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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겨슬 점빵 (7/14)

6. 겨슬 점빵

군용 담요까지 챙겨 오셨다니 너무 본격적인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해녀 모임이 왜 서은오의 별채에서 이루어지는지 의아해하던 나는 어느새 할머니들 틈에 끼어 패를 훔쳐보고 있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화투판에 침을 꼴깍 삼키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할머니들은 풍경화 보듯 패를 감상하는 서울 아가씨가 같잖았는지 웃으며 한 판 하라고 권했다가 느린 속도로 판을 망치는 것에 실망하곤 바로 등을 돌리셨다.

“아기는 구경만 하라.”

한마디 남기시곤 패를 돌렸다. 아기야, 눈꾸녕 빠지켜. 재미시냐? 아기야, 귤 먹으라. 아기야, 아기야, 하고 자꾸만 아기라고 부르시니 서른셋이나 먹은 나로서는 어쩐지 동갑인 서은오의 눈치가 보이고 계면쩍어서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저 서른셋인데요.”

수줍은 시선 처리와 미소에 패를 맞춰 보던 할머니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짧은 침묵 끝에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많이도 잡수셨소.”

“뭐랜? 한창 좋을 때라고 자랑질하맨?”

“아가씨, 5학년 1반인 나도 여기선 애기라 불려마씸.”

할머니들 사이에서 애기해녀라고 불리는 아주머니가 깔깔거렸다. 멀리서 대합탕을 끓이던 서은오가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너 뭐 해? 어디서 주름 잡다가 혼나? 하고 꾸짖는 것 같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저, 은오하고 친구인데, 은오한테는 아기라고 안 하시니까, 혹시나 하구요.”

“아휴, 아꼽다. 아꼬와.”

내 뺨을 톡톡 치며 웃는 할머니를 따라 나도 입꼬리를 올렸다.

“야야, 어디서 밑장을 뺌시냐? 너 영 할꺼냐? 대장 있어시믄 너 진작 쫓경나서.”

팽팽한 눈치 싸움이 잠시 풀어진 틈을 타, 한 할머니가 손장난을 쳤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슬그머니 거실을 빠져나와 주방으로 발을 들였다.

바깥은 소리 없이 젖어 갔다. 부슬비가 창을 적시는 모양을 응시하다가 넓은 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파전을 부치며 대합탕이 올라간 가스 불을 줄이는 몸짓을.

가까이 다가가자 고소하고도 짭짤한 냄새가 풍겼다. 파전이 노릇노릇 먹기 좋게 부쳐지고 맑은 대합탕에선 하얀 연기가 솔솔 올라왔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내가 온 것을 곁눈질로 알아챈 서은오가 가스 불을 완전히 끄고 새 수저에 국물을 떠 코앞으로 대 주었다. 간을 보라는 뜻인 줄 알고 후후 불어먹었다. 먹자마자 엄지손을 들었다.

“넌 정말 못하는 게 없어?”

“한식이 더 편하긴 해. 배운 게 그거라.”

헛웃음이 나왔다. 중식이나 일식, 양식 같은 요리 종류를 물은 게 아닌데 서은오는 겸손을 갖춰 진지하게 답했다. 와중에도 손은 쉬지 않았다. 국자를 집고 오목한 국그릇에 국을 퍼 담아 쟁반에 올려놓았다. 자리가 모자라 다른 쟁반도 꺼냈다. 수저 세트와 소주, 소주잔을 챙기면서도 나에게 들고 따라오라는 말도 없이 국그릇을 담은 쟁반만 챙겨 떠났다. 그 등을 세모꼴로 흘겼다. 자기가 두 번 왕복하려고 한 것이 분명해서 얼른 남은 쟁반을 들고 쫓아갔다.

“은오가 고생햄쪄.”

게임을 끝낸 건지, 중단한 건지 담요를 한쪽으로 치우며 낮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겅하난 딴 집에서 하주. 주인 바뀐 집에서 할망들이 패나 돌리고. 대장이 이 꼴 봐시민, 자기 새끼 고생시킨다고 난리 쳤을 건디. 대장, 억울하주게? 게믄 난중에 만나믄 혼냅서양. 끽소리 안 하고 혼나크매.”

“대장은 다 이해하주게. 봐달랜 골을 사람은 따로 있주. 은오야, 이해허라이? 겨슬 점빵에서 모영 버릇해사난게.”

“돼서. 이미 와부러신디 앞으로 조심하믄 되주. 이야, 음식 빛깔 좀 봅서. 냄새에 군침 돌아신디 모양도 곱딱한게.”

“은오가 할망 닮앙 손맛이 좋주게.”

“게난 색시가 좋으켜, 좋으켜 해신디, 어떵? 좋으냐?”

수저를 내려놓는 내게 갑자기 시선이 몰렸다. 대장. 겨슬 점빵. 할머니. 자기 새끼. 그 연결 고리만 골몰하느라 질문을 놓친 나는 일단 웃었다. 뭔지는 몰라도 동조해야 할 것 같아 천천히 끄덕거리자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깔깔 웃으셨다. 틀리지 않았구나 싶어 세차게 끄덕였다가, 어른에게 너무 버릇없나 싶어 슬쩍 엄지손을 올렸다.

나를 보던 서은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야이네 좀 봅서. 할망들 언제 국수 먹게 해 주크냐?”

“청춘들 그만 놀리고 회의나 하게. 낼모레믄 알다시피 대장 기리는 날 아니? 은오가 한 번은 지 손으로 하고 싶댄 골았지만, 대장 좋아하는 거는 우리가 잘 아니까 하나씩 해 오믄, 은오는 손 덜엉 좋고, 우리도 성심 다한 치레 되난 좋은 거 아니. 난 빙떡 하크라. 삼춘들은 뭐 하잰?”

심각한 대화에 발걸음 소리도 죽이고 거실을 나왔다. 먼저 주방으로 간 서은오는 술과 파전, 남은 대합탕을 식탁으로 옮겨 놓았다. 서은오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까 할머니들 왜 웃으신 거야? 넌 왜 눈을 질끈 감았고?”

“질문이 뭔지도 모르면서 대답을 왜 해.”

내 잔에 술을 따르던 서은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딴생각했다고 하면 버릇없어 보일까 봐 그랬지.”

