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었다고 생각한다
Chopin : Piano Concerto No.1 in E Minor Op.11 Ⅱ. Romance. Larghett
[평창동 391-1]
쪽지에 적힌 집은 버스를 타고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려 10분쯤 걸어야 하는 곳에 위치했다. 요새의 성벽처럼 높고 견고해 보이는 돌담과 거대한 목재 대문이 인상적인 집이었다. 목을 한껏 치들면 보이는 담장의 끝이 새파란 가을 하늘과 맞닿아 지평선처럼 아득했다.
‘지서윤 씨, 맞죠?’
대문 앞까지 마중 나온 비서의 웃는 낯을 떠올린 서윤의 팔에 닭살이 돋는다. 한 손으로 다른 쪽 팔을 쓸어내리며 숨을 크게 마셨다 내쉬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메트로놈을 켜 놓은 듯 일정한 발걸음은 서윤이 앉아 있는 자리의 맞은편에서 멈추었다.
“중요한 전화가 와서 조금 늦었네요.”
손에 서류 봉투를 든 40대 초반의 여자가 양해를 구하곤 자리에 앉는다. 여자의 미소는 공장에서 찍어 낸 듯 일정했다. 입꼬리는 상냥하게 들어 올렸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그 안에 담긴 눈동자 역시 총기가 없어 산 사람의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까닥인 여자가 서류 봉투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었다. 눈으로 종이를 짧게 훑어 내리곤 다시 서윤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물어왔다.
“대학교 2학년이라구요? 피아노과.”
“네. 스물한 살입니다.”
여자가 서윤의 얼굴을 느리게 훑었다. 하얗고 오밀조밀한 서윤의 얼굴은 숲에서 막 태어난 이처럼 청초해 보였다. 여자가 짧게 감탄했다.
“지 사장님 말이 과언이 아니었네요. 따님이 아주 예쁘다고 자랑하시던데요.”
“아…….”
“돌아가신 사모님을 닮았다고.”
서윤의 표정이 굳는다.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았지만 경직된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서윤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서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좋네요. 사모님께서 걱정하신 이유도 알 것 같고.”
여자가 만족스럽게 턱을 까딱인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사모님의 걱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쁜 인상을 남긴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어젯밤 서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더 그랬다.
서윤 아버지의 회사는 대기업으로부터 일을 수주하는 하청 업체로, 모기업으로부터 일이 끊기면 존속마저 위태로웠다. 아버지의 말을 빌리자면 매일이 총칼 없는 전쟁이라고 했다. 끝끝내는 하나 있는 딸마저 전쟁터로 내던져야 하는 참혹한 벌판 말이다.
“금요일, 토요일. 일주일에 두 번 네 시간씩이에요.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직접 오시라고 했지만 앞으로는 저희 쪽에서 서윤 씨 있는 곳으로 차를 보내드릴 겁니다.”
덧붙여지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단편적이었다.
아버지의 중요한 거래처.
열두 살짜리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
최선을 다하되 겸손할 것.
여기에 방금 전 여자로부터 들은 정보를 취합해도 채 열 개가 안 됐다.
“서윤 씨, 이거.”
고개 숙인 채로 생각에 잠겨 있는 서윤에게, 여자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 집에서 보고 들은 모든 일에 대하여 함구하겠다는 비밀 유지 각서였다.
“지 사장님 따님분께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몰라서요.”
완곡한 협박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여자가 빙긋 웃으며 서윤의 왼쪽에 만년필을 툭 놓아 주었다.
고작 어린아이 하나 가르치는 일이다. 서윤은 여자의 처사가 퍽 유난스럽게 느껴졌지만,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 말하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받아든 각서를 어느 정도는 납득해야만 했다.
[고용인 (갑) 우연우]
[피고용인 (을) 지서윤]
우연우.
끝없는 도돌이표 같은 이름이었다.
한동안 종이를 들여다보던 서윤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펜촉에서 검은 잉크가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서윤은 서명란 위로 제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달칵.
만년필 뚜껑을 닫아 각서와 함께 여자에게 돌려주는 찰나였다. 천장에서 짧은 기계음이 울렸다. 그러자 내내 규격화된 부품 같은 얼굴을 하던 여자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아, 오셨나 보네요. 서윤 씨, 이쪽으로 오세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난 서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와 꼿꼿한 자세를 바라보다가 다소 조급하게 물었다.
“사모님이신가요?”
여자의 걸음이 한순간 멈추었다. 돌아보는 얼굴이 싸늘하다. 물어서는 안 될 것을 캐물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서윤 씨, 도련님 앞에서 되도록 사모님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 주세요.”
서윤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여자와 눈을 맞췄다. 서윤을 책망하는 듯 쌀쌀맞던 얼굴이 한순간 처연하게 어그러졌다.
서글프게 가라앉는 눈동자와 쓸쓸해 보이는 미소마저 계산된 듯 보였다면, 이 여자를 과하게 경계하고 있는 걸까. 서윤이 애써 시선을 돌리려는데 여자가 입술을 뗐다.
“사모님께서 사장님을 살해하시는 모습을 목격하셨거든요.”
“……네?”
서윤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치들었다. 순간 몇 해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뉴스 하나가 서윤의 뇌리를 섬뜩하게 스쳐 지나갔다.
“모르고 오셨구나? 지 사장님도 참. 아직 트라우마가 심하셔서 치료받는 중이에요. 피아노 수업도 치료의 일환이구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여자가 서윤의 시선을 받아 내며 담담히 대꾸했다. 여자의 감정은 꼭 수도꼭지 같았다. 잠그면 멎어 드는 일종의 장치 말이다.
“모쪼록 잘 부탁드릴게요.”
빙긋 입꼬리를 들썩인 여자가 이내 몸을 틀어 복도를 걸어갔다. 서윤은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멀어지는 여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깊고 어두운 복도.
걸어나가는 여자의 어깨너머로 짧은 빛이 쏟아졌다 사라진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윤은 맹렬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꼭 밀랍 인형 같은 남자아이였다.
단정하게 정리된 흑갈색 머리칼 아래에 하이얀 살결은 장인의 솜씨처럼 매끈했다. 아치형 천장 아래에 양옆으로 수행 비서를 둔 모습마저 하나의 인형놀이 세트처럼 보였다.
“도련님, 다음 주부터 도련님께 피아노를 가르칠 지서윤 선생님입니다.”
여자가 허리를 굽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때까지도 아이의 시선은 서윤에게 멈추어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은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 왕을 알현하는 포위된 이방인처럼 숨을 삼켰다.
옆에 선 사내에게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넨 아이가 서윤 가까이 다가왔다. 단지 복도를 걸어오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뿐인데 왜 막다른 길에 가로막힌 기분에 사로잡히는지 알 수 없었다.
“…….”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이를 향해 서윤이 몸을 틀었다. 아이 역시 몸을 틀어 지그시 서윤을 올려다본다. 잠깐의 대치가 억겁처럼 길었다.
“안녕, 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넨 쪽은 서윤이었다. 서윤이 아이를 향해 어색하나마 웃어 보였다. 여자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 탓일까. 한참이나 어린아이였음에도 존댓말을 쓰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서윤의 인사에도 아이는 그녀를 길게 응시하는 것이 전부였다. 짙고 까만 눈동자가 긴장으로 선 서윤을 감흥 없이 훑어내렸다.
“네.”
마침내 아이가 짧은 대답을 내어 놓곤 서윤을 지나쳤다. 곧게 걸어가는 아이의 뒤로 정장을 입은 사내가 곧장 따라붙었다.
서윤이 곁눈질로 아이의 뒷모습을 좇는다. 한 음절이었지만 우물에서 퍼 올린 듯 낮고 깊던 목소리를 혀끝으로나마 되뇌었다.
* * *
길가에 선 서윤이 들고 있는 피아노 교본을 꽉 끌어안았다. 머지않아 짙게 선팅된 세단 한 대가 서윤의 앞에 섰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핀 서윤이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기사는 구면으로, 일주일 전 아이와 함께 들어오던 사내였다. 서윤이 차에 오르며 거울 너머로 작게 목례하자 그에게서도 짧은 목례가 돌아왔다.
그 집에 다녀오고 나서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서윤은 이따금 그 아이를 떠올렸다. 학교 레슨실에서, 잠들기 직전의 천장 위로, 심연이 흐르는 듯한 새까만 눈동자가 겹쳐지고는 했다.
그 아이가 우연우, 그 이름의 주인임을 깨닫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서윤이 고개를 틀어 차창 밖을 응시했다. 버스를 타고 갈 적에는 멀게 느껴졌던 집이 어느새 가까워졌다.
차가 차고 가까이 다가가자 굳게 닫혀 있던 차고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주차를 마친 운전기사가 먼저 내려 서윤이 앉은 쪽의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서윤이 목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서윤이 고개를 튼다. 빛을 물리며 닫히고 있는 차고 바깥쪽에 시선을 두었다. 저무는 저녁 해의 붉고 노란 불빛이 차고의 틈새를 파고들어 순간 시야를 어지럽혔다.
“선생님.”
서윤이 따라오지 않자 남자가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아, 네.”
눈을 감았다 뜸으로써 황급히 시선을 정돈한 서윤이 뒤돌아 그를 따랐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비서가 서윤을 반겼다.
‘김 비서라고 불러 주세요.’
일주일 전 집으로 돌아가는 서윤에게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김지은. 따로 지은 것처럼 평범한 이름이었다.
“박 비서님, 잠깐 한 교수님이 보자고 하시네요.”
