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4/14)

에필로그

단상 위에 서서 떨리는 얼굴로 활짝 웃으며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넘기는 나의 친구 이도경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촉촉한 두 눈에 별이 박힌 듯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수십, 아니 백 개는 넘는 눈들이 다 자길 향하고 있으니 저 언니가 얼마나 떨릴 거야.

“그래. 엄마 저기 있지.”

가까이서 들리는 도준의 목소리에 준과 준의 품에 안겨 해맑게 웃고 있는 아기를 잠깐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차려입은 도준은 오늘따라 빛이 났다. 사람들이 시상식에 입장한 도준을 얼마나 훔쳐봤는지. 아빠를 닮아 벌써 잘생긴 아기가 오랜만에 본 이모, 그러니까 나를 보고 웃느라 쪽쪽이를 툭 뱉는 바람에 준이 몸을 숙였다. 바닥에 떨어져 더러워진 쪽쪽이를 자기 입에 물고 아기를 고쳐 안으며 앉을 자리를 휙휙 둘러보던 모습이 멋지긴 했다. 도 배우를 빼다 박은 도현이를 보면서 갑자기 딸을 낳고 싶어져 은오에게 속삭이기도 했다. 우리 딸 낳자. 갑작스러운 가족계획에 은오의 눈이 커졌지만 나는 결심했다. 딸 낳아서 도현이를 사위로 만들어야겠다.

“현아, 엄마한테 안녕 해. 안녕. 떨지 마. 엄마가 제일 멋져. 텔레파시 쏴.”

준은 아기의 짧고 통통한 팔을 잡고 휘휘 흔들곤 다시 단상 위 사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만큼이나 도 배우도 떨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자길 볼 때는 떨지 않는 남자가 이도경의 눈빛에는 아직도 저렇게나.

“남편이 아니었다면 다시 쓸 생각을 못 했을 거예요. 그가 나의 글을 좋아해서 별것 아니지만 선물처럼 다시 쓰기 시작한 글인데, 이렇게 상까지 받게 되었네요. 아, 음. 분명히 소감을 써 왔고, 연습도 했는데 생각이 하나도 안 나서, 읽히지도 않아서 그냥 남편의 눈을 보며 말하고 있어요. 문학상 소감을 글이 아닌 단상에 서서 하는 건 처음이라 지금 제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 거, 맞나요?”

그녀의 말에 모두 환호하며 박수쳤다. 나도 환호했다. 이도경 멋있다! 있는 힘껏 소리치자 나를 보던 서은오가 피식 웃었다. 박수가 잦아들고 사람들은 다시 문학상을 받은 주인공의 말을 듣기 위해 침묵하며 집중했다.

“작가로서 앞으로 좋은 글을 쓰겠다는, 어떤 다짐을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멋진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 음, 저는 그저 사랑을 쓰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진지해진 이도경의 표정을 보며 나도 진지한 태도로 집중했다.

“사실, 사람들은 모두 작가가 될 수 있잖아요.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요.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활자를 열렬히 사랑했다는 거, 그것 하나예요. 오래전에 쓴 단편소설을 빼면 거의 시나리오만 썼고 주로 인간의 내면, 관계,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어두운 상황에 관한 이야기만 줄기차게 써 와서 글의 주제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제 인생을 바꾼 남자가 그게 다 사랑 아니었느냐고 말하더라고요. 오로지 연인의 이야기만 사랑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냐고, 세상은 유심히 보면 결국 사랑이 타이틀이라고요.”

나는 힐끔 도준을 쳐다보았다. 올라간 입꼬리, 뜨거운 눈빛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은오에게 소곤거렸다. 아, 글 쓰는 것들은 이래서 상종을 하면 안 돼. 서로 자꾸 끌어당기거든. 쟤네 봐 봐. 멋진 말을 서로 남발해서 낭만에 푹 절어 사는 거. 아기가 순해서 다행이지, 예민했어 봐. 애 보느라 바빠서 서로 편지나 썼겠지. 그럼 지켜보는 나만 쓰러졌겠지? 닭살 돋아서? 그럼 내 애인은 내 걱정에 하얗게 질리겠지? 얼마나 유해하냐고, 글 쓰는 것들. 한쪽만 써야 해, 진짜.

