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균열.
전쟁의 기미가 감돌았다.
쇠와 피의 냄새, 투레질 소리와 불길한 속삭임,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문들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켰다. 그녀의 고양된 기분을 망치고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네 동생 좀 어떻게 치워 봐, 벨.”
“내가 걔 못 이기는 거 알면서.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엘리자베스는 눈에 보일 만큼 마른 이자벨을 힐긋 확인하고 혀를 찼다.
“……지금 네 동생, 거의 네 스토커 같은 거 알아?”
그녀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문을 가리켰다.
“지금도 문밖에 있을 텐데? 장난해? 쟤 요새 온종일 너만 따라다니고 있잖아!”
“온종일은 아니야……. 그리고 일은 제대로 하잖아.”
“그 외의 모든 시간을 너만 따라다녀. 너랑 있다가 문만 열면 걔가 보인다고!”
“예쁜 얼굴 계속 보면 좋지 뭐.”
그것도 한두 번이지. 엘리자베스는 이를 갈았다. 문만 열만 튀어나오고, 복도만 돌면 등장했다.
극도의 애정 결핍에 시달리는 눈이 나 좀 봐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더 보다가는 꿈속에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네 눈에만 예뻐.”
“그럴 리가. 어디 아파? 눈이 있으면 걔가 예쁜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자벨은 발끈하며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알렉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놈은 왜 애정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거지……?
애정을 아예 쏟아부어 주고 있는데. 뭐가 모자라서 더 달라고 염병이야, 빌어먹을. 그 열정을 돈에 쏟았으면 벌써 다이아몬드를 접시로 썼을 것을.
“너희 남매의 그 대단한 우애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겼어? 도대체 저놈은 왜 저러는 건데?”
“……그냥. 이제 알렉스도 열다섯이잖아. 예전처럼 아이 취급은 안 하려고.”
엘리자베스는 마른 이자벨의 뺨을 보며 코웃음 쳤다.
“갑자기? 너한테 네 동생은 평생 애새끼잖아. 네가 다른 데로 눈 한 번만 돌려도 죽을 것처럼 우는 애새끼.”
“입 거칠어졌어, 리지.”
“예쁘게 말하면 못 알아먹는 귀머거리들과 싸우느라 바빠서.”
엘리자베스는 들고 있던 서류를 아예 책상 위에 던졌다. 그녀는 똑바로 이자벨을 응시하며 물었다.
“뭐 때문에 그래? 이제 드디어 제정신이 돌아와서, 너희 우애가 심각할 정도로 과하다는 걸 깨닫기라도 한 거야?”
“……그럴 수도.”
엘리자베스는 눈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놈이 미쳐 가는 꼴이 드디어 이해가 갔다.
“……그런 것치고는 얌전하네.”
“알렉스가? 뭘 상상했는데?”
농담처럼 넘기려는 이자벨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꽤 단호하게 답했다.
“자살 시도나 자해?”
“말이 심하네, 리지.”
“애한테 자기 부모를 빼앗아 봐. 더한 짓도 할걸.”
“누가 들으면 내가 알렉스를 싫어하는 줄 알겠어. 난 걔밖에 없잖아. 왜 말을 그렇게 해?”
“백을 주다가 오십을 주는 게, 아예 안 주는 것보다 더 질이 나빠.”
이자벨은 한숨 끝에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보는 엘리자베스는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손을 뗄 수 없을 것 같은, 위태로워 눈이 가는 미인이 앉아 있었다.
누구라도 돌아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위태로우면서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느낌을 주는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리지. 난 알렉스에 대해서는 늘 최선을 다하고 있어.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아니. 넌 문제가 없어. 문제는 걔지. 늘 그랬잖아. 그놈은 욕심이 너무 많아.”
여전히 예뻐해 주는 누이가 독립심을 좀 길러주겠다고 하는 행동에 무슨 그리 집착을…….
“난 욕심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신기한 평가네.”
저 이상한 미소.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저렇게 웃는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바르펜시아 대공비. 태자가 왕위를 버리게 만든 과부. 상복을 입은 신부.
미인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웃나?
* * *
샐리는 창백한 제 주인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걱정스럽게 혀를 찼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샐리는 이자벨이 좋은 주인임은 알았지만, 상냥한 주인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저택 내의 위계를 흐릴 만큼 특별히 총애하는 하녀를 두지 않았다. 하녀 중 가장 경력이 많은 샐리를 전속 하녀로 둠으로써 저택 내의 괜한 분란을 애초에 차단했다. 그건 확실히 현명한 행동이었지만, 고작 이자벨의 나이에 생각해낼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고용인들이 그런 이자벨의 행동을 대단하다 우러러보거나, 혹은 두려워하는 쪽으로 나뉘었지만 샐리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이자벨이 불쌍했다.
그냥 아이일 때부터 아이답게 자라지 못한 주인을 동정한다고 하면, 이자벨은 그녀에게 매질을 할까?
샐리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고, 그저 충실한 하녀로 이자벨의 옆을 지켰다.
“신디아가 뭐래? 또 알렉스가 날 부른대?”
“네. 아가씨. 하지만 쉬셔야 할 것 같다고 답하긴 했습니다.”
이자벨은 그 말에 힘없이 웃었다.
“언제부터 그런 판단까지 했어, 샐리?”
힘없는 목소리는 추궁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녀가 판단할 일이 아닌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요새 몸이 계속 좋지 않으셨기에…… 주제넘은 판단이었습니까?”
“그래.”
녹안이 느리게 깜빡였다. 샐리는 문득 과거의 한순간을 기억해냈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던 백작 부인을.
샐리는 견습 시절일 적에 로윈 백작 부부를 본 적이 있었다.
따뜻한 봄의 정원 안에서 부부는 단 미소와 미래에 대한 기대를 나눴고, 저택에는 좀 더 밝은 기운이 감돌았다.
‘헤더. 헤디. 당신을 닮은 아이면 무슨 이름이 어울릴까.’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응. 하지만 당신을 닮았다면, 사내애도 좋아. 난 그 애를 사랑하게 될 거야.’
신혼의 부부가 그러하듯 몽글한 공기가 부부 사이에 자리했고, 샐리는 후작 부인의 부른 배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로윈 백작을 기억했다.
모든 것이 어떻게 어그러졌는지 샐리는 알지 못했다.
샐리는 혼인을 하기 위해 저택을 떠났고, 그녀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저택은 지나치게 메말라 있었다.
이전의 그 온기가 꿈인 것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로윈 백작은 저택에 거의 있지를 않았고, 한창 울며 부모를 보챌 나이의 이자벨은 필요할 때가 아니고서는 잘 울지를 않았다.
저택은 지나치게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고, 샐리는 누군가의 죽음이 로윈 백작 일가를 끝장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쉽게 상황을 이해했다.
샐리가 로윈 저택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아이를 잃어서였다.
첫 아이였다. 정략 혼인한 샐리와 남편은 첫 아이를 통해 제법 가까워졌지만, 아이는 열병으로 284일 만에 죽었다. 샐리는 아직까지 그 날짜를 기억했다.
샐리의 남편은 첫 아이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약했고, 그것은 죄가 아니었지만…….
그는 샐리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대로 그를 떠나, 다시 로윈 저택의 하녀로 돌아왔다.
로윈 백작은 샐리의 남편을 닮았다. 결국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샐리는 이자벨을 돌보면서, 죽은 첫 아이와 떠나간 남편을 생각했다. 그리고 샐리는 10년이 지나서야, 약한 것은 죄가 아닐지라도, 남은 이들을 돌보지 않은 것은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맞아, 샐리. 주제넘었어.”
흐린 얼굴로 중얼거리는 말에 샐리는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알렉스가 불렀으면 가야지.”
이자벨은 몸을 일으켰고, 샐리는 빠르게 그녀의 어깨에 숄을 둘렀다. 이자벨은 샐리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넌 가끔 주제넘어도 돼, 샐리.”
샐리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이게 애정이 뭔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소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호의일 수도 있었다.
“네 판단이 틀렸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실수해도 괜찮다고, 너는.”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은 늙은 유모 대신 샐리가 이자벨을 돌봤을 때부터, 이자벨은 좀 더 많이 울고, 많이 떼를 썼다.
샐리는 절대 누구에게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겠지만.
가끔은 이자벨에게서 죽은 첫 아이를 봤다.
이자벨은 고개를 숙인 샐리를 지나쳐 느릿한 걸음으로 알렉스를 찾았다. 그녀는 평생 샐리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보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따뜻하고 몽글거리는 감정들은 그녀에게는 몹시 낯선 것들이었으니까.
알렉스는 마치 그녀를 기다렸던 것처럼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알렉스의 등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이자벨은 겨우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이자벨은 거대한 초상화를 올려다보고 있는 알렉스의 옆에 섰다.
엄마의 초상화였다. 액자 밑에 금으로 ‘헤더 로윈’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똑같은 얼굴이 옆에 있는데, 그림을 봐서 뭐하게?”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꽤 진심이었다. 나는 엄마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다.
커가면서는 더더욱.
외가는 어릴 적의 나를 한 번 보고는, 그 후로 다시는 날 보러 오지 않았다.
너무 닮아서 무섭다나.
내 친부가 누군지는 몰라도 난 그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단 하나도 갖지 못했다.
내 모든 것은 엄마를 닮았다. 내가 한 번도 로윈 백작의 핏줄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누님의 초상화도 그리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 내년쯤에 사람을 불러서 그리라고 할까? 네 예쁜 얼굴도 그릴 겸?”
알렉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 낯설었다. 그 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직도 제가 예뻐요?”
“늘 예쁘지.”
내 중얼거림에 알렉스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툭 던졌다.
“거짓말.”
날이 서 있는 어조에 내 눈이 약간 커졌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 없는 애였다.
“말로만 예쁘다고 해 주면 어떻게 해요. 진짜 예뻐해 줘야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적어도 다른 형제자매들이 주고받는 애정보다는 과하게 챙기고 있다고 믿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사이좋은 남매처럼 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알렉스도 이편이 더 편하다 여기고 적응할 거라고…….
“지금도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 왜 안 안아 줘요?”
“알렉스, 그건…….”
