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2)

10장. 꿈과 현실의 경계.

이자벨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게일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아니…….”

이자벨은 머리카락을 잡아 뜯을 것처럼 잡아당겼다. 윤기를 잃어 가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 아래서 끊어졌다.

“무슨 악몽인데, 잠도 못 잡니까?”

“…….”

이자벨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의자에 묻었다. 그녀는 꿈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더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되는 꿈이 점점 더 무서워졌다. 한 번도 기억 속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마치 그녀가 잊고 있었을 뿐이었던 일을 보여 주는 것처럼 생생했다.

“말하기 어려운 꿈입니까?”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이자벨도, 게일도 그게 거짓말인 걸 알았다. 하지만 이자벨은 고개를 돌렸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내 기억도 건드린 적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게일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의 인생에서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꿈이 지나치게 현실 같습니까?”

이자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답변을 유도하려고 하지 말아요. 안 통하니까.”

“그건 안타깝네요.”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바람이 뺨을 스쳤다. 이자벨은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수면제를 처방받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웬만한 건 이제 내성이 생겨서 안 통하고, 독한 건…… 글쎄요. 그 작자가 허락할까.”

“폐하께서 걱정이 심하십니다. 며칠째 폐하께서도 제대로 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이자벨은 게일의 변명 같은 말에 코웃음 쳤다.

“게일, 당신도 그 작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면서 굳이 변명하는 이유가 뭐예요?”

게일은 그 말에 웃었다. 그 미소가 미하일을 닮았다.

“습관이죠.”

생각해 보면 처음 봤을 때와 이미지가 너무 달라졌다. 묘하게 능글맞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와 둘이 있을 때 게일은 차분한 편에 속했다.

여전히 쾌활하고 명랑한 청년처럼 웃고 말하고 행동했지만, 솔직히 지금 와서는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이십여 년의 시간 동안 습관처럼 학습한 행동이 이제는 미하일의 것인지 원래 자신의 것인지조차 잘 구분하지 못했다.

“내 앞에서는 굳이 그렇게 굴 필요 없어요. 그 작자처럼 굴어 봤자 내가 좋게 보는 것도 아니고…….”

“솔직해져도 된단 뜻입니까?”

“마음대로 생각해요.”

게일은 씩 웃었다. 이자벨은 강한 여자였지만, 항상 끝이 물렀다.

“우리가 결혼하면, 난 정말 당신을 자유롭게 해 줄 거예요.”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에 이자벨은 이제는 반응하지도 않았다. 게일의 마음이 진심이든 아니든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작자가 죽지 않는 한, 내가 결혼하더라도 나한테 자유는 없을걸요.”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요.”

“내 인생에서 그런 걸 바라기에는 너무 많이 꼬여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자벨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는 체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내가 많은 걸 바랐나…….”

“차라리 많은 걸 바랐으면 나았을 뻔했죠. 두 나라의 왕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나랑 결혼할 사람이 할 얘기는 아니네요. 질투도 안 나요?”

게일은 어깨만 으쓱했다. 질투보다는 동정이 더 컸다. 그는 이자벨을 분명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감정보다는 구원해 주고 싶은 감정이 컸다.

“한다고 받아 줄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런데 내 앞에서 그렇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남자는 또 처음이라. 보통…….”

이자벨은 쓰게 웃었다.

“원하는 반응을 할 때까지 협박하거나 회유를 하던데.”

“전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죠.”

믿음이라고는 한 톨도 담기지 않은 어조로 그녀가 대꾸했다.

* * *

억눌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밖에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대기하고 있었던 미하일이 급하게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게일은 천천히 열린 문 안으로 미하일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아아악!”

배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자벨을 미하일이 황급하게 깨웠다.

“아가, 아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깨어난 이자벨은 오래도록 헐떡이며 숨을 골랐고, 미하일은 의원을 닦달했다.

답변은 뻔했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피로나 고민이 심한 것 같다……. 그런 말들. 저러다 의원 몇 정도는 목이 잘릴지도.

게일은 미하일을 잘 알았다. 공포만큼 효과적으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게 없다는 걸 게일은 미하일에게 배웠으니까.

“……괜찮으니까 나가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미하일을 밀어내는 이자벨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또 비명을 지르게 되면…….”

“그럼 그때 다시 들어오시든가요! 난 쉬고 싶어요. 나가요.”

그렇게 말해 놓고, 또 한숨도 자지 않을 것이 뻔히 보였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지?

게일은 이자벨이 꾼다는 악몽이 궁금했다. 사실 그녀의 일생은 이미 최악의 악몽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데 무슨 꿈이 이자벨을 괴롭힐 수 있는 걸까.

“……괜찮아요, 이자벨?”

“당신들이 다 나가면 괜찮아질 거예요.”

게일의 물음에 경계하며 내뱉는 이자벨은 불안해 보였다. 그는 달래듯 이자벨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사는 게, 피곤해서…….’

눈앞이 순간 아찔해지면서 환청이 들려왔다.

“치워요.”

이자벨이 손을 쳐냈다. 게일은 약간 비틀거렸다. 그는 자신의 손과 이자벨을 번갈아 응시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밖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나가요!”

푸르스름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은 정말 그런 짓을 저지르고 남을 것처럼 보였다. 억지로 발을 떼어 나가면서도 게일은 몇 번이고 이자벨을 돌아봤다.

단순히 접촉만으로 능력이 발휘되는 일 따위는 왕족들 사이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게일은 이자벨에게만큼은 안심하고 맨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녀와 닿는다고 기억이 흘러들어오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방금은 뭐지?

미하일조차 떠나고 이자벨의 방문 앞에 홀로 남은 게일은 한참을 그 감각을 곱씹었다. 타인의 기억을 엿볼 때 특유의 역겨운 느낌조차 없었다. 지나치게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다.

사는 게 피곤하다고.

환청을 제외하고는 검붉고 불투명한 시야뿐이었다.

무슨 기억이지? 아니, 무슨 꿈인가.

얼마나 생각에 빠져들었던지 새벽이 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게일은 홀린 것처럼 이자벨의 방문을 열었다.

“……나가.”

역시 한숨도 자지 못한 것 같은 이자벨이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불 속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있는 그녀를 향해 게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나가라니까!”

몸을 반쯤 일으킨 이자벨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게일임을 확인한 이자벨이 눈을 찌푸렸다.

“……게일?”

게일의 손이 이자벨의 뺨에 닿았다. 손끝에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살갗이 느껴졌다. 순간, 이상한 기억이 물밀 듯이 쏟아져 왔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가 했던 말들이.

‘고개를 끄덕여 봐요. 네. 그렇게.’

‘……내가 취했나요?’

‘아뇨. 당신은 멀쩡해요. 이자벨. 당신만큼 멀쩡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게일은 기억 속의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저런 말을 했다고? 저런 얼굴로? 왜?

‘나는, 난, 당신……?’

‘허락해요. 이자벨. 딱 하룻밤만 저 소년을 빌려줘요.’

이자벨이 아닌 그녀의 동생에게 접근할 이유 따위는 없는데 어째서?

기억은 이상하게 이어졌다. 게일은 어느 순간 그 기억 속을 걷고 있었다.

그는 방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 그러나 허락의 말이 들리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방이었다. 침대와 탁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넓은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 소년이 침대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알렉스 로윈.

게일은 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기는 했지만 이자벨이 묘사했던 것처럼 학대를 받은 아이 같지는 않았다. 묘하게 지금보다 더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스스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낯설었다.

문득 이자벨이 그를 비난하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알렉스 로윈이 여자였다는 이상한 말과 함께 했던 비난이.

이게 전생의 알렉스 로윈이었다면, 이자벨은 왜 그런 착각을 한 거지?

누가 봐도 여자로 착각할 수 없는 소년이었다.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친 몸은 여성 특유의 곡선이라고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신은 절 모르시겠지만…….’

알렉스 로윈은 무덤덤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게일은 그 표정이 익숙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글쎄요. 중요한 건 제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게 아닐까요?’

‘네가 왜?’

소년은 그를 향해 미심쩍은 눈을 했다.

‘샬덴의 왕족이 나를? 내 존재를 아는 것도 신기한데.’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소년은 소년답지 않은 얼굴로 코웃음 쳤다.

‘난 샬덴의 왕을 알아. 너와 똑같이 생겼지.’

‘……어떻게 아십니까?’

‘본 적이 있으니까.’

적국 왕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소년이 이 저택을 벗어나 본 적 없다는 걸 게일은 알고 있었다.

‘언제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날 도와주려고 왔다면서, 질문하러 온 건가?’

‘……도무지 서로 만날 수 있을 접점이 없어 보여서 말입니다.’

알렉스 로윈은 어딘가 아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없어진 시간에 봤지.’

지금은 없어진 시간. 이상한 말이었다. 그러나 게일은 그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스스로의 몸임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어디까지? 어디까지라.’

알렉스 로윈은 그 질문에 눈을 찌푸린 채 게일을 응시했다.

‘내가 살아온 생은 전부 기억하지. 지금은 없어진 생도.’

그를 시험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죽은 순간도 기억하십니까?’

왜 그런 걸 묻고 있을까.

게일은 이런 기억이 그에게 존재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게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이자벨의 기억이라면, 이상하지 않은가. 이자벨이 본 적도 없는 그와 알렉스의 대화를 그가 어떻게 겪고 있는지.

그럼 이게 내 기억인가. 이자벨이 살았던 이전 생의 내 기억? 없어진 시간의 기억을 어떻게 갖고 있는 거지?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

“전하!”

게일은 거친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격렬하게 심장이 뛰고 머리가 끔찍하게 아팠다. 흔들리는 시야에 시종의 얼굴이 보였다. 어렴풋이 이자벨의 근처에서 보았던 의원도.

그래. 이자벨.

그는 이자벨과 닿은 뒤 정신을 잃었다. 왜지?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그의 눈을 뚫어져라 지켜보던 의원이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벨은…….”

“아가씨께서는 처소에 계십니다, 전하.”

“……내가 쓰러진 지 얼마나 된 거지?

게일은 바깥의 밝은 햇살과 그가 마지막에 보았던 새벽을 비교하며 중얼거렸다.

“몇 시간 지나지 않으셨습니다. 아가씨께서 오늘 새벽에 갑자기 비명을 지르시며 전하께서 쓰러지셨다고 소리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았군.”

그는 약간 괴리감을 느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한 번의 일생을 꿈속에서 겪고 온 것 같은…… 그 정도로 오랜 시간이.

“어떻게 된 일이십니까? 혹시 누군가 전하께 위해를……?”

