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본능
Beethoven : Piano Sonata No.14 In C Sharp Minor Op.27-2 Moonlight
[지서윤 씨, 한일훈 팀장입니다.]
이른 아침, 문자를 확인한 서윤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손을 떨며 나머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한일훈 팀장은 회사에서 따로 면담하길 요청했다. 이유는 서윤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라며 연우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 덧붙였다.
[오늘 1시까지 회사에서 뵙죠.]
예감이 찾아왔다. 아주 나쁜 일이 벌어지리라는 불쾌한 예감.
문틈 새로 마주쳤던 현주의 경악을 떠올리며 손을 떨었다.
서윤은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있던 중 가장 단정한 옷이었다.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집을 빠져나가면서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회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도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고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가씨, 안 내려요?”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내리지 못하는 서윤을, 택시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움 건물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서윤이 마른 침을 삼켰다.
“……내릴게요.”
회사 근처에 택시를 내린 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급히 보자는 말에 발걸음을 재촉하기는 했으나 막상 회사 앞에 서자 용기가 사라졌다. 어쩌면 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주는 서윤에게 막대한 호의를 보이던 인물 아닌가.
그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서윤이 손바닥으로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에도 회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호흡이 거칠었다. 걸음을 멈추기도 여러 번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막상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가 두려웠다.
“…….”
서윤이 흔들리는 숨결을 단단히 했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감춰 물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사움의 건물이 오늘따라 유난히 높게 느껴졌다.
회의실로 걸어가는 복도는 조용했다. 조명은 밝았고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었다. 고요했다. 서윤은 기이하게까지도 느껴지는 정적을 기분 탓으로 치부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3 회의실.]
팻말 앞에 선 서윤이 잠시 망설이다 이내 결심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머지않아 한일훈 팀장이 들어오라 답해 왔다.
“안녕하세요.”
한 팀장을 향해 서윤이 작게 인사했다. 50대 중반 정도의 말쑥한 남자가 몸을 일으켜 목례함으로써 서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서윤 씨 오랜만이네요.”
“네. 팀장님 잘 지내셨죠?”
한 팀장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자의 입꼬리 어딘가에서 찝찝한 기분을 발견하자 서윤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바짝 좁아졌다. 앉지도 못하고 회의실 입구 쪽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 팀장 역시 웃고 있지만 굳은 얼굴로 서윤을 마주 보았다.
짧은 정적이 억겁처럼 감돌았다. 한 팀장이 짧은 한숨과 함께 불현듯 입술을 뗐다.
“서윤 씨,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한 팀장의 손이 남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네. 감사합니다.”
서윤이 작게 목례하며 걸음을 옮겼다. 의자를 빼내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서윤이 앉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은 한 팀장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볼펜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공연히 볼펜을 굴리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어려운 얼굴을 했다.
“곧 리허설인데, 연우 씨 컨디션은 어때요.”
한 팀장이 난감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짓누르면서, 가볍게 물었다. 서윤은 이게 본론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연습량도 일정하구요.”
사실이었다. 두 번째 관계 이후로 연우의 컨디션은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한동안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이 담기지 않던 연주에도 활력이 감돌아 전보다 성장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를 사랑해 마지않는 관객들이 듣는다면 분명 기뻐하리라.
“그거 하나는 다행이네요.”
희소식에도 한 팀장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사실 희소식이랄 것도 없었다. 연우의 슬럼프는 오직 서윤만이 알고 있었고, 연우는 그동안 성실한 연주자의 타이틀을 빈틈없이 유지해 왔다. 한 팀장에게 연우의 컨디션은 그리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테다.
“하, 그래요.”
“…….”
“서윤 씨도 어느 정도는 알고 왔을 테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부터 말하죠.”
“어떤…….”
“사실이에요?”
“……네?”
“사실이냐고 물었어요.”
본론부터 말한다는 남자는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다는 듯 말을 아꼈다. 최대한 줄이고 줄여 사실이냐고만 질문했다. 서윤의 손가락 끝이 차갑게 식어 빳빳하게 굳어졌다.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거, 서윤 씨 알고 있어요?”
서윤이 좀처럼 대답하지 않자 한 팀장은 다른 방식으로 물어 왔다. 하지만 요점은 같았다. 서윤이 평소보다 훨씬 가쁘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어떤, 소문인가요?”
“연우 씨랑 서윤 씨가, 그러니까, 내연 관계라고.”
“…….”
“서윤 씨가 연우 씨랑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고 회사 내에 소문이 파다해요. 한 직원이 서윤 씨와 연우 씨가 관계하는 모습을 봤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 된다고 생각하세요?”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다가오는 재난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면 이러할까 싶었다.
이야기는 어느새 살이 붙어 서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처음 피아노를 가르쳤던 서윤에 대한 존경심으로 불리고는 했던 그녀에 대한 특별대우는 얼룩진 지 오래였다.
어딘가 수상하게 싸고돌더니 그럴 줄 알았다고. 이미 살림을 차린 게 분명하다는 수군거림이 도처에 난무했다.
“…….”
서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연우와 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아홉 살 차이의 스승과 제자. 증거가 확실한 염문설. 그게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서윤 역시 잘 알았다.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결국 서윤이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잘못 입을 놀렸다간 연우에게 더 큰 피해가 갈까 두려웠다. 애초에 제 잘못으로 시작된 일이기도 했기에 죄송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꺼낼 말이 없었다. 게다가 목격자가 있었다. 섣부른 부정은 더 큰 화만 불러일으킬지 몰랐다.
“참, 허. 이게 말이 되나.”
한 팀장이 황당하다는 태도로 입을 벌린 채 서윤을 바라보았다. 연신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서윤은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침묵을 지켰다.
“하, 미치겠네.”
“…….”
“어른이시잖아요. 우연우 씨, 스물한 살이에요. 스물한 살이라구요. 그래요. 아홉 살 차이 그렇다 칩시다. 서로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그런데 서윤 씨.”
“…….”
“이거 이대로 언론에 새어 나가서, 한 번 갔다 온 여자랑 스캔들이라도 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게다가 내연…… 허, 이걸 어떻게 감당합니까? 어떻게 이렇게 경솔하세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내연 관계라니, 그건 정말 사실이 아니에요. 정말로. 믿어 주세요. 저랑 연우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이제 와서요? 지서윤 씨, 이제 와서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나가서 아니라고 해 보세요! 사람들이 믿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니까. 그게 곧 진실이 되니까. 어떻게든 오물을 집어 던질 테니까. 그거 혼자 다 맞겠다면 제가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연우 씨는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연우 씨가 어떤 연주자인지!”
말이 폭격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날카롭게 갈려 서윤의 곳곳에 생채기를 냈다. 서윤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아프다고 소리 지르거나 울 수는 없었다. 모든 게 자신의 과오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지서윤 씨 선에서 정리해 주세요.”
어느새 싸늘해진 한 팀장이 서윤을 향해 통보했다. 더 이상의 인내는 무리라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경멸 어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움에서 지서윤 씨를 채용하는 것도 서울 공연 끝날 때까집니다. 관계 정리해 주세요. 그때까지 기사는 어떻게든 막아 볼 테니까…… 행실 똑바로 합시다. 예?”
“……네. 명심하겠습니다.”
“허, 참.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한 팀장이 분노를 담아 지껄이고는 회의실 문을 닫고 나갔다.
쾅! 큰소리가 나자 서윤이 입을 틀어막은 채 어깨를 떨었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욱.”
서윤이 한 번 더 세게 입가를 짓누른다. 충격에 말갛던 눈동자에는 실핏줄이 터지고 얼굴에도 비극의 기색이 드리웠다.
더듬더듬 테이블을 더듬은 서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황급히 문을 열었을 때, 서윤은 기함해야 했다.
고요하던 복도에 사람들이 나와 서윤을 구경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눈초리가 혐오에 젖어 입을 열지 않아도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지나갈게요.”
서윤이 초점 잃은 눈으로 황급히 사람들 사이를 헤쳤다. 걷다 걷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시선 앞에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
현주였다. 익숙한 동료들 틈 사이에 둘러싸인 현주가 끔찍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대면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리면 자신마저 이렇게 진저리가 나는데, 현주의 반응은 어떻게 보면 납득할 만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제게 조잘거리며 웃어 주던 그녀를 떠올리면 더 그랬다. 조금이나마 현주를 친근하게 여겼던 탓일까. 쯧, 혀를 차며 사무실 안으로 도로 들어가 버리는 뒷모습이 한 팀장의 비난보다 뼈아팠다. 한 팀장의 말이 맞았다.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믿어 줄 사람은 없었다.
서윤이 우두커니 복도를 걸었다. 쏟아지는 눈초리를 모두 감내해 내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우연우가 눈 돌아갈 만큼 예쁘긴 하네. 전 남편도 피아니스트였다며? 저 여자 전남편도 참 불쌍…….”
복도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등 뒤로 들려오는 말에 서윤이 팩 몸을 돌렸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서윤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이 헛기침과 함께 일제히 흩어졌다.
서윤이 등을 돌린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매몰차게 걸었다. 건물을 빠져나가,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어디까지 걸었는지 이제는 알 수조차 없을 무렵 휴대 전동이 짧게 두 번 울렸다. 가방 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 서윤은 잠시 숨을 잊어야 했다.
[더러운 년]
[그럴 줄 알았다]
바뀐 서윤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남편인 대현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 * *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서윤은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정류장 의자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버스들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사람들이 그런 서윤을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잠시 머물렀다 떠나가는 이들일 뿐이다. 차라리 자신을 이상한 여자로만 취급해 주는 군중 속에 있는 편이 서윤에게는 나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우에게로 가는 일도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면 좋을 텐데.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과 고통 사이로 초연한 슬픔이 흘러들었다.
그때, 서윤의 곁으로 그림자가 졌다. 지나가는 행인이겠거니 치부하기에는 익숙한 실루엣이 그녀의 시야에 섞여들었다.
“지서윤 씨.”
“…….”
서윤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종종 연우가 외부 일정이나 외출을 나설 때 동행하고는 하는 수행 기사가 서윤의 곁에 서 있었다. 서윤은 잠시 당황하여 눈을 감았다 떴다. 서윤은 그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밝힌 적 없었다.
“가시죠. 도련님께서 걱정하십니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서윤의 손이 먼저 알고 두려움에 떨었다. 심장이 조급하게 뛰고 있음을 느끼며 꽉, 주먹을 쥐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서윤이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자의 손이 그녀에게로 뻗어 왔다. 그대로 서윤의 목 뒤를, 숙련된 힘으로 내리쳤다. 도망칠 쥐구멍 하나 없이 남자의 손길에 묶인 서윤의 동공이 확장됐다.
“……읏.”
그 짧은 순간, 불현듯 그날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피아노 의자 위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짐승처럼 엉켜 있었다. 밤새 치렀던 관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성기는 탐욕스럽게 서윤의 아래를 파고들었다. 연우는 단단한 손길로 서윤의 턱을 쥐고 있었다.
‘선생님, 사랑해요.’
‘머, 멈춰 줘. 밖에, 밖에. 연우야. 아, 아읏, 하으, 히익.’
