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달라진 것들.(2)
그로부터 나흘 뒤, 알렉스의 기억에서 내가 사라졌다.
더 이상 나를 원한다고 할 수 없는 남자를 두고,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네가 원한다면 난 네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네가 원한다면…….
서궁으로 돌아온 나는 고통에 깨어나지 못하는 게일의 곁을 지킨 채 멍하니 숨만 쉬고 있었다.
내가 옳았다고 믿고 싶었다. 알렉스의 기억을 건드린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이틀을 내리 앓았던 게일이 겨우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를 향해 속삭였다.
“……돌아가요, 우리.”
게일의 바싹 마른 입술이 힘없이 움직였다.
“다 괜찮을 거예요, 이자벨.”
그제야 나는 모든 게 끝났다는 것처럼 울 수 있었다. 몸에 있는 모든 수분을 뽑아낼 것처럼 한참을 울었다.
“괜찮아요, 이자벨. 괜찮을 거예요.”
뭐가 괜찮은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 말에 위로받았다.
하루를 울고, 다음 하루에는 엘리자베스를 만났다. 그녀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말하는 내게 별다른 말을 건네진 않았다. 언제든 찾아와도 굶겨 죽이지는 않겠다는 말을 농담처럼 던졌을 뿐.
다음 날에는 샐리를 만났다. 그녀는 나를 붙잡고 나보다 더 울었다. 더듬더듬 죽은 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샐리는 내가 행복하길 늘 바랐다고 했다.
“……아가씨는 도련님이랑 함께 있을 때 행복해 보이셨어요. 도련님을 만나고서부터 변하셨잖아요.”
어떤 의미로든 나와 알렉스가 가족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샐리에게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를 잘 부탁해. 절대 내 이야기는 하지 말고. 나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봤자 좋을 일이 없잖아.”
“하지만 아가씨는요?”
“나는 곧 스물다섯 살이 돼, 샐리. 믿겨져? 내가 스물다섯이라는 게? 내가 스무 살에…… 죽지 않았다는 게?”
덤과 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저번 생은 스무 살에 죽었는데, 이번 생은 스물다섯이 되도록 죽을 기미가 없으니.
알렉스는 열여덟에 죽지 않았고, 나도 스무 살에 죽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몰라도 알렉스는 앞으로 행복해지겠지.
“나는 그걸로 충분해.”
“……샬덴에서 아가씨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조금은.”
이전 생에 스무 살에 죽을 때는 미련이 남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소중한 거라고는 가문뿐이었으니까.
“난 거기서 널 생각할 거야, 샐리. 그리고 알렉스도.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고, 그걸로 나는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샐리는 내 말에 끝까지 납득하지 못했지만, 결국 내 말을 들었다.
헤어지기 전, 나는 문득 든 생각에 그녀를 붙잡았다.
“아가씨?”
“알렉스가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네가 그 애를 돌보겠지?”
본채에 한해서는 가장 권한이 큰 하녀가 바로 샐리였으니 아이의 교육이나 어떤 하녀를 붙일지 따위의 사소한 것들은 모두 그녀가 관리할 것이 분명했다.
“바라시는 것이 있으세요?”
“그 애가 딸이면, 내 방을 줘.”
샐리가 그랬다. 매일 내 방을 쓸고 닦았다고.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셈이었다. 샐리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새 아기씨가 아주 예쁜 금발에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전 겨우 하녀 주제에 그 아기씨의 이름을 이자벨로 짓자고 할 거예요. 그리고 아가씨의 방을 주고, 정성을 다해 새 아기씨를 모시겠죠. 하지만 아가씨…….”
샐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저는 새 아기씨를 아가씨만큼 아끼지는 못할 거예요.”
“……고마워.”
나는 겨우 샐리와 이별했다.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날 키운 하녀였다. 어쩌면 내 엄마 노릇을 했던 여자가 아닐까. 나는 그녀와 헤어지고 하루 반나절을 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시그니티를 만났다.
나는 시그니티가 자기 사촌 형제를 살해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앞에서 아들을 죽이면서, 죽은 듯이 살라고 말할 때의 시그니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도. 내게 늘 웃기만 해 줬던 그 잘생긴 얼굴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졌는지도.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내가 없던 아를의 7년을.
“……네가 찾아올 줄 알았어, 벨.”
시그니티는 아를의 왕이 써야 하는 집무실의 책상에 자연스럽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내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이내 그의 입이 열렸다.
“7년 전 우리가 헤어지던 날,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
서류가 아무렇게나 뒤엉켜 있는 이 방은 왕의 집무실이었다. 방을 느리게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한마디만 해. 그럼 난 널 위해 이 나라를 가질 거야.”
7년 전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 같았다. 말 없는 내게 시그니티는 쓰게 웃었다.
“넌 끝까지 한마디도 안 했어, 벨.”
“난 네가 날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왜?”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이 자리에서 네가 조금쯤 소중해져서 그랬다는 얘기를 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별을 말하려고 와서 할 소리는 아니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이유는 나도 알아, 벨.”
꽤 길어진 붉은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졌다. 시그니티는 확실히 변했다. 7년의 시간 동안.
“내가 할 수가 없는 일을 바라기에는 넌 너무 나한테 착해졌으니까.”
그는 절대 이런 식으로 내게 질문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내게 원망하듯 말하는 그런 남자가.
“넌 내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내가 너무 가벼웠나 봐, 벨. 너한테 아무 믿음도 못 줄 정도로.
시그니티는 작지만 확실하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반대지, 시그.”
시그니티는 마치 내 말의 진위를 파악하듯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내 말이면 뭐든 믿었으니까. 그게 설사 거짓말이라도.
“네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았어. ……그래서 그랬지.”
“부담스러웠어?”
“……누군가의 희생을 보고만 있는 건 어려운 일이지.”
“부담스러웠군.”
“그래.”
“처음부터 내가 아를의 왕이었으면 달랐을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웃었다.
“냉정하네, 벨.”
희망 고문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시그니티는 가만히 책상에 기대앉은 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눈이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도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처럼 굴어야 했을까. 널 가두고, 강제하고 그렇게……?”
“네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모든 게 쉬웠겠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서, 그게 안쓰러워서 정을 줬으니 말이다. 내 싫다는 말 한마디로 꺾을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았겠지.
“……넌 너무 좋은 사람이야. 그러지 못하잖아.”
“벨. 내가 너한테 아무 짓도 못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야. 상대가 너라서 그런 거지.”
시그니티는 나를 바라보며 어둡게 웃었다. 억지로 지은 미소 끝이 떨렸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서 기회를 주는 건가? 내 기억을 건드리지 않을 자비를 베풀려고?”
그는 어쨌든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였다. 왕과 다름없는 시그에게 알렉스의 일 따위는 아주 빠르게 귀에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넌 선택할 수 있어, 시그. 이대로 날 그냥 포기할지, 아니면 나라는 사람을 기억에서 아예 지워 버릴지…….”
“널 강제하지 않은 대가로 주는 게 고작 그런 선택의 기회야?”
무기력한 음성과 함께 그의 고개가 떨어졌다. 젖은 목소리가 흔들렸다.
“벨,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
나는 고개를 돌렸다. 사랑하지는 않아도 좋아했던 남자였다. 내 말에 달도 따다 줄 것처럼 굴었던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기억을 지워, 시그.”
네 인생에서 내가 사라지는 게 너한테는 더 편하겠지. 나 때문에 아무것도 괴로워할 필요가 없게 될 거야.
“날 이렇게까지 만들었던 유일한 여자를 내 인생에서 지우라고?”
그는 자신이 걸터앉은 책상 위에 손을 얹으면서 속삭였다.
“벨.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어. 권력을 갖고 싶지도, 내 사촌을 죽이고 싶지도 않았어.”
“알아.”
“다 너 때문이었어.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변한 건.”
원망하는 어조가 아니었다. 그는 담담하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시그는 한 번도 자신이 날 위해 한 행동에 내 책임을 묻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널 지워 버리면? 지금 나를 만든 게 넌데, 네가 없어지면…… 난 이 자리에 있는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기억을 지운다고 지나온 시간이 사라지지는 않아.
시그니티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머뭇거리면서도 느릿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는 나를 끌어당기지도, 붙잡은 내 손을 아플 만큼 쥐지도 않았다. 예전에 우리가 가끔 손을 잡았을 때처럼,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내 손을 잡았다.
“날 버리려고 왔지?”
“버리는 게 아니야. 그냥…….”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묘하게 허무한 미소였다.
“넌 날 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어, 벨. 내가 네 거니까.”
정말 버림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도 비참하게 중얼거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는 내게 눈을 맞춘 채 물었다.
“네 고향, 가족. 네가 아를에서 쌓아온 인연, 성과까지. 그 모든 것들을 두고 가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내가 후회한다고 하면?”