시종은 마치 이자벨이 의심스러운 것처럼 은밀하게 물었다. 게일은 그 시종을 향해 손을 내저어 물렸다.

“전하, 폐하께는 어떤 보고를 올려야 하겠습니까?”

눈치 빠른 의원이 게일에게 물었다.

“적당히 수면제나 처방해 주고 가지. 그 이상은 괜히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게일의 말에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제자로 보이는 옆의 젊은 의원에게 무어라 속닥거렸다.

마침내 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서야 게일은 홀로 남겨질 수 있었다.

그는 이자벨과 닿았던 손을 펴고 물끄러미 그 손끝을 응시했다.

게일이 이자벨의 기억을 잃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거의 씨가 마른 샬덴의 왕가라, 게일이 접촉하면서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이자벨과 미하일 말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노력한다면 단단한 이자벨의 기억에도 파고들 수 있었지만, 이렇게 어떤 의지도 없이 단순한 접촉으로?

“……괜찮아요?”

익숙한 미성에 그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문가에 서 있던 이자벨이 피곤함에 절은 눈으로 게일을 응시하고 있었다. 게일은 넋을 놓고 응시하고 있었던 손을 내렸다.

“이자벨이 찾아와 준 걸 보니, 쓰러지는 것도 할 만하군요.”

“매번 말하지만, 그 작자처럼 굴지 좀 마요.”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늘 하던 변명이 되풀이되었다.

“습관을 어쩔 수는 없죠.”

늘 반복되던 대화가 이어지자 그는 조금 느긋해졌다.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상한 기억들에서 현실로 말이다.

“……왜 쓰러진 거죠?”

“당신은 무슨 꿈을 꿉니까?”

둘 다 아무도 답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자벨은 천천히 걸어 들어와 침대 가에 있는 창가에 걸터앉았다.

햇살이 그녀의 어깨와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는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꼈다.

“내 꿈을 읽었어요?”

“그게 꿈입니까? 기억이 아니라?”

그녀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싶지 않은 것처럼 오히려 역으로 질문했다.

“뭘 읽었길래요? 혹시 그 작자가 내 기억을 읽으라고 했어요?”

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미하일은 순순히 그의 품으로 돌아온 이자벨을 굳이 미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이자벨이 밤마다 비명을 지른 이후부터 은근히 게일을 떠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접근한 적이 없었다.

“그럼 왜 내 꿈을 읽었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녀의 얼굴에 역광이 졌다. 햇살이 만들어낸 그림자에 게일은 그녀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사고라면, 당신은 뭘 봤죠?”

의도해서 읽어낸 게 아니라면, 우연히 무슨 기억이, 어떤 꿈이 흘러 들어갔을까. 이자벨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저야말로 이자벨에게 묻고 싶군요. 도대체 뭘 기억하고 계신 겁니까? 당신의 전생은…….”

“그건 꿈이죠.”

“전생에 당신과 나눴던 대화를 봤습니다.”

게일은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쓰게 웃었다.

“파티장이었던 것 같은데…….”

이자벨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침묵했다. 게일은 그가 읽었던 기억을 입에 올렸다.

“저는 당신한테 고개를 끄덕여 보라고 속삭였고…….”

그녀의 고개가 살짝 그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고개를 끄덕여 봐요. 네. 그렇게.”

‘고개를 끄덕여 봐요. 네. 그렇게.’

“당신은, 내가 취했나요? 라고 나한테 물었죠.”

게일은 답이 없는 이자벨을 향해 물었다.

“그게 당신이 전생에 겪었던 일이 맞습니까?”

“……그러네요. 정말 내 기억을 봤군요. 꿈이 아니라.”

묘하게 안도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게일은 점점 더 그녀의 꿈이 궁금해졌다.

“무슨 꿈이기에 그렇게 말하기 싫어하는 겁니까?”

“꿈이니까 말하기 싫은 거죠. 말하면 꼭 그게 꿈이 아니라…….”

이자벨은 말끝을 흐렸다. 게일이 뒤이어 물었다.

“……현실처럼 느껴져서?”

“망상이죠. 꿈은 꿈일 뿐이에요. 스트레스나 불안으로 꾸는 악몽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그가 그녀의 꿈을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나가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게일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의 시간이나마 햇볕에 달궈진 팔이 따뜻했다.

“그 꿈에 당신의 동생이 나옵니까?”

“……많은 이들이 나오죠. 가족이나 하녀들이나 그런. 꿈이 다 그러니까요.”

이자벨은 그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속삭였다. 그는 그 말끝이 몹시도 꾸며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벨, 당신은 전생에 내가 동생에게 위해를 끼쳤다고 했잖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당신 동생의 성별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자벨의 팔을 좀 더 꽉 붙들었다. 손 아래에 느껴지는 팔목이 금방이라도 꺾기 쉬운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본 꿈속의 알렉스 로윈은 전혀 그런 착각을 할 만한 소년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전생의 알렉스까지 봤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그 소년이 학대받은 흔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자벨의 기억이 조작되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범인은 전생의 자신일 것이다. 그 외에는 없었으니까.

* * *

엘리자베스는 펜대를 굴리며 짧은 휴식 시간을 만끽했다. 중증의 일 중독자인 그녀에게 휴식이란 서류를 처리하고, 회의에 가기까지의 짧은 시간뿐이었다. 상단의 모든 이들은 그런 그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엘리자베스를 찾지 않았다. 일종의 배려이자 상사에 대한 아부였다.

상단의 암묵적인 규칙에 가까운 엘리자베스의 휴식 시간에, 그녀의 집무실이 열렸다. 그녀의 눈매는 자연스럽게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러나 열린 문 사이로 초조하게 입술만 씹고 있는 하녀가 등장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소리를 칠 수가 없었다.

분명 며칠 전에 본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손수 차를 내려 주며 도무지 진정하지 못하는 샐리를 향해 물었다.

“부인, 도련님이 이상해요.”

그놈은 원래 이상했어. 그러나 불안감에 떨고 있는 샐리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전처럼 사람들 목을 따고 다니나?”

샐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불안한 듯 집무실 곳곳을 힐긋거리고 있었다.

“아니면 피로 목욕을 한다든가?”

로윈 후작에 대한 소문 중 그가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미인들의 피로 목욕을 한다는 헛소문 또한 있었다.

농담처럼 던진 엘리자베스의 말에 샐리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도련님께서 그런 짓을 하실 리가 없잖아요.”

“그럼 뭐가 문제인데?”

샐리의 목소리가 끝도 없이 낮아졌다. 듣기 어려울 만큼 작아진 목소리가 겨우 들렸다.

“……도련님이 기억하신 것 같아요.”

몇 번이고 주변을 둘러본 샐리가 이곳이 엘리자베스만 있는 그녀의 집무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차마 이자벨의 이름을 언급하진 못했다.

“그…… 아가씨를요.”

엘리자베스의 눈이 냉철해졌다.

“의심이야, 확신이야?”

엘리자베스는 절대 기억이 돌아올 리가 없다고 했던 이자벨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세상에는 ‘절대’라는 말이 의외로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았다.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였다. 샐리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요새 아가씨 방에서 지내세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방에서 나오시지도 않으시고, 자꾸 누구랑 대화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하시는데…….”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샐리는 알렉스가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누님이라고…… 허공에 대고 자꾸 혼잣말을.”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샐리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단어를 입에 올리려 했다.

“그건 미친…….”

“아뇨! 아뇨, 우리 도련님이 그러실 리가 없잖아요.”

비명을 지르듯 그녀의 말을 막은 샐리는 결국 흐느끼기 시작했다.

“흡……. 부인. 어디에다가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도련님 어떻게 해요…….”

충성스러운 하녀는 며칠을 고민하다 엘리자베스에게 오는 것조차 힘들어했을 것이 뻔했다.

“우리 아가씨가…… 도련님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요…….”

샐리의 울음과 함께 엘리자베스는 그날, 처음으로 회의에 지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자벨은 엘리자베스에게서도 중요한 이름이었으니까.

* * *

‘그래. 죽는 순간도 기억하지.’

알렉스 로윈의 목소리는 어딘가 아득한 면이 있었다. 꿈이라 그런 건지, 게일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알렉스 로윈이 웃었다.

‘이게 꿈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뭡니까?’

‘정말 이게 꿈이라고 믿나?’

그 말은 마치 게일을 훈계하는 것 같았다.

‘그럼 기억이겠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게일에게 그는 여전히 미묘하게 웃었다.

‘기억은 과거를 되풀이할 뿐.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내지는 않아.’

게일은 소년이 이상할 정도로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이자벨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모습과는 괴리가 있었다.

‘……그럼 뭡니까? 당신과 내가 내 머릿속에서 만났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처럼 한 말에 소년은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개가 말을 한 것을 본 것처럼, 기대도 하지 않았던 말을 들은 얼굴로.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군.’

아름다운 소년이 그에게 명령했다.

‘좀 더 기억해 봐. 거기에 답이 있을 테니까.’

꿈이 부서져 내렸다. 눈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게일은 그가 의자에 앉아 잠깐 잠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기억해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지만, 눈을 누가 뽑아 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전하?”

경악이 희미하게 섞인 시종의 목소리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가를 더듬었다.

뺨이 푹 젖을 정도로 울고 있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흔적조차 없었다. 단지 우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괜찮으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 아니지, 부르는 게 낫겠군.”

게일은 눈가를 문질렀다. 소금물에 담근 것처럼 쓰라린 감각이 몰려들었다.

시종이 황급히 의원을 부르러 자리를 뜨고, 게일은 한참 동안 고통을 곱씹으며 소년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뭘 더 기억하라는 거지? 어떻게?

이자벨이 바꾸기 전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간을 돌리는 기적과도 같은 힘은 그녀에게만 허락되었으니까.

그런데 알렉스 로윈은 뭘 말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그 소년은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마법은 전설이 되고, 기적은 신화가 된 시대였다. 샬덴 왕가에 이어지는 독특한 능력만 아니었다면, 그들조차 비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것이다.

알렉스 로윈은 유능하고 잔인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인간이었다.

게일은 로윈 가문에 남의 꿈에 들어오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이자벨부터가 그렇지 않은데.

이자벨을 조사하면서, 알렉스 로윈에 관한 것 또한 철저하게 조사했다.

알렉스 로윈은 로윈 백작과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었다. 그 하녀의 핏줄 또한 평범했다. 아비는 하급 병사였고, 어미는 마구간 지기의 딸이었으니. 그런 이는 로윈 가문에 수없이 많았다.

어디에도 알렉스 로윈이 특별한 인간이란 걸 말해 주는 구석이 없었다. 그는 분명히 비범한 인간이었음에도, 비현실적인 구석은 없었으니까.

