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초여름
사랑이 무르익는 게 좋았다. 오래도록 서늘하기만 했던 겨울은 올해부터 사랑의 계절이 되었고 우리는 그 계절을 통과해 봄을 겪고 햇살이 싱그러운 초여름 속으로 들어왔다. 어쩔 수 없는 웃음이 샜다. 일주일 전 제주로 내려가 직원 교육에 힘쓰던 나의 셔터맨이 오늘 돌아오니까. 겨울 문방구를 지율 어머니에게 맡기는 일 때문에 은오와 나는 잠시 떨어져 지냈다. 그동안은 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곳은 여전하다고 했다. 완두콩들은 언제나 사랑스럽고 안채는 적막하지만 문방구와 별채는 시끌시끌하다고, 사랑채처럼 아무나 드나든다고.
“샀어?”
-샀지.
“진짜? 너, 해냈구나!”
-누가 들으면 큰일 한 줄 알겠다.
제주에서만 파는 크래커가 있다. 아침부터 줄을 서야 하고 운이 나쁘면 내 앞에서 끊기는, 준비한 수량이 금세 동이 나 버리는 유명한 크래커. 인기가 많은 만큼 못 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꼭 안 먹어도 된다고 덧붙였으나 서은오는 샀다, 못 샀다, 언질도 없다가 비행기를 타기 직전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어투로 담담하게 해냈다고 대답했다.
“큰일 한 거지. 선착순에 드는 일이 계획처럼 쉬운 일이야? 잘했어. 사랑해, 진짜.”
-…내가 쉽게 칭찬하지 말랬지.
“싫어, 내 마음이야. 왜 자꾸 하지 말래? 내가 내 애인 잘했다고 하는데, 왜 네가 난리야?”
-하, 눈앞에 없을 때 귀엽지 말라고. 왜 그래.
너야말로 쉽게 귀엽다고 하지 말라고 대꾸하려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오늘 본다는 게 기뻐서 찔끔 눈물이 났다. 중증이구나 싶으면서도 그 정도로 앓는 게 나는 좋았다. 보고 싶어. 혼자 입 모양 했다. 잠깐의 침묵 사이로 어수선한 공항의 소음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탑승만 기다리는 서은오처럼 퇴근을 서두르는 내 마음도 애가 탔다.
“나 크래커가 너무 먹고 싶었어. 그게 뭐라고.”
-많이 샀어.
“좋아. 오늘, 뜨거운 밤을 경험하게 해 주겠어.”
-못 샀으면 차가웠을 예정?
“그럴 리가. 잘못을 했으니 뜨겁게 혼내 줘야지.”
수화기 너머로 하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기분 좋은 소리를 들으며 스튜디오 불을 껐다. 은오는 내게 공항에 오지 말라고 쉬고 있으면 집으로 가겠다고 했으나, 일 분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 하는 나를 걔가 이길 리 없었다. 그럼 조심히 오라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며 겨우 열 걸음 떼었을 때 내 앞으로 낯선 그림자가 드리웠다.
말없이 선 남자는 명함을 내밀곤 길 끝에 세워 둔 차를 눈짓했다. 하얀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명화 갤러리 이경희. 그 이름에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준비를 단단히 했어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마른침을 삼키며 티 나지 않게 심호흡했다. 내 긴장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갈까 봐 몹시 조심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마른 웃음이 샜다. 오늘 같은 일이 있으려고 아빠와 점심을 먹었나. 부모는 자식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알아채는 걸까. 어쩐 일인지 아빠는 내가 보고 싶어 왔다며 불쑥 스튜디오를 찾아왔다. 바쁘다면 얼굴만 보고 가겠다던 아빠의 팔짱을 끼고 나가 오랜만에 기나긴 데이트를 했다.
나는 아빠의 자랑답게 늠름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그에게만은 영원한 어린애라 별것 아닌 행동에도 귀여움을 받았다. 뜬금없는 말로 아빠를 은근슬쩍 떠보기도 해서 약간의 꾸중도 들었다.
‘아빠, 내가 만약에 엄청난 사람을 만나.’
‘누구 만나니?’
‘아니, 만약에. 그냥 가정이라구요.’
‘그래. 가정하에.’
‘근데 반대하는 누군가한테 협박을 받는 거야.’
‘협박?’
‘아니, 뭐, 드라마에서 사모님들이 자주 하는 말 있잖아요. 물 끼얹고, 너는 물론이고 가족과 주위 사람 다 가만 안 두겠다는 그런 협박. 나 또 그런 장면에 들어갈 음악 찾다가 문득, 갑자기 그게 내 상황이라면 아빠는 내게 뭐라고 해 줄까 궁금해져서.’
‘도망쳐야지, 여름아. 까불지 말고 알겠다고 해라.’
‘진짜? 나 걜 엄청, 사랑하는데?’
‘가정이라고 하지 않았니.’
‘그…러니까. 가정이라고 쳐도, 가정의 나는 한여름이니까 걔한테 문을 열었겠지, 아빠? 그럼 엄청 사랑하는 거겠지?’
‘아빠냐, 애인이냐, 고민된다는 거지? 그 답을 정말 몰라? 당연히 둘 다 지켜야지. 아빠는 걱정하지 마라. 내 목숨보다 귀한 게 너인데, 네가 괴로워할 선택을 하게 두겠니. 하고 싶은 대로, 하던 대로 해. 하지만 엄청난 사람이라는 말은 좀 어이가 없구나. 가정이라고 해도, 뭘 기준으로 엄청나다고 하는 거지? 재력을 기준으로 삼은 거라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아빠를… 닮은 사람이라는 기준?’