타의에 의해 고정된 턱은 정확히 문가를 향했다. 인기척이 너무나도 선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안 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우는 문 틈새로 관계를 훔쳐보는 이방인에게로 서윤의 시선을 멈춰 두었다.
그녀도 들은 인기척을 연우라고 듣지 못할 리 있었을까.
그 생각을 끝으로 서윤은 까무룩 기절했다.
* * *
눈을 뜨자 연우의 집이었다. 서윤은 기시감과 함께 턱을 치들어 천장을 보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샹들리에의 실루엣이 보였다. 서윤이 멍하니 눈을 감았다 떴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맡에 앉은 연우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
본능적으로 침이 꿀꺽, 침이 넘어갔다. 의심과 두려움으로 어깨가 덜덜 떨려왔다. 낮에 있었던 일의 여파일까. 사고 회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아 어지러웠다. 서윤의 눈 앞에 있는 연우의 얼굴이 뒤틀리고 꿀렁대며 기이하게 보였다.
“선생님.”
연우가 경계하는 서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윤은 그대로 연우의 손을 내치며 비명을 질렀다.
“만지지 마!”
눈앞의 착란에 고통스러웠다. 연우의 입꼬리가 죽 찢어져 보이는가 하면, 두 개가 된 그의 얼굴이 하나로 합쳐졌다 다시 세 개가 되어 그녀를 압박했다.
“……선생님.”
연우의 눈동자가 순간 상처로 얼룩졌다. 처음 보는 표정에 서윤이 멈칫하여 어깨를 말았다. 혼란이 이어졌다. 혼란스러운 기억들 사이로 확신과 부정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난투를 벌였다.
“이야기 들었어요.”
“……윽.”
“회사에서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까지.”
연우가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믿지 않기로 했다. 아직 턱을 움켜쥐던 손길이 선명했다.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알고 있었잖아.”
“선생님.”
“알고 있었잖아! 밖에 현주 씨가 온 것 알았잖아. 발소리가 들렸어. 문이 열려 있었어. 그런데도 계속, 턱을 쥐고, 눈을 맞추게 하고……. 선생님이 안 된다고, 멈추라고 했는데.”
서윤의 양 볼을 타고 울컥울컥 울음이 쏟아졌다. 서윤이 황급히 손등을 들어 눈물을 닦아 냈다. 연우를 향한 서윤의 시선에는 전에 없던 혐오감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 몰랐어요.”
연우가 애절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한숨과 함께 입술을 뗐다.
“선생님.”
서윤이 색색거리며 숨을 쉬었다. 연우를 분간하기 위해 눈빛을 단단히 하고 그를 바로 보았다. 더 이상 연우의 얼굴이 기괴하게 보이는 일은 없었지만, 서윤은 여전히 두려웠다.
“정말이에요. 제가 어떻게 선생님께 거짓을 말하겠어요.”
거짓이었다. 서윤을 가질 수 있다면 연우는 수천 개의 거짓말을 하더라도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깟 거짓말 따위, 무수한 수단과 방법들 중 가장 보잘것없었다.
“저도 그때는 미쳐서,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너무 두려워서.”
연우가 고통에 찬 고백을 읊조리며 서윤을 마주 보았다. 혼란이 뒤엉켰다. 괴로운 눈으로 토해 내는 목소리는 호소력 짙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생각이 고장 난 나침반처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서윤의 눈동자는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서윤은 파도 위의 돛단배처럼 쉽게 흔들렸다. 그녀에게 상냥했던 소년과 지금의 연우 사이에 서서 갈피를 잃고 휘청거렸다.
“죄송해요. 제 잘못이에요. 맞아요. 제가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연우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서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연우의 어깨를 쥐었다. 여전히 의심스러웠지만, 이 애를 향해 남아 있는 오랜 정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제가 가서 회사 분들께 말씀드릴게요.”
연우가 어깨에 올려진 서윤의 손을 떨쳐 냈다.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탓이에요.”
순간 한 팀장의 찢어지는 비난이 서윤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의 말처럼 연우는 고작 스물하나였다. 잠깐의 풋사랑에 빠져 스캔들의 폭풍 속으로 내던져지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쉬세요.”
연우가 덤덤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윤의 고개가 딸려 올라갔다. 뒤돌아 방을 빠져나가는 등이 유달리 그늘져 보였다. 새벽의 희미한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남은 서윤은 어느샌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서윤의 발이 연우가 왔던 길을 따라나선다. 문을 열어 복도로 나섰다. 연우는 복도 끝을 걷고 있었다. 서윤이 허겁지겁 발을 뗐다. 내달려 어느새 계단을 내려가는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지 마, 가지 마. 가면 안 돼.”
서윤이 울음을 터트리며 결단했다. 멍청한 짓이라고 누군가 비난하더라도, 제게는 옳은 일이었다. 연우가 그녀에게 해 주었던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생의 유일하게 안온했던 시절의 기억들과 조건 없는 도움들이 그녀를 이 자리에 살아 있도록 해 주었으니까.
자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왔다. 꼭 한 명 오물을 뒤집어써야 한다면 그건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일만 같았다. 게다가 연우가 의도했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때 뒤를 헤집던 연우는 확실히 이성을 잃어 있었다. 확신했다.
서윤이 다시 한번 연우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허리춤을 끌어안고 있는 팔 위로 연우의 손이 겹쳐졌다. 곧장 매몰찬 손길이 서윤의 팔을 걷어 냈다. 돌아서는 연우의 표정을 보는 서윤의 간담이 서늘했다. 연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러지 마세요.”
“……연우야.”
“여전히 저를 의심하고 계시잖아요. 아직도 제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시잖아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연우야.”
서윤이 다급히 부정했다. 그럼에도 연우는 여전히 배신당한 눈으로 서윤을 보고 있었다.
“기분이 더러워요.”
연우가 서윤으로부터 거리를 넓혔다. 서윤은 황망하게 연우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저한테 화를 냈다는 게, 제 손을 떨쳤다는 게…… 못 견디게 화가 나요.”
“연우야, 선생님은.”
서윤이 성큼 연우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쥐었다. 양손으로 커다란 손을 꼭 붙들고 죄를 지은 마음으로 올려다보았다.
“선생님의 존재가 제 삶에 어떤 의미인지, 선생님은 모르실 거예요.”
연우가 계단 위로 주저앉았다. 서윤이 조급히 한 계단 아래로 따라 내려갔다. 계단 위에 무릎을 꿇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이 잘못했어. 그런 게 아니야. 선생님도 너무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랬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게 너무 무서워서…….”
연우가 지그시 서윤을 내려다보았다. 계단 한편에 작게 난 창으로 역광이 흘러들었다. 연우의 등 뒤에서 빛을 쏟아 내며 희미하게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저도 선생님을 잃을까 봐 무서웠어요.”
공기가 서늘했다. 추운 날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흘러드는 목소리마저 싸늘하여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 왔다.
“그런데, 선생님이 저를 향한 의심을 거뒀는지는 아직 확신이 안 서네요.”
연우가 손을 뻗어 서윤의 턱을 쥐었다. 손가락이 보드라운 살결을 매만져 왔다. 하얀 볼가를 제멋대로 주무르며 서윤의 대답을 기다렸다. 종용하는 듯한 태도는 위압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서윤이 저도 모르게 그가 원하는 답을 내었다. 순간 연우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서윤의 볼을 주물렀다. 서윤의 눈꺼풀이 깜빡인다. 점멸 직전의 가로등처럼 볼썽사납게 오르내렸다.
“흐읍……!”
그때, 연우가 쥐고 있던 서윤의 턱을 끌어당겼다. 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연우의 바지춤 앞에 멈추었다.
“다정하게 빨아 주세요.”
연우의 눈꺼풀이 오만하게 내리깔렸다. 서윤이 주춤거리며 꿇린 무릎을 뒤로 물리는데, 발이 한 계단 아래로 푹 꺼졌다. 놀라 엉거주춤 몸을 지탱하는 서윤을 연우는 고요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도망가 봤자 나락이에요. 지금 제가 아니면 갈 곳도 없으시잖아요.”
연우가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서윤이 잠시 연우를 분간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방금 전의 다정한 미소는 종적을 감춘 채, 소유욕으로 일렁이는 남자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너…….”
서윤이 충격에 고개를 저었다. 연우가 서윤의 턱을 놓고 뒤통수로 손을 옮겼다. 힘주어 다리 사이로 서윤의 얼굴을 파묻었다.
“윽……!”
순간 숨이 막힌 서윤이 켁켁거리며 기침을 토했다. 바지 위로 서윤의 얼굴이 마구잡이로 비벼져 그의 성기가 부풀어 올랐다. 서윤은 아직까지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눈을 깜빡이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서윤아, 나 좆 터질 것 같아.”
연우의 목소리가 한결 나긋하게 그녀를 억압했다. 서윤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절규하는 듯도 보이는 몸짓이었다. 마음이 약해졌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연우는 서윤의 강함을 알았다. 연우가 보았을 때, 서윤은 강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일견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아주 유약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릴 적의 자신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서윤은 언제나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났다. 조금만 햇살을 내리고 물을 넘겨 주면 눈동자에 다시 희망이 감돌았다.
아스팔트 사이로 피어난 꽃을 연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연우는 서윤의 뿌리부터 뽑아 버리기로 했다.
믿게 만들고, 다시 절망시키고, 희망을 주고, 몇 번이고 빼앗을 것이다. 목이 꺾여 죽더라도 그의 온실 속에서 시들어야 했다.
다른 남자의 손에 그녀를 들려 보내는 일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그녀가 그를 아들 따위로 여기지 않게 할 것이다.
“일부러, 일부러……!”
서윤이 안간힘을 쓰며 연우의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치들었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일들 중 고작 그것 하나만을 깨달았을 뿐인데도 서윤의 눈동자는 절망으로 울고 있었다. 연우가 계단 아래로 느긋이 다리를 펴며 담백하게 인정했다.
“네.”
그를 애틋이 여기는 서윤의 마음이야 확인했으니 더 이상은 거리낄 게 없었다. 어차피 이 이상 감추는 것도 무리였다. 무너트리기로 결심했으니 완전히 짓밟을 뿐이다.
연우가 서윤의 뒤통수를 다시금 바지 위로 눌렀다. 막 개간을 끝내 놓았을 뿐인 서윤의 터 위로 불을 지르는 격이었다. 황폐해져 다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도록. 그녀의 마른 땅이 삼켜 낼 수 있는 것은 작렬하며 내리쬐는 그의 애정뿐이어야만 했다.
“서윤아, 빨아야지.”
“으, 으으.”
“어서.”
연우가 친히 바지 버클을 끌러 그녀의 앞에 내주었다. 그의 손에서 딸려 나온 성기를 보며 서윤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화낼 거야.”
“이, 이러지 마. 이러지 마, 연우야.”
“확 버려 버리든가.”
연우가 서윤의 입가에 성기 끝을 가지고 갔다. 서윤의 눈망울 위로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절망으로 기어들어 가는 서윤의 얼굴을, 연우는 똑똑히 기억해 두기로 했다.
“당신 아버지한테 돌아가고 싶어?”
“아…….”
“또 팔려 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어떤 새끼가 될지 몰라. 전보다 최악일 것만은 확실하지.”
“차라리, 차라리…….”
