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4권) (11/12)

11장. 종장.

햇살이 따갑게 눈을 찔렀다. 나는 등에 닿은 딱딱한 대리석의 감촉에 불편함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게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왜…… 쓰러져 있던 거죠?”

게일이 내 팔을 잡고 나를 일으켰다. 바닥에서 잠을 잤던 것처럼 몸이 욱신거렸다.

붉은 드레스가 내 움직임에 따라 구겨졌다. 이 불편한 드레스를 걸치고도 잠을 잘 수 있다고?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요새 거의 잠을 못 잤잖아요.”

나는 구겨진 치맛자락을 탁탁 치다 포기했다. 꽤 오래 쓰러져 있던 것처럼 구김이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몸은 근육통으로 뻣뻣했지만, 의외로 정신은 맑았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기분이었다. 꿈 따위는 꾸지 않는.

“또 악몽을 꿨습니까?”

늘 웃는 상이던 게일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그는 내 의아한 시선에 어설프게 웃었다.

“……아뇨. 아무 꿈도 꾸지 않았어요.”

게일의 어설픈 웃음이 제자리를 찾았다. 씩 웃는 쾌활한 청년은 그림 같이 근사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게일, 분명 아까 쓰러지지 않았어요? 내 쪽으로…….”

“잠깐 휘청거렸는데, 갑자기 절 붙잡으려던 이자벨이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죠.”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앞으로는 밤에 잠을 좀 잡시다. 이러다가 또 쓰러지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내가 자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게일.”

“압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괜찮을 겁니다.”

나는 늘 하던 위로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어요? 드레스 좀 갈아입고 싶은데…….”

“십 분 정도 지났을 겁니다.”

“그 정도밖에요?”

숙면을 취한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인가?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시녀를 불러드리죠. 오늘은 더 일정이 없으니 푹 쉬어요, 이자벨.”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게일의 팔을 붙잡았다.

“이자벨……?”

“아뇨. 아뇨. 지금 내가 잠이 덜 깼나 봐요. 가도 돼요.”

돌아보는 그의 표정을 보지도 못하고 당황해서 손을 놓았다.

왜 그랬는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이 나갔다. 손에 잡혔던 체온이 손끝에 남았다.

“……가지 말까요?”

평소보다 딱딱한 말투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걸 알아차릴 정신이 없었다.

“아뇨. 괜찮아요.”

고개를 젓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게일이 습관처럼 웃었다.

“푹 쉬어요, 이자벨.”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은 그날 밤부터였다. 나는 악몽을 꾸지 않았고, 평범하게 잠들었다가 어떤 꿈도 꾸지 않고 아침에 일어났다.

비명을 지르는 일도 없었다. 그냥 꿈이었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내 인생에서 악몽이 사라졌다.

혼란에 빠진 나를 두고 결혼식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태자의 결혼은 국혼에 속했다. 나는 바쁘게 일하는 게일을 가만히 쳐다봤다.

결혼할 남자라는 생각 때문일까? 요새 이상하게 그에게 눈길이 갔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붙잡은 적도 이제는 제법 많아졌다.

그도 이제 내가 붙잡으면 별다른 질문 없이 웃고 말았다. 하지만 남녀 사이의 두근거림이나 설렘이라기에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자꾸 눈에 밟히기는 했지만 나도 이유를 몰랐다. 딱히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위화감이 종종 들었다. 늘 웃고 있던 얼굴에 가끔 표정이나 감정이 사라졌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위화감을 느끼든 말든 시간은 흘렀고, 국혼에 대한 각 나라의 사절단은 속속히 외궁을 채웠다.

시녀들은 재잘거리면서 내가 외울 정도로 결혼식 과정을 읊어댔다.

아를에서 온 사절단은 유진이었다. 구드윈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은 유진.

“난 당신이 올 줄 몰랐는데.”

내 말에 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결혼식에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있는 게 좋잖아?”

“그런 이유로 왔다고?”

“아니, 샬덴 측에서 요구해서. 나도 딱히 여기 오고 싶진 않았거든.”

유진은 여긴 너무 살벌하다는 둥 투덜거렸다. 나는 여유로운 그의 태도에 혀를 찼다.

“그럼 도대체 난 왜 보러 온 거야? 그냥 얌전히 방에 박혀 있다 다시 아를로 돌아가지.”

“그냥 걱정돼서?”

“당신이?”

불신이 가득한 내 목소리에 유진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단 네 덕분에 내가 작위를 좀 더 쉽게 물려받기도 했고…….”

유진은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픽 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샬덴의 태자는 잘해 주나?”

“생각보다 괜찮지 않으면 뭐, 도와주기라도 하게?”

비딱하게 나간 내 말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짝 당황했다.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손해 보지 않는 한에서?”

“차라리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네.”

그러면 그렇지. 냉담한 내 답변에 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가진 걸 희생해서 남을 돕는 인간은 그렇게 많지 않아. 난 현실적인 거라고.”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의 희생 없이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 당신 말은 정말 도움이 안 돼.”

“그거 안타깝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유진을 향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더 안타까운 티를 내보지?”

“안타깝긴 한데…… 사실 내 일이 아니라 네 일이잖아. 이자벨. 어쩌겠어. 피할 수 없으면 그 와중에서 뭐라도 좋은 걸 좀 찾아봐.”

맞는 말인데도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그래도 샬덴의 태자는 잘생겼더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 앞에선 좀 순한 것 같고…….”

그래서 어쩌라고.

“네가 바꿀 수 없는 일에 용을 쓰지 마, 이자벨. 현실에서 그나마 나은 것들을 찾아.”

유진은 꽤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러나 영 받아들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 뚱한 표정에 유진이 느긋하게 웃었다.

“나도 결혼할 때 결혼도 싫고 상대도 싫었는데 지금 잘 살잖아?”

“전혀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평균적인 귀족 부부들보다는 사이가 괜찮다고. 뭐 어쩌겠어. 내가 결정한 상대도 아닌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나는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유진은 한참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떠들었다.

사실 결혼 생활이라기보다는 아들에 대한 자랑에 가까웠다.

가족 간에도 그리 사이가 좋진 않은 귀족들 사이에서 유진의 아들 사랑은 좀 특이한 구석이 있긴 했다. 심지어 다 큰 자식이잖아. 이해할 수가 없네.

“……처음에는 애 얼굴에서 부인 얼굴이 보여서 좀 짜증 났는데, 이제는 그것 때문에 나름대로 부인도 예쁘게 보인다니까.”

“나한테 아들 자랑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글쎄 그냥……. 살다 보면 아무리 최악이라고 생각했어도 그때의 선택이 괜찮았다고 여기게 되는 날도 있다는 거지.”

인생은 다 살아 보기 전까지는 몰라.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나는 그 능구렁이 같은 태도에 혀를 찼다.

* * *

결혼식이었다.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수십 명이나 되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여야만 했다.

미리 다 정해 놓은 드레스와 장신구임에도, 뭐가 그렇게 바쁜지 쉼 없이 시녀들이 들락날락했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그녀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붉은색 베일은 얇았지만, 수놓아진 보석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흐릿하게 형태만 간신히 볼 수 있는 베일은 허리까지 내려왔다.

도대체 이럴 거면 화장은 왜 하는 거지? 어차피 가려서 보이지도 않는데.

나는 몇 시간을 공들여 시녀들에게 꾸며진 모습으로 움직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운반되었다는 쪽에 가까웠다. 드레스는 지독히 무거웠고, 나 혼자 움직일 수 있을 만한 무게가 아니었다. 시녀 네 명이 달라붙어서 내 드레스를 들어줘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느리게 걸으면서 짜증스럽게 치마 안쪽을 걷어찼다.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내 시야를 더 방해하는 결과물일 뿐이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없었다.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침묵한 무리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걸었다.

샬덴의 결혼식은 아를과 형식이 달랐다. 반지나 입맞춤이나 흔한 맹세도 없었다.

나는 미하일이 앉아 있는 왕좌 바로 아래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긴 드레스가 계단 아래까지 넘실거렸다.

전쟁터에서나 울려 퍼질 것 같은 강렬한 음악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길 끝에서 내게 다가오는 걸 흐릿하게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웅성거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부가 앉아 있으면, 신랑 후보가 다가와 예물을 늘어놓는다. 그게 마음에 들면 신부는 허락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후보가 예물을 들고 와 결혼을 청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다 짜고 치는 결혼식이었다.

나도 모르는 남자 둘이 차례로 내 발치에 예물을 놓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 번째에 게일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샬덴의 암묵적인 결혼 법칙 같은 거였다. 세 번째로 혼인을 청한 남자와 혼인을 해야 잘 산다는 그런 미신.

게일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 나는 미하일을 올려다봤다. 그가 나를 응시하며 웃었다.

잡념 하나 끼어들지 못할 것 같은 환한 미소에 나는 그가 젊은 날에 엄마를 보고 어떻게 웃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를 만나고, 사랑하고, 결국에는 이별하면서…….

미하일은 한 번이라도 이 광경을 상상한 적이 있을까.

엄마와의 결혼식을.

엄마가 죽기 전에는 사랑인 줄 몰랐다고 했으니 생각해 본 적이 없을 수도 있었다.

게일이 다가와서 내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어도 나는 미하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붉은 베일 너머로 보이는 미하일의 눈은 오로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엄마를 투영한 나를.

“……만족해요?”

내 목소리는 희미했기 때문에 나는 미하일이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웅장한 음악 소리와 시끄러운 귀족들의 목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 새 소리…….

내 질문을 들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어서 고개를 끄덕이라는 신호였을까. 미하일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듣지 못하는 중얼거림과 함께.

나는 그제야 미하일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게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이게 나와 게일의 결혼식인지 아니면 미하일과 엄마의 결혼식인지 알 수가 없었다.

* * *

첫날밤이라는 건 긴장과 설렘이 범벅된 시간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나는 파르스름하게 변하는 하늘빛을 바라보면서 그나마 있던 긴장을 모조리 털어냈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고, 어제 결혼한 내 신랑은 신방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샬덴에서 꾸민 신방치고는 아를보다 화려했다. 붉은색을 많이 써서 그런가…….

나는 한참 전에 벗어 던진 베일을 힐긋 확인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금실로 자수를 놓은 베개를 안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지금까지 깨어 있는 것으로 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어제 새벽부터 일어나 난리를 피웠던 탓에 피로가 금방 몰려왔다. 나는 고요함 속에서 눈을 몇 번 깜빡이지도 않고 잠에 빠져들었다.

꿈은 꾸지 않았다. 요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단지 까맣고 붉은 선들이 끊임없이 엉켰다가 풀어지는 이상한 광경을 스치듯 본 기억이…….

“……이자벨.”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잠에서 헤어 나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낮은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익숙했다. 나는 그 익숙한 다정함에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간질거리는 목소리가, 따뜻한 손이 내 몸을 뒤덮는 꿈을 꿨다.

이자벨. 이자벨. 내 이자벨…….

누군가가 내 이름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속삭였다. 어떤 자장가보다 더 따뜻했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뜨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혼자라는 것이 낯설 만큼.

나는 이상하게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게일이 왔다 갔나? 하지만 목소리가 좀 달랐던 것 같은데.

나는 허물 벗듯 벗어 던진 드레스를 대신해 이불로 몸을 감싸고 시녀를 불렀다.

“……아무도 없어?”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불을 숄처럼 두르고 문을 열었다. 정확히는, 열기 위해 움직였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기든 밀든 뭘 해도 열리지 않았다.

나는 문고리를 놓고 창가로 향했다.

창은 거의 천장 즈음에 붙어 있었다. 받침대로 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방을 둘러보다 포기했다.

왜지? 왜 나를 가뒀지?

이제는 익숙해진 감금이었다. 가는 곳마다 나를 납치하는 이들투성이인 삶에 익숙해진 게 좀 우울했다.

그런데 정말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어차피 샬덴의 왕궁에 감금된 처지나 다름이 없는데 왜 나를 다시 방에 가둬 놓은 거지?

미하일의 미친 정신머리야 도무지 짐작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어제부터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서인지 배가 고팠다. 배고픔에 현실감이 들었다. 이대로 굶겨 죽일 셈인가? 결혼식도 봤겠다. 뜻을 다 이뤘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에 대한 미하일의 집착을 생각해 보면 엄마의 딸인 나를 그렇게 쉽게 죽일 것 같지 않았다. 죽으면 시체를 박제시킬 것 같은 사람인걸.

침대에 풀썩 누웠다. 창을 통해 보이는 태양을 보니, 정오 즈음 된 모양이었다.

햇살에 먼지들이 떠다니는 게 보였다. 묘하게 평온했다. 어제 결혼한 것이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굶어 죽기 전에는 꺼내 주려나.

방은 화려했지만 시간을 보낼 만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부유하는 먼지를 세다 다시 깜빡 잠들었다. 잠을 자는 것 말고는 사실 할 게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귓가에 불쾌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무거운 것을 바닥에 대고 끄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였다. 나는 눈을 깜빡여 정신을 일깨웠다.

하늘이 석양과 밤이 뒤섞인 보라색을 하고 있었다.

배가 텅 빈 것 같았지만 배고픔을 잊을 만큼 오래 굶었기에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끼이익. 끼이이익.

문가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나는 천천히 문가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문이 덜컹거리는 것이 보였다. 뭔가 치우는 소리가 커졌다.

쾅!

둔탁하게 부서지는 소리에 나는 멈칫했다. 누군가 방문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치우고 있었다. 단순히 잠그기만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덜컥거리며 문이 열렸다. 나는 들어온 상대를 빠르게 살폈다.

“게일……?”

원래 뭐였는지 형체를 알 수 없는 부서진 목재들 사이에 서서 게일이 웃었다. 흐린 피 냄새와 물 냄새가 섞인 채 풍겨 왔다.

방금 씻고 온 것처럼 축축하게 젖은 잿빛 머리카락에는 묘하게 붉은 기가 도는 것 같았다.

“내가…….”

그는 내가 봤던 이래로 가장 환하게 웃었다.

“……내가 당신을 구원해 주려고 왔어요.”

바닥으로 그가 쥐고 있던 검이 떨어졌다. 어둠 속에 잠긴 검에 피가 묻어 있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사랑해요. 이제 다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까…… 살아요.”

절박하기까지 한 고백이었다. 평생을 기다린 말을 하는 것처럼.

“아주 오래오래 살아요, 이자벨.”

누군가의 구원이 되기 위해 그는 여러 번의 생을 살아야 했다.

여러 번의 생을 살다 보면, 첫 번째 생의 소원 따위는 흐려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생을 살아도 계속 눈에 밟혔다. 이자벨 로윈이 살아서 그의 어머니였던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첫 번째 생에서 이자벨은 그를 낳자마자 죽었다. 그 후로 몇 번의 생을 살면서도, 그녀는 한 번도 어머니였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게일은 이자벨이 좋았다. 얼마나 꼬인 인생인지, 단 한 번도 행복하게 삶을 끝낸 적이 없는 여자가 좋았다.

“그게 무슨…….”

당황한 이자벨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뺨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그녀가 맥없이 쓰러졌다. 그는 이자벨이 다치지 않게 붙잡다가 저도 함께 풀썩 주저앉았다.

긴 밤이었다.

기절하듯 잠든 이자벨을 내려다보면서 게일은 웃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고, 뺨을 쓸었다. 어린아이가 장난치듯이.

눈을 뜬 그녀는 이전과 같지 않을 테지. 어쩌면 그를 징그러워할 수도 있고 그에게 고마워할 수도 있다.

그는 모든 걸 예측했지만, 그녀의 행동만큼은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소리 없이 오열했다.

평생을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누군가 날 구해 주겠다고, 구원해 주겠다고 속삭여 준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부터 꿨던 꿈처럼.

결국 그는 그 말을 듣지 못했지만, 그녀에게는 해 줄 수 있었다.

있잖아요. 이자벨. 난 아주 오랜 시간을 버텨 왔어요. 어쩌면 당신을 구원해 주기 위해서.

열린 문, 부서진 것들, 어둠에 잠긴 복도.

그림자처럼 등장한 검은 사내는 넋을 놓고 울고 있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넌 어떻게 지금 존재하는 거지?”

그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단 한 구석도 닮은 데가 없는 부자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부모를 닮지 않았다. 게일은 타고나기를 미하일을 닮았다.

“우리는 너를 낳은 적이 없어.”

알렉스가 늘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게일은 자기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간대에 존재했다. 알렉스와 이자벨은 부모가 아니되 부모였다.

“넌 어디서 온 거지?”

누가 널 낳았어? 그의 존재에 대한 알렉스의 거부에 가까운 말이었다.

“……과거의 당신들한테서.”

잠든 이자벨의 얼굴이 평온했다. 그는 이걸 얻기 위해 오래도록 달려왔다.

“나는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어. 이게 내 첫 번째 생이야.”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면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더 과거도. 심지어 더 미래도. 시간은 선이 아니라 면이었고 그는 그 면을 오갈 수 있는 인간이었다.

“내 부모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지. 당신들이 여러 번의 생을 거칠 동안 나는 그저 시간을 계속 옮겨 다녔을 뿐이야.”

세 번째 생의 부모는 이제 부모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린 어머니도, 그를 무릎에 놓고 키웠던 아버지도 결국엔 첫 번째 생에서 죽어 버렸으니까.