‘음, 그렇다면 좀 쓸 만한 놈이 맞네. 그래도 넌 네 엄마를 닮았으니 네가 더 엄청난 사람이다. 어느 순간에서든 그 사실, 잊지 마라.’
아빠의 말에 나는 덧문을 닫은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열어 두었던 창으로 원치 않는 한기가 들어와 으슬으슬하던 찰나, 덧문을 달아 추위를 이겨 낼 준비를 마친 기분. 그러니까 그녀는 날을 잘못 잡았다. 더 일찍 찾아왔어도 내가 질 일은 없지만, 아빠의 덧문 같은 말이 아니라도 나는 아빠와 애인을 지킬 자신이 있지만, 의욕이 끓어 넘치는 오늘만큼은 피했어야 한다고 감히 생각했다.
“은오야.”
-어. 곧 탑승해.
“명함을 받았어.”
나는 남자를 따라가며 차분히 말했다.
-…뭐?
“지금 차에 탈 거야.”
-여름아.
은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남자가 홱 돌아보았다. 나의 이실직고를 상상도 못 했다는 듯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공항엔 못 나가겠다. 집에서 보자.”
-한여름, 타지 마.
“안 타면 끌고 갈 기세라, 모양새 빠져서 안 돼. 내 발로 가는 게 낫지.”
-…이런 순간에도 그런 말이 나와? 내 말 들어. 아니, 당장 그 사람 바꿔.
“싫어. 집에서 봐.”
-제발, 여름아.
“…….”
-제발. 나하고 약속했잖아.
은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처연하게 들렸다. 마구 떨리며 어찌할 줄 모르는 반응에 심장이 뛰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사랑이 매달리는 음성만 들어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눈앞에서 매달리는 장면까지 본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녀가 날을 잘못 골랐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해지게 순식간에 잘 골랐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차라리 오늘이 나았다. 오늘이, 제격이었다. 은오가 나를 당장 막으러 올 수 없는 때를, 내게 달려올 수 없는 상황을 치밀하게 계산한 듯 잘 골라냈다. 그가 내게 가지 말라며 매달리는 장면을 봤다면 나는 안 갔을 테니까.
“나를 믿어?”
-믿어. 하지만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야. 사랑한다고 했지. 날 사랑하면 가지 마. 거기 있어. 그 새끼가 너 손끝 하나라도 대면. 아니, 못 대게 할 테니까 전화 바꿔.
“너야말로 날 사랑하면, 그냥 믿어. 믿고 헤매지 말고 와. 집으로. 알겠어?”
“타시죠. 기다리십니다.”
차 문을 열고 재촉하는 남자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타려는 움직임이 없자, 미간을 좁힌 남자가 다시 입을 뗐다.
“기다리십니다.”
“약속도 없이 부른 사람이라면 좀 기다려야죠. 보채지 마세요. 중요한 통화 중이니까 말 걸지 마시고요.”
귓가엔 불규칙한 호흡만이 크게 들려왔다. 불안해 미치겠다는 그의 떨림이 전해져 나는 사랑의 이름을 여러 번 불렀다. 은오야, 서은오, 은오야.
-여름아.
“그래. 듣고 있어.”
-가지 말래도 갈 거지.
“…응.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볼게.”
-그럼 내 말 잘 들어.
심호흡한 서은오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협박을 해도 지지 말라고, 절대 네 사람들 다칠 일 없고 너 또한 안전할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고. 네 눈에 눈물 날 일, 일어나지 않을 테니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된다고. 그 사람에게 네 주위 서성이면 다 무너뜨릴 거라고 겁박도 했다고.
-난 그 사람 약점을 쥐고 있어. 우리에게 이별은 없다고 얘기했지. 그거 잊지 않고 흔들리지만 않아 준다면 헤매지 않을 수 있어.
“응. 헤매지 말고 집으로. 너도, 나도, 은오야.”
-그래. 곧 갈게. 알겠지.
“응.”
-여름아.
“응.”
-사랑해. 사랑한다.
어쩐지 뭉클해 서둘러 끊었다. 입을 여는 순간 울먹이는 음성이 나올 것 같아 애달픈 고백에 답을 해 주지 못했다. 왜 목소리를 잡아 둘 수 없는 걸까. 한순간에 외로워진 그의 고백을, 불 꺼진 방처럼 고요했던 그 음성을 붙잡아 손에 쥐고 싶었다. 나 또한 사랑한다는 말은, 만나서 해 주겠다고 속으로 약속하며 차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서은오의 집과 거리가 멀지 않은 대저택이었다. 철문이 열리고도 한참을 차로 이동했다. 웅장한 건물을 마주 보고 섰다. 한옥 건물을 중심으로 양옥 건물이 늘어선 모양이었다. 들어가야 할 곳을 잠시 등지고 올라온 길을 둘러보았다.
“가셔야 합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정원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쫓기듯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까지 나를 데려온 이는 한옥 건물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가 멀어지고 다른 이가 나와 나를 맞았다. 이쪽으로 오라는 안내를 따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창호지 문이 몇 번이나 열리고 닫혔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침묵하게 하는 이상한 곳이었다. 지어질 때부터 적막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사람을 차분하고도 불안하게 했다.
