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성장.
3년 후.
“알렉스, 알렉스! 오늘 누나 15번째 생일인데, 아직도 안 일어난 거야?”
나는 곧장 침대로 뛰어들었다. 졸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알렉스가 나를 올려다봤다.
“눈 떴는데 왜 안 일어났어?”
동글동글한 젖살이 거의 다 빠진 얼굴은 저택에 처음 왔을 때와 달리 귀여움보다는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특별한 날이면 누님이 깨우러 오시니까요.”
그러나 웃으면 여전히 사랑스럽고 예쁜 어린 시절 얼굴이 그대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렸어요.”
말하는 것도 예뻐라. 나는 알렉스의 뺨에 입을 맞추고 팔을 잡아당겨 몸을 일으켰다.
“너 더 무거워진 것 같아.”
“키가 크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누님이 너무 안 크는 게 문제가 아닐까요?”
넌 저택에 오고 나서 물만 주면 자라는 식물처럼 자라고 있잖아!
“난 아직 성장기가 안 와서 그래. 알렉스, 너 이렇게 일찍 자라다가는 오히려 키 크는 거 빨리 멈춘다?”
“전 예쁘니까 괜찮아요.”
당당한 알렉스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럼 나는?”
“누님도요. 누님이랑 전 똑같이 예쁘니까 키 같은 거 안 자라도 돼요.”
하나도 안 닮은 걸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진짜 가족 같잖아.
“생일 축하해요. 누님.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알렉스가 내 뺨에 입맞춤을 되돌려 주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리고?”
“……지금 선물이라도 줘요?”
나는 알렉스의 멱살을 붙잡고 아침이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을 끌어당겼다.
“선물! 네 13살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은지 내 생일날 말해 준다며!”
“그거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내가 너에 관한 것 중에 기억 못 하는 게 있긴 해? 그래서? 뭐 받고 싶어. 이번 생일은?”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하면, 화낼 거죠?”
당연하지. 장난해?
* * *
나는 열다섯이 되었다.
그 말은 곧 내가 작은 사교계, 즉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수도 귀족 영애들의 티타임에 강제로 참석해야 한다는 말과 동일했다.
“가기 귀찮아.”
“그럼 가지 마요, 누님.”
“사교계에서 매장당할 일 있니?”
“누님이 힘든 것보다는 낫죠. 요새 거의 잠도 못 자면서.”
나가는 날 배웅하며 알렉스가 투정을 부렸다.
“부트 남작 부인의 일이 바빠져서 그래.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걱정 말고, 나 좀 봐봐. 괜찮아?”
옅은 베이지색 드레스는 적당히 유행을 따라가면서 튀지 않을 만큼 무난했다.
“누님이야 뭘 입어도 예쁘잖아요.”
“그건 너한테나 해당되는 말이고. 이걸 네가 입었으면 더 예뻤을 텐데…….”
“됐어요, 누님. 이번에 또 새로 맞춘 드레스 중에 절반은 내 사이즈에 맞춰서 주문했다면서요. 다 돌려보냈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알렉스!”
안 돼! 이번에 더 예쁜 거로만 맞췄단 말이야!
“남자애한테 드레스를 입혀서 뭐하게요.”
네가 여자니까!
밝히지도 않은 걸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앓는 신음을 내면서 얼굴을 찌푸린 알렉스의 소매를 붙잡았다.
“예쁘잖아…….”
“전 그런 거 안 입어도 예뻐요.”
“그건 맞는데, 그래도……. 입으면 더 예쁘잖아.”
알렉스가 한숨과 함께 날 응시했다. 벌써부터 서늘한 미인의 자태가 나오는 알렉스의 한숨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안 입으면 저 안 예뻐해 줄 거예요?”
“아니! 물론 아니지. 그래도…….”
“그럼 이제부터 안 입어요. 자꾸 내 드레스 맞추느라 예산 쓰지 마요.”
“너무해…….”
“너무한 건 누님이에요. 무슨 옷에 보석도 하나 안 달았어요?”
날 위아래로 진지하게 훑어보며 하는 소리에 나는 치마 주름을 탁탁 털어내며 대꾸했다.
“원단이 비싸서 괜찮아.”
“……이번에 또 내 보석 샀죠?”
“어머? 벌써 시간이!”
나는 추궁하는 알렉스를 피해 빠르게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멀어지는 날 알렉스가 어이없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이따 보자 알렉스!”
역시나 예상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티타임은 몹시 지루했다.
나는 깨어 있기 위해 찻잔을 힘주어 노려보았다.
“로윈 영애. 피곤하신가요?”
“아뇨.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졸려. 어제 몇 시에 잤더라.
엘리자베스의 상단이 점점 크기를 불려감에 비례해 최대 주주인 내 수면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그러나 그렇다고 사교계의 행사에 소홀할 수도 없었다. 알렉스는 뒤를 받쳐줄 외가가 없기 때문에 내가 더 노력해야 했다.
내가 좋은 가문에 시집을 가서, 알렉스의 뒷배가 되어 줘야 해.
그래도 지루해.
가지각색의 드레스들을 입은 소녀들이 어른들을 흉내 내듯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나는 지루함에 찻잔을 입에 댄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트 랑쉐라, 괜찮은 차죠. 로윈 영애. 입맛에 맞나요?”
여기 모인 영애들이라면 전부 알고 있을 차의 이름을 굳이 언급하면서 말을 거는 주황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면서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먼 백작이 좋은 차를 구한 건 알겠지만, 이렇게 한 종류만 내놓는 건 좀 격식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글쎄요. 가벼운 티타임에는 그럴 수도 있겠죠.”
옹호도 비난도 아닌 말에 주황빛 머리카락의 소녀, 케르시 자작 영애는 더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순진한 여자애라고 생각했겠지. 알게 뭐람.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지만, 그다지 쓸만한 내용은 없었다. 나는 여기서 여왕벌처럼 군림하고 있는 펠먼 후작 영애가 떠드는 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집에 가고 싶다. 알렉스 보고 싶어.’
어두운 금발에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펠먼 후작 영애는 나중에 결혼 시장에서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그녀의 조모는 선선대 공주였고, 때문에 정략혼으로 적국인 샬덴에 팔려 간다. 그 뒤의 사정은 들은 것이 없다.
“글쎄요. 하지만 바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굳이 일왕자의 애칭을 부르며 목소리를 높이는 소녀의 말에 대부분의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
‘정부라도 노리는 건가.’
이미 혼인한 데다가 곧 서른이 되는 유부남과의 친분이 저렇게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줄이야.
나야 이 당시에 혼인을 데릴사위를 들이는 게 아니라 진짜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돌아버릴 만큼 화가 나 있었기에 그렇게 남자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지금은…….’
굳이 지금부터 생각해야 하나?
후보로 꼽아 둔 남자들은 몇 있었다. 그중에 아무나라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로윈의 성세를 생각하자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요새 쑥쑥 자라고 있는 알렉스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엘리자베스였다.
그 야망에 넘쳤던 여자가 게으른 돼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건 화가 나는 일이었으니까.
내 덕분에 리 상단은 제법 빠르게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그게 그 여자를 망친 건가?
여자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몰래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귓가에 맴도는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신 마차의 방향을 틀었다.
뭐든 쉬운 것이 없었다.
나는 최근 엘리자베스가 어떻게 진주에 관한 독점 교역권을 얻어냈는지 깨달았다.
놀랍게도 이 야망 넘치는 여장부께서는 동대륙의 황위 다툼에 뛰어들었다. 과거의 엘리자베스는 상단 전부를 걸고, 황위를 물려받을 확률이 가장 적은 황자에게 배팅한 것이다.
“리지.”
수도의 외곽에 자리 잡은 리 상단의 본점은 3층짜리 작은 건물이었다.
나는 굳이 수도 안쪽에 그럴듯한 건물을 사 주겠다는 내 제안을 거절한 엘리자베스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오고 가기에는 이쪽이 더 편했다.
“왔어?”
3층의 가장 안쪽에 있는 엘리자베스의 집무실은 상단주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했다.
“아직도 고민 중이야?”
나는 무미건조한 소파-심지어 속을 채운 건 짚이었다-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엘리자베스는 화장기가 없는 맨 얼굴로 긴 회색 머리를 꽉 동여맨 채 미간을 누르고 있었다.
“신중해야 할 문제잖아. 넌 너무 도박을 좋아해, 벨.”
“난 도박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거야, 리지.”
미래를 알고 성공할 곳에만 배팅하는데 못할 리가 있나.
“태연하게 말하지 말렴, 벨. 네 돈이 전부 사라질 수도 있다고.”
리 상단은 원래는 동대륙의 잡화들을 떼와 팔던 수준이었지만, 내 돈이 들어가고 나서는 꽤 고급 품목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종이나 도자기들, 한마디로 잃을 게 더 많아졌다.
“내 돈이니까 하는 말이지, 리지. 열두 살짜리 손을 잡았던 배짱은 어떻게 된 거야?”
엘리자베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 훑었다.
“그저 그런 상단으로 남고 싶어?”
“실패하면 우린 끝이야.”
“뭘 걱정해? 당신은 원래 바닥에서 시작했잖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무서워? 그래서 기회가 왔는데도 잡지 않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화가 난 듯 보였다. 나는 그녀를 살살 자극하듯 오만하게 웃었다.
“손에 쥔 걸 놔야 더 큰 걸 쥘 수 있다면서요, 선생님.”
리지, 당신이 말한 멍청이들처럼 굴 거야?
* * *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로윈 백작의 부름에 나는 꽤 당황한 상태였다. 알렉스를 꼭 닮은 얼굴은 하도 오랜만에 봐서 낯설 지경이었다.
“네가 올해 몇 살이지? 열다섯? 열여섯?”
나는 로윈 백작의 말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성정대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서재는 내가 앉을 만한 자리도 없었다.
“열다섯입니다, 백작님. 최근 생일이 지나서…….”
“나쁘지 않군.”
뭐가?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백작은 뭔가를 찾듯이 간간이 책장을 쳐다보며 서재를 돌아다녔다. 그는 내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약혼하기엔 어린 나이도 아니야.”
“……네?”
“가문 간의 약속이니 넌 별로 신경 쓸 것 없다.”
내 약혼인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이나 몸을 돌리며 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성인이 되려면 5년이나 남았는데…….”
아를 왕국은 스무 살을 기준으로 성인이 되었다. 한때 조혼으로 나라가 진통을 앓은 적이 있기에 이르게 혼인하더라도 18살은 되어야 했다.
정략혼은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과거에 내가 처음으로 약혼을 제의받은 것은 18살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이나 지나고였다.
백작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 알렉스를 닮은 얼굴이었다. 물론 알렉스는 내게 저런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짓진 않지만.
“약혼은 결혼이 아니니 더 이르게 하는 이들도 있음을 모르진 않을 텐데?”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은 로윈 백작의 말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물었다.
“상대가 누군가요?”
나는 이자벨 로윈이었고, 내 아버지인 로윈 백작은 내 혼사를 정할 권리가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일종의 부채감이었다. 로윈 백작은 친딸이 아닌 날 딸로 키웠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그는 내게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바르펜시아 대공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 기색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짤막하게 덧붙였다.
“공개적으로 발표할 일은 아니야. 너도 어리고 하니.”
“그럼 왜 굳이 지금 약혼을 해야 하는 거죠?”
“왕실에서 원했으니까.”
로윈 백작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반쪽짜리 네 동생을 그리도 물고 빠는 걸 보면, 대공자의 혈통에 대해 반발하진 않겠지.”
“……만약 제가 반발한다면요?”
“참아라.”
도대체 당신은 왜 날 딸로 키운 거야? 날 좋아하지도 않잖아.
“적어도 대공자가 사생아는 아니니까.”
엄마의 부정을 탓하고 가문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는 대신, 왜 그냥 날 딸로 내버려 뒀어요?
“네. 백작님.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무슨 정신으로 방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샐리는 깊게 고민에 빠진 내 얼굴을 보고 곧바로 자스민 차를 끓여 내왔다. 나는 따뜻한 찻잔을 손끝으로 만지며 바르펜시아 대공자에 대해 생각했다.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며 왕실이 어떻게든 팔아 버리려 하지만, 나중에는 바르펜시아 대공자는 제법, 아니, 상당한 거물이 된다.
그런데 도대체 이 혼처가 왜 나한테 왔지?
원래라면 왕당파의 테이그 백작의 차녀에게 갔을 혼처였다. 그때 그 영애가 뭐랬더라?
‘과부의 아들한테 시집가느니 죽어 버릴 거야! 염치도 없지 어떻게……!’
뭐 나중엔 후회했겠지만.
실질적인 선왕의 장손. 현 아를 왕의 장조카. 왕의 형인 바르펜시아 대공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선대 스캔들의 산물.
시그니티 바르펜시아.
왕실 특유의 붉은 머리카락을 선명하게 타고난 반쪽짜리 귀족.
왕당파의 귀족들에게 강제로 혼인을 명령해야 할 만큼, 기피되는 결혼 상대.
귀족들이 지루하도록 외쳐대는 푸른 피가 더러워진 소년.
바르펜시아 대공은 태자였던 시절에 죽은 기사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다. 과부에다가 심지어 귀족도 아닌 여자와.
바르펜시아 대공은 끝끝내 왕위를 버리고 그 여자를 선택했다. 이십 년 전 아주 떠들썩하게 수도를 뒤집어 놨던 사건이었다.
지금도 신분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은 부부를 보면 세인들은 대공을 언급했다.
이제 열여덟이 된 바르펜시아 대공자는 그보다 어릴 때 다들 한 약혼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왕실과 혼인이 가능한 귀족 가문에서 다들 똑같이 답했기 때문에.
‘과부의 아들에게 딸을 줄 수는 없다.’
나는 혀를 찼다. 쓸데없는 고집들.
하지만 그 덕에 괜찮은 혼처가 알아서 굴러들어왔으니 다행일까. 나는 그가 갖게 될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헤아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무슨 일이에요?”
알렉스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앉아 있는 소파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내 손을 붙잡고 올려다보는 알렉스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내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리와.”
알렉스는 평소에 하던 것처럼 내 무릎 위에 머리를 올리고 누웠다.
“백작님이 무슨 일로 누님을 불렀어요?”
나는 한숨을 쉬며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뭔가 고민할 게 있으면 알렉스의 머리를 만지는 게 버릇이 되었다.
“나도 모르겠어…….”
여전히 걱정이 서려 있는 얼굴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약혼하게 될지도.”
알렉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나는 달래듯 손으로 알렉스의 이마를 문질렀다.
“괜찮아. 별일 아닌…… 읏?”
내 허리가 훅 잡아 당겨졌다. 알렉스가 내 배 쪽으로 고개를 묻고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놀랐어?”
나는 알렉스가 움직이기 쉽게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누님은 아직 열다섯이잖아요.”
“그래서 약혼만 하는 거지.”
“상대가 누군데요?”
얇은 실내 드레스는 알렉스가 웅얼거리는 입 모양을 고스란히 전달했고, 나는 기분이 가라앉은 알렉스에게는 미안했지만 간질거리는 배에 조금 키득거렸다.
“바르펜시아 대공자.”
알렉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애의 손이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거긴 너무 멀어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속삭이는 말은 다급했다. 나는 안심하라는 듯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어차피 난 어디로 가든 수도에 있을 거야.”
“데릴사위를 들이는 건 어때요? 전 누님이 저택을 나가는 게 싫어요.”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내 토닥임에 조금씩 풀리면서 목소리에도 칭얼거림이 섞이기 시작했다.
“말이 돼?”
나는 내 등을 마주 안아오는 손길에 조금 웃으면서 대꾸했다.
“백작님이 허락하지 않을걸.”
“제가 가주가 되면…….”
“그래도 안 돼.”
내가 혼인해서 나가지 않으면 여자인 너한테 어떻게 로윈을 줘.
아직 밝히지 않은, 알렉스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꿀꺽 삼키면서 나는 단호하게 속삭였다.
“누님도 신분이 높고 부유한 귀족과 혼인하고 싶은 거죠? 그리고 난 잊어버릴 거죠?”
나를 안은 팔이 단단하게 나를 압박했다.
“멀리 있는 영지에 가서, 보지도 못하는 나는 완전히 잊어버릴 거야. 그렇죠?”
알렉스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알렉스, 우린 가족인걸.”
나는 알렉스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고 알렉스와 눈을 맞췄다. 우울하게 흐려진 눈동자에 대고 나는 단단히 일렀다.
“넌 내 동생인걸. 절대 잊어버릴 리가 없어.”
알렉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다 느릿하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너무 예뻐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예쁜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게 진짜 성별을 고백하지 않은 걸까. 내가 믿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난 네 편이고…… 널 사랑할 거야. 알렉스.”
‘그러니까 고백해도 괜찮아.’
뒷말을 삼키며 나는 몇 번이고 알렉스에게 했던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그 애는 내 말에 나를 느리게 끌어안았다. 알렉스의 턱이 내 어깨에 닿았다. 내 귓가에 그 애의 숨소리와 함께 단어들이 떨어졌다.
“저도 사랑해요. 누님.”
* * *
아예 남장을 한 엘리자베스를 보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두꺼운 가죽 부츠에 코트, 거기다가 몸만 한 거대한 가방에 나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디 가?”
엘리자베스는 내 말에 코웃음 치며 장갑을 꼈다.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며 내게 단호하게 속삭였다.
“네 말이 맞아.”
“리지?”
“당분간 상단을 부탁할게. 어차피 네 지분이 더 크잖아.”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엘리자베스는 내게 두꺼운 서류를 안겼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떨어트리지 않고 그것들을 안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동대륙으로 갈 거야. 최소한 몇 달은 없을 거니까. 내 승리나 빌어, 벨.”
나는 드디어 이 이상한 행동들의 원인을 깨달았다. 내 얼굴은 틀림없이 웃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 게으른 여자가 드디어 움직일 생각이 들었나 보군.
“당분간 잠은 다 잤네. 다녀와, 리지.”
처음 봤을 때처럼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눈에 나는 씩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내 웃음에 피식 웃더니 문을 열며 덧붙였다.
“귀찮으면 데빈한테 미뤄. 걔 나름 쓸 만해졌더라.”
상단을 꾸릴 때부터 데리고 있는 그녀의 막내 조카는 확실히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임기응변도 괜찮은 소년이었다.
나는 이제 열아홉이 되는 데빈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걔는 쓸 데가 따로 있어.”
그녀는 눈썹을 한 번 치켜뜨긴 했지만, 내 말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중얼거렸다.
“뭐, 너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나 아직 열다섯이야. 너무 믿지 마.”
“망하지만 마.”
문이 닫혔다. 나는 품에 안은 종이들을 아무것도 없는 책상 위에 쏟아 놓고는 빠르게 뒤졌다.
상세하게 정리된 서류들은 나중에라도 꼼꼼히 읽어 봐야 할 것들이었지만 일단 지금 필요한 건 아니었다.
“아가씨? 뭐하십니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밝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데빈! 마침 널 찾았는데!”
내 밝은 기색에 상대가 움찔했다.
“용건이 뭔지는 몰라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네요…….”
눈치가 빠른 청년은 음울하게 중얼거리며 엘리자베스를 닮은 얼굴을 찌푸렸다.