“……앞은 잘 보이십니까?”

의원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게일은 고개를 끄덕였고, 의원의 표정은 더 아리송해졌다.

결국 원인을 찾지 못한 의원은 그의 눈 위에 차갑게 적신 수건을 올려 두고 진통 효과가 있는 약초를 몇 개 처방했다.

그는 눈 위에 차갑게 닿아오는 물기를 느끼면서 다시 기억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 * *

“어디에 다녀오는 거지?”

불안정한 신디아의 목소리에 외투를 벗던 샐리는 멈칫했다.

날은 이미 어두웠다. 오늘 하루 휴가를 냈던 샐리를 알면서도 굳이 그녀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휴가 냈던 거 알잖아.”

“가족들 보러 간 거, 아닌 거 알아. 어디 갔었어?”

샐리는 외투를 마저 벗어 걸어 두면서 냉정하게 대꾸했다.

“나 감시하는 거야?”

“그냥 물어보는 거야, 샐리. 너도 알잖아. 지금 좀 불안한 거.”

주어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둘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신디아는 샐리의 방문을 닫고 잠갔다.

“도련님께서 오늘도…….”

“신디아. 도련님께서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으시지.”

신디아는 그녀의 말을 끊어 버린 샐리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는 그냥…… 요새 도련님께서 도련님의 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어.”

“우리가 뭘 어쩌겠어? 도련님께서 이 저택의 주인이시니 원하시는 방에 머무르셔야지.”

“샐리, 난 진지하게 우리가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

신디아의 말은 단호했다. 오랜 시간 생각하고 몇 번이고 속으로 중얼거리다 한 말처럼.

“우리가 얘기한다고 뭔가 변하는 건 아니야, 신디아.”

“그래도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그녀는 단둘뿐인 방에서도 눈치를 보듯 주위를 둘러보고는 샐리에게 속삭였다.

“오늘 그 방에 새 가구가 들어갔어.”

“신디아,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자꾸 말을 옮기는 습관을 버려야…….”

“새 옷장이 들어갔다고.”

신디아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튀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붙잡고 덧붙였다.

“내일 재단사가 올 거야. 새 드레스가 필요하겠다고 하셨거든.”

“…….”

“계절이 바뀌니 누이에게 필요한 옷을 맞춰야겠다고 하시면서.”

말문이 막힌 샐리의 주변을 신디아가 초조한 발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그녀는 진정할 수 없는 것처럼 굴었다.

“나도 너처럼 했지. 타국으로 시집을 가신 아가씨께서는 아마 그 옷을 받아 보지도 못하실 거라고. 태연하게.”

저택의 모든 고용인은 제 누이에 대해 말하는 주인에게 세뇌시키듯 한목소리로 대꾸했다.

도련님께서 어릴 적에 시집을 가 많이 보지도 못한 아가씨가 계시긴 하다고. 왜 그 아가씨에 대해 갑자기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 말에 웃기만 하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어. 기억을 잃으신 것 같지도 않아. 아니, 더 이상해지신 것 같은…….”

“신디아!”

점점 불안한 목소리가 커지자 샐리는 황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더는 거짓말하기도 지쳐.”

신디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샐리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면서 속삭였다.

“도련님을 위해서야.”

그 목소리는 냉혹할 정도로 단호했고, 신디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어트렸다.

“……난, 나는 잘 모르겠어. 차라리 진실을 아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가씨께서 했던 말을 잊었어?”

“넌 아가씨의 하녀였지만, 난 아니야. 나한테는 도련님이 더 중요해, 샐리.”

“널 도련님한테 붙여 준 것도 아가씨야.”

신디아는 불안한 듯 주위를 휙 둘러보면서 샐리의 말을 예민하게 되받아쳤다.

“그래서? 지금 와서 아가씨 은혜에 감사하느라 도련님이 저렇게 이상해지는 걸 계속 가만히 두고만 봐야 한다고?”

“도련님께서 아시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 더 심해지실 수도…….”

순간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샐리는 말을 멈췄다.

“샐리?”

닫힌 방에서 느껴질 리가 없는 바람에 샐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분명 잠갔던 문이 열려 있었다.

“도련님…….”

문가에 기대고 있는 남자는 문을 다 가릴 만큼 키가 컸다.

샐리의 중얼거림에 신디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신디아의 뺨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계속 얘기해 봐.”

알렉스 로윈은 아름다운 외모 탓인지 큰 덩치가 그리 쉽게 와닿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둘에게는 그가 문을 다 가릴 만큼 거대하다고 느껴졌다.

혹은 그만큼 압박을 받고 있든가.

“무슨 말들을 그렇게 하고 있었지?”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들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아무것도요, 도련님.”

샐리가 긴장감을 감추며 웃었다. 그녀는 신디아의 앞을 자연스럽게 막아서면서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고용인들이 머무는 별채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도련님. 쉬셔야 할 시간에…….”

“나야 이 저택의 어디든 있을 권리가 있지.”

알렉스는 문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샐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방금 그 대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계속해 봐. 더 듣고 싶으니까.”

“저희는 그저…….”

변명하는 샐리의 말을 자르고 신디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뭘 알고 계세요, 도련님?”

샐리는 그대로 굳었다. 그러나 신디아는 한 번 말을 꺼내자 거침이 없었다.

“분명 뭘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왜 저희한테 듣고 싶어 하세요?”

불안한 듯 갈라지는 목소리에 샐리는 숨을 삼켰다.

원래 마음이 약한 친구였다. 이자벨이 신디아에게 알렉스를 맡긴 것도, 사생아라도 차별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약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내가?”

“도련님, 신디아가 몸이 좋지 않아서…….”

알렉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샐리는 알렉스가 소리 내서 웃는 걸 오랜만에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래. 넌 완전히 이자벨의 사람이군.”

그는 말을 꺼낸 신디아보다 샐리를 더 유심하게 살폈다. 물건을 관찰하듯 무감각한 시선 끝에 그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가 이자벨의 마음에 든 거지? 지금까지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샐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알렉스는 그제야 하얗게 질린 신디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살아 있는 것도 이상하고.”

신디아는 그 말에 살짝 비틀거렸다. 그는 신디아와 샐리를 조금 신기하다는 듯이 훑고 있었다. 마치 이상한 곳에 놓인 물건을 보는 것처럼. 죽었어야 할 인간이 살아 움직이는 걸 본 것처럼.

“도련님, 이자벨 아가씨를…….”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는 신디아를 대신해 알렉스가 되물었다.

“이자벨을 기억하느냐고?”

알렉스는 그 말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신디아가 그것에 반발하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난 이자벨 로윈에 대한 기억이 없어.”

샐리는 그 대답을 바랐으면서도 정작 나온 대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계속 얘기해 보라고 하잖아. 이자벨에 대해서.”

그는 느릿한 말투로 덧붙였다.

“난 그녀가 정말 궁금하니까.”

알렉스 로윈은 이자벨 로윈을 모른다. 그는 하얗게 질린 하녀 둘을 바라보면서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이번 생의 알렉스 로윈은 정말 깨끗할 정도로 지워진 기억만 갖고 있었으니까.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전 두 번의 생 속에 자리한 이자벨이었다. 알렉스 로윈은 이번 생의 이자벨이 궁금했다.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 살아 있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이자벨의 이름을 간직하는 이상한 세상에서.

“넌 말하지 않을 테지.”

알렉스는 샐리를 향해 속삭였다. 저 하녀는 늘 이자벨을 아꼈다. 정도는 달랐을 지어도 항상.

“도련님. 도련님을 위해서예요.”

떨리는 샐리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자벨을 위해서겠지. 넌 이자벨의 사람이잖아.”

이자벨의 사람이 나를 위할 리가. 그런 뉘앙스가 배어 있는 대답이었다.

알렉스는 두 번의 생 동안, 한 번도 이자벨의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이자벨의 도구로 살았고, 한 번은 그녀의 적으로 살았다. 두 번 다 이자벨은 그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가 받아본 것은 가식적으로 꾸며진 애정의 흔적 정도였다.

“뭘 알고 계시는 건가요, 도련님?”

“반대로 질문해야지. 내가 뭘 알고 싶은 건지.”

알렉스의 시선이 신디아에게로 향했다. 그는 나른하게 웃었다.

“네가 아니라도 대답해 줄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샐리는 신디아를 돌아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신디아는 알렉스의 사람이었다. 이자벨이 붙여 줬다고 한들, 알렉스의 사람인 게 변하지는 않았다.

“……도련님께서 궁금하신 게 아가씨에 관한 거면, 제게 물어보시는 게 나을 텐데요.”

“거짓말을 하지 않을 보장이 없잖아?”

샐리는 단호하게 시선을 알렉스에게 맞춘 채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면, 신디아보다는 제가 나을 거예요. 그녀는 아가씨를 모신 적이 없으니까.”

“뭐, 좋아.”

알렉스는 문가를 비켜섰다. 나가라는 듯한 샐리와 알렉스의 눈짓에 신디아는 주춤거렸다.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중얼거림 후에 그녀는 살짝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고, 알렉스는 문을 닫고 거기에 등을 기댔다.

“……어디까지 기억하세요?”

샐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알렉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난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을 텐데.”

“그렇다면 아가씨의 이름은 어떻게 아시죠?”

알렉스는 역으로 그를 떠보는 샐리를 향해 혀를 찼다.

“이름, 성별, 혈통, 서류로 알 수 있는 것들 정도는 알아. 됐나?”

그는 이 생의 이자벨 로윈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해진 가문이나 이름이 바뀔 리는 없었을 테니까.

“그럼 뭘 더 알고 싶으신 건데요?”

“왜 그녀가 내 옆에 없는지. 어떻게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알렉스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내가 분명 보낼 리가 없을 텐데.

“기억도 하지 못하신다면서, 그건 어떻게 아시죠?”

“나한테 이자벨은 원래 그래. 그건 그냥……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거라고.”

알렉스는 샐리를 추궁하듯 응시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샐리의 담담했던 눈이 흔들렸다. 알렉스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이자벨의 보호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를 지독하게 싫어했던 이자벨의 유모보다도 더.

“……샬덴에 계세요.”

놀랍게도 알렉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다.

알렉스 로윈은 첫 번째 생에서 샬덴의 왕에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헤더의 핏줄에 대한 왕의 집착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자존심에 쉽게 가진 않았을 텐데?”

그가 아는 이자벨이라면 차라리 날 죽이라 난리를 피웠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 순순히 갔을 리가 없는데.

“도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말에는 약간의 원망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배어 있는 뉘앙스는 체념에 가까웠다.