이제는 그들조차도 서로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지 못했다.

“……오래 버텼군.”

“그래.”

알렉스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이자벨을 제외한 어떤 것에도 자비롭지 않았지만, 글쎄…….

어찌 됐든 게일은 이자벨과 그의 피가 섞여 있는 자식이었다.

“……하루쯤은 나한테 양보할 수 있잖아.”

게일은 품에 안은 이자벨을 추슬러 안았다. 알렉스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는 그를 보고, 떼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하루도 가져본 적이 없어.”

“그녀의 죽음을 기억하는 게 너만은 아니야.”

알렉스는 게일의 품에서 이자벨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계속 문가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게일은 알았다. 게일이 그들의 자식이기에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여기까지 와서도 네가 뭘 빌었는지 알 수가 없군.”

“그걸 왜 궁금해하지? 어차피 당신은 이제 원하던 걸 얻게 될 텐데.”

“네가 원하는 건 이루어졌나?”

“모르지.”

그는 이자벨의 구원이 되는 걸 소원으로 빌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어머니보다는 차라리 눈앞에서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더 정이 있었으니까.

“넌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빈 거지?”

재차 묻는 알렉스의 질문에 그는 알렉스를 쳐다보면서 짓씹듯이 내뱉었다.

“날 구원해 달라고.”

아무도 그를 구원해 줄 수 없었다. 그가 사로잡혀 있는 악연은 과거의 것이었다.

이미 벌어진 과거의 것들이 그의 인생을 움켜쥐고 놔주질 않았다. 신은 그래서 그에게 과거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했다.

기억을 다루는 힘을.

“당신이 죽었을 때, 나는 너무 어렸어.”

어린 애라도 알았다. 자기 아비가 세상에 아무 미련도 없이 그저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우는 그가 아비에게 그렇게 큰 가치가 없었음을.

슬프지만 그는 받아들여야 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보호자를 찾아 헤맸다.

미하일은 절대 좋은 보호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게일을 추억을 회상할 도구처럼 취급했다.

눈앞에서 아비가 살해당한 아이는 살인자의 손에 키워졌고, 아이는 자라서 어쩌면 당연한 소원을 빌었다.

“내 구원을 빌었어.”

그를 감싼 지긋지긋한 과거의 인연들을 끊어 줄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게일은 스스로 그 인연을 끊어내야 함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스스로뿐이었다. 그게 지독하게 외로울지라도.

* * *

헤더 구드윈은 너무 많은 사람에 의해 미화된 여자였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보는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미인은 아니었고, 이른 나이에 죽긴 했지만 사실 몸이 약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은 솔직히 불운이었다.

헤더 구드윈은 한때는 누군가와 사랑을 했고, 이별을 했으며 또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딸을 낳기도 했다.

객관적으로도 평범한 귀족 영애의 삶이었다.

그녀의 첫사랑이 하필 적대국인 샬덴의 막내 왕자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우연이 그들을 만나게 했고, 사랑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었다.

헤더는 이별을 받아들였지만, 미하일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미하일은 몇십 년을 그녀와 사랑했던,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간에 매여 있었다.

요 몇 년은 그래도 살 만했다. 똑 닮은 그녀의 딸이 그의 곁에 있어서, 나름 숨 쉴 만한 세월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날 모양이었다.

“너일 줄 알았지.”

감히 왕의 앞에서 검을 쥐고 있는 청년을 향해 미하일이 중얼거렸다.

그의 젊을 적과 똑같이 생긴 청년은 증오나 분노를 토해내는 대신 담담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과거의 미하일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을 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듯 무덤덤했던 것처럼.

“기다리셨습니까?”

“딱히.”

미하일은 오랜만에 제 양자를 응시했다. 그는 게일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이란 관심은 죄다 한 여자가 무덤까지 가지고 가 버렸기에.

“기사들은?”

“죽이진 않았습니다.”

“피를 많이 보는 게 좋을 텐데. 공포는 좋은 수단이란다.”

가르치듯 말하는 미하일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였다.

“딱히 권력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니라.”

“왕이 권력에 욕심이 없어서 어떻게 하려고?”

미하일은 덤덤한 낯의 게일을 향해 삐딱하게 웃었다.

“이자벨이 시키든?”

“그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건 좀 아쉽군.”

게일은 온갖 물건을 끌어다 신방의 문을 막았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이자벨을 가두는 게 아니라,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 애 얼굴이 보고 싶었는데.”

“이자벨은 헤더 구드윈이 아닙니다. 헤더 구드윈이 낳은 자식이라고 해도 그녀가 될 순 없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하려면 어쩔 수 없지.”

“그냥 마음속에 묻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미하일은 그에게서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일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마음이지. 굳이 너와 이 쓸모없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은데…… 날 죽이지 않을 테냐?”

“왜 제가 폐하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반란이 아니냐? 나도 해 봐서 알지.”

미하일이 가장 먼저 죽였던 첫째 형과는 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사실 단말마의 비명이 미하일의 첫째 형이 남긴 유일한 유언이었다.

“넌 뭘 원해서 여기까지 왔느냐?”

“그거야말로 대답해 줄 의무가 없군요.”

게일은 검을 쥔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피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굳이 더 산다고 즐거울 일이 있을까?”

“이자벨은…….”

“그 애를 위해서 왔느냐?”

미하일은 기분 좋게 웃었다.

게일은 미하일이 생각하는 그런 감정은 아니라고 정정할까 했으나 굳이 그에게 자신에 대해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이자벨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고.

미하일은 첫 번째 생에서 이자벨과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그녀를 이해함과 동시에 미하일의 집착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큭.”

게일의 검은 정확히 미하일의 어깨에 박혔다. 고통에 커진 눈이 의아함을 담고 게일을 응시했다.

게일은 미하일의 죽음에 이자벨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에 튄 피를 털어내며 게일은 그대로 검을 돌려 뽑아냈다. 피가 울컥 새어 나왔다.

당장이라도 지혈하지 않으면 과다 출혈로 쉽게 목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게일은 미하일의 질긴 목숨을 믿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독한 이가 아닌가.

미하일과 헤더는 서로가 첫사랑이었다. 일단 어린 나이에 만났으니까.

수도 외곽 호숫가로 나들이를 갔던 헤더는 잃어버린 모자를 찾기 위해 한참을 그 주변을 돌아다녔고,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던 미하일과 마주쳤다.

묘하게 이국적으로 생긴 근사한 미남에게 헤더는 그렇게 첫눈에 반했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생긴 미인의 동그란 눈에 미하일 또한 빠져들었고.

원래 모든 사랑 이야기는 진부한 법이었다. 미하일과 헤더는 그렇게 이제는 어느 연극이나 소설에서도 쓰이지 않을 만큼 진부하게 첫 만남을 가졌다.

‘루!’

‘그러다 또 넘어져요.’

‘어차피 잡아 줄 거면서.’

혀를 내밀며 하는 말이 새치름했다. 거기에 미하일은 실없이 웃었다.

‘안 잡아 주면 어쩌려고요?’

‘그럼 넘어져야지요. 해 봤자 무릎이나 깨질걸.’

‘아플 텐데?’

‘내가 아픈 거 자기가 더 못 보면서?’

헤더는 명랑했고 늘 팔랑팔랑 그에게 뛰어와 안겼다.

미하일도 그때까지는 쾌활하고 모험심 넘치는 청년이었으니 둘은 수도 근처를 이곳저곳 탐방하기 바빴다.

미하일은 헤더를 잘 맞는 연인이라고 여겼다. 그의 취향과 잘 어울리고 잘 맞춰 주는.

그는 스스로가 그녀의 눈치를 얼마나 보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했다. 헤더가 즐거워하면 그걸로 뭐든 괜찮았으면서……. 미하일은 사랑에 절어 멍청한 뇌로 그게 사랑인 줄 몰랐다.

사랑인데도 사랑인 줄 몰랐던 것.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난 어디든 괜찮아요, 루. 같이 떠나기만 한다면…….’

‘서로를 위해서도 함께 있는 건 좋지 못해요, 헤더.’

담담한 얼굴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지?

미하일은 아직도 자기가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헤더가 저렇게 절박한 얼굴로 그에게 매달렸는데.

사랑한다고. 같이 있자고 했는데. 어떻게?

늘 차분한 건 미하일이었고, 활달한 건 헤더였다. 하지만 그녀가 죽고 나서는 모든 게 뒤바뀌었다.

미하일은 그때부터 삶이 지루해졌다.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기왕이면 이자벨의 손에 죽고 싶었지만…….

사실 누구라도 괜찮았다.

미하일은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시종 하나가 그의 어깨를 지혈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덜덜 떠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은 젊은 시종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가 헤더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을 때처럼.

사실 헤더를 떠나고 며칠은 괜찮았다.

미치도록 괴롭거나 불면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멍한 느낌이 계속되었지만, 곧 털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쓰러지고 나서야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부러 음식을 거부한 게 아니었다. 그냥 굶주림 자체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먹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더 나아가서는 걷고 움직이고 숨을 쉬는, 생을 유지하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미하일은 그제야 제가 두고 온 게 제 인생의 전부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는 것도.

“헤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 연인.

미하일은 깜빡거리는 시야 사이로 그가 평생을 그리워한 금빛 아가씨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며칠 뒤에 겨우 깨어난 그의 앞에는 헤더와 똑같이 생긴 그의 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금발 미인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것처럼 생긴 헤더였다.

이자벨은 그녀와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미하일은 한 번도 이자벨과 헤더를 착각한 적이 없었다.

차라리 착각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착각이라도 해서, 헤더의 이름을 다시 한번 소리 내서 불러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그녀의 딸이라고 해도 그에게 헤더가 될 수는 없어서.

“……이자벨.”

갈라진 목소리에 이자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그의 어깨에 감겨 있는 붕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둘 중 누구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만약에 당신이 조금 더 빨리 사랑인 걸 알아서, 엄마를 데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해 봐요.”

꿈같은 소리였다. 미하일이 매번 바라온 꿈.

“그리고 내가 태어났으면, 당신은 날 사랑했을까?”

미하일은 매번 사랑한다, 소중하다는 말을 쉽게 했다. 이자벨에게만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원하는 건 다 들어주었다. 그녀가 떠나는 것을 제외한다면.

하지만 미하일도 이자벨도 알고 있었다. 그가 자기 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이미 감정이란 게 없어진 인간이라는 걸.

이자벨은 헤더와의 추억을 증명하고 회상하게 만드는 도구일 뿐이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서 귀하게 다뤄야 하는 도구.

“그랬으면…… 그랬겠지.”

그랬으면 목숨이 아깝지 않을 만큼 널 사랑했겠지.

“네가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고, 네가 웃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겠지. 그렇게…… 널 사랑했겠지.”

미하일은 그가 이자벨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역으로 시인한 셈이었다. 그랬다면 사랑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어쩌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당신이 날 데리러 왔다면…… 난 당신을 아버지로 사랑했을지도 몰라.”

로윈 백작의 애정을 갈구하던 그 어릴 적에 미하일이 그녀를 찾았다면.

“당신은 또 늦었던 거야. 엄마한테도, 나한테도.”

이자벨은 그냥 마지막으로 그 얘기를 해 주고 싶었다.

“사실 다 당신 잘못이에요. 사랑인 줄 알았어야지. 엄마가 매달릴 때 같이 도망쳤어야지. 내가 혹시나 모를 다른 가족을 기다릴 때…… 왔어야지.”

몇 번이나 당신은 기회가 있었잖아. 왜 매번 놓쳤어.

“당신한테는 항상 기회가 있었어. 놓친 건 당신 스스로야.”

그러니까…….

“전부 당신 탓이라고. 스스로를 원망해. 당신이 괴로웠으면 좋겠어.”

있잖아. 당신은 모를 거야. 내가 그 애의 스무 살 생일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내가 열아홉과 스무 살의 알렉스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를 거라고…….

당신한테 빼앗긴 것들에 대해 얼마나 당신을 원망했는지도 당신은 모르겠지.

미하일은 떠나는 이자벨의 등을 바라보면서 직감했다. 다시는 저 애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란 걸.

그 사실이 슬프지 않았다. 당연하게 와야 할 끝이 온 것처럼.

미하일은 늘 이자벨에게 해 주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속내가.

널 사랑하고 싶었다고. 귀하고 예쁜 것들만 엮어서 보살피고 싶었다고. 울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

사랑하고 싶은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헤더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어도 사랑했던 것처럼. 이자벨을 사랑하고 싶었어도 사랑하지 못했던 것처럼.

탁. 문이 닫혔다.

미하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통증이야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 작은 동작에도 어깨의 상처가 터져 붕대가 붉게 물들었다.

문득, 헤더가 봤으면 얼마나 울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다친 것보다 더 아파하면서, 얼굴이 빨갛게 될 정도로 울었겠지.

하지만 헤더는 몇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땅 위에는 미하일만 남아 있었다.

이자벨은 그가 고통스럽기를 바란다고 했다. 미하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붕대를 풀었다. 압박하고 있던 붕대가 사라지자 살이 쩍 갈라졌다. 혈향이 익숙했다. 그런 삶을 살았다.

미하일은 창을 열어 그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제야 이자벨의 말에 대답을 내놓았다.

“……미안하다, 아가.”

네 말이 내게 고통이 되지 못해서. 네가 나를 상처 줄 수 있을 만큼 네가 내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서.

“정말 미안해, 아가.”

너는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는데, 왜 나는 널 사랑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너를 헤더의 분신으로밖에 볼 수가 없었을까.

왜 나는 너를…….

창밖의 아무도 없는 길 위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하일의 눈은 멀리에 서 있는 남자를 한눈에 잡아냈다.

몇 번이고 저주했던 얼굴이었다. 결국 헤더가 죽었을 때 옆에 있던 남자의 얼굴.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얼굴에 미하일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는 창가를 붙잡았다. 빠져나간 피에 시야가 흔들렸다. 그럼에도 또렷하게 보이는 것. 길게 이어진 하나의 길 끝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그의 사랑과 똑같이 생긴 여자가 걸어갔다.

둘이 서로를 마주하기 전에, 미하일은 눈을 감았다.

그는 끝까지 헤더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믿고 죽고 싶었다.

그래야지, 헤더. 나는 평생을 당신한테 사로잡혀 살았는데, 당신도 그래야지. 내가 이기적이고 못된 건 알아도,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했잖아…….

당신의 곁을 지키고, 당신의 딸을 기른 남자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믿고 싶어. 한순간도 당신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그랬지? 그랬을 거야.

당신은. 끝까지 날 기다리다 죽었을 거야.

미끄러지듯 창가 아래에 주저앉은 그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믿었다.

어깨의 상처에는 조금씩 아물기 시작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미하일은 망설임 없이 상처를 손으로 헤집었다. 손끝에 어깨뼈가 닿을 정도로 깊숙이. 피가 멈추지 않게.

문득 어느 순간, 환청으로조차 듣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나, 겨우 기억을 더듬어 회상했던 목소리가.

‘루…….’

그는 웃었다.

결국 끝까지 고통스럽지 못해서. 죽음으로 가는 길의 한순간도 괴롭지 않아서.

미안할 뿐이었다.

* * *

세 번의 생을 돌아 만났으면, 그 우연을 운명이라 불러야지. 스쳐도 인연인 것을, 세 번의 삶 동안 엮었으니. 그건 운명이지.

한 명의 발버둥으로, 억지로 엮이고 스쳤던 인연이라도…….

“이자벨.”

길 끝에 서 있는 알렉스가 내 이름을 속삭였다. 아득한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너무 많은 기억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어떤 것이 진짜 나고, 진짜 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리 와요.”

하지만 그럼에도 늘 똑같이 나를 바라봐서.

나는 세 번의 생 동안 그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 애는 늘 알렉스였다.

내가 한 발자국 다가가자, 알렉스가 웃었다. 안심한 것처럼. 내 한 발자국이 허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었다.

이리 오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그가 내게 성큼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 애의 품에서 무너졌다. 수많은 기억이, 내가 저질렀던 죄와 업이, 엮이고 스쳤던 인연이 그대로 밖으로 넘쳐났다.

“괜찮아요. 다 괜찮을 거예요.”

내가 기억하는 죽음의 순간에 내가 했던 말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제가 잘할게요. 더 잘할 테니까…… 돌아가요, 우리.”

과거는 늘 현재의 발목을 잡는다. 누군가는 과거를 뿌리치고 나아가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매여 있다.

내가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면, 알렉스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 아이가 모든 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고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까. 모든 기억을 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나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다. 알렉스는 그저 나를 더 단단하게 붙들었다.

회색과 푸른색이 볕에 따라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눈이 나를 응시했다. 다 괜찮을 것처럼.

문득 이전의 기억이 났다.

인생을 지옥으로 떨어트리는 선택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날이.

천국에서 살게 해 주는 남자가 아니라, 지옥을 괜찮게 만들어 주는 남자를 선택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알렉스를 볼 때마다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고, 계속 죄를 곱씹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를 떨쳐내지 못했다.

해야 하는데도 하지 못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 잊고, 웃는 게 아니라 우는 길을 택하게 만드는 사람.

