야 될 것 같아…….”
희주가 죽고 부산에서 자신을 찾을 이가 누가 있으려나 싶을 때였다.
“희주랑 가까운 놈이라, 누군가 알 것 같기도 하고.”
진 회장은 대충 짐작되는 이가 있어서 김 기사에게 지시했다.
“흠…… 여기 별실로 들여 줘, 김 기사.”
“네, 회장님.”
진 회장은 같이 자리를 즐기던 높으신 분들께 인사를 한 후 옆에서 술 시중을 들던 계집과 같이 빠져나왔다.
“너, 호텔에 먼저 가 있어.”
“회장님. 금방 오실 거죠?”
“당연한 소릴, 어서 가서 내가 좋아하는 거 준비하고 있어.”
“알겠으니 빨리 오세요.”
교태 어린 화류계 여자 목소리를 뒤로하며, 진 회장은 부산에서 온 젊은이가 기다리고 있을 별실로 발길을 돌렸다.
“회장님,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전에 부산에서 뵌 적 있는 서진우라고 합니다.”
별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눈 밑에 점이 있는 사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바닥에 머리가 닿을 듯 인사를 한 후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제 짐작대로였다. 이젠 손 털고 의사 나부랭이를 하겠다던 그놈. 희주의 오른팔이자 그의 친동생과도 같다고 한 새파란 애송이. 그리고 호랑이의 눈빛을 감추고 있던 남자.
“안 그래도 희주 녀석 그리 가고 나서 자네를 한번 보자고 할 참이었는데. 때마침 여기까지 다 와 주고 말이야. 그래, 서울 구경은 좀 했나?”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서울에 와서 계속 회장님 뵙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흠, 이 늦은 시간에 부산에 사는 자네가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용케 알고 찾아왔군.”
진 회장의 뼈 있는 한마디에 진우의 눈빛이 빛났다.
“사내놈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 알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우의 당돌한 대답에 진 회장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좋아! 그래, 불알 두 쪽 달린 놈이라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좋아, 그럼 나도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내게 뭘 부탁하러 온 건가?”
역시 진 회장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러니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차현을 먹은 거겠지. 아무리 바지 회장이라도 말이다.
진우는 힘을 줘 한 글자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힘, 힘이 필요합니다.”
“힘이라… 힘에는 종류가 많지. 그중에서 자네가 어떤 힘이 필요한지 궁금하군.”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형형한 눈빛을 내는 사내에게 물었다.
“사람 한둘 죽여도 죄를 물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죄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이 갖고 싶습니다.”
진우는 진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원하는 걸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것은 도박이었다. 자신이 가진 패를 모두 내보이면서까지 진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다. 그랬기에 어쩌면 무리수일지도 모를 가장 센 단어를 그 입에 올리며 진 회장의 호기심을 자극하려 했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겠다던 자네가 왜 사람을 죽이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힘이 너무 약해서, 아니 힘이 없어서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미주가 당했을 끔찍한 일들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꽉 물고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힘을 빌려주는 건 문제가 아니야. 얼마든지 빌려주지. 단, 내 힘을 빌릴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자네, 각오는 되어 있는가?”
진 회장은 그런 진우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한 번 웃고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제 목숨이 필요하시다면 몇 번이라도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나는 아직 자네 목숨은 필요 없다네. 진우라고 했나?”
“네.”
“자네를 주겠는가?”
“받아만 주신다면 회장님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결연한 의지를 온몸으로 뿜어냈다.
“사실 원래는 희주가 필요했었는데 이제 희주는 없고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중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희주의 대타라도 기분 나쁘지 않다면 그 자리 한번 넘보고 싶지 않나?”
“회장님, 저는 무슨 뜻인지, 회장님의 깊은 뜻을 알기에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진우의 겸손한 발언에 진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오히려 반문했다.
“의대생이 무식하다면, 나 같은 원래 나이트클럽 하던 집 아들은 죽으라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하하, 알아. 농담일세.”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진 회장이 제 무릎을 한 번 탁- 치고는 조금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릇 사내라면 말이야. 이 세상을 지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지. 어때? 나와 함께 이 대한민국, 쥐락펴락해 볼 생각 있는가?”