알렉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자벨의 선택에 있어서 그가 영향을 끼친 적은 없었으니까.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보내지 않으려고 하셨어요.”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샬덴에서는 아가씨를 내놓지 않으면 전쟁을 벌일 기세였고.”

그것도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아가씨는 전쟁이 터지면, 도련님이 위험해지실까 봐 어쩔 수 없이…….”

“뭐……?”

그럴 리가 없었다. 이자벨이 그를 걱정한다고? 차라리 더 이상 쓰지 못하는 도구를 걱정한다고 하는 게 이해가 더 잘 갔다.

“이자벨이 나를 걱정한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하는 그를 보고 샐리가 살짝 당황했다.

“내 이자벨이, 사생아인 나를?”

샐리는 이 저택의 암묵적인 금기나 다름없는 단어를 언급하는 알렉스가 이상했다.

“아가씨는 도련님을 정말 아끼셨어요. 그만큼 사이가 좋은 남매는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그녀가 아는 알렉스는 단 한 번도 제게 향하는 이자벨의 애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그 애정이 얼마나 오래 갈지 몰라 두려워했을 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충격을 받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는 알렉스를 향해 샐리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말 기억이 안 나시나요?”

“……그래.”

그는 이자벨이 그를 아낀다는 소리에 머리가 복잡했다. 애초부터 그녀의 동정심과 죄책감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 독한 내 아가씨가 그렇게 쉽게 마음을 돌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나를 위해 희생할 만큼 나를 좋아한다고? 그런 기적이 있다고?

“……네가 보기에는, 정말 그녀가 나를 아꼈나?”

가식이나, 체면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덧붙인 말에 샐리는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도 어이가 없었다. 어느 누가 가식으로 적국에 몸을 던진단 말인가.

“마지막까지 저한테 도련님을 부탁하고 가셨어요. 도련님이 행복해지셨으면 좋겠다고.”

알렉스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내가 굉장히 착하게 굴었나 보군.”

샐리는 이자벨의 애정 자체를 의심하는 알렉스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자벨이 그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자신의 최대 즐거움으로 여겼던 남자가 아닌가?

그녀는 정말 알렉스가 이자벨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 맞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련님은 아가씨를 사랑하시긴 했지만, 그렇게 착하게 굴지만은 않으셨어요. 그냥 아가씨는 어떤 도련님이든 도련님을 사랑하셨던 것뿐이에요.”

애초에 저택에 가둬 놓은 것부터가 착한 짓은 아니지 않은가.

“……그럴 리가 없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샐리는 한숨처럼 덧붙였다.

“믿지 못하시면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아가씨는 도련님을 위해 떠났고, 저희는 도련님을 지키려고 했던 아가씨의 뜻에 반할까 봐 침묵했던 것뿐이니까.”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틀어쥘 것 같이 위협적이었던 알렉스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에 샐리는 정말 그가 이자벨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그대로 사세요. 아가씨가 원하셨던 대로 행복하게.”

“……그럼 이자벨은?”

“아가씨는…… 아가씨 나름대로 행복을 찾으시겠죠.”

그건 사실 샐리의 바람이었다. 이자벨은 정말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떠났으니까.

하지만 그런 바람을 품는 것 말고는 샐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전 그저 아가씨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을 뿐이고. 아마 신디아도 이 이상을 답해 줄 수는 없을 거예요.”

알렉스는 샐리의 말에 침묵했다. 그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고,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바빠 보였다.

“내 기억을 지운 것도, 그녀의 의도인가?”

“저도 몰라요. 그건. 그냥 아가씨께서는, 다시는 기억할 일이 없을 거라고만 하셨어요.”

“그녀가…… 나를 아꼈다는 증거가 있나?”

샐리는 그 질문에 눈을 감았다.

증거야 수도 없이 많았다. 이자벨의 수많은 선물, 편지, 둘을 그린 초상화…….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보여 주기가 꺼려졌다.

“아가씨를 다시 찾을 생각이신가요?”

그렇다면 샐리는 아무것도 보여 줄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지만 알렉스 로윈의 기억이 비어 있는 것 같았다.

혹여나 그의 집착을 다시 불러일으킬 물건 따위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가 어떻게 지킨 도련님인데.

“전쟁을 일으키진 않을 거라고 약속하지.”

너무 쉽게 나온 답변에 샐리는 머뭇거렸다. 알렉스는 재차 확답했다.

“이자벨이 나를 걱정한다면…… 좋아. 위험한 짓을 벌이지는 않을 거야.”

샐리는 알렉스를 한참을 응시하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세요.”

방을 나서자 신디아가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샐리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락 열쇠 좀 줘.”

신디아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열쇠를 샐리에게 넘겼다. 그녀의 눈은 알렉스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런 신디아의 걱정이 낯설었다.

이상한 세상이었다. 이자벨이 그를 아끼는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 세상.

이내 다락의 문이 열리고, 알렉스가 처음 본 것은 꽤 커다란 초상화였다. 귀족들이 매해 남기는 가족 초상화 같았지만, 그 그림 속에는 로윈 백작이 존재하지 않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이자벨과 어린 그가 나란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알렉스 로윈이 기억하는 한 그는 늘 먹지 못해 마르고, 눈치를 보느라 숙인 고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 속 검은 머리의 소년은 어느 귀족 자제들과 비교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반듯한 자세와 상기된 뺨, 이자벨을 향한 다정한 시선까지.

한 번도 알렉스 로윈이 가져본 적 없는 것.

소년의 체형에 맞춘 옷이나 장신구 따위도 널려 있었다. 매 계절 새로운 옷을 맞췄던 것처럼.

알렉스는 이 낯선 세상에서 자랐을 스스로가 미치도록 부러워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의 애정을 당연한 것처럼 누렸을 그 자신이.

스스로를 질투하는 것은 꼴사나운 짓이었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자벨이 이렇게 나를 사랑했는데, 어떻게 그녀를 놓칠 수가 있지?

* * *

게일은 이제 이 이상한 꿈에 적응했다.

일단 그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이건 꿈이라기보다는 환상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청년이 되지 못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알렉스 로윈은 자기가 이 환상 속에서 소년처럼 보인다는 것에 웃었다.

큰 키 덕분에 더 말라 보이는 체구를 가진 소년은 늘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침대 위나, 의자, 아무것도 없다면 허공에라도.

‘사실 어릴 적부터 궁금했던 사실이 있긴 하죠.’

소년은 턱을 괴고 게일의 말을 들었다.

별로 집중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알렉스 로윈이라는 인간의 성격상 이자벨이 아닌 이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해야 했다.

‘내 기억도 내가 손을 댈 수 있을지. 내가 내 기억을 지우거나 잘라낼 수 있을지…….’

굳이 자기 몸을 두고 실험하고 싶지 않아서 묻어 두었던 질문이었다. 아니, 묻어 두었다고 생각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황을 보자면…….

‘그래서?’

‘내가 시도한 모양이군요. 내 기억을 건드리는걸.’

처음에는 이자벨의 기억을 건드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억을 왜 건드렸을까. 도대체 왜? 알렉스 로윈이라는 인간의 말에 넘어가서? 무슨 조건을 내걸었기에 그가 알렉스 로윈이라는 인간을 도왔던 걸까.

게일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평탄치 못한 인생에 저 인간과 엮일 일이 무엇이 있어서? 만약 있다면, 이번 생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을 텐데…….

그는 이번 생에서 이자벨을 보러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알렉스를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리 신경 쓰지도 않았다. 게일에게 중요한 건 이자벨이었으니까.

그는 정말 알렉스 로윈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자벨을 향한 집요한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내가 대체 뭘 건드린 겁니까?’

‘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지?’

게일의 말문이 막혔다. 소년은 몹시 오래도록 살아온 고목처럼 무감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뭐든 알고 있을 것만 같은 태도로 구는 건 그쪽이 아닙니까?’

알렉스 로윈은 이상하게 웃었다.

‘날 그렇게 보는 건, 네 머릿속이야.’

그는 정말 오랜만에 게일에게 흥미를 갖고 물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거지?’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내가 어리게 보인다면서? 그건 꼭 노인을 묘사하는 것 같은데.’

‘내가 그쪽 늙은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지.’

알렉스 로윈은 별로 슬퍼하지도 않은 태도로 툭 말을 던졌다.

‘난 늙을 때까지 살아본 적도 없으니까.’

‘……몇 번을 죽었습니까?’

사람이 한 번 이상 죽을 수 있을 리가 없음에도 둘 중 누구도 그 질문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두 번.’

소년은 친절하게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그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샬덴 왕의 손에, 두 번째는 자살.’

‘그녀는 그 자살을 제 탓이라고 여기던데요.’

‘틀린 말은 아니지.’

게일은 약간 당황했다. 그가 뭘 어쨌기에.

‘네 능력을 알았기 때문에 자살했으니까.’

‘그때 그녀의 기억을 조작했습니까? 그러니까…… 내가요?’

‘그럼 누가 했겠어?’

이번에는 이 꿈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이 꽤 오래도록 부서지지 않았다. 꼭 중요한 이야기만 나올라치면 부서지던 공간이 말이다.

‘뭘 어떻게 조작했습니까?’

알렉스 로윈은 아름답게 웃었다. 정말 즐거워서, 이를 내보이면서.

‘날 지독히 불쌍한 새끼로 조작했지.’

지나가던 거지도 불쌍해서 빵 한 조각을 던져 줘야 할 것 같은 작고 더럽고 불쌍한 애새끼로.

‘……성공했군요. 그녀가 당신을 지금도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소년은 그 말에 처음으로 진짜 소년처럼 상기된 뺨을 하며 눈을 빛냈다.

‘진심으로? 진짜 그녀가 나를 그렇게 여기나?’

‘당신도 알지 않습…… 아니, 모릅니까?’

소년은 그 말에 코웃음 쳤다.

‘나라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야. 특히 그녀에 관해서는…….’

알렉스 로윈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하도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많이 치는 여자라 어쩔 수 없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거랑 믿는 건 별개지. 그녀는 나한테 뭘 해도 돼. 어떤 짓을 저질러도 괜찮아.’

소년의 청회안이 더 어둡게 느껴졌다. 마치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배어 있는 집착에 게일은 소름이 끼쳤다.

‘속은 내가 잘못이지. 내가 속지만 않으면 돼…….’

‘그녀가 뭘 속였습니까?’

얼마 살지도 못한 소년의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은 꽤 신기했지만, 게일은 그 괴리감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만 받았다.

뭔가 게일의 앞에 있는 소년은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이 났다. 늘.

‘내가 그녀의 마음을 가졌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지.’

내 품에서 가만히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고, 멋대로 떠나 버렸지.