알렉스의 손이 내 허리를 당겨 안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알렉스의 가슴을 밀어내다가 멈췄다. 그를 올려다보니…….
“아……?”
상처받은 얼굴이잖아.
“이제는 내가 손대는 것도 싫어요?”
“아냐. 알렉스. 아니야. 놀라서 그랬어. 내가 왜 널 싫어해.”
황급히 알렉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면서 나는 알렉스를 달랬다.
“……네 나이대 애들은 어린애 취급하면 싫어한다고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 이제 너도 슬슬 일도 맡고 하니까 그러니까…….”
“누가 그래요?”
알렉스의 손이 내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눌렀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말투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누님 애새끼로 사는 게 내 평생 꿈인데.”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알렉스?”
혼란스러워하는 내 부름에 알렉스가 내 뒤통수를 누르던 손을 뗐다. 올려다보니 여전히 상처받은 얼굴을 한 알렉스가 내게 힘없이 속삭였다.
“제 어리광을 받아 주는 건 누님밖에 없잖아요. 누님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알렉스. 나는…….”
나는 순간 말을 멈췄다. 알렉스의 뒤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알렉스, 손님이 있었니?”
알렉스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다시 안쓰러워 죽을 것처럼 불쌍한 얼굴로 바뀌었다.
“선생님께서 사람을 보낸다고 하셨는데, 아마…… 누님?”
나는 하얗게 질렸다. 반사적으로 알렉스를 밀어냈다. 숨이 쉬어지지를 않았다.
회색 머리카락 아래에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이 섞인, 기이한 조형물 같은 잘생긴 얼굴. 나와 마주친 검은 눈이, 꼭 그날의 밤처럼 웃었다. 이제는 나만 기억하는 그날처럼.
“누님?”
“방에 가 있어, 알렉스.”
“아는 사람이에요?”
알렉스의 눈이 위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알렉스를 향해 중얼거렸다.
“알렉스……. 방에 먼저, 먼저 가 있어.”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 남자였다.
알렉스를 망쳐 버린 그 남자.
피와 하늘, 그리고 다락이 머릿속에 재생됐다. 숨이 턱 막혀왔다.
“누님?”
알렉스의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그제야 겨우 숨을 내쉬었다.
“알렉스, 방에 먼저 가 있어. 응? 누나가, 내가, 바로 갈게.”
달달 떨리는 손이 알렉스의 손을 떼어냈다. 어떤 남자를 보고 하얗게 질리는 누이의 모습에 알렉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들어가 있어. 내가 갈게.”
나는 간신히 알렉스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남자의 시선 앞에 알렉스를 두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전 한 번으로 족했다. 나는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 * *
정원의 알렉스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걱정보다는 흥미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추워 보이는군요.”
내가 그 말에 뭐라고 답했더라? 했던 말도 기억이 안 날 만큼 취해 있었던가?
“로윈의 후계라면 그 정도는 견딜 수 있겠죠.”
“이자벨. 당신이 아니라 그가요?”
나는 그 말에 확실히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타인의 앞에서는 드러내서는 안 되는 짜증을 내면서.
“저 애가 있는 한 나는 무리죠.”
그 뒤로 무슨 대화가 더 오갔지? 기억은 드문드문 구멍이 나 있었다. 확실한 건 그 남자는 내내 웃었고, 마지막에도 웃었다는 것이다. 남은 흔적이 없다면 꿈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기억은 온통 검은 구멍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봐요. 네. 그렇게.”
“……내가 취했나요?”
“아뇨. 당신은 멀쩡해요. 이자벨. 당신만큼 멀쩡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나는, 난…… 당신……?”
“허락해요. 이자벨. 딱 하룻밤만 저 소년을 빌려줘요.”
죽이진 않을게요. 맹세해요.
불현듯 그 말이 지금 생각난 이유는 뭘까.
죽이진 않겠다고. 그 거짓말이 생각났다. 그 믿어선 안 될 말에 넘어가 알렉스가 죽었다.
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창백해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창백해진 여자를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어떻게든 입가에 미소를 지어냈다. 회색 머리의 남자는 내가 알렉스를 보내고 다가올 때까지도 여전히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처럼. 그날 밤처럼.
나는 파르르 경련하는 입가를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이자벨 로윈이에요. 알렉스의 손님에게는 무례한 일이지만…… 갑작스러운 가문의 일이 생겨서요. 이만 돌아가 주실 수 있을까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눈이 감정을 읽기 어려울 만큼 불투명했다.
“괜찮습니다. 로윈 가문의 일에 제가 감히 무어라 하겠습니까.”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드려도 괜찮을까요? 혹시 어느 가문의…….”
나는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과 차갑게 식어 가는 피를 느꼈다.
이 남자는 누구지? 정말 그때 그 남자인가?
“게일 위버겐입니다. 시르넨에서 왔기에 모르실 테니, 만약 초대하실 마음이 있으시다면 코웰 경에게로 초대장을 보내시면 됩니다. 거기에 머무르고 있어서.”
꽤 먼 해안가의 공국을 입에 담는 남자의 말에 나는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이질적인 외모였다. 시르넨의 귀족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려보다 결국 포기했다.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코웰 경의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앓고 있던 병이 꽤 악화되어서요.”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럼…….”
서둘러 말을 정리하는 내 기색을 살피던 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가문의 일은 무사히 처리되길 빕니다.”
가볍고 정중하면서, 흠잡을 곳이 없는 태도였다.
나는 그에게 간신히 웃음을 되돌려 줄 수 있었다. 비록 입 안의 살은 씹혀 엉망이 되었지만, 비릿한 피 냄새와 통증이 적어도 입가가 떨리는 꼴은 막아 주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인사했다. 그 또한 순순히 내게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누구지?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그 순간, 그가 몸을 돌렸다.
“그런데 영애, 이전 생에 제가 무슨 실수를 했습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검은 눈까지 미치지 않은 웃음기가 입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내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제가 무섭습니까?”
“그게 무슨…….”
목구멍에서 간신히 끄집어낸 쉰 목소리가 뱉어졌다. 그는 굳어 버린 나를 향해 방긋 웃었다.
“전 당신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텐데, 왜?”
“당신 누구야?”
내 물음에 그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는 진심으로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나를 기억하면서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는 그게 굉장히 이상한 일인 것처럼 말했다.
나는 문득 어떤 확신이 들었다. 이 남자는 애초에 알렉스에게 관심이 없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가 관심을 쏟는 건 나였다. 왜? 그런데 왜 알렉스를 건드렸지? 아니, 왜 나한테 관심을 가졌지?
호감이 섞인 관심은 아니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었나? 그때의 관심에 호의가 섞였었나? 묘하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성적인, 그런 호의였던가?
“과거의 나는 머저리였군요.”
나는 침묵했다. 남자는 거리낌 없이 정보를 흘렸다.
이 남자는 내가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생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도대체 정체가 뭐기에?
나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내 두 번째 삶이 어쩌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 남자는? 내 두 번째 삶은? 알렉스는?
머릿속이 엉망으로 엉켰다.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내게 닿았다.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도 서늘하게 유지된 눈처럼, 이번에는 다정한 시선을 한 주제에 냉정하게 그가 속삭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한테 내가 졌군요.”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그대로 몸을 돌리고 사라졌다.
단호하고 빠른 태도에 나는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져 엉망이 된 머릿속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전 생에서, 나는 저 남자와 스무 살에 단 한 번 만났다. 그러나 저 남자는 나를 잘 아는 것 같이 굴었다. 어째서?
이제는 의심마저 들었다. 심지어 알렉스에게 단 한 톨의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저 남자가 과거에 알렉스를 건드렸다고? 왜?
아니다. 분명 저 남자가 떠나고 알렉스는 몇 달 지나지 않아 하혈하며 쓰러졌다. 나는 기억을 자세히 되살리려 애썼다.
하지만 저 남자는 알렉스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알렉스와 하룻밤의 시간 동안 뭘 했지? 아니, 애초에 왜 알렉스와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지?
지금까지 알렉스의 죽음이 내가 게일 위버겐이라는 남자에게 그 애를 팔아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알렉스가 죽을 이유가 없잖아. 학대하던 내가 곧 혼인으로 저택을 떠나면 로윈은 자기 것이 될 텐데.
그 남자 때문이 아니라면, 왜지? 내 학대를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나한테 본인이 겪었던 고통을 알려 주고 싶어서?
왜? 알렉스는 왜 다락에서 떨어진 거지? 같이 다락에서 떨어졌는데, 왜 나만 돌아온 거지?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우연, 기적, 붙일 핑계는 많았으니까.
그러나 우연이든 기적이든 왜 내게만 일어났지? 도대체 나는 어떻게 회귀할 수 있었던 거지?
알렉스, 네 과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누님.”
알렉스의 목소리가 멍한 내 정신을 일깨웠다.
“아…….”
나는 멍청하게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바싹 마른 입술에 차 한 방울 닿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차를 다 마셔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 남자가 누님께 무슨 짓을 했습니까?”
약간 낮아진 목소리에는 분노가 배어 있었다. 나는 알렉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그냥…… 예전에 봤던 사람이랑 비슷해서. 놀랐어.”
“그 사람은 누님께 ‘나쁜’ 사람이었습니까?”
“응.”
“얼마나요?”
나는 눈을 찌푸렸다. 알렉스의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 꼭 아버지를 닮았다. 로윈 백작은 늘 그런 눈으로 세상을 봤다.
“아주. 아무튼 중요한 건 그 남자가 아니라…….”
“무서워했잖아요, 누님이. 그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아냐. 그냥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놀란 것뿐이야.”
알렉스는 탁자에서 일어나 성큼 내게 다가왔다. 어릴 때처럼 무릎을 꿇고 내 치마폭에 고개를 묻었다. 알렉스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아 자기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면 제가 안심할 수 있게…… 예뻐해 주세요.”
알렉스의 중얼거림에 나는 반사적으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도닥였다.
“그동안 내 행동에…… 상처받았어?”
“네, 아주 많이요.”
“계속 어리광이 부리고 싶었는데 내가 안 받아 줘서 싫었어?”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실수를 한 걸까. 엘리자베스의 말이 생각이 났다. 어느 남매도 이렇지 않다고.
