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2)

6장. 남은 자들.

아를의 왕은 제 앞에 있는 미인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그에게는 끔찍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대공과 샬덴의 사이에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면 그 원인이 끔찍할 수밖에.

“폐하.”

길게 늘어트린 금발이 인상적인 영애였다. 이제 18살이 되었다고 했나. 묘하게 앳된 티가 남아 있었다.

보는 사람마다 족족 홀리는 독사 같은 미인을 생각해서 그런지, 영 낯설게만 느껴졌다. 금발에 녹안. 묘하게 순해 보이는 조합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 위로 브랜든은 어렴풋이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예의를 따져대는 사교계에서 눈에 확 튈 만큼 명랑하게 웃던 미인을. 그러고 보니 로윈 백작과 결혼했다고 했나…….

“이리 와도 되는 건가?”

로윈 백작이 제 딸의 일에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건 왕이 모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평생 가둬 두기라도 할 기세였던 백작을 생각하면, 그 딸이 지금 제 눈앞에 있다는 것에 왕은 약간 당황한 상태였다.

“쉬이 보내 주시지 않더군요. 그래서 멋대로 나왔습니다, 폐하.”

“저택 안에 있는 게 영애에게는 나았을 텐데.”

“폐하께는 제가 여기에 온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받아치는 말에 왕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선명한 녹안에 총기가 가득했다.

“상황을 알고 있나?”

에둘러 묻는 왕의 질문에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를의 귀족으로 어찌 감히 전쟁의 발단을 자초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은 샬덴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

“저 하나로 전쟁을 멈출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하겠습니다, 폐하. 하지만…….”

이자벨은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왕은 그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주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전쟁을 다시 하는 것보다야 열여덟 먹은 여자애한테 원하는 것을 쥐여 주는 게 낫다는 건 누구나 셈할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제 희생으로 로윈 가문에는 제 동생 하나만 남게 됩니다, 폐하. 감히 폐하를 원망할 문제는 아니나 가문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여…….”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왕은 금방 알아들었다.

브랜든은 이자벨 로윈이 제가 공녀로 가는 대가로 가문에 보상해 주길 원한다고 생각했다. 꽤나 아끼는 듯한 딸을 빼앗긴 군부대신을 달래 줘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대의 희생에 대해 로윈 가문에 어떤 보상을 내린다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가?”

“가문이 아닙니다, 폐하.”

이자벨은 쓴웃음을 삼키며 무례할 만큼 고개를 똑바로 들어 왕을 응시했다.

“제 남동생. 알렉스 로윈에게 제 희생에 대한 보상을 내려 주세요.”

로윈 백작은 수도의 주요 귀족 중 하나였다. 왕은 로윈 백작 가의 유일한 남아가 사생아 출신임을 모르지 않았다. 사이가 좋은 게 이상할 사이였다. 그런데 이런 요구라니.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그것뿐인가?”

이자벨은 지금까지 돌려 말하던 것을 치웠다.

“로윈 백작의 후계자가 제 동생임을 천명해 주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사 반역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한 번은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것은…….”

“전쟁보다는 나은 일이지요, 폐하. 그렇지 않습니까?”

왕의 고개가 한참 뒤 무겁게 끄덕여졌다. 이자벨은 물러나면서 속삭였다.

“약속을 지켜 주세요, 폐하. 반드시.”

이자벨 로윈은 그날부로 아를의 왕성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왕성에 머무르기 시작한 첫날, 샬덴과의 협상이 끝났다.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것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빠른 결말에 모두 당황했다. 샬덴의 사절단을 이끌던 파벨 후작도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했다.

“인사하지 마, 이자벨.”

자신의 딸뻘밖에 되지 않은 적대국의 영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파벨 후작에게 미하일은 딱 잘라 속삭였다.

“넌 앞으로 인사를 받아야 할 위치니까.”

이자벨은 제 어깨를 감싼 미하일을 손을 밀어냈다. 상처받은 듯 과장되게 찌푸려지는 얼굴에 그녀는 코웃음만 쳤다.

“용건이 없으면 갈게요.”

“서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게 용건이지, 이자벨.”

“샬덴의 왕은 그렇게 할 일이 없나요?”

날이 선 이자벨의 말투와 그럼에도 웃고 있는 미하일을 향해 파벨 후작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침묵했다. 미하일의 신분을 알면서도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여자는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였다.

“내 일보다 네가 소중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니?”

“내가 왜 그렇게까지 당신을 생각해야 하죠?”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진저리치는 여자의 목을 날리지 않는 미하일을 긴장한 채로 지켜보던 파벨 후작은 입을 딱 벌렸다.

관대함을 미덕이 아닌 어리석음으로 평하는 그의 황제는 그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 버린 여자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폐하, 괜찮으신지…….”

“붉은 계열이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렇지 않나?”

평생 봐왔던 것 중에 몇 안 되는 기분 좋은 얼굴로 황제는 웃었다.

“누굴 닮았는지…….”

중얼거리는 말에 파벨 후작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작은 차라리 호칭이라도 빨리 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분’은 너무 애매한 호칭이지 않은가.

이자벨이 순순히 굴복해 그와 함께 가기로 했다는 것만으로 미하일의 기분은 꽤 좋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샬덴과의 모든 협상이 종료되었다는 것과 이자벨이 궁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그니티의 기분은 저 밑바닥까지 처박혔다.

그는 알현을 피하는 왕을 닦달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시종들을 협박하고 회유해서 이자벨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이자벨을 찾아가는 일.

샬덴의 사절들이 묵는 숙소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자벨의 거처에 시그니티는 조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숙부가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는 아버지처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든가.

시그니티는 그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시녀 몇이 깜짝 놀라며 그를 막아섰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이자벨을 마주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사랑은 여전히 예뻤다. 그를 따라온 시녀들을 향해 조곤조곤 이르는 목소리도.

“괜찮아. 차를 내오렴. 저번에 폐하께서 선물로 주신 차가 좋겠다.”

“벨…….”

“앉아, 시그.”

티테이블에 앉아 맞은편을 향해 눈짓하는 이자벨은 태연해 보였다.

“왜 여기 있어?”

“그러게…….”

이자벨은 흐리게 웃었다. 그는 거칠게 의자를 빼서 주저앉았다. 목이 탔다. 당장이라도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나가자, 벨.”