“세상은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동감했습니다. 사랑이 없어 팍팍해지고, 사랑이 있어 행복하며, 때론 괴롭기도 한 거겠죠. 게다가 저의 모든 글엔 지독한 짝사랑이 묻어 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계속 사랑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상의 팔 할은 좋은 글을 쓰는 작가님들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확장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남은 이 할이 제 몫이라면, 그 몫 다 사랑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활짝 웃는 이도경을 보며 손뼉 쳤다. 상은 언니가 탔는데 왜 내가 눈물이 나는 거지? 눈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도경 진짜 멋있다.”

“응. 멋지네.”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수긍에 어쩐지 조급해졌다. 은오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딱 기다려라. 나도 음악상 받아서, 이 상을 사랑에게 바친다, 두 팔 들고 외쳐 줄게.”

“기다린다. 두 팔 꼭 들어. 하트 만들어.”

“이제 아주 한술 더 뜨지!”

소리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이 예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으슥한 데 가고 싶다고 몰래 속삭이자, 집에 갈까? 하고 더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사 얼른 하고 가자.”

“저기 오신다.”

꽃다발을 안은 언니가 가까워지자 일어선 도준이 내 품에 도현을 안겼다. 현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까꿍, 한 번에 햇살처럼 눈부신 웃음을 지었다. 빠르게 자리를 튀어 나간 도 배우는 예상한 대로 이도경에게 달려가 으스러지게 그녀를 안았다. 뭐라고 속닥거리는데 안 들어도 밀어라 그쪽엔 시선도 주지 않고 예쁘게 생긴 도현이만 응시했다.

“현아, 이모가 분발해서 이모 같은 딸 낳아 줄게.”

“…그걸 왜 아기한테 얘기해?”

“응. 나 현이 우리 사위 만들라구.”

“뭐?”

은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목울대가 일렁이는 걸 보며 픽 웃었다. 도현의 보호자들이 돌아왔다. 도경 언니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끝으로 우리는 서둘러 시상식장을 빠져나왔다.

“너, 나 닮은 아들 낳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는데, 바뀌었어.”

“왜? 내가 너 닮은 딸 얘기할 땐 안 된다며.”

실없는 말장난에 불과했던 일을 마음에 담아 뒀을 줄이야. 며칠 전 나는 잘생긴 애인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서은오 닮은 아들을 낳아야겠다고 통보했다. 서은오는 사색이 되어 청혼하는 거냐고 취소하라고 난리 쳤다. 감정이 상해 영원 어쩌고저쩌고하더니 결혼할 생각은 없던 거냐, 따졌고 서은오는 청혼만은 자기가 먼저 할 수 있게 선수 좀 치지 말라고 역정을 냈다.

‘그리고 네가 애를 낳을 생각이 있다면, 무조건 딸이야.’

‘뭔 소리야? 그런 걸 어떻게 우리 마음대로 정해?’

‘…어이가 없네. 아까 아들 낳겠다고 우기던 사람은 딴 사람이냐.’

‘아들이야, 무조건. 낳는 건 나니까 토 달지 마.’

‘…그럼 너 닮은 아들로 해.’

‘나도 예쁜 편이지만, 2세는 서은오 유전자로 올인하는 거로 하자. 어쭙잖게 섞이면 곤란해질 수도 있어.’

‘섞어. 섞어도 예쁠 거니까.’

‘은오야, 근데 너 좀 나 닮아 가는 것 같지 않아? 실없는 소리에 최선을 다해 동참하는 거 봐.’

그 말에 네가 즐겁다면야, 하고 쿨하게 대답하던 서은오는 지금 쿨하지 못하게 따져 대고 있었다.

“아니, 네 소원이 딸이잖아? 그리고 현이 보니까 정략결혼 시켜야겠더라고.”

“정략결혼? 왜 그걸 네 마음대로 정해? 애 의사도 없이?”

비죽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차에 올랐다.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의 의사를 챙기는 게 웃기고도 사랑스러워서 발끝이 저릿했다. 아, 서은오. 너 집에 가면 가만 안 둔다.

운전석에 오른 서은오는 기가 막힌다고 중얼거리며 안전벨트를 채워 주고 시동을 걸었다.