겨우 한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나를 한 번 쳐다본 안내인이 고갯짓했다. 준비하란 뜻인 것 같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관장님, 초대하신 손님, 도착했습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안내인은 그녀를 마주한 듯 아랫배에 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인 채 얘기했다.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들어가 보라는 듯 문을 열어 주며 비켜나는 행동에 침착한 걸음걸이로 들어갔다.
방 안은 하나의 전시관 같았다. 은은한 멋의 정적인 수묵화가 걸려 있고 반대편으로 큰 창이 나 있었다. 큰 창마저도 예술 작품인 양 화려한 정원을 액자처럼 담아냈다. 그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정원을 응시하고 있던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미 한번 마주한 인물인데도 처음처럼 사람을 압도했다. 긴장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적요는 계속되었다. 그녀는 기품 있는 동작으로 소파를 향해 갔다. 어떤 소리도 없이 상석에 앉아 차를 따랐다. 앉으라는 말이 없었으나, 걸음을 옮겨 가까운 곳에 앉았다. 크나큰 공간에 주눅이 들어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도, 그녀도 죽은 인간인 것처럼 호흡 소리를 내지 않아 방 안엔 차를 따르는 소리만이 흘렀다.
“들어요. 향이 좋아.”
내 앞으로 차 한 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나는 꼿꼿하게 앉아 정면만 응시했다. 이따금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모른 체하며 쏟아질 말만 기다렸다.
“왜 왔어요?”
“부르셔서 왔습니다.”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혼자 깔깔대기도 했다.
“미안해요. 너무 웃기는 일이라. 자기 여자 하나 단속도 못 하는 놈이 누굴 겁박하나, 그런 생각에 웃음이 나와서.”
왜 왔냐는 황당한 물음에는 꿈쩍하지 않았으나 은오를 비난하는 말에는 속이 따끔거려 움찔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고 온 거겠죠?”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제야 불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신 그녀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한여름 씨는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요. 집안일이라 조용히 진행했던 일인데 우리 아들이 결국 여자에 미쳐 집안을 풍비박산 내겠다고 설치네.”
“…….”
“뭐부터 할까, 생각해 봤어요. 머리 좀 컸다고 팔다리 꺾는 일로는 통제가 안 돼서. 걔가 그렇게 맷집이 세질 줄 알았다면 좀 덜 엄하게 키울 걸 그랬지 싶고. 괜히 후회가 돼요. 이제 와서 소용없는 일이지만. 하여간 난 지금 매가 될 만한 걸 찾는 중이에요. 한여름 씨는 그중 하나일 뿐이고, 통했으면 좋겠는데 맥없이 부서질까 봐 좀 걱정되네요.”
겹겹이 쌓인 한숨을 쪼개 내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손을 뻗어 찻잔을 쥐고 단번에 털어 마셨다. 목이 타서 예의고 뭐고 상관없어졌다. 어차피 내가 백 점짜리 답안을 내놓아도 마이너스를 매길 여자다.
“하실 말씀을 정확히 해 주시면, 저도 분명하게 답하겠습니다.”
“배짱은 있네요.”
“네, 제 장점입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여자가 한 박자 느리게 입을 뗐다.
“부친이 자랑스러워하겠어요. 훌륭한 교육자라 자식 교육도 잘했는지 볼수록 내 아들과 어울리지 않네. 칭찬이에요. 난 훌륭한 사람이 못 돼 자식들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는 소리만 듣거든요.”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제 아버지는 이 자리와 상관없으니 거론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거론하고 싶어질 텐데. 내 아들을 떠나지 않으면 한여름 씨 아버지부터 잘라 낼 거니까?”
예상한 협박 중에 가장 상위에 있던 말이었다. 그런데도 손이 떨렸다. 꼴사납게 떠는 손을 들키지 않으려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너무 뻔하고 식상한 과정이라 기가 막히지만,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할 줄은 몰랐지만, 어쩌겠어요. 자식 일인데.”
“못 헤어집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나 같은 사람에게 훌륭한 교육자 흠집 내는 거 일도 아닌데. 보여 줘요?”
“어떤 말씀을 하셔도 아드님을 떠날 일 없습니다.”
“스쳐 갈 얄팍한 감정에 아버지의 평생을 무너뜨리겠다? 한여름 씨, 훗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요.”
“제가 업고 살면 됩니다.”
비로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말의 동요도, 표정 변화도 없이 그녀는 나를 응시했다. 까만 동공이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제 행복을 위해 뭐든 감당하실 분입니다. 제 행복은 이제 은오 없이는 완성이 안 되고요. 그러니 은오하고 열심히 아버지께 용서 구하겠습니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입가를 막고 한참을 깔깔거렸다.
“미안, 미안해요, 한여름 씨. 너무 순진하고 귀여운 소리라 웃음을 참지 못하겠네요.”
“협박으로 그치지 않으시면 오늘 일, 앞으로 일어날 일 모두 언론에 제보하겠습니다.”
“뭐라고요?”
겨우 웃음을 지워 낸 그녀가 다시 조소하며 물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 눈동자에 흥미가 깃들었다. 고요한 호수에 내가 돌을 던졌나. 잠시 상황 파악하는 동안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소파 뒤편에 있는 큰 책상으로 가 파일 하나를 가져왔다. 내 앞으로 자리한 것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환한 미소를 지은 아름다운 여자가 아이를 안은 채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었다. 서은오와 닮은 여자였다. 한눈에 봐도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아서 가슴이 철렁했다.
“역시 바로 알아보는구나. 그래요, 그 여자가 은오 친모.”
갈가리 찢겼다가 다시 붙은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마저도 몇 장 안 되지만, 테이프로 간신히 붙여 놓은 흔적이 여실했다.