그를 보며 심장이 떨리지 않았다. 설렘이 가슴을 뒤흔들지도, 내가 나인 것 같지 않은 질투가 나를 휩쓸지도 않았다.

그래도 너라면, 어리석어져도 좋았다.

지옥도 괜찮았다.

그것도 사랑이 아닐까.

* * *

숨이 끊긴 미하일의 육신을 내려다보던 게일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멀리서 보니 제법 다정한 연인 같았다.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제 행복해져야 하는 건가?

게일은 미하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맥이 뛰지 않았다.

“폐하.”

부르는 목소리에도 대답이 없었다. 게일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인생의 대부분은 미하일에 의해 지배당했다. 그에게 미하일은 늘 강자였다.

“폐하. 저는 이제 뭘 하면 되겠습니까?”

뭘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까?

당신은 적어도 헤더라는 여자랑 나눴던 순간이 행복이라는 걸 알았잖습니까.

당신이 죽고, 나는 원하던 대로 내 부모를 구원했어. 그런데 왜 행복하지가 않습니까? 어떤 기분이 행복한 겁니까?

그의 뇌리에 여러 사내가 스쳤다. 사랑에 미쳐 그를 고통 속에서 살게 한 남자들이.

그의 아비부터, 미하일까지.

“저도 사랑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시궁창 속에서 웃는 것처럼 보여도, 거기가 천국인 것처럼 웃을 수 있습니까?

“그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게일의 인생은 이자벨과 비슷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이자벨에게는 악연인지 인연인지 모를 알렉스가 있었고, 게일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누군가의 대신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사랑받고 싶었다.

누가 나를 그렇게 사랑해 준다면,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할 텐데. 어떤 식이라도 좋으니 날 사랑해 줘. 누구라도 괜찮으니까.

게일은 그의 인생을 구속하고 지배했던 남자의 시체를 앞에 두고 웃었다. 습관이 되도록 훈련한 미하일과 닮은 미소를.

어린 시절 그를 무릎에 앉힌 아비는 느릿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 주곤 했다. 애정 하나 없는 목소리로, 중요한 서류를 보고하듯 무감정하게.

동화의 끝은 늘 행복한 결혼식이었다. 어느 악당의 시체 앞이 아니라. 그리고 어떤 주인공도 악당의 시체 앞에서 울지 않았겠지.

게일은 마침내 제게 해피 엔딩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다음 생에는 사랑이 사랑인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태어나지 마십시오, 폐하.”

게일은 한 번도 그를 사랑한 적이 없는 양부의 시체 앞에서, 처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사랑해 주지 않을 거면, 갖고 싶어 하지도 마십시오.”

이자벨은 어쩌면 아주 어릴 적에, 그녀가 타인의 애정에 욕심을 냈을 때 미하일이 왔다면 그를 사랑했을 거라고 했다. 어린아이란 응당 그렇게 애정을 욕심냈다.

게일이 미하일의 손에 아비를 잃은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는 자라오면서 몇 번이고 내면의 욕심과 싸워야 했다.

어쩌면 미하일도 게일을 소중한 자식처럼 아끼고 있을 거라고, 아버지를 죽인 데에는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고.

그런 게 없다는 걸 너무 잘 알면서도, 속으로 미하일의 변명을 하는 스스로가 역겨운 적이 많았다.

당신이 나를 사랑할 거라고 착각하고 싶을 때마다 당신은 그 착각을 산산이 부쉈지.

게일은 피로 물든 미하일의 손을 들어 올려 스스로의 머리 위에 올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쓰다듬을 받듯이 피 묻은 손을 머리에 올린 게일은 가만히 미하일을 응시했다.

죽은 이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면, 나는 당신의 구원을 빌었을 텐데. 당신이 다시 사랑을 만나서 행복할 수 있게 당신의 행복을 빌었을 텐데…….”

이게 투정이란 걸 게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린아이처럼 게일은 계속 그에게 속삭였다. 이 모든 게 당신의 잘못이라고.

“마지막에 당신이 나한테 살려달라고 매달렸다면…….”

‘너일 줄 알았지.’

나일 줄 알았다고?

게일은 미하일이 그를 보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허무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생에 미련 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었다면. 나는 당신을…….

“아버지…….”

찌르지 못했을 텐데.

이자벨이 미하일을 아비로 여기지 못했던 것처럼.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로윈 백작이었던 것처럼.

게일은 이자벨의 그림자처럼 그녀와 닮은 삶을 살았다. 제 양부를 애증한 것조차.

* * *

샬덴의 왕궁에 다시 피가 흘렀다. 귀족들은 그 사실을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왕족끼리의 칼부림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왕가의 핏줄을 이은 이라면 누구나 왕좌에 앉을 수 있었고, 귀족들은 결국 왕좌에 앉은 승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만 귀족들이 당황한 것은 그들의 새로운 왕의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스스로의 결혼식 날 반란을 일으킨 태자는 사라진 신부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라진 신부를 찾으란 말도, 결혼식에 대한 기록을 지우란 말도.

결혼식 날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여자가 자연스럽게 왕비로 기록되었지만,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증발한 것처럼 사라진 여자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불허했다.

등장부터 기묘했던 여자는 그렇게 샬덴에서 사라졌다.

선왕이 명령했던 대로 그 여자의 출신과 태생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았다. 기록관들은 후대에 이 여자에 대해 어떻게 해석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왕이 데려온 여자. 아끼던 여자를 며느리로 삼으려 한 왕. 결혼식 날 반란을 일으킨 태자. 그리고 사라져 버린 여자.

어느 것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었다.

어쩌면 후대에서는 이 여자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할지도 몰랐다. 모든 걸 보고 겪은 귀족들마저 그 여자가 신기루 같았으니까.

햇볕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미인은 이 추운 땅을 싫어했다. 왕의 곁에 머물면서도 왕을 사랑하기는커녕 곁에 있는 것조차 진저리쳤다.

샬덴의 귀족들은 그 미인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대부분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조차도 왕이 내보이는 걸 꺼려 자주 보지도 못했다.

입이 무거운 시녀들이 겨우 옮긴 소문으로는 밤마다 비명을 지르거나 운다고 했다.

귀신같은 여자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하일의 치하에서 숨을 죽이고 살던 샬덴의 몇 안 되는 왕족들이 오랜만에 모였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왕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다.

고풍스러운 방 안에 모인 이들은 채 다섯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왕위 계승권을 잃지 않은 왕족은 갓 태어난 아이를 포함해서도 한 줌이었다. 불안한 몸짓으로 아이를 끌어안은 왕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새로운 왕은 들어섰고, 그들에게 지금과 같은 복종과 침묵을 요구했다. 그리고 새로운 왕과 한때 태자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왕족 하나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발치에 흐른 피에 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이는 샬덴의 왕실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살던 대로 사세요. 선왕께서 했던 것을 그대로 하기에는, 이제 우리는 너무 적지 않습니까.”

미하일처럼 왕족들을 학살하기에는 이미 남은 이들조차 몇이 없다는 말임과 동시에 미하일처럼 게일도 잔인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살아남았던 대로 살면 되었다. 죽은 듯이 복종하면서.

게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순종을 맹세한 왕족들이 하나씩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어린 여자아이 하나만 남았다. 겨우 다섯 살쯤 된, 게일이 부모를 잃었을 나이 즈음 된 아이가.

이곳에 왕족이 아닌 이들은 들어오지 못했다. 소녀는 돌봐 주는 이들이 없이 홀로 서서 두려움에 굳어 있었다.

“내게 복종을 맹세하렴, 얘야.”

게일은 꽤 부드럽게, 하지만 강압적으로 속삭였다.

고개를 숙인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의 눈은 방금 전과 같이 검지 않았다. 백색에 가깝게 텅 빈 눈을 한 채 아이는 노인 같기도 하고 청년 같기도 한 기묘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만족해?

게일은 그 질문에 웃음을 터트렸다. 저건 신일까. 아니면 그의 망상일까.

“전혀.”

그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내 구원을 빌었잖아. 모든 게 끝나면 내가 행복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다시 시작할까?

계집아이의 몸을 한 신의 목소리가 마치 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게일은 그와 꽤 닮은 사촌 형제의 시체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나 인생에서 절박한 순간은 있었을 텐데. 신은 왜 그를 선택했을까. 글쎄. 적어도 호의는 아니었겠지.

-다시 시작할까?

“아니. 충분해.”

아이는 재차 그에게 물었다. 게일은 왕좌에 등을 기댄 채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 세대마다 한 명씩. 게일은 그 뒤에 붙은 설명을 이자벨에게 하지 않았다.

한 세대마다 한 명씩, 가장 비참한 인간에게 내려지는 기적이란 걸.

재미로 하는 신의 유희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인생을 이리도 꼬아 놓을 수는 없겠지.

-다시 시작할까?

“처음부터 시작할 기운도 이젠 없어. 난 됐어. 끝이야, 이제.”

게일을 떠나면서 이자벨은 몇 번이고 그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의 곁에 머물러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내 엄마면서.

그는 꽤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했다. 실제로 그는 이자벨을 딱히 어머니라고 여기고 있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사실 이자벨과 게일의 관계는 좀 이상했다. 서로 부모 자식이라고는 여기고 있지는 않지만 가족이라는 애착은 느끼고 있는 기묘한 관계였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로 모자라는 기억은 있는데, 쌓은 인연이 그렇질 못하니.

-네가 원하던 것이 이루어졌어?

순간, 그의 뇌리에 어설프게 웃는 이자벨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아이는 웃었다.

-그래서, 만족해?

“아니. 하지만 다시 시작하진 않을 거야, 아무것도. 그러니까 꺼져.”

그는 눈을 감았다. 환청처럼 이자벨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풀이되었다.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그에게 속삭였던 말이.

‘네 이름을 지어줄까?’

아이는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게일은 이자벨의 말에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이름은 미하일이 지어준 것이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또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행복해지지 못했지만 자유를 얻었다. 이자벨이 말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그녀는 행복하겠지.

어떻게 웃어 줘야 할지 몰라 이상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던 이자벨의 얼굴이 머릿속을 채웠다. 적어도 그 표정 하나는 가졌잖아.

“왜 자꾸 돌아봐요?”

나는 한숨을 쉬며 말에 탄 알렉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날 잡아 말안장 앞쪽에 태웠다.

“돌아보지 않는 네가 더 이상해, 알렉스.”

“당신이 내 팔 안에 있는데 왜?”

마지막에 봤던 게일의 얼굴이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팔자도 날 닮아서 더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넌 몇 년은 그 애 부모 노릇을 했잖아. 네 애라고. 알렉스.”

“당신 애라서 그런 거예요, 이자벨. 아니었으면 내 무릎 위에서 키웠겠어요?”

냉정한 말이었다. 나는 날 제외한 이들에게 잔인한 알렉스에게 여전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좀 더 있어야 했을까.”

“집으로 가고 싶었잖아요, 이자벨. 우리 집으로.”

자식이라 해도 내 관심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던 알렉스였다. 심지어 알렉스는 그를 키웠던 기억까지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알렉스의 애정을 받아들이기로 했음에도 여전히 그런 그의 태도가 어색했다.

세 번의 생의 모든 기억이 돌아오고, 더 그가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악연이었던 기억만 가득한데, 도대체 어느 구석에서 사랑에 빠져 세 번의 생을 걸고 나를 쫓았지? 내가 다정히 대해 주는 걸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고통을 즐기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순간 그의 입술이 내 뺨에 스치듯 내려앉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연인 간의 애정을 드러내는 알렉스가 낯설었다. 내가 선택한 길임에도.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내 대답에 알렉스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기쁨을 담고 휘어지는 눈이 좋았다.

이게 맞는 걸까?

나는 알렉스를 사랑한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게 이제는 우애인지 뭔지도 사실 약간 불명확했다.

심지어 내 머릿속에는 서로 냉랭하게 무시했던 두 번째 생의 기억과 아이까지 가졌던 첫 번째 생의 기억이 혼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첫 번째 생도 딱히 다정한 사이는 아니었다. 이런 정상적인 연인 관계는 내게는 몹시도 새롭고 이상한 일이었다. 온갖 애증과 죄책감이 뒤섞인 격렬한 이전의 관계들이 차라리 익숙할 정도로.

우리가 정상적인 다른 연인들처럼 살 수 있을까?

“있잖아. 알렉스.”

나는 알렉스의 가슴팍에 몸을 기대고 속삭였다.

“우리 나중에 또 오자. 여기로.”

“그를 보러요?”

별로 내키지 않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애야.”

“이미 다 큰 어른이죠. 난 이 땅이 싫어요, 이자벨. 당신을 빼앗아 갔잖아.”

“우리 없이 혼자 어른이 된 거지. 알렉스. 난 그를 정말 아들처럼 여길 수는 없어. 하지만 그를…….”

내 말은 채 끝나기도 전에 끊겼다.

“알았으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순간 오싹해졌다. 알렉스는 굳은 내 몸을 느끼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나로 충분하잖아요. 이자벨. 내가 우리 아들을 싫어하지 않게 도와줄 거죠?”

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대화는 늘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내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다른 화제를 입에 올리면 쉽게 불안해했고, 분노했다. 영혼 깊숙이 새겨진, 나에 대한 불신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내가 언젠가 또 도망가 버릴 거라고, 자기를 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정 중에 한 번도 알렉스의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때때로 나를 감시하듯 훑었다. 내가 품에 있어도 안심하는 법이 없었다.

이게 정상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건 나조차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믿을까. 내가 자의로 그와 함께한다는 걸 믿을까.

나는 눈을 감고 알렉스에게 몸을 기댔다. 내가 저지른 짓들 때문이니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갈수록 선명해지는 건 진실뿐이었다. 알렉스가 절대 나를 믿지 않는다는 진실.

알렉스는 국경을 지나자마자 마차를 구했다. 그는 사방이 막힌 마차 안에 이자벨과 단둘이 있을 때 그나마 안심했다. 인간은 생각보다 더 시각적인 동물이었다.

“……답답해.”

“조금만 참아요.”

이자벨의 중얼거림에 알렉스는 그녀를 달랬다. 마차의 창으로 향하는 손을 부드럽게 쥐자 그녀는 한숨을 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일정한 움직임 속에서, 마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알렉스는 필요 이상으로 말하지 않았고, 이자벨은 뭐라 말을 붙여야 할지를 몰랐다.

알 수 없는 긴장으로 물든 침묵 끝에 로윈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자벨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가씨!”

샐리가 이자벨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어떤 순간에도 그녀의 편에 섰던 충실한 하녀를 향해 웃었다.

알렉스는 그런 이자벨을 말없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알렉스는 늘 그런 모습이었다. 이자벨이 뭘 하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자벨은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이자벨을 불신했고, 뭘 하든 의심했다. 그가 티를 내진 않았어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자벨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수많은 일거리를 제치고 로윈 저택에 방문한 엘리자베스는 이자벨의 고민에 코웃음 쳤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이전이랑 큰 차이도 없어 보이는데.”

“알렉스가 날 안 믿어. 날 감시한다고. 그게 이전이랑 같아?”

엘리자베스는 어두워진 이자벨의 안색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어차피 그전에도 널 감시하는 건 비슷했잖아?”

알렉스 로윈은 애초에 소년 시절부터 사방에 제 사람들을 풀어놓고 이자벨의 일거수일투족을 수집했다.

“그때랑은 달라. 지금은…… 아무튼 달라.”

그때는 사랑이든 집착이든 감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전제를 깔아 둔 채로 그녀를 대하지 않는가. 이자벨이 알렉스를 버리고 도망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전제를.

“난 도망칠 생각이 없어. 도대체 어디로 도망을 칠 건데?”

“그걸 내 앞에서 말해 봤자 소용이 없을 텐데.”

“알렉스 앞에서도 말했어! 하지만 믿지를 않잖아.”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쉬었다.

“후작이 널 안 믿는다고 너한테 해코지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널 좀 오래 쳐다보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너라면 그게 되겠어?”

이자벨의 짜증 섞인 되물음에 엘리자베스는 우아하게 대답했다.

“내가 너라면 벌써 후작을 피해 야반도주를 했겠지.”

엘리자베스는 다 들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미친 인간이랑 왜 같이 살겠어.”

“리지!”

“사실이잖아?”

엘리자베스는 자기 머리를 툭툭 두드리면서 이자벨에게 느릿하게 충고했다.

“어차피 후작은 여기가 어딘가 맛이 갔어. 정상적으로 행동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

이자벨은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녀라고 해도 알렉스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는 걸 부정하진 못했다.

“네가 후작의 옆에 있기를 선택한 건 정말 슬픈 일이지만, 선택한 이상 좀 이상한 짓을 해도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가 섭정공이랑 야반도주하는 걸 추천했잖아. 그나마 네 인생에서 정상적인 길이었다니까, 그게.”

엘리자베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낮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런 말도 들었어요, 이자벨?”

이자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문가에 서 있는 알렉스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이자벨은 알렉스의 눈치를 보며 웃었다. 혹시나 기분이 상했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이자벨이 알렉스에 관해서는 멍청해진다는 걸 인정했다. 애초에 이자벨이 자기 외의 다른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부터 기분이 상했을 인간인데 뭘 눈치를 보고 있어.

“알렉스, 언제 왔어? 오면 바로 부르지…….”

