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희생.
알렉스는 작고 말랐었지. 뼈밖에 남지 않은 육신은 성별을 떠나 늘 아이 같았다.
‘내’ 알렉스는 그랬다.
나를 거의 안다시피 해 자기 방으로 데려온 알렉스는 몹시 초조한 눈으로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부딪쳤다.
“나 안 아파, 알렉스.”
“아파 보여요.”
의자에 앉아 있는 내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알렉스가 더 커다랗게 보였다.
거의 성장이 멈춘 나와 달리 몇 년을 더 자랄 것이 분명한데도, 이미 내 키를 뛰어넘은 걸 나는 다시 실감했다.
“아는 사이였어요? 누구죠?”
내게 추궁하듯 붙여오는 말은 내 눈치를 보며 애원으로 바뀌었다.
“누구예요, 누님. 제발.”
바닥에 꿇어앉듯 몸을 낮추고,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는 알렉스였다.
확실히, 나는 이런 모습에 약했다. 알렉스는 늘 내게 어린아이처럼 굴었고, 나는 그걸 기꺼워했으니까.
“누님, 걱정이 돼서 그래요.”
희미해지는 말끝과 우울하게 가라앉는 표정은 어린아이의 것처럼 극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나는 문득 내가 받았고, 알렉스도 받았던 교육을 되새겼다. 본심을 숨기고, 그럴듯한 표정을 가면처럼 뒤집어쓰는 법.
“알렉스.”
그럼에도 나는 늘 알렉스에게 솔직했다.
‘하지만, 아니야. 의심하지 마.’
그리고 설사 알렉스가 내게 어린아이처럼 일부러 굴었다 한들, 누이의 애정을 잃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이 더 안타깝잖아.
“네. 누님.”
그런데 말이야, 알렉스. 그냥 이상하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게 틀린 것 같아.
알아. 전부 다 내 추측이고, 내 생각이었지. 사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게 달라진다고 해도, 넌 여전히 내 동생일 테니까.
하지만 알렉스…….
“오늘 같이 잘까? 옛날처럼?”
네가 사내애라면, 모든 일은 몹시도 쉬워져서.
놀라 커진 알렉스의 눈이 당황과 기쁨으로 물들었다.
“아니다. 너도 이제 다 컸는데. 그치?”
사실 네가 사내애라고 달라지는 건 없어.
사실 내가 사내라 한들 난 로윈 백작의 친자가 아니니. 이 가문은 네 성별과 상관없이 당연히 네게 갈 권리지. 그래서 그래. 내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넌 전부를 갖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내 도움이 필요 없이 넌 다 갖게 될 거라고. 진짜 다행이지?
“네가 여자아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매일 같이 자고, 함께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할까.”
그렇지 않니? 나는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렉스는 아쉬움에 물든 표정으로 내 손을 끌어다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누님께서 그리 말하시니 끌리긴 하네요.”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웃음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전달되었다.
문득 당장이라도 알렉스를 발가벗기고 싶었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네가 남자애면 정말 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진짜야. 알렉스. 내가 널 가만히 두기만 했어도, 너는 전부를 가졌을 거야. 널 위해 뭔가를 했다고,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의미 없는 일이었을지도 몰라.
“정말 넌 여자애가 아니야?”
내 질문은 사실 알렉스에게는 굉장히 뜬금없을 것이 분명했다. 알렉스는 농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는지 눈까지 휘어지게 웃었다.
“오늘은 드레스를 입을까요? 그러면 누님과 함께 잘 수 있습니까?”
일말의 동요도 없는 대꾸에 나는 물끄러미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알렉스의 턱과 목을 지나 어깨까지 손으로 쓸어내렸지만,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단단한 뼈대와 근육뿐이었다.
알렉스는 대꾸 없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누님?”
나는 그대로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당황한 알렉스의 손이 내 어깨 위에 얹어졌다.
널 지켰다고 생각했어, 알렉스. 그런데 진짜로 지켜 줄 필요가 없었구나, 내가.
“알렉스…… 있잖아. 누나는 알렉스를 정말 사랑해.”
당황에 머뭇거리던 알렉스의 손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저도요, 누님.”
“네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해. 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한테는 네가 제일 소중할 거야.”
그런데 알렉스. 네가 소중해도, 이제는 이전처럼 굴 필요가 없어졌어. 내가 지켜 주지 않아도 네 자리는 무사할 테니까.
넌 정식으로 입적된 로윈 백작의 장자야. 그건 말이야, 두 번째 딸과는 전혀 다른 위치란다. 내가 이전 생에 그리도 처절하게 염원하고 질투했던 네 자리가 그대로 주어질 거야.
그러니까 내 존재가 있든 말든 상관없이.
아니, 네가 후계자로 서기 위해서는 차라리 내가 없는 게 낫겠지.
* * *
⌜뭘 기록했냐고 물었죠?
소원이요. 역대 선조들의 소원을 기록했죠.⌟
나는 게일 위버겐이 보낸 편지를 모두 구겨서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타들어 가는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주저앉았다.
내 소원은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정당하게 모든 권리를 누리고 사는 알렉스 로윈.
이상하게 모든 게 허무해졌다.
몸을 일으켰다. 내가 더 이상 알렉스가 제 권리를 누리는 데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면, 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도 될 것이 아닌가.
아를에서 혼인할 수 있는 나이는 스무 살 이후였다. 그러나 왕실의 허가를 받으면 열여덟 살부터 가능했다.
이번 생에 난 반드시 22살에 혼인을 해서, 알렉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렉스가 여자애라면, 방계에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지만 아들이면 다르잖아.
“시그!”
정리되고 있는 저택의 한복판에서 반쯤 갑옷을 걸치고 있던 시그니티가 뛰어오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
“벨. 조심해야지. 왜 갑자기…….”
나는 그대로 그의 멱살을 잡아 눈을 맞췄다. 그는 순순히 내게 끌려왔다.
“잘 들어, 시그.”
“난 늘 그래. 벨.”
“난 너 사랑 안 해. 사실 앞으로도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나 곧 가벼운 웃음이 그의 입가에 느슨하게 걸렸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알아.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디 있어?”
“나한테 제일 소중한 건 알렉스야. 그 애가 내 삶의 이유야. 그 애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난 다 버리고 뛰쳐나갈 거야.”
“이자벨.”
“우리가 결혼해도 그럴 거야.”
내 말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가볍게 굴지 마, 시그. 내 마음 편하라고 하는 짓이잖아. 사실 너 안 괜찮잖아. 그러나 나는 당연하게 뒤에 따라올 말을 알았다.
“괜찮아.”
“그럼 내게 청혼해.”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이렇게 다짜고짜가 아니라 뭔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그리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 생일 얼마 안 남았어. 열여덟이면 되잖아. 백작도 날 빨리 치우고 싶을 거야. 그러니까 시그니티, 내게 청혼해. 다 괜찮으면 결혼하자고 말해.”
널 사랑하지 않아도, 네가 첫 번째가 아니라도, 네 옆에 있어 줄게. 날 사랑하잖아. 날 갖게 해 줄게.
“전쟁에 나가기 전에 우리 결혼하자. 나 너 안 기다릴 거야.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러니까 지금 잡아.”
손해 보는 거 알아도 잡혀 줄 테니까.
“싫어.”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제대로 이해했어?”
나는 내내 결혼하자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남자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되물었다. 멱살을 붙잡은 내 손이 맥없이 탁 풀어졌다.
시그는 내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려 주며 반문했다.
“너야말로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 거야?”
“아주 명확하게.”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터로 떠날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근사한 결혼식이나 절절한 청혼도 없이?”
시그는 코웃음 치며 몸을 바로 세웠다. 날 내려다보는 시그의 눈은 마치 어린애가 떼를 쓰는 걸 보는 듯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돼. 정신 차려, 이자벨.”
“너 미쳤어? 내가 잡혀 주겠다잖아! 그냥 넘어가면 안 돼?”
“다른 건 다 그냥 넘어가도, 네 일은 못 그러는 거 몰랐어?”
그는 내게 평소처럼 웃었다. 근사하고 가볍게. 진심이 아닌 것처럼. 부담 하나 갖지 말라는 얼굴로.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이자벨. 즐거운 일만 하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그럼 넌?”
내 반문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의 몸에 걸쳐진 갑옷이 낯설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내가 다시 네 앞에서 얼쩡거릴 거야. 그때 네가 괜찮으면…… 날 주워 가.”
“넌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 시그, 난…….”
“아니, 이자벨. 넌 이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야. 날 생각하면서 부정적인 생각하지 마.”
시그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덧붙였다.
“그러면 꼭 죽고 싶어지니까. 너는 즐겁고 좋은 것만 누려야 해.”
“그게 가능해?”
그는 내 물음에 나를 응시하며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키지 않은 어조로 느리게 입을 열었다.
“가끔 말이야. 그런 상상을 해. 네가 나 때문에 우는걸.”
그 애정의 깊이에 놀라 저도 모르게 울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했다. 떠보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땠는데?”
“끔찍했어. 내가. 그러니까, 벨, 나는 네가 나 때문에 흔들리는 게, 너무 좋아서…….”
그의 어조는 순간 무거워졌다.
“그런 내가 싫었어.”
내가 뭔가 달래기도 전에 그는 옷을 바꿔 입듯 빠르게 분위기를 밝게 바꿨다. 장난기 섞인 웃음이 얼굴에 걸렸다.
“널 울게 만들기 싫어. 나 스스로를 증오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벨, 네가 날 도와줘야 해.”
“널 무시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널 돕는 거라고? 시그, 난 잘 모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한테 영향력을 갖고 싶어 하잖아. 그리고 넌 나한테 그래도 된다고…… 내가 허락한다잖아.”
내 행복을 절대 순위로 두고 있는 시그의 애정에 의문을 던진 셈이었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 행복을 네가 지켜 주면, 너는? 네 행복은 어떻게 해?
“그러지 마, 벨.”
그는 쓴웃음을 짓고 한 발짝 물러났다. 날 똑바로 응시하는 눈이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힘겹게 입을 연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발.
“내가 널 욕심내게 하지 마.”
“욕심내.”
나는 힘주어 내뱉었다.
“날 믿어. 난 이기적이고 못된 애라서, 내가 싫고 힘들면 널 버릴 거야. 그러니까 욕심내도 돼.”
행복하지 않으면 멋대로 떠나 버릴 거니까. 네가 울어도, 매달려도, 떠나 버릴 거니까. 나는 손을 뻗었다.
“내 행복은 내가 찾아. 시그니티. 그러니까 넌 네 행복을 잡아.”
도무지 이길 수 없다는 얼굴로 시그는 눈을 감았다 떴다. 몹시도 느리게 머뭇거리는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잡기 전까지 그토록 망설였던 손은 내 손을 붙잡자마자 꽉 쥔 채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 평생 너한테 지고 살 거야, 내 사랑.”
“그리고?”
몸을 숙여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춘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진지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떨어졌다.
“사랑해. 당신과 결혼하게 해 주세요.”
당신의 공식적인 옆자리를 부디 내게 허락해 주시길 빕니다.
“기꺼이 허락할게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내 허리를 잡아챘다.
놀라 눈을 크게 뜬 내게 시그는 자기 이마를 내 이마에 콩, 하고 부딪쳤다.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빨리 날 혼내.”
“나한테 청혼한 걸 혼내라고?”
내 어이없는 웃음에 시그는 쓰게 웃었다. 가까이서 보이는 눈이 예뻤다.
“나 지금 너한테 나쁜 짓 했는데……. 너무 좋아서. 빌어먹을.”
그는 본인이 말하고 놀라 입을 닫았다.
청혼을 빗대어 나쁜 짓이라 말하는 것은 그뿐일 것이다. 하물며 조건만 따지자면 사실 내 쪽이 더 안 좋았다. 그는 왕의 조카였고, 나는 사생아였으니.
“그래. 난 쓰레기야.”
체념조로 중얼거린 말은 누가 보아도 진심이라 나는 황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난?”
“넌 너지. 벨. 그거 말고 더 완벽한 수식어가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세상에서 이자벨 로윈이라는 단어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걸 본 적이 없어.”
그는 진심으로 속삭인 뒤, 문득 그가 한 말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임을 새삼 깨달았다.
진부한 핏줄 같으니라고.
“너도 그래, 시그.”
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제 이름을 좋아하기로 결정했다.
가까이서 웃고 있는 여자는 비현실적이었다.
아. 예쁘다.
그의 뇌는 사랑하는 여자가 제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것에 이미 과부하가 걸린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이성을 반쯤, 아니 어쩌면 절반보다 더 놓아 버린 상태였다.
“……키스해도 돼?”
그 결과, 여과를 거치지 않은 본심이 불쑥 튀어나왔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약혼녀를 보며 그는 빠르게 덧붙였다.
“괜찮으면 도망가고, 싫으면 가만히 있어 줘.”
“……보통 그 반대 아니야?”
“내 아가씨는 너무 착해서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의 어깨를 밀었다. 몹시 아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는 순순히 나를 놨다. 나는 그대로 한 발짝 물러난 후 멈췄다.
“도망쳤어, 나.”
“……그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성큼 다가온 시그의 양손이 내 턱을 붙잡았다.
이마에 살짝 닿은 입술. 그것은 곧 살짝 벌어진 내 입술에 포개졌다.
그는 몹시 정중했다. 얇은 입술을 두고 맞닿은 열기가 느껴지는 것도 잠시 금방 그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왜?”
아이들이나 할 법한 입맞춤에 대한 내 물음에 시그는 굉장히 자책하는 어조로 내게 속삭였다.
“미안해. 내가 못 참았어. 난 쓰레기야…….”
“……뭐가?”
뭐가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 1초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우린 아직 결혼도 안 했잖아.”
이 무슨 보수적인 생각인지. 마치 수녀원에서 팔십 평생을 사신 수녀님처럼 말하는 그를 두고, 나는 어쩐지 파렴치한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할 거잖아.”
“기다려야 했어…….”
그는 그 사실에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나는 현재 문란함의 끝을 달리는 사교계를 그가 안다면 얼마나 놀라지 잠시 생각했다.
그렇게 첫 키스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짧은 입맞춤이 끝났다.
나는 문득 이전부터 했던 생각을 확신으로 바꿨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계속 함께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 * *
바르펜시아 대공은 기사의 재촉에도 여관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도까지 가겠다고 출발한 지 사흘이 지났음에도 하루 정도의 거리밖에 오지 못했지만, 대공은 느긋했다.
“전하.”
기사의 독촉에도 대공은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즐기지는 못했다. 대공은 대공비와 떨어진 지 사흘이 지났다는 사실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확인한 대공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야겠어.”
“외람된 질문이지만, 바르펜시아 성으로 말입니까?”
“그럼 내가 돌아갈 곳이 어디 있겠나?”
“대공자님을 뵈러 가시는 길 아니셨습니까……?”
대공이 태자 시절부터 그의 곁을 지켰던 기사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공은 기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내 아내가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지 뭔가.”
“중요한 일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 자식인데 뻔하지.”
지금쯤이면 대충 소식이 도착했겠군.
대공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사를 향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내 아들이 미쳤다는 소식이든 결혼하겠다는 소식이든 둘 중 하나는 도착했을 거라고.”
대공은 어깨를 으쓱이고 차를 술 마시듯 입에 털어 넣고 걸어 나갔다.
“내가 그랬거든.”
남겨진 기사는 황망한 얼굴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놈의 집안이란.
* * *
베르디 코웰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알렉스는 갑작스러운 선생의 죽음에 안타까움보다 놀라움을 먼저 느꼈다. 죽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도, 병색은 있어도 그리 심하진 않았다.
“답신을 쓸까요?”
코웰 가문에서 장례를 치른다는 짤막한 글을 힐긋 확인한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쓰지.”
손으로 펜을 굴리던 알렉스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베르디 코웰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별다를 것 없는 대화, 무난히 흘러갔던 이야기. 그가 알렉스에게 죽음에 관한 신호를 남겼던가?
병사라고 했다. 베르디 코웰이 진정으로 자기 죽음에 대해 몰랐을까?
알렉스는 그의 태연함을 이상하게 느꼈다. 원래도 그런 사람이었지만…… 제 죽음에도 초연하다니. 그의 평정심을 흩뜨릴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었을까?
가족? 연인? 친구?
하긴, 있었으면 죽음에 그리 초연할 수가 없었겠지. 그런 사람을 남겨 두고 절대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없었으니까.
그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이자벨, 내 누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 편.
아픈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알렉스는 혀를 찼다. 어린 날의 그가 틀렸다. 이자벨이 세상에 숨 쉬는 한, 죽는 것보다 아픈 게 나았다.
알렉스는 누이에 대한 제 감정이 맹목적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게 뭐 어떤가? 이자벨은 제 어떤 모습이든 사랑해 줄 텐데. 그는 이자벨의 첫 번째가 자신임을 진리처럼 믿었다.
한편, 게일은 코웰 가문의 지하에 안치된 관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 이제는 어디로 가지?
서늘한 지하의 기운에 그는 투덜거리며 지하 계단을 올랐다.
이제 아를을 떠나야 하나?
그는 머릿속에 스치는 아름다운 얼굴에 앓는 소리를 뱉었다. 미움받기 싫은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왜 다 나를 싫어하는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새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게일의 품에 날아들었다. 그는 흥분한 듯 날개를 미친 듯이 퍼덕거리는 새를 붙잡아 달랬다.
“그래. 그래. 멀리서 오느라 힘들었지.”
게일은 소매로 새의 부리를 문질렀다. 짤막한 단어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귀환⌟
“타이밍도 좋네.”
그는 그대로 새를 허공으로 던졌다. 몇 번 공중에서 휘청거린 새는 미련이 남았는지 그의 머리 위를 두어 번 맴돌다 사라졌다.
기지개를 길게 켠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미워해도 어쩔 수 없지.
* * *
투레질하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긴 기사는 그대로 무너진 성벽을 뛰어넘었다.
붉은 갈기를 가진 말은 왕의 말인 레깃과 혈통이 섞여 있었다. 명마로 보이는 말은 몇 번의 뜀박질 만에 검은 갑옷으로 얼굴까지 가린 남자 앞에 도착했다.
“폐하.”
“남은 이는?”
입을 가린 갑옷에 부딪힌 목소리는 지독하게 낮았다. 단순한 물음에도 기사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없습니다. 모든 것이 폐하의 은혜입니다.”
“목을 챙겨라. 돌아간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사들이 고삐를 움켜쥐었다.