“……!”
너무 뜻하지 않은 말에 진우의 얼굴이 살짝 동요되면서 굳었다.
“이거 너무 놀란 얼굴인데. 내가 필요한 건 믿고 쓸 수 있는 내 사람, 그게 필요하지. 그렇지만 자네는 아직 내가 믿을 수 있는지, 실력은 있는지 검증이 되지 않아서 말이야. 희주의 친형제나 다름없다는 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제가 어떻게 하면 회장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본론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 역시 정공법으로 진 회장에게 물었다.
“스스로 증명해 봐. 메스를 쥐려고 했던 그 손에 다시는 메스를 잡지 못하게 되겠지만. 자네 투지를 보여 줘. 일명 불도저 아니었나?”
진 회장의 선문답 같은 말 속에 담긴 저를 시험해 보고자 하는 뜻을 알 것 같았다.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것도 좋지만, 제가 사는 동네 하나 평정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겠지요, 회장님.”
“하나를 보면 열을 아니까, 그 하나를 보여 주면 돼.”
그 정도 답이면 충분했다. 진 회장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조만간에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천천히 큰절을 한 번 하고는 자리에서 빠져나오려는 순간, 진 회장이 무거운 목소리를 냈다.
“아까 밖에서 봤던 김 기사를 내려보내겠네. 이런 뒤처리에 아주 잔뼈가 굵거든.”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할지 예상하기에 돕겠다는 의도를 알 것 같아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은 참 추워, 부산은 이 정도까진 아닌데.”
진 회장과 헤어지고 밖으로 나와 보니 차가운 서울 밤공기가 폐 속까지 들어왔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 뺨을 스치는 바람이, 숨 쉬는 공기마저 모두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을 다시는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설령 죄를 지어야 한다고 해도 난 웃으면서 죄를 짓겠어.’
담배를 천천히 입에 물며 생각에 잠겼다. 스스로 선택한 이 어둠을 걷는 게 기분이 좋아 진우는 웃었다.
아니, 울었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 * *
지금 이곳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좆 같은 새끼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지.”
진우가 펼쳐 놓은 거미줄 같은 정보망과 인맥으로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 일대를 뒤지고 뒤져서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던 놈들을 찾는 데 성공했다. 병신같이 일부러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교란하더니 턱밑에 숨어 있었다니. 다른 곳도 아니고 일본으로 가려고 한 게 코미디였다. 거기로 가면 제 칼날을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모양인데 뛰어 봤자 손바닥 안이라는 걸 왜 모를까?
재민은 진우의 서울행 목적에 대해 알고 난 뒤 제가 알던 진우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맞는지 헷갈리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라도 뒤바뀐 것 같았다. 악을 응징하기 위해 스스로가 악인이 되는 걸 마다하지 않는 진우의 살의에 재민마저 두려워지고 있을 때였다.
분노에 찬 진우의 목소리가 소금기 가득한 공기에 섞여 들렸다.
“이 씹새끼들, 지옥이 뭔지 내가 보여 줄 테니 지금부터 잘 봐 둬.”
재민의 눈에 처음 보는 남자가 들어왔다. 이 참혹한 광경을 마치 관람하듯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고 있었다. 비싼 양복에 피라도 한 방울 튈까 봐 염려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민은 양복 입은 남자, 아니 김 기사를 흘낏 보다가 진우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이 새끼들을 잡기 위해서 형이 진 회장의 힘까지 빌리다니.’
우리나라에서 현재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재벌도 아니고, 이제 막 재벌에 끼워 줄까 말까 한 규모인 기업의 수장 정도만 돼도 이렇게 쉽게 공권력을 주무를 수 있음에 탄식했다.
오늘 여기 부산항 창고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은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해 경찰에 신고한다 한들 그들은 출동하지 않을 테고.