“못 알아들은 건 아니고?”

“무슨 소리야. 다 알아듣거든? 네 생각 하느라고 못 들은 거거든?”

자기 잔에 술을 붓던 서은오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내 생각을 왜 해. 코앞에 있는데.”

“코앞은 무슨. 숨결 정돈 느껴져야 코앞이지.”

“그래. 가까이 있는데 생각할 게 뭐 있어. 묻고 따지면 그만인데.”

턱을 괸 채로 실실 웃었다. 서은오는 내 웃음을 봤으면서도 딴청 부리지 않았다. 됐다, 물은 게 잘못이다, 혹은 못 들은 거로 해라,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산통을 깨며 고고해지면 그만인 사람이 내 입술과 눈을 번갈아 살폈다. 나는 그게 이상하고도 좋았다.

“넌 상대가 눈앞에 있다고, 그 사람 생각을 안 하니?”

“무슨 뜻이야.”

“네가 눈앞에 있어도 함부로 만질 수는 없잖아. 그럼 난 널 지척에 두고도 네 생각을 하는 거지. 내 머릿속에서 넌 주로 벗고 있거든. 손대면 쓰읍, 하는 태도로 도망가라고 경고하는 현실의 너보다, 입 닫고 벗고 있는 이쪽이 더 좋아.”

서은오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소주를 마셨다. 서은오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심각한 얼굴을 한 서은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상상이 돼?”

“뭐?”

“안 보고도 그게 어떻게 되냐고.”

“왜 안 봤다고 확신해? 봤어. 봤잖아.”

태연한 대답에 눈빛이 흔들렸다. 함께 있던 지난날을 샅샅이 뒤지는 눈빛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평한 소리나 해 댔다.

“아까 할머니가 뭐라셨는데?”

“…색시. 내 색시라서 좋냐고.”

서은오는 자기가 순순히 대답해 주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멍한 얼굴로 대체, 언제, 어떻게 벗은 몸을 보였는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제 넋을 놓은 건 나였다. 갑자기 얼굴이 홧홧했다. 서은오의 색시라서 좋으냐는 질문에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거다. 그것도 모자라 엄지까지 들면서.

붉어진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열기를 식히는데, 칠흑 같은 눈동자에 내가 잡혔다. 머뭇대며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서은오가 가여워서 이실직고했다.

“한파에 산책 가자고 한 날. 내가 문 열어서, 그때 웃옷 입으면서 걸어왔잖아.”

그제야 짧은 숨을 내쉰 서은오는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넘겼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도 여러 가지다.”

노기 없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빈 잔을 채워 주었다. 건배하자고 잔을 내밀었다. 무심한 손길로 짠, 부딪쳐 오는 단정한 손을 오래도록 눈에 담으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을 느꼈다. 수저를 들었다. 대합탕을 떠먹고 파전을 찢어 먹었다.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할머니들의 토론을 훔쳐 듣다가 불시에 입을 열었다.

“겨슬 점빵이 네 문방구를 말하는 거야?”

“…….”

그렇다, 아니다, 그건 왜 묻느냐고 타박하며 넘길 거라고 예상했던 나는 길게 침묵하는 서은오를 응시했다. 천천히 잔을 채운 서은오는 턱이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세게 물더니 이내 나를 마주했다.

“옛날에 외할아버지가 이 자리에서 가게를 했어. 없는 게 없는, 동네에서 나름 유명했던 구멍가게.”

미간이 좁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입술을 말아 물었다. 물어도 될까. 전부터 골몰하던 것이지만 그저 알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물어도 되는 걸까. 시선을 내린 채 고민하던 나는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전에 사투리를 잘 아는 것 같다고 했을 때, 할머니가 상군 해녀라고 했어.”

“그래.”

“지금은 할아버지가 여기서 구멍가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고.”

“응.”

“대장 기리는 날이라는 게, 상군 해녀였다는 할머님 제사를 말하는 거 맞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원하던 답을 들었는데도 이해가 안 됐다.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어떻게 할머니 제사일 수가 있을까. 혹시 말을 잘못한 게 아닐까. 외증조할머니나 외고조할머니를 그냥 외할머니라고 한 게 아닐까.

세상에 알려진 대로라면 서은오의 양가 조부모는 정정하게 살아 계셨다. 의혹은 커지지만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의혹을 가졌던 것이 어이없을 만큼 단순한 일일 수도 있고,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알고 말고는 중요치 않았다. 그 중심에 있는 서은오가 중요했다. 들여다보기만 해도 아픈 상처라면 굳이 들쑤실 필요가 없었다.

“집마다 사연은 있지. 나도 그런 게 있어.”

낮은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서은오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서겨슬. 내 엄마 이름이야.”

“…은오야.”

내가 들어 온 이름은 다른 이름이었다. 이경희.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 갤러리의 관장 이경희.

“사람들이 아는 내 외할머니는 갤러리를 세운 사람이지만, 아니라고. 내 할머니는 여기서 나고 자라 여기서 생을 마쳤어.”

잠시 바닥으로 시선을 둔 서은오가 고개를 들었다.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말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어. 네가 아는 나는 껍데기다, 까놓고 보면 별것 없다.”

“…….”

“그런데 입이 안 떨어져. 말해 본 적 없어서 어려운 줄 알았는데. 그냥 내가 바닥인 걸 들키면 진짜 도망갈까 봐.”

“천천히 해도 돼.”

빈 병이 된 소주병을 내 앞으로 옮겨 놓으며 말을 덧붙였다.

“시간은 허무할 만큼 짧기도 하지만, 또 말도 안 되게 길기도 하거든. 늦더라도 얘기만 해 줘.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마음인지, 네 사소한 모든 걸 다 알고 싶으니까.”

이를 악문 서은오가 눈을 감았다.

“취했나.”

괜한 핑계를 댄 서은오는 큰 몸을 숙이며 식탁에 이마를 기댔다. 숨만 훅훅 뱉어 내는 쓸쓸한 실루엣에 유령처럼 일어나 옆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무거운 숨이 쏟아졌다. 팔을 내려 머리를 쓰다듬자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있었다. 눈가가 축축해진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다시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서은오의 입꼬리가 애처롭게 말려 올라갔다. 애달픈 기색이 묻어나는 입꼬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속닥거렸다.