“나 여기 내 발로 왔어.”

“그럼 갈 때는 내 손에 들려 나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이자벨에게만은 다정했던 말투가 들쑥날쑥 날뛰었다.

“그럴 수 있어?”

“……아니.”

우리 아가씨는 너무 잘 알지. 내가 네가 싫어하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거.

……제기랄.

“왜 여기 있어. 왜…….”

이자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초조함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뭐가 문제야?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제발. 벨. 가자.”

“난 샬덴으로 가게 될 거야, 시그.”

“누구 마음대로? 숙부께서 너한테 그러라고 하셨나?”

당장이라도 왕에게 달려갈 것만 같은 그를 향해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찻잔이 그들의 앞에 놓였다. 조용히 차를 따른 시녀가 물러났다. 단둘만 남자, 시그니티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누구도 너한테 명령할 수 없어, 벨.”

“난 아를의 귀족이야.”

시그니티의 입매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몹시 오만하게 속삭였다.

“한마디만 해. 그럼 난 널 위해 이 나라를 가질 거야.”

그런 족속들이 있다. 권력이 목적이 아닌 수단인 사람들이. 그는 왕위를 수단으로 치부할 만큼 사랑에 눈이 돌아 있었다.

“하지 마, 시그.”

“그럼 여기서 나가자, 벨. 응?”

달래듯 속삭이는 말에 이자벨은 제 약혼자를 찬찬히 살폈다.

태양 같은 남자였다. 아를 왕실이 자랑하는 적발이 그린 듯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남자. 착하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했으면, 그래서 날 잊었으면.

“시그. 너도 나한테 소중해졌나 봐.”

툭 뱉어지는 말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벨, 그게 무슨……?”

“전쟁이 터진다고 하니까, 알렉스 생각이 났어. 그다음은 엘리자베스 생각이 났고, 그다음은…… 네 생각이 났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눈짓하자 그가 목이 타는 것처럼 앞에 놓인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뜨거울지도 모르는데.

“난 전쟁이 싫어. 알렉스도 리지도, 너도 다치는 게 싫어.”

“그래서 혼자 희생하겠다고?”

그는 코웃음 치며 몸을 일으켰다. 이자벨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그녀는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널 희생시키느니 내가 죽는 게 나아, 벨.”

“네가 죽으면 난 많이 슬플 텐데.”

이자벨은 또 흐릿하게 웃었다. 우는 것 같이, 꼭 억지로 우는 것 같은 표정.

“안 죽을게. 네가 원하면 난 뭐든지 하잖아.”

“날 이대로 내버려 두는 건?”

“제발. 벨……. 내가 어떻게 네 문제에 가만히 있어…….”

이자벨은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약혼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태양 같은 남자였다. 애정을 쏟아붓다 못해 정말 질식할 정도로 사랑을 퍼부어 주는 남자. 인생에 이런 남자를 또 만날 수는 있을까?

“맞아, 시그. 넌 날 너무 사랑하니까…….”

시그니티는 순간 자신의 무릎이 꺾이는 걸 인지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시야가 거뭇하게 일그러졌다.

눈을 뜨려 애쓰던 그의 고개가 푹 꺾였다.

“그래서 그랬어. 미안해.”

이자벨은 그의 고개를 무릎에 뉘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창백한 얼굴의 시녀가 들어와 마시지도 않은 이자벨의 찻잔을 치웠다.

“조금만 자고 있어. 곧 다 끝날 거야.”

미안해. 그런데 네가 다치는 게 싫었어…….

날 위해 검을 들지 마, 시그.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시그티니 바르펜시아는 한참을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나갈 수 없는 방 한가운데에 있는 스스로를 자각했다.

그의 곁에는 이자벨 로윈이 없었다. 이자벨 로윈이 아를을 떠났다. 그는 이자벨 로윈이 아를을 떠날 동안 갇혀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손으로 인해.

* * *

바르펜시아 대공자와 연락이 끊겼다.

도무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대공자의 행방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백작가의 사생아인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로윈 백작도 왕의 명령으로 잠깐 수도를 떠난 상태였고, 그사이에 이자벨이 사라졌다.

상단의 정보원들을 굴려서 겨우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왕성. 그것도 샬덴의 사절단이 머무는 서궁이었다.

이자벨, 도대체 왜 이래요?

알렉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 좌절했다. 그러나 그가 속으로 계속 곪아 가는 것과 상관없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며칠 만에 모든 협상이 끝났고, 샬덴의 사절단은 귀국을 준비했다.

알렉스는 곧바로 눈치챘다.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고. 뭔가 원하는 것을 드디어 얻은 샬덴의 사절단은 이제 아를에서 머무를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여러 가지 정보들을 늘어놓은 뒤에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자벨, 그의 귀한 누이를 샬덴에서 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누이를 손에 넣자마자 떠나려고 하는 거다.

내 눈에 보물인 것이 남의 눈에도 보물임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자벨을 잃어버린다고?

“도련님…….”

신디아의 부름에 알렉스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 마지막으로 봤던 하늘은 시커멓게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침인가?”

그러나 지금 고개를 들어보니 환한 빛이 눈을 찔렀다. 알렉스는 스스로를 내려다보고 헛웃음을 뱉었다.

수련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이자벨의 방에 왔다. 그 뒤로는 사실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알렉스는 몸을 일으켰다. 사실 이자벨의 방이 아니라도 그녀가 떠오르는 장소는 수도 없이 많았다. 이 저택에서 이자벨과 그가 함께하지 않은 공간은 없었으니까.

항상 그의 앞에서 손을 잡아끌면서 하나라도 더 알려 주지 못해 안달 났던 누이. 작고 동그랗던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와 흔들리는 금발이 익숙했다.

이자벨은 늘 길잡이처럼 알렉스보다 앞서 걸었다. 그가 저택에 대해 이자벨보다 더 잘 알게 된 이후에도. 꼭 지켜 주려는 것처럼. 조금만 힘을 줘도 꺾일 것 같은 작은 몸으로.

이제 와서 하기에는 너무 늦은 생각이지만, 차라리 그가 이자벨의 오라비였으면 어땠을까. 지킴 받는 대상이 아니라 지켜 주는 사람이었으면, 그녀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안일하게도, 로윈 백작과 바르펜시아 대공자가 이자벨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살았지. 얼마나 편하게 살았으면 남을 믿었을까. 얼마나 편하게 지냈으면!

