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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산 가시나와 서울 촌놈 (5/53)

4. 부산 가시나와 서울 촌놈

* * *

아직 영업 시작하기 전이라서 그럴까?

시끄러운 소리가 잔뜩 울려 퍼져야 할 텐데 왠지 모르게 조용했다. 넓은 홀 안에는 조명만 울긋불긋 돌아가고 있었고 진우는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기 클럽은 원래 희주가 뒤를 봐주고 있는 곳이었지만 잠시 진우가 맡고 있었다. 물론 이곳을 봐주기 위해 학교를 휴학한 건 아니었다.

희주를 잃은 진우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잠시 의사가 되려고 했던 걸 한 템포 늦추기로 한 것이었다.

‘형은 언제나 시끄러운 게 싫다고 그랬는데, 인생은 참 웃겨.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여기 클럽은 명목상으로는 희주가 관리하는 곳이었다. 사실 그는 이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저 ‘윤희주가 이곳에 있다.’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일 수 있었다.

진우는 희주가 욕심이 없는 게 늘 불만이었다.

그는 보통 수컷들이 영역을 확보한 후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세상에서 말하는 ‘나쁜 짓’들에 대해 큰 반감을 느끼며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깡패치고는 혼자 고결해 마지않은 모습이 형으로서는 존경스러웠는데.

조직의 우두머리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짓을 그만두고 의사나 돼 볼까 했는데, 다시 여기에 앉아 있다니.’

불만을 느끼고 있다는 걸 희주가 알게 되는 게 싫었다. 조금씩 쌓이고 있는 ‘내가 형보다 잘 끌어갈 수 있을 텐데.’ 같은 마음이 형제와도 다름없는 둘을 갈라놓을 수 있다, 여겨 진우는 어둠에서 빠져나왔다.

온전히 희주가 왕이 되길 희망하며 제가 다른 세계로 가는 게 옳다 여겼는데. 이런 식으로 친형제나 다름없었던 희주를 잃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었다.

‘형이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이 손에 메스가 아니라 칼을 들고 피를 묻히고 온갖 더럽고 비열한 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하지만 세상에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 따윈 생기지 않았다. 비어 있는 잔에 다시 술을 붓는 진우의 곁에 하나둘씩 따르는 무리들이 다가와 무어라 속삭였다.

“…이 원숭이 새끼들.”

희주가 죽은 이후로 충무동 잔나비 패거리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조용히 그쪽을 예의 주시 하던 중에 점점 작은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진우가 얼마 전에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불도저는 몇 년 쉬었어도 기량은 여전했다.

그 후로 충무동 쪽은 잠잠해진 듯해 겨우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그 뒤 조용히 희주의 사고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정말로 형의 죽음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교통사고일까? 차라리 누군가가 형을 제낀 거라면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 수가 있을 텐데, 형의 복수를 해 줄 수 있을 텐데. 정말로 사고라니…….’

너무나도 허망했다.

‘형, 나는 아직 형을 보낼 준비를 하지 못했어. 아니, 아직은 못 보내.’

괴로운 마음에 얼굴을 감싸 쥐며 마른세수를 하던 진우는 문득 며칠 전 이마에 닿았던 미주의 손길이 떠올랐다.

“가시나, 일부러 세게 탁-, 하고 때리면서 반창고를 붙이다니.”

이따금 통화는 했지만, 한동안 미주를 보기 괴로워 만나지 않았다. 아니, 내버려 두고 있었다. 재민을 통해서 미주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미주야, 널 만나게 되면 희주 형의 빈자리가 다시금 느껴질 것 같았어.’

어려서부터 셋은 친남매처럼 자랐다. 그런데 가장 큰 버팀목이었던 희주는 어느 날 갑자기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이제 남은 두 사람은 희주의 빈자리를 채워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했지만 말이다.

너무나도 큰 상실감에 빠진 진우는 미주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나약한 모습을 미주가 목격하고는 원망의 말이라도 들을까 봐 겁이 났었다. 그랬기에 제 역할까지 재민에게 모두 미루고 미주의 곁에서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

“병신 새끼.”

저 멀리 도망가기로 했으면 끝까지 도망쳐야 할 텐데.

왜 나는 마치 그 자리가 제자리인 양 돌아오게 되는 걸까? 희주 형을 잃고 울고 있을 네 모습을 보는 게 무섭고 겁이 나서 아주 멀리 도망가려고 했는데.

진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빤 다음 천천히 몸을 소파에 기댄 후 며칠 전을 떠올렸다.

그날은 충무동 애들을 제압한 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미주의 집 앞이었다. 현관 앞에서 차마 그 문을 열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었다. 셋이서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기억된 그곳으로 왠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면 미주 너는 깔깔대면서 웃고, 옆에서 그런 너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희주 형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셋의 시간은 행복했던 순간인 상태로 진우 안에 멈춰 있어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씨발, 충무동 그 새끼들 때문에 다쳐서 이렇게 아픈 거라고.’

