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종장.(2)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로윈 백작이 살해당한 날이.
알렉스는 그날 그녀에게 와서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괜찮지 않았다.
이자벨은 구겨진 편지지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안부에 대한 물음 하나 없는 건조한 편지는 오로지 용건에 대해서만 적혀 있었다.
「……별채의 일층 왼쪽에서 세 번째 방으로 나오게 된다. 그 방의 창은 별채의 뒷문과 가장 가까우므로…….」
이자벨에게. 라는 짧은 단어 하나 쓰여 있지 않았다. 로윈 저택을 탈출할 수 있는 대피로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뿐이었다.
그녀는 양부답다고 생각하면서 편지를 책 사이에 끼웠다. 조금이라도 구겨진 게 펴질 수 있게.
알렉스가 왜 그렇게 굴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녀의 양부는 정면으로 이자벨에게 로윈 저택을 나오라고 하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까지 이자벨을 외면해 온 주제에 이제 와서?
이자벨은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에는 늘 이렇게 한발 늦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다릴 때는 오지 않더니, 원하지 않을 때는 오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버지, 이제 와서 나를 구해 주고 싶어요?
“날 버릴 건가요? 또다시?”
이자벨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늘 여유로운 사냥꾼 같았던 알렉스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허락해 줘요, 이자벨.”
네 아버지를 죽이는 일을?
이자벨은 첫 번째 생에 있었던 일이 반복되는 것만 같았다. 흐려진 눈은 과거를 되짚고 있었다.
“……내 허락이 필요하니?”
“날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해요.”
“난 널 버리지 않았어. 그냥 지쳤을 뿐이지.”
첫 번째 생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이자벨의 말에 알렉스는 속삭였다.
“……이번에도 내가 그를 죽이면, 이자벨, 당신은 지칠까.”
“그냥 편지야, 알렉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믿고…….”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알렉스는 이자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도록 후회했으니까.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내 마음도?”
이자벨은 메마른 어조로 반문했다. 그들은 여전히 마주 보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알렉스가 했던 말들을 되풀이했다.
“내가 수십 번 내 마음을 증명해도?”
알렉스는 그녀의 질문에 침묵했다. 그것만큼 확실한 대답이 없었다.
“그렇구나.”
이자벨은 더는 묻지 않았다.
겨우 며칠 전이었다. 이자벨은 알렉스에게 그녀와 함께 있어서 행복하냐고 물었다. 알렉스는 그렇다고 했다.
이자벨은 그 대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는 아주 섬세하게 키워야만 하는 연약한 화초처럼 이자벨을 지켜봤다. 금방이라도 죽어 버리지 않을지. 시들어 버리지 않을지. 그런 눈으로.
이자벨은 그와의 관계가 애초에 뒤틀린 관계라는 걸 마침내 인정했다. 함께하더라도 둘은 행복해지는 게 아니었다. 단지 조금 덜 불행해질 뿐.
그녀는 그와 행복해지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건 쉽지 않았다. 너무 오랜 세월을 기다린 게 오히려 문제라면 문제일까.
이자벨은 알렉스가 백작의 죽음을 빌었던 날 이후로 그녀를 가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녀의 행동에 아무런 제약도 걸지 않았다. 다만 낮 동안 자리를 비우는 일이 사라졌다. 가만히 이자벨의 곁에 머무를 뿐이었다.
이자벨은 그런 알렉스를 외면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대화가 적어졌을 뿐, 아슬아슬한 침묵 속에서 둘은 끝이 정해져 있는 평온을 누렸다.
“……왜 날 가둬 두지 않아?”
햇살이 떨어지는 바깥은 이자벨의 창가에서도 훤히 보였다. 사실 창을 바라볼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으니까.
알렉스는 이자벨의 질문에 몹시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당신을 가둬요? 내가 싫으면 차라리 도망쳐요. 난 당신을 절대 가둬 두지 않을 테니까.”
부드럽게 포장된 말 속에는 예민함이 숨겨져 있었다.
이자벨은 창에 등을 기댄 채 알렉스를 응시했다.
“죽을까 봐?”
“네. 이자벨. 살아서 도망쳐요. 죽지 말고.”
내가 계속 잡아 오면 되니까.
그녀가 도망칠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답변에 이자벨은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로윈 저택의 정원은 가문의 위세와 걸맞지 않게 무난했다. 초라하지 않을 정도로만 꾸며진 정원에는 정원사 몇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번째 생의 죽음은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알렉스와 떨어졌던 정원도 이때와 똑같았을까.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생도, 두 번째 생도, 세 번째 생도, 결국 완전히 같진 않았으니까.
이자벨은 거기서 희망을 찾고 나아졌지만, 알렉스는 거기서 절망을 찾은 모양이었다.
뭘 어떻게 하면 너한테 믿음을 줄 수 있을까?
그녀는 알렉스의 목에 팔을 감고 키스했다. 그는 몸을 수그렸고, 혀가 달게 서로 엉켰다. 알렉스의 손짓 몇 번에 드레스가 땅에 떨어졌다.
살갗에 닿은 서늘한 기운에 이자벨은 알렉스에게로 안겨들었다. 알렉스는 그녀를 받쳐 든 채로 침대로 움직였다.
이자벨의 손 아래에서 알렉스가 알지 못한 쪽지가 구겨졌다.
“지금 내가 네 품에 있다는 건 믿어?”
알렉스는 이자벨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 채 속삭였다.
“그것만 믿어요, 이자벨.”
이자벨은 알렉스의 단단한 몸을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알렉스는 관계 도중 자신의 몸은커녕 얼굴조차 보는 것을 싫어했던 이자벨이 하는 행동에 굳었다.
“그럼 그거라도 믿어.”
이자벨은 알렉스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알렉스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에게 매달렸다.
* * *
로윈 저택은 아를이 건국되었을 때부터 수도에서 자리를 지킨 저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도에서 오래된 저택을 꼽는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갔다.
아무리 상인들이 득세하는 시대라 해도 전통과 명분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단순한 수리에 있어서도 신중하게 대처할 정도로 로윈 가문에서는 수도의 본채를 아꼈다.
그건 로윈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소중해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가문의 역사에 대한 세뇌에 의해서였지만.
로윈 가문의 역사는 수도에 자리한 로윈 저택과 함께했다.
몇백 년 동안 수도에서 자리를 지킨 로윈 저택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고용인들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물을 끌어와!”
밤을 밝히는 붉은 불길에 고용인들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뛰어다녔다. 기사들 또한 불길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사는 후작을 구하기 위해 저택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사들을 맞이한 건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마다 무너져 있다는 기이한 현실이었다. 마치 저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는 누군가가 저지른 짓처럼.
기사들은 진입을 포기하고 불길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아가씨!”
불길이 시작되자마자 밖으로 대피하는 대신 이자벨을 찾아 움직이던 샐리는 금세 기사들에게 붙잡혔다.
저택 내부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주인님…….”
유난히 저택 안의 고용인들과 기사들이 적은 날이었다.
하나씩 차례로 제압당하는 고용인들과 기사들 사이로 다가오는 전대 로윈 백작의 모습에 샐리는 숨을 멈췄다.
“어째서……?”
샐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백작을 응시했다.
전대 로윈 백작은 후작을 공격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후작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이미 일찍이 권력을 승계했으니까.
샐리는 마지막으로 저택을 떠나던 그가 어딘지 허무해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작위에 대한 미련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 하나 없는 얼굴로, 전대 로윈 백작은 죽을 자리를 찾아가듯 떠났다.
샐리는 그가 돌아온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주인님, 설마 이 화재가…….”
그는 샐리를 제압한 기사에게 눈짓했다. 샐리는 뒤로 끌려 나가면서 백작의 등을 노려봤다.
“아가씨가 저택 안에 계세요! 주인님, 아가씨가……!”
샐리는 밖으로 강제로 끌려 나가면서 쉼 없이 그에게 소리쳤다. 백작은 그녀의 입을 막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는 이자벨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도착해서 본 것은 이미 열린 문과 엉망이 된 방이었다.
누군가가 이미 헤집고 간 것 같은 방을 지켜보던 백작은 꼼꼼하게 저택 전체를 확인하면서 올라갔다.
그는 이자벨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이자벨이 어디로 도망칠지 그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서로에 대해 그만큼 무지한, 그런 부녀였으니까.
어차피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모조리 막혀 있었다. 불길을 피해 더 위로 올라가는 법 말고는 길이 없었기에 그는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침내 꼭대기에 위치한 다락에 도착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이곳이 이자벨이 도망칠 만한 마지막 장소였다. 여기에 있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문을 연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아들의 등이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굳어 있는 알렉스의 등에 가려 이자벨이 보이지 않았다.
창틀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이자벨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그녀의 모습에 백작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아들처럼.
“내려와요, 이자벨.”
알렉스는 평소의 차분함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이자벨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당신 아버지를 따라가도 좋으니까…….”
그 말에 이자벨은 알렉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백작을 응시했다. 죽음을 각오한 것 같은 행동치고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내가 안전해지면, 아버지를 죽이고 나를 되찾아올 거니?”
“…….”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자벨은 백작을 향해 물었다.
“당신 아들이 당신을 죽이기 전에, 오늘 그를 죽일 건가요?”
“……아니.”
백작은 짧은 침묵 뒤에 대답했다. 이자벨은 그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아버지, 당신 아들 손에 죽으러 왔나요?”
“…….”
이자벨은 백작의 침묵에 천천히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붉은 불길과 저택을 감싼 기사들. 그녀는 저 가운데 시그니티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알렉스가 당신을 죽이면, 나는 알렉스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죠. 그럼 나는 도망칠 테고…… 그런 나를 받아 주고 지켜 줄 남자도 있고…….”
백작은 애초에 그녀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도망칠 마음을 심어 주려 했을 뿐.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이용해서.
“알렉스는 또 혼자 남을 텐데.”
첫 번째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당신 아들한테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서로에게 일말의 미련이나 원망조차 느끼지 않은 부자는 여기까지 와서도 서로를 응시하는 대신 이자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나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빼앗고 싶으셨나요?”
아마 서로의 손에 누군가가 죽더라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게 서로는 아닐 것이다.
백작은 알렉스를 미워하지 않았다. 단지 이자벨을 위해서는 알렉스가 없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했을 뿐. 그리고 알렉스 또한 이자벨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백작이 없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했을 뿐이다.
알렉스가 이자벨을 사랑한 순간부터, 둘은 공존할 수가 없었다. 백작은 늘 이자벨의 곁에서 알렉스를 지우고 싶어 했고, 알렉스는 그걸 참지 못했으니까.
지금처럼.
그래서 첫 번째 생의 이자벨은 죽음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이자벨은 이제 자신의 죽음이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알렉스에게 명령했다.
“아버지를 죽이지 마, 알렉스.”
“당신이 죽지 않는다면요.”
알렉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는 제발 이자벨이 위태로운 창틀 아래로 내려오길 빌었다.
이자벨은 백작에게 물었다.
“알렉스가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널 데려가야겠지.”
백작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이자벨은 그의 얼굴에서 후회와 미련 말고 다른 감정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제가 거부해도요?”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이자벨은 위태롭게 붙잡고 있던 창틀에서 일부러 한 손을 놓았다.
“내가 찾으러 갈게요, 이자벨. 당신 아버지를 따라가요. 제발.”
알렉스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쉰 목소리가 이자벨에게 다급하게 쏟아졌다.
“난 기다리는 것도, 찾는 것도 잘하니까…….”
이자벨은 미동도 하지 않는 백작을 응시했다.
“창밖에 누가 대기하고 있나요?”
“그래. 네가 죽으면 아무 의미 없으니까.”
“철저하시네요.”
이자벨은 바깥을 힐긋 돌아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 어떤 일이 있어도 백작을 죽이지 마. 난 영원히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럴게요.”
알렉스의 답에 이자벨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아, 알렉스.”
이자벨은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줄 충실한 종을 향해 명령했다.
* * *
불길은 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오래된 저택들은 석재를 많이 썼고, 그런 저택이 불에 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고 있는 것들은 문과 창뿐이었다.
로윈 저택으로의 진입로를 막고 있는 불길은 잦아들 기미가 없었지만, 더 번질 기미도 없었다.
저택으로의 출입을 막는 파수꾼처럼 자리한 불길을 잡으려고 분주하게 사람들이 움직였다.
희뿌연 연기로 시야가 불분명했다.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밤의 어두움과 연기가 섞여 현실과 괴리된 느낌을 주었다.
시그니티는 정원 속 나무에 몸을 숨긴 채 타오르고 있는 문과 창에 달라붙은 사람들을 지켜봤다.
매캐한 연기는 그가 있는 곳까지 미치지 못했지만, 알 수 없게 눈이 시큰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어버려서일 수도 있었다.
그는 잠깐 시선을 돌렸던 시간도 아까운 듯 다시 위를 응시했다. 이자벨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는 곳이었다.
저택을 태우고 있는 불길이 어둑한 밤을 밝혔다. 원래라면 보이지 않을 것도 보였다. 이를테면 바람에 펄럭거리는 희끗한 치맛자락 같은 것.
그는 멀리서도 이자벨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그니티는 불안한 눈으로 위를 응시했다. 그의 주변에는 몇 명의 기사들뿐이었다.
전대 로윈 백작이 이자벨의 위치를 짐작하고 그에게 알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저택 안쪽에 있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투입된 기사들을 바깥으로 빼 오기에는.
시그니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떨어졌을 때 그가 그 순간을 회상하며 후회하지 않도록.
그는 늘 추락하는 이자벨을 받아 줄 수 있도록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어떤 순간이든, 그녀는 한 번도 추락하면서 그에게 손을 뻗지 않았지만 그는 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순간, 창가에 서 있던 희끗한 형체가 크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금발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그는 숨을 멈췄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하얀 발이 눈에 박혔다.
그리고 곧 어둠 속에 삼켜진 것처럼 그녀의 모습이 안쪽으로 빨려들어 가듯 사라졌다.
시그니티는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늘 한 발자국 뒤에서 기다리는 것. 그게 그의 자리였다.
* * *
알렉스가 이자벨에게로 손을 뻗은 순간, 그의 등을 노리고 검이 날아들었다. 소리조차 없이 다가오는 검 끝이 예리했다.
알렉스는 이자벨에게 뻗은 손을 거두고 빠르게 물러났다.
흐트러진 셔츠와 바지만 걸치고 있는 알렉스는 어떠한 무장도 하고 있지 않았다. 위험을 알아차리자마자 이자벨을 찾아 뛰쳐나온 몸은 스스로를 보호할 무기를 챙길 정신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자벨은 알렉스가 공격당하고 있는데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침묵했다.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로윈 백작의 검을 피하느라 움직이는 알렉스의 발소리만 거칠었다. 고함 섞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알렉스. 이리 와.”
백작의 검이 알렉스의 어깨를 스쳤다. 다락의 물건들은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쉼 없이 부서졌다. 그러나 이자벨은 차분하게 알렉스에게 명령했다.
백작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비껴 나갔다.
피가 비치기 시작했음에도 백작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위험한 순간이 몇 번이나 지나갔음에도.
백작의 검이 어느 순간, 알렉스의 목 앞에서 멈췄다. 그대로 밀어 넣기만 하면 취할 수 있는 목숨임에도 백작은 멈칫했다.
마치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처럼.
그리고 알렉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위치가 역전되었다. 알렉스는 아이 손목을 비틀 듯 백작의 손목을 꺾고 검을 가로챘다.
살아온 세월은 두 배나 차이가 났지만 죽인 사람의 숫자로 따지면 그 정반대였다.
백작과 달리 머뭇거림 한번 없는 알렉스의 손이 움직임과 동시에 이자벨이 소리쳤다.
“이리 와!”
충실한 사냥개처럼 알렉스는 멈췄다.
“절대 아버지를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알렉스. 그냥 이리 와.”
그가 백작을 죽이지 않는다면, 백작이 그를 죽일 것을 이 공간의 모두가 알았다.
이자벨의 말은 알렉스더러 죽으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알렉스는 배신감을 느끼거나 분노해 이자벨의 말을 거부하는 대신 마지막으로 물었다.
“날 버리지 않을 거야?”
십 년도 전에 알렉스가 했던 질문이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그래. 영원히 널 버리지 않을 거야.”
이자벨의 확언에 알렉스는 웃었다.
언젠가 그는 이자벨에게 차라리 자신을 버리기 전에 죽여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알렉스의 머릿속은 멋대로 이자벨의 말을 조합했다.
그의 손에서 검이 미끄러졌다. 알렉스는 이자벨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뒤를 노릴 것이 분명한 백작을 뒤로한 채 이자벨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곧은 눈이 그를 응시했다.
냉엄한 심판자처럼 창틀 위에 서 있는 이자벨은 웃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알렉스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지금, 이자벨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알렉스가 이자벨의 손을 붙잡은 것과 동시에 백작이 알렉스의 목에 검을 겨눴다.
백작은 알렉스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몇 번이고 제 손으로 날렸다. 알렉스의 손에 죽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이자벨이 알렉스를 거부하기를 원해서.
모든 이들의 속셈이 드러났는데도 그들의 대치는 끝나지 않았다.
알렉스의 옷은 이미 피와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목에 스친 검의 날에 셔츠의 목깃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그럼에도 그녀만 응시했다. 무엇이 제 목을 겨누고 있는지 모르는 백치처럼.
“웃어 줘요, 이자벨.”
끝끝내 알렉스가 이자벨의 명령에 따라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는다면…….
어떤 순간이 와도 알렉스가 자신을 살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면, 백작은 더는 망설이지 않겠지.
알렉스는 이자벨의 손을 생명줄처럼 붙잡은 채 속삭였다.
“……한 번만 웃어 줘.”
목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가 조금씩 커졌다. 여전히 이자벨은 웃지 않았고, 알렉스는 애원했다.
“내게 자비를 베풀어 줘요, 이자벨. 당신은 처음부터 내 신이었으니까. 당신의 종을 위해 한 번만…….”
이자벨은 그제야 웃었다. 억지를 써서 간신히 올린 입꼬리에 알렉스는 이자벨에게 성큼 다가갔다.
“……날 버리기 전에 날 죽여.”
백작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이자벨의 발이 창틀에서 떨어졌다.
그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고, 지나치게 찰나였다.
허공에서 나부끼는 연기처럼 힘없이 흩어지는 이자벨의 잔상을 알렉스는 본능적으로 낚아챘다. 그의 뇌리로 이자벨이 죽음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렉스에게 붙잡힌 손목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의지할 곳 없이 허공에 매달린 이자벨이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안 버린다고 했잖아. 도망치지 않겠다고!”
알렉스는 이자벨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배신감에 차 소리쳤다. 목소리마다 진득하게 절망이 배어 있었다.
“안 버려, 알렉스. 그러니까 놓지 마.”
이자벨의 손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떨리는 알렉스의 눈을 응시한 채 명령했다.
“죽어도 날 놓지 마.”
이자벨은 알렉스의 불신을 알았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 망가진 신뢰를.
알렉스는 언젠가는 그녀가 그를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를 버리고 도망칠 거라고. 도망칠 곳이 없다면 죽음으로라도.
이자벨은 그래서 보통의 연인들이 위기의 순간에 닥치면 하는 말과 정확히 반대되는 말을 했다.
나를 버리고 가라는 말이나, 혹은 너라도 살라는 그런 말을 대신해서…….
“날 놓칠 것 같으면 그냥 죽어 버려, 알렉스.”
같이 죽자는 말을.
알렉스는 그녀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말에 굳어 버렸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알렉스의 너머에 있는 백작을 향해 이자벨이 속삭였다.
“하던 걸 계속하세요, 아버지. 당신 아들을 죽여요.”
알렉스의 안위라면 이성을 잃었던 이자벨이 할 말이 아니었다. 오로지 알렉스의 안전을 위해 살아온 모든 인생을 등진 여자는 가차 없이 알렉스의 죽음을 언급했다.
“따로 사느니 함께 죽는 게 낫잖아요. 그렇죠, 아버지?”
이자벨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오래도록 고민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네 불안과 집착 위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불행하지 않은 것과 행복한 것은 달랐다.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언제쯤 그녀가 자신을 버릴까 고민하는 알렉스를 보는 건 끔찍했다. 그는 불안해했고, 그녀는 그의 눈치를 봤다. 솔직해질 수 없으니 대화는 겉만 맴돌았다.
그는 그걸로도 만족한다고 했지만…… 이자벨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난 널 목숨이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데, 왜 넌 나를 믿지 못할까.
