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둘. 나의 여름
❖ 01 ❖
집이 낡아 고쳐 쓸 요량으로 사람을 불렀다. 그들에게 일을 맡겼으나 할 일이 없는 나는 다른 곳을 수리했다. 곁눈질로 몇 번,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가 알려 달라고 한 후 조금씩 고치기 시작했다.
“양, 어린 사장. 내려옵서.”
못을 입에 물고 망치질하던 내게 나이가 많은 인부가 말을 걸었다.
“혼자 다 할 거믄 왜 불러서? 일당 받아 가지 말랜 시위햄수꽈?”
하지 말라는 뜻이라 조용히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몇 칸 남지 않은 곳에서 뛰어내리자 기다렸단 듯 망치를 빼앗아 간다.
“확실히 골읍써. 애인 이서, 어서? 내 딸, 한 번만 만나 보랜 몇 번을.”
“그럼 저 동네 한 바퀴만 돌고 오겠습니다.”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돌아섰다.
“밥벌이 못 할 거 같으민, 신입으로 받아 주쿠다.”
마당으로 나오자 땀 흘리며 서 있는 인부들이 영양가 없는 농담을 건넸다.
“손재주 좋앙 어깨너머로 보고 다 따라 햄서.”
“삼춘, 내가 뭐랬냐고. 여기 형님이 일 잘한댄 안 골았수가. 형님, 생각해 봤어요? 육지에서는 몰라도, 섬에선 우리 가게가 제일 잘나갑니다.”
내 또래인 인부가 내게 영입을 시도했고,
“뭔 말? 형님이라니? 너가 동생이냐?”
“삼춘 영 할꺼꽈? 나신디 뭐 악감정 이서? 저 얼굴은 테레비에 나올 상이우다. 데뷔에 뜻이 없엉 안 나온 것 같은디, 그런 사람하고 평범한 나하고 비교하민 내 가슴, 대패질당한 것 같아지는디?”
그들의 농담에 실소하며 마당을 벗어났다. 정처 없이 걷고 걸어 바닷가에 도착했다. 바닷가 근처에 낡은 건물 하나가 부식되어 가는 걸 의미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문구사 하나 있었으면 좋겐!”
어린애들의 조잘대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간 모양처럼 세 아이의 키가 달랐다. 세 아이는 아직 찬 기운이 남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연을 주섬주섬 까고 있었다.
“맞아. 우리 맨날 버스 타고 저-어기까지 갔당 와야 하네.”
저건 좀 귀엽네.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네 살, 다섯 살은 될까. 인간을 싫어했지만, 정확히는 그들을 덮고 있는 내 눈의 환각이 싫은 거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만큼은 달랐다. 작은 사람에겐 마음이 한없이 끌려갔다. 징그럽거나 섬뜩하지도 않았고 그저 가여웠다. …형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거 하나 살라구 버스 타고 왔당, 갔당, 아주 지겨워!”
작은 두 손이 연실을 잡고 있었다. 쟤는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말을 잘하는 걸 보니 다섯 살쯤 된 것 같았다. 누군가와 닮았다고도 생각했다. 여덟 살의 내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 여자아이.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 타인이 그것도 또래 친구가 생긴 일은 처음이라 기억에 남는다. 모든 게 낯설어 경계하던 나에게 다가와 같이 앉을래? 묻고, 또랑또랑하게 자신은 나와 앉고 싶다고 외치던 그런 여자아이가 있었다.
“거기라도 있는 게 어디야! 거기도 없어지면 우리는 진짜 슬퍼지지!”
“그건 맞아!”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걜 좀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애도 지금 저 아이처럼 작고 사랑스러웠으니까. 엄마가 아닌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고, 날 좋아했고, 밝았고, 같이 있으면 재밌었다.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겠지.
“학교 앞에 문구사 없어?”
“뭐야, 깜짝이야!”
깜짝 놀란 아이가 연실을 감은 플라스틱을 홱 던져 버렸다. 나를 올려다보며 씩씩거렸다.
…여름이. 여름이같이 생겼어, 너. 아이에게 실없는 소릴 할 뻔했지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코 주위를 가리켰다. 콧물이 나왔다는 뜻을 알았는지 왼팔을 들어 코 주위를 박박 닦아 냈다. 그리고 빽 소리쳤다.
“아저씨 뭐예여! 갑자기 말을 걸면 놀라자나!”
“미안.”
“김지율! 조용히 해!”
“아, 왜!”
셋 중에 제일 큰 아이가 동생을 만류했으나 그 아인 팔을 파닥거리며 입을 틀어막는 손짓을 완강히 거부했다.
“와, 잘생겼어! 아저씨 연예인이에요?”
남자아이가 물었다. 나는 눈을 빛내며 서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지어 줄까.”
“연예인을요?”
“…아니, 문구사.”
“문구사를요?”
“아저씨! 나쁜 사람이지! 이제 따라오라고 할 거지! 울 엄마가, 좋은 거 주켄하믄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놔 봐! 하고 언니의 손길에 파닥거리면서도 내게 달려들지 못해 안달 난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꼭 나쁜 놈이랜 울 할미가 그래서!”
웃음이 샜다.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아. 뭘 주면서 따라오라거나,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인데 너희더러 도와 달라거나 하면, 도망가야 해.”
“그래서, 아저씨 뭐 하는 사람인데! 착한 사람이야?”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
“뭐야……. 뭐라는 거야.”
“문구사 지어 줄 테니까, 자주 와 줘. 그거면 우리 서로 좋은 거니까.”
아이들이 기다렸단 듯 손가락을 내밀었다. 세 개의 작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걸었다.
아이들과 만나고 돌아온 나는 할아버지의 먼지 낀 잡화점 불을 켰다. 나이 지긋한 인부 한 분이 들어와 입을 뗐다.
“어린 사장, 여기 어떵할지 결정했구나이?”
“예.”
그 옛날 허허벌판인 동네에서 가장 재밌는 장소였다는 할아버지의 잡화점을 둘러보았다. 왜 겨슬 점빵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후계자라 자기 이름이 들어갔다고 자랑하던 엄마. 그 옛 기억에 픽, 웃음이 샜다.
그리고 따라오는 다른 기억 하나. 처음 사귄 친구가 좋아서 어디든 가고 싶었던 어린 나는, 그날 손잡고 걷는 내내 웃고 또 웃었다. 함께 문방구 앞에서 게임을 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날을 자주 떠올렸겠지.
“뭐 할 건디?”
“문구사요.”
“문구사?”
“예.”
