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렇다면 그가 그녀의 신일 것이다 (7/10)

그렇다면 그가 그녀의 신일 것이다

Chopin : Prelude No.4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은 서윤이 테이블 위에 놓아둔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은 서윤이 결혼하고 2년쯤 지났을 무렵의 모습으로 서윤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날이었다.

대현과 함께 초대받은 모임에 나갔던 날. 내내 불편한 기분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속을 다 게워 냈던 기억이 있다. 앵글 속에는 서윤 혼자였지만, 대현도 함께였다.

그렇다면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일까.

서윤의 낯빛에 깊은 수심이 어린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혼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서윤은 고민 끝에 생각을 멈추고 대현에게 전화하기로 결심했다.

서윤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곁에 그녀를 지탱해 주는 연우가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이나 대현과의 관계를 확실히 끝내고 싶었다.

서윤이 옆에 놓아두었던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서윤의 번호는 한 번 더 바뀌었지만, 휴대 전화에 아직 대현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서윤은 지체하지 않고 통화를 연결했다. 혹시 몰라 녹음 버튼도 눌러 두었다.

-……당신이야?

짧은 연결음 끝에 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끔찍하여 토악질이 나올 듯이 역겨웠다.

서윤이 손가락으로 꾹 가슴께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겨 내고 싶었다. 극복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대현이, 그녀에게 주었던 상처로부터 이제는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짓 다시는 안 했으면 좋겠어서 전화했어요.”

서윤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나직이 입술을 뗐다. 물을 머금은 듯 여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강단이 있었다.

-지서윤, 내 이야기 들어 봐. 네 옆에 있는 그 새끼, 우연우, 정상 아니야.

대현이 허겁지겁 말을 잇는다. 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현에 연우에게 가지는 열등감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추악한 열등감 때문에 서윤에게 다시 폭력이 시작되었으니까.

“……이러는 당신은 정상인가요?”

-지금 그런 말이 아니라! 진짜 정상이 아니라고. 진짜, 정말 정상이 아니야. 그 새끼가 한 짓을 네가 들어야 돼. 일단 만나자. 지서윤, 일단 만나.

“연우라면 제가 더 잘 알아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엔 적어도, 연우보다 지금 당신이 더 정상 같아 보이지 않으니까요.”

서윤이 연우를 두둔했다. 연우가 타고나기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쯤 서윤도 잘 알았다. 애초에 서윤이 연우와 만나게 된 이유도 치료의 일환이었다.

처음에는 서윤도 연우가 무서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연우는 달라졌다. 지금도 보통의 사람들과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다름에서 기인하여, 현주에게 관계를 보이지 않았었나.

다만 서윤은 연우를 이해했다. 이만큼 달라진 것도 연우에게는 큰 변화였다. 연우는 앞으로 더 달라질 수 있다고 그녀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끊을게요.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하려고 전화했어요.”

-너 씨발……. 내가 너랑 우연우 관계 퍼트려 버려도 괜찮겠어?

서윤이 통화를 끊으려는 때, 대현이 음산하게 지껄였다. 서윤이 순간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응? 안 그래도 지금 사움에서 그 소문 막으려고 난리가 났던데. 지금이야 불씨지, 내가 기름 한번 부어 주면 어떻게 될지 정말 몰라서 이래? 내가 너희 둘 사진 하나 안 찍어 뒀을 것 같아? 어? 그 새끼랑 너 망하는 꼴 내가 꼭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휴대 전화를 쥔 서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질끈 눈을 감자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듯 몰려와 입방아를 찧던 직원들의 눈초리가 떠올랐다.

-일단 만나. 만나서 이야기해. 지서윤.

“……정말 마지막이에요.”

-그래. 만나서도 우연우 그 새끼를 향한 네 믿음이 여전했으면 좋겠네.

서윤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통화 너머로도 이를 감지한 대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장소는 서윤이 정했다. 연우의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인적 드문 카페였다. 서윤과 동행한 비서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이 10분쯤 지났을까. 대현은 초라한 행색으로 카페에 들어왔다. 서윤을 발견하고는 거칠게 자리로 걸어들어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두 사람 모두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다가와 상냥하게 물었다. 대현은 차가운 커피를 주문했고, 서윤은 따뜻한 과일차를 주문했다.

“…….”

“…….”

마주 본 대현과 서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윤을 만나기만 하면 모든 이야기를 쏟아 낼 듯 굴었던 대현도 막상 외상이 역력한 서윤을 보니 주저하는 눈치였다. 제 외관을 훑으며 입술을 달싹이는 대현을 본 서윤은 그저 우스웠다.

“……장인어른한테 끌려갔었다더니.”

“당신도 나를 똑같이 취급해 놓고 동정하는 척하지 마요.”

대현의 동정을 서윤이 단호하게 잘라 냈다. 이런 목소리가 그녀 스스로에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서윤은 이미 그들을 잘라 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나 대현이나 서윤에게는 별다를 바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고작 그런 게 아니니까.”

고작. 고작이라고 여기기에 그렇게 때릴 수 있었던 거겠지. 서윤이 서글프게 웃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화를 내고 악을 써 봐야 이런 작자들이 들어먹을 리 없다는 것을 서윤은 너무 잘 알았다.

“지서윤, 내가 공연장에 어떻게 들어갔을 것 같아?”

서윤이 대꾸하지 않자, 대현이 테이블 위로 스스로의 양손을 깍지껴 맞잡으며 눈을 빛냈다. 대현의 질문을 듣자마자 서윤은 피로가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대현의 말에서 그 속내를 읽어 냈기 때문이다. 서윤이 인상을 찡그리자 대현이 급히 덧붙였다.

“우리 아버지가 평생을 연구한 기술 빼앗겼다는 말에 나 눈 돌아서 맨몸으로 들어갔어. 그런데 들어가지더라. 당신은 사움 소유의 공연장 보안이 그렇게 허술하다고 생각해?”

“우연이었겠죠. 당신이 난동 부린 일까지 연우가 뒤집어써야 하는 거예요?”

“사움이 우연우 관련해서 얼마나 통제하는지 당신도 알 거 아니야. 게다가 당신 아버지까지 공연장에 기어들어 왔다며. 그리고 내가 당신 번호를 어떻게 알았겠어? 그것도 우연우 그 새끼가 나한테 흘려서…….”

“더 듣고 있고 싶지도 않네요. 할 말 끝났으면 일어날게요.”

“지서윤!”

서윤이 일어나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대현이 황급히 들고 온 가방을 뒤졌다.

“씨발, 기다려 보래도!”

그가 가방에서 꺼내 든 것은 묵직한 서류 봉투였다. 대현이 열어 보라는 듯 서윤에게로 봉투를 밀어 주었다. 때마침 종업원이 서윤과 대현이 시킨 음료를 들고 왔다.

잠깐 동안의 유예가 주어졌다. 서윤이 두 손으로 받아든 서류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종업원이 대현의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서윤의 앞에는 과일차를 놓아 주려는 찰나…….

“우욱.”

서윤이 입술을 틀어막았다. 과일 향을 맡은 순간 역한 기분이 올라왔다. 속이 메슥거리고 답답했다. 역겨움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대현이 당황한 눈으로 서윤을 본다. 그러다 항간의 소문을 떠올렸다. 대현의 눈빛에 의구심이 스쳤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서윤을 보며 의혹을 던졌다.

“너 설마…….”

“속이, 속이 안 좋아서 그래요. 요새 몸이 안 좋아서.”

대현이 무엇을 의심하는지 단박에 알아챈 서윤이 불쾌하다는 얼굴로 대현을 보았다.

“그래. 일단 진정하고 열어 봐.”

대현은 여전히 의심하는 얼굴이었지만, 서윤의 완강한 태도에 이내 꼬리를 내렸다. 서윤이 과일차를 조금 옆으로 미루어 두고는 숨을 골랐다. 조금쯤 진정됐다고 느꼈을 무렵 서류 봉투를 뜯었다.

바스락.

서윤이 서류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어 든다. 그 안에는 사진 뭉치가 들어 있었다. 지난번 병원에서 서윤에게 주운 것과 비슷한 구도의 사진들이었다. 찍히고 있는 사람이 모를 정도로 멀리서, 몰래 그녀를 찍은 사진들이 어림잡아도 수백 장이었다.

“이게 뭐죠?”

“이상하지?”

대현이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서윤은 당혹감에 사진을 넘겨 보지도 못한 채 테이블 위에 헤쳐 두었다. 이내 경멸 어린 눈으로 대현을 바라보았다. 서윤은 찍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사진들이다. 이건 명백한 스토킹이었다.

“당신 나를 이런 식으로…….”

“내가 아니야.”

그 시선이 연우에게로 돌아갈 생각을 하자 대현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속으로 히죽 웃은 대현이 희열을 숨기지 못한 채로 서윤에게로 가까이 상체를 숙였다.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연우 그 새끼지.”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서윤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하다 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가다니 기가 막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늘을 위해 대현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사진을 찍어 왔을 리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놀랐어, 나도.”

“…….”

서윤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대현을 본다. 눈빛으로 이 사진의 출처를 묻고 있었다.

“사람 구해서 네 뒤를 파고 있었는데 이 사람한테 먼저 연락이 왔어. 그러니까 이 사진을 찍은 사람. 돈을 요구하길래 전 재산을 털어서 이 사진들을 샀지. 웃기는 게 뭔지 알아? 이 새끼 얼굴을 내가 안다는 거야.”

“그게 무슨.”

“우리 이웃이었어.”

서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믿기 싫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일 것이다. 연우가 그럴 리 없었다.

“우연우 그 새끼가 집도 구해 주고 돈도 줘 가면서 네 사진 조달받고 있었다고, 한국에서. 그 사진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새끼가 네 사진 보면서 딸이나 쳤으려나.”

서윤이 선 넘지 말라는 듯 대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뇌리에 채찍질처럼 휘둘러지는 상상은 돌이킬 수 없었다. 제 사진을 쥔 채, 굵은 성기를 꺼내어 자위하는 앳된 얼굴의 연우가…….

“그럴 리, 그럴 리 없잖아요.”

대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앞에 놓인 음료를 들이켰다. 서윤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야 판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며 한 번 더 입술을 뗐다.

“너랑 내 결혼이 우연우 외가 쪽 주선으로 이루어진 건 알고 있지?”

“……뭐라구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대현은 서윤이 몰랐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라는 눈치였다.

“지서윤,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너희 집이 그 새끼 외가랑 같이 담합해서 우리 집 특허 기술 빼 가려고 했던 거. 그래서 내 유학으로 우리 아버지 꼬셔서 개수작 부린 거잖아. 그 덕에 지금 너희 집이나 우리 집이나 풍비박산 났고. 이 개 같은 새끼들이…….”

아버지에게 납치당했을 적에도 어렴풋이 들은 이야기였다. 대현은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냉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랑 네 결혼 주선한 그 여자 우연우 손에 모가지 날아갔잖아. 그 여자는 우연우랑 오래 안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김지은.”

“…….”

“평생 못 가져 본 것 없는 새끼가 눈앞에서 널 빼앗겼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너는 상상이 가? 아아, 아직 기억이 나. 너랑 내 결혼식 날 그 새끼가 연주하던 결혼행진곡이.”

대현이 느긋하게 자리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서윤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여자가 네 결혼 주선자라는 사실 알게 되자마자 그 여자부터 정리하고, 기어코 한국까지 너를 불러들이고. 얼마나 애틋했으면 그랬겠어. 참 대단한 사랑이야. 눈물이 나올 정도라니까?”

서윤이 애써 대현의 시선을 피하며 가슴 속에 움튼 의심을 부정했다. 애초에 그녀의 결혼을 소개한 사람은 김 비서였다. 연우의 잘못은 없었다.

사진 역시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럴 수 있었다. 연우는 조금 다른 아이였으니까.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사랑해서,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다.

“지서윤, 아무리 그래도 네 트라우마를 이용하는 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날 끌어들인 건 그렇다 쳐. 장인어른한테까지 끌려가게 해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처맞고나 오게 만들고, 쯧……. 이 머저리 같은 계집애야, 네가 파리에서 나한테 맞고 사는 걸 그 새끼가 몰랐을 것 같아? 다 알면서 기다린 거야. 널 자기 손아귀에 떨어트리려고 그런 거라고!”

“연우 짓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잖아요!”

주먹구구식으로 이어지던 합리화는 대현의 말에 산산조각이 났다. 서윤이 절규처럼 소리치자 대현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너 우연우가 구해 줘서 빠져나왔지? 나한테도, 장인어른한테도.”

“…….”

“병신 같은 년. 그러니까 그러고 살지.”