그러니 재민은 진우가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걸, 말없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미주를 윤간한 놈들은 이런 끔찍한 짓을 당해도 싸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진우의 처음 보는 서슬 퍼런 모습에 겁을 먹고는 그저 이 잔인한 폭력을 마치 영화라도 보는 듯 멍하니 관람하고 있을 뿐이었다.
재민이 두려운 눈빛을 내며 숨죽이고 있을 때, 진우는 이놈들을 그냥 죽일 수는 없었다. 미주가 겪어야 했을 지옥 같았던 고통 그대로, 아니 몇 배는 더 돌려줘야만 했다.
“개호로 새끼들, 이 정도도 생각 안 하고 그런 짓을 했을 리가. 감히 날 건드리고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겠지?”
창고 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사람들의 신음으로 가득 찼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그곳이겠지…….’
한 놈이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고문을 당하던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놈은 고통을 견디지 못한 건지 아니면 죽은 건지 이내 축 늘어졌다. 미주를 만져 댔을 더러운 양손을 산 채로 잘라 내 버렸으니 기절할 만도 했다. 아니, 죽을 만하려나?
“으어어어……!”
머리를 염색한 놈의 손이 잘리는 걸 지켜본 눈이 큰 놈은 뭐라 뭐라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혀가 이미 잘린 터라 그저 돼지 멱따는 소리만 꽥꽥 질러 댈 뿐이었다.
“크크큭, 새끼야, 넌 눈알을 하나씩 뽑아 줄 테니 좀만. 응? 차례를 기다려.”
진우는 눈이 큰 놈이 꾸엑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악귀처럼 낄낄낄 웃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벌써 겁을 먹으면 안 되지.”
잠시 숨을 가다듬은 진우는 이 모든 일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잔나비의 오른팔을 자처하던 얼굴에 흉터가 있는 놈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저놈을 어떻게 요리해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아, 이 새끼 벌써 죽어 버렸네. 재미없게, 쯧쯧.”
아쉽게도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놈이 몸의 구멍에서 피라는 피는 다 뿜어내며 죽어 버린 것 같았다.
“죽었습니다, 형님.”
“겨우 사지 두 개를 잘랐을 뿐인데 이리 쉽게 죽다니. 지혈이라도 하면서 더 가지고 놀아야 했는데, 약해 빠진 새끼.”
진우 패거리 중 넙치라고 불리는 놈이 의자에 묶여 있던 머리가 노란 놈의 숨이 끊어진 걸 확인했다. 넙치는 놈의 결박을 풀어 드럼통에 꾸깃꾸깃 시체를 담았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진우는 몸을 돌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놈의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를 직접 뜯었다. 천천히 다가가 눈이 큰 놈의 혀를 잘랐던 피 묻은 칼로 그의 얼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 좆만 한 새끼야, 이젠 네 차례야. 어떻게 죽여 줄까? 응? 한번 말해 봐.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근데 그건 알아야 해. 절대로 쉽게는 못 죽어.”
얼굴에 흉터가 있는 놈은 낄낄낄 웃으면서 진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진우는 침을 닦아 내며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너는 내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아주 조각조각 내줄 거야, 걸레처럼.”
계속 웃기만 하던 얼굴에 흉터가 있는 놈은 점차 웃음을 멈추면서 비아냥거렸다.
“서진우… 너 그거 아냐? 그년 말이야… 윤희주 동생…….”
얼굴에 흉터가 있는 놈의 입에 미주가 오르는 순간 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변했다.
“뚫린 입이라고 이게 어디서!”
“난 또 너랑 정재민 그 새끼가 벌써 따먹은 줄 알았지…… 병신 같은 새끼, 그 맛있는 년을 아직도 안 먹다니.”
“…….”
퍽 하고 소리가 났다. 진우가 패거리 중 하나가 손에 들고 있던 야구 배트를 뺏어 쥐고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놈의 머리를 터뜨려 버렸다.
“학교에서 농담으로 교수가 사람 머리가 깨질 때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난다고 하더니 얼추 비슷하네, 씨발.”
머리가 터져서 눈이 반쯤 튀어나와 버린 놈은 끝까지 혀를 놀리며 계속 지껄였다.
