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촘촘한 삶(2권) (8/14)

7. 촘촘한 삶

정신없이 서로에게 매달렸다가 방 안이 후끈해졌다. 더 엉켜 있다간 제사고 뭐고 정말 후레자식이 될 것 같아서 서은오도 나도 서둘러 방을 나왔다. 방문 앞에 떨어진 메모지가 발치에 걸렸다. 시장에 다녀오겠다는 글자가 쓰여 있어 비죽, 웃음이 샜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에도 웃음은 곧잘 새어 나왔다.

“운전 좀 하자.”

“응. 해.”

뻔뻔한 내 대답에 서은오가 실소했다. 그 얼굴이 천만 영화 속 하이라이트 같아 뒷덜미가 뜨거워졌다. 나는 침착하게 팔을 뻗어 서은오의 목을 끌어안았다. 폭격처럼 쏟아붓는 입맞춤에 서은오의 눈매와 입꼬리는 어쩔 수 없이 휘어졌다. 얼굴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다디단 서은오는 예쁘다는 죄목으로 한여름의 달궈진 애정을 받아야만 했다. 진한 눈썹과 청초한 눈두덩이, 붉은 기운을 띠는 애굣살과 날렵한 코끝, 근사한 턱과 뺨, 신이 사소한 부분마저 놓칠 수 없다며 공들여 작업한 예쁜 길목 같은 귓바퀴까지 나는 열심히, 그리고 마음껏 음미했다.

“여름아.”

“응.”

“까딱하다간 사고 나.”

오늘따라 빨간 신호가 어찌나 고마운지. 신호에 걸린 차가 정차할 때마다 서은오의 얼굴을 잡아끌었고 서은오는 그때마다 웃으며 순순히 입을 벌렸다. 빨개진 귀 끝과 촉촉한 눈동자, 자주 일렁이는 목울대, 입 맞춘 후에 찾아오는 잠깐의 정적, 그 끝에 올라가는 입꼬리가 서은오의 상태를 말해 주었다. 떨고 있고 이런 건 처음이고 이상한데도 좋다고. 나 역시 그랬다. 비슷한 표정과 비슷한 반응으로 서은오를 당겼다.

하지만 녹색등이 켜지고 차를 몰아야 하는 순간은, 운전 중에도 자꾸만 뺨에 입 도장이 찍히는 순간만큼은 곤란해했다. 자기도 고개를 돌려서 뭔가를 더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으니까.

“한여름.”

“운전대 잡은 사람이 정신 바짝 차리면 돼. 집중해, 은오야.”

“집중을 하게 해 줘야지.”

이기적인 대답을 탓하지만 눈빛만큼은 원망하는 기색이 없어 가슴이 간지러웠다. 다시 신호가 걸렸다. 빨간불만 기다렸는지 바로 고개를 돌린 서은오가 내 입술을 막아 냈다. 잠시 시선이 얽혔다. 이제는 폭격 같은 키스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며 턱을 쥐어 놓고 아랫입술을 만져 왔다.

손길이 야릇했다. 만지면 안 되는 것을 손대는 것처럼 아슬하게 스치는 느낌이 들다가도 욕망으로 이글대는 속을 손길에 담아 보내는 듯 꾹 눌러 보는 행동에 웃음이 샜다. 내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서은오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

손가락이 멈칫하는 게 느껴져 슬쩍 웃었다. 굳어 버린 긴 손가락에 가볍게 키스했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가락을 삼켰다. 입 안에 넣고 가만히 물고 있다가 혀를 움직였다. 우수에 찬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번쩍거렸다. 서은오의 목울대도 크게 일렁였다. 이를 깨무는지 턱 근육까지 팽팽해졌다.

“하, 젠장.”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서은오가 사이드브레이크를 거칠게 올리며 내 목덜미를 한 손으로 끌어당겼다. 빠져나간 손가락 대신 서은오의 말캉한 혀가 침범했다. 얽히는 동시에 혀뿌리를 뽑아 낼 것처럼 내 입 안을 강력하게 빨았다. 무더운 여름의 뙤약볕 아래 선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다. 가슴이 팔딱거리며 그에게 더 붙으라고 아우성쳤다.

“하아…….”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신호가 켜졌는지 참을성 없는 운전자들이 연속으로 경적을 울려 댔다. 조수석으로 넘어올 기세로 몰아붙이던 서은오가 살짝 물러났다. 나는 그새 가빠진 호흡을 정돈하느라 어깨를 들썩이며 숨만 내쉬었다. 이를 악문 서은오는 한숨을 삼키며 운전대를 잡았다.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고 부드럽게 출발하며 서은오가 말했다.

“더 건드리지 마.”

“…후레자식 될까 봐?”

할머니 제사인데 너무 경건하지 못한가 싶어 되물었다. 속으로 서은오의 할머니께 사죄드렸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손자분이 저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제가 원래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요. 저도 제가 이럴 줄 몰랐다구요. 이제 막 시작한 연애에 취해서 뵈는 게 없어질 줄은.

“빨라지니까.”

딴생각을 하다가 서은오의 말을 놓칠 뻔했다. …빨라지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샐쭉, 웃은 나는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얌전히 실려 갔다. 오늘 하루는 겸허한 마음으로 서은오를 따르리라 결심하면서.

