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복집 할매 손자들
* * *
부산釜山.
산과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그곳이 ‘부산직할시’라고 불렸던 시절, 일명 ‘매축지埋築地’라고 불리던 어느 작은 동네.
바다를 메워서 만든 땅이라고 매축지라고 불린 그곳은 한국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내려와 만든 판자촌이 형성된 곳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정만큼은 넘쳐흘렀던 그들의 고향.
아직 부산 시청이 남포동에 있었던 그 시절, 그들은 태어났다.
한복집 할매 손자들.
별난 한복집 할매 손자였던 희주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피붙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 미주와 함께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형제처럼 서로를 돌봐 주면서 서로를 지켜 주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찰나 같았던 평화로운 나날들.
“내가 집에서 담배 피우지 말랬지? 여기가 무슨 너구리 굴이야? 아유, 이 연기!”
이것들이 진짜! 미주는 온 힘을 다해 방문을 벌컥 열었다.
허리에 양손을 얹고는 씩씩거리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말이다.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희주와 진우를 보자니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진짜! 자꾸 하지 말라니깐 더 하고 있잖아, 이것들아!”
“가시나, 성질머리하고는.”
미주가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것도 모자라 발까지 쿵쿵거렸다.
담배 피우지 말라고 난리 치는 꼴을 보자 진우는 급히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꼈다. 슬그머니 그녀를 위아래로 흘겨보면서 중얼거렸다.
“야, 윤모개(모과의 사투리). 너 요새 말본새가 왜 그러냐? 오빠들한테 이것들이 뭐냐? 엉?”
진우도 지지 않으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주와 같은 모양새로 허리에 손을 얹고는 무섭게 눈을 부라리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기세등등하게 성큼성큼 미주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 살짝 위협해 보면서.
“오빠는 무슨. 이봐요, 진우 오라버니.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지 맨날 동생 앞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밖에서는 맨날 쌈질이잖아. 나보다 연장자라고 해서 오빠 오빠 하면서 존경하고 존중해 줄 알아? 난 그럴 생각 눈곱만큼도 없거든.”
진우의 의도적인 무서운 모습에도 미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진우를 올려다보면서 지지 않으려고 눈꼬리를 확 올리며 쏘아붙일 뿐.
“뭐? 이봐요? 이 가시나가! 진짜, 아오. 희주 형, 형 동생 고등학교 가더니 지가 다 큰 줄 알아!”
“왜? 나 다 컸거든? 오빠야말로 뒤늦게 의대 갔다고 뻐기지 마, 재수 없어.”
말싸움이 시작되면 희주는 동생을 이기지 못했다. 슬쩍 뒤에서 미주의 눈치만 보고 있던 희주는 동생을 진우에게 토스하고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걸 미주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빠도! 쫌! 담배 쫌!”
“알았어, 미안해, 미주야. 다시는 안 그럴게.”
“형, 얘 봐주지 말아요, 아오! 이 가시나가 진짜 코 찔찔 흘릴 때부터 오냐오냐해 줬더니 뭐? 재수 없다고? 이게 진짜, 악-!”
진우의 정강이를 걷어찬 미주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째려보았다.
“야, 윤미주, 윤모개, 윤똥개. 너 이리 와. 너 잡히면 죽을 줄 알아! 너 일로 안 와?”
“안 갈 건데?”
진우에게 회심의 한 방을 날린 미주가 혀를 내밀고는 얄밉게 약을 올린 후 잽싸게 제 방으로 가려고 했으나 아뿔싸, 진우가 한 발 더 빨랐다.
“윤모개, 이 가시나가.”
몇 걸음 가지 못한 채 진우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 결과는 늘 이랬다. 둘이서 맨날 이렇게 엉망진창 와진창으로 싸우기.
“가시나가 갈수록 입이 험해져서 너 어쩔 거냐? 엉?”
진우는 한 손으로 미주를 붙잡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아마도 소파 쿠션일 그것을 냅다 집어 들었다. 도망가려고 버둥거리는 미주를 살살 때리는 시늉을 하자 물론 미주는 죽는다고 소리를 쳤고.
“일단 넌, 맞고 시작해야 해.”
“오빠! 진우 오빠가 날 때려! 깡패가 사람 치네! 으악! 사람 살려.”
