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겨진 사람들
* * *
미주는 학교가 싫었다.
겉보기에는 사이좋게 잘 지내는 관계였지만 학교 친구들이 자신이 없는 곳에서 돌아가며 욕을 한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미주 고아잖아…… 죽은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였대.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동네에서 유명했대. 사람 때리고 막…….’
‘걔 오빠는 완전 장난 아니잖아. 부산에서 윤희주 모르면 노는 남자들 사이에서는 간첩이라는데……? 사촌 오빠가 그러는데 완전 무서운 깡패래. 으으, 난 무섭다, 그런 오빠….’
‘나도 들었어, 걔 오빠 이야기…… 그리고 이건 진짜 비밀이다. 나도 친구한테 들었는데 있지… 미주랑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래! 으, 더러워, 변태들.’
‘맞아, 나도 비슷한 거 들었어! 내가 들은 건 좀 다른데… 미주가 오빠 친구들, 그러니깐 깡패들이랑 막 사귀는데 있잖아, 그거…… 그 짓도 벌써 하고 이 남자, 저 남자랑 엄청 문란하대.’
저를 둘러싼 너무나도 많은 루머와 소문이 점점 더 커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힘들게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부정하려고 해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귀를 닫고 모르는 척 그렇게 지내 오고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잘못한 것 없는데 사람들은 왜 날 괴롭힐까? 왜 나에 대해서 험담하고 안 좋은 소문을 내는 걸까.’
어릴 때는 동네에서 또래 여자애들한테 놀림도 많이 당하고 괴롭힘도 많이 당했다. 아빠는 약쟁이고 엄마 없는 애라고.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가 안 좋은 쪽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는 그 괴롭힘은 사라졌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남매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더 안 좋아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깡패 오빠를 둔 여자애를 두고 거짓을 진짜처럼 꾸며 내는 사람들.
그래서 공부에 집착했다. 이상한 소문들과는 다르게 공부라도 잘하면 사람들이 저를 다르게 봐 줄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타고난 머리는 없는 것 같지만 죽자고 노력한 끝에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놓고 앞에서 저를 괴롭히는 사람은 일단 없었지만, 끔찍한 루머는 점점 더 수위가 높아졌다.
‘미주야, 우리 서울 가서 살까?’
미주는 부산을 벗어나고 싶었다. 소위 말하는 서울에 있는 명문 대학으로 진학해 저를 옥죄고 있는 추잡한 뜬소문 속에서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마도 오빠는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우연히 엿들은 재민과 진우의 대화 속에서 오빠가 부산에 남기로 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제 마음도 몰라주는 오빠가 너무나도 미웠으니까.
‘뭣 때문에 서울로 가자 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왜 또 안 가는 거야!’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아 미주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비가 올 것 같네, 흠. 우산도 없는데 어쩌지?’
마지막 수업을 앞둔 쉬는 시간, 손에 쥔 핸드폰을 들고는 깊은 고민에 빠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인 척하느라 오빠가 사 준 핸드폰을 항상 꺼 뒀는데.
‘굳이 오빠를 불러서 소문에 말을 더 보태진 말자.’
한참 핸드폰을 물끄러미 보던 미주는 전원 버튼을 눌러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재민 오빠, 학교야? 나는 아직 수업 중인데 밖에 비 와ㅠ 우산 없어ㅠㅠ]
누가 볼세라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 핸드폰을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재민에게 문자 하나 보낸 것뿐인데 가슴이 이렇게 두근두근하다니. 여전히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머니 안에서 길게 진동이 느껴졌다.
‘아으, 빨리 확인하고 싶은데. 제발 시간아, 빨리 가다오!’
재민에게서 어떤 회신이 왔을지 오만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업 종이 울렸다. 미주는 들뜬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미주야, 수업 중일까 봐 문자 보내. 이거 보는 대로 전화해. 엄청 급해.]
