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희생. (2)
미하일은 정말 이자벨을 위협하고 싶지 않았다.
헤더의 딸을? 내가 어떻게 그래.
하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딸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헤더. 당신도 이해하지? 하필 당신을 닮아 고집도 세서.
“아가. 넌 내 딸이야.”
네가 있는 땅을 폐허로 만드는 데 분명 십 년이 넘는 세월이 걸리겠지. 하지만 난 그럴 수 있단다.
“네 자리로 돌아오렴. 네가 아끼는 모든 게 망가지기 전에.”
“……당신 누구야?”
그럴 능력이 있냐는 이자벨의 물음에 미하일은 처음으로 스스로가 가진 권력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이 전쟁을 시작한 사람.”
제 모든 형제를 도륙하고 왕위에 오른 잔인한 샬덴의 왕.
“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어, 이자벨. 모든 건 네 선택에 달렸단다.”
“내가…… 당신 딸이 아닐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어?”
미하일은 그 질문이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웃었다. 거의 웃지 않고 살았던 2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미하일은 이자벨의 앞에서 자주 웃었다.
“네가 헤더의 딸인 이상, 넌 내 딸이어야만 한단다. 아가.”
그 말에 담긴 집착 어린 확신에 이자벨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마치 어린 딸의 침대 맡에서 잘 자라고 속삭이는 부모처럼 굴었다.
이마에 짧은 입맞춤이 내려앉았고, 그와 동시에 미하일은 모습을 감췄다.
이자벨은 소름이 돋았다.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이 미친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거지?
이자벨은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렸음을 인정했다. 빠져나가겠다고 발버둥 치면 주변 사람들이 다친다.
그리고 그 첫 번째는 알렉스가 될 거다. 뒷배 없는 군부대신의 사생아.
알렉스. 어떻게 해. 널 지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잖아.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결국 모든 일을 망치는 건 나야. 잘해 보려고 해도, 그게 안 돼. 약속을 어겨서 미안해. 매번 미안하다고 해서 미안해.
나는 창턱에 섰다. 잠긴 창문 너머로 어두운 정원이 어렴풋이 보였다.
순간,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와 동시에 꽃병으로 창문을 강하게 내리쳤다.
창문과 꽃병이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깨진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자벨!”
로윈 백작의 고함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모습이 위태로워 보일 것은 지나가는 개라도 알겠지. 한 번만 비틀거려도 아래로 추락할 테니까.
“들었어요, 백작님. 샬덴에서 제가 아니면 전쟁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고.”
“그래서?”
“제 동생, 제 약혼자…….”
어두워서 로윈 백작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전쟁은 안 돼요, 백작님. 아시잖아요.”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지?”
“누가 말한 게 뭐가 중요하죠? 끝까지 숨길 생각이셨어요? 전쟁이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쏟아내는 말을 멈췄다. 원망할 것은 로윈 백작이 아니었다. 그 남자였지.
나는 창틀을 붙잡고 있는 손을 떼어냈다.
“제가 종전의 대가라면, 싼 거죠.”
나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만큼 엄마를 사랑했으면서, 엄마가 죽을 때까지 오지 않은 남자.
날 곁에 둬서 뭘 하려고? 어차피 엄마는 죽었는데. 해 봤자 추억을 곱씹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날 원하는 게 진짜 우스워.
그런데 거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나도 웃기지.
“더 버티지 말고 날 보내요.”
날 보내요. 아니면 죽을 거야.
“내려와라, 이자벨 로윈.”
로윈 백작은 침착하게 나를 불렀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뛰어오는 고용인들의 소리가 들렸지만, 백작은 차분하게 문을 닫고 날 응시했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로윈 백작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왜 나를 키웠는지도,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렉스를 왜 데려왔는지도…….
늘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절 포기하세요, 백작님.”
그럼 내려갈게요. 내 중얼거림에 로윈 백작은 그저 미간을 좁혔을 뿐이다.
“샬덴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요.”
“어째서?”
“샬덴의 왕이 절 요구했으니까요. 알잖아요, 백작님. 전쟁은 안 돼요.”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이상한 소리 말고 어서 내려와라.”
로윈 백작은 마치 나를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백작님도 아시잖아요. 왜 아무 말 하지 않으셨죠?”
백작은 정말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코웃음 쳤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내가 만약 친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잘못된 사실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많이 힘든가 보군. 내려와라. 일단 내려와서…….”
“백작님. 절 지키려 하실 필요 없어요.”
그럴 이유가 당신에게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제가 미우시잖아요.”
