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유년.
다락의 창틀은 녹이 슬어 있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불길했다. 알렉스는 거기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내려와, 알렉스. 착하지…….”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알. 제발.”
처음으로 부른 애칭이었다. 떨리는 다리로 다락 안으로 들어섰다.
“내려오자. 응?”
창이 크다. 새삼 드는 생각에 황급히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제발. 위험하잖아.”
억지로 웃었다.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텅 빈 회색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옛날에는…….”
“응. 알렉스. 내려와서 얘기하자. 다 들어줄 테니까. 내려와서…….”
“당신을 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형이었다.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해도 참을 수 있을 만큼 좋아했죠.”
“다시 시작하자. 내가 잘할게. 누나가 잘할게.”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은 이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고개를 젓는 얼굴이 아름다웠다. 누가 공들여 일부러 만든 것처럼 조형적으로 완벽한 미모는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다.
“내가 지켜 줄게. 응? 다시는 아무도 너한테 손도 못 대게 할게. 우리 좋은 남매는 아니었잖아. 나 때문에. 내가 나빠서.”
“꼭 당신 탓만은 아니었죠.”
“아냐. 내가 잘못했어. 이제부터 내가 잘할 테니까…….”
나는 그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억지로 올린 입가가 떨렸다.
“내가 잘하면, 우리 좋은 자매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알렉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나 하는 희망에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알렉스. 그러니까…….”
“우린 가족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랬죠.”
알렉스는 그대로 뒤로 추락했다. 날개가 달린 것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알렉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애를 붙잡기 위해 몸을 던졌다. 결국 내 몸 또한 아래로 추락했다.
구할 수 없으면 같이 죽기라도 해야지.
나는 눈을 감았다.
* * *
알렉스 로윈은 이자벨 로윈의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오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알렉스는 서자였고, 이자벨 로윈은 적녀였다.
남부의 넓은 평원, 다섯 개의 광산, 휴양지의 별장들과 300년이 넘은 수도 로윈 저택의 정당한 후계자.
그건 이자벨 로윈이었다는 말이다.
로윈 백작과 정당하고 신실한 결합으로 맺어진 구드윈 백작가의 차녀 헤더 구드윈, 둘 사이에서 나온 하나뿐인 딸!
로윈 백작이 어디서 굴러먹던지도 모를 서자, 알렉스 로윈은 정식으로 입적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자벨은 그녀의 위치가 변할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자벨은 그녀가 로윈 백작가의 후계자임을 자신했다. 그녀는 심지어 아홉 살 때부터 데릴사위를 들여야 한다는 것까지 염두에 뒀다. 이자벨은 총명하고 어여뻤으며 때문에 더더욱 확신했던 것이다.
그녀를 낳고 죽은 어머니의 자리가 그 어떤 여자에게도 돌아가지 않았으니, 아버지인 로윈 백작의 후계자는 자기뿐이라고.
무뚝뚝한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이자벨 로윈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손을 붙잡고 들어온 알렉스 로윈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를 닮아 금발에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던 그녀와 달리 알렉스 로윈은 누가 봐도 로윈 백작의 아이임을 알 수 있을 만큼 백작과 닮아 있었다.
나란히 선다면 로윈 백작의 자식은 그녀가 아니라 알렉스 로윈으로 보일 정도였다.
열두 살의 이자벨 로윈은 그것을 참지 못했다. 그녀에게 웃어 보이는 열 살짜리 아이가 그녀에겐 악마처럼 보였다.
아이들이란 때론 어른보다 잔인할 수 있었다.
이자벨은 알렉스의 인생을 시궁창으로 처넣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되었다.
이자벨은 똑똑했고, 로윈 백작가는 그녀를 사랑했다. 로윈 백작이 집안일에 무심한 것도 핑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자벨은 손 하나 쓰지 않고 말로 하녀들을 부렸다. 로윈 백작이 집에 없는 날에 알렉스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기 어려웠다.
육체적인 폭력은 티가 나기에 크게 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하녀들을 시켜 알렉스를 계단에서 밀거나 다락에 가뒀다. 모든 것은 알렉스의 실수로 포장되었다.
이자벨은 그럼에도 그녀에게 독한 말 한 번 못 던지는 그 애가 미웠다.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거면서 피해자인 양 구는 그 애가.
이자벨이 사교계에 데뷔하고, 결혼 적령기에 도달하자 그녀의 학대는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가 있기에 그녀는 로윈이 아닌 다른 성을 달고 혼인을 해 집을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학대 탓인지 열여덟이 되고도 마르고 작은 알렉스를 보며 이자벨은 이를 갈았다. 저 볼품없는 것보다 그녀가 더 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오직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이자벨은 로윈을 빼앗긴 것이다!
내가 바로 로윈의 정당한 후계자야. 저 사생아가 아니라 내가!
그러나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자벨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지, 그녀가 모든 것을 잃고 떠나야 하는 스무 살의 생일이 도래했다.
로윈 백작가에서는 파티가 열렸고, 그 파티에는 그녀의 예비 약혼자 후보 몇이 참석했다. 그녀는 결혼을 곧 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리고 그날, 이자벨은 알렉스를 어떤 남자에게 팔았다. 취했다는 변명조차 통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알렉스는 몇 달 뒤 하혈을 하며 쓰러졌고, 그 애가 유산을 했다는 소문이 저택 안을 뒤덮었다.
여자애였다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앤데도 아버지가 나를 대신해 그 애를 선택했다고. 남장을 시켜서라도 가문을 물려주고 싶어 했다고. 그 애한테.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 제가 미우셨나요? 왜 제가 아니라 그 애였어요?’
로윈 백작은 원망을 토해내는 이자벨에게 그저 그녀의 어머니, 헤더 구드윈이 남긴 유품을 건넸다.
당시 수도 최고의 미녀라 불렸던 그녀의 유품치고는 참 보잘것없었다. 낡은 편지 몇 장과 이국적인 양식의 펜던트 하나.
‘그러니까 백작님……. 전부 다 제 탓이군요. 제 것이 아닌 걸 탐낸 제 죄요.’
왜 아버지가 그녀에게 로윈을 물려주지 않으려 했는지, 이자벨은 첫 줄을 읽자마자 알아차렸다.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울기에는 그녀가 저지른 죄인데, 스스로 피해자처럼 굴 수는 없지 않은가.
「친애하는 루,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난 곧 결혼해요. 날 구해 주러 올 건가요?」
이자벨 로윈은 로윈 백작의 친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정당한 상속자 또한 아니다. 그녀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웃었다.
‘백작님, 저는 이미 알렉스를 잔인하게 망가트렸어요.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제 죄지만, 백작님께서 기여하신 바가 없는 것도 아니죠. 책임을 전가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궁금해서 그래요. 전 남은 생을 수치와 자책으로 보내게 될 거고, 스스로 죄인임을 잊지 못할 거예요. 백작님. 당신을 배신한 어머니에 대한 복수인가요? 당신 자식을, 나를 다 망가트리고……. 그래서 만족하셨나요?’
백작은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자벨은 제가 망가트린 것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녀는 죄책감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것은 죽음까지 안고 갈 내 원죄다.
그래서 이자벨은 그날 알렉스와 함께 추락했다.
그리고 이자벨은 열두 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날에 다시 눈을 떴다.
알렉스 로윈, 로윈의 정당한 상속자, 그녀가 평생을 사죄해야 할 그녀의 여동생과 만나는 날이었다.
* * *
여긴 지옥인가?
나는 눈을 비볐다. 죽은 지 8년이나 된 유모가 왜 내 눈앞에 보이는 건지.
응?
손끝이 뭉툭했다. 아이들의 것처럼.
“우리 애기씨. 절대 잊지 마셔요. 그 더러운 것에게 아무것도 빼앗기면 안 돼요.”
나는 유모의 말에 눈을 찌푸리면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방이었지만 좀 달랐다. 낮은 책상과 침대. 레이스 옷을 입은 꽃병들.
15살 이후로 내 방에서 꽃은 전부 치워 버렸는데?
“백작님의 것은 모조리 애기씨 것이에요. 애기씨는 헤더 아가씨의 딸이니까.”
다짐처럼 중얼거리는 늙은 유모는 소름이 끼칠 만큼 익숙했다.
유모는 죽을 때까지 내게 당부했었다. 절대 빼앗기지 말라고.
어미가 다른 동생에게는 그 어떤 자격도 없다고. 사생아 주제에 감히 가문의 것을 탐내게 두지 말라고.
“그 도둑 새끼를 몰아내셔야 해요. 우리 애기씨, 꼭…….”
“그만해, 유모. 죽어서까지 그 얘기를 해야겠어? 어차피 우리 둘 다 죽었는데.”
지옥이 과거에 후회했던 일들을 다시 보여 주는 건가?