“이야, 잘 생각해서. 이 동네만 문방구가 딱 없주게. 생기기만 하믄, 애들이 좋아하켜.”
이 집에서 창문을 열면 멀리 바다가 보였다. 한 폭의 그림 같던, 사진 같던 장면을 보면서 엄마는 할머니가 얼마나 멋진 여자인지 중얼거렸다. 저 안에서 숨을 길게 참고, 매일 목숨을 걸어 소박한 해산물을 건져 오는 사람. 그걸 먹고 자라 은오의 엄마가 되었다는 그 꿈결 같은 목소리를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온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 과자를 팔고, 비누도 팔고, 바늘도 팔았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순간에 스윽, 내밀었지.’
그런 걸 먹고 자라 은오의 엄마가 되었다고, 구연동화처럼 속삭이던 음성을 생각했다.
자식 입에 무언가를 넣어 주려고 지루하고 고단한 노동을 견디며 살던 이들을 생각했다. 나는 그런 걸 먹고 자랐으니 단단해질 자격이 있다. 단단한 사람들이 살다 간 이곳,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 보리라.
그렇게 바다가 보이는 문구사를 만들었다.
❖ 02 ❖
내 생활은 일정한 패턴으로 돌아갔다. 아침이 오면 아침을, 점심이 오면 점심을, 저녁이 오면 저녁을 차려 먹었다. 내 몫으로 먹기엔 많은 양을 차렸다. 아이들을 앉혀 놓고 같이 먹었다. 가끔은 학원을 빼먹은 아이를 데리러 온 보호자도 내가 차린 밥을 먹었다.
찾아온 어른마다 이곳이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는 얘기를 늘어놓곤 하셨다. 혹시나 싫어하시는 걸까, 긴장했지만 운동장 아니면, 이곳이니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안도했다.
“요새 영화 촬영한다고 동네 시끄럽든디, 문방구는 끄떡도 안 한다매?”
“예.”
“그래, 잘 생각했어. 문방구 빌려주고 나믄, 애들이 또 딴 동네 피시방이나 가지.”
동네가 시끄럽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일전에는 모래사장 하나를 다 막아 놓고 촬영했고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이 촬영에 방해된다며 스태프 하나가 혼을 내는 바람에 내가 가서 허가받고 하는 거냐고 따진 일이 있었다. 그 일로 그들과 얼굴을 붉혔는데, 뻔뻔하게 장소 섭외 요청으로 왔다며 문구사와 집까지 빌려 달라고 청해 콧방귀와 무시로 일관했다. 안 되면 문방구에서 녹음만 하겠다고 애걸을 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소리가 좋다고, 애들이 마당에서 뛰노는 소리가 좋다고.
어이가 없었다. 바다에서 촬영할 땐 시끄럽다고 해 놓고. 화가 나서 꺼지라는 뜻에 가까운 문장만 늘어놓았더니 포기하고 물러났다.
❖ 03 ❖
아니, 물러난 줄 알았다. 기가 막혔다. 곱게 물러난 줄 알았더니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을 보냈다.
거부 못 할 것을, 알고 보낸 건가?
“삼촌!”
“삼촌의 친구가 왔는데! 여자 친구야?”
요리하던 나는 이상한 말에 골몰하며 주방을 벗어났다. 내게 그런 사람은 없다. 아주 잠시나마 김 비서를, 그러니까 그가 비서가 되기 전에 친구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 있다. 어머니의 사람인 걸 알기 전까지는.
누가 온 걸까, 잘못 찾아온 거겠지, 별채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그런 것만 골몰했다.
“친구?”
지율이 내 다리를 붙잡고 헤실헤실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보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목구멍이 좁아져 숨쉬기 힘든 기분이었다. …네가 있었구나. 그래, 네가 있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모른 척했다.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밀어내는 소릴 지껄였다. 습관 같은 거였다. 지금은 날 지켜보는 눈도, 그래서 이 사람이 뒷조사당할 일도 없는데.
무엇보다 불규칙하게 날뛰는 심장이 어색하고 이상해 서둘러 도망가고 싶었다. 얼른 들어가 단팥죽이나 마저 끓이고 싶었다. 하지만 기어이 시선을 끌어당겨서 홀린 듯 바라보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 맑은 눈동자.
…어릴 때 얼굴하고 변한 게 없네.
넋 놓고 있다가 칼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반가워서 정신을 못 차리나. 정신 차리자. 그래 봤자 한낱 인간이다. 봐,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잖아. 창백하고, 서늘한 기운이 묻어나잖아. 차갑게 일갈하고 돌아섰다. 그대로 도망치려던 때, 꼬르륵, 귀여운 소리가 내 발목을 잡았다.
“밥 먹고 가.”
나는 들뜨는 기분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며 말했다.
❖ 04 ❖
이상하다. 밤에도 사람이 있다는 게. 나만 남은 집에 사람 하나가 더 들어 있다는 게.
잠이 오지 않았다.
❖ 05 ❖
분명히 뭔가 이상하다.
❖ 06 ❖
넌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
집요하게 나를 보기도 해.
난 그런 눈에 질색해. 숨 막혀 해.
너도 수십 년을 나처럼 살면 내가 왜 싫어하는지 이해할 거다.
이 말을 못 해서 가슴이 빠듯했다. 실은 싫지 않아서 무서웠다. 눈이 너무 예뻐. 살아 있는 사람의 눈 같아.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은 맞지.
…잠깐,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 같다고 했나?
❖ 07 ❖
너 왜…….
너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다른 데 좀 봐라, 제발.
아니다. 쟤는 잘못이 없다. 이건 다 착각하는 내 잘못이다.
❖ 08 ❖
나를 어지럽히는 이상한 감각과 감정에 시도 때도 없이 골몰했다. 자주 쏟아지는 시선이 싫지 않은 것은 반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뿐이라고. 그게 아니면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여름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아이만 응시했다. 누구나 저 나이엔 좋아 보이는 물건을 가지고 싶기 마련이었다. 한 번의 실수가 반복된다면 문제가 될 테지만, 아이는 누가 봐도 어쩌다 저지른 실수 같았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괜한 참견을 한 건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그저 아이가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바라건대, 상처받지 말라고.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생각은 깔끔히 밀어내고 아이가 그리는 그림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서은오.”
어쩔 수 없이 긴장했다. 나를 부르는 음성에 온 신경이 쏠렸다. 억지로 딴생각해 보려고 해도 안 될 거라고 비웃듯 손바닥만 한 여름이 내 정수리로 폴짝 뛰어올랐다. 이상한 상상이었다. 머리를 짓밟더니 이마를 타고 내려와 내 눈앞까지 알짱대는, 제멋대로 쏘다니는 상상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공상은 처음이라 심장이 간지러웠다.
