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침전
* * *
“모의고사, 나는 나쁘지 않았어. 수현아, 너는 어때?”
“나도 저번이랑 비슷해, 미주야. 조금이라도 올랐으면 했는데 역시 과탐이 문제야.”
“아, 문과생은 과탐 때문에 죽습니다. 특히 물리! 너무 싫어!”
“미주야, 나는 수학도 문제다, 아흑.”(현재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2003년입니다.)
모의고사를 치렀던 어느 날, 미주는 가장 친한 친구 수현이와 학교 근처 분식점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사 먹으며 오늘의 시험이 어땠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빠를 떠나보낸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본분인 학업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저만큼은 번듯한 좋은 대학을 가는 게 죽은 오빠의 소원이었다.
이제 몇 달만 더 고생하면 수능을 치고 원래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서울이든, 어디로든 대학을 들어가 부산을 떠나고 싶었다. 물론 성적이 이대로 쭉 유지만 되면 말이다.
“미주야, 너 지금 이대로면 인서울은 문제없겠는걸? 아, 좋겠다. 나도 서울로 가고 싶은데 난 성적이 간당간당해.”
“수현아, 할 수 있어. 우리 늘 이야기했던 대로 같이 서울로 가자. 학교는 달라도 같이 살면서 서울에서 스무 살을 맞는 상상을 해 봐.”
“그래, 서울말 쓰는 자상하고 멋진 남자 선배랑 연애도 해 보고 싶다.”
“수현아, 그것도 그거지만 화끈하게, 응? 클럽 가서 술도 마셔 보고, 남자랑 데이트도 좀 해 보고.”
“그렇지, 미주야. 우리 20대 청춘을 서울에서 불살라 보는 거야.”
여고생들의 대화는 으레 그렇듯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하듯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한참을 재잘재잘 별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하다 보니 해는 저물고 날이 꽤 어둑해지고 있었다.
미주는 분식집을 빠져나와 아이스크림을 하나 입에 물었다. 친구와 같이 가는 길까지 걷다가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에서 안녕을 고했다.
“낼 봐, 안뇽, 빠이.”
“굿베이, 친구쓰.”
두 여고생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미주는 더 늦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현이와 헤어진 곳에서 집까지는 천천히 걸으면 30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모의고사를 치는 날에는 늘 수현과 군것질을 하고 노래방을 가거나 하는 식으로 놀았기에 재민에게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길가에 모아 둔 양이 적어 보이는 종량제 봉투의 빈틈에 쏙 하고 넣었다. 그 뒤 늘 하던 대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오늘은 무엇을 들으면서 집에까지 갈까나?’
잠깐 멈춰 서서 MP3 목록을 쭉 훑어보다가 맘에 드는 음악을 플레이했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음악에 살짝 우울한 미소를 지으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봤던 서울 촌놈, 부자인 것 같던데.’
뻐큐를 날리고 도망치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너무 쫄아서 서울말을 쓰던 키가 큰 잘생긴 남자가 저를 쫓아올까 봐 숨어 있다가 보고 말았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제가 봐도 너무나도 비싸 보이는 말 그림이 그려진 스포츠카.
‘역시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 그 서울 촌놈이 어떻게 오빠를 알고 찾아온 걸까?’
그날 이후로 멀끔했던 그 서울 남자와 희주가 자꾸 오버랩되었다.
‘우리 오빠도 그런 좋은 옷을 입고 머리도 넘겼으면 진짜 멋졌을 텐데. 우리 오빠도 그런 좋은 차를 타고 다녔으면 누구보다도 더 멋졌을 텐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리에 마치 돌덩이라도 매달린 양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오빠… 나는 너무 억울해. 오빠가 그렇게 죽은 게, 오빠가 그런 것도 못 해 보고 죽은 게. 정말… 너무…….’
누가 건드리면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저 빨리 집으로 가서 이 느낌을 다 씻어 내고 싶었다. 그랬기에 어느 순간 뒤를 따라오는 인영들에 대해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이어폰까지 끼고 있어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느덧 해는 완전히 저물고 세상은 어둠으로 물들 시간이었다.