“크으… 그년 아다…… 내가… 뚫……!”
두 번째로 퍽- 소리가 났다. 그러나 놈은 끝까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야… 크흑… 내가 왜…… 그년… 안 죽였는지…… 크흡…… 커… 컥…… 날… 죽여도…… 커헉…… 그년은 이제… 죽지도 못… 하고 기억…… 커억…… 크흡…… 그게, 너한테…… 할 가장… 큰 복수…….”
머리가 반쯤 터진 놈이 마지막까지 세 치 혀를 놀렸다. 그러자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진우는 온 힘을 다해 배트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완전히 터트려 버렸다.
머리라고 불리는 것을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때까지 배트로 때리고 또 때리고 짓이겨 버렸다. 뇌수가 흘러넘치고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다 못해 칠갑이 되고 있었다.
사람의 몸에서 저리 많은 피가 나올 수 있을까?
재민은 악귀 같은 모습의 진우를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놀랍도록 평온한 얼굴과 얼어붙은 눈동자를 한 남자가 진우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언제나 허허실실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그의 본성이 바로 이 모습일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무서워지고 있었다. 피를 온몸에 뒤집어써 새빨간 형체를 가진 짐승이 바로 오랫동안 저와 형제처럼 지냈던 진우라니.
재민이 복잡한 번뇌에 사로잡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수라는 이름의 살육을 그저 방관하고 있을 때. 피 칠갑을 한 진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만하면 내가 죽어서 지옥에서 다시 희주 형 만났을 때 고개 들 수 있겠지?”
“……고개만 들겠어요? 희주 형이 한 소리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너무 손이 독했다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고.”
어쩌면 재민의 뼈 있는 말에 진우는 살짝 눈썹을 움직이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참혹한 심판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저 멀리서 이 광경을 매너리즘에 빠진 표정으로 보고 있던 김 기사가 다가왔다.
“미리 정박시켜 둔 배가 있으니 대충 정리하고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물론 김 기사는 끔찍할 정도로 퍼져 있는 피비린내가 역하다는 듯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말했지만 말이다.
놈들의 명줄이 모두 끊어진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현재는 진우를 따르는 입이 무거운 동생 서넛까지 달라붙어 증거 인멸에 힘을 보탰다. 진 회장의 힘을 빌린 이유이기도 했던 드럼통과 콘크리트, 그리고 작은 선박과 휘발성 냄새가 물씬 풍기는 수상한 말통 여러 개.
“…….”
동이 트려고 하는 새벽녘, 조금 흔들리는 배 위에서 진우는 새까만 바다를 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사람을 살리려고 손에 피를 묻히려고 했는데, 이젠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돼 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죄와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피 냄새.
‘그래도 후회는 안 해. 미주를 위해서 내가 저지른 일은 정당한 복수였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오른손으로 빼내 힘껏 바다로 내던졌다.
배에 실려 있던 드럼통 세 개가 바닷속으로 사라진 후 조금 가벼워진, 그들 모두를 실은 배가 다시 육지로 향할 때였다.
진우와 재민은 저 멀리서 해가 뜨지 않았음에도 불타오르는 붉은 화염을 보았다.
아마도 죄를 지은 그곳은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불길 속에 소멸하게 될 것이다. 지옥의 염화炎火는 진우와 재민의 죄와 미주의 상처까지 모두 끌어안고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고.
주황빛으로 물든 광경을 보며 재민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하늘이 불타는 광경을 여전히 방관하고 있을 때 진우가 입을 열었다.
“선짓국이 먹고 싶어.”
“…세상에, 형. 조금 전까지 본 게 잊히지도 않았는데 선지라니요…….”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우는 살짝 미소 지으며 재민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어깨동무를 한 두 사람이 뜨거운 침묵 속에 눈빛을 교환했다.
저 바다에, 저 화염 속에 모든 걸 묻고 불태워 보면서.
* * *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여전히 시작하고 있었다.
병실 침대에서 잠결에 눈을 뜬 미주의 옆에 팔짱을 끼고 머리를 꾸벅이며 잠든 진우가 있었다.