얼마 안 가 입구부터 북적거리는 재래시장에 도착했다. 혼잡하게 늘어진 줄이 줄어들길 기다리며 오래 대기했다. 차례가 되어 겨우 주차한 후엔 서로를 훔쳐보며 터덜터덜 걸었다.

인파가 드나드는 시장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섰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온갖 양념과 산지 직송된 농산물의 싱싱한 냄새, 물건 파는 이와 사 가는 이가 내뿜는 냄새까지 한데 뒤엉켜 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하루 혹은 한 주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생활력, 생기 같은 것으로 시장은 번잡했다.

복잡한 시야가 아니더라도 나는 시장에만 오면 정신을 못 차렸다. 어린 시절 엄마와 아빠 손을 잡고 갔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아빠는 마트에만 다녀서 시장에 관한 선명한 기억이 없었다. 다 자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도시에서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젊은 사람이 시장에 갈 일은 많지 않았다. 영화 촬영장의 배경지, 혹은 배경지와 가까운 곳이라 들르는 일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시장에는 특유의 분위기와 소리 그리고 냄새가 있다는 걸 어른이 된 후에야 제대로 알았다. 그 어수선함 속에 촘촘한 삶들이 농축되어 있음을 뒤늦게 알고 빠져들었고, 시장에 걸음 하는 날이면 식료품보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손짓을 오래 관찰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열기와 온기, 입김으로 거대한 천막 아래 길목은 춥지 않았다.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수록 공기는 쿰쿰했지만. 천천히 걸으며 음식 장만할 재료를 눈여겨보는 서은오를 빤히 응시했다. 길이 엇갈려도 남들보다 커서 금방 찾겠다고 생각하며 서은오 대신 흥정에 나섰다.

“달라는 대로 척척 계산할래? 너무 비싸다는 그 한마디를 못 해서, 어? 너 나랑 살면, 살림 다 거덜 내겠다? 알뜰살뜰한 면이 없네. 내가 단단히 가르쳐야겠어.”

나의 농담 같은 말에 서은오는 소리 없이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은오야, 예쁘게 웃지만 말고 잘 들어. 깐깐하시다? 그럼 깎아 달라고 하지 말고 한 줌 더 주세요, 해. 따라 해 봐. 한 줌 더, 왜 그렇게 봐? 시장 인심이 어째서 얄팍해졌냐고 한마디라도 해야 콩고물을 얻는 거야. 원래 미운 놈 떡 하나 주고, 쫑알대는 놈 입에 엿이라도……. 됐어. 정 못 하겠으면 그냥 웃어. 그럼 깎아 주실 거야.”

“앞에 잘 봐.”

서은오만 보며 열변을 토하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서은오가 급하게 내 팔을 잡아 당겨 준 덕에 충돌은 면했으나 단호한 표정으로 앞을 보라고 해서 입 다물고 시장 구경이나 했다.

서은오가 대파와 가는 파, 오징어와 돼지고기를 바쁘게 사들이는 동안 나는 종종거리며 쫓아가고 봉지를 나눠 들자 매달리다가 결국엔 빈손으로 서은오를 따랐다. 그러다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겨 뒤처져 버린 좀 웃긴 애인이 되었다. 홀린 듯 걸음을 멈추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곱게 지나치지 못하는 꼴로 나는 카세트테이프가 진열된 좌판 앞에서 정지했다. 트로트 음악 테이프와 동그란 시디 앨범이 좌판에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노래 제목과 가수들이라 꽤 오래 살피고 있었다.

“큼. 크음.”

테가 얇은, 붉은 기가 도는 선글라스를 낀 사장 아저씨가 목을 가다듬었다. 내게 관심이 없단 듯 다른 곳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르셨지만, 라디오 스피커의 볼륨을 높이셨다. 이래도 안 사? 이렇게 신나는데 너 안 산다고? 무심한 손동작에서 노련한 장사꾼의 기운이 느껴졌다.

뽕, 뿡, 빵, 빡, 뚱, 짝, 짜그작, 깽, 깡, 강렬한 된소리의 향연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음악을 들었다. 사장 아저씨가 무심한 손길로 테이프 하나를 싹 뽑아 던졌다. 다른 테이프들을 깔고 홀로 툭 튀어나온 것은 지금 스피커에서 흐르는 곡이 담긴 테이프였다. <살구 같은 당신, 내 마음에 둥지를 터 다오> 간지럽고도 직설적인 제목을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네모난 플라스틱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은오도 살구처럼, 달고 상큼하… 어? 한참 만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함께 온 사람을 잊고 있었다.

“아…….”

멀리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사라지고 없을 줄 알았던 서은오가 가만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가자는 말도, 뭐 하냐는 말도 없이 얌전히 서서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한 번 들썩인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아저씨에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색시가 음악 들을 줄 알암신게. 취향이 고급쪄마씸.”

“예. 음악도 만들어요.”

“어쩐지. 범상치 않았수다.”

서은오는 미소를 보이며 거스름돈을 받았다.

“카세트는 있어?”

나란히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서은오가 물었다. 나는 애인에게 받은 선물이 좋아서 휘황찬란한 테이프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되물었다.

“없으면? 그것도 사 줘?”

“응.”

서은오를 올려다보았다. 보채거나 나무라지 않고, 방해도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따스한 눈빛이 내가 애인에게서 받은 첫 선물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아주 오래 기억할 것 같은데, 은오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멋대로 손을 잡았다. 얽힌 손을 한번 내려다본 서은오가 말했다.

