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서울에서 온 손님 (3/53)

2. 서울에서 온 손님

* * *

차가운 밤공기를 가로질러 걷고 있는 발걸음이 어딘가 모르게 무겁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재민은 진우와 함께 희주 형의 ‘서울에서 오신다는 손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진우는 뭔가 알고 있는 듯했지만, 재민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희주의 뒤를 따랐다.

‘형들 모두 양복이라니. 대체 누굴 만나길래 옷까지 신경 써서 온 걸까?’

재민은 잠시 옷차림을 확인하고는 괜히 습관처럼 안경을 한 번 만졌다. 그냥 평범한 공붓벌레처럼 보일 청바지와 체크 셔츠. 이 정도면 완전히 격식을 차리진 못해도 예의에 어긋날 정도는 아닐 거로 생각하며 희주와 진우의 뒤를 따랐다.

영주동에 있는 한옥을 본따 만든 호텔 나이트클럽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희주를 안으로 안내했다.

“회장님께서 제 일행들도 같이 와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진우와 재민을 제지하다가 희주의 한마디에 일단 떨떠름한 표정으로 길을 다시 터 줬다.

“흠흠.”

나이트클럽 안쪽에 마련된 지하 공간으로 앞장서서 걷던 사내들이 걸음을 멈추고 여기라는 눈짓을 보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희주가 진우와 재민을 번갈아 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회장님 이제 곧 뵈니깐 다들 매무새 살피고.”

‘회장님? 회장님이라, 대체 누구일까?’

서울에서 온다는 손님이 누구인지 한 번도 묻지 않았기에 그 손님의 정체가 궁금했던 재민의 얼굴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희주가 준비되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노크하며 문을 열고 룸 안으로 들어섰다.

“회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건강은 잘 챙기고 계시지요?”

화려하지만 실내가 약간 어두운 룸 안에는 연배가 제각각인 사내들 몇이 앉아 있었다. 희주는 그중에서 소파 중앙에 앉은 중년의 남자에게 웃으면서 깍듯이 인사를 했다.

‘회장님’이라고 불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주를 향해 말을 건넸다.

“윤희주, 오랜만이다. 녀석, 잘 지냈지?”

희주가 먼저 진 회장에게 인사를 하자 뒤이어 진우와 재민도 희주를 따라 꾸벅 인사를 했다. 편안한 분위기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함도 느껴지는 공기.

손에 든 잔을 비워 낸 진 회장은 희주를 향해 다시 잔을 들며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회장님이라, 아직은 뭔가 익숙하지 않네. 뭐, 오늘은 너 보려고 왔으니깐 호칭, 편하게 불러되 된다, 희주야.”

“그래도 이제 막 차현 그룹 회장님이 되신 분한테 제가 어찌 감히.”

“오늘만, 딱 오늘만 그냥 옛날처럼 아저씨라고 불러. 그럼 됐지?”

희주가 씨익 웃으면서 앞에 있는 테이블에서 양주를 들고 진 회장에게 따랐다.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그래, 미주는 잘 있고?”

진 회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잔을 받았다. 아무래도 아저씨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진 회장과 희주는 으레 그렇듯 요즘 근황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희주야. 저 녀석이 진우라고 했지? 작년에 뒤늦게 공부해서 의대에 들어갔다던 깡다구 있는 놈.”

“회장님께서 저를 다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회장님. 그러니 제가 따르는 술…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진우는 양주병을 집어 들고 넉살 좋게 진 회장의 빈 잔을 채웠다.

“앉아서 자네도 한잔하지.”

진 회장은 진우가 따라 주는 술을 한 잔 깨끗이 비워 낸 후 제가 마신 잔을 다시 진우에게 줬다. 술잔을 공손히 잡은 진우가 진 회장에게 받은 잔을 쭉 들이켰다.

“아차, 한 명 더 있었구만. 내가 미처 못 봤네, 허허. 희주야, 저 친구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정재민이라고 합니다. 저놈도 진우처럼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같이 자란 놈입니다. 재민아, 여기로 와서 회장님께 한 잔 드려.”

희주가 말하자 재민이 자리로 앉으며 양주병을 들었다.

“재민이는 저 같은 양아치가 아니라 워낙 모범생이라서 법대를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갈 정도로 똑똑하니, 아저씨가 잘 눈여겨봐 주시면 분명히 쓰일 데가 있을 친구입니다.”