맹목적인 충성이 짙게 배어 있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에게는 그 어떠한 패배도 없을 거라고 믿었다.
사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현왕만큼 지배력을 가진 왕은 샬덴에 없었다.
샬덴의 사람들은 건국 신화를 진심으로 믿었다.
‘하늘신이 흰 사슴이 되어 땅에 내려왔을 때, 그 흘린 피에서 왕이 났다지.’
세뇌에 가깝게 왕에 대한 복종을 대물림한 샬덴의 귀족 사회는 사실상 왕권을 견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샬덴에서는 왕의 말이 곧 신의 뜻이었고, 그러다 보니 당대 샬덴의 성세는 늘 당대의 왕에게 달려 있었다.
20여 년 전 왕위에 오른 샬덴의 왕은 교활하고 유능한 자였다. 그는 여덟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결국 모든 혈육을 몰살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왕가의 일에 그 어떠한 첨언도 하지 못하는 샬덴의 귀족들은 피로 젖은 대전에 앉아 있는 막내 왕자에게 순종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했고 자비롭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샬덴에게는 적합한 왕이었다. 해이해졌던 귀족들의 복종심을 다시 키웠고, 왕이 아를을 친 것을 열렬히 숭배했다.
샬덴의 기사들은 스스로가 꽃으로 대련하는 고상한 아를의 기사들과는 다르다고 여겼다. 그들은 죽음마저도 왕의 것인 충성스러운 왕의 기사들이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마저 배제된 맹목은 제법 많은 걸 해낼 수 있었다. 현재 왕이 이끄는 샬덴의 군대가 아를에서 도저히 추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아를의 군대가 과연 언제쯤 국경이 이미 부서졌다는 것을 눈치챌 것인지. 그리고 아를의 군대가 완전히 조직되는 것과 그들이 준비되지 못한 채 샬덴의 군대를 마주치는 것 중 어느 게 더 빠를지.
샬덴의 왕은 하나는 확신했다.
아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내주어야 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미하일의 사랑 이야기는 짧다면 짧았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막내 왕자로 태어났으니 차라리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는 부모가 몹시도 아끼는 늦둥이였기에 다른 형제자매보다 자유를 보장받았다.
미하일은 일찍이 세계를 돌아보러 떠났다. 더 나이가 들면 제 충성을 증명해야 했으니 그 전에 그는 자유를 즐기러 돌아다니기로 했다.
화려한 도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오지, 위험한 뒷골목…….
그는 새로운 것들에 쉽게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쉽게 갔던 관심은 쉽게 식었고, 늘 새로운 것들에 다시금 관심이 생겼다.
헤더 구드윈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고. 금방 식을 사랑이라고. 잠시간의 유희라 여겼다.
그는 그 잠깐의 착각을 평생토록 후회했다. 왜 평생의 사랑인 줄 몰랐을까.
헤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너무 멍청해서 그때는 몰랐어요. 다 괜찮을 줄 알았어요. 내가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미쳤나 봐요. 헤더.
당신은 혼자서 우리 애를 배 속에 키우면서 나를 기다렸을 텐데, 내가 너무 늦어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정말 빨리 오려고 했어요. 거추장스러운 인간들을 다 치우고 가려고, 내가 조금 늦었어요. 죽여야 할 인간이 너무 많아서. 우리 부모님이 자식을 너무 많이 낳아서 내가 좀 바빴어요.
맞아. 우리 딸. 당신이 남기고 간 우리 아이.
당신한테 못 해 줬던 거, 당신이 원래부터 가져야 할 권리, 그거 다 내 딸한테는 모자람 없이 해 줄게요.
아이가 당신을 닮았어요. 우리가 이별했던 그 날의 당신이랑 너무 똑 닮아서…….
그 애가 너무 보고 싶어요. 헤더.
우리 딸이. 우리 이자벨이.
미하일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지금은 이자벨이 그가 살아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가지기 위해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게일은 종종 기억할 것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의 부모를 생각했다. 미하일의 손에 살해당한 부모는 아마도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의 양부가 제 딸에게 하듯 집착적인 사랑은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죽는 순간에 그를 걱정하기는 했을 것이다. 아마도?
사실 아니어도 뭐 어떤가. 그들은 죽었고, 그가 상상하는 것을 틀렸다고 말할 사람도 없는데.
죽음은 참 편리한 미화의 수단이었다. 헤더 구드윈은 죽음으로써 평생토록 제 양부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가련한 그의 연인으로.
게일은 헤더 구드윈이 양부가 떠난 후 제 나름의 행복을 찾아 움직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자는 영리하고 강했으며, 기꺼이 제 양부를 잊고자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헤더 구드윈은 죽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영원히 불쌍한 미하일의 연인으로 남았다.
뭐, 남은 이들만 불쌍한 결말이었다. 그 여자가 살았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다. 어쩌면 그 똑똑한 아가씨도 좀 더 부드러운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어쩌면 이름이 이자벨이 아니었을 수도?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면 부질없는 일이었다.
게일은 그의 눈앞에 자리한 양부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은 생기 하나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만약 양부가 원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를 살해할 수 있는 양부의 충견들이었다. 그가 태자인 건 그들에게 별로 고려할 사항이 아닐 테니까.
“폐하.”
현재 대륙에 제국은 없다. 그러나 샬덴은 오래도록 황제라는 호칭을 고집했으며, 샬덴의 왕은 샬덴 내에서는 황제와 같은 격식을 갖췄다.
“보았나?”
제 형제들을 전부 살해하고 황위를 강탈한 샬덴의 현 황제는 몹시도 초조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게일은 샬덴의 모든 이들을 떨게 만드는 이가 내보이는 긴장에 작게 웃었다.
“그분을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초상화에 과장은 없더군요.”
그는 황제가 그 작은 소녀를 헤더 구드윈의 대신으로 여기는지, 혹은 그저 자기 핏줄에 대한 애착을 느끼는 건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황제는 제 형제자매를 죽이고 스스로 왕관을 썼다. 핏줄에 대한 애착을 느꼈다면, 적어도 그에게 좀 더 관대했겠지.
게일의 부모는 황제가 살해한 수많은 샬덴의 왕족 중 하나였다.
게일의 어머니는 황제의 사촌이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의 아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그는 태자가 되었다.
그저 게일은 샬덴의 몇 안 되는, 살아남은 왕족 중에 그나마 황제와 촌수가 가까웠고, 사내였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어떤 일에도 엮이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는 다음 대 왕좌를 약속받았다.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는 생존에 대한 욕구가 조금 더 컸던 그에겐 운이 좋은 결과였다.
자식에게 늘 가장 좋은 것을 물려주고자 하는 부모의 욕구란 뻔했다.
이자벨 로윈은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샬덴의 왕비가 되고, 태후가 되어, 샬덴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왕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음 대 왕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는 제 딸에게 모든 명예와 권력을 쥐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다음 대 왕은 그저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이자벨 로윈의 발등에 입을 맞추면 되었다.
좋아할까? 왕비보다는 왕에 더 잘 어울리는 여자였는데.
“전 그녀가 몹시도 마음에 듭니다, 폐하.”
황제는 게일의 발언에 얼굴을 찌푸렸다.
게일은 운이 좋았다. 황제는 살아남은 왕족 중에 가장 똑똑하고 잘생긴 청년을 태자로 뽑았다. 그건 그게 다음 대 왕이 될 만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이자벨의 남편이 될지도 모를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이자벨이 원한다면, 황제는 거렁뱅이라도 샬덴의 왕으로 만들어 줄 심산이었다. 제 나라에서, 궁에서 헤더 구드윈이 그의 정당한 연인으로 누리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쥐여 줄 생각이었다.
게일의 위치는 이자벨의 말 한마디에 날아갈 수 있을 만큼 가벼웠으며, 황제의 측근 모두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애는 네 머리 위에 있지. 명심해라.”
“물론입니다. 폐하.”
볼모로 끌려온다 한들, 그 발밑에 비단을 깔고 보석으로 만든 꽃을 뿌리면서 황제가 손수 안아 데려올 여자를 무시할 인간이 이 샬덴에 있겠습니까?
* * *
“알렉스!”
나긋하게 걷는 평소의 걸음은 어디다 팽개쳤는지, 알렉스는 그에게 한달음에 달려오는 이자벨의 허리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누님. 조심해야죠.”
사뿐히 바닥에 내려놓자 이자벨이 그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알렉스는 엉거주춤하게 선 채로 웃었다.
“왜요? 제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음, 그것도 있고. 아주 중요한 소식이 있어서.”
알렉스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난 이자벨의 뺨이 약간 상기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그렇게 냉정해 보이는데, 조금만 감정이 들어가면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살짝 난처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급하게 말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래도 너한테 가장 먼저 말해 주고 싶어서. 내 경우를 생각해 보면, 네 소식을 다른 사람한테 먼저 듣는 건 너무 기분 나쁠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무슨 소식을 알려 주려고 이렇게 뛰어 왔어요?”
엉클어진 이자벨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알렉스는 부드럽게 물었다.
이자벨은 애써 밝게 뛰어왔지만, 끌어모은 용기가 알렉스 앞에서 파스스 흩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알렉스는 묘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이자벨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렉스한테 성인이 될 때까지는 같이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알렉스가 실망하면 어떻게 하지? 나를 미워하게 되면?
“무슨 일입니까?”
“로윈 백작을 어떻게 생각하니, 알렉스?”
그는 이자벨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들에게 로윈 백작은 의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누님.”
“내 생각에는 말이야. 음. 알렉스. 만약 네가 로윈 백작에게 그리 애착이 있는 게 아니라면…….”
“있을 리가요.”
이자벨은 긴장으로 굳은 입매를 파르르 떨면서도 미소를 그렸다. 알렉스는 차오르기 시작하는 불안에 고개를 털어냈다.
“그럼 알렉스, 누나가 결혼을 해서 네 새로운 보호자가 되는 건 어떨까?”
“결혼…… 말입니까?”
“응. 수도에 새로 저택을 사고, 거기 네 방도 만들 거야. 물론 넌 이곳의 후계자니까 계속 들락날락하기는 해야겠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불편하지 않게 너랑 나랑…….”
알렉스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치를 보면서 재잘재잘 조건들을 늘어놓는 이자벨은 여전히 참 예뻤다.
그것참 빌어먹게도 예쁘지. 화도 못 내게.
알렉스는 까닭 없는 배신감에 시린 눈을 깜빡였다. 그는 정말 어린 아이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누이가 듣고 놀라 도망갈 말들을 속으로 삼키니 남은 것은 정말 투정뿐이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어디도 안 간다고 했잖아요.”
“어디도 안 갈 거야. 알렉스. 누나는 알렉스밖에 없어. 응? 그러니까 울지 마…‥.”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마저 달콤하게 들렸다. 그래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알렉스는 겨우 열다섯이었다. 그는 쉽게 제 분을 토해냈다.
처음부터 그는 대공자가 싫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 가졌고, 앞으로도 다 가질 인간이. 왜? 그런데 왜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이자벨을 빼앗아 가? 당신은 이자벨이 아니어도 가진 게 많잖아. 난 내 누이밖에 없는데.
“대공자가 청혼했습니까? 왜요? 전쟁터에 총각으로 가긴 아깝다고 합니까?”
“알렉스…….”
아이들의 울음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는 이자벨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먼저 했어, 청혼.”
“뭐라고요?”
“내가 먼저 한 거라고…….”
“……날 버리고 싶었어요?”
이자벨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됐다. 더 다정하고 불쌍하게 굴어야 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어리고 가진 것이 없었기에, 그녀의 애정이 거둬진 순간 이자벨을 붙잡을 수 있는 명분이 없으니까.
하지만 알렉스의 세상이 방금 부서졌다. 알렉스의 세계를 만든 사람이 그의 세상을 부수었다. 끔찍하도록 무서웠다. 발밑에 아무것도 없이 쑥 밑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네게 더 많은 걸 보장해 줄 수 있어. 알렉스, 내 첫 번째는 늘 너야. 시그한테도 말했어. 늘 널 우선으로 둘 거라고.”
“거짓말. 나랑 먼저 약속했잖아요.”
당신은 언젠가는 날 버릴 거야. 봐, 벌써 다른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하잖아.
그런데 난 당신을 못 버려. 그럼 난 어떻게 해?
* * *
나는 언젠가부터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적어 둔 종이를 펼쳐 보지 않았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과거의 알렉스와 지금의 알렉스가 다르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그 이후로 너무 많은 일이 터지고 바뀌어서, 나는 이제 정말 그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스무 살 때도 터지지 않았던 샬덴과의 전쟁이 터지고, 엘리자베스는 사교계에서 군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바르펜시아 대공자와 약혼하고, 사실은 알렉스가 여자아이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과거가 꿈처럼 느껴졌다. 현실은 너무 달랐고, 많은 것이 변했다.
가끔은 내가 모든 것을 망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일은 수습할 수 없는 곳에서 벌어졌고, 알렉스에게 더 나은 것을 쥐여 주겠다는 다짐은…….
글쎄. 그 애가 울었지. 내가 아무리 짓밟아도 쉽게 울지 않았던 애를 울렸어.
좋은 것과 원하는 것. 그건 몹시 어려운 문제였다.
시그에게 청혼한 건 그가 내게 완벽한 선택지가 되어 줄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아끼지 않을 테니까. 알렉스에게도 분명 훌륭한 아군이 되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시그의 헌신적인 애정에 감동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에게 청혼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계산하더라도 시그와 결혼하는 것은 내게도, 알렉스에게도 나은 선택지였다. 그걸 알렉스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 애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다.
내가 당장 시그와 결혼하는 것을 그 애는 원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원하는 대로 그 애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옆에 있게 되면, 시그와 결혼은 힘들 것이다. 아마 아버지가 고른 적당한 귀족과 결혼하겠지.
그럼 난 네게 줄 수 있는 게 적어져, 알렉스. 그래도 내가 결혼하는 게 싫어?
이게 너한테도 나한테도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잘 모르겠어. 내가 네가 원하는 답을 내어줘야 할까. 아니면 너한테 이로울 답을 내어줘야 할까. 열다섯의 네가 한 선택을 스무 살의 네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이가 일찍 결혼하는 것이 싫다고 우는 소년이 자라면, 더 큰 뒷배가 되어 주지 못하는 누이를 원망하지 않을까.
지금은 가족이라고는 나밖에 없다고 울어도, 나중에 네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까.
“네가 더 크면, 진짜 가족이 생기면…….”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나는 눈물을 멈추지 않는 알렉스의 머리를 도닥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때가 되면.”
날 안고 있는 알렉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내 선택이 옳다고 생각할 거야, 알렉스.”
“싫어요……. 누님이 아무 데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지 마세요.”
“평생 결혼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잖아. 나중에 아버지가 골라 온 상대가 타국의 사람이거나 하는 것보다는…….”
결혼만큼 괜찮은 거래 수단은 없었다.
차라리 어디 무너져 가는 집안이면 모를까, 로윈 백작가 정도의 귀족 가문들은 당연하게도 결혼을 통해 제 부과 권력을 불려 나갔다.
내 식사 한 끼를 마련할 돈이면 평민 가족의 일주일 치 식량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로윈 백작의 딸로 풍족한 삶을 누렸고, 결혼은 그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절차였다.
내가 시그니티와 결혼하면, 로윈 백작은 바르펜시아 대공을 뒷배로 가질 수 있어. 그게 안 그래도 혈통에 약점을 가지고 있는 알렉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왜요? 왜 평생 결혼을 안 하고 나랑 살면 안 돼요? 로윈 백작 때문에?”
“알렉스.”
애가 떼를 쓰듯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타이르듯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스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그득하게 묻어났다.
“난 누님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래요?”
누님이 뭘 해도 결국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거 알면서. 왜 나한테 그래요.
알렉스는 차마 더 애원하지 못하고 고개만 떨어트렸다. 그의 울음이면 뭐든 들어줬던 누이는 이제 없는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대공자와의 결혼 이야기를 들은 후, 알렉스는 더욱 바빠졌다.
그의 누이는 마치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대가를 주듯, 그에게 상단의 모든 권한을 넘겨줬다. 그는 겨우 며칠 만에 혼자 자리한 집무실에 익숙해지는 것이 싫었다.
알렉스는 책상 위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다 몸을 일으켰다. 한때는 이자벨의 집무실이었던 공간이 서류로 가득 차 있었다.
“할 일 많을 텐데. 나가려고?”
문가에 삐딱하게 기댄 여자는 피곤함에 절어 있는 눈가를 문질렀다.
“아가씨가 부탁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네게 아가씨가 가졌던 것만큼의 권한은 없어.”
“알고 있어, 애니.”
이자벨은 알렉스를 달래려는 듯 그녀가 가졌던 모든 것들을 알렉스에게 주려 했다. 알렉스는 지나치게 일찍 받은 상단의 지분에 오히려 화가 났다.
다 두고 그 남자한테 가려고?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생각이 부정적으로 뻗어 나갔다. 알렉스는 간신히 웃었다.
“누님이야 늘 특별하니까.”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알렉스. 빨리 지금 업무에 적응하길 바랄게.”
애니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알렉스를 찜찜한 눈으로 응시하다 떠났다. 할 일이 많았다.
* * *
“결혼을? 네 나이는 아직…….”
“왕실의 허가만 받으면 결혼할 수 있는 나이죠, 아버지.”
요사이 저택에 들어오지 않거나, 밤늦게 들어오는 백작과 대화를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며칠을 기다려 얻어낸 기회에 빠르게 대공자와의 결혼을 입을 담았다.
“그는 제 약혼자예요. 로윈에게도 훌륭한 선택지죠. 전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로윈 백작은 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설사 그가 전쟁터에서 죽더라도, 저는 대공비로 남을 수 있어요.”
나는 그에 대한 감정보다 결혼으로 인해 얻게 될 실익을 강조했다.
그에게 감정적인 호소가 전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감정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을 거라고.
“알렉스는 네 결혼을 반기지 않던데.”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나는 잠깐 할 말을 잊고 눈만 깜빡였다.
로윈 백작이 알렉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얼마 만이던가?
나는 백작이 알렉스의 이름을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백작은 꽤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리 무감각하지 않게 알렉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직 어리니까요. 하지만 그 애한테도 좋은 일일 거예요.”
“열다섯이 어린 나이는 아니지.”
귀족들의 기준에서나 그렇겠지.
비록 후방 보급이나마 열다섯짜리를 전쟁에 밀어 넣는 것은 지독한 짓이었다. 알렉스는 어리고, 어쩔 수 없이 곁에 있어 줄 보호자를 필요로 했다. 내가 아닌 성인의 보호자가.