발이 닿는 길가와 주택가 골목마다 붉은색 가로등이 하나씩 켜졌다. 가난한 동네에는 왠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기만 했다.
골목을 돌아 한 블록만 더 가면 되기에 미주는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늘 다니는 길에 흉물스럽게 방치된 공사 중단 건물을 괜히 한 번 올려다봤다.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팻말이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다.
‘여기 몇 년 전인가 5층짜리 건물을 올리던 사람이 부도를 내고 도망갔다고 오빠가 이야기해 줬던 것 같은데…… 아니, 진우 오빠가 얘기해 줬나?’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은 사람을 방심하게 했다. 아직 완전히 어둡고 위험한 깊은 밤도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그렇듯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그저 걷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야, 윤희주 동생.”
“……?”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림자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음악을 듣던 미주가 기척이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오른쪽 이어폰을 귀에서 빼려는 찰나. 그것은 직감이었다.
“너, 윤미주 맞지?”
이어폰을 빼자 제 이름을 부르는 낮고도 음흉한 목소리가 들리며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도망가야 해! 소리를 지르고 빨리 도망가야!’
위험한 육감에 온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커다란 손이 미주를 덮쳤다.
“읍! 읍!”
아뿔싸, 제가 가던 길 앞에도 누군가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뒤에서 말을 건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겨 앞을 미처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아니,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 자신을 노렸다는 걸 처음부터 생각하지도 못했다.
꼼짝없이 담배 냄새가 잔뜩 묻은 남자의 손에 입을 틀어막혀 목소리를 빼앗기면서. 아무리 외쳐도 더러운 남자의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살려 달라는 소리를 그 누구도 듣지 못했다.
“오빠들이랑 재미 좀 보자고, 응? 이쁜 윤미주.”
미주의 눈에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놈 하나. 얼굴에 칼자국 같은 흉터가 있는 놈 하나. 그리고 얼굴을 보지 못한 지금 자신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놈 하나. 총 세 놈이라니.
두려움에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눈을 굴리면서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쓰고 생각을 해 보려 해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쭉 살았던 동네에서 납치라니. 억지로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몸부림을 칠 때 머리를 염색한 놈이 주머니에서 뭘 꺼내는 게 보였다.
‘안 돼!’
청 테이프의 휘발성 냄새가 역하게 코로 들어왔다. 입이 막혀 버린 미주가 온몸으로 발버둥을 쳐 보지만, 얼굴에 흉터가 있는 놈이 다가와 제 양손을 힘으로 붙잡았다. 그러자 머리를 염색한 놈이 다시 테이프로 양손을 못 움직이게 칭칭 감아 완전히 결박시켰다.
그 뒤 몸을 더듬거리면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미주가 보는 앞에서 발로 밟아 버려 박살을 내어 버렸다.
‘안 돼, 제발. 살려 줘! 핸드폰이 없으면 경찰을 부를 수가, 오빠들을 부를 수가! 안 돼!’
눈앞에서 가루가 되어 버린 핸드폰을 보면서 두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미 그들에게 꼼짝없이 잡혀 버렸기에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몸을 옥죄고 있던 놈이 머리채를 잡더니 저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미주의 눈에 조금 전 지나쳤던 흉물스러운 건물이 들어왔다. 유치권 행사 중이라던 그곳, 5층 건물.
다리에 힘이 풀려 걸을 수가 없었지만, 머리채를 잡은 놈은 아랑곳없이 미주를 끌고 갔다. 몇 번이나 휘청이며 계단을 강제로 오르면서 바닥에 넘어졌다. 긁히고 쓸려 다리에 피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극한의 공포로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버렸을 때.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빈 건물에 달빛이 비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미주는 깊은 좌절감에 완전히 절망해 버렸다.
차라리 날 죽여 줘. 제발.
“산삼보다 좋다는 고3을 잡아 왔으니 먼저 한번 맛봐야지?”