“……나중에 다 커서 결혼하고, 내가 애라도 낳으면 어떡하려고. 우리 알렉스, 그땐 내가 달래 주지도 못하는데.”
“왜요? 그때도 누님은 제 누님이잖아요.”
“다 크면, 나 말고 네 사람을 만들어야지. 알렉스.”
알렉스가 힘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알아요. 그런데 그중에 누님이 첫 번째면 안 돼요?”
“응. 안 돼.”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애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난 아주 나쁜 사람이라, 널 괴롭힐지도 모르거든.”
너한테 소중한 게 많았으면 좋겠어. 내가 너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릴 만큼.
알렉스는 이자벨이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자벨이 나쁜 사람이라고? 그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는 이자벨이 나쁜 사람이어도 별 상관없었다. 겨우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넘어갈 만큼 알렉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날 예뻐해 주면 안 되나요? 왜? 내가 자라서? 내가 커버려서?
“전 누님이 나쁜 사람이어도 괜찮아요.”
나쁜 사람이면 더 좋지, 나한테만 이렇게 구는 거잖아요.
그는 이자벨의 손바닥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이자벨이 그 손을 빼내려고 하자 알렉스는 더 꽉 붙잡았다. 하얗게 질린 손이 약하게 떨렸다.
“내가 너한테 나쁜 짓을 하면 어쩌려고.”
“그럴 수는 없어요.”
알렉스는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웃었다.
“누님이 저를 버리는 것을 빼면, 누님이 제게 뭘 하든 그건 나쁜 게 될 수 없으니까.”
누님은 저한테 뭐든 해도 좋아요. 뭐든 좋을 겁니다. 가끔은 누님이 절 죽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알렉스는 현명하게 뒷말을 삼켰다.
“약속했잖아요. 세상이 전부 등을 돌려도, 서로의 편이 되어 주기로.”
그러니까 절대 날 버리지만 마세요. 다른 건 뭘 해도 상관없으니까.
* * *
나는 결국 게일 위버겐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차라리 아예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렇게 대놓고 의뭉스럽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인간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어떤 경위로든 그는 알렉스에게 피해를 끼친 인물이다. 나는 그의 속셈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시그?”
갑작스러운 시그의 방문은 사실 놀라울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늘 웃음을 달고 다니던 표정이 약간이나마 굳은 것은 낯선 일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런 얼굴이야?”
나는 겨우 웃음기를 조금 잃어버린 것만으로 인상이 확 달라진 붉은 머리의 미남을 두고 약간의 놀라움을 표출했다.
“벨, 내 피앙세.”
약혼한 사이임에도 시그는 날 그렇게 부른 적이 많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경우에서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가 스스로임을 자신했고, 약혼을 빌미로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시그, 괜찮아?”
묘하게 초조한 눈이 나를 향했다. 그는 평소처럼 웃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했다. 나는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가 내 손길에 눈을 감았다.
“왜 그래?”
“내가 네게 손해를 봐야 하는 선택지라도…… 네가 날 선택할까?”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늘 내게 최고의 선택지였다. 나는 내 종착역이 그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 어깨를 붙든 그가 내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남겼다.
“아니야. 잊어버려, 멍청한 질문이었어.”
난 늘 너한테 최고일 거야, 내 아가씨.
그는 힘주어 덧붙였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최고의 선택지가 되어 줄게. 내가 반한 여자는 최고만 가져야지. 그게 맞아.
* * *
며칠 전, 시그니티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제기랄.”
부트 남작 부인의 편지가 그의 손에서 구겨졌다.
전쟁이었다. 샬덴과의 전쟁이 마침내 발발했다.
공식적인 서한이 오기 전에 당도한 부트 남작 부인의 서신은 분명 호의였다. 적어도 대비라도 할 수 있을 테니.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라 믿었지만, 이리도 빨리는 아니었다.
“너무 빨라, 일러도 너무 일렀어…….”
적어도 바르펜시아 대공자에게는 좋지 못했다. 시그니티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머니께 매달릴까?
적어도 어머니께 애원한다면, 그의 어머니가 그의 편을 들어준다면, 아버지께서는 절대 반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젠장. 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그가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 대공은 대공비와 혼인하기 위해 자기 자식을 대가로 걸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왕실에 바쳤던 맹세를 지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렇기에 바르펜시아는 전쟁에서 처음으로 차출되는 왕족이어야만 했다. 전쟁 시에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왕족이며, 최전방에 나서야만 하는 왕족이었다.
시그니티는 무지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기에 이번 전쟁에서 아를이 열세하다는 것 정도는 깨닫고 있었다.
아를의 최우선 목표는 현재 국경의 방어였다. 여차하면 국경 남서쪽의 영지를 포기하는 것 정도는 각오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애초에 샬덴은 왕이 권력을 전부 움켜쥔 나라다. 귀족파와 왕당파가 균형을 이루는 아를과는 반대였다.
아를이 전쟁에 나서기 위해 귀족들에게서 병사를 차출할 동안, 샬덴은 정예로 훈련된 왕의 군대를 내보냈다.
빌어먹을. 샬덴과의 전쟁에서 아를이 우위를 차지한 적이 있긴 했던가?
아를은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였지만, 샬덴은 대륙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였다.
몇십 번은 터진 두 나라의 전쟁에서 늘 아를은 방어전을 치러야 했고, 기적처럼 때마다 공성전의 영웅이 나와 아를을 방어해냈다.
“시발.”
그리고 빌어먹게도, 아를과 샬덴의 전쟁이 10년 안에 끝난 것은 딱 세 번뿐이었다. 샬덴의 강력한 군사력이 아를의 국경을 순식간에 깨버리고 강화 조약을 맺었을 때 세 번.
10년?
시그니티가 10년이 지나 전쟁에서 돌아온다면, 이자벨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흠이 없는 귀족 가문의 영애가 스물일곱까지 혼인을 하지 않을 리가 있을까? 아니, 이자벨이 그때까지 그를 기다려나 줄까?
시그니티는 회의적으로 답을 내렸다.
“그럴 리가 없지. 일단 가문에서 압박을 할 테고. 젠장!”
일단 그부터가 전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약혼자를 기다려 달라고 죽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이자벨에게는 늘 최고의 것만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절대 그녀가 희생하고 헌신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이자벨이 조금이라도 희생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았다. 적어도 시그니티의 사랑은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고민조차 할 필요 없어야지.
평생 고민이라고는 파란색과 녹색 중에 뭐가 더 예쁠까 정도면 족했다. 아니면 사과 파이를 먹을지 귤 파이를 먹을지, 라든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원하는 건 전부 가질 수 있는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희생이 사랑을 증명한다고?
개소리.
이자벨이 사랑을 증명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가 열렬하게 증명하는 사랑만 보고, 거기에 이따금 시선만 주면 되었다. 그냥 존재만 해도 예쁘고 완벽한데 거기서 굳이 뭘 더 해야 하지?
뭔가를 희생하고, 헌신하고, 증명해야 하는 건 사랑을 원하는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의무.
시그니티는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했던 일들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땅히 어머니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 결과가 그에게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시그니티 또한 이자벨과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미래에 태어날 그들의 아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내놓을 수 있었기에, 아버지의 결정을 이해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분명히 사랑했지만, 우선순위가 확실한 인간이었을 뿐이니까.
공식적인 전쟁이 발발했다고 아를이 선언하는 즉시, 군대가 조직될 것이고, 시그니티는 제일 먼저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군대의 소집까지 생각한다면, 한 달은 남았을까?
시그니티는 막막함에 손바닥으로 피곤한 눈을 눌렀다.
차라리 알렉스 로윈이라도 수도에 남아 있다면. 그 성정에 누이를 혼인시키지 않으려 무슨 짓이라도 하겠지만, 말처럼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로윈 백작은 아를의 군부에 소속된 이였다. 제 아들에게 제 지위를 물려주려 할 테니, 자신만큼 최전방은 아닐지라도 머지않아 전장에 끌려갈 것이 뻔했다.
아를 왕실의 수치나 다름이 없는 자신을 반발 하나 없이 제 딸과 약혼시킨 로윈 백작은 이자벨이 혼인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적당한 혼처만 나온다면 곧바로 팔아치우듯 제 딸을 보내겠지.
“빌어먹을.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시그니티는 펜을 집어 들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신중한 얼굴로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
* * *
“부르셨습니까.”
알렉스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을 가다듬었다. 로윈 백작은 그런 알렉스의 기색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는 도대체 로윈 백작이 왜 그를 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로윈 백작은 어쩌면 그의 누이보다 그에게 더 무관심했으며, 알렉스는 로윈 백작을 딱히 아버지로 여기지도 않았다.
핏줄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이자벨이 의무감으로나마 로윈 백작을 부친으로 여기는 것에 비한다면, 알렉스의 감정은 훨씬 더 건조했다.
“네 나이가 몇이었지?”
“열다섯입니다.”
물건을 감정하듯 무심한 시선이 알렉스를 훑었다. 곧 로윈 백작의 시선은 서재의 책상 위로 떨어졌다.
알렉스는 제 아비가 자식의 나이도 모르고 있다는 것에 충격받지 않았다. 이자벨의 생일에는 그나마 형식적으로나마 선물을 보내는 아비가 그의 생일에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알렉스는 로윈 백작이 저택에 그가 살고 있다는 걸 잊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이름은 뭔지 알고 있을까?
“나쁘지는 않군.”
무엇이?
그의 아비는 서신 몇 개를 서랍에 넣고는 알렉스에게 힐긋 시선을 주었다.
“열다섯이면 충분히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겠지.”
알렉스는 놀랍게도 이게 그와 그의 아비가 단둘이 대화 비슷한 것을 나눠본 첫 번째 날임을 깨달았다.
“내일부터는 날 따라나서라.”
“왕실이라면, 아직 나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럭저럭…… 멍청하진 않군.”
알렉스는 제법 신기하다는 시선이 그를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로윈 백작은 알렉스가 마치 태생부터 귀족처럼 자라온 이처럼 굴고 있다는 것에 약간의 의아함마저 느끼는 듯 보였다.
“상관없다. 어차피 알현을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니.”
“그럼 무슨 일입니까?”
