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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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작품에 등장하는 단체나 인물은 모두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허구임을 밝힙니다. 또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부산 출신 캐릭터의 경우 대화에 있어 몇몇 단어나 표현을 제외하고는 사투리 서술을 지양하였습니다.
프롤로그
바늘 끝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두 사람이 있었다.
차현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야경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자리에는 질식할 것 같은 긴장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도,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오늘 날씨가 좋았네, 어땠네 하는 시시콜콜한 잡담이라도 한다면 이 파랗게 날 선 공기가 조금은 부드러워질 수 있을 텐데.
입을 다문 여자와 침묵하고 있는 남자.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공기만 무겁게 가라앉고 있을 때,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윤미주 씨, 내가 최근에 좀 재밌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제 말에 미주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연호가 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을 꺼냈다.
미주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대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혹시 저에게 있었던 일들을 모두 알고 하는 말은 아닐까?
“그쪽이 서울에 올 일 없이 그냥 부산에서 쭉 살았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조용한 삶을 살았을 텐데 말이야.”
연호의 말에 미주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알고 있어, 차연호 이 사람, 다 알고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야.’
갑자기 얼음이라도 쥔 것처럼 손이 차가워졌다. 긴장감에 손에 땀이 나면서 손끝이 바르르 떨린다고 느껴질 때 연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알겠지만 나는 서 실장, 아니 서진우 그 새끼, 꼴도 보기 싫어. 물론 그 새끼 밑에 있는 안경잡이 놈도 마찬가지지만.”
갑자기 목이라도 타는 듯 조금 남은 와인을 손에 든 연호가 천천히 음미하듯 마셨다. 그러고는 일부러 탁- 하며 테이블에 잔을 올려놓는 소리가 미주의 귀에 위협적으로 들렸다.
제가 알고 있는 진우와 연호의 적대적 관계는 연호 쪽이 더 악의가 깊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윤미주 씨. 내가 그쪽한테 재밌는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어때, 들어 볼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
일부러 동요하지 않는 척하는 저를 바라보는 연호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음을 미주는 느꼈다.
‘그래, 나는 알고 있어. 저런 눈 본 적이 있어.’
더없이 차갑고 냉정한 눈빛.
“공소시효 8년 남은 건 알고 있지?(현재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2015년 이전입니다.)”
미주는 테이블 아래 숨겨 둔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떠는 손을 보지 않았기를 빌면서 차분히 숨을 골라 보지만, 당혹감이 스치는 얼굴을 완전히 숨길 수가 없었다.
“윤미주 씨 지금 표정을 보니 그쪽도 몰랐던 일은 아니었네. 내 예상이 맞았어. 역시 대단해. 너도 서진우 그 새끼도…….”
그래, 사실은 미주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란 진우가 저를 위해서 했던 일은 복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끔찍한 행위였다.
물론 그때도 진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런 일을 당해도 싼 놈들이라 생각했기에 더는 진우가 자신을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더는 알려고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우린 죄를 지은 게 아니야, 하늘을 대신해 우리 손으로, 오빠 손으로 그들을 심판한 거야.’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을 다물고 8년만 더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니고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알아 버렸다.
차연호.
차현 그룹의 다음 회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차현 그룹 창업주의 3대.
밀물처럼 밀려드는 마음속 불안감을 숨길 수가 없어질 때, 연호는 벌벌 떠는 미주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보며 말을 이어 갔다.
“똑똑하신 윤미주가 이쯤 되면 나한테 이렇게 물어야지, 이제 와서 왜 옛날 일을 꺼내냐고.”
“……왜 지금 지난 일을 제 앞에서 언급하시는 건가요?”
“글쎄, 나는 왠지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느껴졌거든.”
그런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여유를 부리는 연호와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미주 사이에 눈치 없는 메인요리가 끼어들고 있었다.
“아, 스테이크.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연호는 나이프를 들고는 스테이크를 몇 점 썰어 먹었다. 혀끝에 감기는 비릿한 피 맛이 매우 좋았다.
우아한 동작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연호가 냅킨으로 입술 주변을 훔친 다음 미주를 응시했다.
그녀는 제가 던져 놓은 먹잇감에 쉽사리 손을 뻗지 않고 이를 악문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연호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건방지고 자존심 세우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여자를 완전히 꺾어 버릴 수 있게 된 묘수에 감탄해 보면서.
앞에 놓인 와인을 한 모금 혀로 굴리며 삼키고는 미주를 향해 무심한 듯 말을 던졌다.
“넌 나와 결혼을 하게 될 거야.”
“……!”
미주의 아몬드 모양 눈이 크게 떠졌다. 결혼이라니, 이 인간이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이건 내가 너한테 동의를 구하거나 부탁을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시키는 대로 너는 해야만 하는 거지.”
“차 차장님. 와인 몇 잔에 취하셨나 보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 하고. 못 들은 거로 할게요.”
미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연호는 그녀의 말을 뭉개 버리며 더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넌 해야만 해. 할 수밖에 없어. 내가 아는 윤미주는 정말이지 서진우랑 정재민을 아끼고 사랑하고 좋아하니깐 말이야.”
“당신 미쳤군요.”
“아니, 불행히도 난 멀쩡해.”
“싫어요, 당신이랑 결혼이라니. 그냥 지금 바로 나가 죽으라고 해요. 그럼 죽는시늉이라도 할 테니깐. 아니, 진짜 난 죽을 수 있어요.”