말을 다 끝맺지 못한 채로 서윤의 볼을 타고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차라리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갔다면 이토록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녀를 가해하는 일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아니었다. 연우는 서윤의 마지막 보루였다. 서윤의 마음에 경계가 있다면, 연우는 어느 날, 어느 때에나 그 안쪽에 위치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연우와 보냈던 따뜻한 기억들이 그녀의 마음을 데워 주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서윤은 연우를 생각하더라도 웃거나 따스해질 수 없을 것이다.
“빨아.”
“흐읍.”
서윤의 작은 입 안으로 연우의 성기가 들어찼다. 자비는 없었다. 추억은 일그러지고 기억은 오물을 머금었다. 반짝이던 소년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웠다. 서윤의 살갗 위로 무수히 비벼져 피를 취했다.
“혀 내밀어서 샅샅이 핥아 봐.”
“으, 읍. 흡.”
이미 서윤은 눈에 초점을 잃은 채였다. 그저 연우가 하는 말을 따라 혀를 내었고, 성난 성기를 입 안에서 굴렸다.
“서윤아.”
이름이 불리면 서윤의 눈빛이 잠시 동안 맹렬해졌다. 그를 형형하게도 노려보았다.
“왜.”
그런 서윤을 달갑게 받아들이며, 연우가 서윤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입 안으로 허리 짓 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부르면 조이잖아. 지금도 보지로는 질질 싸고 있을지도 모르고.”
서윤이 이를 세운 것은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이가 연우의 성기를 깨물려다, 주저하며 다시 입을 벌렸다. 생살을 씹는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저항을 저지했다.
“하윽, 하하…….”
잠시 동안 스쳐 지나간 알싸한 고통에 연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습게도 성기가 들끓었다. 이미 그녀의 입 안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성기가 더 크게 부풀어 올라 흉흉하게 꺼덕거렸다.
“아으, 아.”
입술이 찢어질 것만 같다. 서윤이 연우의 성기를 혀끝으로 무던히도 밀어 냈다. 그건 곧 성기를 샅샅이 핥는 행위와도 같았다. 힘주어 뱉어 내려 할 때마다 혀끝에 곤두선 핏줄이 걸려들었고, 연우의 성기 끝에서 움칠움칠 액이 흘러나왔다.
“으, 읍, 흐윽. 힉.”
비릿한 맛에 서윤이 괴성과 함께 숨을 삼켰다. 연우의 성기가 입 안 깊숙이 빨려들어 갔다. 성기 끝이 여러 번 목젖을 때리면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실핏줄이 죄다 터진 흰자는 그녀의 한계를 말하고 있었다.
“빼.”
성기가 빠져나간 건 급작스러웠다. 혹시 이 자리에서 삽입당하게 될까 봐, 서윤이 턱을 떨었다. 온몸이 연우가 두렵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지서윤, 고개 들어.”
그렇게 말하며 연우는 서윤의 머리채를 쥐고 뒤로 젖혔다. 턱이 들리며 고개가 연우를 향해 높이 쳐들렸다.
“가만히 있어.”
그의 개가 된 기분이다. 그 어떤 개도 이런 모욕을 당할 리 없었지만. 오히려 개로 살아내는 편이 지금 자신의 처지보다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조금쯤 서글펐다.
연우가 다시금 서윤의 턱을 쥐었다. 연우의 성기는 여전히 흉측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연우와는 별개로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꿈틀거리는 성기가 무서웠다.
서윤이 체념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동시에 귓가에 성기가 치덕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미 본 바 있는 장면은 서윤은 애쓰지 않아도 떠올릴 수 있었다.
“하…… 씹.”
근육질의 몸이 팽팽하게 말라붙은 흰 셔츠는 조금 젖은 채로, 정결한 얼굴을 한껏 열망으로 끌어올려, 다리 사이의 성기를 그의 아름다운 손이 주무르는 모습은…….
성기를 주무르는 모습 자체가 불러오는 외설적인 충격과는 별개로, 연우의 모습은 풍경으로 보일 만큼 아름다웠다. 그가 가진 외견이란 그만큼 대단했다.
“후으.”
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서윤이 감긴 눈꺼풀을 떨었다. 살을 손으로 치대며 쩍쩍 대는 소리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서윤에게로 공포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입 벌려.”
연우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내리깔린다. 서윤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자 연우가 낮게 웃으며 서윤의 볼가에 툭, 툭 성기를 치댔다.
“음탕하네. 얼굴에 싸 줘?”
부러 수치를 주며 겁박하는 투였다. 서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연우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턱 중앙에 지그시 닿는다. 힘주어 입술을 벌려 냈다. 손이 성기를 훑는 소리가 거세졌다.
“싫어. 정말, 싫……!”
서윤이 허겁지겁 눈을 뜨며 연우를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연우가 서윤의 얼굴에 사정했다. 정액이 서윤의 눈가부터 볼, 벌어진 입술 새까지 범람했다.
혀끝에 연우가 싸지른 정액의 맛이 감돌았다. 처음 먹어 보는 맛이었다. 서윤이 아연하며 혀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연우의 성기가 가까이 다가온다. 기다렸다는 듯 좆 대가리를 서윤의 혀에 대 주었다.
“핥아서 다 먹어야지.”
아직 성기 끝에 정액이 남아 있었다. 서윤이 끔찍한 눈으로 불투명하고 말간 액을 시야에 담았다. 방금 전 느꼈던 맛이 떠오르면서 거부감이 들었다.
“간단하잖아. 혀 내밀어.”
“하나도 간단하지 않아!”
서윤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연우가 그런 서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이런 얼굴을 보는 것은 또 처음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다른 이에게는 또 어땠을지는 몰라도, 자신에게는 절대 보여 주지 않던 서윤의 모습이었다. 서윤은 대개 연우에게 살갑고 다정했으므로.
“내가 네 보지 빨아 줄 때는 좋다고 절절거리더니 내 좆은 싫어?”
“…….”
“왜 싫어.”
다정을 패륜으로 갚은 꼴이었다. 연우가 성기를 서윤의 입 안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핥아지기를 포기하고 서윤의 입 안 곳곳에 정액을 묻혔다. 서윤의 안에 싸질러 두었듯이, 입 안에도 공평하게 베풀었다.
“너는, 으, 연우가 아니야.”
연우의 성기가 빠져나가자 서윤의 몸이 연우의 허벅지 위로 무너졌다. 연우가 입고 있는 바지가 눈물로 젖어 들며 서러운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연우가 아니야. 흐으, 윽.”
연우가 지그시 서윤의 뒤통수를 내려다본다. 차라리 제가 연우가 아니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믿는 여자가 미련하고 사랑스러웠다. 결국 서윤은 이 껍데기를 뒤집어쓴 자신에게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차올랐다.
“나빠. 너 정말, 나빠. 연우가 아니야. 연우일 리 없어. 연우는, 연우는.”
연우가 정갈한 몸짓으로 조용히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계단 위에 쓰러져 울부짖는 서윤을 바라보다 조용히 상체를 숙여 그녀를 들어 올렸다.
“하, 하지 마. 하지 마, 연우야. 제발. 선생님이잖아. 선생님이잖아. 연우야.”
가뿐히 서윤을 품에 안은 연우가 유유히 계단을 올랐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감한 서윤이 질겁하며 허공에서 발을 굴렀다.
겨우 그 시절의 자신을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선생님 타령이라니. 연우가 태연자약하게 제 어깨 위에 올려진 서윤과 시선을 맞추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선생님을 범하고 싶었어요.”
그가 서윤의 연우를 부정한다. 서윤이 사랑해 마지않는 소년의 어투 그대로 그녀를 희롱했다. 더 이상 그런 사람은 없다는 듯 서윤의 남은 추억마저 앗아가 버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이다지 잔인할 수는 없었다.
서윤의 눈동자가 공허하게 비어 갔다. 연우는 개의치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우아한 발길은 머지않아 어둠 속에 먹혀들었다. 캄캄한 새벽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가구의 삐걱대는 비명과 서윤의 짙은 신음뿐이었다.
* * *
더 이상의 연습은 없었다. 연습이되 연습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발정 난 짐승들의 교미만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서윤은 피아노를 치는 연우의 허벅지 위에 앉아 직접 몸을 움직이거나, 그 아래에 무릎 꿇고 연우의 성기를 빨았다. 이따금은 그랜드 피아노의 매끈한 등 위에 상체만을 걸친 채로 뒤를 내주기도 했다.
거대한 저택에 둘만 남은 것처럼 연우는 서윤을 탐했다. 연우의 성기를 받아 내고 있을 때 본 지나가는 사용인들의 경직된 얼굴은 서윤을 조금씩 무너트렸으나, 그마저도 점차 익숙해졌다. 서윤은 그들과 눈을 맞추고도 더 이상은 울지 않을 수 있었다. 폐허에서 태어나 폐허를 살아내는 사람 같았다. 허겁지겁 시선을 피하던 일이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아득했다.
자신을 범한 남자가 연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음에도, 연우는 언제나처럼 자신을 다정하게 불렀다. 이따금 일부러 이러나 싶게 귓가에 선생님, 선생님 부단히도 속삭였다. 당신의 뒤를 헤집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하라는 듯이.
“선생님.”
가만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연우가 익숙한 듯 허리를 숙여 서윤의 볼에 입 맞췄다.
쪽, 쪽. 가볍게 닿는가 싶더니 이내 뭉근하도록 짙어졌다. 입술이 서윤의 턱선을 따라 입 맞추다 목을 향해 내려갔다.
연우의 고개가 파고들자 서윤이 길게 목을 뺀다. 희미한 열기를 머금은 숨을 내쉬다 바라본 시선의 끝에 수행 기사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서윤이 손을 올려 더듬더듬 연우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너른 가슴팍이 단단했다.
“……느, 늦었어.”
벌써 서윤이 이 집에 들어온 지도 3주 차가 되었다. 오늘은 서울 공연 리허설이 있는 날이었다. 회사 사람들이며 여러 분야의 관계자들까지 모이는 자리였다. 늦어서는 곤란했다.
아무리 끈 떨어진 비서직이라고는 하나 서윤의 일이었다. 서윤이 다시 한번 연우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입맞춤이 더 짙어졌다. 이제는 이를 세워 서윤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짓이겼다. 도통 적응되지 않는 알싸한 아픔이 살결 위로 전해졌다.
“돌겠네…….”
보지 않아도 연우의 바지 앞섶이 달아올라 있을 게 분명했다. 서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 저녁 내내 관계를 맺은 탓에 아직 몸이 예민했다.
특히 그녀의 목은 연우가 유달리 집착하는 부위였다. 삽입당하며 깨물리는 감각을 몸이 기억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목이 씹히면 다리 사이가 젖어 들었다.
“읏. 얼른, 얼른 가자. 다 기다리고 계실 거야.”
서윤이 연우의 팔을 붙들며 재촉했다. 목덜미에 콧등을 비비던 연우가 체향을 삼키듯 숨을 들이마셨다. 깊게 마셨다 내뱉는 숨결이 서윤에게로 다 전해졌다.
다행히 거기까지였다. 연우가 서윤에게로 기대어 두었던 고개를 들었다. 다만 완전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지는 않은 채였다. 고개만 치들고 빤히 서윤을 들여다보았다.