로윈 백작은 그의 물음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어차피 내일이 되면 알게 될 일이라 여겼는지 제법 순순히 답했다.
“군부 쪽 일이다. 언젠가는 물려받을 일이니 좀 이르게 시작해도 괜찮겠지.”
도대체 그의 이름도, 나이도 제대로 모르는 아비는 어째서 그의 누이를 대신해 그를 데려오고, 모든 것을 물려주려 하는 건가? 아들을 원해서라기에는, 알렉스에게는 정말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주제에.
그러나 알렉스는 왜 저를 데려왔냐는 원망이나 의문의 말을 한 번도 내뱉지 않았다.
어쨌든 로윈 백작이 알렉스를 데려왔기에 그는 이자벨을 만날 수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그의 가족을.
그것 하나만으로 로윈 백작이 알렉스의 은인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그의 아비는 될 수 없어도 말이다.
“군부 쪽 일이라면 더더욱…….”
“네 나이면 고작 해 봤자 후방이다. 게다가 정통성에 문제가 있으니 괜한 소리라도 줄이려면, 전쟁에 참여했다는 공훈이라도 있어야지.”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최근 상단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문제를 그가 모를 수는 없었다.
“전쟁입니까?”
로윈 백작은 그의 질문에 처음으로 진득하게 그의 눈을 마주했다.
지나치게 닮은 부자는 침묵 속에 신경전을 벌이듯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먼저 눈을 피한 것은 로윈 백작이었다.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알렉스에게 명령했다.
“이만 나가라.”
“백작님.”
“내일이면 알게 될 일이다. 나가.”
“그럼 지금 알려 주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넌 알 자격이 없다.”
단호한 명령에 알렉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전쟁이란 단어에 좋은 기분이 들 수 없음은 당연했지만, 기이하리만치 기분이 불쾌했다.
로윈 백작이 그를 부른 것처럼,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일상이 깨질 것 같았다.
그건 좋지 못했다.
알렉스의 일상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의 누이 이자벨을 뜻하는 말이었으니까.
* * *
게일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의 손에는 초대장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용기 있고, 그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지닌 사람을 좋아했다. 슬프게도 그런 이들이 그를 좋아한 일은 없었지만.
그는 그를 좋아하는 수많은 이보다 오히려 그를 미워하는 소수의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다. 감히 나를 꺼리다니, 신선한데. 따위의 감정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이상하게도 괜찮은 인간들일수록 그를 싫어하는 경향이 높았다. 아니,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답장을 적어 내렸다. 괜찮은 인간 중에서도 그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지 않은가. 게일은 괜히 자신을 비하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날 모르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게일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전 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거기서라고 그의 양부가 좀 덜 미쳤던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의 존재가 바로 광기의 증명이니.
이자벨의 탄생 자체가 그 남자의 뒤늦은 사랑과 일평생을 안고 갈 그 미친 집착의 시발점이었다.
제 어미의 죽음 위에서 태어난, 그녀와 꼭 닮은 딸.
그는 편지 위에 촛농을 떨어트리고 인장을 눌렀다. 휘어진 나뭇가지 같은 형상이 편지를 봉인했다.
게일은 촛농이 완전히 굳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이자벨을 생각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였다. 순진한 아가씨나 악에 받친 여자를 생각했지만 둘 다 아니었다.
마음에는 들었지만…….
“좀 더 어렵겠는데.”
그는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가볍게 생각해도 무거운 주제였으니 뭐 괜찮지 않겠는가. 계속 볼 사이에 마음에 안 드는 것보다는 낫겠지.
완전히 굳은 인장을 톡 건드린 게일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우리 뻐꾸기 아가씨. 이제는 돌아와야지.”
* * *
바르펜시아 대공이 그의 하나뿐인 아들에게 유일하게 아쉬워하는 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자신만 닮았다는 점이었다.
외모야 물론 아름다운 대공비를 많이 닮았지만, 전체적으로 뜯어보면 시그니티는 대공의 판박이였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좀 리아를 닮아 귀여웠는데, 커서는 영…….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책상 앞으로 숙여 제 아들이 보낸 편지를 응시했다.
⌜……전 아버지와 똑같은 선택을 한 겁니다. 책임지셔야 해요. 절 이렇게 키운 건 아버지니까.⌟
그는 아무튼 사랑하는 부인과의 결실인 시그니티를 사랑하기는 했다.
대공비는 좀 더 많은 자식을 원했지만, 대공은 대공비 외에 사랑하는 대상을 하나 더 만들기가 벅차 거절했다.
리아가 조금만 냉정했으면 일이 더 쉬웠을까.
대공은 차라리 그가 왕이 되어, 반발하는 세력을 전부 숙청하고 그녀를 왕비로 삼았으면 더 편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곱고 예쁜 것만 봐도 모자랄 부인님 앞에서 무슨.
리아는 늘 옳으니, 아무튼 잘못한 건 대공이었다. 내 부인께서는 잘못 같은 거 할 줄 몰라.
그와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아들이 보낸 애원에 대공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리아 또한 제 아들이 약혼녀에게 푹 빠져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예쁜 목소리로 종종 그 아가씨를 보고 싶다고 속삭였으니까.
리아를 보고 자라 눈이 높은 제 아들이 반한 여자이니, 참 어지간히도 대단하거니 싶었다.
원래 그렇게 대단한 여자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상황도 도와주지를 않으니 돌아버릴 것 같겠군.
대공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네 인생은 알아서 개척하라는 답변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리아가 슬퍼하겠지. 젠장.
그는 편지를 두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사랑스러운 것을 봐야 했다. 물론 그 핑계는 모든 순간에 쓰였다.
그를 태자 때부터 모신 시종장은 어차피 즐겁거나 슬프거나, 심지어 구름이 하얗다는 이유로 대공비를 보러 가는 대공을 보며 왜 저렇게 살지, 라고 생각하는 듯한 시선을 종종 보내곤 했다.
“리아.”
“윌, 우리 아들이 뭐래?”
정원에서 하녀들을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던 대공비의 뒤에서 대공이 등장하자마자 하녀들은 흩어졌다.
대공비를 등 뒤에서 끌어안은 대공은 집사의 말을 빌리자면 나잇살 먹고 할 짓이 아닌 애교를 부렸다.
“몰라. 당신한테는 뭐래?”
대공비의 어깨에 이마를 대며 웅얼거리는 대공에게 대공비는 젊은 시절처럼 웃었다.
대공은 연인 시절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가끔 대공비는 대공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에서 시간이 멈춰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 정도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허락하지도 않았겠지만.
남들이 무어라 하든 간에 그녀는 죽은 전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관을 앞두고 홀로 살겠다고 했던 맹세를 깨트리게 만들 정도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로윈 영애를 초대하고 싶다는데, 나한테 보여 주고 싶대.”
“그거 자랑하려는 거야.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여자한테 반했는지 자랑하려는 수작이니까 내버려 둬. 내 아들인데 뻔하지. 당신은 안중에도 없을걸.”
“당신도 그랬어?”
대공비의 물음에 대공은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대공은 솔직히 사랑에 눈이 뒤집히고 나서 불효자가 된 경우였다. 아무튼 왕실에서 응원해 주는 결혼은 절대 아니었으니.
그는 가족과의 길고 피곤한 싸움 끝에 리아와의 사이를 허락받았다. 정확히는, 허락을 강제로 뜯어냈다.
“당신이 너무 예뻤어.”
“태후 폐하께 참 좋은 변명이 되었겠네.”
“지금에 와서는 다 행복해졌잖아, 내 사랑.”
대공에게 짓눌려 야망의 ‘야’자도 꺼내지 못했던 동생은 왕이 되었고, 그는 리아와 혼인했다. 이보다 완벽한 결말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의 어머니인 태후는 그 뒤로 대공을 보지도 않지만.
선택에는 늘 포기가 따랐다. 대공은 그저 다른 어떤 선택지보다 사랑을 골랐을 뿐이다.
물론 내 사랑은 예외지.
선택은 다른 선택지의 포기라는 사실을 그녀는 절대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그니티는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제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
시그니티는 이자벨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것보다, 그녀에게 완벽한 선택지가 되어 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괴로웠다.
그는 어머니가 수줍게 속삭이던 아버지의 청혼을 기억했다. 자신도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꽃과 황금으로 길을 만들겠습니다. 당신이 걷기 싫다면, 구름으로 가마를 만들지요. 그래도 오기 싫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 * *
“상황이야 계속 나빠지고 있지. 애국심이란 게 있으면 끔찍하고, 상인으로서는 나쁘진 않고.”
엘리자베스는 말을 멈췄다. 데빈은 그녀의 말에 굳은 얼굴을 애써 폈다.
그녀는 조카의 긴장에 픽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곧 본점으로 돌아갈 조카에게 더 많은 말을 할 시간도 없었다.
군대와의 거래를 위해 잠깐 부른 데빈은 전장의 공기에 영 적응을 하지 못했다.
“데빈. 보충해야 할 물자는 다 확인해 놨으니, 군대에 보고해. 내가 정해 놓은 선 이하로 부르면 그냥 나와 버려.”
“그래도 됩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물론 나올 때는 예의 바르게 나오렴.”
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뻣뻣하게 굳은 팔다리로 방을 나가는 데빈을 응시하다 눈을 감았다.
피로가 심했다. 아를의 군대는 점점 더 많은 물자를 요구했고, 그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승전 소식 하나 없이 닳아 가는 물자라.
엘리자베스는 이 전쟁에서 샬덴이 얻어갈 것이 뭔지를 생각했다. 추세로 보아 아를을 정복하려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얻어야 만족하고 진군을 멈출 셈이지?
아를은 아마도 남서쪽의 영지 정도는 포기할 마음이 있겠지만, 샬덴이 거기에 만족할지, 아니면 그 이상을 바랄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빨리 협상 테이블에 올라 평화 조약을 맺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아를과 샬덴 사이의 평화 조약은 정말 수십 번은 있었으나 다 깨지고 말았다. 그나마 당대에는 지켜졌다고 하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전장이 끝날 순간을 확실히 계산해 놔야 함을 알고 있었다.
전장만큼 거대한 부가 오가는 곳도 없다지만,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다면 최대치를 얻지 못하고 끝날 수 있었다.