머리를 염색한 놈이 끔찍한 농담을 웃으면서 하자 눈이 큰 놈이 킬킬대는 게 보였다.
‘아, 저놈이 아까 뒤에서 날 붙잡던 놈이구나. 그럼, 여기서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놈이 제일 대장인 건가? 아니야…… 뭔가 저 노란 머리가…….’
어차피 이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기에 이들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려 했다.
만약 여기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어떻게든 목숨은 부지하게 된다면, 이놈들을 다시 찾으려면 알아야 했다. 이놈들의 얼굴을.
미주는 두 눈으로 악다구니를 쓰면서 놈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너희들을 죽일 거야. 내가 죽는다면 죽어서라도 복수할 거야. 그리고 내가 안 된다면 진우 오빠가, 진우 오빠가 안 된다면 재민 오빠가 해 줄 거니깐, 그러니깐.’
악에 받친 제 눈빛을 읽었는지 얼굴에 흉터가 있는 놈이 다가왔다.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부릅뜨고 있는 미주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처음으로 입을 뗐다.
“난 윤희주 그 눈깔이 참으로 맘에 안 들었는데. 지금 보니 이 씨발년도 똑같은 눈깔을 가졌네…….”
퍽- 하고 놈이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별이 번쩍이면서 뺨에 차가운 콘크리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코에서 뜨거운 게 흐르는 느낌과 동시에 다른 놈들도 합세했는지 금세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주의 정신이 고통 속에서 천천히 가물거릴 무렵 손 하나가 교복 치마 사이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안 돼! 안 돼! 차라리 죽여 줘! 차라리…… 날 죽이라고! 제발, 내 몸에 손대지 마!’
아무리 절규하고 외쳐도 비명은 청 테이프로 막혀 버린 입술을 뚫지 못했다. 미주는 끔찍한 감각을 오롯이 느끼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진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온종일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다.
며칠 전 원숭이 새끼 몇 마리가 동네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주변을 경계해 보지만, 아직 별다른 일은 없었다.
충무동에 심어 놓은 애들 말로는 잔나비 쪽 놈들이 ‘진우에게 복수하겠다.’, ‘진우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해 줄 테다.’라고 했다던데.
피라미 몇 마리가 자기 상대가 되겠냐면서 가소롭게 넘겼던 진우였다. 얼마 전에 있었던 충돌에서 개박살이 나 버린 잔나비 패거리들이 부들거리면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좀 이상한 얘기가 충무동에서 들어왔다. 죽은 윤희주가 알면 저세상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라든지, 윤희주가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날 거라든지. 이상하고도 찝찝한 이야기들.
이상했다. 아무래도 나쁜 예감이 들어서 종일 미주에게 전화를 해 보지만,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지금쯤이면 학교에 있을 시간이니깐 전화를 못 받는 게 당연하겠지.’
잠시 고민하다 재민에게 전화했다.
‘오늘 미주 모의고사라고 하던데요? 오후 5시는 넘어야 연락될 건데 형님, 무슨 일 있나요?’
“아니, 그냥…… 미주가 요새 통 연락이 없길래 그냥 생각나서 전화해 봤지.”
재민의 물음에 차마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다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재민아, 일단 미주랑 연락되면 이따가 저녁쯤이라도 집에 조신하게 잘 들어가 있는지 네가 좀 살펴봐.”
‘알겠어요. 저도 수업 끝나는 대로 미주한테 연락해 볼게요.’
재민이 알겠다면서 전화를 끊자 진우도 괜한 기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미주가 연락을 해 오거나 재민이 연락을 줄 때까지 일단은 얌전히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몇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몇 번이나 미주의 학교 앞이나 집으로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주를 생각하면 자꾸만 그날 밤, 민희를 찾아가 밤새도록 의미 없는 섹스를 했던 기억이 떠올라 이상하게 마음이 켕겼다. 그래서 재민의 연락을 불안한 마음으로 계속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해가 완전히 저물고서야 재민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혹시나 해서 전에 미주가 준 열쇠로 문 열고 집 안까지 들어가 봤는데 미주가 없어요. 혹시 무슨 일 있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재민이 넌 일단 미주가 가 볼 만한 곳 빨리 다 찾아봐라. 미주 찾으면 빨리 전화하고. 나도 나가서 찾아볼게.”