나는 알렉스를 데려와 놓고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한 백작이 하는 말에 반발심이 들었다.
“언제부터 그 애의 생각을 신경 쓰셨죠?”
백작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 그 애의 생각을 신경 쓰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하는 말이다, 이자벨.”
“시간이 지나면 납득할 거예요. 우리 문제에 아버지께서 신경 쓰실 건 없어요.”
“우리라.”
백작은 메마른 얼굴로 나를 한참을 응시했다.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백작님께서 정해 주신 상대잖아요.”
나는 다만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가 마음에 드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똑바로 백작을 응시했다.
“제 마음을 고려하고 잡은 혼처도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는 단호하게 로윈이 얻을 이익을 나열했다. 왕실의 외척이 될 수 있으며, 몇 개의 사업에서 확장을 시도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이보다 제게 나은 상대는 없어요.”
“나은 상대가 있다면?”
만약을 가정하는 건 백작의 버릇이 아니었다. 나는 단순하게 끝날 대화가 이상한 쪽으로 빠진다고 여겼다.
“설사 왕자님이라고 해도 그보다 나은 상대는 아니에요.”
“왜? 로윈이면 왕자비를 노려도 가능성이 영 없지는 않아. 전쟁으로 약혼이 깨지더라도 네게 흠이 될 건 없지.”
“확실한 쪽에 배팅해야죠. 우왕좌왕하다가는 둘 다 놓칠 텐데.”
“확실?”
“대공자는 절 사랑해요. 절 위해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죠. 왕자님께선 그럴까요?”
백작의 얼굴에 기시감이 스쳐 지나갔다.
“너는 어떻고?”
“제 의사는 중요치 않아요. 중요한 건 로윈이 제 결혼으로 뭘 얻을 수 있느냐죠.”
나는 몇 번이고 입이 닳도록 언급했던 손익을 다시 입에 담았지만, 백작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곧게 나를 응시했다.
“그래서, 너는 대공자를 어떻게 생각하지?”
“백작님.”
“대답해라, 이자벨. 그럼 나도 답하지.”
감정적인 측면에서 백작과 나는 단 한 순간도 교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의무 이상의 것을 내게 제공하지 않았다.
알렉스를 지독하게 닮은 얼굴은 늘 어둡거나 차갑게 메말라 있었고, 나는 그걸 해결할 방법을 몰랐다.
“마음을 주게 될지도 모르죠. 저는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해요. 그는 사랑에도 성실하니까요.”
백작은 내 말에 처음으로 동요했다. 찌푸려진 미간에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전 제가 로윈임을 잊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나는 일부러 아버지라는 호칭을 입에 담았다.
당신은 친딸도 아닌 나를 딸로 키웠지. 그러니 나도 보답하겠다는 거잖아. 도움이 되는 가문에 시집을 가서, 로윈을 위해 사는 거. 당신한테도 나한테도 이득이잖아.
그는 내 최선의 선택지가 되려고 노력했어. 그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어.
백작은 한참 침묵하더니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짤막한 허락이었다. 나는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문득 머릿속으로 울던 알렉스가 스쳐 지나갔다.
* * *
엘리자베스는 이제 입 속에 씹히는 흙먼지가 익숙해졌다. 그녀는 닳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우둘투둘한 흉이 가득한 손이 이제는 익숙했다.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전부 철수시켜. 하나도 남기지 말고.”
“하지만 고모님, 성주는…….”
데빈은 여지 하나 남기지 않은 엘리자베스의 결정에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엘리자베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단호해지지 못하는 데빈의 버릇을 이전부터 몇 번이나 지적해 왔지만, 무던한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닥치라고 해.”
“고모님!”
“패장은 말이 없다지. 지금 성주에게 가장 필요한 말은 그거야.”
엘리자베스의 지시에 따라 이미 상단의 일원들은 철수를 준비했다. 데빈은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복잡한 눈으로 응시했다.
엘리자베스는 중요한 서류를 차곡차곡 상자 안에 분류했다.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지. 여기서 물러나는 게 더 이익이야, 데빈.”
엘리자베스는 데빈을 생각해 명령하지 않고 찬찬히 설명했다. 데빈은 그 배려를 알면서도 엘리자베스의 태도에 미련을 놓지 못했다.
“……두벨리는 저희까지 떠나면 완전히 무너집니다, 고모님.”
“틀렸어, 데빈. 두벨리는 이미 무너졌지.”
“두벨리는 아를의 마지막 요새입니다. 저희마저 포기하면 아를은 정말 패배한 게 되는 거라고요!”
엘리자베스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혈기가 넘치는 청년은 뭐가 우선인지도 모르고 날뛰고 있었다.
총명한 것과 영리한 것은 달랐다. 적어도 엘리자베스에게는 그랬고, 그녀는 후자를 더 낫게 평가했다.
“마지막? 두벨리부터 아를의 수도까지 몇 개의 성을 더 거쳐야 하지? 파쉐? 콘졸라? 팜벨? 남은 요새가 몇 개나 더 있었더라.”
“하지만 최전방이…….”
“그걸 왜 네가 걱정하지? 네가 뭐라고?”
어차피 아를은 멸망하지 않는다. 단지 세가 좀 약해지겠지. 그리고 설사 멸망하더라도 그게 엘리자베스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리 상단이 자랄 때 아를이 해 준 게 뭐가 있어서?
엘리자베스는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왕실에 물건을 바쳤다. 그게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애국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굴드 남작의 일을 늘 가슴에 새겼다. 왕실은 그녀가 아닌 굴드 남작을 선택했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했음에도!
아를은 엘리자베스의 충성을 몹시도 당연한 것으로 취급했다. 그 오만에 그녀는 진저리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나라를 팔아넘길 생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나라를 위해 의무 이상의 충성을 바치고 싶지도 않았다.
“데빈, 넌 상인이야. 우린 물건을 팔았고, 이제 더 이상 우리 물건을 사 줄 사람이 여기 없다. 그런데 우리가 왜 여기에 계속 있어야 하지?”
“고모님은 아를의 사람이십니다.”
“아를의 군인은 아니지.”
“군대만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고모님.”
그녀는 서류를 분류하던 손을 멈췄다. 데빈은 그녀에게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그 낭만적인 논리에 엘리자베스는 순간적으로 부러움마저 느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낭만이라고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이해득실의 진흙탕 싸움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거기서 살아남았다.
“여기서 싸우다 우리가 모두 죽기를 원하느냐?”
“승리할 수도 있지요. 설사 죽더라도 아를의 기상을 보여 줄 수 있…….”
“우린 군인이 아니야!”
휙, 데빈의 얼굴로 서류 하나가 던져졌다. 몇 달간의 장부를 요약한 것이었다.
“패색이 기울 때부터 철값만 받고 무기를 넘겼다. 식량은 반값에 후려쳐졌고. 그 이상으로 내가 뭔가를 해야 했다고?”
엘리자베스는 실망이 넘쳐 분노까지 내보이고 있었다.
“내가 널 너무 곱게 키웠구나, 데빈.”
“고모님, 제 말은…….”
“무기 한 번 쥐어 본 적 있느냐? 사람을 한 번 죽여 본 적은? 네 뜻대로 움직이면 모조리 죽어 갈 상단의 사람들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데빈은 엘리자베스의 분노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귓가에 바쁘게 돌아다니는 상단 사람들의 고함이 울렸다.
“이길 수 없는 전장에 뛰어드는 고귀한 희생은, 네 목숨만 가지고 하려무나. 난 이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켜야겠으니!”
엘리자베스의 인생은 내내 전쟁이었다.
그녀는 고귀한 이상과 훌륭한 뜻에 낭만을 느끼기 전에 경멸스러운 눈초리에 대한 수치스러움을 먼저 배웠다. 또한, 희생의 위대함을 알기 전에 죽음의 끔찍함을 먼저 깨달았다.
만약 데빈이 그녀에게 홀로 요새를 지키다 죽겠다 했다면 엘리자베스는 차라리 그의 기상을 높이 샀을 것이다.
그러나 데빈은 엘리자베스에게 희생을 요구했고, 그건 그녀에게는 끔찍할 만큼 책임감이 없는 짓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가차 없이 데빈의 요구를 쳐낼 수 있었다.
“……제가 틀린 겁니까?”
“네 이상에 타인의 희생을 바라지 마라. 옳다는 게 다른 사람의 목숨을 멋대로 다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니.”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데빈이 입을 열었다.
“……철수 준비하겠습니다, 고모님.”
리 상단이 두벨리 요새에서 철수한 날, 아를의 최전방 요새가 붕괴했다.
전쟁의 끝이었다.
전장에서의 패배 소식은 전령의 등에 달려 급하게 수도로 향했고, 그와 동시에 샬덴의 사신단이 출발했다.
제대로 군대가 꾸려지기도 전에 당한 패전에 아를의 수도는 두 가지 결정을 놓고 갈라져 싸워댔다.
싸울 것인지, 협상할 것인지.
* * *
“아가씨.”
샐리가 알렉스의 방문 근처 복도를 계속 맴돌고 있는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를 핑계 삼아 결국 알렉스의 방문에서 멀어졌다. 알렉스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겠지.
“무슨 일이야?”
“손님이 오셨어요.”
“누구?”
“펠먼 영애께서 지금 응접실에 계십니다.”
“캐롤이?”
성인이 되고 나서 영 소식이 닿지 않던 인물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군으로 노선을 튼 이후로는 그전만큼 거한 선물을 갖다 안기지 않아서인지 서로 시들해지기도 했고.
서로 이름을 부르고 친근하게 굴었지만, 정치적인 관계일 뿐임을 서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도무지 캐롤 펠먼이라는 여자가 내게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온갖 파티에 불려 다니느라 바쁜 후작 영애께서 여기까지는 왜?
의문을 품고 응접실 문을 열자 금발을 가진 미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부터 예쁘장하게 생겼음을 알았지만, 정식으로 꾸미기 시작하니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펠먼은 나를 보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치솟았던 눈매를 누그러트렸다.
“이자벨.”
“오랜만이에요. 펠먼 영애.”
“캐롤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요. 우리 사이에 뭘.”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그녀는 내게 작게 웃어 보였다. 나는 그녀와 마주 앉고서야 우리가 거의 일 년 만에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잘 지냈나요?”
“늘 똑같죠. 캐롤은요?”
“글쎄요.”
캐롤은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건 이전에 한 번도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쉽게 용건을 꺼내지 않는 캐롤의 모습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직도 부트 남작 부인과 친분이 있나요?”
침묵 끝에 나온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부인께서 수도를 떠나신 지 꽤 되어서…….”
캐롤은 내 말에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그녀는 몹시 지쳐 보였다.
“이자벨이 스스로 말하던 것보다 더 친분이 깊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굳이 숨길 생각도 없었잖아요. 아닌가. 그냥 우리를 멍청하게 봤던 건가요?”
“캐롤, 난…….”
“날 좀 도와줘요, 이자벨.”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던 캐롤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난 조금 당혹스러웠다.
내가 뭘 할 수가 있어서? 엘리자베스에게 대신 부탁이라도 해달라는 건가? 무엇을?
“내가 캐롤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가요?”
“부트 남작 부인에게서 아무 연락도 없었나요?”
캐롤의 얼굴이 실망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연락이야 몇 주 간격으로 오고 있었지만, 별다른 얘기는 없었다.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 말이에요, 이자벨. 그러니까…….”
캐롤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더니 문 쪽에 붙어 있던 샐리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믿을 만한 아이예요.”
“난 지금 아무도 못 믿어요.”
캐롤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향수 냄새가 아닌 분 냄새가 났다. 향수를 뿌릴 정신도 없었다라.
“전쟁이 끝났어요, 이자벨. 아를이 졌어요.”
뭐?
나는 그대로 굳었다.
캐롤은 말을 끝내자마자 내게서 떨어져 다시 주위를 살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미인은 눈을 굴리며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걸, 그걸 어떻게…….”
“하녀를 내보내요, 이자벨. 제발.”
오만한 영애가 저자세로 하는 간청은 그녀의 말에 대한 신뢰를 더 증폭시켰다.
“샐리. 나가 있어.”
나는 샐리를 향해 손짓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캐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더 말해 봐요. 무슨 일이에요? 전쟁이 벌써 끝났다고요?”
“가족들이 날 포기했어요. 그랬겠죠, 왕족 중에서 가장 정통성이 없는 게 나니까. 난 가기 싫어요. 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높아진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캐롤은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는 본인이 처한 상황에 분노와 절망을 함께 느끼고 있었으며 그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벌써 협상이 시작됐나요?”
“아뇨. 아뇨.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샬덴에서 서신이 왔대요. 공녀를 요구한다고. 빼앗긴 성을 돌려받으려면 원하는 대로 다 주겠죠. 그러니까 내가 선택된 거예요. 난 그렇게는 못 해요. 차라리 죽을 거야.”
캐롤의 눈은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지 내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이자벨. 부트 남작 부인만이 날 도와줄 수 있어요.”
“후작 영애도 거부하지 못한 걸 남작 부인이 가능할까요? 캐롤, 일단 진정하고…….”
“군상이잖아요! 두벨리 요새에서 리 상단에게 진 빚이 얼마죠? 이번 전쟁 협상에서 부트 남작 부인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제발, 이자벨. 난 죽고 싶지 않아요.”
“간다고 죽지는 않아요, 캐롤.”
그녀가 안타까운 것과는 별개로 그 정도의 권한은 엘리자베스에게도 없었다.
나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충격받아 커진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당장 결혼을 해요, 캐롤. 그간의 우정으로 충고하자면 두 가지뿐이에요. 결혼하거나, 끌려가거나.”
캐롤은 내 말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우는 대신 웃었다. 흐느끼는 웃음소리가 허무했다.
“하하, 그 생각을 나만 했을 것 같아요? 이자벨, 이미 늦었어요.”
내일 금혼령이 떨어질 거예요. 아무도 예외가 되지 않는.
캐롤은 그 말만 남기고 저택을 떠났다. 나는 덩그러니 남겨진 채 입술만 초조하게 깨물었다.
캐롤은 끊임없이 울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꾸민 그녀는 가족들이 모두 볼 수 있는 정원에서 과시하듯 슬픔을 전시했다.
후작 부인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형제자매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하루에 수십 장씩 오던 편지가 뚝 끊겼다. 간단한 다과회조차 쉽게 열리지 않았다.
공주들부터 나서서 드레스의 보석을 떼어냈고 지금까지 방탕하게 굴었던 것이 다 거짓말인 것처럼 손등과 목을 죄다 가린 어두운색 옷들을 입었다.
파티가 열려 봤자 귀족들은 옹기종기 모여 담배나 피우며 떠들어대기 바빴다. 샬덴에 보내야 할 물건들과 아를의 자존심, 패배의 책임 같은 것들을.
캐롤은 이제 자신을 쫓아다녔던 소위 친구나 구혼자들이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최악의 순간에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캐롤은 그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핏줄과 가문이 등을 돌렸을 때 그녀에게 남은 게 무엇인지 곱씹었다.
진정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제 것처럼 휘둘렀던 가문이 힘과 명예는 온전한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가문은 힘과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캐롤을 버렸다.
“이런다고 변하는 건 없어요.”
이제 겨우 열다섯이 된 어린 막내의 속삭임에 캐롤은 눈을 치켜떴다.
“품위를 지켜요, 누님.”
막 사춘기가 올 법한 나이의 소년은 누이의 매서운 눈초리에 눈을 맞추지 못했다.
“에버릭. 네가 나였다면 더한 짓을 했겠지. 내가 고상하여 고작 울고만 있는 걸 다행이라 여겨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가문을 위해서는…….”
“난 가문을 위해 죽고 싶지 않아!”
흐르던 눈물이 말랐다. 살이 좀 붙었다지만 여전히 예쁜 누이의 눈에는 숨기지 못한 분노가 가득했다.
에버릭은 변명하듯 가족들이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국경이 안정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어요. 몇 년 정도만 있으면 가문에서도 손을 쓸 수 있으니까.”
하하. 캐롤은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드레스를 피며 그녀는 막냇동생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진심이니? 네 가정 교사를 바꿔야겠구나, 에버릭.”
하녀가 급하게 다가와 그녀에게 외투를 입혔다. 캐롤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언제 울었냐는 듯이 매서운 눈으로 에버릭에게 다가갔다.
“사랑하는 우리 막내.”
그녀는 순진한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긴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단다. 공주조차도 말이야. 에버릭 펠먼. 내 걱정을 하는 이는 너뿐이니 충고할게. 가문은 얼마든지 널 버릴 수 있어. 그러니 조심하렴. 다음에 운이 없는 것이 너일 수도 있으니.”
굳은 동생을 지나친 캐롤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삶을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았다.
* * *
엘리자베스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옷을 드디어 갈아입은 상쾌함을 만끽하기도 전에 밀린 보고들을 확인했다.
하필 최전방에 있던 탓에 거의 수도와 연락이 끊어진 채로 지냈던 여파가 산더미 같은 서류들로 돌아왔다.
“금혼령이라.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이 기회에 귀족들의 기강을 한 번 잡겠다는 거죠.”
국경에서 벗어난 이후로 말수가 줄어든 데빈을 대신해 잭이 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더 신중해짐과 동시에 우울해진 조카를 무시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왕이? 그는 대공이 아니야. 그럴 위인도 못 돼.”
“그렇지만…….”
“어차피 이미 공녀로 뽑힐 영애들부터 각 가문에 차출될 재산까지 전부 결정이 난 상태인데, 그 이유 말고는 뭐가 있죠?”
전쟁터까지 따라가지 않고 수도의 본점을 지켰던 애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냉소적으로 덧붙였다. 그녀는 귀족들에 관해서는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
“국왕 폐하도 오래 참으셨죠. 너무 눌려 살았던 걸 본인이라고 모를까.”
“나라를 위해서는 그편이 더 낫죠. 명군이 되려다가는 폭군이 되기에 십상이니.”
엘리자베스가 함께 둘러앉은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상단에서 결정권을 가진 고위직은 죄다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전부가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그래서, 아무도 왜 금혼령이 내려졌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는 거야? 상상이라도 해 봐.”
섣불리 대답하지 않은 이들 사이로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이자벨은 이미 그녀가 가진 모든 발언권을 알렉스에게 넘겼다.
그들 중 가장 어린 주제에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소년에게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왕실의 명령은 사소한 것이라도 분석해 버릇하는 게 좋지.”
