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3권) (8/12)

8장. 달라진 것들.

춤이 끝나갔다.

나는 내가 사생아란 사실을 당장이라도 밝히라고 했던 캐롤의 말을 생각했다.

왜? 그럴 이유라도 있나? 내가 사생아라는 건 수치스럽긴 해도 아를에서는 별 의미가 없지 않나? 샬덴에서야 왕의 딸이니 다르다고 해도…….

내가 고민하는 와중에 춤이 끝났다. 느리게 나를 플로어 바깥으로 인도하던 그가 내게 속삭였다.

“지금 태연한 척 네 손을 놓고 가야 하는데, 못 하겠어. 어쩔까.”

“한 곡 더 추면 되죠.”

한 곡 정도 더 추면서 말하면 되지 않을까. 캐롤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한 말이니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전히 착하네, 우리 아가씨는.”

미련에 잠긴 목소리를 한 주제에 그는 내 손을 놓았다.

많은 귀족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을 계속 유지했다.

“샬덴의 태자가 이쪽을 아주 열렬히 바라보고 있어.”

그의 말대로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 나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물어도 돼?”

“샬덴의 왕은…….”

“전하.”

내 말이 끊겼다. 나는 내 옆에 선 존재가 누군지 곧바로 눈치챘다. 알렉스였다.

“무슨 일이지, 후작?”

알렉스가 시그니티에게 다가온 순간, 나는 귀족들이 우리 주위에서 멀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도 많이 기다려서.”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시그가 눈을 찌푸렸다. 어쩐지 귀족들이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알렉스는 그 말만 남기고 내 손을 붙잡았다. 순간 소름 끼칠 만큼 갑작스럽게 모든 대화가 끊겼다.

뭐지?

알렉스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나는 플로어로 반쯤 끌려가면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의 캐롤과 어딘가 놀란 것 같은 게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알렉스, 이래도 돼?”

시그 또한 겉으로는 내가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알렉스는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려고 막살았는데.”

“뭐?”

막살았다고? 우리 알렉스가? 왜?

“내 허리에 손.”

알렉스는 내 손을 끌어다 자기 허리에 붙였다. 나는 그의 손에 빙글빙글 돌면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막살았어? 어떻게? 왜?”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

“그래. 사람들이 너에 대해 이상하게 말해. 네가 정말 위험한 사람처럼.”

그건 아니잖아, 그치?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오히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두려움을 사는 게 나아요. 그러면 감히 함부로 선을 넘지 않으니까.”

그는 내가 모르는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난 이자벨한테만 사랑받으면 되니까.”

어딘가 질린 귀족들의 시선이 허공을 떠다녔다. 그들은 알렉스를 제대로 응시하지도 못했다.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내가 애를 잘못 키웠나?

나는 과거와의 괴리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순하고 어리광이 많던 내 예쁜 동생은 어디로 간 거지?

“나쁜 짓이요.”

“……뭐? 왜?”

“힘이 필요했으니까요.”

나 때문인가? 내가 떠난 게 자기가 힘이 없어서라고 생각해서 애가 이렇게 변했나?

춤이 점점 느려졌다. 어차피 우리 주위로는 다른 이들이 오지도 않았다. 우리만 다른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스텝을 밟던 발을 완전히 멈췄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나를 향해 알렉스가 손을 뻗었지만 나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알렉스가 나한테 정을 붙이게 둬서는 안 됐던 걸까.

“공식적으로 지금이 내 첫 번째 춤인데, 날 두고 갈 거예요?”

애원보다는 위협에 가까웠다. 분명 말로는 애원하고 있는데, 나를 붙잡는 손길이나 얼굴은 애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누구 하나 망가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 성인식이 지난 지가 언제인데 이게 첫 번째라고?”

결국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내 손을 붙잡은 알렉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 모든 처음은 이자벨이어야 하니까요.”

아니면 의미가 없잖아요.

기분이 이상했다. 누님. 누님 거리며 내게 어리광을 부리던 애는 어디로 간 걸까.

내 앞에 있는 건 캐롤이 말했던 것처럼 위험한 남자였다.

내 허리를 잡은 알렉스의 굵은 손마디가, 순간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 * *

연회가 끝났다. 샬덴의 사절단은 밤새 이어지는 연회에 끝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

자정이 넘자 초대한 이에 대한 예의는 지켰다고 생각했는지 약속한 것처럼 숙소인 서궁으로 돌아왔다.

게일은 넋을 놓고 있는 이자벨을 추슬러 서궁으로 데려왔다. 그의 등 뒤에 박히는 시선이 꽤 위협적이었다.

“이자벨, 괜찮습니까?”

“아뇨. 안 괜찮아요. 게일. 당신도 봤죠? 알렉스가…… 알렉스가 좀 이상해요.”

의자에 거의 주저앉듯이 앉은 이자벨은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걔가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애가 외로움도 많이 타고, 어리광도 많고…….”

게일은 한숨을 쉬었다.

콩깍지가 씐 것은 알고 있었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알렉스 로윈은 어렸을 때라고 딱히 이자벨이 말한 것처럼 순한 아이는 아니었다. 단지 이자벨의 앞에서만 순한 척 굴었을 뿐.

“사람을 좀 경계하긴 했어요. 어렸을 적에 안 좋은 기억이 많았으니까. 근데 애가 원래 순했어요. 착하고, 똑똑하고…….”

열네 살짜리 남자애가 자기 누이를 스토킹하는 게 ‘순한 애’가 할 행동은 아니지 않나?

게일은 처음 로윈 저택에서 그들 남매를 봤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잊기도 어려울 만큼 이상했다.

이자벨의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기 바쁜 소년은 로윈 저택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로윈 백작이 허락한 건지 아닌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저택의 하녀들은 소년의 통제하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이자벨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녀들은 이자벨이 저택의 일을 주관하는 것처럼 따랐고, 이자벨 또한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는 아니었다.

무슨 야망이나 계략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래놓고 그 소년이 하는 건 하녀를 시켜 제가 지켜보지 못할 때의 이자벨에 대해 감시하는 것뿐이었다.

저택이 통째로 잘 꾸며진 무대 같았다. 소꿉놀이 같은 남매의 관계는 사실 미하일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망가질 것이 뻔히 보였다.

물론 미하일에 의해 이자벨이 떠나면서 알렉스 로윈이라는 인간이 더 돌아버린 것 같긴 하지만…….

“내가 문제였을까요? 나 때문에 애가 저렇게 변한 거면 어떻게 하죠?”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죠.”

“알렉스는 아니에요.”

“모를 일이죠.”

게일은 알렉스의 돌아버린 눈을 떠올리며 그의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게 되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렉스 로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자벨을 놓지 않을 거다. 그건 명확했다.

그리고 여기는 적의 땅이었다. 그 미친개가 날뛰어도 게일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았다. 이러려고 수도로의 행군에서 이자벨을 그렇게 무시했나?

그의 집착을 눈치챈 샬덴이 이자벨을 샬덴으로 미리 돌려보낼까 봐?

연기였다면 정말 그럴듯했다. 게일도 잠깐은 속았으니까.

“……후작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의 물음에 이자벨이 딱딱하게 굳은 답변을 내놓았다.

“해야죠. 난 샬덴으로 돌아갈 거예요. 조금 변했어도 알렉스는 알렉스고, 난 걔가 위험해지는 꼴은 못 봐요.”

문득 게일은 궁금해졌다.

이전 생에, 그러니까, 오로지 이자벨만이 기억하는 그 삶에서, 정말 알렉스 로윈이 순한 인간이었을까? 단편적인 이자벨의 말만 들으면 이자벨은 천하의 나쁜 년이었고, 알렉스는 순하다 못해 제 몫도 못 챙겨 먹는 어린애였다는 건데…….

지금 보면 둘이 바뀐 것 같았다.

“그가 당신을 놔주려 할까요?”

“몇 년에 하루라도 볼 수 있는 게 아예 못 보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좀 멀리 시집갔다고 생각하고 살면 되는데.”

“그는 당신을 누이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자벨. 멀리 시집간 가족처럼 여기기는 무리죠.”

게일은 이자벨의 착각을 정정했다.

“……그는 당신을 갖고 싶어 해요.”

“날 이제 누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날 갖고 싶어는 한다고요? 그게 무슨 앞뒤가 안 맞는 말인지…….”

“간단하죠, 이자벨. 그는 자기 누이가 아니라 자기 여자를 보듯 당신을 보고 있잖아요.”

이자벨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녀는 정말 심각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가 지껄이고 있다는 투로 그녀가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알렉스를 모욕하지 마.”

명령처럼 떨어진 말에 게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응이 아무리 격해도, 이자벨의 착각은 한 번 깨져야 할 것이었다.

“모욕은 아니죠. 어차피 피도 한 방울 안 섞였는데.”

“그깟 피가 뭐라고? 난 5년 동안 걔와 가족으로 살았어.”

스물세 살인 알렉스 로윈의 5년은 앞으로 살아갈 시간에 비하면 꽤 짧았다. 그리고 알렉스 로윈은 이자벨과 함께할 평생을 꿈꾸는 모양이었고.

진짜 순진한 게 어느 쪽인지.

게일은 이자벨의 강경한 반응에 한발 물러나면서 중얼거렸다.

“피가 별 게 아니라니, 폐하께서 들으시면 우시겠군요.”

“날 울게 만드는 게 아니라?”

냉소적으로 받아치는 말에 게일은 그녀가 그가 하는 말을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설사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게일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호위를 강화해야겠군. 시녀도 몇 매수하고. 후작에 대한 감시도 시작해야겠는데.

“폐하께서라면 우시면서 당신을 울게 만들기도 하시겠죠. 그러니 이자벨, 부디 잊지 마세요.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당신이 나와 알렉스를 모욕하지 않는다면 훨씬 기억하기 쉬울 것 같네요.”

그의 청혼 이후에 약간이나마 풀린 경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게일은 쓰게 웃었다.

“쉬어요, 이자벨.”

속삭이는 인사에 아무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방문을 닫은 게일은 문 앞에 서 있는 시녀를 발견하고 친절하게 웃었다. 그리고 당혹스러워하는 시녀의 손목을 그대로 낚아챘다. 머릿속으로 날카로운 것이 파고드는 듯한 고통과 함께 시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기절했다.

“전하.”

샬덴의 기사들이 게일에게 다가왔다. 쓰러진 시녀에 대한 어떠한 의문이나 동정도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서궁 앞에 잘 보이게 던져 놔.”

게일은 몰려드는 기억에 숨을 몰아쉬면서 명령했다. 끔찍한 두통에 신음하면서도 게일은 거기서 필요한 정보를 골라냈다.

지독히도 오랫동안 해 온 일이었기에 그는 금방 자신이 원하던 정보를 기억의 해일 속에서 찾아냈다.

시녀는 후작의 사람이었다.

* * *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도 어지러웠다.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이 까만 시야가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몇 번이고 스스로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알렉스가 나를 그런 의미로 원한다고? 우리가 가족이란 사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했던 앤데. 그 애가? 누님. 누님. 하면서 내 치마폭에 붙어 어리광을 부리던 애가 갑자기 그럴 리가 없잖아. 다시 잘 얘기해 보면, 알렉스도 분명히 알아들을지도 몰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뒤척거리느라 머리는 이미 이불 속에서 잔뜩 헝클어지고 난리가 났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위해 결국 이불을 걷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내려다보는 알렉스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머리 엉켰어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알렉스는 몹시 자연스럽게 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하도 자연스러운 태도에 나는 그가 여기 있는 게 마치 약속된 일이라는 착각을 할 뻔했다.

“감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이자벨. 숨 막히지 않아?”

“넌, 넌……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내 말에 알렉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올라가는 알렉스의 입꼬리가 보였다.

“여긴 아를이잖아요. 내가 더 유리한 땅이죠, 뭐든.”

엉킨 내 머리를 살살 풀어 내리는 손이 내 뺨을 스쳤다. 딱딱하고 큰 손이 낯설었다.

어둠 속에 있으니 알렉스가 더 내가 아는 알렉스 같지가 않았다. 그냥 아주 아름답고 위험한 남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치워 버리기 위해 애쓰면서 알렉스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마침 잘 왔어. 기다렸는데.”

“나를요? 당신이?”

내가 밀어낸 손이 내 허리를 잡아당겼다. 나는 가까워진 알렉스와의 거리에 그대로 알렉스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알렉스는 오히려 자기 어깨에 닿은 내 손을 보고 웃고 말았다.

“날 기다렸어요? 이렇게 예쁘게 하고?”

자려고 누운 꼴이 예쁘면 얼마나 예쁠까. 차라리 별로 꾸미지 않았더라도 아까 연회에 갔을 때가 더 나았겠지.

얘가 왜 이럴까.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허리를 감은 알렉스의 손을 치우려고 했지만 헛손질만 계속됐다.

“할 말이 있어서…….”

“무슨 말?”

뭐든 들어줄 수 있을 것처럼 기분 좋게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지나치게 가까웠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뒤로 빼면서 속삭였다.

“내가 여기 온 이유 말이야. 알렉스. 그러니까 샬덴에서 내가 조건을 받아왔는데…….”

알렉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나는 말끝을 길게 늘였다.

내 말이면 뭐든 좋다고 했던 알렉스였는데, 이제는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몇 년에 하루 정도는 가족들을 볼 수 있게 해 준대. 좋지, 응?”

“몇 년이요?”

감정이 담기지 않는 되물음에 나는 약간 희망을 가지고 덧붙였다. 화를 안 냈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거 아닐까.

“그래. 오 년마다 한 번씩은 서로 국경 부근에서 얼굴도 보고 안부도 묻고…… 이전이랑 다르게 말이야.”

나는 주절주절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전쟁을 끝내고, 위험한 일도 그만두고, 좀 멀리 시집간 누이라고 생각하라는 그런 말을.

“어쩌면 편지도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정식으로 태자비가 되면 그 정도 자유는…….”

“태자비?”

알렉스가 내 말을 끊었다. 여전히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지만, 전혀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쩐지. 당신이 쓰는 신분이 이상하긴 했죠.”

“게일은 나름 좋은…… 사람이야.”

나는 더듬더듬 변명했다. 알렉스는 내 말을 제대로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당신 결혼을 대가로 이번에 산 게 오 년에 하루인가?”

알렉스의 말이 짧아졌다. 그리고 그와 내 거리 또한 가까워졌다.

이내 알렉스는 나를 한쪽 팔로 들어 자기 허벅지에 앉혔다. 알렉스가 나보다 작았을 적에 내가 자주 해 주던 행동이었다. 열두 살짜리가 열 살짜리에게 해 줬던 행동.

서로 다 큰 남매가 하기에는 이상한.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일 리가 없잖아. 그렇지? 당신은 매번 나를 위하느라 자기 결혼을 팔았잖아.”

알렉스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톡 갖다 댔다. 가까워진 거리에 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힘이 없어서 당신을 지키지도 못했고…….”

나는 그대로 알렉스의 허벅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알렉스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알렉스가 자책하는 게 싫었다. 아주 끔찍하게.

“그건 아니야, 알렉스. 누구나 다 조건을 맞춰서 결혼하는데, 나라고 다른 건 아니었을 뿐이지.”

알렉스가 내 손을 붙잡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어딘가 맹목적이었다.

“그래서 상대를 좋아했어? 아니잖아. 나 때문이었잖아. 날 위해서, 나 때문에…….”

“좋아도 했어, 알렉스.”

“거짓말.”

알렉스는 숫제 웃음까지 터트렸다. 내 손을 붙잡은 알렉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냐, 알렉스. 난 분명 7년 전에 시그니티를 꽤 좋아했었어. 지금 게일도…….”

“지금 내가 당신의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소리야?”

연애 감정은 아니더라도 분명 인간적인 호감이 있었다.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알렉스는 내 말이 완전히 거짓말인 것처럼 굴었다.

“아니야…….”

그건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알렉스를 내려다보면서 나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정도 물러났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약간…….

“이자벨. 나한테서 도망치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알렉스의 손이 날 잡아당기는 게 더 빨랐다.

“지금, 당신이?”

손목에 격통이 느껴졌다. 내 손목을 쥐어짜듯 비트는 느낌에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아……!”

나는 다시 속절없이 알렉스의 품으로 끌려들어 갔다. 나는 다시 알렉스의 품에 안겨서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약간 서러웠다. 내 알렉스가 날 아프게 했다고? 내가 그렇게 당해도 싸다지만, 그래도 뭔가 기대라는 게 있었나 보다.

“아파. 알렉스……. 왜 그래. 너 왜…….”

알렉스가 이번에는 아예 품에 꽉 안은 채로 내게 속삭였다. 목덜미에 스치는 숨결이 뜨거웠다.

“미안해요. 이자벨. 당신이 자꾸 거짓말을 하고 날 피하니까 너무 화가 나서……. 많이 아파요?”

알렉스의 손이 내 손목을 약하게 쓸었다. 나는 은근히 내 손목을 건드리는 알렉스를 제지했다.

“하지 마.”

“내가 닿는 게 싫어요?”

아까와 같은 어딘가 위험한 말투였다.

나는 황급히 부정했다. 알렉스는 꼭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야. 알렉스. 그냥 놀라서 그랬어.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해요?”

“……너무 가깝잖아.”

“어렸을 적에는 매일 같이 잤는데, 고작 이게요?”

적어도 그때는 네가 내 목덜미를 입술로 문지르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알렉스를 달랬다.

“그땐 어렸잖아. 지금은 너도 다 컸고.”

“신경 쓰여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목에 알렉스의 이가 닿았다. 딱 잇자국이 남을 정도로만 힘을 줘 물었다.

목, 목덜미, 어깨……. 점점 내려가는 알렉스를 향해 나는 일부러 고개를 강하게 흔들면서 대꾸했다.

“아니, 그냥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내 어깨를 문 것을 마지막으로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어릴 적과 다르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 눈이 두려워졌다.

“신경 쓰이면 좋겠는데.”

“……알렉스, 너 뭔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 지금까지지.”

“우린 가족이잖아? 그치? 알렉스…… 누나잖아. 응?”

“그럼요.”

알렉스는 내가 놀랄 만큼 시원스레 수긍했다.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것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에요.”

“알렉스, 너무 가깝…….”