김 비서가 서윤의 곁에 선 남자를 향해 눈짓했다. 남자가 서윤의 곁을 지나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윤은 그때까지도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어색한 미소만을 걸치고 있었다. 속으로는 한 교수, 되뇌기도 했다.
“서윤 씨.”
김 비서가 서윤 가까이 다가온다. 힐긋 서윤이 들고 있는 피아노 교본에 시선을 두는 것이 느껴졌다.
“도련님 방에 계세요. 안내해 드릴게요.”
“아, 네.”
“긴장하지 마세요. 워낙 성정이 기민하셔서 바로 알아보실 테니까요.”
얕보여선 안 된다는 뜻일까?
서윤이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김 비서는 다만 웃을 뿐이었다. 서윤은 더 묻지 않았다. 뒤돌아 집 안을 가로지르는 김 비서를 조용히 따랐다.
계단은 다이닝룸 옆에 있었다. 서윤은 김 비서와 두 계단 정도 거리를 벌린 채 그녀를 따라갔다.
마침내 2층에 서자 개미굴처럼 깊은 복도가 서윤을 반겼다.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는 그림을 비추는 은은한 조명만이 복도에 든 빛의 전부였다.
“복도 끝,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김 비서가 복도 끝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다 이내 서윤에게로 몸을 틀었다.
“아, 그리고 아직 회장님께서 보내 주시기로 한 피아노가 안 와서요. 오늘은 앞으로 있을 수업에 대해 간단히 설명만 해 주시면 좋겠네요. 다음 주면 완벽하게 준비될 테니까요.”
“저 혼자 가나요?”
고개를 주억이며 복도 저편으로 시선을 옮겼던 서윤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수업을 상상했을 때, 어쩌면 아이와 자신 곁에 김 비서 역시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작 학부생에 불과한 피아노 선생에게 각서까지 받아 낼 정도로 유난스러웠으니까.
“수업은 전적으로 서윤 씨 권한이니까요.”
상상 속에서 서윤이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연신 김 비서의 눈치를 살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었다. 김 비서가 얼른 가 보라는 듯 서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면 수업 끝나고 뵙겠습니다.”
“우리 도련님 잘 부탁드릴게요. 지 선생님.”
제 성 뒤에 붙은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어색하다. 서윤은 얼떨떨하게 웃으며 몸을 틀었다. 깊은 복도를 향해 발자국을 내디디면서는 초조함에 주먹을 말아쥐기도 했다.
복도 끝에 선 서윤이 왼쪽 방문을 한번 바라본다. 2층에는 두 개의 방이 전부인 듯했다. 오른쪽 방이 아이의 방이라면 왼쪽 방은 부부의 방이었을까.
굳게 닫힌 방이 답을 내어 줄 리 만무했으므로 서윤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웠다. 아이의 방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가볍게 노크했다.
“…….”
짧은 응답이나마 돌아오지 않는다.
서윤이 도움을 바라는 눈으로 걸어왔던 복도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그러나 김 비서가 서 있던 자리에는 침묵을 동반한 어둠만이 내리깔려 있었다.
“저기, 들어갈게요.”
서윤이 고민 끝에 입술을 뗐다. 방 너머를 향해 작게 통보하고는 조심스레 손잡이를 쥐고 돌렸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흔들의자에 몸을 맡긴 채 잠든 아이였다.
눈을 감는 것조차 아까울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다. 서윤은 감탄했다. 아이는 창으로 쏟아지는 저녁노을에 흠뻑 젖은 채 한 폭의 명화처럼 잠들어 있었다.
석양에 잠긴 붉은 구름이 아이의 새하얀 피부 결 위로 그림자를 남기며 스쳐 지날 때마다 뭉클한 감정마저 피어올랐다.
“…….”
서윤이 발소리를 죽이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을 닫을 때에는 숨조차 아주 조그맣게 내쉬었다. 도둑질이라도 하듯이 살금살금 걸어 마침내 잠든 아이의 곁에 다다랐을 때, 서윤은 또다시 고민에 잠겼다. 아이를 어떻게 불러 깨우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도련님. 그 호칭은 너무 낯뜨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제가 무슨 대단한 선생이라고.
마지막 선택지는 아이의 이름이었다. 서윤은 아이의 이름을 알았다. 어깨를 쥐고 다정하게 부르는 것이다. 연우야, 그렇게. 결심을 마친 서윤이 의자 곁에 무릎 꿇었다.
아이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으며 조금쯤 망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붉은 빛이 감도는 도톰한 입술은 끝끝내 아이의 이름을 완성해 냈다.
“연우야.”
어깨를 쥔 순간 아이가 눈을 떴다. 아이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눈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맹수처럼 형형한 시선이 순간 서윤을 옭아맸다.
“피아노 수업, 흐읍……!”
순식간의 일이었다. 잠에서 깬 아이가 서윤을 덮쳤다. 순간 몸이 뒤집혔고 바닥에 부딪친 등이 아리도록 따가웠다.
“욱……!”
무엇보다 숨이 막혔다. 서윤의 상체를 누르고 앉은 아이가 온 악력을 다해 서윤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흐으, 억.”
서윤의 시야가 깜빡깜빡 점멸한다. 목구멍을 타고 괴상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주 보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서윤은 그 어떤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헉, 허억. 윽, 끄흐.”
꿈틀거리며 경련하던 서윤의 손과 발이 서서히 힘을 잃는다. 흐려지는 정신 너머로 서윤은 아이에 대해 상기했다.
재벌가의 외동딸을 아내로 둔 남자가 어느 날 밤 목이 졸려 살해당한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여 모르려야 모를 수조차 없었다.
우연우. 굴지의 대기업과 예술계의 큰손을 나란히 외가와 친가로 둔 재벌가 외손자. 사용인부터 남편까지 다섯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의 아들.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았고,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았는지 모르는 열두 살짜리 남자아이.
‘긴장하지 마세요. 워낙 성정이 기민하셔서 바로 알아보실 테니까요.’
다 알아봤다면…… 두려운 눈 역시 들켰을까요?
허공에서 바르작거리던 손이 맥없이 꺾이며, 서윤은 정신을 잃었다.
* * *
꿈을 꿨다.
꿈속에서 서윤은 교복을 입은 자신을 발견했다. 어린 서윤의 시선은 침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살이 짓이겨지는 폭력의 소음과 어머니의 비명이 쏟아졌다. 아직 젖살조차 빠지지 않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끝은 연신 벽을 더듬거렸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다리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두려움으로 숨을 헐떡이면서도 어린 서윤은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끝끝내 부모님의 침실을 열어젖혔다. 아버지의 손에 머리채가 잡힌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삶의 의지를 잃은 눈동자는 텅 비어 공허했다.
‘아버, 아버지. 제발…… 그만하세요.’
버석하게 마른 서윤의 입술 새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달려가 아버지를 있는 힘껏 밀쳐 냈다. 서윤은 이다음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했다.
감히 대들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손에 멱살이 잡혔다. 들어 올려진 그대로 뺨을 얻어맞았고, 발로 몸이 걷어차였다.
얼마나 아픈지 목울대를 타고 연신 괴상한 비음이 터져 나왔다. 눈동자는 실핏줄이 다 터진 채 말간 울음을 벌컥벌컥 흘려 냈다. 처음 말살되는 자아였다.
그때, 서윤의 어머니는 엉금엉금 구석으로 기어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서윤은 아버지의 발에 짓밟히며,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한순간 마주 보았다.
‘윽, 으으, 끄으…….’
‘……흐, 으, 흐흐. 흑.’
어머니의 일그러진 얼굴 위로, 딸을 폭력에 내몰았다는 고통이 어렸다. 동시에 홀로 감당하기엔 무거웠던 불행을 나누어 가졌다는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뚝 끊긴 꿈은 다른 시간으로 옮겨갔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서윤은 아무도 없으리라 예상한 집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눈에 띄게 어깨를 떨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통화에 정신이 팔려 서윤이 돌아왔다는 것은 모르는 듯싶었다. 서윤은 발소리를 죽인 채 걸으며 아버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천호? 그 있잖아. 맨날 TV 나오는 양반. 소문에는 그 양반한테 치료받는다던데. 트라우마? 웃기는 소리. 그 괴물 같은 여자 아들인데 뻔하지. 제 남편 죽인 핏줄이 어디 가겠어? 나야 우리 딸년 때문에 살았지, 씨팔. 그 년이 똑바로 해야 될 텐데.’
한천호. 서윤도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서윤은 재빨리 방으로 들어왔다. 조용히 문을 닫고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방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오늘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지의 목소리가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서서히 멀어졌다.
멀어지다 멀어지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차단되었다. 서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금 전 엿들었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한천호라는 남자를 언급하며 서윤 덕분에 살았다고 했다. 우연우 그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일 게 틀림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윤은 바닥에 가방을 던져 놓고 컴퓨터를 켰다.
한천호.
남자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이름을 검색하면 약력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50대 중반의 정신의학과 교수. 여러 방송에 출연했으며 출간한 책이 열 권쯤 됐다. 무엇보다 남자가 유명세를 탄 것은 사이코패스 범죄를 분석하면서부터였다.
서윤은 굳은 손끝으로 마우스를 달칵이며 페이지를 넘나들었다. 마지막으로 다다른 페이지의 영상 속에서 한천호는 한 아버지의 질문을 경청하고 있었다.
‘아이에게서 사이코패스 성향이 보일 경우 부모로서 어떤 대처를 할 수 있을까요?’