다른 사람을, 설사 사랑해 마지않는 이자벨이라 해도 믿어서는 안 됐는데.

아무도 믿지 말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났으면서, 곱게 자란 것들처럼 굴어서 잃은 거다.

이자벨을 만나고 사그라드는 듯했던 독기가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자기혐오와 타인에 대한 불신. 가진 것에 대한 집착. 생존에 대한 욕구. 양심 같은 것들.

아마도 이자벨이 싫어할 감정들이 그의 한구석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 * *

샬덴의 사절단이 떠나기 전날이었다.

아를의 왕실에서는 연회를 열었고, 과정이야 어땠든 전쟁을 종결했다는 데에 많은 귀족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참석했다.

전쟁 소식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던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들이 다시 등장했다. 오랜만에 화려하게 치장하고 뽐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샬덴의 사절단은 오히려 하도 소박해 시선을 끌었다. 사절단을 이끄는 파벨 후작만 고작 어깨에 은으로 수를 놓은 정장을 입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금방 사냥을 나갈 것처럼 가죽으로 된 조끼를 입고 있었다.

“전쟁만 아는 족속들이라니까요.”

“즐거움이라고는 모르는…….”

속삭이는 목소리는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 작았다. 샬덴의 사절단을 환송하는 연회라기에는 기이한 분위기였다.

아를의 왕은 사절단을 외면했고, 사절단 또한 저들끼리 가만히 모여 속닥거렸다.

기이한 대치가 계속되는 순간, 사교계에서는 본 적 없는 키가 큰 청년 하나가 연회장에 들어섰다. 조용히 들어섰다고 한들,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외모였다.

“누구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샬덴의 귀족인가요?”

“복식은 샬덴의 것이 아니긴 한데…….”

어딘가 날이 서 있는 아름다운 청년은 천천히 연회장을 훑었다. 눈을 마주쳤다고 생각한 영애 하나가 탄성을 흘렸다.

그러나 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두운 금발을 진주로 가닥가닥 엮어 늘어뜨린 미인이 청년의 팔을 붙잡았다.

전쟁 소식이 있기 전의 화려한 꾸밈새는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시선을 잡아끄는 여자를 귀족들은 금방 알아보았다.

캐롤 펠먼. 공녀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던 펠먼 후작가의 영애. 늘 주위에 사람을 몰고 다녔는데, 오늘은 혼자였다. 귀족들은 공녀로 끌려간다는 소문 이후로 그녀가 혼자 다닌다며 소곤거렸다.

꽤 가깝게 붙어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연인처럼 보였다.

“펠먼 영애와 함께 있는 청년이 누군지 아나요?”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펠먼 영애는 아직 약혼도 한 바가 없을 텐데.”

“젊은이들의 가벼운 만남일 수도 있지요.”

“펠먼 영애가 상대해 줄 법한 가문의 영식이…….”

연회장의 문가에서 시작된 수군거림이 점점 더 퍼져 나갔다.

캐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빌어먹을 미남을 향해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당장 따라 나와, 알렉스 로윈.”

“내가 왜?”

이전보다 더 위험한 기색을 품은 눈이 캐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캐롤은 알렉스의 팔을 더 꽉 붙잡았다.

“넌 여기 있으면 안 되니까. 일단 나이부터가…….”

알렉스는 캐롤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알렉스의 시선이 샬덴의 사절단들이 모여 있는 곳에 박혔다.

캐롤은 꼭 이 사태를 예측한 것 같은 이자벨의 말을 떠올리고 신경질적으로 알렉스를 잡아끌었다.

물론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캐롤은 그를 움직일 수 있는 마법 같은 단어를 알았다.

“이자벨, 이자벨이 보고 싶지 않아?”

알렉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캐롤은 그 느릿한 움직임에 침을 삼켰다.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맹수를 붙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캐롤은 이 짐승의 주인도 아니었다.

“내 앞에서 누님을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이자벨이 널 보고 싶어 해.”

“……정말?”

알렉스는 누구 하나 살해할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이면 당신 큰일 날 텐데.”

캐롤의 의중을 가늠하듯 가늘게 뜬 눈에 의심스러운 기색이 배어 나왔다. 그녀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와.”

꼼짝도 하지 않은 아까와 달리 순순히 끌려오는 알렉스를 이끌고 캐롤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소문 따위는 사실 지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캐롤은 낮보다 밝고 화려한 연회장을 지나 정원 깊숙이 발걸음을 옮겼다. 갈수록 등이 적어지면서, 주변이 점점 어두워졌다.

“어디까지 가지?”

묵묵히 따라오던 알렉스의 물음에 캐롤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이자벨이 있는 곳까지.”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자벨의 이름에 정신이 팔려 캐롤을 따라왔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다 왔네.”

그는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캐롤은 어딘가 눈치를 보듯 주위를 살피다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알렉스는 캐롤의 행동 따위를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설사 캐롤이 갑자기 옆에서 쓰러진다고 해도 알렉스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알렉스의 앞에 이자벨이 있었으니까.

“알렉스.”

이자벨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장식 하나 없이 늘어트린 금발이 정원등의 불빛에 환했다.

알렉스는 손을 뻗어 이자벨의 어깨를 붙잡았다.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의 감촉. 두꺼운 숄의 감촉. 그 아래에 느껴지는 맥박이 뛰는 몸.

알렉스는 그대로 이자벨을 확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진짜 누님이네요.”

“가짜 누님도 있어?”

농담처럼 속삭이는 말에 알렉스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마치 없던 일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아뇨, 없죠. 누님은 하나뿐이니까.”

알렉스는 말하면서 드는 불안감에 이자벨이 숨도 못 쉴 만큼 강하게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같이 갈 거죠? 저랑 같이 돌아갈 거죠? 그러려고 지금 온 거죠?”

“알렉스…….”

“싫어요. 같이 가자는 말 아니면 안 들을래요.”

놔주지 않을 것처럼 꽉 안은 팔에 이자벨은 알렉스의 등을 도닥였다. 여전히 다정했다. 그가 원하는 말을 해 주지 않는 것만 뺀다면.

“그냥 내가 조금 멀리 시집갔다고 생각하자. 알렉스.”

“싫어요…….”