“제 말은, 그 어떤 결과라도 상단에는 별 지장이 없을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샬덴이 혼인을 앞둔 영애를 굳이 집어 요구했다거나, 아니면 왕께서 당장 누군가의 혼인을 막고 싶어 했을 수도 있더라도……. 그게 상단의 이익과 상관있습니까?”
엘리자베스는 알렉스의 말에 코웃음 치며 일어났다.
외모만 그럴듯한 애새끼가 참 잘도 자랐지. 이자벨이 말하는 착한 동생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저 그런 상단으로 남을 거라면 말이다.”
알렉스는 고개만 끄덕이고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둘러앉은 이들을 죽 확인하며 명령했다.
“잭은 정보원들 돌리고, 애니는 지금까지 밀린 보고 전부 들고 올라와.”
어두운 기색의 조카를 향해 시선 하나 주지 않고 그녀는 덧붙였다.
“데빈, 넌 알렉스한테 지금까지 군에 납입했던 물자들 대금 확인하고. 나머지는 전장에서 했던 거 인수인계나 확실히 하고 집이나 들러.”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인간들 사이로 알렉스는 데빈을 붙잡았다.
“데빈.”
눈 밑이 까맣게 물든 데빈은 알렉스에게 이끌려 나갔다.
“오랜만이네. 알렉스.”
“따라와.”
이미 웬만한 성인만큼 키나 덩치가 큰 알렉스는 쉽게 사람들을 헤치고 무리를 빠져나갔다.
이내 서류만 가득 들어찬 좁은 사무실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은 알렉스는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데빈을 향해 턱으로 작은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그래. 고마워.”
평소라면 내숭이라도 떨며 걱정의 말이라도 던졌겠지만, 지금은 본인의 머릿속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목록,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필요해?”
“……무기랑 식량에 해당하는 건 전부. 의약품은 따로 처리할 거야.”
“전부? 다른 애들 붙여 줘?”
본인도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하는 말에 데빈은 새삼스럽게 알렉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앳된 티가 남은 얼굴을 제외한다면 어리다고 볼 덩치도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데빈의 얼굴이 약간 펴졌다.
“됐어. 필요하면 내가 알아서 충원할게.”
“네 왼쪽 책장부터 옆 책장 위에서 세 번째 칸까지. 그냥 여기서 자리 펴. 혼자서 하면 며칠은 걸릴 텐데.”
“어마어마하네.”
“전쟁이니까.”
무심하게 대꾸한 알렉스는 뒷목을 주무르며 몸을 일으켰다.
성장통이 유난히 심하게 왔다. 무릎부터 목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간단한 산책이나 하고 오려는 알렉스의 뒤로 데빈이 중얼거렸다.
“나라 간의 전쟁은 명예로울 줄 알았는데…… 결국은 속물적인 싸움이었군.”
“전쟁이든 애들끼리의 다툼이든, 벌어지는 이유는 똑같지. 남의 것이 탐나니 빼앗으려는 것. 그런데 뭘 기대했길래?”
데빈은 픽 웃었다. 알렉스는 문에 기댄 채 기운이 쭉 빠진 데빈을 내려다보았다.
“……좀 더 귀족적인 거?”
“귀족이라고 뭔가 다른가?”
“다를 줄 알았지. 소백작 앞에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도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내가 특별하다고 배웠고……. 글쎄, 확실히 죽어 가는 모습은 차이가 별로 없어.”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특별해지지는 않지.”
특별한 사람은 귀족이 아니라도 특별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생각이야. 귀족이란 이유로 특별히 고상하거나 품위 있다면, 아마도 나는 더러운 피가 섞여 더러운 생각밖에 못 하는 걸 테지. 이자벨이 특별한 이유가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조상의 피 때문이 아닌 것처럼.
알렉스는 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여자에 대해 곱씹었다. 어차피 결혼해서 그를 떠날 걸 알면서도, 그게 당연하게 예정된 미래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왕이 내린 금혼령에 안도했다. 겨우 몇 달 가지 않을 그 명령 탓에 저택을 떠나지 못할 이자벨이 좋아서.
그의 사랑스러운 누이는 어쩌면 울지도 몰랐다. 대공자와의 결혼이 미뤄진 것에 슬퍼서, 그를 더 일찍 버리고 떠나지 못한다는 것에 우울해져서.
개소리. 이자벨이 날 버리는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는 머릿속에 떠도는 피해망상들을 향해 닥치라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상처받은 얼굴이 눈을 감으면 선했다. 그밖에 없다고 애원하는 목소리도.
‘거짓말이 아니야. 이자벨은 날 사랑해. 그녀의 가족은 나뿐이야. 그녀의 첫 번째는 나라고. 절대 누구도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없어.’
알렉스는 자꾸만 들리는 환영 같은 소리에 머리가 아팠다.
정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도 네가 첫 번째일까? 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너와의 약속을 어겼는데도?
어쩌면 이미 너는 첫 번째 자리를 잃어버린 걸지도 몰라. 너만 착각하고 있는 거지.
머릿속에서 악마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아냐. 그녀는 날 사랑해.’
그래. 상냥하고 아름다운 네 누이는 널 사랑할 거야.
너도, 그 남자도, 앞으로 탄생할 네 조카도, 어쩌면 그냥 지나가던 길고양이가 귀엽다고 사랑할 수도 있겠지.
넌 더 이상 유일하지도 특별하지 않은 존재가 될 거야.
‘……이자벨은 날 사랑해.’
유일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사랑에 만족할 수 있어? 견딜 수 있어? 너처럼 끔찍한 욕심쟁이가?
머릿속의 목소리가 깔깔 웃으며 단언했다.
넌 못 해. 너도 알잖아.
‘……닥쳐. 꺼져 버려.’
* * *
샬덴과의 전쟁에서 아를은 군대를 모으기도 전에 패배했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가 정해진 전쟁 때문에 귀족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제 손익을 셈하기 바빴다.
시그니티는 가만히 대전에 서 있었다. 모인 귀족들의 시선이 한 번씩은 그에게 가 닿았다.
“……대공자?”
“대공을 닮았군요.”
“그 여자도.”
“전하께서는 조카를 소개할 마음이 없으신 것 같네요.”
“그럴 만도 하죠.”
소곤거리는 얘기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는 힐끗 왕좌에 앉아 있는 왕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버지와 닮지 않았다. 형제임에도 그 색채부터 분위기까지 그 어떤 것도 닮지 않았다. 손가락만 까딱여도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화려하고 눈을 끄는 아버지와 달리, 왕은 고요하고 차분했다.
“그만.”
팔걸이를 치면서 내뱉는 말은 평이한 어투였다. 말소리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이내 위엄 있고 웅장한 목소리로 귀족들을 소개했을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샬덴의 사절단이 아를의 태양, 위대한 군주, 에드워드 왕의 정당한 후계자, 아를의 왕께 알현을 청하옵니다—!”
대전의 문이 열렸다. 앞에 선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회색빛 갑옷을 걸친 이들이었다. 무장하지는 않았으나 직접적인 위협이나 다름이 없었다. 귀족들 사이로 불안이 퍼져 나갔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중년의 사내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샬덴의 파벨 후작으로, 주인의 은혜를 입어 아를의 왕을 알현합니다. 태양의 영광을.”
예의를 모른다 여겨지는 샬덴의 귀족치고는 정중한 태도였다. 뭔가 협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속닥거림이 입과 입을 통해 스쳤다.
“파벨 후작이면, 샬덴 왕과 그리 먼 핏줄도 아닐 터. 그 이상의 예의를 보일 필요는 없다.”
여우 같은 왕의 발언에 시그니티는 속으로 약간 웃었다.
그 이상의 예의를 차릴 생각도 없는 사람을 두고 마치 은혜를 베푼 것처럼 말하다니. 성격은 그의 아비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러하시다면 곧바로 샬덴의 요구를 고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본론에 들어가려면 최소한 한두 시간은 탐색과 겉치레를 거쳐야 하는 아를에서는 오히려 무례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역시 샬덴은…….”
“무례한 야만인들…….”
왕이 손을 들었다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만.”
조용해진 이들을 뒤로 한 채 왕은 사절단을 내려다보았다.
대전이 아니라 전쟁터에 어울릴 법한 이들이었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사절단의 책임자 또한 외교관이라기보다는 기사에 가까웠다.
웃음기 하나 없는 사절단을 내려다보며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하지.”
“국경에 자리한 샬덴의 군대를 물리는 대가로 아를의 영지 16곳과 그에 속한 42개의 봉작에 준하는 값, 그리고…….”
웅성거림이 점점 심해졌다. 시그니티는 눈을 찌푸렸다. 샬덴의 요구는 생각보다 과하기는 했으나, 예상 범위 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마지막으로 전사한 샬덴의 병사들에 대한 위로금 조로 공녀를 요구합니다, 전하.”
브랜든은 아를의 몇 년 치 예산에 달하는 공물을 요구하는 샬덴의 사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것이 끝인가?”
“예. 전하. 저희 폐하께서는 전하께서 협상을 받아들이신다면, 곧바로 군대를 물리실 것이라 했습니다.”
혈기가 넘치는 젊은 귀족들 몇은 꽤 분개한 듯 보였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이건 단순한 보여 주기식일 뿐이었다. 이미 샬덴의 요구는 아를에게 전달된 상태였다. 브랜든은 이미 차출되고 있는 공물들을 떠올리다 눈을 감았다.
침묵하는 왕을 대신해 르포 백작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16개의 영지는 과합니다. 협상할 여지가 있다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절단의 눈이 모두 르포 백작에게 쏠렸다. 그 압박에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샬덴의 폐하께서는 그리 ‘통보’하셨습니다, 전하.”
이는 말로만 협상이라 이름 붙여진, 샬덴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 * *
미하일은 투구를 벗었다. 회색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흩어졌다.
“폐하. 부디 지금이라도 돌아가심이…….”
“괜한 소리 내지 마라, 후작.”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후작은 적진의 한가운데나 다름이 없는 곳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의 주인을 응시하다 결국 고개를 떨어트렸다.
왕의 말에 반발할 수 있는 샬덴의 귀족은 없었다. 그나마 말이라도 꺼내 볼 수 있었던 것은, 후작의 피에도 샬덴 왕가의 피가 몇 방울은 흐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를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나?”
“전부 수용하기에는 아를의 왕이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폐하.”
“알아. 그래서 그랬지.”
샬덴의 왕은 20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17년 동안 왕좌를 지키고 있었음에도 아직 젊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왕의 옆을 차지한 여자는 없었다.
제 형제자매들을 몰살할 때, 갓 결혼한 새 신부였던 부인을 죽여 버린 후로 귀족들이 차마 제 자식들을 내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밀어붙여.”
“어디까지 말입니까?”
“그 대신이라면 사람 하나쯤은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미하일은 투구를 손으로 던졌다 받으면서 웃었다. 파벨 후작은 처음 보는 황제의 웃음에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버러지 같은 게 눈은 있어서…… 감히 내 공주님을 탐내지.”
그는 왕좌 바로 아래 자리한 잘생긴 청년을 떠올렸다. 왕보다 더 시선을 잡아끄는 청년이었다.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화려한 미남을, 미하일은 망설임 없이 격하했다.
“……원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주저하며 묻는 파벨 후작의 말에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물결치는 금발과 맑은 녹안을 상상했다.
실제로 보면 어떨까. 초상화만 봤을 때도 그렇게 두근거렸는데. 우리 딸. 실제로 보면 얼마나 당신을 닮았을까, 헤더.
파벨 후작은 즐거워 보이는 황제를 보며 침을 삼켰다. 그를 비롯한 샬덴의 귀족들은 황제가 사람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샬덴의 황제는 대개 무심하고 뭔가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떤 분이신지, 여쭈어봐도…….”
툭. 툭. 던져졌다 떨어지는 미하일의 투구가 바닥을 굴렀다. 나뒹구는 투구를 바라보던 파벨 후작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심기를 거스를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폐하. 용서를.”
미하일은 무릎을 꿇은 신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후작은 자기 이마를 땅에 대고 입을 열었다.
“폐하. 용서를…….”
“이자벨.”
후작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하일은 내키지 않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두 번은 말하지 않을 테니 기억해 둬라.”
“예. 폐하.”
“이자벨. 이자벨…… 로윈이다.”
돌아가면 당장 저 성을 떼어버려야지.
그는 헤더의 딸 이름 뒤에 자신의 성이 붙어 있지 않다는 것에 끔찍함을 느꼈다. 로윈이란 성을 가진 인간을 세상에서 전부 지워 버리고 싶을 만큼.
“곧 열여덟이 되는 아주 예쁜 여자애지. 황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금발을 가지고, 세상 누구보다 똑똑한 눈을 하고…….”
미하일은 이자벨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헤더를 묘사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다정하고, 작은 손발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명랑하게 웃는 그의 연인을. 머리를 올려 묶고, 치마를 동여맨 채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게 더 익숙했던 말괄량이 아가씨.
이자벨 로윈과는 전혀 다른, 넘치는 사랑 속에 자란 여자를 미하일은 묘사하고 있었다.
샬덴에서 익숙하지 않은 온갖 비유들을 사용해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는 황제를 향해 후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한 황제를 목격할 수 있었다.
“나를 대하듯 대해라. 후작.”
“……황후가 되실 분입니까?”
경악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미하일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 생각과는 다르지만, 결국 그렇게 되겠지.”
태자가 누군지는 상관없었다. 미하일은 이자벨을 왕비로 만들 셈이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죽여 버리고 다른 이를 양자로 삼으면 되고. 남자를 만나기 싫다 하면, 적당한 아이를 하나 데려와 태후로 만들어 줘야지.
귀족들이 뭐라고 오해하든 상관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이자벨이 헤더의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와 헤더의 자식. 둘이 사랑했다는 증거이자, 결국 마지막까지 헤더 구드윈에게 남은 미하일의 흔적.
세상에. 헤더, 내 사랑. 심지어 우리 딸은 당신을 똑 닮아서, 어쩌면 그렇게 사랑하기도 쉬운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이자벨이 나를 닮지 않아서, 당신만 닮아서…… 너무 다행이야, 헤더.
* * *
며칠이 지난 후, 캐롤은 다시 이자벨을 찾아왔다.
“난 아무런 힘이 없어요, 캐롤.”
“무작정 도와달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이자벨.”
지난번과 달리 완벽하게 차려입은 캐롤은 내가 알던 펠먼 후작 영애였다.
오만하고 아름다운 그런 여자.
“난 정말…….”
“리 상단에 당신 지분이 꽤 된다는 거 모르지 않아요. 나도 꽤 절박하거든요.”
“옛날 일이죠.”
캐롤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응접실 한구석에 자리한 샐리를 여전히 탐탁지 않은 눈으로 응시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을 만한 하녀예요.”
“나도 내 하녀들을 아껴요. 하지만 가족들도 믿을 수 없는 이 판국에 하녀를 믿을 수 있겠어요?”
“제 하녀는 가족보다 믿을 만하죠.”
난 당연히 로윈 백작보다 샐리를 더 믿었다. 로윈 백작은 정말 자식들의 문제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 반면에 샐리는 내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으니까.
“좋아요. 부탁하러 온 입장에서 더 요구하는 건 무례겠죠.”
“뭐든 난 들어줄 힘이 없어요, 캐롤.”
캐롤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는 한숨을 가볍게 내뱉었다.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내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 동생하고 결혼한다면요?”
뭐?
“알렉스 로윈의 태생을 모르는 귀족들은 없어요. 로윈 가문에 걸맞은 혼처에서는 아무도 딸을 주려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자벨, 당신의 약혼처럼.
그녀는 단단하게 결심한 듯 쉼 없이 의견을 토해냈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았다.
“난 아를의 왕족이자 펠먼 후작가의 영애예요. 혈통적으로 전혀 흠잡을 데가 없죠. 만약 당신 동생이 나와 혼인한다면, 태생적 약점을 내가 보완해 줄 수 있어요.”
“걔는 겨우 열다섯이에요, 캐롤.”
“그럼 약혼부터 해요, 제발. 이자벨, 날 도와줘요.”
난 당신 동생한테 최고의 정치적 파트너가 되어 줄 수 있어요. 약속해요, 로윈 가문을 위해 살겠다고.
나는 캐롤을 찬찬히 훑었다.
캐롤이 다섯 살 연상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미인이었으며, 정치적으로나 혈통적으로나 한 군데도 나무랄 곳이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알렉스가 그녀를 좋아할까?
귀족 간의 혼인에 마음이야말로 가장 쓸모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렉스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캐롤과 약혼시킨 나를 원망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결혼을 해서, 알렉스의 외가 역할을 대신해 줄 수도 있죠.”
내 말에는 힘이 없었다. 캐롤 또한 그 사실을 눈치챘다.
“결혼하면 당신은 로윈이 아니죠. 도와줄 수는 있어도, 진짜 로윈의 안주인만큼은 아니잖아요, 이자벨.”
캐롤이 내 손을 붙잡았다. 차갑게 식은 손이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알려 줬다.
“난 잘할 수 있어요. 태생적인 이유로 당신 동생을 무시하지 않을 거고, 로윈의 번영을 위해 살 수 있어요.”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알잖아요. 난 그렇게 길러진걸. 이자벨. 난 한때는 왕자비로도 거론된 여자예요. 나만 한 결혼 상대는 아를에 몇 없다는 거 잘 알잖아요.”
“당신이 유일하지는 않죠, 캐롤. 당신을 공녀 목록에서 빼내려면 상단이 얼마나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 모르는데…….”
캐롤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점점 더 초조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나한테 필요한 건 명분이라고요. 이미 정해진 목록을 바꿀 만큼 왕실이 빚을 진 상대. 그게 필요한 거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내게 말했다.
“이건 당신 가문에도 이로운 거래잖아요, 이자벨.”
나는 한숨을 쉬면서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난 내 동생을 아껴요, 캐롤.”
“그렇다면 더더욱…….”
“그 애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살기를 바란다고요.”
캐롤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 그렇겠지. 얼마나 허황된 말처럼 들리겠어.
“나도 알아요. 이상한 소리죠. 나도 당신 같은 여자와 내 동생이 사랑에 빠지길 바라지만, 아니어도 그 아이의 선택을 지지할 거예요.”
“……난 정부를 관대하게 용납할 수 있어요, 이자벨.”
“난 걔가 사생아를 만들 상황을 두고 보고 싶진 않아요.”
캐롤은 몹시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면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팔을 주물렀다.