“펜.”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키지 않은 얼굴로 내게 펜을 건넸다.
“……뭘 하시려고요?”
나는 서류 하나를 끄집어내서 빠르게 휘갈긴 후 그에게 내밀었다.
“발령서야, 데빈. 이제부터 넌 우리 상단의 바르펜시아 지점장이야.”
“바르펜시아에도 우리 상단 지점이 있었습니까?”
멍하니 중얼거리는 데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 만들 거야. 네가 가서.”
“왭니까?”
세상만사를 다 포기한 것 같은 허탈한 말에 나는 눈을 접어 가며 웃었다.
딱히 개인적인 사정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혹시나 모를 미래의 남편에게 호의를 사려는 목적도 있지만 중요한 건 거기에 바르펜시아 대공을 왕실보다 더 부유하게 만들어 줄 것이 있지 않은가.
“거기서 돈 냄새가 나.”
데빈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고모님과 아가씨는 절 미워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자벨은 침울해하는 데빈의 어깨를 두드린 뒤에 상단을 나섰다. 물론 갑자기 일을 떠맡게 된 데빈에게는 썩 위로가 되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르펜시아령을 생각했다.
다이아몬드 광산. 거의 산맥 하나가 통째로 다이아몬드 광산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지.
바르펜시아 대공자가 성인이 되자마자 대공은 그에게 대공위를 물려준다. 그리고 바르펜시아 대공은 이 년 뒤,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그걸 바탕으로 왕실보다 더한 부자가 된다. 자본도 훌륭했지만 그 자본을 활용할 줄 아는 대공자의 능력 또한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4년 뒤에 발견해야겠지만, 굳이 그럴 것이 있나?
독점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거래할 때 조금이나마 다른 상단보다 나은 대우를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데빈에게 광산의 위치를 살짝 흘린 편지를 전하게 했다. 물론 데빈에게도 대강 말해 두기는 했다. 그래야 거래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계약을 따낼 것이 아닌가.
사랑받는 아내의 덕목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 상냥한 말솜씨? 뭐, 아니면 사랑?
하지만 귀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권력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될 수 있는가?
나는 바르펜시아 대공자가 보낸 편지를 쥐고 픽 웃었다.
뭐, 난 그런 의미에서는 훌륭하지.
별다른 일 없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알렉스의 결혼식 날에는 세상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로 티아라를 만들어 줘야지.
“누님?”
“알렉스.”
내 허리를 끌어안는 알렉스의 팔에 나는 방긋 웃었다.
“네 눈 색이랑 다이아몬드는 진짜 잘 어울릴 거야, 그치?”
“……뭘 주문했는지 몰라도 당장 취소해요, 누님. 전 목걸이도 귀걸이도 반지도 할 생각 없으니까.”
상냥하게 웃는 알렉스의 태도에서 단호함을 읽은 나는 모르는 척 하하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이아몬드 안 샀어.”
“그럼 뭐 샀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침대에서 사파이어 목걸이에 목을 졸린 채로 깨어나는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해요.”
“사파이어는 아니야.”
“뭘 샀긴 샀군요.”
“…….”
눈치도 빠르지.
* * *
펠먼 후작 영애가 주최하는 티파티는 이때껏 참석했던 어떤 티파티보다 화려하면서, 조잡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돈 장난 아니게 썼겠는데?’
캐롤 펠먼은 한껏 입술을 끌어올린 채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열일곱인 그녀는 쇄골까지 가린 남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주최자로서 여러 개 놓인 테이블에 한 번씩 자리한 그녀가 마침내 내가 있는 테이블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목을 좀 더 뻣뻣하게 세우고 가슴을 폈다.
“로윈 영애, 목걸이가 참 예쁘네요.”
정말 예쁘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기존의 보석과 다른 것을 걸치고 있다면 화제 삼아 한 번 언급해 주는 것이다. 성인이 되지 않은 여자애들이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란 한정되어 있으니까.
“새로 알게 된 상단에서 동대륙 물건들을 취급하다 보니, 얻게 된 것이랍니다.”
동대륙으로 떠난 지 몇 달 만에 엘리자베스는 내게 별다른 편지 없이 목걸이 두 개를 보냈다.
하나는 진주를 작게 엮어 만든 예쁘지만 무난한 것이었고, 하나는…….
“그러고 보니 요새 사교계에서는 진주가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더군요. 확실히 우아한 게 귀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를 알 것 같네요.”
펠먼 영애는 매끄럽게 대사를 치며 다른 영애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마음에 드신다면, 펠먼 영애께도 하나 선물로 드려도 괜찮을까요? 정말 사소한 호의니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 주시면 감사할 텐데……”
그녀에게 선물을 건네는 영애들은 많고도 많았다. 내가 딱히 특별한 건 아니었다.
내가 있는 테이블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어떤 것이든 정성을 거절할 수는 없지요. 사소하면 또 어떨까요. 마음이 중요할 텐데.”
펠먼 영애는 거절하는 말을 내뱉지 않은 채 시큰둥한 기색을 숨기기 바빴다.
하기야, 왕족의 피까지 섞인 귀한 아가씨가 감탄할 선물이 어린 영애들의 손에서 나올 리가.
“샐리.”
내 작은 부름에도 샐리는 빠르게 내게 다가와 고급스러운 상자를 건넸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과 뻔하다는 시선이 동시에 내게 쏠렸다. 나는 탁자 위에 소리를 내어 상자를 올렸다.
“동대륙에서는, 진주를 인어의 눈물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상자 안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씩 웃었다.
작은 조약돌만 한 다이아몬드가 섬세하게 세공되어 빛을 발했고, 그 주위를 작은 진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양옆에는 그보다 좀 더 작은 다이아몬드가 금실에 꿴 진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대로 금실로 꿴 작디작은 진주들이 목걸이를 완성시켰다.
어느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처럼, 어마어마한 값어치의 목걸이가 등장하자 펠먼 영애를 비롯한 모든 영애의 시선이 몰렸다.
“아주, 사소한 성의랍니다. 영애.”
원래 사치품은 높은 사람이 쓰는 것만으로도 홍보가 되는 걸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제야 보석 사업이 궤도를 잡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투자한 돈을 전부 써서라도 돈을 풀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그 뒤는 예상한 대로 진행되었다.
아직 동대륙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엘리자베스가 보내는 수량은 한정되어 있었고, ‘구하기 힘든’이라는 타이틀이 붙자 가격은 더 치솟았다.
바르펜시아 대공자는 발견한 광산을 숨길 작정인지 데빈을 통해서만 아주 적은 양을 시험 삼아 채굴할 뿐 건드리지를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부러 바르펜시아 대공자가 선물이라고 보낸 다이아몬드 중에 가장 큰 것을 아껴서 보관했다.
거의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는 아직 세공이 덜 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빛이나 크기를 볼 때 틀림없이 최상등품이었다.
보는 순간 딱 직감했다.
이건 우리 알렉스의 결혼식 티아라 감이다.
요새 쑥쑥 자라는 알렉스는 자라는 추세를 보아하니 분명 웬만한 남자는 키로 찍어 누를 수 있을 만큼 크고 우아한 아가씨가 될 것이 뻔했다.
이 정도 다이아몬드는 올려야지.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 * *
“안돼에에에에.”
나는 알렉스의 어깨에 매달리며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게 그렇게 좌절할 일이에요?”
내 등을 도닥이며 알렉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넌 아직 14살이잖아……. 난 열일곱이라고. 삼 년이나 차이가 있는데 내가 졌어…….”
“정확히는 2년 차이죠, 누님. 제 생일 얼마 안 남은 거 알잖아요.”
“아무튼. 그래서, 누나를 내려다보니까 좋아? 좋니?”
키가 역전된 것에 대한 서러움을 표현하자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잖아요.”
“그래도…… 이제는 누나가 안고 다니지도 못해…….”
“제가 안고 다니면 되잖아요?”
알렉스는 너무 손쉽게 나를 휙 들어 올려 안았다. 나는 허공에 뜬 몸을 허우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랑 그건 다르지!”
“떨어지지 않게 잘 붙잡기나 해요.”
“됐어. 내려 줘. 괜한 고생하지 말고.”
첫 만남 이후로 5년 동안 알렉스는 2배로 자라났다. 심지어 어떨 때는 바빠서 며칠 못 봤다가 눈높이가 달라져서 깜짝 놀랐다.
“누님은 내가 어릴 때 나 안고 다니는 게 고생이었어요?”
“그거랑 이건 다르다니까…….”
알렉스는 내 항의에도 묵묵히 나를 안아 들고 걸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알렉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뭐 때문에 그래?”
내가 말하는 거라면 대부분 다 들어주는 애가 이러는 건 뭔가 내가 잘못한 게 있을 때였다.
“이번 누님 여름 드레스요.”
나는 시선을 피했다. 알렉스의 집요한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그게 왜?”
“다섯 벌을 맞춘다고 했는데, 왜 들어온 건 세 벌이에요? 두 벌은 어쨌어요?”
“으음. 그게 말이지…….”
눈을 열심히 굴려도 알렉스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요새 보석으로 만든 부채가 유행이라고 하잖아……. 보다 보니까 예뻐서…….”
알렉스 걸 하나 맞췄지…….
내 잘못이 아니야. 저 예쁜 청회안만 드러낸 채로 입가를 부채로 가리면 얼마나 예쁠까. 아무튼 알렉스가 예쁜 탓이었다. 내 잘못은 아니었다.
“그래서 검은 머리의 미인한테 잘 어울리는 부채를 주문하셨어요? 누님이 언제부터 검은 머리셨습니까?”
거기까지 알았니.
나는 내 금발을 힐긋 확인하고 변명할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래도 네가 하면 예쁠 것 같아서…….”
알렉스의 시선이 무거웠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들킨 내 잘못이지. 젠장.
“응. 내가 잘못했어…….”
* * *
⌜……미인에게 보석은 당연한 게 아닌가요? 알렉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요. 내 드레스야 나중에 맞춰도 된다고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알렉스한테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 나왔는데. 대공자도 잘 생각해 봐요. 우선순위가 확실하지 않아요?
……(중략)……아무튼, 그래서 특별한 건 정말 특별하게 다뤄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사람들이 특별한 줄 아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처럼 채굴 수량을 조절하는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약혼 관계란 걸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대의 편지에 감사하며 묻는 건데, 그 ‘알렉스’는 남동생이 아닌가?⌟
⌜맞아요.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죠? 그 애는 아를 최고의 미인이 될 텐데. 그리고 약혼자 겸 사업 파트너죠. 얼굴 한 번 못 본 약혼자보다는 후자가 친근하지 않나요?⌟
⌜지난 2년 동안 오간 편지가 무색해지는 내용에 마음이 아프군.⌟
⌜그거 안타깝네요. 마음 아파할 시간에 새로 물색한 판매 루트에 대한 제 제안을 생각해 보세요.⌟
⌜당분간은 물량을 더 줄일 거야. 그리고 이런 공적인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쓸 수는 없나?⌟
⌜저택에 웃음소리가 가득하기를 빌며. 신의 축복이 그대에게 깃들기를.⌟
⌜격식을 갖춘 편지 쓰기 교본 첫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군. 조금 변형이라도 주질 그랬나?⌟
내가 왜?
나는 코웃음 치며 편지를 넘겼다. 대공자는 꽤 재밌는 인간이었지만 내게는 약혼자보다는 사업 파트너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 수도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뭐? 왜? 올 일이 뭐가 있어서?
나는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다고 내용이 변하진 않았다.
“누님, 편지랑 눈싸움하세요?”
“아니. 내가 잘못 읽었나 확인하고 있어.”
알렉스가 편지를 붙잡은 내 손을 내리고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또 열 올랐어요. 오늘은 일 그만하고 들어가 자요.”
“넌 뭐만 하면 나보고 열난다고 하잖아.”
난 투덜거리며 서재의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순히 따르는 나를 보며 알렉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자, 알렉스.”
알렉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자 그 애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키가 크다는 걸 자랑하는 건가.
* * *
나는 17살이었고, 알렉스는 나보다 두 살이 어렸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아를의 법령상 파티의 참석이 불가능한 나이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비공식적인 일들이 아주 많았다. 나는 불쌍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알렉스에게 매달렸다.
“정말 안 돼?”
굳건하게 버티고 선 알렉스는 내 애원에 움찔하기는 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모를 텐데? 귀족들이 여는 파티도 아닌데?”
“무슨 말을 해도 드레스는 안 입을 겁니다, 누님.”
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부채도 새로 맞췄는데. 예쁠 텐데……. 천사 같을 텐데……. 남자들이 다 쓰러질 텐데…….”
“불쌍한 척하지 마세요. 안 돼요. 안 입을 겁니다.”
“옛날에는 드레스 입는 거 좋아했으면서…….”
알렉스가 한숨을 쉬었다. 남성용 정장을 입은 모습도 예뻤다. 그런데 그건 어차피 나중에도 입어야 하는 거잖아.
우리만 있을 때 드레스 살짝 입어 보는 게 어때서!
어깨에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에 흰 얼굴이 더 돋보였다. 객관적으로도 알렉스는 특출 난 미인이었다.
나중에 알렉스가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
‘언니랑 처음으로 드레스 입고 파티에 참석한 날 기뻤어……!’ 라고!
“무슨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누님. 안 입어요. 정신 차리세요.”
나는 상상력의 저 너머로 떠났던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알았어…….”
알렉스가 시무룩한 내 기색을 살피더니 결국 길게 한숨을 쉬고 날 폭 안았다.
“준비한 드레스는 다녀와서 입어 볼게요. 부채도 들고. 누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싫으면 하지 마.”
“안 싫어요. 누님이 나 보고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해 주는데 왜 싫겠어요?”
“진짜?”
“네. 진짜요.”
거짓말.
신디아는 약 12겹의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묵묵히 치우면서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도련님은 여장에 전혀 취미가 없었다. 그냥 예쁘다고 말해 주는 아가씨가 좋은 거지. ……그런데 왜 아가씨는 여장에 꽂힌 걸까.
“하긴, 우리 알렉스는 저런 드레스 안 입어도 예쁘니까.”
도련님이 웃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외모가 웃으니 방 안이 환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신디아는 어쩐지 속이 불편해졌다.
“……불편해?”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알렉스의 얼굴이 찌푸려진 것을 보고 괜히 데려왔나 싶어 물었다.
“아뇨. 그냥……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돌아갈래?”
“만날 사람이 있잖아요.”
“나 혼자 만나면 돼.”
“그건 싫습니다.”
취한 무리 하나가 옆을 지나갔다. 알렉스가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약혼녀를 이런 데서 보자고 하다니 진짜 최악인데요.”
“이상한 데는 아니야.”
수도에는 귀족 이외에도 부유한 평민층이 살았다. 그들은 그들끼리 파티를 열었다. 귀족들의 파티보다 훨씬 자유롭고, 화려했다.
“좋은 데도 아니죠.”
“공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몸도 아니잖아.”
“그럼 공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어야죠. 누님, 지금 나 말고 대공자 편을 드는 거예요?”
“내가 그럴 것 같아?”
내 말에 알렉스가 그제야 웃었다. 내 얼굴을 가린 반가면을 더 단단하게 고정하면서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죠. 누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니까.”
우리 옆으로 열 살 먹은 꼬마 커플이 손을 잡고 지나갔다. 나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뜻에서 어깨를 으쓱했다.
“춤출까?”
“……대공자를 찾을 생각도 없는 거죠. 사실?”
“아닌데.”
정확히 말하면, 난 대공자의 얼굴을 몰랐다. 그러니 그쪽에서 날 찾아야지. 빨간 머리에 금안이라는 것밖에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찾아.
“이리 와. 힘들면 내가 남자 스텝 밟을까?”
“남자 스텝을 배우긴 했어요?”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요?”
“그냥?”
나중에 알렉스가 여자 스텝을 배울 때 내가 가르쳐 주고 싶어서 일부러 따로 배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난 남자 스텝밖에 몰라요, 누님.”
나는 내게 내밀어진 알렉스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알렉스의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나중에 여자 스텝도 가르쳐 줄까?”
“도대체 왜요?”
“……그냥?”
무난하게 차려입은 녹색 드레스가 나를 돌리는 알렉스의 손길에 따라 확 퍼졌다가 가라앉았다.
“필요 없습니다.”
“춤을 더 잘 추게 될 텐데?”
“더 잘 춰야 합니까?”
“글쎄. 인기가 더 좋아지지 않을까?”
귀족들의 파티에서는 볼 수 없는 가지각색의 사람들과 격식 없는 화려한 복장들이 주변에 가득했고, 웃음소리 또한 경박한 것과 우아한 것이 전부 뒤섞여 있었다.
“다른 사람이랑 별로 붙어 있고 싶지 않아요. 누님이랑 추는 거로 충분해요.”
“나랑만 살 수는 없잖아.”
나는 알렉스가 귀여워 웃었다. 마음껏 웃음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은 귀족들의 파티보다 나은 점이었다.
“……그렇죠.”
나는 알렉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몸을 좀 더 가깝게 붙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가면을 쓴 사람도 꽤 되었다. 대공자가 날 찾을 수는 있을까?
나는 파티장을 훑었다. 어디 있을까? 아니, 일단 어떻게 생겼지?
붉은 머리에 금안을 가지고 있는 미남을 찾아 내 눈동자가 굴러갔다. 아는 특징이 너무 적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누님. 집중해요.”
나를 향해 엄하게 속삭이는 알렉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 애한테 시선을 맞췄다. 허리에 감싼 팔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몇 번이나 췄을까. 마실 거라도 가져오겠다며, 누가 말을 걸어도 절대 대답하면 안 된다는 보호자 같은 말을 남긴 채 알렉스가 잠시 떠났다.
‘내가 보호자일 텐데. 어쩐지 역할이 바뀐 것 같은 느낌이…….’
알렉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꽤 많은 여자의 시선이 알렉스를 향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조금 웃었다.
생각해 보니 알렉스는 남자로 태어났어도 인기가 많았겠지. 예쁜 얼굴이 조금 아까워도 뭐…….
정말 남자애였으면, 모든 문제는 더 간단해졌겠지.
“아……?”
순간 내 시야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잡혔다. 진저는 많았지만 저렇게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은 처음이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천천히 사람들을 헤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으앗?”
순간 강한 힘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나는 어느새 나를 품 안에 가둔 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를 보고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춤 안 출 겁니까?”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입만 빼고 전부 가린 가면이었지만 뚫려 있는 눈구멍 속의 금안이 반짝였다.
나는 그가 뻗는 손을 붙잡았다. 제법 로맨틱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을 덮는 붉은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손을 위로 뻗어 가면을 붙잡았다.
“……벗겨도 돼요?”
그는 순순히 가면을 벗기는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 태도에 확신을 가지고 속삭였다.
“우리 처음 뵙는 거죠?”
적발과 금안. 아를 왕족이 가지는 색을 가지고도, 그들과는 전혀 닮지 않은 잘난 얼굴이 드러났다. 짓궂게 씩 웃는 얼굴은, 왕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게 만들 만한 미인을 닮았다 했다. 나는 대공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소문에 동의할 수 있었다.
“이자벨.”
낮은 목소리가 독특한 운율로 내 이름을 속삭였다.