“정략결혼이라니. 한여름 입에서 그런 말이 어떻게 나와? 너처럼 멋진 어른으로 키우겠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글쎄. 상대가 도현이라면 아마 우리 딸이 고마워할걸?”

“뭔 소리야.”

“도준이랑 이도경의 자식이라면 멘탈은 따 놓은 당상인데, 생긴 거를 봐. 너 저렇게 잘생긴 아기 봤어? 성격도 온순하지. 난 느껴져. 내 딸이면 무조건 나한테 절한다. 진짜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있지도 않은 애를.”

자기가 밀리니까 괜히 정색하며 현실을 직시하라고 얘기한다. 창밖을 응시하며 노래나 흥얼거렸다. 가는 내내 은오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문장만 수십 번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서은오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키스했다. 애인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슈트 재킷을 벗으며 그대로 따라왔다. 넥타이를 끌어 내리고 서둘러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내 옷을 벗기려고 잠시 떨어진 서은오에게 속삭였다.

“우리 아기부터 만들까?”

“뭐?”

눈을 크게 뜬 서은오가 확 물러났다.

“콘돔 부른 거, 아직 안 왔잖아.”

“하.”

“은오야, 어차피 낳을 거면 빨리 낳자. 언제 청혼할 건데? 네 속도에 나 속 터져. 어느 세월에 절차 다 밟아. 늦출수록 나만 힘들어.”

목덜미를 끌어안고 뺨과 입술에 입 맞추며 얘기하던 나를 쓱 밀어낸 서은오가 단추를 채웠다. 그 모습에 눈썹이 일그러졌다. 뭐야? 왜 갑자기 산통을 깨?

“뭐 하는 거야? 왜 갑자기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

“콘돔, 차에 몇 개 있어. 가져올게.”

“오늘은 콘돔 필요 없다니까?”

달려드는 내게 밀려 달뜬 숨을 뱉으면서도 서은오는 끝내 옷을 벗지 않았다. 한참 만에 내 팔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훤한 대낮부터 왜 이래?”

“뭐? 너도 아까 좋다고 재킷 벗어 던져 놓고?”

“속 터져도 참아. 절차 다 밟자.”

“야, 서은오!”

“나 이미 아버님께 도둑놈이야. 인사도 못 드렸는데, 미움부터 살 일 있어?”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몸이 달아올라 아래를 붙이며 서은오가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반짝이며 가까이 붙자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는다.

“나 콘돔 가지고 올라온다. 너 잘 생각해. 지금부터 해도 기절하지 않을 자신 있어?”

“…아니. 이따 밤에 적당히 하자.”

“‘적당히’가 누구 기준인데.”

“당연히 내 기준이지! 나 또 코피 흘려? 아이스크림이나 사 와!”

피식 웃은 은오가 내 뺨을 잡고 입술에 쪽, 쪽 연달아 입 맞추었다.

“인사부터 하고, 날 잡고, 남들 하는 거 다 해 보자.”

“알아. 나도 조금 오버했다. 오늘 좀 안전한 날이기도 하고, 실은 콘돔 하나 남았다?”

“봐. 너는 사람을 시험한다니까. 내가 좋다고 달려들었으면, 화냈을 거지?”

“아니? 오늘 해서 아기 생기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지. 난 진작 준비됐어. 아빠 될 준비는 너만 하면 돼.”

“…아이스크림 뭐 사 올까.”

고분고분해진 은오가 사랑스러워 이번엔 내가 뺨을 잡고 발꿈치를 들었다. 간지럽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맞춤에 서은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맞닿은 입술 새로 웃음이 끼어들었다.

* * *

씻고 있겠다며 빨리 다녀오라는 여름을 두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여름을 생각하자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더웠다. 넥타이 없이 셔츠 차림으로 내려온 터라 단추만 두어 개 풀었다. 팔을 걷어 올리며 편의점 문을 열었다. 망설임 없이 생각해 둔 상품을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만큼이나 잘 알았다. 애인이 좋아하는 맥주, 과자, 음료, 즉석요리 식품, 아이스크림까지 편의점을 털어 갈 기세로 바구니를 채웠다.

계산을 마치고 주차한 차 문을 열었다. 콘솔박스에서 콘돔을 꺼내 비닐봉지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몸을 실었다. 문을 닫으려는 찰나,

“잠시만요! 같이 갑시다!”