“이자벨 로윈. 무슨 일이 있었지? 누가 네게…….”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번 생에서는 어쩌면 평생 비밀로 안고 갈 것이라 여겼던 사실을 뱉어냈다.
“당신이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백작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백작의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정말 내 말을 헛소리처럼 취급했다. 그는 내가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넌 내 딸이다, 이자벨 로윈.”
“그럼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밤새 당신이 오기를 기다려 문 앞에서 잔 적도 있는데. 생일이면 몇 분이라도 같이 있어 줄까 해서 새벽부터 일어나서 기대했는데.
당신은 내 보호자로 의무를 다했을지언정, 한 번도 나한테 애정을 준 적이 없잖아. 가끔 나를 바라볼 때면, 끔찍한 표정을 했잖아.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한 번도 절 사랑해 주신 적 없잖아요. 백작님. 제가 당신 딸이기는 했어요?”
백작은 침묵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백작이 변명이라도 했으면 화가 나서 미쳐 버렸을 테니까.
“백작님과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절 보내 주세요. 전 괜찮을 거예요. 절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실 필요 없어요.”
“널…….”
백작의 목소리는 작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 무표정이 일그러진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널 사랑한 적이 있었지.”
그는 한 단어를 뱉는 것 자체가 몹시 힘겨워 보였다.
“네가 헤더의 배 속에 있을 때.”
아무 감정 없는 인형 같은 얼굴에 온갖 감정들이 스쳤다. 원망과 애정, 그리고 증오.
깨달음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헤더가 죽기 전에는…….”
백작님, 당신도 설마…… 엄마를 사랑했어요?
“널 사랑했지, 이자벨.”
그래서 그랬구나. 엄마를 사랑해서 그랬구나.
우리 엄마는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구나. 감정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당신 같은 사람도 사랑에 빠질 만큼.
그런데 나는 엄마가 아닌데. 나는 그 아름다웠던 헤더 구드윈이 아닌데. 그런데 왜 다들 나를 찾아. 우리 엄마가 보고 싶으면서. 엄마는 이미 죽었는데.
“난 엄마가 아니에요, 백작님.”
이제 지긋지긋했다. 이들은 내 아버지의 자리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헤더 구드윈의 딸, 그 딸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거다. 설사 시궁창을 기어가고 있던 쥐라도 헤더 구드윈의 자식이라면 좋다고 제 자식으로 삼았겠지.
“나는 이자벨 로윈이에요. 당신이 지킬 필요가 없는 당신의 딸이죠.”
그래도 내가 한때 애정을 갈구했던 아버지는 당신이야, 로윈 백작. 엄마 때문이든 뭐든 당신은 날 책임졌잖아.
“날 보내요. 어디를 가든 난 이자벨 로윈일 테니까. 평생 로윈임을 잊지 않고 살 테니까.”
발밑이 따끔했다. 깨진 유리 조각을 밟은 것 같았다. 나는 상처를 변명 삼아 조금 울었다. 어두워서 티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사생아도 키웠잖아요, 아버지. 당신은 엄마 무덤 옆에 같이 누울 자격이 있어요.”
흐느낌이 새어 나오지 않게 소리를 죽였다.
“내 아버지는 당신뿐이니까, 걱정 말고 그냥 나를 버려요.”
내 친부는 평생 내 아버지가 되지 못할 테니까.
백작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일그러진 표정이 어둠 속에서 설핏 비쳤다.
“약속할게요. 당신이 지금 나를 버리면, 평생 당신만 아버지로 여기겠다고.”
나는 백작이 가장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로윈 백작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창가에서 내려 줄 뿐이었다. 이내 닫힌 문을 열고 치료해 줄 하녀를 찾는 등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내 제안을 로윈 백작이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누님!”
로윈 백작을 밀치고 알렉스가 내게 달려왔다. 깨진 유리창과 나를 확인한 알렉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을 옮겨야겠네요.”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하는 얇은 실내화에 알렉스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발목을 붙잡았다.
“괜찮아. 알렉스.”
“제가 안 괜찮아요.”
순간 나를 올려다보는 알렉스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울었어요?”
로윈 백작은 나와 알렉스를 문가에 멀거니 서서 응시하고 있었다. 몇 년은 한꺼번에 늙은 것처럼 피곤한 눈이었다.
“……오늘 했던 얘기는 없는 것으로 하지.”
도망치듯 내뱉는 말에 나는 발을 다친 것조차 망각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백작님!”
로윈 백작은 나를 보지도 않고 집사인 루크에게 명령했다.
“옆방으로 옮겨. 깨질 만한 물건은 다 치우고. 문도 다시 잠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허리를 붙잡는 알렉스를 밀어내며 로윈 백작을 불렀다.