“그거 알아? 너 눈 감으면 자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것 같다? 지금도 그래.”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서은오가 나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종종 해.”

“기도를?”

“응.”

“뭐라고 비는데?”

“…….”

서은오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등을 겹쳐 잡으며 근사한 미소만 지었다. 한참 만에 얽힌 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서은오가 중얼거렸다.

“다 뺏기고 겨우 하나 얻은 것 같은데. 넌 좋을 게 하등 없어서. 그래서 찾고 있어.”

“뭘 더 찾아? 그만 찾아. 좋다는데.”

“그거뿐이라. 될 이유는 하나고, 안 될 이유는 많고.”

“못 찾으면 어쩔 건데. 계속 안 될 이유가 이기면?”

“…….”

“어쩌면, 우리가 시작하지 못할 수도 있는 거네.”

내가 말해 놓고도 뺨을 맞은 듯 얼얼했다. 우리가 우리로 남지 못하게 될 가정이 쓰리고 미워서, 말이 재수 없어서 화가 났다. 온갖 인상을 다 써 가며 손을 팩 놓는 나를 서은오는 씁쓸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슬픈 얼굴마저 아름다워서 화낼 수조차 없었다. 다시 슬금슬금 손을 내려 겹쳐 잡았다.

“나더러 생각해 보라더니, 우리에게 끝은 없을 거라더니. 뭐가 그렇게 겁나?”

“하루에 하나씩 얘기해 줄까. 왜 안 되는지. 그럼 네가 정신을 좀 차리나.”

“도망갈 준비는 네가 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그건 나를 위한 거다?”

“망설여서 미안하다. 하지만 그건 너 위한 게 맞아. 생각해 보고 도망가야겠다, 싶으면 가.”

“우리 숲에 다녀온 지 이틀 지났어. 안 되는 이유, 몰아서 지금 말해 봐.”

허리를 펴고 앉은 서은오는 왼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맞잡은 손이 조금 떨렸다. 나는 멀쩡했다. 긴장하고 떨고 있는 사람이 나는 아니라는 말이다.

“피해자와 목격자가 같이 있으면 그 꼬리표는 평생 따라다니겠지.”

“뭐?”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황급히 거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할머니들은 나누던 대화에 빠져 계셨다. 생각지도 못한 이유 하나에 심장이 팔딱거렸다. 쓰라린 것도 같았다.

몸을 일으켰다. 내게 딸려 오는 서은오의 팔을 잡아당겼다. 멋대로 서은오의 방문을 열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서은오는 나를 따라 불 꺼진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탁, 전등을 켜며 서은오에게 따져 물었다.

“너 사람들 눈이 무서워?”

내 질문에 서은오는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는 얼굴로 그는 대답했다.

“네 사람들 눈은 무서워.”

“…….”

“너는 귀중하고 특별해서 여름이잖아. 그런 이름을 지어 준 분이 나를 좋아할 리 없어.”

“우리 아빠는…….”

“죽으려고 했어.”

잡은 손이 축축해졌다. 나를 보지 않고 바닥을 응시한 채 서은오는 말했다. 죽으려고 했다고. 벼락같은 침묵이 우리 사이에 떨어졌다. 노곤하게 취한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거실에서 시작돼 온 집 안을 울리는데, 칼날 같은 적막이 서은오와 나를 둘러쌌다. 숨만 쌕쌕거렸다. 빠져나가려는 손을 힘주어 잡았다.

“계속 얘기해.”

“…….”

“해, 서은오.”

안 되는 이유를 고작 두 가지 얘기했을 뿐이다. 사랑 앞에 망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을 두고, 나는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손가락만 접고 있었다. 서은오가 걸어 둔 기한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죽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고통이 크면 차라리 편해지고 싶어져. 그래서 그랬어. 너 만나기 전에.”

“서은오.”

“이 길이 아니면 절대 안 끝나니까.”

“…….”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나. 심할 땐 게워 내고, 더 지랄 같을 땐 기절도 했어. 네가 나한테 떨어질 줄 알았으면, 살 만한 이유가 생길 줄 알았으면 안 그랬겠지. 조금 더 버텼겠지.”

왈칵, 눈물이 차올라 급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얗게 질린 낯빛을 확인한 서은오가 초조한 기색으로 덧붙였다.

“울지 마.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너무 쉽게.”

“여름아, 네가 자책하면 얘기한 거 후회할 거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서둘러 닦아 내며 생각했다. 후회와 자책은 도움 되지 않는 성질이다. 서은오는 보채는 내게, 뭐가 문제냐는 내게 이유를 얘기해 줬을 뿐이다.

“약을 먹어도, 치료를 받아도, 달라지는 게 없었어? 네가 보는 세상은 계속 죽어 있어?”

“나아지고 있어.”

“솔직히 말해.”

“내가 해결할게.”

“해결 못 하면.”

서은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구겨지는 미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사랑은, 은오야. 사랑은 영원하지 않아.”

“…….”

“지금 뜨거워도 시간 지나면 달라져. 날 위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식으면? 사는 게 재미없어지면, 고통스러우면, 내가 더는 너의 살 만한 이유가 못 되면?”

“그렇지 않아.”

“사람 다 똑같아. 안 변할 것 같아도 변해. 그래서 인간이야.”

“…내가 망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어.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 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 자식 잃은 여자보다 가여운 인생은 없으니까. 고통의 팔 할이 그 사람이야. 떠나야 치료가 된다더라. 근데 안 놔줘. 놓아주질, 않았어.”

그 말을 하며 서은오는 희미하게 웃었다. 파르르 떠는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귓가에 떨어지는 낮은 음성에 눈을 감았다.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죽으려고 했던 거, 후회 안 해. 실패한 걸 후회한 적은 있지. 지금은 실패해서 다행이고.”

“은오야.”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물었지. 어떻게 있는 거냐고. 다 던지고 나니까 숨은 쉬라고 보내 주더라.”

“…….”

“그러니까, 내가 해결한다고. 다신 날 망치게 두지 않을게.”

허리와 등을 꽉 끌어안았다. 천천히 말해도 좋다고 해 놓고 나는 그의 여린 속살을 헤집어 지독한 비밀을 움켜쥐었다.

“안 되는 이유가 초장부터 강력하네.”

나의 중얼거림에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나오나.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내게 서은오가 물었다.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어?”