순간, 알렉스가 내게 입을 맞췄다. 딱 다문 내 입술 위를 알렉스의 혀가 쓸고 지나갔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가 까끌한 혀가 그 위를 쓸었다.

나는 완전히 굳은 채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하얗게 변했다. 알렉스가? 우리 알렉스가? 그 애가 나한테?

그가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는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제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 알렉스는 다시 내게 짧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떨어졌다.

“난 정말 이자벨과 가족이 되고 싶어요. 진짜 가족.”

“난, 이건…… 알렉스. 너 무슨 짓을…….”

더듬거리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형편없었다. 알렉스는 나를 향해 정말 배부른 듯한 미소를 지었다.

“놀랐어요?”

알렉스가 내 뺨에 입을 맞춘 채로 중얼거렸다.

“빨리 익숙해져야 할 텐데.”

* * *

소파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는 넋을 놓고 있었다. 게일이 들어서자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한 이자벨은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알렉스가 이상해요.”

무릎을 안고 있는 손목에 벌겋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부어 있는 꼴이 어지간히 세게도 붙잡힌 것 같았다.

벌겋게 남은 손자국, 목과 어깨에 드러난 잇자국.

“……당신 꼴을 보니 잘 알겠군요.”

게일은 속으로 감정이야 어쨌든 겉으로나마 침착하게 굴 수 있는 스스로에게 감사했다.

“걔가 나한테…….”

“잠은 잤습니까?”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게일은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면서 이자벨을 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준 게일은 이자벨의 눈을 손으로 덮으면서 속삭였다.

“자요, 이자벨. 최대한 빨리 돌아가도록 할 테니까.”

이 거래는 애초에 그른 셈이었다.

게일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을 때까지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리고 돌아선 순간,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정말 미하일을 닮고 싶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 거의 평생을 미하일을 연기해 왔다.

샬덴의 미친 왕이라면 지금 같은 경우에 어떤 행동을 했을까.

전쟁?

아를은 협상을 할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게일은 첫날의 연회 이후에 표면적으로만 오가는 이야기들로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내용이 거의 없는 번드르르한 말들만 가득 찬 나날들이었다.

게일은 꽤 빠르게 깨달았다. 아를은 애초에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은 후에 곧바로 수성에 들어갈 작정인 것 같았다.

어차피 샬덴과 아를의 세력은 비슷한 편이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키기가 어려운 백중지세.

애초에 이들은, 샬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이자벨을 되찾는 것에 집중했던 거다.

‘하여간 귀한 아가씨지.’

그 사실을 깨달은 게일은 곧바로 이자벨의 호위를 최대로 강화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전쟁은 시간문제였으니까.

이자벨을 무사히 샬덴으로 데려가는 게 게일의 최우선 과제로 바뀌었다.

제일 먼저 게일은 이자벨의 방을 여기사들의 방과 합쳐 버렸다. 서궁 가장 안쪽의 큰 숙소를 중심으로 기사들을 겹겹이 배치하고, 그 안에 이자벨을 두고도 안심을 하지 못했다.

다음 문제는 수도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수도를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국경까지 어떻게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이 요원했다. 게일은 아무리 유리한 협상을 들이밀어도 그들을 내보낼 생각이 없는 아를의 태도에 혀를 찼다.

“아주 철저하군.”

게일은 중얼거렸다. 이자벨에게는 말하기도 어려웠다.

자기가 없어지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자벨에게 이런 말을 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불쌍한 여자였다. 하필이면 두 나라의 미친놈을 사이에 끼어서 인생이 멋대로 휘둘리고 있으니.

오늘도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뭔가 해결해 보겠다며 나선 이자벨이었다. 게일은 기사를 붙여 주면서도 딱히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미친놈은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미쳐 있는 여자의 말도 안 듣는 놈들인데 다른 사람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이 뻔했다.

이자벨은 몇 번이고 알렉스가 이상하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그가 제정신이 아닌지는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인지하기 싫은 것이든지.

* * *

고풍스러운 응접실은 꽤 많은 돈을 들인 것 같아 보였다. 적어도 웬만한 백작가 이상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즐비했다. 막 상단이 시작할 때, 충분한 여유 공간이 없어 난장판이었던 것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로웠다.

리 상단의 본점은 이미 예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물어보니 이미 두 번이나 증축한 모양이었고, 그사이 화재도 한 번 일어나 자재도 석재로 대부분 바꿨다고 한다.

“그럼 지금 상단주께서는…….”

“미리 선약이 되어 있지 않으실 경우에는 따로 저희가 약속을 잡아 드린답니다. 이름과 가문을 알려 주시겠어요?”

친절과 상냥함을 얼굴에 써 붙이고 있는 젊은 남자는 나 같은 방문객이 몹시 익숙한 태도였다. 상인 주제에 귀족이 부르면 응당 나와야 할 것이 아니냐는 그런 귀족들을 응대하는 일에는 도가 텄겠지.

“……저는 예전에 부트 남작 부인께서 가정 교사 일을 보실 때 가르치셨던 제자 중 한 명이랍니다. 오랜만에 선생님을 뵙고 싶어 왔는데…….”

나는 말끝을 흐렸다. 어딘가 아쉬워하는 듯하면서 정말 순수하게 과거의 지인을 보러 왔다는 것처럼.

“혹시 벨이라는 여자아이를 기억하고 계시냐고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

나를 응대하던 젊은 남자는 약간 침묵하더니 내게 잠깐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응접실을 떠났다.

그리고 몇 분 뒤, 돌아온 남자는 나를 엘리자베스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나는 손때 묻은 서류의 난장판 속에서 익숙함을 찾았다. 늙지도 않은 얼굴로 종이 무덤 한복판에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가 날 보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딸린 기사들은 떼고 들어와, 이자벨.”

내 뒤에는 네 명의 기사가 내게 붙어 있었다. 나는 눈짓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내 명령보다는 게일의 명령이 더 우선시되는 이들이었다.

나는 간신히 문을 반쯤 열어 두는 것으로 타협하고 엘리자베스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철저하네. 아주 소중히 보호받고 있어. 내 집무실의 사생활은 보호가 안 되겠지만.”

비꼬는 말투는 여전했다. 서류를 보느라 썼던 안경을 책상 위에 그대로 던져 버린 엘리자베스는 눈을 비비며 내게 물었다.

“왜 왔어?”

“7년 만에 만났는데 그게 할 소리야?”

변함이 없는 엘리자베스에 나는 안도하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바로 어제 만난 사람처럼 대꾸했다.

알렉스의 일을 겪고 나니 내가 알던 인간들이 죄다 변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말은, 이 위험한 도시에 왜 돌아왔냐는 뜻이야.”

“위험?”

엘리자베스는 피곤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걱정이 섞여 있었다.

“너 하나 붙잡겠다고 벼르는 인간들 천지인 곳에 왜 왔어?”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러나 바깥의 기사들에게는 충분히 들릴 정도는 되었다.

“어디 호화로운 골방에 갇혀 손과 발이 묶인 채로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으면, 돌아오지 말았어야지.”

“누가 날…….”

“섭정공도, 후작도. 또…….”

엘리자베스는 나를 응시하다 말을 멈췄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후작을 봤어?”

“내가 놀라 달려오는 일이 알렉스에 관한 일 말고 또 있는 거 봤어?”

“봤단 뜻이네.”

“……언제부터 애가, 그렇게 된 거야?”

아무리 멍청해도 내가 알렉스가 나를 이성적으로 보는 걸 몰랐을 리가 없었다.

알렉스는 분명 나를 굉장히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남매라는 사실에 몹시 만족했다. 하나도 닮지 않은 얼굴에서 어떻게든 닮은 부분을 찾고, 공통점을 하나라도 발견하면 한 핏줄이라 그렇다고 환하게 웃었다.

그런 애였는데…….

“이자벨. 알렉스 로윈은 처음부터 딱히 멀쩡한 편은 아니었어. 특히 여기가.”

엘리자베스는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알잖아. 원래부터 후작이 너한테 집착했던 거.”

“이렇게는 아니었지. 걔는 자기 가족한테 집착한 거였어. 지금처럼 이상하게…….”

“애초에 가족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려서부터 정 붙일 데가 없었잖아. 내가 부모고 친구고 걔 전부였으니까 어릴 때는…….”

“네가 떠날 때도 걔는 어린애는 아니었어. 그때도 널 거의 안고 다닐 정도로 컸을 텐데.”

“적어도 그때는 날 여자로 보진 않았어!”

“뭐?”

엘리자베스가 눈을 찌푸렸다. 마치 처음 듣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왜 그런 반응이야? 알고서 나한테 한 말 아니었어?”

나는 엘리자베스의 반응이 생경했다. 지금까지 알렉스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던 사람인 주제에 이제 와서 몰랐다는 것처럼…….

“근친을 할 만큼 미쳤다는 게 새삼 놀랍지는 않은데…… 진심으로?”

“그건 아니야, 리지. 지금까지 그럼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건데? 알렉스가 이상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후작은 원래부터 너한테 집착했으니까. 그냥 처음부터 이상했다고. 네가 없으니까 점점 더 돌아 버리기 시작하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아까보다 좀 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그냥 누이였을 때부터 그랬다고. 후작은 변한 게 아니야. 그냥 네 앞에서 부리던 내숭을 때려치운 거지.”

그녀는 내게 가깝게 다가오라는 듯이 손을 까딱였다. 슬그머니 반쯤 열린 문을 바라보는 태도에 나는 주춤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네가 정말 후작과 남매라면 차라리 좀 상황이 나을 거야. 하지만 지금 태도를 보아하니…….”

아니지?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작았다.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상상했던 것 중 최악이군.”

“캐롤 양도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하긴 하던데. 도대체 이게 왜 문제인데?”

“섭정공은 알아?”

“아주 똑같이 묻네. 아직 몰라. 곧 말하게 되겠지. 아는 인간마다 그렇게 닦달해대니.”

나는 나만 빼고 뭔가 아는 것 같은 이들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비꼬는 내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썹이 올라갔다.

“당장 돌아가서 섭정공에게 그 말을 해. 그리고 기왕이면 둘이 그대로 짐을 싸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신혼집을 차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시그한테 뇌물이라도 받았어? 왜 갑자기 그런 소리야?”

“그게 네 자유가 보장된 채로 남은 생을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거든.”

“……글쎄.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나는 반쯤 열린 문을 향해 고갯짓했다. 내 호위와 감시를 둘 다 하고 있는 샬덴의 기사들이 저 너머에 있었다.

“가끔 생각하는데, 이자벨…… 넌 약간 미친놈들을 끌어들이는 자석 같아.”

“욕도 참 고상하게 하네, 리지.”

“별말씀을.”

엘리자베스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이건 정말 널 위해 하는 소리야, 이자벨. 네 주위의 미친놈 중에서 섭정공은 그나마 제일 상식적으로 미쳤거든.”

“……아무튼 미친놈이란 소리 아니야?”

“그나마 덜 미쳤다는 소리지. 그는 네 자유를 존중할 거고, 널 구속하지 않을……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네 앞에서는 아주 착하고 성실한 인간처럼 굴 거야.”

엘리자베스는 마치 어린애에게 설명하듯 차근차근 내게 설명했다.

“반면에 후작은 미친개지.”

알렉스에 대한 설명은 몹시도 짧았다.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알렉스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미친개는 주인도 무는 법이야.”

알렉스에게 물린 목의 자국이 거의 사라졌음에도 순간 그 부분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그나마 덜 미친놈이랑 도망가. 네 인생에서 선택지는 별로 없어.”

“그건 나도 동의하지만…….”

이쯤 되면 아무리 회피하고 있더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던 모든 사람이 알렉스가 나를 납치할까 우려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확신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알렉스가 날 납치해서 평생 가둬 놓을 것처럼 말하는 엘리자베스는 제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내가 도망치면, 가만히 있지 않을걸.”

“누가?”

“너도 짐작은 할 텐데, 리지.”

나는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 모양으로만 ‘샬덴의 왕’이라고 속삭였다.

“넌 진짜 미친놈 자석이야, 이자벨.”

엘리자베스는 질린 얼굴을 양손에 묻었고, 나는 다 포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쟁이 일어나면 알렉스가 나설 테고, 난 또 그 꼴은 못 보고……. 그런데 내가 어디에 있든 날 갖지 못한 쪽에서 전쟁을 일으킬 것 같고…….”

정말 그냥 딱 돌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도 저도 못하고 그냥 콱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게 업보인가. 전생에 그렇게 못되게 굴었던?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데, 나보고…….”

내 혼잣말에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팔자가 더러운 인간은 처음 본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아직도 후작이 소중하니?”

“…….”

“이자벨, 이젠 자신을 좀 우선시해 보는 건 어때?”

엘리자베스는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나라면 그냥 다 버리고 어디 산골에 은거할 텐데. 넌 도대체 그 미친개가 뭐가 예쁘다고…….”

“난…….”

아직도 악몽을 꿀 때면 알렉스가 죽었던 날이 되풀이된다.

다락의 커다란 창문과 바람에 흔들리는 알렉스의 검은 머리카락, 그와 대비되는 창백한 얼굴.

내가 죽였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일어난 적 없는 일이 되어 버린 지금에서도 나는 알렉스의 일이라면 전혀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

내 세상은 몹시 좁았다. 무관심한 아버지, 로윈 가문 그리고 아버지가 데리고 온 사생아. 친구도, 연인도, 심지어 아끼는 하녀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가문에 더욱 집착했고, 알렉스를 미워하고…….

사실 그게 내 인생의 전부였다. 지금과는 아주 다른 그런 인생이었다.

알렉스가 여자애가 아니라는 것. 내가 알렉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계기가 아니라는 것. 그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도 그 창백한 알렉스의 얼굴이 계속 잔상처럼 내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럼 넌 왜 죽었어? 몇 개월만 참으면 내가 자연스럽게 저택에서 사라질 거고, 네 세상이 펼쳐질 텐데. 넌 왜 하필 내 앞에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서, 그런 얼굴로 죽었어?

내가 그렇게 미웠니? 앞으로 펼쳐질 꽃길을 걷어차고 내 앞에서 죽는 걸 선택할 만큼?

모르겠다. 이제 ‘그’ 알렉스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질문에는 평생 아무도 답해 주지 못할 것이다.

“난 그 애한테 빚이 있어.”

이건 나만 아는 부채 의식이었다. 게일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내게 더 묻지 않았다.

“후작이 널 죽여도 좋다고 할 거야?”

“그 애가 원한다면.”

“그럼 후작이 자신을 이성으로서 사랑해 달라고 하면?”

“리지. 난 이미 그 애만 사랑해. 물론 그 애가 원하는 것처럼 연애 같은 감정은 아니지. 하지만 만약 이런 답도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에 미하일이 없이, 그냥 그대로 우리가 이 아를에서 살았다면.

“……어쩌면 알렉스를 받아 줬을지도 모르지. 걔가 원하는 대로 걔를 사랑하는 척하면서.”

어쩌면 나는 알렉스의 비밀스러운 연인으로 살았을지도 몰랐다.

“넌 후작을 그런 의미로 사랑하지 않잖아.”

“뭐가 중요해? 알렉스가 원한다는데. 내 감정이야 꾸며내면 돼. 그걸로 알렉스가 행복하다면.”

왜 나 같은 것을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알렉스가 원한다면야 사실 뭐든 해 줄 수 있었다. 알렉스한테 해가 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답도 없는 상황에서는 아니지. 전쟁이라고? 내가 그런 곳에 알렉스를 보낼 것 같아?”

“후작만 미친 줄 알았는데…… 너도 딱히 정상은 아니구나, 이자벨.”

엘리자베스는 질린 얼굴이었다.

“난 그냥 알렉스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야.”

“보통 자기 동생이라고 생각했던 애가 사랑한다고 하면, 기겁하고 도망치는 게 먼저 아니야?”

“그러다 애가 상처받으면 어떻게 해?”

“다시 말하지만, 후작은 애가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이마를 짚었다.

“너 지금 그러니까 후작을 거절하는 게…… 후작이 전쟁에 나가서 다칠까 봐서야? 거부감이라든가 그런 게 아니고?”

“거부감이야 있지.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거야.”

엘리자베스는 아예 책상 위에 엎어졌다. 머리를 헤집는 엘리자베스는 몹시 괴로워 보였다.

“넌 어떤 의미로 그 미친개보다 제정신이 아니야, 이자벨…….”

그 미친개가 네 새끼가 아닌데 도대체 왜……. 엘리자베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그래, 그렇겠지. 내가 이 아무도 믿지 않을 과거를 설명하지 않는 이상.

“후작은 더 이상 어리지도 않고, 네 자식이나 손주도 아니야.”

“나도 알아.”

“아니. 넌 몰라. 넌 후작이 당장 널 납치해서 감금해도 배신감 같은 거 안 느낄 거잖아.”

“……탈출하려고는 할 거야.”

“전쟁 나서 알렉스가 끌려갈까 봐 걱정돼서?”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는 말투로 덧붙였다.

“세상에 누가 자기를 납치한 인간을 걱정해?”

“납치범이 아니라 알렉스잖아.”

“후작이 너한테 포옹이나 키스나, 아무튼 연인 간에 할 법한 행동을 요구하면? 물론 거부하겠지. 근데 거부하는 이유가 싫어서가 아니라 걔가 전쟁을 일으킬까 봐서잖아.”

이자벨, 너 무서운 거지? 후작이 널 사랑해서 위험한 짓을 할까 봐. 네가 걱정하는 건 그것뿐이잖아.

정곡이었다.

“……그래. 그게 뭐 어때서.”

“그 미친개가 불쌍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는데…….”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 문제에 정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자벨, 너 사실은 후작이 너한테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상관없지? 아니…… 아예 후작한테 기대 자체를 안 하는 거야, 넌.”

알렉스 로윈이 뭘 하든, 그게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행동이 아니라면 아무 상관이 없지? 넌 후작이 널 죽여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죽어 줄 인간이야. 기대가 없으니까.

“연애 감정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기대를 해. 상대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기대를 하게 된다고.”

“대가를 바라는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배웠는데.”

“그럼 질투라는 감정이 왜 있겠니?”

엘리자베스는 내 말에 코웃음 쳤다.

“……그러게.”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엘리자베스는 반발하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글쎄. 어느 정도는 나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넌 후작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후작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것 같아, 이자벨.”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래. 후작을 더 돌아 버리게 만든다는 것 빼고는 나쁜 건 아니지.”