“뽀뽀.”
“…….”
서윤이 움찔하며 연우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반대쪽으로 틀었다.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안기는 일이라면 익숙했다. 몸을 취하고 내주는 사이에 그런 달가운 입맞춤이 가능할 리 없었다.
“뽀뽀해 주세요.”
그때, 연우가 서윤의 턱을 쥐고 우악스럽게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렸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서늘했다. 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완곡한 협박이었다. 서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연우를 보았다.
“네, 어서요.”
서윤이 망설이다 작게 턱을 치들었다. 연우가 턱을 놓아준 채로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에게로 얼굴을 내렸다. 서윤이 조심스럽게 연우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쪽, 빠르게 입 맞추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순간 입술 끝에 느껴지는 단맛에 연우가 기묘한 표정을 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으며 여자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라고 안절부절못하는 서윤의 위를 연우가 덮친 것은 명백한 불시착이었다.
“읏.”
연우의 양손이 서윤의 턱을 쥐었다. 서윤의 얼굴을 감싸 쥐고는 입술을 엉겼다. 남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서윤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등받이에 걸려 놀란 눈으로 연우의 키스를 받아 냈다.
얽혀 있는 입술은 푹신하고 부드러운 데 반해 행위는 거칠고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혀와 혀가 꼬리 잡기를 하듯 쫓고 쫓기면 맞닿은 입술 새로 질척이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춥, 츕.
연우가 다디단 사탕을 빨아 먹듯 서윤의 입술을 탐닉했다. 서윤의 입 안에 있는 타액을 모조리 삼킬 듯이 혀로 곳곳을 쓸었다. 문지르고, 핥아 내고, 빨아들이며 짙은 키스를 이어갔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정신이 어질어질한 키스였다.
“으, 으.”
주먹을 쥔 서윤이 맥없이 연우의 팔을 내리쳤다. 눈꺼풀이 발작처럼 깜빡거리며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연우는 그제야 서윤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서윤과 연우의 입술이 서로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흐, 흐으, 흐.”
서윤이 가슴팍을 내리치며 호흡했다. 궁지까지 물린 얼굴이 새빨갰다.
“걸을 수 있으시겠어요?”
연우가 서윤의 이마에 이마를 툭, 부딪혀 오며 물었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겨우 숨을 몰아쉬던 서윤이 날쌔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우가 그런 서윤을 삐뚜름히 보았다.
“……!”
연우가 몸을 내려 서윤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아기라도 안은 듯이 연우는 평온했다. 진짜 아기를 안아도 이렇게 태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걸을 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윤은 놀라 안달복달했다. 연우는 연주자였고, 당장 리허설이었다. 거실에서 차고까지의 짧은 거리라고는 하나 팔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거나 무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네. 가죠.”
서윤에게 툭 대답한 연우가 수행 기사를 향해 눈짓했다. 수행 기사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차고로 향하는 계단으로 앞서 걸었다.
연우가 서윤을 뒷좌석에 가볍게 내려놓고는 문을 닫았다. 머지않아 서윤의 옆자리 쪽 문이 열렸다. 그녀의 옆에 앉은 연우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서윤의 손이었다.
“…….”
작고 오밀조밀한 손이 그의 커다란 손 안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연우는 쉴 새 없이 서윤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자신에 비해 한참은 작은 손을 기이하게 바라보다 자신의 입술 가까이로 가지고 가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입맞춤보다도 맹세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손등에 입술을 맞댄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서윤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자 연우가 피식 웃었다.
연우의 이런 행동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따금 서윤이 새벽에 눈을 뜨면 연우는 그녀의 신체 아주 작은 부위들을 관찰하고 있고는 했다.
발가락부터 귓바퀴, 속눈썹, 살갗 위의 솜털까지 샅샅이 주무르고 들여다보다 마지막에는 꼭 입술을 맞췄다. 한번은 손톱을 한 시간여 동안이나 문지르고 있기도 하였다. 서윤은 종종 그 저의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다만 지금처럼 모르는 체하며 연우에게 모든 것을 내줄 뿐이었다. 괴상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연우의 행위들은 이따금 간지러운 기분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처럼 소중하게 매만져 주거나 경건하게 입술을 찍어 내릴 때 특히 더 그랬다.
미쳐 버린 게 틀림없었다. 연우는 서윤을 여왕이나 떠받들 듯 입 맞추면서, 창부처럼 그녀를 굴렸다. 그 간극이 서윤을 고통스럽게 했다. 가슴께를 긁어 대는 수상한 감각에 아연하다 절벽으로 굴러떨어지면 꼭 상처투성이가 되어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그사이 차는 공연장에 도착했다. 곳곳에 곧 있을 연우의 공연 현수막이 바람을 따라 나부꼈다. 서윤이 문을 열고 나가기 위해 연우에게서 손을 가지고 오기 위해 힘을 주었다.
“곧 올라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예.”
연우가 서윤의 손을 꽉 붙든 채로 수행 기사에게 명령했다. 하대가 익숙해 보였다. 남을 부리는 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연우와 수행 기사, 모두가 이 상황에 덤덤했다. 떨고 있는 것은 오직 서윤뿐이었다.
탁.
수행 기사가 차를 내려 공연장을 향해 바르게 걸어갔다. 서윤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를 창 너머로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눈 돌리지 마세요.”
그 찰나도 허락하기 힘들다는 듯 연우가 서윤의 고개를 자신에게로 가지고 왔다.
“기분 더러우니까요.”
예언가라도 된 기분이다. 서윤은 이제 새까만 연우의 눈동자 위로 흐르는 한 줄기 애욕만을 바라보면서도 어렵지 않게 다음 순서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 올라와서 무릎 꿇으세요.”
다시 절벽으로 떨어질 시간이다.
서윤은 연우의 입술이 다정하게 맞대었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머뭇거리자 팔이 힘주어 당겨졌다. 어느새 상체가 연우 쪽으로 기울어져, 서윤은 아래에서 위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이…….”
공연장 앞이었다. 회사 사람들이 연우의 차를 알아보지 못할 리도 없었다. 그가 타고 다니는 차들은 대부분 국내에 한 대뿐인 차였다. 수행용이라고 해서 다를 바도 없었다. 수행 기사와 함께 올라오지 않은 두 사람이 차 안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을지 입방아를 찧는 목소리들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니까 빨리하셔야죠.”
연우가 서윤의 뒤통수를 바지춤 위로 짓눌렀다.
“더 늦으면 찾으러 올걸요.”
“…….”
“차체가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 끝나도록 배려해 드린 거예요. 혹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박히고 싶으세요?”
서윤이 질끈 눈을 감으며 시트 위로 다리를 올렸다. 무릎을 꿇기까지는 둔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으나 연우는 만족스럽게 서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서윤이 연우의 곁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뻗었다. 출발지에서부터 지금껏 성나 있는 앞섶을 최대한 피해 바지 버클에 손을 올렸다.
처음, 연우의 바지를 벗기는 일조차 난처해하던 서윤은 이제 알아서 좆을 꺼내어 들 정도로 그에게 길들여졌다. 좁은 틈으로 브리프 아래 발기한 성기를 꺼내어 들 때는 여전히 힘겨워 보였지만 불과 며칠 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후…….”
서윤이 연우의 성기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결 좋은 긴 생머리가 그녀를 따라 풍성하게 떨어졌다. 한껏 입술을 벌리고 연우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우읍.”
몇 번을 물었지만 매번 버거웠다. 서윤 혼자서는 성기 끄트머리나 겨우 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연우가 힘주어 쑤셔야 그의 성기의 반절이나 먹을 수 있을까 하였다.
서윤이 천천히 머리통을 움직였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연신 귀 뒤로 넘기며 혀로 성기의 끝, 움푹 팬 골을 할짝거렸다. 연우에게서 낮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후, 서윤아…….”
연우가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정리하듯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카락을 흘려보냈다. 정리한 지 오래되어 어느새 허리춤까지 자란 머리카락이 그의 손을 서윤의 둔부 가까이로 안내해 주었다.
“여, 연우야.”
엉덩이를 쓰다듬는 손에 서윤이 움찔거리며 바짝 고개를 들었다. 간신히 좆 대가리만 문 채로 당황하여 올려다보는 얼굴이 미치도록 그의 취향이었다.
연우가 물끄러미 서윤을 응시하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세게 한쪽 엉덩이를 움켜쥐자 서윤이 히익, 소리를 내며 움칠거렸다. 벌려서 다리 사이를 훑어 내리면 젖어 있을 게 분명했다.
“다리 벌리세요.”
무릎을 꿇어 가지런히 모여 있는 서윤의 다리가 느릿하게 벌어졌다. 연우의 손이 둔부를 타고 흘러 허벅지를 매만졌다. 무릎 위를 살짝 웃도는 단정한 미디스커트는 그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딸려 올라갔다.
“계속 빠셔야죠.”
서윤이 바들바들 떨며 마저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이 시간을 빨리 끝내 버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연우가 불편한 기분을 숨기지 않은 채 손을 치마 안으로 넣었다. 속옷 위를 문지르자 그의 손끝으로 젖은 천이 만져졌다.
“언제부터 젖어 있었어요?”
“흐읏, 응.”
연우의 곧은 손가락이 속옷 위로 클리토리스를 둥글게 굴렸다. 서윤이 숨을 들이 삼키며 다급히 연우의 성기를 빨았다. 그 속내가 자꾸 읽혀 심술궂게 구는 줄도 모르고 성실하게 그의 좆을 애무했다.
“이 자리에서 싸게 만들면 하루는 삐쳐서 우시겠죠?”
연우가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러자 서윤이 얼마나 착실하게 핥고 빨아 주는지 몰랐다. 연우가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참으며 나른하게 지껄였다.
“선생님, 속보여요.”
“부탁, 부탁해.”
성기를 물고 있어 발음이 어눌했다.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워서, 연우는 너그러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고개를 숙인 연우가 열심히 제 성기를 오물거리는 서윤의 뒤통수에 쪽 입 맞췄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서윤이 짧게 흐느꼈다.
“아, 흐흣.”
연우의 손가락이 서윤의 밀지를 매만졌다. 손바닥 위에서 굴려 주는가 하면 클리토리스를 짓궂게 꼬집어 주어 성감을 자극해 주었다.
“리허설 끝나면 건반에서 씹물 냄새 나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고 있는 구멍이 그 말 한마디에 벌름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찌나 질질 흘리는지 손바닥이 흥건했다. 정직하게 밝히는 몸과 여전히 서투른 펠라치오를 연우는 몸을 누인 채로 양껏 만끽했다.
“이렇게 흘려서는 좆이나 빨면서 부탁한 보람이 없잖아요. 발정 난 것처럼 안 굴려는 노력을 좀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응?”
“끄흐, 읏, 아흐, 앙.”
“하아, 글러 먹었네.”
차 안이 서윤의 다리 사이에서 찌걱이는 소리로 흥건했다. 연우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만져 주면 금세 달아오르고는 하는 서윤의 몸은 곧 절정을 맞을 듯 보였다.
“흣, 으, 힉.”
예상대로였다. 지그시 클리토리스를 만져 주자 서윤이 무릎을 조였다.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속옷은 더 젖을 수 없을 만큼 축축했다.