이만한 미인이면, 나라를 등지게 만들 수도 있겠지. 그의 손이 가면을 들고 있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시그니티. 시그라고 불러도 좋아.”
느슨해진 미소와 내 손목에 전해지는 열기에 나는 드디어 내 약혼자를 만났음을 실감했다.
여름의 축제를 닮은 청년이었다. 그 엄격한 왕실에서 태자가 사랑에 빠졌다는 여자도 이랬을까?
“시그.”
내 속삭임에 그의 웃음이 더 매력적으로 짙어졌다. 알렉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잠시 잊어버릴 만큼.
“수도엔 왜 오셨어요?”
시그는 내 말에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편지에 적었을 텐데?”
심지어 그는 드러난 얼굴을 굳이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진짜 그 이유 하나 때문에요?”
“아주 중요한 이유지.”
“어차피 언젠가는 볼 약혼자의 얼굴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될지는 몰랐는데요…….”
“난 내 약혼녀가 보고 싶었어. 그거 말고 뭐가 중요해?”
그는 날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나는 그가 엄격한 왕실과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이임을 직감했다.
“내가 평생을 함께하고 사랑하며 전부를 나눌, 어쩌면 다음 생도 맹세할 여자가 보고 싶었는데.”
“정략결혼에 그렇게 깊은 의미가 있는 줄 몰랐는데요.”
나는 약간 기가 질려 중얼거렸다. 시그는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이렇게 잘 웃는 귀족을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을 약속한 건데 당연하지. 난 계속 그대를 상상했어. 나와 미래를 약속한 여자를.”
“그래서, 진짜로 보니 어떠세요?”
“무슨 대답을 원해? 난 이럴 때 올바른 대답을 하는 법을 잘 모르거든.”
노래가 점점 빨라졌다. 빠른 스텝이 반복되자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나는 경쾌하게 흐르는 노래와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리는 남자를 보고 속삭였다.
“솔직하게?”
“안 돼. 난 솔직한 남자의 끝을 너무 잘 알거든.”
내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시그가 비굴하지 않게 굴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우리 아버지는 솔직하게 고백했다가 열두 번을 차였지.”
“결국 성공하셨잖아요?”
“더 거절하기에 어머니는 마음이 약했지. 아버지는 약았고.”
그는 내 가면을 살짝 건드리고는 비밀을 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우린 반대 같거든. 난 마음이 약하고.”
“저는 약았고?”
“아니. 영리한 거지. 난 똑똑한 여자가 좋아. 앞으로 좋아하기로 했어.”
바람둥이 같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손길은 담백했다. 나는 픽 웃으며 플로어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석으로 움직였다. 그는 아주 순종적으로 나를 따라왔다.
“그래서, 시그, 진짜 이유가 뭐예요?”
“진심이야. 이자벨, 애칭이 뭐야? 이지? 벨? 말은 놓도록 할까?”
그가 내 허리를 잡고 가볍게 들어 올려 뱅그르르 돌았다. 세상 근심 없다는 밝은 표정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굳이 덧붙이자면, 말은 나한테만 놨으면 좋겠고.”
“……바람둥이는 아니죠? 아니, 사실 상관없긴 하지만.”
“상관해. 난 간섭 받는 거 좋아하거든.”
사뿐히 나를 내려놓은 남자는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바람둥이가 할 말은 아니네요.”
“난 운명론자야. 한 사람만 봐.”
“그 얼굴을 가지고?”
살짝 말을 놓자 시그는 푸스스 웃으면서 나를 살짝 들어 플로어에서 내려 줬다.
정중한 손길이 내 허리를 받쳤고 그의 손이 내 가면 옆의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다.
“당신이야말로.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단번에 찾아낼 만큼 예뻐.”
나와 마주한 눈이 다정했다. 나는 그가 초조해하는 건지 만족스러워하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가면, 치워도 될까?”
그는 조금 애원하듯 덧붙였다.
“당신이 보고 싶어, 이자벨.”
세기의 로맨티스트인 대공을 닮았는지, 처음 본 약혼자에게도 참 온갖 달콤한 말을 자연스레 쏟아내는구나 싶었다. 내가 정말 열일곱 살짜리 소녀였다면, 솔직히 넋을 놓고 휘둘렸을 것 같았다.
“그건…….”
“누님!”
순간 허리에 강한 손길이 느껴지더니 내 몸이 붕 떠올랐다.
“꺄악!”
나는 허공에서 발을 까딱이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알렉스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
알렉스가 나를 등 뒤에 숨긴 채 시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그의 얼굴에 불쾌함이 깃들었다. 나는 알렉스의 허리를 붙잡았다.
“괜찮아. 알렉스. 이분은…….”
“이자벨, 누굽니까?”
나와 둘이 대화할 때 쏟아졌던 친근한 말투는 어디로 갔는지 예의 바르지만 어딘가 딱딱한 어조로 시그가 물었다.
“알렉스. 제발. 왜 그래.”
물론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대치에 주변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나는 알렉스를 향해 소곤거렸다.
“사람들이 보잖아, 알렉스.”
“애인이라거나, 애인 후보는 아니겠죠. 이자벨?”
시그는 알렉스를 외면한 채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럼 난 굉장히 슬플 테니까.”
짤막한 말에 알렉스의 기색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만해, 알렉스! 바르펜시아 대공자야. 너도 알잖아. 누나 약혼자야.”
내 속삭임에도 알렉스는 내 앞에서 물러나지를 않았다.
“알렉스…….”
왜 그래?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나는 결국 알렉스를 밀어내고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돌아본 알렉스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누굽니까, 이자벨.”
“알렉스 로윈, 제 동생이에요. 아직 어려서…….”
나는 알렉스의 팔에 매달려 곤란한 얼굴로 알렉스를 올려다봤다. 알렉스는 굳은 얼굴로 말문을 닫았다.
“알렉스. 왜 그래…….”
나는 작게 소곤거리며 알렉스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편지에 쓰여 있던, 예쁘고 사랑스러운 동생?”
시그는 자기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작고 귀여운 알렉스?”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알렉스의 딱 자르는 말에 시그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미인…… 이기는 한데. 작은?”
도대체 어디가 작고 귀여운 동생이냐는 눈초리에 나는 살짝 시선을 피했다. 물론 알렉스는 작고 귀여웠지만, 객관적으로 남들이 보기엔 나보다 컸으니까.
“동생이 열넷이라면서요?”
“맞아요. 얼마 안 있으면 열다섯이에요.”
“열넷치고는 키가 크네요.”
“아버지를 닮았죠.”
나는 순간 심각한 상황임을 잠시 망각하고 뿌듯한 어조로 대꾸하고 말았다. 시그는 내 대답에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서로의 신원이 확인되었으니, 약혼자에게로 오실까요?”
나는 알렉스의 팔을 도닥인 뒤 시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손이 닿자마자 그가 나를 제게로 잡아당겼다.
시그의 품으로 쏙 빨려 들어가면서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알렉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알렉스?
나는 입 모양으로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입을 꾹 다문 그 애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시그니티 바르펜시아.
왕국을 뒤흔든 스캔들의 결과물인 그는 적발과 금안으로 대표되는 아버지의 색깔과 어머니의 미모, 그리고 둘을 잘 버무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제멋대로 뛰어다니는 그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사랑받는 법을 알았고, 사람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데 제법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성공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약혼녀가 정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별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다. 약혼은 언제든 취소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런 것에 반발하거나 난동을 피울 가치가 없다 여겼다.
하지만 그에게 날아온 편지를 확인하는 순간, 글쎄. 뭐랄까. 그는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섬세한 글씨체와 고급 어휘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 짧은 문장 속에서 이 여자가 말하는 방식을 알아차렸다.
⌜……멍청한 귀족에게는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어요. 뭘 받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들이니까. 차라리……⌟
⌜태어난 이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죠. 하지만 자신의 권리가 아닌 것을 탐한 이들은 벌해야 마땅해요. 자기 주제를 아는 이들이야말로 쓸 만한 이들이죠.⌟
사생아인 동생을 아끼면서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뭐지?
글 마디마디 남동생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귀족이란 신분을 가진 이들에 대한 환멸도.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또 주제나 분수를 모르는 아랫것들의 행동을 경멸하고 있었다.
편지를 주고받을수록 모순점은 커졌다. 그는 점점 이 여자가 궁금해졌다.
“동생을 진짜 좋아하나 보네…….”
⌜세상에서 내 동생보다 아름다운 건 없어요. 그 어떤 다이아몬드도 내 동생보다는 못하다고요!⌟
“진짜 재밌네.”
그는 언젠가부터 냉소적이면서 동생의 일에 한해서는 팔불출이 되는 이 소녀의 편지를 기다렸다.
⌜……그런 천한 피를 가진 주제에 어떻게 바테 남작 가문의 후계 자리를 탐낼 수 있겠어요? 그런 XXX는 죽어 마땅할……
……(중략)…… 제 동생은 완벽해요. 로윈의 후계자가 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죠. 대공자께서 제 동생을 지지한다면 그건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 될……⌟
“어쩌라는 거야, 이 아가씨는.”
호감을 품은 궁금증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큰 예시가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아버지가 어머니께 부르는 1036번째 세레나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시그니티는 이 여자를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충동적인 행동들이 인생을 완성해나간다고 믿었다. 그 순간의 강렬한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을 그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데빈, 내 약혼녀는 그래서 어떤 사람인데?”
“음…… 똑똑하세요, 정말.”
“그리고?”
“예쁘시죠.”
“또?”
“……열일곱처럼 보이지는 않죠. 외모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 나이대의 순진함이나 치기가 없으니까.”
편지만 봐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낭만적인 단어라고는 한 조각도 보이질 않았으니. 그나마 간간이 들어 있는 동생에 대한 찬사를 제외한다면 그냥 사업 파트너와 나누는 편지와 다를 게 없을 정도였으니까.
“남동생 칭찬을 해 주면 약간 상냥해지시죠.”
“본인을 칭찬하면?”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하실걸요.”
그는 점점 높아져 가는 이자벨에 대한 관심에 쉽게 굴복했다.
보고 싶다. 보러 가야지.
‘왜 그래, 알렉스…….’
늘어트린 금발과 녹안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키가 큰 소년에게 매달린 소녀는 불안한 얼굴을 했다.
절대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시선은 소년이 등장하고 몇 초 만에 쉽게 무너졌다.
그 괴리에 그는 욕심이 났다. 저 절대적인 애정이 그에게만 향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 * *
베르디 코웰은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는 알렉스를 보고 책을 펼치다가 닫았다. 그는 훌륭한 선생이기 이전에 좋은 상담가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알렉스는 그의 심정을 제대로 정리해내질 못했다. 그는 짜증이 나기도, 불편하기도 했으며 결국 궁극적으로는…… 두려웠다.
알렉스는 마침내 제 감정을 인정했다. 그는 지금 겁이 난 상태였다.
“왜 귀족들은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겁니까?”
건조한 어조가 불편한 심정을 담고 흔들렸다.
알렉스는 이자벨 로윈을 ‘그런’ 의미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건 올바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떠나는 것은 두려웠다.
이자벨 로윈은 알렉스를 이루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는 그녀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릴 때마다 끔찍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다.
알렉스는 종내에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 자란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했다.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알렉스는 더 이상 이자벨과 한 침대에서 자지 못했고, 내내 안고 있을 수도 없으며, 길게 입맞춤을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렸다면, 그 나이로 영원히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보통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후대에 물려주기 위함이죠.”
베르디 코웰은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혹은 드물지만 사랑일 수도 있고.”
“피 한 방울도 이어지지 않았는데 결혼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지나치게…… 불합리한 일입니다.”
알렉스 로윈과 이자벨 로윈은 남매였다. 그 사실은 그들이 설사 싸우거나 멀어진다 하더라도 변함없는 진실로 그들을 묶어 주었다.
그러나 대공자는 그녀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주제에, 단지 결혼이라는 제도 하나로 그와 이자벨이 나누었던 유대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유대는 고고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세계였으며, 그 누구도 그것을 침범하거나 흉내 낼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이자벨과의 유대를 건드리는 이를 기꺼이 증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혼 같은 것을 하지 않은 채 둘이 영원히 지금처럼 로윈 저택에서 행복하게 살면 안 되는 걸까. 지금까지 이렇게 행복했는데, 왜 바뀌어야 하는 걸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제 안락한 세상에 금이 가는 것이 끔찍했다.
“로윈 영애가 결혼하는 게 싫습니까?”
“아뇨.”
멍청한 벙어리를 데릴사위로 들여서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이자벨과 행복하게,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럼 누님은 울까?
“누님이 떠나는 게 싫습니다.”
“이별은 슬프지만, 가족인 이상 완전한 이별은 있을 수 없죠. 로윈 영애는 여전히 알렉스의 누이일 테고, 그건 변함없는 진실일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왜 가족이 있는데,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자벨에게는 알렉스가 있고 알렉스에겐 이자벨이 있는데. 왜 서로 다른 이와 결혼해서 이별해야 하는 거지?
그건 이상했다.
아무 대답 없이 침묵하는 알렉스를 향해 베르디 코웰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랑은 그게 어떤 채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생의 전부죠. 고민할 가치가 있는 문제일 겁니다.”
그는 눈을 길게 깜빡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은 변화를 받아들여야 성숙할 수 있습니다. 세뮈의 회고록에서 알 수 있듯이, 진정으로 성숙한 감정이란…….”
“선생님은 그게 쉬우셨습니까?”
알렉스가 베르디 코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어른이었다. 알렉스는 어른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알렉스의 질문에 평소보다 더 매끄럽게 웃었다.
“아뇨.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건.”
간결한 어조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 말에 조금쯤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는 알렉스가 아는 한 가장 길게 침묵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알렉스를 응시하고 있던 그는 알렉스마저 간신히 잡아낼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렉스는 그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을 유지하는 데, 굳이 의미를 찾지 않으면 됩니다.”
베르디 코웰은 웃었고, 곧이어 부드럽고 유려한 말이 쉽게 화제를 바꿨다.
* * *
시그의 손이 내 모자를 가볍게 톡 치고 지나갔다. 그는 유쾌하지만 조금 안타까운 어조로 속삭였다.
“이러면 내가 나쁜 어른이 된 것 같잖아. 벨. 사탕이라도 줘야 하는 기분이야.”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런 기분이 들 일이 없겠죠.”
나는 모자를 붙잡아 다시 꼭 눌러쓰고는 중얼거렸다.
나는 리 상단에 올 때마다 알렉스가 커버리는 바람에 더 입지 못하는 옷들을 입고 모자 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예쁘장한 어린 소년처럼 보이는 내 모습에 시그는 혀를 찼다.
“말 놓으라니까. 벨. 사탕 주면 말 놓을래?”
“제가 일곱 살이면 통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열일곱이라 통하지 않을 거래네요.”
고개를 서류로 돌리면서 대꾸하자 시그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가 도대체 나와 뭘 하고 싶은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연애라도 할 심산인가?
물론 우리는 약혼한 사이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결혼하게 될 것이다. 서로 괜찮은 사업 파트너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더라도 제법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게 될 테지만, 그건 어차피 결혼 이후에 생각해도 될 문제가 아닌가?
굳이 지금 연애 놀음을 할 이유가 있나? 결혼을 하려면 최소한 3년은 있어야 하는데? 게다가 어차피 결혼할 사이에 굳이 연애를 할 필요가 있나?
“말하는 것도 꼭…….”
“일곱 살 같다고요?”
“아니, 예쁘다고.”
시그가 씩 웃었다. 나는 그 말에 지금까지 하던 고민이 더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를 쳐다보자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췄다.
“말하는 것도 예쁘고,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예쁘고.”
“이런 말투 좋아하세요?”
남자들의 만년 공통 이상형은 순종적이고 청순한 미녀가 아니었나?
“아니, 네가 좋아.”
시그의 눈이 접혔다. 나는 그 웃음에 멍해졌다. 이 인간은 정말 나를 꼬시고 있었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깨끗하게 치우고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저랑 연애하고 싶으세요? 도대체 왜?”
“뭘 그렇게 계산해?”
그야 우리가 그 계산이 맞아서 약혼했기 때문이지.
“정략혼의 뜻은 아시는 거죠?”
“당연하지. 난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어.”
“어차피 결혼할 텐데 왜 연애를 해요?”
그 말에 시그가 잠깐 멍해지더니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지. 우리는 결혼할 사이니까…….”
안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줘야 하나?
“3년 뒤까지 파혼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충족되면요.”
“너무 멀어. 아니지. 벨, 내년에 결혼할까 우리?”
“죄송하지만, 제 결혼 계획은 22살에 잡혀 있어서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자 시그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왜?”
“알렉스가 그때 성인이 되니까요.”
시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내 쪽으로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나는 고개를 한참을 젖혀 그를 응시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그 애는 외가가 없어요. 지켜 줄 가족은 저뿐이죠. 그 애가 성인이 돼서 정식으로 가문의 소가주가 될 때까지는 제가 로윈의 성을 달고 있어야 해요.”
“남매 사이가 질투 날 정도로 좋은데? 내가 보기에 그대 동생은, 그렇게 쉽게 자기 걸 빼앗기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렉스는 영리하게 자랐다. 그러나 그 애가 영리하든 멍청하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 애를 지켜 주고 싶었다.
“알아요. 그래도 난 걔를 지켜 주고 싶어요.”
작게 속삭여진 진심에 그의 손이 내 모자 위에 닿았다. 머리를 쓰다듬듯이 모자 위를 도닥인 그가 내게 웃었다.
“착한 누나네.”
내 뺨이 확 붉어졌다.
착한 누나. 사이좋은 남매.
내가 이전과 다르게 이룩한 것들.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는 그 사실들을 칭찬받는 기분은, 뭐랄까. 굉장히 부끄러웠다.
“대단해. 내가 5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걸 뺀다면 말이지…….”
그의 목소리에 나는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붉어진 뺨을 보이기가 싫었다. 물론 이미 눈치챘는지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뻣뻣하게 반대편을 계속 응시했다.
* * *
“세상에. 알렉스!”
나는 빠르게 알렉스의 손을 낚아챘다. 손에 돌돌 감긴 붕대에 피가 비쳤다. 나는 매서운 눈으로 신디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업 중에 펜이 부러지는 바람에…….”
“도대체 무슨 펜이기에 이렇게 손을 다쳐!”
“괜찮아요, 누님.”
알렉스의 다친 오른손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알렉스가 나머지 손으로 감쌌다. 알렉스는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부러진 펜이랑, 같은 공방에서 만든 거 전부 버려.”
“네. 아가씨.”
신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알렉스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알렉스가 날 안고 내 어깨를 도닥였다.
“괜찮다니까요, 누님.”
“내가 안 괜찮아. 신디아. 상처는 어느 정도야? 언제쯤 낫지?”
내 질문에 신디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재촉하듯 그녀를 향해 고갯짓했다. 신디아의 머뭇거리는 입이 열렸다.
“심하지는 않습니다. 한 달이면……”
“한 달? 맙소사. 흉이 지는 건 아니겠지?”
불안하게 짓씹고 있는 내 입술에 알렉스의 손가락이 닿았다. 겨우 손에서 시선을 떼고 올려다보자 알렉스가 다정하게 웃었다.