재민에게서 온 메시지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네, 재민 오빠는 이렇게 급할 사람이 아닌데? 항상 느긋한데…… 그냥 우산 좀 같이 쓰자고 데리러 와 달라고 한 말인데?’
항상 차분한 재민의 다급함에 오히려 쉽사리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윤미주 학생?”
쉬는 시간 교실에 울리는 어른 목소리에 시선이 앞문으로 향했다. 학교에 다니며 오다가다 얼굴만 아는 교직원이 저를 찾아오다니.
“네? 전데요?”
“미주 학생, 지금 학교로 급한 연락이 와서. 빨리 병원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빠가 사고가 났다고 학교로 연락이.”
머릿속이 터지는 기분이 들면서 온몸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드는 듯했는데 이내 바닥이 솟아나 몸을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씨발, 이게 뭔 일이야!”
재민의 전화를 받은 진우는 어떻게 병원까지 달려왔는지 기억을 못 할 정도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희주 형이 사고가 나서 위독하다니.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집요하게 울리던 핸드폰 넘어 울먹이는 재민의 말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미칠 것 같은 정신으로 온 힘을 다해 재민이 알려 준 병원 응급실로 와 보니 온몸에 관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형이자, 친구였고, 진우의 가족이었던 사람.
“재민아,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냐고!”
“형님, 저도 연락받고 너무 놀라서…… 우선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병원으로 달려와 보니 이미 희주 형은 저 꼴이 나 있었고…… 흑흑.”
“사고라니, 무슨 사고냐고!”
“교통사고래요, 건널목을 건너다 트럭이 희주 형을 못 보고 친 후 그대로 달아난 것 같다고….”
“뭐, 뺑소니? 씨발, 으아아악!”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오갈 데 없는 분노에 미친 진우가 흡사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며 울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지금의 진우를 말릴 수가 없었고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재민마저 그런 진우를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미주…… 미주한테는 연락했어?”
울음 섞인 진우의 말에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금 같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을 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주가 응급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 오빠…… 흐흑…….”
제대로 몸도 가눌 수가 없는지 병원까지 따라와 준 친구에게 의지해서 겨우겨우 걸어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민은 얼른 뛰어가 미주를 부축했고 제 얼굴을 본 미주가 눈물을 터트렸다.
“오빠…… 우리 오빠는? 응? 우리 오빠는 지금 어딨는 거야? 오빠…… 흐흐흑.”
“지금 혼수상태라고…… 의사가 맘의 준비를 하라고 했어…… 미주야, 맘 단단히 먹어. 미주야, 응?”
미주는 다시금 몸이 휘청였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미주, 간신히 정신 차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수현이라고 했지? 여기까지 우리 미주랑 같이 와 줘서 고맙다.”
미주를 데리고 와 준 친구도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안면이 조금 있던 미주 친구라 재민은 고마움을 건넸고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곧 죽을 듯한 얼굴로 망연자실 자리에 주저앉은 미주에게 진우가 다가와 눈물을 닦아 주면서 말했다.
“미주야, 오빠가 있다. 내가 있잖아, 응? 형 꼭 일어날 거야…… 걱정하지 말자. 울지 말고, 응?”
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가 저를 꼭 안아 주면서 괜찮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였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를 꿰뚫는 그 순간을 재민이 옆에서 보고 있었다. 함께 자란 둘의 유대감이 얼마나 깊은지 느낄 수가 있어서 다소 복잡한 마음이 들어 괜히 고개를 돌렸다.
응급실은 이내 다시 조용해지는 듯했지만 말이다. 사고 소식을 들은 희주네 패거리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희주의 옆을 미주가 지키고 있었다.
겨우 이성을 찾은 진우와 재민이 잠깐 머리 식힐 겸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지만, 침묵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씨발, 그 트럭 운전사 그 새끼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 버릴 거야! 경찰 새끼들 난 못 믿겠고 내가 직접 찾아야겠어.”