“널 잡겠지.”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눈을 맞췄다. 계속 피해 왔던 것을 멈추고.
“시그, 넌 정말 네 말을 지켰어.”
나를 갖고 싶고, 옆에 두고 싶어 했던 남자 중에 시그니티만 유일하게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대신 사랑해 주려고 애썼고, 자신의 욕심보다 내 욕심을 우선시했다.
“넌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지야. 시그. 네 말이 맞아. 너한테 가면 난 분명 행복해질 테지. 넌 날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날 행복해지게 만들어 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게 만드는 상대.
그와 함께하는 미래가 또렷하게 그려졌다. 전쟁이고 알렉스고 날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나와 함께 지탱해 줄 그가.
그런데…….
“……그래도 난 아니야?”
응. 그래도 넌 아니야. 나도 내가 미친 것 같은데, 그래도 너한테 갈 수는 없어.
“이대로 가 버리면, 넌 불행해질 거야. 많이 울겠지, 내 아가씨. 정말 그래도 난 안 돼?”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끝이 내 손바닥을 쓸었다.
“맞아. 난 많이 울겠지. 어쩌면 후회할 수도 있어. 그것도 꽤 많이.”
“날 버리고 가서 불행해지면 내가 어떻게 놔주라고?”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은 여전히 다정했다. 내 손짓 한 번이면 떨쳐낼 수 있을 만큼 가벼웠고.
부담스럽지 않게,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다가오는 다정함. 나는 이제 그게 날 위해 꾸며진 모습인 걸 알았다. 마지막까지도 날 위해 그 모습을 버리지 않을 남자라는 것도 알았다.
“있잖아, 시그…….”
인간은 진짜 이상해. 더 좋은 길을 놔두고 다른 길을 가는 이상한 족속이지. 무슨 본능이 시켜서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걸까.
“나는 불행해도 괜찮을 거야. ……하지만 내 불행이 네 불행이 된다면, 난 그걸 없애줄 수 있어.”
시그는 아주 느리게 내 손을 놓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서 널 빼앗아가지 마. 넌 내 게 아니어도, 내 기억 속의 너는 내 거잖아.”
……그 정도는 허락해 줘.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길이 아니라, 불행해도 괜찮도록 만들어 주는 길을 택했다.
행복하지는 않겠지.
미하일의 소름 끼치는 눈이 생각났다. 내 기분은 저 시궁창 밑바닥 어딘가를 맴돌고 있을 것이 뻔했다.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나를 잊었고, 내 고향과 인연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신기루가 되었을 것이고, 나를 나로 보지 않는 남자의 눈이 계속 나를 따라다니겠지.
거기서 행복은 무슨. 미치지나 않으면 다행이 아닐까.
그래도…….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스무 살이 넘었어도 살아 있었고, 알렉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시간은 멈추겠지만, 알렉스의 시간은 흘러가겠지. 그 애는 더 많이 자라고 더 많은 것을 겪고, 얼굴의 주름이 깊어질 때까지 오래오래 살 것이다.
다락의 창 너머로 몸을 던지는 알렉스의 회색 눈동자에는 푸른빛이 돌고는 했다. 격렬하게 박동하는 감정을 수면 아래에 감춘 채 고요하게 비어 있던 그 눈이.
나는 이제 평생 그 눈 안에 무엇을 채워갈지 알지 못하겠지만, 괜찮았다. 이제 알렉스는 이루지 못할 것을 꿈꾸느라 괴로워하지 않을 테니까.
그 애는 더는 전쟁을 겪지 않을 것이다. 그걸로 충분했다.
내가 아를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은 마리사 구드윈의 장례식을 하는 날이었다.
내가 납치된 날처럼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날이었다. 장례식은 우중충했고, 참석한 누구도 많은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가 많았고, 언제 죽더라도 놀랍지 않을 만큼 미리 신변을 정리해 두었기에 장례식은 고요했다.
한구석에 숨어 서 있는 내 뒤로 유진이 다가왔다. 그는 몹시 태연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아마 곧 형님도 따라가실 거야. 고맙다고 해야 하나?”
구드윈 백작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예상했다는 것처럼.
“유진이 죽일 건 아니겠죠?”
“그럴 필요도 없어.”
마리사 구드윈에게서 나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나는 그 뒤로 딱 한 번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몹시 온화한 표정이었다. 당장 세상을 떠나도 미련이 없다는 듯 맑은 얼굴이었다.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던 마리사는 그냥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인간은 원래 간절하게 바라왔던 것이 사라지면, 사는 게 좀 귀찮아지잖아.”
유진은 장례식에 맞지 않게 씩 웃었다.
“뭐, 나이도 있으시고.”
참 마음도 편하시네. 내 탐탁지 않은 시선에 유진이 손가락으로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보여? 내 귀여운 아들이야. 이제 다시는 못 보는데, 삼촌 얼굴은 알아야지.”
물론 유진이 내 할아버지뻘이니 유진의 자식은 삼촌뻘이 되겠지만…….
“……몇 살이죠?”
거기에는 스무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웬 곰 같은 게 서 있었다.
“스물다섯. 아, 내가 안 말했나? 나 결혼 좀 빨리했어.”
유진은 내 어깨를 살짝 감싸 안고는 속삭였다.
“저 애가 다다음 대 구드윈 백작이 될 거야.”
평생의 꿈을 자랑하듯 뿌듯하게 속삭이는 말에 나는 문득 내 예전 모습이 생각났다.
‘저 애가 다음 대 로윈 백작이 될 거예요.’
나도 저렇게 상대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을까.
* * *
신디아는 알렉스가 이 저택에 처음 온 10살 때부터 그를 모신 하녀였다.
처음에는 그저 사생아 도련님을 모시는 일이기에 겨우 기사의 딸인 신디아에게 가문의 직계를 모시는 영광이 주어졌다.
사실 사람들도 설마 설마 했겠지. 사내아이라 해도 정당한 핏줄의 첫째 딸을 두고 사생아에게 물려줄 거라 생각이나 했을까.
신디아의 인생은 그 이후로 급속하게 변했다. 겨우 기사의 딸인 신디아는 알렉스 로윈이 능력을 증명하고 권력을 얻을 때마다 덩달아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마침내 알렉스 로윈이 후작의 자리를 거머쥐었을 때, 신디아는 로윈 가문 전체를 관리하는 하녀장이 되었다.
집사인 루크는 늙었고, 서서히 신디아에게 일을 물려주었으며 그녀의 주인인 알렉스는 사실 그녀가 뭘 하든 정말 관심이 없었다. 가문을 망하게 하지 않게 잘 관리하기만 한다면 부정이나 비리를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기색이었다.
그러니 신디아는 로윈 저택에 한에서는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셈이었다. 샐리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 방은 정리하는 게 좋아요, 샐리. 알잖아요. 혹시라도…….”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와서 보면, 그냥 조금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이라고만 여길걸요.”
이자벨의 방이었던 곳에 서서, 샐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문제죠. 샐리. 아무도 살지 않는 방이 왜 ‘꾸며져’ 있겠어요?”
“기억도 나지 않는 누이의 방이었다고 하면 되죠. 사실…… 도련님은 저택 일에 관심도 없으시잖아요. 모르실 거예요.”
샐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신디아는 불안했다. 만약 다시 알렉스가 이자벨을 기억해 낸다면?
신디아는 이자벨과 엮였을 때, 알렉스가 보이는 태도가 무서웠다.
어린 도련님은 제 누이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눈물이나 거짓말은 예사였다. 관심이 조금이나마 멀어질라치면 자해조차 서슴지 않았다. 옆에서 질릴 정도로 나만 예뻐해 달라고 울었다.
솔직히 제정신인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그런 모습을 오래 보고 있다가는 신경 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자벨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제 동생이 예쁘다며 방긋거렸고, 알렉스는 그녀의 앞에서는 세상 순한 아이가 되었으니까.
그 꼴을 볼 때마다 위가 아팠다. 양심도 함께.
그래서 신디아는 알렉스가 이 저택에 처음 온 10살 때의 기억만 남기고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때, 사실 약간 안도했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도련님은 놀랍도록 빠르게 돌아왔다. 흡수하듯 지식을 빨아들이고,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이자벨을 기억하지 않는 알렉스는 전대 로윈 백작과 비슷했다. 무심하고 서늘하며, 어딘가 무기력하게 일에 빠져 있는 것 또한.
신디아는 그 고요한 도련님이 마음에 들었다. 터질 일 없는 그 모습이. 그래서 그녀는 도련님이 다시 이자벨 아가씨를 기억해 내지 않기를 빌었다.
샐리 또한 도련님이 이자벨 아가씨를 기억해 내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신디아처럼 강박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신디아는 그런 샐리의 모습을 이해해 주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녀는 그 아슬아슬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신디아.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도련님은…….”