주먹을 말아쥔 채 화면을 들여다보던 서윤의 시선이 느리게 감겼다 뜨였다. 마우스를 움켜쥔 손이 불안을 호소하며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걱정 마세요. 어린 시절에 폭력적인 성향이 발견되더라도 교육을 통해 충분히 사회화할 수 있습니다.’
한천호가 안심하라는 듯 눈꼬리를 휘며 온유하게 웃었다.
* * *
약한 것은 잡아먹힌다.
서윤은 눈을 뜨며 제가 그런대로 약하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천장이었다. 높고 눈부셨다. 아니, 눈부신 것은 그 뒤로 이어지는 거대한 샹들리에의 불빛일지도.
순간 눈앞이 흐리고 머리가 핑 돌았다. 서윤이 황급히 눈을 감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겨우겨우 숨을 골랐다.
차차 정신이 돌아온다. 동시에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서슴없이 날아들었다. 제 목을 조르던 아이의 눈빛을 상기하자 잊고 있던 통증이 목울대를 베듯이 스쳐 지나갔다.
서윤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목을 매만졌다. 손과 함께 딸려 나온 곁가지가 살갗을 간질인다. 링거였다.
“서윤 씨, 일어났네요.”
때마침 김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윤이 주춤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김 비서님.”
서윤이 조용히 김 비서를 불렀다. 부스럭거리며 링거액을 확인하던 김 비서가 고개를 돌려 서윤을 마주 보았다. 분명 눈동자에 걱정의 빛이 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윤은 김 비서에게서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지금은 안정이 제일 중요해요. 많이 놀랐을 텐데 누워 있어요.”
김 비서가 서윤의 어깨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린다. 서윤이 조급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까끌한 입술을 감춰 물며 이불 밖으로 손을 꺼내 김 비서의 소매를 쥐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저는…….”
“다행이죠?”
김 비서가 서윤의 말을 끊었다. 잡혀 있던 소매를 정중히 거둬 내며 상냥하게 웃었다.
“날이 점점 쌀쌀해져서.”
그렇게 말하며 김 비서는 서윤의 목에 남은 피멍울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멍울이 올가미처럼 서윤의 목을 두르고 있었다. 여름이었다면 확실히 곤란한 흉이다. 김 비서의 말대로 날이 쌀쌀해져서, 터틀넥 티셔츠로 멍을 가릴 수 있어 다행인지 몰랐다. 서윤은 김 비서의 말을 곡해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저는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나마 마지막을 포장하면 오늘의 악몽은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김 비서에게 끝을 선언한 서윤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김 비서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서윤 가까이로 성큼 다가와 눈을 맞췄다. 서윤이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에 살을 붙였다.
“애초에 저는 누구를 가르쳐 본 적도 없었구요. 저보다 훨씬 좋은 선생님이 계실 거예요. 아이를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좋은 선생님이.”
무엇보다 서윤은 그 아이가 두려웠다. 그 사실을 김 비서는 눈치챘으리라. 그리고 마땅히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김 비서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서윤의 기대를 배반했다.
“글쎄요……. 서윤 씨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실까요?”
“…….”
“서윤 씨는 참, 용감하네.”
김 비서가 까닥, 고개를 기울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 * *
서윤이 조심스레 신발을 벗는다. 밤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집은 어두웠다. 고요한 집 안에 못내 안도한 서윤이 차근차근 걸음을 내디뎠다.
빌려 입고 온 터틀넥 티셔츠가 감싸고 있는 목이 아직 따끔따끔했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
조급한 서윤의 걸음을 멈추어 세운 것은 안방 쪽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불빛이었다. 서윤은 이 공기를 잘 알았다.
꽉 닫힌 안방의 문과 집 안의 정적. 머지않아 안방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그녀를 향해 걸어올지 몰랐다.
서윤이 순간 머뭇거리는데, 가방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안방의 눈치를 살핀 서윤이 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김 비서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계좌 확인해 보세요. 내일 서윤 씨 집으로 차 보내겠습니다. -김지은]
서윤이 급히 휴대 전화를 조작했다. 계좌에 거액의 위로금이 입금되어 있었다. 당혹을 숨기지 못함과 동시에 안방 문이 열렸다.
서윤이 주춤거리며 휴대 전화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아버지가 서윤을 쳐다보고는 심문관처럼 물었다.
“어땠어?”
많은 의문이 뭉뚱그려진 질문이었다. 그 집 아이에게 목이 졸린 이야기를 할까. 가기 싫다고 하면 들어 주실까. 서윤의 불안한 얼굴을 읽었는지 아버지의 눈매가 굳어졌다.
“지서윤, 설마 가서 실수했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수십 번, 수백 번을 말했는데?”
서윤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진다. 서윤에게로 바짝 붙은 아버지는 그녀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장 손이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고작 목 좀 졸렸다고 일을 망친 것이냐 고함을 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토로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요. 잘 다녀왔어요.”
폭력과 더 큰 폭력의 갈림길에서, 서윤은 선택했다. 내리깐 눈꺼풀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래?”
그제야 서윤의 아버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서윤은 가슴께에 주먹을 움켜쥔 채로 마른 침을 삼켜냈다. 설핏 올려다본 아버지는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간이 조명 불빛이 내려앉은 아버지의 새까만 눈동자가 더럽게 번들거렸다.
“그래. 고생했다.”
“아니에요.”
“들어가서 쉬거라.”
서윤이 작게 고개를 주억이고는 몸을 틀었다. 잰걸음으로 빠르게 방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졸렸던 목이 따끔거리고 어느새 눈시울마저 뜨거웠다.
하지만 서윤은 끝끝내 울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떨림을 지우고 공포를 숨겼다. 침묵을 지키는 일은 익숙했다. 늘 그래 왔듯이, 몸에 남은 상흔은 외면하면 그만이었다.
* * *
한 달이 흘렀다.
겨울이 불어닥쳤고, 서윤의 목에 남아 있던 멍은 점차 희미해졌다. 수업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받았던 위로금은 돌려주었다. 덥석 받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였다.
아버지는 다시 수주 계약을 마쳤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나날이 바빠져 집에 있는 일이 드물었다. 서윤에게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연우와의 수업 역시 어느 정도는 적응되었다. 여전히 아이를 볼 때면 긴장했지만, 그 애를 연우라 부르는 일만큼은 익숙해졌다.
연우야, 부르면 조용히 돌아오는 눈동자에 어색하나마 미소를 걸어 줄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언젠가 또다시 아이가 자신을 덮치고 목을 조를지 모른다는 공포를 들키지 않으려 한사코 애를 썼다.
“지 선생님?”
생각에 잠겨 있던 서윤이 부름에 퍼뜩 깨어났다. 학교 근처의 길목, 검은 세단이 서윤의 앞에 길게 서 있었다. 반쯤 열린 운전석 창 너머로 박 기사가 의뭉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서윤이 황급히 박 기사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재빨리 걸음을 옮겨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
서윤이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연우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처음 있는 일에 서윤이 차에 타기를 주저하자 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바르게 마주한 시선에 서윤이 순간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애써 표정을 정돈하며 뒷좌석으로 몸을 밀어 넣고는 어수룩하게 웃었다.
“안녕, 연우야.”
“네.”
그 이후로는 내내 가시방석이었다.
연우의 옆자리에 앉은 서윤은 연신 불편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자주 차창 밖을 내다보고, 차창 유리에 비친 연우의 옆얼굴을 응시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서윤과 달리 연우는 꼿꼿이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첫 수업의 악몽을 제외하면 연우는 유순한 학생이었다. 어떨 때는 또래 아이들보다 조용하고 착하다는 인상마저 주었다. 이따금 뜻 모를 눈으로 바라봐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악몽은 끝났고 연우는 잠에서 깨어나 바라본 새벽하늘처럼 고요했다.
서윤이 힐끔 창 속에 비친 아이를 곁눈질한다. 창에 반사된 이목구비가 선명하다. 서윤은 아이의 미래를 흐릿하게나마 그려 볼 수 있었다. 이대로 자란다면 대단한 미남이 되리라. 연우는 기사 사진으로 남은 아이의 어머니를 꼭 빼닮았기에 짐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고풍스러운 미인.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며 짓는 미소는 건조했으나 아름다웠다. 언뜻 보면 한 송이 꽃처럼 여리게도 느껴지는 여자였다.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그녀가 끔찍한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서윤이 숨을 고르며 창에 비친 연우에게서 시선을 비꼈다.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던 서윤의 동공이 크게 뜨인 것은 그때였다. 골목길을 나오던 오토바이 한 대가 서윤이 타고 있는 차로 질주하고 있었다.
“……!”
선량한 천성을 타고난 이의 본능이었다. 서윤이 연우에게로 몸을 날렸다. 차를 향해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발견함과 동시에 서윤은 몸을 틀어 연우의 머리통을 감싸 안았다.
쾅-!
차체가 흔들리고 큰소리가 났다. 아이를 안고 있는 서윤의 손가락 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거칠어진 숨 역시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도,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박 비서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서윤은 감았던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살핀 것은 품 안의 아이였다.
“……괘, 괜찮아요.”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서윤이 대신 대답했다. 박 비서가 안도하는 숨소리가 이어졌다. 그때까지도 서윤의 심장은 조급하게 뛰고 있었다. 반면에 연우는 침착했다. 서윤의 품에 안긴 채로 가만히 고개를 치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지 선생님, 죄송합니다. 일단 처리하고 올 테니 도련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얼른 가 보세요.”