이자벨은 아주 오랜 시간 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제야 가까스로 답을 얻었다.
그 사랑 자체가 문제였다는 걸.
난 네 사랑이고 세상인데, 내 목숨은 네 보물인데…….
나는 욕심을 내야 했다. 기대를 해야 했고, 원하는 것을 말해야 했다.
네가 원하니까. 널 위해서. 네가 좋아하니까.
이런 말들은 알렉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날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어?’
비명처럼 느껴졌던 알렉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얼마나 참을 수 있냐는 그 물음에 나는 무엇이든 견딜 수 있다고 대답했지. 멍청하게.
네 옆에 있는 게 널 사랑하기에 견뎌야 하는 시련처럼 대답했잖아. 난 그러면 안 됐어. 내가 원하는 걸 말해야 했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말해야 했다. 좀 더 나 스스로를 아껴야 했다.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네 곁에 있는 거라고 말해야 했어.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너를 선택한 게 내 이기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해야 했어. 날 위해 희생해 달라고 말해야 했어. 네 옆에 있는 게 내 욕심 때문이었다고 해야 했어.
널 사랑하니까…….
네가 가진 모든 걸 다 버리고라도 나와 함께 떠날 만큼 나만 사랑해 달라고 해야 했어. 도망가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함께 도망치자고 말해야 했어.
우리 엄마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심지어 사랑하는 상대의 희생까지 요구했던 우리 엄마처럼 말해야 했는데. 그렇지?
알렉스가 웃었다.
나는 내가 알렉스에게 정답을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알렉스?”
널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한테 필요한 말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난 살고 싶어.
너랑.
날 위해서.
그 순간, 백작의 손에서 검이 미끄러졌다. 실수는 아니었다. 그가 하는 어떤 행동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자벨이 하는 말은 명확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고.
백작은 이자벨에게서 헤더를 보았고, 알렉스에게서 미하일을 봤다.
그게 어쩌면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모를 일이지. 동기란 행동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흐려지기 마련이니까.
알렉스 로윈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자벨에게 이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자벨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함께하고 싶다고.
그러길 그녀 자신이 원한다고.
백작은 이자벨이 정말 자신의 목숨을 끊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바깥에 사람을 대기시켜 놓고 목숨을 부지시켜 놓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본인이 죽고자 하면 막을 방도가 없는데.
그걸 알게 된 순간부터 백작이 진 싸움이었다. 그 애는 백작의 딸이었으니까.
백작은 여전히 이자벨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자벨은 너무 헤더를 닮았으니까. 얼굴만 봐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아이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헤더를 닮지 않았으면 사랑이란 걸 조금은 해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렉스의 손에 끌어 올려진 이자벨은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은 채 백작을 응시했다.
백작이 입힌 알렉스의 상처 때문에 이자벨의 옷이 피로 젖어 갔지만, 그녀는 알렉스를 다시는 놓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안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이자벨의 품에 잔뜩 몸을 구겨 넣은 알렉스의 등을 바라보면서, 백작은 문득 알렉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헤더가 죽었던 날, 그녀를 붙잡고 울었던 백작처럼 알렉스는 이자벨에게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저 눈에 밟혔을 뿐이다.
그는 잡지 못했고 그의 아들은 잡은 사랑에 대해서.
“저희는 행복할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그 말을 하는 이자벨의 얼굴은 헤더를 닮았다. 어쩌면 그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던 헤더와.
그 녹안에 비쳤던 게 희망이었을까.
그럼 헤더도 어쩌면……. 정말 그들에게 시간이 있었더라면, 어쩌면.
어두운 밤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이자벨은 단언했다.
“당신이 버린 아들은 이제 행복할 거예요. 내가 그러길 원하니까.”
백작은 이자벨이 알렉스를 사랑한다는 게 의아했다. 그녀에게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는 사내를 사랑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자벨은 왕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녀가 원하기만 했다면. 정체를 알지 못하는 사내를 사랑해서 그를 저버렸던 헤더에게 묻고 싶었던 물음이,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언제부터, 왜…….”
알렉스를 사랑했냐고.
이자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 생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백작은 들을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사랑을 알기 전에 미움을 먼저 배웠고, 이후에 시작된 마음이 사랑인 줄도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였다. 처음부터 이자벨은 알렉스가 미웠고, 어느 순간 사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순간에는 둘 다였다.
여전히 알렉스를 보면 첫 번째 생의 악몽 같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시간이 많았으니까.
이자벨이 알렉스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알렉스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는 알렉스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눈이 드러났다.
악몽처럼 떨어지지 않던 기억이 있었다. 피를 흘려 창백해진 얼굴, 텅 빈 청회안.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
잿빛 눈동자에 푸른빛이 돌았다. 그 안에 내가 또렷하게 비쳤다.
비어 있지 않았다. 나로 채워져 있었다. 오로지 나로만.
나는 알렉스의 눈에 비친 나를 보고 그냥 웃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알렉스의 눈과 닮은 새벽하늘이었다.
* * *
불탄 저택과 돌아온 전대 로윈 백작,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사들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샐리는 그날이 꿈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다른 고용인들과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었다.
대부분의 고용인은 사고라고 여겼다. 진실을 아는 고용인은 몇 되지 않았다.
그러나 샐리는 그녀가 직접 겪은 것들에 대한 의문을 삼키고 내뱉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가씨의 얼굴이 편안해졌으니까.
이자벨은 정원의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방에서 웬만하면 나오지 않았고, 도련님을 마중하러 나올 때조차도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아가씨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는 묘하게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샐리는 그 모든 행동에 잘한다고 박수를 치면서 더 부추겼다.
그녀는 조금씩 어두워지는 날에 이자벨을 깨워 들여보내려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가 이자벨의 근처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객이 있었다.
샐리는 도대체 어디서 다가왔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도련님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 걸음을 돌렸다.
이자벨의 몸에 담요를 덮어 주는 알렉스의 손길이 계속 바라보기 민망할 만큼 다정해서는 아니었다. 절대.
돌아선 샐리의 등을 힐긋 확인한 알렉스는 좀 더 마음 놓고 이자벨을 바라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알렉스가 이자벨을 바라보는 눈이 무섭다고 했다.
알렉스는 요새는 남들의 눈에 무서워 보이지 않고 다정해 보이는 요령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특히 이자벨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샐리는 반쯤은 이자벨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하녀였다. 괜히 안 좋은 인상을 줄 필요는 없었다. 이전이라면 그딴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알렉스에게 처음으로 여유란 것이 생겼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그는 이자벨이 자신에게 그녀의 손을 놓을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했던 말에 황홀함을 느꼈다. 그의 생각과 똑같은 말을 하다니.
알렉스는 이자벨이 서투르게 내기 시작하는 욕심이 좋았다.
그녀는 조금씩 그를 욕심내고 있었다.
알렉스는 이자벨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내면서 마음껏 웃었다. 남들이 보면 무섭다고 했던 그 미소를, 마음껏 지었다.
사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평생을 걸어도 완전히 그녀를 믿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미친 척하고 믿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자벨이 그를 버려도, 또 배신해도 다시 찾아가면 되니까. 이자벨이 처음으로 나를 갖고 싶다고 했는데, 믿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의 믿음은 이자벨이 그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알렉스는 잠든 이자벨에게 속삭였다.
“당신을 믿어요, 이자벨. 그러니까…….”
당신이 날 버리지 않을 거라는 걸 믿어, 이자벨.
“……날 배신해도 돼.”
설사 당신이 날 버려도, 그 슬픔은 온전히 내가 감당할게.
완전히 믿지 못해 미안해요. 하지만 이게 내 최선이에요.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기온이 서늘해졌다. 알렉스는 이자벨을 안아 올리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알렉스.”
이자벨의 다정한 부름에 알렉스는 웃으면서 그녀와 눈을 맞췄다.
“네. 이자벨.”
“……꿈을 꿨어.”
“나도 나왔어요?”
알렉스의 물음에 이자벨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를 먹은 네가 나왔어.”
“그럼 못생겨졌을 텐데.”
“아냐. 그래도 여전히 예뻤어.”
이자벨은 이제 더 이상 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청년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굵어진 선과 깊어진 눈매는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앳된 기색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있잖아, 알렉스.”
“듣고 있어요.”
“난 이번 생에 네가 성인이 된 모습이 보고 싶었어.”
이자벨은 가볍게 말하기 위해 애썼다.
“계속 네 어린 시절밖에 못 봤으니까. 다 자란 네가 보고 싶었던 건데…….”
“지금 보고 있잖아요. 내가 잘 자란 것 같아요?”
“내가 키운 것도 아니잖아. 넌 혼자 자랐으면서.”
첫 번째 생에서는 그를 적당히 도구로 키웠고, 두 번째 생에서는 무시했다. 그리고 세 번째인 이번 생에서는 유년의 5년도 함께 있지 못했다.
이자벨은 양심이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를 키웠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알렉스는 혼자 자랐다.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작위든 권력이든 혼자서 낚아챘다.
“이자벨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자라지도 않았을걸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느 쪽이든 맞는 말이었다.
그는 사실 이자벨 없이 자란 인생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상상 자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자벨이 없는 유년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고통을 싫어했던 기억이 있었다. 아마 아예 순종적인 아이가 되었거나, 탐욕적으로 권력을 가지려는 아이가 되었을 수도.
어느 쪽일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굳이 이자벨의 부재를 상상하는 끔찍한 짓을 스스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
“더 잘 자랐을 수도 있지.”
“굳이 당신이 없는 인생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건 나랑 똑같네.”
이자벨은 알렉스의 턱을 잡아당겨 가볍게 뺨에 입을 맞췄다.
“이제 난 네 어린 시절도 알고, 성인 시절도 아니까…….”
알렉스는 지금 이자벨이 하는 말이 모두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한 걸 수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네가 노인이 된 모습만 알면 되겠다. 그치?”
이자벨이 하는 말들은 배신 따위는 감수할 만큼 달았으니까.
“내가 나이를 먹는다고 싫어하면 안 돼요, 이자벨.”
이자벨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었다.
“너는? 너는 내가 나이 먹으면 싫어할 거야?”
“그럴 리가요. 이자벨은 어떤 모습이든 이자벨이죠.”
“나도 마찬가진데.”
이자벨은 키득거리면서 알렉스의 뺨을 붙잡고 얼굴 전체에 입을 맞췄다.
곧이어 그들의 숨결이 얽히고 혀가 엉켰다. 어둑한 밤이 그들의 모습을 가렸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처럼.
에필로그
마침내 유폐된 아를 왕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 사실이 섭정공의 권위를 해치지 못했다. 귀족들은 섭정공이 다음 대의 왕이 될 거라 짐작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다음 대 왕의 자리는 젊다 못해 어린 왕자가 차지했다. 섭정공은 왕이 어리다는 핑계로 여전히 권력을 틀어쥐었다.
캐롤은 그런 상황에 만족했다. 그러나 섭정공이 불쌍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동정. 그래 동정이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이자벨이 더 좋았다. 그러나 한쪽이 행복할수록 다른 한쪽이 더 비참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봄이 되고, 날이 풀리자마자 사냥 대회가 열렸다.
궁인들의 고생 끝에 완성된 화려한 천막들 사이로 삼삼오오 귀부인들이 오갔다. 공작새처럼 꾸민 여인들을 지켜보면서 캐롤은 약간 비딱하게 생각했다.
뭐 이렇게 신생 귀족들이 많아.
돈으로 작위를 산 귀족들이 과장을 보태 절반은 되는 것 같았다. 이리 귀족의 권위가 문란해졌으니 이자벨이 쉽게 아를의 귀족 사회에 편입한 거지.
왕족을 비롯한 공후작 가문에서는 아직도 돈으로 작위를 산 이들과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캐롤은 괜히 생각했다.
이자벨은 어차피 구드윈 백작가의 방계로 신분을 세탁했다. 돈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신분을 세탁하자마자 하루 만에 후작과 결혼했다. 저택에서 알아서 부를 사람은 불러서 식을 치렀다는 일방적인 통보에 사교계 전체가 황당함에 휩싸였다.
남작이라 해도 몇 달은 준비하는 결혼이었다. 그런데 후작이 손님도 초대하지 않은 채 날림으로 식을 치러 버렸다는 사실에 몇몇 귀족들은 신부의 존재마저도 의심했다.
그 황당한 결혼식도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로윈 후작 부인이란 사람은 사교계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 결혼식 때 ‘알아서 부를 사람’에 속했던 캐롤은 단순한 초대장이라고 알고 로윈 저택에 방문했다가 이자벨의 들러리를 섰다.
캐롤은 아직도 그날이 꿈같았다.
그녀와 비슷한 과정으로 결혼식에 끌려오게 된 엘리자베스 상단주가 몹시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증인을 섰다.
신랑 신부를 제외한 그 결혼식의 모든 인간은 결혼식인지도 모르고 끌려온 인간들뿐이었다. 심지어 신관조차도.
후작의 악명만 알고 있는 신관은 신부가 강제로 납치당한 여자가 아닌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의심했다.
아무튼 그 얼굴과 권력을 가지고도 저런 의심을 살 수 있는 것도 능력이었다.
그러나 결혼식이 끝나고 베일을 벗은 이자벨을 보고 신관은 의심을 거뒀다. 이자벨은 정말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캐롤은 그냥 거기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이자벨이 잡은 행복이라고. 지지리도 멍청해서 자기 손으로 복을 걷어찬 거라는 투덜거림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캐롤은 이제 그녀의 앞에서 알렉스를 부정하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둘의 사이가 좋아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후작과 캐롤은 서로를 싫어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이자벨은 자기 주변 사람들이 후작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어렵사리 인정했다.
이자벨의 친구들은 알렉스와 어떤 일이 있어도 친해질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녀는 이미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을 사실을 늦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알렉스와 누군가가 친해지기란 끔찍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도.
리 상단의 수도 지점장인 데빈만이 거의 후작의 유일한 친구였다.
사실 친구라기보다는 어딘가, 뭐랄까……. 어린 시절부터 봐와서 남보다는 나은 사이라고 해야 하나.
지능과 상관없이 데빈은 약간 맹한 구석이 있었다.
알렉스가 이자벨에게 하는 집착을 보고, 미쳤네, 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 마는 그 성격을 알렉스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친구가 없다는 것을 걱정하는 이자벨에게 훌륭한 방패가 되어 주는 데빈을 굳이 쳐낼 필요도 없었고.
그들의 결혼식에서 신랑 측 증인으로 납치된 인간도 데빈이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알렉스는 사적으로 인간관계를 맺은 이가 이자벨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캐롤은 혀를 차면서 부채로 입을 가렸다.
주변에서 많은 여자가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캐롤은 오늘 별로 누군가와 말할 마음이 없었다.
만약 이자벨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캐롤은 이자벨이 들어오자마자 놀라 얼굴을 가리던 부채를 떨어트렸다.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로 한 번도 한 적 없는 실수였다. 뒤에 서 있던 하녀가 황급히 새 부채를 건넸다.
캐롤은 그녀의 실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영애들을 향해 적당히 말을 흘렸다.
“날이 더워지네요.”
이제 막 겨울이 끝난 초봄인데 더워질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섭정공의 약혼자라는 그녀의 칭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말이 되게 만들 힘이 있었다.
“어머, 그러게요. 봄이 깊어지는 모양이죠.”
“저희 가문에서도 저택의 가구들을 다시 바꾸고 있답니다.”
“날이 날이다 보니 벨벳 소재가 유행이 지난 것 같아요.”
재잘거리며 떠드는 여자들 사이로 캐롤의 실수는 그대로 지나갔다.
캐롤은 적당히 듣고 있다는 듯한 표정만 지은 채 이자벨을 살폈다.
후작이 이자벨을 사교계에 내보냈다고? 왜? 그럴 이유가 없는데.
후작은 굳이 자기 부인을 사교계에 풀어놔서까지 얻을 이익이 없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군에 속한 이들은 후작에게 꽤 열렬히 충성했다. 그의 권력은 군대에서 나왔으므로 사랑해 마지않은 이자벨에게 굳이 사교계의 진흙탕을 경험하게 할 필요가 없는데.
차분하게 웃고 있는 이자벨은 어딘가 독기가 빠져 있었다.
그래도 결혼 초반에는 어딘가 불안한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요새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초기에 한 번은 후작이 약간은 소름이 끼친다며 울다가 갑자기 술을 마시고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
캐롤은 후작이 ‘약간만’ 소름 끼친다는 이자벨이 오히려 신기했다.
나중에는 약간이니까 괜찮다는 헛소리를 한 것 같기는 하지만, 캐롤은 잘 듣지 않았다.
이자벨의 주변 사람들은 후작과 관련된 말들은 잘 듣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괴로워하든 슬퍼하든 뭐든 일단 내버려 두면 알아서 후작한테 달려가든지 후작이 달려온다. 둘이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짧으면 몇 시간에서 길면 며칠 정도 지나면 해결되어 있었다. 연인 간의 싸움이 그러하듯이.
“전하. 눈을 좀 돌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캐롤은 일단 명목상 약혼자이기 때문에 섭정공의 소매에 손수건을 묶어 주면서 중얼거렸다. 물론 손수건은 하녀가 만들었다. 캐롤은 수를 놓을 줄 아예 몰랐다.
가짜든 진짜든 약혼자가 손수건을 매어 주고 있는데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섭정공 때문에 귀족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림 같은 선남선녀가 서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부드러운 얼굴을 한 후작의 팔목에 웬 미인이 손수건을 묶어 주고 있었다.
이자벨은 결혼하고 나서도 사교계 모임에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게 귀족 사회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것이었다.
“전하.”
캐롤은 섭정공의 팔을 손톱을 세워 움켜쥐었다.
시그니티는 그제야 고개를 땅으로 떨어트렸다. 캐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욕심이 날 것 같으면 아예 보지 마세요.”
“욕심이 나는 게 아니야.”
캐롤은 의아한 얼굴로 시그니티를 바라봤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보는 거지.”
이게 미련인지 체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감정을 해석하는 대신 팔을 위로하듯 두어 번 두드렸다.
“어딘가에 전하의 운명도 있을 거예요.”
시그니티는 그 말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고삐를 잡았다.
“난 운명을 안 믿어.”
훌쩍 말에 올라타자 사냥을 알리는 고둥이 울렸다. 달려 나가는 말들이 일으키는 흙먼지에 하녀들이 황급히 그들의 주인 앞을 막아섰다.
캐롤은 애써 위로해 줬더니 하는 말에 약간 빈정이 상했다. 이자벨을 좋아하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더러웠다. 그녀 자신도 포함해서.
캐롤은 고개를 내저으며 이자벨의 천막을 방문했다. 익숙한 얼굴의 하녀가 그녀를 보고 천막을 열었다.
“이게…….”
안쪽은 겨울 사냥에 나갈 때나 쓸 법하게 꾸며져 있었다. 담비 털로 만든 카펫이 깔려 있었고, 심지어 한 구석에는 난로까지 있었다.
한마디로 따뜻하다 못해 더워 죽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이자벨, 어디 아파요?”
이 더운 곳에서 담요로 몸을 싸매고 있는 이자벨을 보고 캐롤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아니지, 아니지. 후작이 아픈 당신을 여기까지 오게 뒀을 리도 없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꼴이에요?”
이자벨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담요를 벗었지만, 하녀는 가차 없이 그녀의 손을 제지하고는 다시 꼼꼼히 담요로 이자벨을 싸맸다.
“그냥, 뭐…….”
“아가씨.”
하녀는 정말 펄펄 끓는 것 같은 차를 이자벨에 건넸다.
캐롤은 이게 무슨 짓인지는 몰라도 고문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벌써부터 더워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진짜 아픈 건가요?”
걱정스러운 캐롤의 물음에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캐롤은 도무지 무슨 일인지 대답하지 않으려는 이자벨을 두고 천막 안을 살폈다.
쓴 찻잎의 향이 어딘가 익숙했다. 캐롤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자벨…… 설마 임신했어요?”
이자벨은 난감하게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캐롤은 그 반응에 확신했다.
“진짜요? 어쩌다가…….”
“무슨 반응이 그래요?”
캐롤은 까칠한 이자벨의 반응에 후작의 욕을 황급히 집어삼켰다. 솔직히 그놈이 기어코, 라는 생각이 제일 컸지만 임산부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축하해요. 음…… 축하할 일이 맞는 거죠?”