하필이면 대놓고 구속과 집착을 바라는 남자한테 이 기대감 없는 태도는…….

엘리자베스는 상황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더라도 둘의 괜찮은 미래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설사 일이 잘 풀려서 이자벨과 알렉스가 평범한 연인이 되었다고 해도…….

‘왜 이자벨은 질투를 안 해요?’

‘응? 왜? 그 여자랑 잘 어울리던데. 물론 네가 그 여자보다 더 예쁘지만.’

몹시 올바르지 않은 답변인데. 이자벨은 정말 그렇게 말할 것이 분명했다.

‘이자벨은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헤어진 사이면 네 결혼식에는 못 가려나……. 그건 슬플 것 같은데.’

……어떻게 해도 후작의 폭주 및 감금 루트를 탈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는 머리가 아팠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나마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여자는 팔자가 너무 사나웠고, 약간은 자초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자벨, 도대체 뭐 때문에 온 거야?”

“알렉스를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고. 리지, 당신은 계속 그 애를 봤으니까…… 뭔가 알지 않을까 해서.”

“후작이 널 포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후작이 죽거나, 아니면 너에 대한 기억을 전부 잊어버리거나.”

“……지나치게 극단적인데.”

“아니고는 없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냥 네가 다 포기하고 도망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그러면 이 빌어먹을 사태가 진정이 될까?”

“아니, 더 심해지기는 하겠지만 네 인생은 평온을 얻겠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산골 오지까지 다 뒤지고 다닐 것이 분명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전혀 바라던 답변이 아니네.”

“난 신도 아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어.”

엘리자베스는 딱 잘라서 말했다.

“만약 내가 상인의 입장으로 널 대했다면, 지금 널 묶어서 후작에게 넘겼겠지. 하지만 널 적어도 친구로 생각하고 있으니 너한테 도망가라고 충고하는 거야.”

“난 도망 못 가.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라고.”

“그러니까 섭정공에게 가라는 말이야.”

“다 듣잖아.”

나는 열린 문 너머의 기사들을 지칭하면서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그쪽도 모르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널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네 인생이 꼬인 걸 모를 수가 없을걸.

* * *

미하일은 게일의 전보를 구기며 생각했다.

역시 보내지 말 걸 그랬지.

결혼이라는 대가가 너무 매력적이라 넘어갔지만, 역시 보낸 순간부터 후회하고 말았다.

아를의 인간들은 헤더를 제외하고는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헤더의 핏줄조차 말이다.

미하일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며칠 동안 약속 장소에 나오지 못한 헤더를 보기 위해 그녀의 저택으로 몰래 잠입했던 날이었다. 경비는 삼엄했고, 방 안에 갇혀 있던 헤더는 그를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헤더는 아버지에게 결혼하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고백했다고 했다.

미하일은 우는 헤더에게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헤더는 제 가족을 사랑했다. 보기 드문 화목한 귀족 가문에서 헤더가 그를 위해 부모의 말을 거역한 것이다.

미하일은 그 사실에 비틀린 만족감을 느꼈다.

헤더는 늘 그렇게 미하일이 부족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의 독점욕을 충족시켜 줬다. 그래서 헤더가 없다는 사실에 이렇게 괴로워질 줄도 몰랐지.

울던 헤더는 발걸음 소리에 미하일을 숨겼고, 그는 그때 처음으로 구드윈 백작을 봤다. 희끗희끗하게 바래기 시작하는 금발을 제외하고는 헤더와 닮은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도무지 웃지 않을 것 같은 엄격한 얼굴을 한 구드윈 백작은 헤더에게 다정한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았다. 헤더는 또 울었고.

아, 그래도 구드윈 백작 부인은 그나마 나았다.

어떻게든 헤더의 마음을 포기하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헤더를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말을 고르는 모습이 꽤…… 헤더와 닮았으니까.

미하일은 문득 든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구드윈 백작가는 이자벨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그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자벨은 온전히 헤더만 닮았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헤더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것은 로윈 백작과 결혼하기 전이었으니까.

제 가족을 아꼈던 헤더가 가족들에게 이자벨의 태생을 알렸을까? 알렸다면 어디까지? 미하일이 샬덴 왕가의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렸을까.

이자벨은 제 외가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교류조차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나뿐인 외동딸을 꼭 닮은 손녀를 외면했다면, 글쎄…….

미하일은 게일에게 보낼 서신을 새로 휘갈기며 머리를 짚었다. 두통이 느껴졌다.

역시 보내지 말아야 했다. 보내고서 후회하는 건, 헤더 하나로 족했는데.

* * *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타고 있는 마차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렸다.

나를 가장 안쪽에 둔 채, 네 명의 기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빗소리가 천둥처럼 느껴질 만큼 마차 안은 고요로 숨이 막혔다.

투툭. 툭.

진흙 위를 구르는 마차의 바퀴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빗소리가 박자를 맞춘 음악 같았다. 아주 음산한 음악 말이다.

그리고 그 빗소리가 불안의 전조였던 것을 증명하듯,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무슨……?”

나는 마차 안에서 거의 구를 뻔한 몸을 겨우 지탱했다. 마차가 멈췄다. 기사 하나가 속삭였다.

“확인해.”

가장 내게 가깝게 붙어 있던 기사 하나만 남고, 전부 밖으로 나섰다. 나는 검 위에 손을 얹고 있는 기사의 긴장한 얼굴에 더듬더듬 물었다.

“뭐죠? 지금 갑자기…… 꺄악!”

갑자기 마차가 출발했다. 거칠게 덜컹거리는 마차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무릎을 마차 바닥에 찧었지만,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고통조차도 느낄 새가 없었다.

“꽉 잡으십시오.”

기사는 그대로 내 허리를 낚아채 꽉 안고 마차 문을 열었다. 빗방울이 얼굴을 아프게 때렸다. 눈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기사의 품에 안긴 채 강제로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내 머리를 보호하듯 꽉 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을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나는 겨우 멈췄다. 날 붙잡고 있던 기사는 빠르게 검을 뽑고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그게 그 기사의 끝이었다. 엎어지는 그의 등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머리 위로 쉴 새 없이 비가 쏟아졌다.

뭐야, 이거…….

찰박찰박 진흙을 밟고 걸어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났다.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이 노골적인 기척이었다.

“이자벨 로윈?”

묵직한 음성이 내 위로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서른은 넘어 보이는 남자는 나를 보고 웃었다.

“맞군.”

축축하게 젖은 남자의 황갈색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집에 가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기시감이 들었다. 비슷한 얼굴을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그런…….

“당신 누구야…….”

남자는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이런 순간에 마주하지 않았다면, 좋은 사람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을 만큼 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

그 순간, 머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흔들렸다.

나는 끊기는 의식 사이로 남자에게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매일 아침 거울에서 봤던 내 얼굴. 험한 일 한번 겪어 본 적 없는 온실 속의 화초같이 예쁘장하고 순한 그 얼굴.

남자는 나와 닮았다.

남자는 쓰러지는 이자벨을 안아 올렸다. 낡은 마차가 약속한 듯 도착했다.

몇 번이고 마차를 바꾸고, 길을 빙빙 돈 끝에 남자는 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비를 맞아 젖은 채로 꽤 오래 두었더니 몸이 열이 나고 있었지만, 남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남자의 앞에 있는 그의 형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지만.

“쓸데없이 약해 빠졌군.”

“그냥 걱정된다고 말하는 건 어떻습니까, 형님.”

“…….”

예순쯤 되었을까. 희끗희끗하게 새어 원래 머리 색이 뭔지 알 수도 없는 백발의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기만 했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형제라 부르기에는 꽤 나이 차이가 있어 보이는 두 남자의 사이를 가느다란 목소리가 가르고 들어왔다.

“일단 아이부터 옮기죠. 도련님, 위층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꼿꼿한 허리의 노부인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빗물에 푹 젖어 있는 이자벨을 응시했다.

“물론이죠, 형수님.”

치마와 소매는 진흙투성이였다. 노부인은 가만히 서 있는 남편을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남자는 노부인의 뒤를 따르면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늙은 형에게 약간의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자기가 자초한 일인 것을.

* * *

‘나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에 나는 물건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내 앞에 있던 여자는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내 앞에서 사라졌다.

천박하고 화려한 향이 내 코끝에 맴도는 것에 나는…….

잠깐, 저 여자가 누구지?

‘왜 또 화가 나셨어요?’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그 손길에 씩씩대던 숨을 간신히 고를 수 있었다.

‘누님, 제가 뭘 해드리면 다시 웃으실 수 있을까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알렉스…….’

검은 머리카락이 내 뺨에 닿았다. 내 뺨 아래쪽에 키스한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깊고 얕은 흉터가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 턱을 들어 올린 손 또한 흉터투성이였다. 오래된 것처럼 흐릿한 것부터 최근 것처럼 붉은 것까지 다양했다.

‘말만 해 줘요. 난 당신 명령을 들을 때가 제일 좋아…….’

나는 내 턱을 들어 올린 알렉스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손가락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음?

‘이번에는 어떻게 할까요. 저번처럼 다리를 잘라 팔아 버릴까. 아니면 광에 가둬 굶겨 죽일까요?’

내 손가락이…… 하나가 없었다. 새끼손가락이 있는 부분이 깨끗하게 도려낸 듯 뭉툭했다.

‘너무 약한가요? 누님이 이렇게 기분이 나빠졌으니까…… 죽지도 못하게 괴롭혀 줄까요?’

내가 대답도 하지 않고 손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알렉스가 아예 내 손을 낚아챘다.

‘무슨 생각해요? 그 남자?’

그 남자가 누구지? 나는 알렉스가 누구에 대해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그 남자를 생각해요?’

알렉스의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나는 오싹함을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원하는 답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게도.

그가 만족하는 답변이 아니면…… 아니면?

‘왜 대답이 없어요?’

내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손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내 육신은 딱딱하게 긴장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

‘읏……!’

허벅지를 문지르던 손이 아플 정도로 강하게 둔부를 움켜쥐었다. 알렉스는 여전히 예쁘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이제야 말하네.’

‘낮, 낮이잖아. 알렉스.’

미친 꿈이었다. 밀어내거나 하지 말라고 해야지. 왜 알렉스의 눈치만 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싫어요?’

눈을 접으면서 웃는 알렉스의 얼굴은 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점점 더 거침이 없어졌다.

나는 싫다고 말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고개라도 끄덕여야 했다.

‘으응, 읏, 아!’

내 아래를 파고들기 시작하는 손가락은 어느새 두 개, 세 개로 늘어나 있었다. 나는 알렉스를 밀쳐내는 대신 얌전히 그의 허벅지에 올라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왜?

와르르 쏟아지는 생각들이 쾌락에 밀려 의식 아래로 잠겨들었다. 일부러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알렉스의 것을 더 받아들이기 위해 움직였고, 알렉스는 내 온몸에 키스하고 잇자국을 남겼다.

목의 여린 살이 알렉스의 이에 찢어져 피가 흘렀다. 알렉스는 피가 멈출 때까지 상처에서 입술을 떼지 않았다. 숨이 막힌 내가 밀어내려고 애써도 그 애는 내 상처를 빨며 내 아래를 파고들었다.

‘아읏, 흡, 흐…….’

어느 순간에는 침대였고, 어느 순간에는 소파였다. 수십 번의 잠자리가 한순간에 되풀이되는 기분이 들었다.

‘흐읏, 응, 흑…….’

난 대부분 울고 있었다. 알렉스에게 절박하게 매달린 채로. 그 애의 아래에서, 때로는 위에서 허리를 흔들면서도.

알렉스를 거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위해…….

뭘 했지?

나는 어느 순간 멍청하게 내 가슴 위에 얼굴을 묻고 있는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어내리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가슴과 목덜미에는 얼룩덜룩한 자국들이 빼곡했지만 나는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천장의 무늬만 헤아렸다.

‘아…….’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내 태도가 싫었는지 알렉스가 내 가슴을 크게 깨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머릿속이 뿌옇게 물들었다. 생각이 필요했던가?

대답을 바라는 알렉스의 눈이 무서우리만치 짙었다. 날 범하고 싶은 건지 죽이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감정이 날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 새끼손가락 생각했어.’

내 대답에 알렉스가 웃었다. 얇은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살짝 드러났다 사라졌다.

‘저도 매일 생각해요, 누님.’

그는 내 약지를 물었다. 약하게 물어 아프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다.

내 약지를 문 채로 알렉스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맛있었는데…….’

“헉!”

나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무거웠다. 목이 타는 것처럼 말랐다. 간신히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사이에서도 몹시 낯선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소름 끼치는 꿈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기절하기 전까지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빗속의 마차. 죽은 기사. 곤란한 얼굴로 웃던 남자.

“이자벨……?”

나이가 든 음색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괜찮니? 심각한 병은 아니야. 너무 젖은 채로 오래 있어서 며칠만 푹 쉬면 괜찮아진다고 하더구나.”

온화한 인상을 가진 늙은 부인이었다. 우아한 몸짓과 주름이 졌다뿐이지 부드러운 피부는 고생 한번 해 본 적 없는 귀족의 것이었다.

“옷은 내가 갈아입혔으니 걱정하지 말렴. 목이 마르진 않니?”

꽤 높은 귀족 부인 같은 노인은 내게 차분하게 물어왔다. 나는 찢어질 것 같은 목에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입가에 컵을 대주었다. 나는 몇 모금 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누구……?”

노부인은 내 말에 쓰게 웃더니만 내 머리를 쓸어 주며 속삭였다.

“아주 어릴 적에 보고 본 적이 없으니 기억을 못 할 만도 하구나.”

내가 처음으로 의심한 건 슬프지만 알렉스였다.

하지만 여긴 내가 익숙한 곳도 아니었고, 나를 납치한 알렉스가 나를 혼자 내버려 둘 리도 없었다.

“난 마리사 구드윈이라고 한단다.”

구드윈?

“그래. 얘야. 네 짐작이 맞을 거란다.”

노부인은 굳이 스스로를 나의 외할머니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땀에 젖은 내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고 화제를 돌렸을 뿐이다.

“자고 일어나면 부드러운 식사는 가능할 텐데, 먹고 싶은 거라도 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인생에 없다고 생각했던 외가였다.

“절 여기로 데려온 게 부인이신가요?”

“할머니라 부를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마리사라고 불러 주렴.”

“절 왜 데려오셨죠?”

마리사는 이자벨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쉬렴. 음식은 헤더가 좋아했던 거로 준비할 테니.”

“부인. 전…….”

“넌 지금 아픈 아이란다. 잠과 휴식이 필요하지.”

“전 돌아가야 해요.”

“여긴 헤더가 쓰던 방이란다. 네 엄마는 작아도 이 방이 제일 풍경이 좋다고 좋아했지.”

전혀 딴소리만 하는 노부인은 침착하게 몸을 돌렸다. 문고리를 붙잡은 채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너도 이 방이 마음에 들 거란다, 이자벨.”

탁. 문이 닫혔다.

나는 날 감싼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내딛자마자 푹 주저앉았다.

겨우 침대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열 때문에 몽롱하기는 했어도 나름 움직일 만했다.

문고리를 돌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고 창가의 커튼을 걷었다.

“이거 뭐야……?”

내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한쪽 벽을 전부 덮은 창문은 모조리 벽돌로 막혀 있었다. 빛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나는 커튼을 붙잡은 채로 천천히 방을 둘러봤다. 방금 전까지 이 방에서 누군가가 생활한 것처럼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옷장을 열어젖혔다. 이십 년 전에나 유행했을 것 같은 구식 디자인의 드레스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은 낡은 기색조차 없었다. 방금 장인이 만든 것처럼 깨끗하고 먼지 하나 쌓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여긴 정말 엄마의 방이었다. 이십 년 전, 엄마가 아직 로윈 백작과 결혼하기 전에 살았던 구드윈 저택의 방이었다.

나는 옷장의 드레스를 죄다 꺼냈다. 수도에서 일하는 장인들은 전부 자기 물건에 이름을 남긴다. 이 드레스도 마찬가지겠지.

짤막한 자수로 새겨진 문양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

이런 문양을 쓰는 장인은 내가 막 아를을 떠났을 때 데뷔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 드레스는…… 지금 아무도 입지 않을 것 같은 이 구식의 드레스는, 최근에 만든 것들이었다. 이십여 년 전의 드레스가 아니라.

죽은 딸의 방에, 죽은 딸이 입었을 법한 드레스를 계속 새로 만들어 채워 놨다고?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 방은 이십여 년 전에서 시간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십여 년 전처럼 보이게 인위적으로 공들여 꾸민 방이었다. 엄마가 떠났던 그날에서 멈춘 것처럼.

* * *

진흙에 한 번 뒹군 것 같은 더러운 드레스가 찢긴 채로 길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구두 또한 딱히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드레스의 주인이 누군지 명확히 알려 주는 금발 몇 가닥이 질척한 진흙탕 속에서 발견되었다.

게일은 노골적으로 사고가 아니라 납치라는 것을 보여 주는 흔적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죽은 기사는 없었다. 이자벨을 가장 마지막에 본 기사는 화살에 묻어 있는 마비 독에 당했다. 샬덴의 사절단이 입은 피해는 그게 전부였다.

“여기 있던 게 아닙니다. 어딘가로 데려간 후에 옷만 벗겨 여기다 찢어 놓은 거로 보입니다.”

찢어진 드레스를 유심히 뒤지던 기사 하나가 드레스 밑단에 주변의 흙과는 다른 흙들이 묻어있음을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구두는 여기서 잃어버린 게 맞는 것 같습니다만…….”

“주변의 발자국은?”

“비 때문에 흔적이 다 쓸려나갔습니다.”

게일은 혀를 찼다. 철저하게도 준비한 모양이었다. 상대도, 경로도, 뭐 하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후작저로 간다.”

증거가 없다면, 심증이라도 있는 인간을 찾아가 봐야지.

로윈 저택은 게일이 처음 이 저택에 방문했을 때와 똑같았다. 겉모습만은 말이다.

게일은 로윈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고요함에 질식당하는 것 같았다. 창가를 통해 햇빛이 환하게 쏟아졌지만, 이상하리만치 어둡게 느껴졌다.

