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프롤로그 (1/10)

프롤로그

끼익.

어둠이 내린 비상계단에 빛이 흘러들었다. 빛은 서윤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비좁게 몰려들다 이내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까맣게 점멸했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서윤은 벽 쪽으로 몸을 틀어 자신을 숨겼다.

규칙적인 발소리는 두 계단 아래에서 멈추었다. 더 이상은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혹시 아는 사람인 것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곤란했다.

서윤이 황급히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을 닦아 냈다. 손가락으로 헤친 물길 아래의 볼이 아직 홧홧했다. 서윤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숨을 고르며 응시한 곳에 흐리지만 분명한 기척이 그녀를 반겼다.

“……연우구나.”

어둠 속에서 연우의 눈동자가 희게 빛났다 사라졌다. 동시에 방금 전 대기실에서 찢어지던 남편의 고함이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그가 평생을 목표로 삼았던 쇼팽 콩쿠르의 최종 라운드. 남편은 자신과 같은 나라 출신의 소년에게 왕좌를 내주었다. 소년이 거머쥔 최연소 타이틀과 전 부문 우승의 영예는 그를 비참케 했다.

‘너만 아니었어도, 지서윤 너만! 씹, 이 개 같은!’

‘지서윤 네가 우연우 그 씹새끼한테 피아노만 안 가르쳤어도!’

뺨을 맞은 순간 눈앞에 뜨거운 불꽃이 튀었다. 그것이 순수한 고통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아내로서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존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서윤은 그저 그와의 결혼 생활을 더는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연주 잘 봤어.”

제 앞에 선 이는 그녀의 결혼식에서 피아노 반주를 쳐 주었던 소년이다. 수치스러웠다. 부끄러웠다. 그날의 맹세가 떠올랐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이 차오르는 참담한 기분에도 서윤은 애써 입꼬리를 당겼다.

“훨씬, 훨씬 좋아졌더라. 테크닉도, 감정 표현도, 곡 해석도 전부.”

“선생님.”

서윤의 말을 끊어 낸 연우가 한 계단 위로 올라왔다. 흰 손이 어둠을 가르고 얼굴 가까이로 다가온다. 손가락은 건반 위를 유영하듯 젖은 볼을 매만졌다. 서윤은 피할 새도 없이 소년의 체온을 받아들였다.

차디찼다. 길고, 곧았다. 예고도 없이 침범해 서슴없이 더듬어 왔다. 꼭 서윤의 상처가 어디쯤에 있는지 다 아는 사람처럼 그녀를 매만졌다. 아직 뜨거운 볼 위의 상흔이 순식간에 서늘해진다. 마음을 다 태워 버릴 듯 불거졌던 화마가 짧은 손길 한 번에 불씨를 죽였다.

서윤이 손을 들어 연우의 손길을 저지하려는데, 숨이 가까워졌다. 순간 서로의 숨결이 성글게 엉켰다. 코끝으로 연우의 숨이 흘러들었으나 완전히 닿지는 않았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되 불온해지지 않는 선에서 연우는 멈추어 섰다.

“다음에 만날 때는…….”

연우가 서윤의 목덜미로 고개를 기울였다. 향을 음미하는 사람처럼 숨을 짙게 들이마셨다. 삼켰던 숨은 다시 고요한 바람이 되어 서윤의 목덜미에 불어닥쳤다.

서윤은 속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가만히 그 쏟아지는 듯한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 냈다.

“조금 더…… 깊은 나락까지 떨어져 있어 주실래요?”

연우의 낮고 음울한 목소리가 서윤의 귓가를 간질인다. 뱀처럼 똬리를 튼 목소리가 끈적했다. 서윤이 경직된 고개를 연우 쪽으로 돌리려던 찰나였다.

“지서윤!”

거칠게 비상계단의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졌다. 남편, 대현의 목소리다. 서윤이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데리러 올게요.”

작게 속삭인 연우가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폈다. 이내 산뜻하게 걸어 계단을 올랐다. 아래쪽에서 두리번거리던 대현은 그제야 서윤을 발견했는지 허겁지겁 그녀에게로 뛰어들었다.

“미, 미안. 미안해. 내가 미쳤었나 봐.”

대현이 양손에 서윤의 볼을 쥐고 얼굴을 훑어내렸다. 그녀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연우와 달리 대현의 손길은 우악스러웠다.

“아파, 아파요…….”

서윤이 대현의 손등을 붙잡아 끌어내렸다. 대현이 허공에 내던져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황급히 무릎 꿇었다.

“내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어. 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까. 응?”

대현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서윤의 신경은 온통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에 곤두서 있었다.

“장인어른께는 제발, 계속 공부할 수 있게…….”

초점 없는 눈으로 대현을 바라보던 서윤이 불현듯 차오르는 기시감에 고개를 들었다. 켜켜이 쌓인 계단의 난간 사이로 고개 숙인 연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대현을 향해 빗겨 간 시선이 비죽 웃는다. 서윤은 잘게 떨리는 손가락을 주먹 안에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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