서윤의 숨이 거칠어졌다. 과거에, 연우와 다시 만났던 세 번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던 그 애가, 나락으로 떨어져 있어 달라고 말하던 그 애가,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던 그 애가, 끝끝내 그녀를 데리러 왔다던 그 애가, 서윤의 뇌리에 깊이 박혀 들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이 폭풍처럼 몰아쳐 한순간에 그녀를 폐허로 만들었다.

“잘 생각해 봐, 지서윤. 이 모든 게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으므로, 우연이었다고 생각했다. 서윤의 눈꺼풀이 고통스럽게 감겨들었다. 연우와 다시 만난 일이 정말 우연이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 * *

-잘 생각해 봐, 지서윤. 이 모든 게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

대기실에 길게 다리를 뻗고 앉은 연우가 눈을 감은 채로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대현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어진 서윤의 숨소리 구간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귀 기울였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어쩌면 커다란 눈망울 위로 눈물이 맺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얀 볼을 가르며 후두둑 눈물을 떨굴 때의 얼굴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에 불쾌함이 밀려들었다. 불구로 만들어 버리거나 어디든 집어처넣었어야 했나.

버러지 한 명이 더 떠오르자 짜증마저 치밀었다. 서윤의 사진을 찍어 조달하던 남자 말이다. 몇 년 시키는 일만 잘하면 평탄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남자는 어느 날 욕실에 선 그녀의 나체 사진을 동봉해 왔다. 그렇게 하면 돈이라도 더 챙겨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병신 같았다.

반병신이 됐다고 들었는데 대현에게 붙었을 줄이야. 이래서는 다시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하지 않나.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 일이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역시, 세상에는 자비를 베풀어 주면 안 될 하등한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뭐…….”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서윤의 생을 자신의 곁에 완전히 박제할 좋은 기회였다.

연우가 생각을 마치며 눈을 떴다. 촘촘한 속눈썹이 들리며 베일 듯 날카롭고, 정교한 세공품처럼 섬세한 얼굴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못마땅한 기분을 숨기지 않아 가라앉은 분위기는 오만하여 그가 타고난 것들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도련님.”

연우의 뒤로 수행 비서가 다가왔다.

“지서윤 씨께서 전남편분을 만나러 갔다고 하십니다. 늦게 보고드려 죄송합니다.”

남자가 연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연우가 짧게 허공을 바라본다. 서윤에게서는 아직 한마디 말 없었다. 꺼끌한 숨만을 토해 내며 쏟아지는 대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데리러 가야겠지.”

연우가 매끄러운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붙여 두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연우에게로 데리고 오겠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그녀를 데리러 가야 했다.

“약속했으니.”

절망에 빠진 여자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가 묶어 놓은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그 절망을 그가 그녀에게 선물했다 하더라도.

“아, 인테리어를 바꾸려고 하는데.”

대기실의 문을 열어젖힌 연우가 옆에 선 비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만간 가족이 한 명 늘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는 연우의 입꼬리에는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 * *

대현이 떠나고, 자리에 홀로 남은 서윤이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화 말미에 서윤은 대현에게 물었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처음 손에 쥔 행복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이의 마지막 발악일지도 몰랐다.

‘그 새끼한테 가장 큰 절망은 널 잃는 걸 테니까.’

‘돌려줘야지. 이렇게라도.’

그걸로 끝이었다. 대현은 더 이상 마주 볼 일 없을 거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진은 마음대로 하라며 서윤의 앞에 버려 두었다. 아닐 거라고, 가슴 깊은 곳에서 부정이 치밀 때마다 테이블 위의 사진이 비웃듯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

서윤이 테이블 위의 사진을 한데 모았다. 원래 사진이 있던 서류 봉투 안으로 모조리 집어넣으면서는 이미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텅 비어 있었다.

서윤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서류 봉투를 꽉 쥔 채로 걸어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카페의 문을 열고 나섰다. 등 뒤로 멀리서 대기 중이던 비서가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카페 밖으로 나선 서윤이 순간 쏟아지는 빛에 인상을 찡그렸다. 하얗게 점멸했다 바라본 정면에는 연우가 서 있었다. 신기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모습에 서윤이 주춤 걸음을 뒤로 물렸다.

퉁, 하고 카페 문이 서윤의 등에 부딪친다.

서윤은 연우가 걸어오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남자가 환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불현듯 두려워져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다가오는 연우의 표정은 서늘하게 굳어져 그녀가 오늘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다 아는 사람 같았다. 서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턱을 잡아당겼다. 시선을 내리깐 채로 유난스레 떨었다.

저벅, 저벅.

연우의 구두 앞코가 서윤이 신고 있는 운동화 앞코 앞에 멈추어 섰다. 서윤이 꼴깍 침을 삼키며 연우를 보았다.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초리에 숨이 턱턱 막히려는 찰나에, 연우가 웃었다.

“이 카페에 계신다길래 퇴근하는 길에 데리러 왔어요.”

그의 목소리에서 단내가 풍겼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 주고는 머리통 위로 쪽, 짧게 입 맞췄다. 이 모든 것은 서윤이 평생 바라 마지않던 온기였다.

“선생님, 추우세요? 코끝이 빨개요.”

연우가 서윤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맞춰 왔다. 툭, 코끝끼리 부딪치며 사랑스럽다는 듯 서윤을 내려다보았다.

서윤이 홀린 듯이 연우를 올려다본다. 마주 본 연우가 빙그레 웃으며 주먹을 움켜쥔 서윤의 손을 맞잡아 왔다. 부드럽게 파고들어 깍지 끼고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선생님?”

“……누구 만났냐고 안 물어봐?”

서윤의 질문에 연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니까 만나셨겠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곤 앞서 걷는 연우의 손에 끌려가며 서윤이 멍하니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삶에 드는 모든 웃풍을 막아 줄 듯 보이는 너른 등이었다.

이런 등을 가진 이가 그녀를 절벽으로 밀어 넣었던 범인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잡힌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 * *

묻지 못했으므로, 서윤과 연우는 평소와 같았다. 폭풍 전의 고요처럼 수면 위는 가라앉아 있었다. 쏟아지는 다정한 눈길에 서윤은 여전히 휘청거렸고, 가슴이 뛰었다. 그 뒤로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는 불안의 잔재들만이 유일한 전조였다.

홀로 방 안에 남은 서윤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서윤의 방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었던 연우는 취침 시간이 되자 방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벌써 깊은 새벽이었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대현이 했던 말들이 허공을 떠돌아다니며 서윤을 짓누르는 듯했다. 대현의 헛소리일 거라고 묻어 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캄캄한 밤에는 삿된 생각들이 더 쉽게 몰려들었다.

‘연애 상담 같은 거라도 괜찮으니까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서윤 씨.’

그 순간 불현듯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선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선아 역시 연우가 연결해 준 사람이었지만, 서윤을 대하는 선아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서윤이 이불 속에 파묻힌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화면을 툭 건드려 쏟아지는 빛이 서윤의 초조한 얼굴을 비췄다. 서윤이 조심조심 휴대 전화를 조작했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내일 따로 뵙고 싶은데 시간이 되실까요?]

오늘로써 공연은 이틀이 남아 있었다. 공연 하루 전날에는 연우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무조건 집에서 머물 예정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이어야 했다.

서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휴대 전화를 응시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답장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기다리는 심정이 절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까맣게 점멸한 휴대 전화를 보며 서윤이 눈을 감는다. 때마침 휴대 전화를 쥐고 있는 손바닥 위로 진동이 울렸다. 선아였다.

[일어나 있었어서 괜찮아요. 무슨 일 있나요? 시간 비워 둘 테니까 언제든지 오세요.]

[감사합니다. 내일 뵐게요.]

서윤이 안도하며 빠르게 답장하고는 양손으로 휴대 전화를 꼭 쥐었다.

밤새 한숨도 잠들지 못한 서윤은 아침이 밝아서야 세 시간 남짓의 짧은 잠을 청했다. 일어나 보니 연우는 이미 리허설을 위해 집을 나선 뒤였다.

“저, 비서님.”

준비를 마친 서윤이 1층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를 불렀다. 비서가 나갈 준비를 한 서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잠깐 나갔다 오려고 하는데요.”

“아, 같이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혼자 다녀오고 싶어서요.”

서윤이 손사래를 치며 간절하게 비서를 올려다보았다. 서윤의 시선을 받은 비서의 표정이 짐짓 곤란하다는 듯 굳어졌다. 연우에게 서윤과 함께 다니라는 지시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

“공연 날 연우한테 해 주기로 한 게 있어서요. 꼭 오늘 사야 하는 거라, 금방 돌아올게요.”

초조했지만, 서윤은 애써 침착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변명했다. 연우에게 공연날 음식을 해 주기로 했던 약속을 핑계 삼았다. 비서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여쭤보겠습니다.”

“네?”

서윤이 희망을 느끼는 찰나, 비서가 단호하게 서윤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비서가 통화를 연결했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태도를 보았을 때 연우가 바로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비서가 연우에게 서윤이 혼자 나가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꼭 사야 하는 것이 있다고까지 꼬치꼬치 전달하고 있었다. 서윤의 속이 타들어 갔다. 허락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께서 바꿔 달라고 하십니다.”

기어이 서윤에게 통화가 돌아왔을 때, 서윤은 반쯤 포기 상태가 되었다. 서윤의 얼굴이 깊이 절망하자 비서는 조금 미안한 눈치였지만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지 금세 덤덤해졌다.

“……여보세요.”

전화를 바꾼 서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선생님, 어디 가세요?

“그게, 있지…….”

-아직 몸도 안 좋으시면서.

통화 너머로 옅은 한숨 소리가 넘어왔다. 서윤의 눈꺼풀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차라리 다른 변명을 할 것을 그랬다고 사무치게 후회했다. 어차피 상담 내용은 들킬 리 없는데 비서를 데리고 갈 것을 바보 같았다.

-맛있게 해 주세요.

서윤이 완전히 포기하려는 찰나, 짧은 웃음과 함께 연우가 말했다. 서윤의 눈이 크게 뜨인다. 동시에 거짓말을 했다는 죄악감이 찾아왔다.

-기대할게요.

몸이 성치 않으니 택시를 타고 가라는 당부도 함께였다. 비서에게 물어 가까운 마트로 가라며 친절히 가야 하는 길까지 정해 주었다.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마음 깊이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태도에 서윤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대현의 말이 진실일까?

연우를 향해 마음의 추가 기울어졌다. 대현을 향한 오랜 불신도 자꾸만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잠수하기를 반복했다. 서윤이 숨을 고른다. 목울대를 조여 오는 불안감 탓에 잘 다녀오라는 마지막 인사가 다소 싸늘한 것은 느끼지 못한 채였다.

* * *

서윤은 택시를 타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언제든 시간을 비워 두겠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으레 한두 명씩 앉아 있고는 하던 병원 대기실에는 기다리고 있는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서윤 씨.”

서윤이 진료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머지않아 선아가 문을 열고 나왔다. 하루 사이에 야윈 서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일단 들어오세요.”

선아가 걸음을 물리며 진료실 안으로 서윤을 안내한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은 서윤은 두서없이 선아에게 어제의 일부터 그간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마음이 온전치 못해 이야기가 이리저리 튀거나 산만하기도 했지만 선아는 묵묵히 서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온화하던 선아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선아의 답을 알 것만 같았다. 허벅지 위에 올려 둔 두 손에서 식은땀이 비질비질 흘러나왔다.

“잠시만요. 일단 따뜻한 차 한 잔 줄게요.”

선아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뒤편에 마련된 차 테이블로 가 따뜻한 물을 붓고 티백을 넣었다. 투명한 물 안에 금세 아지랑이처럼 차가 우러나왔다. 진료실 내부에도 산뜻한 녹차 향이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읍.”

자리에 앉아 흘러드는 녹차 향을 맡던 서윤이 황급히 입을 막았다. 어제 대현을 만났을 때와 같은 증상이었다. 속이 니글거리고 역겨움이 명치 끝부터 올라왔다.

“서윤 씨, 왜 그래요?”

선아가 우러난 차를 들고 서윤에게로 걸어왔다. 녹차 향이 우러나오고 있는 머그잔이 가까워지자 서윤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우욱.”

진료 테이블 위에 급히 머그잔을 올려놓던 선아가 흠칫하여 서윤을 보았다. 꼭 입덧이라도 하는 것처럼 녹차 향을 극도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 순간 선아의 머릿속으로 나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황급히 머그잔을 뒤로 물리고 서윤에게로 다가갔다. 앉아 있는 서윤의 앞에 한쪽 무릎만 꿇은 채로 어깨를 쥐었다.

“서윤 씨, 피임약은 잘 먹고 있죠?”

“그게…….”

서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선아를 올려다보았다.

“마지막 생리가 언제였어요?”