젊은 후작의 저택이라기에는 활기가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이자벨이 이 저택에 있었을 때에는 이 정도까지 고요하진 않았는데.

이자벨은 겉보기처럼 사랑스럽고 명랑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기 동생에게는 그렇게 행동하고자 애썼다. 그 덕분에 꽤 분위기가 밝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제 이자벨이 없는 로윈 저택은 옛이야기 속에 나오는 귀신들의 성 같았다.

“새벽부터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인데.”

잠을 잔 기색도 없이 멀끔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는 알렉스를 향해 게일은 짧게 대꾸했다.

“그건 나도 동의해.”

“그럼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는 걸 추천하지.”

게일은 알렉스를 유심하게 살폈다.

그가 이자벨이 납치당한 것을 안 것은 어젯밤이었다. 밤새 내내 수색하고 주변을 살폈지만 나온 것이 없었다.

만약 로윈 후작이 범인이 아니라면, 이자벨이 사라졌다는 것 또한 알기 어려운 시간이기는 했다.

그래서인가. 알렉스 로윈의 얼굴은 마지막에 봤을 때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아름다운 얼굴 위에 깔린 무심한 권태, 게일에 대한 증오와 상대를 가리지 않은 예기. 이자벨을 정말 훔쳤다면 지었을 그 어떤 만족감도 그 얼굴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긴 손님 대접이 이런가?”

“새벽부터 기사를 이끌고 온 주제에 손님?”

서로 정중하게 가면을 쓰고 대했던 수도까지의 여정과 전혀 다른 태도였다.

“어젯밤의 사건으로 도무지 혼자서는 안심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지.”

“어젯밤?”

알렉스는 샬덴의 사절단을 모조리 불에 태워 버리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이자벨 또한 샬덴의 사절단에 속해 있었다. 샬덴의 사절단에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 이자벨에게도 무슨 일이 생겼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후작이 저지른 게 아닌가?”

알렉스의 기색이 더 날카로워졌다. 게일은 그 얼굴이 연기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고민했다.

“어젯밤에 샬덴의 사절단 중 일부가 타고 있던 마차가 공격받았지.”

“…….”

알렉스의 표정에 불길함이 깃들었다. 게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내 약혼녀가 납치를 당한 모양이야.”

놀라운 얼굴이었다. 게일은 뭔가 더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 로윈은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혼이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텅 빈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분노, 상실, 허무, 질투…….

“……날 의심했군.”

알렉스는 꽤 긴 침묵 끝에 게일에게 입을 열었다. 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번 일이 그대가 벌인 일이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저지를 일이 아닌가?”

“난 아니야, 태자.”

게일은 그 말을 이제 반쯤 믿었다. 아예 믿지 않은 처음보다야 꽤 회복한 신뢰였다. 저 표정이 연기라면, 알렉스 로윈은 세계 최고의 연기자임이 틀림없을 테니까.

“내가 했다면, 이렇게 눈에 띄는 방식으로 하진 않았겠지.”

“그럼 섭정공에게 가 봐야겠군.”

알렉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었다. 즐거움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미소였다.

“그는 그럴 인간이 못 돼.”

시그니티 바르펜시아는 위험한 남자였지만, 이자벨에게만은 위험해지지 못했다. 갓 태어난 아이도 그보다 귀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지는 못할 것이다.

시그니티가 이자벨을 사랑하는 방식은 그랬다. 너무 사랑하고 아껴서, 질투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그 절절한 마음이 알렉스는 늘 거슬렸다. 조금이라도 덜한 마음이었으면 이자벨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쳐내기라도 했을 텐데,

“이자벨에게 손을 대느니 자기 손을 잘라 버릴 인간이 섭정공이니까.”

“사람에 대해 확신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 없지.”

“글쎄…… 그리고 만약 섭정공이 그녀를 납치했다면 당신을 먼저 죽였겠지.”

“그럼 누가 범인이지?”

알렉스는 게일의 질문에 비웃음을 던졌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 아닌가?”

“여긴 아를이고, 여기 사정은 후작이 더 잘 알 텐데.”

게일은 눈에 불을 켜고 이자벨을 찾을 알렉스를 알았다. 나름 협력을 하자는 제스처에 알렉스는 서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더 손을 잡을 이유가 없지.”

“그거 아쉽군.”

게일은 한숨과 함께 그대로 로윈 저택을 나섰다. 뒤에 남겨진 알렉스 로윈은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 몸을 움직였다.

잠을 거의 자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알렉스 로윈은 이자벨이 떠난 후로 만족스럽게 자본 적이 없었으니까.

* * *

나는 커튼을 활짝 걷었다. 벽돌로 막힌 창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슨 풍경을 보란 말이죠?”

“네 안전을 위해서란다, 이자벨.”

마리사는 내 비난에 침착하게 대꾸했다. 나는 그 침착함에 오히려 더 그녀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줄 알고 그림 몇 개를 가져왔단다. 헤더가 그린 풍경화란다. 너도 좋아할 거야.”

“전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헤더와 다르구나.”

엄마가 경치가 좋은 곳을 좋아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미하일이 끊임없이 말했으니까.

“전 여기 왜 있어야 하는 거죠? 언제 나갈 수 있는 거죠?”

“이자벨. 넌 우리 가족이야. 가족을 떠날 필요가 왜 있니?”

“난 구드윈이 아니라 로윈이에요.”

마리사는 그 말에 몹시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내 어깨를 감싸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쳐냈다.

“네 진짜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지 않니? 로윈 백작은 널 애정을 가지고 키우지도 않았어.”

“그렇다고 부인께서 절 애정을 가지고 키우신 것도 아니죠.”

“그건 정말…… 깊이 후회하고 있단다.”

마리사는 내 손을 붙잡았다. 쳐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노인임에도 말이다.

“늘 널 지켜봤지. 매번 널 데려오자고 말했지만…… 네 외할아버지가 너무 완고했단다.”

그녀는 슬프게 속삭였지만, 내게는 딱히 아무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후회하든 지켜보든 내 알 바인가. 그런다고 내 유년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그럼 그대로 그냥 사시지 그러셨어요.”

“네 외할아버지도 네가 결혼만 하고 나면, 다시 너와 교류를 하려 했단다. 겉으로는 네 약혼자의 출신에 대해 영 탐탁지 않아 하셨어도, 속으로는 네 결혼을 꽤 기대하셨는데…….”

변명하듯 말이 길어질수록 내 손을 붙잡은 그녀의 악력이 거세졌다.

“하필이면 또, 또 그놈이 우리 아이를 빼앗아갈 줄은 몰랐지.”

그녀의 눈은 회상하듯 초점이 없었다. 나는 그 초점 없는 눈이 두려웠다.

“무섭니?”

나는 내 손이 살짝 떨리고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마리사는 내게 상냥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렴, 이자벨. 이번에는 우리가 지켜 줄 테니.”

그놈이 다시는 널 빼앗아가지 못할 거야.

나는 중얼거리는 마리사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두려운 건 그녀였다.

“……엄마는 그 남자를 사랑했어요.”

마치 미하일 때문에 엄마가 죽은 것처럼 얘기하는 마리사가 이상했다.

헤더 구드윈은 미하일을 만나 사랑했고,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아이를 가진 채로 로윈 백작과 결혼한 뒤 아이를 낳다 사망했는데…….

그 모든 것은 사실 엄마의 의지대로 벌어진 일들이었으며, 나를 낳다 돌아가신 것은 사고였다.

“따지자면 엄마가 죽은 건 나 때문이죠. 그 남자 때문이 아니라.”

“그 남자가 헤더를 이상하게 만들어서 그렇단다. 그 남자를 만나지 않고 살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끔찍하게도…….”

비논리적인 말이었다.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헤더는 정말 착한 애였단다. 내 말에 한 번도 토를 달지 않을 정도로 착한 아이였는데…….”

마리사는 정말 끔찍한 것을 입에 담는다는 것처럼 증오와 경멸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하필 그 남자를 만났지.”

신께서 그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벌을 내리신 거야.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지.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어떻게 야만인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겠니. 분명 강제로…….”

“엄마는 결혼식 전날까지 그 남자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자기를 데리러 와 줄 수 없냐고.”

“지금 그 남자를 옹호하는 거니? 네 아버지라고?”

그녀의 눈에 경멸스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엄마와 똑같이 생겼지만, 반쪽에는 그 남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지금 깨달은 것처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작자는 끔찍한 인간이죠. 하지만 그 작자에 대한 당신의 증오와 저를 연결하지 마세요.”

미하일에 대한 내 감정은 솔직히 원망과 증오가 가장 컸다.

나는 마리사가 미하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복수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자기 딸을 버린 남자니까. 그들은 원망하고 증오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에 대한 증오가 왜 내게 영향을 끼치지?

이제는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나를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로 보는 게.

미하일은 내가 엄마의 분신이자, 그들이 사랑했던 증거이기에 갖고 싶어 했다. 마리사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는 미하일보다 좀 더 친절하고 연약했으며, 내 말에 상처를 쉽게 받는다는 것을 뺀다면 미하일처럼 내게서 엄마를 봤다. 그리고, 내게서 미하일을 사랑해 부모에게 반기를 든 딸을 봤다.

“난 그 작자도, 엄마도 아니니까.”

그날의 대화 이후로 며칠 정도는 마리사가 오지 않았다. 내가 잘 때를 귀신같이 알고 그 시간에 식사가 들어왔고 난 그 이후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미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곳곳에는 집착적일 만큼 고스란히 보존한 엄마의 흔적들이 가득했고, 대화를 나눌 사람 하나 없었으니까.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내 방문이 열린 건. 금세 닫혔지만 말이다. 남자는 빠르게 들어와, 내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문을 닫고 내 앞에 섰다.

“아직 제정신이군.”

내가 납치된 날 본 남자는 꽤 신기한 것을 보듯 나를 쳐다봤다.

“당신은 누구예요?”

말을 하도 오랫동안 하지 않아 내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대충 짐작하지 않았나? 거울만 봐도 알 텐데.”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더 나와 닮아 있었다.

“구드윈 백작이 사생아……인가요?”

그는 내 말에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틀렸나? 아니면 뭐지?

“네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필요는 없지.”

내 출생을 꼬집는 발언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정식으로 혼인한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어. 너와 달리.”

그는 전대 구드윈 백작의 늦둥이였다. 현 구드윈 백작이 이미 후계자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을 때 후처와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었다.

말하자면 작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지. 구드윈 백작 부인이 난산으로 헤더를 낳고 불임이 되기 전까지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네가 작은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면…….”

“전혀요.”

“그럴 줄 알았어.”

남자는 꽤 잘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꽤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웃는 인상이 그를 좀 더 젊어 보이게 만들었다.

“유진이라고 불러. 내가 널 로윈 양이라고 부르긴 좀 그렇잖아?”

“로윈 양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죠.”

“진심으로? 내가 알기론 네 진짜 아버지는…….”

“내가 정말 그 작자를 내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당신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자신을 유진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이해하지 못한 투로 물었다.

“그렇다고 로윈 백작이 널 아꼈던 것도 아니잖아?”

“적어도 날 딸로 키웠죠. 이 얘기는 그만하죠. 당신이 날 뭐라고 부르든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니까.”

그가 나를 로윈 양이라고 부르든 이자벨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래 보고 싶은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날 왜 여기 데려왔죠?”

“형님이 시켰으니까. 정확히는 형수님인가.”

유진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구드윈 백작 부부가 왜 나를요?”

“넌 헤더의 딸이잖아. 넌 잘 모르겠지만…… 형수님은 헤더한테 상당히 집착하셨어.”

“그건 여기 잠깐만 있어도 알겠던데요. 그래서 백작 부인은 도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죠?”

“없어.”

“네?”

내 되물음에 그가 다시 친절하게 대답했다.

“없다고. 정말. 넌 뭘 할 필요도 없어. 그냥 여기서 잘 먹고 잘 쉬고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걸 바라는 거군요.”

미하일이나 알렉스가 그러했듯이.

“음…… 그건 아니야. 며칠 지나면 넌 영지로 보내질 테니까. 형수님이야 자주 오가려 하시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지.”

“내가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한다면요?”

“아를 내에서, 형수님이 오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딱히 막지는 않을걸……?”

“그럼 지금은 왜 날 가둬 두고 있는 건데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사람을 납치해서 가둬 놓고 지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그게 말이 되나.

“아직 호적 정리가 안 끝나서. 그리고 널 풀어 주면 샬덴으로 갈 거잖아. 그건 안 되지.”

“아니면 전쟁이 일어날걸요.”

“뭐 난 상관 안 해. 형님 부부도 전쟁 물자를 지원하느라 꽤 고달프겠지만, 목숨이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 있어요? 딸도 아니고, 연을 끊다시피 지내온 손녀 하나 가지고?”

“나야 사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어쩌겠어. 나는 아직 백작이 아니고, 형님께서 정정하시니 형님 명령을 따라야지.”

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호적 정리가 끝나면 넌 내 딸로 들어올 거야. 이자벨 구드윈. 꽤 잘 어울리지 않아?”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난 아직 아들 하나밖에 없어. 정부는 없고, 부인과 사이는 그럭저럭 괜찮아. 어차피 잘 마주치지도 않을 테니 그건 상관없을 거고.”

그는 약간 고민하는 투로 덧붙였다.

“내 부인이 정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들은 내 친아들이야. 내가 백작이 되면, 그 애가 후계자가 될 거고.”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의 자리를 빼앗지만 마, 이자벨.”

“……애초에 난 당신의 딸로 입적되고 싶지도 않아요.”

“아니. 넌 그렇게 될 거야. 형수님이 네 이름 뒤에 구드윈이라는 성이 달리기를 정말 고대하셨거든.”

그는 별로 내키지 않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야. 난 헤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숙부와 조카 관계는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처음 보네요. 엄마를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은.”

만인의 첫사랑 같은 묘사만 봐 와서 그런가. 처음으로 엄마가 인간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네 주변에는 헤더의 광적인 추종자들밖에 없었을걸. 유모나 백작이나……. 글쎄. 그 남자는 잘 모르겠지만.”

“그중에 제일 광적인 추종자가 바로 그 작자일걸요.”

“네 인생이 안타깝군.”

“그럼 날 풀어 주는 건 어떤가요?”

“나도 내 인생이 있어서. 널 입양해야만 나한테 확실하게 작위를 물려준다고 하셨거든. 어쩔 수 없지.”

“조카 손녀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너야말로 이 나이에 형님 명령에 빌빌거리는 할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니?”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유진은 지나치게 귀족적이었다.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섰고, 거래에 익숙했으며 이상한 집착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그는 나를 약간 동정하고 있었지만, 자기 형님의 명령에 따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내 인생에 이런 인간은 오랜만이었다.

내게 감정적으로 집착하는 인간들 틈 사이에서 나는 오랜만에 정상인을 만난 게 낯설었다. 이런 인간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해 봤자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나를 풀어 주는 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는 내가 불쌍하든 말든 그냥 무시할 것이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서 오히려 제시할 수 있는 게 없는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네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요새 형수님이 하시는 걸 보니 네가 미칠 것 같더라고.”

“그런 생각이 아니었으면, 아예 끝날 때까지 말해 줄 생각도 없었죠?”

“그렇지. 잘 아네. 넌 헤더보다 좀 더 대화가 잘 통하는구나.”

그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걔는 너무 착했거든. 좀 짜증 날 정도로.”

그런 여자 같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그녀를 평가한 건 유진이 처음이었다.

“며칠만 미치지 말고 버텨 봐. 다른 곳으로 갈 테니까.”

나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문에 다가갔지만, 그가 문을 닫는 게 좀 더 빨랐다.

닫힌 문 앞에 서 있자니 내 인생이 정말 답도 없게 느껴졌다.

영지로 갈 때, 도망칠 수는 있을까?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물어라도 볼걸. 샬덴의 사절단이 뭘 하는지, 섭정공은 어떤지, 알렉스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침대로 기어들어 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시야가 조금이나마 어두워지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 방은 완전히 막힌 곳이었다. 램프는 내내 켜져 있었고 나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을 하지 못했다.

사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며칠이 흐른 건지도.

잠에 빠져들면서도, 사실 지금이 밤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또 이상한 꿈에 도착했다. 정말 겪었던 것처럼 생생하지만 실제가 아닌 꿈.

이번에는 계속 나오던 화려한 방이 아니었다. 나는 이번에는 금방 내가 있는 곳을 깨달았다. 기억과는 조금 다르지만 분명히 로윈 저택의 복도였다.

한밤중에 서 있기에는 썩 좋은 곳이 아닌데도 난 그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굴 기다리고 있나?

그러나 나는 내 발걸음이 이리저리 한 군데에서 맴도는 것을 보고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디를 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걸까? 이 늦은 시간에? 아니면 방으로 돌아가는 걸 망설이는 건가? 왜?

‘누님.’

알렉스의 목소리였다. 잠겨 있는 알렉스의 목소리가 기쁨에 물들어 있었다.

‘절 기다리셨어요?’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알렉스를 돌아봤다. 어두운 곳에서 알렉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와.’

‘그건 안 돼요. 지금 너무 보기 싫은 꼴이니까.’

‘괜찮아.’

이상하게 비릿한 냄새가 주위에서 났다. 기분 나쁜 냄새였다. 나는 천천히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다쳤어?’

나는 놀라 숨을 멈췄다. 그러나 꿈속의 내 몸은 오히려 차분하게 알렉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알렉스의 몸을 뒤덮은 피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의 근원도.

‘아뇨. 전부 그 사람의 피에요.’

‘유언을 들었어?’

‘네.’

내게 손을 뻗으려다 멈칫하는 알렉스의 손을 붙잡았다. 내 손에도 피가 묻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사실에 안도했다.

이상한 꿈이었다. 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단편적으로만 나열되었다.

좋은 꿈도 나쁜 꿈도 아닌 이상한 꿈.

‘후회할 거라고 했어요.’

‘그 사람답네.’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쓸쓸했다. 도대체 누가 죽은 거지?

‘……누님은 후회해요?’

‘모르겠어.’

알렉스는 내 말에 나를 천천히 안았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알렉스에게 안기자 내 드레스와 몸에 핏물이 묻어났다.

‘후회해도 괜찮아요. 내가 한 짓이니까. 누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하지 않았을 짓이지.’