‘너한테 충고하자면, 갖고 싶은 게 인간이라면 상대를 믿지 마.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나는…….’

‘이미 욕심이 난 이상, 우리가 진 거야. 절대 믿지 말고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해.’

소년이 그와 소년을 일컬어 ‘우리’라고 부르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게일은 이상하게 그의 말에 납득했다. 그러나 그의 이성이 제동을 걸었다.

‘……내가 그 충고를 듣고, 이자벨을 놓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들이 디디고 있는 공간이 서서히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내키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입으로 내뱉은 말은 달랐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알렉스 로윈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게일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게도 그 말에 안도했다.

“……게일!”

날카로운 목소리에 천천히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게일은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되찾았다. 이자벨의 불퉁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정신을 일깨웠다.

“지금 나는 고생하고 있는데, 혼자 자고 있는 건가요?”

붉고 풍성한 드레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채, 이자벨은 진절머리가 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자벨?”

옆에 우르르 서 있는 시녀들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일은 그제야 그가 뭘 하고 있었던지 기억이 났다. 그와 이자벨의 결혼식에 쓸 드레스를 맞춘다고 해서 끌려왔던 일이.

그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이자벨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자벨.”

“됐어요. 어차피 잠을 못 자는 건 그쪽이나 나나 똑같으니까.”

이자벨은 금발을 가리는 얇은 붉은 천을 들어 올리면서 덧붙였다.

“그보다 아무거나 좀 괜찮다고 해 줘요. 별로 더 갈아입고 싶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아가씨, 최소한 세 벌은 더 비교해 봐야…….”

재단사로 보이는 마담이 어쩔 줄 모르고 속삭였다.

“그냥 붉은 옷이면 되는 거 아닌가? 게일, 당신도 괜찮다고 좀 해요.”

원체 화려한 것을 즐기는 아를에서는 오히려 결혼식에 신부의 순결을 증명하듯 흰 드레스를 입었다. 그러나 척박한 나라인 샬덴에서는 결혼식 때 온갖 화려한 색들로 식장과 사람들을 꾸몄다. 평소에 부릴 수 없는 사치를 결혼식에 쏟아붓는 것처럼.

신부의 옷은 금색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만들었고, 왕가의 결혼식이라면 그 규모나 사치가 더 거대해졌다.

“……사실 당신이라면 뭘 입어도 예쁠 테니까 상관없죠.”

그의 말은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얇게 비치는 붉은 베일 아래에 자리한 흰 얼굴은 사실 아무리 거지 같은 옷을 입는다고 해도 그녀의 미모를 죽이기는 힘들어 보였다.

피기 시작한 한 송이의 꽃처럼 붉은 천에 휘감긴 이자벨은 게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치마를 감싼 천을 들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그럼 치마도 한 세 겹 정도는 줄이죠. 지금도 무거워서 걷기 힘든데. 머리에 단 보석도 반 정도 줄여도 될 것 같고.”

보통은 더 추가하려고 안달인 드레스를 어떻게든 더 간소하게 줄이려 하는 이자벨을 향해 게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그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게일의 말에 이자벨의 투덜거림이 멎었다.

그는 샬덴의 태자였고, 이 모든 준비는 그들의 결혼식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의사는 사실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권력이란 게 참 절실한 순간이군요.”

짤막한 이자벨의 중얼거림은 무거웠다. 주변의 시녀들은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태자 전하.”

그때, 침묵으로 가득 찬 방 안에서 후다닥 시종이 들어와 왕의 방문을 알렸다.

“아가.”

문이 열린 타이밍이 참 완벽했다 할 수 있었다. 게일은 고개를 숙였지만, 미하일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역시 예쁘구나. 좀 더 화려하게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미하일의 시선은 이자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찬찬히 훑어보는 눈은 과거를 회상하듯 흐릿했다.

재단사는 왕의 시선이 닿지 않았는데도 굽실거리며 말을 꺼냈다.

“치마에 수놓을 다이아몬드를 좀 더 상등품으로 쓰면 더 화려해질 겁니다, 폐하.”

“지금은 아닌가?”

미하일의 시선에 재단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지금도 자수용으로는 쓰지 않을 만큼 상등품을 쓰고 있습니다, 폐하. 다만 좀 더 좋은 길이 있다는 말을 올리고 싶었사옵니다.”

“아가, 넌 어떠하냐?”

이자벨은 미하일의 물음에 뻣뻣하게 대꾸했다.

“전혀요. 너무 무거워요. 걷기도 힘들고.”

주변의 이들이 사색이 되었지만 이자벨은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머리에 달린 보석도 좀 줄였으면 좋겠고, 치마도 겹을 좀 줄였으면 좋겠어요. 움직이기 쉽게.”

“하지만 한 번뿐인 결혼식이 아니냐, 아가. 조금 불편해도 참아야지.”

미하일의 손이 이자벨의 붉은 베일을 붙잡았다.

짝!

이자벨이 반사적으로 미하일의 손을 쳐냈다.

무섭도록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미하일은 웃었다.

“원래 결혼식 전의 신부는 예민해진다고 하지. 내가 괜히 널 귀찮게 한 모양이구나.”

“……네.”

다가오는 결혼식에 너그러워진 미하일은 한 발자국 물러나며 명령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줘라. 한 번뿐인 결혼식이 아니냐.”

끝끝내 미하일의 시선이 게일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이번 생은 권력이란 것에 그리 탐욕적으로 굴지 않고 살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몹시도 권력이 고팠다. 있다면 적어도 드레스 정도는 바꿀 수 있었겠지.

이자벨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드레스를 확인하며 미하일의 권력을 실감했다.

그녀가 아무리 싫다 해도 소용없었다. 드레스는 갈수록 화려해지고, 무거워졌다.

입으로는 알았다고 하면서 더 화려하게 만드는 건 뭔가. 화라도 낼라치면 넙죽 엎드려 죽여 달라 빌었다.

이러다 머리카락 한 가닥마다 보석을 달 기세라, 이자벨은 내내 짜증을 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점점 화려해지는 이자벨을 보는 미하일의 얼굴에 더 기분이 나빴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어요?”

게일은 드레스에 깔려 죽을 것 같은 이자벨을 보고 정말 걱정이 됐다.

“더 무거워지면 진짜로 걷지도 못할 게 분명해요.”

잠깐씩 조는 것 말고는 제대로 잠을 잔 지 꽤 오래되었다고 했나. 몸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고, 피부는 창백해지다 못해 파르스름했다.

대신 밤마다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미하일은 여전히 이자벨의 방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속 겹은 잘 보이지도 않으니 그걸 좀 줄여 보자고 해야겠습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걷지도 못하고 쓰러질 것 같으니까.”

“내 말이 그거예요.”

이자벨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어찌나 드레스가 풍성한지, 그녀는 주저앉지도 못했다.

풍성한 치마를 의자처럼 깔고 앉은 이자벨은 베일을 벗어 시녀에게 건넸다.

“이건 더 못 줄여?”

“죄송합니다. 아가씨.”

시녀는 곤란한 얼굴로 죄송하다는 소리만 반복했고, 그녀는 나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봤죠? 다들 똑같아요. 죄송하다고만 하지 바꿀 생각도 없고…… 당신도 그럴 건가요?”

게일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딱히 믿는 구석이 아니었다.

피로가 쌓인 눈가가 어두웠다. 게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거둬들였다.

그녀에게 닿고 나서 시작된 꿈이었다. 또 닿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겁이 났다.

“괜찮습니까?”

“여기서 그 질문을 가장 많이 하는 게 게일, 당신이에요.”

이자벨은 똑바로 게일을 응시한 채 덧붙였다.

“난 늘 괜찮지 않았지만 당신도 해결할 능력이 없잖아요.”

미하일에게 꼼짝도 못하는 그의 무능력함을 질타하는 소리에 게일은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다. 틀린 소리가 아니었으니까.

“당신을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더 이상 괜찮냐고 묻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어차피 괜찮지 않으니까?”

“맞아요. 이게 내 인생이죠.”

이자벨은 담담하게 사실을 인정했다. 그녀는 당장 뛰어내릴 것처럼 절망하고 있지도, 분노하고 있지도 않았다.

짙은 체념과 무거운 피로. 지금 그녀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결혼을 앞둔 남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그들 사이를 감돌았다.

위태로울 만큼 아슬아슬한 침묵 끝에 게일이 오랜만에 이자벨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핏기 없는 얼굴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요새 계속 꿈을 꿉니다. 어쩌면 당신과 비슷한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이자벨은 지친 고개를 들어 게일을 올려다봤다. 그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미하일을 닮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과 닿은 이후로부터 계속.”

게일의 손이 천천히 이자벨의 뺨을 감쌌다. 시체처럼 차가운 체온에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도 이제는 진실이 뭔지 정말 궁금해져서요.”

그는 웃었지만 미하일처럼 쾌활한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익숙하게 봐왔던…….

“게일……?”

그대로 기절하듯 천천히 그의 몸이 무너졌다. 그녀의 몸 위로. 제대로 쉬지 못한 이자벨의 육신은 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뛰는 심장 소리와 잠을 자는 것처럼 느린 숨소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졸음이 쏟아졌다. 이자벨은 눈을 깜빡이다가 어느 순간 눈을 뜨지 못했다.

* * *

시야가 낮아졌다. 이건 익숙했다. 나는 그냥 또 꿈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번 꿈은 이상했다. 한 번도 그녀가 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투박하고 추운 바위 성.

샬덴과 아를의 국경 근처에 종종 이런 바위로 만든 성이 있다고 들은 적은 있었다. 뭐든 그녀에게 최고의 것만 보여 주려고 하는 미하일 덕분에 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달랑거리는 짧은 다리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샬덴의 것이 분명한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가 나를 지키고 있었다.

꿈이 으레 그러하듯 나는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몸은 그냥 가만히 침대 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나는 뺨을 더듬었다. 축축한 것을 보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흐…….’

딸꾹질까지 해대면서 우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순간, 이게 내 육신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오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은 황급히 얼굴을 닦아냈다.

‘……진짜 신기하군.’

만약 내 의지대로 육신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내 눈은 한계를 모르고 커졌을 것이 분명했다.

미하일이었다.

유쾌함과 잔인함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미남이 물건을 들어 올리듯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많이 닮지 않았나?’

신기한 물건을 보는 것처럼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미하일이었다. 나는 버둥거리는 것조차 못하고 들어 올려지느라 꽉 조여진 목에 숨만 캑캑댔다.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의 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미하일을 그대로 복제한 것 같은 어린 애가 비쳤다. 나는 내가 누구의 몸으로 이 꿈을 걷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름이 뭐지? 아니, 굳이 옛날 이름을 쓸 필요는 없으니…….’