“오, 법대생 좋지. 자, 한 잔 따라 보게.”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정재민이라고 합니다.”

희주가 재민과 진 회장을 번갈아 보면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재민이 제 소개에 고개를 꾸벅이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럼 사법고시를 목표로 하고 있겠구만.”

“네, 회장님. 내년에 고시 공부 들어가려고 생각 중입니다.”

“그럼 올해 나이가 몇이지?”

“스물다섯 살입니다, 회장님.”

저를 유심히 바라보는 진 회장의 눈길에 재민은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높으신 분의 눈에 드는 게 중요할 것 같다고 말이다.

“희주야, 재민이라는 저 친구 연호랑 동갑이군.”

“듣고 보니 그렇네요, 연호가 진우보다 한 살 어리니.”

“근데 가만히 보니…… 재민이 이 친구가 진우 자네보다 훨씬 잘생겼어.”

“회장님, 섭섭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는 재민이처럼 곱상한 것보다 저처럼 남자답게 잘생긴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음,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진우 자네는 선이 굵은 스타일이라 요새 젊은 애들이 말하는 꽃미남 스타일은 아니니깐.”

“회장님, 서운해서 한잔해야겠습니다. 재민이한테 얼굴로 밀리다니 너무 서글퍼지네요. 저도 나름대로 잘생겼다고 여자들한테 인기 많습니다.”

진우의 농담에 다들 크게 웃으며 유연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술잔이 오고 가며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었다.

술잔이 여러 번 돌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몇은 취했는지 살짝 눈이 풀린 이들도 있었고 구석에서 꾸벅꾸벅 조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 잠시 주변을 살피던 진 회장이 조용히 말했다.

“희주랑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다들 자리를 비켜주게나.”

“네, 회장님. 늦었지만 한 번 더 차현 그룹 회장직에 오르신 걸 축하드리겠습니다.”

진우가 넉살 좋게 진 회장을 추켜세우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진 회장 주변을 관찰하며 요령껏 술을 피한 재민도 진우를 따라 인사를 하며 그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뒤 진 회장과 동석한 이미 만취한 다른 이들은 밖을 지키던 사내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룸을 벗어났다.

일행이 모두 나간 뒤 텅 빈 룸 안에는 드디어 진 회장과 희주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진 회장은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희주에게 말했다.

“가까이 와서, 한잔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희주는 진 회장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 회장은 앞에 놓인 양주를 단숨에 들이켠 후 그 잔을 그대로 희주에게 건넸다.

희주가 잔을 받아 들자 양주를 따라 주면서 진 회장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회장이지, 나는 차현 그룹 차씨들의 바지에 지나지 않아.”

“…….”

“그래서 말인데, 이왕 이리된 거 제대로 회장 노릇 하고 싶어지니깐 말이야, 죽은 네 아버지가 생각나더라고.”

“벌써 아버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네요.”

“살아 있었다면 내 옆에서 큰 힘이 되었을 텐데, 너무 일찍 갔어. 약만 아니었어도…….”

진 회장이 중얼거리는 말에 희주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술잔을 입에 댔다.

이제 막 일명 ‘30대 재벌 그룹’ 안에 그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 차현 그룹의 진수오 회장과 제 아버지는 고향 친구였다.

나이트클럽을 크게 했던 진 회장의 아버지는 부산이라는 지리적인 특성을 놓치지 않고 조폭들과 손을 잡았다. 일본에서 밀수품을 들여오기도 했고, 돈을 벌러 일본으로 밀항하려는 이들에게 배를 공급해 주기도 하면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었다.

그렇게 불법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영도에 작은 조선소를 지었다. 경제 성장기에 맞물려 시작된 합법적인 사업은 점점 몸집을 불리며 성장했다.

자연스럽게 진수오 회장은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희주의 아버지는 지역에서 꽤 유명한 조폭이었고. 악어와 악어새처럼 진 회장과 희주의 아버지는 공생하는 관계로 서로의 이득을 위해 도와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진 회장이 그 당시 자금난에 허덕이던, 아직은 재벌까진 아니었던 중견 회사 차현 기업에 현금을 대어 주면서 정략결혼을 해, 차현의 일원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 회사를 차현의 중공업 계열사로 합병시키며 그룹 내에서 흔들리지 않을 지분을 가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장인어른이자 차현 그룹의 2대였던 전前 회장이 죽어 제가 회장직에 올랐지만, 여전히 발밑이 단단하지 못했고, 차현을 완전히 장악하긴 힘들었다.