“그……. 그런데 저는 원래 불규칙한 편이어서요.”

“테스트기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해 보는 게 좋겠어요.”

선아가 애써 웃으며 서윤을 다독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철제 서랍이 닫히고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서윤이 불안한 눈빛으로 손을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여깄다. 서윤 씨, 가서 하고 오세요. 걱정하지 말구요.”

“네…….”

“몸이 정말 많이 약해진 걸 수도 있어요.”

애써 서윤을 다독이는 선아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서윤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실을 나서는 서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선아의 마음도 철렁하여 무너질 듯했다.

테이블 위에 테스트기를 올려놓은 채로, 서윤과 선아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선아가 서윤이 가지고 온 임신테스트기를 다시 한번 손에 쥐어 보았다.

참담한 얼굴의 서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선아가 입술을 떼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신테스트기 속 선명한 두 줄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알면서도 그랬다.

“서윤 씨, 미안해요. 산부인과 가서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임신이 맞는 것 같네요.”

“다시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입덧이 이렇게 빠르게 시작되나요?”

“……드문 경우지만 없는 일도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선아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서윤을 향해 입술을 뗐다. 서윤의 고개가 무너지듯 아래로 처박혔다.

아이가 있었다.

배 속에, 연우의 아이가.

* * *

돌아오는 길에는 비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아무 생각 없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서윤은 황급히 마트로 길을 돌려야 했다. 허겁지겁 카트에 재료를 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비서를 만났다. 비서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고작 마트 하나를 들렀다는 게 의뭉스러운 눈치였지만 서윤을 따로 캐묻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저, 올라가서 씻을게요.”

“네. 장 보신 것 정리해 놓겠습니다.”

서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랐다. 비서가 주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주시하다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조급히 2층을 향해 걸었다. 다급한 발자국 사이로 드문드문 선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서윤 씨가 원하는 대로 해요.’

‘선생님…….’

‘서윤 씨도 이성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도망치고 싶다면 도와줄게요. 지방에 친한 친구가 하는 병원이 있어요. 원하면 부탁해서 서윤 씨 숨겨 줄 수 있어요.’

‘정말 연우가 그랬을까요? 그 오랜 세월을. 전 남편에게, 아버지에게, 저를…….’

‘서윤 씨…….’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심증일 뿐이잖아요.’

그 많은 일들이 우연일 리 없는 줄 알면서도 서윤은 애걸하듯 물었다. 모든 심증이 연우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서윤은 그를 믿고 싶었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우연우 씨 방을 확인해 보세요. 사진이 전해졌다면 남아 있는 게 있을지도 몰라요. 서윤 씨라면 들어갈 수 있죠? 찍은 사람이 있다면 받은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네. 먼저 확인해 볼게요.’

‘서윤 씨, 다 없었던 일로 하고 살아가도 괜찮아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용서하는 일보다, 차라리 무지한 채로 다 잊고 살아가는 일이 더 쉬울지도 모르니까요.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두 서윤 씨에게 달렸어요.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서윤이 아무도 없는 복도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들고 갔던 가방을 내려놓고 욕실로 가 물을 틀어 두었다. 만약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물줄기 소리에 발걸음을 감추며 서윤은 중앙 욕실을 따라 연우의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연우의 서재였다. 그의 책상부터 책상 뒤편의 장식장까지, 서윤은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서랍은 대부분 이렇다 할 잠금장치 하나 없었다. 열쇠 구멍이 있는데도 허무하게 열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언가를 감추고 싶은 마음도, 귀중히 보관해야 할 마음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서재의 모든 서랍을 살핀 서윤의 얼굴에는 땀이 흥건했다. 서랍을 한 칸씩 열 때마다 긴장이 몰려든 탓이었다. 허나 연우의 서재에는 서윤이 찾는 물건이 없었다.

서윤이 잠시 침실을 떠올랐다가 고개를 저었다. 연우의 침실은 침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어 무엇을 숨길 공간이 못됐다.

역시 대현의 수작일 뿐이었던 걸까? 하지만 연우가 숨기고자 했다면 집이 아니더라도 어디든지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서윤이 초조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감춰 물 때였다.

“……?”

서윤의 시야에 책상 맞은편의 벽면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벽의 왼쪽 끝 손잡이에 서윤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서윤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 살피자 눈앞의 벽은 가림벽이라는 사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도 손잡이가 노출되어 있었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서윤이 손잡이를 쥐어 왼쪽으로 밀자 가림벽은 완벽한 벽처럼 존재하며 손잡이를 감추었다. 왜 하필 오늘, 이 손잡이가 서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인지 이상했다. 덫을 향해 제 발로 기어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꿀꺽.

서윤이 잠시 고개를 돌려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 소음이라고는 서윤이 켜 놓고 온 물줄기 소리밖에 없었다.

서윤의 고개가 다시 벽으로 돌아왔다. 더듬더듬 벽을 짚어 틈새로 사라진 가림벽의 손잡이를 쥐었다. 기묘한 기분에 손가락 끝이 빳빳하게 굳었다. 떨림이 여실했다. 무언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서윤을 날카롭게 사로잡았다.

“…….”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겨우 손잡이를 쥐었다. 손 안에 가득한 쇠붙이의 감각을 느끼며 서윤이 마침내 힘주어 가림벽을 열었다.

조용히 정면을 응시한 서윤의 발이 뒷걸음질 친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궁지에라도 몰린 듯 주춤거리던 걸음이 순간 뒤엉켰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진 서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힉, 읍…….”

비명이 새어 나오기 전에 서윤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거짓말, 거짓말일 거야. 넋이 나간 얼굴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시선을 위로 했다.

아무리 부정해 보아도 눈앞의 현실을 지울 수는 없었다. 벽면 가득히 자신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모르는 그녀의 순간들이 연우의 서재에 빼곡하게 박제되어 존재했다.

“윽, 욱.”

빈틈없이 걸려 무수히 반복되는 자신의 허여멀건 얼굴에 한순간 토악질이 밀려들었다. 서윤이 혼란스레 바닥을 짚으며 방 곳곳을 바라보았다. 눈을 둘 곳이 없었다. 고개를 돌릴라치면 자신의 얼굴이 담긴 수백 장의 사진이 개미 떼처럼 쫓아와 그녀를 좀먹는 듯 느껴졌다.

서윤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서윤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안간힘을 써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림벽을 닫기 위해 걸어갔다.

거기까지였다. 손잡이를 쥔 서윤의 눈길이 무의식적으로 사진 하나를 좇았다. 카메라 앵글 가득 나체로 선 자신을 확인한 순간, 서윤의 얼굴은 일그러져 더 이상은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샤워를 마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울다 겨우 가림벽을 수습하고 나온 서윤은 쏟아지는 따뜻한 물 아래에서 떨림을 진정시켰다. 욕실에 홀연히 선 나체 사진이 떠오르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 욕실은 프랑스에 있었던 서윤의 신혼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사진이 찍힐 수 있었는지 서윤은 상상조차 하기 힘겨웠다.

‘웃기는 게 뭔지 알아? 이 새끼 얼굴을 내가 안다는 거야.’

‘우리 이웃이었어.’

순간 대현의 말이 떠올랐다. 털썩 침대에 주저앉은 서윤이 멍하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분홍빛으로 정돈된 방이 더 이상은 과분하고 기쁜 선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예쁘게 꾸며진 새장이라면 모를까. 그러고 보면 언젠가부터 나가는 일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마저도, 허락을 구하고 진땀을 빼야 했다. 감옥에 갇힌 포로처럼 통제당하고 감시당했다.

“윽…….”

다시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울음을 삼켜 내며, 서윤이 이를 악물었다. 실망하고, 원망하며, 절망할 시간조차 없었다. 망치로 머리를 세차게 맞은 듯한 감각을 온몸으로 떠안으면서도 서윤은 연우가 오기 전에 결정해야 했다. 서윤은 곧장 선아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연결하는 손가락 끝이 잘게 떨려왔다.

-서윤 씨?

“선생님, 저, 저 떠날게요.”

-서윤 씨?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떠날게요. 떠나게 해 주세요. 도와주세요, 선생님…….”

연우와 함께 있다가는 그 애가 주는 애정에 매몰될 게 분명했다. 옳지 못하단 걸 알면서도 눈감고 말 것이다.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떠나야 했다. 서윤이 아래를 향해 고개를 처박으면서 조용히 흐느꼈다.

통화를 마치고 붉어진 얼굴을 수습한 서윤이 찾은 곳은 냉장고였다. 사 온 재료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허겁지겁 정신없이 사 온지라 빠진 재료가 있을지도 몰랐다. 냉장고를 채운 재료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서윤의 손가락 사이로 선아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공연 날 떠나는 게 가장 좋겠어요. 그때 말고는 우연우 씨의 시선을 돌릴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서윤 씨 무대 뒤편에서 관계자들하고 함께 있죠?’

‘네. 빠져나오는 게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좋네요. 그전까지 최대한 평소처럼만 해 주세요. 힘들겠지만, 아셨죠?’

선아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평소처럼 연우를 대할 것을 강조했다. 연우를 떠올리면 그 벽이 함께 떠올라 괴로웠지만 노력해야 했다. 갑자기 멀게 굴거나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면 연우는 분명 의심할 테니까.

“……별걸 다 사 왔네.”

서윤이 과일 칸의 과일을 손 안에 짧게 굴리며 탄식했다. 담을 때는 몰랐는데 필요 없는 과일까지 잔뜩 담고 말았다. 과일뿐만 아니라 채소들까지. 고작 한 그릇의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서라기엔 지나친 재료들 투성이었다. 서윤이 냉장고를 열어 놓은 채로 멍하니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때문에 뒤에서 인기척이 다가오는 줄도 미처 알지 못했다.

“뭘 그렇게 숨기세요?”

“흐읍.”

등 뒤로 껴안아 오는 온기에 서윤이 놀라 어깨를 떨었다. 비단 갑작스러운 포옹 때문만은 아니었다.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는 어둡게 가라앉아 꼭 서윤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아는 사람처럼 무엇을 숨기냐 물어왔다.

서윤이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뒤틀었다. 연우가 한참은 작은 서윤을 내려다보며 사랑스럽다는 듯 볼을 비벼 왔다. 품에 안겼을 때의 서늘한 간담은 기분 탓이었던 모양이다. 서윤이 못내 안도하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겨울잠이라도 대비하는 다람쥐처럼 야금야금.”

그대로 서윤을 돌려세운 연우가 서윤의 볼을 쓰다듬었다. 종일 고민에 잠겨 뜨거운 볼을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단숨에 식혀 주었다. 연우의 손에 한껏 볼을 비비며 가슴 깊은 곳의 열 오른 잡념들도 진정시키고 싶었다.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할 허무맹랑한 망상이었다.

“와, 왔어?”

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연우를 반겼다. 서윤의 입꼬리에 불쑥 올라온 경련을 연우가 짧게 응시하고는 입가에 다감한 미소를 걸었다.

“네. 다녀왔어요, 선생님.”

“힘들지는 않았어?”

“매번 하는 일인 걸요. 같이 씻으실래요? 목욕물 받아 두라고 했거든요.”

“나는 이미 씻었는데…….”

같이 씻자는 제안에 서윤이 순간 쭈뼛거렸다. 거절했다는 이유로 공연한 의심을 살까 봐 대답이 느려졌다. 이전까지 자신이 연우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 번 더 씻으시면 되잖아요.”

서윤이 망설이는 사이 연우가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왔다. 선생님.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거절하지 못할 만큼 달게 그녀를 불렀다. 서윤이 흔들리는 눈으로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무수한 번뇌가 어려 있었다.

“……그래. 그러자.”

“그럼 올라가요. 나머지는 알아서 정리하라고 하면 되니까.”

연우가 서윤의 손을 깍지 껴 잡고는 그녀를 이끌었다. 서윤을 끌어당기며 앞서 걷는 연우의 눈매가 싸늘했다. 웃음기는 종적을 감춰 찾아볼 수 없었다.

욕실로 가자 따뜻한 목욕물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서윤이 옷을 벗고, 알몸을 수건 한 장으로 가린 채 다가가자 연우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윤이 조심스레 연우의 손을 잡았다. 몸을 가린 수건을 내려놓을 때는 손을 맞잡은 채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연우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시는 거예요?”

“원래, 부끄러웠어.”

오늘따라 이상하다는 말에 서윤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흐음. 연우가 욕조에 팔을 괴고는 천천히 몸을 담그는 서윤을 보았다. 여전히 연우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몸 선이 다소 야위었다. 그나마 살집이 있던 엉덩이도 마른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찰박.