‘날 동정해요?’

알렉스는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속삭였다.

‘누님이 드디어 날 동정하기 시작했다면, 난 더한 짓도 할 수 있어요.’

알렉스의 마지막 속삭임에 나는 이 이상한 꿈을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백작을 죽인 건 저예요. 누님이 아니라.’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기분 더러운 피의 감촉과 품에 안겨 있는 이자벨. 만족스러움이 차올랐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자벨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 손으로 문지르자 오히려 더 피가 묻어났다.

‘정말 아무것도 되돌리고 싶지 않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벨의 목소리가 꼭 노랫말 같았다.

‘네가 후회한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를 원망해.’

그 말과 동시에 알렉스는 튕겨 나오듯 꿈에서 깼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창밖으로 해가 비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다.

알렉스는 이자벨이 떠난 뒤,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 제대로 잠을 청해 본 적이 까마득했다. 그런데 고작 의자에 한 번 앉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고? 이자벨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꿈에까지 영향을 미친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내용이…….

그는 영지로 내려간 아버지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한 적은 없었는데.

아무튼 전대 로윈 백작은 그와 이자벨을 만나게 해 준 은인이 아닌가. 딱히 아버지로 여기고 있지 않더라도 그에게 살의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사실 그렇게 깊게 생각할 만큼의 관계도 아니었는데…… 내가 꿈에서 그 남자를 죽였다고?

꿈속의 감각들이 선명했다. 꼭 현실처럼.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느려진 느낌이었다. 사람을 죽일 때처럼.

……기분 나쁜 꿈이군.

그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계속 더러운 꿈을 곱씹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더 볼 서류도 없었다. 이자벨에 관한 건 머릿속에 전부 구겨 넣고도 모자라서 쓸데없는 정보까지 모아왔으니까.

이자벨을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빨리 데려와야지.

* * *

물에서 이상한 맛이 났다. 미묘하게 달콤한 맛이.

나는 그대로 마시던 물을 삼켰다. 샬덴에서 지냈던 7년간 수면제라고는 지독하게 먹어왔다.

가끔은 나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오를 때도 있었다. 내가 뭘 부숴도 내버려 두는 미하일이었지만, 내가 자해하는 꼴은 두고 보지 못했다.

내가 자해를 시작하면 미하일은 날 진정할 때까지 재웠다. 강제로.

웬만한 수면제는 이제 잘 듣지도 않았다. 이 정도는 마신다고 해도 멀쩡할 것이다.

나는 그대로 물을 끝까지 다 마시고,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웠다. 자는 척 눈을 감았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이건 어쩌면 마지막 탈출 기회일 수도 있었다. 이 인간들은 날 샬덴으로 결코 보내지 않을 테니까.

늘 밝은 방 덕분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빨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 몸을 안아 들었고, 나는 잠이 든 척 몸을 늘어트렸다.

새벽 공기 냄새가 났다. 나는 오랜만에 맡은 바깥 공기에 몸을 움찔할 뻔했다.

남자는 나를 안고 어딘가를 한참 걸어 마차 앞에 도착했다.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몹시 좁고 푹신한 상자 같은 것에 몸이 넣어지는 게 느껴졌다. 마차 안에 따로 상자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면 마차 의자 안쪽에 나를 집어넣은 것 같았다.

“이랴!”

덜컹-!

흐릿한 마부의 외침과 함께 몸이 크게 출렁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겨우 시야가 어둠에 적응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떻게 탈출하지?

만약 구드윈 영지로 나를 옮기고 있는 거라면, 꽤 먼 길이니 몇 번은 멈추고 쉬겠지. 날 굶겨 죽이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분명 깨워서 뭘 먹이기도 할 텐데……. 그때를 이용해야 하나?

나를 감시하는 인원은 어느 정도인지조차 모르니 뭘 어떻게 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초조하게 입술을 씹다 멈췄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방책일 수도 있었다.

나는 끈질기게 기다려야만 했다. 이들이 방심하기를.

마차는 꽤 오래 달렸다. 중간에 한 번 멈춰 서 수도의 검문을 통과한 것 같았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할 때쯤, 날 가둔 좁은 상자가 열렸다. 눈을 감고 잠든 척 누워 있는 내 머리를 누군가 툭툭 건드렸다.

“깬 거 알아. 일어나.”

나는 그 확신 어린 말투에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어떻게 알았어요?”

목이 잠겨 있었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마차 문을 열었다.

“별로 안 센 수면제야. 보니까 통하는 것 같지도 않네.”

“……안 묶어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나는 머뭇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맨발바닥에 밟히는 흙보다 휑한 시야에 더 놀랐다.

다 쓰러져 가는 집 한 채를 빼고는 주변이 허허벌판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수도의 성벽과 그 반대편에 있는 산 하나를 빼고는 하늘과 땅뿐이었다.

“네가 맨발로 아무리 뛰어가도 내가 못 잡을 리는 없어 보이는데.”

나는 내 걸음으로는 까마득해 보이는 수도의 성벽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찾았어요?”

“쓸 만한 곳은 찾는 것보다 만드는 게 편하지. 안아서 옮겨다줄까?”

그는 내 맨발과 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낡고 좁은 집을 중심으로 서너 명의 기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의외로 인원이 적었다.

나는 바깥공기를 깊게 들이쉬며 물었다. 새벽에 출발했지만,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깥에 좀 있으면 안 돼요?”

“누가 보물을 바깥에다 둬. 바람 쐬고 싶은 거면 안에서 창 열어놔.”

유진은 타협할 여지가 없게 내 제안을 잘라 버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낡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망가려다가 세 발자국도 가지 않아 붙잡히게 생겼다. 수도 근처에 이리도 허허벌판이 있는 줄은 난생처음 알았다.

다음에 머무르는 곳은 이렇지 않겠지. 수도와 가까워서 일부러 고심해서 고르고 준비한 장소일 수도 있었다.

“푹 쉬는 게 좋을 거야. 오늘 이후로는 삼 일간 마차 생활일 테니까.”

낡은 집 안은 의외로 멀쩡한 가구들로 차 있었다. 다만 신기한 것은 집 전체가 방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큰 창고 같았다.

“큰 침대가 네 거야. 그게 더 감시하기 편하거든.”

그는 집 정 가운데에 놓인 침대를 가리키며 웃었다.

“빨리 자는 게 좋을 거야. 지금이 아니면 침대는 볼 수도 없을 테니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창문을 열었다. 낡은 창문은 내가 열기가 무섭게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바람도 잘 들어오고 좋네.

한참 동안 조그맣게 보이는 수도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금방 보라색에서 남색, 그리고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날 납치한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어요?”

“글쎄……. 그리 길지는 않지.”

유진은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굳이 더 묻지 않았다.

별로 자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를 감시하는 시선에 억지로 누웠다.

천장을 향해 눈만 깜빡였다. 어두컴컴한 집은 촛불 몇 개만이 음산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여정에서도 내게는 개인적인 공간이나 방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불길하지만 또 당연한 예감이.

말이 없는 기사들이 교대하면서 나를 감시했다. 더더욱 잠이 달아났다.

한밤중이었다.

순간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내 귓가에 잡혔다. 그리고 나보다 더 빨리 기사들은 알아차렸는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리 와.”

유진은 나를 끌고 뒷문으로 나섰다. 마차 안에 있는 의자를 열어젖힌 유진은 긴장한 어조로 속삭였다.

“들어가. 혹시 모르니까.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다…….”

내가 이 남자를 밀어 버리고 마차를 몰고 탈출할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나는 그의 체격과 내 힘을 가늠하며 머리를 굴렸다.

끼이익. 낡은 뒷문이 열렸다. 차분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강한 피 냄새와 함께 알렉스가 거기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웃는 그의 뺨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지옥에서 금방 올라온 것 같은 살의가 나를 보자 자취를 감췄다.

“아!”

나를 그대로 마차 안에 밀어 넣은 유진은 마부석에 앉아 말을 채찍질했다. 나는 마차 안에 엎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상황을 파악했다.

알렉스가 왔다. 나를 구하러.

하지만 알렉스의 손에 들어가는 게 나한테 나은 일일까? 그는 날 보내려고 하지 않을 텐데, 오히려 알렉스가 위험해지는 일이 아닌가?

덜컹-!

“아악!”

마차가 크게 출렁이더니 아예 옆으로 쓰러지며 뒤집혔다. 허벅지가 마차 의자에 강하게 찍히면서 비명이 터졌다.

몇 번이나 마차 안에서 구른 후에야 나는 마차가 멈췄음을 깨달았다. 옆으로 쓰러진 마차 덕분에 내 위에 있는 마차 문이 열렸다.

“이자벨.”

알렉스가 나를 불렀다. 나는 어두워 제대로 뭐가 보이지도 않는 와중에도 알렉스가 웃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알렉스…….”

내 속삭임에 그의 웃음이 더 진해졌다.

“날 기다렸어요?”

‘절 기다리셨어요?’

순간, 반쯤 잊고 있었던 꿈속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왜일까.

순수하게 기대에 찬, 피투성이가 된 남자. 나는 이유 모를 의무감에 휩싸였다. 그 꿈속의 내가 된 것처럼. 알렉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의무감에.

“……그래.”

나는 널 기다리지 않았어도, 넌 날 찾아오잖아. 그럼 어쩌겠어. 내 대답은 당연히 ‘그래’지. 네가 알렉스고 내가 이자벨인 이상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다쳤어?”

“아뇨.”

알렉스는 내 말에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은 아이처럼 배부른 얼굴로.

“날 걱정했어요?”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급하게 닦아낸 것처럼 핏자국이 이리저리 남아 있는 손을 붙잡았다. 알렉스가 내 손을 꽉 잡고 나를 끌어올렸다.

마차를 나오자 다리에 검이 꽂힌 채 기절해 있는 유진이 보였다. 알렉스가 내 눈을 가렸다.

“이런 거 보지 마요.”

“죽일 거야?”

“아뇨.”

알렉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죽이진 않을 거예요. 쓸 데가 있으니까.”

날 단단하게 붙잡은 팔, 강렬한 피 냄새. 기분 좋은 웃음소리…….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그건 조금 무서운 기분이었다.

* * *

흐드러지게 핀 장미가 시야에 잡혔다.

이제는 익숙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꿈속이었다. 그것도 아주 이상한 꿈속.

나는 묘하게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른 로윈 저택의 정원을 빠르게 걸어 지나치고 있었다.

순간 도망치듯 빠르게 걷고 있는 내 팔을 누가 붙잡았다. 아니, ‘누가’가 아니었다. 이 이상한 꿈에는 알렉스만 나왔으니까.

‘왜 도망쳐요?’

역시 알렉스였다. 나를 강제로 돌려세운 남자는.

흉터투성이에 현실의 알렉스보다 살짝 작았지만 그래도 알렉스였다.

그러게. 내가 왜 도망치고 있었지?

‘이제 내가 원망스러워요?’

뭘? 무슨 이유로 널 원망하지 내가? 그러나 내 머릿속과 달리 내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난 그날 널 부추기지 말아야 했어.’

‘누님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전부 내가 한 거잖아요. 왜 이상한 말을 해……. 그냥 이리 와요. 조금 자면 괜찮아질 테니까.’

‘난 그렇게 못 해!’

‘왜?’

급격하게 톤이 바뀐 목소리가 내 귓가를 무섭게 파고들었다.

‘그냥 눈 감아.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잖아, 이자벨.’

날 삼킬 것 같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꿈이 천천히 부서졌다. 내 팔을 잡고 있는 알렉스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는 텅 빈 공간에 혼자 남아 몸을 웅크렸다. 천천히 현실과의 경계가 흐려졌다.

푹신한 침대의 감촉과 욱신거리는 허벅지가 제일 먼저 느껴졌다. 마차에서 부딪쳤던 곳이다. 내 정신이 확 깨어났다. 무거운 눈꺼풀을 뚫고 햇살이 들어왔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커튼을 걷고 있던 샐리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조금 늙기는 했지만 내 하녀였던 샐리다.

순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허벅지의 통증이 내 현실 감각을 천천히 일깨웠다.

어제 알렉스가 나를 구하러…… 아니지, 구하는 게 아니라 다시 납치하러 왔다.

알렉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고 내 입을 막아 다시 마차 의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과다 출혈로 기절한 유진을 이용해 그는 흔적도 없이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로윈 저택에 도착한 내가 본 것은 하얗게 질린 채로 다시 기절해 있는 유진과 그런 유진을 가차 없이 끌어내 가둬 버린 알렉스였다.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느냐고? 알렉스는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날 한 번도 품에서 떨어트려 놓지 않았으니까!

“……나랑 같이 온 남자 말이야. 죽였어?”

샐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께서 그런 일을 하실 리가요. 아가씨의 친척이시잖아요.”

과다 출혈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수도로 다시 돌아오는데 쓸모가 없었다면 알렉스는 정말 유진을 죽였을 것 같았다.

“알렉스는?”

“……내가 두 번째에요?”

뒤에서 알렉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몸을 휙 돌렸다. 언제 들어왔지?

“깨어나면 날 먼저 찾을 줄 알았는데…….”

“보통은 칼 맞은 사람을 먼저 떠올리지.”

“나도 다칠 걸 그랬나?”

“내가 걱정할 짓 좀 하지 마…….”

나는 눈가를 문지르며 지친 정신을 깨웠다.

알렉스를 상대할 때마다 늘 예상이 빗나갔고, 그건 꽤 심한 피로감을 유발했다.

“그런 짓을 하지 않게 관심을 충분히 줘요. 관심이 부족해서 이러는 거니까.”

“내 인생에서 너만큼 내 관심을 가져간 인간은 없어, 알렉스.”

알렉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게요. 관심만 주면 가만히 있잖아요.”

“정말 가만히 있을 거야?”

“그럼요.”

“난 세상에서 네가 제일 소중해.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건 변하지 않을 테니까…….”

“떠나는 건 안 돼요.”

알렉스가 단호하게 말하며 내게 다가왔다. 순간 이상한 꿈이 지금과 겹쳐 보였다. 주춤하는 나를 향해 알렉스는 꽤 사납게 웃었다.

“난 당신이랑 달라요. 곁에 없지만 서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요.”

알렉스는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믿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약속 같은 것을 그는 불신했다.

그가 자라온 빈민가에서는 당장 손에 쥔 것만이 자신의 것이었다. 두 손 가득 움켜쥔 것만이 진정으로 소유한 것이라 몸으로 익혔다.

이모는 절대 외상을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값을 치르기 전까지는 물건을 내놓지 않았다.

‘사람은 말이야. 한 번 손에 들어온 건 꼭 자기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자기 건데 왜 값을 치러야 하느냐고 오히려 화를 내지. 염병할.’

어렸던 알렉스는 이모의 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구석에 숨어 그녀의 분노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약속이라는 게 얼마나 허무한지를. 사람은 한 번 손에 쥔 걸 절대 놓지 못한다는 걸.

이자벨은 애정으로 알렉스를 길들였다. 전부 그에게 줄 것처럼 손안에 그득하게 쥐여 주고는 웃었다.

처음에는 경계했고, 나중에는 없어져도 슬퍼하지 말자고 생각했고, 또 시간이 지나서는…… 이모의 말처럼 정말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졌다고 믿고 살았다.

인간이란 게 어쩌면 이리 뻔한가. 한 번 가졌다고 영원히 자기 손에 있을 거라고 믿는 그 안일함이 웃기지도 않는가.

그러나 알렉스도 그런 안일함을 가졌다. 날 사랑해 주고, 웃어 주고, 품어 주는 내 이자벨. 그게 영원할 거라고.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좋아요.”

사실 좋은 수준을 넘어 황홀할 정도지. 여전히 날 아낀다는 게. 그 의미는 좀 다를지라도.

“그런데 당신이 옆에 없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자벨이 없는데 이자벨이 나를 사랑할 거라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살라고?

그게 망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내가 착각한 건지, 미친 건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나는 이제 당신이 나를 위한답시고 나를 버리는 짓에 질렸어. 소중하면, 버리지 말아야지.”

“뭐든 죽는 것보다는 나아.”

이자벨의 신념은 단단하다 못해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매번 똑같은 소리였다. 죽거나 다치는 것보다는 이별이 낫다고.

“나한테 한 번만 물어봐, 이자벨. 내가 정말 이별과 죽음 중에 뭘 택할지.”

“넌 어렸어. 난 너한테 최선인 선택을 할 의무가 있었고. 알잖아, 알렉스. 그때 네 보호자는 나였어.”

그는 로윈 백작이 보호자였다는 소리를 하진 않았다. 그건 아니었으니까. 알렉스는 이자벨의 손에서 크고 보호받고 배웠다.

이자벨의 눈이 강철 같은 신념으로 빛났다. 그건 맹목에 가까웠다.

“난 널 보호해야만 했어. 넌 그때 겨우 열넷이었다고!”

난 너를 지켰어.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한때 이런 이자벨의 맹목을 사랑했다. 나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그 독한 애정이라니. 얼마나 황홀한지.

그런데 그 뭐든지에 우리의 이별이나 스스로의 안전 같은 것도 포함될 줄 몰랐지.

“당신도 그때 열일곱이었잖아, 이자벨. 당신도 어른이 아니었잖아…….”

“하지만 네 누나였지.”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이자벨은 그의 빈정거림에 제법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점점 격해지는 분위기에 샐리는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7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방에서 오랜 시간을 건너뛴 채 둘은 서로를 마주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의미가 없어지니?”

남자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고, 여자는 더 이상 누이가 아니었다.

“같은 피가 흐르지 않으니까, 이제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닌 거야?”

“네.”

알렉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흰 손목에 푸른 혈관들이 비쳤다. 그는 그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만약 정말 우리가 같은 피가 흘렀다면, 전 정말 누님이 하는 말이 아무리 헛소리라도 들어봤을지도 몰라요.”

핏줄이란 얼마나 단단한 구속인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누님이 설사 나를 외면하고 끔찍하게 여기더라도…… 우리 피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내가 너를 소중하게 여기고,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로는 우리가 남매가 될 수 없니?”

“핏줄도 이어지지 않았는데, 내가 왜 굳이 당신 동생의 자리에만 있어야 해요? 더 좋은 자리가 있는데.”

“……그래서 내가 갖고 싶어졌니?”

