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2)

7장. 7년 후.

거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따라붙은 시녀들의 소란스러움이 샬덴의 왕궁을 울렸다.

“아가씨!”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에 왕의 침실을 지키는 기사들은 침을 삼켰다.

곧이어 그들의 예상과 똑같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외모와 별개로 그들에게는 더없이 두렵기만 한 여자가 문 앞에 멈춰 섰다.

귀찮다는 듯 금발을 휙 넘긴 여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기사들이 막아선 문을 노려봤다. 시녀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기분 푸세요, 아가씨.”

“전에 재밌어하시던 광대들을 부를까요?”

“여름도 끝나가는데 새 드레스로 드레스룸을 새로 채우시는 건 어때요?”

“이번에 폐하께서 새로운 보석을…….”

‘폐하’라는 단어가 언급되자마자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 말을 꺼낸 어린 시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문 열어.”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은 굳어 버린 이들을 향해 눈썹을 추켜세웠다. 잎사귀를 싱그러움을 닮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오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열까?”

왕의 침실을 막아선 기사들은 서로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고는 결국 문을 열었다. 어차피 이 왕궁에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자벨은 굳어 버린 이들 사이를 코웃음을 치며 지나갔다.

문이 다시 닫혔다. 시녀들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까 실수를 한 시녀가 울상이 되자 다른 시녀들이 진정하라는 듯 손을 잡아 줬다.

“어떻게 하죠? 저 이제 쫓겨나는 건가요?”

이제 반쯤 울먹이기까지 하는 시녀를 가장 나이가 많은 시녀가 달랬다. 작게 소곤대는 시녀들에게서 기사들은 고개를 돌렸다.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으신 것뿐이야. 그분은 시녀들을 벌하지 않아.”

“……하지만 아가씨는 늘 기분이 안 좋으시잖아요.”

말문이 막힌 시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더 안 좋은 날인 거지.”

폐하를 직접 만나러 가신 걸 보면. 그녀는 현명하게 뒷말을 삼켰다.

이자벨은 닫힌 문에 기대서 심호흡했다. 분노가 제 몸을 머리끝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아가?”

방금 일어난 것처럼 편한 옷차림으로 침대 기둥에 기대어 있던 미하일은 이자벨을 향해 반가운 듯 웃었다.

“내 편지, 당신이 전부 가로채고 있었어?”

“아가. 아빠라고 부르라니까.”

미하일은 이자벨의 분노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그의 태도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대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런 인간이니까. 하지만 거기까지 건드리면 안 되지.

“나한테 온 답장도, 당신이 조작한 거야?”

지난 7년간 이자벨은 호화로운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떤 외부의 소식도 들을 수 없고,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귀한 물건들로 가득 채운 방이라고 한들 그게 감금이 아닌 건 아니지.

만날 수 있는 인간들은 죄다 미하일의 수족들이었다. 미하일의 말이라면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는 인간들만 가득했다.

미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틴 건, 1년에 겨우 몇 번 오갈까 말까 하는 편지 때문이었다.

“이자벨. 너한테 제대로 된 호칭을 들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난 것 같은데…….”

“내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불러 주면, 알렉스와 연락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잖아!”

미하일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부드럽게 웃었다. 어느 놈이 그 사실을 흘린 거지?

“연락할 수 있게 해 줬잖니.”

초반에는 정말 편지를 전달해 주기는 했다. 한두 번 정도는. 그런데 꼬박꼬박 오는 답장에 기분이 더러운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미하일은 그 질척한 집착이 묻어오는 편지를 전해 주는 대신 그냥 이자벨을 속이는 편을 택했다.

이자벨이 동생이라고 예뻐하는 그놈은 정말 미하일의 신경에 거슬렸다. 제 아비를 닮은 얼굴부터 이자벨을 향한 집착까지,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진짜 그 애가 무사하긴 해?”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않았던 이자벨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물었다.

“당신이 그냥 알렉스를 없애버리고 나한테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그 애가 정말 멀쩡하게 잘 있는지 모르겠어.”

“이자벨…….”

미하일은 이자벨을 달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 손을 쳐냈다.

“그 애가 아니면, 내가 여기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잖아. 당신은 그러면 안 됐어. 안 됐다고…….”

“난 네 아버지야, 이자벨. 왜 이유가 없지?”

“내 고향은 아를이야! 난 거기서 자랐고, 거기서 태어났어!”

미하일이 이자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자벨은 밀어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안단다, 이자벨. 네 엄마도 아를의 사람이었으니까.”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이자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이자벨은 앞으로 이어질 말을 아는 것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헤더는 나를 따라 어디든지 가겠다고 했단다……. 고향은 중요하지, 아가. 하지만 내 옆에 있는 게 더 중요하잖니.”

가족이 함께 있는 게 고향보다 더 중요한 일인데…….

이럴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나는 엄마가 아니었지만, 미하일은 나를 엄마와 완전히 동일시했다. 죽은 이에 대한 그 집착에 진저리가 났다.

“난 엄마가 아니야. 그리고 내 가족은 당신이 아니고.”

몇 번이고 했던 말은 미하일에게 통하지 않았다.

“알아. 넌 헤더가 아니라 헤더의 딸이지. 헤더와 내 딸.”

7년간 지긋지긋하게 반복해 온 대화였다. 아니 이걸 대화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일방적인 미하일의 헛소리에 그녀가 아무리 반발해도 미하일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게 어떻게 대화일 수 있겠는가.

이자벨은 미하일과 싸우는 게 이제는 질렸다. 늘 같은 대화고, 같은 결말이었다.

“알렉스의 소식이 알고 싶어. 당신이 멋대로 꾸며낸 게 아니라 진짜 알렉스가 어떻게 사는지, 건강한지, 결혼은 했는지…….”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곧 알렉스의 23번째 생일이었다. 축하해 주고 싶었던 성인식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어떻게 컸을까. 어디 아픈 데는 없을까. 가문은 물려받았을까. 결혼이 아니라면 약혼이라도 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까…….

“그게 알고 싶어요, 아버지.”

이자벨의 약점은 늘 알렉스였다. 그래서 미하일과의 무슨 말을 해도 이자벨은 미하일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속이면 안 돼요. 그럼 정말 내가 창밖으로 뛰어내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아버지, 알렉스가 잘 살고 있는지 좀 알게 해 주세요…….”

미하일이 매번 그녀를 속여도, 이자벨은 별수 없이 그에게 다시 매달렸다.

소중한 사람이 있는데, 힘이 없었다. 이자벨은 매 순간 본인의 무력함을 느껴야만 했다.

“우리 공주님 말이라면 뭐든 들어줘야지.”

미하일은 이자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이자벨은 그냥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진짜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속아도 똑같이 매달릴 제 꼴을 알았다.

샬덴의 인간들은 미하일이 이자벨에게 꼼짝도 못한다고 하지만 그건 헛소리였다. 이자벨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가족과의 연락을 끊어 버린 것도 전부 미하일이었다.

결국 꼼짝도 못하는 건, 약점을 가진 이자벨이었으니까.

“일찍 와서 식사도 못했을 텐데, 함께하는 것도 좋겠구나.”

배고프기는커녕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지만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7년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다니엘라 공주가 연 티파티는 아를의 수도에서 열리는 티파티 중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했다. 초대받는 손님들 또한 엄격한 기준을 통해 선별됐다.

그래서 수도에서 딸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딸이 다니엘라 공주가 여는 티파티에 참석하기를 원했다.

어린 영애들은 어린 영애들끼리, 귀부인들은 귀부인들끼리.

티테이블만 여덟 개를 쓰는 다니엘라 공주의 티파티에서는 15살짜리 소녀부터 쉰이 넘은 귀부인까지 다양한 인자들이 참석했다.

그 중심에는 올해 성인이 될 사랑스러운 다니엘라 공주가 있었다.

분홍빛이 도는 드레스를 입은 다니엘라 공주는 차분하게 초대장을 확인하고 일일이 배정된 자리까지 손님을 안내했다. 그녀의 예의 바르면서도 세련된 태도에 나이든 부인들의 칭찬이 몇 마디 이어졌다.

그러나 그런 유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세상에. 내가 늦은 건가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을 부채로 가린 여자의 말에 다니엘라는 몹시 조심스럽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펠먼 영애.”

그리고 설사 늦었다고 해도 그녀라면 상관없지 않으냐는 대답은 목 끝에서 막혔다.

“다행이네요. 내 자리는 어딘가요?”

부채가 사르륵 접혔다. 마지막으로 탁, 접히는 소리에 다니엘라는 움찔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자리한 모든 이들이 캐롤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캐롤은 오히려 그런 기색을 가볍게 넘겼다.

“따로 원하는 자리가 있으신가요?”

“공주님께서 여신 자리니, 공주님께서 정하신 자리에 앉아야죠.”

다니엘라는 캐롤을 바로 자신의 옆자리로 안내했다.

캐롤이 자리에 앉자 마치 허락받은 것처럼 대화 소리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이번에 공주님께서 성인이 되시니 기대가 크시겠어요.”

캐롤은 아무렇지 않게 그 말에 끼어들었다.

“섭정공께서도 생각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공주님께서 워낙 아름다우시다 보니 혼담이 너무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하시던데…….”

“……그런 사소한 문제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으실 텐데. 정말 감사드릴 일이네요.”

약간 창백해진 것만을 제외한다면 다니엘라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공주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캐롤은 웃으며 물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훅 가라앉았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인물들 사이로 캐롤만 생글거리고 있었다.

“네, 펠먼 영애.”

다니엘라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녀는 섭정공의 다음 숙청 대상이 되고 싶진 않았다.

“섭정공의 마음 씀씀이에 늘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그 마음이 계속 변하지 않기를 빌게요, 공주님.”

캐롤은 공주를 말 하나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금이 마음에 들었다.

시그니티 바르펜시아.

한때는 아를 왕실의 수치였던 반쪽짜리 왕족이 태자를 살해하고, 제 숙부인 왕을 유폐시킨 지 3년이 지났다.

권력을 잡은 대공자는 대공위를 물려받고 아픈 왕과 어린 왕자를 대신한다는 명목하에 섭정공의 자리에 올랐다.

캐롤은 섭정공의 정치적인 파트너였다. 한때 그녀를 팔아넘기려 했던 그녀의 아버지조차 이제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누군가의 부인보다는 이 자리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죠?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캐롤의 말 한마디에 티파티의 모든 이들은 재빠르게 입을 열어 소음으로 자리를 채웠다.

그녀는 방긋 웃었다.

아를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쩌면 꽤 오래전부터.

* * *

서류가 잔뜩 쌓인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불청객의 등장에 집무실의 주인은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문 앞에 세워 둔 시종은 장식품이 아니야.”

시종에게 방문을 알리는 기본적인 예절을 꼬집는 말에 남자는 코웃음 쳤다.

“이제 와서 내가 격식을 차리길 바라나?”

시그니티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목이 뻐근했다.

“바란다고 예의를 지킬 놈도 아닌 주제에 별소릴 다 하는군.”

앉아 있으니 남자의 덩치가 더 커 보였다. 시그니티는 가끔 궁금했다. 스물셋이나 된 남자가 계속 성장할 수 있는 건지.

볼 때마다 이전보다 커진 느낌이었다. 예쁘장하던 어릴 적의 외모는 더 이상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용건이 뭐지?”

“샬덴에 가야겠어.”

눈 하나 깜짝 않고 적국을 언급하는 남자의 말에 시그니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닥치고 돌아가서 군대나 정비해.”

“정보가 들어왔어.”

회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시그니티를 응시했다.

“샬덴 왕이 총애해 마지않는 정부와 별궁으로 휴양을 즐기러 간다던데.”

단어 하나하나를 짓씹듯이 발음한 남자는 입매를 비틀었다. 시그니티는 그 잘난 얼굴을 응시한 채 되물었다.

“그래서? 네 기분이 더러워서 가 봐야겠다고? 지금 네 기분만 더러울까?”

“국경 근처로 온다더군. 열흘만 줘. 무사한지 확인만 하게.”

“허가할 수 없으니 네 위치로 얌전히 돌아가.”

남자는 그 말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시그니티의 명령에 따르는 대신 입을 열었다.

“……7년이야. 7년이 지났다고. 정말 그녀가 무사할 거라고 자신할 수 있나? 시그니티 바르펜시아. 네가 그 자리에 있는 이유를 기억해.”

“너야말로. 네 자리의 중요함을 알면, 개죽음당할 짓은 관둬.”

알렉스는 그 말에 처음으로 웃었다. 이까지 드러내며 웃는 그를 본 시그니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걱정하는 척 집어치워, 개자식아.”