진 회장은 알고 있었다. 저는 그저 처남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차현 그룹이라는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키만 잡고 있으면 되는 존재였다. 왜냐면 차현 그룹의 3대가 미국 유학 중이었고, 어리다면 어렸기에 경험이 없는 그가 노련해질 때까지 그룹을 이끌어 갈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희주야, 그래서 나는 내 사람들이 필요해. 내 곁에서 날 위해 싸워 줄 사람들. 네 아버지처럼.”

마시던 양주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진 회장은 강렬한 눈빛으로 희주를 쳐다봤다.

“……그럼 저를 보자 하신 이유가.”

“네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한다. 서울로 와서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니?”

진 회장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진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 말을 들은 희주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여기서 꼭 답을 드려야 됩니까?”

“그건 아니야.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겠네. 그러나 가능하면 너무 오래 끌지 말고 내 옆에 와 줬으면 좋겠어. 네 아버지도 아마 그걸 바랄 테고.”

“사실은 아직 동생도 어리고, 서울은 저에게 너무 큰물 같은데 조금 자신 없네요, 아저씨. 저는 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는데.”

희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진 회장은 아까보다 좀 더 힘주어 한 마디 한 마디 이어 갔다.

“희주야, 언제까지 부산에 있을 생각이냐? 미주 대학도 보내고 해야지, 안 그래? 알다시피 난 일단 자식이 없어. 그래서 내 옆에서 나를 도울 수 있는, 그러나 내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놈이 필요해. 바로 너처럼.”

“…….”

쉽게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자기 서울로 올라가 재벌 회장을 보필해야 한다니. 물론 진 회장이 무슨 생각이 있어서 저를 옆에 두려는 거겠지만 진짜 속내를 희주가 알 리 없었다.

입을 다문 희주를 물끄러미 보던 진 회장이 손목시계를 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희주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며 말했다.

“늦었어, 벌써 시간이 이리됐군. 내일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지금이라도 서울로 올라가 봐야 해. 희주야, 대답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조만간 정리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진 회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진 회장이 떠나고 홀로 남은 희주는 잔에 남아 있는 양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짧지만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울로 올라오라는 진 회장의 말. 과연 서울은 저에게 기회의 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의 땅이 될 것인가?

남은 술을 마시면서 고민에 빠진 희주가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가운 밤거리를 마주하며 같이 온 동생들을 찾았다.

‘진우랑 재민이는 어디로 간 거지?’

진우와 재민의 행방을 생각하면서 품 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불을 붙여 보지만. 왠지 라이터가 잘 켜지지 않는 건 기분 탓일까?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어서 빨리 피우고 싶은데 라이터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잠시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고쳐 물 때였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물고 있던 담배가 빨갛게 익어 가기 시작했다. 폐부까지 깊이 들어갔다가 내뱉어진 담배 연기의 끝에 진우가 라이터를 들고 웃고 있었다.

“형, 갈 거면 우리도 데리고 가요.”

“……뭔 소리야.”

“애석하게도 내가 눈치가 백 단이라. 차현 그룹 진 회장이 직접 죽은 친구 아들 찾아왔다면 이유가 뭐겠어요?”

“네가 생각할 때 이유가 뭘 거 같은데?”

희주의 물음에 진우가 조금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요새 신문 좀 읽거든요. 그래서 좀 알아요. 지금 차현 그룹 내부적으로 문제 많은 거.”

“새끼, 지금 널 누가 예전에 나랑 같이 주먹질이나 하고 다니던 놈으로 보겠느냐고?”

눈치 빠른 진우의 말에 희주가 그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뺏은 후 담배를 건넸다. 이번에는 제가 진우의 담뱃불을 붙여 주면서.

“미주 두고는 안 가.”

“미주는 서울로 대학 간다고 그러던데.”

희주는 진우와 재민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근데 진우야, 만약에 내가 같이 가자고 해도 너 학교는 어쩌고.”

희주는 재민에게 어깨동무했다. 진우를 보고 웃으면서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아, 학교를 생각 안 했네요. 뭐, 어떻게 되겠죠.”