“도련님은 이제 아무것도 관심이 없으시잖아요. 저택의 방 하나 정도는 관심거리도 될 수 없을 거예요.”
알렉스 로윈은 정말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 귀족들이 흔히 즐기는 취미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았고, 따로 시간을 내 휴식을 즐기지도 않았다.
너무 할 일이 없어서 깨어 있을 때 일만 하는 인간처럼 보였다. 제멋대로인 구석이 컸던 이전에 비해서는 굉장히 성실해졌지만, 그게 딱히 좋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알렉스 로윈은, 꼭 혼이 빠져나간 인간인 것 같았다.
쨍그랑-!
알렉스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졌다. 책상에 부딪힌 찻잔은 산산조각이 나서 책상과 바닥에 떨어졌고, 알렉스는 이상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도련님, 괜찮으신가요?”
샐리는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알렉스는 날카로운 찻잔의 조각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도련님!”
“……아.”
손끝이 부서진 찻잔 조각에 닿기 전에 알렉스는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굳은살이 이리저리 박인 자신의 손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면서 피곤한 어조로 물었다.
“누이는? 여전히 침실에서 나오질 않나?”
“……예?”
자신의 손이 이상하다는 듯 한참을 주무르고 응시하던 알렉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서 있는 샐리를 뒤늦게 발견하고 눈을 찌푸렸다.
“왜 가만히 서 있지?”
“방금 도련님께서…….”
“내가 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의문스럽게 되묻는 알렉스를 향해 샐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련님. 오늘은 일찍 쉬시는 게 좋겠어요. 혹시라도 부서진 조각에 손을 다치실 수도 있으니.”
알렉스는 그 말에 영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놀랍도록 순순하게 수긍하고 몸을 일으켰다.
샐리는 알렉스가 일하지 않을 때는 그냥 잠을 잔다는 것을 알았다. 잠과 일 말고는 알렉스 로윈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 * *
손에 잡히는 물건은 전부 집어 던지던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서럽게 펑펑 울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희뿌옇게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금발이 반짝였다. 알렉스는 거기에 묘한 감흥을 느꼈다.
이 여자를 달래 줘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과, 우는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이상한 감정이 충돌했다.
‘……너도 내가 미워?’
그의 손이 여자의 어깨에 닿았다. 알렉스는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게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알지 못한 채.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당신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잖아요.’
사랑 고백이었지만, 사랑 고백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보다 협박하는 것처럼 위협적인…….
‘변하지 마. 아니, 사실 변했으면 좋겠어…….’
여자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고, 그는 거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난 너한테…….’
알렉스는 희뿌옇게 흐려지는 여자의 모습에 손을 휘저었다. 손에 닿았던 감촉이 옅어지더니 아예 사라졌다.
‘……너한테 손을 내밀지 않았을 텐데.’
꿈이 부서져 흘러내렸다. 강제로 깨어난 정신에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서늘해지기 시작하는 바람이 뺨을 스쳤다.
여긴 어디지?
분명 잠을 자고 있던 육신은 어느새 저택의 복도에 서 있었다. 몽유병인가?
알렉스는 귀신에 홀린 기분에 주변을 느릿하게 둘러봤다. 눈앞에 꽤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그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 복도에 있는 모든 방의 문을 하나씩 열어 봤다. 이 문 하나만 잠겨 있었다.
알렉스는 고집스럽게 문을 열기 위해 애썼다. 이상하게 문을 부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알렉스는 그대로 문손잡이를 아예 뽑아 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쇳덩이의 소리가 꽤 컸다.
문은 자주 기름칠한 것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알렉스는 홀린 듯이 그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났다. 혹은 낡은 책의 냄새라든가.
바로 몇 시간 전에 청소한 것처럼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하고 고풍스러운 방에서 알렉스는 뭔가를 찾듯이 눈을 움직였다.
뭘 찾고 있는지는 알렉스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뭔가를 잃어버렸는데.
뭔가를…….
알렉스는 뺨이 젖은 걸,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지는 걸 아주 늦게 깨달았다.
그는 분명 이 방에서 뭔가를 잃어버렸다. 어쩌면 인생 전부를 걸었던 뭔가를.
‘……이자벨.’
* * *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국경에 눈을 찌푸렸다. 게일은 내 기색에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 있는데요.”
지금 내 기분을 더 안 좋게 만들 수 있는 소식이 있단 말인가.
“폐하께서 국경까지 나오시겠다고 하시는군요.”
“그거 정말 끔찍한 소리군요.”
나는 짜증스럽게 사절단 일행을 훑어보다 게일을 향해 물었다.
“좀 더 느리게 갈 수는 없나요?”
게일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도 내가 원하는 답변을 내놓았다.
“오늘 저녁은 여기서 머물다가 내일 출발하죠. 반나절 정도는 느리게 도착할 겁니다.”
“……그거 마음에 드네요.”
“그럼 다행입니다.”
통째로 빌린 여관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고 아무리 속으로 중얼거려도 미하일의 집착은 도무지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나한테 이 정도면 정말 엄마가 살아 있다면……. 우리 엄마는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걸어 다닐 수는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사랑해 놓고 사랑인 줄 몰라서 놓치는 게 말이 되는지.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이미 엄마가 죽고 나서……?
내 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계단 한가운데에 선 나를 향해 게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자벨,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몸을 돌렸다. 계단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게일은 정말 미하일과 닮았다. 엄마가 사랑에 빠졌던 미하일의 젊은 시절이 이렇게 생겼겠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작자가 후회했으면, 왜 나처럼 과거로 시간을 돌리지 않았어요?”
이게 샬덴 왕가에 내려오는 축복이라면, 왜 샬덴의 왕인 미하일은 시간을 돌리지 못했던 거지?
게일은 내 질문에 정말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그는 마치 말하는 걸 잊었다는 것처럼 내게 속삭였다.
“축복은 한 세대에 단 한 명에게, 단 한 번만 허락되어 있으니까요.”
게일은 웃었다. 그 웃음은 미하일과 닮지 않았다. 지나치게 차분하고 비어 있는 미소는 미하일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돌아가신, 폐하의 첫째 형님께서 이미 소원을 빈 뒤였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셨답니다.”
게일은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이자벨이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제가 아무것도 빌지 못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예전에, 날 찾았어요?”
우리의 첫 만남에 대해 언급하자 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폐하의 명령도 있었지만 사실 그 이유가 좀 더 컸죠.”
“그 펜던트…….”
“그건 저도 있어요.”
게일은 내가 과거에 엄마의 유품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색과 모양의 펜던트를 끄집어냈다.
“왕족이라면 다 가지고 있죠. 그래서 누가 소원을 가지게 될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축복이 당신을 고른 거죠.”
“무슨…… 무슨 소원을 빌고 싶었어요?”
나는 내가 묻고도 무례한 것 같아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게일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당신과 똑같은 소원이요, 이자벨.”
그가 이번에는 미하일처럼 웃었다. 쾌활하고 명랑한 왕자님처럼.
“나도 시간을 돌리고 싶었거든요. 우리 부모님이 죽기 전날로.”
* * *
시그니티는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알렉스의 눈이 낯설었다.
이자벨을 잊은 알렉스 로윈은 아무에게도 딱히 날을 세우지 않았다. 무심하고 서늘한 기색을 몸에 두르고 있어서 그렇지, 뭐든 시키는 대로 했다.
보고를 끝내고 나가는 알렉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시그니티는 쓰게 웃었다. 적어도 괴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와 달리. 하지만 과연 그게 좋은 걸까.
“전하.”
캐롤의 부름에 시그니티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어두운 금발을 화려하게 꼬아 묶은 캐롤은 살짝 걱정이 담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신 거죠?”
“왜? 영애의 권력이 위험할까 봐 걱정이 되나?”
캐롤은 비꼬듯 던지는 시그니티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벨 앞에서 아무리 얌전하고 순한 척한다고 해도, 사실 이자벨을 좋아하는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나쁘게 굴었다. 그냥 이자벨만 예외일 뿐.
“그렇죠. 저희는 한배를 탄 몸이니까요. 방금 나가신 영혼이 없는 후작님도 포함해서요.”
얼굴도 아름답겠다, 딱 걸어 다니는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캐롤은 정리해 온 서류를 시그니티에게 넘기면서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글쎄. 이자벨이 부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게 맞는 건가?
“뭐지?”
“로윈 후작의 배우자 후보 목록이에요, 전하.”
시그니티의 얼굴이 정말 예상치 못한 것을 본 듯 찌푸려졌다. 그는 심지어 말도 조금 더듬었다.
“결, 결혼……?”
“예. 전하. 이제 뭐, 누구랑 하라고 명령하면 알아서 들을 것 같은데요.”
미친개가 너무 온순해졌다는 말을 돌려서 중얼거린 캐롤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면서 설명했다.