“아흣……!”
연우가 클리토리스를 가볍게 비틀자마자 서윤은 절정에 올랐다. 엉덩이가 무너지며 연우의 손바닥 위로 젖은 아래를 흥건하게 맞대 왔다.
“흐, 흐으.”
절정에 올라 늘어진 몸으로도 서윤은 연우의 성기를 우물거렸다. 연우가 쯧 혀를 차며 서윤의 목 아래로 손을 넣었다. 달래듯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서윤의 입에서 주르륵 성기가 빠져나왔다.
“당장 들어가면 안 되겠는데.”
그의 손바닥 위로 올라간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연우가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제 좆 빨다 온 얼굴이라.”
정말 그랬다. 자주, 반복적으로 서윤의 입에 성기를 물렸다고는 하나 적응하기 힘들 만큼 버거운 크기였다. 매번 흰자에 실핏줄이 다 터지고 얼굴은 목이라도 졸린 사람처럼 벌겠다. 그녀의 생을 쥐고 흔드는 기분은 짜릿했지만 사랑했으므로, 동시에 안쓰러웠다.
“괜찮아요. 예뻐요.”
연우가 서윤의 관자놀이에 꾹 입술을 붙였다. 서윤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연우가 다시금 서윤의 볼가에 입 맞추며 서윤의 다리 사이에 들어 있던 손을 가지고 와 제 성기를 쥐었다.
서윤이 곁에 없을 때는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고는 했다. 하물며 제 좆을 빨다 녹초가 된 얼굴이 제 손바닥 위를 구르는데 느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연우가 서윤의 얼굴을 포르노 삼아 느릿하게 성기를 주물렀다.
눈물과 고통이 얼룩진 투명한 눈동자.
한겨울의 동백꽃처럼 피어난 볼.
달싹이는 입술.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연우는 기꺼이 한계에 다다랐다. 서윤의 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연우가 꺼덕이는 성기를 힘껏 주무르며 서윤의 입을 향해 조준했다.
서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습관처럼 입술을 벌렸다. 유순한 여자의 음탕한 태도에 연우가 낮게 욕을 씹었다. 서윤이 질끈 눈을 감는 모습을 보며, 연우는 끝끝내 서윤을 향해 사정했다.
“후…….”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서윤이 입을 벌리고 정액을 받아먹었다. 끈적이는 식감이 싫은지 가루약을 먹는 어린애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열기로 들뜬 차 안이 어느샌가 어색했다. 서윤이 손등으로 입가에 남은 정액을 닦아 문질렀다. 어디에 다시 닦아야 할지 눈알을 굴리기에 연우가 뒷좌석에 마련된 티슈를 뽑아 들었다. 작은 손을 가지고 간 연우가 서윤의 손등을 툭 닦아 냈다.
그 순간 서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녀의 기억 속, 아직 온전하게 남아 있는 추억이 마음을 시리게 베고 지나갔다.
연우는 서윤에게 10분의 말미를 주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킬 기회였다. 축축하게 젖은 속옷은 수습할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 얼굴을 하고 리허설 현장에 도착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차에서 내린 서윤이 엉거주춤 아스팔트 바닥을 디뎠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차고 축축한 속옷이 불편했다. 다리 사이로 초겨울의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속옷이 여성에 차지게 붙어 오며 낯부끄러웠다.
서윤이 그렇게 잠시 서서 표정을 정돈하는 사이, 차에서 내린 연우가 서윤의 뒤로 성큼 걸어왔다. 동시에 포근한 감촉이 서윤의 어깨를 감쌌다. 연우가 입고 있던 재킷이었다.
“대기실 가서 닦아 드릴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쪽. 연우가 서윤의 관자놀이에 입 맞추곤 손을 잡아 왔다. 서윤이 순간 당황하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인적이 드물었지만, 지금 연우는 공연장 안까지 손을 잡고 걸어갈 기세였다.
옳지 않았다. 특히나 다른 직원들이 연우와 서윤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떠올리면 더 그랬다. 연우에게 분명 좋지 않은 일이었다.
“손은 놓고…….”
“괜찮으니까 겁먹지 마세요.”
“사람들이…….”
“선생님을 모욕한 새끼들 자리는 조만간 전부 비워 드릴 테니까요.”
연우가 서윤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서윤이 고개를 저을 새도 없이 덤덤하게 그녀를 이끌며 걸었다. 앞서 걷는 등이 넓고 단단했다. 그녀가 아껴 마지않던 소년이란 착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 * *
연우가 공연장에 들어선 지금까지, 공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특히나 멀리서 연우와 서윤의 등장을 지켜보고 있던 한일훈 팀장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연우는 명백하게 서윤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그의 수트 재킷을 걸치고, 깍지 낀 손을 지분거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짐승처럼 영역 표시로 말미암아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 곁의 서윤은 내내 좌불안석에 눈치를 살펴서, 서윤에게 벌컥 화를 냈던 일이 무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눈에 보아도 애정의 추는 연우 쪽으로 더 깊이 기울어져 있었다.
“……자, 자. 얼빠져 있지 말고 다들 움직여!”
한일훈이 손뼉 치며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러면서 그의 시선 역시 연우와 서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연우는 서윤을 자연스럽게 대기실 쪽으로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꼭 신혼부부라도 되는 양 간지러운 분위기가 두 사람 주변을 떠돌았다. 실제로 선남선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림이기는 했다.
일훈이 한숨과 함께 옆에 있던 직원을 바라본다. 직원의 기분도 마찬가지인지 당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무대 음향 쪽에 문제가 생기면서, 30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연우와 서윤은 대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경직된 서윤의 곁에, 연우가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로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대기실을 지나다니는 직원들이 연우와 서윤을 힐긋거렸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연우는 평소 그 어떤 리허설이나 공연에서도 대기실을 개방하지 않았다.
사움 소유의 공연장은 건축 설계 단계부터 연우의 개인 대기실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연우가 그 공간을 개방한 것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보란 듯이, 연우는 서윤을 바라보며 간간이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스쳤다. 서윤의 손을 멋대로 가지고 가 주물럭거리기도 했다.
지금의 연우는 완벽하게 사랑에 빠진 남자 같았다. 싸늘하게 바라보거나 단칼에 직원들을 잘라 내던 단호함은 티끌만큼도 엿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연우가 대기실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무지한 서윤만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연우가 서윤의 볼가를 장난스레 툭툭 건드렸다. 서윤이 하지 말라는 눈으로 연우를 돌아보았다. 연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손톱을 세워 아프지 않게 그녀의 볼을 긁으며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지금 닦아 드릴까요.’
무엇을 닦아 줄까 묻는지 깨달은 서윤이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혹시 누가 봤을까 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곁에서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상한 기분이다. 괴이한 일이었다. 모두가 연우와 서윤을 끔찍하게 바라보는데, 오직 그만이 그녀를 꼭 연인처럼 대했다. 그 달콤함에 매몰되기에는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따가웠다.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처럼 마음을 졸였다.
“저, 준비 끝났습니다.”
그때, 한 직원이 대기실 근처에서 연우를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설핏 뒤를 돌아본 연우가 짧게 고개를 까닥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몸짓은 물 위를 걷는 백조처럼 우아했다. 그의 몸을 따라 흐르는 흰 셔츠가 깃털처럼 보일 정도였다.
“……잘 다녀와.”
서윤이 연우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우가 서윤을 향해 넌지시 시선을 주었다. 연우의 공연은 추후 DVD로 제작할 예정이기 때문에, 한 사람은 대기실에서 화면을 확인해야 했다. 일전에 서윤이 안내받았던 그녀의 역할이기도 했다.
이미 한참은 오래전에 정해진 일인데, 연우는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직원이 말한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서서 서윤을 바라보았다. 연우의 등 뒤로 몇 직원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보였다. 서윤이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선생님은 여기서 화면 확인하기로 했어.”
선생님이란 호칭이 껄끄러웠다. 이 자리에 앉아 지분거리는 모습을 모두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 호칭이 얼마나 거북하게 느껴질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누구 마음대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라는데, 연우가 서늘하게 뒤돌아보았다. 대기실 뒤편에 서 있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저, 어…… 그게. 은사님. 그건 저희가 하겠습니다.”
한 직원이 다급히 서윤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필사적으로까지 보이는 남자의 대처에 서윤은 연우의 위치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
연우가 서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서윤이 주변을 의식하며 연우의 손 위로 손을 올렸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의 뜻은 아니었다. 여기서 더 머뭇거렸다가는 괜히 직원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었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서윤은 자연스레 그녀를 끌어안아 감싸오는 연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연우와 서윤이 걷는 길을 따라 일제히 물러서는 눈빛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전해졌다.
끔찍해하거나 더러워하거나.
서윤의 주눅 든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본 연우가 안고 있는 그녀의 팔을 살살 쓰다듬는다. 서윤이 올려다보자 더더욱이나 살가운 눈빛을 내렸다.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이중적인 마음이 교차한다. 오늘따라 유달리 다정히 구는 연우와 사람들의 옥죄는 시선 사이에서 서윤의 마음은 연우에게로 가파르게 기울었다. 재난 사태에 비상구를 찾아다니듯, 자신을 지켜 줄 안전한 지대를 향해 저도 모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연우의 비호가 자신을 지키리라는 것을 서윤은 알고 있었고,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지옥과 지옥 사이에서 차악을 선택하는 일은 서윤에게 있어 숨 쉬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심스레 곁에 몸을 붙여 오는 서윤을 연우가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사건은 연우가 세 번째 곡의 리허설을 마쳤을 무렵 일어났다.
서윤은 무대 한편, 연우와 마주 보는 자리에 직원이 따로 마련해 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몇몇 관계자들이 서윤을 이상하게 보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서윤에 관한 연우의 태도가 지나치게 강경하여 그 누구라 할지라도 이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리허설 내내 서윤을 보며 연주하는가 하면, 이따금 가만히 앉아 연주를 듣는 서윤을 바라보며 미소짓기도 했다.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연주회처럼 연우는 곧게 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리허설을 보러 온 고위 관계자들도 함부로 입을 떼기를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특히나 서윤에게 크게 한소리를 한 한일훈은 내내 절망이었다. 연우가 어디 20대 초반의 연주자라고 하여 쉽게 휘두를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던가. 그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게다가 서윤이 조곤조곤 덧붙이는 연주에 관한 피드백을, 연우는 거부감 없이 흡수하고 있었다. 전공자였다고는 하나 업계를 떠난 지 꽤 오래된 서윤이 덧붙이는 피드백이 꽤 그럴듯하여 연우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상마저 드는 게 사실이었다.
“……난리 났네.”
한 팀장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하얗게 질려 갔다. 사움이 설립되던 당시, 연우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물갈이된 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인간으로서의 예의나 구태의연한 절차조차 없이 댕강댕강 목이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공포를 학습한다. 어쩌면 저 사람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직관적인 두려움이었다.
“거기.”
한 팀장이 고개를 비틀어 관객석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아직 사움 외부까지는 소문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한 클래식 음악 관계자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직원들을 향해 무언가 묻고 있었다.
“리허설 중입니다.”
피아니스트의 집중을 깨지 말라.