하지만 귀여웠다. 일부러 매섭게 뜬 눈이 힘없이 풀어지려고 했다.
“나랑 같이 앉자.”
그 말에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얼얼했다.
“나랑 다시 친구 해 주라.”
“…….”
“이번엔 절대로 너 혼자 안 보낼게.”
실없는 상상을 들킨 건 아닐까. 그딴 상상을 왜 하느냐고 비난하는 게 아닐까. 그만큼, 가슴이 제멋대로 요동칠 만큼 너무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등신 같은 나는 한여름이 어떤 마음으로 혼자 보내지 않겠다고 했는지도 모르고 철없이 가슴만 졸이고, 떨었다.
❖ 09 ❖
신경 쓰여 미치겠다. 대답 한번 안 했다고 저녁을 굶는다. 나는 초장부터 쟤한테 말려서 신경이 쓰이는 거라고 낯설고도 불안한 감정에 이유를 붙였다.
아이들을 먹이고, 치우고, 다시 한여름이 먹을 밥상을 차려 밥상보를 엎어 놓았다. 안채로 향했다. 단단히 각오하며 마당을 통과했다. 처음 볼 때부터 나를 뻣뻣하게 했지만, 이제 각오 없이 쟤를 마주하는 건 힘든 일이 됐다.
마루턱을 밟고 올라서자 열린 문으로 지율과 여름의 조잘대는 목소리가 빠져나왔다. 잠시 서서 그 정다운 소릴 들었다. 엿듣는 일이 양심에 찔렸으나, 그 순간만큼은 양심 없는 새끼가 돼도 상관없었다.
걸음을 옮겨 노크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뾰족했다. 삐친 듯 퉁명스러운 태도에 목구멍이 따가웠다. 애들을 바래다주고 올 동안 밥 좀 먹으라고, 다녀와 얘기 좀 하자니까 갑자기 허둥대며 따라왔다.
웃기는 일이었다. 내가 빨리 걸으면 뛰듯이 쫓고, 내가 느리게 걸으면 편한 얼굴로 나란히 걷는 발걸음이 웃겼다. 동시에 입 안이 말라 곤란했다. 뭐 하는 거지. 얘, 지금.
애들이 돌아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함께 돌아갈 사람이 있다는 게 기분을 묘하게 했다. 못 견디고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왔는지 모르겠다고. 이만하면 오래 버텼다고 생각했다. 매번 속고 매번 실망했던 나는 혹시나, 한여름도 그 여자가 심은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다.
개에게 물리면 개를 조심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버려졌던 나는 네가 무섭다.
“내게 올 행운은 아직 무궁무진한데, 그 행운의 절반 정돈 너 주려고 마음먹었다고. 그러니까, 탐나면 붙어.”
멋없이 떨며 경계하는 나와 달리 여름은 빛나는 소리를 돌려주었다. 빛나는 얼굴로 나를 당기고 있어 꼼짝없이 끌려가면서도 열심히 발버둥 쳤다. 가벼운 거라면 나가떨어져라, 그 여자의 사람이라면 나가떨어져라, 염불을 외웠다.
이상하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너 같은 사람이 왜 나를? 너 같은 사람이 왜 내게 와 손을 내밀어?
❖ 10 ❖
미간을 좁혔다. 밥 먹고 설거지하고 싶다고 조르는 꼴이, 이렇게까지 예쁠 필요가 있나. 여자들은 다 예쁜가. …아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진짜 나사 하나 빠진 놈처럼.
아무리 예쁜 사람이라고 해도 내겐 예쁜 시체였다. 그런데 왜 한여름은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싶을 정도로 생생해 보이지. 이를 악물고 곁에 서서 그릇을 씻었다. 설거지를 대충 하는 것 같아 제대로 하라고 말했더니 허무맹랑한 소리를 던졌다. 그게 말장난이라는 것도 모르고, 친해지고 싶어서 자꾸 장난치는 건 줄도 모르고 나는 그저 얘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왜 이러는 건가, 멋없는 생각만 해 댔다.
설거지를 마치고 아이들이 숨바꼭질하자고 달려들었다. 한 번도 내게 놀이를 권한 적은 없었다. 놀이에 참여하지 않을 완벽한 ‘어른’으로 보였기 때문이겠지. 어딜 같이 가 달라거나, 위험을 느꼈다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혹은 배가 고플 때 찾아왔지 놀이에 참여하라고 한 일은 없었다.
사소한 변화는 한여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여름은 아이들과 친구처럼 어울려 주었으니까. 어른으로서 어떤 판단을 할 때도 선택의 여지를 주며 맞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나는 걔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른과 친구 사이를 넘나들면서도 아이들을 존중하는 모습이.
시작된 숨바꼭질에 한여름은 최선을 다했다. 물 부엌문 뒤, 화장실 문 뒤, 거실 탁상 아래에 몸을 최대한 납작하게 구겨 가며 숨은 것을 봤을 땐 웃음이 샜다. 나는 시시하게 창고로 쓰는 방으로 들어가 아무 생각 없이 장롱 문을 열었다. 여러 번 반복되는 놀이가 끝나 갈 때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갔다.
더는 숨을 곳도 없어서 이번 판이 마지막이라는 종알거림을 들었을 때도 나는 다시 장롱에 들어앉았다. 한숨이 나왔다. 어둠에 익숙해졌다고 서늘한 감각까지 익숙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자의로 만든 습관이 아니더라도 습관은 습관이군. 몸에 밴 어둠에 자조했다.
이렇게 오래 어두운 걸 보니 이게 내 인생이구나.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너.”
믿기지 않았다. 내 인생은 영원히 어두울 거라고 점칠 때, 문이 열렸다. 불시에 파고든 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환한 빛은 아니지만 옅은 빛을 등지고 선 한여름이 보였다. 그녀가 내 관 속에 발을 들였다.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에 핏기가 가셨다. 황급히 팔을 뻗어 막았다.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상했다. 온 감각이 뒤틀리는 희한한 착각이 들었다.
장난처럼, 한여름은 내 옆에 앉았다. 심장이 뛰었다. 열이 올랐다. 숨이 막혔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속이 울렁거렸다. 손에 진땀이 차올랐다. 자꾸 살결이 닿았다. 닿은 곳마다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만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처지 바꿔서 생각해. 내가 네 허락도 없이 자꾸 만지면 기분 어떨 거 같은데.”