“이자벨. 난 당신이…… 꽤 계산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는데요.”
“내 일에는 그렇죠.”
“……함께 지내다 보면 정이 들어서 사랑에 빠질 수도 있잖아요.”
캐롤은 가까스로 침착함을 찾고 내게 다시 속삭였다. 나는 한참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난 그러니까, 아마도 당신을…… 알렉스에게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요?
“알렉스를 설득하는 건 당신 몫이에요, 캐롤. 난 이미 리 상단의 지분을 걔한테 다 이전했으니까.”
캐롤이 벌떡 일어나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내 목에 매달린 캐롤의 등을 어설프게 도닥였다.
“고마워요, 이자벨. 정말 고마워요. 내가 잘할게요. 진심이에요.”
“알렉스가 당신을 거부할 수도 있어요. 감사 인사를 받기는 너무 이르죠.”
“난 샬덴으로 끌려가지만 않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동생이 당신과 사랑에 빠지길 기도할게요, 캐롤.”
그리고 그 애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내가 늘 바라왔던 꿈처럼.
* * *
“알렉스……?”
나는 연무장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사용한 것 같은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알렉스? 여기 없니?”
금혼령이 내려지고 나서, 알렉스는 당장 내가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약간은 유해졌다.
말 그대로 아주 약간.
아이가 떼를 쓰듯이 저택에서 나만 보이면 날 안아 들고 다니는 통에 피해 다니기 바빴다. 그나마 요새는 울 것 같은 표정은 잘 안 하니까 다행일까.
“어디 갔지. 얘가…… 샐리. 알렉스가 어디에 있는지, 꺄악!”
“절 찾았어요?”
허공에 확 떠오른 몸에 비명을 지르기도 잠시, 알렉스의 목소리에 난 간신히 숨을 삼켰다.
“알렉스……! 깜짝 놀랐잖아. 왜 뒤에서 나오는 거야.”
“씻고 왔으니까요.”
알렉스가 날 안아 올려 시선을 맞췄다. 나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날도 추워졌는데, 제대로 말리고 다녀야지.”
걱정도 이제는 습관이었다. 알렉스는 내 말에 작게 웃었다.
“누님이야말로 좀 더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 누가 누굴 걱정해요, 도대체.”
“넌 이렇게 입고서 나한테 하는 말이야?”
나는 얇은 튜닉 하나만 입고 있는 알렉스의 옷을 꼬집으며 말했다.
“훈련하고 나면 더워요. 땀도 많이 나고. 누님은 아니잖아요. 몸도 약하고 키도 작으면서.”
평범하게 오가는 대화에 나는 안도했다. 여전히 알렉스는 품에서 날 내려놓지 않았지만 말이다.
“난 평균 키야. 네가 큰 거라고, 알렉스.”
“알아요. 그래서 매번 피해 다니더니 왜 무슨 이유로 이번에는 절 찾으셨어요?”
“안 피해 다녔어…….”
내 힘없는 웅얼거림에 알렉스가 짧게 웃었다. 묘하게 냉소적인 웃음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알렉스는 내게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요사이를 제외하고는.
“진짜야. 그냥 너도 바쁘고 하니까…….”
알렉스는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회색과 푸른색이 뒤엉켜 있는 눈동자는 꼭 짐승의 눈 같아서 나는 결국 항복했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럼 앞으로는 피하지 마세요.”
“네가 날 좀 내 발로 걷게 해 주면.”
“누님이 결혼하면 이제 이렇게 붙어 있지도 못하는데, 그 정도도 못해 줘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요사이 한숨이 느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냥 알렉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알았어. 대신 안 미워할 거지?”
“전 누님을 미워한 적이 없어요. 그럴 수도 없고.”
“내 말은, 시그 말이야. 너무 미워하지 마.”
“그 남자 편들지 마세요. 내가 첫 번째라고 했잖아요.”
나는 간신히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샬덴과 아를의 사이도 이보다는 좋을 것이다.
“……거짓말.”
“알렉스…… 그렇게 대공자가 싫어?”
“누님이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잖아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으면서.”
알렉스는 머뭇거리다가 날 좀 더 꽉 안았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안 돼요? 이제 대공자가 전장에 갈 일도 없잖아요. 그렇게 일찍 결혼할 필요도 없는데…….”
“내가 5년 있다가 결혼하면, 대공자를 덜 미워할 거야?”
알렉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물기가 젖어 있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속삭여졌다.
“누님이 결혼하는 게 싫어요…….”
나는 울음기 섞인 알렉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알렉스는 오히려 내 몸을 더 꽉 안아 고정시켰다.
“난 엄마도 아빠도 없는데, 누님밖에 없는데…… 계속 나랑 살면 안 돼요?”
착하게 있을게요, 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는 큰 키에 비해 앳되어서, 나는 순식간에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더불어 알렉스에게 빨리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도.
나밖에 없으니까 애가 이러는 거야. 가족이라고는 나밖에 없으니까.
캐롤이 제안하기 전까지 나는 알렉스의 결혼에 대해 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은 내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줬다.
지금부터라도 약혼을 하고, 친구처럼 서로 정을 붙여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정이 고픈 아이니까. 자기 가족은 끔찍이도 아끼겠지. 언젠가 다른 가문으로 떠날 누이보다는 평생 같이 있을 부인과 자식이 더 낫지 않을까.
“알렉스, 있잖아…….”
알렉스는 가만히 이자벨을 내려다봤다. 이자벨은 걱정과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약혼에 대해, 어쩌면 미래에 이루게 될 가정에 대해서.
떠나지 말아 달라는 대답에,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이자벨의 말은 알렉스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알렉스에게 필요한 것은 부인이나 자식이 아니라 이자벨이었다.
그러나 이자벨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기어코 이자벨은 알렉스의 앞에 새로운 가족 후보랍시고 한 여자를 데려왔다. 똑똑하고 아름답지만, 이자벨이 아닌 여자를.
“이자벨!”
어두운 금발을 가진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이자벨에게 포옹했다.
“반가워요, 캐롤.”
친근해 보이는 여자 둘은 서로 뭔가 속삭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알렉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알렉스, 이리 와.”
웃으며 알렉스에게 손을 뻗는 이자벨은 여전히 예뻤지만, 알렉스는 평소처럼 웃을 기분이 전혀 나지 않았다.
“캐롤 펠먼이에요.”
가볍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캐롤은 묘하게 이자벨과 색감이 닮았다.
좀 더 어둡긴 하지만 금발에 총명한 눈을 가진 여자는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자벨과 한 톨만큼이라도 닮았다는 이유로 알렉스의 친절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알렉스?”
이자벨의 재촉에 인사를 하면서도 알렉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알렉스 로윈입니다, 영애.”
“……키가 크시네요.”
나이에 맞지 않게. 캐롤은 뒷말을 일부러 생략했다. 이자벨이 그 말을 받았다.
“백작님을 많이 닮았죠. 알잖아요, 캐롤. 로윈 가문의 남자들은 늘 대대로 키가 컸죠.”
대대로 군부에 종사해 온 로윈 가문의 남자들은 체격이 좋고, 전투에 익숙했다.
이자벨은 늘 알렉스를 소개할 때 로윈 가문의 특징을 입에 담았다. 사생아가 아니라고. 로윈 가문의 다음 대 후계자가 이 아이라고.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네요. 이자벨. 칭찬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럴 줄은 알았지만.”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이자벨은 웃었다. 그러나 캐롤은 이자벨에게 박혀 있는 알렉스의 시선에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다 뚫어지겠네.
“사실만을 말한 거죠. 과장한 건 없어요. 정말 예쁘잖아요. 안 그래요?”
예쁘긴 한데……. 뼈대가 굵어서 예쁘다는 수식어보다는 잘생겼다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렸다.
캐롤은 빠르게 그들 관계를 눈치챘다. 이자벨은 그녀의 동생을 몹시 어리게 보고 있었고, 그녀의 동생은 이자벨에게 꽤…… 집착하고 있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기 누이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청회안이 약간 소름 끼쳤다.
“예쁘다는 말을 쓰기에는 너무 크지 않았나요?”
“그런가요? 알렉스, 이제부터 잘생겼다고 해 줄까?”
분위기를 풀려는 것처럼 이자벨은 계속 웃었다. 알렉스의 팔을 두드리며 속삭이는 이자벨에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전 예쁘다고 해 주시는 게 좋아요, 누님.”
예쁘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과 다른 뜻이었다. 작고 보호해 줄 상대에게 주로 쓰이는 그 수식어를 알렉스는 사랑했다.
날 예뻐해 주세요. 품 안에 넣고 귀여워해 주세요. 평생 예쁜 아이로 봐주세요. 죽을 때까지 나만 예뻐해 주세요.
……날 다른 사람한테 버리지 말고.
이후,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운 이자벨을 대신해 알렉스는 묵묵히 캐롤을 에스코트했다.
정확히는 실내 정원을 걷는 알렉스의 두 걸음 뒤에 캐롤이 따라가고 있었다. 둘 사이의 침묵은 무거웠고, 젊은 남녀의 설렘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영식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실내 정원이라 할지라도 찬기가 남아 있었다. 캐롤은 걸친 숄을 꽉 쥐고 침묵을 깨트렸다.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부를 일이 없을 테니까요.”
알렉스는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캐롤은 초조하게 침을 삼켰다.
이 소년은 바깥에서 들여온 15살짜리 사생아 같지가 않았다. 허술한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년을 두고 캐롤은 결국 곧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이자벨에게 내 사정을 들었다면, 우리가 서로 부를 일이 많아질 것 같지가 않나요?”
“……영애. 전 지금 당신이 누님의 친구이기에 예의를 차리고 있는 겁니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고 캐롤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귀찮음을 제외한 다른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애께서 그 화제를 꺼내지 않는다면, 전 끝까지 정중할 수 있겠죠.”
“만약 꺼낸다면?”
“샬덴에 끌려갈 공녀 따위에게 시간을 별로 할애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대답이 되었을까요?”
캐롤은 이제는 없다고 생각했던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분노하는 대신 웃었다.
“아직은 아니죠. 아직은 난 펠먼 후작 영애예요.”
“곧 아니게 되겠죠.”
“영식이 도와준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요.”
“제가 왜 도와줘야 합니까?”
“내가 펠먼 후작의 딸이자, 세위나 공주의 증손녀니까요. 가망성은 전혀 없지만, 난 아를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여자 중 하나에요.”
“그래서?”
알렉스의 말이 짧아졌다. 캐롤은 누구 하나 쉽지 않은 로윈 남매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정치적으로도 혈통적으로도 완벽한 결혼 상대란 뜻이죠.”
“난 내 결혼에 관심 없어.”
“그럼 더 좋죠. 상대를 안 가린다는 뜻이니까. 난 어때요?”
“나쁘진 않지. 그런데 당신을 위해 고생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고생한 만큼의 대가는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만큼 당신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내 가치는 너 같이 어린애는 상상도 못할걸.”
날카롭게 오가는 말들에는 이제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체면치레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캐롤은 무표정한 소년을 응시한 채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난 샬덴에 끌려가지만 않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뭐든?”
“그래.”
알렉스는 처음으로 캐롤을 향해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이었지만 캐롤은 그나마 그가 반응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물론 그 생각은 곧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지만.
“이자벨의 결혼을 막아 봐, 그럼.”
“……뭐?”
캐롤은 할 말을 잃었다. 알렉스는 멍청하게 서 있는 캐롤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 누이가 이 저택에서 나가지 않게 만들어 보라고. 그럼 당신이랑 결혼할 테니까.”
위협적으로 속삭여지는 말에는 의심할 수가 없을 만큼 진심이 절절하게 녹아 있었다.
캐롤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경멸을 숨기지 않은 채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너 설마…….”
그러나 알렉스가 다가오는 게 더 빨랐다. 눈을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가깝게 다가온 알렉스는 캐롤의 말을 잘랐다.
“이자벨을 두고 더러운 생각을 하지 마, 캐롤 펠먼. 난 ‘그런 식’으로 내 누이를 보고 있지 않아.”
그들 남매를 아는 많은 이들이 경멸이나 걱정을 담아 바라보는 것을 알렉스는 잘 알고 있었다.
알렉스는 비정상적으로 이자벨에게 집착했다. 그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명하자면, 그는 결코 이자벨을 성애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도대체 왜 그래야 하지?
이자벨과 그는 남매였다. 알렉스는 그 사실을 종일 외치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사랑했다.
그깟 성애적인 사랑 따위가 뭐라고.
그의 몸에는 이자벨과 같은 피가 흘렀다. 그건 감정과 상관없는 진실이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둘 사이가 가족으로 묶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 완벽한 관계를 두고, 왜 내가 이자벨을 다른 의미로 사랑해야 해? 우린 태어났던 순간부터 가족인 건데. 나는 이자벨이 내 누이인 게 너무 좋은데.
그 사실을 부정하는 이가 있다면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난 이자벨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가족으로서.”
“가족끼리 그런 식으로 집착하진 않지.”
“난 가족이라고는 이자벨밖에 없어서 몰라. 이게 나한테는 맞는 방식이야.”
그저 알렉스는 어릴 때처럼 이자벨과 단둘이, 둘밖에 없는 것처럼 사는 걸 원할 뿐이었다.
이자벨의 사람이 늘어나는 건 짜증이 났다. 그로는 부족한 건가? 왜? 그는 이자벨만 있어도 충분한데.
“그래서 캐롤 펠먼. 나와 거래할 생각이 있어?”
캐롤은 갓난아이가 제 어미에게 하는 집착처럼 그가 이자벨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성애적인 의미는 확실히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
“넌 이자벨에게 상처를 주게 될 거야.”
“나 때문에 우는 거라면 환영이지.”
아이들은 순진한 만큼 잔인할 수 있었다.
캐롤은 문득 그녀의 막냇동생이 붙잡고 도무지 놓지를 않아 결국 잘라 버렸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기억했다.
상대가 상처받아도, 쥔 것을 놓을 줄 몰라서.
키만 큰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캐롤은 어린아이의 얼굴을 찾아냈다.
“……그래서 넌 뭘 얻는데?”
“난 이자벨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야. 내 누이를 어떻게 내가 괴롭혀.”
캐롤은 알렉스의 말에 따르는 게 이자벨에게는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의 선택지를 가지지 못했다.
“그저 이자벨은 나만 평생 예뻐해 주면 돼.”
“……상처받고 울어도?”
알렉스는 몹시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은 그 우울함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건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자기가 상처를 주고 울려 놓고 미안하니까 다시 안아달라고 할 작태가 머릿속에 상상이 갔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캐롤에게 선택지는 이 소년뿐이었다.
나는 알렉스의 방에서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달려가 알렉스를 붙잡았다.
“잘 배웅했어?”
“네.”
담백한 답변은 거기서 끝이었다. 나를 안아오는 알렉스의 팔을 붙잡고 나는 재차 물었다.
“어때? 그러니까 너도 알겠지만, 난 절대 너한테 정략결혼을 강요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어, 음, 네 의사가 제일 중요하다는…… 세상에, 나 지금 제대로 말하고 있니?”
내 말이 멋대로 꼬여 갔다. 알렉스가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날 안았다.
“네. 아주 잘 말하고 있어요.”
“그럴 리가. 내가 들어도 엉망인데!”
“진정해요, 누님.”
“너라면 진정이 되겠니? 이건 네 새로운 가족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알렉스가 날 그대로 확 들어 올렸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성큼 걸어간 알렉스가 날 침대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날 옮길 거면 말 좀 하고 해 줘, 알렉스……. 놀랐잖아.”
“다음부터는 고려해 볼게요.”
알렉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 얼굴에 겨우 안심했다. 팔을 뻗어 알렉스의 목에 매달려 속삭였다.
“괜찮았어?”
“네. 똑똑한 여자더라고요.”
“맞아. 똑똑하지.”
“제가 아직 어리니까, 약혼 기간이 길어질 것 같지만……. 그쪽이 감수하겠죠.”
“……벌써부터 그 얘기까지 나왔어?”
나는 당황스러운 말투를 숨기지 못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캐롤이 마음에 들었나? 이렇게 빨리?
“서로 조건이 맞는데 굳이 더 두고 볼 필요가 있어요?”
“그건 너무, 정략결혼 같은데. 알렉스. 난 그냥…… 캐롤이 마음에 드냐는 소리였어.”
알렉스는 순진한 소리를 하는 이자벨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감으며 웃었다.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누님.”
“……난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누님이 결혼 상대로 대공자를 받아들인 이유가 그 남자를 사랑해서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적어도 호감이 가는 상대와 약혼을 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당신과 대공자처럼?
알렉스는 튀어 나가려는 질문을 삼켰다. 아직은 이자벨에게서 알렉스가 첫 순번을 차지했다. 아직은.
깜빡거리는 눈동자는 스스로의 결혼에 온갖 조건을 계산했던 여자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진했다.
“귀족들의 결혼이야 뻔하죠, 누님. 전 많은 걸 기대하지 않아요.”
“……캐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럼 거절해도 돼, 알렉스.”
“아뇨. 마음에 들어요. 금발에 똑똑하잖아요. 누님을 닮았어요.”
알렉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미 없는 소리였지만 생각은 쉽게 뻗어 나갔다.
누님하고 닮은 여자와 결혼하면 내 자식은 누님을 닮을까? 그러면 조금 괜찮겠는데.
“정말? 알렉스, 다시 말하는데, 계산적으로 굴 필요 없어. 네가 누구와 혼인하고 싶다고 해도 난 널 지지할 거야.”
“……제가 하녀조차 되지 못하는 신분의 여자를 데려와도요?”
이자벨은 그 말에 눈까지 접어 가며 웃었다. 알렉스는 이자벨의 그런 표정을 좋아했다. 뭐든 다 들어줄 것 같이 애정이 넘치는 그녀의 얼굴을.
“적국의 노예를 데려와도 난 네 편이야, 알렉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알렉스는 무너지듯 이자벨에게로 몸을 수그렸다.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알렉스는 속삭였다.
“누님은 제가 뭘 해도 제 편이죠? 세상에서 제가 제일 예쁘죠?”
그의 누이는 그의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공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알렉스는 몹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 * *
⌜얼마나 바쁜지 얼굴 보기 어려운 약혼자님께.
이제 잡은 물고기라고 보러 오지도 않는 거야? 시그,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건 알지만, 그럴 사람이라고 의심하기 전에 나 좀 보러 와.⌟
미하일은 짧은 편지를 쥐고 몇 번이고 읽었다. 아쉬운 듯 글씨체를 만지작거리는 탓에 종이에 구멍이 뚫릴 지경이었다.