‘네, 알겠어요. 일단 미주 친구한테 연락을……’
“안 된다. 미주 친구들한테는 절대 연락하지 마. 재민아, 사실은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든다…… 최대한 우리끼리 미주를 찾아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드니깐 암튼 시키는 대로 하고 나도 애들 풀어서 빨리 동네부터 샅샅이 뒤질 테니 전화해라.”
실수였다. 미주에게 사람을 붙여 놓지 않은 작은 실수가 큰 폭풍처럼 휘몰아 닥칠 것만 같았다.
희주 형이 알면 저승에서도 눈을 못 감는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에게 복수하겠다는 이야기. 이 두 개는 분명 연관이 있었다.
‘내 눈에서 피눈물이 날, 형이 알면 눈을 못 감을 일이라…….’
확신할 수 있는 불안감에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희주도 진우도 그간 절대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다. 그런데 그 새끼들이 미주에게 할 수 있는, 차마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일은 뻔했다.
‘미주가 위험해. 분명히, 분명히!’
진우는 급히 밖으로 나와서 미친 듯이 미주의 집으로 향하던 중,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놈들이 미주를 납치하기로 작정했다면 미주의 생활 반경을 분명히 관찰해 알아 뒀을 것이다. 제가 누군가를 납치하려고 마음먹었어도 그리했을 테니깐.
‘그놈들이 아무리 간이 커도 학교 근처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쉽게 접근할 수 없었을 거야…… 그렇다면, 집에 가는 길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걸어서 늘 다니는 길… 마음을 놓고 방심할 수 있는 늘 다니던 길, 거기에 뭐가 있을까, 뭐가…….’
이미 차로 미주를 납치해 버린 상태라면 부산을 벗어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빨리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이라면 나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는 무엇일까.
‘나라면 멀리 안 가. 일부러 내 영역에서 사고 치는 거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걸 보란 듯 일을 저지를 거야. 나라면 그렇게 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진우의 머릿속에 한 곳이 떠올랐다. 예상이 맞다면, 그리고 아직 그놈들이 부산을 벗어난 게 아니라면, 일부러 가까운 곳에서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면.
“여보세요, 재민아! 거기, 거기부터 먼저 확인해 봐! 미주 집 근처의 거기! 건물 짓다가 만 곳! 김 사장이 부도내고 튄 그 건물! 거기부터 먼저!”
전화를 끊은 재민은 원래 가려 했던 곳을 뒤로한 채 일단 진우가 지목한 그곳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진우가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주를 찾는 모양새가 필시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보였다.
자초지종을 듣지 않아도 재민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고 있었다. 빨리 미주를 찾지 않으면 분명히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는 걸 말이다.
“헉-!”
진우가 알려 준 흉측한 모습으로 서 있는 건물로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무언가를 보았다. 부서진 것 같은 핸드폰의 잔해 사이로 보이는 눈에 익은 핸드폰 케이스와 줄이 헝클어진 이어폰.
그건 바로 제가 미주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사 준 거였다.
“……!”
불빛 하나 없는 콘크리트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끔찍하게도 진우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한 듯했다.
미주가 여기에 있다는 직감 속에 아직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어 미칠 것 같았다.
재민이 흡사 짐승 같은 모습으로 한 층 한 층 샅샅이 살피며 미주를 찾아 헤매다 어떤 작은 그림자에 그만 두 다리가 굳고 말았다.
“미주야! 미주야! 나야, 재민이! 제발 눈을 떠!”
피투성이가 된 채 덩그러니 콘크리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미주를 재민이 부둥켜안고는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는 미주의 모습에 아연실색하면서 덜덜 떨리는 손을 미주의 목덜미에 가져가 보았다. 희미하지만 맥이 뛰는 게 느껴졌다.