“남으면 어때요, 누님. 손을 못 쓰게 된 것도 아닌데.”
“하지만 여자애 몸에,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일단 들어가자. 아픈데 왜 나왔어.”
나는 혹시나 건드리면 아플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알렉스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알렉스는 거의 나를 안고 있는 것처럼 걷고 있었지만, 나는 상처에 집중하느라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누님. 손을 다쳐서 그런데, 오늘은 책을 읽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런 건 손을 안 다쳐도 해 줄 수 있어.”
방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알렉스의 말에 나는 그 애의 팔을 붙잡고 알렉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신디아는 빠르게 들어와서 책상에 올라가 있는 펜과 서랍에 있는 여분의 펜을 들고 나갔다.
“신디아. 가는 길에 샐리 찾아서 차를 가지고 여기로 오라고 해.”
“네.”
신디아가 문을 닫기가 무섭게 알렉스의 손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알렉스! 위험하게!”
나는 균형을 잃고 알렉스에게로 넘어졌다.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알렉스의 무릎 위에 안착한 나는 알렉스의 웃음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벌어지면 어쩌려고 장난을 쳐?”
“심하지 않다니까요, 누님.”
알렉스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댔다.
“넌 너무 네 몸에 신경을 안 써.”
내가 차마 알렉스에게 몸을 기대지 못하고 올려다보고 있자 그 애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누님이 대신 신경 쓰고 걱정해 주잖아요. 내가 안 해도.”
“내가 평생 해 줄 수는 없잖아. 너 나 결혼하면 어떻게 할래?”
결혼하더라도 알렉스는 내 1순위겠지만, 지금처럼 매일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한참 남았잖아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계속 옆에 있어 준다고 약속했으면서.”
“넌 어려서 모를걸. 5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뭐 어때요. 그럼 5년 뒤에도 결혼하지 말고 나랑 살면 되는데.”
나는 어리광을 부리는 알렉스의 이마를 꾹 눌렀다.
“너 대공자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알아? 누나가 그거 다 가져와서 너 주려고 이러는 건데.”
알렉스가 다치지 않은 팔로 내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내 동생은 하필 내가 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는 누님만 있으면 돼요. 어차피 바깥에서 가진 거 하나 없이 들어왔는데…….”
“알렉스! 그런 말 말라고 했잖아. 다 네 거라고. 여기 있는 건 다 네가 태어날 때부터 네 거라고 정해진 것들이라고 했잖아!”
로윈 백작의 자식은 너밖에 없어. 원래부터 다 네 거란 말이야. 내 게 아니야. 알렉스.
화를 내는 내 모습에 알렉스가 날 안고 흐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겠어요. 누님.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나야말로. 화내서 미안해. 알렉스.”
“손 다친 것도. 걱정시킨 것도 미안해요.”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알렉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불쌍한 얼굴도 예뻤다.
“까먹지 마. 다 네 거야.”
알렉스의 뺨을 반죽하듯 주무르며 나는 단단히 일렀다.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는 얼굴을 잡아 늘여도 예쁘구나. 나는 문득 얻은 깨달음에 멍청하게 알렉스의 얼굴을 넋 놓고 응시하고 있었다.
“누님?”
“……넌 뭘 먹고 이렇게 예쁜 걸까?”
알렉스는 내 뜬금없는 소리를 아주 익숙하게 받아넘겼다.
“누님의 사랑이죠.”
“아우, 예뻐라.”
알렉스의 머리통을 꼭 끌어안고 정수리에 쪽쪽 입을 맞췄다.
“드레스는 언제 입어 볼까? 응? 얼마나 예쁠까? 초상화로도 남길까?”
“그런 꼴을…….”
“응? 뭐라고 했어?”
뭐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나는 알렉스와 눈을 맞춘 채 되물었다.
“아뇨. 아무것도요. 이제 책 읽어 주세요, 누님.”
나는 그제야 내가 이 방에 온 용건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요.”
책을 건넴과 동시에 알렉스는 나를 자기 몸에 기대게 만들었다.
“나 무거울 텐데. 게다가 실수로 다친 손이라도 치면 어떻게 하려고.”
“이게 편해요.”
“난 마음이 불편해.”
“제 마음은 이 자세가 편하다는데, 안 돼요?”
날 뒤에서 안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하필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 있었다.
“내가 그런 목소리에 약한 거 알고 이러는 거지?”
“누님은 그냥 저한테 약하잖아요.”
누가 키웠는지 참 똑똑하네.
나는 결국 알렉스의 고집에 몸에 힘을 빼며 그 애가 내민 책을 받아들었다.
“고집쟁이.”
“버릇 잘못 들인 건 누님이면서.”
나는 그 말에 할 말이 없었기에 책으로 눈을 돌렸다.
“몇 페이지?”
“여기부터요.”
내 질문에 알렉스의 손이 한 페이지를 짚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렉스의 다리 사이에 좀 더 편하게 몸을 자리 잡았다.
알렉스의 턱이 내 정수리에 닿았다. 나는 알렉스가 너무 쑥쑥 크고 있다고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고통, 나의 죄, 그 모든 죽음을 닮은 것들은 자격이 있겠지. 인도하는 영혼의…….”
알렉스는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서 책을 낭독하는 이자벨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알렉스는 사실 책 내용에 관심이 없었다.
“내 사랑. 그대의 불꽃이 나를 휘감고…….”
그의 유일한 유대.
알렉스는 이자벨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댔다.
“왜? 이제 그만 읽고 잘까?”
이자벨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이마의 진동으로 느껴졌다.
“아뇨. 계속 읽어 주세요. 눈이 피곤해서 그래요.”
“알렉스…….”
이자벨의 손이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는 그 온기에 웃었다. 변하지 않는 진리를 떠올리듯, 알렉스는 속으로 단어들을 새겼다.
누님은 나를 사랑해.
“피곤하면 자야지.”
“누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어리광이 심하네, 오늘따라.”
그녀만 나를 사랑하면 돼.
알렉스는 품 안의 온기에 좀 더 강하게 이자벨을 끌어안았다. 이자벨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키득거리며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잡아당겼다.
“누님이 절 두고 약혼자한테 빠져서 그래요.”
“질투하지 마, 알렉스. 그는 너랑 달라.”
지금은 다르겠지. 알렉스는 조금 불퉁한 얼굴을 하고 이자벨의 귀를 물었다.
“알렉스!”
이자벨이 파드득 뛰어오르며 몸을 돌려 알렉스의 양 뺨을 잡아당겼다.
찡그린 척을 하고 있었지만 웃고 있는 이자벨의 얼굴을 보며, 알렉스는 그의 뺨을 당기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파요.”
“네가 먼저 물었잖아.”
“누님이 절 혼자 둬서 그래요.”
이자벨은 뺨을 잡아당기던 손으로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불퉁한 표정을 하고도 그녀가 쓰다듬기 쉽게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삐졌어?”
“네. 알렉스는 누님이 없어서 외로웠어요.”
요샌 거의 부리지 않는 애교를 부리는 알렉스의 말에 이자벨은 눈을 반짝이며 알렉스의 얼굴을 붙잡고 뺨에 입을 맞췄다.
“아이구. 그랬어?”
“빨리 좀 더 예뻐해 주지 않으면 슬퍼서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누나가 어떻게 더 예뻐해 줄까?”
알렉스는 그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이자벨이 신기했다.
이 사람 눈에 나는 몇 살짜리로 보이는 거지?
알렉스는 이자벨보다 어리다는 걸 제외하면 키도, 체격도 모두 이자벨을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그는 로윈 백작의 키를 통해 대충 그가 어디까지 크게 될지 짐작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자벨의 자라는 속도를 본다면, 성인이 되고 나서는 거의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어 있는 꼴일지도.
“오늘은 같이 자요, 누님.”
“열다섯 살은 혼자 잘 수 있는 나이야, 알렉스.”
“아직 아니잖아요. 다음 주니까 그전에는 같이 자도 돼요.”
그의 억지에 이자벨은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알렉스는 초조하게 덧붙였다.
“열다섯이 되면 같이 못 자니까, 그 전에 같이 자요.”
그는 순간 그 말을 내뱉고 스스로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그는 그녀와 함께 잠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나이를 먹었다. 더는 어리지 않았다.
이제 그녀와 함께 잠들 권리는 오직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의 것이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자벨은 그런 그를 보고는 뺨을 부드럽게 도닥였다.
“알겠어, 알렉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무섭잖아.”
이자벨은 그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알렉스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어디 가요?”
“옷 갈아입어야지. 씻고 올 테니까, 너도 잘 준비하고 있어.”
이자벨은 부드럽게 알렉스를 달래며 가볍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얼른 와요…….”
알렉스는 온순한 양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씻고 방으로 들어온 이자벨이 알렉스의 옆에 꾸물꾸물 기어 들어왔다. 알렉스는 아이처럼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자벨은 알렉스의 머리를 안으면서 물었다.
“친구라도 소개해 줄까? 혼자 저택에 있는 게 많이 외로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는 이자벨이 그리웠지, 혼자인 게 외롭진 않았다.
약한 백합 향이 섞인 물 냄새가 이자벨에게서 났다. 이제는 이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고? 알렉스는 우울하게 속삭였다.
“누님이 결혼해서 떠나면 저는 어떻게 해요?”
이자벨은 알렉스에게 약했다. 조금만 불쌍한 얼굴을 지어도 그녀는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안달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자벨은 알렉스를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난 계속 수도에 있을 거야. 그리고 알렉스. 너도 새로운 가족을 갖게 될 거고. 너만 사랑해 주는 배우자를 만나겠지.”
“전 누님이 가장 좋아요.”
알렉스의 말에 이자벨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나도 그래, 알렉스.”
그럼 왜 나를 떠나요?
알렉스는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참았다.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평범한, 아니, 이자벨처럼 아름다운 영애는 혼인을 하는 게 당연했다. 그녀는 그 어떤 흠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하게 다른 이들처럼 혼인을 해야 했다.
“거짓말. 나중에는 그 남자가 더 좋다고 할 거잖아요.”
“알렉스. 그와 너는 달라. 그가 만약 나와 결혼해서 내 남편이 된다고 해도, 네 위치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야. 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인걸.”
하지만 그녀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함께할 사람은 내가 아니겠지. 알렉스는 달콤한 말들을 삼키면서 쓰게 생각했다.
“그리고 알렉스, 너 나중에 결혼하면 지금 이랬던 거 까맣게 잊어버릴걸? 누님은 상관하지 마세요! 이러면서.”
“그럴 리가 없어요.”
알렉스의 단언에 이자벨이 졸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될걸. 나는 까맣게 잊고, 그 사람만 생각하겠지. 우리 알렉스 결혼식은…… 누나가 정말 기대하고 있는데…….”
반쯤 잠에 빠진 목소리가 흐려졌다. 정말 예쁠 거라는 말을 끝으로 이자벨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알렉스는 진정으로 궁금했다. 그가 이자벨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삶을 공유할 수 있을까. 이자벨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다들 그에게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연인이 생길 것이라 말했지만, 알렉스는 그럴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이자벨은 그의 세계였다. 알렉스는 거기서 자꾸만 그를 내보내려는 말들에 순응하고 싶지 않았다.
“누님은 나빠요.”
알렉스는 잠에 빠져 듣지 못하는 이자벨을 향해 속삭였다.
왜 자꾸 나를 내보내려고 해요? 나는 영원히 자라고 싶지 않은데.
* * *
상자 안에 담긴 물건을 감동적으로 바라보는 나를 향해 엘리자베스가 탐탁지 않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어마어마한 돈을 처발랐구나, 벨.”
“지금 리지 당신이 입고 걸친 것도 만만치 않거든.”
엘리자베스는 진주를 세 겹으로 길게 늘어트린 목걸이를 걸친 채 동대륙의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그녀가 걸친 것들이 더 비쌌다. 그러나 내 말에 그녀는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이것도 사업이지. 사람들은 날 보고 물건을 사. 내가 얼마나 사치스러우면서도 세련되게 차려입으려고 아침마다 노력하는지 몰라서 그래?”
사교계의 진주 여왕다운 말이었다. 나는 반박하지 않고, 상자 속에 있는 티아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렉스의 생일이야. 그것도 열다섯 생일.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래. 도대체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어디다 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알렉스는 귀여운 여자앤데.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꾹 속으로 삼키며 대꾸했다.
“그 애 결혼식에 쓸 거야. 미리 선물하는 거지. 사실 좀 더 기다렸다가 하고 싶었는데 참을 수가 없었어.”
면사포 위에 이걸 쓰고 있으면 안 그래도 예쁜 얼굴이 얼마나 더 예쁠까.
나는 아까워서 손도 한 번 못 대고 상자를 닫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내 모습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 애를 정말 아끼는 건 알지만. 이자벨, 정말 아깝지 않니? 후회하지 않을 거야? 원래라면 로윈은 네 거였어.”
“그건 원래 알렉스 거야. 후회할 것도 없지.”
후회라면 이미 알렉스와 함께 추락할 때 실컷 했다.
엘리자베스의 매서운 눈이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그러고 있어. 물론 로윈을 물려받기에 알렉스가 좀 순하긴 하지만…… 내가 지켜 줄 거니까 상관없어.”
다짐처럼 중얼거리는 내 말에 엘리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묘하게 우습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걔가 정말 순하다고 믿니?”
“물론 알렉스가 영리하긴 하지. 하지만 그거랑 착한 건 다르니까.”
“글쎄다. 난 사람 보는 눈 하나로 바닥에서 여기까지 왔어. 그 애는 네가 생각한 것만큼 순하진 않아, 벨.”
엘리자베스는 짧게 덧붙였다.
“네 앞에서만 그렇게 굴 뿐이지.”
나는 상자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리지. 난 당신의 안목을 믿어. 하지만 당신도 실수할 때가 있잖아?”
“내 결혼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벨, 슬프지만 원래 인간은 인생에서 한 번쯤 이성이 마비되는 순간이 있단다.”
엘리자베스는 단호한 어조로 속삭였다.
“실수가 아니었어. 난 단 한 번도 그와 결혼한 걸 후회해 본 적이 없으니까.”
“……미안해, 리지.”
나는 머뭇거리며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 쳤다. 평소의 그녀였다.
난 한숨과 함께 변명을 내뱉었다.
“리지, 당신한테 남편이 약점인 것처럼, 나도 그래. 그 애가 내 약점이야. 그 애에게 쥐여 준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
* * *
알렉스의 생일이었다. 특별한 날이면 늘 그렇듯이 난 알렉스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알렉스!”
졸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기다렸다는 듯 알렉스가 몸을 일으켰다.
“오래 기다렸어?”
“아뇨. 방금 일어났어요.”
“거짓말.”
찌푸려진 내 미간을 알렉스가 손으로 꾹 눌러 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누님이 어떻게 알아요?”
“방금 깬 얼굴이 아닌데?”
“전 원래 그래요.”
나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알렉스의 뺨을 잡아 늘였다. 그러나 내 손목을 붙잡는 알렉스의 손에 남은 얇은 흉터에 나는 힘을 빼고 침대 밖으로 후다닥 나왔다.
“오늘은 안 바빠요? 매번 아침마다 나가서 안 들어와 놓고.”
“네 생일이잖아. 어떻게 그래?”
요사이 상인 하나를 두고 작위를 내리느니 마느니 말이 많았다. 샬덴과의 무역 분쟁과 얽힌 문제라 지금 어린애 손이라도 아쉬울 만큼 바빴다.
“생일 선물이에요? 나랑 오늘 종일 같이 있어 주는 거?”
“그게 무슨 선물이야. 그건 당연한 거지…….”
나는 괜히 미안해져 알렉스를 꼭 안았다. 이제는 키 차이 때문에 폭 안긴 모양새였지만 난 꿋꿋하게 안았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알렉스.”
알렉스는 내 말에 기분 좋게 웃었다.
종일 알렉스와 서재의 소파에서 한가롭게 뒹굴면서 시간을 보냈다. 알렉스는 내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계속 웃고 있어?”
“좋아서요. 온종일 같이 있으니까…….”
날 품에 꼭 안고 속삭이는 말에 내 죄책감은 하늘을 뚫었다. 그동안 집 밖으로 나돈 게 몹시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나쁜 년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니. 과거의 나야.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그럼 내일도 같이 있어 주세요. 어디 가지 말고.”
“그런 거 말고. 음. 받고 싶은 거라든지.”
나는 곱게 포장된 티아라를 떠올리며 초조하게 답을 기다렸다.
“누님이 주시는 건 아무거나 좋아요.”
“너 그게 제일 어려운 답인 거 알면서 말하는 거지?”
“전 진심이에요. 정말 뭐든 좋으니까.”
하지만 작년 생일에 준 드레스를 보고는 몰래 한숨을 쉬는 걸 봤는데. 색이 별로였나. 보석이 별로였나.
“아가씨.”
똑똑. 내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별다른 일이 없다면 우리를 찾지 않았다. 나는 의문 어린 얼굴로 대꾸했다.
“……들어와요.”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가씨.”
오기로 한 사람이 없는데? 귀족들 사이에서는 약속 없이 방문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알렉스의 날카로운 물음에 루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알렉스의 옆에서 일어났다.
“누가요?”
“공식적인 방문은 아닙니다.”
“하지만 루크의 선에서 정리될 만한 인물은 아니고요?”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면 루크가 되돌려 보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는 건 그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거겠지.
“알겠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고 알렉스에게 미안한 어조로 속삭였다.
“잠깐 다녀올게, 알렉스. 금방 올 테니까, 조금 이따 보자.”
“제 생일이잖아요. 누님.”
알렉스의 투정에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루크는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알렉스…….”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알렉스가 깊게 한숨을 쉬고 내게 속삭였다.
“빨리 돌아와요, 누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착한 우리 알렉스. 금방 갔다 올게.”
나는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치마를 탁탁 쳐서 주름을 폈다. 샐리가 재빨리 내게 외투를 걸쳐 줬다. 루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 앞에서 걸었다.
“루크.”
“예. 아가씨.”
나는 내일 아침에 말하려 했던 것을 지금 말할까 잠시 고민했다.
“……월요일 오전 10시에 이제 제가 아니라 알렉스를 찾아가는 게 좋겠어요.”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매번 받던 로윈 저택 일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내 말에 루크는 약간 침묵하더니 내게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가 이유를 묻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는 원래 명령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제 그 애가 열다섯이니까요. 충분히, 로윈의 후계자로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때죠.”
노련한 집사답게 루크의 표정에서 놀란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응접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평소와 다름없는 루크의 말에 나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그가 나를 로윈의 후계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내 명령에 아무런 반발하지 않고, 늘 그렇듯 내 의사를 존중했다.
“고마워요, 루크. 늘.”
로윈의 충실한 노집사는 분명 알렉스에게 많은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로윈의 일 중에서 그의 손에 닿지 않은 것은 없었으니까. 루크는 내 감사에 간단하게 묵례를 하고 물러났다. 참으로 그다운 행동이었다.
“안녕, 벨. 좋은 밤이지?”
응접실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새빨간 머리에 나는 곧바로 방문자의 정체를 눈치챘다.
“공식적으로 방문해도 되셨을 텐데요, 시그.”