옆에 선 기사에게 내 육신을 던지듯 넘긴 미하일은 고민 하나 없이 중얼거렸다.

‘게일, 게일이라고 하지.’

‘허나, 폐하…….’

나를 들고 있는 기사가 움찔했다.

‘상왕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내리셔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미하일이 기사의 목을 자르고, 그 피가 내 몸 위로 쏟아지는 게.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된 채였다.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검을 바닥에 던져 버린 미하일은 살짝 혀를 찼다.

‘여기서는 못 자겠군. 나가자.’

그는 문을 열고 내게 속삭였다. 나는 시체를 등 뒤에, 왕을 앞에 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았다.

어린 게일의 감정이 울컥 밀려와 내 몸을 지배했다.

‘여기 있을 생각인가?’

어디고 있고 싶지 않은데. 그러나 내 육신은 멋대로 움직여 미하일에게로 다가갔다.

‘……똑똑하구나. 넌 오래 살겠어.’

그 말은 맞았다. 게일은 오래 살아남아 결국 태자가 되었다.

이건 그의 유년인가? 그게 왜 나한테 이렇게 보이는 거지?

‘나만 닮아서 좀 아쉬웠는데…….’

점점 혼란스러웠다. 게일은 미하일이 왕위를 탈취하면서 죽인 수많은 왕족 중 하나를 부모로 두었다고 했다.

친척이니 닮기야 했겠지만……. 미하일의 말은 마치 게일이 부모 중 하나를 닮지 않아 아쉽다는 말처럼 들렸다.

게일의 육신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 차분함이, 딸꾹질까지 해대며 울었던 아까와 너무 달라 기분이 이상했다.

걸을 때마다 끈적거리는 핏물이 걸음을 붙잡았다.

순간, 디디고 있는 땅이 무너지는 감각과 함께 나는 다시 새로운 공간에 도착했다.

이번의 시야는 내 것과 높이가 비슷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빼곡하게 책들이 가득 찬 서가였다. 내가 아는 샬덴 왕가의 서고였다.

내 육신은 망설임 없이 몇 권의 책을 뽑았다. 왕실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 같은 책들이었다.

무기로 쓸 만큼 무거운 책들을 가볍게 들고 움직이는 몸에 나는 신기함을 느꼈다. 열여섯? 열다섯? 그 정도 즈음 되는 소년의 몸은 힘이 넘쳤다.

‘전하. 제가 들겠습니다.’

시종 하나가 황급히 다가와 내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전하? 게일이 소년 시절부터 태자였던가?

시종은 전혀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다. 샬덴 왕실의 시종과 시녀들이라면 대부분 얼굴을 알고 있었는데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복도를 걷는 와중에도 속에서는 계속 의문이 생겨났다. 지나다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얼굴을 알지 못했다.

‘폐하께서 부르셨습니다, 전하.’

‘내가 가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아는 게일의 어투가 아니었다. 쾌활한 청년 같지 않았다. 서늘하고 예민한 어조였다.

나는 그제야 이상한 분위기를 깨달았다. 지나다니는 이들도, 게일을 측근에서 모시는 이들도 모두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샬덴의 왕궁에서 내게 그러했듯이.

‘허나 전하…….’

눈치를 보는 듯 애처로운 시종의 눈에 게일은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절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었다. 그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은 많았고, 미하일은 게일에게 일말의 애착도 갖지 않았으니까.

게일은 늘 눈치를 보고 예의를 갖추는 데 익숙한 인간이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게 아니라.

나는 게일의 방인 것 같은 곳에 도착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원래 그가 가졌던 방이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밝고 화사하면서…… 내 방 같았다.

게일의 시종들이 책을 놓고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아니, 그는 천천히 창가에 다가갔다. 창에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창에 비친 스스로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나는 이게 꿈인 걸 알면서도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이 열렸다.

‘과거를 바꾸고 싶었던 게 당신뿐이었을까요?’

이 꿈을 걷고 있는 날 향한 물음이었다.

게일 위버겐이라는 남자는 참 알기 쉬우면서도, 또 속내를 들여다보면 복잡한 남자였다.

꽤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가진 주제에 겉으로는 사랑만 받고 자란 청년처럼 방긋방긋 웃고 있었으니.

그는 몇 번이고 내게 자신의 과거를 흘렸다. 그리 큰 비밀도 아니었다. 샬덴에서는 암암리에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미하일부터도 딱히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하일은 늘 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게일을 버리겠다고 했으니까.

부모가 미하일의 손에 살해당했고, 그 후 살아남아 운 좋게 태자가 된 남자. 그건 단지 운이 좋다, 라고 표현할 과정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서의 그는 눈칫밥 먹는 왕족의 태도가 아니었다.

궁의 모든 이들이 게일의 눈치를 봤다. 마치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샬덴의 왕이 총애하는 핏줄을 대하는 것처럼.

꿈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여전히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걸음은 본궁의 문 앞에서 멈췄다. 소리 없이 걷는 시종의 얼굴이 처음으로 낯익었다. 다만 내가 알던 얼굴보다 10년은 족히 더 늙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시종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게일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얼굴 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미하일의 말은 늘 그렇듯이 묘하게 느릿하고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 모든 광경이 이상했다. 미하일은 게일과 뭔가 대화를 나누려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 작자는 게일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종종 들러야지.’

몸을 돌린 미하일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녹아 있었다. 적어도 내가 알던 미하일보다 몇 살은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은…….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얼마 남지도 않은 핏줄끼리 매정한 소리구나.’

미하일은 저런 말을 게일에게 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하면 했지.

‘그 핏줄이 줄어든 건 폐하의 탓 아닙니까?’

정말 게일이 말했다면, 미하일이 목을 자르고도 남을 발언에도 둘 사이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미하일은 너무 관대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꼭 마치 이자벨을 대하는 것처럼…….

‘네 아비를 죽인 게 아직도 원망스러우냐?’

미하일의 질문엔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게일은 거기에 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아직 자라지 않은 이 소년이 불쌍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네 아비는 반항조차 하지 않았어.’

‘폐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든, 제 눈앞에서 아비의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미하일은 미하일답지 않았고, 게일은 게일답지 않았다.

나는 순간 어지러워졌다. 까맣고 하얗게 일렁이는 눈앞에 몇 번 깜빡이고 나니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익숙한 곳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로윈 저택이었으니까.

파티가 열리고 있는 중인지 소음과 음악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밤이 깊었을 시간임에도 사람들은 제각기 돌아다녔고, 분위기든 술이든 취한 이들이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내 성인식이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홀 근처를 벗어나 천천히 어딘가로 걸었다. 복도는 깊어질수록 사람이 없었다.

하녀들이나 하인들이야 죄다 홀에 몰려나갔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일은 미리 아는 길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헷갈리지 않은 채 그는 이자벨이 모르는 문 앞에 섰다.

비어 있는 방이 아닌가?

‘안녕하십니까.’

알렉스였다. 나는 순간 치솟은 그리움을 억눌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그날 밤이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알렉스가 너무…… 멀끔했다. 내 기억 속에서는 항상 마르고 굽은 몸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였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오히려 이번 생의 알렉스의 소년 시절 같았다. 그보다 조금 더 작고 마르긴 했지만, 학대나 폭력을 당한 흔적이 없었다.

누가 봐도 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얼굴로 그가 속삭였다.

‘난 샬덴 왕을 알아. 너와 똑같이 생겼지.’

‘……어떻게 아십니까?’

‘본 적이 있으니까.’

내가 믿어왔던 상식들이 조금씩 부서졌다. 이건 꿈인가?

알렉스는 뭔가 비밀이 있는 노회한 권력자처럼 굴었고, 게일 또한 그러했다.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내가 살아온 생은 전부 기억하지. 지금은 없어진 생도.’

‘죽은 순간도 기억하십니까?’

‘그래. 죽은 순간도 기억하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게일의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나만 과거를 바꾸고 싶을 정도로 필사적일 것 같냐고?

인간은 누군가 후회를 하면서 산다. 그 절실함이 다를 뿐 후회는 인생의 당연한 부산물이었다. 나 말고도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후회했겠지.

하지만 알렉스나 게일이 나처럼 과거로 돌아가 새 인생을 산 적이 있었다고? 한 세대에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기적과도 같은 일은…… 내게 주어진 게 아니었나?

침묵이 길어졌다. 대화 사이의 침묵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년의 모습인 알렉스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게일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나를 아는 것처럼.

아닌 걸 알면서도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빡였다.

몸이 내 뜻대로 움직였다. 꿈이면 그럴 리가 없었는데.

‘……왜 다들 꿈이라고 생각할까요?’

알렉스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이건 꿈이니까!”

내 목소리였다. 나는 내 목과 얼굴을 더듬더듬 만졌다. 손끝에 내 금발이 얽혔다.

“이게…… 뭐야?”

“왜요? 정말 꿈이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리가 없잖아요.”

알렉스는 내게 웃었다. 소년의 형상을 하고 있던 그가 몇 초 만에 나이를 먹듯이 서서히 내가 알던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냥 꿈인데, 왜?”

그는 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황급히 물러났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보여요?”

이상한 일이지. 다정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그냥, 그냥 내가 아는 알렉스로…….”

알렉스의 손이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나는 너무 익숙한 알렉스의 얼굴에 차마 손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당신 사랑만 받고 큰 그 머저리로 보여요?”

“……넌 누구야?”

“누구겠어요?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알렉스지.”

내 몸에 닿은 알렉스의 몸이 기묘했다. 마치 구름이나 햇살에 닿은 것처럼 감각이 흐릿했다.

그리고 알렉스 또한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그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솜털이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역시 진짜로 보고 싶어요.”

알렉스의 품에 안겨 있자 온몸이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나를 안고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당신도 그렇죠? 날 사랑하잖아.”

가깝게 들리는 목소리도 아득했다. 나는 알렉스가 알렉스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내 알렉스는 날 기억 못 해.”

“곧 기억하게 될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

알렉스는 내 부정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괜히 내가 조바심이 나서 물었다.

“넌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너도 돌아온 거야? 넌 누구야? 무슨 목적이지?”

그는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내 이마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내 목적이야 늘 하나였잖아요. 당신 마음.”

“……그날 무슨 일이 있었어? 왜 내 앞에서 뛰어내렸던 건데!”

“말하면 날 미워할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는 그 말에 신기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다 웃었다.

“이렇게 착하고 순한 당신은 처음이네요, 이자벨.”

발밑이 또 부서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눈 감아요.”

그가 내 눈을 가렸다. 목소리는 달았다. 아주.