“그래도 불쌍하니까 금발 위주로 고르긴 했어요. 특히 위리빈 남작 영애가 괜찮아 보여요. 신분이 좀 낮긴 하지만, 외조모가 후작가였으니 그럭저럭 격을 맞췄다고도 할 수 있고…….”
“그래서?”
영 협조적이지 않은 시그니티의 태도에 캐롤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지금 시켜 놓는다고 해도, 별로 좋은 결혼 생활을 할 것 같진 않은데.”
“원래 귀족들의 결혼이 다 그렇죠. 적당히 자식만 보고 나면 알아서 자기 애인들 끼고 사는 게 보통이니.”
“그녀가 자기 동생이 그렇게 살기를 바랄까?”
캐롤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것참 지독한 순정일세. 자기를 버리고 간 여자의 심정까지 염려하다니.
“혼자 늙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그녀는 늘 후작이 가정을 이루는 것을 꿈꿨으니까요.”
일부러 성격이 온순하고 순진한 여자들 위주로 목록을 추렸다. 적당히 정 붙이고 살 만하면서도, 쉽게 밖에다가 애인을 만들지 않을 만한 여자로.
저 혼이 빠져나간 후작이야 여전히 무덤덤하게 살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럭저럭 화목한 가정처럼 보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렇게 혼을 빼놓고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뛰어내리거나 목에 칼을 박고 자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글쎄…….”
시그니티는 서류에 손을 쉽게 가져가지 못하면서 중얼거렸다.
* * *
알렉스는 사실 모든 게 낯설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모의 손 아래에서 얻어맞고 다녔던 빈민가의 꼬마가 갑자기 후작이 되었으니 그렇게 빨리 적응할 수 있을 리가.
그러나 알렉스는 이상하게도 쉽게 적응했다. 마치 몸이, 무의식이 기억하는 것처럼.
글도 읽지 못하던 빈민가의 꼬마는 자연스럽게 어려운 고어를 읽어댔고, 무거운 짐 하나 들지 못하던 손은 사람의 목뼈를 부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단지 어딘가 현실감이 없었다. 모든 게 꿈속의 일 같았다.
가끔은 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잠을 자고 싶었다. 영원히 깨지 않은 잠을.
알렉스는 이제 현실에서도 꿈속의 여자를 봤다. 흐릿한 환상처럼 알아볼 수 없는 희뿌연 얼굴의 여자가 저택 곳곳에서 보였다.
그가 미친 걸까? 미쳤다면 그는 언제부터 미친 거지? 어쩌면 그가 후작이라는 것부터가 환상이나 착각 같은 게 아닐까.
알렉스가 딛고 있는 현실은 몹시 위태로웠다. 그는 사실 지금도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알렉스?’
반짝거리는 금발이 흐트러졌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지만, 알렉스는 그게 환청임을 알았다.
“당신은 누구야?”
왜냐하면 여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으니까. 그림자도 없는 여자는 형체마저 불분명했다. 가끔은 웃었고, 대부분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종종 그를 원망했다.
‘넌 아무것도 몰라.’
“그럼 알려 줘.”
‘나도 아무것도 몰랐어.’
“무엇을?”
여자는 또 울었다. 그리고 햇빛에 부서지듯 녹아 사라졌다.
알렉스는 가만히 그 여자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여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아쉬워서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 정말 기억이 돌아오지 않나요?”
게일은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조작할 경우에는 미쳐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아예 싹 지워 버릴 경우에는 제가 돌려주지 않는 한평생이요.”
“허전함이나 이상함을 느낄 가능성도 없나요?”
“허전함이야 느끼겠지만…… 기억이 어렴풋이라도 떠오를 가능성은 아예 없죠.”
그 기억은 전부 내가 갖고 있으니까.
나는 게일의 말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뒷목이 서늘했다. 가을이 다가오는 것 때문일까.
요즘은 꿈자리가 영 사나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흐릿한 꿈의 흔적들 사이에서 나는 울거나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악몽에 나는 잠들기가 무서워졌다. 그런데도 밤만 되면 불면증이 무색하게 잠이 쏟아져서…….
이상한 꿈속에 도달했다.
어린 알렉스였다. 막 로윈 저택에 도착했을 때의 마르고 불쌍한 알렉스. 정리되지 않은 검은 더벅머리가 얼굴의 반은 덮었고, 또래보다 작은 몸은 멍과 상처로 가득했다.
그 애는 내 손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서럽게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나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손수건을 들어 알렉스의 눈물을 닦아 줬다.
이런 적이 있었나? 없었던 것 같은데…….
‘괜찮아?’
내 목소리였다. 가식이 한껏 섞인, 매끄럽게 포장된 목소리 밑에는 경멸이 깔려 있었다.
나는, 이 불쌍한 아이를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차 없이 손수건을 바닥에 버렸다. 알렉스의 시선이 손수건에 닿았다.
‘갖고 싶니?’
‘네…….’
‘그럼 가져도 돼.’
알렉스는 머뭇거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잡았다. 눈물로 얼룩진 손수건이 알렉스의 손 아래에서 이리저리 주름이 졌다.
‘내가 버린 건 다 가져도 돼.’
‘……정말요?’
‘새것이 갖고 싶니?’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입가는 웃고 있었다.
‘저는 당신이 버린 게 더 좋아요.’
그건 이상하잖아.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 몸은 멋대로 움직여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구나, 알렉스.’
아냐. 이건 착한 게 아니라…….
그때, 꿈이 부서지고 다시 새로운 장소로 나를 던져 놓았다.
나는 바뀐 공간을 처음에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순간 토기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다. 내 몸은 내가 느끼는 대로 똑같이 움직였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서 배 속의 모든 걸 토해냈다. 먹은 것도 없는지 위액만 잔뜩 올라왔다. 목이 쓰렸다.
눈앞의 시체는 목이 잘려 있었다.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도질 당해 있었다.
‘괜찮아요?’
누군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알렉스겠지. 나는 안도감에 겨우 몸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내 몸은 이상한 소리를 멋대로 내뱉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했잖아. 난 그냥 멀리 보내는 것 정도로도…….’
‘하지만 당신이 버린 거잖아요.’
알렉스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당신이 버린 건 다 내 거잖아.’
“……아가씨!”
나는 순식간에 꿈에서 깨어났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놀란 것이 분명한 얼굴로 시녀는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꽤 많은 시녀와 기사들. 심지어 시녀장까지 서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방금 전까지 비명을 지르고 계셨어요. 아가씨…… 괜찮으세요?”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을…… 꿨나 본데.”
“이자벨!”
급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못한 미하일이 내게 다가왔다. 다른 이들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괜찮니, 아가?”
“그냥 악몽이었어요. 오실 필요 없었는데…….”
“악몽?”
미하일의 시선이 시녀장에게 닿았다. 그녀는 황급히 허리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약 5분간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시다가 마지막에는 숨조차 쉬지 못하셨습니다, 폐하.”
“의원을 불러.”
“예. 폐하.”
나는 황급히 미하일의 팔을 붙잡았다. 궁에서 일어난 소란은 늘 모든 소문의 근원이 된다. 내 주변에서 속삭일 소문 따위는 별로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냥 악몽일 뿐이에요.”
“아가. 네가 숨도 못 쉬었다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미하일의 손이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정말 누가 들어도 그가 안타까워 미칠 것 같다고 여길 만한 목소리였다.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나는 미하일의 손을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미하일의 손이 멈칫했다.
내가 아플 때마다 미하일은 좀 더 예민해졌고, 좀 더 나를 엄마와 겹쳐 봤다.
“그래…….”
미하일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죽어서는 안 되지, 아가…….”
나는 헐레벌떡 달려온 의원에게 진찰을 받으면서, 끝까지 미하일을 외면했다.
미하일은 내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도 왕궁에 있는 모든 의원을 불러 나를 진찰하게 한 뒤에서야 물러났다.
그날 밤 이후로, 나는 밤마다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외전. 세 번의 기회.
이자벨은 이전 생에서 몇 번이고 알렉스를 회유했다.
애정을 원하면 애정을, 부를 원하면 부를,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줄 테니까 가문을 그녀에게 달라고.
알렉스는 늘 애정을 갈구하는 눈을 하고서도 이자벨의 제안을 매번 거절했다. 학대와 회유의 반복에도 그는 끝까지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자벨이 그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은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은 알렉스의 마음 탓이 컸다.
그녀는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집요할 만큼 떨어지지 않는 저 시선을 하고서, 왜 그녀가 내민 손을 잡지 않는지. 그리고 알렉스는 그런 이자벨을 아주 집요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관찰했다.
알렉스는 이자벨이 내민 손을 잡았을 때의 미래를 이미 겪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내민 손을 잡은 걸 아주 길게 후회했다.