“미친놈, 어떻게 들어간 의댄데 그만두려고?”

“형님, 진우 형 말뜻은 학교 졸업하고 의사 돼서 서울로 가겠다, 이 말일 듯한데요? 물론 저는 형 따라가서 노량진에서 시험 준비하면 되지만요.”

“야, 정재민. 너까지 나만 부산에 두고 서울에 갈 생각이었어?”

“아무튼, 우리 집에 가서 술이나 더 마시자. 오늘 미주도 친구 집 가서 잔다고 했으니, 이런 노마크 찬스를 날릴 순 없지.”

셋이 된 남자들은 나잇값도 못 하며 어깨동무를 하면서 룰루랄라 신나게 걸었다. 그들의 모습을 누군가가 봤다면 할 일 없는 동네 양아치들이 시끄럽게 몰려다니며 술이나 먹는다고 혀를 끌끌 차고 말았겠지만 말이다.

* * *

“으음…….”

문득 눈이 번쩍 떠졌다.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나 보다. 깊은 밤이 되었는지 TV는 재미없는 프로그램만 내보내고 있었다.

희주의 눈에 어지럽게 흩어진 맥주 캔과 그 옆에 빨래를 던져 놓은 것처럼 자는 진우의 모습이 보였다. 희주는 코를 골고 있는 진우를 향해 웃었다. 몸을 일으켜 리모컨을 집어서 TV를 꺼 버렸다.

“재민이는 할머니 방인가?”

돌아가신 할머니 방 문을 벌컥 하고 열었다. 술에 취한 재민이 조용히 엎드려 자고 있기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방문을 닫았다.

‘쏘리, 재민아. 순간 네가 혹시 술 취해서 미주 방에 들어갔나 의심했어. 미안, 미안.’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재민을 의심한 게 미안해져서인지 이불을 잘 덮어 주고 문을 닫았다.

발소리를 죽여 미주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문을 살짝 열어서 살펴보니 침대에 누워 있는 미주는 다른 이들처럼 꿈나라에 빠져 있는 듯했다.

미주가 깨지 않도록 문을 살살 닫았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시원하게 들이켰다.

“…….”

입가에 남은 물방울을 손등으로 한 번 닦아 냈다. 희주는 식탁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진 회장을 만난 지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난 것 같았다. 아직 그에게 어떤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진 회장은 저를 채근하지 않았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희주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너무 어지러웠다.

“하아…….”

깡패, 양아치, 싸움꾼, 저를 수식하는 단어.

희주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미주를 생각하면 지금의 삶을 끝내야만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진 회장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던 어머니는 몸이 약했다. 그래서인지 제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미주를 낳고는 동생이 돌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어머니를 만났을 무렵에는 조폭 조무래기였던 아버지는 그사이 중간 보스까지 올라갔지만, 어머니를 잃고 실의에 빠져 약과 술에 절어 살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그 후 늘 언제나 강인했던 할머니도 아들을 먼저 보낸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 아버지가 죽고 1년 뒤 노환으로 자식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던 ‘방울이 이모’ 아들, 진우.

부산에서 밀항 브로커 역할을 하던 야쿠자와 사귀었던 방울이 이모는 그 일본인 애인에게 버림받았다고 들었다. 그 충격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던 이모는 저보다 세 살 어렸던 진우를 어머니에게 부탁하면서 눈을 감았고 어머니는 진우를 친아들처럼 거둬 줬다.

진우와 친형제처럼 자라다가 늦둥이 여동생 미주가 태어났고, 어른들이 하나씩 제 운명을 다하면서 어느 순간 셋만 남아 버렸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깡패 아빠와 오빠 때문에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놀림도 많이 당하던 제 동생의 인생을 여기서 더 망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미주의 평범한 인생도 바랄 수 없게 돼 버릴지도 몰라.’

대학을 졸업한 미주가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 평안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게 희주의 작은 꿈이었다.

‘그땐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속에서 화가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어. 그냥 딱, 병신 새끼. 그게 바로 나였지.’

어느 순간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제대로 돌봐 주지 못했던 어린 미주는 어느새 자라 일찍 철이 든 눈으로 오빠를 보고 있었다. 동생의 순수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개차반인 인생을 살고 있을 때였다.

‘진우라도 정신 차려서 정말 다행이야.’