“떡만 받고 가자.”

“응.”

어제 미리 주문해 놓은 것을 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서은오의 모습은 처음이라, 아니 휴대폰을 쥔 모습 자체가 처음이라 연신 훔쳐보며 온 신경을 집중해 말소리를 들었으니까. 통화를 마친 서은오에게 그 많은 양의 떡을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제사 때 온 할머니들께 나눠 드릴 거라고 했다.

“왜 웃어?”

이유 없이 웃는 나에게 서은오가 물었다. 한 손으로 허리 근처를 짚은 채 통화를 하던, 숱 많은 머리칼을 대충 넘기며 중얼거리던 그림 같은 장면이 떠올라 그런다고 할 수 없어서 어깨를 으쓱했다. 서은오를 생각하면, 그 어떤 장면을 되짚어 봐도 근사해서 웃음이 자주 따라다녔다.

도착한 떡집 앞엔 건조한 얼굴로 작은 티브이를 보고 있는 아저씨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서은오가 이름을 말하자 아저씨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안쪽으로 사라지셨다.

“애인이냐?”

자주 들르던 곳인지 떡집 옆 쌀과자집 주인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서은오는 안녕하시냐는 동문서답을 했다. 아주머니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응? 하고 다시 물으시는데 서은오는 내가 곤란할까 봐 말을 삼가려는지 그냥 입꼬리만 당겨 올렸다.

“애인 맞아요.”

팔짱을 끼며 호호, 웃었다. 과자들 사이에 삐죽 올라온 나무 그릇 두어 개에 시식용 과자가 담긴 것을 보고 서은오의 팔을 흔들며 속닥거렸다.

“자기야, 저것 좀, 아.”

입을 벌리며 올려다보자 서은오가 픽 웃었다. 그리고 순순히 대령했다. 입 안에 쏙 들어온 것을 아작 씹으며 맛있다고 엄지손을 치켜올렸다. 아주머니께 진짜 맛있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던 건데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외면했다.

“총각이랜 허난 사위 삼고 싶어신디, 겅할 줄 알았쪄. 너같이 멀쩡한 놈이 임자 없는 게 말이 되어? 별 오징어 주꾸미 같은 놈들도 꼴값 떨고 다념신디.”

아, 내 존재가 달갑지 않으신 거로군. 멋쩍어진 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슬쩍 눈치를 살폈다. 아주머니는 계속 불만을 쏟아 내시면서도 손을 놀리지 않았다. 보랏빛 봉지를 단번에 뜯어내 벌리며 종류별로 한 움큼씩 넣었다.

“저, 오늘은.”

“돼서. 맨날 애들 것만 사지말앙, 곱딱한 애인 먹을 것도 챙기라. 저추륵 맛있댄 하는디. 양, 애인이 단골이라 서비스 주는 거난 잘 먹읍써양.”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봉지를 내밀길래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좋을 땐 게. 저 깎듯이 바른 놈도 애인 앞에서는 별수 없고. 그래도 애인 간수 잘합써. 문방구집 총각 넘보는 집들 많암씨난.”

서은오는 농담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꽤 진지하게 들었다. 그때 떡집 아저씨가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오셨다. 서은오는 봉지를 쥔 손으로 상자를 받아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봉지를 나눠 달래도 못 들은 체하고 앞서갔다.

“네가 뭘 들어.”

“짐 들어 준다구.”

“과자나 먹어.”

너 들게 할 거면 버리고 오는 게 낫다고, 길 잃지 말고 잘 따라오기나 하라며 한 발짝 앞서 걸었다. 절대 짐 나눠 들 일은 없다는 뜻의 다른 문장들을 이따금 중얼거리면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크게 드리운 천막이 곧 끝나는 지점에서 기름 냄새를 풍기는 호떡 자판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천막 밖까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호떡을 나눠 먹었다. 자연스럽게 그 줄에 합류했다. 내가 멈춰 선 줄 모르고 몇 걸음 더 걷던 서은오는 옆자리가 허전한 걸 눈치채고 돌아보았다.

픽 웃으며 다가온 그에게 말했다.

“2천 원만.”

현금이 없어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서은오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코트 주머니에서 꺼내 가라는 뜻이라 손을 넣어 지폐를 꺼냈다.

“너도 먹을 거야?”

“아니.”

“그럼 진짜 나 먹을 것만 산다.”

“응.”

“딱 2천 원어치만 살 거야.”

“그래.”

줄이 줄어들 때마다 서은오와 나는 조금씩 전진하며 말없이 순서를 기다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했다. 순서가 되자 하나는 종이컵에 담아 받고 나머진 포장해 달라고 했다.

다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서은오는 한 팔에 무거운 봉지와 묵직한 떡까지 옆구리에 끼고 있는데, 내가 든 것이라곤 과자 봉지와 기름 묻은 호떡 봉지가 전부라 조금 계면쩍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널 따르려 했는데 나만 소풍 온 것 같잖아, 꿍얼대면서도 후후 불어 호떡 식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뜨거워. 천천히 먹어.”

아무리 생각해도 서은오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인 게 분명했다. 호떡을 먹느라 걸음이 느려진 나를 얌전히 기다려 주며 쳐다보기만 할 뿐, 한숨을 내쉬거나 앞서가는 일이 없으니까.