“얼얼할 정도로.”

“…도망갈 마음도, 좀 생겼어?”

팔을 풀지 않은 채 상체만 뒤로 빼 서은오를 흘겨보았다.

“도망갔으면 좋겠지, 아주?”

“반반. 널 생각하면 가는 게 맞는데, 날 생각하면 네가 있는 게 맞아.”

진지한 말과 표정, 눈빛까지 그의 진심이 면면에 묻어났다. 자신보다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이 다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세상에 딱 절반이라는 건 없어. 미세하게 기우는 쪽이 분명히 있거든. 잘 생각해 봐. 어느 쪽이 우세한지. 네 대답에 따라 나는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천사도 될 수 있으니까.”

“눈물이나 닦고 웃기든가.”

서은오가 웃으며 내 뺨을 닦았다. 중얼거리기도 했다.

“잘 웃고, 잘 울고, 잘 화내고, 잘 풀고. 좋네.”

연애 초반이라면 초반인 건데 벌써 나를 다 파악하게 한 것 같아 좀 민망했다.

“그래서, 나를 어떻게 만들겠다고?”

“후자로 하자.”

“아, 아무래도 애인이 천사인 게 좋다, 이거지?”

“네가 있는 게 맞다고.”

어쩔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내 뺨을 만지작거리던 서은오가 말했다.

“그래도 열흘 더 생각할 수 있어.”

“네 살길이나 찾지. 끝까지, 기어코 날짜를 채워야겠어?”

“난 너처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단언할 수 없으니까.”

“가시밭길일 테니 기회가 있을 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그래.”

“감언이설로 꼬셔도 모자랄 판에 뭐 하는 거야.”

서은오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뭐 하는 거냐구요. 같이 걸을 길이 돈 길이다, 금 길이다, 나를 꼬셔야지. 쉴 새 없이 꿍얼거렸다.

“넌 항상 나보다 빨라. 내 결점 다 만회하고 고백하려고 했는데, 선수 쳤잖아. 근사하게.”

“그 말은, 내가 성급했다? 인생관이 달라서 벌어진 일이라고 정정해 줄래? 우리 엄마가 좋은 거 앞에선 망설이지 말라고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너한테 맞추느라 망설였는데 이마저도 빨랐다고 하면 어떡해? 빠른 게 뭔지 보여 주고 싶게.”

“가시밭길 치우기 전에 네가 선수 친 걸 어쩌라고. 선빵 쳤으면 뒷감당해야지.”

“좋아. 약속한 기한 버텨 볼게. 근데 내 대답은 처음부터 계속 같았다는 거 참고하고, 적당히 애태워. 안 그럼 너, 내 거 되는 순간 진짜 빠른 게 뭔지 알려 준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음흉하게 웃자 서은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어르신들이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좀 나중에 나오라고 속삭인 서은오가 먼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숨을 크게 내쉬며 주저앉았다.

죽으려고 했다는 말, 그를 망치려는 사람이 있다는 말, 그게 어머니라는 말. 그 말들이 나를 무너지게 했다. 서은오를 평생 못 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손이 떨렸다. 외롭게 살아온 그가 너무 가엾고 아파서 끌어안고 울고 싶었다. 가시밭길, 그딴 건 개나 주라고. 이제 같이 행복해지자고. 다른 사람은 다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다 참아 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내 마음보다 걔 마음이 더 산산조각일 거라서. 마음이 부서진 사람은 서은오라서.

나를 위해 부서진 잔해를 끌어모아 잘 붙이겠다는 그에게 어쭙잖은 위로와 달콤한 속삭임은 교만이었다. 나는 백마 탄 왕자가 아니니까. 무너진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잔해에 베이지 말라고 비는 것. 조각난 것들이 흉측할지라도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 지친 너를 끌어안는 것. 그뿐이다.

젖은 얼굴을 닦아 냈다. 별채가 조용해졌을 때 몸을 일으켰다. 창을 적시던 부슬비가 그쳤다. 아직 마당에 계신 할머니들을 배웅했다. 몰고 온 사륜 오토바이는 아침에 찾아가시라고 통보한 서은오의 강단에 그녀들은 뒷짐을 쥐고 내리막으로 사라졌다.

조용해진 거실과 주방을 함께 정리했다. 느린 손놀림과 걸음으로. 내가 어쭙잖은 농담을 건네면, 서은오는 헛웃음을 치거나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달빛이 우리가 선 자리까지 스며들었다. 발등이 창백하게 물드는 착각이 들었다. 그동안 서은오는 달빛 아래에 오래 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시퍼런 빛은 차갑고 우울하니까. 그 슬픈 기운을 다 먹고 자라서 오늘처럼 달빛이 쓸쓸한 날이면 습관처럼 애처로운 미소를 짓는 거라고.

“내가 와서 좋지? 실은, 첫눈에 반했지, 응?”

“직구 전문인 건 알겠는데, 나더러 치라고 강요하지 마. 빨라져.”

개수대 앞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설거지하던 손들이 멎었다. 내가 멈칫하니 서은오의 손도 굳었다. 나는 샐쭉 웃으며 대꾸했다.

“아까 우린 미래를 논했는데, 이런 질문이 어려워? 가시밭길은 괜찮고 좋냐, 아니냐, 이 쉬운 문제는 어려워?”

“…….”

“나 좋지?”

“그래.”

“어허, 대답이 짧다.”

“네가 와서 좋다.”

입술을 말아 물었다. 춤을 추듯 몸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며 그릇을 씻었다. 콧노래도 부르면서 가끔 서은오의 옆구리를 툭, 쳤다. 고무장갑은 날 주고 맨손으로 거품을 씻어 내는 남자는 치근덕대는 나를 묵묵히 받아 주었다. 오래된 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보름달이 교교했다. 달빛에 온몸이 창백해지더라도 함께라면 근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란히 선 발등이 하얗게 빛났다.

* * *

“코트밖에 없어?”

녹음 때문에 오름에 다녀와야겠다고 통보했을 때만 해도 별다른 표정이 없던 서은오였다. 외출 준비를 마친 후 장비를 어깨에 메고 신발을 신자, 얌전했던 서은오가 못마땅하단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코트밖에 없냐고 물으면서. 톤이 죽은 빨간 울코트와 짙은 남색, 까마귀 눈알처럼 검거나 은은하게 밝은 상아색까지 들고 온 겉옷이 죄다 코트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이다.”