알렉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자벨의 얼굴을 보고 사실 늘 묻고 싶었다.
두 번째 인생은 어때요? 첫 번째보다는 낫습니까?
첫 번째 생에서 알렉스는 이자벨의 손을 잡았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가문에 들어온 사생아는 누이의 사탕발림에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넘어갔다.
‘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누님만 있으면 돼요.’
‘착한 우리 알렉스…….’
알렉스는 가식적으로 꾸며낸 애정을 내주는 이자벨에게 쉽게 휘둘렸고, 그 가짜 애정에도 만족했다.
그는 멍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자벨이 진심으로 그를 아끼지 않음을 금방 깨달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자벨에게 알렉스가 필요한 이상, 이자벨은 가짜든 진짜든 그에게 애정을 줄 테니까. 알렉스는 가문이나 작위 따위에 관심도 없으면서 능력을 기르고 힘을 키웠다.
‘뭘 걱정하세요? 누님, 전 언제나 누님의 편인걸요. 제 힘은 곧 누님의 힘이고, 우리의 힘이죠.’
이자벨은 그의 세력이 커지길 바라지 않았지만, 정말 철저하게 이자벨의 개처럼 움직이는 알렉스에 대해 곧 만족했다.
로윈 가문은 군부와 깊게 관련이 있었고, 군대를 다루는 데 알렉스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니까.
그저 예쁘다는 말 한마디, 쓰다듬어 주는 손길 한 번이면 알렉스는 뼈다귀를 문 개처럼 웃었다.
로윈 가문을 위해, 이자벨의 권력을 위해, 알렉스는 수많은 전쟁터를 굴렀고 불평 하나 하지 않았다.
이자벨이 결혼하는 날까지는.
알렉스의 충실한 지지로 이자벨은 꽤 오랜 시간을 결혼을 미룰 수 있었지만,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자벨 또한 결혼 자체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혹여나 자신의 권력을 나누어야 할 경우를 염려했던 것뿐이었으니.
알렉스가 꽤 긴 영지전에 나섰을 때였다.
가문에서는 이자벨에게 꽤 고심 끝에 혼처 하나를 들이밀었다. 나쁘지 않았다. 무역권을 쥐고 있는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이었다.
도무지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없는 남자는 이자벨에게 설설 기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약간 멍청했다.
적당히 약았고, 적당히 욕심이 있었지만, 이자벨의 자리를 위협할 만큼 똑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자벨은 헛짓거리조차 하지 못할 살짝 멍청한 그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다.
일말의 호감도 없었지만, 그녀의 행동 하나에 쩔쩔매고 눈치를 보는 모습 정도는 귀엽게 봐줄 만했다.
약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이자벨은 정말 대수롭지 않게 결혼식 전에 알렉스가 와서 자신의 권위를 세워 주길 바란다고, 알렉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그 서신이 알렉스에게 도착한 직후, 알렉스는 잔인하리만치 빠르게 적을 짓밟고 가문으로 돌아왔다.
이자벨은 반가운 기색으로 알렉스를 맞이했고……. 알렉스는 그날 밤 이자벨의 손가락 하나를 그녀가 보는 앞에서 씹어 삼켰다.
‘말로만 예뻐해 주는 걸 어떻게 믿어요?’
뇌가 술에 잔뜩 절여진 채라도 손가락이 잘리는 감각은 섬뜩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자벨은 몇 번은 비명을 지르고, 몇 번은 기절했다.
그녀가 정신을 놓을 때마다 알렉스는 꼬박꼬박 이자벨을 깨웠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그대로 지켜보라는 듯이. 자기가 하는 짓을 이자벨의 기억 속에 똑똑히 각인시키기 위해.
‘날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 줘요.’
알렉스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이자벨의 손에 끊임없이 입을 맞췄다. 흘러넘치는 피로 범벅된 이자벨의 손과 알렉스의 입술은 꼭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다른 남자와 평생을 약속한다면, 나한테는 당신 손가락 하나쯤은 줘야지.’
이자벨은 처음으로 쉽게만 생각했던 알렉스가 무서워졌다.
그저 고분고분하고 애정에 고픈 어린 애라고 생각했다. 가식적인 말 한마디로 움직일 수 있는 쉬운 패.
알렉스가 그녀에게 웃었다. 이자벨의 피로 물든 입술이 새빨갰다. 원래부터 붉은 건지 피로 붉어진 건지 알 수 없는 혀가 이자벨의 손을 쓸었다.
‘나는 평생 당신뿐일 텐데.’
이자벨은 무언가 비틀렸다고, 그걸 처음으로 인지했다.
갑자기 손가락 하나가 없어진 이자벨을 향해 귀족들이 소곤거리긴 했지만, 소문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알렉스는 그날 이자벨의 손가락을 먹어치웠던 남자에서, 다시 착하고 순종적인 동생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했지만 말이다.
‘내가 결혼하지 않기를 바라니?’
‘하지 말라고 하면, 싫어할 거잖아요.’
알렉스는 충성스러운 노예처럼 이자벨의 뭉툭한 손끝에 키스했다.
‘누님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건 권력이니까. 작위를 물려받으려면 어쩔 수 없는 거 알아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상냥하게 웃는 알렉스에게 이자벨은 불안감을 느꼈다.
‘결혼은 어쩔 수 없죠. 알아요. 하지만…….’
알렉스는 말끝을 흐렸다. 이자벨은 두려워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자벨이 결혼했음에도 이자벨에게 작위를 물려줄 의사가 없음을 표방한 로윈 백작을…….
그들 남매의 아버지를, 알렉스가 살해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누님.’
알렉스는 매번 변명처럼 그렇게 속삭였다.
어쩔 수가 없다고.
그리고 이자벨이 작위를 물려받은 지 정확히 한 달 뒤, 그녀의 남편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며 그녀의 권위를 넘보았다.
알렉스는 이자벨을 위해 그녀의 남편을 몰래 살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자벨은 그녀의 남편을 부추긴 게 알렉스의 수작이었음을 알았지만,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았다.
‘권력이든 명예든, 원하는 건 제가 전부 다 갖다 줄게요. 누님.’
알렉스는 그녀를 속인 후에는 항상 이자벨이 탐내하던 것을 잔뜩 가져왔다.
그건 가로챈 수많은 광산이 될 때도, 승리해 빼앗은 영지가 될 때도, 공을 세워 받은 작위가 될 때도 있었다.
이자벨은 그 뒤로도 꽤 여러 번 결혼했고, 모두 좋지 않은 끝을 맺었다.
사교계에서 그녀를 향해 남편을 잡아먹는 암거미라고 불렀지만, 그녀의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기에 이자벨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자벨이 결혼하면, 알렉스는 그녀의 남편을 어떻게든 끌어내렸다. 때로는 여자를 붙여 사생아를 만들게 할 때도 있었고, 도박에 빠지게 하기도 했다. 이도 저도 통하지 않으면 약을 썼다.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한 이자벨이 그의 남편을 버리면, 알렉스는 몹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 남자들을 처리했다.
그녀의 결혼은 길어도 삼 년 이상을 간 적이 없었다. 가장 짧았을 때는, 한 달이었다.
그녀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은 결혼 중 하나였지만, 그 남자는 이자벨을 사랑했고 그래서 좀 더 빠르게 처리되었다.
이자벨은 그런 인생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녀는 왕족을 제외하고는 다음 가는 권력을 누렸으며, 가문은 성세를 구가했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간이나 쓸개라도 빼어다 줄 것처럼 온갖 것을 떠안겼고, 이자벨은 그 인생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행복한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가끔 알렉스가 무서워졌지만, 말 그대로 이자벨이 알렉스를 예뻐해 주는 한 알렉스는 순종적인 동생을 연기했기에 이자벨은 종종 그 두려움을 잊었다.
그리고 그러니까…… 알렉스도 이자벨도 만족했던 그 삶이 망가진 것은 또 한 남자의 방문 때문이었다.
‘맞아요. 이자벨 로윈. 당신은 사생아예요.’
회색 머리의 남자는 웃는 얼굴로 이자벨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자벨은 로윈 백작을 죽인 날을 기억했다. 남매가 공모해서, 아니, 공모가 아니지. 이자벨이 원해서, 알렉스가 로윈 백작을 살해했던 날을. 이자벨과 알렉스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공범자로 묶어 주었던 사건이었다.
그녀가 조금 더 뻔뻔했더라면 어쩌면 편했을 수도 있었다.
아내의 사생아를 친딸로 키워준 남자를, 아들의 손에 죽게 만든 게 이자벨 그녀였다.
로윈 백작은 제 아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무슨 기분을 느꼈을까.
가문을 잇고 싶다고 말하는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사생아를 향해, 어떠한 진실도 알려 주지 않고 죽어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날 알렉스는 이자벨에게 속삭였다. 유언을 들었다고.