내가 이자벨을 보는 게 거슬려? 그런데 어쩔까. 그렇다고 다 때려치우고 달려갈 수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난데.

* * *

알렉스가 이른 시간에 저택에 돌아온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제 로윈 저택의 하녀장이 된 샐리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저택에 돌아온 주인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열흘 정도 자리를 비울 텐데, 그동안 내가 없는 걸 모르게 대타를 세워놔.”

알렉스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로윈 저택은 고요했다. 전대 로윈 백작마저 영지로 떠나고 나서부터는 저택은 오로지 알렉스의 차지가 되었다.

로윈 저택 곳곳에 자리했던 헤더 로윈의 초상화들은 이미 치워 버린 지 오래였다. 그 자리를 메꾼 것은 이자벨의 초상화들이었다. 갓난아이 시절부터 이어지는 초상화는 17살의 이자벨을 마지막으로 멈췄다.

알렉스는 7년이 흐른 지금 이자벨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닮았다 했으니 헤더 로윈의 초상화와 비슷하게 자랐을까.

알 수가 없었다. 보지 못했으므로.

“이자벨…….”

이자벨의 방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알렉스는 그녀가 두고 간 물건들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면서도, 매일 이 방을 서성였다.

그를 향해 웃는 이자벨. 안아 주는 이자벨. 재잘거리는 이자벨. 뭔가에 집중하는 이자벨. 차를 마시는 이자벨…….

이 방에 있는 것만으로 모든 기억이 살아났다. 행복한 지옥 속에서 알렉스는 그의 신에게 매번 똑같은 소원을 빌었다.

“……보고 싶어요, 이자벨.”

소년의 목소리는 이제 완연한 사내의 목소리로 변했지만, 그의 소원은 변하지 않았다.

제 누이의 치마폭에서 칭얼거리던 아이가 검을 잡고, 사람을 죽이고, 군대를 지휘하기까지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의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알렉스를 아이로 남게 했던 것, 어른으로 성장시킨 것은 모두 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 이자벨.

* * *

“난 알렉스가 보고 싶어요.”

“물론 압니다, 이자벨. 하지만…….”

나는 내 앞에서 울상을 한 게일이 가증스러웠다. 어차피 이 인간도 미하일의 편이지 않은가.

“보지 못하게 하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내 편지는? 지금 나 죽으라고 하는 건가?”

이건 화풀이였다. 내 소중한 인간들을 가지고 위협하는 미하일에게는 못하는 소리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자벨!”

미하일을 똑같이 닮은 얼굴이 찌푸려지자 나는 움찔했다. 그는 내 기색에 비굴하리만치 빠르게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어요, 이자벨.”

“어련하실까.”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내가 죽으면 게일의 쓸모는 사라진다. 대를 잇는 것 따위에 관심 없는 미하일은 게일을 죽이겠지.

“당신한테 문제가 생기면 전 슬플 겁니다. 어쩌면 울지도 몰라요.”

“당연히 그래야죠. 지금 당신의 지위와 목숨을 보장해 주는 게 누군데.”

나를 왕비로 만들기 위해 샬덴의 태자가 존재한다는 이유를 미하일에게 처음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남자로 바꿔 주겠다는 미하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에서 눈에 가는 남자가 있을 리도 없거니와 멀쩡하게 대화를 나누던 인간의 목이 날아가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약혼이고 결혼이고 전부 미뤄진 와중에도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한마디에 이 인간은 지금까지 살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이자벨. 당신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있어요. 폐하가 아니라도, 전 이자벨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겁니다.”

“……그런다고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게일.”

“저런. 아쉽네요.”

별로 아쉽지도 않은 얼굴로 그는 웃었다.

“전 정말 이자벨과의 결혼을 고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잿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노인 같은 머리라고 빈정거렸어도 이럴 때면 꼭 은으로 뽑은 실 같았다.

그는 가끔 진심 같아 보였다. 그러나 진심이면 어쩔 것인가. 어차피 그와 결혼할 생각도 없는데.

“폐하께 당신 목을 자르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죠. 당신이야말로 욕심 좀 부려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는 마치 비밀을 속삭이듯 덧붙였다.

“왕비가 되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활동이 자유로워질 텐데…….”

“난 그 작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아요. 그딴 말을 계속할 거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요.”

“하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게일은 정말 아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를 이용하라고 했잖습니까.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 합니까?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뿐.

“그 작자가 즐거워하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아요.”

나와 게일의 결혼식에 미하일은 정말 다 가진 것처럼,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한을 이룬 것처럼 굴겠지.

나는 엄마가 아니고, 게일은 미하일이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그게 마치 자신과 헤더의 결혼식처럼 느껴질 것이 뻔했다.

그 집착이 소름 끼쳤다.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은 이것뿐인 게 아쉬울 뿐이죠.”

그에게 순종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착한 딸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손해 보는 건 당신이에요, 이자벨. 당신은 똑똑하니까 잘 알고 있잖아요.”

“내가 당신과 결혼해서 왕비가 된다고 해서 얼마나 자유로워질까요?”

나는 이제 이 빌어먹을 샬덴에 익숙해졌다. 이들은 왕족을 저들과 다른 종족처럼 봤다.

숭배와 찬양이 섞인 복종.

가끔씩 샬덴 왕족의 핏줄에서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태어났다. 샬덴의 인간들은 그것을 보고 정말 왕가가 신화 속의 핏줄인 양 믿었다.

“그가 상왕으로 물러난다고 해서, 날 놔줄까요? 그 작자의 영향력이 이 궁을 꽉 쥐고 있는데!”

“……적어도 내가 그 영향력을 양분할 수는 있겠죠.”

“그걸 날 위해 쓸 수 있나요? 당신이? 샬덴의 태자가 아를의 여자를 위해?”

게일은 적어도 내가 아를의 사람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게 그나마 내가 그와 대화하는 이유였다.

“내가 약속한다고 나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는 쓰게 웃었다.

“내가 당신한테 진실만 말해 준다고 해도, 당신이 나를 믿을 수 있습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미하일의 양자고, 샬덴의 태자인 이상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의심할 테니까.

“……난 여기서 뭐든 세 번씩 의심해요. 하지만 당신은 한 번만 의심하죠. 그게 내 최선이에요.”

“언젠가는 그 한 번도 의심하지 않기를 기대하며 평생을 살겠군요.”

그가 내게 한 발자국 더 가깝게 다가왔다. 내가 물러나려는 것보다 그가 내 팔을 붙잡는 게 더 빨랐다.

“당신의 신뢰를 얻기 위해, 뇌물을 하나 바쳐도 될까요?”

미하일과 똑같은 검은 눈이 나를 향해 휘어졌다. 집착이 담긴 그 지긋지긋한 눈과 달랐다.

“보석이나 드레스라면, 당신이 그 작자보다 더 나은 것을 줄 수는 없을 텐데요.”

“솔직함은 어떻습니까?”

장갑을 끼지 않은 게일의 손이 내 팔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당신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 대한 솔직한 정보 말입니다.”

“말해 줄 수 있나요?”

“제가 물어야 하는 말이죠. 절 믿으실 수 있습니까?”

전 당신한테 진실만 말할 겁니다, 이자벨. 그런 날 믿어요?

나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믿어요. 그러니까 말해 줘요. 내 동생에 대해.”

나한테 이렇게 말해 주는 인간은 이 남자뿐이었다.

나를 미하일이 총애하는 인형쯤으로 대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어쨌든 그는 나를 이자벨 로윈으로 봤다.

그를 믿는다는 말. 반쯤은 거짓이고 반쯤은 진심이었다.

“3년 전, 아를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누가…….”

“주동자는 당신의 옛 약혼자였던 바르펜시아 대공자였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믿는다고 했던 말을 당장이라도 철회하고 싶었다. 시그니티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권력에 대한 욕심조차 없던 남자였는데.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이 거기에 가담했죠.”

머리가 어지러웠다. 거짓말도 작작 하라는 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거짓말이면……. 이렇게 믿지 않을 사실들로 거짓을 꾸며낼 필요가 있었을까?

“반란은 성공했습니다. 대공자는 왕을 유폐하고 섭정공의 자리에 올랐고…….”

“알렉스는? 알렉스는 어떻게 되었죠?”

“반란에 대항하는 이들을 가장 많이 살해한 공으로 로윈 가문은 후작위를 받았죠.”

“그럴 리가 없어…….”

그 어린 애가. 뭘 안다고.

“전대 로윈 백작은 반란이 끝나자마자 하나뿐인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영지로 떠났다고 합니다. 글쎄요. 지나치게 젊은 후작의 탄생에 아를에서도 썩 의견이 좋지는 않다고 하는데…….”

게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습니까. 성공한 반란은 그런 것인걸.”

* * *

오랜만에 별궁을 방문한 미하일 덕분에 별궁의 시종, 시녀들은 바쁘게 뛰어다녔다. 아리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손끝이 야무지다는 평 덕분에 폐하께서 아끼는 아가씨의 방으로 배정된 아리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고 그 날 내내 감탄했다.

예쁜 사람들은 많이 봐왔지만, 저렇게 예쁜 아가씨는 또 처음이었다.

낯선 이들을 싫어하신다더니, 그녀를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리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수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수발을 꺼리던 이자벨은 잠자리를 지키겠다는 아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내 어두운 기색인 이자벨의 말에 아리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꼭 강제로 끌려 온 것 같은 얼굴에…….

아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의 생각은 무례였다.

복도가 어두웠다. 그녀는 이자벨이 머무르는 방 앞에 램프를 걸었다.

순찰을 도는 기사가 다가왔다. 그림자 때문인지 유난히 커 보이는 기사의 덩치에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무슨 일이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반쯤 어둠에 파묻혀 있는 얼굴은 묘하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기사님?”

그녀의 부름에 그나마 드러난 입매가 휘었다. 문득 위험하다는 생각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한 번 봤다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에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그게 그날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필요 없다고 했잖니. 가서 쉬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시그니티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렉스와.

나는 불안함에 물어뜯느라 너덜거리는 손끝을 한 번 보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소파는 푹신했고, 방은 따뜻했지만 내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둘이 그렇게 변했을까. 알렉스. 그 착한 애가 왜…….

“나가라고 했잖니.”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는 한숨을 쉬며 돌아봤다.

침대에 씌운 캐노피 너머로 키가 큰 남자의 인영이 비쳤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또 왜 오셨어요?”

미하일이 분명했다. 나는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에 두통까지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또 무슨 얘기를 하려나. 이 별궁을 엄마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다는 얘기?

내 의사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나들이는 이제 익숙했다. 모든 것은 엄마의 취향대로였다. 명랑하고 사랑스러웠던 헤더 구드윈의 취향.

“피곤하다고 했잖아요. 하긴, 당신이 내 말을 언제 들어주기는 했나.”

쏟아지는 빈정거림에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나는 순간 굳었다. 미하일이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는, 샬덴의 기사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저렇게 화려한 얼굴을 기억 못 할 리가 없…….

“……놀랐어요?”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비명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 그 아래 자리한 익숙한 이목구비. 절대 잊을 수 없는 회색 눈동자.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앳된 기색이 사라진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꿈인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놀랐구나…….”

무거운 저음이 낯설었다. 알렉스는 이상하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놀라서 도망치는 거죠?”

성큼 다가온 알렉스가 날 그대로 끌어안았다.

“아니면 당신이 날 피할 리가 없잖아요.”

단단한 체격. 낮은 목소리. 큰 키. 나를 끌어안는 억센 손길. 모든 게 낯설었다.

하지만 알렉스였다. 내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알렉스…….”

내 부름에 알렉스는 나를 끌어안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진짜 이자벨이네요.”

나를 계속 생각했구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았다. 나를 생각하느라 많이 괴로웠구나. 내가 멋대로 떠나 버려서, 너 많이 아팠구나.

“너도 진짜 알렉스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꿈인가? 현실감이 없었다.

“보고 싶었어, 알렉스.”

알렉스의 등을 천천히 끌어안자 그가 굳는 게 느껴졌다.

“……정말 내가 보고 싶었어요?”

“응. 아주 많이.”

“나만 그럴 줄 알았는데,”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생경했다. 나는 알렉스의 어깨를 밀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굴 보여 줘.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어.”

그 말에 알렉스가 겨우 나를 안은 팔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나는 양손으로 알렉스의 뺨을 붙잡았다.

“진짜 많이 변했네…….”

23살의 알렉스는 처음이었다. 18살 이후의 알렉스를 나는 알지 못하였으므로.

처음 보는,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네가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여전히 예쁘죠?”