“애기씨! 무슨 그런 말을……! 험한 꿈이라도 꾸셨어요? 그것이 뭐라고 했기에!”
“그 앤 아무것도 못해! 뭔갈 했다면 나겠지! 알잖아, 유모. 걘 제대로 먹지도 배우지도 못해서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던 거!”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아무것도 못 배우고, 못 먹고, 못 쉬게. 그걸 기억 못 할 리가 없잖아…….
“세상에. 애기씨. 그것이 원망이라도 하덥니까? 그래서 그러셔요? 그것은 그래도 싸요.”
“왜? 알렉스가 사생아라서?”
죽자마자 저승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유모와 한 일이 말다툼이라니. 나는 진절머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늙은 유모의 얼굴이 이어지는 내 한마디에 하얗게 질렸다.
“나도 사생아잖아.”
“애기씨!”
“유모는 원래 엄마 유모였으니까, 몰랐을 리가 없으면서. 내가…….”
“아니에요. 애기씨.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애기씨는 헤더 님과 백작님의 하나뿐인 따님이세요. 감히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누가.”
불안한 목소리가 다다닥 달라붙었다. 어린 시절에도 들어 본 적 없는 초조한 목소리였다.
“거짓말. 유모. 이제 와서 거짓말해 봤자 뭐해.”
난 로윈 백작의 친딸이 아니잖아. 적어도 알렉스는 로윈 백작의 딸이기는 했어. 사생아였어도, 로윈 백작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그런데 난 아니야.
난 자격이 없어.
“애기씨. 절대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셔요. 절대…….”
저승은 원래 이런 식인가?
“틀린 소리도 아니잖아. 죽어서까지 유모랑 그 문제로 싸우고 싶진 않아. 내 판단이 틀렸고, 내 잘못이었어.”
“자꾸 왜 죽었다고 하세요! 애기씨마저 없으면 전…….”
“우린 죽었잖아! 유모는 8년 전에! 난 지금!”
나는 울지 않으려 눈에 힘을 줬다. 유모의 경악한 얼굴이 보였다.
“알렉스는 18살이었어. 알아? 유모 걔는 내가 죽인 거야. 내가…….”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젊은 하녀는 방 안에 흐르는 분위기에 주춤했다.
“아가씨. 저녁을…….”
“그것도 있니?”
유모의 말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나는 유모를 사랑했지만, 내 오만이 사실 그녀를 닮았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멍청하기는. 그 사생아도 뻔뻔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냐고!”
늙어 휘청이는 몸을 가지고도 성량 하나는 대단했다. 유모는 로윈 백작에게도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그만해, 유모.”
오로지 내게만 상냥한, 이미 죽고 없는 엄마의 충성스러운 하녀.
“더 이상 그러지 마.”
저승은 피곤한 구석이 있었다. 내 인생에서 어쩌면 나를 가장 많이 사랑했을 유모와 싸우게 되는 일처럼.
“하지만 애기씨. 첫날부터 눌러놓지 않으면 그것이…….”
“첫날?”
진짜 사람을 정신적으로 몰아가기 위해선가? 하필이면 첫날이야?
알렉스랑 만난 첫날? 이날 내가 뭘 어떻게 했더라. 분해서 울다가 유모 품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불쌍한 우리 애기씨. 괜히 나가실 필요 없어요.”
유모가 날 붙잡고 눈물을 훔쳤다. 나는 기력 없는 그녀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악몽을 꾸셨나 봐요.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푹 주무시면…….”
“갈게.”
난 유모의 말을 잘라냈다. 문가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젊은 하녀는 유모의 눈치를 봤다.
“유모는 좀 쉬어. 다리도 안 좋잖아.”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여는 유모보다 내가 좀 더 빨랐다.
“샐리가 내 시중을 들 테니까. 유모는 쉬어도 돼.”
젊은 하녀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지만, 유모보다 심하게 놀라지는 않았다.
“애기씨. 제가 어떻게 애기씨 곁을 떠나서 쉬겠어요.”
“부탁이야, 유모. 난 유모랑 더 싸우고 싶지도 않고. 생각도 복잡하고 오늘 너무 피곤해서. 알잖아.”
대강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할 말도 없었고. 이곳이 환각인지 저승인지 알 수 없는 곳이라고 해도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만족이래도 어때.
진짜 알렉스랑 처음 만난 날처럼 그 애한테 폭언을 쏟아내고 싶지는 않은걸.
“하지만…….”
“유모, 내가 명령까지 해야겠어?”
유모는 내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몇 번 웅얼거리다 결국 못 이기는 척 옆방으로 비척비척 떠났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승은 저승인가 보지. 하필 열두 살. 알렉스와 만나고, 유모가 죽은 해였다. 죽었을 때처럼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면 이 짜증 나는 환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들어와, 샐리.”
샐리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빠르고 능숙한 손길이 내 차림새를 정돈했다.
거울 속에 예쁘장한 여자애가 비쳤다. 물결처럼 흐르는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
나는 엄마를 똑 닮게 태어나서 똑 닮게 자랐다. 그래서 그랬을까, 로윈 백작은. 날 보면서 엄마를 생각했을까.
그래서 내가 미웠을까. 그래서 알렉스를…….
“다 되었어요, 아가씨. 리본은 어떤 거로 하시겠어요?”
“검은색.”
죽었으니 검은색을 입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이제 겨우 적응한 낮은 시야와 짧은 팔다리에 속으로 투덜거리며 생각했다.
“넓은 것밖에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거울 너머로 내 머리를 공들여 묶고 있는 하녀의 얼굴이 비쳤다. 뺨에 주근깨가 뿌려진 하녀는 이제 막 서른이 되었을 법했다. 나는 젊어진 내 하녀의 얼굴에 지금 내가 과거의 한순간에 있음을 실감했다.
언제 끝나지, 이 환상은?
“끝났습니다, 아가씨.”
“고마워, 샐리.”
내 인사에 샐리는 잠깐 침묵했지만 그것도 찰나일 뿐. 곧 웃으며 별 말씀은, 이라는 말을 되돌려 주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샐리에게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짜도 아닌걸.
몇 시간? 며칠? 어쩌면 이 방문을 나가는 순간 난 지옥에서 눈을 뜰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상관없지.
어차피 진짜가 아닐 텐데.
* * *
“아가씨!”
이름 모를 하녀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아침만 해도 진저리치며 이복동생을 싫어했던 내가 갑자기 동생 방에 온다는 건 예상외의 일임을 나도 알았기에 눈만 찌푸리며 물었다.
“그 애는?”
“그게…….”
하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방 안을 쭉 둘러봤다. 새것처럼 깨끗한 방은 분명 컸지만, 열 살짜리 소년 하나가 몸을 숨길만 한 곳은 보이진 않았다.
“어디 있어?”
“방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 나오시질 않으셔서.”
그녀의 손이 침대 아래를 가리켰다. 난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엎드렸다.
“아가씨. 그러실 필요까지…….”
“괜찮아.”
침대 밑은 당연히 어두웠다. 그러나 은회색 눈동자는 그 와중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움직이는 게 더 쉬웠다.
“아!”
망설이지 않고 침대 아래로 손을 뻗자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내 손을 쳐냈다.
“아가씨. 제가 할게요. 일어나셔요.”
샐리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얜 내 동생이야.
“나와 주면 안 될까? 네 얼굴이 보고 싶어.”
나는 손을 알렉스의 손 앞까지 밀어놓고 상냥하게 물었다. 보석같이 예쁜 눈이 경계심을 담고 깜빡였다.
죽을 때도 이랬는데. 물론 알렉스는 그때 내 손을 잡지 않았고, 난 그 애를 붙잡지 못했다.
“알렉스.”
알렉스의 손은 차갑고 거칠었다. 열 살짜리답지 않은 손이었다. 나는 내 손에 톡, 하고 작게 닿은 알렉스의 손을 그대로 꽉 붙잡아 당겼다.
침대 밖으로 그대로 끌려 나온 몸은 아주 작았다. 그 덕분에 나는 그대로 알렉스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뒤통수에 충격이 느껴졌다.
“안녕.”
알렉스를 다치지 않게 꼭 안은 상태로, 나는 그 애에게 인사했다. 몹시 마른 몸과 커다란 눈만 가지고도 알렉스는 참 예뻤다.
“반가워. 너 정말 예쁘구나.”
“아가씨!”
하녀 둘은 날 일으키려 몸을 숙였지만 난 괜찮다고 중얼거리며 품에 안긴 알렉스를 꼼꼼히 확인했다.
기억이랑 똑같네. 얘는 평생 예쁜가 봐.
“너 진짜 예뻐. 너도 알지? 근데 그건 모를걸. 넌 커서도 예뻐.”
나는 알렉스의 양 뺨을 붙들었다. 빼빼 마른 얼굴이 눈만 커다랗게 뜨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예뻐. 그러니까 절대 나한테 상처받지 마. 내가 이상한 짓을 하면 내 머리채를 잡아. 내가 나쁜 짓을 하면 날 계단에서 밀어 버려.”