“난 공식적으로는 수도에 방문한 적도 없는 인간이니까 그건 안 돼.”
“그럼 이렇게 비공식적인 것도 자제하셔야죠.”
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속삭이자, 시그는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툭툭 쳤다.
“오늘 미래의 처남 생일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점수를 딸까, 해서 왔지.”
“정말요?”
“아니. 사실 그 핑계면 벨을 보러 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얼른 뛰어왔어.”
시그가 조금 멋쩍게 웃었다. 그는 변명처럼 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그래도 선물은 제대로 마련했어. 벨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잖아.”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그는 정말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나를 대했다. 나는 그런 애정이 낯설었다.
“아무튼 잘 전해 줘.”
“뭔데요?”
“검. 귀한 거야.”
나는 그 말에 조금 미묘한 표정을 했다.
우리 알렉스한테 검? 물론 음유 시인들의 옛 고전 시들을 보면 위대한 여기사에 대한 이야기도 많지만, 글쎄.
“남자들이라면 다 좋아할걸.”
그가 내 표정을 확인했는지 자신감 있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남자가 아니니까 그렇지.
샐리에게 손을 까딱이자 샐리가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품에 안았다.
“아무튼 고마워요. 선물은, 음. 알렉스가 당신을 질투 중이라서 잘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꼭 전달해 주도록 하죠.”
“하여간 사이가 엄청 좋은 남매로군. 누나를 뺏어가려는 내가 그렇게 밉대?”
“시그. 당신은 형제가 없어서 몰라요.”
“그럴 수도. 아무튼 얼굴 봤으니 이만 갈게.”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 담백한 행동에 나는 살짝 놀라 중얼거렸다.
“오자마자요?”
“나야 밤새도록 있고 싶지만, 누나를 뺏어갔다고 처남에게 욕을 더 들으면 안 되잖아?”
그는 서서 앉아 있는 내게 손을 뻗었다. 내가 그 손을 잡자 그가 내 손등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냥 보고 싶었어. 봐서 좋았고. 잠깐이라도 시간을 허락해 줘서 고마워, 벨.”
“시그, 당신은 음, 너무…… 날 미안하게 만드는 데 선수네요.”
“알아. 우리 아버지가 잘 써먹었던 전략이거든.”
나 또한 일어났다. 여전히 올려다봐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고개가 아프진 않았다. 시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어머니는 이러면 미안해서 밤새 같이 있어 줬다는데.”
“내가 그러길 원해요?”
“당연히 그러면 나야 좋지. 그런데 아니라도 괜찮아.”
그의 얼굴이 한순간 진지한 빛을 띠었다.
“오늘 달빛이 유독 아름다워서, 네 생각이 났어. 그리고 넌 내 앞에 있고.”
가벼운 웃음이 순식간에 진지한 표정을 지워냈다.
“이걸로 충분해.”
“욕심도 없어라.”
“나중엔 욕심쟁이가 될 테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걱정한 적 없는데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문으로 걸어가면서 내가 조금 장난스럽게 속삭이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그럼 지금부터 해.”
시그는 진지한 말을 가볍게 할 줄 알았다. 그런다고 그의 말이 가벼워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건……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내 생각도, 내 걱정도, 나랑 관계된 거면 다 괜찮아.”
“미워하는 건?”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멈춰 서 나를 마주 보고 단언했다.
“그것만 빼고.”
“시그. 정말 그냥 가도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 그러니까 빨리 내 생각해.”
그가 정중하게 내게 인사하고는 고개를 들어 웃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내일 보자고 해 줘.”
“내일, 내일 봐요.”
내 말에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난 그만큼 표정이 다양할 수 있는 사람을 처음 봤다. 대개의 귀족은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니까.
그가 달게 속삭였다.
“내일 봐. 벨.”
* * *
마침내 아를의 왕이 평민에게 작위를 내렸다. 무도회마다 그 이야기를 떠들었다.
드디어 명예가 돈에 팔리기 시작했다고. 아니, 그럼 팔리지 않을 줄 알았나?
나는 밖으로 내뱉지는 못할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도회든 티타임이든 어디든 그 이야기를 하는 건 똑같았다.
이야기가 전부 그 새로운 평민 출신 귀족, 굴드 남작에 대한 비난으로 끝나는 것도. 지루한 티타임의 시작과도 같은 그 비난 뒤에 꽤 흥미로운 말이 들렸다.
“세상에. 로윈 영애. 들으셨어요? 이 자리에 그 남자의 딸이 온대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소곤거리는 어린 영애들 사이로 나는 직감했다. 오늘 누가 하나 울겠구나. 귀족들이란.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구해 줄 자비심 같은 것은 없었다.
결국 새빨개진 눈으로 눈물을 겨우 참던 갈색 머리의 소녀가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주변에서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저런. 말도 할 줄 모르나 보죠?”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왜 여기까지 온 건지.”
특히 내가 목걸이를 선물해 준 뒤로 내게 친근하게 굴기 시작하는 펠먼 영애는 내 옆에서 경멸조로 속삭였다.
“드디어 자기 자리를 찾았나 보죠. 물론 하녀들도 그녀보다는 우아하겠지만.”
굴드 남작 영애. 이번에 새로 작위를 받은 굴드 남작의 막내딸. 귀족들이 그토록 무시하는, 바로 몇 년 전만 해도 평민이었던 이들.
“입은 걸 봤어요? 붉은 드레스라니. 질은 제법 괜찮았지만, 너무 천박하죠.”
‘글쎄. 붉다기보다는 분홍빛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나는 아무 말 없이 찻잔으로 입가를 가렸다. 영애들이 다들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언제적 유행인지.”
“저택에 돌아가면 하녀들에게 한번 물어봐야겠어요. 그들은 알겠죠.”
물론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영애들은 그냥 묵묵히 침묵했으나 굳이 분위기를 바꿀 말을 던지진 않았다.
“……이번에는 진주 수입이 좀 줄 거라고 하더군요. 안타깝죠.”
남을 깔아뭉개기 위해 열심히 입을 놀리던 영애들 사이로 내가 입을 열었다.
“어머, 정말인가요?”
“안 그래도 적은 양인데…….”
재잘대는 어린 소녀들은 금방 화제를 돌렸다. 그들은 눈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간 이를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이게 다 샬덴 때문이겠죠?”
“그 야만인들이 동대륙 물건들의 가치는 알까요? 살던 대로 살지.”
“진주와 흰 돌을 구분이나 할 수 있을까요?”
샬덴과 아를은 늘 사이가 나빴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왕국들이니 어련할까.
샬덴은 아를을 잘난체하는 사기꾼들이라 불렀고, 아를은 샬덴을 예의 없는 야만인들이라 불렀다. 몇백 년 쌓인 원한은 이제 그 기원을 찾기도 모호했다.
“이번에 부트 남작 부인이 상급의 진주 여든여섯 개로 장식한 드레스를 선보였다는데.”
“비단도 동대륙의 황실에나 납품하는 것이라더군요.”
“이자벨, 이자벨은 좋겠어요. 부트 남작 부인과 친분이 있으니.”
펠먼 영애는 친근하게 내게 웃었다. 나는 부드럽게 마주 웃어 보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별말씀을. 캐롤. 아주 사소한 친분이죠.”
“참, 이번에도 최상급 진주들은 전부 왕실로 가겠죠?”
“그건 알 수가 없죠. 왕비 폐하께서 우릴 배려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안 그래도 줄어든 양에 우리까지 기회가 올까요? 펠먼 영애라면 모를까.”
내가 슬그머니 그녀를 치켜세워 주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말이 맞네요. 펠먼 영애 말고는 누구에게 가겠어요?”
다른 영애들도 빠르게 맞장구쳤다. 여기도 어떤 의미로는 정치의 장이었다.
“글쎄요. 이번에 왕궁에 가면 한번 여쭤보기라도 해야겠어요.”
왕궁에 들락날락할 수 있는 본인의 신분을 적당히 끼워 넣어 자랑하는 모습은 확실히 어려 보였다.
나는 몇 년 뒤에 그녀가 샬덴에 끌려갈 모습이 안타까워서라도 그녀의 자존심을 더 치켜세워 주었다.
* * *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동대륙 무역의 우선권 덕분에 샬덴과 아를이 맞붙었던 것이 최근이었다. 그러니 수입이 줄어들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뭐가? 어차피 전면전이 당장 일어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적어진 수입이야, 값을 올려 팔면 되고. 귀족들이야 일일이 값어치 따지는 거 품위 없다고 신경 안 쓸걸.”
뭐 그걸 살만큼 성세가 여전한 귀족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굳이 덧붙이지 않고 속으로 비꼬았다. 엘리자베스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지금 아를이나 샬덴이나 분위기가 안 좋아.”
그야 원래대로라면 몇 년 있다가 일어나는 사건이니까. 나는 목구멍으로 말을 집어넣고 나름 논리적인 답변을 찾아냈다.
“휴전 협상 마친 지 얼마 안 됐어. 겨우 합의 봤는데 다시 일을 터트린다고?”
“아를이나 샬덴이나 둘 다 만족 못 했지.”
“그래서? 전면전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벨. 언젠가는 일어날 일인 거 너도 알잖아. 다만 문제는 언제 일어나느냐지.”
나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녀를 달래듯 부드럽게 대꾸했다.
“뭐가 불안한 거야?”
“불안한 게 아니야. 난 그냥…….”
엘리자베스는 짜증스럽게 입술을 비틀더니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내가 굴드 남작보다 못한 게 뭐지?”
“리지.”
“내가 여자라서? 하지만 난 귀족이잖아. 굴드 남작은 평민이었어.”
그녀는 결국 거친 손길로 펜을 집어 던졌다. 벽에 맞아 떨어지는 펜에서 잉크가 튀었다.
“엘리자베스!”
나는 머리를 짚었다.
“아를에서 돈에 대해 특혜를 준다면, 제일 먼저 내가 돼야 했어! 왜 내가 아니지? 동대륙과의 무역권에서 나만큼 공헌한 귀족이 있나?”
“더 이상 귀족이란 게 의미 없어지고 있다는 걸, 리지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그럼 내가 여자인 게 문제인가? 아니면 과부라서? 아니면!”
“리지. 모르고 뛰어든 거 아니잖아. 어디든 마찬가지라고.”
서른이 넘었음에도 매끄럽게 관리된 피부와 혈기로 타오르는 눈은 엘리자베스의 특징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분노하는 그녀의 눈과 마주했다. 그녀가 나를 조롱했다.
“그래서 순종하라고? 드레스와 보석? 다 좋아. 벨. 하지만 난 거기서 끝내고 싶지 않아!”
나는 그 눈동자에서 냉정함을 마침내 찾아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연기였다. 진심이 섞인.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긴장감이 방 안을 팽팽하게 물들였다. 엘리자베스 또한 내가 그녀의 의도를 알았음을 인지했다.
샬덴과 아를의 전면전. 지금까지의 대화. 결론은 하나였다.
군수업.
“리지, 거긴 상인의 영역은 아니야.”
“굴드 남작은 최초로 작위를 수여한 상인으로 역사에 남겠지. 나는?”
“명예를 원해?”
엘리자베스는 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화가 난 채로 웃고 있었다.
“명예? 그게 아니야. 난 그냥 나보다 못난 것들이 나보다 낫다고 기록되는 걸 참을 수 없을 뿐이야.”
“당신이 뭘 하더라도, 사람들은 당신이 더 낫다고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나는 현실에 대해 속삭였다. 거기에 좌절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냥 나는 그녀가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했다.
내가 죽을 때, 그녀는 여전히 사교계의 진주 여왕이었다. 내가 개입했다고, 뭔가 변할 수 있을까?
“알아.”
“그런데?”
“어디까지 인정하지 않나 두고 보자고.”
화를 내며 날뛰었던 주제에 차분하게 속삭이는 말로 끝맺었다. 나는 결국 웃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엘리자베스의 이런 면을 좋아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그 태도가.
“날 설득할 생각도 없었지? 이미 결정 내린 거잖아.”
“그럴 리가. 벨, 넌 내 최고의 동업잔데.”
입에 발린 거짓말에 나는 혀를 차며 웃었다.
“거긴 정치의 영역이야. 솔직히 국정의 영역에 더 가깝지. 일단 허가부터 받을 자신은 있어?”
“전쟁 물자라도 사고파는 건 똑같아. 그럼 나보다 나은 사람은 없어.”
담담해진 엘리자베스의 얼굴에서 나는 그녀의 열정을 읽었다. 그건 내가 갖지 못한 것이었으며, 무언가에 미칠 수 있는 자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나도 한때는 저런 얼굴을 했겠지.
이전 생에서 로윈의 모든 것을 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책임지고 사랑하고, 이끌어나가는 것에 대해 저리 열정적이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 왜 제가 아니라 알렉스였어요?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잊어야지. 이제는 없는 일. 반복하지 않으려 애썼던 과거의 순간들.
로윈이 내 것이 아니라 포기한 후, 나는 쉽게 무기력해졌다. 만약 알렉스가 아니었더라면 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번 생을 흘려보냈겠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는 삶에서 한때는 내 적이었던 아이. 내 어떤 인생도 알렉스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애는 날 죽게 했고, 다시 날 살아가게 해.
* * *
시그니티는 수도의 한구석에 적당한 저택을 구매했다. 하인 하나와 하녀 하나만 있으면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작은 저택이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작은아버지한테 들킬 일 있나?”
귀족들보다는 적당히 부유한 평민들이 은퇴해서 살 법한 그런 저택.
굳이 시선을 끌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자벨 로윈을 본 것에 만족했다. 굳이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자고로 연애란 비밀 연애일 때 좀 더 불타오르는 법이지.
그는 도무지 마음을 잘 열지 않는 약혼녀를 떠올리고 조금 우울하게 입술을 늘어트렸다.
“음…….”
시그니티는 서재에 앉아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대충 서랍에 쑤셔 넣으면서, 어머니의 편지를 펼쳤다.
아버지의 편지야 늘 그렇듯 단순했기에 솔직히 읽을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의 말을 잘 들어라.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마라. 뭐 그런 한마디를 제외하고는 내용 따윈 없었으니.
⌜……네 아버지는 널 당장이라도 결혼시키고 은퇴하는 꿈에 부풀어 있는데 정말 아버지에게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을 생각이니?⌟
그는 살짝 삐뚤삐뚤한 어머니의 글씨를 읽어 내리며 조용히 웃었다. 글만 읽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지내고 선했다.
늘 그렇듯 어머니 웃는 얼굴 한 번 더 보겠다고 아버지가 앞에서 굴러다니고 있겠지. 가끔은 집안에 너무 사랑이 넘쳐서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수도의 사람들은 아직도 떠들어댔다.
‘만약 바르펜시아 대공이 그렇게 사랑에 미쳐서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을 텐데! 불쌍하기도 하지.’
어머니가 아니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도 행복하지 않았겠지.
그는 아버지가 행복하기 위해 최선의 방향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권력과 사랑 중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사람은 자신이 행복해지는 쪽을 선택하기 마련이었다.
시그니티는 씩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말 운이 좋지 않은가. 사랑하게 될 여자와 같이 걸을 길에 권력과 부, 그 모든 것이 함께할 테니 말이다.
물론 그는 그 어떤 것이 없더라도 이자벨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러니까, 이자벨도 그를 선택해 주면 좋을 텐데.
* * *
“미쳤어?”
“이게 아니면 방법이 없어. 아무도 내게는 무기를 팔지 않을걸.”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속삭였다. 나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재물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계획 앞에 아연했다.
“철광산을 아예 사버리겠다고?”
“그래. 그 철광산에 딸려 있는 길드도 한꺼번에 고용할 거야.”
“돈은, 그래 돈이야 어떻게든 한다고 쳐. 허가는?”
내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씩 웃으며 초대장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나른하게 조롱조로 속삭였다.
“난 그저 조금 더 왕실에 충성스러움을 보이고 싶을 뿐이야. 왕비 폐하께서는, 그런 내 마음을 아주 잘 아시지.”
“귀족들이란.”
“별로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거야, 그들은. 이건 군대도, 병사도, 보급도 아니야. 그저 충성스러운 여자 하나가 무기 조금을 싼값에 바치겠다는데, 무슨 생각을 더 하겠어?”
“데빈을 데려와야겠군.”
“맞아.”
나는 엘리자베스의 담담한 수긍에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자베스는 내 기색을 확인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군대는 여자와 대화하지 않아. 당연히 데빈이 필요하지. 이제 제법 청년티가 나니 얼굴마담으로도 괜찮을 거고.”
내가 바르펜시아 대공령으로 거의 쫓아내듯 임명해 버린 엘리자베스의 조카 데빈은 엘리자베스를 부모보다 더 따랐다. 데빈은 그녀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할 것이다.
“하지만 벨, 그들이 언제 나와 대화를 하자고 매달릴지 한번 보자고.”
엘리자베스는 오만하게 속삭였다.
“난 자신 있어.”
“그거 기대되네.”
나는 그녀의 높은 자신감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모습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참 대단한 여자였다.
“그러니까 빨리 데빈한테 오라고 연락해, 벨.”
“왜 내가?”
“네 약혼자 편지가 더 빨리 갈 테니까.”
나는 말한 적도 없는 시그니티의 수도 방문을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투덜거렸다.
“모르는 것도 없지, 리지.”
“집무실에 대놓고 방문하는 남자의 신분 정도는 파악하는 게 정상이겠지, 벨.”
엘리자베스는 조금 키득거리면서 내게 충고했다.
“연애는 조용히 해. 뭐, 그 나이면 그게 될 리가 없겠지만. 불타는 청춘은 좋겠어.”
“늙은이처럼 말하지 말지? 리지, 당신이 하고 싶으면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남자들이 지금도 줄을 설걸?”
동대륙인들처럼 짙은 흑발을 깔끔하게 틀어 올린 엘리자베스는 단아한 느낌의 미인이었다. ‘단아’라는 수식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인생에 결혼은 한 번도 많아. 아무튼 데빈이 올 때까지 난 두록 산맥 좀 다녀와야겠어.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지.”
두록 산맥의 철광산과 그 아래에 있는 대장장이 길드를 한 번 둘러봐야겠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일이 많지도 않았다. 샬덴이 동대륙과의 무역에 끼어들면서 거래가 크게 줄었고, 사업은 이미 궤도를 타고 순행 중이었으니.
“앞으로 계속 돌아다니게 될 거면, 밑에 애들 몇 더 키워. 데빈도 바빠질 거고, 지금처럼은 제대로 안 돌아갈걸.”
리 상단은 고급화 전략을 택했고, 귀족들을 주거래 상대로 삼았기 때문에 지점도 적었다.
지금까지야 나와 엘리자베스로 어떻게든 최종 결정을 이뤄나갔지만, 그것도 이제는 상단을 키우려면 한계였다.
“아아. 알아. 좀 오래 일한 애 중에 괜찮은 애들을 중간 간부로 올리려고. 좀 더 체계적으로 바꿔야지.”
“닷이랑 애니가 괜찮더라. 그런데…… 그럴 거면 우리 알렉스도 데려와서 교육시켜도 괜찮을까?”
나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서 짤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벨, 난 너랑 거래한 거야.”