반쯤 닫힌 문을 다시 열었다. 보약을 든 중년의 남자가 고맙다며 웃었다. 나란히 섰다. 침묵이 흐르고 움직이기 시작한 엘리베이터를 느끼며 문득 층수 버튼이 하나밖에 눌리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몇 층 가세요?”

남자를 흘끗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도 7층 갑니다.”

“아, 예.”

버튼을 눌러 주려고 뻗었던 팔을 내렸다. 멍하니 계기판을 올려다보며 도착하길 기다렸다. 어쩐지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고 있던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자하게 웃었다. 인상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선했고 주름이 멋졌다. 젊었을 적 미남자였을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이런 남자가 옆집에 살았던가. 왜 나를 유심히 보는 거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자가 먼저 내렸다. 남자의 뒷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벼락 맞은 듯 온몸이 굳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풍기는 분위기가 닮았는데.

“안 내려요?”

남자가, 아니 여름의 아버님이 나를 향해 물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일단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701호의 벨을 누르며 가까이 오라고 눈짓해 걸음을 옮겼다. 속으로 열심히 빌었다. 제발, 여름아, 옷 입고 있어. 여름아, 인터폰 확인해. 여름아, 여름아.

“딸애가 전화를 안 받아서 왔어요. 오후엔 집에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네.”

“애인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나중에 왔을 텐데.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갑자기 찾아온 건데요.”

사실은 저 여기서 살아요. 그 말을 못 해서 첫 만남부터 거짓말을 했다. 등줄기로 진땀이 흘렀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불어 여름의 목소리도.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여름아.

“으이그, 비밀번호 치고 들어오면 되지. 꼭 내가 열어 주길 바라고 깜찍한 짓을 하는 이, 귀여운 남자야… 어, 어, 아, 아빠?”

문을 활짝 연 여름은 다행히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마스크 팩을 붙이고 머리가 젖어 있긴 했지만, 이상할 게 없는 복장이라 안도했다.

“어, 어떻게 둘이 같이 와?”

여름도 꽤 당황한 눈치였다. 얼굴에 붙인 팩을 떼어 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어.”

“그, 그래?”

“일단 들어가자.”

아버님이 들어가고 여름과 나는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으며 뒤따랐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봉지를 빼앗아 든 여름이 주방 테이블에 올려놓는 걸 보면서 나는 먼저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그가 피식 웃었다.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왜 거기에, 아니 왜 무릎까지 꿇어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완벽한 죄인의 모습이라 여름은 나를 또 짠하게 보며 옆으로 꿇어앉았다.

“나도 꿇을까.”

아버님이 소파에서 내려왔다. 정말 무릎을 꿇으려는 모습에 기겁해 팔을 내밀었다.

“제가! 제가 편하게 앉겠습니다.”

우리는 결국 소파를 두고 바닥에 둘러앉아 눈치 게임을 시작했다.

“과일이라도…….”

긴장해서 정신이 나간 나는 몸을 세우려다가 멈칫했다. 잠시 놀러 왔다는 사람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과일을 꺼내 오려고 한다.

“그래요. 뭐라도 먹는 게 낫겠네.”

그 말에 일단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장고를 열어 사과를 꺼내 씻고 서둘러 껍질을 깎았다.

“은오야, 와서 깎으래.”

거실에서 소곤거리던 부녀에게 시간이 필요해 보여 느리게 깎은 것인데 여름이 다가와 속닥거렸다. 그대로 쟁반을 들고 다소곳하게 앉아 과일을 깎았다. 뭐라고 하지. 따님을 주십시오? 여름이가 물건도 아닌데 뭘 달라고 해. 따님을 사랑합니다? 너무 당연한 소리다. 사랑하니까 만나고 있겠지.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첫 만남에 너무 도둑놈 같은 소리 아닌가.

“아.”

“응? 어.”

내 팔을 찌르며 입을 벌리길래 아무 생각 없이 예쁘게 깎은 것 하나를 골라 입 안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를 보는 아버님과 눈이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아버님이 드시기도 전에 습관처럼 여름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얼마나 어이없는 놈으로 보실까. 예의가 없다고 여기진 않을까. 잘 보여야 하는데. 이미 너무 많은 결점을 달고 있는 놈이 첫 만남부터 어이없는 모습만 보였다.