내 말에 한여름의 눈이 커졌다. 바로 사과해 오며 어찌할 줄 모르는 반응에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계면쩍어하며 나를 등졌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끝에 한여름이 서 있는 상상을 했다. 울고 싶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싫어서, 떨어지라고 한 게 아니라고, 나와 붙으면 재수 없어지니까 내가 재수 없기를 택한 거라고.
하지만 그 어떤 말도 못 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재수 없게 군다는 말 같지도 않은 변명만 해 댔다. 나의 변명을 가만히 듣던 한여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고 화를 내도 묵묵히 들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더한 소릴 해도 견디겠다고.
그런데,
“너야말로 바르작거리지 마. 목소리도 좀 낮추고. 들키면 손잡을 줄 알아.”
술래가 온 것 같다며 나를 쉽게 용서했다. 해맑게 용서해 준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얼른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한참이나 나를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져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그녀가 나를 보지 않은 척했다.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나를 휘감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
“…….”
한여름이 조심스럽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칠 줄 몰랐는지 크게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정말 모르겠다. 너와 내가 뭘 하는 건지. 단지 하나만은 알 것 같았다. 너하고 있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어린 술래가 영원히 우리를 찾지 못하길 빌었다.
나가지 마. 나랑 있어 줘. 목숨이라도 줄게.
오늘 나랑 따뜻하게 있어 준다면, 내일 차갑게 죽어도 좋아.
한여름이 알면 끔찍하게 여길 생각을 멋대로 했다. 하지만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생각도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 11 ❖
한여름이 나를 피한다. 어쩌면 내 끔찍한 생각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잘된 일이다.
❖ 12 ❖
작은 발이 땅을 밟고 오는 소리를 놓칠까 봐 문을 열어 놓는다.
“삼촌! 주방이 얼음장이잖아!”
거실과 주방 사이에 달린 미닫이 덧문을 열고 나온 지율이 식탁에 앉은 내 다리를 안으며 다그친다.
“이리 와! 우리랑 티브이 보자!”
“콩나물 다듬고. 들어가 있어, 춥다.”
지율의 얼굴이 빨갰다. 작은 몸은 뜨끈했다. 거실은 난로를 켜 놓아 따뜻했고 아이는 훈기 도는 공간에서 뛰어논 덕분에 살아 있는 난로처럼 뜨거웠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겨 주며 거실을 턱짓했다.
“삼촌은 가끔 희한해!”
어깨를 으쓱한 아이는 열린 별채 문과 나를 번갈아 응시하다가 거실로 뛰어 들어가며 덧문을 닫았다.
겨울바람이 집 안을 파고드는 것은 견딜 만했다. 손이 곱아드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종일 기다린 사람이 온 줄도 모르는 것보다는. 안채 불이 환해지는 걸 보고 가슴이 덜컥거리는 것보다야 살갗이 차가워지는 게 나았다.
❖ 13 ❖
실은 기분이 좋지 않다. 꼴 보기 싫다는 듯 서둘러 돌아서려는 행동을 목격하면 어색해지는 공기도 못내 미워진다. 어쩐지 애가 탔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속만 태우면서도 멀쩡한 척 하루를 보냈다. 속은 썩어 가도 괜찮은 척 가면을 쓰는 건 내가 가장 잘해 온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서는 등을 보면 절벽 앞에 선 기분이 되어 아찔했다. 내가 더 잘할게, 애원하고 싶어진다. 빌어먹게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싶어진다. 빌고 싶은 마음에 어이가 없다. 뭘 잘하고 싶은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비굴하게 비는 게 네 천성이야? 거울 속 나를 보며 다그친다.
❖ 14 ❖
나는 왜 한여름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왜 걔 생각을 막을 수가 없는 건지.
음식을 핑계로 네 방을 기웃거리는 내가 낯설고 이상했다. 알면서도 나는 또 한여름의 방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음성에 마른침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밤바다를 응시하며 서 있는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작은 어깨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 주고 싶었다. 실없는 얘기도 늘어놓고 싶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이 방은 원래 내 방이었어. 네가 넋 놓고 보는 바다, 그걸 볼 수 있는 이 자리를 나도 좋아했어.
창 앞에 나란히 서서 바다를 보는 척하지만 사실 바다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뺨을 감싸고 싶어져 이를 악물었다. 황급히 음식만 안겨 주고 돌아섰다. 안채를 나오며 심호흡했다.
내가 이상하겠지.
안다. 나도 내가 이상하니까.
❖ 15 ❖
“진짜 애인 아니냐?”
“아니니까, 혹시라도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아닌데 왜 웃어시냐? 아까 서울 아가씨가 네 이름 부르면서 팔 흔드니까, 휙 돌아서면서 웃었잖아? 요새 말로 밀-당, 그거냐?”
“그런 말은 어디서 들으셨어요.”
“아, 사내새끼가 뭔 간을 봐? 좋으면 야, 나 너 좋다! 잘 만나 보자! 말을 해야지, 앞에서는 뻣뻣하게 굴고 돌아서서 눈 접엉 웃으믄 아가씨가 뭐 알아주냐?”
“하지 마세요.”
한여름이 나오는 걸 보고 서둘러 말했다. 왕래가 잦은 어른들이 고기를 들고 찾아오셨다. 고기 파티 하자는 말에 그릴을 꺼내 고기를 구웠다. 넌 왜 안 먹느냐는 말에 나중에 먹겠다며 식사를 미뤘다. 올 때가 됐는데. 좋아할 거 같은데. 모르는 사람 틈바구니에서 혼자 먹으면 잘 못 먹을까 봐 기다렸다.
한여름이 나오자 부 씨 아저씨는 바로 쓸데없는 소릴 했고, 지율의 할머니가 나 대신 부 씨 아저씨를 혼내며 여름에게 질문하셨다. 쟤가 저 말을 다 알아들을까, 나도 못 알아듣는 사투리가 있는데. 잠시 머뭇대는 사이 해맑은 얼굴로 대답한다.
“…얘는 제 타입이 아니라서요.”
웃음이 샜다. 그리고 초조해진다. 어떤 게 네 타입인데. 남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나를 비난한다. 그런 게 왜 궁금한 거냐고.
한여름은 사람 헷갈리게 하는 말을 자주 했다. 억울했다. 자기, 여보라고 할 수 없지 않으냐는 장난에 사람 심장 썰려 나가는 것도 모르고 너는 태평하게 돌을 던지지.
아사 직전이라며 초췌한 얼굴로 매달리는 게 귀엽고도 안쓰러워서 서둘러 고기를 구웠다. 달려온 지율의 코를 닦아 주는데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한여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너 사실 유부남이지? 손끝 하나 닿지 말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임자 있으니까 조심하는 거 아니야?”