미주는 극단적인 표현을 써 가면서까지 온몸으로 그를 거부했다. 하지만 연호는 개의치 않다는 듯 웃으며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네가 죽는 걸 보고 싶긴 한데, 아직은 아니야.”
“…….”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나와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서진우 그 새끼가 살인죄로 감방에서 영원히 썩는 걸 보든지.”
“……!”
누군가 몸에 얼음물이라도 부은 듯,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몸이 차갑게 식었다.
역시 맞았다. 이 남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 한 명 더 엮을 수 있더라고. 살인방조죄라는 거 들어 봤지? 정재민 그 새끼도 거기에 있었거든.”
“아…….”
미주는 분노로 몸을 떨면서 연호를 바라봤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당신은 죽었어.
“내가 당신 같은 인간의 말 들을 것 같아요? 나는 내 목숨 따위 아깝지 않아. 이미 한 번 죽었으니깐. 그러니 절대로! 차연호 네 뜻대로 할 수 없을 거야.”
“아직 공소시효가 남아 있고, 나한테는 증거가 있지. 그리고 사람 셋이면 아무리 서진우가 손을 쓴다고 한들 최소 무기징역, 그리고 사형이지.”
“뭐?”
“아, 다행인 건 요즘에는 사형선고 받아도 사실상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잖아? 목숨은 부지하겠지만 살아서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할 거야. 뭐, 정재민 그 새끼는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저를 위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힌 진우와 옆에서 도운 재민의 인생이 이 순간 송두리째 부서질 수 있었다.
‘나만 아니었으면, 내가 그때 그냥 죽었다면 오빠들이 이렇게 죄를 짓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미주가 눈물을 삼키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최대한 차분히 생각해 보려 애써 보지만 돌아오는 건 더없는 깊은 절망감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호의 협박을 사실상 빠져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서 그가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진우 오빠가 그렇게도 밉다면 사람을 죽인 증거를 찾아냈으니 그냥 경찰에 가서 말하면 될 텐데, 왜 굳이 나와 결혼을 하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설마, 그 잘난 머리가 지금 멈춰 버리기라도 한 거야? 잘 생각해 봐. 내가 널 원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쩌면 조금 모욕적일 수 있는 말에 미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부들부들 떠는 걸 구경하는 게 연호는 재미있었다.
서진우의 스모킹 건인 윤미주를 옆에 둔다면 그 건방진 새끼가 더는 함부로 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미주도 바보는 아니었다. 아니, 제가 바라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쪽 인질이 돼라, 그 말이잖아요.”
“역시 똑똑해.”
“그런데 진우 오빠를 견제하려고 나를 당신 옆에 두려 한다 해도 굳이 결혼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법적으로 너를 나한테 묶어 놓으면 네가 더는 필요 없어졌을 때 처리하기가 쉽지 않겠어? 남도 아니니깐.”
연호의 입에서 나오는 충격적인 말에 미주는 벼락 맞은 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처음부터 연호가 목적을 위해 접근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순간순간 스치는 그의 다정함에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저를 만나기 위해 자동차까지 집 앞으로 보내 준 그에게 머리로는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을 완전히 감출 수가 없었는데.
‘설마 차연호가 정말 나한테 관심 있다고 생각이라도 한 거야? 윤미주, 정신 차려. 여긴 정글이야.’
강하지 않으면 잡아먹히고 마는 잔인하고도 잔혹한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세상 속에서 미주는 늘 안전했다.
진우가, 그리고 재민이 지켜 주는 세상 속에서 더는 아픔을 겪지 않고 두 남자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우산 아래에서 비바람 없이 늘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 재벌 3세라고 불리는 남자로부터 그들을 지켜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오빠들한테 받았던 이 모든 것에 대해 보답을 해야만 해.’
진우와 재민을 안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제 안위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이 남자에게 죽을 목숨이라면 지금까지 날 살게 해 준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차갑게 식은 몸에 다시 피가 도는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 이럴 때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희주 오빠가 늘 이야기했었지.’
저를 보는 미주가 조소를 띠자 연호도 입꼬리를 올리며 화답해 줬다.
‘너무 쉽게 몰락시키면 재미가 없으니깐.’
살인죄로 진우를 처리하는 건 너무 쉬웠다. 좀 더 제 눈엣가시를 괴롭히고 그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었다.
미주가 제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혹여 진우가 미주를 손에 쥔 하나의 패로 생각해 쉽게 버리거나, 또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상관없었다.
‘서진우, 네가 지금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걸 내가 농락해서 가지고 놀다가 버리는 걸 천천히 지켜보라고.’
그녀를 함락시키고 싶은 건 제 자리를 위협하는 놈에 대한 견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서진우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미주를 손에 넣고 싶었다.
‘한번 자고 나면 이런 이상한 생각도 더는 안 나겠지.’
머릿속에는 온통 미주 생각뿐이라는 걸 연호는 부정했다. 오히려 적절하지 못한 방법으로 상처 많은 그녀를 지금 옆에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그때, 뭔가 결심한 듯 미주가 천천히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집어 드는 게 보였다.
미주는 싸늘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제 뜻을 알아차린 연호도 와인 잔을 들고는 쨍- 하는 소리가 나게 부딪쳤다.
“Deal?”
연호의 물음에 미주는 차분히 대답했다.
“Deal.”
계약 성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