‘후회할 거라고 했어요.’
‘그 사람답네.’
‘……누님은 후회해요?’
‘모르겠어.’
아무것도 몰랐던 이자벨은 그렇게 답했고, 알렉스는 그런 이자벨을 다정하게 달랬다.
‘후회해도 괜찮아요. 내가 한 짓이니까. 누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후회는 매번 했다. 어쩌면 좀 더 노력해서 백작을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후회는.
하지만 이건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후회였다.
이자벨은 그 순간, 태어나서 했던 모든 행동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로윈 백작의 은혜로 이룩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자벨은 백작을 죽였다. 그의 아들을 이용해.
사실을 고백하는 이자벨에게 알렉스는 몹시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알렉스. 난, 나는 백작을 죽여서는 안 됐어.’
알렉스는 순하게 웃으면서 이자벨의 뺨에 키스했다.
‘내가 죽였잖아요.’
‘네 손을 빌린 내가 죽인 거겠지!’
알렉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자벨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이자벨은 벗어나려 했지만 알렉스는 놓아주질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쩔 수 없잖아요. 그냥 잊어요. 누님.’
그는 이자벨의 귀 아래에 키스하면서 덧붙였다.
‘그런데 사생아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때, 알렉스는 어떻게 웃고 있었더라?
‘남매가 아닌 건 아쉬운데…….’
적어도 확실한 건, 이자벨에게 키스하는 알렉스의 눈에는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누님,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이자벨이 알렉스에게 진실을 고백한 날, 꽤 오랜 기간 동안 새로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이자벨에게 새로운 혼처가 생겼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자벨은 쫓기듯 빠르게 결혼했다.
남편은 정말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인간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자벨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갈라치면 소스라치듯 물러나 눈치를 보는 탓에 이자벨은 그와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본 적이 없었다.
‘왜 그런 남자를 골랐어?’
‘편하잖아요.’
내가? 아니면 네가?
이자벨은 차마 묻질 못했다. 무엇이 편하고, 누가 편해지는 거냐고.
‘우리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남자잖아요.’
알렉스의 손이 이자벨의 귀를 쓸었다. 그 손에는 미묘하게 성적인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었다.
‘싫어요?’
‘……아니.’
싫다고 해도 싫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 남자는 그녀를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그녀를 위해 일생을 바쳤는데. 어떻게 감히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자벨은 어느 순간부터 알렉스가 하는 말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없다고 생각했던 양심이 갑자기 존재감을 발휘해서일까. 아니면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두려워서일까.
알렉스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친애의 의미로 주고받는 가벼운 접촉이 아니었다. 혀가 섞이고 서로의 타액이 오갔다.
이자벨은 알렉스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녀의 혀를 빨던 입술이 목덜미에 내려앉아도, 전 남편들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던 몸을 품 안에 넣고 주무를 때도.
알렉스가 이자벨의 몸을 처음 열었을 때, 이자벨은 도망칠 수 있었다.
‘싫어요?’
알렉스는 그녀의 몸에 손이 닿을 때마다 물었다.
드레스가 벗겨지고, 알렉스는 이자벨을 눕힌 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그동안 알렉스는 12번이나 이자벨의 의사를 물었다. 이자벨은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날, 어떤 의미로 이자벨을 소유하고 싶었던 건지 스스로도 몰랐던 진심을 깨달았다.
이자벨과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은 쾌락 너머에 있는 또 다른 황홀함을 선사했다. 그는 없었다고 생각했던 성욕에 뒤늦게 눈을 떴고, 그를 거절하지 못하는 이자벨은 그를 감당해야 했다.
처음에는 무표정 아래에 긴장감을 감추고 있는 이자벨의 얼굴로 밤을 시작했지만, 대부분은 멍하니 그의 아래에 깔려 흔들리거나 기절하는 거로 끝났다.
이자벨은 관계 내내 울었으므로 체력이 늘 부족했다.
알렉스는 이자벨에 있어서는 자제를 몰랐기 때문에 시달리는 것은 이자벨뿐이었다. 그녀는 한 달 만에 그녀의 아랫구멍에 자기 물건을 처넣은 채 헐떡거리는 알렉스의 얼굴로 아침을 맞이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읏…… 이자벨. 일어났어요?’
성욕을 깨달은 짐승은 자제를 몰랐고,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졌다. 짝을 지키려는 맹수처럼 이자벨 주변의 인간들을 쳐냈다.
심지어 그가 붙인 남자조차.
‘부인, 나는…….’
푸르스름할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남편의 얼굴은 꼭 아픈 사람의 것 같았다. 해쓱한 뺨과 핏줄이 선 눈으로 그녀의 명목상 남편은 이자벨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습니다, 부인.’
사랑하는.
그 단어가 낯설었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겁쟁이인 남자는 인생 최고의 용기를 끌어모아 그녀에게 애원했다. 이자벨은 그녀를 떠난 남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꼴을 맞이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자비를 베풀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버려 둬, 알렉스.’
‘왜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요?’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의 손이 이자벨의 턱을 붙잡았고, 이자벨은 피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긴장했다.
‘같이 있을 때, 다른 남자 얘기를 하면 어떻게 해요. 나 질투 나게…….’
낮아지는 목소리에 이자벨은 황급히 덧붙였다.
‘그 남자, 사랑하는 여자가 있대. 그러니까 한 번쯤은 그냥…….’
‘알아요, 누님.’
알렉스는 장난처럼 약하게 뺨을 깨물었다. 이자벨은 얌전히 알렉스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내가 붙였으니까.’
‘뭐?’
이자벨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되물음에 알렉스는 귀엽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누님이 한마디만 하면, 그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손에서 죽게 될 거예요.’
‘그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그냥 내버려 둬. 알렉스. 응?’
그의 눈초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자 이자벨은 눈치를 보듯 입을 닫았다.
‘정말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요? 왜 안 하던 짓을 해요?’
이자벨은 점점 더 알렉스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망가졌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원래 이상했던 걸까. 아니면 그녀로 인해 이상해진 걸까.
하긴, 제 아비를 죽이는 건 멀쩡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걸 시킨 건 나잖아…….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귀엽기는 한데……. 다른 사람 때문이면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프잖아요, 누님.’
이자벨은 모든 게 엉켜서 시작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꼬여 버렸다고 생각했다.
후회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로윈 백작이 사생아인 그녀를 친딸로 키우지 않았다면. 아니면 그녀가 야망을 가지지 않았다면, 아니면 알렉스가 이자벨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수많은 가정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그러나 로윈 백작은 이미 아들의 손에 죽었고, 알렉스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이자벨은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주 절실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이유는 그녀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알렉스 때문이었다.
이용하기 쉬운 상대. 적당히 애정을 던져 주면 꼬리를 흔드는 개.
그렇게 생각했다. 애정을 주어도 그저 쓸모 있는 도구를 아끼는 것 정도 이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자벨은 마치 스스로가 알렉스의 망가진 인생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가문도, 가정도, 친구도 아무것도 갖지 못했으며 결국에는 아비까지 제 손으로 살해했다.
그에게 남은 건 이자벨뿐이었다.
이자벨은 그래서 죽지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도 죽음을 생각하진 않았다. 그게 아무리 유혹적이어도, 스스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올라와요.’
알렉스는 이자벨이 그의 위에서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멋대로 움직이기 어려워도 이자벨이 얼굴을 가리지 못한다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며칠간 보지 못했을 경우가 아니라면 알렉스는 늘 이자벨을 배 위에 올려놓고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입, 맞춰 줘요.’
이자벨은 알렉스의 물건을 뿌리 끝까지 품고 있느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렉스와의 잠자리가 싫었다. 아래를 파고드는, 한때는 동생이라고 믿었던 남자의 성기도. 흰 살갗을 벌겋게 물들이는 억센 손도. 온몸을 삼킬 것처럼 바라보는 눈도.
‘으응, 아…… 흐읏…….’
조금만 움직여도 아랫구멍이 삼키고 있는 살덩이가 안쪽을 찔러댔다. 그래도 이자벨은 알렉스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아파요?’
잡아먹힐 것 같은 입맞춤 뒤에 나온 질문에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고, 아래는 부어올랐을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흐으……. 안, 아……파.’
‘그럼 눈 뜨고, 움직여요.’
이자벨은 찌푸렸던 눈을 떴다.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알렉스는 만족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이자벨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으응. 흣. 아!’
힘이 빠진데다가 서투르기까지 한 몸짓으로 이자벨은 허리를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알렉스는 그의 물건을 삼켰다 뱉기를 반복하는 이자벨의 허벅지 사이를 응시했다.
멋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이자벨을 아래에 깔아뭉갠 채 끝까지 쑤셔 넣고 싶어 혀가 말랐다.