곧 아를의 군대가 당도할 것이다.
그녀는 구 할의 확률로 총사령관으로 배정될 대공자를 생각해 보고는 고민에 빠졌다.
엘리자베스는 시그니티를 알았다.
이자벨의 두 번째 스토커.
제 아비처럼 사랑에 눈이 뒤집힌 걸 뺀다면 그는 제법 유능했으니, 최소한 나쁘지 않은 사령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국경선의 방어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최소한의 피해로 국경을 수습하는 것에 그칠 것인가?
도대체 샬덴이 어디까지를 원할 것인가?
샬덴의 군대는 난폭했고, 그들의 왕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문득 소문 하나가 떠올랐다.
‘이번에 샬덴의 태자가 된 남자가 왕의 사생아라고 했던가? 확실한 건 친자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태자의 정통성을 위해 왕이 일부러 전장의 공적을 만들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전쟁은 그리 길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또 모를 일이지.
점점 더 격해지는 전장의 공기에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뱉었다.
* * *
“벨.”
시그니티의 걱정스러운 부름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내가 왜 돌아오게 되었는지부터 게일 위버겐이라는 남자가 누구인지까지. 문제들은 너무 많고 복잡해 정신이 없었다.
“……미안. 뭐라고 했어?”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들자 시그니티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다 식었잖아. 벨, 괜찮아?”
“아마도.”
내 애매한 답변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 찻잔을 들어 빈 그의 찻잔에 부어 버리고는, 새로 차를 따라 내게 주었다. 티 테이블에는 단둘뿐이었기에, 그는 기꺼이 내 시중을 들었다.
“고마워.”
“그럼 나한테 집중해, 벨.”
그는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내가 웃자 그는 그제야 안심이 된 것처럼 웃었다. 나는 농담처럼 속삭였다.
“좋아. 시그, 집중했어. 이제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 봐.”
“내가 수도에 와서 가장 놀랐던 이야기?”
“응. 그게 나라는 사탕발림을 할 거라면, 그렇게 흥미로운 얘기는 아닌데.”
나는 평소의 그라면 뱉었을 말을 상상하고 대꾸했다. 시그는 내 말에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벨, 넌 놀랐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약하지.”
“그럼?”
“좋아. 고백하자면, 난 우리 부모님의 이야기가 공연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런 대단한 스캔들을 공연하는 인간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지.
“나한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데. 안 그럴 줄 안 게 더 신기한데?”
나는 대공 부부의 이야기가 책으로, 연극으로 아주 다양한 형태로 공연되고 있음을 알았다. 심지어 이야기가 작가마다 여러 형태로 각색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죄다 틀려먹었을 줄도 몰랐고.”
“완전히 달라?”
“특히 고백 장면에서. 절대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멋지게 고백하지 않았어.”
아름다운 정원이나, 왕궁이나, 저택이나. 아무튼 배경은 작가마다 달랐지만, 한결같이 진중한 왕태자의 근사한 고백이었다.
시그니티는 그것을 보고, 음, 저것은 누구인가, 라고 생각했다. 절대 그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가 아는 아버지는 자존심이 없는 남자였으니까.
“하늘을 날아서 고백하기라도 하셨어?”
“땅을 기면서 하셨지.”
“뭐?”
“당시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완전히 차버리고 떠날 생각이었거든. 그래서 돌아버린 아버지는…….”
문득 말을 하다 그녀를 바라봤다. 이자벨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그니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예쁘다.
그 당시 대공은 정말 미쳐 있었다. 그는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선택한 게 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도 이자벨이 떠난다고 한다면 비슷한 짓을 벌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어머니 애완견의 목줄을 훔쳐 차고는 어머니한테 그럼 당신의 개로 살게 해 달라고 고백했어.”
“……뭐?”
“어머니는 그걸 보고 아버지가 가망 없이 미쳤다는 걸 알고, 아버지를 거둬 주기로 했지.”
입을 벙긋거리던 그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시그니티는 이자벨이 고민 없이 늘 이렇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은 아니네.”
“뭐든 상상 이상이지. 만약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비슷한 짓을 저질렀을걸.”
가끔 대공이 한탄할 정도로 시그니티는 그다지 대공비를 닮지 않았다. 자연스레 사랑하는 방식도 대공을 더 닮았다.
“난 개 안 키워. 다행이지?”
“그럼 날 키우면 되겠네. 잘생기고, 말도 잘 듣고, 돈도 잘 벌고. 얼마나 키우기 좋아?”
“시그, 당신은 다 컸잖아. 거기서 더 크게?”
“키우기 힘들까 봐 미리 커서 왔어. 칭찬해 줘, 빨리.”
“키운 건 대공 부부실 텐데.”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끝에 그는 본론을 농담처럼 꺼내 들었다.
“한 번 뵈러 갈래? ……우리 부모님.”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었다. 시그니티는 이자벨이 그녀의 선택으로 행복해지길 원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최악의 것뿐이었다. 지켜 줄 사람들이 전부 떠난 그녀는 로윈 백작의 손에 의해 적당한 혼처에 팔려 나가겠지.
그는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최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어도, 그녀는 최고의 선택을 해야 했다.
“글쎄. 나는…….”
그는 일부러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겨우 조금이지만 그녀에게서 멀어진 거리가 싫었다.
“아버지에게 네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했어, 벨.”
이자벨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구속이 아니야, 벨.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는 스스로 목줄을 찰 수는 있어도 그녀에게 채울 수는 없는 인간이었다.
“네가 날 선택하지 않아도, 우리의 약혼이 깨지더라도, 네가 날 버려도…….”
“시그.”
“대공께서는 네 뒤에 서 있을 거야, 벨.”
아무도 네 선택에 간섭하지 못할 거야. 나 자신도. 어쩌면 정말 운이 좋아서, 네가 너무 착해서 나를 기다려 줄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도 좋아. 네가 좋으면 다 좋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로윈 백작은 절대 네 선택에 간섭하지 못할 거야.”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난 네가 왜 이러는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벨.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원하는 것만 보고, 그렇게…….”
그는 문득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벨은 너무 예뻤고, 그런 그녀에게 최고가 되어 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사랑해, 이자벨.”
날 선택해. 날 기다려 줘. 날 사랑해 줘.
그런데, 내 사랑이 네게 강요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온전히 네 선택으로, 나한테 와 주기를…….
바라고 있어.
* * *
네가 왜 나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시그니티.
그 질문을 하면, 넌 뭐라고 대답할까? 평소처럼 웃으면서 넘길까. 아니면 진지하게 내게 고백할까.
“아가씨. 차를 치울까요?”
샐리의 말에 나는 내가 정원에 꽤 오래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의 차는 이미 차갑게 식은 채였다.
“그래.”
몸을 일으키자 잎사귀가 내 머리카락에서 떨어졌다. 나는 떨어지는 이파리를 응시했다.
시그니티의 사랑은 낯설었다. 그토록 맹목적인 애정은 부모에게조차 받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시그니티가 주는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고, 내게 퍼붓는 모든 것들을 몇 마디로 일축했다.
‘보답을 바라는 순간, 그건 거래가 되잖아. 우리 사이가 사적이었으면 좋겠어. 내 욕심이야.’
시그, 넌 이상해. 아니면 이상한 건 나일까.
‘넌 날 위해, 나 때문에, 나를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건 내가 할 일이니까.’
원래 그렇게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사랑할까.
그가 내게 해 준 것들과 해 줄 것들을 저울에 올린다면, 나는 기꺼이 어느 정도는 그를 위해 희생할 수 있었다. 공평하게.
그게 내가 살아온 세상인데. 너만 다른 세상에 살아. 누가 봐도 그 세상이 더 아름답겠지.
나는 상상할 수 있었다. 시그와 결혼한 후의 삶을. 내 말을 법으로 삼고, 나를 신으로 삼아 살겠지. 내 행복만을 위해 살면서.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온기와 애정이 그득한 가정일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상상할 수는 있어도 실감할 수는 없는.
그건 무슨 세계일까?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애는 너처럼 행복하게, 완전하게 자랄까.
겪어 본 적도 없고, 꿈꿔 본 적도 없는, 아득히 먼 세계의 이야기 같았다.
감정도 저울에 올리는 물건이었다.
한때는 로윈 백작의 정을 갈구했던 때가 있었다. 늦는 아비를 기다리느라 문 앞에 한참을 앉아 있던 적도…… 있었지.
당신도 내게 정을 주지 않았으니, 나도 정을 줄 수가 없었어. 배운 적도 없었으니까.
나는 알렉스에게 빚이 있어. 그래서 그 애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 애도 날 사랑해.
그 정에 굶주린 아이는 손을 내민 누구라도 사랑했겠지. 내가 아니어도, 내 자리에 누가 있더라도.
하지만 시그니티, 넌 아니잖아. 내가 아니어도 괜찮은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잖아. 그게 네가 사는 세상이구나. 그런 세상에 나를 데리고 가려는 거야.
“아가씨?”
“응?”
놀란 샐리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대로 찬 뺨에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왜지? 갑자기?
인지하기 시작하자 더 멈추지 않고 눈물이 쏟아졌다. 난 슬프지 않아. 왜…….
한참을 가만히 울면서 서 있었다.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샐리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그냥 신기했고, 대단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 애정이 나를 향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걸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알렉스가 불쌍해서.
알렉스한테 미안해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줬는지도 모를 내 사랑이 그 애한테 괜찮았을까.
“누님!”
물기로 번진 시야에 두 명의 인영이 들어왔다. 내게 빠르게 다가오는 알렉스가 어느새 내 앞에 자리했다.
“왜 그래요, 누님. 왜…….”
눈가를 문지르는 내 손을 붙잡아 내린 알렉스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내 젖은 뺨을 쓸었다. 나는 알렉스의 뒤에 서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로윈 백작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아버지. 복수였어요? 아버지를 배신한 엄마에 대한? 그래서, 내가 미워서 날 그렇게 키웠어요?
평소라면 금방 시선을 돌렸을 아버지는 꼼짝없이 굳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버리지. 애정 한 점 없이 키울 거라면, 왜 나를 키웠어요?
슬프지 않아도 울 수 있다는 걸 난 지금 배웠어요. 그는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요. 사람은 슬프지 않아도 울 수가 있어요. 아버지.