얼굴을 멋대로 만지는 날 배려하듯 알렉스가 몸을 수그렸다. 나는 한참을 알렉스의 얼굴을 주무르다 그 애의 목을 끌어안았다.

“응. 여전히 예뻐.”

내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어나는 걸 숨기기 위해 계속 헛기침을 했다.

“너무 예쁘게 자랐네, 우리 알렉스…….”

내가 끝까지 지켜 주지도 못했는데. 나는 뒷말을 삼켰다.

순간 덜컥이는 소리가 내 귓가에 천둥소리처럼 박혔다.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대로 알렉스를 밀어 침대 위에 눕혔다. 허겁지겁 알렉스 위에 이불과 베개를 올리고 있자, 알렉스가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 손을 밀어냈다.

“가만히 있어, 알렉스. 숨도 쉬지 마.”

급하게 캐노피까지 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가. 자던 중이었니?”

문이 열리고,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밤에 그럼 뭘 하겠어요?”

뾰족한 내 말투에도 미하일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이 별궁은 밤 풍경이 예쁘단다. 혹시 봤니?”

“누군가가 제 방 창문은 죄다 잠가 놓아서 창가로는 가지도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죠.”

“누가 널 훔쳐 갈까 그러지.”

“당신처럼요?”

내 빈정거림에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네 정당한 자리란다, 이자벨. 넌 돌아온 거야.”

“……가세요. 피곤해요.”

“너한테 할 얘기가 쌓였는데…….”

“밤이에요. 어차피 내일 온종일 옆에 붙어 있을 텐데, 오늘 밤이라도 좀 내버려 둬요.”

입 안이 말랐다. 나는 초조함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미하일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평소처럼 신경질적으로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꾸나.”

미하일은 몹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배웅해 줘야지, 아가.”

“……내일 봐요.”

겨우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미하일에게 다가가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들켰을까? 이미 기사를 불렀나? 들켰으면 어떻게 하지?

“게일이 함부로 입을 놀렸다지?”

안 들켰구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믿지 말렴.”

문이 닫혔다. 나는 그대로 서 있던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 들켰어. 게일이 했던 말 때문에 온 거야. 알렉스는 안 들켰어.

게일이 했던 말…….

“알렉스, 너…… 반란을 일으켰어? 시그랑?”

겨우 고개만 들어 묻는 말에 침대에 앉아 있던 알렉스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알고 있었어요?”

“사실이구나.”

내 말에 알렉스가 변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왜…… 아니야. 너 무사한 거 봤으니까 됐어. 얼른 돌아가. 빨리. 들키기 전에.”

알렉스가 주저앉아 있는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초조한 얼굴로 계속 문을 힐긋거렸다.

“알렉스. 제발…… 여긴 샬덴이라고!”

“내가 걱정돼요?”

“그래. 샬덴의 왕은 무서운 인간이야. 당장 떠나야 해.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운이 좋게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날 그렇게 걱정하면서, 왜 날 떠났어요?”

“알렉스,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야!”

나는 내가 소리치고도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가 나를 안고 침대 위에 앉았다. 이내 애를 재우려는 것처럼 내 등을 도닥이는 알렉스의 느긋한 태도에 나는 손톱을 깨물었다.

“하지 마, 피 나잖아.”

알렉스가 내 손을 붙잡으면서 속삭였다. 내 눈이 커졌다.

“난 안 가. 당신한테 확답을 받기 전까지는.”

“알렉스…….”

“왜 반란을 일으켰냐고?”

알렉스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비틀려 올라간 입술이 자연스러웠다. 내내 그런 표정을 짓고 산 사람처럼.

“왜일 것 같아? 그 새끼와 내가 왜 그랬을까.”

알렉스가 내 놀란 얼굴에 쓰게 웃었다. 날 품에 안아 시야를 가린 알렉스는 미하일이 쓰다듬었던 내 머리 위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저 남자가 당신을 훔쳐 갔으니까.”

알렉스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어딘가 섬뜩한 어조에 나는 멈칫했다. 묘하게 미하일과 닮은 어투가…….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누님.”

“알렉스…….”

“누님을 데려가려고 왔는데.”

“난 안 가.”

나는 온 힘을 다해 알렉스를 밀어냈다. 여기까지 온 것도 큰일인데, 지금 나를 데려가겠다고? 그러다가 들키면? 그럼 알렉스는 어떻게 되는 건데? 내가 뭐 때문에 여기 이러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어.

“돌아가, 알렉스. 빨리. 여긴 위험한 곳이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알렉스는 내 반발에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당신은 당신 위험한 것보다 내가 위험한 거에 사족을 못 쓰잖아.”

“알면 왜 왔어. 오지 말았어야지!”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알렉스는 이상하게 느긋했다. 초조한 건 나뿐인 것만 같았다.

“반란은 3년 전이었어요. 나만큼은 아니지만 대공자도 제정신은 아니었거든요.”

“알렉스. 제발 지금이라도 가자. 응?”

알렉스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내 배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계속 문을 힐긋거렸다.

“그리고 그 후로 계속 전쟁을 준비했어요.”

나는 숨을 멈췄다.

“누님을 빼앗아 간 게 전쟁이면, 빼앗아 올 수 있는 것도 전쟁뿐이잖아요.”

알렉스가 웃었다.

“오늘 누님이 안 따라올 거 알아요. 그 남자가 나한테 무슨 짓 할까 봐 무섭잖아.”

내가 무섭지 않게 해 줄게요. 저 남자를 없애줄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냥 오늘은 정말 보고 싶어서 온 거니까.

딱딱하게 굳은 이자벨의 얼굴에 알렉스는 좀 더 불쌍한 척을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샬덴의 왕에게 쩔쩔매는 이자벨을 떠올리니 도무지 살의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지 마.”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예뻤다. 알렉스는 이자벨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콩 부딪쳤다. 나뭇잎 같은 초록색 눈 안에 그가 비쳤다.

시간이 지났으니 변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이자벨이 예쁘다 예쁘다 했던 그 시절과 달라졌으니 이자벨도 달라졌을 거라고.

매 순간 상상했다. 18살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떠난 이자벨이 어떻게 자랐을지. 어떻게 변했을지.

“싫어요. 누님도 내 말 안 들었잖아요.”

하지만 역시 상상은 현실보다 못했다. 그는 손에 감기는 이자벨의 머리카락을 쓸며 웃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그의 상상보다 황홀했다.

반 뼘 정도지만 키가 자랐고, 말랑해서 부서질 것 같은 몸도 조금은 단단해진 것 같았다. 여전히 힘주면 쉽게 부러질 것 같지만…….

“전쟁은 그렇게 함부로 언급할 게 아니야.”

화가 나도 힘을 주진 말아야지. 이자벨이 부서지면 어떡해.

알렉스는 이자벨의 허리를 끌어당기는 것으로 불만스러운 기색을 표출했다.

“돌아가, 알렉스. 나중에 또……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가. 가서 행복하게 살아. 전쟁은 생각하지도 마.”

“이젠 안 믿어요.”

그렇게 떠나고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 지금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샬덴의 왕이 이자벨을 놓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하는 행동과 목소리에 집착이 득시글거렸다.

꼭 저처럼.

“이번에는 내가 구해 줄게요. 저 빌어먹을 새끼를 죽이고 누님을 데리러 올게요.”

안고 있는 몸이 서늘했다. 두려움에 질린 얼굴이 창백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부드러운 살갗이 느껴졌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데, 알렉스. 넌 그러면 안 돼.”

작은 입을 통해 이자벨은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네가 위험해지면, 그러면…… 난, 난 못 견뎌. 그러지 마.”

“그러면?”

이자벨은 알렉스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이렇게 봤잖아. 그걸로 됐어. 넌 돌아가서 행복하게…….”

“이걸로 됐다고?”

그의 말이 다시 짧아졌다. 알렉스는 이자벨의 턱을 붙잡고 강제로 눈을 맞췄다.

“나 봐, 이자벨.”

“…….”

“왜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할까, 누님?”

결국 이자벨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어린애처럼 펑펑 울기 시작한 이자벨이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아 자기 얼굴을 감췄다.

“네, 네가 잘못되면 어떡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결혼하고 애 낳고, 그냥 그렇게 살아야지……. 왜 위험한 짓을 해. 왜!”

“누님 없이는 행복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있어. 해야 해, 알렉스. 난 괜찮으니까…….”

“내가 안 괜찮아요. 누님. 가족이라고 했잖아요. 당신 없이 내가 뭘 어떻게 행복해져…….”

“가족…….”

이자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울음 끝에 체념 조의 웃음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그 작자가 날 포기할 리가 없어. 넌 그 남자가 얼마나 미쳤는지 몰라.”

알렉스는 그녀의 등을 쓸던 손을 멈췄다.

“전쟁…… 전쟁 좋지. 그런데 그 남자는 아를처럼 적당한 타협을 하지 않을 인간이야.”

이자벨은 자기가 8개의 영지를 대가로 미하일에게 팔렸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하일이 설사 샬덴 전체를 걸고도 자신을 놔주지 않을 것 또한.

“하지 마. 단순히 이기는 거로 끝나지 않는 전쟁이 될 테니까.”

잔뜩 울어 붉은 눈가를 문지르며 이자벨은 어설프게 웃었다. 내 양 뺨을 붙잡고 어린아이를 다루듯 문질렀다.

“널 보게 돼서 너무 기뻤어, 알렉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전제한 말이었다.

“네가 어른이 된 모습을 못 보고 죽으면 한이 될 것 같았는데…….”

금방이라도 이별을 할 것처럼 말하는 이자벨은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걸로 충분해. 떠나.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

“끝까지…… 이럴 거예요?”

알렉스는 전혀 그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이자벨을 향해 물었다.

“내가 찾아왔잖아. 내가 당신 되찾겠다고 했잖아.”

“알렉스, 이건 어쩔 수 없는…….”

“누님은 항상 이랬죠.”

알렉스는 이자벨을 눈가를 쓸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나한테 이게 더 좋을 거라며 멋대로 결정하고, 날 떠나고…….”

알렉스의 목소리는 갈수록 가라앉았다. 끝에 가서는 낮아진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너도 나중에는 분명히…….”

“그러니까 이제 안 들을래요.”

알렉스는 이자벨의 입과 턱을 손바닥으로 아예 막아 버렸다. 강압적인 손길에 이자벨은 섬뜩함을 느꼈다. 엄마에 대한 미하일의 집착을 볼 때처럼.

“그 남자를 만난 이후로부터 누님은 이상한 소리만 하잖아.”

위험하게 가라앉은 눈에 이자벨은 속으로 애써 부정했다.

아냐. 안 닮았어. 내가 착각한 거야. 미하일의 그 돌아버린 눈이랑 어떻게 우리 알렉스가 같아.

“그러니까 말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입을 막은 손이 거칠게 이자벨을 찍어 눌렀다. 그녀는 숨이 막혔다.

“내가 구해 줄게요, 누님.”

이자벨의 의사 따위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채, 억지로라도 데려가겠다는 알렉스의 발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간신히 알렉스의 손을 떼어낸 이자벨은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너 이상해. 알렉스. 너 이런 애 아니었잖아.

단단하게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이 점점 낯설어지고 있었다.

“난 못 돌아가, 알렉스.”

그 말에 알렉스는 무섭게 웃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이자벨은 쫓기듯 진실을 고백했다.

“난…… 사생아야. 알렉스.”

“…….”

“옛날에 헤더 구드윈이라는 아주 사랑스럽고 명랑한 여자가 있었어. 그 여자는 세상을 여행하는 적국의 왕자님을 만났지.”

입 안이 껄끄러웠다. 알렉스의 표정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아무 감정도 아름다운 얼굴 위에 떠오르지 않았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가 이별했고,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어.”

“……백작과?”

“그래. 로윈 백작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약혼녀를 기꺼이 받아 줬지. 더 관대하게…… 그는 그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키우기로 결심했어.”

나는 알렉스를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랑했나 보지, 백작도 내 어머니를.”

나는 때때로 궁금해졌다. 두 남자를 사로잡은 헤더 구드윈이라는 여자가. 평생을 헤어 나오지 못하게 꽁꽁 묶어 둔 그 대단한 여자가 궁금했다.

“그리고 내 어머니는 나를 낳다 돌아가시고……. 적국의 왕자님은 거기에 아주 많이 울다가…… 미쳐 버렸지.”

이게 그 결과야. 그 작자는 미쳤고, 죽은 자기 연인을 대신해 딸인 나한테 집착해.

“난 샬덴 왕의 사생아야, 알렉스.”

알렉스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애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우리가 남매가 아니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알렉스의 말은 느릿했다. 그는 마치 스스로에게 질문하듯 물었다.