진우가 거칠게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말을 먼저 꺼냈다.
“형님, 경찰이 조사하고 있다니깐 조금 더 지켜봅시다. 괜히 범인 잡아내라 닦달하다가 오히려 더 일을 망칠 수도 있으니.”
늘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한 재민이 설득하자 격양되어 있던 진우도 알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진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미주예요?”
“어, 희주 형 의식이 돌아왔대. 지금 빨리 오란다.”
허겁지겁 병실로 올라가니 미주가 밝게 웃고 있었지만, 눈가는 이미 젖어 있었다.
“오빠가 눈을 떴어! 빨리, 오빠.”
진우는 희주의 머리맡에서 그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형, 이게 뭔 꼴이야? 얼른 일어나야지, 응? 나 흰 가운 입고 있는 거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네?”
희주가 눈을 깜박이며 대답하는 것 같았다. 진우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희주의 눈이 한 번 더 깜박이는 것을 보고는 잡은 손을 더욱더 세게 꽉 잡았다.
미주는 그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희주의 손을 꼭 잡았다. 목이 메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희주의 심전도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불안한 소리에 재민의 옆에 있던 간호사가 바이털을 확인하고는 의사를 급히 호출했다.
의료진들이 제세동기를 급히 가져오고 있었다. 제가 의대생인 걸 모를 의료진들이 나누는 대화를 진우는 알아들을 수 있어,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이게 마지막일까 싶어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 내고 있을 때였다.
삐- 하는 한 음절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환자분께서는 금일 오전 2시 45분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뭐라고? 사망?”
의사의 사망 선고를 들은 진우는 망연자실해 죄 없는 의사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제발, 선생님! 아니, 선배님! 제발 우리 형 살려 주세요!”
재민이 눈물을 흘리며 진우를 간신히 말리고 있을 때 미주는 희주에게 다가가 볼에 살짝 입을 맞춘 뒤 귓속말을 속삭였다.
“오빠, 우리 오빠로 태어나 줘서 고마워. 사랑해, 오빠. 오빠, 제발 나 두고 가지 마. 제발.”
미주의 마지막 말을 들었던 걸까? 그녀와 똑 닮은 눈매를 가진 남자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 둔 채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 * *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상주는 진우가 맡았다. 진우는 의연한 얼굴로 조문객들을 하나씩 맞이했다. 미주가 진우에게 의지한 채 조금은 초췌한 모습으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재민이 보기에는 미주에게 진우가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오빠를 잃은 미주가 형을 잃은 진우를 지켜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주는 화장돼 납골당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는 여전히 세 사람이 있었다. 당분간 재민이 같이 지내기를 원했지만, 미주는 제안을 거절했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렇게 나약한 애가 아니야.”
“미주야, 그래도 같이 있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싶은데.”
재민이 걱정스럽게 하는 말에 미주 대신 진우가 답했다.
“재민아, 걱정하지 마. 미주는 강해. 왜냐면 희주 형 동생이니깐. 그리고 내 동생이기도 하고.”
진우의 한마디에 재민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한 남자들의 동생은 정말 강한 것일까?
* * *
희주가 떠나고 계절이 한 번 바뀔 정도로 시간은 야속하게 계속 흘렀다.
“뭐야? 다들 기운 내. 산 사람은 살아야지.”
“역시 윤모개. 내 동생답네.”
씩씩한 미주 앞에서 두 사람은 그녀의 단단한 강함에 탄복했다.
하지만 예전만큼 셋이서 서로 부대끼며 지내진 않았다. 아마도 셋이 있으면 자연스레 한 사람의 부재가 느껴져 모두 괴로웠겠지. 누가 먼저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거리를 두고 각자의 생활에 몰두 중이었다.
“미주야, 별일 없지?”
“응, 완전 아무 일도 없어. 공부한다고 힘든 거 말고는.”