“편지도 자주 할 거고, 어쩌면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흐르고는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알렉스, 너무 걱정 말고…….”

알렉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밀어내는 이자벨을 더 꽉 붙잡았다. 이자벨은 알렉스의 강압적인 태도에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당신이 약속했잖아…….”

알렉스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두워 보이지가 않았다.

“누님이 없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간다고 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이자벨은 오싹함을 느꼈지만, 착각이라 생각하고 무시했다.

그녀에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자벨은 준비했던 말을 쏟아내면서 차마 알렉스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절대 위험한 짓을 하면 안 돼. 이상한 짓도 하지 말고. 스스로를 다치게 하지도 말고.”

알렉스, 네 생각만 해. 너 스스로만 생각해.

이자벨은 문득 지금 자신의 나이가 과거에 알렉스가 죽었던 나이라는 걸 떠올렸다. 참았던 눈물이 떨어졌다.

알렉스, 나 진짜 네가 성인이 되는 날을 기다렸어. 본 적 없는 19살과 20살의 너를 상상할 때, 그 옆에 내가 있을 걸 의심한 적이 없었어.

미안해, 알렉스. 그런데 나도 정말 네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었어…….

남매라고 보기에는 지독하게 닮지 않은 남녀를 지켜보던 미하일은 나무에 등을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악당이 된 건가?”

무슨 대화가 그렇게 많은지.

미하일은 알렉스 로윈이 싫었다. 아를의 모든 것이 싫었지만, 그중에서 특히 로윈과 관련된 건 더 싫었다. 어찌 되었건 헤더는 헤더 구드윈이 아니라 헤더 로윈으로 죽었으니까.

미하일은 헤더를 꼭 닮은 딸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로윈 백작을 닮은 아들과 붙어 있는 게 점점 더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하일은 거슬리는 걸 참지 않고 살아온 지 이미 20년여 년이 되었다.

“……이자벨.”

미하일은 검집을 벗기지 않은 검을 빌어먹을 로윈 백작을 닮은 아들놈에게 겨눴다. 이것만으로도 미하일은 최대의 관용을 베푼 셈이었다. 죽이지 않고 위협만 하겠다는 뜻이니까.

“이리와.”

방금 전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존재의 등장에 알렉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품에 안긴 이자벨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리 와야지, 아가.”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얼굴에는 감정이 없었다. 겨눠진 검에도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알렉스는 저를 힘껏 밀어내는 이자벨을 더 단단히 고쳐 안았다.

“놔. 알렉스. 놔줘. 제발…….”

로윈 백작과 비슷한 연배의 남자는 이자벨을 향해 웃었다. 이자벨이 그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안 돼! 안 돼요. 얘 건드리면 나 못 살아요. 죽어 버릴 거야. 아무 짓도 하지 마요.”

“이리 와서 얘기하렴, 아가. 네 말이면 내가 뭘 못 들어줄까.”

알렉스는 그 순간 깨달았다. 깨닫지 못하는 게 바보였다. 이 남자가 바로 그의 누이를 빼앗아가려는 적이었다.

“알렉스, 착하지. 놔. 얼른 놓자. 응?”

안절부절못하는 이자벨을 안은 채 알렉스는 미하일을 노려봤다.

“당신 누구야.”

“이자벨. 언제 올 생각이니?”

미하일은 완전히 알렉스를 무시했다. 건성으로 잡은 검만이 알렉스를 겨누고 있을 뿐, 미하일의 시선은 계속 이자벨을 향해 있었다.

“알렉스. 제발…….”

“싫어요.”

이상한 대치였다. 이자벨은 알렉스를, 알렉스는 미하일을, 미하일은 이자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치가 깨진 것은 이자벨이 알렉스의 귀를 물어뜯은 후였다.

“읏!”

찢긴 귀의 아픔보다 제 누이가 저를 공격했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알렉스가 짧게 비틀거렸다. 이자벨은 그 틈을 타 그대로 알렉스의 품에서 빠져나와 미하일에게로 달려갔다.

“알렉스는 건드리지 마세요. 나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몸의 균형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달려오다 넘어진 주제에 이자벨은 미하일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미하일은 혀를 차며 이자벨을 한쪽 팔로 안아 올렸다.

“아가,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란다.”

미하일은 저를 향해 달려드는 알렉스를 힐끗 확인하고 검을 그대로 던져 버렸다. 검집째로 날아온 검에 어깨를 맞은 알렉스가 순간 중심을 잃었다.

“하지 마!”

“공격이 아니라 방어란다, 아가.”

어깨를 붙잡고 일어난 알렉스가 제 앞에 떨어진 미하일을 검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알렉스의 목덜미에 검 끝이 닿았다.

알렉스는 제게 검을 겨눈 기사를 확인했다. 최소한 셋은 넘는 기사가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샬덴의 복식을 숨기지도 않은 기사들. 그리고 그 기사들을 부리는 것 같은 남자.

“알렉스, 알렉스! 날 봐.”

이자벨은 알렉스를 향해 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억지웃음이었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알렉스. 돌아가…….”

당장 울 것 같은 얼굴로 어설프게 웃으면서, 그의 누이는 아주 절박하게 속삭였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또 만날지도 모르잖아. 응?”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자벨의 미소가 더 어설퍼졌다.

“제발. 알렉스…….”

“싫어요.”

그는 제가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는 걸 알았다.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뿐인 스스로가 싫었다.

“같이 가요, 누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울음 섞인 사과와 함께 알렉스는 날카로운 통증이 제 팔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인지했다.

살갗이 벌어지고 피가 튀는 것과 함께, 고작 그 정도 상처로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이 서너 개로 겹쳐서 흔들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알렉스의 시야는 까맣게 점멸했다.

* * *

시그니티 바르펜시아가 정신을 차린 것은 샬덴의 사절단이 떠나고도 이틀이 지난 날이었다.

“제기랄…….”

그는 멍청해진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희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던 머릿속이 말끔해짐과 동시에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제대로 힘이 돌아오지 않은 몸이 비틀거렸다. 그는 겨우 침대 기둥을 잡고 고개를 털어냈다.

벨. 내 아가씨…….

느린 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그는 문을 열고 굳었다.

“처남…….”

문가에 기대 서 있던 알렉스는 시그니티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 소리를 할 수도 없는 처지일 텐데.”