“백작님, 저는 우리가 거래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알렉스.”
알렉스는 로윈 백작이 자신을 불렀다는 것에 놀랐다.
“네 누이를 감시해.”
이어지는 말에 알렉스는 혼란에 빠졌다. 왜? 왜 이자벨을 감시하라고 하는 거지?
로윈 백작은 제 누이에게 달라붙어 있는 알렉스를 향해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네 누이가 널 버리고 공녀로 떠나겠다고 하니 말이다.”
한 번도 제 손으로 키워본 적 없는 아들이라도, 로윈 백작은 제 아들을 자극하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
“누님…….”
로윈 백작은 둘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자벨이 파악하지 못한 건 하나였다.
로윈 백작에게 이자벨이라는 존재 자체가 헤더를 뺀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자벨이 로윈 백작을 아버지로 여기듯이, 로윈 백작 또한 이자벨을 자식으로 여겼다. 애정을 주지 못했어도, 그 애를 볼 때마다 헤더가 떠올라도…… 그래도 이자벨은 그의 자식이었다.
로윈 백작이 떠난 자리에 남은 알렉스는 기꺼이 백작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알렉스, 내 말을 잘 들어 보면…….”
“듣기 싫어요.”
알렉스는 깨질 수 있는 물건은 죄다 치우고 있는 하녀들 사이로 이자벨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 데도 가지 마요.”
“알렉스, 네 마음은 알겠는데 이건 널 위해서…….”
“나 화났어요…….”
알렉스는 이자벨을 품에 꼭 안고 중얼거렸다. 이자벨은 그를 밀어내려고 애쓰다가 결국 포기했다.
“알렉스, 누나 말 들어봐. 들어보면 너도 알 거야. 그게, 그러니까…….”
알렉스의 손이 내 입을 아예 덮어 버렸다. 알렉스의 입매가 비틀렸다.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놀란 이자벨의 눈에 알렉스는 애써 웃었다.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였다.
“내가 듣기 싫다고 했잖아요, 누님.”
알렉스는 놀란 이자벨의 얼굴에 황급히 불쌍하게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내가 화났다고도 했는데…… 누님이 날 떠날까 봐.”
이제는 질릴 만도 한 불쌍한 척은 이자벨에게는 항상 통했다. 알렉스는 제 큰 덩치를 구겨서 이자벨의 품에 몸을 밀어 넣었다.
“알렉스…….”
그렇지. 당신이 이러니까 내가 포기를 못 하지.
이자벨이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어조로 알렉스를 불렀다.
알렉스는 이래서 이 멍청한 짓을 관둘 수가 없었다. 저보다 한참 큰 남자가 불쌍한 척하는 꼴이 뭐가 그리 안타까워서 저렇게 쳐다보는 건지.
“안 갈 거죠?”
불쌍하게 굴어. 약하게,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인간인 것처럼 굴어. 스스로에게 세뇌하다시피 중얼거렸다.
“나 두고 안 갈 거죠?”
봐봐.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나는 당신 없으면 금방 죽어 버릴 것처럼 약해.
“누님, 빨리 그렇다고 말해 줘요. 나 두고 어디도 안 간다고.”
알렉스는 흔들리는 이자벨의 눈에 속으로 웃었다. 내가 원하는 말을 해 줄 거잖아. 날 동정하잖아.
그러나 이자벨에게서 나온 말은 달랐다.
“널 위해서야, 알렉스.”
단호한 이자벨의 말에 알렉스의 그린 듯한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전쟁이 벌어져. 전쟁이 벌어지면 넌…….”
“난 상관없어요.”
“난 상관있어. 알렉스.”
그는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늘 이랬다. 이자벨은 겨우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주제에 그에게 늘 어른처럼 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널 위해서야. 알렉스. 네가 전쟁터에 끌려가는 꼴을 내가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나는!”
이자벨은 알렉스의 거친 반응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어떻게 참을까?”
알렉스는 어떻게든 억누르려고 있지만 제 안에서 들끓고 있는 감정을 다 통제하지 못했다. 새어 나오는 감정들에 이자벨이 놀랄까 두려우면서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참아.”
이자벨은 단호하게 속삭였다. 마치 그 외의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참아야 해, 알렉스.”
“싫어요.”
알렉스는 이자벨을 꽉 안고 속삭였다.
“이번에는 누님이 포기해요.”
이자벨은 아무 말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알렉스는 불안한 마음에 이자벨의 품에 더 매달렸다.
며칠 뒤, 잠긴 방 안에서 이자벨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