박 비서가 다급히 차를 나섰다. 서윤이 고개를 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결정적인 순간, 박 비서가 차를 돌린 덕에 큰 사고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튕겨 나간 오토바이와 그 운전자는 도로를 뒹굴고 있었다.
머지않아 차창 밖에서 오토바이 운전자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
연우는 그때까지도 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번 한 음절의 대답과 공허한 눈 맞춤으로 그녀를 대하던 아이에게서 처음 발견한 끈질김이었다.
“많이 놀랐니?”
아이를 살짝 품에서 떼어 놓은 서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연우는 서윤을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아이가 덤덤해 보여도 많이 놀란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럴 만했다. 그 어떤 아이가 사고에 무던할 수 있을까. 아무리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편이라 하더라도, 설령 제 목을 졸랐던 아이라도, 충분히 놀랄 만한 상황이었다. 아이는 아이였다.
“잠깐 나가 있을래?”
서윤이 연우를 향해 물었다. 어차피 박 비서가 일을 수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잠깐 사고 현장을 벗어나 아이의 기분을 환기시켜 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서윤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긴다. 어색한 미소를 주시하는 연우의 시선이 순간 깊어졌다. 서윤의 낱낱을 헤집듯 한동안 그녀를 들여다보다 마침내 입술을 뗐다.
“네.”
여전히 짧은 대답이었지만, 분명한 승낙이었다.
차에서 내린 서윤과 연우는 나란히 인도에 서 있었다. 박 비서가 인도에 선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놀라 입을 벌렸지만, 서윤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주억이자 이내 안도하고는 마저 일을 처리했다.
초겨울의 바람이 볼썽사납게 볼을 스쳐 지난다.
교복만 입고 춥지는 않을까.
서윤이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곧게 선 연우는 바르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갈 때마다 언뜻언뜻 화려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그때, 연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단내가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서였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서윤의 시선 끝에도 허름한 붕어빵 가게가 걸렸다. 흔히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주황색 포장마차였다. 연우의 고개는 그 자리에서 돌아올 생각 없이 멈춰서 있었다.
서윤이 가게와 연우를 번갈아 보았다. 먹고 싶은 걸까. 다른 아이 같았다면 진작에 사서 손에 들려 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를 향한 불편한 감정과 김 비서의 엄격한 표정이 뒤엉켜 눈앞을 스치자 물음은 또 다른 물음으로 흘러갔다.
내가 굳이, 저걸 아이에게 먹여도 되는 걸까.
“…….”
짧은 고민 끝에 서윤이 연우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어깨로 다가가던 손이 흠칫 물러났다가 아이의 팔 부근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연우의 시선이 힐긋 서윤을 향해 돌아왔다.
“먹어 볼래?”
대답이 없다. 서윤은 공연히 맛있어, 덧붙였다. 그러자 연우가 빤히 서윤을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다 나직이 입술을 뗐다.
“네.”
“그래. 사 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야 해.”
“네.”
깔끔한 대답이었으나 불안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서윤 역시 김 비서처럼 유난을 피우고 있는 꼴이었다.
“……꼭이야.”
“네.”
서윤은 다시 한번 당부하고는 포장마차를 향해 뛰어갔다. 주문을 하면서도 내내 그 자리에 서 있는 연우를 힐끔거렸다. 멀뚱히 선 연우는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서윤을 기다렸다. 그것이 왜인지 기특하고 다행이었다.
그래 봤자 열 발자국밖에 되지 않는 거리다. 서윤은 그 짧은 거리를 계산을 마치자마자 부리나케도 뛰어왔다.
품 안에 붕어빵 봉투를 꼭 끌어안고 숨을 헐떡이는 서윤을 연우가 지그시 응시했다. 들썩이는 가슴팍과 겨우 몰아쉬는 숨소리를 들으면서는 짧게 웃음 지었다.
“…….”
웃었다고?
순간 당황한 서윤이 연우를 바라보았다. 언제 웃었냐는 듯 연우는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서윤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봉투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지고 다니는 티슈에 꼬리를 감싸 연우에게 건네면서 짧게 손과 손이 스쳤다.
붕어빵을 건네받은 연우는 시큰둥하게 대가리를 베어 물었다. 아이와 가까워진 듯한 기분을 애써 외면하며 서윤도 제 몫의 붕어빵을 집어 들었다. 금세 입 안으로 달달한 팥앙금과 바삭하게 구워진 밀가루 반죽이 뒤엉킨다. 서윤도 아주 오랜만에 만끽하는 단내였다.
“처음이에요.”
아직 반쯤 남은 붕어빵을 든 채로 연우가 중얼거렸다. 네, 말고는 처음 듣는 아이의 음성이다. 서윤은 아이의 입술 사이로 완성된 문장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뭐가?”
“거리에서 지나치게 달고 비위생적인 음식을 먹는 거요.”
아이가 내리는 것 치고는 신랄한 평가였다. 미간을 좁힌 서윤이 허리를 굽힌다. 그만 먹어도 된다는 듯, 눈을 맞추고 상냥한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맛없니?”
“맛있어요.”
모진 평가와 상반되는 대답이 돌아왔다. 서윤은 아이의 속내를 다 짐작하기는 어려운 얼굴로 콧등을 찡긋거렸다. 그래도 맛있다니 다행이었다.
“또 사 줄게. 더 먹어도 돼.”
“네.”
서윤이 살포시 웃으며 허리를 폈다. 이렇게 나란히 서서 거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첫 수업의 일이 꿈처럼 멀었다. 이 아이가 제 목을 졸랐던 일이 없던 일처럼 까마득했다.
연우의 손에 목이 졸리고도 그 애의 집으로 갔던 다음 날, 서윤은 김 비서를 향해 물었다. 혹시 자신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그러자 김 비서는 대답했다. 조금은 안타까운 눈이었다.
‘잔인한 말이겠지만…… 서윤 씨는 폭력에 익숙하죠?’
어떻게 알아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 비서는 서윤이 직면하고 있는 폭력에 대해 잘 아는 눈치였다.
폭력에 노출되었지만 단 한 번도 도망쳐 본 적 없는 사람.
이번에도 당신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착각이든 아니든, 서윤에 눈에 비친 김 비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이었으므로 서윤은 반박할 수 없었다. 발악했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서윤이 아버지를 가로막은 지 1년여쯤 지난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는 자살했다. 생을 버림으로써 지난했던 불행으로부터 도망쳤다. 추운 겨울이었고 유서는 없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서윤은 도망치지 못했다.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렀다. 어머니가 목을 매단 집에서 살아 내고 있듯이, 어느 순간 모든 것에 익숙해져 이제는 제 목을 조른 아이와도 나란히 서 있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와 본 적 없니?”
스스로에 자조한 서윤이 연우를 향해 물었다.
“아버지랑 가끔요.”
……아이가 아버지의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고 했지.
괜한 질문을 했다. 서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생각해 보면 연우와 자신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부모가 부모를 죽이는, 부모가 부모의 원수가 되는, 토할 길 없는 서러운 감정의 공명이었다.
“그렇구나.”
목이 막힌 채로 꾸역꾸역 대답한 서윤이 거리를 응시한다. 문득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날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시장 곳곳을 배회하던 천진한 추억 역시 가슴께를 시리게 파고들었다.
그 순간 연우가 서윤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서윤도 고개를 틀어 눈을 마주했다. 바라본 아이가 지나치게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해 현장을 목격하기에는 정말이지 어린아이였다. 어렸던 자신이 폭력에 노출되기에 너무나도 작은 여자아이였듯이.
그리하여 서윤은 아이가 두려운 마음 한편에 이 애를 향한 연민을 싹틔웠다.
“……너, 괜찮니?”
서윤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입술을 뗐다. 괜찮냐고. 스스로에게는 단 한 번도 던지지 못한 질문이었다.
괜찮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마음 한구석이 망가지고 악 소리가 난다. 정상적일 리 없는 것이다.
별안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구보다 당황한 쪽은 서윤이었다. 평생을 씹어 삼켜 온 불행은 감정의 훌륭한 마모제였다. 서윤은 더 이상은 기쁘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리 들떠 웃을 일도, 서러워 흐느낄 일도 없다 느껴 왔다. 다만 두려움에 떠는 일이 숙명처럼 어깨를 짓누르는 나날이었다.
고작 비슷한 처지의 어린아이를 바라본 게 무어라고.
게다가 아이는 자신을 해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황급히 고개를 틀어 눈물을 훔쳤으나 소용없었다. 한 번 범람하기 시작한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가방에서 티슈를 찾다 들고 있던 봉투를 놓치고, 그걸 정리하느라 쪼그려 앉아 허둥거렸다. 그 와중에도 눈물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서윤이 허겁지겁 바닥을 치우는데, 그 앞으로 연우가 무릎 꿇었다. 희고 고운 손이 서윤의 손을 물리고 뭉개진 잔해들을 치웠다. 김 비서가 안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미, 미안.”
서윤이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사과했다. 어느새 바닥을 다 정리한 연우가 고개를 든다. 마주한 눈동자는 우주 어딘가를 흘러 다닐 것처럼 새까맸다.
“선생님은 연약하시네요.”
연약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처음 배운 사람처럼, 연우가 말했다.
“…….”
서윤은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는 없었다. 연약하다니. 그녀보다 작은 남자아이에게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서윤이 굳어 있는 사이 연우가 몸을 일으켰다. 멀지 않은 곳에 마련된 휴지통까지 다녀오는 걸음마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제되어 보였다.