서윤이 연우에게 등을 보인 채로 욕조에 앉는다. 종일 긴장 상태로 굳어 있던 몸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며 나른하게 풀어졌다. 완전히 늘어지지 않기 위해 서윤이 무릎을 세우고 양팔로 끌어안았다. 무릎 위에 턱을 올린 채 표정을 단단히 했다.

“선생님.”

“……응.”

“저 좀 봐 주시면 안 돼요?”

서윤의 어깨 위로 연우가 얼굴을 올리며 물었다. 물에 잠긴 낮은 목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애절하게도 들리는 음성의 울림에 서윤의 허벅지 위로 닭살이 돋아났다.

“선생님.”

연우가 재촉하듯 서윤을 부른다. 서윤이 망설이며 고개를 틀었다. 마주 본 얼굴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눈을 깜빡이는데, 연우가 웃으며 서윤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매끄럽게 당겨 서윤의 작은 몸을 다리 사이에 가두었다.

“미, 밑에.”

순간 엉덩이 아래로 느껴지는 흉흉한 성기의 감촉에 서윤이 움츠러들었다. 연우가 개의치 않고 서윤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선생님만 보면 서거든요.”

“……조금 죽여 봐.”

“손이라도 빌려 주시면요.”

“……참을게.”

“네.”

장난스러운 대화마저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몽글몽글한 기분에 취해 연우의 품에 안겨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었다.

역시 떠나기로 결정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단내가 풍기는 꿀단지 안을 오래 들여다보다가는 발을 헛디디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안에 든 독을 안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서윤이 표정을 정돈하는 찰나, 목 뒤로 연우의 입술이 느껴졌다. 서윤의 허리가 곧추서며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쪽, 쪽……. 연우의 입술이 느리게 서윤의 목덜미를 점령해 왔다.

“공연 날이 이렇게 기대되는 건 처음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연우가 서윤의 배를 쓰다듬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내려다본 배는 판판하기만 했다. 비밀 하나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일에 놀라야 하니 피로도가 가중되었다. 서윤이 작은 숨을 내쉬는데, 등 뒤로 쓸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늘 외로웠거든요.”

연우는 여전히 서윤의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물을 가르는 소리가 고요한 욕실에 찰박찰박 울려 퍼졌다.

“아세요? 첫 공연을 올릴 때, 관객석 어딘가에 선생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면서 연주했어요.”

서윤의 눈매가 굳어진다. 서윤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감춰 물며 장대비처럼 마음을 적셔 오는 연우의 말에 젖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랬니?”

“덕분에 실수 없이 끝낼 수 있었죠.”

“…….”

“선생님께 멋있는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요.”

마음이 일렁거렸다. 지그재그로 쌓아 올린 견고한 결심이 마치 젠가처럼 하나씩 툭, 툭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순진한 말을 지껄이는 아이가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어? 악마가 속삭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VIP석에 선생님 자리 마련해 뒀어요.”

“응?”

VIP석이라니. 당연히 관계자들과 함께 앉아 있을 줄 알았던 서윤이 연우를 돌아보았다. 연우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서윤의 볼에 입술을 맞대었다.

“제가 연주를 잘 끝마칠 수 있도록, 선생님께 드리는 업무예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파고드는데도 서윤은 쉽사리 집중할 수 없었다. 도망치기로 했던 계획이 떠올랐다. 무대 뒤편이라면 몰라도 관객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서윤이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연우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장 중요한 업무죠. 제가 공연을 망치면 지금껏 준비해 온 많은 일들이 물거품이 될 테니까요.”

“…….”

그럴 리 없는데도, 왜 자꾸 연우가 다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연우의 말은 꼭 많은 사람들이 공들여 준비한 공연을 망치고 싶지 않으면 떠나지 말라는 협박처럼 들려왔다.

쪽.

두려움은 둥근 어깨 위로 내리는 짧은 입맞춤으로 종식되었다. 한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에 아찔했다. 그래, 연우가 알 리 없었다. 알았다면 이런 간지러운 시간이 허락될 리 없었다.

공연한 불안감이라며 애써 마음을 다독이는데, 서윤의 아랫배를 묘하게 쓰다듬던 연우의 손이 서윤의 가슴 위로 올라왔다.

“읏.”

연우가 손가락 사이로 도드라진 젖꼭지를 굴렸다. 서윤의 어깨에 기댄 볼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말간 볼을 바라보았다. 체구에 맞지 않는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고 주무르며 그녀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살살, 살살 해야 해.”

서윤이 연우의 손등 위로 손을 겹치며 말했다. 배 속에 아이가 있었다. 격렬한 관계는 지양해야 할 때였다.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으니 서윤은 벌벌 떨며 저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다는 말은 안 했는데…… 하고 싶으세요?”

“히익.”

다리 사이로 손이 들어왔다. 젖가슴을 만지던 손은 어느새 서윤의 허벅다리를 벌려 단단히 고정했다.

“미끈거려요.”

연우의 손이 서윤의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긴 손가락으로 구멍 근처를 배회하며 어느새 비죽 흘러나온 애액을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끈적이는 감촉은 물에 씻겨 금세 달아났지만 서윤의 아래에서는 여전히 애액이 흐르고 있었다.

“아흣…….”

“쉬이. 괜찮아요. 힘 푸세요.”

연우의 손가락이 여성의 갈라진 틈을 벌리고 클리토리스를 매만졌다. 둥글게 굴리는 손길은 섬세하여 서윤은 금세 달아올랐다. 곧게 서 있던 허리가 둥글게 휘며 젖가슴과 배를 앞으로 내밀었다.

“응, 흐. 하읏.”

꾹, 꾹 연우가 물길을 헤치고 붉은 속살을 매만졌다. 그녀가 기분 좋아하는 손길로만 오롯이 채워 아래를 달궜다. 구멍에서는 연신 끈적한 애액이 흘러나왔다. 고작 몇 분 만져 줬다고 엉덩이가 움칠거리고, 흰 젖가슴마저 덩달아 위아래로 무겁게 흔들렸다.

“아, 아흐, 으, 읏.”

짧은 오르가슴이 서윤을 덮친다. 빠르고 갑작스럽게 서윤을 스치고 지나간 절정이었다. 이토록 이르게, 발가락까지 오그라들 정도로 느꼈다는 사실에 서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주는 쾌락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졌다고 자백하는 꼴 같아서.

“귀여워.”

쪽, 쪽. 서윤이 푹 고개를 숙이자 연우는 쉴 새 없이 서윤의 머리통이며 어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어느새 힘주어 다리를 벌리던 힘도 약해져 서윤이 황급히 다리를 오므렸다. 연우가 킥킥 웃으며 서윤의 다리를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쓸어내렸다.

“……으.”

어느새 서윤의 발목까지 내려간 연우의 손이 그녀의 발 아래를 헤집는다. 가볍게 들어 작은 발을 손 안에 쥐었다. 다리가 들리며 순간 무게 중심이 흐트러졌지만 단단히 잡아 주는 연우 덕에 미끄러지지는 않을 수 있었다.

“어떻게 발이 이렇게 작을 수 있죠.”

발가락 사이사이를 매만지며 연우가 중얼거렸다. 서윤의 어깨에 턱을 괸 채로 관찰하듯 그녀의 발을 바라보았다.

“입에 넣고 하나씩 혀로 빨아 보고 싶어요.”

“제발 그런 말은…….”

“입 닥치고 실천으로 옮길까요?”

섬섬옥수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예쁘고 곧은 손이 서윤의 발을 매만졌다. 신기한 물건을 대하는 양 주무르고 비비며 남김없이 예뻐했다. 사랑받고 있었다. 실로 짙고 무거운 사랑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깃털처럼 가볍고 산들산들하게만 느껴졌다.

“후우…….”

“…….”

엉덩이 아래에서 커지는 성기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서윤에게까지 다 전해질 정도로 크기를 키우고 있는데도, 연우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갔다 오느라 힘드셨죠. 그러게, 그런 일은 그냥 시키세요.”

“그래도…….”

“사람을 부리는 일에 익숙해지셔야죠.”

연우가 화두에 오늘 서윤의 외출을 올리자 서윤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레 찔려 되는 대로 말을 만들어 냈다.

“내 손으로 다 해 주고 싶어서…….”

“아.”

서윤의 말에 연우가 감탄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윤이 슬그머니 뒤돌아보았다. 마주 본 연우의 표정이 꼭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연우의 눈빛이 샅샅이 몸을 핥고 가는 듯하여 솜털까지 곤두섰다.

“신기해요. 귀여운 말도 할 줄 아시네요.”

“…….”

“일부러 이러시나 싶을 정도로.”

축축이 젖은 목소리가 한 번 서윤의 귓가를 살랑이고, 흠뻑 젖은 손이 또 한 번 서윤의 볼가를 문질렀다. 연우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숨결이 얽히고 곧장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연우가 읊조렸다.

“제가 참았으면 하세요?”

“……뭐를?”

“뭐든요.”

“…….”

“그래서 이렇게 애교를 부리시는 건가 싶어요.”

서윤의 눈꺼풀이 느리게 감았다 떠졌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눈앞의 연우만이 오롯이 그녀의 세상에 들어찼다.

“아무래도…… 못 참겠어요.”

쪽. 짧은 입맞춤이 신호탄처럼 쏘아 올려졌다.

“침대로 가요.”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가 서윤을 한 품에 안아 들었다.

애간장이 녹아내릴 정도로 부드러운 섹스였다. 그동안의 섹스가 무색하게도 연우의 몸짓은 부드러웠다. 서윤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를 혀로 샅샅이 핥고, 입을 맞추며 그녀의 몸을 열었다. 세게 움켜쥐거나 신랄한 음담패설 없이도 서윤을 달궜다.

예쁘다고 말하고, 사랑스럽다고 속삭였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 살갗을 깨물며 사랑한다는 말을 돌림노래처럼 이어갔다. 서윤은 쉽게 달떴고 금세 서글퍼졌으며 자꾸만 혼란스러웠다.

“살살, 사, 살살.”

“네, 살살.”

“흐읏, 읏.”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넣으려는 연우를 바라보며 서윤이 본능적으로 마른 배를 움켜쥐었다. 아직 작은 점에 불과할 아이에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운 눈이었다.

쪽, 쪽. 연우가 서윤의 속눈썹 위로 입을 맞췄다. 왼쪽, 오른쪽 공평히 사랑을 담아 입술을 내렸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저토록 아끼는데, 물러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반만 넣을게요.”

“으, 으응. 흣. 흐읍.”

연우가 서윤의 턱선을 따라 입술을 뭉개며 성기를 삽입했다. 까끌한 숨이 서윤의 입술 새를 타고 흘러나왔다. 연신 배를 쥐고 있던 서윤이 뱃가죽 아래로 느껴지는 성기의 윤곽에 놀라 손가락을 더듬었다. 반만 넣었는데도 이 정도인데 그간은 어떻게 그의 성기를 받아 냈는지 도통 믿어지지 않았다.

“하아, 선생님.”

“연우야, 연우야…….”

서윤이 매달리듯 연우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하염없이 연우의 이름을 부르며 쾌락에 울부짖었다. 밤새도록, 다음 날에도, 마지막으로 남을 관계임을 상기하며 그의 침대 위에서 기꺼이 흐드러졌다.

* * *

공연 첫째 날이 밝았다. 공연장 앞은 이른 아침부터 오프라인용 티켓을 구매하고자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우와 함께 차에서 내린 서윤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감탄했다. 만약 연우를 만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았다면 자신 역시 저 줄에 서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가요.”

연우가 서윤의 허리춤에 손을 대고 그녀를 이끌었다. 잠시 마주친 눈에 웃음기가 어려 있다. 연우가 안내하는 대로 걸음을 옮기며, 서윤이 어젯밤 잠들기 전 선아와 주고받았던 문자를 떠올렸다.

VIP석에 앉아 있어야 해서 몰래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선아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인터미션 끝날 무렵에 연락할게요. 그때 나오세요]

[공연장 뒤에 차 대기시켜 놓는다고 하네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인데도 자리를 뜨는 상상을 하자 심장이 조급히 뛰었다. 허리춤에 걸쳐진 연우의 존재감이 서윤을 마음 졸이게 했다.

자리를 벗어나는 서윤을 발견하고 연우가 연주를 멈춰 공연을 망치는 상상도 이어졌다. 없는 일도 아니었다. 서윤의 결혼식 때, 연우는 정말로 그렇게 했었으니까.

어느새 대기실 앞이었다. 연우가 대기실의 문을 열어 서윤을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지난 리허설 때와 같이 모두에게 개방해 열어 둘 줄 알았던 대기실은 연우가 들어옴과 동시에 굳게 닫혔다. 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우를 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주세요, 선물.”