“경영에서는 계속 손 놓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상단에서 내 지분은, 내 돈은 전부 알렉스가 갖게 될 거야. 미리부터 상단 일에 익숙해지는 게 낫지 않겠어?”
“난 너랑 동업하고 있어, 벨. 우린 큰 의견의 대치 없이 잘 이끌어 왔고. 그건 그래……. 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끄럽게 우리의 갈등을 완화시켰기 때문이지.”
엘리자베스는 날카롭게 문제의 논점을 짚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확신해서는 안 되지만, 난 너라면 계속 이렇게…… 머리가 둘인 채로 상단을 경영하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네 동생은? 네 그 소중한 알렉스와 내가 대치하게 된다면? 상단을 반으로 쪼개버릴 생각이야?”
그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고작 상단 하나. 네겐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야, 엘리자베스. 난 이 상단이 당신한테 가지는 의미를 이해해.”
“이해하면 그런 소리는 못 해. 넌.”
나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할 수 있을 리가. 아무리 작은 집단이라도 머리가 둘인 집단은 패망한다.
“네가 아니면 난 여기까지 못 왔어. 알아. 고맙게 생각해. 기껏 해 봤자 사교계의 큰손에 만족하면서 살았겠지. 하지만 이자벨 로윈, 너도 나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어.”
엘리자베스는 거의 스무 살이나 어린 날, 오래된 친구처럼 달랬다. 그녀의 장점이었다.
이 여자는 단 한 번도 날 어린아이 취급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어리광을 부리며 넘어갈 수도 없었다.
“지금 네 나이에 너만큼의 부를 쥐고 있는 인간이 있을 것 같아? 네 약혼자? 오,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그냥 동생한테 줘 버리고 시집이나 가게?”
“비꼬지 마, 리지. 난 그냥…… 알잖아. 알렉스는 내 동생이고…….”
“아무도 동생한테 그렇게까지 안 해!”
“걘 내 전부야!”
내가 가진 건 전부 알렉스 거야. 걔는 좋은 건 다 가져야 해. 좋은 것. 예쁜 것. 전부…….
“알렉스는, 알잖아. 리지. 걔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헐떡거리는 숨을 간신히 골랐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나를 고요하게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렇게 살다간 넌 언젠가 그 애 때문에 죽을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이 상단은 내 전부야. 그걸 알면서도 그 애한테 빼앗아다 주고 싶어?”
“순순히 빼앗기지도 않을 거잖아, 어차피.”
“싸워서 이긴 사람이 가져라?”
“사이좋게 나눠 가질 수도 있고.”
“내가 재혼할 확률쯤 되겠네.”
나는 회의적으로 중얼거리는 엘리자베스를 똑바로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주고 싶은 건 기회야. 어차피 지분이 아니라 경영권 문제잖아. 알렉스가 져도 상관없어.”
내가 투자하고 불린 돈은 그대로 내 손에 들어와 알렉스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건 보장된 사실이었다.
“알렉스는 져도 돼. 실패해도 돼. 내가 있으니까.”
기회를 받고 정당하게 겨루고, 졌어도 인생이 망가지지 않는 삶.
난 알렉스를 5살짜리 애처럼 다루고 싶진 않았다. 스스로의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되, 그 뒤에서 절대 부서지지 않는 안전망이 되어 주고 싶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애의 편이 되어 줄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너희 남매는 미쳤어.”
“미친 건 나지. 우리 알렉스까지 끌어들이지 마.”
엘리자베스는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넌 걜 몰라. 어느 15살짜리 남자애가 자기 누나 없으면 죽겠다고 매달리지?”
“……난 걔 부모나 다름없으니까. 알렉스는 내가 키웠어. 리지. 잘 알잖아.”
“너흰 2년밖에 차이 안 나. 걔가 10살 때 처음 만났다고 했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너무 그렇게 품 안에서만 키우지 마. 걔 그렇게 안 순진해.”
“알아.”
알렉스 교육도 내가 관여하는데 그 애가 또래보다 똑똑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애는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이전 생에서도 남들 앞에서는 꽤 그럴듯하게 귀족 흉내를 냈다. 로윈 백작을 닮았다면, 그 머리가 어디 갈 리가 없었다.
“정말?”
“알렉스는 나한테만 순진한 거야. 걔는 나한테만 떼쓰고, 나한테만 어리광부리고. 내가 하는 말은 다 믿어. 순진하게.”
나한테만 어리게 구는 걸 어떻게 몰라. 그러다가 배신당하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면 어때. 알렉스는 날 배신해도 돼.
“걔한테는 나밖에 없단 말이야.”
우리 알렉스는 불쌍하게도 배신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 걔를 믿고, 돌보는 게 나뿐이니까.
“더 크면 알렉스도 자기 사람이 생기겠지. 그런데 그전까지는? 걔는 엄마도 아빠도 유모도 없는데.”
내가 전부야, 알렉스는.
“……크면 네 품에서 벗어날 거라고 생각해? 아니, 네 품에서 놓기는 할 거야?”
“리지, 그거 알아?”
나는 종종 알렉스가 날 소중하게 여길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 내가 걜 죽였는데, 알렉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좋다잖아.
“내 소원은 알렉스한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거야.”
“뭐?”
“알렉스한테 소중한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내가 그 애의 소중한 사람 목록에도 못 들어가는 거.”
“진짜 이상한 말이긴 한데, 벨. 가끔 넌…… 네 동생을 좋아하는 것 같지가 않아. 그렇게 지극정성인데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쓸데없는 구석에서도 예리했다.
“설마. 내가 얼마나 알렉스를 좋아하는데. 그래서, 알렉스를 데려오는 거에 더 반대는 안 하는 거지?”
엘리자베스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내키지 않은 목소리였다.
“좋아. 트집 잡을 일이 많았으면 좋겠네.”
“마음 착하게 먹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장난해?”
“걘 15살이야. 당신 나이 절반도 안 먹었다고.”
“넌 12살에 이 바닥에 뛰어들었으면서 퍽이나 나이가 의미 있겠네.”
나는 웃었다. 굳이 따지면 정신은 스무 살이었는데?
그리고 엘리자베스, 난 정말 알렉스를 좋아해. 난 그냥…….
알렉스가 날 좋아하는 게 싫은 거야.
……그건 너무 미안하잖아.
* * *
내가 앉아 있는 일인용 소파에 알렉스가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의 머리를 도닥였다.
머리에 윤기 흐르는 거 봐. 우리 알렉스는 머릿결도 예뻐.
“큽.”
잠시 감격에 빠져 있는 동안 알렉스가 뭐라고 속삭였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럼 이제 낮에도 누님과 같이 있을 수 있어요?”
“그건 아닐걸. 같은 장소에는 있겠지만, 바쁘지 않을까?”
“좋아요.”
나는 빠르게 수긍하는 알렉스에게 미리 준비했던 말들을 내뱉었다.
“거긴 평민들이 많을 거야. 하지만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렉스. 나는 네가…….”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더 이상 혈통만으로 권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저도 알아요.,누님.”
알렉스는 낮게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님이 항상 하는 말이잖아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거긴 대단해질 거야. 난 네가 그들의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어.”
“걱정 마세요. 누님. 전 누님 말이면 뭐든 잘 듣잖아요.”
나는 알렉스의 확신 어린 목소리에 안심하고 웃었다.
늘 그렇듯 알렉스는 내 유일한 가족이었고, 나는 알렉스와 함께 있을 때면 마음이 편해졌다. 긴장이 풀리자 소파의 폭신함이 몹시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소파에 몸을 파묻자 알렉스가 내 옆자리를 냉큼 차지했다. 졸음이 내 몸을 지배할 때까지 알렉스는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알렉스는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잠든 이자벨의 품에 있는 책을 빼냈다. 혹시 몰라 책갈피를 끼워 두고, 덮어 옆에 놓았다.
꿈이라도 꾸는지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몇 번이고 그에게 당부했던 이자벨을 떠올리고 낮게 웃었다. 그의 일에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보는 건 기분이 좋았다.
“누님?”
알렉스는 작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깨기 어려울 만큼 작은 목소리임에도 그의 부름이 들렸는지 이자벨이 고개를 톡 앞으로 떨어트렸다.
알렉스는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의 턱을 손으로 받쳤다. 손안에 폭 들어오는 턱과 뺨에 알렉스는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거렸다.
“……이자벨. 이자벨 로윈.”
그는 이 감긴 눈이 얼마나 그를 향한 애정으로 빛나는지 알았다. 어떻게 웃는지도, 어떻게 찌푸려지는 지도,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렉스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 한가운데에서 그는 알 수 없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이 순간은, 이 광경은 그만의 것이었다. 그와 이자벨만의 것.
그녀가 설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할지라도 이 순간만은 그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시간은 지나갈 테고, 기억 속에 박제된 풍경은 오로지 그만의 것일 테니까.
손바닥에 문질러지는 부드러운 턱과 뺨. 손끝에 엉키는 머리카락과 평온하게 잠든 얼굴. 그를 걱정하며 살짝 찌푸려졌던 눈매와 달래듯 늘어트린 웃음.
그는 세상이 등을 돌려도 그를 배신하지 않을, 그의 단 하나뿐인 신을 향해 속삭였다.
“난 당신이 원하면 뭐든지 해요.”
다짐처럼 중얼거린 목소리와 함께 그는 허리를 숙여 금발이 가닥가닥 흩어진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늘 그에게 해 주던 것처럼 깊은 애정과 신뢰를 담아.
“그러니까 당신은 날 버리면 안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후, 엘리자베스는 빠르게 떠났다. 데빈은 돌아와 엘리자베스의 일을 맡아서 하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아가씨…….”
그리고 데빈은 얼굴마담과 엘리자베스가 떠넘긴 일 사이에서 당장이라도 죽고 싶어 하는 상태였다.
“제가 죽으면 쉴 수 있을까요?”
“말할 시간에 서류나 한 번 더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쌓인 문건들 사이에서 햇빛을 보지 못해 하얗게 질린 얼굴이 빼꼼 내밀어졌다.
“유언장에 고모님과 아가씨 이름을 적을 거예요.”
“데빈, 넌 유언을 남길 시간이 있다고 믿니?”
“신경 써 주지 마세요, 누님. 버릇 나빠져요.”
알렉스가 내 눈을 가리며 꽤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데빈의 앓는 소리와 함께 알렉스의 혀 차는 소리가 울렸다.
“오냐. 유언장에 네 이름도 올려 주마, 알렉스.”
“지금 네 일을 돕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너지. 젠장…….”
친구 사이에 할 법한 친근한 대화가 오갔다. 나는 여전히 그 모습이 꽤 낯설었다. 저택 내에서는 사람을 그렇게 싫어하던 애가 상단에는 너무 쉽게 녹아 들어왔다.
“저걸 볼 시간에 나를 봐요, 누님. 예쁘지도 않은 걸 왜 봐요?”
“아가씨 눈에는 내가 예쁜가 보지. 서류나 봐. 집착도 그 정도면 병이야 이 새끼야.”
알렉스는 그 말에 코웃음 치더니 뒤에서 안고 있던 내 몸을 돌려 마주 보게 했다.
“누님 눈에 예쁜 건 나지. 그렇죠?”
날 내려다보는 알렉스의 눈이 접히며 그 애가 웃었다. 숨이 막힐 만큼 예뻤다.
“세상에…… 우리 알렉스는 어떻게 점점 더 예뻐지지?”
멍청하게 중얼거리자 알렉스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제 눈에는 누님이 그런데.”
“눈이 삐었구나, 알렉스.”
아무리 너라도 네 외모를 깔 순 없단다.
“남매간의 정은 나가서 나누세요, 제발……. 신성한 노동 현장을 더럽히지 마시고…….”
반쯤 죽어 가는 데빈이 기계적으로 서명을 끼적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관심 없는 우리 누나는 뭘 하려나…….”
누나 실내화로 처맞았던 곳이 아직도 쑤시는데…….
* * *
데빈은 문 옆에 기대고 서서 물끄러미 유난한 남매를 응시했다.
이자벨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알렉스의 손이 계속 그녀의 뺨과 턱을 문질렀다.
애도 아니고. 이상하게 민망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더 기다리게 하시면 고모님이 화내실지도 몰라요. 아가씨.”
“좀 이따 봐, 알렉스.”
이자벨이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알렉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데빈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안 웃으면 너 늙어 보인다.”
“네 키가 작은 걸 분풀이 하지 말지?”
“난 평균이야……. 네가 너무 큰 거라고.”
데빈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문 앞을 떠날 생각이 없는 소년을 향해 그는 충고했다.
“총회가 한 번 열리면 반나절은 걸려.”
엘리자베스가 귀환한 후, 모든 지부장을 소집한 총회였다. 바르펜시아 지점을 담당할 때야 데빈도 안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으. 그는 이전 총회 때, 엘리자베스의 매서웠던 눈빛을 떠올리고 고개를 털어냈다.
“이번엔 뭘 논의하는데?”
데빈은 잘생긴 소년의 말을 정정했다.
“논의가 아니야. 명령이지. 아무도 고모님 말에는 토를 안 달거든.”
“누님도?”
“아가씨는 예외.”
리 상단은 엘리자베스가 만들었고 키웠다. 총회에 참석 가능한 지부장과 고위 결정권자들은 죄다 그녀가 키우고 다듬은 이들이었다.
그러니 반발은 무슨.
엘리자베스가 물러난 후라면 모를까 그전의 총회는 명목상의 논의에 가까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고모님을 존중하니까……. 뭐. 총회에서는 트집을 안 잡으셔. 정말 필요하다 싶으면 따로 뒤에서 얘기하시지.”
데빈은 묘하게 불편한 표정을 짓는 알렉스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넌 뭐가 또 불만이냐?”
15살로 보이지도 않는 키의 소년은 제 누이만 없으면 지나치게 경계심이 많아졌다.
아주 제 누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놈. 이 정도 집착이면 아직 아가씨의 약혼자를 찌르러 가지 않은 게 신기한 수준인데.
“아무것도.”
“아가씨가 보고 싶다고 울 거면 모른 척해 줄게.”
“헛소리 집어치워.”
데빈은 거의 1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알렉스와 친구 비슷한 것이 되었다는 게 스스로도 의문스러웠다.
무려 그 로윈인데? 게다가 얼굴은 무슨 신전 조각상 갖다 놓은 것처럼 다가가기 힘든데? 그리고 자기 누나 말고는 관심이 없…… 는 게 이유였지.
데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자벨과 그 외의 인간으로 사람들을 구분했고, 이자벨이 아닌 인간들은 신분 고하를 불문하고 알렉스에겐 평등했다.
생각하고 보니 더 미친 것 같은데?
무슨 남매가 그래. 데빈은 주먹과 협박, 그리고 한 스푼의 미운 정이 섞인 보통의 남매 사이를 유지하는 입장으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인한테도 그렇게는 못 해.
게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안 닮아서 남매 같지도 않은 탓에 보는 입장이 더 괴로웠다.
데빈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끙끙거리는 데빈을 보던 알렉스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미쳤어?”
너 때문이잖아. 이 미친놈아.
* * *
나는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알렉스가 시그니티와 내가 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걸.
“둘 다 싸울 거면 나가.”
“벨, 나는 절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과 싸우지 않아.”
시그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부드러웠지만, 나는 이미 면역이 된 지 오래였다.
그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단어들은 대부분 너무…… 몽글거렸다. 일일이 설레하다가는 내 얼굴색은 늘 빨갛게 변해 있었겠지.
“전 그가 여기 있는 게 상단에 별로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누님.”
“난 사업 파트너이기도 해. 그렇지, 벨?”
알렉스의 딱딱한 목소리에 시그는 대꾸하지 않고 내게 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들 싸우면 안 되는 거니?
알렉스와 시그가 괜찮은 사업 파트너가 될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워야만 하는 걸까?
“도대체 서로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오해야. 벨. 난 처남이 마음에 들어.”
“처남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나는 머리를 짚었다. 싱글거리면서도 알렉스에게는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는 시그와, 딱딱하게 되받아치는 알렉스는 내가 없다면 서로를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둘 다 됐어. 난 산책이나 좀 할래.”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알렉스도 곧바로 나를 따라 일어났다.
“벨.”
시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으래. 고마워.”
알렉스가 영 내키지 않는 시선으로 붙들린 손을 보더니 비어 있는 내 옆에 섰다.
“그러고 보니, 시그, 안 돌아가도 돼?”
그가 수도로 온 지 꽤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그동안 퍼부어지는 그의 공세에 휘말려 결국 존칭을 잃어버렸다.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쥐면서 속삭였다.
“같이 돌아가려고.”
“누님은 수도에 계실 겁니다, 계속.”
“한 번쯤은 내가 자란 곳을 보여 주고 싶어. 부모님도 벨을 굉장히 보고 싶어 해.”
“누님이 자란 곳은 여기죠. 있을 곳도 여기고.”
너흰 뭐가 문제니?
나는 산책을 하는 건지 싸움을 관람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둘 다 나랑 좀 대화할까? 그렇게 서로 할 말이 많으면 내가 빠지고.”
“난 계속 벨한테 말하는 중이었어.”
애를 이겨 먹으면 좋아?
시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나는 알렉스가 데빈보다는 차라리 시그와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만약 내가 시그와 결혼하더라도, 둘은 평생 싸우고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조용히 걷자, 우리…….”
깊은 한숨이 딸려 나왔다. 잠깐의 산책이 더 피로를 키운 기분이었다.
* * *
“나 당황하는 게 재밌어서 계속 싸우는 거지? 아니면 우리 착한 알렉스가 하지 말라는 짓을 계속할 리가 없지, 응?”
알렉스는 투덜거리는 이자벨을 향해 곤란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대공자가 하는 말을 좋게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바르펜시아 대공자가 싫었으니까.
“내가 그와 결혼하면, 그는 네 지지 기반이 되어 줄 거야. 너무 싫어하지만은 마.”
결혼을 하나의 거래처럼 얘기하는 이자벨의 목소리에 알렉스는 조금 안심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그냥 누님이 아까워요.”
투정처럼 내뱉은 말에 이자벨은 푸스스 웃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아래층에 일을 처리하러 떠났다.
알렉스는 순식간에 고요해진 이자벨의 집무실을 가만히 둘러봤다. 집무실이라 해 봤자 여기서 앉아 있는 것보다는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일이 많아, 이 공간은 거의 알렉스의 차지였다.
그래도 곳곳에 이자벨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는 약간 닳은 의자를 손으로 쓸었다.
‘알렉스?’
매번 이 자리에 앉아서, 그가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들고 웃는 얼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좋네. 실물보다는 못해도.
“……안 들어오십니까?”
“징그럽게 똑똑하네.”
가벼운 노크 소리 하나 없이 문이 열렸다. 알렉스는 곧 상단의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여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네 누이는 어디에 있냐고 물을까 했는데…… 넌 이미 내가 왜 왔는지 아는구나.”
“이자벨이 날 여기로 데려왔고, 그녀는 여기 상단의 최대 지분을 가지고 있죠. 누가 상단주였더라도, 절 보러왔을 텐데요.”
“멍청한 것보다는 낫구나.”
엘리자베스는 내키지 않은 어조로 그를 평가했다. 그녀는 벌써부터 이 잘난 소년이 싫어졌다.