“이자벨은…….”

“당신이 자빠져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아?”

까맣게 죽어 가는 시그니티의 얼굴이, 알렉스는 우스웠다. 그럴 거면 제대로 지켰어야지.

그건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죽지도 못해 살 것을 알았으면 차라리 지키다 죽었어야지.

“샬덴의 왕이야.”

알렉스는 절망에 빠져드는 시그니티를 향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샬덴의 기사들을 멋대로 부리는 남자였다. 그리고 샬덴의 고위 귀족 중에는 그런 외모를 가진 이가 없었다.

알렉스는 이틀 동안 온갖 정보들을 뒤졌다. 이자벨을 앗아간 그 남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알기 위해.

샬덴의 왕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게 아니었다. 알렉스는 시그니티의 붉은 머리를 힐끗 확인했다.

아를의 왕족은 주로 붉은 머리를 타고난다. 게다가 본인 스스로도 태양을 닮았다 여기는 붉은 머리를 자랑스러워했기에 왕족들은 붉은 머리를 가진 귀족들과 결혼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샬덴의 왕족은…… 타고 식어 버린 재처럼 회색 머리를 주로 타고난다.

샬덴의 고위 귀족 중에, 그중에서도 왕실의 피가 섞인 이들의 절반은 노인들의 것과 같은 회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20여 년 전의 사건으로 직계에 가까운 샬덴의 왕족들은 몰살당했다.

고위 귀족도 아닌데 샬덴의 기사들을 멋대로 부리는 회색 머리의 남자? 샬덴의 왕밖에 더 있겠는가.

적국의 왕이 적진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 외에는 이 모든 일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처음 그 사실을 깨닫고 끔찍한 무기력감에 휩싸였다.

샬덴의 왕이 고작 귀족 영애 하나를 데리러 직접 적국의 수도에 들어왔다고? 그런 인간한테서 이자벨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누님을 데려간 남자, 샬덴의 왕이라고.”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 지금 무슨 상황인지도 알겠군.”

“처남. 지금…….”

알렉스는 시그니티의 말을 잘랐다.

“이제 당신은 나를 그렇게 부를 자격이 없잖아, 대공자.”

둘은 대치하듯 서로를 살폈다. 시그니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왔지?”

“당신이 절망하는 꼴이 보고 싶어서.”

나만 절망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나 보지. 자살 시도 말고 색다른 짓을 좀 더 해 보고 싶었거든.

* * *

샬덴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사절단이 출발할 때부터 마차에 거의 갇힌 것처럼 나가지 않고 있었다.

“아가, 걷는 법을 잊어버린 거니?”

“나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마차의 창을 연 채 지루한 얼굴로 턱을 괴고 밖을 응시했다. 미하일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을 리가. 나가는 순간 주변을 둘러싼 인간들의 신경이 나에게 쏠리는데.

샬덴의 인간들은 이상했다. 사절단으로 이상한 인간만 뽑은 건지, 아니면 샬덴의 인간들 자체가 원래 이런 건지.

벙어리인 것처럼 말이 없었고, 미하일의 움직임 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하는 행동을 보고 경악하면서도 저들끼리 소곤거리는 말 하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지만, 인간들인데 꼭 잘 길든 동물들 같았다.

“……머리를 땋아 줄까?”

“싫어요.”

“헤더는 내가 머리를 땋아 주는 걸 좋아했는데……. 짧은 머리를 나만큼 잘 땋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했지.”

나는 한 귀로 그의 말을 흘렸다. 엄마와 이 남자의 연애 이야기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 아를을 벗어나죠?”

“내일 국경을 넘을 거란다, 아가.”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가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미친놈이란 두려운 법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넌 샬덴에서 가장 귀한 여자가 될 거야, 이자벨. 네 엄마가 당연히 가져야 했던 것들이 널 위해 준비되어 있단다.”

“……난 엄마가 아니에요.”

내 말에 미하일은 웃었다.

“그녀의 딸이지.”

나는 일부러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물었다.

“그렇게 엄마를 사랑했어요?”

“그래.”

“그럼 왜 바로 엄마를 데리고 가지 않았어요?”

그랬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내 질문에 미하일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땐 사랑인 줄 몰랐거든.”

엄마도 아니고 엄마의 딸에게 이렇게 집착할 만큼 돌아 있으면서 그때는 몰랐다고?

“아주 많이 좋아하는 줄만 알았지. 네 엄마는 그런 착각을 할 만큼 예뻤으니까.”

미하일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찌푸렸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헤더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상을 하지.”

그의 분위기가 변했다. 나는 숨을 죽였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가 무서웠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고.”

미하일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그는 나를 통해 엄마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날 죽일 것만 같았으니까.

“그럼 내가 좀 더 빨리 정신을 차렸을 텐데.”

좀 더 빨리 미쳐 버렸을 텐데.

나는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련 남은 남자의 독백에 시선을 주고 싶지 않았다. 창밖으로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루한 마차 생활이 끝난다는 즐거움 따위는 없었다. 나는 이 마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미하일이 지배하는 땅에 발을 디디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순순히 마차에서 내린 후 하나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파벨 후작은 쩔쩔매고 있는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앞에 얌전히 서 있는 미인은 아무 말이 없는 후작을 이상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후작 각하. 저는 어디로 가면 되나요?”

전혀 경칭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이리로.”

왕이 아끼는 여자였다. 왕후의 자리를 주겠노라고 말한 여자. 하지만 지금은 그저 공녀로 끌려온 적국의 영애에 불과했다.

후작은 그들의 왕이 하루라도 빨리 이 여자에게 알맞은 직위를 내리길 기도했다.

사절단에 속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이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단 그의 왕이 이 여자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왕을 싫어했다.

약혼자와 가족을 두고 적국으로 끌려온 심정이 오죽하겠냐마는, 그는 이자벨이 미하일을 향해 독한 말을 내뱉을 때마다 공포에 질렸다.

그러나 미하일을 향해서 그리 독설을 내뱉던 이자벨은 놀랍도록 순순히 후작의 인도에 따라 전리품들 사이에 섰다.

후작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아를에서 뜯어온 공물들과 전리품 사이에 가만히 서게 된 이자벨은 이 샬덴의 왕성에서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화려함보다는 상대를 찍어 누르는 위압감으로 충만한 샬덴의 왕성은 일종의 무기 같은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다.