그의 생각과 달리 그의 딸은 약혼자와 제법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래도 빌어먹을 아를의 귀족은 안 돼.
저절로 들어간 힘에 종이가 약간 구겨졌다. 미하일은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다시 펴서 책 안에 끼워 놓았다.
“폐하.”
파벨 후작은 젊은 청춘 남녀의 연애편지를 가로채서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는 황제를 향해 뭐라 말을 해야 할 줄 알지 못했다.
“언제쯤 그 아가씨에 대한 얘기를 아를의 왕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로윈 영애라고 나름의 존칭을 사용해 불렀지만, 그대로 황제의 분노를 한 몸에 받게 된 후로부터 후작에게 이자벨은 ‘그 아가씨’로만 불렸다.
후작은 존경하는 그의 주인에 대한 감상을 삼갔다. 아무리 심각한 스토커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왕의 입에서 차라리 공주를 보내겠다는 말이 나올 때.”
미하일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 파벨 후작을 뒤로한 채 그의 태자를 떠올렸다.
그의 딸은 진저가 취향인 건가?
그건 헤더와 별로 닮지 않았는데. 미하일은 애꿎은 그의 회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어리니까…….”
일부러 그와 닮은 청년을 태자로 책봉해 놨더니…….
미하일은 게일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 귀환하라는 한마디에 그 즉시 샬덴으로 돌아온 게일은 집무실에서 갇힌 듯 지냈다.
“음?”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는 게일을 향해 남자는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뭔가 내 안위에 심각한 위협이 닥친 것 같아서…….”
게일의 보좌관인 키로프 헴프턴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그를 무시하고 마저 책상 위에 서류를 쌓았다.
“다행스럽게도 이 서류를 다 해결하기 전까지는 폐하께서 전하를 살해하시진 않을 겁니다. 일하세요. 전하.”
“내 권한으로는 벅찬 일이야, 키로프.”
“괜찮습니다. 전하. 실수하신다고 해 봤자 날아가는 건 전하의 목이니까요.”
“그것참 다행인 말이네.”
“다른 보좌관들을 불러드릴까요?”
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냉정한 얼굴을 한 키로프는 더 묻지 않았다.
다른 보좌관들이면 게일의 말에 개처럼 기겠지만, 그는 그런 꼴을 보는 걸 썩 좋아하질 않았다. 무덤덤하게 그런 꼴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만큼 단련이 되질 않은 탓인가.
샬덴 귀족들의 왕가에 대한 충성은 어딘가 병적인 면이 있었다.
* * *
브랜든은 피곤에 절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샬덴의 사절 앞에서 피로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진심인가?”
“예. 전하. 16개의 영지 중 절반을 황금과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도록 하지요.”
“그 대가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국가 간의 거래에서 단순한 호의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를과 샬덴이라면 더더욱. 브랜든은 그 사실을 알기에, 오히려 지나치게 좋은 제안을 하는 파벨 후작을 경계했다.
“저희 샬덴의 왕족분들 중의 한 분이 아를의 한 영애께 푹 빠지셨습니다.”
“그 영애를 공녀로 달라?”
“예, 전하.”
“고작 그걸로?”
파벨 후작은 그 말에 오만하게 웃었다. 국경에 위치한 8개의 영지를 대가로 원하는 것이 고작 사람 하나라.
“다시는 하지 않을 제안이지요, 전하.”
“……공주인가?”
브랜든은 꽤 많은 자식을 보았다. 그중에 딸은 셋이나 되었고, 셋 다 객관적으로도 매력적인 아가씨들이었다.
“아를의 공주님들이 아름답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그분이 원하는 영애는 다른 분이십니다.”
“여덟 개의 영지를 지불하고서 데려갈 여자가 공주도 아니라. 이미 짝이 있는 여자인가?”
“약혼은 결혼이 아니지 않습니까?”
파벨 후작의 말에 브랜든은 고위 귀족들과 왕자들의 약혼녀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훑었다.
샬덴의 인간이 아를에 왔을 리가 없으니 초상화만 보고도 반할 만큼 굉장한 미인이 누가 있었던가.
“어쩌면 전하의 조카며느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영애를 그분께서 원하셨습니다, 전하.”
파벨 후작은 그대로 들고 왔던 초상화를 펼쳤다. 금발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그 속에서 웃고 있었다.
“아를의 군부대신인 로윈 백작의 장녀, 이자벨 로윈 영애를 말입니다.”
브랜든은 침묵했다. 차라리 공주를 요구하는 게 더 나을 뻔했다.
대공자의 약혼녀.
“……확답할 수가 없군.”
왕은 속으로 대공자가 제 약혼녀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 사랑에 미친 족속들의 역린을 왕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정략적으로 한 약혼이었다. 억지를 써서 로윈 백작에게 넘긴 혼처였는데, 대공자가 설마 거기에 의미를 두었을까?
* * *
“왜 답장 안 했어?”
시그니티는 제게 달려와 폭 안기는 약혼녀의 말에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도 착실하게 물음표를 띄웠다.
“무슨 답장?”
“편지 썼는데, 못 받았어?”
“받은 적 없는데…….”
이자벨은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럼 그녀가 보낸 편지는 하늘로 솟았단 말인가, 땅으로 꺼졌던 말인가?
“나한테 편지도 보냈어?”
시그니티는 고민에 빠진 이자벨의 이마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이자벨은 그의 이마를 밀어냈다.
“응. 생각하는 데 방해되니까 붙지 마.”
“알았어. 내가 또 그런 거 잘해.”
분명 시그니티의 시종한테 전해 줬다고 하녀가 그랬는데……. 왜 중간에 증발했지?
“……뭐해, 시그?”
“생각하기 편하게 대신 운반?”
이자벨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들어 올린 채로 조심조심 걷고 있는 시그를 돌아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놔.”
“응.”
“……시그, 어디 아파?”
어딘가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 모양새에 이자벨은 의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냥 공식적으로 로윈 저택에 방문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전에도 자주 왔잖아?”
“네 약혼자로는 정식 방문이잖아, 벨.”
“그게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아가씨는 몰라도 돼.”
조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은 약혼자를 보며 이자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동안 바빴어? 협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지지부진하지. 우리 측은 어떻게든 차출될 것들을 줄이려고 하고, 샬덴은 꼼짝도 안 하고 버티고 섰고.”
“……손 좀 가만히 둘 수는 없어?”
이자벨은 그녀의 손을 주무르고 쓰다듬기 바쁜 그의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싫어?”
“아니 싫은 것보다는…… 지금 내 손을 주무르고 있는 걸 너도 인식 못 하는 것 같았는데.”
그녀가 말하자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의 손을 놓는 모습을 차례로 지켜본 이자벨의 평가였다.
“지금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너.”
이자벨의 가차 없는 평가에 시그니티는 가까스로 이자벨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채로 얼굴을 감쌌다.
“미안, 벨. 이상하지.”
“응.”
냉혹한 답변에 시그니티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굉장히…… 아버지 같았어. 특히나 멍청해 보일 때의. 조금만 있으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겠군.
“나 찬물 한 잔만…….”
“진짜 어디 아파? 열이라도 나?”
“아니. 그냥 이건 유전병 같은 거야.”
애인 앞에서만 도지는 조증 같은 거…….
이자벨이 거의 듣지 못할 목소리로 웅얼거린 시그니티는 하필 이런 점까지 아버지를 닮았다는 사실에 약간 좌절했다.
“조금 뜨거운 것 같긴 한데.”
그의 이마에 손을 댄 이자벨은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확인하고 손을 거뒀다.
“그냥 가서 쉬어, 시그. 아프면 오지 말지. 굳이 올 필요는 없었는데.”
그는 가까이 다가온 이자벨의 얼굴을 보고 문득 그의 아버지가 대단해졌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본단 말이지?
매일 신에게 기도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는 아버지의 지랄병이 드디어 이해가 갔다.
“안 아파, 진짜.”
그는 이자벨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아무래도 신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완벽한 여자가 그의 품에 있을 리가.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 벨.”
“아니, 넌 아픈 것 같아 보이는데…….”
“아플 리가. 신은 날 사랑해. 그러니까 널 만나게 해 줬지.”
이자벨은 진지한 그를 향해 몹시 의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음. 아니.”
“그래. 확실히 그래 보인다.”
쨍한 초록빛의 눈에 그가 비쳤다. 그는 멍청하게 웃는 남자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
도무지 멋있게 보일 수가 없어. 너만 보면 제정신이 아니라서.
“사랑해, 이자벨.”
속을 전부 긁어내고 토해내듯, 고백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이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의심해?”
이자벨은 눈을 깜빡이다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니.”
“넌 너무 똑똑해, 벨.”
“그래서 싫어?”
그는 몸을 이자벨에게 맞춰 수그린 채로 짤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너 내가 무슨 말 할지 알잖아.”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닌데.”
“내가 너한테 싫다고 한 적 있어?”
“응. 내가 청혼했을 때.”
“그래. 그건 내가 나빴네.”
“내가 특별히 용서해 줄게.”
이자벨은 오만하게 속삭였다. 그는 보이지도 않는데도 이자벨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아가씨는 관대하기까지 해서 어떻게 하지? 이렇게 예뻐서?”
“시그…….”
이자벨의 한숨이 귓가에 닿았다. 그녀는 몹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신 좀 차려.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 정신을 빼놓고 다니진 않았잖아.”
“그때랑 지금은 다르지.”
“너 목소리도 쉬어 있어…….”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
“세상 모든 일에 대한 변명이 나 때문이라고 하지그래?”
“맞아. 사실 그래.”
“뭐가 사실 그래야. 정신이나 차려, 시그.”
그의 양 뺨을 잡아당기는 이자벨은 진심으로 그를 걱정했다. 시그니티는 그 사실을 깨닫고 신앙심을 되찾았다. 앞으로는 매일 아침 기도해야겠다. 안 하기에는 이자벨이 너무 예뻤다.
“지금 제대로 듣고 있어?”
이자벨의 눈초리가 위로 휙 올라갔다. 시그니티는 재빨리 변명했다.
“잘 듣고 있지. 누구 말인데. 그래서…… 그 약혼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아직 약혼한 것도 아니야. 그냥…… 모르겠어. 난 알렉스가 자기 약혼 문제에 그렇게 관심이 없을 줄은…….”
제 앞에서도 동생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약혼녀라니.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바보였기에, 묘하게 시무룩해진 이자벨을 황급히 달랬다.
“벨, 네 동생은 아직 열다섯 살이잖아. 아직 너무 어려.”
“열다섯짜리 애들이야말로 이성 문제에 가장 관심 많은 족속인 걸 내가 모를 거라고 하는 말이야?”
“정작 넌 안 그랬잖아, 벨. 네 동생도 널 닮았나 보지.”
닮았다는 말은 이자벨에게나 알렉스에게나 꽤 잘 먹히는 말이었다. 이자벨은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네 동생도 펠먼 양을 마음에 들어 한다며.”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니까 걱정이지.”
“너도 그랬잖아, 벨. 하지만 지금 우리를 보면…… 뭐, 괜찮을 것 같지 않아?”
이자벨을 향해 달게 웃는 그의 얼굴은 더 행복해질 수 없을 만큼 행복으로 꽉 차 있었다. 그녀는 마치 행복에 전염된 것처럼 다 잘될 거라는 이상한 생각에 잠깐 사로잡혔다.
시그니티는 나를 만나서 행복한데, 나도 그런가? 겪어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게 불행한 것은 아니란 거였다. 내게 일어날 모든 일을, 그게 불행이든 행복이든 무엇이든 함께 감당해 주겠다는 상대가 있다는 건 상당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알렉스도 캐롤과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이렇게 되어서……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겠지.
“그럴까……?”
캐롤은 로윈을 위해 살겠다고 했다. 알렉스에게 일어날 어떤 일에도 함께 싸우겠다고.
그 처음이 애정이 아니었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나와 시그도 그랬는걸.
지금 시그를 사랑한다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 관계가 어느 정도 신뢰를 기반으로 탄탄해졌다는 걸 나는 인정했다.
“걱정하지 마, 벨.”
그가 나를 단단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매가 다정스레 휘어졌다. 애정이 묻어나는 시선에 나는 눈을 피했다.
언젠가 그에게 이 애정을 되돌려 줄 수 있기는 할까?
사랑받는 감각은 기분이 좋았지만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나마 이 어설픈 연애를 흉내 내는 시간이 자주 있지 않았기에 부담스러운 내색을 숨길 수 있었다. 샬덴과의 협상 문제로 시그니티는 늘 바빴고, 나 또한 알렉스의 약혼 문제로 정신이 팔렸었으니까.
간신히 얼굴 한 번 보고 헤어진 적도 꽤 많았다. 몇 번은 편지로 보고 싶다는 투정이 오갔지만, 궁에 있는 탓인지 이상하게 편지가 자꾸 분실되는 바람에 나중에는 그냥 사람을 통해 안부나 전했다.
그리고 알렉스의 약혼은…… 이상할 정도로 지지부진했다. 그렇게 내게 매달렸던 캐롤은 묘하게 소극적으로 변했고, 알렉스 또한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굴고 있었다.
“알렉스, 마음이 바뀌었어? 펠먼 영애와 약혼을 하기 싫어?”
이제는 익숙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알렉스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처음부터 싫지도 좋지도 않았어요. 좋은 조건이지만, 그게 꼭 그녀일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어차피 약혼은 하게 될 거예요, 누님. 그쪽은 절박하니까.”
그 말을 하는 알렉스의 표정은 묘하게 권태로웠다.
“아쉬운 건 제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어차피 할 거면 이렇게 끄는 건…….”
“전 그녀에게서 우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요. 이런 기 싸움은……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거죠.”
알렉스는 처음 거래를 트기 시작하는 상대를 대할 때처럼 굴고 있었다. 그건 분명 가문에나 그에게 나쁘지는 않겠지만, 너무 냉정하지 않나? 그래도 결혼하고 부부가 되어서 자식을 낳고 평생을 살 여자인데…….
물론 귀족들 대부분의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알렉스까지 그러길 바라진 않았다.
“캐롤이 많이 불안해할 텐데.”
“그럼 더 좋죠. 좀 더 우리 눈치를 볼 테니까.”
알렉스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우울한 척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펠먼 영애에 대한 얘기는 그만 해요.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고……. 누님은 저보다 그 여자 얘기가 더 궁금해요?”
“너랑 약혼하게 될 여자니까 그러지…….”
나는 한숨을 쉬며 알렉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점점 더 이대로 약혼을 진행해도 될지 의문이 들었다. 알렉스와 캐롤이 부부가 된다면, 정말 귀족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파트너가 되겠지만, 내가 지금 그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
알렉스가 권력이나 부를 갖게 되는 건 좋지. 그런데 그것만으로 행복했다면 과거의 내가 그렇게 불행했을까.
뭐든 최고로 안겨 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왕위를 포기하고도 행복한 인간이 떡하니 있지 않은가.
사랑이라. 그게 뭔지는 몰라도 진짜 좋은 거긴 한가 보지.
알렉스의 약혼에 대한 내 고민은 며칠 가지 않아 이상한 방향으로 풀렸다. 갑작스럽게 왕실에서 공녀를 다시 뽑겠다는 공표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캐롤이 뽑힐 확률이 높았지만, 적어도 내 고민은 뒤로 미뤄졌다.
캐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몇 번이나 찾아와 이번에도 뽑힌다면 약혼을 바로 추진하겠다고 말하고 갔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알렉스와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누가 보면 내가 캐롤과 약혼하는 줄 알겠군.
* * *
대공은 왕에게서 온 서신을 읽어 내렸다. 대공비의 앞에서는 늘 풀려 있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 갔다.
그가 왕위를 저버리고 난 뒤로 브랜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대공을 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대공 또한 그런 동생을 철저하게 왕으로 모시고 대했다. 그런데 서신의 서문이 형님이라?
⌜……대공자의 약혼을 파기해야겠습니다, 형님.⌟
내 아들이 얼마나 미쳐 날뛸 줄 알고? 대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왕의 서신을 내던졌다.
“대공 전하.”
대공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집사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큰일입니까?”
“그래.”
“어느 정도로 말입니까?”
집사는 태자가 왕위를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하고, 그걸 실제로 실행한 것을 눈앞에서 본 사람이다. 그래서 늘 매 순간 설마 그 순간보다 더한 일이 닥치겠느냐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그러나…….
“태자가 과부랑 결혼하겠다고 날뛰었던 정도?”
“대공비 전하께 문제라도…….”
대공은 거칠게 고개를 내저으며 머리를 헤집었다.
“아니. 그녀가 아니야. 물론 사실을 알면 그녀가 가만히 있진 않겠지만…… 제기랄.”
집사는 바닥에 나뒹구는 서신을 집어 들었다. 대공이 초조하게 책상을 손으로 두드리며 욕설을 삼켰다.
“역시 그냥 내가 왕이 되는 게 나았어.”
“전하!”
대공의 눈이 위험하게 가라앉았다. 집사는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서신을 차마 읽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대공을 제지하듯 소리쳤다.
“반대하는 이들을 다 죽이고, 아니, 지금이라도…….”
“늦었습니다, 전하.”
“진심으로? 내가 마음을 먹었는데, 늦었다고?”
집사는 오만한 대공의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며 대답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대공은 그 말에 집사가 쥐고 있는 서신을 노려보며 서늘하게 속삭였다.
“……읽어 봐.”
내가 움직이든 아니든 결국 그녀가 울겠지.
자식을 낳지 말아야 했다. 대공은 시그니티를 사랑했지만, 대공비를 울게 만드는 모든 것이 싫었다. 시그니티가 운다면, 대공비도 울 것이고, 대공은 그걸 잘 견디지 못했다.
집사의 손에서 바스락거리던 서신이 펴졌다.
⌜샬덴이 공녀로 대공자의 약혼녀를 요구했습니다. 국경의 영지 여덟 개를 대가로 단 한 명의 영애를요.⌟
“생각해 봐, 집사. 내 아들이 가만히 있을까?”
과거의 대공을 생각한다면, 그 대답은 ‘아니오’였다.
“……새로 서신을 쓰셔야겠군요, 전하.”
“무슨 말을?”
짤막한 물음에는 이 상황에 대한 짜증이 깊게 깔려 있었다. 집사는 서신을 곱게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전하의 아드님께서 약혼녀에게 미쳐 있다고요. 과거의 전하처럼.”