‘하느님, 부처님, 미주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하다며 눈물을 삼켰다. 엉망진창이 된 미주를 살펴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놈들이 돌아왔나 싶어서 살기를 품고 뒤돌아보는 순간 어둠 속이었지만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장승처럼 우뚝 서서 미주를 내려다보고 있는 진우의 얼굴에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형…….”
“살았으면 됐어, 그거면 충분해.”
진우는 재민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없이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피범벅이 된 미주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듯 조심히 안아 들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재민이 룸미러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진우를 한 번 힐끗 바라봤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차가운 눈동자를 한 그가 피투성이가 된 미주를 품에 꼭 안고는 얼굴을 계속 닦아 주고 있었다.
진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던 재민은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병원이 이제 바로 코 앞이었다.
응급실은 굉장히 부산스러웠지만 갑작스러운 환자의 내원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의료진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얼굴로 중상을 입은 미주를 살펴보다가 진우를 불러 조용히 물었다.
“폭행 사건이라 경찰을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아니요. 경찰 필요 없습니다. 경찰 부르기만 해 봐, 씨발, 여기 다 엎어 버릴 테니까.”
진우의 험악한 말에 그에게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말한 의사가 표정이 파리하게 변하며 자리를 피했다. 의료진들도 진우가 만들어 내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미주의 상태를 체크하며 서로 눈치만 볼 때였다. 간호사가 우물쭈물 다가와 이야기했다.
“저, 보호자들은 잠시…… 지금 커튼을 좀 칠 거라서…….”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커튼을 쳤다. 잠시 후 콜을 받고 내려왔는지 피곤한 얼굴의 의사가 커튼으로 들어갔다. 의사 가운의 가슴께에 수놓인 글자를 재민은 똑똑히 보았다. ‘산부인과’. 그나마 여자 의사라 왠지 다행일 것 같았다.
“형…… 도대체 왜…… 미주한테 왜…….”
이 모든 상황에 기가 막힌 재민이 말까지 더듬으면서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진우는 조용히 웃으면서 재민의 말을 막았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너무나도 무겁게 가라앉은 진우의 목소리에 재민은 입을 다물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그 어떤 말도 서로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재민과 진우는 일인실로 옮겨진 미주의 곁에서 말없이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지금은 미주가 깨어나는 게 최우선이었기에 진우와 재민 모두 병실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다.
진우는 이미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미주를 윤간한 놈들을 수배하는 중이었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제 동네에 몰래 들어온 원숭이 새끼 세 마리를 찾으라 지시해 미주의 고통을 숨겼다. 그 새끼들 몸값은 진우가 아주 후하게 쳐줄 것이라고 소문을 냈는데 조건은 바로 ‘반드시 살려서 원숭이 새끼들을 제 앞에 잡아 올 것’이었다.
재민은 조금 놀라웠다. 그저 부산에서 주먹깨나 휘두른 희주 형 밑에 있던 진우가 언제부터 다른 지역과도 교류하고 있었던 건지. 그리고 그를 도울 수 있는 인맥들이 각지에 포진해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제가 알던 진우는 술을 좋아하고, 호탕하면서도 입이 조금 거칠긴 하지만 번뜩이는 머리로 기지를 발휘해 내는 희주 형의 오른팔이었는데.
‘어쩌면 내가 알고 있던 형의 그 모습이 본모습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희주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 진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민은 미주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진우의 얼굴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병실을 옮기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될 무렵 마침내 미주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런데 깨어나면 상처 입은 제 모습에 소리를 지르며 울고 절망할 거로 생각했던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담담했다.
“오빠, 오늘 무슨 요일이야?”
미주의 첫마디에 담긴 의연함에 진우와 재민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금요일, 심지어 오늘 13일의 금요일이야.”
“그래? 서양 귀신이긴 하지만 밤에 나가면 안 되겠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미주의 평범한 일상 언어가 두 남자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래, 살았으면 됐다. 그거면 충분해.’