진 회장의 제안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서울로 가서 폼 나게, 가오 잡으면서 남자답게, 남들만큼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돈도 많이 벌어서 미주를 호강시켜 주고 풍족하게 떵떵거리며 좋은 곳으로 시집도 보내 주고픈 욕심도 있었다.

‘어쩌면 차현 그룹의 치열한 권력 다툼의 총알받이로 나를 쓰려고, 아니 적어도 아저씨를 지키는 충실한 개로 쓰려고 연락했다는 걸 알고 있잖아.’

지금은 멋진 중년의 재벌 회장님으로 모습을 바꿨지만 진 회장의 뿌리는 저와 같은 어둠의 세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위험할 거야, 진 회장 옆에 간다는 건.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혼자라면 몰라도 진우와 재민까지 이 위험한 도박에 끌어들일 순 없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잘못되면 미주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진우와 재민이가 잘 돌봐 주겠지만 두 사람도 잘못된다면? 그럼 혼자 남겨진 미주는?’

그들의 세계에서 보호자가 사라진 여자의 말로를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하게 살지 못한다면 벌어질 수 있는 수없이 많은 끔찍한 선택지들. 죽는 건 오히려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살아남은 여자들이 처하는 지옥보다 못한 삶을 많이 보았으니깐.

지금도 어쩌면 제가 가진 물리적인 힘과 이름에 얹어진 무거운 명성이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적으로부터 미주와 진우, 재민까지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야, 부산에서 그냥 손을 다 털고 조용히 살아가는 거야. 욕심내지 말고.’

희주가 결심한 듯 입술을 꼭 다물 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진우가 나타나 앞에 앉았다.

사실 진우는 이미 희주가 미주를 살펴볼 때부터 눈을 뜨고 있었다.

술기운이 조금 남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 식탁에 앉아 있는 희주를 발견했지만 말이다.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해 진우는 쉽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냐면 희주가 무엇 때문에 저토록 고민하고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정을 보니 결정했네요.”

조용한 진우의 목소리에 말없이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어떻게 들어간 의댄데 인제 와서 다 집어던지고 형 따라 서울 가려니, 너무 객기를 부리는 건가 싶기도 했네요.”

진우가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희주는 알고 있었다. 만약 부산에서 모든 걸 버리고 서울로 가자고 하면 두말없이 제 결정을 따를 진우였으니깐. 반대로 진우가 그러자 해도 희주 역시 그를 따라 서울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래서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진우에게 진심이 담긴 마음으로 말했다.

“고맙다, 진우야. 전부 다 고마워.”

쑥스러운 듯 진우가 담배 하나를 희주에게 건네면서 히죽였다.

“미주 자니까 창문 열면 지랄 안 하겠죠?”

잠시 후, 담배를 다 피웠는지 창문 닫히는 소리가 드르륵 나면서 “이제 그만 잡시다.”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발소리와 뒤이어 거실에서 몸을 뒤척이는 듯한 소리가 나는 듯하다가 이내 집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모두가 잠든 어둠 속에서 재민은 집 안이 조용해지자 살포시 눈을 떴다. 그리고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생각에 잠겼다.

‘형이 회장님 손을 놓기로 했구나.’

어쩌면 모두가 잠 못 이루는 어느 부산의 밤이었다.

* * *

그날은 여느 날과도 다름이 없던 평범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미주는 늘 지각과의 전쟁이었고 그런 미주를 깨워 학교에 보내는 것은 미성년자 동생의 보호자인 오빠의 일상이기도 했다.

“오빠, 오늘 저녁에는 고기, 고기 먹고 싶어! 완전 고기! 공부한다고 힘이 없어.”

“이 육식 동물 같으니라고.”

“야채는 노노! 고기 완전 사랑합니다. 오빠, 저녁에 집에서 고기 구워 먹자. 나 오늘 야자 안 하고 집에 올 거야.”

오늘도 역시 늦잠을 잔 미주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허둥지둥거리고 있었다. 아침밥은 안 먹어도 현관 앞 거울에서 머리와 얼굴을 매만지는 게 당연한 여고생 동생에게 희주는 소리쳤다.

“너 그럴 시간에 밥 한 숟갈이라도 먹어라. 거울 닳는다, 닳아!”

“오빠가 여자를 모르니깐 하는 말이야. 아무튼, 간다, 안녕.”