“왜 그렇게 봐? 한 입 줘?”

뜨겁고 다디단 호떡이 입 안에서 녹아 갔다. 맛있어서 한 입 더 뜯어 먹는데 서은오가 오물대는 내 입술만 쳐다보았다. 호떡을 내밀자 안 먹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더러워서? 새것 꺼내 줘?”

내 말에 서은오는 어이가 없단 듯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러곤 조금 복잡해 보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닌 거 알면서, 왜 그렇게 말해.”

“응?”

“그럴 리가 없잖아. 차라리 직구를 쳐. 간 떨어지게 장외로 치지 말고.”

“…으응?”

“나 이런 거 처음이라 잘 몰라.”

갑자기 진지한 말투에 놀란 나는 눈만 깜빡거렸고 서은오는 조금 굳은 얼굴로 하던 말을 이었다.

“너 그렇게 말할 때마다 좀 무섭다고.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봐.”

침을 꼴깍 삼켰다. 좀 무섭다는 사람에게, 긴장한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안하지만, 미치도록 짜릿해라.

“안 더럽단 얘기지?”

“네가 씹다가 뱉어도 먹어.”

단호하게 대답하며 호떡을 덥석 무는 행동에 입을 틀어막았다. 호떡이 싫을 뿐이라고 한쪽 눈썹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씹다가 뱉은 것까지 먹을 수 있단다. 그런 소린 처음 들어 봐서 심장이 요동쳤다. 한여름 취향 뭐야. 뭐, 그런 말에 심장이 뛰어?

“은오야, 너 조금 낯설다.”

“뭐가.”

“사랑할 땐 뜨겁구나.”

그 말을 뱉고 희희 웃었다. 서은오는 복권 당첨된 사람처럼 헤실대는 나를 한참 보다가 가자며 턱짓했다. 다시 걸었다. 시동이 꺼진 차에 짐을 싣고 차에 앉아 호떡을 뜯어 먹으며 나를 멍하니 관찰하는 서은오의 눈빛을 다 받아 주었다. 호떡을 다 먹자마자 휴지를 꺼냈다. 설탕 때문에 끈적해진 입술을 닦으려는데 등받이에 손을 짚은 서은오가 고개를 틀어 왔다. 닦고 하자고, 끈적하다고 중얼거렸지만 못 들은 체하고 내 입술을 빨았다. 묻었는지도 몰랐던 턱 끝의 꿀을 핥는 애인 때문에 달콤하게 오전을 날렸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허리가 나가게 음식을 장만했다. 서은오는 하지 말라며 툭하면 만류했고, 내가 손대는 것마다 수습이 필요해 어쩐지 일이 늘었지만 다른 날도 아니고 할머니 제사라는데, 게다가 객식구 노릇하며 탱자탱자 놀던 내가 오늘까지 놀 순 없어서 거든 것뿐인데 서은오는 지나치게 신경 썼다. 다음부턴 안 할 거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거라고, 엄마가 기독교인이라 원래대로라면 상은 안 차리는 게 맞다며 귀여운 얘기를 줄줄 읊었다.

“뭐야, 그거. 너 지금 어필해?”

“…어느 부분이 어필로 들려?”

“원래 제사 없는 집이다, 결혼하면 상 차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런 기류 아냐?”

멍하니 있던 서은오는 대꾸 없이 시선을 내려 다시 전을 부쳤다. 동네 분들이 하나씩 해 오신다고 하여 나물과 전만 준비하는데도 온몸이 쑤셨다. 아아, 곡소리를 내며 거실로 엉금엉금 기어가 대자로 뻗었다.

열린 창으로 노을이 지는 하늘이 보였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의 오후였다. 기름 냄새가 온 집 안에 진동하고 삼삼한 나물 냄새도 간간이 풍겨 오는 나른한 순간이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꺼풀의 운동이 느려졌다.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이다가, 보이지 않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찬 바람이 살살 불었다. 조금 으슬으슬하다고 느껴졌을 때 모로 돌아누웠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다. 살짝 머리가 들리는 기척에 눈을 뜨니 어두워진 하늘이 보이고 서은오도 보였다. 그사이 전을 다 부쳤는지 어지러웠던 식탁이 정리돼 있었다.

“일어났어?”

“응.”

머리칼을 넘겨 주는 손의 온도가 좀 차가웠고 비누 냄새도 묻어나 기분이 좋았다. 뒤통수가 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내 머리 아래로 베개를 넣어 주고 담요를 덮어 주는 기척에 잠에서 깬 것을 알았다.

“파스 있어?”

한참을 서로 바라만 보다가 서은오에게 물었다.

“어디가 아픈데.”

“다 쑤시는데.”

“마사지해 줄게.”

“특히 허리…….”

침묵이 흘렀다. 당혹스러워하는 서은오만큼이나 나도 당황했다. 온몸이 다 쑤신다는 문장과 내 이어질 말에는 쉼표가 있었고 그 쉼표 사이에 서은오가 끼어들었다. 애인이 됐다고 잠시도 아픈 걸 못 견디겠다는 듯 서두르는 행동이 좋긴 했으나 오늘은 경건해야 하는 날이 아닌가. 경건함과 멀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와 곤란했다. 굳은 듯 움직임이 없던 서은오가 천천히 담요를 들쳤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 서은오가 중얼거렸다.