오로지 연우의 관심은 서윤이 들고 있는 도시락통에 향해 있는 듯 보였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만든 새우볶음밥 도시락이었다. 예쁜 모양은 아니었지만 간을 보았을 때 꽤 맛있었다. 거기에 실수로 산 과일까지 깎아 구색을 맞췄다. 가볍게 시작한 도시락을 3단이나 쌓아 올렸다.

“……여기. 마지막 공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전혀요.”

서윤이 들고 있던 도시락 가방을 건네자 연우가 기쁘게 받아들었다. 소풍 전날의 아이 같은 미소를 보자 공연히 마음이 아팠다. 서윤은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특히나 어제오늘 들어 더 다정하고 더 달게 구는 연우를 볼수록 그랬다.

“선생님, 옆으로 오세요.”

어느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연우가 도시락을 펼쳤다. 서윤이 쭈뼛거리며 연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연우가 씩 웃으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든다. 카메라를 켜 도시락 앞으로 휴대 전화를 가져다 대기에 서윤이 다급히 물었다.

“뭐 해?”

“찍으려구요.”

“이걸?”

“네.”

찰칵 소리와 함께 서윤이 펼쳐진 도시락을 바라보았다. 맛은 있었지만 모양은 괴식처럼 보였다. 레시피 책에 나와 있는 도시락들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은커녕 있는 반찬을 때려 박았다는 인상을 주는 도시락이었다. 그걸 사진으로 남기다니 당혹스러웠다.

“잘 먹을게요.”

연우가 그런 서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식탐도 없는 데다가 먹는 것도 잘 입에 대지도 않는 이가 볶음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 깔끔하게 먹었다. 이렇게 잘 먹는 모습을 보는 일도 처음이었다.

“정말 맛있네요.”

연우가 희미하게 웃으며 서윤이 만든 음식을 칭찬했다. 별것도 아닌데 내내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서윤이 께름칙한 얼굴로 연우를 지켜본다. 연우가 마저 볶음밥을 크게 한 숟갈 떴을 때, 볶음밥의 향이 순간 서윤에게로 훅 끼쳐 들었다.

“읍.”

급작스레 숨통을 조이는 울렁임에 서윤이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연우의 눈길이 돌아왔다. 서윤이 연우의 눈치를 살피며 파들파들 눈꺼풀을 떨었다.

“…….”

“자,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서윤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잰걸음으로 비틀비틀 걸어가 대기실의 문을 열어젖히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서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본 연우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서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새까맣게 잠겨 있었다.

입덧은 화장실에서 30분을 견딘 후에야 겨우 진정이 됐다. 헛구역질을 하는 서윤의 곁에는 어느새 쫓아온 연우도 함께였다.

어디가 아픈지, 가타부타 묻지는 않았다. 다정한 손길로 등을 두드려 주고, 몸에 힘이 빠져 발을 절며 일어나는 서윤의 입가에 흐른 타액을 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콜록.

서윤이 연우의 부축을 받아 세면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연우가 물을 틀어 서윤의 입가를 조심조심 닦아 주었다. 화장실 밖에서 몇몇 스태프들이 두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연우야, 이제 괜찮아.”

서윤이 주먹 쥔 손으로 연우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 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연우의 팔은 멀어졌지만 미약한 힘이 연우의 발걸음까지 뒤로 물릴 수는 없었다.

“공연은 끝까지 보실 수 있으시겠어요?”

연우가 가까이 얼굴을 맞대 오며 물었다. 인터미션 이후 공연장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잠시 당황했지만 서윤은 애써 입꼬리를 잡아당겨 웃었다.

“그럼.”

“힘들면 말씀하세요.”

“응, 그럴게.”

“저…….”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로 스태프 한 명이 끼어들었다. 연우가 몸을 돌려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연우 너머로 보이는 스태프의 얼굴은 죽을죄를 지었다는 얼굴이라, 그가 어떤 표정으로 스태프를 돌아보았는지 서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됐다.

“죄송합니다. 리허설 곧 시작해서요.”

“알겠습니다.”

싸늘하게 대답한 연우가 서윤에게로 뒤돌았다. 서윤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여전히 걱정 어린 눈을 했다.

“얼른 가 봐. 공연…… 끝까지 잘하고.”

서윤이 간절한 당부를 담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연우가 한동안 말없이 서윤을 내려다보았다. 지그시 바라보는 끈질긴 시선에 서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연우가 짧게 웃곤 대답했다.

“네.”

“…….”

“금방 다시 만나요, 선생님.”

쪽. 연우가 서윤의 머리카락 위로 짧게 입 맞췄다. 생각보다 크게 난 소리에 밖에 서 있는 스태프들이 당황하여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서윤이 먼발치에서나마 연우를 지켜보면 모를까. 먼저 자리를 벗어나는 연우의 뒷모습을 서윤은 꽤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공연장 입장이 시작되었다. VIP석에 앉은 서윤이 고요한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아직 붉은 장막에 가려진 무대를 보며 기대에 찬 관객들이 곳곳에서 재잘거렸다.

손에 쥐고 있는 휴대 전화에서 짧은 진동이 울린다. 때마침 관객석 조명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머지않아 장막이 열리며 무대 위로 조명이 쏟아졌다.

“…….”

무대 한가운데를 주시하던 서윤이 손에 쥐고 있는 휴대 전화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선아로부터 서윤을 태울 차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킨 서윤이 다시 무대를 바라본다. 세련된 슈트를 입은 연우가 박수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왔다. 걸어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는 외견이었다.

한 손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짚은 연우가 관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그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연우가 관객석에 앉아 있는 서윤을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서윤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몰아치는 긴장에 숨을 잠가 두어야 했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오는 시선이 사라진 후에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연우가 자리에 앉는 모습이 보인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연주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혼을 빼고 연주를 지켜보는 가운데에 오로지 서윤만이 불안한 얼굴을 했다.

“와…….”

서윤의 옆자리에 앉은 이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서윤은 그제야 홀린 듯이 연우를 바라보았다. 곧은 등과 아름다운 손가락이 천상의 선율을 빚어냈다. 장대비 같은 울림이 어깨 위로 섬세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같은 공간 안에 있음에도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서윤이 조심스레 배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아이는 태어날 적에 배 속에서의 기억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덜컥 두려워져, 서윤은 아직 형체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아이를 향해 속으로나마 속삭였다.

얘야, 길게 감동하지 마. 너무 오래 기억하지 마. 언젠가는 잊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선아는 아이를 지우고 싶다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임신 소식을 알았을 때는 왈칵 울음을 터트릴 만큼 놀랐지만 기이할 만큼 소중했다. 무한한 사랑 아래에서 축복받으며 태어났다면 더 좋았을 텐데, 공연히 미안했다.

……그래도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기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터미션이 코앞이다. 관객들에게는 쉬는 시간이었지만 연주자와 스태프들에게 인터미션은 다음 연주를 향한 치열한 도움닫기였다. 다행히 인터미션 내내 연우는 서윤을 찾지 않았다. 같은 공간, 다른 장소에서 숨 쉬며 다음을 기다렸다.

서윤은 그의 품을 떠나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

20분간의 인터미션이 끝난 뒤, 관객석은 아직 소란스러웠다. 화두는 당연히 공연의 주인공인 연우였다.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연주자인지를 실감하며, 서윤은 한 팀장이 그녀에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를 다시금 이해했다.

“시작한다!”

관객석의 불이 꺼지며 서윤이 쥐고 있는 휴대 전화에도 짧은 진동이 두 번 다녀갔다. 서윤이 지그시 고개를 내려 메시지를 확인했다. 순간 보이는 이름에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하나는 선아였고, 하나는 연우였다.

10분 뒤에 공연장을 나오라는 메시지 뒤로 깨끗하게 비운 도시락통 사진이 나란히 도착해 있었다.

“…….”

동시에 무대 위로 연우가 등장했다. 서윤이 황급히 휴대 전화 화면을 끄고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서윤을 바라보지 않았다. 연우는 곧은 걸음으로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관객석을 향해 인사하고는 곧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한동안 연주는 시작되지 않았다.

자리에 앉고도 5분 동안이나 정적이 이어지자 관객석이 웅성거렸다. 서윤 역시 당황하여 연신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러다 10분이 되어 나가는 모습이라도 들킬까 봐 서윤이 손가락을 떨었다.

6분, 7분, 8분, 9분…….

연주는 여전히 시작되지 않았다. 곧게 정면을 바라보는 연우에게 미동은 없었다. 이런 와중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눈에 띄기만 할 뿐이다.

서윤이 당황하여 선아에게 연락하려는 찰나였다.

10분이 되기 직전, 연우가 건반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그의 몸짓 하나에 소란하던 좌중이 순식간에 정적을 꽃피웠다. 머지않아 첫 음이 그의 손가락 아래에 짓눌렸다.

서윤이 숨을 몰아쉬며 허겁지겁 자리 아래의 가방을 챙겼다. 옆자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곡이 달라졌다.

예정되어 있던 곡이 아니다.

공식 석상에서 단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었던 무결한 피아니스트의 크나큰 실책이었다.

당황한 서윤이 구두 한쪽을 놓고 가는 신데렐라처럼 발을 절며 시선을 흘렸다. 실체 없는 눈길 따위를 들고 그녀를 찾으러 올 리 없다고 믿었다.

“…….”

눈이 마주쳤다. 달아나는 서윤을 연우가 무감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윤은 두려운 눈으로 직감했다. 연우가, 서윤의 도망을 알고 있었다.

서윤이 급히 뒤돌았다. 있는 힘껏 내달리며, 서윤은 그의 손끝에서 연주되고 있는 곡의 제목을 더듬었다. 쇼팽 전주곡 4번. 쇼팽의 장례식장에서 연주되었던 곡이었다.

그가 그녀를 데리고 오기 위해 썼던 피아니스트란 가면은 오늘부로 모두 벗겨질 것이다. 이 곡은 연우가 피아니스트로서 연주하는 마지막 곡이 되리라.

* * *

“괜찮으세요?”

공연장을 나오는 내내 서윤은 멀리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가 끊기지는 않을지 마음을 졸였다. 겨우 차에 탔을 때도 믿기지 않아 숨을 몰아쉬었다.

얼른, 얼른 가 주세요.

차에 오르자마자 내뱉은 말은 다급하여 운전석에 앉은 여자마저도 조급하게 만들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서야 서윤은 여자를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네. 감사합니다.”

“선아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처음이라 들어 주기는 했는데, 걱정이 되네요. 너무 떠셔서. 정말 괜찮으신 거죠?”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서윤이 스스로에게 되뇌듯 반복적으로 말했다. 여자는 그제야 안심한 듯 서윤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윤의 마음 한편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연우는 서윤이 도망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일까. 어떤 루트로 알게 되었을까.

처음 결심했던 순간부터?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금방 다시 만나자던 연우의 목소리가 떠오르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순간 선아를 향한 불신이 움텄지만 그녀를 통해서는 아니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서윤이 어깨를 말았다. 알고 있었다면 왜 서윤에게 말하거나 잡으러 오지 않은 거지? 떠난다면 보내 주겠다는 손쉬운 이별이라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윤이 떨며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 * *

병원은 서울에서 차로 4시간은 달려야 하는 곳에 위치했다. 함께 온 여자의 안내를 따라 서윤은 입원 수속을 밟고 병실에 올라갈 수 있었다.

병원에서 서윤은 지서윤이 아닌 김은채라고 불렸다. 전산망에 서윤의 이름이 올라가면 발각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다른 여자의 이름을 빌려 서윤의 것처럼 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지만, 서윤은 침묵으로 따랐다.

“……채 씨. 김은채 씨?”

“아, 네.”

아직 불리는 이름이 익숙지 않아 서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복으로 환복한 서윤은 가장 먼저 임신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진료실 앞에 앉아 있었다. 몇 가지 검사를 받았고 임신이 맞는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서윤 씨.”

진료가 끝나고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서윤이 퍼뜩 놀라 의사를 바라보았다. 서윤은 어렴풋이 그녀가 선아의 오랜 친구임을 알아챘다.

“……네.”

“선아한테 대강 이야기는 들었어요. 정확히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 낳을 동안은 잘 지내보죠. 요새는 미혼모에 대한 지원도 많은 편이니까 이겨 내 봐요. 서윤 씨 이제 엄마잖아요.”

의사의 시선에서는 서윤을 향한 따스한 연민이 묻어났다. 서윤이 울컥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 삼키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한선아 선생님께도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구요.”

“내일이나 모레쯤 서윤 씨 보러 잠깐 내려온다니까 그때 직접 보고 인사해요.”

“정말요?”

선아가 온다는 이야기에 서윤의 얼굴색이 밝아졌다. 의사가 그 모습을 보고는 막냇동생 보듯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네. 별일 없는 한 온다네요. 이제 얼른 가서 쉬어요. 내일 회진 때 보죠.”