진우는 늘 그렇듯 미주와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지만, 가슴속에 담긴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한편 미주가 의식을 되찾고 하루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미주가 약 기운에 취해 자고 있을 때 진우가 재민에게 조용히 말했다.
“재민아, 잠시 서울에 다녀와야겠다. 그동안 네가 미주 옆을 절대로 떠나지 말고 지키고 있어.”
“네, 형님. 그런데 미주가 아직 누워 있는데 갑자기 왜 서울에…….”
“그건 다녀와서 말해 줄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미주의 안위를 부탁한 진우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병실을 빠져나갔다. 재민은 혼자 미주의 옆을 지키지만, 진우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형이 절대로 미주의 옆을 떠날 사람이 아닌데… 미주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서울이라…….’
무서운 얼굴을 한 진우는 홀로 서울로 올라갔다. 저를 보스 대하듯 따르는 동생 중 그 누구도 데려가지 않고 말이다.
한참을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던 재민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시 의자에서 눈을 붙일까 싶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지만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잠도 쉽게 오지 않았다.
“…….”
아주 잠깐 졸았을까 싶을 때 누군가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고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주가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조는 모습 좀 더 구경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너라도 누가 훔쳐보는 건 왠지 싫어.”
“아…… 약점 잡기 대실패네.”
재민은 최대한 평소대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잘 먹고 잘 자야 빨리 낫지. 어때? 배는 안 고파?”
“응, 별로. 입맛이 없어.”
“너처럼 잘 먹는 애가 입맛이 없을 리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오빠가 나가서 사다 줄게.”
재민의 눈에 미주의 얼굴은 예전과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분명 전과 다르게 어색하고 어두워 보였다.
“됐어, 그냥 병원 밥이 맛이 없는 거야.”
“…….”
아마 놈들에게 맞아 붓고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 고통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마음의 통증을 견디며 아닌 척, 괜찮은 척 노력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가슴이 아팠다.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인 여자애가 겪기에는 너무나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것도 어쩌면 자신들 때문일지도 모르는 이유로 죄 없는 어린 소녀가 무참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미주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지 신이 있다면 재민은 묻고 싶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도 매정하고도 잔인한 것이냐고.
그렇지만 저는 감히 물을 자격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는가?
병상 침대에 반은 눕고 반은 걸터앉아 멍하게 저를 바라보는 미주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괜찮다는 듯 평소대로 머리를 몇 번 쓰다듬자 갑자기 미주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흑흑…….”
갑작스러운 미주의 행동에 재민은 당황했지만, 침대에 걸터앉아 천천히 손을 올려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눈을 뜨고 지금껏 한 번도 울지 않던 미주가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흐느껴 울고 있었다. 재민은 토닥토닥 그저 등을 두드려 주며 가만히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주의 울음소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슴 아프게 병실 안을 채우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품에 안긴 미주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이제 다 틀린 거지?”
“무슨 소리야? 아직은 어려서 안 되는 거지. 나중에…… 나중에, 좀 더 크면 그때 오빠한테 와.”
“……그래도 돼?”
“너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야. 커서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웬 놈 데리고 와서 시집보내 달라고 울고불고 떼쓰지나 마셔.”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어쭈? 방금까지는 나랑 결혼한다더니 또 딴 놈한테 가겠다?”
재민이 웃으며 미주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때렸다. 미주는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지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환자를 때리다니 너무하네! 정말.”
“성질은.”
제 이마를 미주의 이마에 살짝 부딪치면서 장난스럽게 인상을 썼다. 미주도 그제야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과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그 모습이 재민의 눈에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고.
“오빠, 근데 진우 오빠는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아…… 볼일이 좀 있다고 서울에 좀 다녀온대.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아마 형 금방 올 거야.”
“서울? 거긴 왜 갔지? 뭐, 아무튼 알았어. 오빠, 나 많이 울었더니 머리가 띵해… 잠도 오고…… 나 잘 때까지 옆에서 손 좀 잡아 주면 안 돼?”
“당연한 소릴.”
재민이 손을 잡아 주자 미주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제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듯 이내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