“그럼요. 그런데 알렉스 앞에서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가장 기뻐서 날뛸 인간이 아닌가? 드디어 이자벨의 배 속에 자기 핏줄이 들어섰다고 떠들고 다닐 것 같은데.
“왜요?”
이자벨은 뜨거운 차를 홀짝거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어머니가 절 낳다 돌아가셨거든요. 걱정이 되나 봐요.”
무거운 내용이 가볍게 떨어지자 캐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자벨은 난감해하는 캐롤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요. 제가 그 전철을 밟을 일도 없고.”
“후작은 걱정한다면서요.”
“전례가 있으니까요.”
이자벨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난 아주 건강하고, 그럴 일은 없어요.”
캐롤은 오지도 않은 미래를 확신하는 이자벨이 의아했다.
이자벨은 젊은 미인의 얼굴로 오랜 세월을 산 노인처럼 웃었다. 그녀는 종종 저렇게 웃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난 알렉스를 혼자 두고 못 죽어요. 죽어도 다시 살아 돌아올 거야.”
그 미소의 결이 후작의 집착과 비슷하다고, 캐롤은 생각했다. 더운 방 안임에도 팔에 설핏 소름이 돋았다.
처음으로 이자벨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샐리였다.
갑자기 졸음이 많아져 걷다가도 휘청거릴 수준이 되자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이자벨을 의원에게 보였다.
의원은 신속하게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자벨은 기쁜 얼굴로 알렉스를 찾아갔다가 실컷 울었다. 샐리는 우는 이자벨을 달래느라 며칠은 기가 빨렸다.
‘옛날에는 자기가 먼저 가지자고 해 놓고…… 이제 와서, 흑, 싫다는 건 또 뭐야. 사실 나, 날 안 믿었던 건가?’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웠던 아가씨는 어린애처럼 변했다.
‘걔가 미쳤나 봐. 나한테 어떻게…….’
샐리는 도련님이 원래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대신 난생처음으로 이자벨을 피해 도망치는 도련님을 찾으러 다녔다.
평온하게 잘 돌아가던 저택은 오랜만에 스릴이 넘쳐졌고, 후작 부부는 한 달간의 냉전에 돌입했다.
후작은 아이가 생기는 걸 썩 반기지 않았다.
샐리는 둘의 대화를 스치듯 듣고 더더욱 그들 사이를 이해하길 포기했다.
후작은 이미 그들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처럼 말했고, 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했다. 샐리가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슨 꿈속의 자식도 아니고.
전생에라도 낳았다는 건가.
이자벨은 보름 정도 알렉스를 설득하기 위해 언성을 높였다. 나머지 보름 정도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째 되던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가린 이상한 남자가 저택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자벨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몹시 의기양양한 태도로 그 남자를 옆에 끼고 알렉스와 길고 긴 대화를 나눴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떠난 후 후작의 고집이 한풀 꺾였다.
후작은 이자벨의 건강을 조건으로 걸었고, 저택은 다시 평화를 찾았다.
갓 태어난 사슴 새끼를 보는 것처럼 이자벨을 보는 알렉스의 과한 걱정과 배려만 아니었더라도 좀 더 평화로웠을 것이다.
이자벨은 알렉스의 과보호 속에서 아이를 낳았다. 아무도 죽지 않고 무사했다.
가을의 끝과 겨울의 시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 *
팔불출인 아버지와 엄격한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에드거 구드윈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이의 모습에 눈만 깜빡였다.
작년에 혼인한 에드거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그는 그의 손바닥만 한 아이를 보고 침을 삼켰다. 검은 머리카락이 복슬복슬하게 자라기 시작한 아이는 그가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았다.
“어딜 잡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태어난 지 고작 몇 개월이 지난 아이는 에드거의 손바닥만 했다.
“너, 덩치는 엄마를 닮았나 보네.”
그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말을 걸면서 누구든 그를 이 난감함에서 탈출시켜 주기를 바랐다.
똘망똘망한 녹색 눈이 에드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거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생명체와 한 공간에 단둘이 있는 지금의 상황이 몹시 힘겨웠다.
“물론 널 보러온 거긴 한데, 아기야. 너희 엄마 어디 갔어?”
뭘 알아듣지도 못할 나이면서 엄마라는 단어가 들리자 아기는 방긋방긋 웃어댔다. 아기 주제에 미모가 벌써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예쁜 것은 예쁜 것이었고, 난감한 건 난감한 거였다.
에드거는 한숨을 내쉬며 아기 침대 위에 있는 모빌을 톡 건드렸다. 빙글빙글 도는 모빌에 아기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애를 두고 어디로 간 거야…….”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긴 어디를 가. 계속 여기에 있었는데.”
에드거는 몸을 돌렸다. 금발을 올려 묶은 미인이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그 얼굴에 걸린 미소가 비웃음인 것을 확신했다.
“말도 모르는 애한테 무슨 질문을 그렇게 많이 해?”
사랑스러운 얼굴에서 튀어나온 비웃음은 여전히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쩔쩔매는 꼴을 보려고 숨어 있었어?”
“네가 발견 못 한 거지.”
“난 기사가 아니야. 눈에 안 보이는 걸 어떻게 찾아.”
그녀는 에드거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곰처럼 생겨서는 힘을 쓸 줄 모르는 게 말이 되나.
“유진은?”
그녀의 질문에 에드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으로 부르는 건…….”
“내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유진이 더 싫어할걸. 물론 나도 싫고.”
이자벨은 사랑스럽게 웃으면서 단호하게 덧붙였다.
“물론 평생 널 삼촌이라고 부를 일도 없어, 에드거.”
“얘도?”
에드거가 아기를 슬쩍 쳐다보면서 물었다. 이자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애도 없는 게 벌써부터 할아버지라고 불리고 싶니?”
“뭐 어때. 할아버지라고 불린다고 내가 갑자기 나이를 더 먹는 것도 아니고.”
“꿈도 꾸지 마.”
이자벨은 혀를 차며 침대에 누워 있던 아기를 안아 올렸다. 그 동작이 의외로…… 서툴렀다.
의아한 에드거의 시선에 이자벨이 픽 웃었다.
“대부분 알렉스가 데리고 있으니까. 난 아직도 애가 뭐 때문에 우는지를 잘 구분 못 하겠다니까.”
입으로는 투덜거리는 주제에 눈은 아이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경험의 차이인가…….”
첫 아이이면서 무슨 경험의 차이가 있단 말인가.
속으로 투덜거린 에드거는 후작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애 이름이 뭐야?”
“헤더.”
익숙한 이름이었다. 에드거는 본 적도 없는, 이미 죽고 없는 사촌 누이의 이름.
에드거는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헤더 구드윈이자 헤더 로윈이었던 여자가 젊은 나이에 이자벨만 남기고 죽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아이의 앞에서 이름을 직접적으로 지적하기가 망설여졌다. 에드거는 그저 조용히 대답했다.
“……예쁘네. 네가 붙인 거야?”
이자벨은 알렉스를 닮은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면서 웃었다. 그 웃음의 뜻은, 말릴 수 없었다, 에 가까웠다.
“아니, 알렉스가.”
“그건 좀…… 신기하네.”
“그렇지. 내 어머니의 이름이니까.”
아기는 지나치게 순했다. 서툰 이자벨의 품에서도 얌전히 잠을 청했다. 졸린 녹안이 깜빡이면서 작은 입이 하품 비슷한 것을 했다.
이자벨이나 후작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이렇게 순한 아이가 나온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잘살 거야.”
에드거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자벨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우리 엄마랑 다르게?”
“그런 말이 아니야. 난 그냥…….”
“알아.”
황급히 변명하려는 그에게 이자벨은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이의 마지막이 그녀 같지는 않을 거야. 난 아주 오래 살 거거든.”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이자벨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헤더는 행복할 거야.”
에드거는 순간 충동적으로 물었다.
“후작은 왜 그 이름을 붙였어?”
이자벨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알렉스가 했던 말을 회상하면서 웃었다.
그녀는 헤더 구드윈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찍 죽은 것은 사실이라 애초에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이름도 아니었다.
이자벨이 그녀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이라.”
그래서 그들은 한 번도 같은 시간대를 살아본 적 없는 여자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였다.
알렉스는 그녀가 아이를 많이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자벨은 그렇게 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사 아이가 순하지 않았더라도, 어딘가 문제가 있었더라도 이자벨은 아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널 만나고, 사랑하게 되어서 기뻐, 헤더.
* * *
알렉스는 익숙하게 헤더를 허벅지에 받쳐 안고 있었다. 그는 이미 경험이 있는 탓에 육아에 익숙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딸을 놀아 주고 있던 그는 이자벨의 기척에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자벨.”
“안 무거워?”
알렉스의 다리를 차지한 허벅지를 가리키며 묻자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보통 당신을 올려놓고 있는 데였는데, 헤더가 올라왔다고 무겁겠어요?”
“내가 안으려고 핑계 대는 거지.”
이자벨은 헤더를 안아 올리면서 속삭였다.
헤더는 잘 받쳐 주고 놀아 주던 알렉스의 손에서 이자벨의 품으로 옮겨가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칭얼거렸다.
“얘는 너무 너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제가 이자벨만 좋아하니까 괜찮아요.”
이자벨은 오싹하게 들릴 발언을 가볍게 넘겼다. 세월의 힘이었다.
“내가 첫 번째면, 우리 헤더는 두 번째?”
“세 번째죠.”
순간 이자벨의 움직임이 딱 굳었다. 헤더의 칭얼거림이 더 거세졌다. 알렉스는 의아한 듯 바라보며 덧붙였다.
“헤더는 둘째잖아요.”
알렉스는 결국 울먹이기 시작하는 헤더를 이자벨의 손에서 빼앗아 능숙하게 달랬다. 그 익숙한 손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자벨은 알렉스의 목을 감싸 안았다.
“난…… 네가 걔를 미워하는 줄 알았어.”
이자벨은 당혹스러움에 살짝 말을 더듬고 있었다.
“내가 걔를 낳고 죽었으니까…….”
부자라기보다는 남에 가깝게 서늘한 사이였다. 그래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 애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없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이자벨.”
자신의 행복을 위해 몇 번이고 시간을 돌린 주제에 결국 자신의 행복을 찾는 대신 그들의 행복을 찾은 아이였다.
이자벨을 제외한 이들이라면 그들의 아이라도 애틋하거나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했다. 알렉스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알렉스는 첫 번째 생에서 이자벨이 죽고 따라 자살하지 않았다. 그는 죽는 대신 이자벨이 남긴 아이를 키웠다.
그는 적어도 아이를 자식으로 품 안에 넣고 길렀다. 알렉스는 아직도 그게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배울 게 많았으니까.
그리고 이자벨은 그 모든 것들을 충분히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함께할 시간은 많았으니까.
“……그럼 우리 첫째를 보러 갈까. 우리 귀여운 딸. 오라버니를 보고 싶지 않아?”
이자벨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을 삼키고 애써 헤더에게 눈을 돌렸다. 알렉스는 늘 그래왔듯 똑같은 대답을 했다.
“당신이 원하면 어디든 좋아요.”
첫 번째 외전. 미하일의 소원.
아를의 수도에서 가장 큰 여관에는 오늘도 수많은 투숙객이 들어왔다 나갔다.
여관에서 잡일을 하는 잭은 지루한 얼굴로 투숙객들의 명단을 적고, 열쇠를 건넸다. 잭에게는 오늘도 별다를 것이 없는 하루였다.
그 순간, 문에 매단 종이 딸랑거리면서 한 소녀가 들어섰다. 따라오는 이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 반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소녀를 보자마자 잭의 눈이 커졌다.
“걔 진짜 이상하다니까, 엄마. 작은할아버지도 이상해.”
긴 금발을 높게 올려 묶고 있는 소녀는 잭이 봐왔던 어떤 여자애보다 예뻤다.
사랑스러움이 풀풀 풍기는 소녀가 잭을 돌아보자 잭은 순간 쥐고 있던 펜을 떨어트렸다.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지자 소녀가 풋,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잭은 높게 갈라진 자기의 목소리가 머저리 같다고 생각했다. 예쁜 여자애 앞에서 이런 모습이라니.
“네. 안녕하세요.”
상냥하게 받아 주는 소녀는 정말 볼수록 예뻤다. 잭은 반쯤 넋을 놓고 그녀를 쳐다봤다.
“방 두 개.”
낮은 목소리가 잭의 정신을 일깨웠다.
소녀의 부모인지, 소녀의 뒤에 나란히 서 있던 남녀 중 남자가 잭이 떨어트린 펜을 주워 내밀면서 다시 재촉하듯 입을 열었다.
“방 두 개 없나?”
“어…… 있죠. 네. 있어요. 어떤 방으로 하시겠어요?”
소녀는 자신의 부모 사이로 파고들더니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의 허리에 매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일 좋은 방 두 개요! 엄마, 이번에는 나랑 같은 방 쓸 거지?”
“다 큰 주제에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 벨.”
후드로 얼굴을 반쯤 가린 남자는 한 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꾹 누르면서 타박했지만, 소녀 또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내 통금 시간부터 없애고 그런 말을 하시죠?”
말없이 있던 여자 또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동참했다.
“그래. 그건 당신이 잘못했네.”
“헤디. 당신은 누구 편이야?”
“그 나이 먹고 딸이랑 편 가르기 하지 마, 루.”
소녀는 이겼다는 듯이 소리 내서 웃었지만 남자는 한숨만 쉬고 말 뿐이었다.
잭이 열쇠를 내밀자마자 소녀는 하나를 빠르게 낚아채고는 여자를 이끌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홀로 남은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잭은 소녀가 뛰어 올라간 계단을 힐긋거리면서 남은 열쇠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눈 돌려.”
잭은 서늘한 목소리에 딱 굳었다.
그는 살짝 위로 올라간 후드 덕분에 남자의 어둡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내 딸한테서 눈 돌리라고.”
잭은 남자가 가고 나서도 한참을 두려움에 떨었다.
사랑스러운 모녀와 무서운 아버지. 잭은 그들을 그렇게 기억했다.
* * *
“아빠는 너무 유치해. 난 아빠 같은 남자는 안 만날 거야.”
헤더는 침대 위를 뒹굴거리는 딸이 하는 말에 고개만 저었다.
“어렸을 적에는 너, 아빠랑 결혼한다고 난리 쳤으면서?”
“원래 어린 애들은 좀 멍청한 법이지. 아무튼! 엄마는 왜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났어?”
이자벨은 턱을 괴고 엎드렸다.
헤더는 짐 정리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딸의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었다.
“잘 생각해 봐, 엄마. 내 미모를 보면 엄마도 젊었을 적에 따라다녔던 남자만 수십이었을 텐데 왜 하필 아빠를?”
“집안이 엄했지.”
“우리 집도 엄해.”
“네 외할아버지를 보고 하는 소리니?”
깐깐하기 그지없는 외할아버지를 떠올린 이자벨의 눈이 도르륵 굴러갔다.
“외할아버지보다는 아빠가 낫지…….”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투로 중얼거린 이자벨은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아빠나 외할아버지 같지 않은 남자를 만나야겠네.”
“네가 남자 만난다고 하면 네 아빠가 드러누울걸.”
“17살 먹고도 연애 한 번 안 해 본 건 나밖에 없어.”
이자벨은 좀 억울해졌다. 이 미모를 이렇게 썩히는 게 말이 되나?
순간, 언제 들어온지도 알 수 없는 미하일이 이자벨의 머리를 눌렀다. 엎드린 그대로 이불 위에 이자벨의 얼굴이 폭 박혔다.
“아, 진짜! 하지 마, 아빠!”
“17살이면 집에 얌전히 있을 나이지. 어디 연애를 하려고 해.”
“어디 천 년 전 세상에서 오셨어요?”
이자벨은 비꼬듯 대답했다. 미하일은 혀를 차며 헤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가 천 년 전 세상에서 왔으면 당신 아버지는 이천 년 전 세상에서 온 건가?”
“지금 당신, 우리 아버지를 욕하는 거야?”
헤더가 가볍게 받아치자 미하일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럴 리가. 전통과 예의를 아시는 분이라는 뜻이지.”
부모의 애정 행각을 목격한 이자벨이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나 나갈래. 엄마 아빠의 애정 행각 같은 건 보고 싶지 않거든?”
“마음대로 해라. 저녁 전까지 돌아와야 하는 거 잊지 말고.”
통금을 상기시켜 주는 미하일의 말에 결국 이자벨이 빽, 소리를 질렀다.
“몰라!”
헤더의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부녀 둘 다 진심이란 게 그녀에게는 더 웃긴 일이었다.
이자벨은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올려 묶으면서 길을 걸었다.
수도는 그녀가 살던 마을과 달리 길이 크고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마을은 아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로, 솔직히 말하자면 이자벨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처음 봤다. 이렇게 많은 가게도.
이자벨은 주변을 쭉 둘러보고는 씩 웃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예쁘네. 이자벨은 태어나면서부터 도시에서 제일 예쁜 아이였고, 그건 아무래도 수도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예쁜데 연애를 못 하는 게 말이 돼?
사실 남자를 만나는 것에 대해 관심도 없으면서 이자벨은 속으로 일부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나이의 그녀는 그저 미하일이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을 전부 해 보고 싶을 뿐이었다.
아마 미하일이 그녀를 그냥 풀어 뒀다면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이자벨은 그냥 집에서 얌전히 놀았겠지만, 미하일은 그 사실을 몰랐다.
주변의 가게와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걷던 이자벨은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눈치채고 의문을 품었다.
어쩐지 길이 점점 더 깨끗하고 화려해질수록 사람이 더 적어지는 느낌인데.
귀족만 다니는 길. 그런 건가?
이자벨은 머뭇거리며 더 나아갈지 말지 고민했다.
17살이나 먹은 그녀는 자기 부모가 야반도주한 귀족이란 것 정도는 알았다.
그냥 돌아가자.
이자벨은 하녀나 하인을 이끌고 다니는 인간들이 많은 것을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가 이자벨의 팔을 붙잡았다. 놀라 뿌리치려는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헤더?”
이자벨은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큰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 자리한 청회안에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리움도.
이자벨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삼십대 중반 즈음처럼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우리 엄마의 전 애인 비슷한 건가.
그녀는 천천히 그녀를 붙잡은 남자를 훑어봤다. 잘생겼다. 키가 크다. 몸도 좋다. 돈도 많은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왜 이 남자를 차고 아빠를 골랐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이자벨과 과거의 추억에 빠져든 로윈 백작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응시했다.
“백작님! 갑자기 어디를 그렇게…….”
갑자기 마차 안에서 뛰쳐나간 백작을 쫓아 달려온 기사는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주인이 어떤 소녀 하나를 붙잡고 있는 걸 보고 말을 멈췄다.
이자벨은 그 기사를 힐긋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백작의 손을 떨쳐냈다. 그러나 백작의 손이 다시 이자벨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 저 가 봐야 하는데…….”
곤란해하는 이자벨의 목소리에 백작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이자벨의 팔을 놨다.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방계이기에 댈 수 있는 가문의 작위가 없습니다.”
이자벨은 슬슬 뒷걸음질 치며 대꾸했다. 백작은 그녀가 뒷걸음질 치는 만큼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혼란스러워졌다.
“어느 가문의 방계인지…….”
“귀한 분께서 알 만한 이름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혹시…….”
기사는 자기 주인이 웬 소녀한테 수작을 걸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서 온 늦사랑이야 뭐야. 지금 도련님 나이가 저 소녀 정도의 나이였던 것 같은데, 갑자기 미치신 건가.
“벨!”
순간 이자벨과 백작 사이를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곰 같은 덩치를 가진 청년이었다.
기사는 뭔가 일이 어디 낭만 소설이나 연극에 나올 법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자기 주인이 악역인 것 같았고.
“에드거…….”
이자벨은 속삭이듯 곰 같은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소백작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님.”
이자벨이 짜증스럽게 여기는 작은 외할아버지의 아들, 현재 구드윈 백작의 장남인 에드거였다.
유진의 사랑스러운 외모를 전혀 닮지 않은 곰 같은 청년은 이자벨에게 낮게 질책했다.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어?”
그래. 이런 면이 짜증이 났다. 무슨 다섯 살짜리 애 취급하는 이 태도가!
“그냥 좀 산책을…….”
다른 사람 앞에서 짜증을 낼 수도 없어서 얼버무리자 에드거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날 부르지.”
너랑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거든? 이자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는 아가씨인가?”
백작의 물음에 에드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저희 가문 방계의 아이입니다.”
아이가 아니야! 네 눈에는 내가 아이로 보이니?