“누가 봐도 그 여자 아들처럼 생겨서 내가 많이도 미워했지.”
“…이 사진을 제게 보여 주시는 이유가 뭐예요?”
“사랑은 얄팍한 거예요. 젊음과도 같아요. 영원할 것 같아도 한순간에 지나가, 그런 것은. 그걸 알려 주려고.”
잠시 허공을 응시한 그녀가 옛 기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서진 그룹의 개차반으로 소문난 장남과 정혼에 놓였던 이경희의 한 시절을, 자신의 젊은 날을 차분히 나열했다. 부모가 정해 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나 안하무인인 남자에게 짝지을 줄은 몰랐다고, 반항심에 서진 그룹의 사생아 서현우를 찾아가 제안 하나를 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 함께 두 집안에 불을 지펴 보지 않겠냐고.
“안하무인이 판치는 이 바닥 남자 중에 서현우는 남달랐어요. 집안에선 미운 오리 새끼로 상처받은 눈으로 살지만, 높은 담을 넘어 세상 밖으로 나가면 어찌나 반짝거리던지. 잘난 외모에 유혹의 기질을 타고난 매력적인 남자에게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당연한 순서처럼 사랑했어.”
그녀는 내게 설명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혼잣말로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내가 나쁘지 않았을 거야. 타고난 설움 다 갚게 해 주겠다는, 인생을 바꾸게 해 주겠다는 여자가 싫지 않았겠지. 그래서 젊은 남녀는 여러 차례 서로의 몸을 탐했어요. 이해하죠? 한여름 씨도, 내 아들 집에서 살다시피 하니까, 알겠지.”
“…….”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라 입 안이 말랐다. 그녀는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말할 땐 조금 풀어졌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다.
“나는 연애라 생각했고, 그는 그저 그것만으로도 집안사람들에게 엿 먹이는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아버지가 쩔쩔매는 명호 그룹 회장, 그 회장 딸과 정혼을 앞두고 집안이 들떴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팔아서 절망케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그런 순간에 제 발로 걸어온 내가, 그 남자에겐 얼마나 좋은 기회였겠어요. 목숨을 바칠 필요도 없이 쉬운 불장난으로 그들 계획을 산산이 부서뜨릴 수 있다는데.”
“은오는.”
“들어요. 걔 얘기 곧 나오니까.”
창을 응시하던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이경희의 일상이 달라진 것을 눈치챈 그녀의 부모는 딸을 미행했고 덜미를 잡았다. 크게 분노한 그들은 사생아 놈과 붙어먹는다는 저질스러운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다 큰 딸을 감금했다. 서진 그룹에서 버린 자식 취급하는 놈과 어울리는 걸 부모 말을 거부하는 일종의 반항이라고 여겼다고.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난 그 사람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 어떻게든 만나려고 문을 긁고, 창문에 매달리기도 하고. 그때 몇 대나 뺨을 맞았는지, 기억도 안 나요. 포기를 모르고 반복했어요. 그런 내가, 임신했다는 걸 알고 무의미한 시도를 접었어요. 생리는 멈춘 지 오래고 뭘 가져오든 구역질만 났으니까. 테스트기, 그딴 게 다 뭐야. 그냥 알겠더라고요.”
속이 좋지 않았다. 멀미하는 것처럼 시야가 넘실거렸다. 애써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지만 실은 그대로 엎어지고 싶었다.
“행복이 코앞에 있다고 믿었어요. 배 속에 자리 잡은 존재가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다 해결될 일이라고, 어리석게. 처음엔 잘 숨겼어요. 첫 아이라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아 붕대로 감고 살았지만, 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고, 어쩔 수 없이 그 사생아란 놈을 데려오라고 허락하셨지. 난 기쁜 마음으로 그 남자를 찾았어요. 그 후론 말 안 해도 알 만한 이야기예요. 그 남자가 왜 거기까지 흘러갔는지 나는 지금까지도 모르지만, 순진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더라고요. 내가 우리의 미래를 그릴 동안, 그 남잔 다른 여자와 미래를 그렸던 거야.”
남의 이야기를 떠들듯 그녀는 아주 평온했다. 망연자실해 집으로 돌아간 이경희는 부모에게 이실직고했고 그사이 서진 그룹에선 버린 자식 취급하던 서현우를 불러들여 정혼을 준비했다. 차질 없이 결혼이 진행될 거라는 말을 들었으나 이경희는 기쁘지 않았다. 서현우의 사랑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이경희의 모친은 깔끔히 마무리 짓고 오겠다며 비행기를 탔다. 이경희는 그냥 그 여자가 한 번 더 보고 싶어 서둘러 따랐고 그 겨울 시골에서 모든 게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녀를 잡으려고 달리는 남자들, 당장 잡아서 병원으로 데려가라는 모친의 날카로운 음성, 그리고 미친 듯이 달리는 여자. 얼마 가지도 못하고 잡혀 온 여자는.
“살려만 달라고 빌었어요. 내 다리를 붙잡으며 죽은 듯이 살겠다고, 아이만 있으면 된다고, 영원히 나와 현우 씨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살겠다고요. 임신하면 눈물이 많아져요. 내 일도 아닌데, 내 일 같고. 그 여자가 불쌍했어. 우는 여자를 따라 나도 울었지. 나처럼 배가 나올 때가 된 것도 아닌데 그 여자의 배가 꼭 내 배 같았고, 그 여자의 배 속에 있는 게 꼭 내 애 같았어요.”