알렉스는 이자벨의 뺨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이자벨은 그런 알렉스의 행동에 아주 잠깐 멈칫했지만, 이 방 안에 있던 모든 인간이 그녀의 반응을 인지했다.

“손님이 있었잖아요.”

“그래도 네가 부르면…….”

다정하게 오가는 말임에도 이상하게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을 만큼 그럴듯한 연인 같은 둘이 하는 꼴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둘이 알아서 할 문제였다. 후작이야 어차피 이자벨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이자벨 또한 벗어날 생각이 없으니 시간도 많지 않은가.

설마 죽을 때까지 저러겠어.

“난 이만 갈게, 벨.”

“벌써?”

“내가 얼마나 바쁜지 넌 잊고 사는 거니?”

응접실까지 멋대로 들어오는 알렉스에게 싫은 말 한마디도 못하는 이자벨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으로 순간 의문이 하나 스치고 지나갔다. 저러다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다음번에는 내가 가야겠네, 리지.”

이자벨의 허리를 감싼 알렉스의 손을 슬쩍 쳐다본 엘리자베스는 자기 팔자는 스스로 꼬는 거라고 생각하며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손을 내밀지 말았어야지, 뭐…….

사실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고 해도 딱히 달라질 것 같지는 않긴 했다.

엘리자베스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생각이 맞았다. 알렉스는 이자벨이 손을 내밀지 않았던 생애에서도 여전히 이자벨을 사랑했으니까.

“참. 돌아오고 로윈 백작은 만나봤어?”

엘리자베스가 떠나기 직전에 남긴 물음에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싼 알렉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엘리자베스가 로윈 저택을 떠나자마자 알렉스가 물었다.

“백작을 보고 싶어요?”

“아니.”

이자벨은 첫 번째 생에서 백작이 죽었던 밤을 기억했다. 어쩌면 그들의 인생을 이렇게 뒤틀어 버렸던 그날을.

“잘 살아 계시다며. 그러면 됐어.”

헤더가 죽은 후로 백작은 어떤 식으로도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자벨은 애써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원하면 백작을 수도로 한 번쯤은 부를 수도 있어요. 할 얘기가 있을 수도 있고…….”

알렉스는 말끝을 흐렸다.

이자벨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알렉스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더 불안해졌다.

목덜미에 알렉스의 입술이 느껴졌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깨무는 이의 감촉도.

“……당신 아버지잖아요, 이자벨. 내 아버지는 아니었어도.”

이제는 아득해진 기억 속에서 그녀가 아이를 가졌을 때처럼 알렉스는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감쌌다.

“그 반대겠지, 알렉스.”

이자벨은 애써 웃으면서 알렉스의 손등을 감쌌다. 그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낳았다고 다 아버지는 아니죠.”

알렉스는 게일이 자신보다 미하일을 좀 더 아버지에 가깝게 여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작이 미워?”

그는 순진한 소리를 하는 이자벨의 떨리는 목소리에 웃었다.

“미워할 만큼의 관심도 없어요, 이자벨. 백작도 마찬가지일걸요.”

알렉스가 첫 번째 생에서 로윈 백작을 살해한 건 그게 필요해서였지 감정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애들은 본능적으로 알잖아요. 누가 자기를 사랑하고 미워하는지.”

“…….”

이자벨은 알렉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알렉스의 말은, 이자벨이 이전 생에 알렉스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도 걱정하지 마요. 이자벨.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애는 사랑 속에 자랄 테니까.”

“게일은…….”

“당신이 없었잖아요. 당신만 있으면 난 정말 우리 애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어요.”

이자벨의 머릿속에 미하일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에 당신이 조금 더 빨리 사랑인 걸 알아서, 엄마를 데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해 봐요. 그리고 내가 태어났으면, 당신은 날 사랑했을까?’

‘그랬으면…… 그랬겠지.’

미하일과 알렉스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한 사람을 인생 전부의 가치처럼 여기는 데에 있어서는.

이자벨은 불안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계속 알렉스의 옆에 있을 테니까. 그녀가 옆에 있는 한 알렉스는 평범한 이들처럼 살 수 있었다.

“예전에는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누구를 닮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알렉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가깝게 들렸다.

생기지도 않은 자식을 언급하는 알렉스의 목소리는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라고는 한 톨도 담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당신 자식인데 외모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게 닮았다고 당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아이를 또 가질 필요가 있을까? 그냥 우리 둘만 살아도…….”

이자벨의 망설이는 말에 알렉스는 그녀의 배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왜? 또 도망가려고?”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는 그의 눈치를 보는 이자벨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럼 증명해 봐.”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배를 누르는 손의 힘이 거세졌다.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날 버리지 않겠다는 걸 증명해 보라고, 이자벨.”

아이는 사실 없는 편이 더 좋았다. 굳이 이자벨의 관심을 분산시킬 뭔가를 두는 걸 싫어하는 알렉스의 입장에서는.

하지만 알렉스는 이자벨을 불신했고, 그녀를 잡아 둘 것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되는 핏줄 같은 것이. 알렉스가 최후의 순간에 잡아 둘 인질이.

“알렉스…….”

꺼질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헐떡거리면서 그를 불렀다.

이내 힘이 빠진 몸이 알렉스에게 기대자 알렉스는 거기에 희열을 느꼈다.

“……내가 당신을 믿게 해 줘.”

사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알렉스는 이자벨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아이를 나한테 줘.”

그러니까, 이건 전부 거짓말이었다.

“우리를 묶어 둘 수 있는 증거를 내게 줘, 이자벨.”

순진한 이자벨은 이 말에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겠지.

알렉스는 이자벨을 사랑하는 만큼 잘 알았고, 사랑하는 만큼 그녀를 불신했다. 어떤 적도 알렉스에게 이자벨 만큼 분석되고 해부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날 믿을 거야?”

미약한 기대감을 담은 목소리가 흔들렸다. 알렉스는 거기에 기꺼이 거짓말로 답했다. 이자벨이 원하는 답을.

“그럼 당신을 믿을게요.”

알렉스는 게일에게 했던 충고를 회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절대 믿지 마. 사랑할수록 더.’

* * *

알렉스가 내 몸을 집요하게 응시하면서 속삭였다. 허벅지를 벌리는 손길이 아팠다.

“더 벌려요. 할 수 있잖아요.”

이미 한껏 벌어진 허벅지 근육이 팽팽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싫어요?”

허리 아래에 밀어 넣은 베개와 이불들로 아래가 연결된 게 선명히 보였다. 핏줄이 선 그의 성기가 내 허벅지 사이에 반쯤 박혀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며 몸에 힘을 빼려고 애썼다. 아래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기분이 이상했다.

첫날밤이 아니었다. 나는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잠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그 연장선일 뿐이었다.

“눈 떠요, 이자벨.”

부드러운 목소리는 짙은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반쯤 그의 것을 물고 있는 내 안쪽 구멍에 자기 것을 깊게 처넣었다.

“아읏!”

뿌리 끝까지 들어온 살덩어리는 단단하게 질벽을 짓눌렀다. 나는 몸 안에 들어온 낯선 것에 고통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드디어 눈 떴네요.”

나른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은 서늘한 눈매가 나를 응시했다. 그는 자신의 물건을 아플 정도로 꽉 물고 있는 내 안쪽 구멍에 추삽질을 하는 대신 가만히 내 입술을 혀로 쓸었다.

“흣…….”

목과 귀, 어깨에 느릿하게 입을 맞춘 알렉스는 내 가슴팍에 입술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이러고만 있을까요?”

단단한 물건이 성이 잔뜩 나 질벽을 짓누르고 있는 주제에 그는 내 안에서 나가기 싫은 것처럼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누님. 제가 어떻게 할까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알렉스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비명을 지르기 않기 위해 애썼다. 그의 허릿짓에 따라 짓이겨지는 질벽이 벌써부터 빨갛게 붓기 시작했다.

“응, 으읏!”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면서요.”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그는 뿌리 끝까지 자신의 물건을 내 안에 처넣었다. 나는 흔들리면서도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가렸다. 알렉스의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목에 감도록 만들었다.

“괜찮아요, 이자벨. 괜찮아…….”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몸짓에 나는 쾌감에 온전히 몸을 실었다. 전생의 경험상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건 좋지 못했다. 멀쩡한 이성으로 그와 맨살로 얽혀 있는 걸 그 시절에도 나는 잘 감당하지 못했다.

하반신이 떨어질 틈도 없이 붙은 채로 알렉스는 내 눈 위에 입을 맞췄다.

“흐으…….”

나는 자주 눈을 감았다. 때때로 눈을 뜰 때면 항상 알렉스와 눈을 마주쳤다. 엉켰다가 떨어졌다가 얽혔다가 입을 맞추고…….

모든 순간에서 그 애는 나를 응시했다.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이자벨…….”

마지막에는 기절에 가깝게 잠에 빠져들었다. 하도 범해져 감각이 무뎌진 하반신보다는 그 애의 눈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이상하게 젖어 있던 청회안이.

새벽까지 시달린 탓에 오전 내내 멍하니 누워 있었다. 겨우 식사를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고, 안개가 낀 것처럼 스스로도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 번의 생에 걸쳐 엉킨 감정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막막했다.

“아가씨?”

샐리의 조심스러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복잡한 머리를 털어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손님이 오셨는데요…….”

“리지가?”

“아뇨. 펠먼 영애께서 오셨어요.”

내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샐리는 내 기색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돌려보낼까요?”

캐롤이 어떻게 내가 로윈 저택에 돌아온 걸 알았을까. 그녀가 그만한 정보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로윈 저택에 돌아온 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일이었다. 알렉스가 내 새로운 신분을 만들겠다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샬덴의 공녀로 끌려갔던 여자가 아를의 저택에서 발견된다면 그만큼 이상한 일이 있을까.

“정확히 누굴 찾았는데?”

“친구분을 찾아오셨다고 하셨어요.”

“……그런 여자는 없다고 해.”

샐리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얼굴을 감쌌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내 얼굴을 감추고 싶었다. 정확히는 아예 사라지고 싶었다. 어디로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도.

그래도 지금이 예전보다는 낫잖아. 알렉스도 내 옆에 있고, 샐리도, 리지도…….

나는 내가 이렇게 다른 이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인간일 줄 몰랐다.

알렉스의 불신에서 비롯된 불안은 나에게 전염된 것처럼 내 발목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나를 믿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날 믿지 않아서, 최후의 순간에 나를 흔들 인질을 원하면서…….

애가 있으면 나를 믿겠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속아 준다고 알렉스가 날 믿게 되나?

알렉스를 사랑한다고, 내 목숨보다 아낀다고 수십 번은 더 속삭였다. 그 애는 정말 내 전부였으니까!

왜 안 믿는 건데, 왜!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하는데 왜 안 믿어…….

닫힌 문이 열리고 들리는 인기척에 나는 표정을 정돈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샐리가 난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펠먼 영애께서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대화를 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고…….”

고민도 편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 펠먼은 본인이 자신했던 대로 실행할 능력이 있는 여자였다. 아무렴 아를의 사교계를 한 손안에 쥔 여자인데 소문 정도야 가볍지.

“이자벨, 왜 이렇게…….”

저택 바깥의 공식적인 응접실을 대신해 내 방에 딸린 작은 응접실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멀쩡해요?”

여전히 화려한 미인인 캐롤은 나를 보고 놀람과 의문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게 협박까지 해서 날 나오게 만든 영애가 할 말인가요?”

캐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이자벨을 위해서였어요. 난 이자벨이 팔다리 중 하나는 멀쩡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그녀는 진심이라는 듯이 덧붙였다.

“구해 주려고 온 건데…….”

나는 과거에 나를 알던 이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걱정을 캐롤에게서 다시 들은 셈이었다.

“구해 줄 필요 없어요, 캐롤. 난 아주 멀쩡하고, 여기 온 건 내 발로 온 거니까.”

“어떠한 위협이나 협박 없이?”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캐롤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내 약점은 예전부터 알렉스였는데, 이제 알렉스 옆에 있으려니까 왜 다들 이상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몰라서 물어요? 이자벨도 왜 내가 이러는지 알 텐데.”

나는 굳이 알렉스에 관한 것들을 들춰내고 싶지 않았기에 침묵했다.

그가 나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 정도야 내가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것도.

“아무튼 어떻게 샬덴에서 당신을 놔준 거죠? 이번에 샬덴의 태자가 즉위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샬덴의 반란은 정당한 양위로 포장되었다. 게일은 미하일만큼 학살을 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원래부터 태자였으니까.

“샬덴의 태자를 봐서 알지만, 당신을 쉽게 놔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한테 자유를 주고 싶다고 했어요. 그게 다예요.”

캐롤 또한 그 이상의 이야기가 있음을 알았지만 꺼리는 내 기색에 더 묻지 않았다.

“후작에게 가는 게 자유를 갖는 일인 것 같진 않은데…….”

그녀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이자벨의 자유를 가장 구속할 인간은 후작뿐이잖아요? 부정하려고 하지 마요.”

나는 움찔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캐롤은 그런 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뭐가 씐 건 알겠는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죠.”

“너무 과하게 말하니까 그렇죠. 물론 알렉스가 조금 문제가 있지만, 캐롤이 말하는 것처럼 심각하진 않아요.”

“미안하지만 이자벨. 그게 뭐가 씌었다는 거예요.”

캐롤은 내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난 후작이 열다섯이 되기도 전부터 봐왔어요. 그거 알아요? 후작이 날 처음 만나서 한 말이 뭔지?”

회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진저리치는 캐롤이었다.

“당신이 평생 자기만 예뻐할 수 있게 당신의 결혼을 막을 방법이 있냐고……. 열네 살짜리가요. 자기 누나를 두고 할 말이에요, 그게?”

“……어렸잖아요.”

캐롤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후작이 점점 더 맛이 간 이유가 당신이 너무 받아 줘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 드네요. 지금.”

“지금 그래서 나를 보러 온 이유가 알렉스가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인가요?”

꽤 냉랭하게 받아치자 캐롤이 고개를 젓다가 멈칫했다.

“글쎄요……. 이자벨이 마음을 바꿔 먹기를 바랐으니까 영 틀린 주제는 아닐 수도.”

“무슨 마음이요?”

“내가 당신이 로윈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 것 같아요?”

그녀는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나 같은 일개 영애가 이 나라에서 몇 알지 못하는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

“이자벨. 당신도 짐작하고 있지 않아요?”

캐롤은 부드럽게 물었지만, 내게는 나를 몰아세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캐롤이 더 말하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대화는 충분했던 것 같…….”

“섭정공이 여전히 당신을 기다려요.”

시그니티…….

“당신의 옛 약혼자가 여전히 당신을 위해 옆자리를 비워 두고 있다고요, 이자벨.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죠?”

내게 첫사랑을 고백했던 남자가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여전히 나를 지우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다고.

캐롤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알아요, 이자벨. 당신한테 후작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란 걸. 목숨도 아깝지 않은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당신이 늘 말했으니까.”

“그러면, 그런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되는 거죠. 캐롤.”

“후작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 후작을 사랑하니까? 이미 연인이 된 두 사람의 사이를 방해하는 말이라서요?”

“……네. 그렇죠.”

이게 연인인 관계가 맞기는 한가?

분명 서로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게 일상이니 연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캐롤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내 안색을 살피다 물었다.

“이제는 샬덴에서 당신을 놓아줬으니 자유의 몸이잖아요, 이자벨. 진심으로 당신이 여길 선택한 건가요?”

“자유를 얻자마자 난 여기를 선택했어요, 캐롤.”

“당신의 사랑을 인질로 잡힌 게 아니라?”

“그게 무슨…….”

캐롤은 나를 주의 깊게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후작이라면 그랬을 것 같은데요. 당신 앞에서 매달렸겠죠. 나 좀 사랑해 달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요. 후작을 사랑하는 당신이 잡혀 줘야지.”

“서로 사랑하는 게 이상하기라도 한 건가요?”

날카롭게 되묻는 내 말에 캐롤은 일어선 나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가족이…… 날 연인으로 원한다는데 어떻게 해요. 그렇죠?”

차마 그 앞에서 어떻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난 그 애를 사랑해요, 캐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순간 울컥해서 튀어나온 말에 캐롤이 안쓰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도 내 형제자매를 사랑하죠. 가족인데.”

“이만 나가 줘요, 캐롤. 대화는 충분했잖아요.”

나는 몸을 돌렸다. 내 뒤에서 캐롤이 계속 내게 말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자벨. 정말 후작을 사랑해요? 질투해 본 적은 있어요? 설레본 적은?”

문을 열었다. 나는 그제야 몸을 돌려 캐롤을 마주 봤다.

“나가요, 캐롤.”

캐롤은 나를 응시하다 천천히 문을 나섰다. 내 옆에 스칠 것처럼 가까워졌을 때 그녀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그 남자가 갖고 싶어졌던 적은 있어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샐리는 내 기색을 보고 조용히 물러났다.

나는 홀로 방 안에 앉아 생각을 곱씹었다.

정말 사랑하냐고? 당연히 사랑하지. 정말 나는 걔밖에 없는데. 내 전부를 바쳐도 아깝지 않을 내 알렉스인데.

질투나 설렘 같은 건 이미 한참 전에 고려할 가치에서 벗어났다. 그런 게 없어도 이 정도면 사랑이지. 사랑인데…….