그렇게 에둘러 말함으로써 한 팀장은 아주 잠시 잠깐 분위기를 수습했다. 단편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일주일, 아니, 당장 하루만 지나도 연우와 서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업계에 파다할 게 분명했다.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연우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좌중이 고요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가히 천재라고 불리는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환상적인 연주였다.
그의 맞은편에 있는 이가 끊임없이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본다면 한 폭의 그림처럼 예쁜 풍경이기도 했다.
그때, 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살짝 열어 놓은 문틈 새로 남자의 우악스러운 비명이 불분명하게 찢어지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뒤를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이 더러운 개새끼들아!”
오직 피아노 선율만이 가득하던 공연장에 악에 받친 남자의 고함이 길게 찢어진 건 순간이었다. 모두가 당황한 얼굴로 눈빛을 교환했다. 공연장은 공연일이 아니고서야 관계자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특히나 연우의 공연이 있을 때는 공연 2주 전부터 그 어떤 예약도 받지 않기 때문에 보안은 더욱더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그 철통같은 보안을 깨고 대현은 리허설 현장으로 난입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대현이 서 있는 눈앞으로 몰아쳤다.
서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루한 행색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가 전남편인 대현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서윤은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하얗게 질렸다.
“씨발, 씨발. 지서윤 네가 그러고도 멀쩡히 살 것 같아? 어?! 이거 놔!”
제지하는 사람들 사이를 대현이 마구잡이로 헤치고 걸어갔다. 폭력도 불사했다. 불시에 대현에게 얻어맞은 직원들이 공연장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와중에도 연우의 연주는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의 흔들림 없이 섬세하게 선율을 쌓아 나갔다.
“하, 이 개 같은 년들. 지서윤 이 더러운 년. 씨발.”
갈기갈기 찢어지는 괴성 사이로 흐르기에는 연주는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대현은 어느새 공연장 한가운데까지 쫓아왔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대현의 눈동자는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몇몇이 그를 말리겠다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대현은 성큼성큼 걸어 서윤에게로 가까워졌다. 무대 위에 연우와 서윤을 번갈아 보며 잠시 멈추어서서는 삿대질과 함께 코웃음 쳤다.
“너희들 내가 소송 걸 줄 알아. 내 뒤에서 너희 둘이 더럽게 놀고 있었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어? 그런 주제에 나한테, 씨발, 감히 내가 불륜이라고 이혼 소송을 걸어? 지서윤 이 음침한 년이 언제 남의 침실에 기어들어 와서는 그딴 사진들을 찍어 가지고. 언제부터야? 어?! 씨발, 남의 집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고 무사할 줄 알아?! 지서윤 너 때문에! 네깟 년 때문에!”
대현이 서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게 머리채가 잡힌 채 얻어맞았던 기억들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서윤이 황급히 자리에서 내려와 등받이 뒤로 몸을 숨겼다. 한 집에서는 도망칠 곳이 없어 그렇게라도 몸을 숨겨야 했던 지난날의 트라우마가 반복되고 있었다.
“너를 더 팼어야 했는데, 응?”
대현이 그런 서윤을 비웃으며 한 뼘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연주가 멈추었다. 대현이 무대의 문턱까지 쫓아올 동안에도 무신경하게 이어지던 연주였다.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그시 일어나 대현을 내려다보았다. 기쁘게 웃고 있는 듯도 보였던 얼굴이 순간 표정을 지웠다.
대현의 걸음이 멈칫하며 표정이 누그러졌다. 무언가 덫에 걸린 듯 텁텁한 기분에 대현은 몇 번이고 연우를 다시 보아야 했다.
“병신…….”
연우가 대현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읊조렸다. 시선을 둘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나아갔다. 길고 곧은 두 다리가 아직 의자 뒤에 웅크려 있는 서윤에게로 향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발발발발 떨고 있는 서윤 앞에 연우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누가 보아도 연인을 대하는 태도로 그녀의 곳곳을 살피며 애틋하게 매만졌다.
“선생님.”
서윤이 눈동자에 물기를 가득 매단 채로 연우를 본다. 숨이 불규칙하게 색색거렸다. 불안으로 눈꺼풀을 떨며 바라보는 꼴이 꼭 날개를 파먹힌 나비 같았다.
“선생님, 괜찮아요. 떨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그녀가 더 이상 날지 못한다는 사실이 노엽지는 않았다. 다만 삶의 모든 욕구를 잃고 박제되어 그의 침실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신 하나만은 욕망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조금 더 맹목적일 필요가 있었다.
연우가 웅크린 서윤의 무릎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의 팔 아래에 가볍게 들어 올려진 서윤이 현실을 도피하듯 연우의 품 안에 고개를 처박았다. 아직 떨림이 느껴졌다.
“내보내.”
서윤을 안은 그대로 연우가 직원들을 향해 말하고는 이내 유유히 무대를 벗어났다. 여러 직원들에게 팔이 붙잡힌 대현이 사라지는 연우와 서윤을 바라보며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연우와 서윤은 대기실로 돌아왔다. 화면으로 무대의 상황을 보고 있던 직원 몇몇이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문을 닫고 대기실에서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힘과 동시에 대기실에는 연우와 서윤만이 남았다. 소파로 걸어간 연우가 서윤을 내려놓으려는데, 미약한 힘이 셔츠 끝단을 붙잡아 왔다.
“……흐.”
연우가 서윤을 내려다보았다. 서윤이 눈을 내리깐 채로 연우의 셔츠를 붙잡고 있었다. 힘주어 꽉 쥔 손등에는 얇은 핏줄까지 솟아 있었다.
“선생님.”
연우가 서윤의 손을 맞잡았다. 잔뜩 들어간 힘이 서서히 풀려갔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연우가 손가락과 손가락을 얽었다. 깍지 껴 단단하게 맞잡으며 서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연우가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순애를 담아 서윤을 감싸 안았다. 품에 두고 다독이며 그녀를 달랬다. 매번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고통 뒤의 시간들 안으로 그가 제멋대로 침범했다.
“……으.”
아늑했다. 따뜻하여 마음이 누그러졌다. 울컥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연우가 서윤의 머리통을 감싸 안아 그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기대었다.
“이만 갈까요?”
다정한 온기가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우리, 집에 가서 쉴까요?”
늘 혼자였던 서윤과 기꺼이 우리가 되어 주었다.
“따뜻한 물에 씻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요. 잠들 때까지 안아 드릴게요.”
서윤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우가 그 작은 몸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 * *
연우와 서윤은 집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집에 오로지 둘만이 남겨졌다. 연우는 서윤을 위해 요리했고, 서윤은 연우가 넘겨 주는 식사를 받아먹었다. 서윤이 한 숟가락을 삼키면 칭찬하듯 입 맞췄다. 애틋하게 쓰다듬어 주며 끊임없이 괜찮다 말해 주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욕실로 향했다. 연우가 그녀를 안고 옮겨 주었으므로 걸을 필요도 없었다. 따뜻한 욕조에 거품을 풀고 긴장으로 딱딱해진 몸을 녹이기만 하면 됐다.
욕조 맡에 걸터앉은 연우가 연신 거품을 들어 어깨를 문지르고, 따뜻한 물을 퍼 그녀의 어깨에 부어 주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아프게 관계를 맺는 일은 없었다. 수건으로 서윤의 몸에 남은 물기를 꼼꼼히 닦아 준 연우는 그저 푹신한 침대에 그녀를 뉘어 주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그 위를 토닥이며 잠을 재촉했다. 어느새 침대 옆 탁자로 옮겨진 오르골에서는 청아한 결혼행진곡이 울리고 있었다.
* * *
연우의 극진한 보호 덕일까. 잠에서 깨어나는 서윤의 안색은 한결 맑았다. 지난날, 이와 같은 수호가 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하게 됐다.
아버지에게 맞아 궁지에 내몰린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연우와, 전남편의 손에 우악스럽게 머리채가 잡혔을 때 그녀를 구하는 연우를 자연스레 상상했다.
그때도 곁에 연우가 있었다면 오늘처럼 온전하게 눈뜰 수 있었을까.
“……아니야.”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감상이었다. 서윤은 필사적으로 폭력적이던 관계를 떠올렸다. 그녀의 턱을 움켜쥔 채 현주에게 관계를 보이고, 그럼에도 죄악감 없던 말끔한 얼굴을 되새겼다. 수천 갈래로 갈라지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그러나 생에 처음 느낀 구원의 온기를 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서윤이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잠시 기다리자 연우가 쟁반에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서윤이 당황하여 급히 침대에서 빠져나오려는데, 성큼 가까워진 연우가 그녀를 제지했다.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쟁반을 한 손에 든 채 다른 쪽 손으로 지그시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침대에 계세요.”
그렇게 말하는 연우는 오늘 아침마저도 손수 먹여 줄 기세였다. 어제는 대현 때문에 정신이 모두 무너졌다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서윤이 고개를 저으며 막 숟가락을 쥐려는 연우의 손등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정말 많이 괜찮아졌어. 혼자 먹을 수 있어.”
“그래요?”
“응.”
“그러세요, 그러면.”
그녀 쪽으로 쟁반을 돌려 주는 행동이 순순했다. 서윤이 숟가락을 집어 들며 힐긋 연우를 보았다. 연우는 지그시 서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연히 마음이 불편했다. 어제 연우의 품에서 먹고, 자고, 씻었던 일이 떠오르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윤이 못내 어색한 표정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침 먹었어?”
“아니요.”
“왜…….”
“선생님이 드시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말문이 막힌다. 어머니에게서조차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서윤이 애써 시선을 그릇 안으로 옮기며 대답했다. 그릇 안에는 빛깔 좋은 야채죽이 담겨 있었다.
“잘 먹어야 리허설도 하지…….”
“못 먹는다고 못할 실력은 아니라서요.”
“그건 그렇지만.”
“다녀올 테니까 오늘 하루는 집에서 쉬세요.”
숟가락으로 의미 없이 야채죽을 휘젓던 서윤의 고개가 바짝 들렸다. 연우가 그래도 된다는 듯 턱을 까닥였다.
“아니야. 그래도 나갈게. 나가고 싶어.”
서윤이 굳건한 의지를 내비쳤다. 비록 사람들에게 그녀는 어린 제자를 꼬여 낸 양심도 없는 여자일지라도 맡은 바 역할은 다 해내고 싶었다. 자신에게 사회의 한구석,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주어진다면 열심히 하고 싶었다.
“불편하시지 않겠어요?”
연우가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서윤이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 연우의 미소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선생님은 강하시네요.”
“……그럴 리가.”
“아니에요. 선생님은 정말 강한 사람이에요.”
연우가 손가락으로 서윤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겼다. 서윤이 흠칫 놀라 어깨를 떠는데도 굴하지 않고 사분사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정말…… 강한 사람.”
다만 그의 손길이 지나치게 다정하여 서윤은 알아챌 수 없었다. 이상했다. 오늘따라 연우는 서윤에게 다정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살갑게 굴었다.
게다가 연우는 그녀가 강한 사람이라며 아무도 믿지 않을 이야기로 띄워 주기까지 했다. 우악스럽게 섹스를 졸랐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이런 마음이 옳은 것인지 궁금해졌다. 연우를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해지면서도 몸에 열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저릿했다.