서윤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병실로 돌아가며 천천히 병원을 둘러보았다. 아직 낯선 공간이지만 점차 익숙해질 것이다.

이곳에서 어떻게든 치열하게, 사회로 돌아가서도 살아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서윤이 못내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잘될 거야, 잘될 거야 중얼거렸다.

하루 이틀이면 온다던 선아는 오지 않았다. 병실의 창가 쪽, 주차장이 보이는 자리에서 오랫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며 기다렸으나 선아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게다가 의사가 선아와 연락이 안 된다는 말을 흘리듯이 전해서, 첫날의 결기와는 달리 서윤의 상태는 무척 불안정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창가 옆 소파에 앉은 서윤이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불안한 상상이 이어졌다. 혹시 선아가 서윤의 도주를 도운 것을 알고 연우가 그녀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한 것은 아닐지, 덜컥 두려워졌다.

공연은 잘 끝났을까.

예정되었던 곡이 뒤바뀌던 순간을 떠올리며 서윤이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도망치는 차 안에 올랐던 즉시 휴대 전화를 끄고, TV도 한번 틀어 본 적 없었기에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일을 망쳐 버린 것은 아닐까. 심지어는 자신을 도와준 선아마저도 말이다.

똑똑.

생각에 잠겨 있던 서윤이 노크 소리에 퍼뜩 몸을 일으켰다.

“네. 들어오세요.”

서윤이 허락하기 무섭게 의사가 문틈 새로 얼굴을 비췄다. 그러고 있을 줄 알았다는 얼굴이다. 병실 안으로 들어온 의사가 가운 주머니 안에 양손을 찔러 넣고는 베드에 앉았다.

“선아, 오늘 온대요.”

“아.”

“아기도 엄마가 불안한 거 느껴요. 매일 여기 앉아서 밥도 잘 안 먹는다면서요.”

“입덧이 심해서요…….”

서윤이 손가락으로 마른 입가를 더듬으며 멋쩍게 웃었다. 얼마나 까탈스러운 아이가 들어 있는지, 날이 갈수록 몸이 받는 음식이 없었다.

이따금 먹고 싶은 것들도 있었으나 변두리에 있는 병원에서 보호자 없는 서윤이 누군가에게 요청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잠깐 사이에 서윤은 눈에 띄게 살이 내린 모습이었다.

의사가 쯧, 혀를 차며 앙상하게 마른 서윤을 본다. 당장이라도 대가리가 뚝 꺾일 듯 위태로운 꽃이었지만 꽃은 꽃이었다. 섬세하게 그려 놓은 이목구비가 처연했다.

“그래도 이것저것 먹어 보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찾아보는 게 좋아요. 선아 곧 온다니까 누워서 좀 쉬어요.”

“바쁘셨던 거예요?”

“글쎄요. 그런 말은 없고 오늘 온다는 말만 하고 끊었어요. 바쁘긴 한가 봐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기는 하더라.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기는 했는데, 전화가 갑자기 뚝 끊겨서.”

의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부러 말을 전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와 주었다는 것을 안다. 서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사와 마주 보았다.

“이야기 전해 주셔서 감사해요. 바쁘실 텐데…….”

“바쁘기는요. 아무튼 한 세 시간 전쯤에 연락 왔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바로 온다는 게 나도 진료 보느라 늦어졌네요.”

“아니에요.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윤이 희미하게 웃으며 의사를 배웅했다. 어느새 불안했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마주 보며 작은 미소를 걸어 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병실 안에 홀로 남은 서윤이 창가로 걸어갔다. 그동안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지난 한 달 동안 늘 연우와 함께 있었기 때문인지도.

그랬다. 하는 일 없이 1인실에 홀로 남아 있다 보면 문득 허리춤이 시렸다. 이따금 연우와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하루가 쏜살같이 달려나갔던 순간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연우가 어떤 사람인지를 떠올렸다. 속은 거야. 속은 거라고. 그 애는 네가 알던 아이가 아니야. 스스로를 다그치듯 말했다.

멍청한 마음은 고작 그 정도로 서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다정한 눈으로 사랑을 말했으면서, 그녀를 끔찍한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서윤이 중얼거렸다. 아이가 태어나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갈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 그녀의 앞에 펼쳐져 더 이상은 연우의 생각도 나지 않으리라.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서윤이 창밖을 보았다. 때마침 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외딴곳의 병원인지라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다. 서윤이 눈을 크게 뜨고 들어오는 차를 주시했다.

“……아.”

선아였다. 차에서 선아가 내리고 있었다. 선아라는 확신과 함께 서윤은 곧장 소파에서 내려왔다. 벗어 두었던 슬리퍼를 욱여 신고는 가쁜 걸음으로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있어서, 서윤은 그녀를 한달음에 마중 나갈 수 있음에 기뻤다. 혹시나 엇갈릴까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내려가는 숫자판을 보며 서윤이 해야 할 말을 곱씹었다. 서윤은 선아에게 고마웠다. 말로는 다할 수 없겠지만 정말 고맙다고 소리 내어 전하고 싶었다.

마침내 1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서윤이 코너를 돌아 주차장과 연결된 로비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찬란히 부서지는 겨울 햇살 아래로 누군가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

실루엣만 보아도 모를 수가 없는 외견이 서윤을 곧게 바라보며 문을 지나온다. 그 옆에 선 선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꺼풀을 내리깔고 있었다.

손을 떨며 자리에 멈추어 선 서윤이 황급히 뒤돌았다.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허겁지겁 자리를 달아났다. 돌아서며 스친 시선이 연우의 것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 * *

서윤이 도망치는 광경을, 연우는 낱낱이 목격했다. 도망치는 사냥감을 보고 있음에도 서둘러 총구를 겨누거나 달려가 쫓지 않았다. 어차피 이 건물에 있는 이상 그녀는 그의 손아귀 안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저렇게 겁에 질려 달아나는데도 괜찮나요?”

슈트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로, 서윤에게 달아날 시간을 주는 연우에게, 선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주일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선아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서윤의 도주를 도운 것을 알게 된 연우는 그녀의 아버지부터 압박했다. 일주일 동안 한천호의 논문 비리로 매스컴이 떠들썩했다. 병원의 세금 문제로도 압박이 들어왔으며, 그녀의 여동생이 운영하는 식당은 재료 수급이 모두 끊겼다. 인터넷에는 식당을 비방하는 글들이 고작 하루 사이에 우후죽순 올라왔다.

선아는 제 발로 걸어가 서윤의 행방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동생 같아 안쓰러운 마음에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고.

‘한 선생님께 제 연인을 여동생처럼 대하라 부탁드린 적 없는데…….’

‘진짜 여동생이 슬퍼하겠는데요, 한 선생님.’

‘친동생이 더 슬퍼질 일은 없어야겠죠.’

연우는 이미 서윤의 위치를 알고 있으면서, 선아가 직접 입술을 열고 병원에 동행하기를 바랐다. 서윤의 세상에 그 어떤 언덕도, 작은 의지마저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의지임이 분명했다.

“후회하실 거예요.”

그런 사랑이 상대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을 리 없다. 선아가 일그러진 얼굴로 연우를 보며 말했다. 비스듬히 선아를 내려다보던 연우가 피식 웃음 지었다.

“네, 후회해요.”

기꺼운 대답이 돌아왔다. 선아의 눈에 의문의 빛이 어렸다.

“더 일찍 가졌어야 했다고.”

무던한 목소리에 반해 눈빛은 서늘했다. 그 자리에 굳어선 선아를 둔 채로 연우는 걸음을 옮겼다. 그 옛날, 다프네를 좇아 사랑을 갈구하던 아폴론처럼은 아니었다. 월계수로 변한 여자를 머리에 얹고 승리라 자위하며 살아가는 일은 꼴같잖기만 했다.

만약 서윤의 가슴에 납 화살이 꽂혀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그딴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가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하면 된다. 궁지에 몰려 두려운 얼굴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신을 올려다보면 되었다.

사랑은 그녀를 가진 다음의 일이다.

이 순간만큼은 지금 현재의, 살아 숨 쉬는 그녀를 소유하는 것만이 오롯한 그의 승리였다.

* * *

서윤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12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를 얌전히 기다릴 수는 없었다. 다행히 서윤의 병실은 9층에 있었고, 벽에 걸린 이름도 서윤의 것이 아니었다.

서윤은 있는 힘을 다해 계단을 올랐다. 숨이 턱턱 막히고 가빠 왔지만 중요치 않았다. 연우가 대동하고 온 인원이면 몇 시간이면 서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디든 문을 잠그고 숨어들어야 했다.

병실로 가야 해.

병실에서 문을 잠그고 떠나기를 기다리자.

단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쯤 알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병실 앞에는 지서윤이 아닌 김은채라 적혀 있으니 어쩌면 지나칠지 몰랐다.

서윤은 8층을 알리는 팻말을 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혹여 아이에게 무리가 갈까 아랫배를 부여잡은 채로 몇 번이고 다독였다.

서윤이 떨리는 눈으로 비상구의 문을 반쯤 열어 동태를 살폈다. 때마침 비상구 위층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0층 비상구에는 안 계십니다.”

기다릴 새도 없었다. 서윤은 비상구의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가야 했다. 다행히 복도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서윤이 허겁지겁 자신의 병실을 찾아 달렸다.

[904, 김은채.]

그 팻말을 보자마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서윤이 주변을 살피며 급히 병실 문을 밀었다. 병실 문을 닫고 잠금장치가 잠긴 것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겨우 안도하며 침대로 향하는데, 순간 서윤의 숨이 멈추었다. 소파에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연우가 들어오는 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선생님이랑 노는 게 제일 즐거워요.”

서윤이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뒤로 걷다 문에 부딪쳐 무릎이 무너지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가 서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주저앉은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서늘하게 지껄였다.

“숨바꼭질.”

“……여, 연우야.”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몇 번을 말해도 선생님은 날 위해 꼭 들켜 주니까.”

연우가 서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심한 얼굴을 그녀에게 가까이 붙인 채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서윤이 배를 움켜쥐었다.

“선생님, 기억하세요?”

“……흐, 흐으.”

“저는 선생님 말씀을 참 잘 듣는 아이였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제 말 하나를 안 들어 주세요. 제 곁에 있어만 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쥐새끼처럼 도망칠 만큼? 사랑해 달라는 것도 아닌데, 왜요?”

“그,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 사랑이라고…….”

서윤은 내심 연우가 반문하기를 바랐다. 아니라고 말해 주기를 원했다. 오해라고, 우연이었을 뿐이라고, 신의 농간이라 말해 주기를. 차라리 그에게 사랑하겠다는 희망을 주고 홀연히 떠나간 그녀의 잘못이었으면 했다.

“하하.”

그런데 연우가 웃었다. 그녀의 미약한 바람을 무참히 짓이기며 입술 새로 웃음을 터트렸다. 연우가 손가락 끝으로 서윤의 턱을 들어 올린다. 못마땅하다는 듯 서윤의 낯을 음험하게 훑어 내렸다. 서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연우의 손아귀 안에서 발발거리며 떨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선생님도 행복해하셨잖아요. 제게 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죠. 알게 된다 해서 달라질 게 있나요?”

“…….”

“그리고, 제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면 저를 사랑하셨을 거예요? 아니요. 선생님은 프랑스의 그 거지 같은 신혼집에서 목숨을 끊으셨겠죠. 제 말이 틀려요? 똑바로 대답하세요.”

연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대답을 종용했다. 위압적인 태도에 서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서윤이 언젠가 연우를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그가 그녀를 죽이기라도 하는 양, 서윤은 연우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아 머릿속을 헤집어야만 했다.

“여, 연우 너는 내 제자고.”

서윤이 허겁지겁 입술을 뗐다. 연우의 시선이 한결 짙어졌다.

“그래서 선생님 소리 하면서 쑤셔 줄 때 그렇게 조였구나. 내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씹물을 싸던데. 저는 또 좋아서 흘리는 줄 알았네요.”

“……어리고.”

“이 자리에서 같이 죽어 버릴까. 함께 다시 태어날 날을 고대하면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그때는 우리를 방해하는 같잖은 변명 없는 세상일지도 모르니까. 응?”

“으, 으…….”

“그렇게 귀애하는 제자라면서, 그렇게 어린 나를 편할 대로 다 이용해 놓고……. 선생님은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요?”

연우가 서윤의 턱을 매몰차게 놓았다. 그 반동에 서윤의 턱이 돌아갔다. 서윤은 넋이 나가 초점 잃은 눈동자로 하염없이 투명한 눈물을 떨궈 냈다.