황금으로 섬세하게 수놓은 장신구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곳. 샬덴이 이번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 중 살아 있는 것은 저 이질적인 여자가 유일했다.

시종들이 각자 물건들을 짊어졌다. 파벨 후작은 제 바로 뒤에 선 여자를 몇 번이나 돌아봤다.

마침내 대전의 문이 열렸다.

궁중 악단의 화려한 연주로 장식되는 아를과는 달리 샬덴의 왕성은 침묵으로 휩싸여 있었다. 시종들의 발걸음 소리조차 어지럽지 않고 일정했다.

후작은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왕이 왕궁을 벗어나 적국에까지 다녀왔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설사 알더라도 모른 척 굴어야 하는 비밀.

“폐하의 은혜를 받아 무사히 귀환했사옵니다.”

미하일은 끝도 없이 늘어선 시종들의 앞에 선 이자벨을 보고 웃었다. 왕의 미소에 놀랄 귀족들이야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이번 전쟁으로 아를이 지불한…….”

황금 갑옷 스무 벌, 운석으로 만든 검. 아를의 대장기 여섯 개. 은 오십 상자……. 줄줄이 이어지는 말에 왕은 관심 없다는 듯이 팔걸이만 두드렸다.

샬덴의 귀족들은 대전의 문이 열린 순간부터 왕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열여섯? 열다섯? 어려 보이지만 미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소녀였다.

음산할 만큼 말수가 적고 웃지 않는 샬덴의 사람들은 이자벨을 보고 나이를 제대로 짐작하지 못했다.

아를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진 미인은 샬덴의 인간들 눈에는 제 나이보다 어려 보일 수밖에.

입을 꾹 다문 이자벨의 뺨은 찬바람을 맞아 붉었다. 그녀는 점점 집중되는 시선에 눈을 내리깔았다. 거기에 못마땅해하는 미하일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를에서 바친 공녀로, 아를의 로윈 백작 가문에서 바친 이자벨…….”

“그만.”

왕은 팔걸이를 강하게 내려쳤다. 무서운 침묵으로 대전이 가라앉았다.

“이자벨로 충분하지. 그렇지 않나?”

파벨 후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왕의 말에 동의했다.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왕은 그 말에 웃으면서 기록관을 찾았다.

“아를에서 온 공녀에 대한 기록은 전부 삭제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샬덴의 귀족들은 침묵만 하고 있었다. 이자벨은 그 고요 속에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네가 있던 가문을 멸문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자비를 베푼 셈이란다, 아가.”

이자벨을 다정하게 어르는 미하일의 말에 몇 명의 귀족들은 헛숨을 들이켰다.

“그랬다가는 내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걸 알기에 그랬겠죠.”

그녀의 무례에도 미하일은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웃었다. 이자벨에게 미하일은 이상하게 자주 웃는 사람이었다.

“이리 오렴, 이자벨.”

이자벨은 미하일의 말에 주위를 살폈다. 하얗고 파랗게 질린 귀족들을 배경 삼아 그나마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던 파벨 후작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앞에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안 가면 어떻게 되나요?”

“한 번 시험해 보련? 누구 목이 떨어질지.”

이자벨은 욕설을 삼키면서 왕좌를 향해 올라갔다.

미하일은 이자벨이 그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왕좌에서 일어났다.

“폐하!”

파벨 후작의 외침을 들었을 때, 이자벨은 그녀가 왕좌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당혹에 물든 샬덴의 귀족들이 내려다보였다.

그녀를 밀어 왕좌에 앉힌 미하일은 일어나려고 하는 이자벨의 어깨를 붙잡아 눌렀다.

“놀랐니, 아가.”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은 만족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익숙해지렴. 원래 네 자리였던 것처럼.”

* * *

이자벨의 충격적인 등장 소식에 게일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삐끗했다.

“진심으로……? 진짜?”

“제가 전하께 거짓을 고할 이유가 있을까요?”

보좌관인 키로프의 무뚝뚝한 답변에 게일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쌓인 서류가 기우뚱거렸지만, 게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디 가십니까?”

“폐하께.”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말을 가려 하는 법을 모르는 보좌관은 지금 귀족들이 떠드는 내용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폐하께서 결혼을 하시고 아이를 보신다면, 전하를 가장 먼저 처리하고 싶으실 테니까요.”

“결혼? 폐하께서 그 아가씨랑?”

뭐 말도 안 되는……. 게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보좌관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무슨 오해가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일은 애초에 이자벨을 왕비로, 나아가 태후로 만들기 위해 뽑은 태자였다.

미하일이 일부러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닮았으면서도 잘생긴 인간을 가려 뽑은 결과였단 말이다.

게일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넓디넓은 궁에서 마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이는 왕뿐이었기에 게일은 그저 부지런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본궁에 들어서자마자 시종장이 찾았다는 듯이 그를 안내했다. 기가 질릴 만큼 넓은 방이었다.

말을 타고 다녀도 되겠군. 게일은 넓은 방을 꽉 채운 물건들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 뭐가 마음에 안 드니?”

하얗게 질린 시녀들이 수십 벌의 드레스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피곤과 짜증으로 물든 이자벨이 시위하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요. 폐하, 차라리 제가 혼자 절망을 곱씹을 시간을 주시는 건 어떨까요?”

혼자 남겨 두면 절망하며 울기보다는 미하일의 암살 계획을 짤 것 같은 냉랭한 목소리였다.

“폐하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아버지라고 불러 달라는 은근한 권유에 이자벨은 코웃음 쳤다. 냉랭한 이자벨의 기색에 떠는 건 시녀들이었다.

게일은 자신이 예상했던 상황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풍경에 혀를 찼다.

“폐하.”

미하일은 게일의 등장에 이자벨을 향해 물었다.

“……아가, 기억하니?”

이자벨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자벨의 태도에 미하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게일은 뒷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샬덴의 왕은 쓸모없는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게일의 쓸모는 하나였다. 이자벨을 왕비로 만들어 주는 것.

“결국 다시 볼 거라고 했잖아요, 이자벨.”

게일은 일부러 다정하게 이자벨에게 속삭였다.

“헛소리인 줄 알았죠.”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알았겠네요. 샬덴은 어때요?”