“이제 떠요.”

눈을 떴을 때, 나를 안고 있던 알렉스는 보이질 않았다. 나는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내게 알렉스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시끄러운 곳으로 가요, 이자벨.”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아주 먼 곳에서 온 메아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온갖 고함과 뛰어다니는 소리가 가득한 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익숙한 로윈 저택의 복도를 걸으면서 하녀들이 뛰어가는 쪽으로 걸었다.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귀청을 찢을 것 같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불길한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왜요? 이자벨, 당신이 궁금해하던 우리의 첫 번째 인생인데…….”

마치 내 등을 떠미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냄새 따윈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나였다. 창백하고 마른 얼굴로 죽어 있는 나. 그리고 그 옆의 알렉스.

“……누구야?”

끊임없이 우는 아기가 알렉스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알렉스는 내 시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이를 달래 줄 생각도, 쳐다볼 생각도 없어 보였다.

“우리 아들이요, 이자벨.”

내 죄책감을 자극하듯 어두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공격했다.

“당신이 버린 우리 아들이에요.”

나는 포대기에 감싼 아기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는 없는 인생이었고, 없는 기억이었다.

“나도 버리고, 우리 아들도 버리고…….”

내가 있던 공간은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알렉스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너 살쯤 되었을까. 아이의 노란 뒤통수가 보였다.

알렉스에게 짧은 팔을 뻗는 아이는 어린 시절의 나를 연상시켰다. 로윈 백작에게 되지도 않는 손을 뻗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그러나 알렉스는 로윈 백작과 다르게 아이를 안아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몸짓이었지만, 아이는 그것도 기뻐 손을 이리저리 바둥거렸다.

“……이름이 뭐야?”

“없어요.”

“뭐?”

“굳이 지을 필요를 못 느꼈어요. 별로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알렉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잔인했다.

“그럼 저 애는 어떻게 자라?”

“몰라요. 난 곧…….”

순간 장면이 다시 빠르게 흘렀다. 나는 익숙한 미하일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반항 하나 없이 미하일의 검에 몸을 내준 알렉스도.

“……죽거든요.”

태어날 때처럼 커다란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금발이었던 머리카락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대여섯 살 정도 되는 아이는 필사적으로 알렉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아 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손을 잡아 주고 싶을 만큼.

“울어요, 이자벨?”

웃음기 섞인 알렉스의 목소리가 잔인한 장면과 대비되어 소름 끼쳤다.

“내가 죽는 게 슬퍼서 우는 거구나. 당신. 그렇지?”

“네 아들이잖아.”

“당신 아들이죠.”

마치 그림처럼 멈춰 선 장면에 나는 눈을 감았다. 죽은 알렉스도, 우는 아이도, 웃는 미하일도 전부 보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가 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나는 사람보다는 구름에 안긴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차라리 다행이라고 느꼈다.

현실과 괴리된 감각이 그나마 내가 정신을 붙들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에.

“보기 싫어요?”

“……그래.”

“다 당신이 저 애와 나를 버려서 그래요. 그러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알렉스는 내 물음에 멈칫했다. 그는 말을 고르듯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비슷하죠. 의원에게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야 한다고 협박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잖아.”

알렉스가 서늘하게 속삭였다.

“……그 이틀 전에 저택에 있는 지혈제를 죄다 태워 버린 걸 몰랐다면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네요.”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지?”

“죄책감 때문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내게 말했다.

“항상 당신을 무너트리는 건 그 감정이었으니까.”

알렉스는 이 고고하고 오만한 아가씨가 절대 타인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늘 그녀가 스스로 한 행동들의 결과에 무너졌다. 어찌 보면 지독히 오만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도 널 괴롭히거나…… 그랬니?”

“아뇨. 우린 아주 사이가 좋았어요. 너무 좋았죠……. 내가 당신을 위해 백작을 살해할 만큼.”

그는 돌아보는 이자벨의 얼굴에 웃었다. 충격에 일그러진 표정도 예뻐서였다.

알렉스는 그냥 이자벨을 본다는 사실이 좋아서 웃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웃을 수가 있어?”

“난…….”

“아버지를 죽였다고? 네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다는 게 그렇게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소리야?”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알렉스는 오히려 차분하게 대꾸했다.

“당신한테는 진짜 아버지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더 문제야. 알렉스…… 네 아버지라고.”

본인이 사생아라는 걸 깨닫자마자 이자벨이 그에게 한 소리와 거의 똑같았다. 알렉스는 도대체 그게 왜 중요한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자벨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았다.

이자벨이 백작의 친딸이든 아니든, 그게 알렉스가 백작을 살해한 사실에 무슨 영향을 주는 건지 여전히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알렉스를 가만히 응시하던 이자벨이 허탈하게 웃었다.

“넌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는 해?”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이자벨. 난 백작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잖아요.”

애초에 백작도 알렉스도 서로 애정이란 것을 보이거나 원한 적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기대는커녕 흥미 한 조각조차 서로 느끼지 못하는 무관심한 사이였다.

알렉스 또한 백작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고, 백작 또한 알렉스를 딱히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둘의 관계는 남보다 못했다. 오히려 서로에게 애증을 느끼는 것 같은 이자벨과 로윈 백작 사이가 더 가족 같았다.

“백작도 내게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을걸요. 우린 사실 남에 더 가까웠으니까.”

“그렇다고 백작이 네 아버지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잖아.”

이자벨의 말은 날카로웠다. 생각해보면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백작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심지어 대신 처리하겠다는 알렉스를 반쯤 말리기까지 했으니…….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정작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이자벨과 로윈 백작이 더 가족 같다는 것은.

그는 어렴풋이 확신했다. 백작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도 그가 아닌 이자벨을 향한 것이라고. 그래서 이자벨이 후회할 거라고.

그녀는 정말 후회했다.

백작은 이자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이제는 살아 있는 백작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자벨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넌 나 때문에 네 아버지를 죽인 거야.”

“그건 당신이 사생아라는 걸 알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어요.”

“후계자와 찬탈자는 달라.”

정당한 권리를 가진 후계자가 제 아비를 죽이고 그 자리를 계승하는 것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이가 자리를 찬탈하는 것은 달랐다. 적어도 이자벨에게는 그랬다.

이자벨 로윈이라는 여자는 그렇게 태어나면서부터 귀족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각 한 줌까지도.

전통과 명분보다 부와 권력이 더 대단하다고 알렉스에게 내내 가르쳐왔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정당한 권리와 핏줄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것은 이자벨을 이루는 근본적인 토대이자 꺾이지 않는 고고함이었다.

그리고 유년의 단 한 순간도 제대로 된 귀족으로 살아본 적 없는 그는 이자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고, 납득시킬 수 없는 것을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

“……하지만 이제는 백작도 살아 있잖아요. 난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요. 이자벨.”

이자벨은 침묵했고, 알렉스는 이자벨의 뺨과 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건 이제 없어진 생이잖아요.”

그녀는 소름이 끼친 듯 알렉스를 응시했다.

“……어떻게 시간을 되돌렸어?”

“내가 되돌렸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알렉스는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웃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피는 당신 몸을 타고 흐르는데…….”

순간 이자벨은 진실을 깨달았다. 여전히 그림처럼 멈춰 있는 공간 속에서 여전히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스의 시체를 향해 뻗은 작은 손만 봐도 절박함이 보였다.

“한 세대에 한 명만.”

알렉스가 이자벨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닮았나 봐. 우리 아들도 기적을 가진 걸 보면.”

“저 애가…… 시간을 돌렸어?”

이자벨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럼 넌 어떻게 기억해? 네가 당사자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 아들은 당신처럼 과거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빈 게 아니니까.”

그는 사실, 이건 살아온 인생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이자벨은 자신이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새로 시작할 기회를 원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가 죄다 죽어 버리고, 원수의 손에 자라게 된 아이는……. 글쎄. 내가 그 애였어도 기회가 아니라 결과를 원했겠지.

“게다가 그 애가 원했던 건, 그 애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졌는데 과거로 돌아가 봤자 뭘 하겠어?”

“저 애는 널 원하고 있어.”

“우리 아들은, 가족을 원해.”

구체적으로는 자기를 사랑해 줄 부모를. 나 같이 당신 생각만 하느라 애정 하나 주지 않는 부모가 아니라.

“그래서? 그게 네가 전생을 기억하는 이유와…… 잠깐, 알렉스. 그럼 너 그날 다락에서 떨어질 때……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어?”

이자벨의 기억 속에서 평생 잊혀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장면이었다. 마르고 창백한 얼굴 위로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카락.

“……왜 떨어졌어?”

“나를 기억해 달라고.”

드디어 알게 된 그날의 알렉스의 진심이었다.

날 원망해서일까 세상이 힘들어서일까 한참을 고민했던 게 어이없을 만큼 대답이 쉽게 나왔다.

알렉스는 처음부터 원하던 것은 하나였던 것처럼 내게 진심을 고백했다.

“당신 사랑이 받고 싶어서.”

“…….”

“사랑해 달라고.”

그래서 그랬어요.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질문이 나갔다.

“왜?”

“세상에, 이자벨. 정말 그 이유를 몰라요?”

주위의 살벌한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알렉스는 푸스스 웃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안다. 이제는 알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내게 고백해 왔다. 몇 번의 생을 돌아 늘 같은 감정을 내게 고하는 남자.

“그러니까…… 왜? 왜 날 사랑해?”

사랑을 증명해 달라는 연인 간의 물음 같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알렉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 생을 제외하고서는 이자벨은 알렉스에게 살갑게 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적의를 드러내거나, 이용하는 쪽에 가까웠지.

만약 알렉스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 만들어진다면 1막부터 등장할 치졸한 악역이 바로 이자벨이 될 것이다.

“몰라요.”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필사적인 질문을 쉽게 치워 버렸다.

“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깨닫는 것도 십 년이 걸렸는데. 왜 사랑에 빠졌는지까지 알기에는 내가 너무 멍청해서.”

과정이 뭐가 중요해요. 결과가 중요하지.

속삭이는 말이 달았다. 그리고 맹목적이었다. 나는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난, 나는 너한테 갈 생각이 없어. 결혼식도 곧, 바로…….”

“우리 아들이 어떻게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는지 더 궁금하지 않아요?”

내 말을 자연스럽게 끊어 버린 알렉스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시체를 향해 뻗은 아이의 손에 내 손을 끌어다 겹쳤다. 여전히 구름을 만지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손끝에 남은 감촉은 바람 같았다.

내 아들이라고…….

천천히 아이가 흩어졌다. 알렉스의 시체도. 미하일도. 이 공간도.