“이자벨, 당신이 내 누이가 아니라고?”

내 손을 붙잡은 알렉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난 뭐로 당신을 붙잡아?”

알렉스는 세상 전부를 잃어버린 것처럼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알렉스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우리가 가족이 아니면?”

“미안해, 알렉스. 정말 미안해…….”

나는 어쩔 줄 모르며 알렉스를 달랬다. 알렉스를 목을 끌어안고, 어깨와 머리를 쓸면서 쉼 없이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날 품에 안고 있는 알렉스의 얼굴이 어떤지.

알렉스는 그를 달래는 이자벨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핏줄이란 말을, 가족이란 말을 좋아했다. 마음이 식어도, 사람이 변해도, 그건 변할 수가 없는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굴레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면, 이자벨을 뭘로 붙잡지? 붙잡을 수나 있나? 그들의 관계는 순전히 이자벨의 호의에서 시작했고, 이어지는 것 또한 이자벨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핏줄에 더 집착했다. 이자벨과 닮았다는 말을 좋아했다.

사람의 마음처럼 쉽게 변하는 건 없었다. 알렉스는 이자벨이 평생 저만 예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이면, 내가 미워져도 곁에 있을 핑계가 되니까.

그런데 아니면 어떻게 하지? 당신이 내 누이가 아니면, 내 가족이 아니면, 난 어떻게 살지?

이자벨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나를 잊어버려도, 아무 말도 못하고 예뻐해 달라고도 할 수 없고…….

“울지 마, 알렉스…….”

그가 우는 것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좋았다. 이 얼굴을, 관심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핑계는 뭐든 상관없었다. 알렉스는 그저 이자벨의 전부가 되고 싶었다. 그의 전부가 이자벨인 것처럼.

이유가 필요했다. 이자벨이 그를 평생 사랑하고 아껴 줄 이유가. 설사 이자벨이 그에게 질려 떠나고 싶을 때도 붙잡을 수 있는 핑계가.

“내가 불쌍해?”

알렉스는 이자벨을 끌어안았다. 손아래에 느껴지는 감촉이 이전과 느낌이 달랐다.

“아냐, 네가 불쌍해서 달래는 거 아니야. 알렉스. 네가 소중해서 그래…….”

핏줄만큼 강한 구속이 필요해.

아니, 핏줄만큼 강한 구속이 어디 있겠어.

알렉스는 이자벨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착한 이자벨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이를 어르듯 그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문질렀다. 이자벨은 별 반응이 없었다. 알렉스는 속으로 웃었다. 이자벨은 늘 그를 순진하고 예쁜 아이로만 봤다. 정작 순진한 건 그녀면서.

우리 몸에 같은 피가 흘렀으면 좋겠어. 서로를 구속할 수 있게.

만약 그럴 수가 없다면 그렇게 만들어야지. 샬덴의 왕이 제 여자에게 했던 것처럼, 결국 어쩔 수 없이 서로를 구속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야지.

“데리러 올게요, 이자벨. 사랑해요.”

“제발 그러지 마. 알렉스…….”

아이를 가져야겠다. 이자벨과 제 피가 흐르는 아이가 필요했다. 이자벨을 묶어 두고 구속할 수 있는 핏줄이 그에게 절실했다.

떠오른 생각에 알렉스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꼴 따위는 보지 않아도 되잖아. 나랑 평생 같이 살면서, 우리 아이를 낳고, 서로만 바라보다 죽어야지.

알렉스는 그동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정말 평생 내 이자벨이 되는 거야. 나만 예뻐해 주는 나만의 이자벨이.

알렉스는 열심히 그를 달래고 있는 이자벨을 내려다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그럼 싫어할까?

아니, 사실 이젠 당신이 싫어해도 상관없어.

* * *

별궁은 커다란 호숫가 근처에 지어져 있었다.

밤에는 반딧불이가 모여 아름답다고 재잘거리는 시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몸을 수그려 호수에 손을 담갔다.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직 물이 찰 텐데요, 아가씨.”

“그러네.”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미하일이 오는 게 보였다. 호숫가에 앉아 있는 나를 보는 순간부터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뭘 상상했을까. 엄마랑 호숫가에 있었을 때?

나는 호수로 눈을 돌렸다. 여기 빠지면 죽겠지. 그냥 죽을까.

낯설었던 알렉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데리러 올 거라고 속삭이는 그 말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이 상황이 어이가 없고, 현실감이 없었다.

이전 생의 나는 천덕꾸러기였다. 로윈 백작은 나를 빨리 결혼 시장에 팔아 버리려 애를 썼지만, 영 관심 없는 나 때문에 무산되기 일쑤였다. 주변에 사람 하나 없는 악에 받친 어린애. 그게 나였다.

“아가. 마음에 드니?”

“아뇨.”

글쎄. 내가 생각하던 미래에 두 나라가 나를 두고 전쟁까지 벌이는 일이 있었나?

나는 이번 생에서는 꽤 평온한 인생을 설계했다. 가문이 정한 약혼자와 착실하게 결혼하고 가문을 이어갈 후계자를 돕는, 귀족 영애라면 흔하게 살아갈 그런 인생을.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미하일이 말하는 헤더 구드윈은 정말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여자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 그는 끊임없이 어머니의 모습을 내게 기대했다.

좀 더 웃고, 명랑하고, 사랑스럽고…….

“당신이요.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그건 내가 아닌걸. 태어날 때야 어땠을지 몰라도,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성격이 그렇게 좋았던 적은 없었다.

예민하고 까다롭고, 제 사람에게나 유해지는 인간이었는데. 지금 와서 사랑스러운 성격이 될 수나 있을까.

“마음 아픈 소리를 하는구나, 아가.”

미하일의 미소에 금이 갔다. 그러나 그는 애써 내게 다정함을 꾸며 보였고, 주변의 시종들만 그의 변한 기색에 하얗게 질렸다.

“상처 주는 거에만 익숙해서, 상처받는 건 어려우신가 봐요.”

비꼬는 내 말에 미하일은 짜증스럽게 웃었다. 그는 호숫가에 앉아 있는 나를 일으켰다.

“뭐가 또 불만일까, 우리 공주님은.”

나는 미하일의 손을 밀어냈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내가 여기 있으면, 내 소중한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한 거 기억해요?”

주변에 자리한 시녀와 시종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무거운 고요 속에서 나는 미하일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

미하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황제의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엄마처럼 사랑스럽지는 않아도 불쌍해라도 보이게.

“평생 그럴 거죠?”

“그래, 아가.”

미하일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길든 고양이처럼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약속했어요, 당신. 내 소중한 사람은 절대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미하일의 손은 한참 동안 내 머리 위를 떠나지 않았다.

거의 한 달을 머무른 별궁에서 떠나서 수도의 본궁으로 돌아온 날, 전쟁이 터졌다는 급보가 도착했다.

나는 미하일을 붙잡았다. 그럴 자격이 나한테 있었다. 미하일은 절대 내 사람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아를의 최전선 사령관은 알렉스 로윈이었다.

“약속했잖아요. 내가 당신 곁에 있어 주면, 내 사람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미하일은 알렉스를 공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즉시…….

“내가 죽기를 원한다면 마음대로 해 봐요.”

나는 처음으로 샬덴의 땅에서 진심으로 웃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 늘 나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조금 잔인한 궁금증이 생겼다. 미하일은 샬덴과 나 중에 무엇을 선택할까.

나를 선택해 전장에 뛰어들지 않아 샬덴이 패퇴를 거듭하더라도 난 상관없었다. 미하일이 샬덴의 왕이 아니라면, 그만한 권력이 없다면, 내가 붙잡힐 이유조차 없으니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하나였다. 전장에 뛰어든 알렉스의 안위. 그리고 나는 그 불안을 아낌없이 표출했다. 미하일에게 고함을 지르고, 알렉스의 몸에 생채기 하나만 나도 죽어 버릴 거라고 날뛰었다.

“아를의 군대가 멤바 성을 점령했다고 하는데…….”

“누가 네게 그 얘기를 했지?”

“궁의 모든 인간이 그 이야기를 해요.”

나를 볼 때마다 미하일의 얼굴에 떠올랐던 다정함이 없었다. 미하일은 나를 버릇없는 망아지를 보듯 응시했다.

귀엽지만 앞으로도 함께하기 위해서는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을 필요가 있는 그런 망아지처럼. 가두든지 매질을 하든지 말이다.

“당신이 전장에 나서야 한다고 해요. 적어도 당신이 아니라도 군대를 다시 정비해서 국경으로 보내야 한다고.”

나는 미하일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들 그 말을 해요. 폐하께서는 왜 아무 명령이 없으실까. 왜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으실까. 왜…….”

“네 주위의 아이들은 입이 가볍구나, 이자벨.”

“갈아치우시게요? 죽이시든가?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다 당신이 고른 아이들이잖아요.”

나를 감시하라고 당신이 손수 고른 아이들이면서. 미하일의 시중을 드는 이들도 그리 철저하게 뽑아 감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익숙한 얼굴들이 사라지면 아쉽겠죠. 하지만 그게 저한테 위협이 되지는 않아요. 당신이 날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나는 앉아 있는 미하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마치 어린 자식들이 제 아비에게 하듯이.

“내 소중한 건 다 아를의 땅에 있어요. 저 땅에 내 감정을 다 두고 왔어요.”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참으로 볼만했다. 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샬덴의 인간 중에서, 이상할 정도로 미하일은 잘 늙지를 않았다.

정신이야 엄마와 이별한 그때 완전히 멈춰 버린 모양이지만, 외모 또한 마흔이 넘은 나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근사한 얼굴이 뜻대로 되지 않은 일에 일그러지는 꼴을 처음 봤다.

“아버지. 아를의 군대를 공격하지 마세요. 제 소중한 사람이 거기 있어요.”

역사에서 나라를 망친 수많은 미인이 했던 짓이었다. 달콤한 말로 왕이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게 하는 것.

“나를 계속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잖아요, 아버지…….”

아무리 왕가에 맹목적인 샬덴의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이제 슬슬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왕의 눈과 귀를 막고 걸음을 멈춘 여자. 내버려 두면 나라를 망칠 미친년.

“……샬덴에는 뛰어난 장수들이 많단다, 아가.”

“지원하는 군대 하나 없이, 국경의 상비군으로만 아를의 군대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불가능할 것도 없지.”

아를의 군대는 늘 샬덴의 군대보다 약했다.

갑옷을 닦아 빛을 내고 검에 보석을 박는 아를의 기사들과 달리 샬덴의 군대는 무두질한 가죽을 받쳐 입고, 검의 날을 갈았다.

미하일은 그의 무릎에 기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절 보내시는 건 어떠세요?”

미하일은 그 소리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었다. 나는 협상을 하듯 빠르게 덧붙였다.

“아주 보내란 뜻이 아니에요.”

전쟁이 이어지면서 미하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은 보기가 좋았지만, 즐거움보다는 걱정이 더 컸다. 알렉스가 전장에 있었다. 그것도 최전선에.

“1년에 한 번 정도, 아니, 3년에 한 번도 괜찮겠죠.”

전장에서 목숨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먼 화살에 맞아 허무하게 죽어 버릴 수도 있는 지옥이 거기였다.

나는 전쟁 속에 알렉스를 오래 놔둘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생이별한 애예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그래요.”

그 착한 애가 전쟁터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변했다는 것에 나는 사실 꽤 충격을 받고 있었다. 떠날 때까지만 해도 어리광이 일상인 아이였다. 그랬는데…….

“몇 년에 한 번이라도 서로 보고 안부를 확인할 수 있으면 돼요.”

그냥 아주 먼 곳으로 시집을 갔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가끔이라도 얼굴을 보고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난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알렉스가 처음에는 반발하더라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시그니티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군대는 알렉스의 통제하에 있으니, 알렉스만 잘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

“전쟁을 끝내는 대가로 그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그 정도라…….”

미하일이 내 턱을 붙잡았다. 그와의 시선이 부딪쳤다. 나는 엄마처럼 웃으려고 노력했다. 사랑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몇 년에 하루라도 허락한다면, 전 조금 더 기쁠 거고, 여기에 정을 붙일지도 모르죠.”

“혹은 몇 년의 하루만 바라보며 이 땅을 더 증오하거나.”

미하일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수그려 나를 안아 올렸다.

“하루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란다, 아가.”

“이건 당신한테 유리한 거래일 텐데요.”

미하일은 나를 고쳐 안았다. 그와 내 눈높이가 똑같아졌다. 그는 당연한 진리를 말하듯 내게 속삭였다.