그러나 알렉스는 참았다. 흰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라서 익어 버린 과일 같았다. 누르면 과즙이 흘러나올 것 같은.
‘흑, 으응, 흐읏, 흡…….’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그의 가슴에 떨어졌다. 어린애처럼 계속 울면서도 이자벨은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 스스로 그의 위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자벨을 엉망으로 범하고 싶은 욕구 정도는 참을 만했다.
이자벨은 어둡게 가라앉은 알렉스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그를 거절하지 못한 것처럼.
알렉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이자벨의 아래에 자신의 물건을 쑤셔 넣고 있으면서도 이자벨을 범하는 상상을 했다.
이자벨은 이 모든 게 싫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자벨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녀는 여전히 울었지만, 알렉스의 품에 안겼고 다리를 벌렸으며 혀를 섞었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알렉스는 어느 순간부터 지나치게 순종적으로 변한 이자벨에게 의문을 품었지만 당기면 당기는 대로 속절없이 그의 품으로 끌려오는 이자벨에게 만족했다.
그렇게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으로는 위태로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자벨의 남편이 결국 죽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유는…….
‘왜 그랬어?’
이제는 따지지도 못할 만큼 지친 이자벨의 목소리에 알렉스는 그녀에 대한 염려를 한껏 담아 속삭였다.
‘누님 아이가 그 남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생각해 봐요. 누님.’
그건 진짜 아버지도 아닌데.
이자벨은 알렉스가 그 말을 할 때까지 자기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남편은 죽었고, 그녀의 아이는 공식적으로는 유복자로 태어나 가문의 후계자로 자랄 것이다.
이자벨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엄마의 초상화를 보면서, 이자벨은 그녀의 전철을 똑같이 밟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생아로 태어나서 가문을 차지하고, 또 사생아를 낳아서 후계자로 기르는…….
‘누님을 많이 닮았으면 좋겠어요.’
아직 불러오지도 않은 배에 귀를 댄 채 속삭이는 알렉스의 머리를 습관적으로 쓰다듬었다.
이자벨은 그때부터 조금씩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그 꿈에서는 대부분 로윈 백작이 나왔다. 이자벨은 매번 왜 자신을 딸로 키웠냐고 물었고, 알렉스와 닮은 얼굴을 한 남자는 항상 어쩔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사실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은 따로 있었다.
아들의 손에 죽을 걸 알았더라도, 그녀를 딸로 키웠을 건지, 혹은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지 않는지. 답을 들어 봤자 소용없는 질문들이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 갔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배는 불러왔다.
겨울이었다. 스트레스로 쇠약해진 이자벨의 몸은 출산의 고통을 버텨내지 못했다. 정확히는 버텨내고 싶어 하질 않았다.
이자벨은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라고 명령했고, 알렉스는 한발 늦었다.
‘왜……? 왜 그랬어요?’
이자벨은 가물가물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대수롭지 않은 유언이었다.
‘사는 게, 피곤해서…….’
창백하고 마른 얼굴로. 그게 끝이었다.
알렉스는 이자벨을 하나도 닮지 않은 그들의 아들을 안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했다.
이자벨이 원하는 건 다 이루어 줬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갓 태어난 아이는 몹시 작았고, 이자벨을 생각나게 하는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흑백의 색채가 알렉스를 닮긴 했지만, 알렉스의 모습조차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잿빛 머리카락에 검은 눈,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골격.
아이는 이자벨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자벨의 친부를 닮았다. 샬덴의 왕족이 가지는 특징을 고스란히 타고난 아이였다.
알렉스의 앞에서는 말하지 못했지만,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자벨의 아이는 죽은 남편도, 그녀도, 심지어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으니까.
알렉스는 로윈 가문을 물려받았다. 그는 가문에 칩거한 채, 늘 질문을 곱씹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 주지도 않은 채 한참을 바라보면서.
‘왜 이자벨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 뭐가 모자라서?’
울다 지쳐 잠든 아이는 이자벨의 아이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자벨의 피가 흐르고 있는 생명이었다.
딱히 소중하거나 사랑스럽진 않았지만 그래도 알렉스는 아이에게 관심을 두었다.
남들이 보면 퍽 이상하게 느낄 광경이었다. 아이가 웃든 울든 마치 적을 관찰하듯 쳐다보고만 있는 남자라니.
알렉스는 아이가 눈을 뜨고 걸을 때까지 이름을 붙여 주지도 않았다.
하녀들은 아이를 도련님이라고 불렀고, 아이는 도련님이라는 말을 자기 이름처럼 알고 자랐다.
그리고 미하일이 나타났다. 이자벨에게 그녀가 사생아라는 진실을 알려 주었던 남자와 닮은 샬덴의 황제는 마치 이자벨이 자신의 사생아였던 것을 이제야 안 것처럼 굴었다.
샬덴의 황제는 자기의 외손주인 아이를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알렉스는 그 요청을 거부했다.
‘아바…….’
이도 다 자라지 않은 아이는 혀 짧은 발음으로 알렉스를 부르며 그의 다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아이에 대해 수군거렸다. 이자벨이 샬덴의 왕족과 사생아를 낳았다고.
알렉스가 죽인 이자벨의 남편 가문에서는 아이의 태생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알렉스는 권력으로 찍어 눌렀다.
‘……아바, 엄마는 어디 이서?’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렉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바, 나…….’
하지만 아이를 늘 허리춤에 끼고 다니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사는 것 또한 알렉스였다.
가문의 하녀들은 점점 더 입이 무거워졌다. 아이는 외삼촌인 알렉스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고, 알렉스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기에.
‘넌 왜 이자벨을 하나도 안 닮았지?’
아이는 자랄수록 샬덴의 황제를 닮아 갔다. 이자벨의 흔적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이는 일곱 살 즈음에는 하녀를 졸라 금발로 머리를 염색하기도 했다.
아이의 행동에 알렉스보다는 미하일이 더 반응했다. 마침내 미하일은 선을 넘었다.
전쟁도 아니었다. 칩거에 들어간 알렉스를 아를 왕실에서는 포기했고, 미하일은 암묵적인 아를의 동의하에 로윈 저택을 점령했다.
저항하자면 할 수 있었겠지만, 알렉스는 정말 저항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죽지 않아야 할 이유도.
알렉스는 그제야 이자벨을 이해했다.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었구나.
세상에 자신을 붙잡아 두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어떤 것에도 미련이 없어서. 숨 쉬는 게 벅차고, 산다는 것을 버티는 게 어려워지는 감각을 이해했다.
아이는 시끄럽게 울어댔고, 알렉스는 검조차 들지 않고 순순히 미하일의 손에 죽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스가 본 것은, 우는 아이를 안아 올리는 미하일의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아빠……!’
아이는 버둥거리며 알렉스를 향해 손을 뻗었고, 알렉스는 그 손을 잡아 주지 못했다.
* * *
알렉스는 죽은 이후에 본인이 천국이란 곳에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완전한 끝이나, 아니면 지옥.
과거의 한순간으로 돌아오게 되는 건 그의 예상에 없는 일이었다.
밤에는 시끄럽고 낮에는 고요한 빈민가의 구석에서 알렉스는 희뿌연 먼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손을 뻗었다.
얻어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손과 팔이 햇빛 아래에 선명했다.
그제야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들을 깨달았다. 빈민가에 살 적에 하루도 쉬지 않고 함께해 왔던 통증들을.
좁은 방은 문이 없었다. 뜯어져 나간 문짝 안쪽의 방에서는 이모가 잠들어 있었다.
로윈 가문에 간 이후로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한 번쯤은 돈을 달라 찾아올 법도 한데, 그녀는 로윈 백작에게 그를 넘기고 완전히 연을 끊어 버렸다.
사실 나중에서야 생각했지만, 이 여자가 정말 그의 이모가 맞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딘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휘어진 코와 푹 꺼진 왼쪽 뺨을 가지고 있었다. 보기에 흉한 외모는 아름다운 알렉스의 외모와 한 군데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알렉스는 잠든 그녀의 침대 아래에 놓여 있는 가죽 자루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웃었다. 여긴 천국인가?
알렉스는 이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자벨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살아 움직이는 이자벨을 또 볼 수 있다니.
알렉스는 그를 데리러 올 로윈 백작을 기다리며 문가에 주저앉았다.
로윈 백작은 한참은 지나야 오겠지만, 알렉스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눈만 깜빡이며 골목 어귀를 응시했다. 살아 숨 쉬는 이자벨이 머릿속에서 예쁘게 웃었다, 울었다 난리가 났다.
물론 이자벨은 알렉스를 향해 진심으로 예쁘게 웃어 준 적 따위 없었지만 알렉스는 상상을 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탁하게 풀린 동공과 집요하게 응시하는 시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덤덤한 표정. 알렉스에 대한 로윈 백작의 첫인상이었다.