“엎드려.”

입술을 말아 문 나는 시키는 대로 몸을 돌려 누웠다. 곧 조심스러운 손길이 허리에 닿았다. 허리를 잡은 손이 두 개가 되고 허리 전체를 부드럽게 눌러 왔다. 찌릿하면서도 시원해 신음이 튀어나왔다. 억지로 입 안을 씹으며 소리를 참아 냈다. 긴장감과 이상한 감각에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침묵 사이로 옷감이 마찰하는 소리만 끼어들었다. 사락사락.

숨을 쌕쌕 내쉬며 얼굴만 슬슬 붉히던 나는 마당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황급히 떨어졌다. 떼굴떼굴 굴러가는 나를 서은오는 멍하니 응시했다.

“안에 이시냐?”

별채 입구에서 할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곧이어 완두콩들의 목소리도 울려 퍼졌다. 삼촌, 이모! 하고 부르는 음성에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왔다. 우당탕, 마루를 밟고 올라와 집 안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발소리가 나고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치는 할머니의 음성도 잇따라 들려왔다.

“은오 할머니, 죄송합니다. 손주분이, 너무, 너무 그러네요…….”

차마 손주분이 섹시하다는 고백은 할 수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허공에 대고 주절대던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빨개진 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늦지 않게 도망쳐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다가도 홀로 남은 서은오가 나를 어이없게 여길 거라 상상하니 뒷덜미가 뜨거워졌다. 마사지해 준 것뿐인데 혼자 얼굴을 붉히며 흥분하다가 도망쳐 버린 나를, 욕망덩어리 어쩌고 하더니 정말 천지 분간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엄마 제사인데 서은오가 막, 어? 얼굴 붉히고 달려들면. 달려들면…….”

비죽, 웃음이 새서 이마를 짚었다. 상상만 해도 섹시해서 심란했다. 미쳤다고 나를 비난하면서, 괜한 상상을 해 엄마에게도 사과하면서 속도 없이 걔가 좋아서.

“엄마는… 이해하지?”

익숙한 무응답 앞에서도 나는 슬프지 않았다. 문을 열어 사랑을 끌어안으라고,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하라고 삶의 팁을 알려 준 사람이 나를 비난할 리 없으니까. 종일 슬퍼하지 말고 아주 잠시 동안만 자신을 추억하며 웃어 달라고 적어 놓고 떠난 사람이니까. 언젠가는 은오에게 말해 주어야겠다. 너만큼은 나를 후레자식으로 만들어도 좋다고. 그런 자식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남자라고.

찬물에 손을 씻어 내고 얼굴에 손부채질해 가며 열을 식혔다. 한참 만에 욕실에서 나오자 완두콩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느새 별채를 채우는 인원이 늘었다. 해녀 할머니 몇 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를 뜨겁게 했던 서은오는 어른들의 지시에 따라 상을 차리느라 바빴다.

바깥은 이제 완전한 어둠에 가까웠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노란 불빛으로 밤을 밝히며 떠나간 누군가를 떠올렸다. 나는 완두콩들과 나란히 앉아 아이들을 진정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지루해하지 않도록 조율하며 추모 자리에 껴 있었다.

한 상 가득 제사상이 차려졌다. 어느새 서은오는 새카만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반듯한 자세로 정종을 따라 상에 올리고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이 순간만큼은 서은오가 사랑했을 그녀가 평안하기만을 바랐다. 오로지 그것만 바랐다.

밤이 더 깊어 가고 그녀의 동료였던 해녀 할머니들이 차례대로 상 앞에 술 한 잔 올릴 때 서은오가 곁으로 다가왔다.

“인사, 해 줄래? 꼭 안 해도 되지만.”

곯아떨어진 지율을 보며 슬쩍 웃던 서은오가 긴장한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내가 해도 되는 거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서은오의 단단했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함께 상 앞으로 갔다. 서은오가 나를 데리고 상 앞에 섰을 때 할머니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나셨다. 적막 가운데 우리는 느리게 움직였다. 내가 잔을 들고 서은오가 술을 따라 주었다. 이렇게 돌리면 돼, 하고 허공에 시범을 보인 서은오를 따라 세 개의 향 위로 술잔을 돌린 후 조심스럽게 상에 올렸다.

“…그렇게 소원하시던 내 애인.”

그 말을 끝으로 서은오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곧은 자세로 정면만 바라보았다. 도드라진 턱이 그가 얼마나 많은 말과 슬픔을 참아 내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상복마저 어울릴 필요는 없는데, 서은오는 어째서 슬픔과 달빛과 외로움과 차가움을 가리키는 상징과 어울릴까. 지켜보는 내가 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애써 밝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은오 할머니. 제가 너무 늦었죠. 죄송해요.”

내 말에 서은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의아한 기색이 묻은 눈빛에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이어 말했다.

“손주며느리가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은오가 애인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소원하시던 모습을 보셨을 텐데요.”

우리끼리 속닥거리고 있지만, 어쩐지 눈치가 보여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할머님들은 없었다.

“은오는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서은오가 웃었다. 소리 없이, 어이가 없는 듯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아랫입술을 혀로 쓸었다.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표정이라 손을 잡았다. 너도 무슨 얘기라도 하라고 눈짓을 하자 잠시 바닥을 응시한 서은오가 입을 열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이제 헛짓 안 할 거니까. 헛짓하면 슬퍼할 사람, 여기 있으니까.”