“난 헤더에 관한 건 어떤 것도 거래하지 않는단다. 그건 거래에 올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러다 이 나라가 멸망하면 참 보기 좋겠군요.”

“세력이야 좀 약해지겠지만…… 멸망까지 갈 정도로 아를이 철저히 준비한 것도 아니지.”

고작 몇 년이었다. 몇 년 동안 벼른다고 샬덴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군대를 정비할 수 있다면, 그동안 샬덴과 아를이 지긋지긋하게 싸워올 필요도 없었다.

샬덴이 이자벨 하나를 얻기 위해 7년 전에 전쟁을 벌였듯이, 아를 또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저 샬덴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올 만큼의 전공이 아를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미하일은 어떤 피해가 있더라도 아를이 만든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에나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었고, 미하일에게 그건 헤더였으니까.

끊임없이 들려오는 패배 소식에도 미하일은 그저 침묵했다. 왕가에 맹목적인 샬덴의 습성이 아니었더라면 이미 문제가 생겼을 정도로.

이자벨은 제게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난의 시선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최전선의 칼타카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였다. 게일이 이자벨을 찾았다.

알렉스에 대한 걱정으로 야윈 이자벨의 안색에 게일은 한숨부터 내뱉었다. 미하일이나 이자벨이나 지독한 고집이었다.

“왜 왔죠?”

경계를 품은 이자벨의 눈길에 게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제가 왜 왔는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요.”

“아를에 관한 거면 난 할 말 없어요.”

이자벨은 딱 잘라서 타협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게일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고집 하나는 미하일을 닮았다. 그런 말을 하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볼 테지만 말이다.

“폐하께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내가 말해 줘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죠. 늘 말했지만 이자벨, 전 당신 편입니다.”

“퍽이나 그렇겠군요.”

이자벨의 중얼거림에는 불신이 묻어냈다. 게일은 쓰게 웃었다.

“7년 전과 똑같죠. 당신을 얻기 위해 아를은 군대를 일으켰고, 샬덴은 꼼짝도 하지 않고…….”

게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과 한 약속 때문에 폐하께서는 움직이지 않으실 테고, 그렇다고 협상 테이블에 오를 생각도 없으시고…….”

“잘 아네요.”

“눈치 보는 게 제 전문이니까요.”

게일은 이자벨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가끔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지 못했다.

다른 인간들이 얼마나 그녀를 탐내고 집착하는지를 순진할 정도로 모를 때가 있었다. 본인이 누군가에겐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걸 왜 모르지?

“폐하께 무슨 거래를 제안하셨습니까?”

“……몇 년에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 준다면, 알렉스를 설득해 보겠다고 했죠.”

이렇게 말이다. 게일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몇 년에 하루에요. 그 정도로 전쟁을 끝낼 수 있으면 싼값이죠.”

“그건 이성적인 인간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죠, 이자벨.”

“그 작자가 미친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샬덴에게 유리한 일이잖아요.”

“그게 틀렸다는 겁니다.”

샬덴에게 유리한 일 따위는 미하일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자벨, 당신의 하루를 걸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시했어야죠.”

“종전은…….”

“아뇨. 샬덴은 폐하께 아무 의미가 없어요. 폐하께 의미가 있는 건 당신뿐이죠.”

정말 진저리가 난다는 듯 이자벨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대가로 당신에 관한 걸 걸었어야죠. 샬덴에 유리한 것 따위가 아니라.”

“이미 여기 갇혀 있는데 더 뭘? 사근사근하게 엄마처럼이라도 굴까요?”

“맞아요, 이자벨. 그런 거요.”

비꼬듯 던져진 이자벨의 말에 게일은 시원스레 수긍했다.

“폐하께서 원하는 걸 들어줘요, 이자벨. 샬덴 따위는 폐하께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그 작자는 이미 원하는 걸 다 가졌잖아요. 도대체 내가 뭘 더 걸어야 하죠?”

“글쎄요……. 하나 더 있지 않나요?”

무슨 말인가 싶어 게일을 응시하던 이자벨의 눈이 어느 순간, 배신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날 걱정해서 온 게 아니군요.”

이자벨은 게일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게일은 오히려 이자벨이 더 멀어지지 못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놔요.”

“당신을 걱정해서 온 겁니다, 이자벨.”

“황제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자벨의 목소리는 서릿발 같았다. 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자벨은 믿지 않았다.

“나와 결혼해요, 이자벨.”

게일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폐하께서 당신의 청을 들어줄 겁니다.”

게일은 미하일을 닮았다. 미하일이 그런 이를 이자벨의 짝으로 골랐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게일은 미하일이 젊은 시절에 좋아하는 색의 옷을 입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미하일이 가진 습관을 따라 했다.

미하일은 그의 젊은 시절과 똑같은 게일이 이자벨과 함께 있는 것을 만족스러워했다.

게일의 가치는 그뿐이었다. 헤더의 분신과 짝을 이룰 미하일 자신의 분신.

마치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부모처럼, 그는 끈질기게 그들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자벨은 계속 거절해 왔고.

헤더의 분신을 끼고 있다는 사실에 나름 만족한 미하일이 한발 물러서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게일은 여전히 태자였고, 서른이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흔한 약혼 한 번 하지 않았으니까.

몇 년 전쯤인가, 태자의 약혼을 주장했던 귀족 하나가 미하일에게 목이 잘린 이후로 아무도 게일의 결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게일에게는 죽음 아니면 이자벨과의 결혼밖에 선택지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뭐 어떠냐고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정략적으로 결혼하고 사는데 그라고 다를까.

하지만 지금은…….

“내가 당신에게 자유를 줄 수 있게 해 줘요, 이자벨.”

이 여자와 결혼해야만 하는 운명이 반가웠다고 하면, 이상할까.

살고자 하는 생존 본능이 이 여자를 사랑하는 쪽으로 심장을 움직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기가 어떻게 되었든 결국에 남는 것은 결과였다.

“진심으로 당신께 평생을 헌신하겠습니다. 날 선택해 주세요.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요.”

게일은 늘 누군가 그를 구원해 주기를 기대했다. 부모처럼 그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존재를 원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감정이 향한 곳은 그를 보듬기는커녕 스스로의 상처와 가녀린 두 어깨에 놓인 짐에 허덕이는 여자였다.

그렇게 게일은 구원을 바라는 대신, 누군가의 구원이 되고 싶어졌다.

“난…… 난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항상.”

늘 매끄럽게 흘러나왔던 말이 더듬어졌을 때, 이자벨은 어쩌면 그가 진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믿지 않아도 좋아요, 이자벨. 그냥 날 이용해도 좋아요.”

게일은 늘 이자벨에게 말했다. 무엇이든 이용하라고.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미하일을 이용하라고.

“당신도 알잖아요. 나를 믿지 않아도, 우리가 결혼하는 것만큼 폐하께서 만족할 대가는 없다는 거.”

“난 그 작자가, 그러니까, 당신과 결혼한다면 그 작자가 보일 얼굴이…….”

나는 말을 더듬었다.

“끔찍해요.”

내 결혼을 그따위의 거래로 해치우고 싶지 않다는 어린애 같은 소리는 아니었다.

지금의 내게 결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사랑이란 게 뭔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저 그 미친놈이 원하는 대로 하기 싫을 뿐.

나는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게일을 가만히 응시했다. 잿빛 머리카락의 채도마저 미하일과 같았다. 샬덴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 잘난 외모부터 묘하게 자유분방한 말투까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좀 소름 끼치기는 하지만…….”

내 손목을 감싼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당신이 날 좋아한다는 걸 그 작자가 알면, 아주 만족할 것 같아요.”

감정까지 닮았다며 좋아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나도 당신을 좋아하기를 바라겠지.”

당신이 미하일이 아니고, 내가 엄마가 아닌데도 말이야. 나는 뒷말을 삼켰다.

“그가 좋아하는 꼴을 보기 싫어요.”

마침내 그의 손이 툭 떨어졌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나한테 선택지는 그것밖에 없는 거죠?”

게일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결혼해요. 그게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이라면 기꺼이.”

어떤 의미로 몹시 정략적인 거래였다. 그는 청혼을 수락한 날 향해 꽤 슬프게 웃었다.

“……언젠가는 당신한테 자유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 * *

“……그래서 내년 즈음에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게일이 말에 미하일의 입매가 비틀렸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너와?”

“예. 폐하.”

“꽤 좋은 핑계를 잡았군.”

황제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게일은 씩 웃었다. 미하일의 젊은 시절처럼.

“폐하께서 바라시던 바가 아닙니까?”

미하일은 침묵했다.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입이 열렸다.

“……오 년에 하루. 그 정도면 생각해 보지.”

미하일의 허락에 게일은 허리를 숙였다. 게일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미하일의 비위를 맞춰 왔다. 어쩌면 세상에서 미하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간이 바로 그일지도 몰랐다. 때문에 게일은 미하일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고 아름다울 겁니다, 폐하.”

미하일은 게일의 말에 만족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샬덴이 드디어 협상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샬덴의 사절단이 파견된 날, 미하일은 손수 사절단을 배웅했다.

“한 달 안에 돌아오도록.”

게일은 저를 배웅하는 미하일을 향해 속으로나마 쓰게 웃었다.

그의 뒤에 있는 가장 화려한 마차에는 이자벨이 타고 있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제 동생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러나 만약에 하지 못한다면? 가장 좋은 건 이자벨이 제 동생을 설득하고, 그와 결혼해 샬덴에서 사는 거였지만…….

“만약 그녀가 설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폐하.”

“전쟁이지.”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에 게일은 뒤의 마차를 힐긋 확인했다.

“그녀가 가만히 있을까요?”

“글세, 물론 건강한 이자벨이 훨씬 보기 좋지만…….”

미하일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다. 그럼에도 게일은 평정을 가장하며 미소를 유지했다.

“……멀쩡하지 않은 이자벨이라도 난 그 애를 사랑하니 괜찮겠지.”

게일은 미하일의 시선이 장갑을 낀 그의 손에 닿는 것을 보고 침을 삼켰다.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단다.”

샬덴의 왕가에서는 가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간들이 태어났다. 게일은 그중 하나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의 기억을 건드릴 줄 알았다. 그리고 게일은 멀쩡한 기억을 한 번 건드리기 시작하면, 미치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정말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미하일은 기꺼이 게일에게 명령할 것이다.

이자벨의 기억을 건드리라고.

그 결과 이자벨이 미쳐 버려도 미하일은 조금 아쉬워할 뿐. 슬퍼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이자벨은 미하일이 사랑해 마지않는 헤더의 분신이지만, 헤더는 아니었으니까.

게일은 이자벨을 제 손으로 미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미하일의 앞에서는 순종적인 아들처럼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전부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테니.”

이자벨을 태운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하일은 계속 서 있었다. 그리고 게일은 미하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후에야 겨우 숨을 내쉬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게일은 평소처럼 웃고자 노력했다.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게일은 어린 나이에 미하일의 손에 부모를 잃었던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나는 어딘가 넋을 빼놓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게일을 향해 물었다. 원래부터 느슨하게 다니던 인간이었지만, 그것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글쎄요.”

“자기가 괜찮은지 아닌지도 몰라요?”

내 말에 게일이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정말 동생을 설득할 자신 있습니까?”

“해야죠. 아예 볼 수 없는 거랑 그래도 간간이 볼 수 있는 거랑은 다르니까…….”

나는 국경을 가르는 관문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별로 높지도 않았다.

아를의 병사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사절단의 신분을 확인했다. 기사로 보이는 이가 다가와 정중하게 나와 주위에 있는 이들의 신분을 물었다.

샬덴의 태자라는 게일의 답변에 기사가 딱딱하게 굳은 채로 더 묻지 않고 물러났다. 샬덴 측의 기사 하나가 그를 쫓아가 사절단에 속한 이들의 신분을 하나씩 알려 주는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 내 신분은 뭐죠?”

“뭐일 것 같나요?”

사절단에 속한 귀족 중 게일을 제외한 이들은 다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들을 쭉 훑어보고는 대답했다.

“적어도 이자벨 로윈이라는 이름을 쓰게 하진 않았겠죠.”

내가 아를의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이라 내 얼굴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게 다행일까.

“그래서, 내 위장 신분이 뭐죠?”

“디어 위버겐.”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이름이 아니죠.”

“하지만 신분이죠.”

폐하께서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당신이 아를에서 불리는 걸 원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게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샬덴에 와서야 미하일이나 게일이 썼던 성이 샬덴 왕가의 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왕가의 성을 적국에서 드러내놓고 다닐 리가 없지.