재민은 혼자 사는 미주가 걱정되어 자주 연락하며 챙기고 있었다.
미주도 재민이 원래 다정다감하고 섬세하다는 건 어릴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친오빠를 잃고 구멍이 나 버린 것 같은 가슴에 조금씩 채워지는, 뭔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미묘한 감정이 재민을 볼 때마다 생겨나는 듯했다.
“항상 문단속 잘하고, 주말에 밖에 나가면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고.”
“알았어.”
“모르는 사람 절대 집에 들이지 말고, 누가 초인종 눌러도 항상 확인 후 문 열어.”
“알았어, 알았어.”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면 이미 늦은 밤이었다. 재민은 매일같이 밤늦게 귀가하는 미주를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 있으면 나나, 아니면 진우 형한테 꼭 전화하고.”
“네, 네, 알겠습니다.”
싱긋 웃으며 한 번 저를 올려 본 후 이제 부끄러운지 눈길을 돌리는 미주가 귀여웠다. 두 사람이 가로등이 있는 골목길을 지나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재민은 미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웃었다.
“갈게. 공부 열심히 하고.”
“어, 잘 가, 오빠. 매번 고마워.”
재민과 헤어진 후 늘 하던 대로 집으로 들어가 문을 꼭꼭 닫았다. 교복을 벗고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사실은 전혀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는 걸 재민 오빠는 모르겠지?”
사실상 완전히 공부를 손에서 놓았지만, 그동안 쌓아 온 게 있어 성적은 그럭저럭 간신히 유지되는 중이었다.
미주는 우울한 얼굴로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오빠…… 보고 싶어.”
지난날 희주가 왜 그리 밖으로 돌면서 싸움만 했었던 건지 그를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일까?
‘오빠는 분명 마음속의 괴로움을 싸움으로 잊어 보려고 했던 걸 거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동생이 아니라 오빠의 누나였거나 엄마였다면 그때의 오빠를 이해해 주고 좀 더 따스하게 감싸 안아 줄 수 있을 텐데.’
‘아니야, 내 존재만으로도 오빠에게 어쩌면 짐이지 않았을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 무겁게 침전됐다. 너무나도 괴로웠다. 오빠에게 좀 더 잘해 주지 못해서, 좀 더 이해해 주지 못해서, 더 살갑지 못해서 너무나도 미안했다.
책상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더는 흘릴 눈물도 남아 있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흑흑…….”
참아 보려고 했지만 참아지지 않은 마음의 비명이 방에 울려 퍼졌다. 미주는 고개를 완전히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계속 울 수만은 없어, 강해져야 해. 혼자서도 잘 살아야 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나니 왠지 목이 말랐다. 슬픔도 생리 현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마른 웃음을 지으며 방에서 나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시원하게 갈증이 해소되고 아까 혼자 울었던 것이 괜히 머쓱해질 때였다.
왠지 대문 밖에서 인기척 같은 게 나는 것 같아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슨 소리인지 집중했다.
‘사람이 문 앞에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덜컥 겁이 났다. 현관문을 제대로 잠가 놓은 게 맞는지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한 후 한숨을 쉬면서 핸드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지? 재민 오빠? 진우 오빠?’
찰나 고민의 순간, 밖에서 작게 무슨 소리가 나는 듯했다.
‘라이터 소리!’
귀를 쫑긋 세우던 미주는 이내 현관문을 벌컥 열어 문 앞에 있던 사람을 확인했다.
“오빠, 왔으면 전화하든지 문 열고 들어오지 밖에서 뭐 하는 거야, 응? 열쇠 잃어버렸어?”
현관문 옆쪽에 앉아서 피투성이로 담배를 피우던 진우가 웃었다.
“오빠, 얼굴이 이게 뭐야? 싸운 거야? 술 냄새…… 어휴, 몇 년 조용하다 했어. 어휴, 싸우고 다니지 마, 응?”
“……그래, 미안하다.”