“……괜찮으세요, 아가씨?”
“응. 아주 괜찮아.”
나는 여전히 알렉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녀들은 내 몸에 손도 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넌 날 미워해도 돼. 그리고 미워해야 하고. 그리고 공격도 좀 하고…….”
머리가 어질거렸다. 부딪친 뒤통수가 욱신거렸다. 알렉스의 예쁜 얼굴이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났다.
“음……. 그래도 난 너 좋아할게. 넌 예쁘니까…….”
저승에서도 기절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이제 이 망할 환각이 끝나는 건가?
“세상에! 아가씨!”
하녀들의 높은 비명을 들으면서 나는 까무룩 눈을 감았다.
여기서 확실히 하자면, 나는 내가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면, 이따위로 알렉스와의 첫 만남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기절했다 깨어나고 나서야 겨우 내가 과거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몹시 후회했다.
진심으로. 갑자기 방에 쳐들어와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고 기절해 버리는 언니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았다고!
예쁘다는 말밖에 한 게 없어. 아니, 물론 알렉스는 예쁘지만. 사실 전생에 싫어했을 때도 얼굴 하나는 참 예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예쁘지만.
그래도 좀 더 다정하게 시작할 수도 있잖아!
* * *
이자벨 로윈은 8년 전으로 돌아왔다.
왜? 어떻게?
나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기적에 한참을 혼란스러워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이런 일이 왜 나한테 벌어졌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신이 기회를 준 것도 아닐 텐데. 차라리 악마가 내 소원을 들어줬다는 추측이 맞겠지.
“이리와, 알렉스.”
뒤에서 따라오는 알렉스의 손을 붙잡았다. 약간 흐려진 경계심이 눈에 서리는가 싶더니 내게 어설프게 웃었다.
“어제 멋대로 방에 쳐들어가서 미안해. 네가 정말 보고 싶었거든.”
알렉스의 손이 긴장한 듯 찼다. 날 올려다보는 눈에 나 또한 긴장해서 되물었다.
“손잡지 말까?”
“아니요…….”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웃었다.
뭐, 악마면 어때. 중요한 건 내게 새롭게 시작될 기회가 주어졌다는 거였다.
“고마워, 알렉스.”
역겨운 죄책감과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해방감이 속에서 들끓었다.
“제가…… 안 싫어요?”
그동안 내가 뭘 하든 순순히 따라오던 알렉스는 뭔가를 묻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 첫 질문에 과거와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응. 너 안 싫어.”
예전의 나는 너를 죽도록 싫어했지만, 지금의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아.
감히 내가 어떻게 널 싫어할까.
나는 로윈 가에서 가장 사랑받은 아가씨였다. 내가 얼마나 이 로윈 저택에서 공주님처럼 살았는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엔 내 명령으로 동정심이 많던 하녀나 하인들도 백작의 아들인 알렉스를 무시했으니 이 저택에서 내 영향력은 고작 열둘의 아이가 가질 것을 넘어섰다.
왕당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로윈 백작 가의 저택이 고작 열둘인 내게 좌지우지되었다는 게 이상할 법도 하지만,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는 이 로윈 백작 가의 살림은 집사인 루크가 맡고 있었고, 실질적인 권한은 내게 있었다.
내 아버지인 로윈 백작에게 아내는 죽은 내 어머니, 헤더 구드윈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로윈 백작가의 성을 가진, 직계의 여자는 오로지 나 하나란 뜻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었으니,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로윈 백작 가의 안주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을까? 그래서 재혼도 하지 않고 남의 아이를 자기 딸처럼 키웠을까? 내 친아버지는 누굴까? 어머니는 왜 내 친아버지와 결혼하지 않고 아버지와 결혼했을까?
나는 로윈 백작의 빈자리를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남의 자식을 친딸처럼 키웠으면서 왜 자기 자식을 그리 무시했을까.
넓은 식탁에는 나와 알렉스 단 둘뿐이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알렉스가 눈에 밟혔다.
스스로 세뇌하듯 되새겼다. 웃어, 이자벨.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럽게. 이상하게도, 무섭게도 굴지 마.
“알렉스, 바깥에 있는 것부터 쓰면 돼.”
나도 놀랄 만큼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부러 가장 바깥쪽에 있는 포크를 집어 든 채로 그 애를 응시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따라 바깥쪽 포크를 집어 들었다.
“미안해. 너무 많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평민 이하의 삶을 살았을 아이에게는 낯설 것이 분명한 커트러리였다.
나는 혹시 부끄러울까 봐 일부러 접시를 치울 한 명의 하녀만 빼고 다 나가게 만들었다.
“아뇨, 괜찮아요…….”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 음, 혹시 싫어하는 음식이라도 있니?”
엉망으로 잘린 머리카락은 아직도 정돈되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자 얼굴이 거의 반은 가려졌다.
알렉스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일부러 천천히, 그리고 그 애가 볼 수 있도록 정확하게 형식을 지키며 식사에 집중했다.
내가 접시에 집중하자, 그나마 긴장이 풀렸는지 힐끗 다가오는 시선이 있었다.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과거로 이미 충분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알렉스를 붙잡았다. 굴러가는 눈동자가 귀여웠다. 열 살이라기에는 또래보다 작은 아이라 내 품에 쏙 들어올 것만 같았다.
“알렉스, 내 방은 이 층 복도 끝에 있어. 문제가 있으면 찾아와도 좋고, 하녀를 시켜서 날 불러도 좋아.”
“……네.”
당황한 눈에는 희미한 경계와 호의, 의심 등이 섞여 있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알렉스가 날 따를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전 생에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니 호의를 기대하는 것도 양심이 없는 일이었다.
“네가 오면 기쁠 거야.”
나는 알렉스를 향해 웃었다. 알렉스는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그 얼굴에 머뭇거리다가 아이의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치워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전 생에서 알렉스가 저택에 온 첫날을 기억했다. 그 애는 식사를 빼앗기고, 온종일 다락에 갇혀야 했다. 나 때문에.
“가족이잖아.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넌 나한테 어떤 것도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네게 주는 그 모든 것들은 마땅한 것들이니. 넌 내게 그럴 자격이 있어, 알렉스.
* * *
“루크.”
내 말에 늙은 집사는 주름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 투명한 시선을 예전에는 참으로 무서워했지만, 지금은 그러기엔 나이가 적지 않았다. 겉으로는 여전히 열두 살이래도 말이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로윈 가문의 내부를 돌볼 자격을 가진 여자는 내가 유일했다.
직계의 여자들은 다 결혼을 했고, 며느리들은 다 죽었다.
내가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가 없으니, 공식적으로 로윈 가문의 안주인은 나였다.
안주인이 해야 할 일들은 모두 루크가 처리했다. 다만 로윈의 충실한 집사는 내가 아홉 살 때부터 내게 형식상으로나마 한 일들을 보고했다.
늘 순서는 같았다. 월요일 오전 10시에 내 방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의자에도 앉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며 그가 처리한 큼지막한 일들에 대해 짧게 얘기하고 나간다.
어찌 보면 내가 당연하게 로윈을 차지할 거라고 믿었던 것은 루크의 탓도 있었다.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심복인 루크가 날 그리 대우했으니.
“알렉스에 대한 거예요.”
나는 침을 삼켰다. 루크가 알렉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전 생의 내 괴롭힘에 대해 루크는 알렉스가 죽기 직전이 아니면 딱히 도와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 편을 들어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애가 이제 저택으로 돌아왔으니까, 선생이 필요할 텐데. 구했나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주인님께서 지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겠지. 원래도 그랬으니까. 로윈 백작은 도무지 집안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백작은 알렉스에게 지독하리만치 무심했다.
“하지만 전 그 애한테 선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십니까? 주인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루크. 지금 내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는 거예요.”
로윈의 노집사는 내게 어디까지의 권한을 허용할까. 이전에는 시험해 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알렉스의 교육은 로윈 백작이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일이었고, 나는 루크가 그 정도는 내 뜻을 따라 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로윈의 안주인으로 여긴다면 말이다.
“알렉스의 선생을 고용해야겠어요.”
8년 전으로 돌아오기 전에도 난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그러나 열둘과 스물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루크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알겠습니다. 후보를 추려 올리겠습니다.”
그 짤막한 답에 나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과거와 다르다. 알렉스는 열다섯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겠지. 좋은 선생 밑에서 질 좋은 교육을 받고, 그렇게…….
“고마워요, 루크. 그리고 내 생각에 알렉스의 하녀로는 애니보다는 신디아가 나을 거예요. 물론 판단은 루크가 하겠지만.”