우리는 가만히 지방을 바라보았다. 얽힌 손을 더욱 단단히 고정하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소란해졌다. 주방에 있던 할머니들의 분주함이 상이 차려진 방 안까지 밀려들어 왔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우리는 고개를 돌려 문밖을 살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등장한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을 보고 나도, 서은오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나도 술 한잔 올리려고 하는데, 좀 비켜 줄 수 있을까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한 기품이 묻어나는 중년 여성이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분위기를 가진 여자가 나와 서은오 그리고 얽힌 손까지 번갈아 보며 말했다. 벌떡 일어나 물러났다. 떨어진 손을 허망하게 지켜보던 서은오는 하얗게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비켜나지도, 술을 따라 주지도.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나? 자리에서 비켜서려면 손이야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건데도 서은오의 표정이 참담해서 가슴이 뛰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차분하게 움직이는 그녀보단 그의 표정이 더 신경 쓰였다.

“형 제사는 나 몰라라 하더니, 관계도 없는 사람 제사는 챙기는구나.”

“…….”

그녀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홀로 정종을 따르고 술잔을 상에 올렸다. 자의로 무릎을 꿇었던 서은오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자 어쩐지 강제로 무릎이 꿇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 이상 없는 약간은 무뚝뚝한 모자 사이라고 여기겠지만, 나는 서은오에게 진실을 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오셨어요.”

서은오가 입을 열었다. 피식 웃은 그녀가 서은오를 돌아보았다.

“언제 한국으로 들어왔냐고 묻는 거니? 아니면, 이 시골까지 어떻게 왔냐고 묻는 거니.”

“…….”

“비행기 타는 일은 아주 쉬웠단다. 여기가 먼 곳도 아니고. 내 아들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인들 못 갈까.”

“돌아가신 분이 사모님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아시잖아요. 이 집으로 발 들일 생각, 어떻게 하셨냐 묻는 겁니다.”

“사모님? …사모님이라니. 기가 차는구나.”

자조하듯 중얼거린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위아래로 훑는 싸늘한 눈빛에 입 안이 말랐다. 시선을 가져오려는 듯 서은오가 나가 달라고 얘기했지만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잘도 그렇게 부르는구나.”

“그만 돌아가시라고요.”

“누구니.”

그녀가 일어서며 물었다. 내게 다가오는 그녀보다 서은오가 더 빨랐다. 내 앞을 가로막고 다시 나가 달라고 읊조렸다. 모자 사이라고 느낄 수 없는 대화였다. 이 집에 있던 많은 사람이 다 돌아간 것처럼 고요함이 느껴졌다.

“서은오.”

서은오가 방패막이처럼 나를 다 가리고 섰으나 보이지 않아도 그녀의 눈빛이 느껴졌다. 서은오를 뚫어서라도 나를 알아야겠다는 의지가 그 형형한 안광에서 드러났다.

“김 비서는 아무 말이 없던데 어떻게 된 걸까. 아들. 아들이 기어이 걜 매수했니?”

“저 찾으러 오신 거면 날 잘못 잡으셨어요. 말씀드린 날짜에 갈 테니까.”

“네가 뭔데 집에서 나가겠다고 통보해?”

“…….”

“이제 너 혼자 행복하겠다? 이 지옥에서 나만 놓고 가겠다? 누구 마음대로. 누가 허락해서? 은오야,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평생을 당당하게 살아온, 그 누구도 나 자신보다 귀중하지 않으니 절대 기죽지 말라던 부모의 가르침도 단번에 지워 내 버린 여자였다.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 서은오의 하얗고 큰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왼손이 파르르 떨렸다. 억지로 참아 내려는 듯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다시 느리게 펴내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넋 놓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멈칫하며 굳은 손이 거짓말처럼 떨림을 멈추었다. 이윽고 강하게 얽히는 손가락.

“돌아가세요. 지금 당장. 안 가시면 끌어낼 겁니다.”

“…뭐?”

“내 인생에서 당신 끌어낼 거라고.”

“서은오. 너, 네가 감히.”

“배은망덕한 새끼한테 뭘 바라세요.”

말문이 막힌 그녀는 한참을 시근덕대다가 돌아섰다. 방을 나서기 전 잠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오롯이 나를 향해서 나도 피하지 않았으나 서은오의 넓은 등이 시야를 막았다.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던 서은오가 나를 마주했다.

“여름아.”

문턱 너머는 여전히 고요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집에 은오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할 만큼 적요했다.

“부탁 하나만 하자.”

애수에 젖은 눈빛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모한 부탁이라도 좋았다. 어떤 말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내 손을 잡고 뺨을 만져 오던 서은오가 말했다.

“아무도 만나 주지 마.”

“응?”

“누가 따라오든, 불러내든, 막아서든 너는 네 갈 길 가. 아까 그 사람이 널 부르면 따라가지 말고 나한테 전화해.”

“…은오야.”

“내가 해결할게. 그러니까 넌 지금처럼 나를 봐 줘.”

그가 허리를 당겨 안았다. 태산같이 큰 서은오가 빈틈없이 붙어 왔다. 불규칙한 숨소리에 등을 쓸어 만졌다.

“뭘 걱정해?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래.”

“그분, 나한테 중요한 사람 아니야. 그런 사람은 내게 상처를 줄 수 없어.”