위버겐은 샬덴의 북쪽 끝에 있는 작은 성의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샬덴이 시작된 성. 왕가에 시집온 여자들은 모두 자신이 가졌던 성을 버리고, 위버겐이라는 성을 달아야 했다.

“누가 보면 벌써 결혼한 줄 알겠군요.”

“약혼한 사이일 때부터 미리 성을 내리는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약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차피 내년에 결혼할 테니, 그렇게 불려도 됩니다.”

내 결혼이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 내가 가진 이름을 보고 알렉스가 보일 반응이 걱정되었을 뿐.

“알렉스가 싫어할 거예요. 그 애는 내가 자기 때문에 팔려 갔다고 생각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죠.”

나는 딱 잘라 내뱉었다.

“그렇다고 그 애가 사실을 알 필요는 없죠.”

게일은 곤란한 얼굴로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이미 그렇게 말을 전했는데,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자벨.”

난처한 얼굴이지만 늘 웃고 있는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 미하일은 늘 게일이 자신의 젊은 시절과 똑같다고 말했지만…….

글쎄. 미하일이 이렇게 자주 웃는 인간이었을 거라고? 누군가에게나 호감을 얻어낼 만큼 이렇게 무난하게 웃어 보일 수 있는 인간이었다고?

제정신이 아닌 미하일의 눈이 생각나 저절로 눈을 찌푸렸다.

게일은 내 기색에 초조한 듯 혀로 입술을 쓸었다. 꼭 미하일 때문이 아니라 정말 나를 신경 쓰기 때문에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라도…….”

“……연애결혼까진 아니더라도, 서로 호감이 있다고는 해 보죠.”

초조했던 얼굴이 훅 밝아졌다. 그 얼굴에서 나는 시그가 날 보고 종종 지었던 표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는 진심이지만, 당신은 제대로 연기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자연스럽기를 바라며 그를 피해 시선을 성벽으로 돌렸다.

시그니티가 생각나니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보답해 줄 수 없는 마음은 서로에게 독이었다.

“난 알렉스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어요.”

“대단한 우애군요.”

조롱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하는 게일의 목소리였다. 나는 망설이다 덧붙였다.

“……죄책감 때문은 아니에요.”

그는 유일하게 내가 이전 생에 알렉스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간이었다.

이제는 흐릿한 이전 생의 기억 속에서도 나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 뒤로 넘어가는 마른 몸. 손에서 빠져나가는 옷자락. 어쩔 수 없이 평생을 매여 있을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압니다. 죄책감 때문이라면 좀 더 끝이 깔끔했겠죠.”

가진 것을 전부 털어 주고, 떠나서 다시는 보지 않았겠지. 적어도 게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든 그 마음이란 게 문제니까.”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이자벨……?”

선 채로 그대로 굳어 버린 나를, 게일이 놀라며 불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게일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기…….”

성문이 열렸다. 보통 국경부터 수도까지 사절단을 안내하는 역할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신분의 이들이 맡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바로 얼마 전까지 전쟁을 지휘했던 사령관이 오는 경우는 없었단 말이다.

젖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이마는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네.

나는 좀 멍청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느새 가깝게 다가온 알렉스에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떻게 말을 걸지?

얼마 전 알렉스를 봤을 때는 밤이었다. 그래서 어딘가 무서운 느낌을 받았는데, 확실히 환한 낮에 보니 그런 느낌이 없었다.

알렉스의 얼굴을 덮고 있는 무표정은 로윈 백작에게서 익숙하게 볼 수 있었던 표정이었다. 잘 만들어진 감정 없는 인형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대신해 게일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 순간 숨을 멈췄다. 알렉스는 나를 봤지만, 나를 보지 않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스치고 지나간 시선에 나는 게일의 소매를 더 세게 붙잡았다. 뭔가 매달릴 것이 필요했다.

나는 늘 바라왔다. 알렉스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순간을. 내가 무엇을 주든 되돌려 주지 않을 알렉스를.

하지만 다가온 순간은 생각보다……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들었다.

“반갑습니다. 로윈 후작. 지나치게 호화로운 길잡이를 맞이하게 되었군요.”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그래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한 게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아니었나? 나는 그냥 핑계였나? 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보듯 나를…….

“이쪽은…….”

나를 소개하려는 듯 게일이 살짝 비켜섰지만, 알렉스는 그 말을 잘라냈다.

“갈 길이 머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가까이 다가온 알렉스에게서는 묘하게 비릿한 향이 났다.

나는 알렉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지만, 알렉스는 나와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나는 알렉스의 등을 보면서 알렉스와 재회했던 밤을 생각했다. 애원하고, 협박하고, 매달리고…… 어떻게든 나를 데려가겠다고 속삭이던 알렉스를.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했다.

나를 외면하는 알렉스는 처음이었다. 이전 생에서조차 알렉스는 나를 외면하지는 못했다.

“……내가 여기 온 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내 중얼거림에 게일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위로라도 건넸다면 더 비참했을 테니까.

알렉스의 무시는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몇 번이고 그냥 샬덴으로 가 버릴까 생각했다.

감정 없는 얼굴로 알렉스는 나를 스치듯 볼 뿐, 그 이상으로 내게 시선을 두지도 않았다. 심지어 몇 번 마주치지도 않았다.

한 번은 내가 붙잡은 적도 있었다. 알렉스는 그대로 내가 붙잡은 팔을 털어 버리고 그 자리를 떴다.

게일은 점점 어두워지는 내게 쩔쩔맸다.

보통 느긋하게 움직이는 사절단은 알렉스의 강행군 하에 꽤 빠르게 수도로 도착했다.

수도의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나는 오랜만에 수도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끼이익.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수도의 문이 닫히고, 나는 샬덴의 사절단과 함께 서궁에 도착했다.

알렉스는 정말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떠나 버렸다.

“괜찮습니까, 이자벨.”

“괜찮지 않을 것도 없죠.”

태연한 척하는 내 대답에 게일이 미간을 좁혔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전하. 이쪽으로.”

서궁의 시종과 시녀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절단이 머무를 방을 안내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줄을 잡아당기시면 됩니다, 아가씨.”

시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 샬덴의 사절단을 환영하는 연회가…….”

“이쪽 복도에 머무는 건 나 하나뿐인가?”

내 말에 시녀는 잠깐 침묵하더니만 내게 물었다.

“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위치가 좀 이상했다.

“그게 아니라…… 다른 사절단들은 다 반대편 복도에 머무는 것 같은데.”

예전에 잠깐 샬덴으로 가기 전에 서궁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때 머물렀던 방보다 더 크고 화려했다.

문제는…… 그때도 이쪽 복도는 아무도 쓰지 않았던 거로 알고 있었는데. 본궁과 가까운 쪽 방은 사절단에게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시그니티인가? 그가 뭔가 명령을 내렸나?

하지만 시그니티가 내가 오는 것을 알았던가? 알렉스가 말했나? 나를 완전히 모르는 체하는 그 애가?

“죄송하지만 아가씨, 저는 따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서궁의 시녀장께 여쭈어보겠습니다.”

“답이 올 때까지 일단 내 짐은 풀지 마요.”

내 짐을 들고 왔던 시녀들은 내 명령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피곤에 젖은 몸을 침대 위로 던졌다. 알렉스의 태도 때문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강행군을 했으니 몸이 축축 쳐졌다.

저절로 감기는 눈을 어떻게든 뜨기 위해 애썼다. 다른 건 다 나가지 않더라도 환영 연회는 의무적으로 다 참석해야 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면서 앉았다. 더 누워 있다가는 정말 잠들 것만 같았다.

“이자벨.”

순간 눈앞에 등장한 알렉스에 이미 잠든 채로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알렉스……?”

눈을 의심하며 멍하니 앉아 있는 내게 알렉스가 다가왔다. 웃는 얼굴이었다. 즐거워 미치겠다는 얼굴.

알렉스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내 손바닥을 끌어다 제 뺨에다 비비는 모양새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지 마.”

붙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알렉스가 더 꽉 붙잡았다. 손바닥에 알렉스의 혀가 스쳤다.

“나 당신을 못 본 척하느라 너무 힘들었단 말이야…….”

알렉스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토해내며 이자벨의 손바닥 위에 입을 맞췄다.

“왜…… 못 본 척한 건데?”

흔들리는 목소리가 예뻤다. 상처받았겠지.

그리고 그렇다는 건, 그녀가 알렉스를 여전히 아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실 수도로 올라오는 중에 이자벨이 그를 잡았을 때는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그대로 데려가 어딘가에 가두고 싶었는데.

“거기서 돌아가면 놓칠지도 모르니까.”

빌어먹을 샬덴의 태자.

알렉스는 이자벨에게서 내내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포착했다. 사람 좋은 낯을 하고 웃고 있는 그 남자는 철저히 이자벨을 감시하고 있었다.

“여기는 아니야.”

수도로 들어온 이상 이자벨이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이자벨을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 안쪽에 입술을 대고 있으니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이유가 뭐든 말해 주지 그랬어. 내가 얼마나…….”

머뭇거리는 손이 알렉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알렉스는 도망치지 않는 이자벨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들 사이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이자벨이 놀라 손을 거뒀다.

“이자벨 치마폭에서 그만 나오지, 처남?”

시그니티는 천천히 등 뒤의 문을 닫았다. 달칵거리는 소리에 이자벨이 살짝 움찔했다.

“……하나도 안 변했네, 벨.”

여전히 예쁘고, 뭐가 그렇게 눈을 뗄 수가 없는지. 그의 중얼거림에 살짝 떨리는 눈매까지 여전했다.

“여기는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는 시원스레 수긍했다. 어쨌든 그에게 이자벨이 말하는 건 여전히 모조리 옳았으니까.

이자벨의 앞에서 무릎을 반쯤 꿇고 있는 알렉스는 시그니티의 등장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시그니티도 알렉스의 존재 자체가 달갑지 않았으니 피장파장이었다.

“네 누이를 귀찮게 하지 마, 처남.”

“이자벨이 날 귀찮아할 리가 없잖아.”

알렉스가 이자벨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럴 리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눈동자였다.

“내가 귀찮아?”

아니면 그럴 리가 없어야 한다는 집착이든지.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당신이 그럴 리가 없지.”

누님이라 꼬박꼬박 부르던 동생의 변한 어투에 이자벨이 그제야 생경함을 깨달았을 때였다. 시그니티는 서늘한 말투로 알렉스에게 명령하듯 입을 열었다.

“처남. 방금 귀환한 거라면 바쁠 텐데?”

이자벨은 순간, 알렉스가 시그니티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알렉스는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순순히 시그니티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또 올게요, 이자벨.”

왜 이전처럼 누님이라고 불러 주지 않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 봤자, 상처받을 건 자신이었으니까.

문이 닫혔다.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그를 봤을 때, 나는 그의 잔에 약을 탔고 우리는 제대로 된 이별의 말도 못 나누고 헤어졌다.

“……처남이랑 해후는 즐거웠어?”

헤어졌을 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많이 자란 알렉스와 달리 시그니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짧았던 붉은 머리가 묶어도 될 만큼 길어졌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헤어졌던 그때 그 얼굴 그대로였다. 다만 늘 웃고 있었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을 뿐.

“이제 처남은 아니겠죠, 전하.”

“그러지 마, 벨. 내 이름 불러 줘.”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그에게 선을 그었다. 한때 결혼을 논했을지언정, 지금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어디로?”

그는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게 돌아오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어디로 갈까.”

시그니티는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기 위해 본인이 저질렀던 일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위해 제가 벌인 일들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서 애원할 뿐이었다.

“예전처럼 굴어 줘, 제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그럼 그 이상을 바라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의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벨.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전쟁은 안 돼. 하지 마. 정말 당신이 날 생각한다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왜 안 돼? 벨,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이 전장에 나가는 게 끔찍해서? 그놈이 원한 건데도?”

그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럼 내가 나가면, 내가 전쟁터에 나가서 널 데려오는 건 괜찮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게 성큼 다가왔지만 뒷걸음질 치는 나를 보고 다시 걸음을 멈췄다.

“네 명령이라면 뭐라도 들을게. 널 버리라는 명령 빼고. 제발, 벨. 나 그건 못 하겠어…….”

나는 한참을 아무런 대답도 못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너한테도 좋은 일이야…….”

섭정공이라고 했던가. 권력자에게 명분 없는 전쟁은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좋지 못했다.

“미안해.”

“난 미안하다는 소리가 싫어. 벨. 넌 똑똑하니까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할지 알잖아.”

“나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 해. 난 네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니까.”

분위기에 휩쓸려서, 동정에 흔들려서 그를 달래 주기에는 난 그리 순진하지 못했다.