“어쭈, 이것 봐라? 이럴 때만 꼭 친오빠 찾으시고? 뭐? 깡패? 야, 내가 손 턴 지가 언젠데, 이 가시나!”
“오빠, 깡패가 날 때려! 보고만 있을 거야?”
“나 참, 지는 깡패 동생 주제에… 뭐가 어째?”
미주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희주를 보며 깔깔거리며 소리쳤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필시 덩치 좋은 남자가 어린 여자애를 패대기치는 매우 흉악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쿠션이라 해도 진짜로 진우가 힘을 주고 때리면 미주가 다칠 게 뻔했기에 그저 휘두르는 시늉만 하고 있었을 뿐.
오히려 진우는 미주가 있는 힘껏 휘두르는 이상한 주먹질을 막아 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둘 다 인제 그만하자, 응?”
희주는 그저 여동생과 잘 놀아 주는 가장 친한 동생인 진우가 고생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한참을 미주와 진우의 전쟁을 남 일처럼 쳐다보던 희주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이것들아, 밥 먹자. 고만 싸워. 너희 사랑싸움하니?”
“뭔 소리야!”
“우웩.”
희주의 농담 섞인 말에 진우는 토악질하는 흉내를 내고 미주는 소리를 질러 댔다.
“오빠!”
“형!”
잔뜩 흥분된 두 사람의 기세에 살짝 주눅이 든 희주는 슬쩍 웃으면서 두 사람을 말렸다.
“밥 먹고 싸워.”
“오빠, 뭐 먹을 거야?”
“글쎄, 중국집이나 시켜 먹을까?”
씩씩거리는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각자 외쳤다.
“오빠, 난 탕수육에 짜장면.”
“형, 나는 깐풍기에 짬뽕.”
“메뉴 통일 좀 하지, 진우 오빠?”
“나는 먹고 싶은 것도 못 먹냐? 윤미주, 이 못생긴 게.”
또다시 시작된 진우와 미주의 말싸움이 벌어지든 말든 희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이젠 그러려니 했다.
희주는 아무 생각 없이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다가 멈칫하고는 둘에게 물었다.
“근데 재민이는 언제 온다고 했지?”
“아, 형. 재민이 아까 서면에 간다고…….”
말끝을 흐리는 진우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눈치챘다. 희주는 미주는 모르게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고, 진우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재민 오빠는 아마도 볶음밥 쪽일걸? 재민 오빠는 면 싫어해.”
“알았어, 미주야. 내가 적당히 시킬 테니까 고만 싸우고 재민이한테 전화나 해 봐, 어디쯤인지.”
“어, 알았어.”
미주가 진우를 째려보면서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는 어느 큰 성인 오락실 근처에서 재민은 초조한 얼굴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희주 형네 가서 모처럼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전화에 마음이 불안했다.
한동안은 직접 대면한 적 없었는데 왜 갑자기 불러내는 건지, 재민은 이유를 알 만했지만, 호출을 거절할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는 듯 담배만 피워 대고 있을 때쯤 오락실 안에서 남루한 행색을 한 중년 남자가 나왔다.
“재민아.”
“아버지, 또 무슨 일로 전화하신 겁니까?”
“아, 그게… 돈이 조금 필요한데…….”
혹시 했더니 역시였다. 처음 이곳으로 불렀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이번에는 아니길 빌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화병으로 죽어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손모가지를 자르면 발로도 한다는 무서운 중독, 도박.
“아버지, 제발 정신 차리세요. 저, 학교도 겨우 다니고 있어요. 그러니 제발! 죽든 말든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저 돈 없습니다. 아버지가 다 탕진한 덕분에 간신히 죽지 않고 버티는 중이라고요!”
미간에 힘을 주며 간청하는 말에 늙은 남자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재민아, 못난 애비라…… 미안하다.”
“저, 더는 아버지 안 봅니다. 그러니 알아서 잘 사세요. 저까지 아버지 시궁창 인생에 끌어들이지 말라고요!”
조금은 울먹이는 것 같은 아들의 목소리에 아버지는 잘못을 안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연신 “미안하다.”라고 사과를 했지만, 재민은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렸다. 주먹을 꽉 쥐고 앞만 보며 걸으면서 이미 사춘기 시절부터 수없이 다짐했던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않아,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날 거야.’