“미주야, 고기는 뭐? 삼겹살? 목살?”

“아무거나! 그런데 소고기면 더 좋고.”

신발을 신은 미주가 현관문 앞에서 희주를 향해 손을 한 번 흔들었다. 동생이 잽싸게 뛰어나가면서 소리치는 말에 힘들다는 듯 웃었다.

“저렇게 허둥대면서도 꼭 거울은 봐요. 어이구. 근데, 뭐? 내가 여자를 모른다고? 참, 나.”

하긴 제 사생활을 미주가 알 리 없었고 또 알릴 필요도 없지. 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하품하며 거실 소파에 몸을 던지듯 뉘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랠 대로 바랜 낡은 갈색 가죽 소파는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했다.

“아, 몇 시지? 아윽, 머리야.”

잠시 눈을 붙인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시간이 오후가 넘어가고 있었다.

배가 고파진 희주는 부엌에서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숙취 끝에 찾아오는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서 뚝딱 먹고는 창문을 열고 식탁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식후 땡이라는 이 꿀맛, 미주가 안다면 이렇게까지 금연하라고 난리 치진 않을 텐데.

이게 바로 사람 사는 맛이라고 생각하면서 희주는 며칠 전 진 회장과의 통화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희주야, 정말 부산에 남기로 한 거냐?’

‘네, 회장님. 죄송합니다. 아직 미주도 어리고 이제 싸움질도 그만하고 싶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그 말이지?’

‘네.’

‘네 아버지도 나한테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평범하게 네 엄마와 결혼해서 새끼 낳고 그렇게 살겠다고.’

‘…….’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인생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 네 아버지도 결국 죽을 때까지 조직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으니깐.’

‘…….’

‘희주야.’

‘네, 회장님.’

‘너는 네 아비처럼 살지 말거라.’

‘……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내가 부산에 내려갈 때 한번 보자꾸나.’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있을까?

‘그래, 이거면 돼. 그냥 술이나 마시면서 사는 거야.’

진우와 재민을 불러 술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필이면 시험 기간이라 둘 다 시간 내기 어렵다 해 혼자서 정말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고 또 마시며 생각했다. 제가 태어난 곳에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로 말이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미주야. 오빠 지금 하는 일 너 대학 가는 올해까지 다 청산하고 내년부턴 좀 생산적인 일을 시작해 볼까 해.”

“……나쁜 짓 하는 거 드디어 관둔다는 말이야?”

어제저녁, 미주를 앉혀 놓고 꽤 진지한 얼굴로 동생에게 앞으로의 새로운 인생 계획을 알렸다.

“응, 완전히 바로 발 빼기는 좀 어려워서 찬찬히 정리할 테니까 이제 더는 오빠 다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그럼 이제 싸움도 안 하고, 조폭 아저씨들이랑 어울리지 않을 거지?”

“응, 약속할게.”

“알았어, 오빠. 근데 뭐 할지 생각은 해 놓은 거야?”

미주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말에 희주가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모르겠어.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 장사를 해 볼까 싶기도 한데.”

“장사라…… 과연 오빠가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아니면 지금 부산 신항 공사 중이니까 공사 끝나면 거기서 뭔가 할 만한 일을 해 볼까 싶기도 해.”

“천천히 생각해 봐. 진우 오빠도 있고 재민 오빠도 있으니 같이 머리 맞대다 보면 좋은 수가 나올 거야. 오빠 말고 다른 오빠들은 똑똑하잖아.”

“그래, 똑띠 동생님. 너 대학 졸업시킬 돈 정도는 있으니깐 혹시나 등록금 걱정은 하지 말고.”

“응.”

제법 어른스럽게 웃는 미주가 이제는 꼬맹이가 아니라 어른 같은 얼굴로 기뻐하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다 컸다니. 희주는 그저 고마웠다.

“아, 이런 돛대였구나. 담배도 사러 나가야 하고. 흠, 미주 말대로 소고기나 사러 가야겠어.”

희주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재빨리 달그락거리며 제가 먹은 그릇을 깨끗이 치웠다. 주방 선반에서 노란색 커피 믹스를 하나 꺼내 전기 포트에 물을 데워 단잠을 쫓아냈다. 양치하고 대충 세수를 한 뒤 집을 나서려는 순간, 하늘을 한번 보니 새카만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침까지는 해가 쨍쨍했는데.”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사이에 언제 이리 날씨가 나빠진 건지, 곧 비가 올 듯했다. 우산을 가져갈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냉큼 우산 하나 집어 들고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동네에 있는 시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러다 걱정한 대로 비가 조금씩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가 이내 을씨년스럽게 어두워지며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점점 흩뿌려지는 비를 보며 우산을 펼쳤다.