“…오빠, 돌아왔구나…… 나 계속 오빠 기다렸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곁을 지키고 있는 이를 보다가 미주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러다 밝은 햇살 때문에 더는 자기 어려워질 때 다시 눈을 떴다.
“일어났어?”
“응, 오빠, 서울에서 언제 온 거야?”
잠이 덜 깬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는 미주가 이불 속에서 왼손을 쏙 꺼내 진우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손을 잡아 달라는 귀여운 신호에 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투박한 손으로 미주의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
“며칠 전에 내려왔는데 일이 좀 있어서 병원엔 못 왔어. 미안해.”
미주는 제 손을 잡아 주는 진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마음의 짐을 내려 둔 것 같은 평온한 표정을 보았다.
제 짐작이 맞다면.
텅 빈 것 같은 진우의 눈동자를 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억지로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잠투정하는 척했다.
“아으, 힘들어. 더 자고 싶드아.”
“내년이면 스무 살인 말만 한 애가 징그럽게 잠투정이니?”
“아, 어른이 빨리 되고 싶어. 그럼 이 잔소리 안 들어도 될 텐데.”
늘 그렇듯 진우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막내티를 냈다.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러운 오빠라는 위치와 동생이라는 위치.
미주가 하품하면서 기지개를 쭉 켜는 걸 보면서 진우가 입을 열었다.
“역시 깊게 잠들면 귀신한테 업혀 가도 모르는 우리 모개, 잠이 그리 많아서 학교는 어떻게 다니는지.”
진우가 제 코를 한 번 꼬집으면서 하는 말에 아프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 큰 소리로 짜증을 냈다.
“아, 좀. 지금 환자잖아. 자꾸 코 그렇게 하면 코 모양 안 예뻐진다니깐!”
“이미 태어날 때부터 못생긴 모과인데 뭐 어때?”
“아 씨, 가! 오빠 가!”
미주는 울 것 같은 얼굴을 숨긴 채 진우에게 등을 보이며 흥- 소리를 내면서 돌아누웠다. 잠시 말이 없던 진우가 미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달랬다.
“우리 모개, 삐졌어?”
“…….”
“미주야, 아픈데 화내면 더 아프니깐 화내지 마. 오빠가 다 잘못했으니깐.”
돌아누운 미주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모든 게 제 잘못이라는 남자는 아마 자신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안했고, 모든 게 제 탓이라 여겨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차라리 그냥 죽었으면, 내가 죽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왜 살아 오빠를 고통 속에 빠뜨린 걸까?’
미주는 바싹 마른 입술로 진우를 보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오빠…… 고마워…….”
“뭐가…….”
“그냥, 다 고마워…….”
미주의 마음이 느껴지는 진우 역시 가슴이 아팠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일부러 장난기를 발동해 놀렸다.
“주어가 없으면 뭐가 고마운지 모르는데?”
“……몰라, 그냥 대충 알아들어. 고마워, 오빠.”
“아악! 못 듣고 있겠다! 낯간지러워! 가시나, 약을 잘못 먹은 거 같은데? 모개한테 이상한 약 준 의사를 그냥 조져 놔야.”
“앗싸, 내가 이겼다!”
“참 나, 뭘 또 이기고 자시고야?”
“흥, 됐어. 내가 이겼어.”
입술을 삐죽거리며 저를 놀리는 미주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똑같은 죄를 더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말했다.
“모개야, 넌 웃는 게 이뻐. 그나마 웃어야 못난이 네 얼굴이 그나마 봐 줄 만하거든? 그러니깐 오빠가 최선을 다할 테니까. 미주 너는 그냥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 주기만 하면 되는 거다, 알겠어?”
“…….”
“이 가시나가 오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우리 진우한테 약 준 의사 누구야? 완전 맛 갔는데? 크크큭, 완전 낯간지러워, 크크큭.”
미주가 웃음을 꾹 참으며 저를 놀리면서 말대꾸를 했다.
진우는 한숨을 푹 쉬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나아진 기분이었다. 이래야 우리 미주지. 암, 이래야 사랑하는 내 동생이지.
