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겨울 산책
-혼자 뒤통수만 쫓는다고 사랑이 시작돼? 산책이라도 가. 원래 연애는 걸어야 시작돼. 두 발로 걷든, 자기를 다 걸든. 마음이 복잡한 쪽이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거고, 걸으면서 덤으로 진정도 하는 거고. 없는 쪽은. 도경아, 그때 무슨 생각 하면서 걸었어? …뭐?
담담하게 얘기하던 도 배우는 아내에게 무슨 생각으로 나란히 걸었느냐고 물었다. 스피커 모드가 아니라 도경 언니가 하는 얘기를 못 들었는데 별안간 수화기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왜? 뭐래?”
황무지 같은 곳에서 사랑을 틔어 낸 이들에게 전화를 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황무지까진 아니더라도 겨울밤이 유독 지루한 곳이고, 내가 부러워하는 연인이라곤 이들 말곤 없었으니까.
“뭐 하는데? 아, 좀. 뭐 할 거면 끊고 해! 근데 대답은 하고 끊어. 이도경! 언니, 대답해!”
전화로도 나를 따돌리는 그들이 얄미워 전화 안 끊겼다고 소리쳤다. 이도경의 대답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포지션이, 그러니까 첫눈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도준의 포지션과 내 처지가 좀 비슷했고 그를 사랑할 마음이 없던 이도경의 포지션과 서은오의 처지가 얼추 데칼코마니였다.
물론 서은오와 연애하기 위해서 정보를 얻으려는 게 아니었다. 내가 서은오와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닌데도 그들의 조언이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은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들이 행복했다고 말했으니까. 그 여름을 잊을 수 없고 그 계절을 사랑하게 됐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게 필요했다. 잊을 수 없는 계절을 선사하는 것. 나에게도 필요하지만 서은오는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었다.
이제 겨울을 사랑해 주자. 우리도 겨울에 함께 행복해 보자.
그 말 대신 나는 청혼하는 로맨티스트처럼 행복하게 해 줄게, 라는 말을 연발하고 다녔고, 서은오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가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다가 이내 무시했다.
-미안, 여름아. 나야. 뭐라고? 아, 내가 무슨 생각 했냐고. 좋았지. 그 시간만 기다렸을 만큼. 내가 알던 길이 아니라 낯설고 멋진 곳을 걷는 기분이었어…….
도경 언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전화를 가로챈 듯 도준이 한마디만 남기고 냉정하게 끊었다.
-같은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
끊어진 전화에 구시렁대면서도 그 한마디를 머리에 입력했다. 함께 산책하기.
무작정 걷기 위해 코트를 걸쳐 입고 별채로 향했다. 별채는 깜깜했다. 벌써 잠들었나?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신발을 벗었다. 나 때문에 별채로 옮겨 간 서은오의 방문 앞에서 노크했다.
“은오야, 자?”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지만, 나는 슬쩍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걸어오는 서은오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반소매 티셔츠를 껴입으며 걸어오는 서은오의 몸에 시선이 갔다.
“대답이 없으면 안 열어 보는 게 맞아.”
샤워를 마친 지 얼마 안 됐는지 뽀얗고 말간 얼굴이었다. 함부로 문 열지 말라고 타박하는데도 나는 눈만 깜빡거리며 굳어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잠시 스쳐 본 건데도 잔상이 남을 만큼 몸이 좋아서.
“몸 좋은데?”
“왜.”
서은오는 차분하게 내려온 머리칼을 넘기며 노크한 목적을 물었다. 몸 좋다는 칭찬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를 모르는 여자라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중얼거렸다.
“서은오란 인간 자체는 잘 모르겠는데, 몸은 인정할게. 내 타입이네.”
“왜 왔냐고.”
“내가 조금만 가벼운 마음이었어도, 연애 걸었을 거야.”
“심심하면 자라.”
그대로 문을 닫으려는 손짓에 다급히 발을 집어넣었다. 하마터면 발가락을 찧을 뻔했다. 서은오가 미간을 구기며 문을 활짝 열었다. 긴 한숨이 따갑게 쏟아졌다.
“용건이 뭐냐고.”
“밤 산책 가자.”
이게 무슨 수작질이지,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소화가 덜 된 것 같다고 떠들다가 뜨끈한 두부 나베 한 그릇에 속이 편해 좋다고 감탄한 것을 기억해 내고 말끝을 흐렸다.
“바, 바람 소리랑 파도 소리! 아무도 없는 바다의 우울한 파도 소리. 그렇지만 너무 우울하지만은 않은 그런 소리를 녹음해야 해.”
녹음 핑계를 대자 서은오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마치 너 그런 허무맹랑한 일을 하는 거냐고 떨떠름한 표정이 나를 가엾게 여기는 착각이 들어 고개를 저으며 묻지도 않은 말에 대꾸했다.
“내 모든 작업이 이렇진 않아. 같이 일하는 감독 중에 좀 유별난 감독님이 있어서 그래.”