“예.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오늘은요. 다음에는 좀 더 길게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루크는 이전과 달리 뭔가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잊은 것처럼 평소와 다르지 않게 인사하고 내 방을 떠났다. 나는 긴장했던 몸에 힘을 쭉 뺐다.
자단목 책상의 가장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어 책을 꺼냈다. 책을 펼치자 밤새도록 작성했던 종이가 보였다.
나는 그 팔락거리는 종이를 들고 깊게 심호흡했다. 가장 위에는 알렉스 로윈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람에 흩어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텅 빈 눈이 떠올랐다. 그 애는 내 죄였다.
나는 문득 그토록 증오했던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불쌍한 내 동생 알렉스.
피 하나 섞이지 않았을 테지만, 내 인생은 그 애의 것이 되었다. 나는 그걸 깨달았다.
* * *
알렉스는 침대 기둥에 등을 기대고 몸을 웅크렸다. 그는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대한 방과 색이 들어간 가지각색의 물건들, 입은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부드러운 옷감들과 전부 매끄럽게 다듬어진 가구들.
깨끗한 손을 가지고 질 좋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고, 고성이나 욕설이 오가지 않았다.
그가 살던 빈민굴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의 보호자였던 이모조차도 그에게 욕설과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쓸데없이 손이 많이 가…….’
‘아파요. 이모. 이모!’
이모는 종종 술에 취해 그에게 손을 휘둘렀다.
‘아프기 싫어요! 이모, 아파요…….’
알렉스는 아픈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모가 깊게 취해 이전처럼 그의 목을 졸라 죽인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아프지 않은 아침을 맞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딜 가든 아픈 것뿐이니까.
빈민굴에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남자가 그를 데리고 거대한 저택에 데려갔을 때도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픈 건 싫었다.
‘나와 주면 안 될까? 네 얼굴이 보고 싶어.’
‘너 정말 예쁘구나.’
꾸역꾸역 지어 본 적도 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알렉스는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다. 조금은 덜 아프지 않을까, 하고.
“이자벨.”
알렉스는 등을 기댄 침대 기둥이 체온으로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입으로 아주 조그맣게 그 이름을 따라 불렀다.
그는 처음 그 소녀를 봤을 때, 저렇게 귀한 사람은 그를 싫어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안녕, 알렉스.’
이자벨이 웃자 알렉스는 그 쏟아지는 다정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는 웃음을 판다는 빈민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웃음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팔 수 있는지.
그러나 알렉스는 이자벨의 웃음이라면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자벨은 그에게 다정했다.
왜? 왜 저렇게 대단하고 귀한……
알렉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그녀에게 추가될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름다운.
* * *
나는 알렉스의 이름을 적은 종이 아래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적었다. 그리고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알렉스에게 호의를 표했던 모든 이들을 기록했다.
“……신디아.”
신디아는 그 애를 유난히 동정했던 하녀였다. 동생이 비슷한 나이라 했던가.
나는 그 이름 위에 동그라미를 쳤다. 신디아는 알렉스를 잘 보살펴 주겠지. 바싹 마른 몸을 살찌우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한다면 그 애는 충분히 로윈의 훌륭한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뭐 조금 모자라도 상관없었다. 똑똑하고 순종적인 남편을 골라 붙여 놓으면 되니까.
다만 문제는 그 애의 남장이지.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있는 한 그 애는 남장을 반드시 해야 했다. 같은 여자라면 내가 서열이 더 위였으니까.
“결혼, 결혼이 제일 문제네.”
빨리 내가 결혼해야겠군. 혹시 모르니 그 애가 스무 살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버티다가 내가 다른 가문에 시집가는 게 좋았다.
괜히 그 애가 성인이 아니었을 때 방계에서 서녀랍시고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니까. 로윈 백작이 그때까지 기다려 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버텨 봐야지.
나만 없으면 그 애는 여자라고 해도 충분히 로윈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스물두 살에 결혼’이라고 적고 밑줄을 그었다. 내가 로윈의 성을 버리고 난 뒤라면 그 애는 여자인 것을 밝혀도 문제가 없었다.
잘 풀린다면 내가 그 애의 샤프롱이 될 수도 있겠지. 나는 작게 웃었다.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예쁠 텐데. 남장할 때도 예뻤던 아이니.
정말 사내애였다면 참. 여자 여럿 울릴 외모였다. 뭐, 여자아이여도 이성을 울리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미래에 제법 괜찮은 신랑감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청년들을 떠올리고는, 누가 가장 알렉스와 가장 잘 어울릴지를 고민했다.
윈텀 백작 영식? 바르펜시아 대공자? 에드윈 왕자도 나이대가 비슷했는데…….
아, 나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데릴사위를 들여야 하니 고위 귀족의 후계자들과 연을 맺을 수는 없구나.
그 애는 로윈의 후계자니까. 뭐 결혼이야 좀 미뤄도 괜찮겠지. 아버지도 그때까지는 정정하셨고. 조금 아쉬웠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가문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고,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에 얼굴을 감쌌다. 헐떡거리는 웃음이 울음처럼 새어 나왔다. 전부 달라질 것이다.
알렉스의 로윈 저택에서의 첫날이 달라졌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바꾸고 싶었다. 고개를 들었다. 내 눈이 종이 위를 굴러갔다.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확실히 나는 꽤 똑똑한 편이었다. 천재란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고 있기에는,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지.
종이 위에는 대부분 사교계의 유행이 죽 적혀 있었지만, 간간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들도 쓰여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알렉스는 응당 최고를 가져야 했다.
왕당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귀족? 훌륭한 자리였지만, 나는 미래를 알았다. 당장 5년 뒤, 평민의 신분으로 친히 왕이 입회한 자리에서 작위를 수여 받는 상인이 나온다.
고루한, 다시 말하자면 그들 말 따라 유서 깊은 전통을 보유한 귀족 중에 제법 많은 이들이 무너진다.
사실 지금도 무너지고 있었다. 아를 왕국은 늦은 편이었다. 이미 많은 나라가 돈을 받고 작위를 팔고 있었다.
바야흐로 돈의 시대였다.
전통이 황금에 팔리고, 권력이 금력과 결탁한 시대. 신분제가 황금으로 정해지는 시대가 서서히 오고 있었다.
변화는 한순간이지만, 준비는 한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내 방을 둘러보았다. 로윈의 공주님인 내 방에는 늘 최고급의 것들만 놓여 있었다.
북대륙의 끝에서만 나는 나무로 된 침대 위에는 기리주의 실로 짠 실크 이불이 깔려 있었고, 동대륙에서 나온 진주들이 박혀 있는 리본이 수도의 장인이 조각한 화장대 위에 늘어져 있었다.
생산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거래가 돈을 불렸다. 상인들은 이제 대륙을 무대로 삼았다.
아직까지야 길드와 세력 다툼이 심하다지만, 글쎄. 나는 하녀를 부르며 속으로 과거의 유물들을 비웃었다.
결국 최후에 이기는 건 누굴까?
“아가씨, 세릴 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아 방문을 며칠 쉬어야겠다고 전갈이 왔는데, 답신을 어떻게 보낼까요?”
샐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선생으로 붙어 있는 세릴 드만 남작 부인은 늙은 부인들이 선호하는 전형적인 선생이었다.
어마어마한 혈통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 사뿐히 걷는 발걸음과 순종적인 아내의 덕목을 가르치고, 손목이 드러나는 옷만 입어도 창녀라 비웃는 태도를 가르쳤다.
난 그 여자에게서 6년을 배웠다. 그 여자의 머릿속에 든 지식이 그다지 쓸모없다는 걸 잘 안다는 뜻이었다.
물론 전통적이고 우아하며, 노부인들과 대화할 때는 유용했다. 정확히는 그럴 때만 유용했지.
“이제는 더 이상 올 필요 없다고 전해. 정중하고 우아하고, 죄송스러움을 담아서.”
그래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 내 말에 샐리는 조금 놀란 얼굴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내 팔을 잡고 나와 마주 보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유모를 부를까요?”
샐리는 내가 기억이란 것이 있기 전부터 나를 지켰던 하녀였다. 엄마의 유모이기도 했던 메리가 늙어 나를 거의 돌보지 못할 때부터 내 수발을 들던 하녀라 나는 그녀에게 물렀다.
유모가 가르친 대로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하녀를 부리던 내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대한 하녀.
“괜찮아. 유모는 아프잖아.”
상냥하게 웃는 내 얼굴에 샐리의 얼굴이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하녀에게 일일이 설명을 하거나 웃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신분제의 뒤섞임을 보고 돌아온 내게 신분이란 게 그리 거창한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샐리. 하지만 난 그냥 새로운 수업이 듣고 싶은 거야.”
“그러시군요…….”
샐리는 내 팔을 잡은 손을 놓고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일으켰다.
원래라면 어디에 손대냐며 손을 쳐낼 내가 고맙다는 말까지 입에 담으니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멋대로 손을 대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야. 날 걱정했던 거잖아. 그치?”