알렉스가 내게 속삭였다.

“난 당신이 우리 아들도 동정했으면 좋겠어요, 이자벨.”

나는 어느새 샬덴의 왕궁 복도에 서 있었다.

저 멀리서 미하일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가까이 와서야 그가 품에 아이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몸을 통과해 지나쳤다.

이상한 기분에 눈을 찌푸리기가 무섭게 반대편에서 조금 더 자란 아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아들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는 몹시도 미하일을 닮아 있었다.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뺨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기시감에 뚫어져라 아이를 쳐다봤지만, 그녀를 보지도 못한 것처럼 지나쳤다. 그리고 또 반대편에서 방금 사라진 아이보다 자란 아이가 걸어왔다. 이내 반대편에서 또 조금 자란 아이가.

몇 번을 반복하면서 아이는 소년이 되었고,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이자벨은 그때부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아이는 미하일을 분신처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이자벨은 그런 남자를 이미 하나 알고 있었다. 단지 닮았다고 하기에는 지독하게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아는 게일과.

“우리 아들은 정말 똑똑해요, 이자벨.”

게일과 똑같이 생긴 청년은 거의 웃지를 않았다. 어딘가 넋이 나간 것 같았고, 종종 책에 몰두했다.

나는 내 아들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했다.

아이가 청년으로 자랄 때까지, 그 애는 한 번도 사람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장갑 따위를 끼지 않았다.

곁에 사람이 있는 걸 꺼리기는 했지만, 접촉에 대한 거부감이나 고통을 느끼진 않는 것 같았다.

그냥 샬덴의 왕가에서는 저리 닮은 인간들이 많다고…….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복수가 아닌 다른 걸 바라다니. 똑똑하기도 하지.”

미하일은 조금씩 눈에 띌 만큼 나이를 먹어 갔다. 나는 허공에 부유한 채 이들을 신처럼 굽어봤다.

잿빛 머리카락의 청년은 미하일을 증오하는 것 같았지만, 그를 증오하는 데 시간을 쓰질 않았다.

미하일은 그런 청년을 건드리지 못했다. 내게 그러했듯이.

어느 순간에,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늙은 수사자 같은 미하일이 청년에게 물었다.

‘넌 내가 죽어야 나를 돌아볼 테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폐하.’

청년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는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폐하께서는 저보다 오래 사실 테니 말입니다.’

죽음을 암시하는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나는 저 청년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저 청년의 죽음에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낳지도, 기르지도 않은 이에 대한 모정일 리는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원초적인 동정에 가까웠다. 겨우 걷기 시작할 때 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어미가 삶을 놓아 버리고, 아비도 그 뒤를 뒤따라갔다.

나는 저 청년의 소원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뭘 바랐을까. 어린 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이는.

이건 내게 일어난 모든 사건과 삶의 시작점이었다. 나는 저 아이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바꾸었는지가 알고 싶었다.

봄 햇살이 느리게 흘러들었다. 정원에서는 새소리가 새치름하게 울려 퍼졌다. 잿빛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아 거의 은색으로 보일 만큼 빛나고 있었다.

청년은 가만히 목에 건 펜던트를 끄집어냈다. 낡고 고풍스러운 게 눈에 익었다.

“저거…….”

“당신 어머니가 당신한테 유품으로 남겼고, 당신도 우리 아들한테 남겼죠.”

그는 가만히 펜던트를 내려다보다 웃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그의 미소였다. 어딘가 후련하기까지 해 보이는 미소로 그는 펜던트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대로 그 펜던트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마치 더 이상은 필요 없다는 듯이.

나는 미련 없이 성큼성큼 걸어 멀어지는 청년의 등과 잔디 위에 떨어진 펜던트를 응시했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저 애, 지금 죽으러 가는 거구나.

이게 현실이 아닌 과거의 기억인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으려 했다. 투명한 내 손이 그의 몸을 통과했다.

“왜요. 이자벨? 우리 아들이 불쌍해요?”

알렉스가 내 손을 붙잡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봄 풍경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저 애는…… 무슨 소원을 빌었어?”

“어떤 소원일 것 같아요?”

새로 조립되는 샬덴 왕궁의 풍경 위에서 알렉스는 내게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 아들은 너무 똑똑했다고. 고작 한 번의 기회를 빌지 않았죠.”

“그럼?”

“정확한 건 그 애만 알고 있겠죠. 확실한 건 하나뿐이에요.”

순간 끔찍한 비명이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식은땀에 잔뜩 젖은 여자가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여자는 방문 하나를 열어젖혔다. 방 안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어린 애가 하나 있었다. 여자는 그 아이의 목에 펜던트 하나를 걸어 주고 다시 문을 닫았다.

아이는 비명과 애원으로 범벅된 소음 속에서도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 아들은 소원을 빌었고, 신은 그 애한테 기억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했죠.”

“게일…….”

내 중얼거림에 알렉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난 그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샬덴의 왕이 붙여 준 이름이잖아요.”

내 추측에 대한 답변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잠든 아이의 웅크린 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 애가…… 게일이야?”

내가 아는 그 남자가 맞냐고. 몇 번의 생에서 반복해서 내 앞에 등장했던 그 남자가 맞냐고.

“……우리 아들이죠.”

처음으로, 내가 아는 장면이 이어졌다.

밤의 어둠에 잠긴 내 방.

이불 속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다가오는 게일을 보지도 못하고 나는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가. 나가라니까!’

몸을 반쯤 일으킨 내 짜증 섞인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게일?’

게일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그의 몸이 그대로 내게로 무너졌다. 나는 놀라 그 몸을 엉겁결에 받아 지탱하면서…….

“……내가 저랬어도 받아 줬을 거예요?”

알렉스가 내 등을 감싸 안았다. 나는 그게 현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오싹해졌다.

나는 현실감이 없는 사실을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내 아들이라고, 저 남자가……?”

단어 하나마다 낯설었다. 나는 내 입 밖으로 나간 소리의 낯설음에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왔다.

알렉스는 뭐가 좋은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에 갇힌 것 같았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공간이 무너지고 나는 순식간에 로윈 저택의 다락에 서 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 게 더 중요하지.”

나를 안고 있던 알렉스는 어느새 커다란 다락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떨어지던 그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얇은 흰 셔츠. 창백하고 마른 몸.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나를 응시하는 청회안.

“날 잡고 싶어 했잖아요, 이자벨.”

내가 손을 뻗었던 것처럼. 알렉스가 내게 손을 뻗었다.

생과 생을 돌아, 과거와 현재가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이리 와, 이자벨.”

내가 했던 말이 알렉스의 입에서 똑같이 흘러나왔다.

“제발…….”

여유를 가장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절박한 눈이 감춰지지 않았다. 내가 과거에 그랬듯이.

너는 날 사랑해.

의심할 수도 없을 만큼 절대적인 사실 같이 뇌리에 그 말이 박혔다.

세 번의 생을 돌아서, 한 번도 같지 않은 만남과 기억을 품고서도.

똑같이 날 사랑했어.

“이번에는 날 버리지 마, 이자벨. 나한테 기회를 줘.”

이 얼마나 지독하고 순진한 사랑인가.

“이번에는 아무 짓도 안 했잖아. 난 다 당하기만 했어. 그러니까 제발…….”

몇 번의 생을 돌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너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될까.

“다시 시작하자, 이자벨. 이리 와.”

얼마나 많은 생을 거치면, 네가 나를 버릴까.

“내 이번 생의 선택은…… 전부 널 위한 거였어.”

네 고백을 저버리고, 네 곁을 떠난 것조차 전부 널 위해서 한 선택이었는데…….

네 인생에서 내가 없는 게 나을 거라는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어.

“너 때문에 남은 인생이 시궁창으로 떨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널 위해서 네 말을 듣지 않았는데.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을 더 죽으면 당신이 날 이해할까?”

그는 여전히 내게 손을 뻗은 채였다. 손끝이 떨렸다.

“사랑해. 당신 없는 인생은 없는 게 나아.”

아주 형편없는 협박이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현실처럼 틀어박혔다.

“내가 죽기를 바라? 아니면 이리 와, 이자벨. 내 손을 잡아…….”

내가 그의 손을 잡는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나는 샬덴의 왕궁일 것이고, 알렉스는 아를의 수도에 자리한 로윈 저택에 있겠지.

우리는 서로를 보기 위해서 열흘 밤낮을 말을 달려야 했고, 그조차도 국경이라는 것에 가로막혀 할 수 없었다.

전쟁. 내가 저 손을 잡으면, 전쟁이 벌어질까. 알렉스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오게 되는 걸까. 결국 누구 하나가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전쟁이 벌어지게 되겠지.

많은 목숨이 사라지고, 알렉스의 목숨조차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지? 죽는 것보다 내가 떠나는 게 더 싫다는데.

나는 늘 알렉스에게 물렀다.

결국 나는 멈칫거리면서도 알렉스의 손을 붙잡았다. 구름 같은 감촉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알렉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체념한 듯 웃었다.

“……그래, 같이 죽자. 알렉스.”

전쟁에서 알렉스가 죽을 수도, 미하일이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떤가. 우리는 또다시 생을 반복할 테고, 한 번쯤은 해피 엔딩이 있겠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네가 말했던 것처럼.”

이게 사랑일까.

엘리자베스는 나한테 내가 알렉스에게 갖는 감정이 집착이라고 했다.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널 위해 죽는 게 아니라, 너랑 함께 죽고 싶은 거면, 그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너처럼은 아니라도, 나도 사랑이지 않을까.

네가 바라던 것처럼 나도 널 사랑하는 게 아닐까.

“……사랑해, 알렉스.”

나도 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밖에 사랑할 수가 없는 건가.

“이자벨…….”

그는 그 자신의 감정에 벅차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는 그 얼굴에 스친 수많은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환희와 안도, 그리고 탐욕만을 간신히 그 안에서 찾아냈다.

옛 기억과 똑같이 다락에는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 자리한 청회안은 그때처럼 텅 비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 그 안에 담고 있었다. 자기 시선 안에 나를 가두려는 것처럼.

나는 그의 시선 안에 얌전히 갇힌 채로 웃었다. 제대로 웃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이제 미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내가 해 왔던 모든 일과, 내가 믿었던 모든 사실이 뒤집혔다. 어쩌면 알렉스가 나를 속였다고 비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는 대신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그 애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내가 필요하다고 손을 뻗었기 때문에.

그냥 알렉스라서.

그게 이유가 된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소리겠지.

하지만 그 어떤 비이성적인 선택도 용납할 수 있는 게 사랑이라지 않은가. 그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렉스를 사랑해 온 셈이었다.

[4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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