“재밌냐?”
“네가 애를 되게 좋아하잖아. 특히 지율이를.”
“여기서 제일 작으니까.”
“아, 나도 좀 작을걸. 난 커서 하대하니?”
내가 너 하대했다고? 믿기지 않아 홱 돌아섰다. 난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저 도망가기만 했는데 기분 나빴나. 등신. 도망가지 말걸. 자책하며 박박, 설거지했다. 답답할 땐 설거지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랬는데, 여름이가 울면서 들어왔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우는 얼굴에 알았다.
아, 나 얘를. 얘를. 그러니까 너를.
❖ 16 ❖
어떻게 알았는지 골몰했으나 고민은 짧았다. 김 비서가 자기가 말했다고 실토했으니까. 난 그가 싫었다. 그는 대를 이어 그 여자의 사람이 된 자다. 김 비서는 십수 년 전 이곳에서 할머니의 애원에도 나를 끌고 가려던 남자의 아들이었다. 나는 그가 그의 아들인 줄도 모르고 도망치려던 계획을 알린 적 있었다. 친구, 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디든 그 여자가 날 못 찾을 곳은 없는데, 너무도 숨이 막혀 어리석게 도망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어차피 잡히겠지만, 딱 한 번만 보고 싶어서. 며칠만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어서.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면 공항에서 그녀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내 할머니를 불러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에게 내가 있는 곳을 전해 줄 사람이 계속 없었으니까. 그의 존재를 이상하다고 여겨야 했다. 그와 어울리는 걸 그녀가 왜 내버려 두는지, 의심해야 했다.
나는 공항에서 잡혔다. 겁에 질린 얼굴로, 내게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선 그에게 물었다. 내 할머니에게 말을 전하긴 했느냐고. 고개를 젓는 모습에 허탈하면서도 안도했다.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릴 사람이니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죽고 싶어질 테니까.
그날 나는 일주일간 가둬졌다. 밥도, 물도 먹을 수 없었다. 내 뺨을 쓸어내리며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 거라고 속삭이는 그녀의 처연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웃기만 했다. 스물다섯이 나쁜 짓을 했다고 어머니께 벌을 받다니. 우스웠다. 나의 뿌리를 그리워하는 게, 이경희가 설계한 삶을 벗어나려 하는 게 나쁜 짓으로 불리는 것이. 그 생각을 끝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내게 다가온 사람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뭐라고 하셨어요.”
“상무님.”
“말해. 걔한테 뭐라고 했냐고.”
“시체를 기꺼워하며 만질 수 있냐고 했습니다.”
안채를 응시하던 나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가 부득 갈렸다. 소름이 돋았다. 개새끼가. 혐오감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해.”
“상무님.”
“네가 뭔데 걔한테 그런 소릴 해!”
“은오야.”
“입 닥쳐. 닥치고 대답해. 한여름, 여기 있다고 보고할 거야?”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와 똑 닮은 남자가 내게 찾아와 애원한 일이 있다. 그는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 어릴 것 같으냐고, 서진을 먹는 날에 당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냐고 협박했던 말을. 아들을 내게 붙인 것은 이경희의 계획이 맞지만, 제 아들의 배신은 두려움에 비롯된 것이니 용서해 주면 안 되겠냐고. 아들은 후회하고 있다며 자신이 베풀었던 5분을 잊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슬퍼했다. 있는 자들의 패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몰래 나를 찾아와 매달렸다는 것은 나를 패악 부릴 사람으로 간주했다는 거니까.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건, 조금의 시간을 달라는 거였어요.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었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 내며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의 아들은 5년간 나쁘지 않은 친구였으니. 살갗이 닿는 일은 최대한 피해 주었고, 불쾌히 여기지도 않았으니까. 그만한 친구가 내게 또 있을 일은 이제 없을 테니.
“내가 보고하지 않아도 언젠가 아실 거야. 너희 어머니, 아니, 관장님.”
“대답이나 해.”
“안 해.”
대답을 듣자마자 등을 돌렸다. 마당을 가로지를 때 뒤에서 젖은 음성이 들려왔다.
“후회했다면, 믿을래?”
피식 웃음이 샜다.
“네가 끌려가고 나 여기 왔었어.”
무시하고 걷던 나는 벼락에 맞은 것처럼 멈춰 섰다.
“할머니, 동네 분위기, 네가 말했던 그대로더라. 정말 좋은.”
“어디서 거짓말을 해.”
성큼성큼 다가가 멱살을 쥐었다. 팔을 타고 오르는 벌레는 없었다. 여름이 오고 나는 치료에 더 매진했다. 장을 종일 보는 거냐고 묻는 여름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장을 보기 전 병원에 갔다. 이제 사람들에게 날벌레가 꼬이지 않는다. 상태가 아주 좋은 날엔 정말 생기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런 날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만 보았다. 그게 너무 좋아서, 건강한 사람들의 얼굴이 감격스러워서 바쁘게,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좋은 날을 만들어 준 이들 중 여름의 몫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며.
“은오야.”
타인과 가까이 있는데도 소름 끼치지 않는 게 신기하지만 울고 싶었다.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세상에 없는 사람을 입에 담으면서까지 거짓말을 하는지.
“거짓말 아니야.”
거짓이 아니라면 더 슬퍼진다. 나에겐 죽기보다 힘들었던 일이 남에겐 너무 쉬운 일이라 서러워진다. 많은 날 이 집을 다녀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할아버지의 잡화점 손님들, 할머니의 동료들, 할머니가 잡은 해산물을 사 가는 사람들, 엄마가 자주 들른 슈퍼와 정육점, 미용실 주인들이.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행복만 하라고 전해 달라셨어.”
“…웃기지 마. 거짓말하지 마. 증명할 사람 없다고.”
“사랑한다고. 보지 못해도 언제나 서은오를 위해 기도할 거라고, 사랑할 거라고. 할머니가 꼭 좀 전해 달라고 하셨어. 은오 엄마가 은오 만나면 꼭 해 주고 싶었던 말이라고. 그날 해 줬어야 하는데, 못 전했다고.”
이를 악물었다. 혀를 씹었다. 피 맛이 느껴졌다.
“너 돈 받고 판 거 아니래. 그 집에서 준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네게 주셨다고 하셨어.”
“뭐?”