평소에 쓰지도 않는 말투와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의외로 자연스럽게 나왔다.
사랑스럽고 안아 주고 싶은 아이를 연기하는 건 쉬웠다. 내가 8년 동안 보고 큰 게 바로 알렉스였으니까.
사람의 온기를 갈구하면서도 차마 손을 뻗지도 못하는 그 애를 보고 있으면 누구나 손을 내밀어 주고 싶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쫓아낸 게 나였고.
샐리는 아마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곧 내 바뀐 태도에 적응하고, 그 상냥한 성정에 따라 내게 더 정을 붙이겠지.
열두 살짜리 아이들의 변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이전의 내 태도를 잊게 될 것이다.
충성스러운 하녀는 어디서나 쓸모가 있었다. 나는 다시 웃었다.
8년은 짧았다. 나는 많은 것을 해야 했다.
알렉스에게 줄 것들을 위해.
* * *
긴장감이 가득한 시선이 내 움직임을 따라왔다.
나는 지금 알렉스의 방에 있었다. 알렉스의 손 하나 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가구들만 가득했지만, 아무튼 알렉스의 방이었다.
내 것과 거의 비슷한 급으로 꾸며진 방은 약간 더 좁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구조가 동일했다.
나야 내 취향으로 이리저리 배치를 바꿨다지만 알렉스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기에 묘하게 사람 냄새가 나지를 않았다.
“뭐하고 있었어?”
“방 구경…… 이요.”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아이는 불안스레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머리에 알렉스의 하녀로 배정된 신디아와 날 따라온 샐리를 불렀다.
“머리 좀 다듬어야겠다. 신디아, 가위 좀 가져와. 샐리는 간식 좀 가져오고.”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어깨와 고개가 파득 위로 치솟았다.
신디아와 샐리가 나가고, 나는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인 알렉스의 이마에 내 이마를 부딪쳤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방황하다 내 눈을 마주했다.
“구경은 잘했어? 네가 원하면 바꿔도 돼.”
회색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그 애의 눈이 텅 비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해 웃고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알렉스의 시선이 따라왔다. 문득 잡은 그 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렉스. 나한테 방을 소개해 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음. 저 탁자는 어때? 난 흰색이 좋아서 흰색 탁자로 바꿨는데, 알렉스는 어때? 저 색깔이 좋아? 저 모양이 좋아?”
뭐라도 대화를 하고 싶어 내뱉은 말에 알렉스의 입이 우물거렸다. 입을 몇 번이고 벌렸다 닫을 동안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다 좋아요.”
멍하니 풀려 있는 동공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게 묘하게 현실감이 없어서, 나는 그 애의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가 다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으로 덮였다. 아직 자잘한 상처들이 얼굴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욕심이 없구나, 알렉스는.”
나는 아쉬운 말투로 덧붙였다. 많아도 상관없는데.
“아가씨.”
신디아의 목소리에 나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빠르게 바닥에 천을 깔고 의자를 위에 올렸다. 나는 알렉스를 의자 위에 앉혔다.
신디아의 섬세한 손길이 알렉스의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여전히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꼭 주인을 쳐다보는 강아지 같아서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머리를 다듬은 알렉스는 마르고 작은 몸을 하고 있어도 귀한 집 아이처럼 참 예뻤다.
* * *
엘리자베스 부트. 부트 남작가의 과부. 남작인 남편이 죽고 동생이 작위를 이어 부트 남작가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여자를 나는 내 선생으로 낙점했다.
사교계에서 불쌍하다고 언급이나 한 번 되면 다행일 존재감을 가진 여자를 굳이 고른 이유는 하나였다.
“……그럼 윌피어의 소네트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영애?”
온통 회색 일색인 드레스에 회색 장갑까지 낀 서른 즈음의 여자는 차림만큼 우울한 안색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차분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단아하고 차분한 느낌이 우아하게 다가왔다.
“이미 끝난 부분이에요, 부인.”
내 공손한 대꾸에 살짝 눈썹을 추켜세운 여자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세뮈의 자유시부터 시작하도록 하죠.”
영애들이 흔히 배우는 간단한 예법과 교양 있는 예술가들의 시와 음악. 나는 그딴 것들은 이미 신물 나게 배웠다. 그걸 배우려고 그녀를 데려온 게 아니었다.
“그것도 끝냈답니다.”
“영애는 진도가 빠르군요. 하지만 가끔은 복습도 괜찮죠.”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듯 보였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야 그럴 것이다. 지금 그녀는 한창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을 테니까.
“반복되는 수레바퀴들을 부수는 것이야말로 시인들의 본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콥의 ‘열두 신화’.”
내가 읊은 구절에 그녀는 짤막하게 내가 인용한 시의 제목을 읊조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영애는 충분히 총명하고, 복습이 필요 없겠군요. 그럼 제가 어디서부터 가르쳐 주기를 원하시나요?”
“처음부터요.”
공손한 태도로 나는 나와 마주 앉아 있는 그녀를 응시했다. 단정한 얼굴이 작게 찌푸려졌다.
나는 이 여자의 미래를 알았다. 미래에 이 여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리 부인.”
여자의 단정하고 차분한 얼굴이 깨졌다. 사실 난 이편이 더 익숙했다. 오만하리만치 자기애가 강한 여자의 얼굴이.
진주 여왕. 아를 왕국을 휩쓴 진주 열풍에 단박에 사교계의 유명 인사로 떠오른, 동대륙 무역의 큰 손.
내 눈앞에 있는 여자는 변화하는 시대에 뛰어들어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남긴 이 중의 하나였다.
시집올 때 가져온 지참금을 모조리 투자해 상단을 만들고, 마침내 동대륙산 진주에 대한 독점권을 얻어냈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은 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여자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자기 능력으로 거길 헤쳐 나왔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아셨죠?”
엘리자베스의 기색이 잠잠해졌지만, 말투는 이전보다는 날카로웠다.
귀족이 상단 일에 관여하는 건 아를에서 품위 없다 여겨지지만 불법도 아니었다. 가난하다 알려진 부트 남작 부인이라면 할 법한 일이었지.
하지만 난 그녀가 단순히 가난에 벗어나려 그 길을 택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 상단이 엘리자베스 부트의 야망이었다.
“저도 그 바닥에 흥미가 있어서요, 부인.”
“귀한 영애가 관심을 가질 곳이 아니죠. 영애, 제 생각엔.”
“제 생각엔, 부인께서는 제 흥미를 반겨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펴 놓은 시집을 접고, 그녀의 손에 있는 시집도 빼앗아 접었다.
엘리자베스는 내 행동에 가만히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처럼 웃었다. 조금쯤 오만해 보이게.
“전 이자벨 로윈이에요, 부인. 로윈의 부는 말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아버지의 것이니. 하지만 부인께서 제 어머니를 아신다면, 헤더 구드윈의 지참금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시겠지요?”
어머니의 지참금은 오로지 나에게 상속되어 있었다. 그건 아버지도, 루크도 손댈 수 없는 내 것이었다. 구드윈 백작은 무리해서라도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보냈다.
“로윈의 다섯 개의 광산 중 하나는 제 것이죠, 부인. 전 돈이 많아요. 자금난에 허덕거리는 부인의 상단에 기름칠을 해 줄 수도 있죠.”
“영애는 열두 살이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거래 상대를 탐색하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나는 똑바로 마주했다.
“돈은 신분도, 나이도, 성별도 가리지 않죠. 열두 살짜리의 황금과 서른 살짜리의 황금은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이 그 바닥을 골랐으면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던 그녀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나라면 날 잡겠어요. 멍청한 영애라면 더 좋지 않아요? 돈만 빼먹고 버리기가.”
“영애는…… 선생이 필요해서 절 부른 게 아니군요.”
“난 동업자가 필요해요. 그리고 부인은 열두 살짜리를 동업자로 삼을 만큼 절박하고.”
침묵이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은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눈이 깜빡였다. 진주 여왕의 입술이 열렸다.
“좋아요. 앞으로 절 리지라고 불러도 좋아요, 영애.”
“리지.”
나는 그녀의 애칭을 속삭이며 웃었다. 이 여자의 성공은 이제 나와 함께하겠지. 시작점이 달라진다면, 이 여자는 얼마나 더 능력을 뽐낼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엘리자베스와의 거래를 성공한 기쁨에 나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뱅그르르 돌다가 문득 알렉스가 몹시도 보고 싶어졌다. 그 애한테 줄 선물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까.
“알렉스!”
나는 품위 없게 알렉스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신디아와 탁자에 마주 앉아 있던 알렉스는 내 방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디아는 화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
알렉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려 했지만 내 손이 더 빨랐다.
나는 알렉스를 번쩍 안아 들어 품에 꽉 끌어안았다. 첫 포옹은 가벼웠다.
“뭐하고 있었어?”