알렉스는 내 물음에 웃었다. 그는 내 손목을 당겨 푸른 혈관들 위에 입을 맞췄다.

“그래. 당신을 나한테 줘.”

낮의 햇살 아래에 알렉스의 검은 머리카락이 역으로 희게 흐드러졌다. 키도, 몸도 어느 것 하나 크지 않은 게 없었다.

이제 완전히 성인이 된 알렉스에게 나는 처음으로 옛 모습을 찾았다.

……어린 것.

“날 정말 사랑한다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날 사랑해 줘.”

연인끼리, 부부끼리 하듯이 그렇게. 서로를 구속할 수 있는 약속을 나누어 달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내 애정을 갈구했던 어린애는 다 커서도 여전했다.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나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지.

아이의 세상이 부모이듯, 알렉스의 세상은 나였고, 거기서 알렉스는 더 자라지 못했다.

내 손목에 닿는 알렉스의 입술과 혈관에 스치는 이가 느껴졌다.

“내 주변의 것에 질투하고, 나를 구속하고, 나 아닌 곳에서 삶을 찾지 마.”

“그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야?”

“……그렇게 당신을 사랑해.”

나는 드디어 알렉스를 이해했다.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린애의 집착 같은 것에서 비롯된 아집이라도.

아이만큼 순수하고 잔인하며, 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언제부터 날 이런 식으로 사랑했어?”

“당신한테 키스하고 싶어진 순간부터를 묻는 거야. 아니면 이 감정이 시작된 순간부터를 묻는 거야?”

“두 개가 달라?”

알렉스는 내 질문에 내 손바닥 위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당신이 손을 내민 순간부터 사랑했고, 우리가 남매가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키스하고 싶어졌어.”

“내가 그날 너한테 손을 내밀지 않았으면…….”

“그래도 사랑했을걸.”

의미 없는 확신이었다. 실제로 그랬다면 어떨지 그는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전 생의 나는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으니까.

그럼 그 애도, 나를 사랑했을까?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았던 알렉스도? 그럼 그 애는 무슨 이유로 나한테 그렇게…….

까득. 알렉스가 내 새끼손가락을 물었다.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 매섭게 뜬 눈이 내 시선에 누그러졌다.

“내 옆에 있어 줘.”

이상한 꿈속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내 새끼손가락이 생각이 났다. 흉터투성이의 이상한 알렉스는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그 알렉스는 이상한 소리만 했다.

알렉스의 고백 위로 이상한 알렉스의 말이 겹쳐 들렸다.

“당신이 없으면 난 불행해질 거야. 어떤 일도 그보다 더 날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을 테니까.”

‘말만 해 줘요. 난 당신 명령을 들을 때가 제일 좋아…….’

* * *

시그니티는 충혈된 눈을 비비며 대충 손짓했다. 게일은 며칠은 자지 못한 것 같은 그의 얼굴에 예의를 따지는 대신 얌전히 앉았다.

물론 말은 얌전하지 않았다.

“전쟁을 바라십니까?”

“이번 전쟁을 일으킨 게 우리 쪽인 걸 잊은 건가?”

딱히 협박이 못 되는 발언이라고 게일의 말을 일축한 시그니티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덧붙였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제멋대로 할 생각이 아닌가?”

“샬덴의 사절단 모두가 무사히 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전하.”

“사절단 모두라…….”

서로 피차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형식적인 말들만 겉치레로 오갈 뿐.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아를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게일이 먼저 그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왔다.

“아를의 수도에서 벌어진 일이니 어쩌면 당연한 의심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하필 실종된 사람이 그녀라면요.”

“내가 시도했다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진 않았을 거요.”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니군요.”

“납득하지 못한다면?”

“아를은 그녀의 실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그녀를 찾아내든지, 혹은 내놓든지. 아니면…….”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게일은 그 말에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는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샬덴의 폐하께서는…….”

게일은 일부러 말끝을 늘였다. 미하일은 무서운 인간이었고, 이자벨을 놓아줄 인간도 아니었다.

“……그녀를 위해 전쟁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감수할 분이시라.”

“예비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과하시군.”

“단순한 예비 며느리가 아니지요.”

“그럼?”

시그니티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게일은 여기 없는, 샬덴의 황제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자기 정부를 며느리로 밀어 넣을 만큼, 태자를 하찮게 여기나?”

흔한 오해였다. 미하일과 이자벨의 관계에 대해 아는 이는 샬덴에도 많지 않았다.

게일과 이자벨의 약혼에 샬덴에서도 꽤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고, 누구도 자기 애인을 양아들의 약혼자로 삼은 미하일의 의중을 알지 못했다. 샬덴의 귀족들이 왕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으면 꽤 큰 사건이 되었을 일이었다.

“그녀는 고작 폐하의 정부 따위가 아닙니다.”

게일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이자벨의 혈통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에 비하면, 저는 몹시도 하찮은 존재가 맞으니 썩 틀린 말은 아니군요.”

시그니티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뭔가 깊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와 그대 중 둘 중 하나만 데려갈 수 있다고 한다면…….”

“샬덴의 폐하께서는 그녀를 선택할 겁니다. 전하. 고려할 가치도 없는 문제지요.”

태자는 다시 뽑으면 되지만, 그녀는 하나뿐이니 말입니다.

시그니티는 그 순간, 꽤 슬픈 사실을 직감했다. 샬덴에서 끝까지 이자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사실을.

게일이 떠나고 홀로 응접실에 남은 시그니티는 오랜만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했다. 눈꺼풀은 무거웠고, 몸은 피로에 찌들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샬덴의 사절단을 향한 습격은 계속 수사되고 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누가 그녀를 데려갔을지 짐작 가는 구석이 없었다.

처음에는 알렉스 로윈을 의심했지만, 글쎄…… 그렇게 노골적으로 일을 처리할 인간이 아닐 텐데.

그는 자기 누이에 대한 집착이 위험 수위를 넘어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자였다. 허나 그 인간이라면 실종이라는 애매한 수단을 택하기보다는 차라리 가짜 시체를 만들어서 죽음을 위장했을 텐데.

마치 그냥 평범한 귀족 영애를 납치하는 것처럼 이렇게 처리하지는……?

시그니티는 문득 든 생각에 멈칫했다.

어쩌면 자신과 샬덴에서 이자벨에게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가 이자벨을 납치한 거라면? 그저 샬덴의 사절 중 하나를 납치하듯, 지금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하나가 벌인 일이라면?

그럼 의외로 말이 됐다.

이자벨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모르는 인간이 이자벨을 납치한 거라면 그 노골적인 사건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용의자도.

누구지? 누가?

수도에 일을 벌일 만한 귀족은 너무 많았다.

시그니티는 이자벨의 실종 소식 이후에 더 미칠 것도 없는 주제에 놀랍도록 더 돌아 버린 미친개를 부르기로 했다.

그게 연기인지 아닌지는 사실 지금도 잘 구분이 안 되는 게 문제였지만.

* * *

상처받을까 봐 도망치지도, 그렇다고 다칠까 봐 남아 있지도 못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리는 창문에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가둬 놓을 줄 알았는데.”

“도련님께서 아가씨 갇혀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빛이 잘 들어오게 커튼을 예쁘게 묶고 있던 샐리가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갇혀 있는 걸 좋아하진 않을걸.”

샐리는 그 말에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주름이 조금 생기기는 했지만 예전과 거의 그대로인 얼굴이었다.

“그보다 왜 아직까지 알렉스를 도련님이라고 불러?”

“도련님께서 도련님으로 부르는 게 더 좋다고 하셨거든요.”

“다른 고용인들도 그렇게 불러?”

“아뇨. 저랑 신디아만요. 특권이라면 특권이죠.”

알렉스가 로윈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면 그의 전속 하녀였던 신디아도 꽤 빠르게 승진했을 터였다. 나는 유약해 보였던 얼굴을 떠올리며 물었다.

“신디아가 이제 하녀장인가?”

“가문 전체를 관리하는 하녀장이죠. 하지만 본채는 제가 관리해요.”

“그것도 알렉스가 원해서?”

“아가씨, 도련님이 싫어지셨어요?”

샐리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섞인 표정을 나는 제대로 구분해내지 못했다.

“……내가 걔를 싫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

나는 샐리를 향해 약하게 투덜거렸다. 아무튼 그녀는 유모가 아프고 나서부터 날 키운 여자였다. 독설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샐리, 성격이 변했어. 원래는 조금 더 조용하고…….”

“그래서 싫으세요?”

“아니.”

샐리는 내 말에 웃었다. 그녀는 감정 표현과 말 수가 둘 다 적은 여자였지만, 지금은 둘 다 많아진 모양이었다.

“도련님은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예전에는 내숭을 부리셨다면, 지금은 좀 더 솔직해지신 거죠.”

“지금도 좀 부렸으면 좋겠는데.”

“그럼 아가씨에게 계속 열 살짜리 비쩍 마른 불쌍한 꼬마로만 남아 있었겠죠.”

정곡을 짚은 샐리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렇게 보진 않았어.”

“그렇게 보셨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어린 것을 보는 것 같은 태도로 대하셨으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샐리는 내 앞에서 말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티가 났어?”

“안 날 수가 없죠.”

“그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잖아. 부모에게 자식은 평생 애라는데.”

“아가씨는 도련님의 부모가 아니시잖아요.”

“그건…….”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알렉스의 고백 이후에 많은 걸 생각했다. 차라리 손을 내밀지 말아야 했다는 후회부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득한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하지만 가장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건 결국 하나였다.

알렉스는 진심이었어. 그 애가 날 사랑해. 나는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하지? 그 애가 원하는 것처럼 그 애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설사 내가 그 애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 사랑이 내가 가진 죄책감을 이길 수 있을까.

사랑은 이기심을 동반한다.

나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어? 어디까지 갈 수 있어?

아주 옛날부터 연인들 사이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갔던 대화이자, 아직까지도 오가는 말이 아닌가.

내가 알렉스를 사랑해서 알렉스에게 희생을 요구하게 될 날이 상상이 가지를 않았다.

나는 그 애를 사랑하면서, 사랑하기를 무서워했다. 내가 뭔가를 그 애한테 바라게 될까 봐. 그러면 안 되는데도, 알렉스가 날 위해서 뭔가 해 주기를 바라게 될까 봐.

지금 그 애가 나를 사랑하는 건 필연적으로 희생을 동반한 일이었다.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어도, 알렉스를 위해서는 그래선 안 됐다.

그냥 알렉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고 싶은데, 그 마음도 내 이기심일까 봐 겁이 났다. 그냥 알렉스의 핑계를 대서, 그 애가 나를 갖고 싶어 한다는 핑계로 내가 로윈 가문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게 아닐까.

내가 다시 알렉스의 옆으로 돌아가려면, 그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알면서도. 사실 많은 희생을 치른다고 내가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나를 포기할 리가 없는 미하일의 손에서 나를 빼 오려면 그를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적의 황제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전쟁뿐이었다.

모르겠다. 늘 답은 정해져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내 꼬여 버린 인생은 이제 와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도 모르게 엉켜 있었다. 다시 태어나는 게 정말 더 빠를 정도로 해결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없으면…….

“아가씨!”

순간적으로 창밖으로 몸이 기울었다. 시야가 아찔했다. 내 팔을 붙잡은 샐리가 놀란 얼굴로 나를 창가에서 끌어냈다.

“……잠깐 어지러웠어.”

“창가는 가지 마세요, 그럼.”

내 말을 별로 믿는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샐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정말 변명이 아니었다.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왜 내가 떨어지려고 했을까.

죽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이건 진실로 어지러워서였다. 그러나 샐리는 정말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바로 그날 저녁, 내 방에 있는 창문들이 전부 바뀌었다. 아이들 방에나 있을 법하게, 딱 한 뼘 정도로만 열리게끔 되어 있는 창문으로 말이다.

어이가 없어서 창을 열어 보다 포기한 내 등 뒤로 낮 동안 보이지 않았던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당신이 죽어서도 쫓아갈 수 있을지 아닐지, 우리 내기할까요?”

“샐리가 무슨 말을 했든지, 착각이야. 너도 알잖아. 여기서 떨어진다고 죽진 않아.”

내 방은 다락처럼 꼭대기에 있지도 않았다. 이층에서 떨어져봤자 팔다리 중 하나만 부러지겠지.

“알아요. 하지만 충동이 들었을 수도 있겠죠. 가끔 그렇잖아요.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게 되는…….”

내 등 뒤로 다가온 알렉스가 고작 한 뼘 열린 창을 닫았다.

“……죽고 싶어요?”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어깨 위로 알렉스가 이마를 기대는 게 느껴졌다.

“정말 내기할까요?”

“뭘?”

“당신이 죽고 나서, 내가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지 아닐지.”

그는 날 따라 죽겠다는 말을 참 쉽게 했다.

“난 내가 당신을 붙잡을 수 있다는 데 걸게요.”

“……밤이 늦었다. 가서 자.”

알렉스는 내 말에 내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나는 의식하고 있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왜요? 옛날에는 어두운 복도가 무서울 거라면서 옆에서 재워줬잖아요.”

“십 년 전이니까 그랬겠지. 이제는 복도가 어두운 걸 무서워할 나이도 아니면서.”

“무서운데.”

귀신이 나와도 베어 버릴 것 같은 흉흉한 기세를 몸에 두르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꺾인 복도에서 괴물이라도 튀어나올까 봐?”

나는 내 허리를 감싼 알렉스의 팔을 밀어내며 살짝 그의 말을 비꼬았다.

알렉스는 의외로 순순히 팔을 풀었다. 나는 알렉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가서 자. 이제 재워주기에는 넌 너무 컸잖아, 알렉스.”

워낙 큰 인간들이 많은 샬덴에서야 작은 키였다지만, 아를에서는 작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키였다. 그래서 알렉스를 올려다볼 때마다 고개를 뒤로 젖혀야 하는 게 생경했다. 로윈 백작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구두같이 키를 높여 주는 것 하나 없이 옆에 서면 내 정수리 끝이 알렉스의 가슴팍에 올까 말까 했다. 재워준다는 말과는 농담으로라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다란 남자였다.

“그럼 내가 재워줄게요. 동화책이라도 읽어 줄까요?”

“이십 년 전쯤이면 좋다고 했을 텐데, 아쉽네.”

내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은 알렉스의 팔을 붙잡아 내리면서 나는 문을 가리켰다.

“난 혼자 알아서 잘 잘 테니까, 걱정 말고 네 방으로 가서 자.”

“나한테 너무 매정한 거 아니에요?”

알렉스가 조르듯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할 말을 찾는 척 고개를 돌렸다.

“너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 지 하루도 안 지났어.”

“아무 짓도 안 할게요.”

알렉스가 내 허리를 붙잡아 안아 올렸다. 아이를 받쳐 안은 것처럼 한 손으로 내 엉덩이를 받쳐 안자 알렉스와 겨우 시야가 비슷해졌다.

“알렉스!”

“진짜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옆에 있으면 안 돼요?”

“너라면 믿겠어? 당장 날 내려놔, 알렉스.”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드문드문 갈라졌다. 그러나 알렉스는 나를 내려놓는 대신 내 뺨에 키스했다.

“안 믿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내가 당신 말을 안 들어주면 어떻게 하려고?”

코앞에서 보이는 알렉스의 회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그래도 날 사랑하잖아.”

입술이 스칠 것처럼 가까워졌다. 알렉스의 눈에 내가 비쳤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문 내가.

“아직은 내가 당신 첫 번째잖아, 이자벨. 난 그 사실이…….”

나는 내 입술을 손등으로 막았다. 키스할 듯 다가오던 알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원해지도록 만들고 싶어.”

내 손바닥에 닿은 입술과 휘어지는 알렉스의 눈.

발밑의 땅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옥에서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아득했다.

사랑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떤 길이 옳은지 알 수가 없었다.

* * *

머리를 쪼개는 것 같은 격렬한 통증에 게일은 신음을 삼켰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들이 구겨졌다.

“괜찮으십니까?”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게일은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약을 몇 개 삼키자 겨우 고통이 가라앉았다.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흐릿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종이에 적인 이름들 위를 펜으로 그었다.

섭정공이 이자벨을 납치했을 거라고 짐작했던 가문의 수가 너무 많았다. 게일은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기억을 읽었고, 이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로윈 후작 쪽은?”

“본채에 있는 고용인들에 대한 관리가 철저합니다. 거의 나오지 않고, 나오더라도 두 명 이상이 서로를 감시하더군요.”

“직접 들어가지 않고서는 보기 힘들다는 뜻이군.”

게일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애써 고통을 잊고자 했다.

애초에 이자벨이 사라지자마자 가장 처음으로 의심해서 찾아간 곳이 로윈 저택이었다. 본채에서 일하는 것 같은 하녀의 기억을 훑었지만 별다른 것이 없었다.

사실, 그보다 정말 몰랐던 것 같은 알렉스 로윈의 충격받은 얼굴 때문에 물러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계속 거슬린단 말이야…….”

연기였나? 그런 얼굴을 연기할 수도 있나?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알렉스 로윈은 굉장히 의심스러운 용의자였다. 일단 이자벨에 대한 어마어마한 집착과 그걸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미친 행동력. 뒷받침되는 가문의 힘까지.

황제의 밀서가 하루가 멀다고 날아오고 있었다.

미하일은 이미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다. 게일은 두통에 쉬지도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 비틀거렸던 걸음이 걸을수록 나아졌다. 그의 목적지는 로윈 저택이었다.

“어떤 외부인의 방문도 불허한다고 합니다.”

기사의 말에 게일은 묘하게 웃었다.

후작이 미친개처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방문을 막은 것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게일의 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누가 그 말을 했지?”

“하녀 하나가…….”

“그럼 고작 하녀 하나가 한 말을 듣고 돌아가란 말인가? 무례하다고 전해라.”

게일의 능력을 알고 있는 기사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녀에게 말을 전했다.

더 높은 사람의 말이라면 또 어떨지 모른다는 뉘앙스까지 섞어 가면서 말하는 기사 때문에 하녀는 곤란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알렉스 로윈은 수도에서 섭정공에 버금가는 권력자였고, 그가 거절했다는 말에 이렇게 반발해 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녀는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저택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녀의 곁에는 신디아가 서 있었다.

“실례가 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현재 로윈 저택에서는 손님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태자 전하.”