“그렇군.”
그제야 뭔가 이해한 것처럼 아득한 눈빛을 하는 백작을 보고 이자벨은 고개를 숙였다.
진짜 우리 엄마 많이 좋아했나 보다…….
“아는 사람과 닮아서…… 내가 무례했던 것 같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인간이 그 ‘아는 사람’이 굉장히 백작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걸 눈치채기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첫사랑이라든가. 잊지 못할 옛 애인이라든가. 그런 것.
* * *
그날 밤. 겨우 미하일을 방에서 쫓아낸 이자벨은 슬그머니 헤더의 옆구리로 기어들어 갔다.
“엄마.”
“좁아. 네 침대로 돌아가.”
“아, 좀만 참아봐.”
“왜?”
그제야 이자벨 쪽으로 몸을 돌린 헤더는 졸음이 묻어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자벨은 자기랑 똑같이 생긴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다 툭 말을 던졌다.
“오늘 나 엄마 전 애인 봤다.”
헤더는 그 말에 여전히 눈을 반쯤 감은 채 이자벨의 머리를 밀어냈다.
“엄마는 네 아빠가 첫 애인이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리 가서 자.”
“여긴 아빠도 없는데 거짓말하지 말고.”
“내가 너한테 거짓말해서 뭐하니? 네 외할아버지의 철통 방어를 뚫은 건 네 아빠뿐이야.”
“외할아버지가 허락 안 하니까 야반도주한 주제에 무슨.”
“불가능한 적을 상대로는 가끔 물러날 때를 아는 것도 필요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연애하다가 날 가지는 바람에 도망친 거면서.”
“그게 그거지.”
헤더는 대화하다 졸음에서 벗어났는지 눈을 비비며 이자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뜬금없이 왜 그런 소리인데?”
“어떤 남자가 오늘 나보고 엄마 이름을 부르던데. 엄청 애틋하게.”
“도대체 누가?”
헤더는 정말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이자벨은 에드거에게 얻은 정보를 풀었다.
“로윈 백작이라고. 엄마랑 옛날에 혼담이 오갔다고 에드거가 그랬는데. 정말 몰라?”
이자벨은 헤더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치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애인 맞았네.”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이자벨을 향해 헤더가 부인했다.
“……그건 아니야.”
“이미 들켰거든, 엄마?”
“약혼자였지.”
이자벨은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떴다. 그게 그거 아닌가? 미래의 결혼을 약속한 사이면…….
“네가 엄마 배 속에 있었을 때, 그 남자랑 약혼했어.”
헤더의 말은 무거웠다. 이자벨은 설핏 굳었고, 그런 그녀를 보는 헤더는 오히려 작게 웃었다.
“좋은 사람이었어. 엄마가 임신한 걸 알고도 청혼했거든.”
널 자기 딸로 키우겠다고도 했지. 헤더의 눈은 과거를 회상하듯 아득해졌다.
“만약 네 아빠가 오지 않았다면…….”
이자벨은 헤더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헤더는 그런 이자벨을 아는 것처럼 씩 웃었다.
긴장감에 물들었던 분위기가 밝아졌다. 헤더는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아무튼, 벌써 십몇 년도 전의 일이란다. 네 아빠한테는 말하면 안 된다?”
헤더는 이자벨을 품에 끌어안으면서 키득거렸다.
“네 아빠가 워낙 질투가 심하잖니. 말 안 할 거지, 딸?”
“……엄마도 인기가 많았네. 나보다는 못했겠지만.”
“그럼. 네 얼굴이 누구한테서 나왔는데.”
헤더는 이자벨의 볼을 잡아당기면서 대꾸했다. 이자벨은 그녀의 손을 밀어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자기 침대로 돌아가 꾸물거리며 자리 잡은 이자벨이 헤더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 아저씨, 잘생겼던데.”
“네 아빠가 더 잘생겼어.”
“엄마는 눈에 뭐가 씌었어.”
“나중에 네가 데려올 남자의 얼굴이 어떨지 참 궁금하구나, 딸.”
헤더는 우아하게 이자벨의 말을 비꼬았다.
“아빠보다는 잘생겼겠지.”
“그거 그렇게 안 쉽다.”
“그건 엄마 생각이야.”
이자벨은 미하일의 잿빛 머리카락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 오기 직전의 하늘같이 우중충하잖아. 차라리 아예 까맣든가.
* * *
“나는 작은할아버지가 싫어.”
이자벨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에드거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언젠가 작은할아버지는 너도 팔아먹을지도 몰라.”
“삼촌이라고 부르기나 해.”
“꺼져…….”
에드거는 이자벨의 말투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이자벨은 영 내키지 않은 듯 느릿한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반갑군. 소백작.”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백작님.”
에드거는 잘 교육 받은 귀족 자제처럼 굴었고, 등장한 로윈 백작과의 대화는 교본에 나올 것처럼 매끄러웠다.
로윈 백작의 시선이 이자벨을 향했다. 이자벨은 불만스러움을 숨긴 채 그에게 인사했다.
“……이자벨 구드윈입니다, 백작님.”
무례하지 않을 정도의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이자벨은 백작이 꺼림칙했다.
엄마한테 들었던 말 때문일까. 만약에 아빠가 엄마를 데리러 오지 않았으면 이 남자가 내 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다고.
이자벨은 애써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차라리 엄마의 옛 애인이라고 착각했을 때가 더 나았어!
이자벨은 헤더에게서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로윈 백작이라는 남자와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만날까 밖에도 잘 나가지 않은 이자벨을 기어코 로윈 저택까지 끌어낸 건 유진이었다.
체면과 위엄이라는 것은 어디에다가 버리고 왔는지 어린 조카 손녀에게 매달려서 징징거리는 유진은 참 집요했다.
그냥 가서 얼굴 좀 보여 주고 거래 하나만 따오라고.
아니, 내 얼굴을 보여 준다고 뭐 일이 술술 풀릴 리가 있나?
이자벨도 나름 소문을 알았다.
공사에 있어서 철저한 양반이라는데 첫사랑도 아니고 첫사랑이랑 닮은 얼굴을 한 여자가 부탁한다고 뭘 들어줄 리가.
그러나 이자벨의 작은할아버지는 혹시 모른다면서 그녀에게 흑흑거렸다. 그 집요한 설득에 이자벨은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래서 결국 로윈 저택에 얌전히 들어오기는 했지만, 글쎄다.
이자벨은 속으로 짜증스럽게 웃었다. 얼굴만 보여 주라고 했지 뭐 내가 노력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수도에서 유명한 로윈 저택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구드윈 백작께 떼를 써서 오게 되었습니다, 백작님. 무례를 용서하세요.”
마치 관광지를 방문했다는 것처럼 말하는 투가 무례했다. 로윈 백작 정도의 귀족에게는 해서는 안 될 발언이었다.
에드거는 미쳤냐고 묻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유진이 마련한 적당한 변명 따위는 그녀가 선수 치는 바람에 내밀지도 못했다.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라 아직 예의범절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백작님.”
에드거는 황급히 변명했다.
로윈 백작은 이자벨의 무례를 지적하거나 그들에게 축객령을 내리는 대신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 저택이 그리 유명할 만큼 아름답진 않을 텐데.”
“그럼 왜 유명하죠?”
이자벨은 멍청하고 예의 없는 아이처럼 물었다. 그러나 로윈 백작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래 버텼기 때문이지.”
로윈 백작은 그녀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화를 낼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자벨은 백작이 그녀를 통해 엄마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화를 낼 리가 없지.
왜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느냐고 분노하기에는, 그녀는 백작을 이제 겨우 두 번 봤다. 그녀는 그저 백작에게 약간의 연민을 느꼈을 뿐이었다.
“……정원을 구경해 봐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그 약간의 연민은 이자벨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연애사 같은 거, 이렇게 자세히 알고 싶지 않다고.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자벨의 물음에 백작은 순순히 하녀 하나를 붙여 주었다.
“너, 이따 보자…….”
거의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속삭이는 에드거의 말을 뒤로한 채 이자벨은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앞서 걷는 하녀는 말이 없었다.
이자벨은 마치 몇십 년 전으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저택 복도에 나 있는 창을 통해 햇볕이 쏟아졌다. 얼룩이나 흠 하나 없는 깨끗한 바닥은 고풍스러운 맛이 있었다. 과거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저택이었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 저택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멈춰 있는 걸까.
하녀는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이자벨은 느릿하게 그 문을 나섰다. 정확히는 나서려고 했다. 그 문을 통해 들어오려는 사람과 마주치지만 않았다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섬세하게 세공된 단추였다. 이자벨은 그녀의 시야에서는 겨우 가슴팍만 보이는 상대를 올려다봤다.
“……도련님.”
하녀가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낮의 햇살 때문에 역광이 졌다. 이자벨은 상대가 굉장히 크다는 것부터 인지했다. 문 앞에서 한 발 비켜서고 나서야 그녀는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로윈 백작을 더 아름답게 다듬은 것처럼 생긴 소년은 웬만한 청년들은 뛰어넘을 키를 가지고도 아직 얼굴이 앳된 티를 품고 있었다.
이자벨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푸른빛이 섞인 잿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제서야 이자벨은 자기가 얼마나 소년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는지 깨닫고 눈을 내리깔았다.
수도는 대단한 곳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소년을 이자벨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차오르기 시작하는 민망함에 이자벨은 소년이 지나갈 수 있게 몇 발자국 더 비켜섰다.
그러나 소년은 움직일 생각을 하질 않았다. 이자벨의 곁에 서 있던 하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하실 명령이라도…….”
이자벨은 숙인 제 고개 위로 쏟아지는 소년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장님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으니까.
하녀가 머뭇거리다 이자벨을 소개했다.
“이 영애께서는 구드윈 소백작과 함께 오신 손님이십니다.”
이자벨은 가볍게 묵례했지만, 여전히 소년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예쁜 청회안에는 어딘가 초점이 없어 보였다. 로윈 백작의 아들이 거의 확실한 소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이자벨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럼 이만…….”
결국 이자벨은 자기가 먼저 소년을 지나치기로 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소년이었다.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거라고 착각하기에는 뭔가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숨도 못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
“……도련님? 도련님!”
뒤따라오던 하녀의 비명에 이자벨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 방금 지나쳤던 아름다운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자벨은 깜짝 놀라서 쓰러진 소년에게 다가갔다. 하녀의 비명에 근처에서 일하던 이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이자벨의 손이 소년의 팔에 닿자 귀신처럼 소년의 눈이 떠졌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청회안이 유령의 것처럼 오싹하게 느껴졌다.
“……가지 마.”
처음 들어본 소년의 목소리였다
* * *
알렉스 로윈의 삶은 운이 좋았다.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했다.
뒷골목의 빈민가를 구르던 애새끼에서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운이 억세게도 좋은 게 아니냐고.
로윈 백작은 알렉스 로윈의 존재를 알자마자 겨우 하녀 출신인 죽은 그의 어미를 백작 부인으로 만들었다.
뒤에서 그의 태생에 대해 수군거리는 이들이 있다고 해도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어찌 되었든 겉으로는 정통성에 흠잡을 데가 없는 로윈 백작의 하나뿐인 후계자였으니까.
그는 현재 자신의 상황에 만족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이들이 있더라도 어쨌든 그는 먹고 자는 데 불편함이 없는 지금의 상황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고.
알렉스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아들처럼 굴었고, 백작에게 감사했다.
온순한 후계자는 말수가 적었고, 행패를 부리지 않았으며 그럭저럭 괜찮은 도련님이라고 평가받았다.
외모를 제외하고는 어느 하나 눈에 띄는 구석도 모난 구석도 없는 소년. 그게 알렉스 로윈이었다. 그는 현재 상황에 지나치게 만족했기에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았으니까.
로윈 백작가에 들어온 후, 소년의 인생은 평탄했고 무난했다.
그렇게 끔찍한 굶주림이나 폭행 따위가 없는 삶에 녹아든 소년의 앞에 그보다 더한 충격을 주는 존재가 나타났다.
늘 똑같은 하루였다. 아침 식사 후 가정 교사와의 공부, 점심 이후 가벼운 산책과 훈련, 저녁 이후 휴식.
알렉스는 산책을 딱히 좋아하진 않았지만, 산책이란 것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여유롭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매번 정원을 걸었다.
남들이 보면 약간 이상한 광경이었다. 알렉스는 하늘도 한 번 쳐다보지 않고 그저 길만 뱅글뱅글 다섯 바퀴를 돌고 방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는 여느 때처럼 정원을 다섯 바퀴 돌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소녀와 마주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햇볕에 부서지는 금발이었다. 그는 거기에서부터 시선을 빼앗겼다.
겁에 질렸을 때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보다 작은 소녀가 그에게 위해를 끼칠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움직이거나 눈을 깜빡였고, 조금씩 얼굴 근육을 움직여 표정을 만들었다.
알렉스는 그 모든 것을 샅샅이 분석할 것처럼 뚫어져라 응시했다.
눈꺼풀이 떨리고 뺨이 입을 열 때마다 움직였다. 그는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순간 소녀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그는 겁에 질렸고, 그녀는 가볍게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알렉스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어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달려온 의원은 진지하게 알렉스의 상태에 대한 설명과 심도 있는 진찰을 거친 뒤 진단을 내렸다. 상사병으로 인한 호흡 곤란이라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듣고 있던 하녀들과 로윈 백작, 그리고 이자벨과 에드거는 어색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에드거는 여전히 알렉스에게 붙잡혀 있는 이자벨의 손목을 보다가 그녀를 쳐다봤다. 너 뭐했니? 라는 의문이 가득 담긴 얼굴에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10초간의 인사 말고 한 게 없는데.
그녀는 뺨에 뚫어져라 와 닿는 알렉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돌아보지도 못했다. 에드거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헛기침했다.
“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백작님.”
이자벨은 알렉스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얘 뭐지.
다섯 살짜리 애를 보듯 이자벨을 보고 있는 에드거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소백작. 그녀를 놓아주지 않겠나?”
어른인 것처럼 알렉스에게 말을 거는 에드거의 목소리에는 불쾌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로윈 백작은 대치하고 있는 에드거와 알렉스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있다 가지 그러나.”
“아직 어린 영애가 다른 가문에 오래 있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죠. 백작님께는 죄송하지만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에드거는 알렉스에게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 끙끙거리는 이자벨을 보고 말했다.
“가자, 이자벨. 이리 와.”
이자벨은 아직도 저를 놓지 않은 알렉스의 손을 밀어내면서 속삭였다.
“저기, 놓으시죠?”
로윈 백작이 꼼짝도 하지 않는 알렉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놓아라, 알렉스.”
백작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자벨은 백작이 아들을 아끼고 있다고 착각했다.
“영애가 불편해하지 않느냐.”
“하지만…….”
“다음에 다시 볼 때는 꼭 오늘 일에 대해 사과하려무나.”
다음에 다시 볼 일이 있으려나?
이자벨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 만큼 아름다운 소년이 약간은 불편해졌다.
알렉스의 손에 힘이 풀렸고 이자벨은 알렉스의 손을 밀어내자마자 서둘러 에드거의 옆에 붙었다.
로윈 가문의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했다. 겉으로는 다들 친절해 보이기는 하는데……. 첫눈에 반했다고 쓰러지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평소에 이자벨은 고백받을 때마다 미모에 대한 자화자찬을 일삼았지만, 이번에는 어딘지 그러기가 껄끄러웠다.
마을에서 만났으면 한 번쯤 만나 볼 만큼 예쁘게 생긴 소년이었지만, 이자벨은 그 마음을 접었다. 상황도 이상하고 신분도 껄끄러웠다.
나중에 마을에 돌아가서 할 자랑이 하나 더 생기긴 했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자벨은 더 이상 로윈 가문과 얽힐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러나 세상일은 늘 예측대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 * *
로윈 백작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부른 적이 손에 꼽았다. 굳이 따지자면 같은 공간에 있던 적도 많지가 않았으니까.
그렇게 서늘한 부자 사이에 적응한 하녀들은 요사이 몇 번이고 놀라야만 했다. 백작이 정말 도련님을 아들처럼 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식사를 같이하고, 교육을 챙기고, 인맥도 붙여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뭘 하든 무덤덤한 얼굴로 수긍하던 도련님이 백작을 따르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백작을 모셔온 이들은 부자간의 사이가 돈독해진 것을 기뻐했다.
백작은 아들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퍼붓기 시작했다. 팔불출이라 불러도 과장이 아닐 만큼.
그 여파에 휩쓸린 것은 구드윈 백작 가문이었다. 온갖 이권과 협박을 동반한 청혼서가 하루에 한 번씩 날아들었다.
만약 이자벨이 정말 그저 그런 방계의 아이였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서 약혼시켰을 조건들이었다.
유진은 청혼을 거절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가 헤더한테 걷어차인 정강이가 다시 욱신거렸다.
심지어 며칠 전부터는 아예 로윈 백작이 직접 구드윈 백작 가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울면서 이자벨에게 매달렸다. 도대체 뭘 하고 왔길래 일을 이렇게 꼬아 놨냐고.
이자벨은 헤더에게 조속히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위태로운 외할아버지의 건강에, 임종을 지켜야 한다는 헤더의 의견 또한 강경했다.
차마 엄마의 옛 약혼자의 아들이 자기한테 반했다는 말도 못하고 이자벨은 속으로 끙끙 앓았다.
로윈 백작은 오늘도 하루의 일과처럼 구드윈 백작 가문을 방문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알렉스는 언젠가부터 당연한 듯이 백작을 맞이했다.
“아버지.”
백작의 단단한 손이 알렉스의 어깨를 위로하듯 두드렸다. 알렉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걱정 마라, 알렉스. 구드윈 백작은 현명한 사람이니 분명 머지않아 승낙할 게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로윈 백작은 부드럽게 알렉스를 위로했다.
“반드시 그 아이를 네 부인으로 만들어 주마.”
알렉스는 그 말에 웃었다.
백작은 자신을 닮은 알렉스의 얼굴과 그 옆에 나란히 선 이자벨을 상상했다. 그에게 알렉스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아이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 아이는 아직 어려 짝으로 생각해 둔 이가 없을 테니, 약혼을 하자마자 바로 가문으로 데려오도록 하는 편이 좋을 게다.”
“전 뭐든 좋아요, 아버지.”
알렉스는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첫눈에 반한 소녀를 온종일 생각했다.
그는 쉼 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소망을 백작에게 종종 토로했고, 백작은 경청했다.
로윈 백작은 이전에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던 말을 알렉스에게 했다. 역시 나를 닮았다거나, 혹은 내 아들이라는 말들을.
백작은 알렉스에게 겨우 몇 분 본 소녀와 함께할 미래를 그려 보라고 말했다. 알렉스는 그 소녀를 평생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고는 또 기절할 뻔했다.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고…….
백작은 알렉스에게 상상력을 가르쳤다. 알렉스는 그때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말은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소년은 무던한 도련님에서 열정적인 후계자로 돌변했다.
그런 소년의 앞에 소녀가 다시 등장한 것은 한 달이 조금 지난 후였다.
소녀는 그간 했던 상상보다 아름다웠고, 그는 다시금 하얗게 비워지는 머리에 미리 적어 뒀던 종이를 꺼내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러니까, 저는 전혀 소백작과 약혼할 생각이 없어요. 이렇듯 신분 차이가 큰 약혼은 서로에게도 좋지 못한…… 지금 듣고 계신 거 맞죠?”
유진의 울부짖음에 못 이겨 결국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찾아온 이자벨은 전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소년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저기요?”
눈이 약간 맛이 간 것 같은데.
이자벨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알렉스 쪽으로 수그렸다. 초점 없는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빛과 같은 속도로 소년이 이자벨의 손을 낚아챘다.
“이자벨 양.”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감싼 채 그는 반쯤 돌아온 정신으로 그녀와 눈을 맞췄다.
머릿속에는 좋아, 나 이대로 죽고 싶어. 라는 생각들이 가득 찼지만 그걸 그대로 내뱉으면 안 된다고, 그는 아버지에게 배웠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이게.
뭔가 머릿속에서 많은 것이 생략된 것 같았다.
이자벨은 가깝게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에 혹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아를에서 언제부터 열일곱 살짜리의 결혼이 가능했죠……?”
첫사랑을 맞이한 열다섯 살짜리 소년은 본인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정정했다.
“결혼을 전제로 같이 삽시다.”
응??