울음 섞인 말에 진우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미주가 반가웠지만 웃는 것도 잠시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얌전히 의사 공부하는 척하더니 역시, 오빠 주먹이 웬일로 몇 년 동안 잠잠하다 했어. 사람 고쳐야 할 의사가 사람 때리고 다니면 어떡해?”
진우는 입에 물고 있던 걸 슬그머니 빼서 바닥에 던져 버렸다. 또 담배 가지고 지랄, 아니 한 시간은 떠들어 댈 게 뻔하니까.
“들어가서 씻자, 응? 이 피 묻은 거 빨리 씻어서 깨끗이 해야지.”
미주가 진우의 손을 잡고 제 덩치의 두 배는 될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더 잔소리 한바탕을 늘어놓은 후 어서 씻으라면서 욕실로 진우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문 앞에 옷 둘 테니깐 다 씻고 입고 나와, 알았지?”
진우가 씻는 동안 미주는 약통을 모아 놓은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진우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욕실을 향해 소리쳤다.
“환풍기는 꼭 돌리고, 문 닫지 말고. 습기 차.”
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진우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미주가 앉아 있는 거실로 나왔다.
“많이 다친 거야? 약 바르고 오늘 오빠 방에서 자고 가.”
“…….”
“하긴, 오빠가 의산데 오빠가 직접 치료하면 되겠네. 잠시만, 나는 오빠 방에 이불 갖다 놓을게. 한동안 집에 안 와서 내가 빤다고 치웠거든.”
“…….”
“……알았어. 잔소리 그만할게.”
“그래, 고맙다.”
진우는 창고처럼 쓰는 할머니 방에서 이불을 꺼내 와 예전의 제 방으로 들고 들어가는 미주를 가만히 보았다.
얼마 전까지 이 집에 살았던 젊은 남자와 꼭 빼닮은 눈매를 가진 여자애의 눈빛은 이제 기억에서도 희미해진 남매 어머니의 따스했던 눈빛과 점점 비슷해지고 있었다. 잠시 아련해지는 마음을 머리를 짧게 저으며 털어 내 보면서.
치명적인 부상이 아니라면 그저 약이나 바르고 진통제만 먹으며 며칠 누워 있기만 하던 태산보다 더 컸던 희주 형. 진우가 멍하니 이 집에서 살았던, 이제는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는 동안 미주가 제 옆으로 다가와 종알거렸다.
“됐어, 베개랑 다 갖다 놨으니깐 자고 가. 근데 오빠, 뭐 했어? 약 안 발라?”
“아, 깜빡했어. 조금 멍하게 있었더니.”
“뭐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의사가 자기 몸을 치료 못 하네.”
“……야, 윤모개, 아직은 학생이다. 그것도 예과.”
“몰라, 있어 봐. 내가 해 줄게.”
약을 발라 주겠다고 가까이 다가온 미주가 왠지 부담스러웠다. 속눈썹이 저리 길었나 싶었고, 한동안 못 본 사이 많이 야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어, 내가 할게.”
“아, 됐어! 반창고만 하나 붙이고 끝내자.”
“아-!”
일부러 때리듯이 반창고를 세게 눈썹 위 이마에 붙여 주는 미주의 매운 손맛에 인상을 썼다. 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주는 치료가 끝났다며 약품 상자를 제자리에 두겠다고 뒤돌아 일어섰다. 그런 미주의 모습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여 진우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미주야, 밥은 잘 먹고 다니지?”
“당연하지, 내가 또 한 먹성 하잖아?”
미주가 배를 팡팡 치는 동작을 보여 줬다. 그 모습이 귀여워 진우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너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영원히 동생으로만 있으면 돼.
“그냥 갈게. 아무래도 내 집 침대가 편하지, 옛날 내 방 침대는 매트리스가 사실 등이 많이 배겨서 불편해.”