그 여자는 내가 엄마를 그리워할 때마다 미련하다며 잊으라 했다. 어떤 부모는 비루하고 얍삽하다고. 돈 받고 널 판 여자라고, 네 몸값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되냐고 악착같이 많은 돈을 뜯어 갔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다시 찾아온 엄마가 통장과 서류를 내던지며 서은오 몸값이 이것밖에 안 되냐고 따지던 목소리를 장롱에 갇혀 들었다.
“너 정말 개자식이네. 네 말에 혹해 듣고 있던 내가 등신이지.”
실소하며 멱살을 놓았다. 더 볼 것도 없이 잘라 내겠다고 생각했다.
“거짓말 아니야. 네게 남기셨어. 한 푼도 안 쓰셨어. 조금 늘기까지 했어.”
“…….”
“네가 알기도 전에 관장님이 회수하신 거고. 원한다면 그때 찍어 놓은 사진이라도 보여 줄게. 아버지가, 찍으신 거야. 내가 위험할 때 널 찾아가 보여 주라고. 난 지금 위험하지 않지만, 내 배신의 사죄 값이라 치자.”
나는 사실 상관없었다. 엄마가 나를 돈 받고 팔았대도. 그걸 팔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를 홀로 낳고 키워 낸 값이라 생각하면, 그 큰 집에서 나에게 줄 재산을 다 드리고 싶었다. 장롱 속에서 나는 엄마가 많이 받아 갔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걸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맛있는 거 먹고, 추울 땐 따뜻하게 불 피우고, 여름엔 시원하게 에어컨을 샀으면 좋겠다고.
“할머니가 남긴 집은 받았잖아. 그건 믿어지고, 빼앗긴 건 안 믿겨?”
내가 믿기지 않아 넋 놓은 줄 아는지 애원하듯 소리친다.
“그걸 이제야 얘기하는 이유가 뭐야.”
“사실을 알면 네가 관장님 찾아가서 따질까 봐. 그럼 관장님이 내 아버지를 가만두셨겠어?”
일 년이 넘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녀의 말에 복종하며 살던 내가 이곳에 머문 지. 그는 이제 내 아버지의 사람이라며 나를 찾아왔다. 나와 상관도 없어진 회사 사정을 보고하고 아버지의 안부를 전하고 허락도 없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그를 무시했다.
“파일 보낼게.”
“필요 없어.”
울 것 같은 얼굴로 선 남자를 등지고 별채로 들어왔다. 눈앞이 흐렸지만 웃고 말았다. 부들거렸을 이경희를 상상하니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그래, 서겨슬은 비루하고 얍삽할 수가 없지. 얼마나 아름답고 고고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의 사랑을 먹고 자라 당신의 폭력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았다.
❖ 17 ❖
왜 그렇게까지 울까. 왜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슬퍼할까.
그날 나가자고 말한 사람이 자신이라서, 그날 나를 혼자 보낸 게 미안해서 엄청난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고 여름은 말했다. 기가 막혔다. 처음 온 날부터 쌈닭에 서은오 엄마라는 희한한 말을 하기는 했어도, 지독히 무거운 죄책을 안고 살아온 줄은 몰라서 손이 떨렸다. 네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네가 왜.
나의 아픔에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은 처음이라 마음이 복잡했다. 몰래 넣어 둔 음식이 줄지 않은 걸 볼 때면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가슴에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작고 여린 몸이 버티면 얼마나 버틸까.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전복죽이 조금 줄어든 걸 보고 안도했다. 그래도 평소 먹던 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다. 새 모이처럼 먹은 수준이라 놀러 온 아이들을 바래다주고 손을 씻은 후 멋대로 쳐들어갔다.
축축한 얼굴로 미안하다고 읊조리던 여름은 돈 때문에 온 거냐고, 끝까지 못난 소리만 뱉는 내 말에 표정을 바꾸었다. 겨울마다 내 생각을 했다는 말에 손끝이 저릿했다. 점점 횟수가 줄고 어쩌다 한 번 떠올렸다는 말에도 눈치 없이 가슴이 뛰었다. 내가 징그러웠다.
좋아하지 마, 등신아. 그동안 쟤가 아팠다는 거잖아. 미안해서 떠올린 거라잖아.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동자가 황홀하도록 예뻤다. 그 눈을 핥고 싶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지배했다. 등줄기가 써늘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미친 새끼 아니냐. 아, 나는 정말 사람도 아니다. 날 생각해 준 사람을 두고 무슨 더러운 생각을.
“배 안 고파?”
서둘러 묻는 내 말과 여름의 말이 맞물렸다. 너 왜 이렇게 예쁘게 컸냐는 물음에 잠시 아득했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누가 할 소리를. 아무리 생각해도 쟤가 내 생각을 훔쳐보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할 말을 훔쳐 자기의 말로 만들고, 내가 지나친 생각을 하면 비난하듯 입을 막는 소리를 뱉는 게 아닐까.
“나는 뭐, 항상 배고픈 줄 알아? 한참을 쳐다보다가 고작 묻는 말이 밥이야? 여름아, 잘 컸다, 아님, 잘 왔다, 네가 와서 기쁘다, 친하게 지내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차라리 그냥 평소처럼 입이나 다물고 있지!”
“그래서 아사 직전이라고, 아니라고.”
“내내 물만 마셨어. 내가 살아 있는 게 고맙지도 않니?”
그래, 고마워. 죽은 내 세상에 생생하게 산 모습으로 걸어와 줘서. 잘 자란 네가 이곳까지 와서 기쁘다. 너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근데 나는 네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까워지고 싶어.
그런 것 같아.
❖ 18 ❖
별 희한한 새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바다의 우울한 소리, 하지만 너무 우울하지만은 않은 소리를 녹음하라 시킨 놈의 낯짝 좀 보고 싶었다. 아무리 상상해 봐도 대체 어떤 소리인지 짐작이 안 되는 나는 미간을 좁히며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어려운 일임은 알았으나 한여름은 곱절로 어려운 일을 하며 사는 듯해 그녀가 조금 더 대단해 보였다.
“으으. 으윽.”
한파에 산책하러 가자는 말에 따라 나왔더니 역시 여름은 덜덜 떨며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신음만 뱉었다. 머릿속이 바빴다. 옷 벗어 주면 질색하겠지? 돌아가자고 하면 자존심 상해하겠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매서운 바람에도 나는 여름의 기분을 생각했다.
“우리 그냥 돌아갈래?”
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추위를 핑계로 끌어안으면, 뺨을 맞을까. 맞는 데엔 도가 터서 상관은 없는데. 열심히 할 말을 찾던 나는 정신 차리라는 듯 단호히 떨어진 음성에 뜨끔해 서둘러 몸을 돌렸다.