내 품에서 알렉스는 얼굴이 빨개진 채 작게 속삭였다.
“글자 공부요.”
짧은 동화책이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신디아는 내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하녀가 주인을 가르치는 것은 무례였다. 그러나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것도 관심의 일종이 아닌가.
“선생님도 안 왔는데 벌써부터 공부라니, 알렉스는 똑똑하구나.”
나는 아이를 다시 의자 위에 내려 주면서 기쁨에 상기된 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쓸고, 나는 신디아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신디아는 조용히 뒤에 시립했다.
“이 동화는 재밌니? 어디가 마음에 들어?”
“여기요.”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고 공주와 결혼한다는 흔한 동화였다. 알렉스는 용사가 신탁을 받는 장면을 짚었다.
“거기가 제일 좋아? 왜? 여기가 제일 예쁘지 않아?”
나는 용사와 공주의 결혼식이 그려진 마지막 장을 펼쳐서 보여 줬지만, 알렉스는 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피식 웃고 그 애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이러다 습관이 되겠는데.
“네 의견이 있는 건 좋지. 그건 좋은 태도야.”
그 애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기분이…… 기분이 좋아 보여요.”
“그래? 오늘 새로운 선생님이 왔거든. 좋은 분이셔. 나중에 알렉스한테도 소개해 줄게.”
“선생님…….”
알렉스가 되씹는 단어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렉스는 어떤 선생님이 갖고 싶어?”
내 물음에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린 알렉스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알렉스가 뭘 좋아하는지 계속 물어왔지만 늘 대답은 비슷했다.
“모르겠어요.”
“그럼 누나가 정해도 될까? 하지만 마음에 안 들면 꼭 말해 줘야 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가진 것이 있어야 구분할 수 있는 것들.
나는 알렉스가 좋아하는 것이 더 많고, 싫어하는 것도 많기를 원했다. 하도 응석을 받아 주어 버릇없는 아이로 커도 괜찮았다.
애도 낳아 본 적 없는 주제에 육아하는 기분이었다.
알렉스 로윈이 첫 번째 선생을 가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베르디 코웰. 어느 남작 가문의 차남이라는 사내는 온화한 외모를 가진, 수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 시인이었다.
나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꽤 유명한가 보지.
아무튼 선생의 선별 조건은 알렉스를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인물이었고, 나는 거기에 그가 충분히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나는 엘리자베스와의 상단 일로 몹시 바빠져 거기에 대해 잊어버렸다.
하지만 알렉스와 아침과 저녁은 반드시 함께했으므로 그 아이의 나아지는 예법이나 좀 더 명확한 고급 어휘들이 구사되는 것에 괜찮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고, 나는 엘리자베스를 핑계 댄 채 자주 집을 비웠다. 이 때문에 집안 돌아가는 꼴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알렉스는?”
“지금 방에 계십니다.”
내가 얼마나 알렉스를 아끼는지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는데, 설마 그 애를 건드릴 고용인들이 있을 줄은 몰랐지.
“자…… 잘못했습니다, 아가씨.”
바닥에 납작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떠는 하녀는 귀족 가문에서 온 하녀도 아니었다.
샐리는 로윈 가문 휘하 자작 가문의 사람이었고, 신디아는 그보다는 못하지만, 기사의 딸이었다.
내 눈앞에 엎어진 하녀는 그 고루한 푸른 피가 하나도 흐르지 않은 여자였다.
로윈 백작의 고용인 중에 본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귀족 가문 출신의 하녀들뿐이었다. 잡일을 하는 하녀들은 별채에서 지내며 직접적인 수발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별채에서 일하는 하녀들이라 할지라도 외부에서는 대단한 취급을 받았다.
로윈 백작가는 커다란 가문이었고, 하녀들 또한 가려 뽑는 편이기 때문에 부유한 평민들 사이에서도 제법 경쟁이 치열한 편이었다.
때문에 수잔은 로윈 백작가에 일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일하기 위해 잘 꾸며진 정원이나 저택에 발이라도 디딘 날이면 스스로가 귀족이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흔한 평민들과 스스로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가씨는 지나치게 마음이 여리신 것 같아. 나라면 절대 용납하지 못했을걸.’
‘하긴 수잔. 반쪽도 반쪽 나름이지. 예쁘긴 하지만…….’
‘글쎄. 넌 그 손 봤니? 나보다 거칠더라. 도련님인데도 말이야.’
끔찍하게 밉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자부심을 갖던 로윈의 작은 티끌을 보는 기분일 뿐이었다.
그 감정이 좀 심화된 것은 누가 보아도 초라하고 작았던 아이가 점점 갈수록 귀족의 태가 난다는 것에 대해 조금 질투심이 생겼을 때였다.
질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는다면 그토록 보잘것없는 아이도 귀족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수잔, 그녀가 아니라 그 애가 선택받은 이유가 뭐지?
알렉스 로윈은 누구나 돌아볼 만큼 예쁘게 생겼다. 그건 눈 달린 인간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또래보다 마르고 작기는 했어도 그래서 오히려 인형같이 예뻤다. 로윈 백작을 닮았으니 커서는 선이 굵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먼일이었다.
알렉스를 탐탁지 않아 하는 하녀들도 그 미모에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다.
이자벨이 예쁘다, 예쁘다, 입에 달고 다니는 게 빈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호언장담했다.
‘알렉스는 정말 나중에 고개만 돌려도 남자들이 쓰러질 거야. 저 얼굴을 봐. 이건 기적이야.’
하녀들은 도련님이 남자를 쓰러트릴 필요가 뭐가 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빈민굴에서 살다 온 소년처럼 보이지 않았단 뜻이다.
차라리 볼품없었더라면 동정이라도 했을 텐데. 알렉스는 기가 질릴 만큼 예뻤다. 마치 하녀들과 태생부터 전혀 다른 신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수잔은 그 점이 싫었다. 절반은 그녀보다 천한 피를 가진 주제에. 너무 쉽게 로윈 저택에 들어섰고, 사랑받았다.
‘그래 봤자 사생아잖아…….’
오만하고 까다로운 아가씨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고, 전에 없던 상냥함을 그 소년에게 퍼부었다.
“수잔. 왜 그랬지?”
어린 아가씨는 수잔보다 아름답고 부유하며,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손님방을, 방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아가씨.”
“그런데? 왜 알렉스가 다쳤지?”
하지만 그 소년은 아니지 않은가? 그건 사생아인데, 귀족이 아니잖아.
“정리 중이라, 그래서 위험해서 나가셔야 한다고…….”
“그래서 밀었니? 안 그래도 작은 애를?”
밀지 않았다. 맹세코 그렇게 힘을 주지도 않았다. 그 소년을 싫어하긴 했어도 수잔은 그만한 용기도 없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정말 아니에요!”
어깨를 살짝 건드리는 수잔을 올려다보며 소년이 웃었다. 그리고 발을 헛디디며 비틀거렸다.
그리고…… 부서진 가구 위로 작은 몸이 쉽게 쓰러졌다.
붉은 피가 터지고 나서야 수잔은 정신을 차렸다. 어깨를 건드릴 때 그녀가 힘을 줬던가?
* * *
나는 엎드려 있는 하녀를 조용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전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사람 하나를 미치게 만드는 건 쉬웠다. 권력을 갖고 있다면 더더욱.
이전의 내가 알렉스에게 했던 것처럼.
이 하녀 하나를 처리하는 건 내게는 몹시 쉬운 일이었다. 내 소중한 사람을 건드렸으니까. 이 여자는 응당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눈앞의 하녀를 짓밟는 것이 꺼려졌다. 양심? 내게 그런 게 있었나?
있었으면 알렉스가 그렇게 되었을 리가.
“실수였니?”
“네, 네! 아가씨. 전 절대 도련님을 민 적이 없어요……. 제발. 아가씨.”
엎드린 꼴이 초라했다. 나는 그제야 날 불편하게 만들었던 이유를 찾아냈다.
“창고에 하루 가둬 놔. 처벌은…… 규정대로 해.”
“아가씨?”
“내보내. 보기 싫어.”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나는 내가 저 하녀를 통해 알렉스를 투영해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짓밟기는 쉬웠다. 나는 본래 그다지 양심이 있는 인간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누군가를 짓밟을 때마다, 알렉스가 생각난다면. 그 애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리면.
나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떨렸다. 죽기 직전 알렉스의 창백한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떠다녔다.
“샐리. 알렉스는 어디 있어?”
누굴 괴롭게 할 수가 없어.
이번 생에 나쁜 년은 못 될 팔자인 게 틀림없었다.
* * *
알렉스는 푹신해서 몸을 집어삼킬 것 같은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배에 감은 흰 붕대를 응시했다.
“걱정 마세요, 도련님. 상처가 생각보다 얇아서 흉이 지지 않을 수도…….”