멍하게 어릴 적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품 안을 뒤적거리자 라이터가 손에 잡혔다. 간신히 입에 담배를 물고 힘겹게 손을 뻗어 불을 붙이자 타들어 가는 담뱃잎 향에 왠지 살 것 같았다.

‘죽기 전에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갔으면,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희주를 생각하며 두 눈을 감아 보지만.

‘눈을 감아도 형이 이제 보이지 않아… 그렇게 오랜 시간 우린 가족이었는데, 어떻게 형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는 거지? 형, 뭐라고 말 좀 해 봐…….’

왠지 눈가가 촉촉해지는 기분이었다. 다 큰 사내 녀석이 눈물이라니. 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뜨지만 이미 얼굴은 물기가 가득했다.

‘한 대만 더 피우고 가자, 자고 있을 건데 깨울 필요는 없겠지.’

라이터를 철컥거리며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작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있었다.

“오빠?”

꼬맹이 껌딱지 미주가 언제 저렇게 컸을까?

“오빠, 얼굴이 이게 뭐야? 또 싸운 거야?”

자주 보던 풍경이었다. 언제나처럼 저는 잘못을 저지르고 미주는 늘 저를 혼낸다. 그게 바로 익숙하고 편안한 우리 두 사람의 관계. 말 많고 시끄러운 잔소리꾼에 성질 고약한, 모과같이 못생긴 윤미주.

‘나는 널 동생으로 평생 생각하고 살 거야.’

미주는 과연 알까? 자신이 왜 의대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는지를.

진우는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날 왜 민희를 찾아가 밤새도록 안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약인 경우가 많으니까, 굳이 몰라도 되는 걸 일부러 들춰 낼 필요는 없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 * *

“요새 매형 기분 별로 안 좋으니까,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미국으로 들어가.”

“매형이 날 싫어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번에는 왜 또 저기압일까?”

학기 중에 생긴 짧게 쉴 수 있는 시간에 일부러 한국에 들어왔는데. 아버지 장례식 이후 오랜만에 만난 누나가 식탁에 앉자마자 하는 말에 연호는 인상을 팍 구겼다.

“너도 알지? 매형이랑 엄청 친했다던 그 죽은 친구 아들, 걔가 몇 달 전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잖아.”

“근데 그 아들이 죽은 거랑 매형 기분이 좆 같은 게 무슨 상관이라서 누나가 밥상머리에서 이러는 건지.”

연호의 입에서 상스러운 단어가 나오자 연희는 마주 앉아 있는 동생의 손을 한 번 찰싹 때리면서 눈을 흘겼다.

“너, 누나 앞에서 말버릇이 그게 뭐니? 품위를 좀 지켜. 남사스럽게.”

연호가 알겠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앞에 놓인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연희도 동생처럼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치? 나도 좀 이상해서 알아봤는데 남편이 그 친구, 서울로 데려올 생각이었나 봐. 너도 소문 들었겠지만, 남편이 지금 있는 비서실 직원들, 싹 다 다른 곳에 발령 내고는 뭔가 꾸미고 있잖아.”

“아, 안 그래도 들었어. 매형, 우리 견제하려고 군대를 만들고 있다더니, 비서실에 다 모아 둘 생각이었나 보네.”

연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있으니깐 걱정하지 마. 어차피 차현 그룹 회장은 결국 네가 될 거니깐.”

누나와 회포를 푼 연호는 차현 그룹 계열사 호텔의 프레지던트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학교 때 미국 유학길을 떠난 이후로 한국으로 돌아오면 아버지와 살았던 집으로 향했지만, 차현 그룹 회장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혼자서 그 큰 집에 있기 싫었다. 그렇다고 누나 부부가 사는 집에 잠시 얹혀 있기에는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았고.

그래서 누나에게 호텔 방 하나 비워 달라 부탁했고, 연희는 동생을 위해 객실을 마련해 줬다.

“이름이 윤희주였어.”

긴 비행의 여독을 풀고자 연호는 욕조에 느긋하게 몸을 담근 채 서울 시내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저녁에 누나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오래전 있었던 죽은 자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한국 나이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잠시 들어온 서울에서 그를 만났었다.

“매형이 부산 촌놈 서울 구경시켜 준다길래, 나도 얼떨결에 따라나섰다가 한 소리 들었지.”

키가 컸던 희주는 남자답지 않게 눈매가 굉장히 유려하게 아름다웠다.

저보다 다섯 살이 많아, 그때는 성인이었던 그가 피우던 담배가 솔직히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매형 몰래 담배를 하나 달라 말했는데. 희주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연호라고 했지? 새파랗게 어린 놈이 벌써 담배는.’