지나치게 직설적인 발언에 이자벨은 눈만 깜빡였다. 소년은 다시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결혼할 때까지 같이 사는, 그러니까 결혼 전까지 약혼을…….”
점점 더 꼬이기만 하는 말에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얘 좀 이상해.
“거절해도…….”
“안 돼요.”
뭐지 얘는.
이자벨은 간절하게 그녀의 손을 붙들고 있는 알렉스를 쳐다봤다.
소년이 울기 시작했다. 물론 울어도 아름다웠지만 몹시 뜬금없었다.
“가지 말고 여기서 살아요…….”
울음 섞인 목소리가 이자벨의 귓가에 들렸다.
그녀는 오늘로 두 번 본 소년의 절절한 고백에 몹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뭐야. 수도는 다 이런가? 처음 만났을 때는 첫눈에 반한 충격으로 쓰러지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울면서 청혼하다니. 세 번째 만났을 때는 뭘 하려고.
수도는 다 이렇게 극단적인 건가. 설렘과 풋풋함으로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 같은 건 없는 건가?
그리고 음…….
이자벨은 한 뼘이나 되는 서류 뭉치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왜 안 봐요?”
울어서 살짝 빨개진 눈가가 묘하게 섹시했다. 이자벨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시선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그러고 보니까 얘 몇 살이지. 키는 이미 성인인데 얼굴에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다. 결혼 얘기를 한 거 보니까 열여덟은 넘었나?
눈을 씻고 봐도 열다섯으로는 보이지 않는 체구에 이자벨은 쉽게 착각했다.
“제가 보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보라고 만든 건데…….”
말끝에서 실망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자벨은 로윈 가문의 재정 상태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그건 기밀이잖아!
그녀는 알렉스가 내민 서류 뭉치 맨 앞장의 세 줄을 읽고 눈앞의 소년이 단단히 맛이 갔음을 깨달았다.
「사랑합니다. 결혼해 주세요. 당신이 갖게 될 로윈 가문의 재산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영지의 규모는…….」
“부족한가요?”
소년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읽어 보지도 않았는데요.”
“그렇죠. 꼼꼼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이자벨은 로윈 가문의 재산 규모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다.
“아뇨. 검토할 생각도 없는데요. 전 소백작과 결혼할 생각이 애초에 없으니까요.”
심지어 그녀는 결혼이 가능한 나이도 아니었다.
“전 구드윈 백작 가문의 먼 방계이기 때문에 거의 평민이나 다름이 없어요.”
알렉스는 그 말에 뭔가 반박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이자벨은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수도의 귀족분과 혼인하기보다는 고향에서 함께 살아갈 사람을 원한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소백작과 어울리는 짝이 아닌 것 같네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끝마친 이자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몸을 돌린 이자벨의 앞을 어느새 알렉스가 막아섰다.
“그게 뭐가 문제인가요? 제가 이자벨 양의 고향에 가서 살면 되잖아요.”
무슨 헛소리지. 가문은 어쩌고.
“제 어머니도 평민이었죠. 전 분명 이자벨 양의 고향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가문을 물려받으셔야죠.”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그녀가 알기로 로윈 백작의 자식은 하나뿐이었다. 여전히 백작이 아들을 아낀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자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작님께서 허락하시겠어요? 소백작의 마음은 고맙지만 저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아버지께서는 허락하실 겁니다.”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
“그래.”
이자벨은 문가에서 들리는 백작의 목소리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자벨을 향해 묵례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백작님.”
이자벨은 작게 중얼거렸다.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이제 이들 부자에게 별로 잘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뵐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죄송스러울 뿐이네요.”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알렉스가 끔찍해할 걸세, 이자벨 양.”
로윈 백작은 서늘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글쎄요. 소백작께서 어려서 아직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나 본데, 백작님께서 다시 가르쳐야겠군요.”
이자벨은 일부러 무례하게 거친 단어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부자 중 누구도 그녀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영애의 심기를 거슬렸나?”
“아뇨. 단지 너무 안일하게 가르치신 것 같아서요. 가문의 정보를 남에게 함부로 보여 준다거나…….”
“함부로?”
이자벨은 탁자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힐긋 응시했다. 백작은 그제야 이자벨의 말을 이해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내가 허락한 걸세.”
부자가 쌍으로 미친 건가.
“혹시 모자라나?”
알렉스가 했던 질문을 똑같이 반복하는 백작을 향해 이자벨은 이제는 체념한 채로 대꾸했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다 읽기에는 너무 양이 많은가? 좀 더 정리를 해서…….”
“정리하신다고 해도 제가 볼 일은 없죠. 볼 필요가 없으니까.”
단호한 이자벨의 말에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제 의견을 말했다.
“로윈 가문의 청혼은 제게 굉장한 영광이지만,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자리에요. 소백작께서는 제가 아니라 가문의 격에 맞는 영애와 연을 맺으셔야죠.”
솔직히 이자벨은 알 거 다 아는 로윈 백작이 평민에 가까운 귀족 가문의 방계 아이에게 청혼서를 넣은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백작이야 어리고 첫사랑이라 눈이 멀었다 쳐도 백작이 잘 달래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걸 그녀가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굳이 왜 그래야 합니까?”
알렉스의 질문에 이자벨은 한숨과 함께 대꾸했다.
“가문을 생각하셔야죠. 좋은 혼처를 찾는 건 후계자의 의무랍니다.”
“제가 로윈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면 저와 결혼해 주실 겁니까?”
“다시 말하지만 전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아니라 그때 가 봐야 알겠죠.”
만약 소백작이 그냥 길 가던 미소년이었으면 연애라도 한번 해 볼 마음이야 있었다. 그런데 아니지 않은가.
굳이 엄마랑 한 번 엮었던 가문, 그것도 눈에 띄기 좋은 고위 귀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잘생기기는 참 잘생겼는데…….
그녀에게 있어서 알렉스 로윈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럼 간단하군.”
백작의 말에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청혼을 취소하고 서로 자신의 갈 길을 가는 간단한 방법이…….
“알렉스, 비록 네가 로윈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게 되더라도 네가 내 아들이란 걸 잊지 마라.”
“예. 아버지.”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 거지.
“이자벨 양의 고향에 가서 살더라도 계절마다 한 번씩은 함께 수도로 올라왔으면 좋겠는데…….”
여긴 미친 자들만 있는 곳인가.
* * *
“나 집에 먼저 갈래, 엄마…….”
헤더는 그녀의 허리를 안고 징징거리는 딸의 머리를 쓸어 주면서 물었다.
“너 무슨 사고 쳤니?”
“수도에는 미친놈들이 너무 많아…….”
“예쁜 말 써야지.”
이자벨은 지친 얼굴로 헤더에게 매달려 대꾸했다.
“아빠한테 배운 거야.”
미하일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헤더.”
“외할아버지가 아빠를 좋아하는 소리 하네.”
“우리 딸 성격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은데.”
“아빠 닮아서야.”
헤더는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부녀를 돌아보고는 혀를 찼다.
미하일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헤더에게 속삭였다.
“헤더. 우리 딸이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가 본데, 우리 나가 있을까요?”
이자벨은 안고 있는 헤더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으면서 미하일을 노려봤다.
“난 지금 엄마의 위로가 몹시 필요하니까 아빠가 혼자 나가지? 애초에 아빠 방 놔두고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너 보러 온 거 아니란다, 벨.”
“나랑 엄마 방이거든?”
헤더는 찌푸려진 이자벨의 미간을 손바닥으로 눌러 피면서 말했다.
“둘 다 그만 좀 해.”
“엄마는 누구 편이야?”
“편 가르기 좀 하지 말랬지, 딸.”
헤더가 이자벨의 뺨을 꼬집으며 속삭였다.
이자벨의 표정이 부루퉁해짐과 동시에 미하일은 마치 이겼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못생긴 표정 짓지 마, 아빠.”
“이자벨, 우리 딸.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네 아빠는 잘생겼단다.”
이자벨은 헤더의 말에 의기양양해지는 미하일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아빠 방. 몰라. 혼자 있을래. 엄마는 아빠랑 여기서 데이트나 하고 있든지.”
“삐졌어?”
헤더의 물음에 이자벨은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아니!”
쾅 닫힌 문 뒤로 사춘기가 어쩌고 하는 미하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자벨은 사춘기가 아니라고 문을 다시 열고 소리칠까 했지만 참았다.
그녀는 사실 지금 다른 사람들의 애정 행각에 꽤 예민한 상태였다.
연애해 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미소년의 고백에 거절만 해야 하는 상황이 약간 짜증이 났다.
거기다 뭔가 그 집안, 좀 이상해. 좀이 아니라 사실 많이 이상했다. 그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것처럼 바라보는 소년도, 그녀를 며느리로 삼고 말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백작도 말이다.
이자벨은 미하일이 머무는 여관방문을 붙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도는 영 이상한 곳……?”
그녀의 말끝이 의문을 담고 올라갔다.
“이자벨 양.”
환하게 웃는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에 이자벨은 눈을 의심했다.
낡은 여관의 복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한 몸이 왜 여기에……?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여기서 뭘 하세요……?”
알렉스는 침착하게 그녀가 서 있는 방문 옆을 가리켰다.
“옆방에 묵고 있습니다. 이자벨 양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이란 걸 알아주세요.”
네 집은 어쩌고 여기에 있는지?
이자벨은 무수히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여기는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 작위를 잇지 않을 생각인지, 백작은 무슨 생각인 건지.
그러나 그 모든 질문에 앞서 그녀는 물었다.
“……그렇게 제가 좋아요?”
“네. 아주 좋아요.”
알렉스의 말은 들어갈 틈 하나 없이 단호했다. 이자벨은 피식 웃었다.
“우리 두 번 봤는데도요?”
“지금까지 세 번이에요. 제 꿈까지 포함하면 셀 수도 없죠.”
긴장한 게 뻔히 보이는 얼굴로 바람둥이 같은 대사를 읊는 소년은 포기하기 아까울 만큼 매력적이었다.
이자벨은 아쉬운 한숨과 함께 애써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본 여자한테 인생을 거는 건 미친 짓이에요. 돌아가요.”
“이대로 돌아가면 진짜 미칠 것 같은데도 말입니까?”
“여자한테 차였다고 미치는 사람이 어디에 있…….”
이자벨은 말을 하다 멈췄다. 있지. 여자한테 차이면 미칠 것 같은 남자가 있긴 하지. 우리 아빠.
“어느 쪽이든 미치는 거라면, 제가 있고 싶은 쪽에 있는 게 낫겠죠.”
거절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정말 몇 번 본 적도 없는 그녀를 세상 전부인 것처럼 바라보는 곧은 눈에 도무지 거절의 말이 나가질 않았다.
그것은 미하일이 헤더를 바라보는 눈을 닮았다. 그래서 이자벨은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졌다.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어릴 적만 하더라도 이자벨은 헤더보다 미하일을 더 따랐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미하일은 이자벨을 혼내지도 않았으니까. 잘 놀아주고, 혼내지도 않는 아빠를 좋아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헤더가 혀를 내두를 만큼 어릴 적의 이자벨은 미하일의 등에 꼭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자벨이 커가면서 무거워질 법도 한데 꼬박꼬박 그녀를 안고 다니던 미하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자벨은 눈치챘다. 미하일이 가장 사랑하는 게 자식인 그녀가 아니라 헤더라는 걸.
그저 이자벨보다 헤더를 좀 더 사랑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미하일에게 이자벨은 한 번도 헤더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이자벨은 그걸 알고 꽤 상처받았다.
분명 미하일도 이자벨을 사랑했지만, 헤더에 대한 사랑에 비한다면 사랑이라기도 부르기 민망한 크기였다.
아빠는 엄마 거야. 어린 이자벨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된 사실이었다.
그 뒤로부터 이자벨은 미하일에게 불퉁하게 굴기 시작했다. 어차피 엄마만 있으면 다 좋을 양반인데 뭐.
굳이 미하일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지 않게 되었다고 할까.
이자벨은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예쁨을 받는 아이였다. 헤더 또한 하나뿐인 딸인 이자벨을 끔찍하게 아꼈기 때문에 애정이 부족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가끔 미하일이 헤더를 보고 있을 때를 몰래 훔쳐볼 때면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저래서 엄마가 아빠랑 결혼했구나. 그런 생각들.
미하일은 늘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온몸으로 피력했다.
이자벨은 그때부터 연애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첫 번째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그냥 그저 그런 호감 말고,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감정 말고. 아빠가 엄마를 보던 것처럼 아주 열렬하게 나를 바라봤으면 좋겠어. 설사 핏줄이 이어진 가족이 있더라도, 평생을 함께해 온 친구가 있더라도, 낳아준 부모가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의 앞에 나를 둘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러니 당연히 연애란 게 될 리가 있나.
아직 어린 소년 소녀들의 연애란 대개 가볍고 풋풋했으며, 집요함보다는 설렘에 초점이 더 기울어져 있었다.
이자벨은 마을의 소년들이 자신에게 표하는 가벼운 관심들을 모조리 쳐냈다.
내가 아니어도 괜찮은 감정이면 왜 나한테 좋아한다고 하는 거야? 나 때문에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랑 나중에 커서 결혼하자고 하는 거지?
미하일과 헤더의 열렬한 사랑은 이자벨에게 그렇게 어딘가 이상한 결혼관을 심어 주었다.
입으로만 연애하고 싶다고 떠들었던 이자벨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철벽을 단단하게 쳤다. 그리고 그 철벽은 미하일이 헤더를 바라보는 것처럼, 집요하게 이자벨을 응시하는 한 소년에게 흔들렸다.
……보통 그런 걸 정신 나간 애정이라고 부르는지 이자벨은 몰랐다.
잘못된 가정 교육의 폐해였다.
잘못 건드리면 범죄의 길로 가기 참 쉬운 집착적인 애정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자벨은 설렜다.
평범한 다른 여자애들이었다면 소름이 끼쳐 조속히 도망쳤을 감정 앞에 이자벨은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닫힌 문밖에 석상처럼 서 있던 알렉스는 고개만 살짝 내민 이자벨을 보고 무표정했던 얼굴을 금방 미소 띤 얼굴로 바꿨다.
꽃처럼 웃는 미소년에게 이자벨은 머뭇거리면서 다가갔다.
그날 이자벨은 인생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이트를 했다.
이자벨은 눈조차 잘 깜빡이지 않고 한 번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알렉스에게 두근거렸다.
옆에서 누가 죽어도 나만 볼 것 같아.
그게 이상하다는 걸 둘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로윈 백작은 알렉스에게 그 말을 듣고 그게 당연하다고 대꾸해줬다.
이자벨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씩 알렉스와 있는 시간에 정신이 팔렸다.
소년은 정말 세상에 그녀만 남은 것처럼 굴었고, 집요하게 그녀를 관찰했으니까. 그게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알고 있는 이자벨은 알렉스가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고개만 이자벨의 움직임에 따라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알렉스를 지나가다가 본 여관 직원은 흠칫했다.
1층의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잭은 무서운 아버지를 달고 있던 예쁜 소녀가 무서운 소년을 달고 다니기 시작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걸 그 무서운 아버지한테 말해 줘야 하나. 뭔가 약간…… 맛이 간 미소년이 딸한테 붙어 있다고.
그러나 잭은 곧 고개를 저으며 관심을 껐다. 그게 자신의 신상에 이로울 것 같다는 눈치 정도는 갖추고 있어서였다.
무서운 남자와 소년이 비슷한 부류인 것 같은데. 뭐, 알아서 하겠지.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이자벨과 알렉스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헤더는 자신의 딸이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헤더 말고는 딱히 관심이 없는 미하일은 진지하게 그에게 이자벨의 연애에 대해 고민을 상담하는 아내의 뺨을 깨물다가 한 대 맞았다.
“집중해.”
품에 있던 헤더가 몸을 일으키자 미하일은 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불쌍한 척을 했다.
“집중하고 있었어, 헤더.”
헤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하일은 헤더의 허리를 다시 끌어당기면서 살살 웃었다.
“그래서, 우리 딸이 뭐 어쨌다고?”
결국 다시 미하일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된 헤더는 한숨을 쉬면서 대꾸했다.
“남자애를 만나는 것 같다고.”
“설마.”
대수롭지 않은 미하일의 대꾸에 헤더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내 말이 틀렸다는 거야?”
“아니, 당신의 말은 뭐든 맞지.”
헤더를 안은 팔에 힘을 준 미하일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이자벨이 걱정되면 구드윈 저택에 들어갈까?”
“당신이 아버지랑 싸우는 꼴을 보면서 스트레스나 키우라고?”
“아니면 수도에 저택을 하나 사는 것도…….”
헤더는 한숨을 쉬었다.
“난 내 딸의 첫 연애를 방해할 마음이 없거든요, 루.”
“음……. 그건 나랑 생각이 다르네. 우리 딸은 아직 어려.”
“보수적으로 굴지 마. 우리 아버지랑 그렇게 싸우더니 닮아 가고 있어, 진짜.”
“이상한 놈일 수도 있잖아.”
정답이었다. 알렉스 로윈은 어딘가 이상한 놈이 맞기는 했다.
“당신은 우리 딸의 안목을 못 믿는 거야?”
헤더는 자신에게 돌아 버린 미하일과 함께 살면서 아무래도 상식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미하일을 보며 자란 이자벨의 안목이 멀쩡할 리가 있나.
딱 미하일 같은 소년을 만나긴 했으니 어떤 의미로는 참 정확한 안목이기는 했다.
“어리면 잘못 판단할 수도 있지. 좀 더 커서 만나는 게 좋아.”
스무 살에 애인을 데리고 야반도주한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헤더는 자기 객관화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미하일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며 속삭였다.
“우리도 어릴 적에 만났잖아. 분명 당신처럼 좋은 남자를 골랐을 거야.”
미하일은 헤더의 어깨를 도닥이면서 피식 웃었다.
“난 좋은 남자가 아니야. 그래서 문제지. 나 같은 놈을 데려오면 어떻게 하려고.”
헤더가 미하일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훌륭한 범죄자의 싹으로 자랐을 그는 자기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단지 헤더가 그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 뿐이었다.
헤더는 진심으로 말하는 미하일의 말이 농담인 줄 알고 웃었다.
“당신 같은 남자를 데려오면 좋지. 우리 딸을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해 주는 애라면 난 찬성이야.”
미하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헤더를 꼭 안고 웃었을 뿐이다.
그는 저 같은 놈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놈이 이자벨에게 붙었을 거라고도.
그리고 미하일의 그 안이한 판단은 정확히 어긋났다.
이자벨은 며칠 뒤, 머뭇거리면서 만나는 남자애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남자애가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말도.
미하일과 함께 살면서 약간 상식의 선을 잃어버린 헤더조차 그 말을 듣고 약간 황당해했다.
“네 나이에 무슨?”
가볍게 사귀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십 대가 아닌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엄마도 스무 살에 아빠랑 도망쳤잖아.”
“넌 열일곱이니까 하는 말이지. 넌 법적으로 혼인이 불가능한 나이라고.”
이자벨은 입을 비죽이며 대꾸했다.
“알아. 그래서 약혼이라도 먼저 하면 어떻겠냐고…….”
“귀족도 아닌데 무슨 약혼까지……. 아니, 잠깐. 네가 만나는 애, 설마 귀족이니?”
헤더와 미하일의 눈이 동시에 날카로워졌다. 둘은 서로의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자벨은 귀족이되 귀족이 아닌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였다.
헤더는 순간 이자벨의 미모를 본 어느 귀족이 순진한 딸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들은 늘 자신과 급이 맞는 신분만 상대했으니까.
“어느 집안 자제인데?”
헤더는 추궁하듯 물었다. 이자벨은 순간 변한 헤더의 분위기에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이자벨이 갑자기 힐끔거리면서 미하일의 눈치를 봤다.
“엄마한테만 얘기할래.”
“……왜?”
말없이 있던 미하일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가 있어. 아빠는 좀 나가 있어. 아니면 말 안 할 거야.”
이자벨의 선언에 헤더는 한숨을 쉬며 미하일을 내보냈다. 방밖에 서 있겠다는 미하일의 말에 헤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제 말해 봐. 누군데?”
이자벨은 살짝 눈치를 보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렉스 로윈이라고. 로윈 백작의 아들인데…….”
헤더는 오랜만에 들린 과거의 이름에 멈칫했다. 그녀의 기색에 이자벨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도대체 어쩌다가?”
길거리에서 부딪혀서 운명적으로 시작되는 사랑일 리는 없지 않은가. 분명 감정적인 교류가 있을 만큼 만났을 텐데, 어디서 만났던 거지.