소년의 작은 주먹이 붕대 위를 내리쳤다.
“도련님!”
신디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스스로의 배를 가격하는 알렉스의 팔을 붙잡았다.
“신디아.”
신디아의 팔을 밀어낸 소년은 그녀를 향해 웃었다.
“도련님. 이게 무슨…….”
귀족들이 그러하듯,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매끄러운 웃음이 알렉스의 얼굴에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오싹한 기분에 휩싸여 중얼거렸다.
“그만하세요, 도련님. 왜 그러세요. 제발. 그만…….”
“손대지 마.”
몇 번 더 소년의 주먹이 스스로의 상처를 가격하자 깨끗했던 붕대에 붉은 피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가씨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도련님……. 제발.”
알렉스는 그 말에 반응하듯 몸을 움츠렸다. 신디아는 기민하게 그 사실을 파악하고 애원했다.
“아가씨가 곧 오실 거예요. 도련님 걱정 많이 하시는 분이시니까. 도련님이 자해하신다는 걸 알면…….”
“알아.”
신디아의 말을 자른 알렉스가 손을 완전히 멈췄다.
“나도 자해에는 취미가 없어.”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것이었지만, 천진난만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건 우리끼리 비밀이야, 신디아. 그렇지?”
뒤쪽에서 문이 급하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알렉스는 신디아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누나는 모를 거야.”
신디아는 문득, 그 소년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렉스!”
소녀의 비명 같은 부름과 함께 씻은 듯이 사라진 미소를 보면서, 신디아는 분명 알렉스가 웃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 피가. 피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이자벨이 알렉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심하지 않다고 했는데…….”
신디아는 늘 그렇듯이 조용히 한 발자국 물러났다.
도련님은 왜 하필 가장 날카로운 가구 위로 넘어졌을까?
정말 실수였을까?
하지만 신디아는 충실한 하녀의 본분답게 의문을 삼켰다.
생각보다 많은 피가 나왔다. 나는 깨끗한 붕대에 배어 나오는 피를 보고 머릿속에 멍해졌다. 흰 셔츠를 적시는 붉은 피.
작은 상처라고 했잖아. 그렇게 깊진 않은 상처라고. 그런데 왜 피가 아직까지 나는 건데?
“……이게, 지금, 의원을, 의원을 부르자. 피가 지금…….”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머릿속에서 창밖으로 떨어지는 알렉스의 모습이 되풀이되었다.
알렉스가 죽으면 어떻게 해?
“……저 걱정해요?”
“빨리 의원 불러! 당장 달려오라고 해!”
알렉스가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움직이지 마. 알렉스. 제발……. 상처가 더 벌어질지도 모른단 말이야. 너……! 아냐. 아냐. 너 싫어서 손 뺀 거 아니야, 알렉스.”
나는 황급히 알렉스의 손을 붙잡았다. 알렉스는 상처받은 얼굴로 내가 빼낸 손을 움츠리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걱정돼서 그랬어. 진짜 미안해. 알렉스.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저 안 싫어해요?”
“응. 안 싫어해. 너무 좋아해. 그러니까 나 무섭게 움직이지 마. 가만히. 그래. 가만히 의원이 올 때까지…….”
알렉스가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나는 하얗게 질렸다. 제발 힘주지 마. 알렉스. 상처 벌어진단 말이야.
“그러지 마. 알렉스. 위험해. 착하게 가만히 있자. 응? 제발.”
“그렇게 안 아파요.”
“그건 네 생각이고! 아니야. 화내서 미안해. 그런데 잠깐만 가만히 있자. 응?”
나는 억지로 붕대에서 눈을 돌렸다.
“의원은 언제 오는 건데! 다시 확인해 봐. 샐리. 빨리!”
화다닥 뛰어나가는 샐리의 뒷모습을 초조한 눈으로 지켜봤다. 알렉스가 붙잡은 손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진짜 내가 걱정돼요? ……누나?”
세상에. 나는 처음으로 들어본 제대로 된 호칭에 굳어 버렸다.
“내가 이자벨의 자리를 빼앗았는데도?”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넌 아무것도 빼앗은 거 없어. 오히려 내가 네 자리를 빼앗은 거야.
“아냐. 절대로.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듣지 마.”
“난 사생아잖아요. 내가 없었으면…….”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지? 넌 로윈 백작이 정식으로 입적한 아들이야!”
내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했다.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에 알렉스가 입을 다물었다.
“네가 어디서 살았든, 어떻게 살았든 누구도 널 사생아라고 불러서는 안 돼.”
“그게 진실이라고 해도요?”
“진실은 네가 다음 대 로윈 백작이 될 거라는 사실이지.”
“이자벨을 대신해서요? 내가 없으면 전부 이자벨 건데…….”
귀한 것. 좋은 것. 사람들이 욕심내는 모든 것이.
“난 네가 있는 게 좋아, 알렉스. 네가 다 가져가면 어때. 난 네가 있는 게 더 좋은데…….”
어차피 내 것이 아닌 것들. 로윈 백작의 자비로 유지되는 위태로운 유리 성.
내 인생에서 거짓이 아니었던 게 있었던가?
어머니도 아버지도, 가문도, 그 어떤 것도 거짓이 아닌 게 없었다.
아무것도 진짜 내 것이 아니야.
심지어 알렉스, 너조차도 나와 피 한 방울이 섞이지 않는 남이지.
거짓이 아닌 건 전생으로부터 내려온 내 죄뿐이야. 내 모든 건 널 위한 것이고, 그건 내 이번 삶의 의무지.
“난 네 권리를 위해 싸울 거야. 알렉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네 편에는 내가 서 있을 거라고.”
“……왜요?”
“네가 사랑스러워서. 내 동생이라. 우리가 가족이니까.”
알렉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자벨은 착해서…… 내가 아니라 누가 동생이라고 갑자기 찾아와도…… 똑같은 말을 했을 거죠?”
나는 맞잡은 손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라서 특별한 거다.
내가 죽인 알렉스라서.
“너라서 특별한 거야. 알렉스. 네가 동생이라고 나타나서 특별해.”
나는 날 응시하는 알렉스를 향해 비밀을 말해 주듯 작게 속삭였다.
“난 착하지 않아. 너라서 착하게 구는 거야.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나한테만?”
“응. 너한테만.”
알렉스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나는 상처가 터질까 무서워 약한 힘에도 딸려 갔다.
“누나는 나 안 버릴 거죠?”
그 말에는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 일시적인 관심과 금방 사라질 애정일까 봐 겁내는 알렉스를 향해 나는 선의의 거짓말을 속삭였다.
“가족을 어떻게 버려. 우리가 떨어져도 우리가 가족인 걸 부정할 수는 없잖아.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거야.”
알렉스가 예쁘게 웃었다.
“아버지가 결국 널 데리고 온 것처럼. 가족은 그런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알렉스.”
난 널 못 버려.
졸음이 쏟아질 때까지 나는 몇 번이고 알렉스에게 속삭였다.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기 전까지. 어쩌면 잠꼬대로도.
알렉스는 그를 위로해 주다 잠에 빠진 이자벨을 침대에 조심히 눕혔다. 신디아의 시선이 와 닿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커다란 깃털 베개에 작은 머리통을 올려놓고 흐트러진 금발을 조심조심 정리했다.
“도련님.”
“조용히 해. 누나 깨.”
신디아의 시선이 방황하는 듯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나. 누님. 이자벨…….”
꺼질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알렉스는 기도하듯 속삭였다.
알렉스는 감긴 눈의 속눈썹을 천천히 쓸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잠꼬대 같은 앓는 신음과 함께 작은 손이 알렉스의 손을 붙잡았다.
알렉스는 붙잡힌 손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움찔거리는 살갗의 움직임도, 맞닿은 피부에 전해지는 온기도, 전부 처음 갖게 된 것들이었다.
“알렉스…….”
잠결에 속삭이는 그의 이름이 달았다. 알렉스는 천천히 웃었다. 처음으로 갖게 된 하나밖에 없는 그의 가족.
그의 상처에 울어 주고 그의 존재에 기뻐하는 사람.
빈민굴에서는 소중한 것은 쉽게 빼앗기는 것이었다. 남에게 소중한 것은 타인의 눈에도 귀해 보였으니까.
알렉스는 이자벨의 애정을 쉽게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애정을 갖고 싶은 건 알렉스만이 아닐 테니까.
빼앗긴 사람이 잘못한 거였다. 정말 소중했다면 빼앗기지 말았어야지.
알렉스는 자신의 이마를 이자벨의 이마에 마주 댔다.
그는 웃었다. 이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렉스를 사랑한다. 가족으로 여긴다.
붙잡은 손을 좀 더 꽉 쥐었다. 알렉스는 착한 동생이 될 자신이 있었다. 이 온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나 버리지 마요. 절대.”
내가 다쳐서 당신은 울었어. 내 생각만 하면서.