자리로 돌아온 연우가 힐긋 서윤의 가방을 응시한다. 그 눈짓의 의미를 파악한 서윤이 급히 가방을 열어 티슈를 꺼내 들었다. 찾을 때는 잡히지 않던 티슈가 가방 입구 가까운 곳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여기.”
서윤이 티슈 한 장을 뽑아 연우에게 건넸다. 티슈를 받아든 연우가 더럽혀진 손을 닦았다. 그리고는 서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
서윤이 머뭇거릴 틈조차 없었다. 서윤의 손을 가져간 연우는 그녀에 손등에 묻어 있던 잔해를 툭 닦아 냈다.
“도련님!”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서윤이 손을 잡아뺐다. 해결이 끝났는지 박 비서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연우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연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들고 있던 휴지를 박 비서에게로 물렸다. 익숙한 듯 쓰레기를 받아든 박 비서는 서윤을 지나쳐 휴지통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시선이 엇갈린다. 연우가 가만히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저 보고만 있는데도 비좁은 긴장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는 못한 채로, 서윤은 아이의 시선을 감내했다.
얼마쯤 흘렀을까. 연우가 정적을 깨고 먼저 몸을 틀었다. 차를 향해 걸어가는 등이 올곧았다.
서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늘 마시고 뱉는 숨이 돌부리에라도 걸린 것처럼 툭, 툭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 * *
그날 이후 서윤과 연우의 관계에는 많은 진전이 뒤따랐다.
짧게나마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때로 연우의 옆에서 좋아하는 피아노 곡을 연주했다. 어색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아이의 곁에서 두려움에 떨거나 공포를 숨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의외의 발견이라면, 연우의 재능일 것이다.
폭설 예보가 있는 날이었다. 온 세상을 뒤덮을 듯 쏟아진 눈에 차가 막혀 도로에서 한 시간을 허비했다. 수업 역시 한 시간가량 늦어진 셈이다. 그 때문에 2층으로 향하는 서윤의 발걸음은 조급했다.
서윤의 걸음에 익숙한 멜로디가 얽혀 든 것은 복도를 중반쯤 지나서였다. 멈칫 자리에 멈추어 선 서윤이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로망스-라르게토.
연우의 방에서, 연우가 절대 연주할 수 없는 피아노 곡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서윤이 평소 좋아하는 곡으로, 종종 연우에게 연주해 주고는 했던 곡이었다. CD라도 틀어 놓은 모양이라고 치부하며 서윤이 걸음을 재촉했다. 짧게 노크하고 곧장 문을 열었다.
흔들의자가 놓여 있던 정사각형 공간에는 어느새 재규어를 닮아 매끈한 블랙 컬러의 그랜드 피아노가 놓였다. 연우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너…….”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들려오던 음악은 서윤의 등장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서윤이 피아노 건반 위에 올라가 있는 연우의 손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연우가 그런 서윤을 바라보며 비스듬히 고개를 비틀었다.
“들켰네요.”
무덤덤한 표정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퍽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반면에 서윤은 제가 무엇을 보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피아노를 처음 배운다던 김 비서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연우는 진실로 서윤에게 처음 피아노를 배웠다. 자신이 가르쳤으니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방금 연주는 고작 몇 개월 배웠다고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서윤이 급히 몸을 틀어 계단을 내려갔다. 얼마나 다급한지 쿵쿵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연우에게도, 1층에 있던 김 비서에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계단 근처로 나온 김 비서를 보자마자 서윤은 ‘다른 선생님을 구하는 게 좋겠어요!’라며 소리쳤다. 외침을 들은 김 비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던가. 한숨과 함께 대답하려는데 서윤이 더 빨랐다.
“모차르트는 여덟 살에 교향곡을 작곡했다구요! 열두 살은 너무 늦어요!”
……모차르트가, 뭐?
김 비서가 이제껏 들어왔던 서윤의 목소리 중에 가장 큰 목소리였다. 한껏 상기되어 거친 숨까지 색색거리는 서윤을 바라보며 김 비서가 아연할 때였다.
“아하하.”
어느새 서윤을 따라 나온 연우가 그녀의 등 뒤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표정이 굳어진 김 비서가 연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서윤 역시 느리게 몸을 틀었다. 언제나 시큰둥하던 소년의 얼굴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서윤이 얼떨떨한 얼굴로 힐긋 김 비서를 살폈다. 김 비서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입술을 벌린 채로 아직 웃고 있는 연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선생님.”
서윤이 김 비서의 눈치를 살피는 찰나, 연우가 그녀를 불렀다.
“……어?”
퍼뜩 고개를 돌린 서윤이 연우를 본다. 어느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연우가 2층을 향해 턱짓했다.
“올라가요.”
그러고는 먼저 몸을 틀어 2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윤이 계단을 오르는 연우의 등을 응시하다가 슬그머니 김 비서를 돌아보았다.
사라지는 연우를 따라 올라가던 그녀의 고개가 금세 차분히 가라앉는다. 어느새 얼굴에서 감정을 완벽하게 지워 낸 김 비서가 빙긋 웃으며 입술을 뗐다.
“서윤 씨, 일단 수업 진행해 주세요. 방금 하신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괜한 소란을 피운 것 같아 멋쩍은 마음에 서윤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끝에 다다랐을 무렵 김 비서의 목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사모님께 급히 가 봐야 할 듯싶으니, 한천호 교수님 스케줄을 확인해 달라 박 비서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 * *
피아노 수업은 그로부터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사이 서윤은 대학을 졸업했고 음악 잡지사의 에디터로 입사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 이어져 피아노 수업은 주에 한 번으로 줄여야 했지만, 수업을 거르는 일만큼은 절대로 없었다.
연우 역시 성큼 자라났다. 밤마다 극심한 성장통을 앓고 있다고 전해 들은 지 두 달여 만에 서윤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더 자라 이제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때로는 짓궂게 서윤의 머리통 위로 손바닥을 올리는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그녀에게만큼은 다감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오직 그녀에게만 다정한 소년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그녀뿐이었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에 아이와 피아노를 치며 보내는 시간이 서윤에게도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린 탓이었다.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아이는 반 뼘씩 자랐고, 조금씩 살가워졌으며, 그녀의 곁에 사소한 맹목들을 흩뿌려 두었다. 수채화 물감이 번지듯 부드럽게 일어난 변화였다.
알아채기엔 일련의 시간들이 하나의 연주곡처럼 받아들여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연우의 곁에는 그를 과할 정도로 보호하는 수행 비서들과 한 교수가 있었다. 계약 관계라고는 하지만 서윤은 그들이 연우를 진심으로 아끼기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믿었다.
한천호 교수도 말하지 않았던가.
폭력적인 성향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교육을 통해 사회화가 가능하다고.
엄격한 교육과 넘치는 애정으로 말미암아, 연우는 훌륭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아름다운 소년으로 자라난 연우를 보고 있자면 공연히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기도 했다.
게다가 연우와의 피아노 수업을 통해 서윤의 삶도 격변하였다. 그동안 매주 두 번씩 수업이 이어졌기 때문에 서윤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손을 올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십수 년 동안이나 품고 살아왔던 트라우마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서윤은 뒤늦게 알아챘다. 그제야 피아노 수업이 시작되고도 반년 동안이나 긴장한 채로 집 안을 살펴야 했던 일이 잠시 우스워졌고, 이내 왈칵 뜨거운 울음을 터트렸다.
기꺼이 다정해진 소년을, 동시에 자신의 삶 역시 변화시켜 준 연우를, 용서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첫 수업에서 있었던 일은 서윤과 연우 사이의 금기나 다름없었지만, 이제는 그날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고 하더라도 웃어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끼다 보니 지난해 그 사달이 난 것이지만…….
서윤이 씁쓸하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내 금요일이었다. 내일은 피아노 수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에 씻고 빨리 잠자리에 들 계획이었다.
수업이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어드는 대신 수업 시간이 늘어났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이어졌기에 컨디션을 조절해야 했다.
“왔니.”
서윤이 방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하던 찰나였다. 서윤의 아버지가 안방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순간 서윤이 어깨를 떨었다.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일찍 오셨네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한 서윤이 몸을 틀어 방으로 가려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발걸음을 잡아챘다.
“일단 와서 앉거라. 할 말이 있다.”
서윤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말을 마친 아버지는 거실에 놓인 장식이나 다름없는 소파로 향했다. 남자는 회사 일로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데다가,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보통 안방이나 서재에 있기 때문에 큰돈을 들여 꾸민 거실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모델 하우스처럼 황량했다.
서윤 역시 거실에 앉아 TV를 본다든지, 사소한 일상을 향유한 적 없기에 소파에 앉는 일이 어색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양 불편하기만 했다.
“…….”
“…….”
짧은 정적이 부녀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그동안 그녀의 아버지, 지서훈은 서윤을 바라보았다.
딸은 자랄수록 죽은 아내를 닮아 갔다. 아내 역시 주변이 떠들썩해질 만한 외모를 가진 미인이었다. 결혼 이후에는 시든 화초처럼 메말라 결국에는 삶을 포기했지만, 그녀의 위대한 유산만큼은 아직 이 자리에 있었다. 지서훈의 딸 지서윤은 그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 줄 값비싼 매물이었다.
속으로 히죽 웃은 지서훈이 얼마 전 김지은, 김 비서라 불리는 여자와의 식사 자리를 떠올렸다. 대뜸 연락해 자리를 만들기에 무슨 좋은 소식이 있나 했다.