“누님? 말해 봐요. 무슨 일이에요. 제발.”
초조함으로 얼룩진 알렉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나는 눈을 감고 알렉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알렉스…….”
아무 말 없이 시그를 보내지 말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계속 함께한다면, 난 널 사랑하게 될까?
그 말을 해 줬으면, 너는 적어도 조금 더 편하게 웃었을까.
로윈 백작은 이자벨의 시선이 거둬지고 나서야 숨을 뱉을 수 있었다.
그는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어둑해지는 정원에는 몇 개의 등이 위태롭게 빛나고 있었다.
백작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비틀거리며 미끄러졌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머릿속에서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였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계속 함께한다면, 당신을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요.’
철벽을 두른 것처럼 변함없던 얼굴이 흐릿한 등의 불빛에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우리가 이렇게, 지금처럼…….’
제 엄마를 닮았지. 그가 바랐던 것처럼, 아비의 흔적 하나 없이 제 엄마만 닮았지.
백작은 혼란스러워하는 이자벨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에 헤더가 아닌 걸 알면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가 배 속에 있었을 때는, 네 어미를 닮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네 어미를 붙잡았을 때처럼 절실하게.
백작은 제 머릿속을 점령한 여자의 얼굴에 조소를 뱉었다.
헤더, 내가 그렇게 애원했잖습니까. 나를 버리지만 말아 달라고. 옆에만 있어 달라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져도, 내게 마음을 주지 않아도, 다 괜찮으니까.
내 옆에서 살아 숨을 쉬어 달라고.
당신은 나한테 그러겠다고 약속했어요. 이자벨을 낳아서 행복하게 같이 살자고……. 나한테 그랬잖습니까, 헤더.
당신 딸은 이제 당신처럼 웁니다. 헤더, 그대와 소름이 끼칠 만큼 닮았어요.
그날을 후회해요. 우는 당신을 붙잡은 날.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빌었지요. 수없이 그날로 다시 돌아간 데도 나는 여전히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출 걸 압니다. 그래도 후회해요. 헤더.
백작은 영원히 그 순간에서 스스로가 멈춘 것 같다고 여겼다.
당신이 내 앞에서 죽는 걸 봤어요. 죽은 당신을 내가 수습했어요, 헤더.
당신은 당신을 닮은 아이만 남기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떠났어요.
나는 당신 죽음 말고 가진 것이 없어서…….
그는 헤더 구드윈의 연인을 기억했다. 그 앞에서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웃었던 헤더도.
어쩌면 우리가 함께한다면 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에 희망을 품었었지.
배 속에 이자벨이 있을 때, 백작은 그녀의 배에 손을 대고 이자벨의 발차기에 허둥거리며 웃었다.
‘헤디. 애가, 애가…….’
‘당신이 와서 좋은가 봐요.’
그런 백작을 보고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의 백작은 이자벨을 사랑했었다.
내 딸이야. 그 남자의 딸이 아니라 나와 헤더의 딸, 우리 이자벨.
어쩌면 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마지막에 숨이 끊이질 때, 당신은 차라리 우리 이자벨의 이름을 불러야 했어.
‘루…….’
그 남자가 아니라, 차라리 이자벨의 이름을 불렀으면, 내 품에 안겨 울던 우리 딸의 이름을 불렀으면…….
마지막까지 당신은 날 미치게 만들었지.
나도, 이자벨도 안 되는 거야. 그 남자의 대신은 당신한테 누구도 될 수가 없었던 거야.
그날 당신의 앞에 엎드려 매달릴 때보다 더 비참할 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당신이 예측 불가능한 여자라는 건 알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그럴 줄은 몰랐지.
헤더, 이자벨을 볼 때마다 당신을 생각해요. 그래서 그 애가 무서워.
그 애는 또 누구를 미치게 만들까.
당신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 * *
“괜찮아, 알렉스. 난 괜찮으니까.”
“제가 안 괜찮아요.”
내 뺨을 감싼 알렉스의 손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두워진 눈이 내 눈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보다 왕궁에는 잘 다녀왔어?”
화제를 돌리는 내 말에 알렉스는 내 눈가를 몇 번 손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더니 작게 한숨을 뱉었다.
“아뇨.”
나는 알렉스의 답에 그제야 알렉스가 평소보다 날이 선 분위기를 몸에 두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알렉스의 눈에는 불안함과 함께 작은 만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자리한 확연한 불안감에 잠시 착각했다 여겼다.
“누님도 들으신 거죠? 그래서 우신 겁니까?”
뭘?
내 뺨을 감쌌던 손이 자연스레 내 허리를 감았다. 알렉스의 얼굴이 내 뺨에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왔다가 멈칫하더니 순식간에 표정을 지웠다.
“……저 때문이 아니군요.”
느릿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에 로윈 백작을 떠올렸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에 어째서 그 저음의 목소리를 떠올렸는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누굽니까?”
내게 묻는 알렉스의 눈이 살짝 옆으로 굴러갔다. 샐리를 힐긋 본 알렉스가 내게 속삭였다.
“대공자 때문입니까?”
“알렉스. 누구 때문에 울었던 게 아니라…….”
“제가 아니라 대공자가 떠난다는 것에 우셨어요?”
난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떠난다니? 어디로?
“그게 무슨 말이야, 알렉스?”
알렉스는 혼란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했다. 나는 독촉하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지만, 알렉스는 내 기색을 눈치챈 것 같았다.
“알렉스.”
“전쟁이에요, 누님.”
“무슨, 그럴 리가…….”
곧바로 그 단어를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서류들을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몇 년은 위태롭더라도 전선이 유지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고작 몇 달 전이었다. 몇 달 만에 갑자기 전쟁이 터졌다고?
“대공자도, 저도 증명해야 합니다.”
알렉스는 음울한 눈으로 내게 속삭였다. 허리에 감은 알렉스의 팔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알렉스가 나를 끌어안았다.
눈을 감았다. 알렉스가 차라리 멍청했으면,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 전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떠올랐다.
전쟁의 시기를 최대한 희망적으로 포장했던 과거의 이유가 내 귓가에 떨어졌다.
“혈통이 더럽지 않음을요.”
왕실 최악의 스캔들, 시그니티 바르펜시아.
어미 모를 빈민가의 사생아, 알렉스 로윈.
적의 피로 어미의 혈통을 부정해야 할 이들. 나는 알렉스의 등을 끌어안았다.
‘네가 날 선택하지 않아도, 우리의 약혼이 깨지더라도, 네가 날 버려도……. 대공께서는 네 뒤에 서 있을 거야. 벨.’
시그니티, 네가 왜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 알겠어.
넌 날 지키고 싶었구나. 끝까지.
* * *
⌜친애하는 헤더.
오늘 당신 생각을 했어요. 사실 당신과 만난 이후로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당신과 약혼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로윈 백작은 자물쇠로 걸어 잠근, 가장 아래 서랍에 있는 편지들을 생각했다.
차마 그가 부치지 못한 편지와 헤더 구드윈이 그 남자에게 썼던 편지들. 그리고 그 남자가 헤더 구드윈에게 보낸 것들.
헤더 구드윈이 죽은 날 도착한 편지가 가장 아래에 깔려 있었다.
교본에 나올 것 같은 이전의 유려한 문체와는 달리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흔들리는 글씨로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백작은 그 편지를 보고 한참을 비웃었다.
⌜친애하는 헤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백작은 얼굴을 감싸고 한참을 기침처럼 웃음을 뱉었다.
늦었어. 너무 늦었어.
헤더가 그걸 봤으면 살았을까? 그런 가정은 이제 질릴 만큼 곱씹었다.
늦었어. 너무 늦었지…….
* * *
“당신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험해. 남자는 그렇게 속삭이며 웃었다. 여자는 그 말에 쓰게 웃었다.
거짓말. 당신은 그러지 못하잖아.
“루, 우리 도망칠까요?”
“어디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아무도 살지 않는 험한 산맥이나, 글 한 자 읽을 줄 모르는 이들만 사는 마을이나. 아니면…….
여자는 거기까지 중얼거리다 멈췄다.
“어디든요.”
“헤더. 우리는 평생 도망치게 될 거예요. 당신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
남자가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여자는 어두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끝을 예감한 여자는 서서히 체념하고 있었다.
사랑한다. 그러나 그걸로 해결될 수 없는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사랑해요, 루.”
우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사랑만 하다 끝나겠지.
“나도 그래요. 헤더.”
진심으로?
헤더 구드윈은 사랑에 전부를 걸지 못하는 남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드문 법이지.
여전히 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대공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런 사람도 있다면, 이런 사람도 있는 거지.
“당신은 날 놓친 걸 후회할 거야.”
“당신은?”
“난 안 해요. 난 끝까지 매달려 봤으니까. 거절한 건 당신이야. 그러니까…… 후회도 당신만 할 거야.”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고, 그사이에 아이를 낳아, 세상이 요구하는 삶을 완성해 가겠지.
그게 우리가 덜 사랑해서는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했다. 맞다면 헤더 구드윈의 사랑이 비참하지 않는가?
당신이랑 도망가서, 그렇게 우리가 부부가 되는 꿈을 꿨어요. 이전의 나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지만, 난 그렇게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을게요. 안녕. ……루.
헤더 구드윈은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결혼식에서 답장이 오지 않을 편지를 기다리며, 그날을 끝냈다.
다음날, 헤더 구드윈은 그 남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치웠다.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리고 남자는 헤더 구드윈을 추억 속에 묻을 수 있다고 여겼던 스스로의 오만을 후회했다.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여자를 위한 것들을 하나씩 마련하면서, 남자는 한때나마 가졌던 신념과 가치들을 모조리 부쉈다.
내가 바보 같았어요, 헤더. 한 번만 더 말해 줘요. 도망가자고. 우리 같이 떠나자고. 제발.
때늦은 고백을 듣는 이는 없었다.
* * *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안 그래?”
게일은 그에게 온 전서를 꾸깃꾸깃 구기며 중얼거렸다. 탐탁지 않은 눈으로 구겨진 전서를 응시하며 서 있는 남자에게 게일은 작게 구겨버린 전서를 던졌다.