내가 망가지면 당신은 울 거지?
알렉스는 처음으로 죽는 것보다 아픈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 * *
부풀린 치맛단과 소매는 이미 유행이 한참 지났다. 대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아니고서는 이제 거의 입지도 않는 옷이었다.
“나 예뻐?”
“완벽하세요, 도련님. 도련님만 한 미인은 다시 없을 거예요.”
“누나도 예뻐할까?”
짧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소년이란 걸 도무지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예쁜 아이가 수줍게 뺨을 붉혔다.
“당연하죠. 누더기를 걸치셔도 예쁘다고 하실걸요.”
거울 앞에 서서 빙그르르 몸을 돌린 알렉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짧은 머리를 응시했다.
이자벨은 알렉스의 짧은 머리를 늘 아쉽게 바라봤다.
역시 길러야겠다.
콩콩.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알렉스? 다 입었어? 누나 들어가도 돼?”
“응. 누님, 들어오셔도 돼요.”
의젓한 말과 어울리지 않는 노란 드레스에 신디아는 고개를 돌렸다. 가문이 돌아가는 꼴이 참 보기 좋았다.
“세상에. 우리 알렉스. 어쩜…… 어쩜 이렇게 예쁘지?”
늠름하게 작은 동생의 허리를 안고 뱅글뱅글 돈 이자벨은 사뿐히 알렉스를 내려놓았다.
“정말요?”
환하게 웃는 알렉스는 누가 봐도 예뻤다. 보통 열 살짜리 소년이라면 드레스를 입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난리를 부렸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그저 이자벨이 예뻐해 준다는 것에 만족해 자기가 나서서 드레스를 골라 입을 정도였다.
“세상에서 제일.”
“머리…… 기르면 더 예쁠까요?”
“기르고 싶어?”
둘을 지켜보던 신디아는 알렉스가 여기서 머리까지 기르면 어떤 꼴이 될지 두려워졌다.
애초에 아가씨는 왜 갑자기 등장한 남동생을 여장시키는 취미를 들인 걸까. 그리고 왜 도련님은 거기에 기뻐하는 걸까.
“누님이 그게 더 예쁘다고 하면 기를게요. 기르고 싶어요.”
“예쁘긴 하지만…… 불편할 텐데. 좀 더 크고 길러도 되고.”
까만 머리통을 슬슬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 끝에 이자벨이 희미하게 혼잣말했다.
“같은 머리 모양이면 자매 같긴 하겠다…….”
남동생과 자매처럼 보이는 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디아와 샐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 깊은 공감을 나누고 고개를 돌렸다.
“가족처럼 보일까요? 나도 누님처럼 금발이나 녹색 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넌 지금 이 색깔이 제일 잘 어울리고 예뻐. 알렉스.”
“누님이 더 예뻐요.”
알렉스는 몹시 사랑스러웠고, 이자벨은 그런 알렉스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알렉스는 말도 예쁘게 하지.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예쁘고. 어떻게 시집…… 이 아니라 결혼을 시킬까.”
뭘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보아도 다정한 자매처럼 보이는 남매였다.
“누나가 꼭 좋은 짝을 골라 줄게. 알렉스는 어떤 사람이 좋아?”
“누님 같은 사람이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목소리에 이자벨은 더 사랑스러움을 느꼈는지 알렉스의 양 뺨을 붙잡고 쪽쪽거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로윈 백작가의 풍경이었다.
“누님?”
알렉스의 미래 신랑감에 대한 고민에 빠진 내게 쪼르르 다가와 묻는 알렉스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예뻐. 알렉스. 이번에는 이 드레스를 입어 볼까?”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알렉스는 참 예뻤다. 짧은 까만 머리가 아쉬울 뿐.
“네…….”
알렉스는 뺨을 붉히고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데도 이미 완성형인 미모를 뽐내는 알렉스를 나는 꼭 끌어안았다.
“세상에서 우리 알렉스만큼 예쁜 애는 또 없을 거야. 샐리. 우리 드레스 몇 벌 더 맞출까?”
“……도련님 드레스를요?”
“안 될까?”
“집사님께서 ‘도련님’이 쓰실 드레스라는 명목의 예산을 허락하신다면 되겠지만…….”
빌어먹을 남장 같으니라고.
내 시무룩해진 얼굴에 알렉스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나는 알렉스의 뺨에 쪽쪽 입을 맞추면서 괜찮다는 말과 온갖 칭찬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괜찮아. 나중에 맞추면 돼. 나중에 네가 가주가 되면 다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
유모가 들었다면 기겁할 소리였지만, 지금 내 전속 하녀인 샐리는 별말이 없었다.
충성스러운 하녀는 주인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샐리는 단지 머릿속 한구석에 그녀가 모시는 아가씨가 조금 독특한 취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을 집어넣었다.
예쁘긴 하지만 소년이 분명한 남동생에게 여장을 시키는 좀 독특한 취미가 있다고.
눈이 아플 만큼 현란한 레이스의 향연에도 가려지지 않는 화려한 얼굴은 드레스가 아니라 거적을 입어도 아름다웠겠지만 그래도…….
열 살짜리 남자애가 제 이복 누이가 시키는 대로 드레스를 입는 꼴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 * *
유모가 죽었다.
이전 생에서 죽었던 그날, 그 시간에 똑같이 죽었다.
이전과 다른 건, 이번에는 유모가 죽었을 때 옆을 지켰다는 걸까.
“헤더 아가씨…….”
“응. 유모. 나 여기 있어.”
“헤더 아가…….”
날 엄마 대신으로 여겼지만, 그래도 내게 애정을 퍼부었던 여자였다.
날 사랑하긴 했을까? 아니면 엄마를 죽인 내가 미웠을까?
“구드윈 백작 가에 연락해, 샐리. 거기 고용인들의 묘에 묻히길 원했을 거야.”
“네. 아가씨.”
아직 따뜻한 유모의 손에서 내 손을 떼어 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들은 유언은 달라졌네. 그 사생아 새끼를 내쫓으라는 거에서, 엄마를 부르는 거로.
“따라오지 마.”
날 따라오려던 샐리가 멈칫했다. 나는 말 없이 방을 나섰다. 위로. 위로. 나는 계속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어느 순간부터 발걸음 소리가 하나 더 따라붙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왜 부르지 않고. 알렉스.”
잔뜩 긴장한 알렉스의 얼굴에 헛웃음을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이리와.”
“그래도 돼요?”
“안 되는 건 없어. 특히 너한테는.”
알렉스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나는 알렉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울 거예요?”
묵묵히 나를 따라 계단을 오르던 알렉스가 물었다.
“아니. 왜?”
“누님을 키운 사람이잖아요. 슬프지 않아요?”
“유모는 날 키운 게 아니라 엄마의 딸을 키운 거지. 슬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유모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자랐다. 유모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너무 늙었으니까. 그리고 정신도 온전치 않았고.
그리고 날 너무 자주 엄마로 착각했다.
“……네가 있잖아. 알렉스.”
다락은 로윈 저택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알렉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10살의 알렉스. 8년 뒤 여기서 떨어져 죽게 될 알렉스.
파란색과 회색이 뒤섞인 눈이 아무것도 모른 채 깜빡였다.
“여긴 내 비밀 장소야. 알렉스. 너한테만 알려 주는 거야.”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낡아빠진 커튼이 거대한 창 위에서 펄럭거렸다.
“여긴 유모도 몰랐어.”
너도, 나도 여기서 죽게 된다는 걸 세상 누구도 몰랐을걸.
“소중한 장소에요?”
“그보다는 비밀스러운 장소지.”
농담처럼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사실 내가 여기서 사람을 죽였거든.”
알렉스의 눈이 커졌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저으며 알렉스를 창가로 끌고 갔다.
“농담이야, 알렉스.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할래? 그리고 진짜라고 믿었으면 도망가야지.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해.”
“진짜여도 돼요.”
나는 멈칫했다. 알렉스는 진심으로 내게 속삭였다.
“아무한테도 안 들키게 내가 도와줄게요.”
나는 가까스로 웃었다. 우리 벌써부터 달라졌구나. 이전과 다르구나. 더는 그렇게 끝이 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알렉스. 이리 와 봐.”
나는 창 앞에 알렉스를 끌어다 세웠다. 그때처럼 날아가지 않게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고 생각했다.
“뭐가 보여?”
로윈 저택을 한눈에 다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수도에 몇백 년을 버티고 선 로윈의 성세를 증명하는 저택을.
“저택이요, 누님.”
알렉스의 손이 그의 어깨를 끌어안은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 애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절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떨릴 거라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매끄럽게 알렉스를 향해 속삭였다.
“전부 다 네 거야.”
내 죄를 나눠 갖지 마. 넌 온전한 것만 손에 가져야지. 네게 당연하게 주어졌어야 할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