“칫, 뭐야? 그 침대 밑에 콩 넣었다는 동화도 아니고, 오빠 안 예민하잖아? 갑자기 왜 그래?”
“…….”
미주는 제 생각을 알 리 없으니 가지 말라 붙잡았다. 그녀를 이길 수 없는 진우는 져 주는 심정으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 아프긴 아프다.”
진통제를 먹었지만, 상처가 쑤시고 욱신거렸다.
‘상처가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다행히 제가 학교를 휴학했음을 미주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의사고 나발이고, 희주 형이 죽었는데 차분히 앉아서 공부가 되겠어?’
재민이 사실을 알고는 저를 설득했지만, 더는 공부가 하고 싶지 않아졌다.
휴학계를 던져 놓고 과거에 그랬듯 거리를 방황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스럽게 제 곁에는 예전에 같이 어울리던, 희주를 따르던 동생들이 몰려왔다.
마치, 희주가 죽었으니 저들의 보스는 저라는 듯 그들은 진우 밑에서 결집하기 시작했고, 세간에는 이렇게 다시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불도저가 다시 돌아왔다고.
“……흑.”
밖에서 우는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아 눈이 번쩍 떠졌다.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하니 두 시간 정도 깜빡 잠이 들었던 거 같았다. 다친 몸이 무거워 순간 여기가 어딘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어릴 때 희주 남매의 집에서 살았던 제 방이라는 걸 알고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옛날 집이라면 이 소리는 미주가 우는 소리겠지.’
몸을 일으켜 조용히 밖으로 나가 보니 짐작대로였다. 미주의 방에서 조그맣게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진우는 살짝 노크했다.
“미주야, 오빠야. 괜찮은 거지?”
“……흑, 오빠.”
대답하는 미주의 울먹임에 진우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미주가 머리까지 쓰고 있던 이불을 살짝 내렸다.
“미주야.”
슬픈 눈을 한 진우를 쳐다보았다. 아마 오빠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고 있던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더니 진우가 손을 뻗어 미주를 힘차게 안았다.
“괜찮아, 미주야. 울어도 돼. 안 참아도 돼. 내 앞에서는 그냥 펑펑 울어도 돼.”
“오빠, 흑… 흑…….”
품에 안긴 미주도 손을 뻗어 진우를 안았다. 통곡하면서 눈물 콧물을 쏟아 내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슬픔을 전부 받아들였다.
나한테 다 쏟아 내, 미주야. 내 앞에서는 괜찮아.
그렇게 한참을 울다 지친 미주가 더는 울 힘도 없는지 조금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희주 오빠한테 내가 혹시 짐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그랬어, 나한테 엄마 잡아먹은 괴물이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미주의 아픈 말에 진우도 가슴이 아팠다.
“오히려 희주 형이 걱정했었어. 자기가 네 앞길을 막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걱정하지 마, 미주야. 형한테 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어. 그리고 나한테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동생이고.”
“……거짓말이라도 좋아. 그 말 믿을게. 나도 오빠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우리 오빠니깐. 나는 있지, 오빠를 한 번도 남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희주 오빠랑 똑같은 우리 오빠잖아.”
“당연하지, 나는 널 평생 지켜 줄 거야.”
저를 달래 주는 남자 역시 사랑했던 형제를 떠나보내고 찢어진 가슴을 안고 있겠지만 말이다. 제 앞에서는 이렇게 언제나 어른스러운 얼굴로 오빠 행세를 했다. 그래서 미주는 고마웠고, 그의 품이 따뜻해 슬픈 이 감정도 조금씩 잦아드는 것 같았다.
미주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에는 늘 진우가 있었다. 한집에서 같이 먹고, 자고, 놀았던 친동기간 같았던 오빠. 아주 어릴 때는 어쩌다가 같이 잠이 들면 그의 눈 밑에 난 점이 신기해 손으로 꾹꾹 눌러 보곤 했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된 진우가 이 집을 떠나 작은 창고보다 못한 곳으로 나가 살기 시작했을 때, 아홉 살이던 저는 그런 진우가 보고 싶다고 밤마다 울곤 했었다.