“하, 그런다고 브랜든이 여덟 개의 영지를 포기할까?”
“네. 그분은 전하의 과거를 아시지 않습니까?”
대공은 결국 거칠게 펜을 잡았다. 휘갈겨지는 서신에 집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서신을 받은 왕은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결국 대공자를 따로 불렀다. 근사한 청년은 왕의 앞에서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왕은 떠보듯 물었다.
“나이도 찼는데 이제 결혼할 때가 되질 않았나?”
시그니티는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아직 약혼녀의 나이가 어려 하지 못했지만, 곧 열여덟이 되니 왕실의 허락만 있으면 바로 결혼하고 싶습니다. 폐하.”
“벌써 그런 이야기까지 오갔는가?”
“사랑에 시간이 중요하겠습니까?”
그 웃는 얼굴이 지독하게 제 아비를 닮아 있어서, 왕은 그날 밤 밤새 잠을 설쳤다.
그의 형이 저 얼굴로 왕위를 버렸다. 제 사랑이라 생각했던 여자를 잃을 것 같으면 무슨 짓도 저지를 인간들.
왕은 결국 샬덴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차라리 대공자에게 빚을 하나 지워 두는 게 낫겠지.
여덟 개의 영지를 포기하는 것은 정말 아까웠지만, 과거의 대공처럼 무슨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르는 대공자를 건드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숙부가 된 도리로 어찌 조카의 약혼녀를 빼앗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다른 영애를 요구할 수는 없는가?”
“저희의 제안을 거절하시는 겁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파벨 후작의 목소리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를에 아름다운 영애라면 많네. 원한다면 공주도 내어줄 수 있네만…….”
파벨 후작은 결국 최후의 패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설사 로윈 영애를 원한 것이 샬덴의 폐하라 할지라도 말입니까?”
파벨 후작의 말에 담긴 무게가 지독히도 무거웠다. 왕은 비장함마저 두르고 있는 후작의 기색에 의문을 품었다.
“샬덴이 국경을 넘은 이유가…….”
왕의 눈이 점점 커졌다. 샬덴의 왕이 원한 여자. 설마 이십 년 동안 잠잠했던 전쟁이 벌어진 이유가…….
“이 전쟁의 이유가 오로지 그 영애 하나만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말입니까?”
왕의 귓가에 창칼이 부딪치는 매서운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후작의 말은, 그 여자를 내놓지 않으면 전쟁을 멈추지 않을 거라는 말과 동일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영웅들이 10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지. 이제는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왕은 모르지 않았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수많은 영웅을 그 끔찍한 전쟁에 10년을 썩게 했을까.
어릴 적에는 그런 미인이라면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니 이제 그런 미인이 무서웠다. 도대체 왜 하필 권력자의 눈에 띄어 전쟁의 시발점이 되는가. 본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더라도, 이미 눈에 든 이상 누가 돌이킬 수도 없었다.
왕은 바르펜시아 대공자와 샬덴의 왕을 동시에 사로잡은 미인 따위는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둘이 어떻게 알아서 해결을 보면 안 되겠냐고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전쟁이 일어나겠지.
여자에 미쳐 전쟁을 일으킨 왕에게 뭐가 보이기는 할까.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폐하.”
로윈 백작은 늘 그렇듯 굳은 얼굴이었다.
왕은 자리를 권했다. 응접실은 환했고, 마주 앉은 남자 둘의 얼굴은 그런 날씨와 정반대였다.
“……백작. 자네 딸이 대공자와 약혼한 상태였지.”
“예, 폐하.”
“대공자가 빠르게 결혼을 진행하고 싶다고 하더군.”
“지금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금혼령도 금혼령이거니와 샬덴과의 문제를 끝내고 생각해도 될 일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샬덴의 왕이 무사히 전쟁을 종결짓는 대가로 요구한 게 로윈 백작의 딸만 아니었다면 그랬겠지.
왕은 지금 이 얘기가 나오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는 백작에게 툭 말을 던졌다.
“샬덴에서 자네 딸을 공녀로 요구했네.”
적을 앞에 둔 것처럼, 백작의 기세가 순식간에 서릿발처럼 매서워졌다.
“……왕족과 약혼한 영애를 말입니까?”
“선대에는 공녀로 공주가 간 적도 있었던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대공자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폐하.”
“자네는?”
“제 동의를 구하실 문제입니까? 이미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백작의 말은 날카로웠다. 왕은 고개를 저었다.
“난 자네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네, 백작.”
종전을 위해서 대공과 군부대신을 적으로 돌리라고? 그건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내부의 적을 키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최소한 자네가 동의한다면, 적어도 사정이 좀 더 낫겠지.”
“약혼한 아이입니다, 폐하.”
“그것도 대공자와 약혼을 했지. 대공자는 자네 딸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골치 아픈 일이야.”
“대공 전하를 적으로 돌리시면서까지 그 아이를 보내야 합니까?”
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자네 딸을 요구했지. 종전을 대가로.”
응접실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백작은 왕이 이 문제의 해결을 오히려 그에게 미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은 늘 그랬다. 누군가 대신 선택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전염병에 걸렸다 하지요. 죽을지도 모를 상태라고 하십시오, 폐하.”
“그들이 믿겠나?”
“실제로 아프게 하면 그만이지요, 폐하.”
로윈 백작의 말은 서늘했다. 그는 자신의 딸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왕은 침음을 흘렸다. 그러나 백작의 말이 옳다는 것에 동의했다.
백작은 그대로 왕을 일별하고 빠르게 궁을 나섰다.
백작은 사실 그리 열렬히 이자벨을 지키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짜증스러울 정도로 과거를 상기시켰다. 이대로라면 대공자는 다른 나라의 사내에게 약혼녀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마치 과거의 백작처럼.
로윈 백작은 데자뷔처럼 다가오는 과거의 기억들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그 첫 번째는, 제 딸을 방 안에 가두는 일이었다. 백작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이자벨의 팔을 질질 끌어다 백작과 가장 가까운 방에 집어넣고 문을 잠갔다.
“백작님! 백작님!”
잠근 문 너머로 백작을 부르는 이자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작은 충격받은 얼굴로 굳어 있는 하녀를 향해 명령했다.
“먹을 것은 어떤 것도 들여보내지 마라.”
“이자벨 아가씨께서 무슨 잘못이라도…….”
백작의 위압감에 눌린 상태에서도 꿋꿋이 입을 여는 하녀를 향해 백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작님! 샐리! 거기 있어?”
백작은 이자벨의 고함을 뒤로한 채 집사에게 명령했다.
“의원을 수배해. 실력은 따질 필요 없이 최대한 많이. 소문이 날 만큼.”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이자벨의 목소리가 잠긴 문을 타고 넘었다.
“아버지!”
로윈 백작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아주 찰나였다.
“……물은 하루에 한 번만 주도록. 누가 봐도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일 수 있게.”
* * *
내 방보다 더 큰 방이었다. 나는 굶주린 배를 문지르며 입술을 씹었다.
마른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났다. 나는 입술을 혀로 살살 핥으며 내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셈했다.
사흘 동안 물만 겨우 두 번 먹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백작이 나를 가두고 굶겼는지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도 잘 나지 않았다.
‘배고파. 목말라.’
날 굶겨 죽이려고 하나? 그런데 왜 물은 꼬박꼬박 주고, 이런 좋은 방에 가둬 놓고…….
그때, 달칵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열리는 문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들어온 남자는 쉽게 날 막아섰다.
문이 다시 닫혔다.
“백작님…….”
들어온 남자는 로윈 백작이었다. 나를 여기에 가둔 장본인.
“……건강해 보이는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로윈 백작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작님 덕분에요.”
어이가 없어서 비꼬듯 대꾸했다.
“그래서, 절 굶겨 죽일 심산이신가요?”
“그러고 싶었다면 진작 그랬겠지.”
“나가고 싶어요, 백작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를 여기에 가둔 건지 모르겠지만…….”
“만나던 다른 남자가 있었느냐?”
백작의 물음은 정말 뜬금없었다. 나는 사흘 동안 나를 가둔 인간에게서 나온 물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백작은 내 표정을 보고 설명을 덧붙였다.
“대공자가 아닌 다른 사내.”
“아뇨. 당연히 아니죠. 없어요, 백작님. 지금 제가 부정을 저질렀을 거라고 의심해서 저를 가두신 건가요?”
어이없음을 넘어 화까지 났다. 딸이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고 가문에 가두는 일은 꽤 흔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게 나한테 벌어질 줄은 몰랐다.
“설사 제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관심이 없으시면서. 갑자기 이제 와 저한테 관심이 생기셨어요?”
“다른 남자가 접근한 적은?”
“백작님!”
나는 분노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백작은 그런 것 따위엔 신경을 쓰지 않고 재차 물었다.
“처음 보는, 이국적인 사내가 다가온 적은?”
“여긴 수도예요, 백작님. 이국적인 사람이야 셀 수도 없이 많죠.”
“샬덴의 사람이 다가온 적은?”
나는 그제야 분노를 치우고 이성을 찾았다. 수도에 첩자가 돌아다니나? 내게 접근했나? 설마 나를 첩자라고 의심한 건가?
“지금 전쟁에 관한 문제인가요? 첩자? 아니면…….”
백작은 추측을 늘어놓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 말끝이 흐려졌다.
“샬덴의 사절단이 너를 공녀로 요구했다. 이자벨 로윈, 짐작하는 바가 없느냐?”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건 한 남자였다. 곧 다시 볼 거라며 내게 속삭이던 회색 머리카락의 사내.
백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말을 돌렸다.
“……공녀로 가고 싶으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누가 적국의 공녀로 가고 싶어 할까.
“아뇨, 아버지.”
어쩌면 샬덴에서 내 친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굉장히 높은 귀족일 수도 있겠지. 나를 공녀로 점찍어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나를 버린 건 그쪽이 먼저였다. 원망하지는 않는다. 대신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로윈 백작이었다. 그는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나를 딸로 키웠다. 비록 애정 한 줌 없었어도 그는 나를 책임졌다. 나를 버리지 않았다.
“병에 걸려 거동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어쩌면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할 거라고.”
로윈 백작도 나도 서로에 대한 애정은 한 톨도 없었다. 서로가 당장 죽는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그런데 로윈 백작은 나를 딸이라고 여겼고, 나도 로윈 백작을 아버지라고 여겼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란 그런 거였다. 서로 증오하든 사랑하든 상관없이 결국 서로 가족이란 사실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그러기엔…… 제가 너무 건강해 보이네요.”
나는 내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더 굶어야겠다. 더 아파 보여야지. 좀 더 철저하게. 누가 봐도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감사해요.”
로윈 백작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문이 열렸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백작이 나가고, 나는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전생에는 없던 일이었다. 나는 전생에서 내 친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내 인생에서 영영 없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도 아니었다. 내게 그 남자는 나에게 사생아라는 낙인을 남긴, 엄마의 애인일 뿐.
샬덴의 사람이었구나. 엄마는 샬덴의 남자랑 사랑에 빠져서 나를 낳았구나.
아닐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었다. 분명 친부와 관련된 일이라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다고 내가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어떤 대접을 받을지도 모르는 공녀가 되길 누가 원하지?
설사 거기에 내 친부가 있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내 친부가 있으니 더 갈 수가 없지.
나는 이자벨 로윈이야. 로윈 백작 부부의 딸이고, 아를의 사람이야. 내 친부가 누구든, 당신은 자격이 없어.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그냥 지금처럼 서로 없는 것처럼 살아. 나는 절대 샬덴으로 가지 않을 테니까.
이상하게 배가 더 이상 고프지 않았다.
나는 침대 위에 엎드리면서 괜찮다고 스스로 속삭였다.
시그니티는 왕의 조카였다. 왕족의 약혼자를 요구할 만큼 대단한 샬덴의 귀족이라 하여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될 것이다.
나는 왕족의 약혼녀고, 군부대신의 딸이야.
대공자와 군부대신의 반대를 감수하고도 나를 샬덴으로 보내야 할 만큼, 샬덴이 대단한 조건을 제시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뭐라고. 괜찮겠지. 나는 괜찮을 거야. 나는 절대 아를을 떠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나는 이제 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나흘이 지나고 나서는 적은 양의 음식이나마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급속도로 말라 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병에 걸린 사람처럼.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는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님…….”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알렉스의 목소리였다. 좀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해 램프를 켜는 내 등 뒤로 알렉스의 가슴팍이 닿았다.
“……들었어?”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알렉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무서워요.”
“아무 일 없을 거야, 알렉스. 백작님이 날 보내지 않으려고 지금 이러는 거잖아.”
알렉스는 안 그래도 작은 이자벨의 몸이 더 작아진 것을 느끼면서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처음에 로윈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자벨이 이름 모를 괴질에 걸려 죽어 간다는 말만 했을 뿐.
그러나 알렉스는 이제 더 이상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던 멍청한 아이가 아니었다. 저택의 곳곳에 자기 사람을 깔아 둔 알렉스는 곧바로 로윈 백작이 멀쩡한 이자벨을 가두고 굶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사실을 알자마자 무슨 짓이냐며 반발하는 알렉스에게 로윈 백작은 진실을 알려 주었다. 알렉스는 진실을 알고부터 두려워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면 아무도 못 돌아와요. 누님이 가면 난 죽을 거야. 그냥 죽어 버릴 거야.”
“알렉스!”
이자벨의 질책 섞인 말에도 알렉스는 했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자벨이 한숨을 쉬고 알렉스를 마주 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소년이 거기에 있었다.
“절대 안 가, 알렉스. 불안해하지 말고…….”
이자벨은 뺨이 푹 파여 눈만 보였다. 알렉스는 아파 보이기 위해 일부러 이자벨이 굶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말 이자벨이 아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도 하지 마.”
허리에 손을 얹고 알렉스를 훈계하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아파 보여도 예뻤다.
“……이게 다 누님이 너무 예뻐서 그래요.”
정말 진심인 것처럼 알렉스의 눈이 젖어 있었다. 이자벨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알렉스를 안고 등을 도닥였다.
“난 누님이 안 예뻐도 좋은데, 왜 쓸데없이 예뻐서…….”
“그래. 그래. 누나가 다 미안해.”
“누님이 그냥 못생겨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무도 욕심 안 냈으면. 그러면 좋을 텐데.
알렉스는 아이 때처럼 이자벨의 품을 파고들었지만, 역전된 덩치 때문에 알렉스가 이자벨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난 아무 데도 안 가. 알렉스. 너도 알잖아. 나를 데려가는 건 이익보다 손해가 더 큰 거.”
차라리 공주님 중 한 분을 데려가는 게 더 낫다는 걸 그들이 모를까. 하지만 알렉스는 그 말에도 불안감을 죽이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손해도 기꺼이 감수하고 옆에 있고 싶을 만큼.
알렉스는 소문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이 계속 지지부진했다. 의외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협상에 임했던 샬덴의 사절단은 갑자기 과한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마치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것처럼.
* * *
“도련님. 대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신디아의 말에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의 문을 열자마자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널 부른 적 없는데, 처남.”
초조할 게 분명한 주제에 여유로운 척 구는 시그니티를 보고 알렉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누님은 못 와.”
존대마저 잃어버린 알렉스의 말에 시그니티는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아파서?”
“소문은 잘 알 텐데.”
“무슨 병이지? 병문안조차 받지 않는 걸 보니 전염성이 강한 병인가?”
로윈 백작 가의 영애가 앓아누웠다는 소문은 이미 끝도 없이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샬덴과의 협상으로 불안한 마음에 남의 불행을 곱씹는 것을 참으로 좋아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거라는 둥, 이미 죽었다는 둥 별별 말이 많았다.
시그니티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로윈 저택에 방문 요청을 넣었다. 초조함을 가리는 것도 이제 어려웠다.
“……이자벨은 괜찮은가?”
괜찮을 리가. 알렉스는 이제 정말 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이자벨의 마르고 기력 없는 몸을 떠올리고 입술을 짓씹었다.
시그니티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대공자가 미쳐 날뛰는 꼴은 보기 싫었나? 그래서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건가?
“누님이 왜 아파야 했는지?”
“아픈 게 아니라, 아파야 했다고?”
시그니티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알렉스를 위협했던 때처럼 서늘한 얼굴이 드러났다. 알렉스는 내숭을 벗어던진 그 얼굴을 보고 비웃음을 던졌다.
“폐하께서 자기 조카에게는 아무 말이 없었나 보지?”
“알렉스 로윈.”
경고하듯 내뱉은 말에 알렉스는 낮게 속삭였다.
“샬덴이 공녀를 요구했어.”
이자벨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지만, 비참하게도 알렉스가 할 수 있는 것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았다. 알렉스에게 권력이란 것이 이토록 절실한 적이 없었다.
“이자벨 로윈을 명확히 지칭해서.”
“……폐하께서 동의하실 리가.”
이미 왕족과 약혼한 영애를 파혼까지 시켜서 내놓느니 차라리 왕족인 영애를 내놓는 게 더 나았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알렉스의 말에 시그니티는 욕설을 삼켰다.
“8개의 영지를 대가로.”
“제기랄.”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 시그니티는 중얼거렸다.
“왜 말 안 하셨는지 알겠군.”
“어쩔 셈이지?”
“어쩔 셈? 뭔가 다른 방도가 있나? 내가 이자벨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확실히 지킬 수 있어?”
시그니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불안함을 드러낸 소년을 응시했다.
“뭐든 다 해 봐야지.”
가볍지 않은 말이었다. 시그니티는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왕을 만나야 했다.
알렉스는 떠나는 시그니티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저 인간에게 맡겨야만 했다. 가진 권력조차 남의 이름을 빌린 것뿐이라서. 절실하게도 힘이 필요했다.
시그니티는 알렉스가 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정신도 없었다.
이자벨이 공녀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마침내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던 행복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 아가씨는 대단하기도 하지. 어쩌면 이렇게 곁에 서기가 어려워.
시그니티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낭비할 시간 따위 없었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급한 시그니티의 목소리에 시종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신을 휘갈겼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결혼을 앞당겨야겠습니다, 아버지.⌟
왕족조차 예외가 되지 않은 금혼령이라. 시그니티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과하다고 생각하긴 했지. 이러려고 그랬나? 이자벨을 원하는 게 누구지? 샬덴의 어떤 인간이 이자벨을 원하는 거지?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서신을 시종에게 넘겼다.
일단 금혼령을 철회해야 했다. 아직 지지부진한 협상을 보면, 왕이 완전히 샬덴의 요구를 들어줄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 테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금혼령을 철회하고, 약식으로나마 결혼식을 하고…….