서윤이 힐긋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원래 같았다면 어디서든 범해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몸이 지난 정사에 익숙해져 그런 것이다. 끔찍했지만, 서윤은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생각에 잠긴 서윤을 연우가 부른다. 서윤이 내리깔린 눈꺼풀을 연우에게로 들어 올렸다.
“그래도 혹시, 선생님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저를 불러 주실래요?”
서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눈꺼풀 역시 쉴 새 없이 깜빡거렸다. 마음이 조급히 달려나가기 전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삼켜 내고 또 삼켜 냈다.
“식겠어요. 식사하세요.”
어느새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친 서윤의 손에 연우가 다시금 수저를 들려 주었다. 손등과 손가락을 헤집는 연우의 체온을 느끼며 서윤이 불쑥 고개를 돌렸다. 따지듯 물었다.
“……왜 그랬어?”
무엇을 따지고 있는지 스스로조차 정확하게 짚어 내기 어려웠다. 강압적인 관계를 말하는지, 어젯밤 연우가 베풀어 준 품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인지.
“선생님을 사랑해서요.”
연우가 대답했다. 애매모호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그 어떤 일이든 서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선생님을 가지고 싶어서요.”
마치 오래 준비한 사람처럼 연우의 대답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서윤의 입술이 긴장으로 달싹거렸다.
“선생님을.”
“……하지 마.”
서윤이 손으로 연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연우가 한 손을 들어 제 입술 위를 덮친 작은 손등에 손을 겹쳤다. 눈을 내리깔고 희고 보드라운 손바닥 위로 경건하게 입 맞췄다.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안고 싶었어요.”
“…….”
“입술을 맞추고, 끌어안고, 벗겨서, 샅샅이 핥아 먹고 싶었어요. 꽤 오래, 여전히.”
손바닥 위로 흘러드는 숨결이 짙었다. 혹여 그 깊음에 빠져 잠식되지는 않을지 지레 걱정이 들었다. 자신을 구명할 대책 하나 없이 맨몸으로 이 애의 애정을 받아 내는 일이 버겁게 느껴졌다. 자꾸만 혼란스러웠다.
“제가 나쁘다고 하셔도 괜찮아요. 저는, 선생님을 과시하고 싶어요. 선생님을 한 번 잃었던 만큼 더 간절해요. 사실 이 여자는 내 정액을 묻히고 흥분에 겨워 울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
“사랑해서요.”
“그건…… 사랑이 아니야.”
서윤이 연우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자 연우가 침대 위로 몸을 올렸다. 순간 침대가 크게 들썩이며 그녀 가까이로 연우가 눈을 맞춰 왔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사랑은 뭔가요?”
숨결이 성글게 엉켰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깊고 까만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 들어찬 광경을 본다. 그녀가 그의 세상을 모조리 점령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어쩌면 검은 시선 속에 갇힌 가련한 나비이거나.
서윤이 고개를 비틀어 연우의 시선을 피했다. 외면하며 연우에게 잡힌 손을 빼내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서윤도 알지 못했다. 구태여 정의하기 위해 머리를 헤집었지만 손에 잡히는 기억 하나 없었다. 문득 지난 밤 따스하게 안아 주던 품이 떠올랐지만 애써 외면했다.
“저는 평생 선생님밖에 없었어요.”
“…….”
“그런 저를 떠나신 건 선생님이시잖아요.”
“…….”
“겨우 다잡은 마음을, 선생님이 뒤흔드셨잖아요.”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마음이 서윤을 옥죄었다. 그런 아이를, 그날 밤 자극한 것은 명백히 그녀라는 사실 역시도 서윤을 괴롭게 했다.
만약 그날 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미움과 죄책감이 동시에 억눌린다. 아니, 사실은 이 마음을 모조리 죄악감이라 표현해도 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 * *
리허설이 재개되었다. 분위기는 다소 침체되어 있었지만 어제의 부진을 채우기 위해 모두가 일사불란했다. 몇몇 직원들은 서윤에게 조용히 걱정을 표하기도 했다. 개중에는 복도에 나와 서윤을 조롱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순수한 걱정이라고 여기기에 서윤은 그리 순진하지는 않았다. 막연한 호의에는 대가가 따른다. 서윤은 그들의 호의가 연우의 비호에서 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었다. 그 한 팀장마저도 오늘은 못내 서윤에게 괜찮냐 에둘러 물었으니까.
“…….”
서윤이 마지막 리허설 곡을 연주하고 있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누구나 사랑에 빠질 법한 남자가 아름다운 선율을 빚어내고 있었다. 간간이 서윤을 바라볼 때에 심장이 꿰뚫리는 듯한 기분은 다만 서윤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유난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연우를 향한 이상한 마음은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나뭇잎들과 같았다. 서윤은 담담히 자신의 마음을 결론지었다. 때마침 연우의 마지막 리허설 곡도 끝이 났다. 마지막 음계가 울려 퍼지고, 공연장 안의 사람들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내 박수를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곳곳에 서로를 향한 인사가 난무했다. 서윤도 덩달아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주에 관해 덧붙일 말은 없었다. 오늘만 같은 컨디션이 이어진다면 공연도 성황리에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서윤이 안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은사님.”
그때, 누군가 무대 측면의 계단을 타고 걸어와 그녀를 불렀다. 목에는 사움 직원을 뜻하는 공연장 출입증을 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직원이었다. 이런 직원이 있었던가. 서윤이 잠깐 갸웃했다. 사움은 소수정예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팀이든 간에 안면 정도는 있었다.
“공연 일정 관련해서 잠시만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남자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서윤이 슬그머니 연우를 돌아보았다. 연우는 음향 담당자와 직원 몇 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은사님?”
“아, 네. 가요.”
서윤이 계단을 내려 남자를 따랐다. 그녀가 뒤돌아서기 무섭게 연우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남자와 함께 관객석을 지나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서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증명하듯 호리호리했다. 후 불면 날아갈 꽃잎처럼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하였다.
조금 더 건강했다면 이렇게 마음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서윤이 떠난 자리를 더듬으며 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어제 대현을 만난 후 제게로 한껏 기울어져 있던 서윤의 체온을 느끼며 벌써부터 치드는 그리움을 인내했다.
조만간 집으로 돌아가면 그녀의 주린 배에 한가득 맛있는 음식들을 채워 주리라 생각하면서, 연우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초소형 도청 장치를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 * *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공연장을 나선 직후였다. 공연 일정 관련 업무라면 공연장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게 마땅했다. 서윤이 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공연장을 벗어나 걷고 있었다.
“저, 어디 가시는 거예요?”
공연장 뒤편, 주차장 어귀의 분위기는 어둑어둑하여 당장이라도 겨울비가 쏟아질 듯했다. 서윤이 한 발자국 급히 걸어 남자에게 물었다.
당황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그녀를 남자가 잠시 뒤돌아본다. 남자의 눈동자가 일순 희번덕였다. 서윤은 순간 불길한 예감에 손을 절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두피에 강한 고통이 밀려오며 서윤이 숨을 삼켰다.
“흐읍……!”
무릎 뒤가 꺾이면서 몸이 무너졌다.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이 부딪쳐 아리도록 아팠다. 설마 대현인 것일까. 공연장에 사람을 심어 놓은 걸까.
잠깐 동안 서윤의 눈앞으로 무수히 많은 가정들이 쏟아졌다. 고개가 처박힌 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바닥에는 서윤의 입술을 타고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옆으로 두툼한 허벅지가 그녀를 따라 무릎 꿇는다. 대현은 예민한 성정을 보여 주듯 작고 깡마른 체형의 남자였다. 그렇다면…….
서윤의 옅은 색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입술까지 떨며 경련하는데 강한 힘이 머리채를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허윽!”
타의에 의해 고개가 들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서윤의 눈동자가 절망에 가득 찼다. 나이 들어 일그러진 얼굴엔 서윤을 향한 분노와 드디어 만났다는 희열이 한데 얼룩져 있었다.
“하하. 이 개 같은 년, 이제야 잡았네…….”
“아, 아버지…….”
서윤의 아버지, 지서훈이었다.
낡은 봉고차에 태워진 서윤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길을 가고 있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지서훈은 서윤의 뺨을 후려쳤다. 연약한 목이 꺾이며 고개가 돌아갔다. 볼은 물론 눈알이 터져 나올 듯이 아렸다. 입가 역시 쥐어 터져 피딱지가 뭉쳐 있을 게 분명했다.
서윤은 뒷좌석 한편에 웅크려 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로 현실을 부정했다. 왜 고통은 한 번에 밀려올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누군가에게 일상이란 평온을 뜻하겠지만, 그녀에게 일상은 언제나 해일의 한 가운데를 떠다니는 난파선처럼 위태로웠다.
“서윤아…….”
지서훈이 목소리를 내리깐 채 서윤을 불렀다. 서윤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화로 가득 차 그녀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아으, 윽.”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를 본 줄 아니?”
두꺼운 손이 서윤의 멱살을 가까이 잡아 올렸다. 셔츠가 팽팽히 당겨지며 그녀의 몸이 지서훈 가까이로 들어 올려진다. 눈앞에 보이는 형형한 안광이 익숙한 만큼 끔찍했다.
“내가.”
툭. 단단한 손바닥이 서윤의 볼을 두드린다. 짤막하게 두드리는 듯 보이는 손길이 머지않아 어떤 폭력으로 되돌아올지 그녀는 너무 잘 알았다.
“너 때문에.”
툭. 서윤의 숨이 점차 거칠었다.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두려움을 호소했다.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눈앞의 공포를 낱낱이 바라보았다.
“평생 일군 회사를, 응?”
지서훈의 눈매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일그러져 있었다. 서윤이 이혼하면서, 특허 기술을 위해 몇 년간 준비해 왔던 모든 일이 어그러졌다. 조금만 버티면 더 이상 다음 수주 계약을 위해 비굴하게 고개 숙이는 일 없을 거라 굳게 믿었으나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다시 하던 일이라도 되찾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간 연우의 외가 쪽에서도 더 이상은 수주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심지어는 지서훈이 몇 년 동안이나 매달린 특허 기술마저도 그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고작 몇 개월 사이에 두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네가, 너 때문에.”
서윤의 멱살을 쥐고 있는 지서훈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간다. 지서훈은 자신의 무능을 아무 힘도 없는 딸에게로 돌렸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마찬가지였다. 미래 역시 똑같았다.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인간이거나 가진 능력으로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사내였다면 아내를 그렇게 보내지도, 딸을 이토록 핍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지서훈이 서윤의 목을 쥐었다. 가느다란 목이 손가락 끝에 선연히 만져졌다. 아내와 함께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부성 따위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추악한 마음이 검은 손을 내밀어 서윤의 목을 더듬거렸다.
“시, 싫어요. 하, 하지…….”
서윤이 글썽거리며 턱을 저었다. 죽고 싶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아버지의 속에 목이 졸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어린 날, 수업을 마치고 달려왔던 집에서 허공에 매달려 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너만, 너만 아니었어도……!”
“억, 억, 으.”
목을 조르는 힘에 서윤의 뒤통수가 차창 뒤로 쿵, 쿵 부딪혔다. 숨이 막혔다. 움켜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점차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마지막 순간, 평생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사람의 끔찍한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 차라리 감사했다.