‘도련님께서 따님을 많이 아끼세요.’
게다가 첫 마디부터 서윤의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수주 계약 연장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지서훈은 지난해 있었던 콩쿠르 이야기를 꺼냈다.
‘하하, 그렇습니까? 좋은 일이네요. 안 그래도 도련님께서 콩쿠르 나가서 우승하신 덕에 병역 혜택도 받지 않았습니까.’
지난해, 연우는 홍콩에서 개최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사고였다. 서윤이 따로 촬영해 놓은 연우의 피아노 연주 영상을 그녀의 음악 잡지사 동료인 철민이 보게 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화면을 뚫고 나오는 재능에 철민은 압도되었고, 급기야는 서윤이 직장에 가져다 놓은 개인 노트북에서 영상을 빼돌렸다. 빼돌린 영상은 그대로 콩쿠르 예선 심사로 흘러 들어갔다. 연락처를 서윤의 개인 번호로 올려 두어서 처음 합격 통보를 받은 것도 서윤이었다.
일의 전말을 알게 된 후 서윤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냐고 항변해도 철민은 뻔뻔했다. 오히려 아이의 재능을 숨기고 있던 서윤에게 화가 난다는 식이었다. 연우 집안의 법무팀이 대동 되자 철민은 급히 사과했지만 이미 예선 심사는 통과된 후였다.
영상을 제외하고는 이름과 나이까지 모두 철민이 꾸며 낸 거짓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일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죽을죄를 지은 얼굴로 수업에 나온 서윤을 보며 연우가 콩쿠르에 나가겠다 선언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정말 아무렇지 않게 콩쿠르에 나갔다.
당연하다는 듯 우승했다.
우승 트로피에 딸려온 병역 혜택은 덤이었다.
지서훈은 재벌가들이 겉으로는 얌전 떨며 병역을 피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쓴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실수로 시작된 일이었으나 이건 명백한 서윤의 공로였다.
‘우리 딸이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을 줄이야 저도 미처…….’
‘아니요.’
미처 몰랐는데, 기회를 주신 덕입니다…… 까지.
서윤의 공을 치켜세우며 상대에게 입 발린 감사를 표하려던 지서훈의 말이 김 비서에 의해 가로막혔다. 바라본 김 비서의 표정이 살벌했다. 지서훈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되물었다.
‘예?’
‘좋지 않아요.’
‘……아, 그, 그렇습니까.’
‘사모님께서 무척 걱정하세요. 애착 형성이 지나쳐요. 이건 분명 따님께도 좋지 않은 일이죠.’
‘그러면…….’
‘사장님, 사업 키우셔야죠. 언제까지 하청 업체일 수만은 없지 않나요?’
김 비서가 제안한 것은 딸, 서윤의 결혼이었다. 넌지시 건넨 파일에는 서윤 또래의 청년에 대한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부친은 다 쓰러져 가는 소기업을 운영하는 데다가 피아노 치는 외아들이라니. 적당한 때에 서윤을 부잣집으로 보내려던 지서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김 비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저평가되어 있지만 가지고 있는 특허 기술이 앞으로 30년은 내다 볼 만하다는 설명이었다.
지서훈은 머리를 굴렸다. 이건 기회였다. 그렇게 남자는 한 번 더 딸을 팔기로 결심했다.
“너처럼 피아노를 한다더구나. 혼인신고 마치면 프랑스 유학까지 내가 지원하기로 했다. 그까짓 회사는 그만두고 따라가서 내조나 하거라.”
“네?”
“내일 저녁에 약속 잡아 뒀으니 나가서 만나고 와.”
“아버지, 그게 무슨…….”
“지서윤, 이번에도 잘할 수 있지?”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너무 갑작스러워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결혼이라뇨. 저는, 저는 그렇게는 못 해요. 세상이 어느 땐데, 그리고 내일은 피아노 수업을 하러 가야 해요. 무엇보다 이런 결혼은…… 흐읍.”
서윤이 이런 결혼은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데, 머리채가 잡혔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서윤의 머리채를 붙들고 힘으로 고개를 치들었다. 형형한 아버지의 눈과 마주한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서윤이 본능적으로 바들바들 어깨를 떨었다.
“이게 그동안 오냐오냐했더니 그새 말대꾸를…….”
머리채를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쪽 손이 서윤의 볼을 툭, 툭 두드렸다.
“너 내가 만만해? 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 그래서 만나게 해 준다잖아!”
두툼한 손에 뺨이 날아가는 공포를 서윤은 잘 알았다. 딸의 동공이 공포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지서훈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서윤아, 이 애비가 너한테 나쁜 일을 시키겠어? 아무렴 내 딸인데.”
“…….”
“다 너를 위한 일이니까 애비 말 들어. 알았어? 피아노 수업은 내가 김 비서님께 잘 이야기했으니 걱정 말거라.”
머리채를 쥔 손이 스르륵 빠져나간다. 서윤을 놓아준 아버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서윤은 떨리는 몸을 감싸 안으며 고개를 떨궜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평화는 얇게 얼어붙은 강물에 불과했다. 힘주어 내리치면 그대로 깨져버리는 연약한 울타리 속에서 감히 행복했다. 안일하게도.
이 지옥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어떻게든, 그것이 설사 사랑 없는 결혼이라 하더라도, 이 집에서 도망치는 일밖에 없겠구나.
추적추적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서윤은 깨달았다.
다음 날 서윤은 약속 장소에 나가 남자를 만났다. 한 살 연상의 평범한 남자였다. 공통사인 피아노에 대해 이야기해도 대화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자, 대현은 대화 내내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채 서윤을 대했다. 연신 서윤을 폄하하는 태도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꼭 누군가 정해 놓은 일을 이어가듯 일사천리였다.
결혼은 서윤의 의사와 관계없이 고작 한 번의 만남으로도 진행되었다. 사직서를 제출했고, 결혼식 일정이 잡혔다.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토요일이 왔다.
연우와의 피아노 수업 역시 한 달 남짓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연우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서윤은 아이에게 이별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를 난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침내 연우의 방문을 열었을 때, 서윤은 섬뜩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피아노 의자에 반대로 걸터앉은 연우가 서윤이 들어오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끝이라는 거, 알고 있구나.
서윤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지난주 수업을 빠지며 김 비서가 연우에게 소식을 전달했을 터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갑작스러웠겠지. 원망하는 듯도, 질책하는 듯도 보이는 눈동자였다. 마주한 순간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 같은 기분에 덜컥 목울대가 좁아지고 고개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선생님.”
연우가 문가에 그대로 서 있는 서윤을 불렀다. 평소의 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얼음의 표면처럼 차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결혼하세요?”
여상한 질문이었다. 사직서를 제출한 서윤에게 동료들이 수십 번 물었고, 서윤도 그만큼 대답했던 아무것도 아닌 질문.
그들과 대화할 때도 꾸짖음을 당하는 어린아이처럼 떨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내리꽂히는 시선과 어디서부터 피어올랐는지 모르는 죄책감을 감내하고 서 있기도 버거웠다.
“……그렇게 됐어.”
서윤이 대답하며 한 발자국씩 나아가 연우의 앞에 섰다. 연우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서윤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도 가지시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사사로운 어떤 것도 섞여 들지 못할 것만 같은 새까만 눈동자에 일순 분노가 감돈 것도 그때였다.
이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서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일주일 전 만난 남자와 가정을 꾸린 자신조차 아직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물며 아이라니.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당치도 않았지만 서윤은 어쩌면 그렇게 될 거라고 대답했다. 결혼에도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아이라고 제 의지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남자와의 관계를 상상하자 순간 구역질이 나올 것도 같았지만 서윤은 참아 냈다.
“연우 같은 아이면 좋겠네.”
서윤이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진심이었다. 애초에 서윤에게 자식에 대한 애착이나 기대는 없었다.
다만 연우는 서윤으로 하여금 모성애가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실감하게 만들었던 아이다. 그러니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아이가 연우를 닮았으면, 서윤은 작게나마 소망했다.
다정한 아이. 상냥하고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아이. 처음에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나, 결국에는 바라보는 시선에 평화를 선물해 주는 착한 아이.
“저 같은 아이가 갖고 싶으시면, 저랑 결혼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뭉클한 마음을 비집고 연우가 입술을 뗐다. 던지는 의문 속에 맹목이 보일 듯 말 듯 잠겨 있다. 당연하게도 서윤은 읽어 내지 못했다. 참 아이 같은 말이다, 가볍게 치부하고는 낮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대답하는 서윤의 눈시울이 붉었다. 생각해 보면 아이를 아이처럼 대한 일이 드물었다. 이다음에 네가 크면 꼭 너와 결혼하겠다는 실없는 약속조차 해 줄 수 없었다.
시선이 엇갈린다. 수많은 감회가 시야를 스쳐 지났다. 생에 단 한 순간 안온을 안겨 주었던 아이다. 연우와의 이별이 곧 고통스럽던 과거로의 회귀일까 봐, 서윤은 덜컥 두려워졌다.
눈물이 부지불식간에 볼을 갈랐다. 서윤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황급히 닦아 내며 젖은 목소리로 꾸역꾸역 물었다.
“……선생님 결혼식에 반주해 줄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탁할게.”
연우는 다만 굳은 얼굴로 울고 있는 서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눈앞으로 샹들리에의 불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대현의 팔에 팔짱 낀 서윤이 천천히 버진로드를 걸었다. 결혼행진곡 사이로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버진로드를 중반쯤 걸었을까. 고개를 비튼 서윤이 새하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연우를 발견했다. 연우는 걸어오는 서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서윤은 어색하나마 웃어 보임으로써 연우의 시선에 답했다.