“오빠, 나 이제 잘래. 안 그래도 나 아침잠 많아서 맨날 지각하니 마니 하는데, 이러다 밤새우겠다.”
퉁퉁 부은 눈을 한 미주가 훌쩍이면서 하는 말에 진우는 장난스레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 때문에 눈 부어서 쌍꺼풀 없어졌니 마니 하고 나한테 전화해서 짜증 내지 마.”
“글쎄, 생각해 보고.”
다시 침대에 누운 미주의 손을 꼭 잡아 주면서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 줬다.
“오빠가 이렇게 옆에 있으니깐 옛날 생각나고 좋아. 오늘 밤은 안심하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무서운 꿈도 안 꾸고.”
진우는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볼을 한 번 꼬집어 주었다. 이내 정말 안심이 된 듯 잠이 들었고 진우는 그런 미주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나한테 한 말일지도 모르겠어.’
미주 안에 있을 희주 형에 대한 부채 의식. 그녀를 다독이면서 했던 말은 어쩌면 제게 하는 말인지 모를 위로였다.
어느새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미주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 저도 모르게 살짝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항상 좋은 꿈만 꿔, 미주야. 행복하게, 너는 늘 행복했으면 좋겠어.”
미주가 깊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뒤 처음부터 저는 없었던 듯 발소리를 죽인 채 집을 떠났다.
“…….”
깊은 밤, 제가 사는 단칸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쩐지 가슴에 불티가 튀는 것 같았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파 왔지만, 이상하게 피가 끓는 기분에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게 아니야. 그래, 진통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생각하면서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도착했다.
“야밤에 누구지?”
밤늦은 시간까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여자는 이제 막 씻고 자려던 참이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무시하고 잠을 자려고 했지만, 왠지 제가 잘 아는 사람이 온 것 같아 침대에서 일어났다. 철컥- 하고 문을 여니 눈 밑에 점이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꺼져, 서진우. 너랑 볼 일 이제 없어.”
1년이 넘도록 저를 찾지도 않았던 남자가 미웠던 여자는 욕을 하며 문을 닫으려는 순간, 진우가 문을 잡고 하는 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진짜 그냥 가?”
“…….”
뜨거운 눈빛이 주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이 남자와는 철이 든 이후로 의미 없는 섹스를 하며 몸을 섞고 뒹굴면서 서로 욕구를 푸는 사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진우가 뭔가 해소하고 싶을 때 저 좋다는 다른 여자를 찾지 않고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가지 마. 안아 줘.”
제 목에 팔을 걸고 입술을 부딪쳐 오는 여자의 행동에 진우는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흐읏……!”
이글거리는 눈과 뜨거운 손길이면 붙잡는 여자 말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할 것이다. 익숙하다는 듯 집 안으로 들어선 진우는 그녀를 돌려세우고 허리를 잡았다.
더 길게 서로의 몸을 만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늘 그랬듯 터질 것 같은 욕망을 그저 원초적인 결합의 행위로 배설하는 걸 여자는 더 좋아했다. 여자는 제 아랫도리를 거칠게 벗겨 내는 남자의 손길에 자연스레 침대에 엎드리면서 말했다.
“콘돔, 두 번째, 하읏, 서랍에 있어. 흐으…… 알지?”
이미 젖어 있는 음부에 남자의 손이 닿아 터프하게 움직이자 움찔거리면서 내뱉는 신음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빨리, 넣어 줘. 빨리.”
위로 잔뜩 치켜올린,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엉덩이를 흔들며 여자가 애달파하자 진우는 밀부에 박혀서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던 손을 빼어 냈다.
여자가 말하는 두 번째 서랍이 어딘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몸을 움직여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비닐을 찢었다. 진우는 바지를 내려 이미 잔뜩 화가 난 페니스에 콘돔을 씌우고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강하게 벌어진 꽃잎 사이에 밀어 넣었다.