“……정말 예의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작태로군요.”
“뭐 어때. 어차피 없앨 거잖아. 사소한 건 넘어가.”
“그래도…….”
“어차피 숙부는 신경 안 써. 너도 알잖아?”
게일은 구겨진 전서를 소중히 들고 있는 남자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먹어. 꼭꼭 씹어 삼키라고.”
태우는 것보다 그게 더 낫더라고.
* * *
밝히자. 처음 든 생각이 그거였다.
차라리 알렉스가 여자인 걸 밝혀 버리자. 그러면 전장에 끌려갈 일도 없겠지.
하지만, 그럼 알렉스는 완전히 계승권을 잃어버리는데…….
어떻게 셈해도 자매끼리는 첫째가 더 위였다. 게다가 알렉스는 바깥에서 데려와 입적시킨 애라 도무지 승계권에서 나를 앞설 수 없었다.
하지만 목숨이 더 소중하잖아. 차라리 밝히고, 어떻게든…….
후방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아냐. 그래도 위험하잖아. 거기도 전쟁터인데.
“아가씨.”
멍하니 생각에 빠진 내 앞에 따뜻한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놓였다.
평소라면 큰소리 없이 가져다 둘 샐리였지만, 내가 딴생각에 빠졌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곧 올 손님을 앞두고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손님이 의뭉스러움이 가득한 존재라면.
“이자벨 영애.”
가벼운 노크 뒤에 하녀가 문을 열었다. 나는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게일을 향해 마주 인사했다.
그는 여전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날 갑자기 발걸음을 돌리게 만든 것을 사과드려요.”
그날의 대화가 없었던 것처럼 말을 거는 내게 그는 조금 신기하다는 표정을 내보였다.
“괜찮습니다. 용건은 해결되어서요.”
“알렉스를 보러 오셨다고…….”
“제 용건은 그쪽에 있지 않았습니다. 핑계였죠.”
대놓고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로윈 저택에 방문했다는 그를 향해 나는 더 참지 못했다.
인내심이 있을 만큼 내 상황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알렉스와 시그의 문제만으로도 난 이미 벅찼다.
“당신은 누구죠?”
“게일 위버겐입니다.”
“이름이 아니라 당신의 정체요. 도대체 어떻게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아는 거죠?”
작게 속삭이는 내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단정하게 정리된 회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나는 벽에 가만히 붙어 있는 샐리를 힐긋 확인했다. 그는 내 시선을 확인하고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택의 정원이 참 아름답더군요. 구경을 시켜 주실 수 있는지.”
진실을 알고 싶다면 잡아야 할 손이었다. 나는 유난히 흰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의 눈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어쩐지 고통스러워 보인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이자벨, 이자벨이라고. 예쁜 이름이지.”
넋을 놓고 중얼거리는 남자의 시선은 손에 들린 초상화에 박혀 있었다.
아무 표정 없는 인형 같은 소녀가 초상화 속에서 녹안을 뜨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소녀의 머리를 도닥이듯 초상화 속 금발을 문질렀다.
“그녀의 아이야. 그녀가 낳은 내 딸. 우리 딸…….”
게일은 남자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삼켰다.
아이가 태어난 시점이 애매했다. 게다가 오로지 어미만 닮은 얼굴에서 아버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뭐, 남자는 그에 더 만족하는 것 같으니 상관없겠지.
장인이 공들여 만든 인형 같은 얼굴을 보고, 게일은 남자를 미치게 만든 여자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 * *
나는 정원에 들어서고 생각에 빠진 것처럼 말이 없는 그를 데리고 천천히 걸었다.
야외 정원으로 향하는 길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실내 정원은 적어도 밖에만큼 춥지는 않았다.
이 계절에 전쟁이라. 혹한이 닥치기 전에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돌아다녔다.
“이자벨 영애는 무엇을 아십니까?”
드디어 생각이 끝났는지 내게 묻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돌아오게 된 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죠.”
“그럼 서로 질문 하나씩 주고받는 것도 괜찮지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의 말을 조합해 보면 그의 관심사는 나였다. 그렇다면…….
“왜 나를 보러왔죠?”
게일은 내 말에 조금 웃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전 이자벨 영애를 보러온 게 아닙니다. 글쎄요. 보고 싶긴 했지만 굳이 지금 보러올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어차피?”
그는 씩 웃었다.
“이제 제가 질문할 차례죠. 이자벨 영애. 돌아온 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알렉스가 추락했지. 나도 함께. 그 다락 아래로.
나는 절대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문장을 목 너머로 끌어오지 못했다.
내 알렉스, 불쌍한 알렉스.
나는 눈을 감았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죽었어요. 동생과 함께.”
“그때 무엇을 원했습니까?”
알렉스가 행복하길 원했지. 그 애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누리면서.
연민의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니 우울한 생각 속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제 차례죠. 이제, 날 보러 온 게 아니라면, 그럼 내게 왜 관심을 가지죠?”
“당신이 내 양부의 딸이니까요.”
거리낌 없이 떨어지는 대답에 나는 눈을 떴다.
내 아버지?
게일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조용히 웃었다. 단정한 얼굴과 어울리는 미소였다. 그러나 내게는 전혀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평생을 잊고 살았고,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존재였다. 나를 사생아로 만든 어머니에 대해 생각했던 적은 있었지만, 친부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지 알아 봤자 무엇하겠느냐는 생각이 컸다. 어차피 사생아에 대해 달갑지 않아 할 부모는 많았으니까.
갑작스레 인생에 등장한 친부의 존재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해 본 적 없던 생각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내 아버지가 누구지? 내 존재를 알고 있나? 왜 지금까지 찾아오지 않았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안 그래도 고민만 많은 머릿속에 새로운 문제가 던져졌다.
‘생각하지 마. 전쟁이, 알렉스가 더 급하고 더 중요해.’
그는 내 기색을 살피며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요.”
나는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생아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죠. 친부가 살아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게 당신 질문인가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 날카로운 되물음에 내가 할 대답을 이미 안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 없었던 존재라면, 계속 없는 채로 있어야지. 보고 싶냐고?
그럴 리가.
“제 질문은 아까와 똑같죠. 그때 무엇을 원했습니까?”
“알렉스가 살기를 원했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자벨 영애. 만약 당신이 정말 그걸 원했다면, 당신은 그날 죽었을 겁니다. 과거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난 정말 그걸 원했어요. 알렉스가 살아서 행복하길 원했죠.”
내 말에 그가 미간을 좁혔다. 조용히 생각하던 남자는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작은 탄식을 뱉었다.
“좋아요. 거기서부터 시작하죠. 당신 동생이 왜 행복하길 원했죠? 그는 불행했나요? 뭔가 과거의 사건이나, 혹은 인물이나…….”
나 때문이지. 그리고 당신 때문이고. 분노가 극에 달하면 머리가 차가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차례네요, 당신. 도대체 어떻게 내가 지금의 삶을 한 번 더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이번 생에서 처음 본 저를 보고 그렇게 반응했는데. 의심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렇다고 처음 본 여자와 이전 생에 만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정신병자겠죠. 어느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어요?”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내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거라고 외친다면, 의원을 부르고 정신병자라고 진단을 받을 것이 뻔했다.
나 스스로도 내가 미친 게 아닌지 가끔 의심하는데.
“당신은 내가 왜 과거에서 돌아왔는지 알잖아. 그러니까 확신했던 거잖아. 게일 위버겐.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진짜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불린 남자는 웃었다. 그는 몹시 신중하게, 내가 제지하는 것조차 잊을 만큼 진지하게 내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겨우 손가락 두 개가 내 뺨을 스치고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당신 같은 사례가 기록에 없는 게 아니니까.”
“……기록?”
“역사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다 기록해 놓진 않았지만, 그래도 몇몇 선조들은 자기 사례를 기록할 수 있도록 허가했으니까요.”
그는 내 뺨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속삭였다.
“……아주 관대한 처사셨죠.”
입 안이 메말랐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뭐에 대한 기록이죠?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내 아버지의 핏줄에게 계속 있었다는 건가요?”
“제 차례죠, 이제.”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아챘다. 나는 그대로 쳐냈지만, 그는 더 꽉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더 질문하고 싶으면 뿌리치지 마세요. 싫으면 손가락 하나만 잡고 있을게요.”
내 새끼손가락만 쥐고 속삭이는 말은 꽤 다급했다. 나는 진저리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왜 절 싫어합니까?”
그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조로 내게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을 거스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때도 그랬을 텐데. 왜?”
왜냐고? 나는 속으로 온갖 욕을 지껄이며 상상 속의 그를 잘게 찢었다.
“……불쌍한 여자를 건드리고 떠나 버린 주제에. 뭐?”
“제가…… 당신을요?”
“내 동생을! 그거 알아? 내 동생은 당신 아이를 가졌었어! 그리고, 그리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냉정하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런데 알렉스 일이잖아. 어떻게 그래.
“걔는 열여덟 살이었어. 알아? 고작 열여덟 살에, 내 동생이…… 우리 알렉스가, 배 속에…….”
나는 더 말을 하질 못했다. 유산했어. 걔가. 그 작고 불쌍한 애가.
“……제가 여자한테 손을 댔다고요?”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아니, 그전에…… 당신한테 여동생이 있기는 했습니까?”
당신에게는 남동생이 전부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 잠깐…….
그린 것처럼 적당한 표정만 짓던 얼굴이 처음으로 날 것을 드러냈다.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얼굴로 그가 내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은 알렉스 로윈이 여자고, 내가 그와 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는 당황하며 덧붙였다.
“제가 남자를 임신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는 않는데.”
“알렉스는 여자애야! 당신은 그걸 알고 나한테 그 애를 요구했던 거 아니야?”
마르고 창백한 뺨과 유난히 붉었던 입술, 아름다웠지. 내 손에서 그렇게 학대당하며 자랐어도. 걔는 비참하게 예뻤지. 아니, 비참해서 더 아름다웠을지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나는 눈만 깜빡이며 내 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뭔가 커다란 문제를 발견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당신의 동생이 여자애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 동생에 대해 언급하지 마세요. 관심도 보이지 말고.”
날을 잔뜩 세운 내 대답에 그는 오히려 한숨을 쉬었다.