“……사생아 같진 않아.”
느릿하게 비꼬는 말은 알렉스를 일부러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담담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10년 뒤에 사망하실 예정이신가요?”
알렉스는 가볍게 조소했다. 이자벨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면 그전에 상단을 버리실 작정이신가?”
알렉스는 출신을 모욕받는 것이 사실 아무렇지 않았다. 사생아란 게 틀린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자벨이 싫어했으니까.
“협박이라면, 이자벨이 잘도 가르쳤네.”
“이자벨은 그 단어로 날 부르는 걸 싫어해요. 울 만큼 싫어하죠.”
“그래서?”
“그 단어를 계속 쓰신다면, 10년 뒤의 제가 당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별짓을 다 하고 있을 거란 뜻이었어요.”
알렉스는 그가 갖게 될 지위와 권력에 무지하지 않았다.
로윈은 아를의 군대와 가장 밀접한 가문이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현재 로윈 백작이 가진 영향력과 지위를 당연하게 물려받게 될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아주 잘 알아들었다.
“좋아. 취소하지. 벨이 싫어하는 건 나도 별로 하고 싶지 않으니.”
“현명한 판단이네요. 그럼 용건으로 바로 들어가죠. 어차피 부인께서는 제가 뭘 해도 싫으실 테니.”
엘리자베스는 늙은 정치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짜증 나고 까다롭고.
“이자벨이 너한테 주겠다는 지분을…….”
“아직 안 받았습니다. 얘기할 가치가 없죠.”
“언젠가는 받겠지. 그 후의 문제를 미리 얘기해 보자는 거야.”
알렉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심으로 15살짜리와 경영권을 놓고 다투잔 뜻입니까?”
“난 확답이 필요해. 내 상단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겠다는.”
엘리자베스는 딱히 모성애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만약 있다면 그녀가 세운 상단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긴 그녀가 세운 나라였다. 바닥을 고르고 기둥부터 손수 세운 그녀의 것.
“이자벨은 어쩌면 제가 이 상단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던데요.”
“난 후계자 따윈 필요 없어.”
“인간은 누구나 늙고 결국에는 죽죠. 부인께서도 예외는 아닐 텐데.”
“난 내가 죽고 나서 여기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알렉스는 짐작했던 내용이 사실임을 알고 혀를 찼다. 이 여자는 폭군에 가까웠다.
몹시 유능한 폭군.
보통 역사에서 이런 유형의 왕이 등장하면, 급격하게 나라가 번영했다가…… 후대가 망한다. 본인의 지배욕이 너무 커서 후계를 키우는 데 관심을 두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반쯤 후계 취급을 받고 있는 데빈을 이리저리 내돌리는 것부터가…….
“난 죽을 때까지 이곳의 왕으로 살 거야. 후계라…… 글쎄. 내가 죽고 나서는 알 바 아니야.”
누가 감히 그녀에게서 그녀의 왕국을 빼앗아 갈 수 있겠는가?
아무도. 신조차도 그럴 수는 없었다.
“전 어떤 것도 확답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게 없으니까.”
“이자벨, 그 애를 가졌잖아. 걘 너한테 가진 걸 다 주고도 모자랄까 봐 걱정할 애야.”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을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알렉스는 그 말에 웃었다. 조소나 냉소가 아닌 정말 즐거워서 웃는 얼굴을 향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외모도 성격도 어느 하나 닮은 게 없었다.
둘 다 미인이라도 결이 달랐다. 이자벨은 천을 꿰어 만든 사랑스러운 인형 같은 미인이었다면, 알렉스는 신전의 미소년 조각상을 옮겨 놓은 것처럼 생겼다.
“그럴 리가요.”
과할 만큼 단호한 어조가 떨어졌다. 알렉스는 전혀 말이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굴었다.
“이자벨과 전 굉장히 많이 닮았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피 한 방울까지 닮았죠.”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알렉스는 확신을 담아 속삭였다.
“남매잖아요. 비록 절반뿐이라도, 같은 피가 흐르는데……. 어떻게 우리가 닮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거야. 아무도 못 바꿔. 무슨 일이 있어도 누님은 날 완전히 버릴 수가 없어.
그게 가족이잖아.
나는 문 앞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문에 몸을 기댔다. 얇은 문을 타고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사생아 같진 않아.’
‘실례지만, 10년 뒤에 사망하실 예정이신가요? 아니면 그전에 상단을 버리실 작정이신가?’
18살의 알렉스를 기억한다. 18살로 볼 수 없을 만큼 작았던 아이를, 상처 입고 웅크린 작은 짐승 같은 아이를 기억했다.
그 애는 날 아가씨라고 불렀다. 말끝을 길게 늘이고, 희미한 목소리로. 아가씨……. 그렇게.
말이 없었다. 상대를 위협하기는커녕 본인에게 향해지는 폭력에도 말이 없었다.
‘남매잖아요. 비록 절반뿐이라도, 같은 피가 흐르는데…….’
그 애가…… 무슨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지?
‘어떻게 우리가 닮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 버린 18살의 알렉스는 저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아니지. 그 애는 그렇게 못 해.
그래서 그 애가 그렇게 하길 바랐잖아.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당당하고, 곧고 아름답게 자라는…… 알렉스가 되기를.
내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그리고 자랑스러워했잖아.
그런데 내가 죽인 알렉스는…… 그런 거 하나 할 줄 모르는 앤데.
……그럼 저건 누구야?
하나도 불쌍하지 않은, 누구나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저 소년은 누구야?
“절 기다렸어요?”
알렉스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내 뺨에 키스했다. 닿은 온기와 부드러운 시선이 낯설어 몸을 떨었다.
“누님? 어디 아파요?”
몸을 수그려 나와 눈을 맞춘 알렉스가 내 이마에 손을 뻗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짝, 손을 쳐냈다.
“아…….”
알렉스의 얼굴이 불편하게 굳었다가 착각이라고 여길 만큼 금방 다시 부드럽게 돌아왔다.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오늘은 일찍 돌아가는 게 낫겠네요.”
내가 쳐낸 손으로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린 알렉스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웃었다.
지나치게 근사했다. 어느 한 군데도 불쌍하지 않았다.
“누님?”
나는 입을 막았다. 속에 있는 걸 전부 게워낼 것 같았다. 알렉스가 뻗은 손에 나는 이제 아예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알렉스 로윈은 이제 더 이상 불쌍한 아이가 아니다. 열 살의 불쌍한 알렉스는 열다섯의 근사한 알렉스로 자라났다. 그럼…….
그럼 이전 생에서 죽어 버린 18살의 알렉스는?
그 애는 어디에 있어?
“……집에 데려다주려고 그래요. 이리 와요, 누님.”
완벽해서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근사한 얼굴이었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도, 그 아래에 자리한 푸르스름한 회색 눈도.
“누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하는 알렉스잖아요. 왜요, 이제는 내가 싫어요?”
어리광을 부리듯 웃는 얼굴이 불쌍하게 축 가라앉았다. 나는 그 얼굴에 약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알렉스는 그 얼굴밖에 할 줄 몰랐으니까!
“아니, 아니야……. 알렉스. 그런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웅얼거리는 말에 알렉스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라냈다.
“그럼 이리 와요.”
놀라 고개를 들자 알렉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흐리게 웃었다.
“왜 그래요, 누님. 나 무섭게. 빨리 와서 달래 줘요.”
“난, 그러니까…… 알렉스. 누나는 너밖에 없어. 알지?”
내가 사랑하여, 모든 것을 주어왔던 알렉스는 더 훌륭하고 대단하게 자라나겠지.
그러면, 18살의 불쌍한 알렉스는?
내 앞의 알렉스가 삼 년의 시간이 흘러 18살이 된다고 해도, 내가 죽인 알렉스가 되는 건 아니잖아. 기억도, 경험도, 18살의 알렉스를 이룬 것들을 갖지 못할 텐데.
그럼 내가 죽인 알렉스는 어디에 있는 거지? 영원히, 이전 생에서, 날개 없이 추락한 채로 그대로 죽어 버린 건가?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이리 와요. 오늘은 같이, 일찍 들어가요.”
그대로 사라져서,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그대로 한 번도 행복하지 못한 채, 불쌍하게도 사라진 건가?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
“누님? 뭐라고 하셨…….”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뒤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도, 아름다운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전부, 전부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새롭게 다시 한번 인생을 살면서, 그 애한테 걸맞은 권리를 돌려줄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불쌍한 알렉스는 영원히 그 시간에 갇혀 버린 거다. 나만 기억하는 그 시간에서. 내가 사랑하여 모든 것을 주어온 알렉스는 내 사과를 받아 줄 수도, 날 용서해 줄 수도 없어.
왜냐하면 나는 그 애한테는 잘못한 적이 없거든. 내 잘못은 나만 기억해.
“이자벨!”
나를 잡아채는 손길에 저절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벨, 내 아가씨, 괜찮아. 다 괜찮아…….”
한참 날 달래는 목소리가 잦아들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내가 괜찮게 해 줄게.”
그럴 수는 없어. 괜찮아질 수는 없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지.
나는 결코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 날 용서해 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내가 정말 모든 것을 주어야 했던 알렉스는, 내가 그 애를 추락에서 붙잡지 못했을 때, 영영 놓쳐버린 거다.
그럼 난, 지금까지 뭘 위해 살았던 거지?
뭔가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이자벨은 지금 그녀를 안고 있는 게 시그니티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시그니티는 이자벨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중얼거렸다.
“왜 그래, 벨.”
“나는, 그러니까…….”
뭔가를 말하려고 애쓰던 이자벨은 결국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에게 안기길 선택했다.
“누님!”
그의 목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그니티는 이자벨이 약하게 떨고 있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왜…….”
그렇게 아끼던 동생이잖아, 벨.
이자벨과 하나도 닮지 않아 도무지 정이 가질 않는 소년이 화가 난 얼굴로 성큼 다가왔다. 그는 뒷걸음치면서 입을 열었다.
“다가오지 마, 처남.”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합니까?”
알렉스의 말에 이자벨의 몸이 더 굳었다. 시그니티는 이자벨을 더 꽉 끌어안으면서 답했다.
“벨이…….”
네가 다가오는 걸 꺼리니까?
그는 이 말을 해도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자벨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그녀의 남동생이었다.
그녀는 늘 그 사실을 그에게 주지시켰다.
지독한 우애였다. 그는 늘 질투를 가벼운 장난 아래에 숨겼다. 이자벨을 독점하고자 하는 알렉스 또한, 시그니티는 그저 참았다.
이자벨이 원했으니까. 이자벨에게 가장 소중한 게 저놈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알렉스가 받을 상처가 신경 쓰였다. 왜냐하면 이자벨이 걱정할 테니까.
그는 이자벨이 걱정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실망하는 것도 없기를 바랐다.
“이자벨이 좀 아파.”
시그니티는 달래듯 이자벨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중얼거렸다.
“너한테 옮을까 봐 걱정된대.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 처남. 내가 알아서 잘 데려다줄 테니까.”
“지금 그게 말이 되는……!”
“그럼?”
내가 지금 어떤 헛소리를 지껄여야 하는데? 제기랄.
알렉스의 시선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돌아보지 않는 이자벨을 향했다.
그는 알렉스 로윈이라는 존재가 싫었다. 진심으로. 이자벨의 관심을 모조리 가지고 있는 주제에 한 톨의 관심도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놈.
“……저택에서 기다릴게요, 누님.”
지금 널 안고 있는 게 나라는 건 알아? 저놈 목소리밖에 안 들리지?
한 줌이라도 좋으니까 나도 좀 봐줘, 이자벨.
* * *
알렉스, 나는 네가 미워. 넌 내 모든 걸 빼앗아갔잖아. 내겐 가문뿐이었는데…….
네가 내게 애정을 갈구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볼 때면 나는 구역질이 났어. 넌 내 전부를 빼앗아가면서, 나한테 사랑까지 받고 싶었어?
‘아가씨……. 이자벨 아가씨…….’
‘날 부르지 마! 사생아 주제에!’
나는 내 어머니인 헤더 구드윈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난 처음부터 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았다.
내게 허락된 것, 처음부터 내가 손에 쥔 것, 그게 내게는 가문이었다.
알렉스는 내 전부를 빼앗아갔다.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알렉스, 내가 좋니? 날 위해서 뭐든 해 줄 수 있지? 그렇지? 널 아껴 줄게. 좋은 옷, 음식, 뭐든 아끼지 않을 테니까…….’
가문의 승계권을 버려, 알렉스.
그 애는 내 학대와 간간이 이어지는 회유에도, 절대 가문의 승계권을 쥐고 놓지 않았다.
‘왜! 어째서! 왜 너야! 나도 있잖아, 나도 있는데……. 왜 너야…….’
아득바득 죽어 갈 때도, 내 달콤한 회유에 넋을 놓을 때도, 절대 그 애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미웠다.
어쩌면 그래서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때 더 사랑하기 쉬웠을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전부라 생각했던 것을 비우고, 그 자리에 알렉스를 집어넣었다. 미치도록 갈망하고 원했던,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로 바랐던 대상이, 가문에서 알렉스의 행복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애는…… 알렉스가 아니잖아.
“누님.”
문가에 기댄 채 알렉스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약한,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겠지.
“들어가도 돼요?”
“들어 와.”
나는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던 이불을 걷어냈다. 몸을 일으키자 긴 머리가 부스스 흘러내렸다.
“이제 괜찮아요?”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귓가에 넘겨주는 손에 몸을 움츠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웃었지만, 알렉스의 눈이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응. 괜찮아. 많이 놀랐지?”
“네. 아주 많이요.”
알렉스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내 뺨을 쓸었다. 침대 끝에 앉은 알렉스 무게 때문에 침대가 움푹 파였다.
“다시는 그렇게 아프지 마세요. 정말 놀랐으니까.”
“그럴 거야.”
대수롭지 않은 척 알렉스의 손을 밀어냈다. 가볍게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리고 속삭였다.
“이만 가서 쉬어. 이제 걱정하지 말고.”
침대에 꾸물거리며 누워 이불을 끌어당겼다.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이제 제가 싫어졌어요?”
이불을 잡아챈 알렉스가 그대로 내 위로 올라탔다. 얼굴을 가리거나 피할 수 없게 내 손을 붙잡은 알렉스는 금방 울 것처럼 보였다.
“이제 내가 미워요?”
큰 키.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잘 다듬어진 행동, 말투, 그 전부.
넌 내가 그렇게 키웠어. 그런데 내가 널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아?
“누님…….”
“안 미워……. 누나가 어떻게 우리 알렉스를 미워해.”
“그럼 왜 내 얼굴 안 봐요?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그래놓고. 이제는 아니에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동생.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동생. 내가 키우고, 사랑하고…….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제일 좋아. ……누나는 알렉스밖에 없어.”
“진심으로?”
“응. 누나가 피곤해서 그랬어. 미안해.”
넌 ‘내’ 알렉스가 아니야.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내가 준 감정들이 사라질 수는 없는 거잖아. 그냥 알렉스, 넌 여전히 소중하고, 난 널 여전히 사랑하는데…….
“우리 예쁜 알렉스, 울상 짓지 말고, 웃어야지. 내가 잘못했어. 응?”
네가 ‘내’ 알렉스는 아니잖아. 내 전부는, 내 삶의 이유는 아니잖아.
“우리 알렉스는 웃는 게 제일 예쁜데…….”
스스로 들어도 지친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팔을 뻗자 알렉스가 내 품에 안겼다.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만 이럴게. 오늘만…….
누나가 아주 바보 같아서, 이미 망친 일을 계속 붙잡고 있었어.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인데.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또 울어요?”
“아니.”
내가 울 자격은 없지.
나는 의미 없이 웃었다. 나 자신이 조금 더 싫어졌다. 거기서 더 싫어질 것이 남았다는 게 신기할 만큼.
알렉스는 이내 잠든 이자벨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거짓말.”
“…….”
“거짓말쟁이.”
나한테 약속했으면서.
“이자벨 로윈.”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편.
“당신도 날 버릴 거지?”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자벨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냐. 당신은 날 못 버려. 절대. 버리면 버리기 전에 죽어 버릴 거야. 절대 날 버리면 안 돼…….”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동생 할게요. 버리지 마세요. 나 버리면 안 돼요. 이자벨. 제발.
나 미워하지 마…….
* * *
며칠 동안 모시는 아가씨와 도련님의 미묘한 불화로 눈치를 보고 있는 탓에 저택의 고용인들은 전반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베르디 코웰은 그를 안내하는 하녀의 느릿한 발걸음을 보면서 뭔가 일이 있었다고 추측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디 코웰은 이제 거의 달에 한 번씩밖에 오지 않는 저택 안에서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 로윈은 이제 사실 더 가르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베르디 코웰은 꾸준히 로윈 저택에 수업을 핑계로 왔다.
초상화 속 여자는 긴 금발을 단정하게 올린 채 웃고 있었다. 풍성한 속눈썹 안에 들어 있는 녹안이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헤더 구드윈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건 당장 저택 안에 걸린 초상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없더라도 그녀의 분신 같은 이자벨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헤더 구드윈은 정말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화가의 아부가 아니라 정말 이렇게 찬란한 미인이었을까?
그랬겠지. 그랬을 것이다.
베르디 코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인을 속으로 상상했다.
그는 생을 유지하는 것에 벅차 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궁금함이 들었다.
이 여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로윈 영애처럼 아름다웠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선생님.”
“알렉스.”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초상화에 눈을 떼어내면서 그는 로윈 백작의 어린 시절과 다를 바가 없는 그의 제자를 응시했다.
베르디 코웰은 로윈 백작의 소년 시절을 본 적이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선생님.”
아비보다는 좀 더 음울하고, 차분하면서, 영리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알렉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라면 부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작년부터 천식을 앓기 시작한 그를 걱정하는 알렉스의 말에 베르디 코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알렉스는 괜찮습니까? 성장통이 심할 것 같은데.”
수업을 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볍게 대꾸하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따로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습니다.”
“약을 너무 오래 섭취하면 좋지 않을 겁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몇 번 마른기침을 뱉은 그가 멋쩍은 듯 약을 꺼내 삼켰다. 알렉스는 오랫동안 봐온 그의 약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하겠습니다, 선생님.”
방에 딸린 작은 서재에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났다.
“이런.”
그는 조금 웃었다. 알렉스는 향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로윈 영애의 취향이었다.
그녀는 오래된 것들을 좋아했다.
새 가구를 들이면 뻣뻣한 새 나무의 냄새가 빠질 때까지 가만히 다른 곳에 놔두었고, 방금 꺾은 꽃보다는 말린 꽃들의 희미한 향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알렉스는 그녀의 취향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샬덴에 대해 얘기해 보는 게 좋겠군요. 알렉스. 이미 많이 다루었던 내용이지만, 요새 분위기에서는 더 공부하는 게 득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곧 전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돌았다. 그리고 알렉스는 상단에서 일하면서 그게 단순한 소문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부트 남작 부인은 마치 전쟁이 당연하게 일어날 사람처럼 굴었고, 이자벨은…….
“알렉스?”
이자벨은 날 버리지 않아.
알렉스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괜찮습니까?”
“예. 선생님.”