“…….”
”그 여자는 아무리 매달려도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래도 끌려가니까 안간힘을 써서 바다에 뛰어들더라고요. 보기만 해도 얼음장 같은 그 물속으로. 그 여자 부모가 길바닥에 뒹굴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해. 내 어머니가 어찌나 악인 같던지. 그녀도 자식을 위해 벌인 일인데 말이에요.”
“…하아.”
“그래서 살렸어요. 그 여자가 가여워서, 그게 훗날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도 모르고, 내가 무슨 구원자인 것처럼 거만한 마음으로 그 여자를 풀어 주고 배 속의 아이도 살렸어. 나중에 아이를 빌미로 두 사람이 만날까 봐 그 애를 우리 호적에 올리겠다는 조건으로 낳게 했어요. 대신 아이는 평생 서겨슬과 살 것, 몇 푼 챙겨 주겠다고 해도 안 받겠다고 우겼지. 그래도 억지로 받게 했어. 인간은 간사해서 돌아서면 꼭 말이 달라지거든요.”
좁아지는 미간을 느끼고 억지로 표정을 고쳤다.
“결혼하고 행복했어요. 연년생으로 태어난 둘째는 몸이 약해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며 산다고 알린 후론 복잡할 게 없었으니까. 그 여자는 아주 가끔 내 기억을 어지럽혔을 뿐이고, 남편은 가정에 충실했거든요. 그래서 그 남자하고 아이도 더 낳은 거고.”
“…….”
“그 여자는 사실 잘못한 게 없었지. 예쁘고, 착하고, 강단 있고, 자존심도 있었어. 아마 그런 식으로 엮이지 않았다면 친구 하고 싶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웃기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더 웃긴 건, 남자들인 거 알아요? 여자의 몸이 없으면 애를 낳지도 못하는 것들이, 핏줄 욕심은 어찌나 강한지.”
수십 년 전, 부와 권력을 영원히 누릴 것 같던 명호 그룹이 쇠퇴하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서진 그룹이 급격히 성장했다. 상황이 급변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명호가 서진보다 컸다고 오래된 사람들이 하는 말을 흘려들은 적 있었다.
“내 아버지에게 알랑대던 그 여우가, 세상을 다 가진 듯 굴었지. 나와 내 집안사람들을 어찌나 우습게 대하던지. 어느 날은 자기 손자 찾아오겠다고 통보하더군요. 절망의 순간 내가 누구에게 기대겠어요. 남편을 봤지. 그런데 남편의 눈이 빛나는 걸 봤어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남자가, 그 여자는 이제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고, 그저 자식이라니까 그 애에게 미안해서 데려오고 싶은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더군요.”
“…은오는 죄가 없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데려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걜 품어야겠다, 잘해 줘야겠다, 거듭 다짐했는데 남편이 차별을 하잖아. 그동안 챙겨 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그런다고 말하지만, 바라보는 시선부터 달랐어요. 그 사람은 은오가 미치게 좋았던 거야. 사랑했던 여자와 자기 사이에서 나온 그 아들이 금쪽같았던 거야. 그걸 못 숨기니 내 아들이 어땠겠어요. …그 앤 그냥 아이답게, 낯선 동생을 괴롭혔을 뿐인데.”
그녀는 아들 얘기에 동요했다. 파르르 떨며 눈물을 보였다.
“난 우리 정우를 참 많이 혼냈어요. 은오는, 어릴 때부터 예쁜 짓만 골라 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비교를 해 버릴 만큼, 내 자식은 왜 저만큼 하질 못할까, 생각할 만큼 예쁘더라고요, 걔가. 지금 떠올려 봐도 참 웃기는 애지, 싶어요. 형이 자길 때리고 가둬도 고자질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누가 구해 줄 때까지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니 내가, 내가 내 아들을 나무랄 수밖에 없었지. 우리 정우는 말도 안 듣고 큰형답지 못하게 마음이 좁아서 동생들을 쳐다도 안 보는데, 은오는 동생들이 예쁘구나, 좋은 오빠구나, 착하구나…….”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나는 은오가 미우면서도 가여웠고, 정우는 미우면서도 사랑했으니까. 남의 새끼한테 무슨 좋은 엄마 노릇 하겠다고 내 새끼를 아프게 했을까. 동생에게 못되게 굴지 말라고 혼만 냈어요. 은오가 오고, 정우는 혼만 나다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고.”
나 역시 몸이 떨렸다. 의연하게 듣자고 다짐해도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왔다.
“애들이 사라지고 난 매일 기도했어요. 둘 다 살려 보내 달라고. 둘 다 내 자식이니, 잘못되게 하려거든 나를 데려가라고. 그 여자도 매일 내 옆에서 기도했지. 남편은 자식 둘 생사도 모르는 판국에 그 여자를 갈망하며 애틋하게 바라보더라고요. 맞아, 아이와 여자는 잘못이 없었어요. 그 여자도, 나도 파죽음이던 몰골은 비슷했으니까.”
“…….”