나 왜 혼나? 코트뿐인 게 자랑이 아닐 건 없지 않나. 어이가 없으면서도 잘생긴 미간이 좁아진 것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원래 얼어 죽어도 코트만 입어서.”

“그럼 겹쳐 입고 가.”

“코트를?”

“응.”

순진한 눈망울로 쓸데없이 단호해서 잠시 그럴까, 망설였다. 금세 정신을 차렸지만.

“누가 겨울 코트를 겹쳐 입어? 둔해지게.”

제주의 물결과 바람은 금세 표정을 바꾼다고 했다. 잔잔하다가도 어떤 징후도 없이 거칠고 거센 바람으로 모습을 바꾸니 신경 써서 옷을 입으라고 어느 날의 서은오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았지만, 서로 마음을 확인한 날을 기점으로 우리는 묘하게 달라져 상대의 말이라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꼭꼭 씹어 삼키려고 했다.

하지만 바깥 공기가 차다고, 더 따뜻한 옷이 없다고 외출을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서은오의 옷은 너무 커서 바닥을 질질 끌고 소매를 수없이 접어야 할 테니 빌릴 수조차 없었다.

“몸도 약한 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얇게 입냐.”

서은오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코웃음을 참지 않았다. 사지 멀쩡하다 못해 건강한 나는 졸지에 약골이 되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네 눈엔 대체 내가 얼마나 약해 보이는 거야?”

바깥은 화창했다. 전에는 바람에 날아갈 것처럼 작다더니 화창한 날씨에도 두꺼운 코트 두 겹은 껴입어야 할 정도로 약골로 보이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서은오를 향해 말했다.

“뭐, 그럼 목도리라도 챙겨서 나갈게. 됐지?”

대수롭지 않게 몸을 돌리자 서은오가 황급히 나를 잡았다. 잠깐.

“잠깐 기다려.”

그냥 가면 안 된다는 눈으로 확답을 기다리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방에서 겉옷을 입고 나왔다.

“뭐야? 너도 가려고?”

“그래.”

“왜?”

“그냥.”

“문방구는?”

“임시 휴업.”

서은오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기사를 자처하겠다는 남자를 만류하지 않았다. 널찍한 등을 따라가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이유 없이 웃으며 빤히 보거나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하면 떨어지라고, 아직 달라진 거 없다고, 생각은 하고 있는 게 맞느냐고 찬물 끼얹던 서은오가 히터 틀고 대기하려고 문방구 문을 닫는다.

괜히 따지고 싶어진다. 떨어지긴 뭘 떨어져? 달리진 게 없긴 뭐가 없어? 무슨 생각을 더 해. 나는 또 철없이 날짜만 세고 있는데.

“같이 가.”

따지는 대신 거리를 좁혀 서은오를 끌어안았다. 뒤에서 습격하듯 끌어안자 커다란 몸이 멈칫했다. 좋은 냄새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다 널찍한 등에, 정확히는 질 좋은 코트에 슬쩍 입술을 내렸다. 뻣뻣하게 굳은 서은오는 등으로 쏟아진 입맞춤 한 번에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다음엔 앞면이야.”

“…예고해 줘서 고맙다.”

“어디에 하는 게 나아? 입술? 가슴팍? 어쩐지 후자가 더 야한 것 같지 않아? 어쩔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질문은 무슨. 이것도 예고지. 난 생각, 넌 준비. 우리 그러기로 한 거 아니야? 난 생각 잘하고 있으니까, 넌 항상 마음의 준비 해. 언제나 긴장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걸음을 옮기는 서은오를 따라 불편하게 걸었다. 나는 팔만 풀면 되고, 서은오는 뿌리치면 편할 텐데 우리 중 누구도 불편한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차까지 그렇게 걸었다.

날이 좋아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기 시작한 오름은 정상에 닿자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먹구름이 끼더니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뿌연 안개가 무섭도록 빠르게 들이찼다. 혼을 쏙 빼놓는 폭풍 같은 날씨에 서둘러 하산하기로 했다.

서은오는 꼭 등대 같았다. 축축한 바람과 안개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길을 밝혀 주었다. 몸을 휘청일 때마다 단단한 팔과 가슴팍이 벽처럼 버티고 있어 두려움 없이 내려왔다. 별 소득 없이 오전을 날려 버렸지만 서은오가 있어 나쁘지 않았다. 혼자였다면 시간과 체력을 허비했다고 여겼을 일이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괜찮은 경험이 되었다.

돌아가는 길엔 비상등을 켰다. 지대가 높았던 탓에 도로마저 안개로 가득 찼는데 그곳을 벗어나 동네로 들어섰을 때야 시야가 환했다. 지상의 날씨는 흐린 적 없단 듯 햇살에 반짝거렸다.

“저기 저 목욕탕, 영업하는 거야?”

조금 으슬으슬하던 찰나, 지붕이 낮아 옹기종기 모인 느낌을 주는 동네에 홀로 솟은 굴뚝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긴 굴뚝이 사우나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에펠탑처럼 근사해 보였다.

서은오는 조용히 굴뚝 방향으로 차를 몰았고 목욕탕은 다행히 정상 영업 중이라는 푯말을 걸어 둔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처에 차를 댄 서은오는 나를 내려 주고 가려고 했으나 언 몸에는 사우나를 해야 한다고, 나 혼자 좋을 순 없다고 억지를 부려 기어이 끌고 갔다. 들어서자마자 카운터에 대고 물었다. 남탕에 사람 많냐고. 개미 한 마리 없다는 말에 서은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윙크는 덤이었다.

“한 시간 후에 카운터 앞에서 만나.”

초록색 때밀이 수건과 일회용 샴푸와 바디 워시를 구매해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멍하니 서 있는 서은오를 남탕으로 밀어 넣었다. 단정한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나도 여탕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된 커튼을 걷어 내자 시간이 2, 30년 전에 멈춘 듯한 낡은 내부가 보였다. 여탕 문 하나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옛 생각이 절로 날 정도로 케케묵었지만, 아담하면서도 정감 있었다. 노란 장판이 깔린 바닥은 뜨거웠고 한쪽엔 뚱뚱한 티브이와 평상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엔 레이스 속옷과 파자마를 주렁주렁 달아 놓은 카운터, 음료를 담은 오래된 냉장고까지.