헤더의 추측은 죄다 틀렸다.
그냥 알렉스와 이자벨은 딱 한 번, 몇 초간 부딪혔고, 거기서 첫눈에 반한 알렉스가 거침없이 쫓아다니고 매달린 덕분에 이어진 관계였으니까.
“그냥 내가 좋다고 쫓아다녀서, 뭐 잘생기기도 했고…….”
“청혼까지 했다고? 내가 알기로는 그 가문 직계에서 아들은 한 명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가문 같은 거 상관없이 나랑 결혼하고 싶대. 작위 같은 거 안 물려받고 그냥 나 따라서 내 고향으로 가겠다고 했어.”
이자벨의 말은 꼭 질 나쁜 귀족들이 순진한 평민 소녀를 가지고 놀 때 하는 말 같았다.
헤더는 알렉스 로윈인가 뭔가 하는 소년이 이자벨을 갖고 놀고 있다고 판단하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가만히 있으면 백작위가 굴러떨어지는 가문의 후계자가 퍽이나 그러겠어.
헤더는 이미 그 빌어먹을 소년에게 정이 들었는지 눈을 반짝거리는 이자벨의 손을 잡았다. 이 순진한 것을 어째.
“……그럼 엄마가 그 애를 볼 수 있을까?”
이자벨은 뺨을 붉히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에이, 엄마. 그렇게 빨리 서로 인사할 필요는 없는데…….”
헤더는 자신이 너무 딸을 순진하게 키웠다고 자책했다.
알렉스 로윈이라는 소년의 첫인상은 헤더에게 썩 좋진 않았다.
딸을 가지고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헤더는 제 아비와 많이 닮은 소년을 보고 과거를 회상했다. 그만큼 눈앞의 아름다운 소년은 그녀에게 애원했던 옛 약혼자를 닮아 있었다.
오만했던 자존심을 그녀의 앞에서 내려놓은 채 무릎을 꿇었던 남자를. 헤더는 도망치자고 하는 미하일의 손을 잡는 찰나에 그 남자를 생각했다.
미하일의 손을 잡는다면 버려질 그 남자에 대한 연민이 심장을 스쳤지만 그녀는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헤더는 그렇게 수도에서 도망쳤다. 가족과, 친구와, 약혼자를 두고. 소년의 존재는 그녀가 이십여 년 전에 버린 것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엄마?”
멍하니 알렉스를 바라보는 헤더의 팔을 이자벨이 붙잡았다.
“엄마, 괜찮아?”
헤더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얼굴을 뒤로한 채 알렉스를 응시했다.
소년의 시선은 노골적이었다.
알렉스는 헤더의 팔을 붙잡은 이자벨의 손을 바라보고는 헤더의 얼굴을 응시한 후 웃었다.
헤더는 저런 표정을 알았다. 이자벨이 어릴 적에 미하일은 헤더에게 안겨 있는 이자벨을 늘 저런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신에게 붙어 있는 것은 전부 치우고 싶지만 딸인 이자벨만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짓는 표정임을 그녀는 알았다.
“……괜찮아.”
아빠 같은 남자는 안 만난다고 그렇게 바락바락 대들더니, 어쩌다 저렇게 미하일 같은 애를……?
헤더는 알렉스가 이자벨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다.
“약혼을 하고 싶다고 했니?”
“네.”
이자벨을 향해 물은 질문에 알렉스가 답했다.
“우리는 귀족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처지라, 약혼 같은 건 할 생각이 없는데.”
“괜찮습니다. 이자벨의 고향으로 내려가서 나이가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혼하겠습니다.”
헤더는 이자벨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너도 그러고 싶니?”
“지금은 그러고 싶어, 엄마.”
이자벨은 이게 단순한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연애인지 평생을 갈 운명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자벨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이만큼 좋아하게 된 소년은 알렉스가 처음이라는 것을.
“나중에는 나도 마음이 바뀔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헤더는 일단 저런 눈을 한 인간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변할 수도 있겠지. 사람이니까. 그런데 지금은 좋아해.”
“네 나이에 결혼을 생각할 만큼?”
살짝 비꼬는 헤더의 말투는 약간 어이가 없음을 담고 있었다. 이자벨도 그게 민망한지 약간 웃었다.
“몰라, 거기까지는. 그런데 난 분명 말했어. 나랑 연애하려면 내 고향까지 따라와야 한다고.”
이자벨은 약간 의기양양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눈길이 알렉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오겠다잖아. 결혼은 연애하다가 나중에 생각하면 안 돼?”
“……겨우 연애 한 번에 저 애가 버려야 할 게 너무 많은데?”
알렉스가 순간 단호하게 속삭였다.
“전혀요.”
헤더는 소년이 이자벨을 향해 웃는 얼굴에서 한때의 미하일을 발견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도망치자고 했던 그날 밤의 얼굴을.
소년은 헤더의 과거와 미래, 모든 것을 뒤섞어 놓은 것 같았다.
헤더는 알렉스와 이자벨을 내보내고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미하일이 그녀에게 다가왔지만, 헤더는 고개를 저었다.
“헤더, 그 소년이 마음에 들어?”
미하일의 물음에 헤더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당신을 닮았어.”
“좋은 아이야?”
“……이자벨이 그 소년을 사랑해 준다면, 평생 좋은 사람이겠지. 당신처럼.”
헤더는 미하일을 사랑했다. 그가 첫사랑이었고 끝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미하일은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아마 알렉스라는 소년도 그러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걱정하고 있어?”
“우리 아버지 생각이 드디어 이해가 가서.”
헤더는 여전히 열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미하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자벨한테 그 소년이 그냥 지나가는 어린 시절의 연인 같은 거라면, 그래서 우리 딸의 마음이 식으면…… 어떻게 될까?”
“내 의견을 묻는 거야? 당신의 마음이 식었을 경우를 상상하라고?”
사랑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평생을 갈 것이라 믿었던 사랑이 사실 며칠도 가지 못할 수 있었다.
헤더는 미하일과의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지만, 그녀 주변인들의 눈에는 그게 얼마나 어린 행동으로 보였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남자에게 딸을 보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겠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남자한테는.
“날 무섭게 하지 마, 내 사랑.”
미하일의 속삭임에 헤더는 몸을 일으켰다.
“어디를 가려고?”
문고리를 잡고 있는 헤더의 손목을 붙잡은 미하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헤더는 거기에 속지 않았다.
“금방 돌아올 거야.”
헤더는 미하일의 손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그녀는 미하일에게 웃어 줬지만, 미하일은 그러지 못했다.
낮과 밤의 경계는 붉었다.
노을 속에 잠긴 로윈 저택에 찾아온 손님이 문을 두드렸다. 함부로 열리지 않는 저택의 문이 쉬이 열렸다.
평민들이나 입을, 자수 하나 없는 드레스를 걸친 여인의 등은 꼿꼿했다.
긴 금발을 틀어 올린 헤더는 응접실로 안내하려는 집사를 제지했다.
그녀는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정원에 멈춰 섰다. 헤더는 스스로가 저택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하늘이 어두워지지 않은 정원에서 헤더는 늘 그녀를 기다리기만 했던 남자를 처음으로 기다렸다.
바스락. 풀이 짓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헤더는 몸을 돌렸다.
앳된 기색이 남아 있던 오만한 청년은 빈틈없는 귀족이 되어 있었다.
세월에 변한 얼굴 속에서 헤더는 여전히 똑같은 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를 붙잡고 애원했던 그 눈을.
“헤더…….”
말없이 사라졌던 옛 약혼녀의 등장에 백작은 말문이 막혔다.
다시 보게 된다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백작님.”
헤더의 속삭임은 작았지만, 백작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래. 당신이 가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
백작은 차분하게 속삭였지만, 속내는 격렬하게 들끓었다. 지금이라도 헤더를 붙들고 묻고 싶었다.
왜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났냐고. 그만큼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냐고.
“계속 기다렸나요?”
“그래.”
“내 딸을 보았으면서도요?”
백작은 헤더가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자벨이 그때 헤더의 배 속에 있던 아이임을 추측하는 건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신을 많이 닮았어.”
내 딸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백작은 뒷말을 삼켰다.
“당신이 올 것 같았어, 헤더. 그 애를 곁에 두면, 당신이 떠났던 그날처럼 갑자기 날 보러올 것 같았어.”
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헤더는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미하일을 선택했고, 그와 인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했으니까.
그렇지만 백작은 헤더가 보고 싶었다. 자기를 버린 여자가 보고 싶었다.
원망스러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보고 싶었다. 어떻게 웃고, 걷고, 말하는지. 시간 속에서 흐려지는 기억들을 다시 재구성하고 싶었다.
“당신이 보고 싶었어.”
여전히 예쁘네.
“행복한가?”
자신을 버리고 선택한 인생이 행복했을까. 백작은 모순적으로 뒤엉키는 감정을 삼켰다.
헤더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어떤 답변이라도 백작은 괴로워질 것이기에.
그녀는 대답 대신, 도망쳤던 과거를 이제는 끝내기로 했다.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백작님.”
이별을 말하고 떠났다면 괜찮았을까. 헤더는 잔인하게 끝을 입에 담았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날 떠났던 것처럼, 내가 내 마음대로 당신을 기다리는 건 자유야.”
백작은 이 정도는 욕심내도 괜찮다고 위안했다.
헤더는 때때로 살면서 그를 떠올릴 것이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버림받았던 남자를.
그 머릿속을 스치는 찰나만이라도 갖는 게 어딘가. 어느 누군가는 헤더, 그녀를 전부 가졌을 텐데.
헤더는 로윈 저택을 떠나오면서 문득 그 오래된 저택이 백작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을 견디면서도 단단하게 부서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헤더가 돌아보지 않아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저택.
헤더의 집은 그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저택을 나오자마자 그녀를 끌어안는 남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날 선택한 걸 후회해?”
미하일의 질문에 헤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자벨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헤더는 미하일의 신분을 알았다. 모든 것을 버린 것은 헤더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하일은 더 많은 것을 등져야만 했다.
“날 만난 걸 후회해?”
헤더의 속삭임은 작았다.
“그날 밤에 날 데리러 와서, 함께 도망치자고 하지 않았다면…… 당신 인생이 지금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날 헤더를 데리러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하일은 자주 그런 꿈을 꿨다. 헤더를 놓쳐 버리고 평생을 절망 속에 사는 인생을 담은 꿈을.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시간은 꿈속이라는 걸 알아도 끔찍했다.
“전혀.”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고향을 등진 남자가 웃었다.
“이게 내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미래야, 헤더.”
가끔은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질 만큼 완벽해서…….
“사랑해.”
무서워.
미하일은 품에 안긴 연인이 속삭이는 고백을 듣고 울 것처럼 웃었다.
“나도 사랑해, 루.”
이 순간이 깨질까 봐 무서워, 헤더. 그럼 나는 견디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하지?
미하일은 헤더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울하게 웃었다. 그의 시선 끝에 굳건하게 서 있는 로윈 저택이 있었다.
그는 이 저택을 무너트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미하일은 소망했다.
영원히 저 저택을 무너트릴 일이 없기를.
설사 그의 핏줄을 이은 딸이라 할지라도 품 안의 연인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얻고 미치지 않았다. 오로지 헤더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세상. 삶. 모든 것을 가진 여자만이.
꿈 같이 완벽한 세상 속에서 그는 웃었다.
[미하일의 소원 END]
두 번째 외전. 두 번째 결혼식.
아를 왕실 최악의 스캔들.
과부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린 태자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흥미로웠다.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는 어느 시대에나 먹히는 소재였으니까.
그러므로 그 사랑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포장되어서 공연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과부와 태자의 이름을 적당히 바꿔 만든 연극의 이름은 「두 번째 결혼식」이었다.
두 번째 결혼식. 노골적으로 과부와 결혼한 태자를,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연극은 뻔했지만 인기가 많았다.
한미한 귀족 가의 소녀는 잘생긴 기사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연극은 사랑스러운 소녀와 잘생긴 기사의 행복한 결혼 생활로 막을 올린다.
관객들이 절로 웃음을 터트릴 만큼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연달아 보여 주고는 기사는 전장으로 떠난다.
아름다운 여자가 된 소녀는 떠나는 기사에게 맹세한다.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거라고.
기사는 그 말에 약속한다. 영혼만 남아서도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그리고 기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한때 사랑스러웠던 소녀는 검은 옷을 입었고 영혼만 남은 기사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태양 같은 왕자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 연극은 영혼만 남은 기사와 태양 같은 왕자님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녀의 이야기였다.
영혼만 남은 기사는 그의 세상이나 다름없는 부인에게 애원한다. 우리의 맹세를 기억하느냐고.
한때는 사랑스러웠던 기사의 사랑은 집요하고 소름 돋는 집착으로 변해 가고, 마침내 그녀는 과거에 사랑했던 기사를 버리고 왕자의 손을 잡는다.
“……어떻게 하나도 맞는 게 없지?”
왕족들만 자리할 수 있는 로얄석에서 시그니티는 길게 하품했다.
주위는 텅 비어 있었다. 왕족들은 이 연극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아무리 각색했다고 한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연극인 걸 모르는 이는 이 수도에 없었으니까.
시그니티는 비어 있는 주위를 힐긋 훑어보다 몸을 일으켰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젊은 청년은 지루한 일을 오래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연극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었다.
수도 최고의 여배우라는 호칭에 걸맞게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은 창백한 얼굴로 무대 위에서 열연하고 있었다.
어머니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시그니티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게 말하자면 제일 안 닮은 건 아버지였다. 태양 같은 왕자님은 무슨. 어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갖다 붙이고 있어. 우리 아버지가 태양이면 난 신이겠지. 속이 시커멓다 못해 더럽기까지 한 그 양반이 태양이라니.
그는 더는 연극을 지켜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빠져나가려는 순간, 극장 안의 모든 조명이 훅 꺼졌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일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의자를 붙잡기 위해 뻗은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고요한 어둠이 쓰러진 그를 삼켰다.
극장 안의 모든 이들이 무대 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섭정공은 관객석에 앉은 한 여자의 얼굴을 훔쳐봤다.
“전하. 후작이 전하를 살해할지 말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요.”
캐롤은 질린 목소리로 고개를 돌리라고 우회적으로 충고했다.
시그니티는 당연히 그 말을 무시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내버려 둬.”
“하지만 전하께서는 실행에 옮기지 못할 거고, 후작은 가능하겠죠.”
선택받지 못한 주제에 아직도 이자벨이라면 전전긍긍하는 시그니티를 캐롤은 너무 잘 알았다. 이자벨이 버티고 선 이상, 그는 후작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냥 돌아가서 몰래 숨겨 둔 초상화나 보고 우시는 게 어떤가요?”
캐롤이 처음부터 이렇게 그의 순정을 비꼬았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녀도 섭정공을 동정하고 나름 위로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섭정공은 이자벨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성격이 더러웠고, 그녀의 위로를 딱히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성격이 더러웠던 캐롤은 섭정공을 위로하는 데 애쓰는 대신 그저 후작과 섭정공이 맞붙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초상화 같은 거 안 숨겨놨어.”
“거짓말 안 하셔도 돼요. 저한테 내숭 떨어서 뭐하시려고요?”
“진짜야.”
시그니티는 무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자벨이 내가 그러는 걸 싫어할 수도 있잖아.”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게 더 징그러워요.”
캐롤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대의 의견 따위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가끔 제가 이자벨의 친구라는 걸 잊고 사시는 것 같아요, 전하.”
“그래서 영애에겐 나름 관대하잖나.”
캐롤은 관대하다, 라는 단어의 뜻이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가, 고민했다. 이 성질 더러운 놈이 무슨 소리래.
“전하께서는…….”
순간, 극장 안의 모든 조명이 깜빡였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에 까맣게 물들었다 돌아오는 시야에 캐롤은 황급히 섭정공을 돌아봤다.
혹시나 암살 시도일까 하여 돌아본 섭정공은 무사했다. 캐롤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입을 열었다.
“전하, 오늘은 이만…….”
“저거.”
시그니티의 눈이 가늘어졌다. 캐롤은 시그니티가 바라보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혹스러움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섭정공을 호위하는 기사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검 끝은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극장의 의자 사이에 쓰러져 있는 청년을.
혼란스러워하는 캐롤의 목소리가 침묵 속을 뚫고 울렸다.
“전하…… 숨겨 둔 자식이 있으셨……?”
시그니티는 젊었을 적의 자신과 똑같이 생긴 청년을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내가 10살 때 애를 낳았겠나?”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캐롤의 반응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끌고 가서 정체가 뭔지 심문해.”
기절한 건지 잠든 건지 알 수 없는 청년은 기사들의 손에 일으켜졌다.
“……죽이지는 말고.”
섭정공의 명령에 기사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그 명령에 대해 제대로 된 보고를 받았을 때는 그다음 날이었다.
그는 보고를 받고 오랜만에 하루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감옥으로 내려갔다. 그의 젊은 시절과 닮은 청년이 있는 어둑한 지하로.
지하 감옥은 낮임에도 어둑했다. 꺼질 듯 희미한 등조차 몇 개 켜져 있지 않았다.
입이 무거운 간수는 물러나라는 그의 말에 그를 따라오지 않았다.
어둑한 감옥에서도 붉은 머리카락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감옥의 벽에 기댄 채로 주저앉아 있는 청년을 한마디로 평가했다.
징그러울 만큼 나와 닮았군.
겨우 하루 사이에 무슨 험한 꼴을 당했는지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감옥의 창살로 가깝게 다가가자 눈을 감고 있던 청년이 눈을 떴다. 노란 눈 또한 그의 것과 동일한 색채였다.
“……나한테서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갈라진 목소리는 혼란스러움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그는 청년의 혼란을 알 수 있었다.
섭정공은 물었다.
“넌 누구지?”
청년은 온종일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질문에 이번에도 똑같이 답했다.
“시그니티, 시그니티 바르펜시아 대공자. 바르펜시아 대공의 하나뿐인 아들, 아를 왕의 장조카, 왕실 최악의 스캔들의 결과물…….”
섭정공은 그 말을 잘라냈다.
“현 바르펜시아 대공은 자식이 없고, 현 아를 왕의 장조카는 죽었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은 오래된 일이었다.
그는 아직 생기를 잃지 않은 청년을 향해 다시 물었다.
“네가 정말 시그니티 바르펜시아라고?”
어둑한 감옥 안에 진 그늘에 청년은 질문하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남자는 창살에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왔다.
청년은 순간 눈을 찌푸렸다.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얼굴이 낯익었다. 그야 평생을 거울 속에서 보아온 얼굴이었으니까.
“네가 젊은 시절의 나라고?”
청년은 남자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청년은 늘 사랑받아 왔고, 사랑할 줄 알았으며, 그와 조금이라도 대화해 본 사람이라면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다정하고 쾌활한 청년은 늘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의 태생을 싫어하는 이들이라도 그를 알고는 싫어할 수가 없을 만큼 그는 매력적인 청년이었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도 청년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남자는 오랜 시간 전장에서 산 병사처럼, 혹은 적에게 둘러싸인 폭군처럼, 서릿발 같은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남자는 물었다. 청년은 답하는 대신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신이, 나라고?”
혼란을 숨기지 못하는 젊은 청년에게는 아직 앳된 티가 묻어났다. 그가 순간적으로 과거를 회상할 뻔할 만큼.
섭정공은 청년이 하는 말도, 취하는 태도도,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가 이유 없이 믿는 것은 세상에 하나로 족했으니까.
“네가 정말 나라고 주장한다면, 증명해 봐. 네가 정말 시그니티 바르펜시아인지.”
“어떻게 증명하지? 어차피 내 일생 따위는 누구나 알기 쉬운 걸 텐데.”
시그니티 바르펜시아는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이들의 관심을 붙잡았다.
과부와 왕자의 아들이라니. 그 얼마나 귀하고 비천한 핏줄인지.
남자는 청년의 말에 고개를 까딱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의 인생은 늘 공적인 영역이었다.
섭정공은 그의 인생에서 벌인 일 중에 대부분의 사람이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건에 대해 묻기로 했다.
“……난 15년 전에 반란을 일으켰지.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청년은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섭정공은 혼란스러워하는 청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깨달았다.
“그렇군.”
섭정공은 청년이 젊은 시절의 자신이라고 확신함과 동시에 젊은 시절의 자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모순적이었다.
“넌 이자벨을 몰라.”
섭정공은 쓰게 웃었다.