“가장 큰 오해부터 해결하자면, 난 여자는커녕 남자하고도 접촉이 불가능합니다. 손잡는 것도 어려운데, 임신?”
그는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내 새끼손가락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떨쳐냈다.
“하, 참 그래 보이네요.”
“같은 핏줄은 예외에요. 당신과 나는 아마…… 가깝지는 않지만 글쎄요. 아무튼 조상이 같기는 할 겁니다.”
남자는 중요한 사실을 태연하게 털어놓았다.
조상이 같다니. 어머니 쪽을 말하는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럼 이 남자는 오늘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아버지 쪽 친척인 셈이었다.
“그걸 어떻게 믿죠?”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입장에서 못 믿을 건 또 뭡니까?”
“증거가 없으니까요.”
“그럼 그 알렉스 로윈이 여자애라는 증거는 있습니까? 당신이 확인했어요? 직접?”
나는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의원이 내게 그리 말했다. 하녀들도.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로윈 저택의 모두가, 그리고 아버지도 그 애가 사실은 여자애였다고. 그래서 하혈을 하고, 유산을 했다고. 나 때문에…….
내 얼굴은 보지 않아도 창백해졌을 것이 뻔했다. 나는 그 기억을 다시 되살리고 싶지 않았다. 공허한 알렉스의 눈이 그대로 빛을 잃어 가는 그 순간을.
“당신은 무슨 이유로 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거죠?”
“글쎄요. 적어도 현재 알렉스 로윈은 영애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건 잠깐만 봐도 알겠군요.”
그는 머리까지 흔들면서 약간 헛웃음까지 터트렸다.
나도 내가 알렉스를 과보호하고 있다는 것도, 지나치게 연약하게 보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이제 차차 벗어나려고.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건 나도 알아요.”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문제를 지적받은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내 말투는 자연스럽게 날카로워졌다.
“아뇨. 영애는 모릅니다.”
그는 성큼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내 어깨를 붙잡는 남자를 나는 빠르게 밀쳐내려 했다.
“원래 여기서 산책합니까?”
그러나 그의 말이 좀 더 빨랐다. 그가 내 쪽으로 얼굴을 숙이며 속삭였다.
“다 보이게?”
“그건 그쪽이 알 바가 아니죠.”
갑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에 나는 기분 나쁜 얼굴로 그의 팔을 떨쳐냈다. 그는 순순히 떨어져 나가며 내 어깨 너머 허공에 길게 시선을 주었다.
“이봐요. 도대체 뭐가 보인다는……!”
그가 뭘 보는지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가 빠르게 나를 말렸다.
“고개 돌리지 마세요. 영애의 동생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고개를 돌려 본 창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환기를 시키고 커튼을 정돈하는 하녀들만 분주하게 몇 개의 창 너머로 보였다.
“장난해요?”
“전 늘 진지하죠. 특히 영애 앞에서는.”
나는 당장 꺼지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것을 느꼈다. 나는 그를 향해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내 질문 차례야. 당장 내 아버지가 누군지 말하고 우리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게일은 내 말에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전자는 가능하지만 후자는 불가능하겠는데요, 이자벨 영애.”
“그럼 노력이라도 하시죠.”
“정반대로는 노력하고 있죠. 이자벨. 제가 말했던가요?”
그의 손이 내 손을 잡고,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나는 그와 동시에 내 쪽으로 달려오는 제법 다급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당신의 데릴사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걸.”
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강타했다.
“이자벨!”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잔뜩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내 안위를 확인하듯 움직이는 눈이 있었다.
“이런.”
알렉스는 게일에게 잡힌 팔을 그대로 잡아끌어, 제 등 뒤로 나를 감췄다.
나는 나를 완전히 가릴 수 있는 넓은 등을 보며 문득 그동안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알렉스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늘 뿌듯하고 즐거웠다. 하지만…… 과거의 알렉스가 이렇게 컸었나? 언제 이렇게 컸지? 언제? 왜? 열다섯 살짜리 여자애가 이렇게…… 클 수 있나?
“알렉스.”
게일과 대치하듯 마주 선 알렉스를 말리기 위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부드럽거나 말랑거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동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나는 놀라 손을 뗐다.
“누님.”
알렉스와 시선을 맞추려면, 내 고개를 한참 위로 들어야 했다.
큰 키, 길쭉한 팔다리, 단단한 몸. 알렉스의 어깨 너머로 게일이 방긋 웃었다. 그가 입 모양으로 내게 속삭였다.
‘조심하고, 의심해요. 뭐든.’
내가 정확히 알아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어 눈을 찌푸리자 알렉스가 양손으로 내 턱을 고정시켜 시선을 맞춰 왔다.
커다랗고 딱딱한 손. 과거에는 어땠지?
“영애, 산책은 즐거웠습니다. 그럼 편지를 기다리도록 하죠.”
알렉스가 그 말에도 내 눈만 쳐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누구예요?”
나는 그저 고개를 가만히 저으며 알렉스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네. 즐거운 산책이셨다니 다행이군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가웠습니다. 영식.”
뭔가 말하려는 알렉스의 팔을 붙잡으며 나는 그가 떠나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알렉스는 내 반응에 상처받은 것처럼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나는 뜨거운 체온과 더불어 나를 감싸오는 단단한 몸이 순간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왜요? 왜 밀어내요?”
“손님 앞이었잖아.”
“누구예요?”
“너도 알잖아.”
“제 말은, 왜 누님과 저 남자가 만나냐는 뜻이었어요.”
나는 알렉스를 마주 안아 주는 대신 그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끝을 흐렸다.
“그냥…….”
알렉스가 여자애가 아니라고? 내가 틀렸다고?
저 사람이 한 말을 어떻게 믿어. 과거에 대해 기억도 못하는데.
알렉스는……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지 이상할 만큼,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얼굴이 예쁘다지만, 누군들 모두 알렉스를 보면 소년으로 인식했다.
알렉스, 넌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전혀 여자애 같지가 않은 거지?
* * *
아를의 왕은 제 왕위가 양보받은 것임을 알았다. 원래라면 늘 그의 앞에 서 있었던 형제가 가져야 할 자리.
단지 태어난 순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를 압도했던 형.
브랜든은 제가 열등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열등감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발악하는 멍청이였다면 대공은 왕위를 양보하는 대신, 차라리 반란을 일으켰을 위인이었다.
왕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고, 성군은 되지 못해도 암군은 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알았다. 가끔 형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 외에는 역사에서도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이가 될 테지.
왕가의 색깔을 고스란히 가진 조카를 내려다보며, 왕은 오랜만에 그 열등감을 곱씹었다.
사랑하는 제 자식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애정으로 무마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었다.
왕은 문득, 제 자식들에게 조카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아졌다. 그와 달리 평생 세상에서 제가 최고인 양 살았던 자식들이라면, 그 착각이 깨진 것이 괴롭지 않겠는가.
“시그니티라…….”
다이아몬드를 흉내 낸 가짜 보석의 이름을 제 자식에게 붙이다니 참으로 악취미라고 생각했다.
왕은 제 형이 자식의 이름을 붙이고 처음으로 제게 알렸음을 기억했다.
그게 절대 왕위를 탐내지 않겠노라고 모자란 동생에게, 또 동생의 자식들에게 제 형이 맹세한 말이었나 보다.
왕은 오랜만에 익숙한 비참함을 삼켰다.
결국, 다음 대 왕은 그의 자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제 형이 그랬듯이 제 조카는 왕실 앞에 엎드릴 테니까.
제 자식도 마찬가지겠지.
암군이 되지는 않겠으나 성군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 * *
과거에도 알렉스는 항상 창문 너머로 이자벨을 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춥고 좁은 다락방이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알렉스는 자잘한 흉으로 가득 찬 손을 내려다보다, 바싹 마른 몸을 웅크렸다.
그는 밝아오는 새벽에 눈을 찌푸렸다.
“하나, 둘, 셋…….”
백오십까지 셌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정돈된 소녀가 냉정한 얼굴로 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백오십삼.”
어제는 백오십육, 그제는 백육십. 알렉스는 운율을 붙여 중얼거렸다.
“이자벨.”
알렉스는 이자벨이 정원을 떠날 때까지 내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가 어제 ‘실수로’ 뜨거운 차를 엎은 발등이 시큰거렸다.
“이자벨, 이자벨……. 아가씨…….”
부러진 채로 붙어 버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새끼손가락을 습관처럼 주무르며 알렉스는 히죽 웃었다.
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락문 밑에 뚫린 작은 문으로 마른 빵 조각이 담긴 나무 그릇이 밀어 넣어졌다. 누군지 모를 하녀의 동정 어린 버터 한 조각이 거기에 자리했다.
오래 씹어야 겨우 목구멍 너머로 넘길 수 있는 빵을 입 안에서 녹이면서 알렉스는 혀를 찼다.
충분한 영양과 휴식을 공급받지 못한 육신은 기침을 토해내며 흔들리기 바빴다.
아무튼 알렉스는 병든 몸으로도 살아 있었다. 그걸로 족했다.
이자벨은 지나치게 관대했다. 최후까지 잔인해질 수 없는 여자.
날 죽였어야지. 이자벨. 여전히 착해 빠져서는.
빈 그릇은 다시 문에 달린 작은 문으로 밀어 넣어졌다. 찬 새벽 공기에도 나무 그릇에 손도 대지 않은 버터가 눌어붙었다.
알렉스는 좁은 다락 바닥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몸이 뜨거웠다. 독한 열병이 육신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고, 찬 기운이 닿는 곳마다 근육이 뒤틀리듯 아팠다. 삼 일 전에 계단에서 구른 멍들이 더 비명을 질러댔다.
이자벨이 남긴 흔적들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알렉스는 그녀의 자비에 대해 생각했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녹색 눈동자를 생각하니 히죽, 웃음이 다시 새어 나왔다.
내가 죽으면 또 울 거면서.
이자벨. 왜 당신은 항상 그렇게 불행하지? 몇 번이고 당신이 바라는 건 다 했잖아. 그럼 행복해져야 하는데, 왜 아니야?
알렉스는 사실 늘 끝에서 울었다.
사실 처음에도, 끝에도, 늘 우는 건 알렉스의 몫이었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