“무슨 이유로 그렇지?”

게일은 꽤 쾌활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는 부모의 기일에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는 남자였다.

“후작님께서 정무에 바쁘시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아를의 일을 섭정공과 후작, 둘이서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게일은 그냥 웃었다. 마치 다 이해한다는 것처럼.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신디아가 아무리 로윈 저택의 하녀장이라고 한들 그녀는 샬덴의 태자와 인사를 나눌 신분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여유로운 웃음을 걸친 게일은 신디아의 손을 잡고 짧게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약간 당혹스러움을 드러낸 그녀는 순간 약간 어지러운 머리에 잠깐 비틀거렸지만 금방 중심을 잡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떠나지 않을 것처럼 버티고 섰던 샬덴의 무리는 미련 하나 없이 로윈 저택을 떠났다.

마차에 올라탄 게일은 옅게만 훑은 기억을 살폈다. 거의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거기서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면 후작의 경계나 더 키웠겠지.

게일은 찌꺼기 같은 기억들의 단면에서 바라 마지않았던 것을 잡아냈다.

뒷모습이나 그림자 따위조차 없었다. 그가 찾아낸 것은 아주 작은 사실이었다. 이자벨의 방에 식사가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

그 미친개가 이자벨의 방에 다른 여자를 들였을 리가 없지.

게일은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그 개자식이 그럴 줄 알았지. 그 돌아 버린 눈깔로 가만히 있을 리가.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섭정공에게 가지.”

섭정공이 알았을까? 게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자벨을 제 품에 꼭꼭 넣고 독점하고 싶어 하는 후작이 섭정공에게라고 그 사실을 알렸을 리가.

섭정공과 후작은 오래도록 같은 편이었지만, 그들 사이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봐도 그랬다. 함께 반란을 일으킨 끈끈한 동지애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적으로야 누구보다야 질기게 엮여 있었지만, 사적으로는 서로를 향한 독설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섭정공은 후작의 미친 짓이나 발언을 관대하게 넘어갔다. 방관에 가까웠지만, 최고 권력자가 보이는 행태치고는 특이했다.

군권을 쥐고 있는 후작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아를의 귀족들은 말하곤 했지만 게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 숙부를 유폐시킨 그 독한 남자는 그 미친개를 적으로 삼지 못한 것뿐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이자벨의 소중한 동생이라서.

우스운 일이지. 자기 진짜 적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아가려는 게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 꼴이.

왕궁의 응접실에 앉아 시그니티를 기다리며 게일은 고소를 머금었다.

곧 불타는 것 같이 화려한 붉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들어섰다. 게일은 예의상의 말 대신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녀를 납치한 사람이 누군지 찾으셨습니까?”

“후보가 몇 좁혀지기는 했지.”

“거기에 로윈 후작도 들어가 있습니까?”

“……없지는 않지.”

게일은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의심하시긴 하시는군요.”

“남매간의 우애가 워낙 지독해서.”

이자벨은 이자벨 로윈이라는 신분으로 아를에 돌아온 게 아니었다. 그러니 시그니티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가 이자벨 로윈이라고 말한 셈이었다.

“제 약혼녀는 샬덴의 사람입니다, 전하.”

그리고 게일은 그 발언을 정정했다.

“그리고 어느 우애가 납치로 이어진답니까? 그것참 신기한 일이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전 후작을 가장 의심하고 있습니다.”

시그니티는 조금씩 불길해지는 기분에 일부러 느긋하게 말을 끌었다.

“어째서?”

“서궁이 어떻게 관리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호위가 부실하더군요. 후작이 그녀의 방에 침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게일은 목에 선명하게 남은 잇자국을 달고 넋을 놓고 있던 이자벨을 떠올렸다.

누이? 개소리지.

“다음날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절대 우애적인 접촉은 아니었습니다.”

일부러 상상의 여지를 남기듯 정확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게일은 입을 다문 시그니티를 살폈다.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지만 주먹을 쥔 손에 핏줄이 서는 게 보였다.

“전 그녀에게 가장 위험한 인간을 꼽자면 후작을 꼽겠습니다, 전하.”

“……그대 말에 책임질 수 있는가?”

“전하께서도 그녀를 보는 후작의 눈을 보셨다면 제게 그리 질문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시그니티는 게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알렉스 로윈이 이자벨을 바라보는 눈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늘 그런 눈으로, 제 누이라며 매달리던 소년이 아니었던가. 어릴 때부터 그런 눈이었고, 남매라는 사실에 워낙 집착하는 인간이어서 오히려 넘어간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자벨을 사랑했던 건가?

시그니티는 이자벨이 소중히 여기는 동생을 적으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 수 있을까? 이자벨이 울 텐데, 자신이 그럴 수가 있을까?

* * *

“섭정공과 손을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샬덴의 사절단 중에서는 게일과 이자벨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이자벨의 태생을 알고 있는 기사가 게일에게 물었다.

이자벨의 납치 사건 때 마지막까지 이자벨의 곁에 있다 화살을 맞은 이였다.

미하일은 샬덴의 귀족들이 가지는 왕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알았다.

그는 사절단으로 가는 기사 중 가장 강한 기사에게 이자벨의 혈통을 암시했다. 그리고 이자벨의 혈통에 대해 슬쩍 흘리는 것만으로도 기사는 목숨을 걸고 이자벨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게일에게 기사가 던진 질문은 다소 무례하다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사는 이자벨을 게일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리 한 것이었다.

“그렇게 보이나?”

“예.”

게일은 납득하지 못한 기사의 기색을 힐긋 확인했다.

“경은 별로 좋은 선택이라고 보지 않는 것 같군.”

“어차피 그분은 샬덴으로 돌아가셔야 할 분. 섭정공에게 굳이 그분을 구하는 공을 세우게 둘 필요가 있을까요.”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지.”

게일은 느긋하게 웃었다. 두통이 심했지만, 겉으로는 누구보다 여유로운 척 구는 건 익숙했다.

기사는 제대로 납득하지 못한 듯 보였다.

사실 대답해 줄 필요도 없었지만 게일은 오랜만에 제게 질문을 던지는 인간을 본 기념으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아를의 군권을 가진 건 후작이야. 군대를 이끄는 것도 그 새파랗게 어린 미친개지.”

섭정공이 명분과 정치를 주도했다면, 후작은 군권을 휘어잡았다.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역할을 수행해내지 못하면 아를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반란으로 이룩한 권력이란 것이 토대를 잡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둘 사이를 확실하게 찢어 놓고 생각하자고.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건 아를의 군대니까.”

게일은 호탕한 척 기사의 어깨를 두드려 줄까 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기억을 훑어본 머리가 두통으로 욱신거렸다.

장갑을 끼고 있더라도 당분간 사람들과의 접촉은 피하기로 결심하면서 그는 몸을 돌렸다.

이렇게 오래도록 이자벨을 보지 못한 것 또한 오랜만이었다.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진 주제에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던 그 불쌍한 공주님이 얼마나 혼자 속을 썩이고 있을까.

게일은 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요정 할머니를 기다렸다. 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를 구원해 줄 강하고 상냥한 존재를.

그렇게 하도 바라다보니 본인이 그 요정 할머니가 되고 싶어진 건지 뭔지.

대리 만족인가?

하지만 무슨 감정이면 어떤가. 그는 이자벨을 구하고 싶었다. 손을 더럽혀서라도.

* * *

나는 침대 위에 반쯤 걸터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무심하게 물었다.

“몸은 이제 괜찮아요?”

“전혀. 피가 모자라.”

유진은 간신히 아장아장 걸을 수 있게 양 발목을 가깝게 묶어 놓은 끈을 내려다보며 진저리쳤다.

도망가서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알렉스가 유진을 가만히 내버려 둘까. 나는 한숨을 쉬며 그의 불평에 대꾸했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아요?”

“인간은 원래 물에 빠진 걸 구해 놓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족속이야.”

순하고 사랑스럽게 생긴 외모에 안에 들은 건 지독한 속물이라. 나랑 똑같군.

“지금이라도 죽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건가요?”

“아니, 살려 줘.”

태세 변환도 빠르고. 눈치도 빠르고.

“그거야 알렉스가 알아서 할 일이죠.”

“너한테 죽고 못 사는 것 같은데. 우리 형수님처럼.”

“그걸 어떻게 알아요?”

“기절하기 전에 봤거든, 너 잡는 거. 게다가 난 이 꼴인데 넌 멀쩡한 거 보면 답 나오지 않나?”

나는 팔짱을 낀 채 픽 웃었다.

“할아버지가 눈도 좋네.”

“나 아직 쉰도 안 됐어.”

툭툭 오가는 말은 몹시 태평스러웠다. 사실 나도 그도 현실 도피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뭐 앞날이 보여야지 말이야.

오가던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자리했지만, 둘 중 누구도 그 침묵을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셈을 하기 바빴다. 인생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가. 살아서 나갈 수는 있으려나. 뭐 그따위 것들을.

“……너 딱히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나?”

희망을 가져볼까 하는 유진의 물음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뭘 해? 탈출?”

“그 비슷한 거. 아니면 외부와의 연락이라든지.”

“연락하면 알렉스에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내가 빌미를 줘?”

사실 밖과의 연락이 당연하게도 불가능했다. 알렉스는 날 저택에 풀어놨지만, 사실 감금된 것과 그리 차이는 없었기에.

다만 구드윈 저택에서는 날 방 하나에 가뒀다면, 여기는 저택 전체에 나를 가두고 있다고 해야 하나.

“……쌍방이었어? 그럼 날 사돈으로 대접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무슨 헛소리야.

“형님은 반대하겠지만, 난 하객으로 자리도 채워줄 수 있어. 아니, 기왕이면 형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건 어때?”

“의리라고는 없나요?”

어이없어하는 내 물음에 유진은 태연하게 웃었다.

“그게 내 생존과 권력을 보장해 주진 않잖아.”

진짜 나 같네. 내 인생에서 알렉스를 빼면, 아니, 전생의 내가 딱 이 비슷한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정말 귀족다우시네요.”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뭐 이렇게 인간이 계산적이지.

“그래서, 네 애인한테 잘 말해 줄 마음이 들어? 꽉 막힌 형님보다는 내가 더 쓸 만할 텐데.”

그 꽉 막힌 형님이라는 사람이 우리 엄마의 아버지가 아닌가? 이렇게 대놓고 욕해도 되나?

“기대하게 만든 게 별로 미안하지는 않은데, 나도 딱히 뭔가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에요.”

“애인 아닌가?”

“당신에게는 슬프겠지만, 아니에요.”

“왜?”

발목에 묶인 부분이 쓸려서 아픈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는 유진이었다. 나보다는 이쪽이 더 감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네.

“후작도 널 좋아하고, 너도 후작을 좋아하면 된 거 아닌가?”

“지금 내가 샬덴 태자의 약혼녀란 걸 까먹었나요? 날 납치한 이유도 잊었어요?”

“알지. 아는데 좀 희망을 가지고 싶었어.”

유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희망이라. 좋은 말이었다. 지금 그와 나에게는 찾을 수 없는 단어이기도 했고.

유진이나 나나 이 저택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벗어난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건 똑같았다.

“그 뭐지…… 애라도 하나 낳아 주면 후작도 좀 풀어 주지 않을까.”

“애는 뭐 하루면 나와요? 지금 샬덴에서 눈이 뒤집혀서 날 찾고 있을 텐데.”

“그럼 뭐 하녀 하나라도 매수해서 샬덴에 연락을 넣어 본다든가.”

“……뭘로 매수해서요?”

지금 당신이나 나나 가진 거라고는 몸뿐인데.

“미모……?”

유진은 본인이 말하고도 답이 없는지 한숨만 내쉬었다. 아까부터 헛소리의 향연이었다. 뭔가 답이 있을 것 같아 찾아온 건 아니지만 막막함만 더 느껴질 줄은 몰랐지.

“그럼 난 여기서 그냥 죽을 때까지 갇혀 살면 되는 건가? 너도?”

굳이 따지자면 유진은 그래도 내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려둔 거긴 한데…….

“죽고 싶어요?”

“아니, 절대. 집에서 아내와 아들이 나를 절실하게 찾고 있을 거거든.”

부인이 정부를 따로 두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별소리를 다 갖다 붙이네. 그는 내 눈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아무튼 아들은 날 기다릴 거야.”

뭔가 대화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해결책이라도 모색해 보자고 왔는데,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받은 느낌.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유진은 내가 계속 피해 왔던 질문을 던졌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문제도 아닌데.”

“그래도 마음이 다르지. 남기를 원하면 넌 여기에 사는 게 되는 거고, 떠나길 원하면 넌 여기에 갇힌 게 되는데.”

결과가 같아도 다른 거야. 유진은 처음으로 어른처럼 말했다.

“여기서 누가 널 데려가면, 그게 납치인지 구출인지는 네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야.”

“……누가 날 데리러는 올까요?”

본론을 비껴가는 물음이었다. 유진은 도피하는 내 질문을 지적하지 않았다.

“글쎄, 샬덴의 태자?”

나를 배려하듯 유진이 가볍게 말을 뱉었다.

“찾을 수 있을까요? 당신 때문에 일이 여러 번 꼬였는데.”

“형수님 때문이지. 나 때문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까 우리 형수님 또 쓰러졌겠네…….”

“움직인 건 다 당신이잖아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잖아.”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그 귀족적인 태도에 혀를 찼다.

순간 안 그래도 모자랐던 피가 더 부족해졌는지, 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시퍼렇게 변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대화가 재밌어요?”

알렉스가 문가에 서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유진은 일어서려다 묶인 자기 발목에 한숨을 쉬고 허리만 세웠다.

“가족이라 그런가…….”

그는 내게 성큼 다가와 나를 애처럼 안아 올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익숙하게 알렉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모르겠다. 이게 순응하는 걸까?

알렉스는 내 행동에 웃었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손을 놓더라도 알렉스는 나를 떨어트리지 않겠지만.

“그럼 이제 충분히 가족이랑 대화했으니까 나랑 놀아야죠.”

충분히 대화했는지 나나 유진에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사실 우리 의견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그가 하라는 대로 할 텐데.

유진은 아까의 수다스럽던 모습과 다르게 조용했다. 그는 나와 알렉스를 유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여기 더 있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문을 나서기 직전, 알렉스의 어깨 너머로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좀 위험하다고.’

나는 쓰게 웃었다. 그걸 나라고 모를까.

“왜 자꾸 돌아봐요?”

알렉스의 물음에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알렉스가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되질 않는 순간부터, 나는 그가 무서워졌다.

그가 나에게 위해를 가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상하게 할까 봐. 그게 겁났다.

“안 돌아봤어.”

내 중얼거림이 복도 사이로 흩어졌다. 알렉스의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나이 든 하녀는 황급히 유진이 갇혀 있는 문을 닫고 잠갔다. 곧 그녀의 시야에 알렉스와 그에게 안겨 있는 이자벨이…….

“……완전히 돌았나?”

게일은 머리를 붙잡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하녀를 기사들이 재빨리 다시 있던 곳으로 돌려놓기 위해 움직였다.

“정말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 * *

“섭정공보다 후작을 만나는 게 더 어렵다니. 이상한 일이지?”

비꼬는 게일의 말에 알렉스는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로윈 저택의 응접실은 저택의 고요하고 음산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환했다.

게일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조차 화려하지 않게 느껴지는 저택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답게 관리된 티가 나는 정원에는 사실 사람의 손길이나 눈길이 닿은 흔적이 없었다.

이자벨이 정원이나 꽃을 좋아했다면 모를까. 한철 피고 지는 꽃보다는 오래된 고목을 더 좋아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게일은 그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정원을 이해했다.

“무슨 용건이지?”

뭘 말하든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게일은 그 말에 웃었다.

“내가 왜 왔겠어? 그쪽 얼굴을 보려고 왔을까.”

분명 이자벨을 숨겨 놓고 있는 주제에 시치미를 떼는 얼굴이 자연스러웠다.

“이자벨, 어디 있어?”

사실 어디 있는지 이미 알면서도, 게일은 굳이 그렇게 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그쪽이 데리고 있잖아. 어디 가둬 놨지?”

“헛소리를.”

“정말 헛소리인가? 이자벨이 사라졌는데도 그쪽이 그렇게 멀쩡하다고?”

떠보는 듯한 게일의 질문에 알렉스는 비꼬듯 되물었다.

“내가 멀쩡해 보이나?”

마른 뺨과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썩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서 있어도 위협적인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건드리기도 전에 터질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봐도 초조해서 돌아 버릴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을 한 알렉스였다. 진실을 아는 게일이 봐도 스스로가 틀렸는지 의심할 만큼.

“이자벨이 사라졌는데 그 정도면 멀쩡해 보이는 것 아닌가?”

게일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서 있는 알렉스를 올려다봤다. 역광이 졌다. 반쯤 가려진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네 옆을 마음에 들어 하나?”

“…….”

알렉스는 계속 답이 없었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지켜보는 사냥꾼처럼 가만히 게일을 응시하고 있었다.

“계속 말하지 않을 생각인가?”

“글쎄…….”

그는 말을 고르듯 느리게 말끝을 끌었다.

“굳이 이런 대화를 할 필요가 더 해야 하나?”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처럼 알렉스는 느긋하게 덧붙였다.

“만약 날 추궁하고 싶다면, 증거를 가져와.”

게일은 그 말에 속으로 웃었다. 증거가 없을 거라는 걸 확신하는 말이 아닌가.

“없다면?”

“심증만으로 날 추궁할 수 있을 만한 자격이 그대에게 있나?”

알렉스는 그 말만 남기고 몸을 돌렸다. 게일은 그 등을 향해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울지는 않나?”

그는 마지막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 게일은 힘을 빼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녀가 다가와 마차까지 다시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게일은 그 말에 일어나는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웬만한 고통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스스로를 다행이라고 여겼다.

* * *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이는 감촉이 뺨에 느껴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뺨을 닦아냈지만, 뺨에 묻은 피는 더 번지기만 했다.

‘정말 아무것도 되돌리고 싶지 않아?’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는 그가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후회한다면…….’

그리고 그건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알렉스의 후회를 책임져야 한다고.

‘……나를 원망해.’

꿈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이제 이 이상한 꿈에 익숙해졌다. 더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나는 자각몽을 꿨던 것처럼 몇 번의 눈 깜빡임으로 정신을 차렸다.