그는 기억과 똑같이 로윈 저택으로 들어섰다. 로윈 백작은 이전과 달리 몇 번 정도 알렉스를 힐긋거렸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아버지!”
풍성한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소녀는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아버지에 대한 기대로 상기된 뺨을 하고 있었다.
차분한 척하려고 노력하는 어린 얼굴은 알렉스의 기억보다 찬란했다. 다른 무슨 단어로도 표현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그의 이자벨이었다.
똑같았다. 사랑스러운 얼굴이 그를 향해 일그러졌지만, 애써 경멸을 감췄다.
냉랭한 태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자벨은 가식적인 목소리로 사근사근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전과 똑같이.
“가족이잖니, 알렉스.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거지?”
경멸과 혐오, 약간의 초조함까지 섞여 있는 얼굴에도 알렉스는 넋을 놓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
그는 이자벨이 내민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잡고 싶었다. 간절하게.
알렉스는 예전에 삼켰던 이자벨의 손가락을 생각했다. 지금 이자벨의 손은 멀쩡했다.
만약 이 손을 잡으면, 우리는 똑같은 길을 걷게 되는 걸까. 당신이 나를 두고 죽는?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떠돌았다. 그는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손을 잡는 미래가 이자벨을 잃는 거라면…….
“포기하지 않을래요…….”
알렉스는 열 살짜리처럼 중얼거렸다. 이자벨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녀는 더는 알렉스와 상종하기 싫은 것처럼 휙 돌아섰다.
이자벨은 그 후로도 몇 번을 알렉스를 회유했다. 달콤한 것들을 늘어놓거나, 아이라면 좋아할 법한 화려한 장난감을 가져오기도 했다.
“넌 어려서 아직 잘 몰라. 누나 말 대로 하는 게 좋아. 알렉스.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울까.”
알렉스는 사실 이자벨이 가져오는 것들이 뭔지도 관심 없었다. 그는 그저 넋을 놓고 살아 있는 이자벨을 감상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가식적인 미소는 때때로 일그러졌고, 경멸을 토해낼 때도 있었지만 알렉스는 뭐든 좋았다.
“알렉스, 정말 계속 내 말을 듣지 않을 거야?”
모아지는 미간도, 짜증스럽게 비틀린 입매도, 찌푸린 눈매도 사랑스러웠다. 알렉스는 저 눈가에 키스하던 때를 기억했다.
“우리 사이가 좀 더 좋아질 수도 있어…….”
이자벨의 속삭임에 알렉스는 홀린 듯 넘어갈 뻔했다. 여전히 그는 그녀에게 약했다. 하지만 이자벨을 잃느니 차라리 경멸을 받는 게 나았다. 분에 찬 이자벨이 안쓰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독한 놈.”
이자벨의 입에서 결국 그를 향한 비난과 욕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회유와 협박으로 점철된 채 자랐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도움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향해 반응하는 이자벨의 얼굴만으로 알렉스는 살 이유가 있었으니까.
알렉스는 다락에 갇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창은 넓었고, 이자벨이 보였다.
알렉스는 점점 더 히스테릭해지는 이자벨에게 당하면서, 무엇이 그녀를 살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죽지 않을까?
늘어트린 금발 아래의 초록색 눈이 독하게 일렁거렸다. 그러나 알렉스는 이제 이자벨이 그의 생각과 다르게 착하다는 걸 알았다. 욕심 많고 이기적인 여자로 살았음에도 최후에는 죄책감에 무너졌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당신이 무너지지 않고 나와 함께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학대와 굶주림 속에서 알렉스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넌 왜 항상 나를 그런 눈으로 봐?”
언젠가 이자벨이 속삭인 말이었다. 알렉스는 그 말에 그저 웃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자벨은 그를 괴롭히는 대신 무시하기 시작했다. 적당한 방을 내어주고 그녀보다는 못해도 그럭저럭 지낼 수는 있게 해 줬다.
알렉스를 설득시키는 것보다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자벨은 계속 밖을 나돌았다.
이전과 다르게 힘없는 사생아인 알렉스는 그녀가 밖에서 뭘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 그녀는 알렉스에게 짜증을 내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학대하진 않았다.
그리고 스무 살의 이자벨 앞에 이상한 남자가 나타났다. 알렉스는 그와 손을 잡았다.
죄책감에 깔려 죽은 이자벨. 아이를 두고도 가 버린 이자벨…….
최후까지 독해질 수 없다면 시작하지도 말아야 했다. 죄책감에 깔려 그를 두고 가 버려야 했다면.
하지만 그 죄책감을 이용하면?
알렉스는 이자벨의 기억을 조작했다. 그녀가 그에게 행했던 모든 것들을 더 잔인하게 과장하고,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할 수 있는 온갖 요소들로 기억을 범벅시켰다.
게일은 그에게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알렉스는 저를 붙잡기 위해 몸을 던진 이자벨을 응시하면서, 그녀는 보지 못하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후회할 리가 없지.”
세 번째 삶의 시작이었다.
* * *
알렉스는 엉망으로 뒤엉킨 기억들 사이에 서 있었다. 이건 꿈이었다. 아니면 무의식이라든지.
손을 뻗자 짜증 가득한 어린 시절의 이자벨이 그에게 달려왔다. 알렉스는 손에 닿자마자 일그러지는 형상에 황급히 손을 뗐다.
별의별 이자벨이 가득했다.
대부분의 이자벨은 까다롭게 미간을 좁히고 있었지만 몇몇은 며칠은 정신이 팔려 있을 만큼 달았다.
‘아이 이름으로 생각해 둔 게 있어요?’
알렉스는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웃는 이자벨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친 얼굴을 한 그녀는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뭐든 예쁘겠지.’
그래놓고 죽어 버렸으면서.
알렉스는 천천히 기억들을 확인했다. 첫 번째 그가 걸어왔던 길, 두 번째 그가 걸어간 길. 세 번째 인생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누가 도려낸 것처럼.
딱 10살까지의 기억만 남아 있었다. 알렉스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남자를 알았다.
10살까지의 기억이란, 이자벨을 만나기 전의 삶이었다. 알렉스는 게일이 이자벨에 대한 기억을 앗아갔음을 깨달았다.
허나 그 남자도 미처 몰랐던 것은 알렉스가 이미 두 번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과, 그 일생에서 이자벨을 눈에 박아 넣었다는 거였다.
“……도련님?”
희미한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알렉스는 눈을 뜨면서 웃었다.
이 삶의 어딘가에서도 이자벨이 있겠지. 그와 질기도록 엮었던 이자벨이. 아니라면 기억이 사라질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가끔은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기도 했다.
“괜찮으신가요?”
샐리는 기억을 잃은 후 처음으로 보는 알렉스의 미소에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샐리는 커튼을 걷어 묶었다. 햇빛이 쏟아졌다.
알렉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두 번의 생의 기억을 되짚었다.
샐리는 두 번의 생에서 모두 이자벨의 하녀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자벨의 곁에 있던 하녀.
“샐리.”
“네. 도련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차분하게 대꾸하는 샐리는 알렉스를 주인님이나 후작이 아니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깨어난 이후로부터 계속.
“왜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샐리는 집중하고 있지 않다면 모를 정도로 작게 멈칫했다.
“도련님을 어릴 적부터 모셨으니까요. 신디아처럼요. 혹여 불편하시다면 호칭을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내 하녀였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묻는 질문이었다. 샐리는 한때 이자벨에게 젖을 물려 가며 키웠던 하녀였다. 일부러 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하녀라 이자벨의 곁을 지키게 했을 텐데.
“……네.”
“내가 이 저택에 오고 나서부터?”
“아뇨. 도련님이 15살이었을 때부터 도련님을 모시기 시작했죠.”
“그전에는?”
샐리는 여전히 차분하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딱 잘라 대꾸했다.
“저택의 하녀였습니다.”
“아무도 모시지 않는 그냥 하녀?”
샐리는 지위가 낮은 귀족가의 딸이었다. 대대로 로윈 백작 가문에서 일했던 귀족가의 딸. 그저 그런 하녀로 구를 리가 없는 신분이란 뜻이었다.
“젊을 때 결혼을 하러 로윈 가문을 나섰다가 후에 돌아오게 돼서…….”
“내가 듣기로는 내가 이 저택에 오기도 전에 돌아왔던 거로 알고 있는데…….”
알렉스는 말을 끌었다. 그는 태연한 샐리의 얼굴 아래에 깔린 긴장감을 읽었다.
“나 이전에 누구를 모셨지?”
팽팽한 긴장감이 방 안을 채웠다. 샐리는 불안함에 숨이 막혔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아가씨를 모셨죠. 하지만…….”
“이자벨을?”
샐리는 그대로 굳었다. 그녀는, 아니, 이 저택의 누군가도 이자벨의 이름을 알렉스에게 알려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