돌아와 차를 타고 나란히 앉아 뉴스를 봤다. 그동안 여름은 또 알 수 없는 말을 해 댔다. 마음의 빚만 없었다면 나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란 말에 숨이 뜨거워졌다. …그딴 것은 없다니까.
나는 수백 번 망설인 질문을 참지 못하고 던졌다.
“내가 남자로 보여?”
“정확하게 말하면, 매혹적인 남자로 보여.”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매혹적인 남자라니. 내가 아는 뜻이 맞을까.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다. 네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더러운 상상을 들킬 것만 같았다. 수긍하면 바로 알아챌 것 같아서.
“그럼 나 여기서 홀딱 벗어도 상관없겠네.”
숨이 턱 막혔다. 도망가자. 여기 더 있다가는 조를지도 모른다. 진심이냐고, 실은 나, 너랑 뒹굴고 싶다고. 소름이 돋았다. 토기가 느껴지는 동시에 낯선 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농담이었다며 하하, 웃는 얼굴에도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태연한 척하며 서둘러 주방으로 도망쳤다.
“은오야.”
여름이 예쁘게 웃었다. 아주 예쁘게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 게 가능할까. 만에 하나 그런 게 있다면, 그냥 네가 내 몫까지 가져가도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행복은 오래전에 떠난 거니까. 다시 안 와도 된다고.
❖ 19 ❖
정연아.
무슨 일이야, 이 밤에?
내가 이상해.
뭐? 왜?
…….
불안해? 아니면, 다른 증세가 나타났어?
…….
서은오! 당장 말 안 해?
…변태인 것 같아.
동생에게 말하기 창피한 일인데도 고백했다. 욕정을 느낀다고. 자꾸 만지고 싶다고. 이런 게 가능한 일이냐고. 내가 정말 미쳐 가는 게 아니냐고.
❖ 20 ❖
여름을 생각하며 뒤척였다. 한겨울에 한여름을 생각하는 게 좀 특별하게 느껴져 혼자 픽 웃기도 했다.
미소가 사그라든 때는 모두가 잠들어 마땅한 늦은 새벽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 시간에 문을 두드릴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무슨 뜻이야. 무슨 짓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하얗게 질려 이를 악물었다. 문을 열면 안 될 것 같았다. 열자마자 입 맞추고 싶어질 테니까. 좀 전에 정연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이상한 것 같다고 실토했다. 정연은 여러 가지를 묻더니 웃으며 말했다. 대체 누구와 있는 거냐고 대답하라며 흥분하던 그녀는 충격적인 한마디만 남기고 끊었다.
‘사랑, 등신아. 그 사람만 특별해 보이는 거, 그 사람이 죽은 것같이 보여도 상관없어지는 거.’
문을 열면 고백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너는 나를 괘씸하게 여기겠지. 날 싸늘하게 바라볼 시선이 무서워 도망친대도 언젠가는 말하게 되겠지.
두드리는 소리가 멎었다. 긴장하며 문을 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작은 몸이 보였다. 왜 그러냐고 다급하게 묻는데도 고개를 들지 못한다. 몸을 숙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만져 보았다.
“너, 너 괜찮은지…….”
불에 덴 듯 뜨거워 황급히 안아 들었다. 아픈 주제에 누굴 걱정해. 이부자리에 눕히며 떨어지려고 하자 목을 끌어안은 팔이 힘을 주어 물러나는 걸 막았다.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싫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어쩌자고.”
얼굴이 홧홧했다. 확 끌어안는 손짓에 몸이 얼어붙었다. 품 안으로 들어온 여름을 밀어내지 못했다. 틈 없이 닿아 오는 몸이 싫지 않았다. 내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아픈 사람을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가슴팍을 간지럽히는 이마, 머리칼, 등을 끌어안는 뜨거운 체온과 다리 사이로 들어온 가는 다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주먹을 꾹 쥐고 버텼다. 쓰다듬고 싶은 손짓을,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뜨거운 이마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한참이나 같은 자세로 여름을 안았다. 고롱고롱, 편한 잠을 자는지 귀여운 코골이에 웃음이 샜다. 슬그머니 물러나 앉았다. 아픈 것을 떠나서 여름은 남들처럼 내게 창백해 보였다. 다만 소름 돋지 않았다. 끔찍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쓰러운 마음만 배가 되어 사람을 조급하게 했다. 빨리 낫고 싶다, 한여름이 내뿜는 생기를 매 순간 확인하고 싶다. 조급하게 바라고 바랐다.
어지러운 마음으로 밤새 물수건을 가져와 열을 식혔다. 억지로 일으켜 약을 먹였다. 싫다고 누워 버리려는 걸 어르고 달래서. 손끝으로 만져지는 입술이 뜨거웠다.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핥아먹고 싶었다. 벌어진 입술에 혀를 넣어 맛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더러웠다. 동생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게 사랑이라면, 더욱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아닌가. 한여름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내가 자길 두고 온갖 상상을 다 한다는 걸 알면 날 혐오할 텐데.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이 방을 나가긴 싫어서 병간호를 핑계로 간헐적으로 훔쳐보았다. 일어난 여름이 내게 물었다. 자신을 만지면 차갑냐고. 그럴 리가. 차갑게 보이기만 해. 차갑지 않은 걸 알면서도 너를 뜨겁게 하고 싶어져. 뜨겁게 안고 싶어져.
여름은 내게 갚겠다고 말했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일이고 뭐고 뒷전으로 두고 달려오겠다고. 마음껏 앓기만 하라고. 밤새 간호하겠다고. 이런 말에 면역이 없는 나는 어찌할 줄 몰라 또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일단 번호 좀 줘 봐.”
귀여운 말에 웃음이 나왔다. 무거운 내게 적당히 가벼운 너. 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여름은 정말 살 만해졌는지 죽을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죽을 식히느라 후후, 바람을 불어넣는다. 동그랗게 말린 입술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 21 ❖
한파 덕에 가게 문을 닫고 여름과 시간을 보냈다. 고립된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영원히 여름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녀가 알면 끔찍이 여길 생각을 또 하고 말았다.
영화를 봤다. 여름은 모든 소리를 귀담아듣는다. 나는 여름의 세상이 너무 시끄럽지 않길 바란다. 피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가 끝나고 여름은 과거 얘기를 꺼냈다. 여름의 해묵은 감정. 죄책의 시발점. 그걸 없앨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잘못은 없다고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손잡고 싶은 흑심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나, 악수 대신 포옹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품으로 들어온 여름을 다리 위에 앉히고 싶었다. 목덜미에 코끝이 비벼지고, 뜨거운 숨결이 닿을 땐 끔찍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맨정신의 한여름을 껴안는 일은 불행을 곱씹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황홀했으니까. 더 황홀해지고 싶어져 심장이 뛰어 댔으니까. 모든 소리를 귀담아듣는 네가 내 심장 소리마저 들어 버릴까 봐.