사람들은 제가 재벌 3세라는 걸 알게 되면 그때부터 늘 설설 기었다. 그런데 저를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봐 주던 편안함 덕분에 아직 기억 속에 희주가 남아 있었다.

“유학 끝나면 한번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자 하더니, 그쪽이 먼저 죽으면 어떡해?”

어쩌면 다시 만났을 때 저와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랐던 희주의 뜻하지 않은 죽음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누나가 달맞이 고개랬나? 해운대에 별장처럼 쓰는 집이 있으니 부산에 오랜만에 한번 다녀와야겠어.”

매형이 호위 부대로 부르려고 했던 그 남자는 살아 있었다면 아마 제 적이었겠지만.

일부러 매형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한번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웃었다.

굳이 목적에 대해 처음부터 진실하게 알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누나에게는 이렇게 말해 보면서 말이다.

“해운대에 가서 바다도 보고, 여자도 좀 꼬셔서 놀아 보려고.”

“얘가 진짜!”

물론 연희는 동생의 등을 후려치며 못된 것만 골라서 한다고 욕하긴 했지만 말이다.

[영락공원입니다. 부산 금정구……]

누나의 비서에게 부탁해 윤희주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덕분에 누나도 제가 부산에서 어디로 향했는지 알겠지만, 다시 서울로 올라가 왜 거기에 갔는지 설명하면 아마 제 뜻을 알 것이다.

“영락공원?”

해운대 바다가 보이는 달맞이 고개의 어느 고급 빌라 안에서 늦은 아침잠을 깼다. 연호는 핸드폰에 찍힌 텍스트를 보고는 피곤한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직접 운전해서 가 볼까? 근데 거기는 또 어디래?”

당연히 서울 토박이인 연호는 해운대나 광안리, 이런 곳만 돌아다녔기에 조금 떨어진 먼 곳까지 가려니 솔직히 귀찮은 마음이 들긴 들었다.

침대에서 꽤 오래 꼼지락대다가 결국 오후쯤 돼서야 몸을 일으켰다. 뭔가 알 수 없는 이끌림 같은 게 느껴져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누나의 해운대 별장에 주차되어 있던 이탈리아제 스포츠카를 몰고 조금 요란스럽게 가장 조용해야 할 곳으로 향했다.

“납골당이라.”

소탈하게 웃던 윤희주와 어울릴 만한 조용한 이곳에서 안식을 얻었겠지.

평일 대낮의 납골당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납골당 안으로 들어가 희주의 이름을 찾아내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일부러 찾아오길 잘한 거 같아. 반대로 내가 죽었어도 윤희주 네가 이렇게 나를 찾아왔겠지?’

어차피 고인과 친분이 두터워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도 제 행적을 주시하고 있을 매형에게 한 번 스친 인연이긴 해도 이 정도의 애도를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계산된 생각으로 왔다.

그때 제 옆에 누군가 다가와 발을 멈췄다. 그리 넓지 않은 곳이라 두 사람이 서 있기만 해도 꽉 차 보이는 공간 속에서 연호는 살짝 곁눈질로 제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교복이라, 고등학생?’

그런데 너무 대놓고 빤히 쳐다봤나 보다.

시선을 느꼈는지 교복을 입고 있는 여자애가 고개를 돌렸다. 연호를 짧게 보더니 다시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여자애는 교복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앞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같은 인물을 보러 온 것 같은 생각에 입을 뗐다.

“너도 윤희주 보러 왔니?”

“…….”

여자애는 대답이 없었지만 제 말에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가 연호의 장난기를 유발하기 충분해 보였다.

“윤희주 애인? 친구라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있어 보이는데?”

“…….”

“뭐야, 어른이 말해도 대답도 안 하고.”

“……딱히 그쪽이 어른같이 보이진 않는데요?”

저를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여자애의 말에 연호는 재밌다는 듯 살짝 웃음이 나왔다.

“글쎄, 내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지.”

“딱 봐도 대학생으로 보이는데, 뭘. 그럼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어른까진 아닌 것 같은데.”

“야, 너 어디서 반말이야?”

미주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외지인이 분명한 서울말을 쓰는 남자에게 비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그쪽은, 나 언제 봤다고 반말인데요?”

일부러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노려보면서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모습에 연호는 기가 찬다는 듯 혀를 한 번 찼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천하의 차현 그룹 차연호에게 말대꾸하는 여고생이라니.

“오늘 처음 봤지, 너도 아마 날 처음 봤을 테고.”

“뭐, 그렇겠죠.”

“너, 재밌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미주도 조금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려 눈을 내리깔고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연호는 미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직 솜털도 벗지 못한 앳된 얼굴이긴 해도 타고난 이목구비는 상당히 예쁜 편이었다. 하얀 피부와 어울리는 청초하게 생긴 여자의 외모는 단정하고 단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저 예쁜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다니. 연호는 화를 참는다는 듯 제 머리를 한 번 손으로 쓸고는 말했다.