미하일은 마치 시험이라도 보는 것처럼 찬찬히 게일을 훑었다. 의자에 늘어지듯 앉아 있던 미하일은 이자벨과 게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느리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춥죠.”

“단지 그뿐?”

“최악이라는 말을 할까요?”

“아뇨. 그랬다가는 여럿의 목숨이 위험하니까 조금만 참아 줘요.”

이자벨의 경멸을 담은 시선이 미하일을 훑고 지나갔다. 게일은 오싹해졌다. 그는 빠르게 이자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샬덴의 정원을 소개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이자벨.”

이자벨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미하일을 향해 눈짓했다.

“제가 방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저도 알 수가 없어서요.”

“폐하. 제가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미하일은 씩 웃으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게일과 이자벨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꼭 헤더와 그의 옛날이 생각났다.

“정원까지라면 허락하지.”

이자벨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미하일은 그제서야 아직 게일과의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처음으로 밖에 나갈 기회를 얻은 이자벨은 미하일의 뒷말을 들을 생각이 없이 바로 넓은 방을 가로질러 나가 버렸다.

심지어 게일조차 버리고.

게일은 미하일에게 인사하고 이자벨을 찾아 나섰다. 어차피 아를처럼 정원을 꾸미는 데 큰 공을 들이지 않는 샬덴에서는 본궁의 정원이라 할지라도 그리 크지가 않았다.

몇 분도 걸리지 않아 이자벨을 찾아낸 게일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싫은 티를 내십니까?”

“당신이라면 좋겠어요?”

이자벨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의지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삶이란, 끔찍하다고요.”

“이곳에서 당신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이곳에서’ 말이죠.”

이자벨은 게일을 향해 코웃음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일을 향한 이자벨의 얼굴에는 그런 뜻이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미 당신은 여기에 있고, 돌이킬 수는 없는데.”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고 살라고요?”

이자벨은 게일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말했다.

“난 그렇게는 못 살아요.”

“그럼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해요.”

게일은 웃었다.

“난 사람들이 싫습니다, 이자벨. 하지만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숨기죠.”

게일의 인생은 늘 살기 위해 했던 선택지의 나열이었다. 그건 그가 태자가 된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이자벨과 결혼을 해야만 했다. 아니면 살해당할 테니까. 이자벨이 여기에 적응하지 못할수록 괴로워지는 것은 이자벨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은 똑똑하니까 알잖아요. 이자벨. 당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폐하께서 원하는 걸 줘야 하죠.”

이용해요, 이자벨. 폐하께서는 당신이 하는 말이면 뭐든 들어줄 테니까. 가끔 당신 어머니처럼 웃고, 입고, 그가 원하는 말을 해 줘요. 어쩌면 당신에게 자유를 줄지도 모르니까. 짧은 순간의 자유라도, 지금 당신 원하는 건 그거잖아요.

폐하를 이용해요, 이자벨.

* * *

알렉스는 로윈 백작이 이자벨을 잃어버린 것에 감정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자벨에게는 좀 더 무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로윈 백작은 감정이란 게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헤더…….”

알렉스는 멍청하게 우는 로윈 백작을 멍하니 지켜봤다.

알렉스는 이자벨이 떠나고부터 이자벨의 방에서 살았다. 차마 물건은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바닥이나 구석에 몸을 기댄 채 넋을 놓고 지냈다. 로윈 백작이 저택에 돌아왔다는 소식도 그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신디아는 정신을 놓은 것 같은 알렉스를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다 음식을 놓고 사라졌다.

뭔가를 먹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알렉스는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로윈 백작이 이자벨의 방에 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아버지라고 여겨본 적도 없는 남자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한 발자국도 더 들어오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헤더?’

알렉스는 멍한 머릿속에서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이자벨을 낳은 어미의 이름.

로윈 백작은 그 이름만 부르면서 울었다. 이자벨의 방인데, 그 이름만 부르면서.

밤새 석상처럼 가만히 서서 울던 로윈 백작은 새벽의 빛이 들어올 때쯤 딱 한 번, 이자벨의 이름을 속삭였다.

하루뿐인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은 매일 계속되었다. 알렉스는 넋을 놓고 이자벨의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로윈 백작은 밤마다 이자벨의 방에 와서 울었다.

다른 거라고는, 로윈 백작이 부르는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헤더의 이름만 부르던 백작은 하루가 갈수록 이자벨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럴 거면 왜 그렇게 이자벨을 대했지?

멍한 정신으로 생각하던 알렉스는 순간, 제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대로 엎어진 알렉스는 다음 날 아침, 신디아의 비명과 함께 발견되어 강제로 자신의 방 침대로 옮겨졌다.

깨어난 알렉스는, 자신이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새 야윈 듯한 로윈 백작이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가 눈을 뜨자 망설임 없이 떠났다.

알렉스는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계속 잠을 자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았다. 꿈에서는 좋았던 일들만 나왔으니까.

그런 그를 바꾼 것은 샐리였다. 이자벨의 하녀였던 샐리는 알렉스에게도 익숙한 존재였다. 그녀는 로윈 백작이 명하지 않았음에도 이자벨의 방을 계속 관리했다.

이자벨이 떠나고 다른 임무를 배정받았으면서도, 자신의 일이 끝나면 금방이라도 이자벨이 돌아올 것처럼 이자벨의 방을 관리했다.

로윈 백작과 비슷한 연배인 샐리는 절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지 않는 알렉스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돌아오실 거예요, 반드시.”

샐리는 그 말이 헛된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알렉스가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가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자기밖에 모르고, 감정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아가씨가 도련님을 만나고서부터 변했다. 샐리는 그녀의 아가씨가 도련님이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헛된 희망이라도, 희망은 사람을 살게 만든다.

그러나 샐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알렉스가 생각보다 더 이자벨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돌아오지 않으면?”

“그럼 돌아오게 만드세요. 아가씨는 살아 계시잖아요. 돌아가신 게 아니잖아요.”

샐리의 말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죽은 딸을 가슴에 묻은 것처럼. 떠난 남편을 용서한 것처럼.

그러나 알렉스는 그 말에 처음으로 방 밖을 나섰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대단한 권력이나 귀한 혈통, 그 무엇도.

알렉스 로윈이 가진 것들은 모두 이자벨 로윈이 준 것들이었다. 그래서 빼앗긴 거다.