그러자 소년의 손끝에서 결혼행진곡이 부드럽게 변주되었다. 봄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듯, 발걸음을 재촉하는 다정한 선율이었다. 팔려 가듯 해치워지는 결혼 속 유일한 위로였다.
고작 귓가를 두드리는 음악이 변했을 뿐인데 어느새 식장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만약 수업 시간이었다면 칭찬을 쏟아 내며 저 애의 머리칼을 비비적거렸을지도.
그때였다.
쾅!
짓눌린 단조의 비명과 함께 연우의 피아노 연주가 멈추었다. 순간 식장이 정적에 잠긴다. 함께 걸어가던 서윤과 대현의 걸음도 동시에 멈추었다.
“…….”
“…….”
짧은 정적 끝에 웃고 있던 하객들이 웅성거렸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연우에게로 돌아갔다. 고개 숙인 연우는 건반 위에 손을 얹은 채로 미동조차 없었다.
거짓말.
서윤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올려다본 대현의 표정은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다. 베테랑 사회자마저 처음 있는 일인지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보였다.
서윤이 흠칫 연우에게로 한 발자국 나아가려는데, 때마침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꿰뚫듯이 서윤을 바라보았다. 당황하여 흔들리는 눈동자와 하얗게 내려앉은 얼굴을 훑어내렸다.
……그제야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적막이 끼얹어진 식장에 고요한 피아노 음이 내리깔린다. 낮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와 적막을 산뜻하게 건너뛰었다. 언제 멈추었냐는 듯 막힘없이 이어졌다.
혼란에 휩싸인 식장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사회자는 이제 서윤과 대현을 향해 눈짓으로 입장을 재촉하고 있었다.
대현이 신경질적으로 서윤을 이끌었다. 서윤이 엉겁결에 대현을 따라 걸었다.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어 마침내 주례 앞에 섰을 때, 서윤은 급히 연우를 곁눈질했다.
피아노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등은 아이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연우는 더 이상 서윤을 바라보지 않았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은 서윤이 일가친척들 다음으로 찾은 것은 연우였다. 서윤은 하객들 사이를 허겁지겁 돌아다니며 연우를 찾았다.
벌써 성인 남자의 평균 키를 훌쩍 넘어선 연우다. 한 공간에 있다면 분명 눈에 띌 터인데, 아무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도 연우는 보이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쉰 서윤이 피로연장을 빠져나갔다. 멀리서 그녀의 아버지가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혼식이 끝나면 서윤은 대현과 함께 파리행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날 예정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당분간 한국에 들어올 일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야외 주차장에 들어선 서윤은 본능적으로 연우를 찾아냈다. 그 애가 막 박 비서에게 입고 있던 재킷을 건네고 있었다.
“연우야!”
연우가 있는 방향을 향해 서윤이 힘껏 소리를 질렀다. 부름과 동시에 달음박질쳤다. 연우는 덤덤한 눈으로 달려오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박 비서가 서윤을 향해 짧게 목례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윤이 다급히 양손으로 연우의 한 손을 잡아챘다. 힘주어 잡아끈 소년의 손이 어느새 서윤의 것보다 훨씬 커다랬다.
“왜, 왜 이렇게 빨리 가. 밥도 먹지 않고.”
연약한 바람이 서윤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간다. 잡힌 손을 빼낸 연우가 차근히 서윤의 흩날리는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선생님.”
“…….”
“오늘 예뻐요.”
서윤이 무력하게 고개를 떨궜다.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가로 몰려드는 울음을 참아 냈다. 마지막이 분명한 만남 앞에서, 서윤은 가까스로 웃으며 인사할 수 있었다.
“고마워. 정말로.”
식장에서의 일로 연우를 타박하거나 탓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완벽한 결혼식이었다면 더 견디기 힘들었을 테다. 결혼으로 말미암아 연인은 행복해졌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동화 속 마땅한 균열이었을 뿐이었다.
“이상하지. 왜 이렇게 아쉬운 걸까…….”
연우가 중얼거리는 서윤을 내려다본다. 물기에 젖은 서윤의 눈동자가 몰아치는 햇빛에 순간 무지갯빛으로 반짝였다. 모래사장에 파묻힌 깨진 유리 조각처럼 맹렬하게 빛났다.
지그시 밟아 피를 내어 주면, 투명한 유리 조각은 틀림없이 붉게 물들리라.
연우가 짧게 눈을 깜빡이며 서윤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금방 돌아오실 거잖아요.”
흘러나오는 목소리 위로 옅은 치기가 깔려 있다. 분명한 열기였다. 타오르기 직전의 일렁이는 불꽃이었다.
“……응, 맞아.”
거짓말이었다. 돌아온다 하더라도 연우를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서윤과 연우는 살고 있는 세상이 다를뿐더러,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일 테다. 비대해진 아이의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는 무척이나 좁아져 있을 텐데 그 사이를 비집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잘 다녀오세요.”
서윤의 거짓말에 연우가 비스듬히 웃는다. 서윤도 관계의 끝을 맞이하는 슬픔을 숨기며 연우를 따라 웃었다.
“기다릴게요, 선생님.”
남은 이야기는 별 볼 일 없었다. 잊고 잊혀진다. 하지만 기다린다고 말하던 소년의 얼굴만은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서윤은 생각했다.
* * *
그 후 딱 한 번 연우를 만난 적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리사이틀에서였다.
남편이 사사하고 있는 교수님의 초대로 참석한 자리. 대현이 교수님을 뵙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서윤은 로비에 홀로 앉아 있었다. 감흥 없는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는데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걸려들었다.
“……어?”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짙고 어두운 머리칼, 곧고 바르게 선 등, 유려하게 흐르는 얼굴의 선까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키가 더 큰 듯했다.
몸에 딱 맞는 세미 정장을 걸친 연우는 손끝으로 팸플릿을 고르고 있었다. 타지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에 서윤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연우야.”
서윤이 들뜬 목소리로 연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름을 듣고 뒤돌아본 연우의 시선이 지그시 서윤에게 닿았다.
“선생님.”
마침내 연우의 입술이 그녀를 불렀을 때, 서윤은 정말 활짝 웃었다. 일순 주변이 화사해질 정도로 해사한 미소였다.
“알아보는구나.”
그 순간 서윤은 뭉클해졌다. 끝이라고 믿었던 이야기가 기적처럼 이어진 것이다. 고작 몇 장면에 불과하겠지만 충분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데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서윤은 내내 외롭고 고독했다.
남편은 여전히 서윤에게 데면데면했으며 교수와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틀어진 날에는 큰소리도 마다치 않았다. 문득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면 서윤은 발작처럼 어깨를 떨어야 했다.
아버지에게 도망쳤을 뿐, 황량한 일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연우는 서윤에게 조급한 떨림과 기쁨을 안겨 주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아직 피아노를 치는지, 학교생활은 어떤지. 전에도 컸지만, 정말 잘 컸다고 칭찬도 해 주고 싶었다.
다만 연우의 태도가 차분하여 서윤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감춰 물어야 했다. 연우는 이런 곳에서 자신을 만난 게 신기하지도 않은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마치 오늘 서윤과 만날 줄 알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서윤과 만난 일이 특별하지 않거나.
“왜 혼자야? 김 비서님이랑 같이 안 왔니?”
서윤이 연우의 곁을 살피며 물었다. 연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대신 한 발자국 다가와 다감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선생님.”
“응?”
“금방 오신다더니 늦으시네요.”
연우의 손가락 끝이 들고 있는 팸플릿의 모서리를 끊임없이 매만졌다. 어느새 종이의 얇은 속살이 다 보일 정도로 헤진 모양을 들여다보던 서윤이 애달픈 목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기다리기가 힘들어요.”
시선이 뭉근하다. 맹수가 사냥감을 물색하듯 훑어내리는 눈길에 서윤은 순간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선뜻 대답할 말조차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빨리 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원래 연우와의 대화가 이토록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했던가. 어쩌면 지난 시간 동안 서윤 자신의 사회생활이 부족해졌기 때문일지 몰랐다. 서윤이 연우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벌써 많이 컸는걸.”
뜻 모를 이야기에 억지로 이어 붙여 놓은 대답이 졸속했다. 서윤이 어려운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무는데, 연우가 낮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요?”
“그럼. 당연하지.”
“글쎄요. 모르겠어요.”
대화가 뚝 끊어졌다. 연우의 입가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
“선생님, 그러면 다음에 봬요.”
연우가 착한 아이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서윤이 놀라 연우의 재킷 소매를 움켜쥐었다가 황급히 손을 뗐다.
“……벌써 들어가려고?”
아쉬웠지만 토로할 수는 없었다. 파리에서의 생활이 늪에 잠길수록 평화로운 그때가 그리웠지만 그렇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우는 아이고, 서윤은 어른이다. 연우와의 시간이 서윤에게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것과 별개로, 연우에게 자신은 한때 스쳐 지나갔던 피아노 선생에 불과할지 몰랐다.
“봤으니까, 그래야죠.”
서윤이 쥐었다 놓은 재킷 소매를 짧게 들여다본 연우가 대답했다. 허공을 맴돌던 서윤의 시선은 애타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연우에게 가닿았다.
“선생님은 오늘도 예쁘네요.”
연우가 자연스레 손을 들어 흘러내린 서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순간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간 타인의 체온에 서윤이 짐짓 상체를 뒤로 물렸다.