“……울어요?”

먼 길을 달려온 것처럼 숨소리가 거칠었다. 알렉스가 내게 성큼 다가와 내 앞에 반쯤 무릎을 꿇었다.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어요?”

“……내가 돌아온 걸 얼마나 알고 있어?”

내 뺨에 알렉스의 손이 닿았다.

나는 울고 있지 않았다. 너무 오래도록 울어 와서 나는 울지 않고도 우는 법을 배웠다.

“아무도 모르게 할 수도 있어요.”

내 머릿속에 샬덴에 왔던 유진이 스쳤다. 아를의 사절로 왔던 귀족이니, 당연히 시그니티에게 보고했겠지.

“……죽여서?”

알렉스는 내 질문에 어둡게 웃었다. 거기에는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난 당신의 양심이 싫어, 이자벨.”

그게 아니었다면 나한테 잡혀 주지 않았을 걸 알면서도…….

“나 말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당신은 그러질 못해.”

사랑을 하게 되면 이상한 순간이 있다고 한다. 그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이.

동화 속에서나, 연극 속에서나 나오는 그 순간이 알렉스의 인생에서는 끝나질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단 한 번도 그런 눈으로 그를 바라본 적이 없어서. 세상에 자기만 남은 것처럼 봐준 적이 없어서.

그래서 알렉스는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했다. 그는 늘 묻지 못하는 질문을 가슴 속에 숨겼다.

한 번이라도 나와 같은 색채로 나를 사랑한 적이 있어?

* * *

캐롤은 자는 건지 눈을 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남자의 책상을 손으로 두드렸다.

“전하?”

의자 등받이에 한껏 몸을 기댄 남자에게서는 피곤이 묻어났다. 캐롤은 쌓인 서류와 남자를 돌아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이럴 거면 차라리 들어가시는 게 낫지 않나요?”

“……일이 많아.”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눈도 뜨지 않고 말하는 시그니티를 보고 캐롤은 혀를 찼다.

“안 해도 될 일까지 손을 대고 있으니 많겠죠.”

캐롤은 그의 앞에 놓인 서류를 힐긋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번을 도는 기사들 봉급은 왜 보고 계시는 건데요? 이런 건 재무 대신 선에서 처리될 문제 아니에요?”

재무 대신까지 안 가도 될 문제였다. 사실 지금 시그니티가 손대고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그가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었다.

“내가 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보통은 안 하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본인이 쥐고 있는 권력에 대해 하는 말치고는 자조적이었다. 캐롤은 그가 인간적으로 조금 안쓰러웠다.

나라의 가장 꼭대기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공이 뭐가 안쓰러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첫사랑을 위해서 아등바등 권력을 잡았는데 정작 그 첫사랑이 다른 사람을 택했다고 하면 허무하지 않겠는가.

뭐 때문에 십여 년의 세월을 달려왔는데. 그것도 야망 없는 인간이 고작 사랑 하나 보고 달려온 길인데.

후작 또한 비슷한 처지였지만 캐롤은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친개에게 연민을 느끼진 않았다.

이자벨은 아닌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것도 안타까운 일이지.

“권력을 잡았으면 누려야죠. 일만 할 게 아니라.”

“어떻게?”

“전하의 비위를 맞추느라 쩔쩔매는 귀족들도 좀 보고, 귀한 보물들도 좀 수집해 보고…….”

시그니티는 그제야 눈가를 누르며 의자에 반듯하게 앉았다. 그는 약간 한심하다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런 짓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능했어. 굳이 지금 와서?”

시그니티는 반란을 일으키기 전부터 대공이 된 폐태자의 하나뿐인 자식이었고, 여럿 있는 왕자들보다 솔직히 많은 것을 누리며 자라왔다. 정말 이자벨 로윈이라는 여자가 아니었으면, 굳이 반란을 일으킬 필요조차 없던 남자였다.

이래서 사랑이 인생을 말아먹기 딱 좋은 감정이라니까.

캐롤이 가벼운 연애조차 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녀는 권력보다 사랑하게 될 인간이 생기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럼, 권력을 가지면 하고 싶었던 일을 하세요. 권력을 잡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시그니티를 잘 아는 인간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유.

“오늘 이자벨을 보고 왔어요. 여전히 예쁘고, 위태롭고…….”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캐롤은 이자벨이 화제에 오르자마자 그녀의 말을 잘라먹는 시그니티를 향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돌아왔다고요. 당신이 왕인 땅으로.”

“……난 왕이 아니야.”

현 왕은 유폐되어 있었다. 귀족들은 왕이 살아 있는지조차 의심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그 의심을 꺼내진 않았다.

간간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린 왕자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다정한 성격에 왕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에드윈 왕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주 가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과 다름이 없죠.”

캐롤은 시그니티를 부추기고 있었다. 이자벨을 잡으라고.

정치적인 계산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절반쯤은 순수한 호의였다.

이자벨은 어쨌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을 때 캐롤을 도와주려 했던 유일한 인간이었으니까.

계산적인 캐롤의 입장에서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가장 진심으로 대하는 친구였다. 그게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우정은 아니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이 정도만 돼도 꽤 드문 우정이지 않은가.

“후작은 분명 권력을 잡고 있는 인간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왕실의 신하죠.”

“군권을 쥐고 있는 건 그쪽이야. 국경에 주둔한 군대가 수도까지 밀고 들어오는 꼴을 보고 싶나?”

“명분은 전하께 있죠. 귀족들 누구도 아를 왕실의 대가 끊기길 바라진 않아요. 고작 사생아 출신 귀족에게 꺾이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대단하잖아요?”

어둡게 가라앉은 금안이 캐롤을 응시했다. 그녀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그걸 이자벨이 원할까?”

캐롤은 그게 어리석은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갖고 싶어서 못 견딜 것처럼 구는 주제에 상대의 의사를 고려하고 있다니.

어느 왕이 아랫것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릴까.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전하의 옆으로 데려오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후작의 옆에서 바싹 말라가는 이자벨을 보고만 있겠다고?

캐롤은 후작이 이자벨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후작은 이자벨에게 전혀 이로운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애정만 바닥까지 긁어내 삼키는 괴물이었지.

“……그래.”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근사한 청년은 감히 누구도 말을 걸 수 없는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자벨에게만은 약자였다.

그녀가 먼저 손을 뻗지 않으면, 그를 허락하지 않으면, 시그니티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자벨은 후작을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하더라도 후작과 같은 감정은 아니죠. 전 전하께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요.”

캐롤의 말에 시그니티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돌렸다.

“영애의 부친이 또 결혼을 닦달하기라도 하나?”

시그니티의 공식적인 약혼녀는 캐롤이었다.

위장이라지만 서로 꽤 괜찮은 정치적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나이가 차면 찰수록 언제 결혼하냐는 인간들이 많아지는 것만 빼면.

“전하와 제가 파혼한다고 해서 전하나 저나 결혼 압박이 없어지는 건 아니죠. 특히 전하께서는 더 위험하실 텐데요.”

후계자가 없는 권력자란 위험했다. 젊었을 때야 모를까, 늙을수록 세력은 불안해지길 마련이니까.

다음 대까지 권력이 보장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후계자가 시그니티는 필요했다.

자식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기왕이면 좋은 혈통의 자식이면.

“에드윈이 있잖아.”

유폐된 왕의 아들. 어린 사촌 형제를 언급하는 시그니티의 말에 캐롤은 코웃음 쳤다.

퍽이나 에드윈 왕자가 시그니티의 후계자 노릇을 할까.

“아버지의 원수에게 복수하는 왕자의 이야기는 이제 연극에서도 진부해요.”

“그렇게 말하면 신하의 여자를 욕심내는 왕의 이야기도 진부해.”

캐롤은 차분하게 말하는 시그니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정말 포기하실 생각이세요?”

“아니면? 난 그녀가 싫어하는 짓은 못해.”

“쓸데없을 정도로 충성스러우시네요.”

“아버지를 닮아서.”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이 아깝지 않으세요?”

시그니티는 캐롤을 가만히 응시했다.

영리한 여자였다. 손익 계산이 빠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양보하는 법을 모르는 똑똑한 귀족 영애.

캐롤 펠먼이라는 여자는 시그니티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이 마치 이자벨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난 그녀를 갖기 위해 이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니야.”

“지금 와서 변명해봤자 소용없어요, 전하.”

사랑에 절절매는 모습을 몇 년을 봐왔는데. 그런 변명은 너무 늦지 않았는가.

시그니티는 캐롤이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금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자벨은 샬덴으로 떠나길 싫어했어. 아주 끔찍하게 여겼지. 그녀는 여기에 있고 싶어 했는데……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못했지.”

이자벨이 울었다. 그를 조금쯤은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그래서 다치길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시그니티는 그때 자신이 이벨의 방해물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녀에게 원하는 곳에 머물 자유를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헌신과 희생에 기반을 뒀다.

당신은 어디든 갈 수 있어. 이자벨. 하지만 내 곁에 머물러준다면, 당신에게 최고의 선택지가 될 수 있게 노력할게.

제발 나를 선택해줘.

시그니티가 몇 번이고 이자벨에게 했던 고백이었다.

한 번도 권력의 상층부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남자가 선택의 칼자루를 상대방에 쥐여주는 것만큼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근본적인 태생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빈민가에서 자란 알렉스는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을 사랑으로 알았고.

처음부터 전부를 갖고 태어난 시그티니는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을 사랑으로 알았다.

“이자벨이 행복하기만 한다면 나는…….”

“아니라면요? 이자벨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이자벨의 일을 왜 내가 판단을 해야 하지?”

캐롤은 철저하게 훈련된 사냥견을 보는 기분을 받았다.

자기의 본능도 욕구도 모조리 인내한 채, 판단 의지조차 없이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는 사냥개.

“이자벨이 원하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해.”

시그니티는 이자벨의 말 한마디면 뭐든 할 수 있었다.

팔 년 전, 그녀의 한마디면 나라를 갖겠다고 속삭였을 때처럼.

“그럼 이자벨이 평생 당신을 부르지 않으면…….”

“난 미래를 생각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 펠먼 영애.”

시그니티는 피곤에 젖은 눈을 문지르며 창가를 응시했다.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를 바라보는 표정이 아득했다.

“그냥…… 지금 기다리고 있는 거로 충분하지 않나?”

캐롤은 이해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감정의 깊이였다.

“……그러다 전하의 자리를 빼앗길 거예요.”

“그렇게는 못 두지.”

아득하게 흐려졌던 눈매가 날카롭게 돌아왔다. 시그니티는 순식간에 감정을 속으로 집어넣은 채 웃었다.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이들을 베어낼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언젠가 이자벨에게 내가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만약 나를 불렀는데 내가 대답할 수가 없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어.”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해.

팔 년 전, 그가 그녀를 지키지 못해서 그녀가 그를 지켜야 했던 경험 같은 건, 일생에 한 번이라고 해도 많았다.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전하를 평생 부를지도 안 부를지도 모르는 여자를 위해 권력을 잡고 계시겠다는 뜻이네요. 그거 진짜…….”

캐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아는 한 가장 이상한 이유네요.”

시그니티는 그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진 않았다. 캐롤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툭 말을 던졌다.

“이자벨이 전하를 부르기를 기도해야겠네요.”

“그거 고맙군.”

“만약 이자벨이 전하의 옆에 서기로 결정한다면…….”

순간 캐롤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한 시그니티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돌아봤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

캐롤은 그 모습에서 후작과 다른 형태의 집착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나마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시그니티에 대한 평가를 취소했다.

후작이 그냥 미친개였다면, 시그니티는 훈련이 아주 잘 된 미친개였다.

캐롤은 차분한 표정을 덮어쓴 시그니티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 * *

이자벨의 정상적인 주변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자벨의 인생이 꼬이다 못해 신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비틀려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엘리자베스는 만약 자신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이자벨에게 진지하게 수도원을 추천했을 것이다. 어디 먼 변경에 박혀 있어서 사람이라고는 노인밖에 없는 수도원.

이자벨을 만나는 순간 인간들이 살짝 머리가 도는 건가? 아니면 이자벨이 처음부터 맛이 간 인간들을 만나게 되는 건가?

뭐가 문제지, 도대체.

엘리자베스는 로윈 저택으로 들어가는 물자를 예의주시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다행스럽게도 로윈 저택에서 아직 호화로운 감옥 건설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거기에 안심했다.

그녀는 바쁜 와중에도 하나뿐인 어린 친구의 안위를 제법 신경 쓰고 있었다. 신경 안 썼다가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았으니까.

간간이 찾아와 주면 좋겠다는 말을 하던 이자벨의 창백한 얼굴이 종종 생각났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웃지 않았던 것 같은데. 좀 더 활발하고, 오만하면서 시원하게 웃던 이자벨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던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작도, 섭정공도, 하다못해 그녀 자신도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오로지 이자벨뿐이었다.

이자벨은 후작이 어릴 적과 달리 변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알렉스 로윈은 변한 적이 없었다. 단지 이자벨의 앞에서 얼마나 본 모습을 숨겼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일 뿐.

시그니티에게는 사실 이자벨 앞에서 얌전하게 어리광을 부리는 알렉스 로윈 쪽이 더 낯설었다. 어릴 적부터 후작은 시그니티에게는 가식 섞인 친절조차 내보이지 않았으니까. 제 전부를 빼앗아갈 원수를 보듯 노려보기는 했어도 말이다.

커가면서 변한 것이라고는 알렉스 로윈이 좀 더 노련해졌다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무표정 안에 숨기고 상대를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 것처럼.

“어려운 문제도 아닐 텐데.”

알렉스의 말은 낮고 느렸으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시그니티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덩치가 큰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둔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금방이라도 상대의 목을 틀어쥘 수 있을 것처럼 기민해 보였다.

때때로 시그니티는 귀족들이 그러하듯 그를 앞에 두고 섬뜩함을 느끼곤 했다.

“어려운 문제든 아니든, 내가 왜 그 청을 들어줘야 하는 거지?”

“그쪽이야말로 왜 내가 부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로윈 후작은 공적으로는 섭정공의 검이었다. 실제 섭정공이 일으킨 반란의 첫 번째 공신이 바로 알렉스 로윈이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둘의 사이는 남에 가까울 정도였다. 서로에게 무관심했고, 서로가 죽어도 잘 죽었다고 웃어 줄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알렉스 로윈은 8년 전 이후로 섭정공을 윗사람으로 대접한 적이 없었다. 시그니티 또한 후작을 철저하게 자신의 말로 이용하기만 했다.

“부탁이 아니면 협박인가?”

시그니티는 일부러 코웃음 치며 되물었다.

“그래.”

“들어주지 않으면 날 죽이기라도 할 셈인가?”

“죽이진 않지. 그녀는 내가 살인하는 걸 싫어하니까.”

알렉스는 그가 로윈 백작을 살해했다는 게 이자벨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웬만하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싶었다. 이자벨이 그를 버리게 되는 일이 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으니까.

“……숨길 생각도 없나 보군.”

“어차피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그 여자를 보내서 이자벨을 흔들어 보려고 한 주제에.”

캐롤을 언급하는 알렉스의 말에 시그니티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낸 게 아니야.”

“아니면 그 권력에 미친 여자가 굳이 혼자 판단하고 움직였다고?”

“그만큼 네 옆에 있는 게 이자벨에게 안 좋다고 판단했겠지.”

서로 한 단어도 지지 않은 채 대치했다.

시그니티는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후작의 곁을 선택한 이자벨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자벨이니까. 그녀의 선택에 뭐라고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이자벨은 나를 선택했지. 당신이 아니라 나를.”

“그래서? 내가 너와 이자벨의 행복한 앞날이라도 꾸며 줘야 하는 건가? 지나치게 잔인한 소린데.”

이자벨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시그니티는 벅찼다.

“내가 당신 기분까지 신경 써야 하나?”

“부탁하는 입장이면 그렇겠지.”

알렉스는 승자의 입장에 서서 서늘하게 웃었다.

“이자벨이 와서 당신한테 부탁하면 더 비참할 텐데, 섭정공.”

이자벨은 현재 신분이 아예 없는 상태였다. 이자벨 로윈이라는 여자는 샬덴에 공녀로 끌려간 뒤 미하일에 의해 기록이 삭제되었으니까.

아를에서도, 샬덴에서도. 이자벨 로윈이라는 여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이자벨의 새로운 신분을 만들고 있었다. 그와 결혼할 수 있는 적당한 귀족 여성의 신분을.

사생아 출신이든 뭐든 알렉스는 공후작의 반열에 속한 귀족이었고, 그런 그의 짝이 될 신분을 만들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아를의 왕이나 다름없는 시그니티가 나서는 게 빨랐다.

“고작 신분 하나를 만드는 일이야.”

“……내가 끝까지 거절한다면 내게 이자벨을 보여 줄 생각은 있나?”

시그니티가 하는 질문에는 알렉스가 이자벨을 가둬 두고 있다는 뉘앙스가 묻어났다.

알렉스는 시그니티를 향해 비꼬듯 대답했다.

“난 이자벨을 가둬 두고 있지 않아. 만약 가둬둔 거라면, 그 여자가 이자벨을 볼 수 있었겠어?”