❖ 22 ❖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나는 그냥 좀 쉬고 싶어서 왔다는 대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면 도망가고 싶어질 테니까. 나 따위 오래 보고 싶지 않아질 테니까.
잠든 여름의 옆에 누웠다. 천장을 응시한 채 여름의 숨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고도 들었다. 듣기 좋은 노래 같아 떠날 수 없었다. 죽기 전 들을 수 있는 한 곡의 노래가 있다면 나는 네 숨소리를, 네가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틀어 달라고 할 거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숨소리를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 여자가 나왔다.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속삭이는 모습에 좌절했다. 한숨을 내쉬며 받아들이려던 찰나, 하늘이 무너졌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여자의 목소리가 늘어지고 늘어지다가 끊겼다.
지독한 꿈이 깨졌다. 미간을 문지르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괜찮다고 속삭이는 중얼거림과 내 얼굴을 만지는 손길에 숨을 참았다.
여름이 서둘러 별채에서 나갔다. 지독한 적막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눈을 떴다.
❖ 23 ❖
이른 아침 마당을 벗어나는 등을 보며 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와 달라고 말했다. 정연은 한숨 끝에 웃었다.
-내가 얘기할 땐 못 들은 척하더니 갑자기 왜?
“…고백하고 싶어.”
-뭐? 고백?
“…….”
-와, 어이없네. 서은오, 고작 고백 때문이면 그냥 말을 해. 좋아한다고. 난 또 뭐 만나는 여자는 되는 줄 알았지. 뭐 만나지도 않는데, 집안을 풍비박산 내겠대?
“내 상황 해결되기 전엔 말 못 해.”
-그래, 뭐, 나라도 지독한 시어머니 있다면 도망가고 싶겠다. 자식들도 이판사판 도망간 마당에.
“…….”
-그래서, 이제 좀 진심으로 살고 싶어졌어?
“그래.”
-사랑이 널 살게 하는구나.
먹구름이 걷힌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와 따뜻한 햇볕, 그리고 뛰는 가슴. 이날 나는 여름의 손을 잡았다. 같잖은 수작이라고 헛소리하면서, 사실 수작 걸고 싶은 마음은 내가 훨씬 전에 품은 거라고 속으로 고백하면서.
놀라 뿌리친다면 더 천천히 다가가겠다고 다짐했으나 작고 부드러운 손이 깍지를 껴 왔다. 입 안을 씹었다. 손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어서.
❖ 24 ❖
여름은 참을성이 없다. 서두르라는 듯, 달려오라는 듯 나를 다그쳤다. 여름을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죄책감을 다 지우지 못했다면 이것 보라고, 나는 어떤 숲에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아무렇지 않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여름에게 고백 대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아직 내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여름은 한여름답게 근사한 고백을 뱉었다. 삶은 짧으니 망설이지 말고 달려가라고, 문을 열고 끌어안으라는 말에 열심히 문을 열고 다녔던 한여름. 그래서 내 관 뚜껑도 박살 내고 들어왔던 한여름.
나는 너를 사랑해. 네 마음과 내 마음은 출발선부터가 다르다. 네가 아무리 쫓아와도, 전력 질주해도 내 마음은 못 이겨.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밀어내기 바빴다. 뺨 열 대쯤은 각오했는데 여름은 발개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떨기만 했다. 나를 정말 좋아하는 것처럼 젖은 눈으로 사랑을 말해서 내 마음도 다르지 않다고 고백했다. 생각할 기한을 내걸면서. 진심으로 나와 영원을 생각해 보라고 기한을 말했는데 여름은 웃었다. 내 마음이 한여름을 웃게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더 보고 있다간 기한이고 뭐고 끌어안을 것 같아 앞장서서 걸었다.
서둘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청렴한 검사를 알아보고 있었다. 거물을 건드릴 배짱이 있는 검사. 기자도 찾아야 했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촉박했다.
네가 날 어찌할지 생각할 동안 나는 나를 막아서는 것을 부수고 네 곁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 25 ❖
사랑을 숨기지 못하는 여름에게 동조하고 싶어져 괴로웠다. 안 되는 이유를 생각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야 했다. 죽으려고 했고, 아직 끝내지 못한 불행을 업고 있다는 것을. 불행이 네게 옮겨 가게 두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이런 놈인 거 알고는 있어야지. 도망가고 싶어진다면 가게 두어야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이고 머뭇거리다가 겨우 털어놓았다. 사실만 전했다. 내 말에 여름은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고, 사랑이 모든 걸 이기게 해 주진 않는다고 말했다.
그 여자와 떨어지고 나는 정말 나아지고 있었다. 전에 없던 좋은 날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설명할 수 없음에 답답할 뿐이었다. 영원히 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죽은 세상이 이젠 종종 아름다워 보인다는 말을 어떻게 하나. 그럼 네가 또 울 텐데. 내 고통을 네 것처럼 여기며 울 게 뻔한데, 너를 내가 왜 울려.
할머니들을 돌려보내고 여름과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했다. 장난처럼 첫눈에 반한 게 아니냐는 질문에 심장이 덜컥했다. 첫눈에 반하는 게 어떤 건지 모른다. 하지만 첫눈에 네가 날 달라지게 할 것은 알았지. 널 보자마자 나는 들떴거든. 전처럼 손잡고 놀 순 없지만, 오랜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는 게, 나를 잊지 않고 친구라고 해 주는 게 좋았거든.
❖ 26 ❖
뽀얀 얼굴로 모래사장에 글씨를 새겨 넣는 여름을 빤히 응시했다. 글씨가 늘어 갈 때마다 심장이 팔딱거렸다. 가슴이 허물어지는 듯 아리기도 했다. 간조가 되어 젖은 모랫바닥에 크고 작은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함께 걸어온 길과 반짝이는 정수리를 번갈아 응시했다. 여름이 내게 남긴 사랑의 말을 아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만조가 되면 글씨는 사라질 테니까. 그래도 너의 말들은 내 마음에 영원히 남았다, 여름아.
서은오 내 거
빨리 와
사랑해
여름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속으로 답장을 썼다.
날 네 것으로 받아 주어 고맙다.
느려서 미안. 곧 갈게.
사랑한다.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