“하지만 그렇다고 책임이 없을까. 알다시피 비극으로 끝난 일이에요. 하나는 병원으로, 하나는 시신으로 발견됐다고 연락이 오던 날, 병원으로 달려가는 내내 빌었어. 제발, 내 아들이길. 왜 말을 안 해 주는 거냐고, 누가 실려 갔는지 이름만 얘기해 주면 되는 일 아니냐고. 안 가르쳐 주는 덴 이유가 있는 건데, 그걸 모른 척하고 어리석게 기도만 했어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가 내게 다그칠 것만 같았다. 내 아들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너잖아, 하고 따져 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냥 이들의 삶, 그리고 서은오의 삶이었다. 어른들의 실수와 잘못 끝에 결국엔 아이들만 더 상처 입었으니까. 그녀도, 은오의 어머니도 가여웠지만, 그렇다고 은오가 고통받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 병원에서, 은오와 눈이 마주치고 내가 절망할 때, 나는 다시 남편의 빛나는 눈을 목격했지. 그 개, 자식은 은오만 살아서 오면 됐던 거야. 죽은 애가, 서은오만 아니면.”
“…….”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 애를 아들로 품을까. 여우 같은 서 회장이 자기 손주 들일 때 걜 죽이든, 살리든, 미워하든, 내게 맡기겠다 하셨어요. 은오 엄마? 자기 아들 큰 공부시켜 큰 인물 되게 해 주겠다는 말에 순순히 보냈지. 그래 놓고 그 일 겪고 나니까, 다시 데려가겠다고 악을 써. 얼마나 황당한 심보야, 그게? 그래서 평생을 못 보게 했어요. 내가 내 아들 못 보게 된 것처럼, 두 연놈도 고통스럽게 해 주겠다는 목표 하나로 살았어요. 내 아들이 느꼈을 외로움, 절망감, 몇 배로 그 애에게 돌려주겠다고. 평생 불행하게 해 주겠다고.”
“이런 얘길, 왜 저한테, 하세요?”
“사랑은 그렇게 얄팍한 거니까!”
“…….”
“아버지를 업고 살겠다? 사랑을 옆구리에 끼고, 용서 빌며 살겠다? 웃기지 마. 내가 죽기 전까지, 서은오는 내 거야. 내 아들이야!”
소름이 돋았다. 딱딱 부딪히는 이를 억지로 악물었다. 겁에 질린 모습에 비죽 웃은 그녀가 차분한 손짓으로 내 뺨을 쓸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은오가 네게 어디까지 얘기해 주든? 어떻게 살아왔는지 속속들이 다 얘기했니? 그럼 그것도 아니?
“장롱에서 자랐다는 거?”
“…네?”
“은오는 내가 오라면 왔고, 가라면 완벽하게 숨었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잠시 정신이 나간 적을 빼면 내 말을 거역한 일이 없지. 지금 여자를 처음 겪어 봐서 걔가 날뛰는 거야. 넌 걜 몰라. 걔가 얼마나 나를 두려워하는지. 나를 증오하면서도 얼마나 사랑받고 싶어 했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여자의 눈을 마주하니 온몸과 정신이 뻣뻣하게 굳어 왔지만 서은오를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복기했다.
“아니요. 세상엔 얄팍하지 않은 사랑도 있어요. 제가 산 증인이에요.”
“뭐야?”
“은오를 평생 불행하게 만드는 게 목표라고 하셨죠. 그 끔찍한 목표, 진작 실패하셨어요. 은오는 이미 행복하니까.”
몸을 일으켰다. 더는 들을 것도 없었다. 헤어지란 말에 못 하겠다고 답했다. 그게 이 자리가 만들어진 이유였다. 엉킨 실타래 같은 이야기를 잠자코 들은 것은 그 중심에 서은오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 당장 앉아!”
눈에 핏발이 선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는 내게 소리를 지르다 벌떡 일어섰다. 그 기척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은오는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굳이 소유를 붙여야 한다면, 제 사람이에요.”
“뭐?”
“저는 불행하라고 기도 안 해요. 마음으론 정말 바라요. 오래도록 서은오를 괴롭힌 사람이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기를요.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불행에 힘쓰고 싶지 않아서 인과응보라는 말을 믿어 보려고요. 은오하고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것만으로도 바쁘니까.”
그녀가 파르르 떨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혹시 제 말, 못 알아들으셨을까 봐 다시 말씀드릴게요. 은오 이제 힘들게 못 하세요.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다고?”
“해 봐야죠, 뭐든. 사랑하는 사람이 걸린 일인데. 그리고 언젠가는 꼭 우아해지세요.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꾸미지 마시고. 여태껏 멋지게 나오길래, 깜빡 속았잖아요.”
“뭐야?”
“그만 돌아갈게요. 할 일이 많아서요.”
“어디 가! 내 말 안 끝났어!”
빠르게 달려온 그녀가 내 어깨를 홱 돌려세웠다. 씩씩대며 눈을 무섭게 뜨는 그녀를 차분하게 마주했다.
“내가, 그쪽 존경한다고 멋모르는 시절에 신문 스크랩한 게 기억나서, 그거 다 찢어 버리러 가요.”
“뭐?”
“그만큼 괴롭혔으면 이제 놔 달라고. 이제 불행할 사람은 당신이 될 거니까, 상황 끝났으니까!”
“너, 감히!”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성을 잃은 듯 살벌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피해 주춤, 물러나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섰다.
“엄마!”
갑자기 끼어든 젊은 여자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내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뒷걸음질 쳤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를 황망히 응시하다가 서둘러 방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센 척이란 센 척은 다 해 놓고 이제 와 손이 달달 떨렸다. 기나긴 복도가 아득하게 멀어 보였다. 탈출구가 없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가 이 집에서 겪은 불행이 너무도 아프고 무서워서 당장 끌어안고 도망가고 싶었다.
“괜찮으세요?”