활기를 띠는 공간을 관찰하다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손님이 없어 어쩐지 칙칙한, 똑같이 생긴 수납장 중 하나를 열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무슨 통과의례냐고.”

혼잣말하며 체중계에 올라섰다. 체중을 잴 때마다 비슷한 숫자가 나오는데도 이상하게 사우나만 오면 은색 저울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손목에 달랑거리는 36번이란 번호와 뭉툭한 열쇠가 달린 고무줄을 흘긋거리며 욕탕 문을 열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열심히 다리를 미는 중년 여성과 벌게진 얼굴로 냉커피를 마시는 여자도.

특별할 것 없는 풍경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열기로 후끈하게 데워진 공기가 숨을 막았다. 샤워기 아래에 서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후 김이 오르는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으으.”

살결이 빨개질 만큼 팔팔 끓는 물에 몸을 담갔다. 피부가 따갑도록 아리다가 간지러워졌다. 조금 견디고 나니 금세 익숙해져 노곤했다. 입구 위에 달린 큰 시계를 확인하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작고 낡아도 있을 건 다 있는 목욕탕이었다. 대여섯 명이 들어가면 꽉 찰 만큼 작은 간이 사우나에서 얼었던 몸을 녹이고 피로까지 풀었다. 다시 몸을 헹구고 수납장을 열어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야 지각이란 것을 알았다. 시계가 20분이나 느렸던 것을 모르고 여유를 부렸다.

서둘러 옷을 입었다. 긴 머리칼을 말리지도 못하고 여탕 문을 열었다. 그 와중에도 바나나 우유는 샀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쏟아지듯 나오자 입구 쪽의 오래된 나무 의자에 앉은 서은오가 보였다.

“미안. 30분이나 늦었네.”

“나도 지금 나왔어.”

나만큼은 아니지만, 서은오의 머리칼도 축축했다. 말끔하고 뽀송뽀송한 얼굴, 새빨간 입술, 투명한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내 얼굴에 박혀 있던 서은오의 시선이 손으로 내려왔다. 뚱뚱한 우유를 쥔 두 손이 움찔, 떨렸다.

“아휴, 아가씨 이제 나옴서? 총각이 한참 기다려서. 내가 들어강 말해 주카, 해신디 됐댄. 냅두랜.”

카운터에 앉은 아주머니가 작고 투명한 창문을 열더니 말씀하셨다. 앉지도 않고 다리 아프게 서 있길래 앉으라, 앉으라, 몇 번이고 얘기해 겨우 앉혔다고.

“올 때부터 훤칠하난 테레비에 나오는 배우인가 해신디, 씻고 나왕 보난 더 고와. 아가씨두 곱지만 58년 살면서 저런 남자는 나 처음 봄서.”

천천히 일어선 서은오는 민망했는지 가자고 눈짓했다. 겨우 웃음을 참아 낸 나는 아주머니에게 인사한 후 서은오와 목욕탕을 나왔다.

“왜 거짓말해? 더 미안하게. 그냥 불러 달라고 하지.”

“오래 안 기다렸어.”

“방금 목격 증언을 다 들었는데, 어디서 발뺌이야.”

“그건 뭐야.”

말 돌리긴. 눈을 가늘게 뜨며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 두 개 다 쥐여 주자 군말 없이 들고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서 얇은 빨대를 꺼냈다. 껍질을 까 우유에 꽂아 넣고 본능처럼 덥석, 빨대 하나를 물었다. 손 하나 쓰지 않고 쭉쭉 들이켜자 위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불었다.

“망한 연애만 했다는 게 믿기지 않네.”

“뭐라고?”

뜻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뒤늦게 바나나 우유를 가져왔다. 주차된 차로 나란히 걸었다. 찬 바람이 상쾌하게 불었다. 개운하면서도 노곤했다.

“왜 안 마셔? 싫어해?”

몇 번의 흡입으로 금세 바닥을 드러낸 내 우유와 달리 서은오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서 물었다.

“모자라 보여서.”

“어?”

내 손에 빈 통은 가져가고 새것을 쥐여 주며 서은오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느리게 헛웃음 치며 차에 올랐다.

“한 잔이 맛있지, 두 잔은 물리거든? 빨리 마셔. 하나씩 먹으려고 산 건데, 다 날 주면 어떡해.”

시동을 건 서은오는 얼결에 받은 우유를 다시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먹으라고 몇 번을 권하기에 어쩔 수 없이 몇 입 삼켰다. 속상한 마음에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나? 사우나 후에는 커피나 식혜, 우유를 먹어 줘야 한다니까? 이 별미를, 이 달콤한 순간을 왜 양보해? 이거 봐, 너는 이제 반밖에 못 먹는…….”

“먹을 때 여기 들어가. 알아?”

서은오가 내 뺨 근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갑자기 전환된 화제에 잠시 눈만 깜빡거렸다. 모를 리가 있나. 내 얼굴인데. 웃을 땐 옅어지고 음식을 꼭꼭 씹거나, 빨대를 물 땐 진해지는 희한한 보조개가 있었다.

“응.”

“만져 봐도 돼? …좀 그런가.”

“너 내키면 언제든 여기다 뽀뽀도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일단 마셔.”

“어이가 없네.”

실소한 서은오가 빨대를 물었다. 반질반질한 피부는 물론이고 내리깐 속눈썹까지 어찌나 예쁜지 나도 모르게 넋 놓고 훔쳐보았다. 꿀떡꿀떡 액체를 넘길 때마다 일렁이는 목울대도 예쁘고 높은 콧대와 날렵한 턱선에서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우유를 쥔 손마저 심장을 간지럽혔다. 긴 손가락에 굵은 마디, 무엇보다 컸다. 서은오의 손에선 바나나 우유가 요구르트처럼 작아지는 착시가 일었다.

“집으로 가?”

빈 통을 컵홀더에 대충 끼워 넣은 서은오가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 창문을 내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대답했다.

“아니. 바다. 참고로 일 아니고 데이트야.”