이미 다 틀어져 버린 상황에서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차라리 나를 원망하면서 잘 살기를 바랐다.

“난 여기 남지 못해, 시그. 네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지만…….”

“남는다고 말하라는 게 아니야. 벨.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뭘 하든 내가 해. 넌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돼.”

그는 울지 않으려는 것처럼 한껏 눈을 찌푸리다가 결국 손으로 자기 눈을 가려 버렸다.

“나는 그냥…….”

목소리가 먹먹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보고 싶었는데. 너는?”

그가 듣고 싶었던 말. 내게 기대했던 말. 정말 불쌍하게도 여전한 남자였다.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제가 가진 것은 죄다 내놓고 제발 선택해 달라고 바라보기만 했던 남자. 나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던 남자는 아주 소박한 질문을 던졌다.

“벨, 너는 내가 보고 싶었어……?”

내가 고개 한 번 끄덕인다고 이 남자에게 주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다시 그가 불쌍해졌다. 어쩌다 하필 그는 나를 사랑했을까. 불쌍하게. 좀 더 사연 없고, 팔자 안 꼬인 여자를 골라 사랑했으면 좋았을걸.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미련이 넘치는 걸음이 방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단 한 번도.

보답해 주지 못하는 감정들은 너무 무거웠다. 그 무게에 깔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일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가 내게 알렉스보다 소중해질 수는 없을 테니까.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로윈 가문은 대대로 아를의 군부를 맡았다.

내가 알렉스가 위험할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많이 변했어도, 더 이상 나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아도 그 애는 여전히 유일한 내 가족이었다.

얼마나 멍하니 앉아 있었을까. 어느새 내 방에 들어온 게일은 시종들에게 손짓해 풀지 않은 내 짐들을 밖으로 날랐다.

“착오든 의도든, 일단 사절단이 머무르는 쪽 복도로 방을 옮기기로 하죠.”

게일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향해 물었다.

“여기 남고 싶어요?”

그가 말하는 ‘여기’가 아를일까 아니면 이 방일까. 하기야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일까.

“내 기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죠.”

“남고 싶다는 뜻이네요.”

그게 뭐가 중요할까. 여기가 내 고향이고, 내 가족이 사는 땅이었다. 당연히 남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되는 것에 떼를 쓰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어 버려서.

“난 샬덴으로 돌아갈 거예요.”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를 지나쳐 방을 나서자 게일이 빠르게 나를 쫓아 나섰다.

“방이 어딘지는 알고 혼자 나가는 겁니까?”

“누구든 물어보면 답해 주겠죠.”

“화가 났습니까?”

나는 내 눈치를 보는 그를 힐긋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쉬고 싶어요. 너무 피곤해서.”

“연회 때까지는 좀 쉬어요, 이자벨. 그리고…….”

그는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쉬어요.”

새로 배정받은 방의 문을 손수 열어 준 게일은 내가 방에 들어가고 나서도 계속 문을 붙잡고 밖에 서 있었다. 어딘가 방황하듯 이리저리 떠도는 시선에 의문이 들었지만, 거기까지 관심을 가지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몇 년 치 감정 소모를 다 해 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그대로 옷 하나 갈아입지 않고 침대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도피에 가까운 잠이었다. 꿈도 꾸지 않거나, 어딘가에 잡아 먹히는 꿈을 꿀 것 같았다.

“……아가씨?”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뜨면서, 전혀 가시지 않은 피로와 어두워진 주위에 나는 조금 놀랐다.

눈을 감았다가 바로 뜬 것 같은데, 뭔가 잠이란 것을 자기는 한 모양이었다.

어둑한 주변의 공기에 동화된 것처럼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시녀가 램프를 켰다.

“죄송하지만 연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깨웠습니다, 아가씨.”

무뚝뚝한 인상의 젊은 시녀는 대답 없는 내게 물었다.

“지금부터라도 치장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시녀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어차피 옷이야 대충 싸 왔고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얼굴에 분을 찍어 바른다는 말인가. 내가 아무리 공들여 꾸민다고 해도 아를에서 샬덴에서 온 인간들을 곱게 봐줄 리도 없는데.

“하지만 아가씨, 혼자서 하시기에는 지금 시간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가렴.”

나는 몇 번이나 되묻는 시녀를 내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샬덴에서 가져온 샬덴의 옷이였다.

거울을 보니 샬덴 특유의 투박하지만 편안한 드레스가 눈에 밟혔다. 옷장에는 사절단의 이들을 위한 아를의 드레스도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를의 옷을 입을 일은 없겠지. 역대 모든 샬덴의 사절단들이 그래왔듯이.

문을 열자 게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내밀었다. 나는 그 팔을 붙잡았다.

샬덴의 사절단으로서 참석하는 첫 공식 행사였다.

넓은 연회장에서 굳이 이렇게 모여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샬덴의 사절단은 연회장 한구석에 모여서 서로 대화하기 바빴다. 아를의 귀족과 대화를 나누는 인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를의 귀족과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내 질문에 게일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샬덴의 사절단 중에 유일하게 웃고 있는 인간이었다.

“아뇨. 그런 치졸한 법은 없습니다, 이자벨.”

“연회에 참석한 이유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우리끼리만 있을 거면.”

“상대가 초대를 했으면 참석하는 게 예의니까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샬덴은 아를을 싫어하니 어쩔 수 없죠.”

게일은 연회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본능적으로 맞지 않는 관계도 세상에는 있는 법이니까.”

나는 샬덴의 귀족들의 시선이 보석으로 장식된 샹들리에와 금을 입힌 꽃장식에 닿을 때마다 찡그려지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샬덴의 이들은 화려함을 독처럼 취급했다. 눈을 사로잡는 것들을 경계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의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샬덴의 연회는 여자가 참석할 수 있는 점만 제외하면 군법 회의 같았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지.

알면 알수록 샬덴의 왕족이었던 미하일이 도대체 왜 엄마한테 반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두 나라는 너무 취향이 달랐다.

나는 무거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의미 없는 시선을 벽 쪽에 두었다.

넓은 연회장 어딘가에 알렉스와 시그니티가 있겠지만, 마주치기가 꺼려졌다.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그 순간, 내 시선에 익숙한 인간이 잡혔다. 어둑한 금발이었다. 추종자처럼 보이는 이들을 거느린 채 부채로 입을 가린 여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캐롤……?

부채가 사르륵 접혔다. 눈짓 한 번으로 주위의 이들을 물린 캐롤이 내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한쪽 테라스로 물러났다.

“어디 가십니까, 이자벨?”

게일이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훤히 비치는 테라스 쪽으로 턱짓하자, 그가 머뭇거리다 내 팔을 놓았다.

“너무 오래 있지는 마십시오.”

“아를의 귀족과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치졸한 법은 없다면서요.”

나는 그를 뒤로한 채 캐롤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어떤 위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은 이들이 그녀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얇아서 훤히 비치는 커튼이 펄럭거렸다.

캐롤은 달을 등지고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불안함을 대신해 여유로움이 그녀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자벨. 아니, 이자벨이라고 불러도 돼요?”

“캐롤…….”

내가 좀 더 가깝게 다가가려 하자 캐롤이 제지했다.

“밖에서 다 보이는 곳이에요. 반가움은 말로 표현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씩 웃은 그녀는 나를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만 눈으로 훑었다.

“당신이 돌아와서 기뻐요, 이자벨.”

“……돌아온 건 아니죠. 아무튼 나도 반가워요, 캐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다 당신 때문이죠.”

의문스러워하는 내 표정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 이제 얘기 천천히 좀 해 보죠.”

캐롤은 내게 허물없이 굴었다. 배려 섞인 친근함이 내게도 느껴졌다.

“보다시피 난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이 갑자기 적국의 왕자비 후보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말하자면…… 좀 길죠.”

“당신 얘기를 들을 시간은 충분해요.”

마지막으로 캐롤과 있었을 때, 그래도 친구 비슷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캐롤은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거래를 받아 준 내 호의에 꽤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염려가 깔려 있었다.

“당신, 괜찮은 거죠?”

그럴 리가. 나는 그 질문을 받자마자 떠오른 대답에 황급히 말을 돌렸다.

“캐롤은요? 그러고 보니 알렉스와의 약혼은 어떻게…….”

“당신이 없는데 멀쩡하게 약혼이 유지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파혼했죠.”

캐롤은 혀를 차면서 힐긋 밖을 쳐다봤다. 얇은 커튼 밖의 연회장에서 남들 머리 위에 불쑥 올라와 있는 알렉스가 보였다.

꽤 멀리 있었지만, 나는 금방 알렉스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단지 내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연회장의 불빛 아래에서 알렉스가 제일 눈에 띄었다.

바깥의 알렉스에게 한눈을 판 나를 보며, 캐롤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지금 섭정공의 공식적인 약혼녀예요. 이자벨.”

나는 그 말에 바깥으로 향했던 시선을 원위치시켰다.

“시그니티의……?”

몇 시간 전에 내게 절절하게 고백했던 남자의 약혼녀라고 고백한 캐롤은 놀란 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몹시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섭정공을 대신해 변명하자면 아무 감정 없는 위장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난 결혼할 생각이 없고, 섭정공은 사교계에 풀어놓을 자기편이 필요했죠.”

변명을 줄줄 이어나가던 캐롤이 순간 밖을 다시 확인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웃음소리에는 어쩐지 재밌다는 기색이 섞여 있어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정말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 질투를 좀 하면 섭정공이 좀 더 좋아할 수도 있겠네요. 물론 지금 질투는 저쪽이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잠깐 사이에 어디서 등장했는지 알렉스와 대화를 하고 있는 시그티니는 몹시 진중해 보였다. 이쪽에 우리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은데……,

“우린 파혼한 지 7년이 지났어요.”

“난 5년째 저 남자가 당신이 보고 싶다고 우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정말 진심인지 캐롤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저 두 남자의 더러운 성질머리와 한탄에 적응하기까지, 정말 고생했죠.”

알렉스와 시그니티 둘 다 더러운 성질머리라는 말과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지 않나?

알렉스는 낯을 좀 많이 가리긴 했지만, 순한 애였다. 시그니티는 심지어 낯도 별로 가리지 않고 친화력도 좋았는데.

물론 7년 만에 본 알렉스는 조금…… 좀 변한 것 같지만.

“알렉스가 성격이 좀…… 많이 변했나요?”

“…….”

뭔가 몹시 갸륵한 시선으로 날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캐롤은 어딘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원래 순한 애였잖아요. 낯을 좀 가리긴 했지만, 어리광도 잘 부리고 그런 애였는데.”

“순한…….”

캐롤은 마치 난생처음 들은 단어를 말하는 것처럼 힘겹게 중얼거렸다.

“이자벨, 우리 지금 다른 언어로 대화하고 있는 건가요?”

“당연히 아니죠, 캐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캐롤은 그럴 리가 없다는 투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후작에게 순하다는 말을 쓸 수가 있죠? 낯을 가린다고요? 낯을 두 번 가렸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캐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불신이 가득한 그 목소리에 나는 욱해서 되받아쳤다.

“캐롤이 몰라서 그렇죠. 가까운 사람한테는 얼마나 잘하는데.”

“후작에게 가까운 사람은 당신밖에 없잖아요. 이자벨.”

“알렉스도 친구가 있어요. 왜 애를 친구도 없는 애로 만들어요?”

데빈이라든가. 데빈이라든가. 데빈이라든가. 데빈밖에 없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 거다.

“아무튼 너무 오해하지 마세요, 캐롤. 안 그래도 마음이 여린 앤데 상처받으면 어떻게 해요.”

“마음이 여린…….”

“알렉스가 성격이 별로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났나요?”

나는 대답이 없는 캐롤을 재촉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좀 변하기는 했어도 그 여린 애가 변했으면 얼마나 변했다고 그런 헛소문이 돌아요?”

캐롤은 제게 답을 재촉하는 이자벨과 바깥을 한 번 돌아보고 이 순진한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문에 빠져들었다.

여린 애?

세상 여린 애가 다 죽었든지, 아니면 여린 애의 뜻이 바뀌었든지 둘 중 하나가 아니라면 후작에게 그런 설명이 붙을 수는 없었다.

섭정공의 미친개. 그게 바로 로윈 후작이었다. 제 주인도 수틀리면 그냥 들이받는 미친놈이 여리긴 개뿔.

“캐롤?”

부드럽게 늘어트린 금발에 녹안. 사랑스럽고 우아한 것을 최고로 치는 아를의 미인상에 딱 들어맞는 여자였다.

순진하게 생긴 것치고는 꽤 이해득실을 잘 따지는 것에 영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저 미친개를……?