“그럼 짧게 역사부터 훑고, 현재 정세로 넘어가죠. 역사라기엔 좀 허무맹랑하지만 우리는…….”
마른기침이 몇 번 이어졌다. 베르디 코웰은 당장이라도 목을 피가 나도록 긁어내고 싶은 심정을 참았다.
“……우리의 첫 번째 왕께서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글쎄요. 왕가의 상징이 적발이기 때문일 수도 있죠.”
알렉스는 복잡한 머릿속에 그의 말을 집어넣기 위해 애썼다.
“샬덴은 그들의 첫 번째 왕이 흰 사슴의 핏속에서 태어났다고 믿습니다. 하늘의 신이 샬덴을 위해 내려보낸 신성한 사슴을 보고, 태양신이 질투해 던진 창에 꿰뚫린 그 사슴의 피에서 왕이 태어났다고 믿는 겁니다.”
그는 조금 웃었다.
“건국 신화에서부터 적이 되라고 점지한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이 모든 신화가 역사에 기록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백여 년 전이기 때문에 정말 이게 건국할 때부터 내려온 신화인지는 알 수가 없죠.”
알렉스는 겉으로는 성실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디 코웰은 그가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한숨을 쉬었다.
“특히 이백여 년 전이라면, 가장 사이가 나빴을 때라서 사실 학계에서도 좀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듣고 있습니까, 알렉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는 잘 다듬어진 귀족 영식의 얼굴 위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목격했다. 아주 찰나에 스친 감정이었다.
지독한 불안감.
저게 알렉스와 젊은 로윈 백작의 차이였다.
젊은 날의 로윈 백작은 저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높은 이였다. 그게 태도의 전반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정반대였다. 그는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나 위치에 불안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쥐고 있는 것을 빼앗길 것처럼 불안해하는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젊은 날의 로윈 백작보다 더 귀족같이 구는 주제에 말이다.
“집안에…… 아픈 이가 있습니다.”
그는 아픈 이가 로윈 영애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알렉스가 신경 쓰는 건 이자벨 로윈뿐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무례한 방문을 한 셈이군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알렉스는 만류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 심하진 않습니다. 제가 괜히 신경을 쓰게 만들었군요, 선생님.”
“먼 친척의 부러진 다리보다는 제 자식의 깨진 손톱이 더 걱정되는 법입니다. 마음이 쓰인다면 오늘은 수업을 대신해 아픈 이의 간호를 하는 게 낫겠습니다.”
언뜻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는 알렉스를 타박하는 것 같지만, 말투는 부드러웠다.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디 코웰은 그런 알렉스의 어깨를 머뭇거리다 한 번 붙잡고는 다시 위로했다.
“괜찮아질 겁니다, 알렉스.”
“감사합니다.”
베르디 코웰이 떠난 서재에 가만히 앉아서 알렉스는 생각했다.
괜찮아질까? 무엇이?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도 몰랐다.
이자벨 로윈이 알렉스 로윈에게 거리를 두려 한다. 그녀가 그렇다고 그를 미워하는가?
그건 아니었다. 그녀의 눈짓, 손길 하나하나에 전부 이전처럼 애정이 들어 있었다.
알렉스는 얼굴을 감쌌다.
머리가 아팠다. 왜?
그날 이후로 모든 게 어그러졌다.
이자벨은 알렉스를 피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을 뿐이다.
매시간 달려와 사랑을 주던 주인의 변심에 놀란 개처럼 알렉스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부재를 곱씹었다.
다정한 목소리, 부드러운 손길, 애정 깊은 눈동자,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거리가 벌어졌다.
알렉스는 불안감에 숨이 막혔다. 그는 애써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다른 남매들에 비해 친밀하지 않은가?
철없이 어울렸던 어린 날보다 좀 더 격식을 차리고 서로 예의를 차리는 게 옳다고 그녀가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날 버리지 않을 거야. 그냥…… 조금 변한 것뿐이야.
* * *
“벨.”
가벼운 목소리에 나는 찻잔에 떨어트렸던 시선을 올렸다. 시그는 턱을 괴고 웃으면서 대꾸했다.
“찻잔보다는 내가 더 예쁘지 않아?”
나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여기 좀 봐줘.”
그는 내 미소에 즐거운 듯 환하게 웃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예뻐서 좋겠네.”
“네가 안 봐주면 소용이 없지. 벨.”
턱을 괸 손을 내려놓으며 그는 내 찻잔을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얘한테 지고 싶지는 않은데.”
“걔한테는 이겼어. 걱정 마.”
그가 내 말에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샐리의 목소리가 좀 더 빨랐다.
“아가씨. 도련님께서 저녁 시간에 뵙고 싶다 하십니다.”
샐리의 단정한 목소리에 내가 잠시 침묵하자, 시그가 내 눈치를 살짝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나랑 저녁은 어때? 내 생각에는, 약혼자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의 말투는 산뜻했고,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일부러 나를 위해 그런 제의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알렉스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걸 그가 알았다. 사실 숨길만 한 정신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아냐.”
가볍게 웃어 보이는 시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 번도 내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단지 말하지도 않은 내 의사를 존중했다.
“괜찮아, 음…… 샐리, 알겠다고 전해 줘.”
그의 얼굴에 희미한 걱정의 빛이 서렸지만,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물었다.
“괜찮아?”
“응.”
피하는 것만은 능사가 아니다. 알렉스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동생이지 않은가. 이전 생에 발목을 잡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죄책감으로 알렉스를 괴롭혀서는 안 돼.
나는 결심하듯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무리하지 마, 뭐든.”
시그의 목소리는 늘 산뜻하고 가벼웠다.
그는 무거운 말도, 부담스러운 말도 가볍게 만들 줄 알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끔은 도망쳐도 돼. 세상이 다 안 그래도, 넌 그래도 돼.”
더 진심 같아서 무섭지.
태양을 닮은 노란 눈이 나를 직시했다. 입가에 매달린 웃음은 여전했다.
그는 늘 나를 예외로 삼았다. 세상에 어떤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나만은 예외였다.
가벼운 말, 산뜻한 목소리, 그걸로 가벼워질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전 생부터 이번 생까지 전부, 나는 성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때로 무지는 공포를 부른다. 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조금 겁났다.
“나도 가끔 도망치고 싶었거든. 어디든.”
가늘게 접힌 눈매 위로 붉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더 함께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시그를 돌려보내자마자 알렉스가 나를 찾았다.
“누님.”
알렉스의 부드러운 목소리 뒤에 긴장이 깔려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애에게 웃었다. 이전의 다정했던 모습 그대로.
“점점 더 키가 크는 것 같아, 알렉스.”
“그래도 여전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수 있을 거예요.”
그 애가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머뭇거리다 그 검은 머리를 한 번 가볍게 쓸고 식당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는 그러기에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지.”
내 말에 주춤했던 알렉스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알렉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혀요.”
* * *
내가 알렉스를 팔았던 스무 살의 생일은 이상한 날이었다.
그날의 나는 와인 몇 잔에 쉽게 취기를 느꼈지만,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은 아니었다.
“집어치워. 이게 다 무슨 소용인데!”
흰 드레스에는 최신식으로 동대륙 진주를 장식했고, 평민들이 평생을 벌어도 사지 못할 보석들로 몸을 치장했다. 흔한 성인식의 귀족 영애들이 그러하듯.
“알렉스는? 그 애는 뭐하는데!”
“아가씨!”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이 나를 비싸게 팔아 버리려는 아버지의 수작이라 생각해 분노했고, 어떤 것도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그런 내 분노를 알았는지 성인식 내내 내 눈앞에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녀들이 드레스나 장신구를 날랐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짜증을 내며 로윈의 저택을 활보했다.
저녁에 열린 파티에서도 분노에 뭔가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내 약혼자 후보라는 인간들은 아버지가 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것이 분명했을 테지만,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귀족이 나에게 축하한다며 말을 걸었고, 나는 거기서…….
그를 만났다.
상복을 입은 것처럼 어두운 남색의 연미복을 차려입은 남자의 이미지는 무채색에 가까웠다.
“안녕하십니까?”
묘하게 북쪽의 느낌이 나는 얼굴이 나를 향해 예의 바르게 웃었다. 단정한 미남의 웃음에도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회색 머리카락에 검은 눈. 알렉스의 머리와 눈을 뒤바꾸면 나올 색이 아닌가.
나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연상되는 알렉스의 얼굴 탓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른 입술에 술을 몇 번 더 털어 넣기는 쉬웠다.
“제가 기분 나쁘십니까?”
“아뇨. 그저 누군가가 생각나서요.”
“싫어하는 사람입니까?”
당연하지.
그러나 그 말을 로윈이 아닌 이에게 해서 가문의 명예를 깎을 일이 있겠는가. 나는 말을 애매하게 돌렸다.
“……동생이요. 동생이 검은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지고 있어요.”
그는 내 말에 웃었다. 틀에 박힌 것 같은, 지나치게 예의 바른 미소였다.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남자는 누구지?
묘하게 이국적이면서 차분한 미남이었다. 이런 외모라면 이미 소문이 났어야 한다. 그러나 난 그런 남자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직설적인 내 물음에 그가 또 방긋 웃었다.
“게일, 게일 위버겐입니다.”
“죄송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성이네요.”
“그럼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이자벨 영애.”
별 볼 일 없는 가문이라는 내 비꼼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다. 나는 허락 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에게 불쾌하게 대꾸했다.
“이름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무례하시군요.”
그는 내 말에 사과 한마디 없이 시선을 정원 쪽으로 돌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내뱉었고, 그는 정원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내게 전혀 딴소리를 지껄였다.
“……저분이 동생분이십니까?”
검은 머리에 회색 눈. 로윈 백작의 색을 꼭 닮은 알렉스의 외양에 대한 언급에 나는 그에게 반박하는 것도 잊고 고개를 돌렸다.
종일 그래도 제법 나를 잘 피해 다니던 알렉스가 거기 있었다.
“네…… 저기 있었군요.”
정원 한구석에서 가만히 무릎을 접고 앉아 있는 알렉스는 사실 꽤 처량해 보였다. 그 마른 몸 덕분에도 더욱.
나는 괜히 더 짜증이 나서 난간을 세게 붙잡았다.
“왜 저기 있습니까?”
“……파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라면 그렇죠. 아직 어리고.”
변명처럼 내뱉어지는 내 말은 가벼웠다. 나는 괜히 말을 더 섞기가 싫어 난간에서 몸을 떼고 몸을 돌렸다.
끔찍한 파티나 이상한 남자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알렉스나 찾아가서, 찾아가서…….
“영애. 저와 거래를 하나 하시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내 고개를 돌릴 만한. 어쩌면 그냥 취했을 수도 있었다.
“……거래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검은 눈과 마주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버릇처럼 그가 작위적으로 웃었다.
“우리 거래 하나만 하죠.”
그는 기이한 예술품 같았다. 불쾌한데 시선은 뗄 수 없는 그런 것.
“그게 뭔 줄 알고 제가 거래를 하죠?”
게일은 손에 낀 장갑을 벗으며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전 당신의 몸도, 마음도, 아무것에도 손대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멍청하게 그를 응시하는 나를 향해 웃었다. 의미 없는 미소 끝에 흰 손이 부드러운 뺨을 붙잡았다.
“하나면 됩니다, 아가씨.”
* * *
알렉스가 로윈 저택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배운 것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법이었다. 화가 나도, 슬퍼도, 즐거워도, 그저 웃을 수 있는 법을 배웠다.
홀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선 그러지 말아야 했다.
그는 그걸 충실히 지켰다. 그래서 붉은 머리의 미남을 향해 고요하게 웃었다.
“알렉스?”
데빈의 의아한 목소리에 알렉스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먼저 가.”
바르펜시아 대공자를 한 번 힐긋 응시한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알렉스를 지나쳤다.
상단의 복도에서 마주친 남자는 그의 누이가 곁에 있을 때와 달리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가볍게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말을 섞지 않으려는 듯 짧게 고개만 까딱인 시그니티는 알렉스를 지나치려 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자벨이 없으면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는 데 더 익숙했던 이들이었다.
“이자벨이 부트 남작 부인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말이 있어서.”
시그니티는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지만, 순순히 대꾸했다. 알렉스는 그 여유로운 태도가 싫었다.
꼭 이자벨의 옆자리를 영원히 차지할 사람처럼 굴지 않는가.
그 느긋한 어투도, 친절을 가장한 얼굴도 싫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전부 쥐고 난 사람이 그러할까. 모자람 없고, 부족함 없는. 꼭 그의 누이처럼.
알렉스는 이자벨이 아니었더라도, 바르펜시아 대공자를 결코 좋아할 수 없었을 거라고 직감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차이가 큰 법이었다. 그는 감정을 숨길 수 없을 만큼 그가 싫었다.
트집 잡을 수도 없는 완전한 사내가 이자벨의 옆에 버티고 섰다. 시그니티 바르펜시아는 이자벨을 안락하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영애가 부러워할 혼처였다. 그래서 그는 그 완전함이 싫었다.
모자란 그는 이 완벽한 사내에게 누이를 빼앗길 것이다. 야금야금 이자벨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의 자리를 모조리 빼앗아 버리겠지.
귀한 것은 탐하는 이가 많다. 귀하고 완벽한 이자벨은 꼭 그녀 같은 짝을 골랐다.
“이자벨을 자극하지 마, 처남.”
다 아는 것처럼 그는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그 말에 순식간에 평정을 잃어버렸다.
“이자벨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알렉스 로윈.”
홱. 시그니티의 손이 알렉스의 멱살을 강하게 잡아챘다.
웃음 끝에 짜증스러움이 매달려 있었다. 가까워진 거리 속에서 알렉스는 그 또한 평정을 잃어버릴 만큼 불안하다는 걸 깨달았다.
“누님이라고 불러야지. 네 누이가 얼마나 널 아끼는데, 무례하게.”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알렉스의 눈이 서늘하게 굳었다. 시그니티는 그 눈 안에 스치는 희미한 살의를 깨닫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꼬리 흔드는 개처럼 굴 거면 잘 숨겨. 이자벨이 울기 전에.”
착하고 예쁜 알렉스.
시그니티는 내내 이자벨이 주문처럼 외우는 말과 미소를 기억했다.
알렉스 로윈은 이자벨의 보물이다. 그는 그래서 알렉스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당신이야말로. 이자벨이 울면, 죽여 버릴 거야.”
어린 짐승이 발톱을 세우는 것처럼 혈기와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에는 치기가 없었다. 다 자라지 않은 주제에 적에게 날을 드러냈다.
“알아? 그랬다가는 당신을 죽여 버릴 거라고!”
정제되지 않은 소년의 분노를 그는 평소처럼 웃어넘길 수 없었다.
제 누이에게 향한 집착치고는 과하지 않은가.
“……해 봐.”
시그니티는 금방 제 적수를 인지하고 물어뜯을 준비를 마쳤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시체 같은 무감각한 얼굴에 알렉스는 멱살을 붙잡은 손을 밀어내려 했다. 꿈쩍도 하지 않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 보라고, 알렉스 로윈.”
시그니티는 사랑에 돌아버린 바르펜시아 대공의 아들이었다.
정당한 후계자가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죽음 이외의 방식이 선택된 것은 드물었다. 그러나 대공은 결국 해냈다.
제 아내에게는 모자란 이처럼 헤실거리면서도, 뒤에서는 피를 묻히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대공은 과부와 결혼하기 위해 한때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이들을 살해해야만 했다. 수많은 피를 흘려 얻은 사랑임을 감춘 채 제 사랑에게는 아름다운 것만 보여 주는 것.
시그니티는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대공에게 배웠다.
“네가 죽으면, 이자벨이 울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짤막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까지?”
악에 받친 동공에 낯선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이를 악문 소년을 향해 시그니티는 음울하게 속삭였다.
“언제까지 내가 널 봐줄 것 같아?”
시그니티는 알렉스 로윈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는 이자벨이 우는 게 끔찍하게 괴로웠으니까.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이자벨이 울지 않는다면 그는 뭐든 할 수 있었다.
다소……. 비도덕적인 일일지라도.
그게 그가 배운 사랑이었다.
* * *
“알렉스.”
그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대공자의 말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을 후벼팠기 때문이다.
“괜찮아?”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른 눈치로 데빈은 알렉스의 상태가 이상함을 알아챘다.
“들어가 쉬어. 말은 내가 전할게.”
“……아니.”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더 괴로웠다. 그건 이미 유년에 충분히 겪었던 일이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강박에 가까운 생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그는 생각했다.
만약 이자벨이 그를 떠난다면, 어떻게 하지? 그럼 대공자가 말했던 대로 그를 죽여 버리길, 그래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를 원했다.
그녀는 나를 버리지 않아.
알렉스는 수천 번을 새긴 신념과도 같은 말이 더 이상 그의 불안을 잠재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자벨이 그를 떠나는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 * *
“쿨럭. 컥…….”
붉은 피가 기침 끝에 묻어났다. 베르디 코웰은 손수건으로 손바닥과 입을 훔치며 약을 털어 넣었다.
오래도록 씹어 넘기느라 약의 쓴맛이 입 전체에 퍼졌다. 그럼에도 그는 물 한 모금 없이 약을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그게 끝이야.”
“그렇습니까?”
침실에서 갑자기 들린 말에도 베르디 코웰은 놀라지 않고 수긍했다.
그는 몇 번 마른기침을 더 뱉더니 망설임 없이 탁자 위에 있는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물을 들이마신 그는 한숨을 쉬고 중얼거렸다.
“매번 약을 먹을 때마다 이러고 싶었는데, 마지막에는 하게 되는군요.”
“효과가 떨어질 텐데.”
열린 창문을 닫은 키 큰 남자는 베르디 코웰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지만, 거기에 걱정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한 달 뒤에 죽나, 보름 뒤에 죽나, 그렇게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자네 자유지.”
잿빛 머리를 한 젊은 남자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베르디 코웰은 우울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무던한 말투로 대꾸했다.
“전 실패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네를 폐기할 생각이 없었어. 약은 단지…… 마약성 약으로 바꾸면 일 년은 더 견딜 수 있겠지. 그걸 원하나?”
“아닙니다. 충분했습니다.”
베르디 코웰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건 스물넷의 봄이었다. 그리고 그는 칠 년이나 더 살았다. 솔직히, 그는 그렇게까지 버틴 몸에 약간 놀라고 있었다.
“셰릴이 아이를 낳았어요. 아주 작고 예쁘더군요. 충분했습니다. 정말.”
칠 년 전에 파혼한 옛 약혼자를 입에 담으며 그는 회상하듯 웃었다.
미련은 없었다. 그녀는 그를 잊고 행복하게 살겠지. 그는 그걸 원해서 이 남자와 거래했다.
파혼한 옛 연인은 그를 끈질기게 쫓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죄책감 없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디 코웰은 셰릴 위그의 발목을 잡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남자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지만, 곧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는 장갑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신기하군.”
베르디 코웰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베르디 코웰은 곧 닥쳐올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남자는 기억을 읽었다. 뇌를 헤집고 원하는 대로 기억을 뽑아 갔다.
베르디 코웰은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에 매번 몸을 맡기면서 늘 똑같은 여자를 생각했다.
한때는 평생을 약속한 그의 연인을. 사랑해서 버렸던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