집으로 가는, 나무가 즐비한 오르막이 아닌 탁 트인 도로가 보였다. 녹색 신호를 기다리며 넘실대는 파도를 응시했다. 푸른 그림을 향해 달려가는 듯했다. 올해부턴 아빠와 시답지 않은 주제로 토론을 펼치리란 예감이 들었다. 여름이 가장 아름답다던 아빠에게 겨울의 근사함을 열변할 내 모습이 그려졌다.

휴대폰 카메라로 바다를 짧게 촬영했다.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 자료를 남겨야 했다.

차를 세운 후엔 나란히 모래사장을 걸었다. 내가 앞설 때가 있고, 서은오가 앞설 때도 있었지만 서로의 등보다는 옆얼굴을 많이 보았다.

한참을 걷다가 무심히 뒹구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웠다. 물이 빠질 때가 되어 바닷물이 더 넘어오지 않는, 젖은 모랫바닥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 유치한 짓이지만 사랑엔 시시한 일도 필요하니까.

“뭐 해.”

웃음기가 밴 목소리에 행복이 알짱대는 기분이었다. 서은오의 목소리만 들어도 행복한 단계라니.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굵직하게 획을 새겼다. 쭈그려 앉은 나와 늘어나는 글씨를 번갈아 보고 있을 눈길을 짐작하면 얼른 쳐다보고 싶어지지만, 유혹을 참아 내고 마저 써 내려갔다.

서은오 내 거

빨리 와

사랑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고 있으리라 상상했는데 아니었다. 서은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빙긋, 웃은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서은오.”

“응.”

“나 잡아 봐라.”

걸음을 빨리해 철썩이는 파도에서 멀어졌다. 마른 모래사장을 동네 개처럼 뛰어다니며 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기대했던 찬란한 웃음을 보았다. 서은오는 느리게 걸어왔다. 헥헥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따라 모래사장에 구겨 앉았다.

함께 수평선을 보았다. 어깨를 붙이고 앉아 손을 잡고 손장난을 치고 단단한 팔뚝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면서.

* * *

이슬 맺힌 자리가 마르지 않은 시각이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지르고 또 누군가가 오토바이를 몰고 와 별채 문을 여는 작은 소음이 잠을 깨웠다. 그러셨어요. 정말 혼자 할 수 있는데요. 네. 몇 시쯤이 좋은지, 잘. 8시요? 알겠습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을. 그 주인이 좋아서 다시 눈을 감았다. 생각만으로도 포근하고 간지러웠다. 두툼한 이불에서 삐죽 튀어나온 깃털 하나가 방 안을 휘휘 돌아다니다 가슴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명치와 뱃속을 오가며 살랑대는 것처럼 가슴을 긁적거렸다.

남들보다 이르게 아침을 걷는 서은오의 분주함에 나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머리를 하나로 묶고 눈을 비볐다. 욕실에 들어가 칫솔질하며 잠기운을 떨쳐 냈다. 물기 어린 얼굴을 닦아 내고 대충 크림을 푹 찍어 문질렀다. 평소에도 단계라는 게 없을 만큼 간소했지만 딱 하나만 바르고 나가는 건 좀 심한가, 싶어 입술을 말아 물고 고민했다.

선크림 뚜껑을 열었다. 두 손으로 챱챱, 얼굴을 때리듯 발랐다. 뺨을 힘껏 두드릴 때마다 친구들은 경악했고 지난 애인들은 너처럼 바르는 여자는 처음 본다고 귀여워했다. 아빠는 고개를 갸웃하셨다. 나도 그렇게는 안 바르는데. 너 어릴 때 로션 발라 줄 때마다 답답했니? 금이야 옥이야, 아주 귀한 걸 만지는 손길로 로션을 찍어 발라 주던 아빠는 이따금 충격에 빠지곤 했다. 내가 독립한 후로는 터프한 손길은 잊고 사시는 것 같지만.

“아, 깜짝이야.”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누가 서 있을 거란 상상은 하지 않았기에 문 앞에 서 있는 서은오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놀랐잖아.”

노란 메모지를 든 채 멍하니 서 있던 서은오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서은오도 갑자기 열린 문에 흠칫한 것 같았다. 포스트잇을 흘끔거렸다. 문에 붙여 놓고 가려던 것 같아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응시하던 서은오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검지로 자기 뺨을 툭툭 건드렸다.

“…여기.”

“어?”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깜빡거렸다. 이렇게 갑자기?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내내 하고 싶었던 거고, 나를 응시하는 눈에서 어떤 진정성이 느껴져서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친히 멍석을 깔아 주는데 걷어찰 이유가 있나. 기다렸던 일인데.

한 걸음 앞으로 떼며 거리를 좁혔다. 팔을 뻗고 발꿈치도 들었다. 발끝으로 서도 서은오가 많이 숙여 줘야 닿을 수 있었다. 단단한 뒷덜미를 당겨 오자 의아한 기색으로 딸려 오는 서은오의 뺨에 입술을 내렸다.

촉, 하고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활짝 웃는 나와 달리 나를 내려다보는 서은오의 얼굴은 놀람과 경악 그 경계에 있는 표정이었다. 심각한 반응이 대체 뭐 한 거냐고 묻는 듯해 한 번 더 했다.

“…하.”

서은오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고작 어린애 같은 뽀뽀일 뿐이었다. 키스가 아닌 가볍게 뺨에 한 입맞춤. 그런데도 백 번의 키스보다 좋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민망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서은오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딱딱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은오의 한 팔이 내 몸통을 감싸 왔다. 진정하란 듯 허리를 토닥이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진득한 눈빛을 목격하자 다시 웃음이 나왔다. 툭, 하고 무언가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났다. 가볍고 얄팍한 소리에 바닥을 뒹구는 것이 메모지라는 걸 눈치챘다.

“여름아.”

다정한 눈빛과 다정한 손길 그리고 다정하게 안아 주는 품. 서은오가 가벼워진 손을 들어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따뜻하고도 안정적인 자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키스하기엔 서은오가 너무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떨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든 채 눈을 감았다.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래. 달력 한 번 더 접자.”

달력 한 번 더 접자고? 그 말을 바로 해석하지 못해 한쪽 눈을 떴다. 살짝 웃은 서은오가 뺨을 문지르던 손을 입술로 옮겨 왔다. 엄지손으로 아랫입술을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아직은 아니라는 건가? 긴 기다림에 입 맞출 분위기가 저 멀리 도망가 버렸다. 실눈을 뜨고 기다리던 나는 오래도록 닿지 않는 촉감에 실망했다. 백날 기다려도 서은오는 오늘 입 맞추지 않을 것이다. 이럴 거면 왜 달력 한 번 더 접으라고 한 건데?