출세하고 싶었다. 돈을 벌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부모를 선택해 태어나고 싶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아 재민이 안경을 한 번 추켜세울 때, 핸드폰이 울렸다.
“어, 미주야. 응? 잘했어. 어, 이제 볼일 보고 가고 있으니 형한테 금방 간다고 말해.”
면은 불까 봐 밥으로 시켰다는 귀여운 미주의 말에 재민은 겨우 웃음을 되찾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진짜 제 가족일지 모르는 이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재민이 희주의 집 앞에 도착하니 대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이 집은 언제나 문단속을 제대로 안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이내 집주인이 윤희주인데 부산에서 누가 형의 집을 털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음이 나온 재민이 현관 앞에 섰을 때 인기척을 들었는지 미주가 벌써 쪼르르 달려 나왔다. 문을 열면서 활짝 웃으며 반갑게 저를 맞아 주는 예쁘고 귀여운 희주 형의 동생.
“오빠, 왔어? 우리 짜장면 이제 막 도착했는데. 나이스 타이밍! 빨리 같이, 윽-!”
반가운 표정으로 재민에게 재잘대던 미주가 갑자기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마치 뒤에서 누군가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것 같은 미주를 황급히 잡아 준다는 게, 마치 껴안는 자세처럼 되어 버렸다.
미주를 뒤에서 발로 밀었는지 등 뒤에서 의기양양하게 저를 보며 손으로 V 자를 그리는 진우가 보였다. 어휴, 저 형은 언제 나잇값을 하려나.
“형님, 여자애를 발로 차면 어떡해요? 미주야, 괜찮니?”
“응, 괜찮아.”
얼떨결에 품에 들어온 미주가 괜찮다고 올려다보면서 조그맣게 대답할 때 시선이 얽혔다.
“내가 진우 형 혼내 줄게.”
잠시 멍하게 저를 올려다보던 미주가 볼이 조금 붉어졌다. 부끄러운 듯 품에서 벗어나 그래 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모르게 두 사람이 조금 머쓱한 분위기를 느낄 때, 미주는 이상한 공기를 참지 못하고는 도망치듯 소리 지르며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야! 서진우! 진짜 죽을래?”
미주가 휙 하고 몸을 돌려 저를 공처럼 차 버린 이를 죽일 듯이 째려보았다. 진우는 미주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겁이 났는지 슬그머니 재민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재민아, 넌 볶음밥이라 안 불었어, 빨리 먹자.”
진우가 실실 웃으며 빨리 들어오라고 재민에게 손짓했다. 그것은 마치 빨리 들어와서 뿔이 잔뜩 나 있을 미주에게서 저를 보호해 달라는 무언의 대화이기도 했다.
재민은 진우의 도와 달라는 간절한 눈빛에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이제 미주도 열아홉 살이에요, 형님. 어릴 때도 아니고 그만 좀…….”
“재민아, 내 말 좀 들어 봐. 모개가 다 컸다고 얼마나 날 괴롭히는지 네가 알면 그런 소리 못 한다.”
진우는 집 안으로 들어서는 재민에게 미주에 대한 불만을 따다다다 쏘아 댔다.
“미주가 괴롭혀 봤자, 형이 괴롭히는 것만 하겠어요?”
하지만 재민이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자, 제 편을 들어 주는 재민의 옆에 선 미주가 진우를 향해 혀를 날름 내미는 게 아닌가.
“야! 이게 진짜! 씨- 진짜 주먹이 운다, 울어.”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는 한복집 할매 집에서 희주는 재민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우리 미주가 좋아하는 재민이, 빨리 와서 앉아서 먹자.”
“오빠! 뭔 소리야? 미쳤어?”
희주의 농담 섞인 놀리는 말에 미주는 왜 그러냐면서 얼굴이 빨개진 채 소리 질러 댔다. 가만히 있던 친오빠마저 제 편이 아니라니. 돌아 버리겠네, 정말!
그런데 그새를 못 참고 윤씨 남매 사이로 진우가 끼어들었다.
“오구오구, 우리 윤모개, 부끄러워서 그래요?”
“아, 씨! 됐어! 나 밥 안 먹어!”
두 남자의 놀림에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린 미주는 밥 안 먹겠다고 소리치며 발을 쿵쿵거렸다. 화가 났는지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쾅- 하고 닫아 버렸다.
물론 희주와 진우가 사고 친 결과를 수습하는 건 늘 언제나 재민의 몫이었다.