“문을 열어 둔다고 가둬 둔 게 아닌 건 아니지.”

“문을 열어 둬도 내 옆에 있겠다고 선택한 거지.”

시그니티는 알렉스의 말에 아무 대답도 없다가 고개를 저었다.

“비참하더라도 이자벨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나아.”

그는 알렉스를 더 이상 처남이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호칭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이자벨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쓸데없는 자존심이군.”

“자존심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이지.”

알렉스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승자처럼 웃었지만 문을 나서자마자 미소를 지웠다.

섭정공은 항상 알렉스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다 가지고 태어나서, 이자벨에게 모든 것을 약속해 줄 수 있는 남자.

알렉스는 스스로가 이자벨을 갖기 위해 이자벨을 무너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죄책감을 자극하고, 동정을 구걸하고, 어린아이처럼 매달려서 마침내 가졌다. 무너트리지 않고서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는 섭정공처럼, 그런 방식으로 사랑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주면서 묵묵히 뒷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알렉스는 하필 그의 사랑을 받게 된 이자벨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왜 나를 만나고, 내 눈에 띄어서 내 손에 잡혔을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겠지. 더 행복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런 가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데.

사랑해서 미안해요, 이자벨. 하지만 그래도 못 놓겠는데 어떻게 해요.

“알렉스!”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이자벨이 뛰어와 그의 품에 안겼다. 웃는 얼굴이 꾸며낸 건지 진심인 건지 판단하려 하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오늘…….”

뭔가 말하려는 이자벨의 허리를 붙잡고 놔주질 않자 이자벨이 어설프게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알렉스는 입을 맞추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속눈썹이 흔들리고, 억지로 웃고 있는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와 입을 맞출 때면 이자벨은 항상 긴장하고 있었다. 꺼리는 기색을 한껏 숨긴 채로.

“……알렉스, 왜?”

계속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어딘가 안도한 것 같은 이자벨이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냥 이자벨이 예뻐서요.”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작게 웃고 말았다. 머뭇거리는 손이 그의 뺨을 감쌌다.

“괜찮아?”

“저는 늘 괜찮죠. 이자벨은요?”

“나도 그래.”

이자벨은 까치발을 들고도 키가 닿지 않아 알렉스의 턱 끝에 살짝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들어가자.”

그의 품에서 벗어나 걸어 나가는 이자벨의 뒷모습에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자벨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도 이자벨은 오히려 알렉스의 팔을 도닥였다.

“오늘 힘든 일 있었어?”

그게 누이가 동생에게 보일 법한 애정이라도, 그것도 사랑이라서. 알렉스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하려고 애썼다.

이것조차 기적이었으니까.

“조금…….”

“그럼 누나가 뭘 해 줄까?”

순간 툭 튀어나온 말에 이자벨은 자기가 말하고도 굳었다. 알렉스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품 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알렉스, 그러니까…….”

“사랑해, 이자벨.”

듣지 못한 것처럼 속삭이는 알렉스의 말에 이자벨이 입을 다물었다.

“사랑해…….”

절박함과 체념을 동시에 품고 있는 고백이었다.

“나도 사랑해, 알렉스.”

알아. 당신이 날 사랑하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어떤 의미로?”

알렉스는 자기가 물어 놓고도 겁이 나 이자벨의 입을 막았다. 손바닥 아래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마. 이자벨.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 마.”

이자벨은 그 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 하나 없이, 가만히 그녀의 입술을 막은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손바닥 아래로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간지러운 감촉이었다. 희미할 만큼 작은 목소리를 그는 알아들었다.

‘절대 말하지 않을게. 사랑해.

알렉스는 손을 내렸다. 이내 이자벨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웃었다.

뺨을 붙잡은 이자벨의 손이 그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반쯤 수그린 채로 알렉스는 이자벨의 입맞춤을 받았다. 순진한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가벼운 스침이었다.

“괜찮아. 알렉스, 다 괜찮아.”

달래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어설프게 굳은 미소는 여전하면서 그를 바라보는 눈에는 여전히 애정이 가득 차 있었다.

착한 내 이자벨. 불쌍한 내 이자벨.

“사랑해.”

이자벨의 목소리는 늘 달았다. 알렉스는 이자벨이 그에게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건 꽤 잔인한 궁금증이었다.

정말 그저 동생을 향한 애정이라면, 그 애정으로 어디까지 봐줄까?

자꾸 가학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자벨은 뭐든 받아 줬으니까. 그러니까 이자벨이 문제였다. 이자벨은 너무 착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려 했다.

알렉스는 가끔 그녀를 시험하듯 몰아붙였다.

스스로 옷을 벗는 걸 가만히 쳐다보기도 했고, 일부러 그의 위에서 그의 성기를 아래에 품은 채 움직이게 만들기도 했다.

수치스러움 때문인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울 때도 있었지만, 울면서도 그의 말을 거부하진 않았다.

지금 당장 바닥에 엎어트린 채 뒤에서 짓누르면, 싫다고 할까? 아니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좋아할지도 모르지.

헐거워진 옷을 붙잡고 울면서도 괜찮다고 할까. 안 그래도 작은 아랫구멍에 자신의 것을 강제로 삼키게 하면 또 비명을 참는다고 눈만 감을까.

그렇게 한참을 괴롭히다 기절한 이자벨의 몸 위에 올라타 배 속이 전부 정액으로 찰 때까지 범하는 짓도 해 봤다. 이자벨은 아침에 그의 단단한 살덩어리를 품고, 흔들리는 몸에 강제로 눈을 떴을 때도 알렉스의 뺨에 키스하면서 웃었다.

모르지. 속으로는 울었을 수도. 어쩌다 이런 것에 잡아먹혔냐고 속으로는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알렉스는 이자벨의 허벅지를 느릿하게 문지르다가 관뒀다. 이자벨이 진심으로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사랑해, 알렉스.”

그를 사랑한다고.

알렉스는 그냥 가만히 이자벨을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착한 동생처럼. 머릿속이야 벌거벗은 살덩이들이 돌아다녀도 그는 이자벨을 엎어트리는 대신 뺨에 입을 맞췄다.

이자벨이 웃었다.

이자벨은 그녀를 허벅지에 앉히고도 전혀 무거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 알렉스를 신기하게 올려다봤다.

어릴 적에는 그녀가 주로 이렇게 알렉스를 안고 있었는데. 안고서 책도 읽어 주고, 노래도 불러 주고…….

그래. 사실 인정하자면 10살짜리 애한테 할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첫 만남에서의 알렉스는 늘 또래보다 작았다. 예닐곱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머리카락에 가린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때 이자벨은 어떤 때는 가식적이었고, 어떤 때는 냉정했으며, 어떤 때는 다정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자벨은 알렉스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내가 봐도 돼?”

살짝 훑어만 봐도 꽤 중요한 서류들인 것 같았다.

이자벨은 부대의 위치나 수에 대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는 숫자들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봐도 상관없어요.”

“기밀 아니야?”

알렉스는 이자벨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유출할 거예요?”

“아니.”

“그럼 무슨 상관이에요.”

그가 이자벨이 더 기대기 편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기밀이라고 했던 서류들이 더 잘 보였다. 이자벨은 태연한 알렉스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어차피 당신이 날 배신하면, 나한테 그 뒤는 없어요.”

알렉스는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봐도 상관없어요.”

“내 말은, 내가 실수로라도 기밀을 흘릴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어. 알렉스.”

변명하듯 속삭이는 이자벨의 말에 알렉스는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당신이 실수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귀엽겠네요.”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닌데.”

이자벨은 순간적으로 어릴 적에 알렉스를 훈계하듯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좀 더 조심하는 태도를 기를 필요가 있어, 알렉스.”

그녀는 알렉스의 어깨를 짚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한숨 섞인 웃음을 지으며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이자벨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가 그렇게 걱정이 돼요?”

“넌 너무 조심성이 없어. 매번 너 때문에 놀란단 말이야.”

이를테면 갑자기 샬덴의 땅에 그녀를 보러왔던 것처럼.

이자벨은 자신의 안위를 전혀 돌보지 않는 것 같은 알렉스가 걱정스러웠다.

“무모한 태도는 별로 좋지 못해.”

“내가 이렇게 무모하지 않았으면 당신이 잡혀는 줬겠어요?”

그의 말투는 가벼웠다. 그러나 이자벨은 진지하게 답했다.

“지금은 내가 옆에 있잖아. 그러니까 무모해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나 이거 알아요. 옛날에 이자벨이 그랬잖아요. 가족이 생기면 인간들은 젊은 날의 무모한 혈기를 잃고 노인처럼 변한다고 했던가?”

결혼을 유난히 하기 싫어했던 두 번째 생에서 한 말이었던가. 이자벨은 밝아진 알렉스의 안색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내가 이자벨을 책임져야 하니까 위험해지면 안 되는 거죠?”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그 작은 동작에도 웃었다.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신분을 만드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 천천히 해도 괜찮아.”

“난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알렉스는 세 번의 생 동안 이자벨을 만났지만, 한 번도 그녀의 옆자리를 정식으로 차지한 적이 없었다.

이자벨은 이제는 그녀의 죽은 남편들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했다. 별로 중요한 이들도, 심지어 자주 봤던 이들도 아니었으니까.

첫 번째 생에서는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그녀의 주변은 철저히 통제되어 있었다. 그 정도면 늘 옆에 존재했던 알렉스에게 한 번 눈길이라도 줄 법한데도 이자벨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알렉스는 결국 그를 버린 이자벨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그는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서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이자벨을 볼 때마다 현실감이 없었다.

특히 애정 가득한 시선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닿을 때면 더.

“정말 많이 기다렸잖아요, 나.”

세 번의 생을 오로지 그녀를 보고 살았던 남자.

“……알아.”

이자벨은 알렉스가 얼마나 자신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는 스스로도.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알렉스. 난 네가 뭘 하든 네 편이니까.”

“평생?”

“그래. 평생.”

알렉스의 눈이 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래놓고 죽음으로 도망가 버리면…….”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왜?”

단호하게 부정하는 이자벨의 목소리에 알렉스는 뒤이어 하려던 말을 삼켰다.

굳이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이자벨이 그의 품에서 애정을 담고 웃어 주는 이 상황을 좀 더 누리고 싶었기에.

알렉스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제는 죽음도 안전한 도피처가 아닌 걸 알잖아요. 이자벨. 난 다음 생에도 당신을 쫓아갈 텐데.’

* * *

한때 로윈 저택을 관리했던 집사 루크는 이제 영지로 물러난 전대 로윈 백작을 모시고 있었다.

로윈 영지는 수도와 달리 평화로웠다. 지나칠 정도로.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뭐라 하는 이가 없었다.

루크의 주인은 결국 수도에서 영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연무장에서 사는 게 일상이 되었다.

루크 입장에서는, 로윈 가문이 대대로 강골을 타고 났다고는 해도 온종일 수련만 하고 있는 주인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오늘도 새벽부터 연무장으로 향하려는 주인의 발걸음을 겨우 붙잡았다. 무슨 일이냐며 돌아보는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수도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누가?”

후작이 그에게 편지를 할 리가 없었다. 그가 이자벨을 결국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냈을 때부터 후작은 그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런 후작의 마음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순순히 작위를 물려주고 떠난 것 또한 그였다.

“저택에서 온 편지입니다.”

“후작이 보냈다고?”

그제야 그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공적인 일이 아니고서야 그에게 연락하지 않는 후작이었다. 그는 아를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딱 한 번 알렉스의 편지를 받았다. 그조차도 사적인 내용 하나 적혀 있지 않았고.

그는 처음으로 연무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뭔가 큰일이 아니고서야 후작이 연락할 리가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반란? 전쟁? 수도에서 무슨 일이 터진 거지?

가문의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는 얇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봉투 끝을 베어냈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그의 눈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편지는 긴 종이가 허무할 만큼 짧았다. 눈에 익은 필체는 자신을 밝히지도 않았다.

「제가 돌아왔어요.」

그가 지키지 못했던 딸의 편지였다.

순간 아득해졌다.

돌아오기를 바랐으면서도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그의 아들이 그 애를 찾아 헤매는 꼴이 점점 더 보기 힘들 정도로 오싹해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결국 도망치듯 영지로 내려오면서, 그는 자신이 정확히 뭘 바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애는 저택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가 돌아온 저택은 그 애가 생각하던 곳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어리광이 많던 동생과 무관심한 아버지, 성실한 하녀들, 그런 것들이 사라진 곳.

그는 차마 자기 아들에게 이자벨의 출생에 대해 말해 줄 수 없었다. 자기 누이라고 여기고 있는데도 이렇게 미쳐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 버린다면…….

그리고 이 편지는 그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음을 알려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자벨의 편지가 가문의 인장이 찍혀서 보내졌다.

그 애가 알렉스의 곁에 머문다는 뜻이었다.

그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가장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차곡차곡 모인 편지와 잡동사니들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그 안에 이자벨의 편지를 집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도망치듯 떠나왔던 수도로 다시 돌아갈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그 애한테 다정해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애는 그의 딸이었다.

* * *

유진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구슬프게 우는 말을 내려다봤다. 수도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필 거의 다 와서 말썽이라니.

“뭔가 계속 이상한 일만 벌어지는 것 같은데…….”

섭정공에게 샬덴의 반란에 대한 보고를 쓰면서도 유진은 어쩐지 자신의 여정이 계속 꼬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차를 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백작님.”

하필 말이 다리를 다쳤다. 마차를 끌 수 없을 테니 속도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우리 아들을 보는 걸 하늘이 방해하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체념이 묻어났다.

순간 그의 일행 뒤로 말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유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가 다가오는 마차의 문양을 확인하고 다시 찌푸려졌다.

로윈 가문의 문양. 젠장.

그쪽도 멈춰 있는 유진의 일행을 확인했는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선두에서 말을 타고 있던 기사가 유진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마차에 잠시 문제가 생겼지만 괜찮네.”

기사는 도움을 거부하는 유진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러나 로윈 가문의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에 기사가 다시 다가왔다.

“급하신 길이라면 저희 주인님께서 마차에 동석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백작님.”

“괜찮다고 전해 드리게. 그리 급한 길도 아니고.”

“하지만 저희 주인님께서…….”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살짝 짜증스럽게 반응하는 유진을 향해 기사는 망설이다 돌아섰다.

그러나 그건 예고였을 뿐이었다. 유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전대 로윈 백작을 보고 속으로 길게 탄식했다.

정말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따지자면 그의 조카사위였지만, 그 조카가 남편을 두고 애인과 사생아를 낳았다는 걸 아는 이상 좀 그렇지.

“……오랜만입니다. 작위를 물려받으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전대 로윈 백작은 정상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유진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후작과 닮은 얼굴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별말씀을요. 수도로 가시는 길입니까?”

“예. 백작께서도 수도로 가시는 길일 텐데, 함께 가시지요.”

“저는…….”

“샬덴에서 돌아오는 여정이 피곤하셨을 텐데, 좀 더 편하게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별로 좋지 못한 결과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유진은 그 분위기에 기가 질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넓디넓은 마차에서 지옥과도 같은 침묵을 견디고 있었다. 뭔가 그에게 용건이 있어서 붙잡았을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진은 땀이 나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차라리 걸어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위든 나이든 뭐 하나 딱히 밀릴 게 없는데도 유진은 로윈 백작을 처음 봤을 때부터 불편했다.

유진은 헤더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고, 로윈 백작이 헤더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어렴풋이 그가 헤더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부터 유진은 로윈 백작이 몹시 불편해졌다.

말수나 감정 표현이 적은 무뚝뚝한 귀족 중 하나라 여기면 좋았겠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았다.

애초에 헤더의 결혼은 그녀가 살짝 불리한 정략결혼이었다. 로윈 백작의 굳건한 의지가 없었다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유진은 이미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에게 굳이 청혼한 로윈 백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 아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 하면 그의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된다고 하면서 드러누울 텐데.

“……샬덴에서는 어땠습니까?”

지옥 같은 침묵 속에 떨어진 그의 질문에 유진은 순간 자신이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그는 가까스로 늦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괜찮았습니다. 갑자기 큰일이 터지긴 했지만 국가 사절로 갔던지라 신변에 별일은 없었지요.”

“태자가 즉위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자신의 결혼식 당일에.”

유진은 태자의 결혼 축하 사절로 가서 갑자기 즉위 축하 사절로 역할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그는 결혼식 후에 신부가 사라졌다는 뜬구름 같은 소리만 듣고 그대로 국경 밖으로 모셔졌다.

이자벨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단지 샬덴의 새로운 왕의 곁에 그녀가 없다는 것 말고는.

“샬덴의 새로운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유진은 혹시나 이자벨에 대한 얘기가 튀어나올까 봐 바싹 긴장한 채 상태였다.

아무튼 그의 앞에 있는 남자는 이자벨의 아버지였다. 이자벨을 십 년이 넘도록 딸로 키워온.

헤더 구드윈이 사생아를 낳았다는 건 구드윈 가문의 치부였다. 그래서 유진은 이자벨에 대한 얘기를 되도록 꺼내고 싶지 않았다.

“선왕보다는 온화한 청년인 것 같습니다. 아를에는 다행인 일이지요.”

“이번 반란에는 사람이 덜 죽었나 보군요.”