사람들이 달려왔다. 젊은 여자가 불러낸 건지, 소란에 나타난 건지, 대체 이 많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가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소름이 돋아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모두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를 안내했던 이만 남아 내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일하셨어요?”
“그건 왜…….”
머리가 새하얀 안내인이 의아한 얼굴로 망설였다.
“대답해 주세요.”
“젊어서부터 했으니, 30년은 됐습니다.”
“그럼 은오가 어떤 취급을 당하며 자랐는지 아시겠네요? 저 여자가, 은오를 학대.”
“말씀, 가려 하세요.”
“…….”
“관장님도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관장님처럼 마음 넓으신 분도 없으시고요.”
이가 부득 갈렸다. 나를 부축하던 여자의 손을 뿌리쳤다. 역겹고 징그러웠다. 이 집안의 모든 것들이, 모든 존재가 소름 돋도록 추하고 추잡해 보였다. 벽을 짚어 가며 겨우 복도를 벗어났다. 왔던 길을 기억하며 되돌아갔다. 현관까지 나왔을 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무시했다. 이 집이 싫고 이 집안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전부 싫었다. 무엇 하나 서은오에게 따뜻했을 리 없는 이 모든 것들이.
“잠시만요, 저 서은오 동생이에요. 부탁받고 달려온 거예요.”
그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쉰 여자가 울고 싶단 얼굴로 서 있었다. 여자를 따라 현관 밖으로 나왔다. 급박했던 흔적이 여실한, 삐뚤어지게 주차한 차가 보였다. 운전석 문이 열려 있었다. 그녀와 함께 차에 올랐지만 키가 없어 덩그러니 앉아만 있었다.
“미치겠네. 안에다 두고 왔나 봐요.”
“의사라는 동생이죠?”
“네. 따지고 보면 몇 달 차이 안 나는데, 동생이긴 합니다.”
“부탁받고 왔다는 말이, 은오가 부탁했다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나를 흘끗거렸다.
“갑자기 전화해선 자기 대신 집에 가 달래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막으라고요. 멀리 나와 있어서 어렵다니까, 목소리 깔고 엄청 무섭게 얘기해서 과속까지 했는데도 좀 늦었네요. 미안해요. 본의 아니게 험한 꼴 보게 해서.”
“은오가.”
겨우 멎었던 울음이 재발했다. 어린 은오의 모습이 스치고 환하게 웃는 지금의 서은오가 스친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응시하는, 가끔 울 것 같은 우수에 찬 눈이 되는 예쁜 얼굴이.
“살려고 간 거예요, 제주에.”
“…….”
“어머니 피해서요. 오빠 병은 엄마가 없어야 나아요. 약을 아무리 먹으면 뭐 해. 본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질 못하는데. 아들을 죽어라 괴롭히면서도 끼고 사는데. 엄마가 불쌍한 사람인 건 알아요. 동시에 나쁜 사람이라는 것도. 무엇보다 난 서은오도 불쌍해서, 이제 좀 도망쳐도 되지 않나, 이제 좀 행복해 보면 안 되나, 그런 마음으로 돕고 있고요.”
“뭘, 흡, 돕는데요?”
“…저 꼴을 보고도 몰라요? 엄마, 몇 달간 병원에 있다가 나왔어요. 상태가 심각해진 것도 있지만, 서은오가 가족들한테 칼 빼 들었거든요. 이경희 감옥 보낼지, 병원 보낼지 선택하라고. 물론, 시끄러워지는 건 변함없어요. 서은오도 바빠질 텐데, 조사받고, 수습하려면? 오늘 일은, 제 잘못이에요. 그래도 엄마라고 디데이 직전이라 잠시 퇴원 조치한 건데.”
“…네?”
“수십 년간 차곡차곡 모은 비리, 그거 풀지도 않고 죽으려던 사람이 갑자기 풀어야겠다고 도와 달라던데요. 의사니까 이경희 상태 정확히 파악해서 대비하라고. 아버지, 할아버지, 하여간 우리 집안 박살 날 일만 남았어요. 음, 저기 양반은 못 될 팔자 뛰어온다.”
그녀가 보조 거울을 흘긋대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몸을 돌렸다. 차 뒤창으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올겨울에, 그쪽이었던 거죠?”
잠시 여자를 쳐다보았다.
“자기가 이상하다고, 변태인 것 같다고 하던데. 자꾸 만지고 싶어진다고.”
“…….”
“다른 사람과도 그러고 싶으냐고 물으니까 상상만 해도 구역질 난대서 말해 줬죠. 그렇다면, 그거 사랑이라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고요. 나 오빠 때문에 트라우마 생겼거든요. 서은오 영원히 시시하게 살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이제 좀 발 뻗고 자겠네.”
여자가 빙긋 웃었다.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어 입술을 벙긋댄 순간, 조수석 문이 열렸다. 몸을 낮춘 서은오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그리고 동생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뗐다.
“뭐라고 했어.”
“뭘 뭐라고 해?”
“얘 왜 우냐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와, 서은오. 구해 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네?”
“가자, 이리 와.”
나를 차에서 빼낸 서은오가 얼굴을 닦아 주며 이마를 맞대었다. 이를 악물고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애써 삼킨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여름아.”
“응.”
“여기 있어. 안에 다녀올게.”
“뭐? 왜?”
옷깃을 잡으며 만류했다. 옷깃을 쥔 내 손등을 겹쳐 오며 서은오가 중얼거렸다.
“너한테 상처 준 만큼 나도 하고 와야겠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나한텐 의미가 있어.”
“그냥 가자.”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 다 들어야겠다고.”