서윤의 허벅지 아래로 연우의 팔이 들어왔다. 연우가 그대로 서윤을 안아 올렸다. 무언가 짐작한 서윤이 크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 필사적인 몸짓이 다 느껴지는데도 연우는 덤덤했다. 베드로 걸음을 옮겨 단번에 그녀를 침대 위로 내던졌다.

“아흑.”

베드에 처박힌 서윤이 다가오는 연우를 본다.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을 벗은 연우가 베드 위로 올라오자 매트 한쪽이 크게 출렁였다. 오갈 데 없는 서윤만이 배를 부여잡은 채로 소용없는 저항을 이어갔다.

“하면 안 돼, 하면 안 돼…….”

이대로라면 무자비한 관계가 될 게 자명했다. 서윤이 배를 더 깊이 감싸며 울부짖었다. 연우가 개의치 않고 서윤의 몸을 뒤집었다. 굴욕적으로 엎드려 엉덩이를 높이 치들게끔 골반을 잡고 단단히 고정했다.

“아이가 있어, 아이가. 흐으. 네 아이가…….”

서윤이 고개를 돌려 구걸하듯 고백했다. 연우의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갔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이는 또 만들면 되는데.”

연우가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서윤은 연우가 그녀의 임신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느낄 정도였다.

“정말 아이가 있어. 선생님께 여쭤봐. 네 아이야. 제발, 제발 그러지 마. 네 아이, 네 아이잖아. 연우야.”

“네, 우리의 아이였죠. 선생님이 제게서 도망치기 전까지는요.”

서윤이 도망쳤기 때문에 아이에게 위협이 온 거라고, 연우가 말했다. 정신이 나가 이름도 없는 아이를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며 울음을 터트리는 서윤을 바라보며 연우가 바지 버클을 풀었다.

“아이를 지키고 싶으시다면, 선생님이 조금 더 노력하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뭐라도 해 보세요. 선생님 손으로 보지라도 직접 벌리면서 애원하시면 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르죠.”

서윤이 멍하니 연우를 바라본다. 어느새 성기를 꺼내어 든 연우가 서윤이 입고 있는 병원복 하의와 속옷을 잡아 내렸다. 가벼운 옷은 허무하게 그의 손에 무릎까지 내려갔다. 서윤이 히끅히끅 울며 베개로 얼굴을 파묻었다. 뒤에서 연우의 성기 끝이 쿡, 쿡 엉덩이를 찔렀다.

“하아…….”

베개에 고개를 처박은 서윤의 두 손이 천천히 올라온 것은 그때였다. 연우가 흥미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파들파들 떨고 있는 손이 스스로 둔부를 쥐었다. 고양이처럼 한껏 엉덩이를 연우 쪽으로 높게 치들고 힘주어 엉덩이를 벌렸다.

정적 속에서, 한동안 서윤의 서러운 울음소리만이 이어졌다. 연우는 당장이라도 구멍 안을 꿰뚫듯이 성기를 갈라진 틈 사이로 비비고 있었다. 그녀가 바짝 벌려 놓은 사이로 좆을 비비자 아찔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엉덩이 위로 정액을 싸질러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울기만 하실 거예요?”

참고 인내하며, 연우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서윤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컸다.

“조금 짜증이 나려고 해서…….”

“할게, 할게. 할 테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우가 비좁은 구멍 입구로 좆 대가리를 디밀었다. 마땅한 애무도 없이 시작된 삽입에 서윤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혹여 연우가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을까 봐 엉덩이를 벌리고 있는 손에 한껏 힘을 줬다. 그런데도 마음에 차지 않는지, 연우가 힘껏 서윤의 둔부를 내리쳤다.

“똑바로 벌리세요. 저는 선생님께 손을 올리고 싶지 않아요.”

성마른 요구에 서윤의 엉덩이가 경련했다. 연우에게 맞은 곳이 화끈거렸다. 서윤은 더듬거리면서도 입술을 뗐다.

“보지에, 사, 살살, 흐으.”

“그렇게 겁에 질려서 말씀하시면 제가 참 즐겁겠어요.”

성기가 밀고 들어온다. 숨이 턱턱 막히는 감각이 몸을 휘감는데도 서윤은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자칫하다가 연우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겁이 났다. 아이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다.

아무 말이라도, 그가 좋아하는 말을, 연우가 기뻐하던 말을…….

“선생님 보지에, 살살, 살살…… 연우 자, 자지를 넣어 주면, 흐윽, 좋겠어…….”

연우의 성기를 애걸하며, 서윤이 허리를 한껏 치들고 연우에게 아래를 보였다. 연우가 지그시 끝과 끝을 맞대었을 뿐인 접합부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물을 흘리는 구멍이 벌름거리며 연우의 성기를 삼키고 싶어 안달이었다.

피식,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연우가 서윤의 등 뒤로 몸을 겹쳐 왔다. 등 뒤로 남자의 무게감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발정기를 맞이한 짐승들의 교미처럼 그가 그녀의 몸을 점령했다.

“자지나 물려 달라고 구걸하고. 보지로 좆 받는 게 그렇게 좋으세요?”

서윤의 목덜미를 파고든 연우가 음험하게 속삭였다. 서윤은 수치심에 비적비적 눈물을 흘리면서도 대답해야 했다.

“좋아, 좋아…….”

“얼마나요?”

“흐윽. 모, 몰라. 그냥, 연우 자지 빨리, 빨리 먹고 싶어. 제발, 제발 넣어 줘. 살살. 제발 살살. 흐읏. 흑.”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몰랐다. 서윤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음탕한 말을 지껄이며 연우를 향해 애걸했다.

“하아.”

연우의 깊은 신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성기가 느릿하게 서윤의 안으로 들어왔다. 이따금 꺽꺽거리며 울어야 할 크기였지만 이 정도라면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다. 숨을 고르며 참아 낼 수 있었다.

“우리 아이도 엄마랑 아빠랑 화해하는구나, 기쁘겠네요. 후우…….”

“흐읏, 으, 응. 엄마랑 아빠랑…… 괜찮아. 괜찮아.”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말을 서윤이 읊조렸다. 제 아이를 지키고 싶어 기꺼이 진창을 걷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연우가 혀를 내어 서윤의 귓바퀴를 샅샅이 핥았다. 얕은 허리 짓과 함께 귓속까지 질척하게 빨아먹으며 입술을 뗐다.

“아이한테 엄마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말씀해 주셔야죠.”

“아흐, 흐읏. 아, 아응.”

“네? 얼마나 사랑하면 이렇게까지 자지를 조르겠어요.”

“응, 응. 엄마가 아빠를, 너무, 너무 사랑해서…….”

“하, 씨발…….”

사랑한다는 말에 내벽 안에서 연우의 성기가 형형하게 부풀었다. 서윤에게 여과 없이 느껴질 정도였다. 히익, 숨을 삼키며 말도 잇지 못하고 바들거렸다.

“저를 사랑하세요?”

“흣, 으흑.”

“선생님, 저를 사랑하세요?”

광기에 사로잡힌 눈이 서윤을 향해 물었다. 목선과 어깨를 물고 씹으며 미친 사람처럼 자신을 사랑하느냐 물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지만, 막상 그녀의 입술 새로 사랑한다는 고백이 흘러나오자 미친 쾌락이 차올랐다.

“사랑해. 연우야, 사, 사랑해. 흐윽. 그러니까 제발, 살살해 줘. 아, 아읏. 흑.”

참을 수 없었다. 연우가 팔을 아래로 내려 서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반쯤 들어가 있는 성기를 뒤로 빼내고는 그녀의 귓가에 음험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선생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안 돼, 안 돼. 안 돼, 연우야. 히익, 윽. 욱……!”

퍽! 성기가 서윤의 몸을 쪼개며 끝까지 들어왔다. 고개를 내민 서윤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헛구역질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길고 흉측한 성기가 그녀의 안을 마구잡이로 범하기 시작했다. 푹, 푹, 푹…… 성기로 말캉한 내벽을 양껏 쑤시며 그녀를 탐했다.

“제발, 제발. 아흑. 귀여운, 귀여운 아이일 거야. 착한 아이일 거야. 똑똑한, 똑똑한 아이일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넋을 잃은 서윤이 애원하며 끅끅 눈물 흘렸다. 이미 단단히 사로잡힌 몸은 저항도 무리였다. 연우가 내벽을 범하면 범하는 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철제 베드가 연신 삐걱거리며 괴성을 질러 댔다. 엉덩이를 붙들고 있던 서윤의 손은 더듬더듬 내려와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정신없이 흐느끼면서도 서윤의 본능은 배 속의 아이를 찾고 있었다.

“후, 괜찮아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 아이가 생길 때까지 싸 드릴 테니까, 울지 마세요.”

“아흣, 으, 읏. 왜, 왜 나야. 왜 나야. 왜 나야…….”

서윤의 눈에는 더 이상 작은 불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죽어 버린 그녀의 눈동자가 울부짖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연우가 서윤의 어깨 위로 이를 박아넣으며 중얼거렸다.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요.”

신은 끊임없이 서윤이 그의 것이 아니라 말해 왔다. 그녀를 운명의 곁으로 놓아주라 그를 번뇌하게 했다.

서윤이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었던 순간. 그에게 그 순간은 자신의 것을 빼앗긴 유일한 기억이었다. 생에 그보다 굴욕적인 기억은 없었다. 남은 삶 동안에도 그 순간만큼 그를 흔들 수 있는 기억은 없으리라.

그 하찮은 장난질에 질렸을 뿐이다. 이제는 그와 그녀가 운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연우는 그녀를 다시 그의 품으로 불러들이기로 결심했다. 덫을 놓고 빼앗아, 마침내는 그녀의 숨통을 움켜쥐었다. 완전히 놓칠 바에야 절반이나마 소유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연우는 그녀의 신이 되어, 운명을 말하기로 했다.

서윤은 그의 손으로 빚어낸 연인이었다.

* * *

연우는 서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혼절한 그녀를 안고 집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연우를 보며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공포에 떨며 고개를 숙였다.

“다 나가세요.”

거실에 선 연우가 사용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주일 후부터 다시 출근하시면 됩니다.”

연우의 말에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가 통보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집은 적막에 잠겼다. 짧게 집 안의 적막을 둘러 본 연우가 걸음을 옮겼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끄트머리에서 서윤이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흐, 흐어. 으.”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연우의 얼굴에 서윤이 하얗게 질렸다. 끔찍한 것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버둥거렸다. 연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서윤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를 다정하게 내려다보며,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나셨어요?”

일그러진 얼굴의 서윤이 쉴 새 없이 발버둥 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연우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걱정했는데, 건강하셔서 다행이네요.”

연우의 걸음이 복도를 가로지른다. 열려 있는 방문을 지나, 몇 개의 문을 건너, 마침내 그의 침실로 들어섰다. 연우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녀를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서윤이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두려운 눈으로 연우를 보았다.

“흐, 으.”

서윤이 주춤거리며 엉금엉금 몸을 뒤로 물렸다. 연우가 침대를 향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섰다. 형형한 안광이 그녀를 꿰뚫듯 몰아쳤다.

“벌 받을 시간이에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서윤을 좇는 연우의 얼굴은 싸늘했다.

바닥에 연우가 찢어 벗긴 그녀의 병원복이 나뒹굴었다. 서윤은 침대 옆으로 걸터앉은 연우의 허벅지 위에 알몸 채로 길게 누워 있었다. 엉덩이를 치들고 발발 떨며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선생님께서 왜 벌을 받는지 아세요?”

연우의 차가운 손이 서윤의 둔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서윤의 어깨가 부들거렸다. 숨소리가 점차 거칠었다. 중간중간 히끅거리는 것을 보면 벌써 눈물을 터트린 듯싶었다.

“네, 도망치셨기 때문이에요.”

짝! 연우가 서윤의 엉덩이를 아프도록 내리쳤다. 서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하얀 엉덩이가 붉게 부풀었다. 서윤은 더 이상 우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어린아이 혼나듯 엉덩이를 맞고 있다는 수치보다는 연우를 향한 공포가 더 큰 탓이었다.

한 번 더 서윤의 엉덩이에 손을 올리며, 연우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연약한 몸뚱이가 그의 허벅지 위에서 무력하게 헐떡거렸다. 입술을 벌린 채로 넋이 나갔을 그녀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또다시 도망치시면, 그때는 제 몸에 어떤 피가 흐르는지 알게 되실 거예요.”

짝! 서윤의 볼기가 무자비하게 짓이겨졌다. 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도리질 치던 서윤은 느리게 연우가 건넨 말의 뜻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를 알았다. 그의 몸에 흐르는 불온한 피가 어디에서부터 흘러왔는지 서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장은 아닐 거예요. 사랑하는 여자의 목을 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연우가 손을 내려 서윤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서윤의 허리가 발작처럼 튀어오르자, 그가 힘주어 그녀의 허리 아래를 눌렀다.