“왜 눈치를 보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예?”

“내게 잘못한 게 있는 사람처럼 너무 떨어서. 나는 보다시피 여름이 아빠예요. 보약 갖다 주러 왔고. 내 딸이 연애하는 거 진작 눈치챘고, 상대가 누군지도 대충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멋지게 커 조금 놀라긴 했네요.”

입술이 벌어졌다. 내 차례라는 듯 손짓하기에 서둘러 답했다.

“따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음, 그렇군요. 그래 보여요.”

“그래서 긴장됩니다. 여름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니까, 그런 분을 앞에 두고 있으니까.”

여름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웃을 줄 알았는데 진지한 표정이라 정신이 또렷해졌다.

“…서은오입니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뉴스에 자주 나오니 아시겠지만, 제 집안 문제로 시끄러워 상황이 잠잠해지면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싫으실 텐데,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인사드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내가 왜 싫어할 거라 생각해요?”

생각지 못한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정말 의아하다는 표정이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혹시 내 딸을 힘들게 하나? 잘 울리나?”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여름이가 저희 집안일에 휘말렸으니까요.”

“…그 일은 은오 군 잘못이 아니지 않나. 뭐가 됐든 피해자를 탓할 순 없지. 다른 이유가 또 있나요.”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거요.”

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었고, 아버님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뉴스를 자세히 보긴 했어요. 은오 군이 딸과 만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세히 봤을 거예요. 내 딸이 오랜 시간 마음에 담은 이들의 이야기니까. 그런 이야기가 연일 보도되고 있으니까.”

“예.”

“집안의 비리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그 점이 자신이 말하는 부족하다는 지점인가요?”

“아빠, 내가 말할게.”

“네가 왜. 안 되겠다. 너 잠시 빠져 있어. 보약 차곡차곡 넣고 있어, 냉장고에. 얼른.”

여름은 가기 싫단 듯 몇 번 매달렸지만 단호한 아버지의 태도에 내 눈치를 보며 주방으로 떠났다. 나는 그가 일부러 여름을 보내 준 것임을 알았다.

“여름이처럼 빛나는 사람이 못 됩니다. 그게 제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입니다.”

“여름이 참 멋진 사람이지. 그렇게 키우려고 하지 않아도 잘 컸을 거라고 자부해요. 내 아내를 닮은 사람이니까.”

“예. 멋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뭐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거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멋진 사람이 선택한 남자 아닌가, 은오 군은.”

“…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겠지. 내 딸이 얼마 전부터 결혼하면, 어떨 것 같냐고 하던데. 쟤가 투명하잖아요. 그래서 키울 때 속을 몰라서 끙끙 앓진 않았는데, 지금까지 앓을 일이 없네요. 어찌나 고마운지.”

냉장고를 열고 보약을 차곡차곡 넣어 두면서도 거실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나는 동시에 피식 웃었다.

“은오 군은 몰라도, 여름이는 결혼까지 생각해요. 난 쟤가 미쳐 하는 거 살면서 두 번 보는데, 은오 군은 자주 보려나.”

“조금… 조금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하하, 알 만하네. 부럽기도 하고. 우리 연이 보고 싶어라. 아, 여름이 엄마 이름이 연이. 그 사람이 은오 군을 봤다면 당장에 끌어안았을 텐데. 서로 아쉽네, 그렇죠?”

그는 슬픈 듯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여름을 향해 한마디 했다.

“똑바로 예쁘게 넣어. 빨리 오려고 수 쓰지 말고.”

뜨끔했는지 차곡차곡 쌓던 소리가 잠시 멎었다.

“여름이가 뭐에 미쳤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처음엔 음악 만들겠다고 했을 때, 두 번째는 제주에 다녀온 후로 내내. 쟤 지금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저런 표정은 내가 잘 알아요. 내 아내가 나한테 빠졌을 때 짓던 표정이거든.”

“…….”

“나와 연이가 훌륭했다곤 자신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여름이를 키웠어요. 고맙게도 여름이는 우리를 사랑하고, 닮고 싶어 하며 존경까지 해 줘요. 그래서 내가 확신하는 건 보통의 보호자들과는 조금 다르게 키웠다는 거.”