눈꺼풀을 올리며 고개를 바로 세우려던 찰나, 내 입술만 보던 서은오가 고개를 숙여 왔다. 놀라서 뻣뻣하게 굳어 있자 닿은 잇새로 웃음이 끼어들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비튼 서은오가 부드럽게 입술을 빨았다.

“으음…….”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아 뺨을 감싼 서은오의 팔목을 잡았다. 담백하게 맞물리던 입맞춤이 깊어졌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혀를 놓아주지 않았다. 두 손을 올려 서은오의 뺨을 쥐었다. 바람을 맞아 차갑게 느껴지는 피부 온도와 달리 입술과 혀는 뜨거웠다. 뜨거운 숨결과 치약 맛이 나는 키스에 푸흐, 웃음이 터졌다.

같은 치약을 썼는데 왜 이렇게 달고 좋을까. 뺨을 잡은 손 사이로 서은오의 귓불이 들어왔다. 중지와 약지 사이에 들어온, 뱀처럼 시원한 감촉에 귓가로 더 깊숙이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엄지로 귓바퀴를 쓸어 만지며 입술을 빨았다. 내 허리를 껴안은 서은오가 방문을 넘어왔다. 뒤로 밀리면서도 무섭지 않았다. 내가 넘어질 리 없었다. 넘어진대도 아프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서은오가 나를 다치게 둘 리 없다는 믿음은 대체 언제부터 생겨난 걸까.

문이 닫히며 몸이 빙글 돌려진 게 느껴졌다. 등이 문에 닿은 것도, 내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도.

발끝이 빨갛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온몸은 뜨거웠고 다리에 힘이 풀려 자주 주저앉고 싶었다. 호흡이 짧아서 버거워지는데도 떨어지기 싫어서 무작정 단단한 목덜미를 당겨 안았다.

“하아…….”

“운동 좀 해야겠다.”

전력으로 질주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 내쉬는 나에게 서은오가 중얼거렸다. 숨이 짧아, 하고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떨어지는 서은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믿기지 않아서, 은밀한 모습이 기가 막힐 정도로 야해서. 또 하고 싶고, 더 하고 싶었다는 고백은 내가 할 소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키스는 해 본 거야? 연애한 적 없다며.”

아랫입술을 빨고, 입술 사이를 혀로 슬슬 간지럽혀 벌리게 하고 부드럽게 입 안을 헤집는 행위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실제로 혼이 나갔다. 뺨에 뽀뽀 한 번 했다고 백 번의 키스보다 좋다고 여겼는데 키스 한 번에 몸이 달아올랐다.

황망하고 기가 막혔다. 생애 처음 한 첫 키스는 당연히 별로였고 좋았던 키스를 다 떠올려 봐도 지금처럼 짜릿하고 심장을 주무르는 키스는 없었다. 죽기 전에 본다는 인생의 파노라마 중 마지막 필름이 오늘일까 봐 걱정까지 했다. 서은오와 했던 첫 키스, 아, 그때 참 좋았지, 하고 죽을까 봐.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좀 겸허하고 애틋하고 일상적인 장면으로 행복했다 여기며 떠나고 싶은데, 난 온통 너에 관한 기억으로 점철될까 봐. 이러다 너와 자고 나면, 미치는 거 아니야? 일상생활도 못 하고 네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거 아니냐고.

“쉬워 보이지.”

서은오가 물었다. 서은오도 흥분한 듯 불규칙한 호흡이지만 나처럼 오래 진정하지 못할 호흡은 아니었다. 옅은 미소를 지은 서은오가 다시 입을 뗐다.

“그래도 너무 쉽게 보지 마라. 고민 없이 한 거 아니니까.”

“…….”

“너하고 하는 거 다른 사람하고는 죽어도 못 하는 거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쉽게 생각 안 해. 너무 잘해서 의심한 건데.”

픽 웃는다. 때늦은 걱정이 몰려왔다. 첫 키스가 별로라는 건 만고의 진리다. 서은오는 지금 별로일까. 별로겠지. 종소리가 울린다는 말에 기대하던 멋모를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키스를 처음 경험한 서은오는 기대했을지도, 동시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별로네. 하다 보면 좋아지는 건가? 생각하고 있을까.

“넌 어땠어? 다음에 또 해 볼 만하다, 정도는 돼? 아니면 쯔, 별로다, 다들 하니까 그냥 나도 한다, 정도야?”

서은오는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구겼다. 그 표정에 제 발 저려 서둘러 덧붙였다.

“내가 긴장해서 그랬어. 원래는 더 잘해. 다시 할까?”

“한여름.”

“어?”

“별로일 리가 없겠지. 너랑 하는 건데.”

…나하고 하는 건 다 좋다는 말이야? 가슴이 두근거려서 얼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던 서은오가 바싹 붙어 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입술을 만져 깨물지 못하게 막았다. 입에 힘을 풀자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 오는 감각에 다시 숨이 뜨거워졌다. 얼굴이 홧홧했고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오늘 할머니 제사야.”

이마를 맞댄 채 쌕쌕거릴 때 서은오가 중얼거렸다. 응? 하고 되묻자 말을 잇는다.

“그 말 하려고 왔는데.”

촉, 촉, 짧게 다녀가는 입술에 온몸이 저릿했다.

“제사상이고 뭐고 너하고 종일 놀고 싶을 정도라고.”

“하아… 이렇게 입 맞추면서?”

코끝을 맞댄 서은오가 픽 웃었다. 그래. 낮은 음성을 뱉으며 고개를 비튼다. 다시 짧게 촉, 입술을 붙이고 떨어지며 묻는다.

“한여름, 후레자식도 괜찮아?”

“뭐, 또 도망갈 기회를 주는 거야?”

“아니. 너 이제 도망 못 가.”

서은오가 턱을 쥐고 입을 벌리게 하며 파고들었다. 빨고 당기고 헤집는 감각에 몰입하며 숨을 헐떡였다.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뜨겁게 흥분했다. 평온한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작이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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