젠장. 시그니티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시정잡배도 하지 않을 방식이 아니라.
“빌어먹을…….”
왕이 그의 말을 들어줄 것인가?
왕은 제 형인 대공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었다. 웬만한 것 가지고는 대공을 건드릴 일조차 만들지 않을 위인이었단 말이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이렇게 협상이 늘어지고 있다는 것은, 샬덴에서 이자벨을 데려가기 위해 꽤 강한 패를 들이밀었다는 건데.
“일이 많아 당분간 뵈실 수 없을 거라 하십니다.”
시종이 전한 말에 시그니티의 입가가 비틀렸다.
왕이 시그니티를 피하고 있었다. 그 말은 샬덴의 요구를 들어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단 뜻이다.
“내 결혼에 대한 문제라 하고, 다시 여쭙거라.”
지금까지 그에게 한마디의 말도 없이 이렇게? 만약에 끝까지 그가 몰랐다면 어떻게 하려고?
시그니티는 마침내 떨어진 왕의 알현 허락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늘 걸치고 다니던 여유로움 따위는 이제 챙길 정신도 없었다.
웃음기를 잃은 대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시종들 사이로 옮겨졌다.
미하일은 손에 쥔 서신을 완전히 구긴 뒤 벽난로로 던졌다.
“결혼이라…….”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끝까지 타들어 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미하일은 고개를 들었다.
파벨 후작은 무표정한 미하일의 얼굴을 마주하고 침을 삼켰다.
“왕은 아직도 버티고 있나?”
“흔들리고 있습니다, 폐하.”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지.”
미하일은 파벨 후작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충분하지 않아. 그렇지?”
파벨 후작은 미하일이 더 이상 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를에 대한 전쟁을 처음 시작했던 그때처럼 황제는 웃었다.
“국경에 자리한 군대에 전해. 다시 훈련을 시작하라고.”
“다시 전쟁을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미하일은 진정이라도 하려는 듯 방 한편에 걸어놓은 이자벨의 초상화를 응시했다. 이자벨은 참 지독하리만치 헤더 구드윈을 닮았다.
“위협이지. 만약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다시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만약 끝까지 아를의 왕이 거부한다면…….”
“그럴 일은 없어야 할 거다, 후작.”
파벨 후작은 미하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난 최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후작. 내가 좋아하는 건 확실한 결과지.”
미하일은 이자벨의 초상화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공주님을 빨리 데려가고 싶은데, 왜 이렇게 방해하는 인간들이 많은지.”
다 죽여야 말을 들을까.
파벨 후작은 소름 끼치는 기색을 숨기며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그의 황제는 정말 저 아가씨를 데리고 가지 못한다면 전쟁을 한 번 더 일으킬 것이 틀림없었다. 애초에 이 전쟁도 저 아가씨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평화와 안정을 원하는 아를의 왕이 고집을 부리는 것이 더 이상했다.
저 아가씨 하나만 내놓으면 되는데. 이자벨 로윈, 샬덴의 황제를 홀린 저 아름다운 아가씨 하나만.
아를의 왕은 본궁에 자리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 있을 때만 스스로 왕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형이 아니라 그가.
비참한 일이지. 왕은 그 자체로 왕이어야만 했지만, 브랜든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를 만날 때 늘 본궁을 택했다.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나는 왕이니, 상대는 나를 위협할 수 없을 거라는 자기 세뇌.
그러나 본궁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의 조카를 본 순간, 평소에는 잘 통했던 그 자기방어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폐하.”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의 조카를 향해 왕은 쓰게 웃었다.
“알았느냐?”
“제 약혼녀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정중함 뒤에 서늘한 기색이 깔려 있었다.
“그러니 폐하께서 아둔한 조카를 향해 친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제 약혼녀를 샬덴에서 공녀로 요구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시그니티의 말은 비난처럼 들렸다. 왕은 변명하듯 대답했다.
“거절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허나…… 그들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다시 전쟁을 벌이겠다고 했지.”
시그니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전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이가 그녀를 원했습니까?”
이자벨을 원한 남자가 샬덴의 황제냐고. 시그니티는 그리 묻고 있는 셈이었다. 왕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포기할 수 없느냐?”
샬덴의 황제라는 뜻이군. 제기랄. 시그니티는 하필이면 어쩌다 샬덴의 황제가 이자벨을 요구했는지 신을 욕했다.
“과거에 제 아버지가 그 질문에 무슨 답을 내놓았습니까?”
“전쟁이다. 아를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왕은 침음을 삼키며 덧붙였다.
“그 영애를 두고 샬덴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왕은 일부러 샬덴의 왕이 이 전쟁을 벌인 이유가 이자벨 로윈 때문임을 말하지 않았다.
샬덴 사절단의 압박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이자벨 로윈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서서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가장 큰 방해 요인은 왕의 조카였다. 그가 샬덴의 사절을 완전히 적으로 가정하지 않고, 아직 협상 대상으로 여기는 편이 좋았다.
왕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폐하.”
짐승 같은 노란 눈이 왕을 위협하듯 직시했다.
대공이 딱 저랬다. 자신을 섬기고 따랐던 신하를 제 손으로 벨 때, 딱 저런 눈이었다.
왕은 시선을 돌렸다.
“폐하께서 정해 주신 상대이며, 이미 서로 미래를 약속한바. 하루라도 빨리 그녀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고개를 돌린 왕의 얼굴에 시그니티의 시선이 집요하게 와 닿았다.
“……왕족에 한해서는 금혼령을 풀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폐하.”
샬덴 또한 결혼한 여자를 공녀로 요구할 수는 없을 터이니, 거절하기 또한 더 쉽지 않겠습니까?
왕은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겠다.”
* * *
낮에 돌팔이들이 다녀갔다. 이름값만 그럴듯하지 실력이라고는 없는 무리가.
그들은 뼈다귀처럼 말라 가는 내 몸에 고개만 내젓고 떠났다. 심지어 그중에 하나는 정말 전염병에 걸릴까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직전까지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탕파를 껴안고 있었더니 의원들은 별달리 살펴보지도 않고 나를 고열과 구토를 동반한 알 수 없는 전염병에 걸렸다 진단했다.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기력이 계속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식사를 계속 거르니 이상하게 잠만 많아졌다.
가끔 얼핏 잠결에 알렉스가 내 곁을 지키는 것을 보기도 했다. 알렉스는 정말 내가 아픈 사람처럼 굴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알렉스……?”
때문에 나는 너무 당연하게 어둑한 방 안,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을 지키고 선 남자를 보고 알렉스를 불렀다.
“오늘도 온 거니……?”
대답 없는 알렉스의 손을 붙잡았다. 잠결의 흐릿한 시야가 눈의 깜빡임에 따라 선명해졌다.
“벨.”
자잘한 흉이 가득한 알렉스의 손과 달리, 딱 필요한 부분만 굳은살이 박인 남자의 손.
“시그?”
나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 힘이 들어가지 않은 팔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고 뒤로 다시 넘어갔다.
그의 팔이 내 등을 받쳤다. 나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들을 넘겨 겨우 시그의 얼굴을 마주 봤다.
“여기 어떻게 왔어?”
밖에 들릴 리도 없을 텐데 나는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한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평소와 다른 시그였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네가 왜 여기에 이러고 있는지가 궁금한데.”
그는 전혀 즐겁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나한테 말해 줄 생각은 없어?”
그는 톡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삐쩍 마른 약혼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내가 말라 죽고 나면 내 무덤 위에서 얘기하려고?”
그래도 예쁘겠지만…….
“……나한테는 이게 최선이었어.”
그녀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변명했다.
“내 생각은 했어?”
아예 안 하지는 않았지. 하지만 그가 내 생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만…….
“난 네 생각만 했는데.”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한다. 동정도 했다. 함께하는 미래도 생각했고, 결혼도 약속했다. 내가 좋아하는 인간들을 꼽는다면 시그는 분명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가 나에게 보이는 감정들처럼 절박해지지를 못했다.
“……너랑 결혼하려고 이러는 거야, 시그.”
쓰게 웃는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내 뺨에 입을 맞추고 떨어지는 그를 향해 어설프게 웃었다.
“난 너랑 결혼할 거야…….”
사실은, 사실은…… 시그.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어떨까 생각을 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네가 주는 감정을 똑같이 돌려줄 수 있는 사람. 그럼 너한테는 더 좋을 텐데.
“우리 빨리 결혼하자. 이번에 종전 협상이 끝나면 바로 하자, 응?”
나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무리 몰라도 이게 사랑이 아니란 걸 나도 알고 그도 알았다.
하지만 좋아하잖아. 언젠가는 사랑이 될지도 모르잖아. 그걸로 이 남자를 붙잡아 두는 게 나빠? 이 남자가 날 사랑한다는데.
“그래…….”
그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나는 모른 척했다.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벨.”
날 위해서는 모든 걸 할 내 최선의 선택지.
“사랑해.”
네가 날 걱정할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벌어지면 늘 너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응…….”
나는 시그보다 알렉스를 달래는 게 더 중요했다.
미안해. 그런데 걔는 정말 나밖에 없어, 시그. 너도 알잖아. 그래도 괜찮다고 했잖아.
나는 그의 목덜미에 뺨을 기대며 속삭였다.
“우리 결혼식은 겨울에 할까.”
“춥지 않겠어?”
“겨울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가장 추운 날 하자. 내 신랑을 전쟁터에 빼앗길 일이 없는 겨울이 좋겠어.
나는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시그는 다시 예전처럼 웃었다. 서로 손을 잡고, 사소한 것들에 대해 재잘거리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고…….
그는 내게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그러기 위해서 뭐든 할 사람임을 알았기에 나는 그저 선선히 고개만 끄덕였다.
“난 네가 필요해, 시그.”
그는 결혼하자고 하는 말보다 그가 필요하다고 하는 말을 더 좋아했다.
네가 필요해. 그러니까 나는 너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고마워, 벨.”
세상 전부를 가진 것처럼 웃는 남자는 몹시도 근사했다.
나는 그렇게 웃는 그를 볼 때마다 알렉스를 생각했다. 그 애가 이렇게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때로는, 아니, 사실은 자주 생각했다.
처음에는 부와 권력이 알렉스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애가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좋으니, 함께 있으면 지옥이라도 괜찮을 진정한 짝을 알렉스가 만났으면 좋겠다.
결국,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었다.
알렉스가 사랑을 하는 게 보고 싶었다. 상대의 말 한마디에 세상을 가진 것처럼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럼 나는 죽어도 좋을 것 같아. 알렉스가 행복해질 수 있으면 나 같은 건 죽어도 좋아.
“……무슨 생각 했어?”
내 턱을 자기에게 고정시킨 채로 시그가 물었다.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내 뺨을 문질렀다.
“그냥. 네가 싫어할 생각.”
“난 너에 관한 건 아무것도 싫어하지 않아, 벨.”
“알렉스도?”
시그는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난 처남을 싫어하지 않아.”
“거짓말.”
“처남이 날 싫어하는 거야, 벨. 난 네 가족한테 관심이 없어.”
난 너 말고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어.
그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마치 내 눈치를 보듯,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농담처럼.
“난 그냥…… 네 머릿속을 차지한 상대가 싫은 거야.”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뚱한 내 목소리에 그가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빨리 결혼하고 싶어지네.”
“가게?”
“몰래 온 거야. 들키기 전에 가야지. 넌 전염병에 걸려서 의원 말고는 아무도 못 보는 상태잖아.”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또 올게.”
“바쁘면 안 와도 돼.”
“그건 내가 싫어서.”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기다릴게.”
알렉스는 검을 배운 이후로 예민해진 감각이 처음으로 싫어졌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제 누이와 대공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아닌 다른 이를 향하는 다정한 목소리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열리는 문에 몸을 바로 세웠다.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잘난 청년이 나왔다. 알렉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중얼거렸다.
“난 역시 당신이 싫어.”
시그니티는 알렉스의 날이 선 말에 피식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처남.”
시그가 가고, 혼자 남겨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방이 괜히 더 넓게 느껴졌다. 나는 침대 위에 폭 엎어졌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로윈 저택은 왕궁까지는 아니라도 침입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애초에 아를의 군부를 담당하는 가문인데 쉬울 리가.
누가 도와줬나? 로윈 백작이 그런 섬세한 배려를 할 리는 없으니 그럼 누구지?
누가…… 음?
순간 누가 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벽난로의 불이 확 꺼졌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벽난로에 다가가 불꽃이 꺼진 장작에 살짝 손을 대보니 축축했다.
굴뚝에 물이라도 새나? 아니 비가 오지도 않는데?
의아한 얼굴로 벽난로 앞에 쪼그려 앉아 굴뚝 안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나는 아주 새까만 눈과 마주쳤다.
비명이 속으로 삼켜졌다. 벽난로에서 튀어나온 남자는 그대로 내 위에 올라타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동공이 구별이 안 될 만큼 검은 눈동자가 내 눈앞에 가깝게 들이밀어졌다. 물건을 감정하듯 무감각한 눈이 소름 끼쳤다. 내 귀 아래와 목을 남자의 손이 감쌌다.
순간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지금…… 웃는 거야?
“거짓말했구나, 우리 공주님.”
정이 담뿍 묻어나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딘가 감격에 겨운 것도 같았다.
“걱정했는데……. 정말 아픈 줄 알고.”
닮았어.
“누가 우리 공주님을 이렇게 굶겼을까. 누가 감히.”
그 이상한 남자랑 닮았어. 게일 위버겐. 그 이상한 남자가 나이 들면 이렇게 생겼을까.
서른 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는 게일 위버겐이라는 남자와 똑같은 색깔과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노인 같은 회색 머리카락에 이상하리만치 검은 눈. 잘생긴 것과 별개로 묘하게 이질적인 이목구비.
그리고 이 남자가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소리 지르면 안 돼, 아가.”
남자는 부드럽게 속삭이며 내 입을 막은 손을 떼어냈다.
“……당신 누구야?”
나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남자를 노려봤다.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본능이 경고했다. 지금 비명을 지르면 위험한 건 이 남자가 아니라 이 저택이라고.
“세상에, 아가…….”
남자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근사한 얼굴 위로 진한 웃음이 피어났다.
“엄마랑 많이 닮았구나.”
몸이 딱 굳었다. 나는 내 위에서 웃고 있는 남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헤더도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물었지. 당신 누구냐고…….”
“설마 당신…….”
내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마치 그걸 내가 감격했다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 아빠가 너무 늦게 왔니?”
이 남자가 내 친부다. 엄마의 연인이자, 나를 사생아로 만든 남자다. 내 인생을 시궁창으로 몰아간 장본인이자, 나를 태어나게 만든 인간.
턱이 덜덜 떨렸다. 추워서도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나는 머리끝까지 분노했다.
“……소리 지르기 전에 나가.”
쇳소리가 섞인 내 목소리는 불쌍할 정도로 떨렸다. 남자는 슬픈 어조로 내게 속삭였다.
“아가…….”
“내 아버지는 로윈 백작이야! 나가라고!”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엄마를 버린 엄마의 연인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 없었잖아. 그럼 계속 없는 채로 살아. 서로 없는 존재처럼 살자고!
우는 알렉스의 얼굴이 이상하게 아른거렸다. 사생아.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나오지 못한 자식. 태어날 때부터 비난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게 알렉스와 나였다. 알렉스도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나도…… 사생아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태어나기 싫었어…….
“우리 공주님이 못된 말을 하는구나.”
네 엄마도 가끔 그랬지.
그는 내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엄마를 바라볼 때도 그렇게 바라봤어? 그럼 왜 답장을 하지 않았어? 왜 엄마를 데리러 오지 않았어?
엄마는 당신이랑 도망가고 싶어 했어. ……그랬으면 나는 엄마 아빠 밑에서 행복하게 자랐을까?
상상이 안 가. 왜…… 왜 오지 않았어? 엄마는 기다렸는데. 왜?
“왜 지금이야, 다 포기했는데 왜 지금이냐고…….”
미하일은 익숙한 얼굴에 멈칫했다.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지지 않겠다는 듯 노려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우는 여자.
헤더…….
그들이 만난 마지막 순간에 헤더는 그렇게 미하일을 응시했다. 이제는 끝이라고 말하면서.
미하일은 그때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지금 와서 생각건대, 그건 헤더의 첫 번째 거절이었다.
헤더 구드윈은 미하일에게 첫눈에 반했고, 한 번도 그를 거절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늦게 깨달았다. 그 여자 없이 못 산다는 걸.
미하일이 헤더 구드윈의 다정한 옛 연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헤더 구드윈이 미하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헤더가 미하일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미하일은 좀 더 일찍 미쳤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지금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만약 그랬다면 미하일은 이미 헤더를 납치하든 죽이든 둘 중 한 가지 일은 벌였을 테니까.
그러니까 미하일은 애초에 딱히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를 통제할 수 있는 건 헤더 구드윈이었지 이자벨 로윈이 아니었다.
제 연인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딸을 향해 미하일은 웃었다.
헤더는 이렇게 웃는 걸 좋아했는데. 우리 딸도 그럴까.
“이자벨, 아가…….”
“부르지 마!”
“늦었지만 아빠가 데리러 왔잖아. 투정은 나중에도 계속 들어줄 테니까…….”
“그냥 가 버려. 난 당신이 필요 없어. 제발 가.”
이자벨은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계속 내저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흐트러지는 금발이 선명했다.
과거의 기억과 똑같은 색에 미하일은 좀 더 관대해졌다.
“……아가. 또 전쟁이 벌어지길 원하는 거니?”
다정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자벨은 얼굴을 가린 손을 천천히 내렸다.
“지금 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네가 아빠한테 오는 걸 막는 인간들을 다 없애줄까.”
“하지 마.”
이자벨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녀는 미하일이 정말 그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나도 죽어.”
미하일은 속으로는 짜증이 났지만, 겉으로는 웃었다. 사실 헤더와 있을 때도 가끔 그랬다.
헤더는 소중한 게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그의 딸은 엄마의 단점마저 닮은 모양이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아빠랑 가자, 우리 공주님.”
헤더가 누려야 했던 모든 것을 너한테 줄게. 헤더와 내 딸. 우리 공주님.
“난 당신 딸이 아니야.”
원망스러운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이자벨은 몇 번이고 자신의 아버지가 로윈 백작이라고 중얼거렸다. 이자벨의 목소리가 사랑스러운 것과 별개로 거슬리는 말이었다.
“……죽일까.”
그녀의 입이 다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