“이게 오빠한테 진우라고? 아오, 진짜 너는 좀 맞아야 인간이 돼, 응? 맞아야 한다고.”
진우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소매를 걷어붙여도 미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 우리 진우.”
심지어 약을 살살 올리기까지 하자 진우는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진짜 너를 상대해 주는 내가 미친놈이다, 미친놈.”
“알면 됐고, 아무튼 나 오늘은 어리광 마음껏 부릴 거야. 노래 불러 줘, 오빠.”
“갑자기 또 뭔 노래?”
“그거 있잖아, 옛날에 우리 같이 살 때 내가 잠 올 때마다 맨날 불러 줬던 그 노래.”
미주가 중얼거리는 걸 진우는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딱, 오늘만이야.”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박자를 타듯이 손등을 도닥이면서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작은 소리를 흥얼거렸다.
* * *
늦은 밤 재민은 심란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미주가 퇴원하고 더는 학교에 가지 않고 있을 때, 진우는 남포동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후 세력을 서면까지 넓히고 있었다. 마치, 한때 의사를 꿈꿨던 서진우는 세상에 없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내일이 없는 모습으로 어둠에 삼켜진 것 같았던 그가 놀랄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서울에 갈 거야. 차현 그룹 진 회장 밑에서 일하기로 했어.’
‘…형님, 역시 그 일만 도움받은 게 아니라…….’
‘알고 보니 진 회장이 사냥개가 필요했더라고. 그래서 내가 충직한 그의 케르베로스가 되려 하는데 말이야.’
‘…….’
‘머리 세 개 중 하나는 네가 좀 맡아 줘야겠어.’
진우의 말은 이러했다. 미주와 먼저 서울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을 테니 너는 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했으면 한다고 말이다.
‘저야 어차피 사시 준비하려면 노량진이 편하긴 한데, 미주는 몇 달만 있으면 수능을 쳐야 하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형님 따라 이렇게 서울에 가면 학교를 그만둬야……’
‘미주랑은 이야기 끝났어. 자퇴하고 나랑 서울 간다. 근데 너까지 자퇴시킬 수 없으니 대충 졸업장만 따고 올라와.’
재민은 진우의 말에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네, 형님만 믿고 따를게요. 사시 무조건 붙을 테니 같이 차현 그룹의 문지기 역할 어디 한번 해 봅시다.’
* * *
요사이 취업 준비생들에게는 차현 그룹이 가장 입사하고 싶은 곳 1위로 입소문이 나고 있었다.
복리 후생과 친사원적인 그룹 분위기와 더불어 한번 차현맨이 되면 차현에서 끝까지 제 식구를 책임진다는 미담들이 언론들을 통해 종종 알려지면서 그룹의 주가는 날이 갈수록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매년 신입 사원 공개 채용 기간이면 많은 인재가 차현 그룹으로 몰렸다.
물론 한편에서는 현재 차현 그룹의 이미지에 속으면 안 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차현맨의 꿈을 꾸는 인재들은 그곳을 갈망했다.
차현 그룹 전략실.
이미 전략실은 차현의 후계자로 공공연하게 알려진 차연호가 차기 그룹 회장이 되기 위해 발판으로 쓰는 곳이었다. 그러니 전략실로 발령이 난다는 건 차기 회장의 수족이 되기 위한 엘리트들을 모으는 곳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차현 안에서도 가장 비밀에 싸여 있는 조직이 있었다.
진수오 차현 그룹 회장의 비서실.
비서실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여성은 한 명도 없다는 그곳은 사내 발령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암암리에 도는 소문으로 회장의 눈도장을 받은 선택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비서실은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숨겨진 제2의 전략실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곳에 그들이 있었다.
진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비서실의 가장 핵심 인물, 비서실장 서진우와 진 회장 직속 법률 담당으로 비서실 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변호사 정재민.
그리고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당연한 듯 오빠들을 돕기 위해, 죽은 아버지의 친구가 회장으로 있는 차현으로 입사할 예정인 윤미주까지.
네 사람의 인연이 운명처럼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