유진은 담담한 그의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샬덴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알려진 정보가 아니었다. 태자가 새로 즉위했다는 것만이 알려진 사실이었다.

영지에 내려간 뒤 수도의 정치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던 남자의 답변에 유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자의 즉위가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몇십 년은 더 살 것처럼 정정하던 샬덴의 왕이 죽었다는데, 그게 정당한 즉위겠습니까?”

유진은 ‘샬덴의 왕’을 발음할 때 담담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는 자기 부인이 사랑했던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유진은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이자벨의 태생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가 궁금한 건 어차피 반란에 대한 게 아닙니다. 백작, 이자벨의 소식을 아십니까?”

이렇게 직설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공녀로 끌려간 이의 소식을 제가 어떻게…….”

“태자가 반란을 일으킨 결혼식 날, 신부가 그 애였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유진은 이제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알렉스보다 정상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판단이 틀린 모양이었다.

“그 애, 어떻게 된 겁니까?”

“저도 모릅니다. 그 이후로 샬덴에서 신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소리만…….”

“로윈 후작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유진은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주 찰나였음에도 그는 그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있군요.”

“파티장에서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유진은 재빨리 대꾸했다. 어쩐지 로윈 저택에 감금되었을 때 묶여 있던 발목이 아픈 느낌이었다.

“백작. 나는 말을 돌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게 귀족들의 장기이자 취미가 아닌가.

유진은 그의 청회안이 까맣게 보일 정도로 가라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후작이 내 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압니까?”

이상한 질문이었다. 후작은 그의 친아들이었고, 이자벨은 그의 친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이자벨만을 자식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처음으로 웃었다.

“아는군.”

입가에 희미한 주름이 서렸지만, 전혀 온화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유진은 자신의 생각이 읽히는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후작을 볼 적에 수틀리면 누구든 물어뜯을 것 같은 짐승 같았다면, 전대 로윈 백작은 혈기를 노련함으로 메꾼 맹수 같았다.

“후작이 내 딸을 데려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내 딸이 후작한테 끌려간 것 같습니까?”

예의를 갖춘 존대였지만, 차라리 반말이 나을 것 같았다. 유진은 기세에 짓눌린 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제가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추측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의 손에는 검 하나 들려 있지 않았지만, 그가 원한다면 유진 정도는 맨손으로 목을 비틀 수 있을 것이다.

구드윈 백작 가문은 무가(武家)와 거리가 멀었고, 로윈 가문은 대대로 군부대신을 맡았던 가문이었다.

적진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에 유진은 바닥에 드러누워서라도 이 마차에 타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전 정말 모릅니다.”

“압니다. 그러니까 추측이라도 해 보라는 것 아닙니까.”

답을 듣지 않고서는 물러나지 않을 기색이었다.

“이자벨은…….”

로윈 후작과 똑같이 생긴 눈이 가늘어졌다. 유진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

“내 딸과 만난 적이 있군요, 백작. 어릴 적에 공녀로 끌려간 아이인데 말입니다.”

어떻게 만났을까, 대체.

중얼거리는 말에 유진은 아예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말이나 행동만으로 그는 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만 같았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할 대화가 꽤 많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진은 그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아까의 지옥 같던 침묵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지루하세요, 아가씨?”

“약간은.”

이자벨은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알렉스가 없을 때는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이제 와서 가문을 관리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산책이라도 나가실래요?”

“별채의 하녀들이 보면 어떻게 하려고.”

본채의 하녀들이야 철저하게 로윈 가문에 복속한 가문의 일원들이었지만, 별채는 아니었다. 이자벨은 괜한 소문이 도는 걸 피하고 싶었다.

“모자를 쓰시면 괜찮지 않을까요?”

“본채에 머무르는 묘령의 여인이 있다는 소문이 도는 것도 썩 좋지는 않을 것 같은데…….”

샐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아가씨는 너무 똑똑해서 문제였다.

“그런 거 다 신경 쓰시다 보면 평생 산책 한 번 못하실 텐데요.”

“알렉스는 좋아하겠네.”

꽤 냉소적인 말이었다. 샐리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도련님이 미우세요?”

“아니. 내가 걔를 어떻게 미워해.”

샐리는 한숨만 내쉬었다.

“좋아하면서 미워할 수도 있는 거죠.”

“난 알렉스를 안 미워한다니까.”

“네네. 그러시겠죠.”

퍽이나 그렇겠다는 뉘앙스가 담긴 샐리의 말에 이자벨이 샐리를 살짝 흘겨봤다.

“진짜야.”

“그럼 왜 그렇게 도련님 눈치를 보세요?”

“난 원래 알렉스 눈치 많이 봤어.”

샐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대꾸했다.

“도련님이 14살이 될 때까지 여장을 시키신 분이 아가씨 아니셨나요?”

“그거야 뭐…… 알렉스가 싫은 티를 내진 않았잖아.”

“많이 내셨어요. 그냥 아가씨께서 귀여워해 주시니 참으신 거죠.”

이자벨은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지금은 그때랑 다르잖아.”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였다. 그냥 알렉스를 마음 놓고 예뻐해 주기만 했던 그때가 꿈같았다.

“그게 불편하세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곧 적응하겠지.”

샐리는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대신 꼭 그녀의 심정을 아는 것처럼 물었다.

“불편한 걸 참는 것에 적응하신다는 건가요?”

“…….”

“저는 아가씨께서 뭐든 ‘참는 게’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난 이 저택이 좋아, 샐리.”

샐리가 원하던 것과는 다른 답변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이 답이 최선이었다.

“이 저택도, 너도, 그리고 알렉스 옆에 있는 것도 좋아. 난 좋아서 여기에 있는 거야, 샐리.”

“도련님이 아가씨를 사랑하는 건요?”

샐리는 이자벨이 돌아온 후로 예전처럼 이자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때때로 이자벨은 아주 깐깐한 언니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도련님이 동생으로만 보여서 힘드신 건가요?”

“동생으로만 보이진 않아.”

세 번의 생과 감정들이 뒤섞여서 이제는 딱히 가족애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첫 번째 생에서는 알렉스와 자식까지 낳았는데 무슨.

아니, 그 첫 번째 생이 문제였다. 애증이 범벅된 그 생애의 기억이 뇌리에 너무 깊게 박혔다.

알렉스 또한 그녀가 오로지 그를 동생으로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다른 문제였다.

이자벨은 알렉스를 다정하게 품어 주고 싶었고 아껴 주고 사랑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연애 감정은 오로지 첫 번째 생에 국한되었다.

이자벨은 첫 번째 생에서 알렉스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가 스스로를 죽이고 싶었다. 알렉스가 미웠고 불쌍했고,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졌으며 그의 손길에 흥분하면서 동시에 소름이 끼쳤다.

이자벨의 기억은 마치 방어 기제처럼 작동했다. 알렉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가 조금이라도 연인과도 같은 행동을 할 때마다 그녀는 첫 번째 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이번 생의 다정한 남매였던 시간을 떠올리며 첫 번째 생의 애증을 지워냈다.

내가 사랑하는 알렉스야. 내 착하고 예쁜 동생 알렉스. 소름 끼치지 마. 미워하면 안 돼. 그는 내가 사랑하는 알렉스잖아.

캐롤은 그녀에게 한 번이라도 알렉스에게 설레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자벨은 그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설렘보다 더 큰 오싹함이 늘 먼저 육신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이자벨이 알렉스에게 다정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이번 생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되씹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남매였던 때의 기억을.

다정하게 알렉스를 바라보면서, 연인처럼 대할 수 있을까?

알렉스를 조금이라도 연인처럼 바라보려고 하면, 첫 번째 생의 진득한 애증이 뇌리를 지배했다.

애정과 다정함이 공존할 수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자벨에게는 이게 현실이었다.

“내가 착한 누나랑 못된 여자 중 하나밖에 못 해서 그래.”

샐리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이자벨 또한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둘 다는 안 되나 봐.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그래도 못된 여자보다는 착한 누나가 더 낫지 않아?”

알렉스는 그녀가 다가갈 때마다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자벨은 그 얼굴이 좋았다. 포기할 수 없을 만큼.

“……그건 도련님께 여쭤보셔야죠, 아가씨.”

이자벨은 입을 다물었다. 샐리는 늘 옳은 말을 했다.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잖아.”

그녀가 다정하게 대해 주길 원한다면, 누이로서의 이자벨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가씨. 두 분이 해결해야 할 문제잖아요. 혼자서 고민한다고 해결되진 않아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알렉스랑 닿는 것도 익숙해질 거고…….”

“그건 참는 거잖아요. 아가씨.

“적응하는 거지.”

샐리가 이자벨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자벨은 눈을 피했다.

“도련님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실까요?”

“……알겠지. 그 애는 똑똑하니까.”

“그럼 도련님도 상처받으실 거예요. 아가씨도 도련님이 상처받는 걸 원하진 않잖아요.”

“어느 쪽이든 상처받을 거야. 차라리 겉으로라도 다정한 게 더 낫지 않아?”

알렉스가 원하는 대로 사랑해 주는 대신 그의 행동이 소름 끼친다고 느끼는 것. 그를 가족으로서만 사랑해 주는 대신 다정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것. 그녀는 후자가 낫다고 생각했다.

“먼저 얘기해 볼 수도 있잖아요, 아가씨.”

샐리는 이자벨의 손을 붙잡았다. 충실한 하녀는 이자벨의 허락 없이 한 번도 그녀의 몸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이게 처음이었다.

이자벨은 조금씩 주름이 잡히기 시작하는 샐리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도련님은 백작님이 아니에요.”

샐리는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그녀에게 속삭였다.

“두 분은 닮으셨지만 다른 사람이란 걸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아주 어릴 적에는 이자벨도 로윈 백작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가족의 애정을 갈구했던 때도.

수많은 기다림과 내뱉었지만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진 말들.

이자벨은 홀로 결정하고 움직이는 것에 적응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몇 번의 시련과 선택의 기로에서 이자벨은 결코 타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듣는 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말하는 법도, 듣는 법도,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속내를 섞어가는 행위도 이자벨은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이자벨은 알렉스가 울어도, 시그니티가 매달려도, 백작이 그녀를 가둬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샬덴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게 옳은 판단이었으니까. 이자벨은 홀로 그렇게 결정했다.

“도련님을 사랑하시잖아요. 계속 이렇게 있고 싶진 않으시잖아요. 도련님께 얘기하세요, 아가씨. 아가씨를 위해서도.”

“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샐리.”

“도련님께 여쭤보셨어요?”

“내 판단이 틀렸다는 거야?”

이자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날카로운 질문과 달리 그녀의 모습은 처연해 보였다.

샐리는 이자벨도, 알렉스도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어른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홀로 자라버린 어린아이들.

“도련님의 최선은 다른 선택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아가씨는 도련님이 아니잖아요.”

샐리는 이자벨이 했던 말들을 전부 기억했다.

이자벨은 자기가 샬덴으로 떠나는 게 모두에게 좋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틀렸다. 전쟁이 터졌으니까.

그녀는 알렉스가 그녀를 잊을 거라고 했지만, 그건 틀렸다. 결국 알렉스는 이자벨을 되찾아왔으니까.

“도련님의 선택은 늘 아가씨와 함께하는 쪽이었어요. 아가씨는 늘 그걸 부정하셨고.”

이자벨은 어릴 때부터 웬만한 어른들보다 똑똑했지만, 그게 그녀가 일찍 어른이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도 있어요, 아가씨.”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빛이 바랜다.

열정적으로 타올랐던 사랑도, 한때는 목숨을 걸었던 충성도, 미치도록 갈망했던 권력도. 영원할 것 같던 욕망도.

이자벨은 그렇게 배웠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그러니까 더 영리하게 굴어야 해.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시간을 믿지 마세요, 아가씨. 가끔은 미련하게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까.”

“……알아.”

세 번의 생을 걸고 자기 마음을 증명한 알렉스처럼. 일 년도 함께 있지 못했던 첫사랑의 딸을 자기 자식처럼 키운 로윈 백작처럼. 평생을 걸었던 순간의 선택을 후회한 미하일처럼.

가끔은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을, 이자벨은 이제 알았다.

“하지만…….”

이자벨은 샐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상처받으면 어떻게 해?”

알렉스가 그녀를 불신하는 건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생에서 쌓인 불신을 해소하기에는, 연인 간에 할 법한 행동만 하면 굳어 버리는 이자벨인데 어떻게 신뢰를 준단 말인가.

그녀가 그를 사랑해서 떠나지 않는다는 걸.

알렉스는 이자벨이 자기를 동생이기에 사랑하는 거라면,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생기면 자기를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그녀의 주위를 차단하고 있었고. 이자벨 또한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내가 알렉스 손을 쳐내면, 포옹을 거부하면, 웃지 않으면…….”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걔가 상처받으면 어떻게 해? 버림받았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죽, 죽어 버리면…….”

이자벨은 두 번째 생에서 알렉스의 죽음이 그의 의도대로 일어난 일인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날을 기억했다.

창 아래로 추락하는 알렉스를. 마치 알렉스가 첫 번째 생에서 이자벨이 죽었던 날을 기억하는 것처럼.

둘은 서로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고, 서로 극복하지 못했다.

이자벨은 알렉스에게 연인처럼 입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가 그녀의 눈에 드러난 옅은 자기 혐오를 알아차린다면?

첫 번째 생의 잔재로 남아 있는 그 감정들을 알렉스가 발견하면 상처 입겠지.

이자벨은 철저하게 자신을 세뇌시켰다. 알렉스에게는 늘 애정만 섞인 태도를 보일 수 있게…… 알렉스에게 어린 날의 모습을 덧씌웠다.

“아가씨!”

샐리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이자벨의 어깨를 붙잡았다.

“난 못해…….”

첫 번째 생의 애증이 아직 그녀의 속에 남아 있다고. 그러니까, 그를 증오하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그 감정이 찌꺼기처럼 남아 그녀의 속 어딘가에 들러붙어 있다고. 사랑을 꺼내오려 하면 그 감정들이 벌레처럼 달라붙어서 차마 꺼내올 수가 없다고, 말하지 못해.

“난 그 애를 사랑해. 그런데…….”

이자벨의 목소리는 가까이 붙어 있는 샐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조금은 소름 끼쳐.”

그녀는 그 말을 하고 스스로도 놀라 입을 꽉 다물었다.

“아가씨…….”

“아냐. 넌 아무 말도 못 들은 거야. 샐리. 그렇지?”

이자벨은 황급히 샐리의 어깨를 붙잡고 속달거렸다.

“난 그 애를 사랑해. 알렉스는 예쁘고, 착하고…….”

다섯 살 아이를 묘사하는 것 같은 칭찬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누가 들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에 대한 칭찬이.

그러나 알렉스 로윈은 이제 다섯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

샐리는 그제야 이자벨을 이해했다.

그녀의 아가씨는 일말의 부정적인 감정조차 도련님에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집착과 소름 끼치는 행동들을 아가씨는 외면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가씨는 여전히 도련님을 ‘그 애’라고 불렀다. 착하고 귀여운, 오로지 애정만 줄 수 있었던 어린 도련님을 불렀던 때처럼. 그러면 사랑만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듣고 있어, 샐리? 나는 알렉스를 사랑한다고…….”

샐리는 이자벨의 떨리는 손을 붙잡아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듣고 있어요, 아가씨.”

불쌍한 우리 아가씨.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데 누가 우리 아가씨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 * *

밤과 새벽의 경계선에서 샐리는 몰래 하품했다. 그녀의 품에는 작은 아가씨가 안겨 있었다.

“나 혼자 갈 수 있따.”

네 살짜리 아이의 혀 짧은 발음에 샐리는 달래듯 속삭였다.

“어둡잖아요, 아가씨. 도착하면 내려드릴게요.”

어린 아가씨는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졸음 섞인 눈을 어떻게든 뜨려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가주의 침실 문 앞에 도착하자, 샐리는 느리게 아가씨를 내려놓았다. 문 앞을 지키는 기사는 둘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기심 어린 아가씨의 눈이 기사를 힐끔힐끔 돌아봤지만 기사는 동상처럼 앞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샐리는 아가씨의 눈이 울 것처럼 변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몸을 수그렸다.

“아가씨. 졸리지 않으세요? 들어가서 잘까요?”

이제 막 걸어 다닐 수 있는 아이 주제에 옴팡지게 다문 입으로 아가씨는 고개를 저었다.

“쌜리나 자러 가.”

샐리는 한숨을 쉬고 아가씨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성인들도 깨어 있기 힘든 시간이었다. 샐리는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이자벨이 걱정되었다.

“아가씨. 지금이라도 자러 가시는 게…….”

“싫어.”

샐리는 한숨을 내쉬며 차라리 로윈 백작이 빨리 등장하기를 바랐다. 그럴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어린아이에게는 꽤 긴 시간이었음에도 아가씨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아가씨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 안색의 로윈 백작의 시선이 이자벨에게로 돌아갔다. 도무지 왜 아이가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백작을 본 이자벨이 짧은 손으로 백작의 바지 자락을 잡았다.

“아빠…….”

백작은 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이자벨을 돌아보진 않았다. 그는 단지 샐리를 향해 명령했다.

“데려가.”

샐리는 거의 울 것 같은 이자벨을 황급히 안아 들었다.