“다시 펼치고 접고 말리는 게 귀찮아서 최대한 안 쓰고 버티려고 했는데.”

결국, 주르륵주르륵 내리는 비 앞에 희주가 졌다.

“사나이 모양 빠지게.”

입맛을 한 번 다시다 픽- 하고 웃으면서 미주 생각을 했다.

“맞다, 미주 우산 안 가지고 갔는데.”

아침에 우산을 안 가지고 간 동생이 생각났기에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미주 몫의 우산을 하나 더 챙기고는 동생을 데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야자 안 하고 온다고 했으니 5시면 마칠까?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어디서 시간 보내지?”

잠시 고민하다가 식육점 근처 시장 안에 있는 친구가 하는 횟집에 가서 잠시 엉덩이를 붙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야, 준식아. 나다. 지금 가게 문 열었냐? 어어, 지금 비 와서 미주 학교에 우산 가지고 나가는 길에 시간이 어중간해 너희 가게에서 시간 좀 때우려고. 그래, 금방 도착하니깐 조금 있다 보자.”

어린 시절 칼을 휘두르고 다녔던 친구는 이제 나쁜 짓은 그만두고 그 칼로 회를 뜨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문자도 안 보내고 그냥 가 봐야지. 얘가 얼마나 놀랄지 궁금하네.”

전화를 끊고는 미주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진 희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조금 느릿느릿하게 걸어 동네에 있는 재래시장 쪽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흩뿌리는 비는 이제 내린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희주는 우산을 다시 쥐고는 비를 피해 조금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이거 꽤 많이 오겠는데? 우산 없으면 미주 교복 다 젖겠다.”

이제는 새카만 비구름이 해를 완전히 가져 어두침침해지고 있던 어느 오후. 갑자기 내린 비에 한산한 거리에는 왕래하는 차가 많지 않았다.

희주의 발걸음이 4차선 도로의 짧은 신호등 앞에 멈췄다. 도로 맞은편 길가에 준식이가 하는 횟집 수족관이 보였다.

사실 평소라면 그냥 무단 횡단 하고 말았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꼭 이렇게 마음먹고 준법정신을 세우려고 할 때는 신호가 길단 말이야.”

희주가 투덜거리며 다른 손에 들고 있는 우산을 내려다보았다.

“사랑하는 내 동생, 비 맞으면 안 되지. 감기라도 걸려서 아플까 봐 이 오빠가 걱정하는 거 미주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희주가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잠깐 사이 신호가 바뀌었다. 저 멀리서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이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전조등을 켜지 않은 것 같은 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있었다.

“빨리 건너자. 준식이가 저기서 빨리 오라고 손짓하네.”

희주가 발걸음을 재촉하다 갑자기 뒤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어?”

끼이이익!

쿵!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한 치 앞을 못 볼 정도로 굵어지며 거세졌고 바닥에 흐르는 비는 붉게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순간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생각했을 때 몸이 땅으로 고꾸라졌다. 땅에 떨어진 남자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미주야. 내 동생 미주…….’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허망하고, 허무하게 세상 유일한 피붙이를 두고 죽을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천 근이라도 된 듯했다. 온몸이 부서지기라도 한 듯 제멋대로 날뛰는 통증에 정신이 자꾸만 까무러쳤다.

희주는 느낄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지금 누군가가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윤희주, 이 씨발 새끼. 내가 너 죽일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좆 같은 새끼. 네가 우리 형님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고는 네 목숨 붙어 있을 거로 생각했냐?”

그래, 제가 아는 목소리였다.

사춘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폭력으로 점철된 업보가 이렇게 되돌아왔다. 이제 겨우 속죄하듯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했는데 하늘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너 하나 죽는 거로 안 끝나. 씨발, 지옥에서 우리가 무슨 짓까지 하는지 잘 봐 둬.”

충무동의 노란 머리 놈이 지껄이는 말에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굳어 버린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 구급차라도 오고 있는 걸까?

더는 희주의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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