싸늘한 표정과 눈빛이 그가 뵈는 게 없어졌음을 뜻한다는 걸 몰랐다. 그녀를 두려워하면서 내게 일어난 일을 다 알고 싶어 사지로 들어가려 했다. 사지인 걸 알면서도, 내내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도 오로지 내게 함부로 말한 그녀에게 따지겠다는 마음 하나로 가겠다고.
“집에 가자.”
은오의 허리를 잡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은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단 듯 미간을 좁혔다.
“내가 이겼어.”
“이겼다니.”
“흥분하셨어. 너 내 거라고 했거든.”
“뭐?”
미간이 더 구겨졌다. 도대체 그런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전후 상황을 상상해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고뇌했다. 나는 울면서도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발언이라서. 그녀의 소름 끼치는 대사에 낯간지러운 사랑의 대사로 응수했다. 내가 울면서도 입꼬리를 당겨 올리자, 아니 당겨 올리다가도 울먹거리자 서은오가 나를 끌어안았다.
“…근데 왜 울어. 내가 네 거인 거 알면서 왜 울어.”
“너무 좋아서.”
“…….”
“그러니까, 집에 가자. 여기 일 초도 있고 싶지 않아.”
내 말에 서은오는 망설임 없이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철옹성 같은 철문을 통과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났다. 완전히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전히 눈물은 나지만, 묻고 싶은 게 너무도 많지만 우리는 집까지 씩씩하게 걷고 또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침대에 마주 보고 누워 하염없이 서로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새벽이 오고 한참 만에 서은오가 내 아랫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여기서 천둥소리 날 때 됐는데.”
그 말에 힘없이 웃었다.
“내 오장육부도 양심이 있거든? 눈물샘이 터지는 날엔 눈치를 봐, 얘들도.”
“햄버거 사 줄까.”
“아니.”
“뭘 사 줄까. 말만 해. 다 사 올게.”
“…….”
“아니면, 해 줄게. 장 봐 올게. 그만 울자.”
멎었던 눈물이 또 시동을 걸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등으로 은오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얼굴 보여 줘. 어차피 울 거면 나한테 보여 줘.”
손을 내리며 넓은 품으로 파고들었다. 계속 젖어 있던 건 아니었다. 말랐다가도 축축해졌고 다시 마르기를 반복했다. 눈가가 젖을 때마다 서은오는 거칠어지는 숨을 애써 숨기며 나를 달랬다. 부드럽게 안거나 물기를 닦아 주거나 이마에 입술을 대고 등을 쓸어 주기도 했다.
“서은오.”
“응.”
“은오야.”
“그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었다. 그 집에서부터 묻고 싶었던 물음이 목 끝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렸다. 그 말을 못 해서, 새벽이 오도록 은오의 속을 애태웠다. 이제는 물어야 한다. 들어야 한다.
“장롱, 얘기를 들었어.”
서은오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얘기는 상상도 못 했는지 당황했다. 목울대가 일렁였다.
“널 많이 괴롭혔다고.”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솔직히 말해 줘, 제발.”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랬어. 벌 받을 때, 도망가야 할 때, 숨어야 할 때 그만한 데가 없었어. 처음엔 무서웠는데 나중엔 편해지더라. 너 달래려고 하는 말 아니고 정말로, 편해졌어. 우리 숨바꼭질하던 날, 나 내내 장롱에 숨어 있었어. 그만큼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참 만에 느리고도 아픈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불행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지금도 내가 불행해 보여?”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를 걱정하는 눈빛에서도 느껴지는 드글드글한 사랑에 입꼬리를 올렸다. 먹먹한 가슴으로 사랑이 번져 왔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날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응.”
“그럼 내 과거에 더는 눈물짓지 마. 네가 슬퍼하면 내가 초라해져. 널 울리는 사람, 상황 다 부수고 싶은데 그게 나고, 그게 내 과거라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까.”
눈을 감고 서은오의 입술에 마른 입술을 붙였다. 진득하게 붙어 있다가 물러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아까 하지 못한 대답을 돌려주는 거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도 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돌림노래처럼 사랑을 고백했다. 오래도록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라이터를 켠 듯 불꽃 같은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알아서, 후, 하고 눈가에 대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언젠가 그에게 해 보고 싶었던 간지러운 동작을 비로소 오늘에야.
눈매를 부드럽게 찡긋거리며 웃은 애인이 내게 더 가까이 붙어 왔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빛에 후, 하고 바람을 불면 도망갈 줄 알았던 서은오는 지금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애인이 되었다. 아무리 불어도 꺼지지 않는 그 뜨거운 사랑을 나는 영원토록 끌어안고 살겠다고 맹세했다.
은오야, 다시 생각해 보니까 햄버거가 먹고 싶은 것 같기도 해.
맥주도 사?
같이 가자. 차에서 네 눈 보면서 먹는 게 제일 맛있어.
떨어지기 싫은데, 업고 가도 돼?
그래. 체력을 쓸모없는 데다 좀 낭비하자. 자기가 무슨 십 대세요? 누나 힘들어, 은오야.
힘 좀 내 봐. 욕망덩어리라고 꼬셔 놓고 기절을 왜 이렇게 잘해.
…네가 지치지 않는 거야. 정력 감퇴, 뭐 그런 음식 없나?
다들, 이 정도도 안 하고 산다고?
근데 은오야, …크래커 어디 갔어? 웃지만 말고, 아! 읍! 하아, 배고프다니까, 옷을 왜!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