쏟아지는 햇살이 오랜만에 눈을 파고들었다. 찌르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시린 눈에 물기가 찼다.

그래도 알렉스는 울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린 채로 끝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열다섯의 끝이었다.

* * *

대공은 완전히 넋을 놓고 있는 자식을 향해 혀를 찼다.

빈 찻잔을 계속 입에 가져가는 꼴이 지금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제 약혼녀를 보내고 1년째 저런 상태였다.

대공은 찻잔을 아들의 손에서 빼냈다. 빈손으로 헛손질을 몇 번 한 시그니티는 얌전히 손을 내렸다.

“계속 그럴 셈이냐?”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래. 네가 그러면 네 엄마가 걱정할 테니까.”

시그니티는 대공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미치도록 부러웠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곁에 둔 아버지가.

“부러우냐?”

“예. 아주 부러워요, 아버지. 아주…….”

시그니티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대공은 말없이 자리를 피해줬다. 다 큰 자식이 우는 꼴을 제 부모에게 보여 주고 싶을 리가.

이자벨이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시그니티는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차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평생을 이렇게 앓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년이었다. 1년 동안 시그니티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칩거에 들어갔다. 가족들을 제외한 이들은 그를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1년 동안의 칩거를 깬 손님이 방문했다.

한 번 본다면 도무지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남자였다. 웬만한 남자들보다 키가 큰 시그니티를 내려다볼 정도로 큰 남자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폐인이 다 됐군.”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시그니티는 단박에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처남.”

그가 이 남자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다. 특히 제 누이 앞에서는 자기 나이보다 어린 것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꼴이 키만 큰 어린애였는데…….

“……이제 열여섯? 열일곱?”

“알 필요 있나?”

“왜 왔지?”

알렉스 로윈. 그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전 약혼녀의 동생은 지나치게 많이 변해 있었다. 목소리는 지독히 낮아졌고 얼굴선도 제법 각이 져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단발에 가까웠던 머리는 짧아졌지만, 머리가 그대로였다고 해도 한 눈에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했다.

“궁금해서.”

“뭐가?”

“아직도 이자벨이 그리운지.”

“너한테 말해 주고 싶진 않은데.”

원래부터 좋은 사이도 아니었다. 시그니티는 빈정거리듯 말끝을 끌었다.

“왜? 여전히 너만 괴로운 게 아닌 걸 확인하고 싶나?”

알렉스는 말없이 눈썹만 가볍게 찡그렸다.

시그니티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만사가 피곤했다. 귀찮은 것 투정이었다.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나가.”

그는 손을 휘저었다.

“이자벨을 봐서 방문을 받아 주긴 했지만 거기까지야. 난 지금 아주 피곤해. 그러니까 나가, 알렉스 로윈.”

“그 마음,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내키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알렉스의 말에 시그니티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날 모욕하려고 온 거면 성공했다고 해 줄게. 그러니까 그대로 꺼져 버려.”

알렉스는 지친 얼굴로 눈을 감는 시그니티를 내려다봤다.

늘 짜증 날 정도로 웃는 상이었던 얼굴은 피로와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날카롭고 예민한 기색이 온몸에 배어 나왔다.

이 인간도 이자벨을 못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길 바랐으면서도 그러고 있는 꼴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시그니티 바르펜시아는 이자벨의 사람이었다. 그녀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이자벨을 되찾고 싶지 않아?”

“……알렉스 로윈.”

시그니티는 결국 눈을 떴다. 씹어 뱉듯이 알렉스를 부른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경고했다.

“날 자극하지 마. 더 이상 널 봐줄 이유도 없으니.”

“왜. 이자벨을 아예 포기했어?”

느릿한 목소리가 시그니티를 비웃었다. 시그니티는 참지 못했다. 사실, 참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알렉스가 한발 더 빨랐다. 그는 일어난 시그니티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였다. 큰 소리와 함께 벽에 붙어 있던 액자가 떨어졌다.

“잊을 수 있겠냐고 묻는 거야, 대공자.”

시그니티는 과거와 반대가 된 상황에 쓰게 웃었다. 빌어먹게도 잘 자랐군.

“네 대답은?”

검은 머리카락과 회색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이자벨과는 전혀 닮지 않은 그녀의 동생이었다. 한 군데라도, 작게라도 닮았다면 덜 거슬렸을 것을. 어쩌면 이렇게 닮지 않았을까.

“내가 잊을 수 있을 것 같나?”

“내 대답도 마찬가지야. 그걸 들으러 왔나?”

알렉스는 그 대답에 처음으로 웃었다.

즐거워서 짓는 웃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잔인하기까지 한 미소였다.

“그럼 왜 가만히 있지?”

“뭘 할 수가 있어서? 이번에 색다른 자살 방법이라도 발견했나 보지?”

자포자기 한 채로 빈정거리는 시그니티를 향해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전쟁으로 잃었으면, 전쟁으로 찾아와야지.”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어?”

“당신이 왕이 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그 순간, 시그니티의 숨이 멈췄다. 순식간에 경계를 세우는 시그니티를 향해 알렉스가 속삭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든 사실 당신은 상관 안 하잖아, 대공자. 왕이 돼. 그리고 전쟁을 일으켜.”

시그니티의 동공이 커진 것이 알렉스의 눈에도 보였다. 그러나 알렉스는 시그니티가 자신의 말을 따를 것임을 이상하게도 확신했다.

이자벨의 일이잖아. 당신은 거부 못 해.

“이자벨을 되찾기 위해서면, 기꺼이 당신의 검이 될 테니까.”

반란을 일으켜. 당신 숙부의 목을 베고 왕좌에 앉아서 전쟁을 선포해.

알렉스는 멱살을 붙잡은 손을 풀었다. 시그니티는 아무 말 없이 알렉스를 응시했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대공을 그리워해. 당신만 잘하면 어렵지도 않아.”

그건 뱀의 속삭임이었다. 그러나 절박한 인간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시그니티 바르펜시아는 알렉스 로윈과 손을 잡았다.

이자벨이 없어진 건, 역설적으로 알렉스에게 더 많은 길을 열어 주었다. 군부대신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그에게는 장차 군을 통솔할 권력이 쥐어진 것이다.

둘은 서로의 존재를 견딜 수 없었지만, 이자벨을 찾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누군가에게는 지독히도 빠르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아니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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