“미주야,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응? 나와서 같이 먹자, 응?”
재민이 한참이나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방에 틀어박힌 미주를 문 앞에서 서서 달랬다. 볼이 퉁퉁 부은 미주가 마지못해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진짜, 자꾸 이러면 나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거야, 각오해.”
미주는 투덜거리면서 거실로 나와 거실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알았어, 농담, 농담. 우리 동생 화 많이 났구나. 오빠가 미안해.”
저를 달래는 희주를 미주가 눈이 찢어지라 째려봤다. 흥, 소리를 내며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갈랐다.
이미 면들은 붇다 못해 국물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 누구도 불평 없이 맛있게 먹었다. 여기서 또 면이 불었네, 말았네 했다가는 이마저도 먹지 못할 걸 다들 알았으니까. 휴전 상태로 돌입한 듯 조용히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조용해진 한복집 할매 집에서는 호로록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남자들이 소주를 나눠 마시고 있을 때, 미주는 그런 오빠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맛을 한번 다셔 보았다.
“왜? 너도 한잔할래?”
진우가 웃으면서 권하는 말이 화해 신호임을 알았다. 미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주에게 슬쩍 물었다.
“오빠가 허락하면.”
“술은 어른들한테 배우는 게 맞기는 하지. 진우야, 딱 한 잔만 미주 줘.”
“오케이, 모개야, 기다려 봐.”
허락이 떨어지자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하게 주방 선반에서 소주잔을 하나 꺼내 미주 앞에 놓았다.
미주는 신난 얼굴로 어디서 본 건 많은 듯 양손으로 진우가 주는 술을 받았다. 동생의 잔이 채워지자 희주가 건배를 제안했다.
“이제 고3이 된 미주가 진우랑 재민이랑 같은 대학을 가길 바라면서, 자! 건배!”
“건배!”
“됐어, 난 서울에 있는 대학 갈 거야!”
희주의 선창에 진우가 뒤이어 외치는 소리와 미주의 질색 속에서 다들 웃으면서 술을 나눠 마셨다.
“미주야, 소주 맛 어때?”
“음…… 너무 달아, 맛있어. 꿀이야, 꿀.”
남자 세 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각자의 탄성을 내면서 말을 쏟아 냈다.
“역시, 내 동생. 윤씨 핏줄이 어디 가진 않지.”
“희주 형, 조심하셔야겠어요. 미주가 어쩌면 형님을 뛰어넘는 술꾼이 될지도.”
“아, 나는 우리 모개가 빨리 성인 돼서 배틀 한번 떠 보고 싶어지네, 싹수가 아주!”
미주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속으로 웃었다.
‘바보들, 작년에 수학여행 가서 수현이랑 선생님 몰래 소주 몇 병이나 깠는데.’
이제는 식사가 아니라 안주 삼아 남자들이 음식을 집어 먹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배부른 미주는 할머니 방에서 책을 하나 가져와 소파로 올라가 옆으로 누웠다.
“진우야, 그거 뭐라고 해야 하지? 본격적인 의사 공부는 내년부터 하는 거야?”
“네, 형. 올해까진 예과라 조금 널널할 수 있는데, 방학 때 골학이 기다리고 있어 벌써 머리가 아프네요.”
“그래도 자식, 대단하다, 정말. 난 네가 갑자기 대학을 가겠다 하길래 걱정 많이 했는데. 의대라니.”
희주가 진우의 어깨를 한 번 툭- 치면서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진우는 희주의 잔에 제 잔을 부딪치고는 한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재민이는 판검사 되고, 진우는 의사가 되다니. 나중에 동네 입구에 플래카드 붙여야겠어.”
“형, 나는 됐고. 재민이나 사법고시 붙으면 꽃가마 만들어서 동네 한 바퀴나 돕시다.”
“나도 됐네요. 진우 형. 아직 시험 준비도 안 하는데 무슨.”
세 사람의 말을 들으며 미주는 부른 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잠시 옛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싸움질만 해 대던 진우가 군대를 다녀오더니 갑자기 공부하겠다고 해 모두를 당혹시켰던 3년 전이 떠올랐다. 물론 미주도 알고 있었다. 진우도 재민처럼 엄청나게 똑똑하고 머리가 좋은 일명 ‘수재’였다는 걸 말이다.