“…날카로운 말을 할 거야. 협박도 할 거고. 따르지 않고는 못 버틸 만한 무언가로 협박할 게 뻔해.”

“왜? 내가 너 같지 않아서? 평범한 가정의 자식이라서?”

그녀가 서은오에게 혼자 행복해지려고 하느냐고 비난한 것을 들었으면서도 순진한 질문을 했다. 일말의 희망이었다. 반대의 이유가 흔히 짐작해 볼 만한 이유이길 바랐으니까. 정혼자가 있다든지, 내 아들에게 넌 너무 부족하다든지.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는가. 나는 그런 진부한 장면에 매번 다른 음악을 깔았다. 나라면 울먹이는 얼굴로 순순히 헤어짐을 말하지 않을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서은오.”

하지만 진부하다고 여겼던 장면이 내 일상에 겹쳐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고 말할 생각은 지금도 전혀 없었다. 다만, 차라리 돈 봉투 세례를 맞는 게, 나았다. 그 자리에서 탐탁지 않은 눈빛을 받으며 비난받는 게 나았다. 나는 상처받지 않을 자신 있고 그 돈으로 서은오와 데이트를 할 거니까. 아니면 눈앞에서 봉투를 찢는 방법도 있으니까. 아드님 몸값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흥정하며 나를 깔아뭉개려는 상대를 열 받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나를 건드리면, 나만 건드린다면.

“그래야 내가 다시 불행해지니까.”

코끝이 아려 왔다.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나를 불러내는 이유가 오로지 서은오의 앞날이 아닌 그의 불행을 위해서라면 나는 유쾌하게 행동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알았어. 알아봤어.”

한숨 같은 말이 귓가에 쏟아졌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살면서 지금처럼 좋은 순간이 없었어. 그 사람은 그걸 보자마자 알아챘어. 그게 네 덕분이라는 것도. 그러니 하던 대로 하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떼어 놓으려고 하겠지.”

“…은오야.”

“약속해 줘. 그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고. 낌새라도 보이면 내게 전화하겠다고.”

“그럴게.”

나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남자에게 기다리던 대답을 해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원하는 대답을 수없이 속삭이는 것과 넓은 등을 쓸어 주는 일이 최선이었다.

“그럴 거야.”

매달리듯 강하게 안아 오는 남자를 오래도록 마주 안았다.

한참 만에 방을 나온 우리는 상을 치우고 제기 그릇을 닦으며 애써 말을 삼갔다. 할머니들은 아까 온 여자가 누구냐고 떠들었다가 지율의 할머니가 호통을 치자 입맛을 다시며 정리를 서둘렀다. 손이 많아 정리가 빨랐다. 그녀들은 떡과 남은 음식을 나눠 담은 봉지를 하나씩 달고 집을 나섰다. 서은오와 나는 분위기를 침잠하게 만든 이를 억지로 지워 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래. 쉬어라.”

손을 흔들며 얼른 들어가라고 외치는 그녀들을 끝까지 배웅했다. 밤이 깊었다. 까만 하늘에 둥근달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멍하니 달을 보고 있는데 이제 씻으라며 서은오가 안채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씻고 오겠다고 답했다.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인 서은오가 안채 문을 닫고 별채로 향했다.

옷가지를 챙겨 욕실로 들어온 나는 잠시 욕조 끝에 걸터앉았다. 긴 한숨이 나왔다. 불청객이 다녀간 순간이 꼭 꿈만 같았다.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신문이나 티브이에서만 봐 오던 그녀는 등장부터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했다. 기사 사진엔 늘 우아하게 웃는 모습만 담겨서 더 압도당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처럼 고압적인 시선과 싸늘한 분위기는 처음 목격하는 거니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떠올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향냄새와 음식 냄새가 밴 옷을 벗어 내고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 섰다. 정수리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녀의 생각도 함께 씻어 내 주길 바라며 오래도록 뜨거운 물을 맞았다.

몸을 씻고 나니 개운함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나왔다. 동시에 나 때문에 주인을 잃은 방문도 삐걱거리며 열렸다. 열릴 일이 없는 문이 갑자기 열려 흠칫한 나는 빛 사이로 드러난 말간 얼굴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키스를 부르는 얼굴이야.”

“여기.”

서로의 말이 맞물렸지만 내가 일 초 정도 빨라서 서은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멍하니 서 있던 서은오는 곧 피식 웃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내 허리를 바짝 당겼다. 몸이 맞붙고 시선이 얽혔다.

“해, 그럼.”

낮은 음성이 군더더기 없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적막과 야릇한 분위기가 주위를 휘감았다. 아랫배가 이상했다. 아찔하게 닿는 묵직한 느낌도. 함부로 농담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키스를 부르는 얼굴이라는 것은 사실이나 그걸 말로 옮길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묵직한 무언가를 느끼고 등줄기가 선뜩해져 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떨어졌다.

“로션 좀 바르고 할까?”

얼른 돌아서며 뜨거워진 숨을 내쉬었다. 한 걸음 떼자마자 숨이 턱 막혀 왔다. 서은오가 뒤에서 나를 안았다. 뜨겁고도 묵직한 것이 느껴져 입 안이 사막처럼 말랐다. 상체를 숙이며 내 목덜미와 귓불, 뺨에 입술을 내린 서은오가 속닥거렸다.