섭정공의 반란이 터진 직후에 일어난 모든 반발은 저 미친개의 손에서 전부 처리되었다. 건수만 잡았다 싶으면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전부 쓸어 버리는 후작 때문에 섭정공의 위치는 생각보다 빠르게 공고해졌다. 더불어 후작의 악명 또한 아주 기세가 등등해졌지만…….

본인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오히려 만족하는 것 같은데. 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저렇게 사람들이 무서워하게 만드는 것도 능력일 수도.

그리고 캐롤이 알기로는 후작은 원래부터 제정신은 아니었다. 물론 이자벨이 있었을 때는 목줄이 잘 매인 미친개였지만 지금은…….

“해를 거듭할수록 잘 숙성된 미친놈이 되어가고 있지…….”

새어 나온 혼잣말에 이자벨이 되물었다.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순진한 여자가 무슨 착각을 하는지 알려 줘야 한다는 양심과 후작에 대한 두려움이 캐롤의 안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소문 때문인가요? 왜 알렉스의 주위에 사람들이 안 다가가는 것 같죠?”

이자벨의 얼굴에 걱정이 드러났다.

캐롤은 정말 걱정할 게 얼마나 없으면 후작을 걱정하는 쓸모없는 짓을 할 수 있을지 감탄했다.

“아니면 혹시 알렉스의 출생 때문에…….”

물론 후작이 사생아였던 것을 비난하는 인간도 있었지만, 후작의 앞에서 그 말을 하는 인간은 없었다.

다들 목숨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다들 목숨이 귀한 것을 알기 때문에 딱히 후작에게 다가가지 않는 것뿐.

“그건 아니에요. 그냥…… 후작이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걸 다들 아니까요 ”

“알렉스가요?”

이자벨은 여전히 ‘낯을 가리는 후작’이라는 미친 소리를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캐롤은 어떻게 내숭을 부렸기에 저 말도 안 되는 믿음이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장님이 아니고서야. 그냥 딱 봐도 위험해 보이잖아.

“오면서 대화도 한 번 안 해 봤어요?”

이자벨에게 집착하는 꼴을 보아하니 보자마자 치마폭에 안겨서 안 나왔을 것 같은데.

열다섯이었을 때야 어리다고 넘어갔다지만 스물이 넘은 지금 그러고 있으면 누가 봐도 미친놈이잖아.

“여기 도착할 때까지 말도 안 하던데요. 오고 나서야 잠깐 대화하긴 했지만 너무 짧아서…….”

캐롤은 이상함을 느꼈다. 자기 누이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남자가 아무 말도 없이 이자벨을 두고만 봤다고? 사흘 굶은 개가 먹이를 앞두고 고개를 돌렸다는 말을 믿겠는데.

“그거 이상하네요……. 진짜 이상해.”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알렉스가 너무 커 버려서…….”

열다섯이었던 때랑 변한 건 확실했다. 그런데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보질 못했으니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가 있을 리가.

약간 애가 강압적으로 변한 것 같긴 한데…….

내 손목을 붙잡고 놓지 않는 알렉스의 손을 떠올랐다. 예전에도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걸 좋아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손자국이 남을 만큼 꽉 붙잡지는 않았는데.

내 몸에 손톱만 한 상처만 나도 울상이던 애였다. 내 손이나 팔을 붙잡을 때도 늘 부드럽게만 붙잡았었다.

내가 예전만큼 소중하지 않아졌나?

“원래도 딱히 작진 않았잖아요. 열다섯일 때도 이자벨보다 컸는데 무슨.”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캐롤은 내가 알렉스에 대해 굉장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우리 알렉스가 좀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해서 그렇지 가까운 사람들한테는 정말 잘해 주는데.

“아무튼 후작에 관해서는 대화가 안 되는 것 같으니 우리 다시 본론으로 좀 돌아가죠. 어떻게 된 거예요?”

다시 본론을 훅 치고 들어오는 캐롤의 말에 나는 한숨과 함께 테라스의 난간에 몸을 기댔다.

“난 차라리 우리 알렉스에 관해 얘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미안하지만 이자벨, 로윈 후작에 관한 얘기는 정말 내 관심 밖이거든요?”

그래도 한때는 약혼 얘기까지 오갔던 사인데 너무하네.

“오늘 당신을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공녀로 끌려갔던 여자가 적국의 태자비로 돌아온 건 또 무슨 일이에요?”

“아직 태자비는 아니죠.”

“아직? 그럼 곧 태자비가 정말 된단 뜻이네요. 난 어쩌면 당신이 샬덴의 왕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알아요?”

“후작이나 섭정공이나 샬덴의 왕을 정말 증오하던데요. 증거가 널려 있으니 추측도 쉬웠죠.”

미간을 찌푸린 캐롤은 목소리를 낮추고 좀 더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샬덴에서는 부자가 한 여자를 공유하는 미친 유행이라도 도나요?”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샬덴의 왕이 미친 작자이기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럼 샬덴 왕이 며느리 후보를 굳이 적국에서 골라 간 건가요? 그건 더 이상한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캐롤에게 말해도 상관이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겠는가. 난 이제 아를의 귀족 영애도 아닌데.

이자벨 로윈이라는 사람은 샬덴에 공녀로 끌려간 이후로 공식적으로 아를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뭔가 내 입으로 내가 사생아란 사실을 밝히는 건 참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알렉스한테가 아니고서는 처음이었다. 알렉스는 가족이었지만 캐롤은 글쎄. 친구인가?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아뇨. 사실 이제는 상관도 없는 문제이긴 한데…….”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캐롤을 똑바로 응시한 채 내 출생을 처음으로 남에게 고백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난 샬덴 왕의 사생아예요.”

내가 부정한 결과물임을 인정하는 건, 그게 사실임과 별개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샬덴의 태자는 양자고 나는 유일한 자식이니…… 캐롤? 많이 놀랐어요?”

캐롤은 거의 얼어붙어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까먹을 정도로 놀란 것 같았다.

물론 놀랄 만한 사실이기는 한데, 뭘 말해도 여유로울 것만 같던 캐롤의 경악은 새삼스러웠다. 그녀는 겨우 숨을 몰아쉬더니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

“이자벨. 지금 그러니까…… 그럼, 후작은……?”

설마 지금 알렉스의 태생도 의심하는 건가?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알렉스는 당연히 전대 로윈 백작의 자식이에요. 그렇게 닮았는데, 지금 알렉스를 의심하는 건가요?”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이자벨, 그러니까 지금, 당신 말에 따르면…… 후작과 당신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그렇다고 우리가 가족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에요, 캐롤.”

“같은 피가 흐르지는 않잖아요. 그쵸?”

“하지만 여전히…….”

“후작이 당신과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몰라요?”

캐롤은 뭐 때문인지 아까보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부채를 쥔 캐롤의 손끝이 살짝 떨리기 시작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왜지?

캐롤은 내가 사생아란 사실보다 알렉스와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가족이 나밖에 없으니까 그렇죠.”

“지금 그 사실, 후작도 알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충격을 받았는지 예전보다 거칠게 굴기는 하지만 점점 괜찮아지고 있어요. 아마 곧 예전처럼…….”

캐롤이 내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탄식했다.

“미친…….”

“캐롤?”

나는 무슨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구는 캐롤을 미심쩍게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로운 권력자 같았던 캐롤은 이제 무슨 피난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 섭정공도 아나요?”

“아뇨.”

“그럼 빨리 알려 줘요. 그리고 후작과 절대 단둘이 있지 말고, 그가 주는 건 아무것도 먹지 마요. 아니, 그냥 후작과 같은 공간에 머물지 않는 게 좋겠어요.”

쏟아지는 말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그녀는 알렉스를 당장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악당처럼 말하고 있었다.

“걘 내 동생이에요. 캐롤, 지금 무슨 말을…….”

“아뇨.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건 당신이에요, 이자벨.”

캐롤은 바깥을 확인하고 초조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얼른 따라와요.”

캐롤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과거의 자신을 잊은 건지 내 손목을 붙잡고 테라스 밖으로 나섰다.

“난 사절단이 있는 쪽으로 가야 해요, 캐롤.”

“여긴 아를의 수도에요. 샬덴의 사절단은 당신을 못 지킬걸요.”

여기가 전쟁터도 아니고 날 왜 지켜? 내가 뭔가 대단한 인물이라 암살범이 올 것도 아닌데.

나와 체구도 비슷한 주제에 힘이 얼마나 센지 나는 어느새 아를의 귀족들을 헤치고 거의 연회장의 중앙에 가까워졌다.

“캐롤. 난 돌아가야 한다니까요.”

작게 소곤거리는 내 말에 캐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캐롤은 나를 이끌고 마침내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는 곳 한가운데에 있는 남자를 불렀다.

“전하.”

환한 연회장에 서 있는 시그니티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여름 축제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 황금 같은 눈. 화려한 색채를 가지고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잡아끄는, 일상이 아닌 특별한 하루를 닮았다고.

“펠먼 양이군.”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무감정한 어투. 나는 살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약혼녀라고 하면서도 이름도 부르지 않는 건가?

“예. 전하. 이번 연회에 새롭게 사귄 영애를 한 분 소개해 드리고자 전하의 바쁜 시간을 빼앗았답니다. 괜찮으실까요?”

그제야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고, 모든 것을 경계하고 있었으며…… 조금, 무서웠다.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주위의 귀족들은 그런 그를 당연하다는 듯 눈치를 보고 전전긍긍했다. 금방이라도 그가 자신의 목을 날려 버리라고 명령할 것처럼.

나는 그때서야 실감했다. 나를 데려오기 위해 그가 벌였던 일들을.

“……펠먼 양이 원한다면, 한 번쯤은 시간을 내어줄 수도 있지.”

내게 쩔쩔맸던 장난스러운 청년은, 자기 사촌을 살해하고 숙부를 유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캐롤의 감사 인사와 함께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흰 손이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을까.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나를 플로어로 안내했고, 귀족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음악과 함께 발을 움직이면서 나는 주변을 천천히 확인했다. 시그니티는 두려움을 무기로 삼은 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다 봤어?”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한 주제에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나쁜 사람이 돼서 미안해.”

“……그럴 필요까지 있었어?”

유폐 당한 왕은 폭군이나 암군이 아니었다. 능력은 모자라도 성실한 왕이었고 딱히 실정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어, 벨. 난 힘이 필요했어. 그리고 숙부는 널 판 사람이었지.”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었잖아.”

“처음에는 그랬지.”

음악에 맞춰 서로 떨어져 돌다가 다시 손을 붙잡았다.

그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나와 가깝게 붙을 때마다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런데 사는 재미가 없었어. 하나도.”

나는 그 시선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

저건 어떻게 처리하지?

알렉스는 춤을 추고 있는 두 남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이자벨이 샬덴에서 온 여자라며 숙덕거리고 있었다.

“샬덴 사람들처럼 생기지 않은 것 같은데…….”

“펠먼 영애는 왜 저 여자를 섭정공께 소개한 거죠?”

“괜찮은 외모네요. 샬덴의 귀족인 게 좀 아까울 만큼.”

이들은 무슨 자격으로 이자벨에 대해 얘기할까. 감히 자기네들이 무엇이라고.

알렉스는 그들의 입을 찢거나 목을 자르는 상상을 하던 평소와 달리 이자벨에 대해 상상했다.

이자벨이 웃으면서 그의 품에 뛰어드는 상상이나. 아니면 이자벨이 그의 아래에 깔려서 우는 상상 같은 것들을.

누굴 죽이는 상상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다.

다만 이자벨이 곁에 없는 현실을 인지할 때마다 기분이 심각할 정도로 바닥에 처박히는 것을 뺀다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이자벨을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눈에 박아 넣고 있는 알렉스의 뒤로 늙수그레한 음성이 울렸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늙은 귀족 하나가 중얼거렸다. 분명 오래전에 한 번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침침한 눈을 문지르던 늙은 귀족은 젊은 손자의 부축을 받아 연회장을 떠날 때까지 찜찜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어디서 샬덴의 사람을 봤을까……. 분명 아는 얼굴인데. 아는 얼굴임이 틀림없는데 어디서……?”

늙은 귀족은 그날 자택으로 돌아가고 난 후에 또 며칠이 지날 때까지 자기가 어디서 그런 얼굴을 봤던 건지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여자를 봤던 것도 잊어버릴 즈음에야 노인은 문득 한 기억을 떠올렸다.

2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백작 영애의 결혼 소식으로 꽤 많은 사내가 안타까워했던 적이 있었다.

노인의 조카 또한 그 아쉬워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다고. 노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샬덴의 여자가 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지?

[3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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