이 청년은 이자벨을 만나지 않은 젊은 날의 자신이었다. 다정하고 쾌활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청년. 누군가를 상처 입히면서까지 사람을 사랑할 줄 몰랐던 과거의 그였다.
“……이자벨이 누구지?”
청년이 물었다.
섭정공은 웃음을 터트렸다. 평생 그가 던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내 인생을 가져간 여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이자벨, 내 아가씨, 차라리 당신을 모르고 살았다면 내 인생이 조금 더 행복했을까?
* * *
시그니티는 고문을 받는 동안 꺾였던 손가락을 치료받았다.
뼈를 맞추는 감각은 끔찍했지만 뒤틀린 채로 평생을 살아가는 걸 상상해 보니 참을 만했다.
그를 고문할 것을 명령했던 남자. 그러니까, 미래의 자기 자신은 그를 왕궁 구석진 곳에 박아 놓고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과 똑같이 생긴 그 남자가 미래의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은 딱딱한 얼굴 위에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권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시그니티는 그가 그의 아버지처럼 자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독재자 같은 남자가 아니라.
“그건 너무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거 아닌가요?”
도도하게 생긴 미인이 혀를 차면서 시그니티의 생각을 비난했다.
“대공자는 이자벨이 떠나기 전에도 딱히 좋은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자신을 캐롤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 가끔 들어와 감시하듯 그를 응시하고는 사라졌다.
들어오는 인간이라고는 저 여자뿐이니 시그니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라 할지라도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 말을 걸었다.
“내가 그 이자벨이라는 여자를 언제 만났는데?”
“열일곱? 열여덟인가? 지금 대공자는 몇 살이죠?”
“열아홉.”
“약혼은 아직 한 적이 없나요?”
“파혼당했지.”
시그니티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이제 거의 기억 속에서도 지워진 이름을 간신히 기억해냈다.
“테이그 백작의 딸이었던 것 같은데……. 나와 약혼하느니 죽겠다며 난리를 쳐서 결국 무산된 이후로 혼담 같은 건 들어온 적이 없어.”
캐롤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대공자의 약혼은 나름 꽤 여러 소문이 돌았죠.”
사교계 데뷔까지 한참 남은 열다섯 살짜리와 약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야 소문이 가라앉았다.
“이자벨은 대공자가 처음으로 약혼한 소녀였죠. 백작 가문의 맏딸로,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영애였어요.”
캐롤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덧붙였다.
“사실 얼굴만 사랑스럽긴 했죠. 그래도 착한 영애였어요. 뭐, 다른 인간들보다는 훨씬 나았죠.”
“예쁘고, 착하고. 그래. 뻔하네. 그쪽도 내가 싫다고 난리를 쳐서 파혼을 당한 건가?”
“그랬으면 차라리 나았겠죠.”
시그니티는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캐롤이 한숨을 쉬는 것을 쳐다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민 태가 최소한 사교계의 한 축을 휘두르고 있을 여자였다. 아름답고, 자신의 아름다움까지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여자.
시그니티는 처음 그녀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그녀가 이자벨인 줄 알았다. 물론 이자벨이라고 부르자마자 일그러진 얼굴에 아니란 걸 깨달았지만.
“사이가 좋았어요. 대공자가 이자벨을 보기 위해 몰래 수도로 들어와 머무르기 시작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시그니티는 그들의 사정을 뻔하게 다 알고 있는 캐롤을 향해 의혹을 제기했다.
캐롤은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자벨이 없더라도 역시 성격이 좋진 않았다.
“난 섭정공의 최측근이자 이자벨의 친구니까요.”
캐롤은 한숨과 함께 투덜거렸다.
“내가 당신들의 이자벨 찬양가를 얼마나 많이 들었다고 생각해요?”
“당신‘들’?”
“대공자만 이자벨을 사랑한 건 아니거든요.”
“내 약혼녀였다면서.”
따지고 드는 시그니티를 향해 캐롤은 어깨를 으쓱이며 애매하게 답했다.
“꽤 길고 긴 사연이 있으니까 그건 넘어가요.”
그 긴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하기에는 삼 일 밤낮도 모자랐다. 그녀는 그런 친절을 그에게 베풀기에는 귀찮았다.
“불친절하군.”
불평하는 청년에게서 묻어나는 앳된 느낌에 캐롤은 멈칫했다. 까칠하고 까다로운 것은 같았으나 확실히 더 순했다.
캐롤은 이자벨을 만나기 전의 시그니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들의 사정에 대해 해박한 것은 귀로 들었기 때문이지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확실히 이 젊은 청년이 섭정공보다 인간미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시그니티는 말을 잠깐 멈춘 캐롤을 재촉했다.
“아아, 알았어. 불평하지 않을 테니까 계속해 봐. 그래서 사이가 좋던 내 약혼녀랑 내가 왜 헤어졌는데?”
뭐 갑자기 다른 귀족이 연적으로 나타나기라도 했나? 혈통이 좀 거슬려서 그렇지 작위야 그보다 높으려면 왕자는 되어야 할 텐데.
시그니티는 상식적인 선에서 추측했지만 캐롤의 답변은 그 상식을 파괴했다.
“샬덴의 공녀로 끌려갔거든요.”
캐롤은 놀라 말문이 막힌 시그니티를 보고 피식 웃었다.
“왜 당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해요? 사실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요. 본인이 권력 욕심이나 야망이 없다는 걸.”
“……애초에 공녀로 선택되기 전에 손을 쓸 만한 권력은 대공자였던 시절도 충분했을 텐데.”
바르펜시아 대공은 그 정도의 힘이 있었고, 예비 며느리를 위해 그 정도는 할 사람이었다.
“그렇죠. 그저 그런 공녀 중 하나로 뽑혔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겠죠.”
캐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을 앞에 두고 쓰게 웃었다.
“샬덴의 왕이 직접 그녀를 데려가고자 아를의 수도까지 왔던 게 아니라면 말이에요.”
시그니티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연극의 줄거리를 듣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여자 하나를 위해 적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왕이라. 그의 아버지인 왕년의 바르펜시아 대공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아를 왕의 선택지는 전쟁이냐, 아니면 예비 조카며느리를 보내느냐. 두 가지밖에 없었어요. 누가 왕이었더라도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였죠.”
“왕이 결국 그녀를 보냈군.”
캐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대공자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죠.”
“미쳤네.”
시그니티는 미래의 자신을 간단하게 평가했다. 캐롤은 거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길래? 아까부터 이름 말고 누군지 정보를 하나도 안 푸는 이유라도 있나?”
“알아서 뭐하게요?”
캐롤의 질문에 시그니티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그녀를 알지 않는 편이 좋았다.
“당신은 언젠가는 당신의 시간대로 돌아가겠죠.”
시그니티의 몸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캐롤은 본능적으로 그가 이 세계와 맞지 않는 인물임을 느꼈다.
언젠가는 자신의 시간대로 돌아갈, 젊은 시절의 섭정공이라.
“난 당신이 이자벨을 만나지 않기를 빌어요. 그게 더 낫지 않겠어요?”
“미래의 내가 사랑에 실패했으니까?”
“맞아요. 굳이 실패할 사랑을 시작할 필요가 있겠어요? 아직 만나기도 전인데.”
캐롤은 나름 시그니티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 시그니티도 그 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젊은 섭정공은 약간의 반발심을 가지고 대답했다.
“내가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지.”
캐롤은 코웃음 쳤다.
“샬덴의 왕이 아예 그녀를 알지 못하게 미리 막을 수도 있지 않나?”
“대공자의 연적이 샬덴의 왕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요.”
시그니티는 약간 당황했다. 샬덴과 아를의 사이에 끼인 여자를 상상해서였다.
샬덴과 아를의 최고 권력자들이 한 여자를 갖기 위해 다퉜는데 정작 그 여자는 다른 남자한테 갔다는 건가? 그걸 미래의 자신이든 샬덴의 왕이든 보고만 있었고?
“어디 다른 나라 왕이라도 또 끼어들었나?”
이 정도면 그 이자벨이라는 여자의 얼굴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매력적이었으면 왕들이 족족 반하는…….
“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슬쩍 넘어가려는 캐롤의 답변에 시그니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군. 반응을 보니까 왕족에 가깝지조차 않은 남자인 것 같은데. 그럼 고위 귀족도 아닐 테고.”
그는 캐롤의 기색을 살피며 추측을 늘어놓았다. 캐롤은 질린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지만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지. 그래도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인 것 같으니, 나처럼 혈통에 문제가 있는 왕족, 아니면 고위 귀족?”
“……알아서 뭐 좋을 게 있다고 그걸 추측하고 계세요?”
“버릇이야.”
“미래의 권력자다운 버릇이네요. 하지만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당신은 그녀를 만나지 않는 게 좋아요.”
캐롤은 그에게 경고했다.
“이자벨의 사랑은 정해져 있어요. 당신은 그를 이기지 못해요.”
그녀의 말은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확고했다.
“내 경우는 다를 수도 있지.”
캐롤은 쓰게 웃었다.
“과거의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죠.”
결과는 보다시피 이러네요.
* * *
시그니티는 그 뒤로 며칠 정도 더 갇혀 있었다. 캐롤은 그 경고를 끝으로 그의 방에 오지 않았다.
간간이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입이 무거운 시종 외에는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갇혀 있다 자신의 시간대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다. 하지만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전하?”
얇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일고여덟쯤 되었을까. 그와 비슷한 적발을 가진 아이가 시그니티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아를 왕족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남자아이는 아이치고는 신중한 태도로 시그니티를 응시했다.
“누구십니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묻는 아이를 향해 시그니티는 되물었다.
“너야말로 누군데?”
갇혀 있느라 예민해진 시그니티의 까칠한 말투에 아이는 움찔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저는 아를의 태자인 이스테반…….”
“너, 내 아들이니?”
시그니티는 미래의 자신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만 알았지 정확히 무엇이 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반란을 일으켰으니 왕이 되지 않았을까 정도만 추측했을 뿐.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시그니티 바르펜시아의 아들이 아니라고?”
“섭정공께서는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섭정공? 그게 미래의 내 작위인가?
아이는 시그니티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는지 그의 눈치를 보며 슬쩍 뒷걸음질 쳤다.
시그니티는 도대체 아를의 태자라는 애가 왜 시종 하나 없이 복도에 덩그러니 있는지는 몰랐지만, 미래에 대한 정보를 얻기에는 꽤 쓸만한 패라고 생각했다.
그는 도망치려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굽히고는 다정하게 물었다.
“여기 문은 왜 열었는데?”
“……헤더를 찾으려고요.”
아이는 몹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래? 찾는 걸 도와줄까? 어떻게 생겼는데?”
아이를 회유하기로 작정한 시그니티의 꾸며진 친절에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작게 속삭였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생긴 여자애예요.”
그 말을 하는 아이의 얼굴은 불에 타는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시그니티는 아이가 짓는 표정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참나. 어린 게 뭘 안다고.
“헤더는 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깔이에요.”
좋아하는 여자애에 대해 종알거리는 아이는 그제야 제 나이처럼 보였다.
“눈은 녹색이고 키는 저보다 조금 커요.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제가 더 클 거니까 괜찮아요.”
시그니티는 그 헤더라는 아이가 시녀인지 귀족 아이인지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는 슬쩍 물었다.
“네 약혼녀야?”
아이가 대답 대신 시그니티를 올려다봤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아이의 표정에 경계가 깃들어 있었다.
“대충 섭정공의 친척이라고 생각해.”
시그니티의 얼버무리는 대답에 아이는 불만스럽게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가 물은 것이 그리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기에 아이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비밀이라기보다는 아를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에 가까웠다.
“헤더는 다 클 때까지 약혼 같은 거 못해요.”
“왜?”
“헤더는 아주 예쁘니까요.”
도대체 예쁜 것과 약혼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는 시그니티의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약간 한심하게 쳐다봤다.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지은 한심해하는 표정에 시그니티는 약간 떨떠름함을 느꼈다.
“헤더는 아주 예쁘고, 어른들은 다 헤더를 사랑해요. 그래서 헤더를 아주 늦게 결혼시킨다고 했어요.”
시그니티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흔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자기 자식을 예뻐해 품 안에 끼고 도는 귀족들이 있었다. 그런 경우, 어린 시절에 약혼을 해두지 않은 탓에 나중에 상대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 정도로 사랑받는 자식이면 가문의 지원이 넉넉했기에 나름대로 인기 있는 결혼 상대기도 했다.
그런데 자식이 예쁘다고 왕가의 청을 거절하는 미친 가문은 없을 텐데.
시그니티는 스스로를 아를의 태자라고 소개한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이 정도면 자식이 아무리 귀해도 그냥 약혼시킬 법도 한데. 혹여 나중에 파혼하더라도 왕가와 약혼했다는 사실은 가문의 격을 높여 주기 마련이었다.
어느 늙은 고위 귀족의 늦둥이라든가. 그런 건가.
“고집이라도 부려보지. 왕가의 어른들이나, 뭐 폐하라든가.”
아이는 이제는 숫제 시그니티를 바보 취급하면서 대꾸했다.
“왜 그런 짓을 해요? 제가 아까 말했잖아요. 어른들은 헤더를 더 좋아한다고.”
“……왕실에서도?”
“당연하죠. 헤더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그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아이가 말하는 ‘어른’은 헤더라는 아이의 가문 어른이 아니라 귀족들을 통틀어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게 가능한가? 태자보다 예쁨받는 아이라고? 이 무슨 ‘이자벨’같은 아이란 말인가.
그는 얼굴도 가문도 모르고 이름만 아는 여자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가문 아이인데?”
아이는 하늘이 무슨 색이냐는 질문을 들은 것처럼 시그니티를 응시했다.
“어디 다른 대륙에 있다가 오셨어요?”
“비슷하지.”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 아이답지 않은 태도였다.
이 나이대의 왕족이라면 흔히 사람을 깔보는 태도를 가질 법한데 아이는 신분이 불분명한 시그니티에게도 존대를 했다.
심지어 태자가.
시그니티는 그제야 위화감을 느꼈다.
“헤더는 로윈 가문의 여자애예요.”
태자라 하면 왕을 제외하고는 따로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존대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좋은 가문이지만…… 왕가의 사람들이 그 애를 예뻐할 이유가 따로 있나?”
아이는 가만히 시그니티를 응시했다. 마치 탓하는 것처럼.
“……섭정공 전하께서 무릎에 앉히는 아이는 헤더뿐이니까요.”
아이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왕실의 구석진 곳에 자리한 정원에 풀이 무성했다.
나무 사이로 비친 햇살이 아이의 눈을 찔렀다. 아이는 손을 들어 햇살을 막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헤더를 갖고 싶다고 하면, 전하께서 절 죽이실지도 몰라요.”
시그니티는 점점 더 이 미래의 세상에 대해 알 수가 없어졌다.
그가 아이를 부르려는 순간,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순식간에 달음박질쳐 나가는 아이를 보면서 시그니티는 당황했다.
“헤더!”
귓가에 아이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그니티는 아이의 시선 끝에 자리한 여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하얀 아이는 까마득히 높은 고목의 가지에 열매처럼 붙어 있었다. 멀리서 봐도 장난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여자애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올라와 봐, 에반!”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를 예상했던 시그니티의 추측을 완전히 깨트린 모습이었다.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자아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헐렁한 바지와 셔츠를 걸친 아이의 얼굴 위로 엉성하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흐트러졌다.
태자는 나무 아래에서 무슨 숲의 요정을 바라보는 것처럼 멍청하게 여자아이를 올려다봤다.
“안 올라올 거야?”
“위험하잖아!”
“재미없게 굴지 마.”
아마도 헤더라는 태자의 짝사랑 대상인 것 같은 여자아이는 두꺼운 나뭇가지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렸다.
“내려와. 헤더.”
“싫어. 네가 올라와.”
아래에 있는 태자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자아이는 멀찍이 서 있는 시그니티를 발견했는지 손을 허우적거렸다.
뭔가 반갑다는 것 같은 손짓인 것 같은데…….
“시그! 시그!”
순간 아이가 나뭇가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가 봐도 위태로운 모습에 시그니티는 움찔했다. 그리고 아이의 몸이 미끄러지듯 허공으로 추락했다.
시그니티는 거의 구르듯 뛰어가 반사적으로 아이를 받아 안았다. 팔 안쪽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진다 싶더니 아이의 짧은 팔이 시그니티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반가움을 열렬히 드러내는 강아지 같은 태도였다.
“위험하잖아!”
충격받았는지 하얗게 질린 남자아이가 헤더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헤더는 뻔뻔하게 맞받아쳤다.
“당연히 시그가 받아 줄 줄 알았으니까 하나도 안 위험했어.”
“그분은 전하가 아니야, 헤더.”
헤더의 시선이 시그니티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내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헤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러네. 누구세요?”
장난기가 듬뿍 배어 있는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헤더!”
그리고 높은 목소리와 함께 절대 남의 눈치를 볼 것 같지 않은 녹안이 눈치를 보듯 찌푸려졌다.
재빨리 시그니티의 품에서 빠져나온 헤더는 태자를 달랑 들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의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그건 아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속도였다.
자기보다 얼마 작지도 않은 태자를 손쉽게 들어 올려 도망치는 등을 보자, 참 훌륭한 기사가 될 것 같았다.
성별이 잘 구별이 되지 않는 아이라 그런지 정말 여자아이 같지 않았다. 차라리 저 애가 더 태자 같군.
사랑만 받고 자란 사람들만 가지는 특유의 당당함과 매력이 단어마다 묻어났다. 그 누구도 자기를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참 갖기 힘든 종류의 자신감이었으니까.
“헤더! 이 망아지 같은……!”
달려왔는지 헐떡거리는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시그니티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누가 봐도 도망친 여자아이와 닮았다는 감상이었다.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금발 아래의 녹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전하……?”
미인이네.
시그니티는 짤막하게 그녀를 평했다. 아무래도 그 망아지 같은 아이의 어머니처럼 보였다.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눈만은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처음 뵙는 얼굴인데, 누구신지…….”
미인은 금방 그가 섭정공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물었다.
시그니티는 그 말끝에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느꼈다.
태자는 경계심이나 두려움을 갖고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연민이 느껴지는…….
아. 이 여자다.
시그니티는 그녀의 태도에 단박에 깨달았다. 잘 돌아가는 머리는 눈앞의 여자가 ‘이자벨’이라는 것을 쉽게 추론해냈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섭정공이 무릎에 앉혀서 예뻐할 아이가 누구겠어.
첫사랑을 그리워하느라 결혼도 안 한 남자가 예뻐할 아이면, 첫사랑을 닮은, 첫사랑의 아이겠지.
“그분의 먼 친척입니다.”
시그니티는 애매하게 답했다. 그러나 눈은 예리하게 그녀를 훑었다.
확실히 아름다웠다.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하지만 뭔가…… 보는 순간 심장이 떨어질 만큼 사람을 휘어잡는 여자일 줄 알았는데.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인 미인의 전형적인 모습과 달랐다. 사랑스러운 외모에 총명한 눈. 몸에 밴 예의 바른 태도. 지나칠 정도로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였다. 아주 아름답고 잘 교육 받은, 귀족들이 가문의 안주인으로 흡족하게 여길 만한 여자.
별로 재미있어 보이진 않는데. 내가 이 여자한테 그렇게 빠졌었다고?
“아이들은 저쪽으로 가더군요.”
첫눈에 심장이 덜컹거리지도 않았다. 그냥 예쁘다는 감상이 다였다.
“감사합니다.”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그가 가리킨 쪽으로 사라졌다.
시그니티는 혼자 남겨지자 혀를 차면서 몸을 돌렸다. 기대했던 것치고는 시시했다. 그냥 돌아갈 때까지 얌전히 방 안에 박혀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예쁘기는 예쁜데, 별로 내 취향은 아니던데.
시그니티는 그날 침대에 누워서 도대체 왜 그 여자한테 그렇게 미래의 자신이 미쳤는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정확히 삼 일 뒤, 그는 그렇게 평가했던 자신의 머리를 후려쳤다.
첫눈에 심장이 덜컹거리지도 않았고 한눈에 반하지도 않았다. 그건 확실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그 여자의 얼굴이 눈앞에 떠다녔다. 마치 세뇌된 것처럼 떠다니는 먼지를 보고도 그 여자가 생각이 났다.
이자벨. 이름이 이자벨이라고 했지.
삼 일째 되는 날, 시그니티는 벽에 스스로 머리를 박고 인정했다.