“잠깐 하고 바르면 안 돼?”

“응……. 지금 하면 큰일 날 거 같아.”

피식 웃은 서은오가 나를 놓아주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안 천천히 뒤따르는 걸음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았다. 서은오와 나는 이제 아주 쉽게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순식간에 달라지는 분위기 탓에 놀란 게 아니었다. 새삼 이제 와 빠르다고 느꼈을 리도 없고.

다만 아까 그 묵직한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서은오와의 숱한 포옹에서 아래까지 완전히 맞닿는 포옹이 없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천천히 크림 뚜껑을 열었다.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머릿속은 바빴다. 벼락치기 하는 수험생처럼 빠르게 책장을 뒤적거렸다. 기억의 책장, 이를테면 지난 애인들의 크기. 관계 전 성병 검사를 거절한 사람과는 더 볼 것도 없이 헤어졌으나, 그렇다 해서 내가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섹스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한 관계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런 묵직함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작은 크기는 아녔는데…….

한마디로 좀 전의 그 느낌. 그건 겪어 본 적 없는 크기가 분명했다. 내가 진지한 생각에 잠겨 심각한 표정으로 크림을 바르는 동안 서은오는 문가에 기대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슬쩍 돌아보자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발라.”

“어?”

“얼굴 터지겠다.”

터지겠다는 말에 어떻게 알았느냐고 소리칠 뻔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태연한 척 마찰에 의해 붉어진 얼굴을 거울로 확인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거칠게 바르는 게 습관이 됐다 대답하며 머리칼을 감싼 수건을 풀어냈다.

드라이어를 켜고 강풍에 머리를 말렸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지루한 순간에도 서은오는 내 쪽을 향해 서 있었다. 옆얼굴이 따가워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연애가 처음이라 그런지 숨기질 못하니까. 오롯이 닿아 오는 뜨거운 시선을 돌아보았다. 천천히 다가가자 옆방을 턱짓하며 중얼거렸다.

“방 치워 놨으니까 저기서 자.”

“침대 있는 방?”

“응.”

“왜?”

“허리 아프다며.”

한파에 산책하겠다고 설치다가 감기에 걸린 날, 나를 밤새 간호한 그를 두고 오만 가지 생각을 했다. 친구 이상인 관계라면 서은오는 어떤 애정을 쏟아부을지 궁금했다. 그의 다정함에 속이 뜨거웠다. 그를 가지고 싶어 애가 탔고 이런 마음은 욕심이라며 지워 내려고 노력했다.

애인이 되기 전, 그러니까 고백하기도 전에 서은오는 이미 내게 다정을 나눠 주었지만, 어쨌거나 애인이 된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예상한 대로 빼곡하니까. 잠시 요리하는 걸 도왔다고 찌뿌둥해진 나를 늦은 밤까지 걱정하며 먼지 낀 방을 치워 내는 애정이라니. 게다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의 등장으로 혼이 나가 있으면서도 틈틈이 나를 생각했다. 심장에 해로울 만큼 다정해서 침잠한 기분이고 뭐고 진짜 일을 치르고 싶었다.

“같이 자자.”

“…….”

“안고만 잘게.”

서은오가 헛웃음을 쳤다. 안고만 자겠다고 매달리는 내게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좁아진 미간이 완강한 거부를 대변했다. 포기를 잘 모르는 나는 그의 허리를 껴안고 고집을 부렸다. 목을 당겨 턱과 뺨에 입 맞추었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항복했다. 앞장선 그는 자기가 쓰던 침대가 있는 방문을 열었다.

“…….”

“…….”

불을 끄고 나란히 누운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마 불청객만 다녀가지 않았다면 일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사랑으로 넘치는 마음을 입맞춤이 아니면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나.

하지만 서은오는 내게 등을 지고 누웠다. 이불도 덮지 않고 떨어질 것처럼 침대 끝에 붙어서. 팔짱을 낀 채로 모로 누운 넓은 등을 보다가 슬금슬금 움직여 등에 딱 달라붙었다. 허리를 둘러 안으니 단단한 근육이 만져졌다.

“일부러 이러는 거지.”

서은오가 말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어차피 잠 설칠 거면 차라리 네 생각 하면서 설치라고.”

외롭고 우울하게 잠들지 말라는 뜻이야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 있던 건 아니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하고 있으면 잠을 설친다니? 두근거려서 설친다는 거겠지? 진실을 알고 싶었으나 괜히 꼬치꼬치 캐묻긴 싫어서 침묵했다. 얼마 안 가 하품이 나왔다. 심란할 애인부터 재우려고 했는데 잠이 수마처럼 몰려왔다. 연신 하품을 해 대니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한 나를 비웃듯 서은오가 중얼거렸다.

“자. 종일 고생했잖아.”

“내가 뭘 했다구. 고생한 거로 치면 너는 진작 기절했어야지. 그리고 나 잠들면 너 나갈 거잖아.”

“안 가.”

“믿으라고? 지금도 계속 등만 지고 있으면서.”

서은오는 내 투정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원래 사귀면 다 이래?”

“응…….”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몽롱한 잠기운에 잠겨 서은오의 목소리에 아무 대답이나 해 댔다. 서은오가 웃은 것도 같은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 확신할 수 없었다. 마주 보고 누웠대도 확인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난 이제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일을 포기했으니까. 여름아,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무거워졌다는 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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