“하앗! 좋아, 너무…….”
제 것을 넣자마자 여자는 교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는 애액이 음란한 사운드를 내며 남근이 박히는 것을 돕고 있었다. 뜨겁고 미끈거리는 몸속에서 진우는 깊게 허리 짓을 했다.
“진우야, 하앙… 너, 의대 갔다고 이제 나 같은 거 안 찾을 줄 알았어. …읏!”
잘록한 허리를 붙잡고 퍽퍽 깊이 피스톤질을 할 때 여자는 달뜬 목소리로 마음을 표했다.
“하고 싶으면, 공부하다가 변태 같은 짓, 이상한 거 하고 싶으면 다 해 줄 테니까, 딴 년한테 가지 마, 내가…….”
진우는 대꾸하지 않은 채 더 세게 여자의 허리를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페니스를 박아 댔다.
“앗! 진우야… 아, 아! 좋아…… 읏! 더 깊게 쑤셔 줘.”
말로만 좋은 게 아닌지 페니스를 꽉 쥐고 있는 탄력 있는 근육이 강하게 수축해 엄청나게 강한 자극을 주고 있어, 진우의 이마에 점점 핏대가 서고 있었다.
“아…… 더! 더! 해 줘…… 흣! 아앙!”
“씨발, 다시 말해 봐.”
진우는 여자의 짧은 머리카락을 뒤에서 잡아 쥐고는 거칠게 잡아당기면서 계속 물었다.
“아! 악… 아아…… 흑! 더 해 달라고!”
“뭐라고?”
“너한테 먹히고 싶어, 으응, 흣!”
진우가 일부러 느리게 움직이면서 한 번 깊게 찔렀다. 경부까지 닿는 것 같은 페니스를 비비듯이 허리를 움직이자 여자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아아! 나, 느낄 것 같아! 아…… 진우야, 더, 더!”
온몸을 비틀어 대면서 허벅지까지 파르르 떨고 있는 여자는 절정을 맛보고 있는 듯했다.
“하, 씨발.”
덕분에 진우도 쫄깃하게 페니스를 씹어 대는 뜨거운 중심부의 움찔거림에 점점 밀려오는 쾌감을 느끼다가 파정했다.
“아, 너무 좋아. 진우야, 있지, 내가 더 좋은 거 해 줄 테니…….”
여자는 헉헉거리는 숨을 내쉬면서도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콘돔을 벗겨 낸 진우의 두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이러니깐 내가 딴 여자한테 못 가는 거야.”
한 번 끝을 봤지만, 여전히 불끈 솟아 있는 불기둥을 여자가 맛있다는 듯 입안에 넣고는 진우를 올려다보면서 펠라티오를 해 주었다.
“내가 맨날 이렇게 빨아 줄 수 있으니깐 자주 와, 보고 싶었어.”
제 것을 핥기도 하고 빨다가 혀로 능숙하게 감아쥐는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진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해가 뜰 때까지 두 사람의 신음과 질척이는 소리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불같았던 몇 번의 섹스 후 옆에서 자는 남자의 얼굴을 여자는, 아니 민희는 물끄러미 보았다.
‘이 눈물점 때문에 내가 너한테서 못 벗어나는 거 너는 모르겠지?’
민희는 진우의 얼굴을 조금 서글프게 바라보다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반창고 따위를 붙일 위인이 아닐 텐데. 흠, 몇 달 전 희주 오빠가 죽었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고, 서진우.’
진우가 밤늦게 저를 찾아온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아 조금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섹스 파트너라도 괜찮다며 자신을 달랬다.
‘어차피 날 찾아왔어. 그리고 내 옆에서 자고 있어. 이거면 충분해.’
민희는 조금은 외로워 보이는 남자의 등을 끌어안으며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