“너, 윤희주랑 아는 사이야?”

“아니, 모르는데요? 나는 그 옆의 우리 아빠 보러 온 건데?”

미주는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선생님, 배탈이 났는지 배가 아픈데요…….’

최근에 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여자아이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동정받기 충분했기에 미주는 아프다는 거짓말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조퇴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

예전에도 가끔 이렇게 조퇴한 후 시내를 구경하면서 혼자 걸어 다니곤 했는데.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도착한 오빠가 있는 곳은 언제나 조용했다.

‘오빠는 시끄러운 걸 싫어했으니깐, 여기가 정말 안성맞춤이긴 해.’

그런데 서울말을 쓰는 남자가 대놓고 ‘윤희주를 아느냐?’고 묻는 말에 미주는 모른다고 대답을 하면서 연호를 속였다.

오빠가 죽은 후 진우와 재민으로부터 절대로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나 윤희주 동생이요.’ 하면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이유를 물어도 두 사람은 무조건 안 된다고 티를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다행이야. 학교 나올 때부터 명찰은 빼서 가방에 넣어 뒀는데 내 이름을 못 봤으니 동생인 줄 모를 거야.’

죽은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 땅에 묻혔지만, 미주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낯선 남자에게 오빠를 모르는 척했다.

“아, 그랬구나.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는데. 뭐, 너도 힘든 시간이 있었겠지.”

미주는 생전의 희주를 아는 듯한 남자의 대답에 담긴 복잡한 생각이 느껴져 왠지 가슴이 찌르르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 잘생긴 서울 촌놈도 아버지를 잃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걸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실감이 무엇인지 알기에 미주는 살짝 누그러진 말투로 위로를 건넸다.

“그쪽 아버지 일. 힘내세요.”

“그래, 고맙다. 예쁘게 생긴 부산 가시나야.”

가시나 라는 말에 미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반말 찍찍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더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흥-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려 연호의 옆을 벗어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연호는 그런 미주를 계속 재밌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가시나’라는 말을 그대로 넘기기는 열 받았나 보다. 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선 미주가 소리를 쳤다.

“서울 말투 완전 재수 없거든!”

물론 질러 놓고 도망치긴 했지만 말이다. 미주의 일갈에 연호는 풋- 소리를 내면서 웃다가 큰 소리로 미주를 불렀다.

“어이, 부산 가시나! 아니, 헤이, 고져스, 뷰리풀.”

저를 부르는 ‘뷰리풀’이라는 포인트에서 고개를 돌린 미주가 다시 소리쳤다.

“발음 굴리면서 영어 쓰는 것도 재수 없거든?”

“너 진짜 재밌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나중에 혹시 우리 다시 만나게 되면…….”

미주가 열심히 도망치면서 뭐라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이젠 너무 멀어져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분명 욕을 하지 않을까 싶을 때 연호가 크게 외쳤다.

“나중에 만나면, 죽을 줄 알아!”

“뭐래, 이 서울 촌놈이.”

미주가 냅다 큰 소리로 욕하면서 연호를 향해 손가락을 하나 올리는 게 아닌가!

유년 시절 대부분을 미국에서 지낸 연호가 그 손가락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야! 너!”

연호의 고함에 미주는 줄행랑을 치며 도망쳤다. 연호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이게 진짜, 야! 내가 누군 줄 알고…….”

당돌함을 넘어서 겁을 상실한 것 같은 여자애의 뒷모습에 화도 안 나고 그저 웃음만 나와 말끝을 삼켰다.

“F word? 저런 애랑 유치하게 싸우는 내가 제일 병신이지만…….”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푸스스 웃다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슬슬 돌아가야겠지?”

그런데 하필이면 퇴근 시간에 걸려 버려 해운대로 진입하는 게 생각보다 길어졌다.

연호는 조금 짜증이 난 얼굴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다가 조금 전 만났던 건방진 계집애가 생각났다.

“예쁘면 뭐 해, 성격이 저 모양인데.”

하얗고 예쁘장한,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매를 가진 미인형 얼굴이라 그 동네에서는 미녀라고 꽤 칭찬을 받을 만한 부산 가시나. 지금이야 고등학생이니 꾸밀 줄 몰라 수수하고 청순하게 보여도 곧 성인이 되어 화장하고 치장을 할 줄 알게 된다면 말이다.

“꽤 볼만은 하겠어. 뭐, 진짜 다시 볼 일이 있겠냐마는.”

간 크게 손가락 욕을 하고 도망가던 여자애는 아마도 담이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다.

죽자고 도망간 미주가 어쩐지 귀여웠다고 생각하면서 지루한 교통 체증을 견뎠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는 미소가 살짝 걸린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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