“네. 저도 닮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칭찬받으려고 하는 소리 아니고. 여름이는 빛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엇나가지 않고 잘 자란 거라고요. 환경이 돼도 잘 안되는 게 자식 농사거든요. 나중에 애 키우게 되면 내 말, 이해할 테지만.”

“…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은오 군은 좋은 환경에서 자란 느낌은 안 들어요. 사람 깔보고 이용만 하던 부모가 자식에겐 한없이 잘해 줬으리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기분 나쁘다면 미안하지만, 내 솔직한 마음은 그래요.”

마른침을 삼켰다. 기분 나쁘지 않다고, 사실이라고만 덧붙였다.

“그러니까 은오 군도 우리 여름이만큼 빛나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싶은 건데.”

“예?”

“밝은 곳에서 빛나기는 어렵지 않지만, 어두운 곳에서 빛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니까. 그걸 해낸 사람인데, 뭐가 부족해.”

입 안을 씹었다. 여름에게 같은 말을 들은 적 있다. 깊은 밤, 내 뺨을 쓸어 만지며 속삭였다. 사랑 없는 곳에서 넌 어떻게 이렇게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었냐고. 빛 하나 없는 어둠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네가 빛이라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던 거라고. 난 애인에게 귀중한 말을 들었는데, 애인의 아버지에게까지 비슷한 말을 듣는다. 내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지.

“감사합니다.”

“내가 고맙지. 우리 여름이 더 행복하게 해 줘서.”

“잘하겠습니다.”

“나도 잘할게요. 이제 은오 군도 내 자식이니까. 음, 잠시만, …한여름, 그냥 와라. 와도 돼. 그렇게 티 나게 눈치 주면 아빠 서운한데? 내가 설마 네 애인 잡아먹을까.”

무섭게 쳐다보고 있던 여름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옆으로 앉자마자 뺨을 잡고 안색을 살폈다. 아버님 앞에서 왜 이러냐고 중얼거리는 내 말을 여름은 무시했다.

“이만 가야겠다. 다음에 올 땐 은오 보약도 한 채 지어 올게.”

“아, 아냐!”

여름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 말에 일어서려다 다시 앉은 아버님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여름에게 물었다.

“좋은 거 너만 먹겠다는 심보야? 어떻게 안 된다는 소리가 나오지?”

“그게 아니라, 아무튼 아니야. 은오는 괜찮아. 그렇지?”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 말에 아버님이 엄한 표정으로 여름을 응시했다.

“튼튼해! 얘 진짜 튼튼하다고!”

“넌 뭐 부실해서 내가 약 지어 먹여?”

“아, 나 코피도 났어! 얘가 힘이 너무 좋아서!”

“…….”

눈을 감았다. 끔찍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다시 주섬주섬 무릎을 꿇었다. 일을 저지른 건 여름인데, 내 얼굴이 뜨거웠다. 멱살을 잡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

“또 죄송하대. 이번엔 뭐가 죄송한지 들어 볼까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이런 상황에서 아들한테 존댓말 쓰시면, 듣는 아들이 무섭거든요.”

용기 내어 친한 척하자 아버님이 웃었다. 여름과 나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도 못 드는데 아버님만 즐거워하셨다.

“뭐가 어때서 그래. 여름이한테 좋은 섹스 하라고 말한 건 난데. 섹스 전에 성병 검사 반드시 하라고 알려 준 사람이 나야. 아무튼, 은오 보약은 안 짓는 거로. 대신 맛있는 거 사 주마. 다음에 밖에서 보자.”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아버님이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거실을 벗어났다. 더 있다가 가도 된다고 중얼거리는 딸에게 보약이나 시간 맞춰 꼬박꼬박 잘 챙겨 먹으라고 하셨다.

“더 있다가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넌 거짓말할 때 티 난다고 몇 번을 말하니. 은오야, 다음에 보자.”

“예, 저도 놀, 다 가겠습니다.”

내 말에 아버님이 또 웃으셨다.

“인마, 너 아까 놀러 왔다고 할 때부터 들켰어. 너도 티 나.”

나와 여름을 번갈아 보며 웃던 아버님이 등을 돌렸다. 문이 닫혔다. 여름과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매달리는 무게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여름을 안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버님, 정말 좋은 분이셔.”