“기다려야겠죠.”

“잘못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연우야. 잘못했어…….”

서윤이 흐느끼며 잘못을 빌었다. 고통에 꺽꺽거리며 절규하듯 울었다. 그런 여자를 바라보는 연우의 얼굴은 무감정했다.

“또 도망치실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절대, 절대 아니야. 안 그럴게. 안 그럴 테니까…….”

초점을 잃은 서윤의 눈동자가 말간 눈물을 떨궈 냈다. 처박힌 고개는 애처롭게도 도리질 치고 있었다. 구걸에 가까운 부정에도 연우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짝!

서윤이 괴상한 신음성을 내지르며 볼을 뭉갰다. 어느새 그녀의 하얀 볼기에는 피멍이 올라와 군데군데 붉은 핏방울이 비쳤다.

“제발, 아, 아흐.”

고통에 몸부림치는 몸이 보얗고 가냘프다. 그래, 어떤 날에는 이 연약한 여자와 평범한 사랑에 빠지는 꿈을 꿨다.

가슴 벅차 고백하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서윤은 당황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어쩔 줄 모르는 서윤에게 그는 몇 번이고 구애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단내가 풍기는 말들을 수도 없이 속삭였다. 서윤의 품에 값비싼 것들을 한 아름 안겨 주었다.

허무한 꿈이었다.

이제 연우는 그딴 것 따위 바라지 않았다. 아름답게 사랑하고 담백하게 이별할 수 있는 얕은 마음 따위가 뭐라고. 그건 정상적인 인간들에게나 가능한 사랑이었다.

그는 고작 그 정도의 사랑으로는 부족했다. 모자라 갈증이 났다. 평생의 허기를 조금도 달랠 수 없었다. 핥고, 빨고, 씹어 삼켜서라도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해소할 수 없었다.

연우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바랐다.

가령, 이별 따위 혀끝에 올릴 수조차 없는 영원한 사랑을…….

이별은 성숙한 행위다. 끝을 말한다는 것은, 상대의 성숙을 믿는 일이다. 연우는 지금 그녀에게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서윤이 혀끝에 이별을 올리는 순간, 인간의 껍데기 따위 얼마든지 벗어던질 수 있다 경고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 있는 남자였다.

서윤이 그 두려움을 아는 한 이별은 없다. 공포를 아는 한 서윤은 끝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없는 세상을 차마 떠올리지조차 못하리라. 서윤을 빼앗긴 고통을 아는 그가, 이제는 차마 그녀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처럼.

짝!

연우가 다시금 그녀의 엉덩이 위로 힘껏 손을 댔다. 더 이상은 아픔을 참을 수도 없어서, 서윤이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흐, 으. 잘못, 잘못했어. 다시는, 다시는 안 그럴게. 잘못했어.”

쉬어 터진 목소리가 한 적도 없는 잘못을 빌었다. 연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세뇌하듯 읊조렸다.

“선생님 곁에는 영원히 저뿐이어야 해요.”

그녀는 오로지 그의 것이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세상 어느 곳에도, 의지할 구석 없이 그에게 달려와야 한다. 그녀 역시 그 없이는 불구처럼 절절거리며 세상을 기어 다녀야 했다.

“응, 응. 그럴게. 그럴게. 그럴 거야.”

“착해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흐으. 사랑해…….”

연우의 목소리에 분노가 걷히고 애정이 차오르자, 서윤이 기다렸다는 듯 사랑을 말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거짓임을 알면서도 연우는 웃었다.

* * *

서윤은 한 달을 앓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따금 깨어났을 때는 더듬더듬 아이 이야기를 했다. 충격으로 서윤의 정신은 온전치 못했지만 아이는 무사했다. 서윤을 닮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아이임에 틀림없었다.

서윤이 눈을 뜬 것은 한낮의 아침이었다. 서윤의 몸을 닦으려 방에 들어온 사용인이 꿈틀거리는 손가락을 발견하고는 급히 연우를 불렀다. 연우가 서윤 곁으로 왔을 때는 이미 몽롱하게 눈을 뜬 후였다.

연우가 서윤을 내려다보았다. 그와 흐리게 얽혀 든 그녀의 눈동자에 얼핏 그를 향한 증오가 스쳐 지나갔다. 연우는 기꺼이 그녀의 고통을 받아들이며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막 깨어나 더운 살결을 연신 손으로 매만지며 그의 소유가 된 그녀를 아껴 마지않았다.

“……연우구나.”

서윤이 입술을 뗀 것은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마치 다시 재회했던 순간처럼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순간 서윤을 쓰다듬던 연우의 손길이 멈추었다.

연우가 지그시 서윤을 보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이 조심스레 들어 올려져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연우, 구나.”

증오에 차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잊고 처음으로 되돌아간 듯한 그녀의 부름이, 연우에게 서윤의 선택을 말해 주었다.

“네, 선생님. 연우예요.”

연우가 손바닥을 서윤의 볼에 가만히 맞대었다. 경건하게 고개 숙여 그녀의 눈꺼풀 위로 지그시 입을 맞췄다.

잊어야만 살아지는 순간이 있다. 서윤은 망각을 자처함으로써 또 한 번 무거운 생을 견뎌 냈다.

* * *

망각의 바다 속에서 한동안 고요한 일상을 보냈다. 서윤은 기억을 잃은 체하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호들갑을 떨며 연기하지 않았고, 기억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연우에게 들키는 것 역시 개의치 않았다. 서윤이 속이고 싶은 것은 오로지 그녀 자신이라는 듯이.

그렇게 해서라도 서윤이 살아 낼 수 있다면, 연우는 괜찮았다. 기꺼이 서윤이 그녀 스스로를 속일 수 있도록 연우는 움직여 주었다. 평범한 연인처럼 한 다발 꽃을 선물하고 사랑을 속삭였다. 쉴 새 없이 입을 맞췄고, 당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말해 주었다.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성큼 다가온 봄 속에서 서윤은 간간이 웃었다. 함께 영화를 볼 때 특히 그랬다. 행복한 장면을 보면서 후두둑 눈물을 쏟아 내는 날이 더 많았지만, 이따금 웃어 주었다. 옅은 웃음 뒤에는 언제나 연우가 그녀의 머리통을 끌어안아 입 맞추고는 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였다.

서윤은 이대로 그의 일상 속에 박제될 것이다.

그녀 역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안락한 망각 속에서 언젠가는 완전히 부수어진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

어느새 배가 꽤 부풀어 오른 서윤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명화의 한 장면 같은 날이었다. 푸르른 녹색 잔디가 깔린 마당에 서윤과 연우는 소풍을 나와 있었다. 한동안 빠져 보내던 영화 관람 이후 두 사람이 새로이 함께하는 데이트였다.

서윤의 곁에서 연우는 길게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찬 체온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잠들어 있음에도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서윤은 힘겹게 상체를 숙여 연우의 얼굴 가까이에 대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숨을 쉬고 있다. 거기까지 확인한 서윤은 기우뚱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움직임이 둔하고 느렸다. 분명 한눈에 시선을 앗아갈 만한 미인이었음에도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관절 인형처럼 모든 행동이 삐걱거렸다.

깜빡.

깜빡.

깜빡.

깜빡.

서윤의 시선이 마당 곳곳을 배회한다. 나무에 잠시 앉았다 가는 새들을 보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들의 춤사위를 감상하다, 느리게 흔들리는 나무 그네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곳에서 같이 그네를 타요.’

지난번 소풍 때 연우가 서윤의 귓가에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서윤이 가만히 부풀어 오른 배에 손을 올렸다. 생명의 태동이 느껴졌다. 그와 그녀의 아이였다.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연우였다.

배에 손을 올려 둔 그대로 서윤은 연우를 지켜보았다. 서윤의 고개가 느리게 돌아갔다. 어느 순간 서윤은 짐승처럼 엉금엉금 네발로 기고 있었다. 나무 그네를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간 서윤이 들어 올린 것은 묵직한 돌이었다.

서윤이 손가락 끝으로 돌의 표면을 더듬는다. 매끄러웠다. 조금 더 울퉁불퉁하다면 좋을 텐데. 서윤은 지체하지 않고 돌을 들어 올렸다. 돌을 품에 안은 채, 무릎걸음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기어갈 때보다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마침내 연우의 곁으로 돌아와 앉은 서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숨이 가쁘고 심장이 쿵쿵쿵쿵 뛰었다. 죽은 듯이 살아가고 있는데도,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게 이상했다.

“…….”

결단이나 의지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잊으면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잊히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다면 서윤은 그의 무엇이라도 망쳐야 했다. 그가 매번 하던 말처럼 공평하게, 그녀 역시 그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울음이 하얀 볼을 가르며 후두둑 쏟아졌다. 서윤의 시선 끝에 곧게 펼쳐진 연우의 오른손이 보였다. 아름다운 선율을 빚어내던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는 환상을, 서윤은 마주 보았다. 마침내 결심이 섰다. 서윤이 양손에 쥔 돌을 있는 힘껏, 하늘 높이 치들었다.

“고작 그걸로 저를 용서할 수 있으시겠어요?”

그때, 눈을 감은 연우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윽, 흐윽…….”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윤이 숨을 헐떡이며 울었다.

그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연우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최초의 기억은 날카롭게 각인된다. 그는 그녀가 사랑했던 소년이었다. 위태로운 삶 속에서 발을 절 때 소년은 그녀를 구원했다. 처음이었다. 아직 그 애가 준 온기가 그녀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서윤도 알지 못했다. 서윤은 그저 그 참혹한 배신감을 떠안은 채로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을 뿐이다. 어떤 연인은 용서 없이도 함께 살아간다. 또 어떤 연인은 증오를 간직한 채 사랑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선생님의 뜻대로 하세요.”

“흐…….”

“그대로 들고 내리치세요. 온전한 뼈, 마디 하나 남아 있지 않도록 힘껏. 산산조각 내는 거예요. 제가 선생님의 인생을 망쳤듯이…….”

연우가 눈을 뜨고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한 서윤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범람했다.

“울지 마세요. 제게 오려는 거잖아요. 저는 그거면 돼요. 눈감고, 힘주어서 찍으세요.”

높게 치들은 서윤의 팔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연우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선생님이 주는 고통은…… 익숙하거든.”

나지막이 흘러드는 연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연우는 서윤의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 모습조차 곧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짙고 검은 눈이었다.

마침내 서윤이 올려 든 돌을 힘주어 내리꽂았다. 결심했던 대로, 그의 음성이 시킨 그대로. 내리치는 돌덩이와 함께 낙하하는 듯한 심장을 느끼며.

“……흐, 흑, 윽.”

연우의 손을 타고 흘러나오는 피와 함께 묵직한 돌이 잔디밭을 뒹굴었다.

“하아…….”

“피가, 피가……. 피가 나…….”

눈에 초점을 잃은 서윤이 연우의 손을 더듬었다. 연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가만가만 흐르는 눈물을 훔쳐 주었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피가 그녀의 볼을 적시며 아래로 떨어졌다.

“연우야, 연우야…….”

서윤이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힘을, 힘을 풀었는데. 왜 피가, 피가 너무 많이…….”

서윤은 마지막 순간, 그의 손을 뭉개지 못했다. 끝끝내 연우의 손을 내리치지 못하고 들고 있던 돌을 놓쳐 버렸다. 돌이 내동댕이쳐지며 연우의 새끼손가락을 강타하고 지나갔지만 그의 손 하나를 완전히 불구로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

이 미련하고 유약한 여자를, 연우는 사랑스러워 마지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윤은 연우의 손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히끅히끅 울음만 뱉어 내고 있었다. 연우는 자신의 피로 얼룩진 서윤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연우야, 여, 연우. 흐.”

“울지 마.”

서윤은 아직도 그를 해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몰랐다. 그녀는 차라리 그의 머리통을 후려쳐 죽여 버리거나, 혀를 깨물어 죽어 버리겠다 겁박했어야 했다. 연우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거나 연우를 그녀 앞에 무릎 꿇릴 방법이 서윤에게는 얼마든지 있었다.

“괜찮아.”

“병원, 병원 가야 해…….”

“괜찮아, 서윤아.”

그녀의 무르고 연약한 마음에 빌어먹으며, 그녀의 강인한 생명력을 찬양하면서, 연우가 서윤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대답하면 부르기로 약속했던 이름에 한가득 사랑을 담아 속삭였다.

“서윤아.”

부름의 뜻을 알아챈 서윤이 그의 몸 위로 무너지며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연우의 새끼손가락을 타고 흐른 피가 서서히 서윤의 흰색 원피스를 적셔 갔다. 어느새 그녀가 입은 옷이 붉은색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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