서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혼절하듯 눈을 감았다. 흐려지는 정신 사이로, 뻐끔뻐끔 울음을 흘려 내는 눈꺼풀 아래로, 어젯밤 다정하게 안아 주던 손길이 떠올랐다. 괜찮다고 말해 주며 안아 주던 다정한 품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적어도 그건 사랑이라고 했었는데.
눈을 떴을 때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면 온전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제발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조차 과분했다. 마지막 생각을 끝으로 서윤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 * *
끈질긴 생명력을 저주하며, 서윤은 눈을 떴다.
창문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꽤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몸이 얼음장처럼 찼다. 온몸에 오한이 들어 손가락 마디마디며 무릎까지 시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문득문득 기절 중간 발로 몸을 차는 감각에 깨어났던 순간이 정신을 집어삼켰다. 온몸이 너덜거리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뼈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끊임없이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서윤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주변을 훑었다. 집이었다. 연우의 곁이 아니다. 거실 한구석에 서윤은 시체처럼 힘없이 누워 있었다. 기도하지 않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여길 수 있어서, 간절히 바라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차라리 쉬운 목숨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또다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서윤이 자조하며 눈을 감았다. 이런 와중에도 착실하게 슬퍼하며 눈물을 흘려 주는 눈물샘이 우스웠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때였다. 서윤의 귓가에 도르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침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서윤은 집 안에 혼자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
잠들어 있다. 아버지가 잠들어 있었다. 일순 심장이 조급하게 뛰었다. 자신을 이 차디찬 바닥에 던져둔 채 편히 잠들어 있다는 분개와 함께 불현듯 수면 위로 떠 오른 생각 탓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생에 단 한 번이라도 도망쳐 볼 기회가 있다면.
아니다. 서윤이 눈을 감으며 체념했다. 이런 몸으로 도망 같은 걸 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은 차라리 숨죽여 끝을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도망을 치다 잡히면 더더욱이나 끔찍한 지옥이 눈 앞에 펼쳐질 게 분명했다. 한순간 의지를 잃은 서윤의 눈이 무겁게 감겼다. 어느새 바닥까지 적신 눈물 탓에 눌린 볼까지 축축했다.
‘그래도 혹시, 선생님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저를 불러 주실래요?’
때마침 눈감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연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리허설에 들어가기 전 휴대 전화는 몇몇 팀장급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납했다. 과거 직원의 휴대 전화 벨소리가 울려 연주가 끊기면서 만들어진 룰이라고 했다.
서윤은 지금 도움을 청할 휴대 전화도, 힘껏 내달려 도망칠 몸뚱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아 폭력을 기다리던 나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이를 그만큼이나 먹었는데도 손안에 쥔 패가 이토록 없다니 자기혐오마저 일었다.
억울했다. 맞다, 억울했다. 선택할 수 없는 부모를 잘못 타고난 죄가 이렇게 클 리 없었다. 그때그때 어떤 선택을 해야 지금보다 나은 상황이 될 수 있었는지 서윤은 진실로 알고 싶었다. 자신이 나약한 탓이라기에는 받아든 선택지는 매 순간 잔혹했다.
‘선생님은 강하시네요.’
‘……그럴 리가.’
‘아니에요. 선생님은 정말 강한 사람이에요.’
……또, 연우 역시 제게 강한 사람이라 말했다. 서윤이 아랫입술을 힘주어 깨물며 필사적으로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참아 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서윤의 시선 끝에 작은 인조 식물이 걸려든 건 우연이었다.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껏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화분이 서윤의 시야 가까이로 클로즈업되었다. 매끈한 미색 도자기 위에 푸릇하게 피어 있지만 뿌리는 없었다. 언제 쓰레기통에 처박혀 죽어 나갈지 모르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인조 식물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뿌리도 없이 서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자신처럼 보였다.
서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아직 침실 쪽에서는 성근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서윤의 시선이 쉴 새 없이 침실과 화분을 오갔다. 침실 문을 열고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머리 위로 화분을 내리꽂는 상상을 했다.
할 수 있을까.
서윤이 바닥에 눌어붙은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관절을 움직인 것만으로도 알싸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버틸 만했다. 끔찍할 정도로 아픈 순간에는 목을 졸리던 시간을 떠올리며 견뎌 냈다.
할 수 있어.
무릎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발로 얻어맞은 허벅지가 얼얼하여 움직일 때마다 어질어질했다. 서윤은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시간이 없었다. 언제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날지 몰랐다. 안간힘을 써 꿈틀거리며 서윤은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읏.”
서윤이 몸을 질질 끌어 화분 가까이로 다가갔다. 손을 들어 매끄러운 화분의 표면을 스쳐보았다. 차디찬 감촉에 소름이 끼쳤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체온을 떠오르게 했다. 내내 불길 속에 내던져진 듯한 삶을 덮어 주던 차고 커다란 손이.
서윤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부득불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분을 쥐었다. 침실로 걸어가는 길은 지옥이었지만, 걷지 않는다고 해서 낙원으로 갈 수 있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움직여야 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침실 문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여전히 색색거리는 고른 숨이 새어 나왔다. 서윤이 숨을 죽인 채 어깨로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 곧장 아버지의 침대가 나왔다. 걸어가 단번에 내리치면 되는 일이었다. 고른 숨을 내쉬며 자고 있는 모습을 긴장하여 바라보는데,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은사님…….”
“흐으…….”
간담이 서늘하게 녹아내린다. 음산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서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빳빳하게 굳어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아버지에게로 안내했던 남자가 휴대 전화를 든 채 서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번덕하게 눈을 뜨고는 서윤과 그녀가 들고 있는 화분을 번갈아 보다 이내 히죽 웃었다.
“끄, 흐…….”
겁에 질린 서윤의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고 있던 아버지도 깨어나고 있는 듯했다. 남자 둘을 서윤 혼자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
서윤이 들고 있는 화분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남자의 손이 다가오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아주 느리게 보였다.
“무슨 일이야?”
“……억!”
아직 잠결에 취해 있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파고들기 무섭게, 서윤은 주저하지 않고 크게 팔을 뻗어 남자의 머리 위로 화분을 내리쳤다. 남자가 눈을 뒤집어 까며 쓰러짐과 동시에 등 뒤에서 아버지가 당황하여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이, 미친년이……!”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쓰러지며 떨어트린 휴대 전화를 주워 서윤은 죽을 힘을 다해 내달렸다. 등 뒤에서 아버지가 무섭게 그녀를 쫓아왔다.
도와줘.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수신인이 불분명한 기도를 읊조리며 서윤은 달렸다. 한 발자국이라도 삐끗하면 끝이었다. 서윤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달렸다. 끊임없이 발이 엉키고 꼬였다. 몇 번씩 몸이 휘청거릴 때마다 아버지에게 따라잡혔다.
“헉, 헉…….”
마구잡이로 내달린 후에야 서윤은 겨우 건물과 건물의 비좁은 틈 사이에 겨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서윤이 쪼그려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시팔, 시팔’ 하는 아버지의 읊조림이 들려왔다.
“지서윤!”
고래고래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윤이 숨을 삼켰다. 발걸음 소리가 이리저리 오갔다. 이 공간에서 벗어나려면 담장을 넘거나 아버지를 지나쳐야 했다.
“너 지금 살인한 거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서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죄 없는 사람을!”
서윤이 품 안에 생명줄처럼 꽉 붙들고 있었던 휴대 전화를 꺼내어 들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화면을 두드렸다. 그제야 휴대 전화 내에 잠금이 걸려 있다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졌다.
“지서윤!”
골목에 다시 한번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서윤이 간절히 기도하며 휴대 전화를 켰다. 하늘색 기본 배경 화면 위로 손가락을 대자 기적처럼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을 조작하는 서윤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시선이 고개 밖과 휴대 전화 위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여전히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찾고 있었다.
“흐, 흐으.”
서윤이 희미하게 숨을 고르며 번호를 눌렀다. 지금 이 순간 서윤을 도와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선생님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저를 불러 주실래요?’
연우밖에.
우연우, 그 애밖에는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누른 서윤이 휴대 전화를 귀로 가지고 갔다. 길게 이어지는 연결음에 마음이 빠듯하게 옥죈다. 숨이 턱턱 막혀 머리가 어지러웠다.
-…….
뚝. 기나긴 통화 연결음을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통화 너머의 연우는 말이 없었지만 서윤은 오직 그것 하나만으로 안도하여 눈물을 흘렸다.
“여, 연우야…….”
서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연우의 이름을 불렀다. 자그마한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연신 소리치던 아버지가 잠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서윤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떨리는 입술로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데리러 와. 으, 제발, 제발. 데리러 와. 데리러 와 줘.”
-…….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
“부르라고 했잖아. 흐윽.”
서윤의 목소리가 울음에 복받쳐 점차 크기를 키웠다. 서윤은 어렴풋이 아버지가 자신의 위치를 알아챘음을 깨달았다.
“혼자서는, 혼자서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동태를 살피며 더듬거리는 시선 끝에 다가오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서윤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이미 눈물과 피딱지가 엉겨 붙은 얼굴은 아름다운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엉망이었다.
“제발…….”
“지서윤.”
마지막 부탁이었다. 건물과 건물의 틈 사이에 선 아버지를 보며 서윤의 손에 힘이 풀렸다. 휴대 전화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끝끝내 첫 도망도, 마지막 부탁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윽……!”
팔이 넘어온다. 머리채가 잡힌 채로 서윤이 끌려 나갔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무력하게 아버지의 힘에 매달려 바닥을 기었다. 두피가 찢어질 것 같았다.
눈동자에 초점을 잃은 서윤은 어느새 히죽이며 자신을 끌고 가는 아버지의 얼굴을 타인처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아버지가 고꾸라졌다.
“…….”
서윤의 고개가 무너지는 아버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눈을 뜨고 쓰러진 아버지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서윤에게로 손을 뻗고 있었다. 혼절 직전까지도 집착을 놓지 못하고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모습이 기괴했다.
털썩.
마침내 아버지가 땅으로 꺼졌다. 아버지의 입가에 거품이 올라 턱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 집 안에서 서윤이 보고 싶어 마지않던 장면이기도 했다. 서윤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넋을 잃은 서윤에게로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 서윤이 멍하니 제게로 내밀어진 길고 단정한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의 주인을 서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깎아 빚은 듯 곱다란 피아니스트의 손. 리라를 연주하는 아폴론의 손이 이러했을까 의문이 일만큼 하얗고 곧은 손이었다.
“여, 연우야…….”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윤의 자각보다 먼저 눈물이 그녀의 볼을 갈랐다. 흐트러지다 못해 뭉개져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의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울음이 맺혀 흐려진 시야 사이로 연우는 빛처럼 내리쬐었다. 그의 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파도가 굽이치는 밤의 망망대해를 건너 겨우 바라본 달빛처럼 경이로웠다.
“선생님.”
부드러운 음성이 서윤의 귓가에 내리고, 곧은 손은 그녀의 볼을 감싸 쥐었다. 내몰린 삶의 절벽마다 이 애가 있는 게 더 이상은 이상하지 않았다. 기시감이나 의심 한 조각 없이 오롯한 안도만이 서윤의 가슴께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