“그렇다니까.”

“뵙고 나니 더 궁금해진다. 아버님 같은 남자가 이상형인데, 왜 날 선택한 거야?”

“…뭐야. 너 왜 내 안목을 은근슬쩍 깎아내리지? 네가 뭔데? 이거 완전 웃기는 애인이네? 그 못지않아, 우리 은오. 너 함부로 얘기하지 마. 알았어?”

픽 웃었다. 한여름 진짜 귀엽고 사랑스러워. 뺨을 감싸고 입술을 내렸다. 내게 안겨 까르르 웃던 여름이 갑자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속삭였다.

“우리 아까 하던 거, 마저 할까?”

그리고 아래가 맞닿게 자세를 바꿔 앉으며 슬슬 허리를 움직였다. 아찔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내 손에 한 줌밖에 안 되는 허리를 붙잡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오늘은 하면 안 될 것 같아.”

“갑자기, 왜?”

“어떻게 해. 아버님 다녀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아빠가 좋은 섹스 하랬잖아. 서로 즐거워야 한댔어. 뭐 해, 나 즐거워지고 싶거든?”

“오늘은 안 돼.”

내 단호한 태도에 어이가 없는지 여름이 콧방귀를 뀌었다.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나를 훑어보는데 그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긴장하는 순간, 스웨터를 훌렁 벗어 던졌다. 예쁜 가슴이 바로 드러나 목울대가 눈치 없이 일렁였다.

“이래도?”

“…….”

내 위에서 폴짝 내려와선 바지까지 내렸다. 팬티만 입고 가슴은 한 팔로 가리고 선 여름이 윙크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여름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벌떡 일어섰다.

“너, 이리 와.”

내가 일어서자마자 웃으며 도망치는 여름을 쫓아갔다. 방문을 닫았다. 초저녁부터 달려든 대가를 여름은 목이 쉬도록 치러야 했다.

* * *

이른 새벽, 커피 향에 눈을 떴다. 시계는 6시가 조금 못 된 시각을 가리켰다. 무드 등만 켜진 방 안,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은오와 눈이 마주쳤다.

“늦잠 좀 자자니까…….”

“안 돼.”

“왜?”

“할 일이 많아서.”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졌다. 오늘 데이트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기다리던 영화가 개봉한 날인데. 같이 보기로 해 놓고서? 따지고 싶지만, 어려운 일로 정신없이 불려 다니는 애인에게 할 소리는 아니라 입을 꾹 다물었다.

“여름아.”

“응?”

“시간 있어?”

“…뭐야. 나 오늘 쉬는 날인 거 알잖아.”

“그래서 시간 있다고, 없다고.”

“있다고. 너, 설마 나 놀리게? 시간 아껴 써라, 알차게 써라, 그러려고?”

내 말에 은오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애인의 웃는 얼굴을 보니 황홀해서 내 입꼬리도 올라갔다. 그래, 놀려라. 네가 웃기만 한다면 나는 우스워져도 되니까.

“시간 있으면.”

“응.”

“결혼하자.”

순식간에 입꼬리가 내려왔다. 입이 벌어졌다. 은오는 내 귓가에 입술을 내리고 속삭였다. 우리가 없는 게 없더라. 사랑도 하고, 이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도 알아. 집도 있고, 돈도 있어. 미래 계획도 완벽하진 않지만 대충 세웠지. 아버님은 축복해 주시고, 내 집안은 내가 바란 대로 다 부서지고 있어. 근데 넌 좀 바쁘잖아.

“그래서, 네 시간만 된다면.”

“해, 해, 해!”

“…….”

“없어도 낸다, 시간.”

두 팔을 뻗어 애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희희 웃는 나를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에 마구 입술을 붙였다.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얼굴로 사랑을 말했다. 각자 지지 않으려는 순간이었다. 내 사랑이 훨씬 더 크다고 소리칠 때만큼은 양보가 없었다.

“사랑해, 여름아.”

기어코 나를 이겨 먹은 애인이 만족스러워하며 쐐기를 박았다. 나의 여름. 나의 여름아. 네가 오고 내 계절은 온통 여름이다. 간지럽게 고백하는 애인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생기 있는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여름날의 초록처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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