그는 사랑이란 걸 깨닫는 데 느린 인간이란 걸.
재미없어 보이는 여자라고? 숨만 쉬어도 재밌을 것 같은데 무슨 헛소리를 했던 거지. 조금만 더 대화해 볼걸. 젠장.
미래의 자신은 확실히 자신이었다. 보는 눈이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가 있나.
시그니티가 그녀에게 반한 것을 깨닫고 한 짓은 그간 얻은 정보를 조합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연적은 로윈 가문의 남자인 모양이었다.
샬덴의 왕과 아를의 섭정을 두고 선택했을 남자라.
시그니티는 그 남자가 상상이 잘 가질 않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녀는 몹시 평온해 보였다. 권력이 목적이거나 강압적으로 한 결혼은 아닌 모양이었다.
시그니티는 거울을 힐긋 보고 눈을 찌푸렸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적절하게 섞어서 닮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과부임에도 태자를 홀릴 만한 외모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물론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어머니를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의 외모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잘생긴 편이었다.
외모를 안 보는 여자인가?
아니면 그 남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잘생겼나?
시그니티는 알고 싶은 게 많아졌다. 미래의 자신과 다르게 그 여자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정말 남의 눈치라고는 하나도 보지 않고 잠긴 그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 헤더는 하늘이 내려 준 선물 같았다. 궁금증이 가득한 동그란 눈이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누구세요?”
“그게 궁금해서 들어온 거야?”
소파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던 헤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하고 왔는지 흙과 풀이 엉겨 붙은 바지 밑단이 더러웠다.
“난 말해 주기 싫은데.”
“그럼 안녕히 계세요.”
헤더는 망설이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시그니티는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말해 줄게. 대신 너도 나한테 내가 궁금한 걸 대답해 주는 게 어떨까?”
“뭐가 궁금한데요?”
“너희 부모님.”
헤더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답했다.
“엄마는 예쁘고, 아빠는 더 예뻐요.”
“그건 나도 알아.”
“어, 그럼 음…… 할아버지랑 아빠는 닮았어요. 엄마랑 안 닮았어요.”
정말 궁금하지 않았던 사실이군.
“엄마는 외할아버지랑 닮았겠지.”
대충 맞장구쳐 주자 헤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랑 엄마랑 안 닮았어요.”
“할아버지 아들은 네 아버지니까 그렇겠지. 그보다 너희 어머니는 어느 가문에서…….”
“엄마도 할아버지 딸인데.”
애가 외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구분 못 하는 건가. 똑똑하게 생겼는데.
“엄마랑 아빠랑 둘 다 할아버지 아들딸인데. 그래도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안 닮아도 할머니를 닮은 엄마가 더 좋댔어요.”
이게 무슨 혼란스러운 소리지.
“엄마는 할머니를 닮았고, 아빠는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는데 진짜 그래요.”
“네 엄마랑 아빠가 남매라고?”
하늘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를 하네, 얘가.
시그니티는 헤더가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런 미친 짓이 아를에서 가능할 리도 없지 않은가. 아무리 끼리끼리 결혼하는 귀족 사회에서도 그런 역겨운 짓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죠. 남매끼리는 결혼 못 하는 거 저도 알아요.”
지금은?
“그럼 옛날에는 남매였다고?”
부모가 어디 먼 친척이 불쌍해서 양녀나 양자로 들였다가 눈이 맞아서 결혼한 건가.
“너희 엄마는 어느 가문 사람이지?”
“로윈 가문이죠.”
“그전에.”
“그전이요?”
헤더는 천진하게 되물었고 시그니티는 답답함을 느끼며 설명했다.
“외삼촌이나. 외사촌 애들이 어느 가문인데.”
헤더는 그 말에 이해했다는 듯이 웃었다.
“구드윈이요.”
이자벨 구드윈. 시그니티는 머릿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겼다.
“그래서, 누구세요?”
자신이 대답했으니 그도 대답해야 한다는 헤더의 말에 시그니티는 피식 웃었다.
“난 바르펜시아 대공자야.”
“시그는 동생이 없는데요.”
“어른들은 어른들만의 사정이 있단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헤더는 더 대답해 주지 않겠다는 시그니티의 의지를 읽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난 길게 대답했는데 왜 대공자는 대답이 짧아요?”
“어떻게 대답하는지는 내 마음이지.”
“치사해요.”
“그럼 길게 대답해 줄 테니까 더 말해 봐. 네 엄마는 뭘 좋아하니?”
헤더는 능글맞게 넘어가려는 시그니티를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몰라요!”
그리고 시그니티가 잡기도 어렵게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열린 문을 통해 헤더를 잡으려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는 몸을 일으켰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시야가 흔들렸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아득해지는 정신으로 어렴풋이 한 이름을 기억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 * *
“그 청년이 사라졌어요.”
캐롤이 하는 말에 시그니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은 하루가 흘러갔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 꽤 긴 꿈을 꿨다. 꿈속에서 살고 싶을 만큼 그가 바란 인생이 그 속에 있었다.
돌아간 과거의 자신은 몇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이자벨을 찾아냈다. 냉랭하고 영리하며, 그를 오로지 이용할 수 있는지 아닌지로만 판단하는 소녀를.
사이가 좋은 약혼 관계였다고?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물건처럼 이용 가치를 판단당한 과거의 그는 꿈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가 졌다. 왜냐하면 이자벨이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시그니티에게 이자벨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게 어느 세상일지라도.
꿈속의 청년은 그녀의 발밑에 엎드리기를 자처했다.
그를 내려다보는 눈이 문득 뱀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복종에 그의 손을 잡아 줬다.
남들은 그들을 연인이라고 불렀다.
욕심이 많은 소녀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선사하는 청년을 기꺼워했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기는 했지만, 소녀는 주어지는 대가에 기꺼이 청년의 연인 역할에 충실했다.
‘당신은 가끔 완전히 돌아 버린 것 같아. 아니면 인생이 너무 쉬워서 좀 이상한 짓을 해 보고 싶은 거야?’
뭐에 심사가 비틀렸는지 짜증이 난 소녀의 분을 풀어주기 위해 온종일 그녀의 방 앞에서 무릎을 꿇어앉고 있을 때였다.
‘들어와.’
소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웃었다.
그녀는 그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풀이를 한 날이면 보상을 주듯 그에게 무르게 굴었다. 독한 주제에 마음이 약했다.
그리고 그걸 아는 건 자신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도, 사랑스럽다는 것도. 자신만이 아는 게 아니었다.
이미 그는 그녀에게 버려진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절대 그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
하지만 보는 순간 알아버린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새까만 머리카락, 묘하게 익숙한 아름다운 얼굴, 이자벨을 바라보는 눈빛.
너구나.
솔직히 역겨웠다. 자기 누이를 바라보는 눈이.
그래서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자벨을 더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동생은 열다섯의 나이에 죽었다. 갑작스러운 화재로 인한 사고사였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알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품에 고개를 묻던 이자벨도.
그리 아끼지 않았던 동생인 주제에 소녀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는 그 동요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변화를 일으킨 주인은 이미 세상에 없으니 참았다.
소녀의 욕심은 동생의 죽음 뒤로 슬며시 수그러들었다.
그는 욕심이 없어진 소녀에게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질까 봐 어떻게든 욕심을 부추겼다. 그녀는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를 버리고 떠나는 대신.
그리고 마침내 몇 년 동안 곁을 지킨 그에게 보상처럼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신에게 간택을 받은 사람처럼 감격했다.
이자벨이 그를 선택했다. 불쌍해서든, 이용 가치가 있어서든,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옆에서 일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했다는 게 중요했다.
이제는 아무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 결혼 서약서에 적힌 단어들을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이자벨은 결혼 직전에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권력을, 부를, 그것도 아니면 아름다운, 건강한 아이를 낳을 여자를 원했다면 나는 당신한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묻지 않았을 거야.’
그녀는 순진하게도 그를 걱정했다.
‘당신은 사랑을 원했잖아.’
돌려 말했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런 잔인한 말을 결혼 직전에 하다니. 참 그녀다웠다.
‘나는 당신을 원해.’
그는 역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언젠가는 날 사랑할 자신이 있어?’
‘……언젠가는.’
그의 아가씨는 머뭇거리면서도 훗날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해.’
시그니티는 그의 어머니가 평생을 걸고 사랑한 게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두 번째 결혼식이라는 굴욕적인 연극의 제목을 좋아했다.
사람들이 두 번째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결혼을 비웃을 때, 그의 아버지는 달랐다.
그의 아버지는 기사의 죽음에 평생을 감사하며 살았다. 결코 오지 않을 기회가 그에게 주어진 것을 신의 선물처럼 여겼다.
두 번째라면 어떤가. 그의 아버지는 세 번째, 네 번째라 할지라도 그녀의 곁에 설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감격했을 것이다.
‘당신한테는 내가 유일하지 않아도, 나한테는 당신이 유일하니까.’
여전히 이자벨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손을 잡고 곁에 섰으며, 그의 온기에 웃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조차도 기적으로 여겼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부서지는 꿈의 잔해 속에서 섭정공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꾸고 있는 꿈이 다른 세상의 그들일 수도 있겠지.
그는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그런 세상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사랑이 이뤄지는 세상도.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유일하게 원했던 것을 갖지 못한 남자가 눈을 떴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떤 세상에서는 당신과 내가 행복하게 맺어졌을 수도 있다.
사랑하는 내 아가씨.
어느 생에서는 당신이 나를 사랑했을 수도 있겠지.
지금 내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두 번째 결혼식 END]
외전 . 시간을 돌아 마침내.
샬덴의 왕은 어린 시절을 똑똑히 기억했다. 몇 번의 시간을 돌리면서도, 한순간도 잊을 수가 없는 기억들.
게일은 한 번도 어머니의 손길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그게 아버지가 그에게 어머니의 빈자리만큼의 애정을 채워 줬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부모의 사랑이란 것은 그에게는 너무 먼일이었고, 거기에 괴로워하기에는 게일에게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모든 일이 끝나고 그에게 남은 것은 왕좌뿐이었다.
그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이자벨의 방문에 때때로 어색함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을 찾듯, 여름마다 그를 찾았다. 때로는 알렉스를 데리고, 혹은 홀로.
어설픈 애정이 서투르게 그에게 닿곤 했다.
자식이되 자식이라고 느끼지 않은 남자에게 이자벨은 최선을 다했다. 게일은 그걸로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그들 가족은 몇 번의 시간 속에서 대개 불행했고, 이 정도면 불행하지는 않았다.
그래. 불행하지는 않았다.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없었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랑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있었다.
게일은 이대로 외롭게 살다가 죽는 게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에 슬프지 않았다. 구원을 기다리는 어린아이는 이미 어른이 되었기에.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기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는 이자벨과 알렉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그 아이를 질투했다. 그와 다르게 사랑받고, 부모의 보호 아래 안온한 삶을 꾸려갈 동생을.
이자벨의 말 속에 드러난 아이는 그가 가지고 싶었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애는 가족의 성과 이름을 물려받았다. 아버지를 닮은 흑발에 어머니를 닮은 녹안을 가졌다. 아버지의 품과 어머니의 손길 아래에서 흐르는 피와 차가운 시체를 본 일이 없었다.
그 애는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사랑을 할 줄 알았다.
몇 번의 질투가 숨기지 않고 튀어나왔고 이자벨은 그 뒤로 그 아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게일의 머리 한구석에서는 늘 그 애가 살았다. 그와 똑같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축복받은 아이가.
불행하지 않은 인생이라고 자위했지만, 그 아이의 존재는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비교하게 되니까. 그의 삶과 그 아이의 삶을.
그 애는 행복하겠지. 나와 다르게.
한 번도 구원을 꿈꾸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어떠할 것인가.
게일은 늦은 여름에 찾아온 이자벨을 맞이하며 감상에 빠져들었다.
이자벨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던 아이는 수줍음도 두려움도 없이 그를 보며 웃었다. 거칠 것이 없는 눈이었다.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의 눈.
그 애는 게일의 상상보다 사랑스러웠고, 몰라볼 수 없을 만큼 부모를 닮았다.
질투에 몸부림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게일은 덤덤하게 아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이는 그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이였다. 질투는 무의식 너머로 가라앉았다. 아이는 생경함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이자벨은?”
게일은 굳이 그의 서재에서 돌아다니는 아이를 향해 물었다. 책상 위로 겨우 눈만 보일 만큼 작은 아이는 불만족스럽게 발을 굴렀다.
“엄마는 아빠랑 있어.”
“거기로 가.”
“아빠가 오빠랑 놀래. 엄마랑 놀고 싶다고.”
게일은 알렉스를 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딱히 그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를 아들로 여기고 있었다. 이자벨보다 더 확고하게.
이자벨은 게일을 자식으로 느끼진 못했지만 정을 주었고, 알렉스는 게일에게 정을 주진 않았지만 자식으로 여겼다.
둘을 좀 섞을 수는 없는 건지.
헤더는 아직 자기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몰랐다.
그녀는 그저 부모가 소개했던 대로 게일을 가족으로 여겼다. 왜 따로 사는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게일은 바빠?”
“그래.”
“거짓말. 아까부터 그거 한 장만 보고 있잖아.”
게일은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중요한 거라 그래. 심심하면 사람 붙여 줄 테니까 가서 놀아.”
“난 게일이랑 놀고 싶어.”
“난 재미없을 거야.”
헤더는 게일이 서류를 놓자마자 책상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난 재미있는 애니까 괜찮아.”
게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정원에라도 데려다주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헤더는 얌전함을 교육받은 다른 여자아이들과 달랐다. 틈만 나면 뛰어다녔고 관심사는 변덕스럽게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정원에 풀어놓으면 몇 시간은 조용하겠지. 무슨 망아지나 강아지에 대해 생각하듯 게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
헤더는 게일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안아달라는 당당한 요구를 게일은 못 본 척했다.
“나 안아 줘.”
게일은 문을 열며 말을 돌렸다.
“나가자. 이리와.”
헤더는 몹시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내리고 게일의 옆으로 총총 뛰어왔다.
“게일은 몸이 약한 거야? 왜 한 번도 안 안아 줘? 나 안 무거운데.”
게일은 종알거리는 헤더의 목소리를 들으며 쓰게 웃었다.
순간 헤더의 작은 손이 게일의 손을 잡았다. 게일은 반사적으로 헤더를 내려다봤지만, 헤더는 게일이 왜 놀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길을 잃어버렸어?”
멈춰 선 게일을 향해 헤더가 물었다.
게일은 문득 이자벨의 손을 붙잡고 걷고 있던 헤더를 떠올렸다.
아이는 어른의 손을 잡고 걸었다. 자식이 대개 부모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작하듯이.
게일은 처음 걸음마를 시작할 때를 기억하진 못했다. 하지만 상상할 수는 있었다. 알렉스는 게일이 무엇을 하든 가만히 쳐다만 볼뿐 뭘 하지는 않았으니까.
벽을 잡고 걸었을까. 가구를 잡고 걸었을까. 그가 처음 걸음마를 할 때 잡은 것이 누군가의 손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 길 알아. 나만 따라오면 돼.”
헤더의 작은 손이 그를 잡아끌었다. 게일은 또다시 생경함을 느꼈다.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이끈 적이 있었나?
“자기 집에서도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헤더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것에 의기양양한 채로 물었다.
게일은 헤더의 손에 이끌려 걸으면서 아이의 뒤통수를 볼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아버지와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아이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게일을 응시했다.
“도착했다! 게일, 나 저기에 올려 줘!”
헤더는 환하게 웃으면서 정원의 나무를 가리켰다. 게일은 보채듯 자기 손을 잡아 흔드는 헤더에게 이끌려 나무 앞에 섰다.
그는 여기에 있을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헤더를 정원에 두고 서재로 돌아가 일을 할 생각이었다.
“빨리. 빨리. 엄마가 보기 전에.”
“……엄마는 아빠랑 있다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헤더의 허리를 붙잡아 나무 위로 올려 주면서 대꾸했다.
“그러니까 더 문제지!”
헤더는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였다.
“그건 엄마가 올 때, 아빠도 옆에 붙어 있다는 소리잖아.”
“네 아버지가 무서워?”
게일의 물음에 헤더는 투덜거림과 함께 대꾸했다.
“아빠는 엄마 편이니까. 맨날 엄마 편들어서 나만 잘못했다고 한단 말이야.”
“네가 잘못한 거 맞잖아.”
나무 등걸을 타고 원숭이처럼 쭉쭉 위로 올라가는 헤더를 향해 게일이 입을 열었다.
“위험하니까 걱정하는 거야. 높은 곳이 좋은 거면 탑을 구경시켜줄 테니까 내려와.”
어느새 헤더는 게일을 내려다볼 만큼 올라가 있었다.
“난 높은 곳을 좋아하는 게 아닌데.”
“이자벨이 매번 네가 나무든 담이든 타고 올라가서 걱정이라는데 이제 와서 변명한다고…….”
게일은 헤더에게 문제가 생기면 과연 이자벨이 이전과 같은 애정을 보여 줄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헤더는 이자벨의 딸이었다. 애정으로 낳고 기른 자식.
그와는 다르게.
“위험하지 않은데.”
헤더의 중얼거림에 게일은 고개를 저으며 팔을 벌렸다. 혹시라도 떨어지면 받으려는 그의 태도에 헤더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난 높은 데가 아니라, 거기서 떨어지는 걸 좋아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아이는 훌쩍 뛰어 게일의 품에 떨어졌다.
작은 몸이 나는 것처럼 바람을 타고 안전하게 추락했다. 헤더는 게일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웃었다.
“봐. 하나도 안 위험하잖아.”
“내가 받아 줬으니까 그렇겠지. 그대로 떨어졌으면 다쳤어.”
헤더는 그녀를 내려놓으려는 게일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떨어지지 않았다. 게일은 낯선 온기를 품에 안은 채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받아 줬잖아.”
헤더는 게일을 재촉했다.
“한 번 더 하자. 이번에는 저 나무!”
“안 돼.”
“왜!”
“위험하니까.”
게일은 어린 주제에 추락의 스릴을 즐기는 아이의 말에 단호하게 대꾸했다.
“받아 줄 거잖아!”
“안 받아 줄 수도 있어.”
“그럴 리가! 오빠면서! 가족이면 받아 줘야지!”
헤더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는 듯 설명했다.
“그냥 떨어지면 다칠 텐데. 그럼 게일의 마음도 아프고 내 몸도 아프겠지? 그러니까 게일이 안전하게 받아 줘야 하는 거야.”
애초에 떨어지지 않으면 되는 일에 헤더는 고집을 부렸다.
“……다치는 건 넌데 왜 내 마음이 아파?”
“난 게일의 동생이니까!”
헤더의 시선은 여전히 점찍은 나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 오기 전에 한 번만 더!”
헤더의 말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의심할 수가 없는 당연한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그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당연한 관계와 애정을 말하는 것처럼.
정말 가족인 것처럼.
이자벨도, 알렉스도 그에게 보여 준 적 없는 확신이었다.
게일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게 그가 그토록 바랐던 인정이란 것을.
그는 아무것도 아닌 날, 당연하게 자신을 가족이라고 여기는 아이를 안고 울었다. 헤더는 그럴듯한 말을 써서 그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거창한 수식어를 써서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헤더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당연하게 여겨왔던 자신의 오라비에 대한 애정을 왜 설명해야 하는지 몰랐다.
서로를 미워할 수도, 불평할 수도, 혹은 불편해할 수도 있겠지. 가족이란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게일이 원하는 것은 이자벨이 건네주는 아름답게 포장된 애정이 아니었다.
굳건하게 그를 잡아 주는 뿌리. 부유하지 않게 붙잡아 주는 가족을 원했다.
헤더는 게일에게 가끔은 짜증을 냈고, 종종 얄밉게 굴 때도 있었다. 그래도 헤더는 게일을 사랑했다.
게일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헤더는 언젠가 그를 미워하게 될 수도, 귀찮게 여길 수도 있었다.
그래도 헤더에게 그는 여전히 가족이겠지.
시간을 돌아 마침내, 부모가 없이 태어난 남자는 가족을 얻었다.
신이 옳았다.
그는 구원을 빌었고, 신은 그에게 불행하지 않은 삶을 선사했다.
남자는 그렇게 믿었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신이 선사한 건 불행하지 않은 삶이 아니었다. 게일은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널 만나기 위해, 몇 번이고 시간을 돌렸구나. 네가 태어날 세상을 위해.
[그 백작 남매의 비밀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