“무슨 꿈을 꾸셨나요?”

샐리가 내게 물었다. 소파에 기대 잠든 모양이었다. 허리가 아팠다.

“이상한 꿈.”

샐리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악몽이었나 보네요.”

꿈속에서 피가 묻어 있던 뺨이 젖어 있었다. 울었다고. 내가? 그것도 꿈 때문에?

“글쎄……. 악몽이랑 비슷할지도.”

젖은 뺨을 멍하니 닦아내면서 중얼거렸다. 계속 반복되는 똑같은 꿈이라니 뭔가 이상했다.

“숙면에 좋은 차나 향을 준비할까요?”

“괜찮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아를에 도착하고서부터 계속 꾸는 이상한 꿈이 자꾸 거슬렸다. 피투성이가 된 알렉스와 후회한다고 말하는 나.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서 없는 일이었다. 그럼…… 미래인가? 하지만 꿈속의 알렉스는 현실의 알렉스보다 키가 작았다. 알렉스의 키가 미래에 더 줄어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게 미래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잘래.”

샐리는 약간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이른 저녁 아닐까요? 아직 도련님이…….”

“나 피곤해.”

그녀는 지친 내 어조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내 몸을 덮었던 담요를 추슬러 방을 나갔다.

샐리에게는 심한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내가 알렉스와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내가 힘든 기색을 보일 때마다 결국에는 내 말을 들었으니까.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기력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눕기 위해 느릿하게 침대 이불을 걷었다. 순간 내 눈에 여러 번 접힌 누런 종이가 보였다. 하녀들이나 쓸 법한 질이 나쁜 종이였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재빨리 낚아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빠르게 종이를 펼쳤다.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비뚤비뚤하고 맞춤법에도 제대로 맞지 않은 서신이었다.

게일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또 한 번.

점점 읽어 내리는 내 눈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서신을 삼켰다. 한참을 씹어 넘기고도 또 한참을 누워 있었다.

이른 저녁이 지나서, 완전한 밤이 오고, 그리고 알렉스가 나를 찾아올 때까지. 잠도 자지 못하고 그렇게.

“……샐리가 잔다고 했는데. 왜 안 자고 있어요?”

침대가에 앉은 알렉스는 어둠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고 있는 나를 보고 멈칫하더니 웃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날 기다렸어요?”

어둠 속에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어, 시야는 어둠에 적응한 지 오래였다. 알렉스가 어떻게 웃고, 어떤 얼굴을 하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응…….”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사랑해 달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알렉스는 내 짧은 말에 정말 근사하게 웃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처럼 손을 뻗었다.

내 뻗은 손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알렉스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다 큰 남자의 머리카락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있나.

“오늘 왜 이렇게 착하게 굴어요?”

웃음기 섞인 알렉스의 목소리에는 기대가 배어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만 있던 내가 손을 뻗은 게 뭔가 희망같이 느껴진 것처럼.

“앞으로도 착하게 굴려고 이러는 거예요?”

“……어떻게 구는 게 착하게 구는 건데?”

“이렇게요.”

알렉스가 머리를 쓰다듬던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나를 끌어당기는 알렉스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평소라면 조심스럽게 밀어내거나 피했을 내가 지나치게 얌전하자 알렉스가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 아파요? 아니면 내가 아픈 건가? 이자벨, 당신 왜 이렇게…… 상냥하지?”

원래부터 알렉스에게 한해서는 난 상냥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내가 지금까지 몹시 매정했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작게 웃었다.

“왜? 그러면 안 돼?”

“이젠 웃기까지 하네…….”

알렉스는 내가 환각인지 의심하는 것처럼 내 뺨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굳은살이 마디마다 자리한 손이 내 뺨에 느껴졌다.

“도망가려고 그래요? 보통 이럴 때는 도망가기 전에 안심시키려고 그런다는데…….”

불안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말투 사이사이에 섬뜩함이 느껴졌다.

“아무리 좋아도 난 방심 같은 거 안 할 텐데.”

내 귀 아래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의 손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왜 또 말이 없어요? 정말 그런 건가? 도망가려고?”

나는 알렉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원하는 한 네 옆에 있을게.”

가지 말라는 그의 요구에 처음으로 내가 답한 순간이었다.

내가 기댄 알렉스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은 게 느껴졌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고 근육에 날이 선 게 분위기만으로도 느껴졌다.

“난, 나는…….”

알렉스가 내 몸을 아주 느리게 끌어안았다. 그의 손등과 목에 선 핏줄이 선명했다. 마치 잡았다가는 부서지는 설탕 과자를 본 맹수처럼.

그는 나를 다정하게 끌어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뻣뻣한 몸으로 나를 꽉 안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나는 방심하지 않을 거예요, 이자벨. 저번에도 거짓말을 하고 날 떠났잖아요. 나는 절대…….”

“그래. 안심하지 마.”

“전쟁을 일으킬 거예요.”

“네가 그걸 원한다면.”

“당신이랑 결혼할 거고…….”

나는 알렉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잔뜩 긴장한 몸이 느껴졌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

결국 알렉스는 참지 못했다. 그는 거의 나를 짓눌러 터트릴 것처럼 꽉 안았다. 숨이 막혔다. 거친 손길이 내 몸을 끌어당기고, 나와 한 몸이 될 것처럼 제 몸에 내 몸을 붙였다.

“이래도? 내가 뭘 어디까지 원할 줄 알고?”

팔에 돋은 소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나는 몸에 힘을 뺐다.

“알고 하는 말이야, 알렉스.”

“정말로?”

알렉스의 손이 내 등을 쓸었다. 옷을 여민 끈들이 알렉스의 손끝에 쉽게 느슨해졌다. 그는 마치 기회를 주는 것처럼 재차 물었다.

“진심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

그는 내 손을 잡고 무섭게 웃었다. 내 손바닥을 긁어내리는 그의 손길을 나는 피하지 않았다. 반쯤 의아함을 담은 물음이 던져졌다.

“차갑잖아요, 이자벨. 내가 무서워요? 이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왜 그래요.”

“그래서 싫어?”

나는 알렉스의 손에 깍지를 끼면서 속삭였다. 내 행동에 살짝 커진 그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 지금이라도 싫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왜 그래야 하는데?”

알렉스는 대답 대신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뒤로 넘어가는 내 머리가 그의 거친 손에 막혔다. 입술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기가 무섭게 혀가 얽혔다. 내 숨결이 모조리 삼켜졌다.

“흣.”

“싫다고 해요, 이자벨.”

알렉스의 눈동자 속에서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우리의 거리가 가까웠다. 그는 반쯤 위협하듯 으르렁거렸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애원하고 있었다.

“…….”

“싫다고 해. 내가 착각하기 전에.”

“착각해, 알렉스.”

내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알렉스의 입술 위를 스쳤다. 처음으로 혀를 내밀어서 알렉스의 아랫입술을 살짝 쓸었다.

“악!”

순간 내 몸이 뒤집혔다. 소파에 그대로 날 눕힌 알렉스가 내 위에서 무표정하게 날 응시했다.

“마지막이야. 싫다고 해.”

내 가슴 위에 손바닥을 댄 알렉스는 거칠게 뛰는 내 심장 소리를 느끼며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나는 침묵했다.

어느 순간, 알렉스가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손 아래 내 옷이 찢어졌다. 나는 반항하지 않았고, 알렉스는 내 허벅지를 벌린 채 내게 입을 맞췄다. 입 안쪽을 쓸어내리는 혀에 아랫배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으흣, 아…….”

알렉스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내 아래로 파고드는 손가락에 놀란 것도 잠시, 두 개, 세 개씩 늘어나는 손가락에 나는 내 아래를 파고드는 이물감을 느끼고 헐떡였다.

“……싫어?”

멈출 수 있는 것처럼 알렉스가 속삭였다. 풀어 헤쳐진 허리춤이 내 아래와 맞닿아 있었다. 딱딱한 감각이 아랫구멍을 누르는 게 느껴졌다.

“…….”

나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는 더 참지 않았다.

내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간질거렸던 아랫배는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다리를 모았다.

“읏!”

그러나 벌어진 내 허벅지를 짓누르는 알렉스의 손길이 억셌다. 내 아래로 밀고 들어오는 알렉스의 물건에 나는 몸을 한껏 비틀었다. 억지로 살덩이를 찢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좋아, 더 들어가고 싶어…….”

고통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청해진 머리로 나는 겨우 숨만 내쉬었다.

“내가 지금 당신 배 속에 있어……. 너무 좋아. 하…….”

“아, 으…….”

흐릿한 시야로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아래는 고통에 감각이 없었다. 입술이 삼켜지고, 나는 눈을 감았다.

“흐읏, 아, 아아!”

고통은 길었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탁한 알렉스의 눈이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온몸에 입을 맞추면서도 알렉스는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온몸을 버둥거렸다.

“흐으으…… 읏.”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주제에 용케도 달라진 내 반응을 알았는지 알렉스가 웃었다.

“으응, 읏, 아읏……!”

고통과 쾌감이 저들끼리 멋대로 섞여서 날뛰었다. 아픈 건지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흐린 눈으로 알렉스의 입술을 찾아 끌어당겼다. 위도 아래도 모조리 얽힌 채 흔들렸다.

몸에 감겨드는 쾌감에 간신히 웃자 알렉스가 내 가슴을 깨물었다. 심장이 변덕스럽게 덜컹거렸다.

“당신 심장도 보고 싶어. 그것도 예쁠 텐데.”

멍한 머릿속으로도 내 가슴을 물고 있는 알렉스가 무서워졌다. 금방이라도 내 가슴을 물어뜯고 내 심장을 씹어 삼킬 것 같았다. 아찔한 감각이 공포 때문인지 쾌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숨이 벅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알렉스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제멋대로 흔들렸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뒤엉킨 육신이 하나가 된 것처럼 뭐가 내 몸이고 그의 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적어도 숨은 확실히 하나였다.

헐떡거리는 내 숨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삼킨 알렉스는 내 아랫배를 누르며 웃었다. 억센 손길 아래에 내 안을 파고든 그의 물건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내 거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나는 내 배를 누르고 있는 그의 손을 더듬더듬 붙잡았다. 그러나 나를 짓누르는 알렉스의 손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이 더 강해졌다.

“내 거야.”

“흣, 흐으…….”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안을 채운 알렉스의 물건이 더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알렉스가 내 눈 위에 입을 맞췄다. 나는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은 채 간신히 속삭였다.

“그, 읏, 그래, 네 거야…….”

그는 움찔거리는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만족스럽게 속삭였다. 나는 막힌 숨을 겨우 토해냈다.

“내 거.”

나는 그 후로도 한참을 알렉스의 아래에서 울어야 했다.

새벽이 돼서야 겨우 제대로 된 문장을 내뱉기 시작한 알렉스는 그 큰 몸을 내 품 안에 구겨 넣고 속삭였다.

“당신이 내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요. 이자벨, 당신을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아이의 성별은 신이 결정할 문제지.”

“아들이어도 당신을 닮았으면 예뻐해 줄게요.”

약이나 술에 취한 것처럼 생각한 대로 전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녹아 있는 기쁨에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날 안 닮으면 어쩌려고?”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러면…….”

알렉스는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그는 그녀가 더 무서워할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당신 배 속을 차지한 그게 너무 질투 나잖아.

* * *

곁에 있겠다는 말을 한 이후로부터 알렉스의 태도는 더 조심스러워졌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와 날 안고 잤던 알렉스가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얌전히 방을 나갔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허락하는 순간, 알렉스가 바로 날 임신시키려고 하지 않을까, 했던 생각이 민망할 정도였다.

내게 손대는 행위도 조금 더 정중해졌다. 손을 잡는 것 하나까지도 일일이 물어보고 잡았다. 마치 처음 만나는 아가씨에게 점수를 따려는 남자처럼 구는 모습에 나는 진심으로 왜 이러나 싶었다.

이미 마차를 박살 내고, 유진의 다리에 검을 꽂아 넣고 데려왔으면서 이제 와서? 멋대로 키스하던 주제에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물으면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라니.

나는 결국 그에게 물었다.

“알렉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볼 장 다 본 주제에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냐고 직설적으로 물어보지는 못하고 돌려 물었다.

“지금은 연애 중이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자벨이 내 마음을 받아 줬으니까요.”

알렉스는 수줍게 웃으면서 내 귓가에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연애 기간 없이 바로 결혼으로 넘어가면, 이자벨이 너무 아쉬워할까 봐 걱정했는데.”

살짝 소름이 끼쳤다. 알렉스의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이어지는 말은 전혀 그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다른 연인들이 하는 건 다 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에요.”

알렉스는 이미 다 정해진 일정을 다시 읊어 주는 것처럼 내게 속삭였다.

“사흘 뒤에 우리 결혼할 건데, 당신이 그 전에 내 마음을 받아 줘서…….”

알렉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한 지 이틀이 지났는데, 사흘 뒤에 우리가 결혼한다고? 나도 몰랐던 내 결혼식이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워진다고?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물어야 할지 아득해졌다.

“……연애를 나흘만 해?”

“그것도 길죠.”

“어디가 길지……?”

“내 인내심이 나흘도 길다고 하는데.”

내 입술과 턱, 목을 훑는 눈길이 집요했다. 내 얼굴이 붉어졌다. 순식간에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나를 향해 알렉스가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웃었다.

“결혼 전까지는 당신이 원하는 행동만 할 거예요. 당신이 날 받아 줬으니까.”

그럼 그 후에는……?

나는 차마 더 묻지 못하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만약 내가 받아 주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결혼을 준비했어?”

화려한 결혼식 따위는 못 할 것이 분명했지만, 간단하게 하자면 아를의 결혼은 사실 남녀와 각자의 증인, 그리고 주교만 있으면 가능했다.

증인이야 아무나 데려온다 쳐도 주교는 데려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란 말이지?

“……그럼 미뤘겠죠. 이자벨이 받아 주기를 기다리면서.”

차분하게 웃는 알렉스의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직감했다.

거짓말이구나.

내가 거절했다면 그날 이후로 넌 날 침대에서 놔주지 않았을 거야. 내가 네 아이를 가질 때까지.

붉어졌던 얼굴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나는 알렉스의 거짓말에 그냥 웃었다. 굳이 그의 가식을 꼬집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설마 내 증인이 지금 방에서 잠만 자는 내 작은할아버지는 아니지?”

부러 가볍게 물었다. 알렉스는 다시 희게 돌아온 내 뺨을 응시하며 한 박자 느리게 대꾸했다.

“……싫어요?”

“응. 납치범으로 처음 만났는데 좋겠어?”

“하지만 다른 사람을 데려오는 건 안 돼요, 이자벨.”

“엘리자베스도?”

알렉스가 내 의중을 가늠하듯 눈을 찌푸렸다.

“리지는 우리를 어릴 적부터 알던 사람이잖아. 알렉스, 난 결혼할 때 그녀가 내 증인이었으면 좋겠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나는 알렉스의 팔을 붙잡았다. 단단한 근육이 얇은 셔츠 아래로 느껴졌다.

“네 증인은 데빈이 하면 어떨까? 서로를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이들이 우리 증인이 되어 주면…….”

“무슨 꿍꿍이야?”

알렉스가 내 말을 끊고 물었다. 나는 아무렇게도 않게 웃으며 되물었다.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뭘?”

“내가 아는 이자벨은 자기의 결혼 소식을 나흘 전에야 알았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일 여자가 아닌데.”

“알면서도 그렇게 했어?”

“내가 아주 절박했거든.”

우리는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그는 내 속을 할 수만 있다면 낱낱이 파헤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을 놓친 건 한 번이면 충분해. 이자벨, 당신이 그랬잖아. 난 똑똑하니까, 한 번 틀린 건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그럼 한 번 틀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면?

“알아. 넌 그랬지.”

이제는 하도 아득해진 알렉스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나는 알렉스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냥 리지가 내 증인이었으면 좋겠어서 하는 소리야, 알렉스. 너도 알잖아. 리지는 내가 애원한다고 내 편을 들어줄 인간이 아니라는 거.”

오히려 알렉스가 그 점은 더 잘 알지도 몰랐다. 내가 없는 7년간 엘리자베스를 봤을 테니까.

“그리고 리지는 날 데려갈 힘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당신이 하는 생각들이 무서워.”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내 손 위를 그의 손이 덮었다.

“내가 모르는 당신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가.”

날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 무슨 생각으로 내 손을 잡고 있는 걸까. 내가 역겨울까 반가울까. 그런 것들이 무서워…….

알렉스의 속삭임에 나는 다정하게 웃었다.

“난 네가 원하는 대로 있을 거야, 알렉스.”

“……내가 전쟁에 나가서 죽었으면 좋겠어?”

“네가 어떤 전쟁에도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나도 다치지 않을 수 있게.”

“내가 다칠까 봐 내 곁을 떠나겠다고 한 당신이…… 왜 마음을 바꿨어?”

“그럼 내 뜻대로 날 보내 줄 거야?”

“아니. 그렇게는 못 해…….”

내가 얌전하게 굴수록 알렉스는 불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안아 줘, 이자벨.”

10년 전에는 어리광처럼 들렸던 목소리가 이제는 명령처럼 들렸다.

알렉스를 껴안으면서 등을 느리게 쓸었다.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불안해하지 않도록.

나는 알렉스가 정말 소중했다.

처음에는 죄책감으로 시작했고, 나중에는 정말 가족 같아졌다 정말 알렉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았으면.

나를 원하는 게 알렉스의 인생을 망치는 길이라면, 나를 갖지 못해 괴롭다면…….

네 인생에 처음부터 나라는 사람이 없으면 되지 않을까. 인생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욕망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삼켰던 편지를 생각했다.

기억에 없는 여자를 그리워할 수는 없겠지. 만나지도 않은 여자를 사랑할 수는 없겠지. 그걸로 네 인생이 평온해진다면, 나 정도는 네 기억 속에서 없어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평생 추억만 곱씹는 건, 7년 전에도 각오했던 일이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알렉스의 머릿속에 내가 없어지는 것뿐이다. 우리는 어차피 다시는 만나지도 못할 테니, 알렉스가 기억하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아야 했다. 나는 울지도 않을 거고, 슬퍼하지도 않을 거다.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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