로윈 백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샐리는 자기 품에 안긴 이자벨이 소리도 못 내고 우는 걸 달래면서 속삭였다.

“백작님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아가씨. 아침이잖아요. 다음에는 다르실 거예요.”

“정말?”

히끅거리는 울음 사이로 희미한 이자벨의 물음이 되돌아왔다.

“그럼요.”

한 달 만에 겨우 저택으로 돌아온 백작이었다.

새벽이나 늦은 밤이 아니면 볼 수도 없는 백작을 아가씨가 어떻게 해서든 보려고 애쓴다는 걸 그녀는 알았다. 그래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백작님은 아가씨를 사랑하시는걸요. 분명 다음번에는 안아 주실 거예요.”

백작이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 * *

중후한 남자 하나가 로윈 저택을 방문했다. 손님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 본채의 문이 오랜만에 열렸다.

“집사님, 어쩐 일로…….”

신디아는 소식을 듣고 바로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로윈 저택을 관리하던 루크의 등장에 신디아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지 의문을 품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꼿꼿이 허리를 세운 루크는 몇 년 전과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는 돌려 말하는 대신 직설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주인님께 아가씨께서 보내신 편지가 왔습니다, 신디아.”

루크는 신디아의 긴장한 얼굴만으로도 진실을 눈치챘다.

“아가씨께서 이 저택에 계십니까?”

루크는 예리하게 그녀가 긴장하고 있는 이유를 짚었다. 신디아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루크의 앞에서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집사님이 제 입장이라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나요?”

“도련님께서 주인님께 그 사실을 함구하라 하셨습니까?”

“아뇨. 하지만 어떤 말이든 쉽게 옮겨서는 안 된다고 절 가르치신 건 집사님이시죠.”

루크는 그를 경계하는 신디아가 꽤 잘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련님의 이름으로 아가씨의 편지가 왔습니다. 애초에 알리실 작정이었던 것 같은데, 아닙니까?”

“추측은 저희한테 허용되는 일이 아니죠, 집사님. 도련님은 제게 집사님의 질문에 대답해도 된다고 명령하지 않으셨답니다.”

하녀장으로서 훌륭한 태도였다.

루크는 쉽게 풀리지 않은 일에 결국 가져왔던 물건을 꺼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께 드리는 답장입니다.”

신디아는 침묵과 함께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이 편지를 전해 드리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이자벨이 이 저택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말이었으니까.

아마 이자벨의 답장 또한 이전과 똑같이 로윈 후작의 이름으로 보내질 것이다.

루크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답장을 받을 때까지 잠시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본채에는 어떤 손님도 받지 않아요, 집사님. 하지만 별채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신디아.”

신디아는 하녀 하나를 시켜 루크를 안내하게 만들었다.

거의 평생을 돌보아 온 저택에서 안내를 받게 된 루크는 꽤 새로운 기분이었다.

본채부터 별채까지, 루크가 모르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하녀는 마치 루크가 이 저택에 처음 온 손님인 것처럼 그를 안내했다.

마침내 별채의 손님방에 도착한 그는 신디아의 의도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더 이상 이 저택의 주인이 그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로윈 저택의 주인은 알렉스 로윈이었다. 루크가 저택의 일원이 아닌 손님인 것처럼. 그건 루크에게는 좀 씁쓸한 일이었다.

별채는 본채와 다르게 신축이 자주 되는 건물이었다. 전통과 명분에 목을 매는 가문의 이들이 지키는 것은 본채였지 별채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전대 로윈 백작의 아버지는 별채를 신축하면서 혹시 모를 대피로를 하나 마련해 뒀다. 가주의 침실과 별채를 연결하는 비밀 통로를.

위급한 순간에 대피하기 위해 만든 곳이 이렇게 쓰일 줄은 아마 만든 이도 몰랐을 것이라고, 루크는 생각했다.

루크는 통로의 끝에 도달해 신중하게 문 너머의 기척을 살폈다.

어차피 낮이기에 침실에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도 한참을 탐색한 루크는 문을 열었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침실이었다. 밀짚색의 부드러운 숄 하나가 침대 위에 걸쳐 있다는 것을 빼고는.

루크는 직감적으로 저 숄이 이자벨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시간이 별로 없음을 알았다.

이전과 고용인들의 활동 시간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 때문에 루크는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 그럴 시간이었으니까.

루크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고 목적하던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루크는 문을 한 뼘쯤 열었을 때 들리는 소리에 숨을 죽였다.

소리 죽여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달래는 하녀의 목소리. 겨우 문틈 한 뼘 사이로 들었지만, 루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아왔던 이자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샐리의 등뿐이었다.

샐리의 등 너머로 설핏 스치는 금발만 간신히 보일 만큼, 아가씨는 말라 있었다.

루크는 문득, 마지막에 보았던 열일곱의 아가씨가 생각이 났다. 샬덴에 가지 않겠다며 스스로 식사를 끊었던 소녀가.

아가씨는 이상하게 그 순간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마르고, 창백하고…….

“알아요, 아가씨. 더 말하지 마세요.”

샐리의 달래는 목소리에 흐느끼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지만, 그는 아가씨가 계속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샐리의 말에 그는 아가씨가 괜찮지 않다고 생각했다.

* * *

유진은 끙끙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막 들어온 청년은 유진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아버지, 미쳤어?”

“아들…….”

에드거는 유진이 별 쓸데없는 거로 저러고 있는 것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또 뭐로 저러지.

“저택에 손님이 왔어.”

“누군데 그래? 악마라도 왔어?”

“전대 로윈 백작…….”

“……갑자기?”

유진은 그의 인생에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조카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걔가 조금만 덜 예뻤어도, 아니, 조금만 더 살았어도…….

“아무튼, 그러니까 당분간 영지에 좀 내려가 있어.”

“내가 왜? 무슨 일인데?”

“아빠도 아직 모르겠다…….”

“대체 무슨 일인데? 큰일이야?”

유진과 에드거는 부자지간인데도 별로 닮지 않았다. 겉부터 속까지 전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한 구드윈 백작 가문에서 에드거의 곰 같은 인상은 참 눈에 띄었다. 게다가 어딘가 영악한 이들 사이에서 곰처럼 순박한 성격인 것도.

유진은 자기 핏줄에서 어쩌다 이렇게 아기 곰같이 귀여운 게 나왔는지 궁금했다.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은데, 어느 정도일지는 아빠도 모르겠으니까 하는 소리야. 영지에서 한 달 정도 쉬고 있어. 다 끝난 것 같으면 아빠가 부를게.”

이미 스무 살은 훌쩍 넘은 아들을 아이처럼 취급하는 유진이었다. 그리고 그 취급에 익숙해진 에드거는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더 터질 일이 있어? 왜, 후작이 반란이라도 일으킨대?”

“입 조심해야지, 에드거. 너 그러다가 잡혀간다.”

“애 취급을 하든가 어른 취급을 하든가 하나만 해, 아버지.”

“하나만 하기에는 우리 아들이 너무 귀여워서.”

에드거는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미 키가 아버지인 유진보다 커진 지 오래였다.

“됐고. 전대 로윈 백작은 왜 올라온 건데?”

“자식을 보러.”

“후작을? 하긴, 태생이라는 약점이 큰 데도 작위를 물려준 걸 보면 사이가 좋긴 한가 보네.”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마음 편한 착각일세.

“사이 나빠, 그 집.”

“후작이랑 싸우려고 올라온 거야?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전대 로윈 백작이 어떤 사람이었든지 현재 로윈 후작이 가지고 있는 악명이 너무 높았다.

에드거에게 전대 로윈 백작은 이미 옛사람이었다.

특기가 살인이고 취미가 전쟁이라는 소문이 떠도는 잔인한 인간하고는 아무도 엮이고 싶지 않아 했다.

“전대 로윈 백작이 뭐 새로 또 아들이라도 봤대? 후작과 붙으려고 오는 거 보면……. 아니, 근데 그게 우리 가문이랑 무슨 상관이야?”

유진은 혼자 줄줄 추론을 늘어놓고 있는 아들을 한심함과 귀여움을 섞어 쳐다봤다. 우리 아들은 왜 이렇게 가식적이지를 못할까. 귀엽게.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정신없이 굴면 안 된다, 아들.”

“내가 아버지야? 별걱정을 다 하네.”

“아빠는 그래도 속물이기라도 하지. 넌 속까지 순진해서는……. 아무튼 내려가 있어. 나중에 알려 줄게.”

“그냥 지금 알려 줘. 나도 이제 성인이야.”

성인은 무슨. 유진은 코웃음 치며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에드거는 그 손짓에 발끈해 소리쳤다.

“아버지!”

“이번 한 번만 아빠 말 들어.”

유진은 제법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에드거는 장난스럽던 유진의 진지한 태도에 멈칫했다.

“……아버지는 괜찮은 거야?”

“그래. 나까지 불똥이 튈 일은 없지.”

내가 그럴 급도 아니고. 유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알았어.”

“내일 바로 내려갈 수 있게 준비하라고 할게.”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유진은 다정함을 담고 그의 아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냥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알았어. 조심해, 아버지.”

반발하던 것에 비해 쉽게 받아들인 아들이 나가자 유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에드거의 말대로 차라리 로윈 가문 내에서의 다툼이면 좋았다. 그럼 유진이 이렇게 괴로워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왜 헤더는 그렇게 예뻐서 하필이면 백작도 꼬시고, 샬덴의 왕도 꼬셨을까. 그리고 왜 이자벨은 헤더의 미모를 물려받아서 이 꼴이 났을까. 왜 로윈 후작도, 섭정공도 이자벨에게 반해서 그가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 걸까.

미인의 숙명인가?

그녀와 비슷하게 생긴 그는 그의 부인한테도 인기가 없었는데. 젠장.

전대 로윈 백작이 섭정공을 알현하러 갔다. 그리고 로윈 후작에게 자신이 수도로 돌아온 사실을 숨겼다. 그리고 아마…… 로윈 후작의 곁에 이자벨이 있는 것 같았다.

유진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별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섭정공과 로윈 후작이 맞붙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면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내전이었다.

유진은 자신의 추측이 그저 망상이기를 빌었다. 그리고 조속히 전대 로윈 백작이 구드윈 저택을 떠나기를 바랐다.

샬덴과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내전을 맞이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야 간신히 작위를 물려받아서 아들에게 물려줄 가문을 알뜰살뜰 가꾸려는 찰나에 이 무슨 천재지변 같은……. 심지어 그 천재지변의 원인이 바로 그의 조카딸이었다.

“조금만 매력이 없게 태어나지 그랬니, 이자벨…….”

유진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문제는 이자벨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인간들에게 있었지만, 그중에 유진이 어찌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이자벨뿐이었다.

* * *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로윈 저택 안은 평온했다. 샐리는 잠든 이자벨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몸을 일으켰다.

꿈도 꾸지 않고 자기를 빌며 샐리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도련님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이자벨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늘 달려오던 이자벨이 보이지 않자 알렉스는 눈을 찌푸렸다.

“아가씨께서는 주무시고 계세요.”

“이 시간에?”

알렉스는 이자벨이 저택으로 돌아온 이후 일이 있어도 무조건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다. 설사 이자벨을 품에 안고 일을 하더라도 밖에서 오래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깨울까요?”

아직 해가 지기 한참 전이었다.

샐리는 울다 지쳐 잠든 이자벨을 전혀 깨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어디에 있지?”

당연히 이렇게 대답할 도련님을 알았으니까.

“방에 계세요.”

알렉스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샐리는 그 등을 따라가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자리를 떴다.

이자벨의 방은 그녀가 돌아오고 나서도 많이 변하지 않았다. 가구를 새로 들이거나 하는 일이 눈에 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여전히 열일곱 살 때 쓰던 가구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원래부터 화려한 것보다는 고풍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취향 덕분에 유행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은 주지 않았다.

대신 십 년도 버려두지 않은 방은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견딘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의자에 기댄 채 잠든 이자벨처럼.

사랑스러운 외향의 젊은 여자는 오랜 세월을 견딘 것 같은 피로를 어깨 위에 걸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 모순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고요한 이자벨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그녀가 무슨 꿈을 꾸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악몽이면 그가 나올 테니, 악몽을 꾸길 빌어야 하나.

알렉스는 이자벨의 악몽이 그들의 첫 번째 생임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이자벨을 깨우지 않은 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녀가 스스로 눈을 뜨고 그를 부를 때까지.

“……알렉스?”

이자벨이 잠에서 덜 깬 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기다렸어? 깨우지…….”

“방금 왔어요.”

사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그에게는 찰나와 같게 느껴졌었다.

“거짓말. 벌써 해도 졌는데.”

“맞아요. 거짓말이에요. 사실 아까부터 당신이 깨어나기만 기다렸어요.”

차분한 알렉스의 목소리는 노랫소리 같았다. 이자벨은 지금 이 상황이 마치 꿈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왜 안 깨웠어?”

“깨울 이유가 없잖아요.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날 텐데.”

알렉스는 이자벨의 팔을 잡고 그녀를 일으켰다. 잠에 취해 있던 이자벨은 잠시 비틀거렸지만 금방 균형을 잡았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잖아.”

“괜찮아요. 나 기다리는 건 잘하잖아요.”

알렉스의 그 말에 이자벨이 잠에서 완전히 깬 것 같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저녁은 먹었어?”

그는 이자벨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대답을 했다.

“……내가 말을 잘했으면 좋겠어. 아니면 당신 생각을 읽을 수 있거나.”

알렉스는 섭정공을 생각했다. 이자벨은 그와의 대화에 대해 늘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이자벨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그 자신감 때문일까.

알렉스는 섭정공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그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이렇게 긴장하면 어떻게 해요, 이자벨.”

“왜…… 그런 말을 해, 알렉스.”

그를 달래듯 뻗어지는 손을 잡자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내가 손잡는 게 싫어요?”

이자벨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오기까지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알렉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그럼 내가 싫은가?”

거침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이자벨은 놀라 그를 불렀다.

“알렉스!”

알렉스는 놀라 커진 이자벨의 눈을 내려다봤다. 청명한 녹색 눈 안에 그가 어둡게 비쳤다.

“절대 아니야.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해.”

진심인 것처럼, 당혹스러움을 담고 떨리는 눈에 알렉스는 붙잡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내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이자벨. 당신을 내가 억지로 붙잡아 두고 있다고.”

“그 사람들이 몰라서 그래. 아닌 걸 너랑 내가 알잖아.”

“정말 아니야?”

알렉스는 이자벨에게는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거친 말투로 물었다.

“내가 당신을 강제로 붙잡아 두고 있는 게 아니냐고!”

이자벨은 알렉스가 갑자기 감정을 터트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늘 차분하게 그녀를 짓누르던 알렉스답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로 알렉스에게 속삭였다.

“나는 널 사랑해서 네 옆에 있는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알렉스.”

“사랑하는 동생이 인질로 잡혀서가 아니라?”

알렉스는 마치 자신이 이자벨이 사랑했던 동생이 아니었던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서 말하고 있었다.

“도저히 사랑할 수는 없는 남자가, 당신이 사랑하는 동생을 인질로 잡고 사랑해 달라고 하고 있어서…….”

이자벨이 과거의 알렉스와 현재의 알렉스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걸 아는 것처럼.

“그만해, 알렉스 로윈.”

알렉스는 정곡을 찔린 듯 미소가 사라진 이자벨을 보고 끔찍함을 느꼈다.

“왜?”

그녀는 알렉스의 반문에 억지로 웃었다. 그의 눈에는 그게 미소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 좋았잖아, 알렉스. 갑자기 왜 그래.”

이자벨은 아슬아슬 위태롭게 이어지던 평화를 왜 굳이 깨느냐고 물었다.

“넌 날 사랑하고, 난 널 사랑해. 우린 곧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들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평범한 삶을 살게 될 텐데.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살게 될 텐데. 너도 원했잖아, 알렉스.”

알렉스는 이자벨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침묵에 그를 설득하려는 듯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알렉스가 한발 더 빨랐다. 다가와 안기려는 이자벨의 앞에 알렉스는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알렉스, 이게 무슨……!”

당황하는 이자벨의 발치에 고개를 처박은 알렉스는 절박하게 속삭였다.

“이자벨…….”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이 절실한 부름이었다.

“정말 무슨 일 있어? 왜…….”

“내가…….”

이자벨은 죄인처럼 엎드린 알렉스를 일으키기 위해 몸을 수그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알렉스의 말에 이자벨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었다.

“……백작을 또 죽여도 된다고 해 줘요.”

첫 번째 생의 일그러짐이 이자벨의 뇌리를 지배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때와 똑같이 대답했다.

“네 아버지야…….”

“그 남자가 당신을 내게서 빼앗아가려고 해, 이자벨. 당신도 알잖아.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

알렉스의 목소리는 섬뜩할 만큼 삐걱거리고 있었다.

“난 그 남자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가 없다고!”

이자벨은 알렉스가 이렇게 무너진 채로 날 것의 분노를 터트리는 걸 처음 목격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만 일으킨 알렉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의 까맣게 열린 동공에 두려움만 가득했다.

“내가 그 남자를 다시 살해한다고 해도, 날 버리지 마. 제발.”

알렉스는 이자벨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게 해 달라고.

“그 남자를 죽이게 해 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