머리카락을 따라 곡선을 그리며 내려온 연우의 손이 서윤의 어깨를 감싸 쥔다. 떨쳐 내기엔 가볍고 그대로 두기엔 무시하기 어려운 손길로 서윤의 드레스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화가 날 만큼요.”
연우가 서윤의 시선을 마주 본다. 연신 대답하기 난처하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주제에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는 간절함이 결국에는 연우를 웃게 만들었다. 냉담하게 떠나 서운한 얼굴이 보고 싶었다.
완벽한 동상이몽 속에서 서윤은 눈을 깜빡이며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여전했다. 꽉 잠긴 셔츠 단추와 단정히 손질된 머리카락. 새하얘 고결해 보이는 목덜미와 바르게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 검은색. 흰색. 푸르다 못해 시린 파란색. 스쳐 지나가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워 감상하게 만드는 미소까지.
“선생님, 이만 가 볼게요.”
시야를 간지럽히던 수상한 기분은 연우가 한 걸음 물러서자 한순간에 불식되었다. 연우의 손길이 다녀간 자리가 아직 서늘했다.
“……그래. 그래야지. 얼른 들어가 봐.”
서윤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호선을 그렸다. 연우의 시선이 우물쭈물 올라간 서윤의 입가를 맴돌았다. 붉고 작은 입술 끝이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연우가 다정하게 웃으며 어깨를 스쳐 그녀를 앞질렀다. 돌아서는 걸음이 단호했다. 서윤이 공연한 서운함에 잠시 동안 입술을 깨물었다.
힐긋.
그녀를 바라본 연우는 조금 더 매몰차졌다.
서윤과 앉아 있는 1층 구석의 초대석과 연우가 앉아 있는 2층 중앙의 VIP석은 그리 멀지 않았다. 서윤이 턱을 치들면 연우와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동시에 연우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면 서윤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다.
서윤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연우의 눈동자를 알아챌 수 있었다. 어둠은 깊었지만 그 애의 눈빛만은 또렷했다. 모두가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관중석에서 그 애의 눈동자만은 정확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검은 장막 아래에서, 서윤은 방금 전 품었던 서운함을 못내 감추며 연우를 향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러자 연우 역시 서윤을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꽤 즐거워 보이는 눈치이기에 서윤은 멋쩍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막이 오르고 있었다. 무대 위에 불이 켜지고, 머지않아 음표의 빗소리가 공연장 안을 가득 채웠다. 쇼팽의 로망스. 멀리 앉아 있지만, 이미 너무 멀어진 사이이지만, 함께 보낸 추억을 곱씹으며 듣기 좋은 곡이었다.
* * *
스물여덟, 서윤은 이혼을 결심했다. 콩쿠르 다음 날이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통화 너머로 벌컥 호통이 쏟아졌다. 절대 안 된다는 말과 1년만 기다리라는 말이 돌림노래처럼 반복됐다.
남편에게 소식이 전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윤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받고 집으로 귀가한 남편은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였다. 머리채를 잡아채는 감각이 익숙한 것이 죽도록 끔찍했다.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고? 응?’
‘이, 이러지 마요.’
‘이런 게 뭐라고 바짝 겁먹어서는 내가 빌었는지, 씨발. 하하하…….’
콩쿠르 당일만 하더라도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던 남자의 태도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서윤이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신세라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끔찍한 나날이었다. 남편은 낮이면 폭력으로 서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밤이면 집으로 다른 이들을 끌어들여 향락을 즐겼다. 남편이 남자도 여자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 생활이 이혼을 결심하고도 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살고 싶어 몰래 남편의 외도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놓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지서훈은 더 이상 서윤의 연락조차 받지 않았다. 머나먼 타국에서 비상금 한 푼 없이,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서윤은 서서히 시들어 갔다.
딸은 어머니의 삶을 닮아 간다. 악력에 볼이 바닥으로 짓눌리며 서윤은 어머니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삶을 숭고한 채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일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어느 밤 불현듯 찾아왔다. 그러자 모든 것이 초연해졌다.
죽어야겠다고 결심한 날, 서윤은 옷장에서 가장 예쁜 옷을 꺼내입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흰색 레이스 원피스였다. 옷장에 오래 방치되어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아직 쓸 만했다.
서윤은 불행한 채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이나마 행복한 채로 끝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사 먹고, 햇볕을 쬐기로 했다.
밤새 파트너와 일을 치른 남편이 잠든 사이, 서윤은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누군가 길목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툭, 손목이 잡힌 건 순간의 일이었다.
서윤의 걸음에 따라 코트 아래에서 흩날리던 원피스의 치맛단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놀라 어깨를 말았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는 눈동자가 돌아서는 장신의 동양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제 손목을 쥐고 있는 체온이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 가세요.”
서윤이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갈피를 잃은 눈동자가 한동안 잡힌 손목에 내려앉았다가 조심스레 올라섰다. 네이비색 롱 코트를 걸친 연우가 서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살에 뒤엉킨 찬바람이 연우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자 산뜻한 물 내음이 서윤의 코끝을 찔러왔다. 서윤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환상은 아닌지 여러 번 눈을 깜빡여야 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조금 더…… 깊은 나락까지 떨어져 있어 주실래요?’
‘그때, 데리러 올게요.’
그 순간 서윤은 귓가에 읊조려지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져 달라는 저주 같은 말과 데리러 오겠다는 다정한 마중 사이에, 서윤이 알던 소년은 없었다. 내려다보며 비죽 웃던 얼굴은 낯설고 기이했다.
“……연우구나.”
서윤이 중얼거리는 한편, 갇힌 손목을 빼내기 위해 팔을 비틀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소용없었다. 더 강한 힘이 서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서윤은 순식간에 끌려가 연우의 앞에 섰다.
“네, 선생님.”
연우가 허리를 숙여 서윤과 눈을 맞췄다. 서윤의 눈동자가 겁먹은 토끼처럼 크게 뜨였다. 그녀의 시야 가득히 연우가 들어찼다. 연우의 새까만 눈동자에 서윤이 비칠 만큼 얼굴이 가까웠다.
“연우예요.”
어떤 날 예견한 대로, 아름답게 자란 소년이 서윤의 앞에 흐드러졌다.
“선생님을 데리러 왔어요.”
이 깊은 나락에서 어딘가로. 그러나 도통 낙원의 인도자처럼은 보이지 않는 불온한 목소리로, 연우가 속삭였다.
* * *
자신을 윤준호라 소개한 비서의 말에 따르면 연우가 서윤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으로, 연우는 현재 월드 투어를 도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하필 그 우연에 발이 묶여 서윤을 한국에 데려다 놓느라 수천 달러의 손실이 났다며 윤 비서는 혀를 찼다.
그 뒤로 윤 비서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이, 서윤은 우연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깊은 나락까지 데리러 오겠다던 소년과, 때마침 나타나 손목을 움켜쥐던 남자를 떠올렸다.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라기에 그 애의 눈빛과 목소리, 쌓여 온 말까지 의뭉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평생을 이어져 온 숙련된 불행은 그녀로 하여금 감을 일깨웠다. 마치 모든 일이 연우의 뜻 아래에서 벌어진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서윤이 조급하게 물었다. 비서가 이상한 눈으로 서윤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말입니까?’
삶의 낭떠러지마다 그 애가 있는 게요. 차마 그렇게까지는 대답하지 못한 서윤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서윤을 바라보며 비서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날 근처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아…….’
‘체크아웃하는 동안 카페에 계신다고 하시더니 안 계시더라구요. 나중에 들어보니 은사님과 비슷한 분이 휘청거리면서 달려가시기에 쫓아가셨다고 하시구요. 뭐, 은사님이 계시는 동네이기는 했으니까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어디 도망이라도 치신 줄 알고 진땀 뺐죠.’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그만큼 은사님을 존경하고 아끼신다는 뜻이니까요. 일단은 저희가 따로 거처를 마련해 드릴 테니 그곳에서 머물면서 치료받으시죠. 아무리 봐도 지금은 안정이 최우선일 것 같네요.’
윤 비서가 은근히 서윤의 불안 증세를 지적하고 나섰다. 지난 1년 동안 깊은 우울에 빠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은사님 아버님께서 계속 저희 쪽으로 연락을 해 오고 계십니다만…….’
‘아, 아버지가요?’
윤 비서로부터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서윤은 눈에 띌 정도로 손을 떨기 시작했다. 어느새 연우를 향한 의문은 하얗게 지워진 채로, 아버지를 향한 두려움에 잠식되었다.
‘도련님께서 최선을 다해 은사님을 도우라 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윤 비서가 힘주어 말하며 서윤 쪽으로 따뜻한 차를 권했다. 서른을 목전에 둔 추운 겨울이었다. 그렇게 서윤은 뜻하지 않은 연우의 비호 아래에서 무사히 이혼 소송을 끝마쳤다.
혼자였다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내 서윤의 곁을 지킨 윤 비서 역시 언제나 이 모든 일이 연우의 당부임을 역설하고는 했다.
곁에 없는 이의 체온을 어렴풋하게 느낄 만큼 자주, 반복적으로 연우가 얼마나 서윤을 걱정하는지에 대하여 언급했다.
마땅한 의심이 부끄러운 오해로 퇴색되도록.
서윤의 마음 한편에 연우를 향한 부채감이 쌓아 올려질 때까지.
그사이 연우는 월드 투어를 성공적으로 끝마쳐, 이제는 서울 공연만을 남겨 놓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