그렇지만 좋은 머리를 공부하는 데 안 쓰고 불량한 길로 잠시 들어섰었던 지난날. 희주와 함께 동네를 넘어서서 사실상 남포동 쪽까지 장악한 진우는 희주와 일종의 조직 비슷한 걸 이루기도 했었다.
진우는 이제 정신을 차리고 미래를 위해 갈 길을 찾았지만, 오빠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어 미주는 매우 안타까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보호자가 없는 희주에게 내밀어지던 불량한 손길들.
미주가 기억하는 그때 오빠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해 그것을 분출한 곳이 필요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싸우다 보니 어느새 진짜 무서운 사람들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이름을 날리던 중 희주도 철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는 이유 없는 충돌은 피한 채 조용히 살고자 현재 노력하는 중이었다. 진우는 늦깎이 의대생이, 재민은 법대생이 되어 부산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물론 진우의 개과천선과 재민의 타고난 명석함은 미주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을 본받아 열심히 공부했고, 소위 말하는 ‘전교에서 노는 등수’일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아무튼, 내년이면 미주도 대학생 되니깐 이젠 나만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하면 되겠네.”
미주가 잠시 회상에 빠져 있다가 희주의 말에 다시 현실로 돌아와 대꾸했다.
“오빠도 검정고시 봐서 일단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따 놓는 게 어떨까?”
“사랑하는 동생아, 미안하지만 이 오빠 공부는 딱 싫거든?”
“오빠, 고등학교 중퇴는 좀 심하잖아.”
“재민아, 진우야. 우리 담배나 피우고 올까?”
“얘 봐라, 파우스트?”
제가 읽고 있는 책 제목을 진우가 보더니 웃기지도 않는다는 혀를 차자 미주가 발끈했다.
“왜? 나도 괴테 이런 거 읽어.”
“퍽이나.”
“참 나, 오빠가 뭘 알아? 이 책은 아빠가 엄마한테 선물로 준 건데. 앞 장에 ‘나의 샤롯데, 미희에게’라고 적혀 있는 거 봐 봐. 우리 아빠가 한때는 로맨티시스트였다니, 믿을 수가 없지만.”
“책이 삭다 못해 바스러지겠다. 아줌마가 아가씨 때면 오래되긴 오래됐겠다만.”
진우는 뭔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미주를 슬슬 놀렸다.
“파우스트 상권만 읽으면 뭐 하냐? 하권도 빌려서 읽어라, 좀. 쯧쯧.”
“아, 시끄러워. 좀 꺼져 줬으면.”
“중2병이 고3 때 오는 것도 참 문젠 거 같다, 그치 미주야?”
“아, 짜증 나거든? 진짜 좀 꺼져 줄래, 서진우?”
“이게 오빠한테 반말이나 하고.”
미주가 슬슬 발동 거는 것 같았다. 희주가 슬쩍 눈치를 주자 알겠다는 듯 잔에 남은 술을 깨끗이 비운 남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이나 좀 쐴까?”
“몸이 좀 뻐근하긴 하네요, 형.”
미주는 담배 피우러 나가는 핑계도 가지각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나갈 거면 빈 그릇 치워서 가지고 나가 줘. 나는 테이블 닦고 뒷정리할 테니깐.”
미주의 등쌀에 집에서 나와 집 밖 공터에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를 입에 물고는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할 때였다.
희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
혹시나 하는 마음을 느끼는 동시에 어째서라는 생각을 한 희주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뵙겠습니다.”
누구랑 통화하기에 희주 형이 저리 공손한 걸까? 재민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진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진우는 그런 재민의 어깨에 살짝 팔을 걸치며 말없이 담배를 권했다. 통화가 끝난 희주가 조금은 어두운 표정으로 머쓱한 듯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아무 말 없이 진우가 재민에게 건넨 담배를 빼앗아 제 입에 물었다.
“…….”
담배를 다 피울 동안 진우와 재민이 아무것도 묻지 않아, 희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우야, 서울에서 손님이 오실 것 같다.”
재민은 서울에서 오는 손님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시작된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들의 시간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다는 손님은 함흥차사였고 누가 오긴 오는 거냐며 기억에서 흐려질 때쯤 다시 울리는 희주의 핸드폰.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았다.
그들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각자 한 걸음씩 걷기 시작한 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