“꼭 가야 해?”
“응. 내 밥줄이 걸린 일이야.”
“…….”
“인상 풀고 인심 좀 쓰자? 친구가 동네 길을 잘 모르는데, 혼자 나가면 분명히 헤맬 텐데? 밖을 봐 봐. 캄캄해. 저 어둠 속으로 미모의 여성을 혼자 보내려고? 너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야?”
옅은 한숨을 내쉰 서은오가 등을 돌렸다. 무시하는 줄 알고 한 소리 하려던 찰나, 니트를 껴입고 겉옷을 챙기며 방을 나온다. 비죽, 웃음이 샜다.
앞장선 서은오를 따르는데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서은오가 내게 목도리를 안겨 주었다. 목도리 한 번, 서은오 한 번 번갈아 보다가 목에 두르며 재빠르게 신발을 신었다.
찬 공기와 함께 폐부를 채우는 향이 있었다. 코끝을 맴도는 향이 좋아 고개를 푹 숙였다. 종일 맡고 싶은 냄새. 서은오의 냄새. 어떤 향수를 쓰는지 기필코 알아내리라.
마당을 가로질러 길게 늘어선 나무 골목을 지나 내리막까지 걸어 내려왔다.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거리는 조용했다. 가로등은 처음 온 날과 다를 바 없이 미미했고 차 헤드라이트는 간헐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칼바람이 휘몰아치며 눈발이 쏟아졌다. 집 마당에선 버틸 만하던 바람이 길 한복판에서는 태풍처럼 지독했다. 어깨와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고 입술은 굳게 닫혀 침묵이 흘렀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고 걸었지만 손가락이 빳빳하게 굳어서 몇 번이고 주머니 상태를 확인했다. 혹시 뚫린 게 아닌가 하여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무슨 고집인지 꾹 참고 전진했다.
“으으. 으윽. 흡.”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밤 산책이 분위기 있다더니 분위기는 이 바람에 얼어 죽었다. 동사 위기에 놓인 나는 조개껍데기 모양의 타악기처럼 닥닥 이를 부딪치기만 했다.
옆을 흘끗 올려다보니 서은오는 파카 광고 찍는 모델처럼 근사하기만 했다. 오늘 왜 이렇게 추운 거냐고, 나만 뼈가 으스러질 것 같냐고 묻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살을 에는 듯한 고통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한계다. 나는 더 갈 수 없다.
바다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어렵게 도착해도 몸을 녹일 곳은 없을 것이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게 훨씬 나은 선택임을 빠르게 계산해 내고 입을 뗐다.
“우리 그냥 돌아갈래?”
얼굴 전체가 얼얼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서은오는 빨개진 귀 끝을 만지며 몸을 돌렸다. 말은 안 했어도 추웠던 거지? 붉은 귀 끝을 발견하자 괜히 미안해져 소심하게 물었다.
“네 목도리 줄까, 너 할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부지런히 걸어.”
말을 마친 서은오가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뒤에 붙어서 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서은오가 출발했다. 종종걸음으로 서은오를 쫓았다. 바람은 사방에서 몰아치지만 그래도 앞에서 오는 칼바람이 가장 매서운 법이었다. 불침번 하듯 번갈아 앞장서고 싶어도 내 몸은 키가 큰 서은오를 가릴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염치없이 서은오의 옷깃을 쥐었다. 멈칫한 서은오가 나를 한번 돌아보았으나 이내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겨우 돌아온 우리는 별채 문을 박살 낼 기세로 서둘러 들어갔다. 나는 혹독한 추위를 겪고 충격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추위 속에 길을 헤매던 제주에 온 첫날보다 오늘이 더 지독했다.
서은오는 거실 난로에 불을 지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으며 양손을 비볐다. 바닥은 뜨끈했고 별채 안 공기도 따뜻해서 찬기에 전 몸이 빠르게 녹아 갔다.
내가 오두방정을 떨며 몸을 녹이는 동안 방으로 들어갔던 서은오가 이불을 가지고 나왔다. 머리 위로 떨어진 이불을 어깨에 두르며 고개를 들자, 그새 주방으로 들어가 차를 끓이는 서은오가 보였다. 창백한 얼굴로 차를 우리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잘생긴 사람은 어느 순간에도 미모가 흐트러지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나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몸을 빼고 창문으로 상태를 확인했다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 순간, 느닷없이 코에서 액체가 흐르는 느낌에 고개부터 젖혔다.
“뭐 해.”
고개를 젖힌 시야로 양손에 머그잔을 쥔 서은오가 들어왔다.
“나 코피 나나 봐.”
축축한 코밑을 닦아 낸 나는 잠시 숨을 참았다. 손에 묻어난 것이 빨간 액체가 아닌 물 같은 투명한 콧물인 것을 확인하고 절망했다. 내 감은 틀렸고 입은 눈보다 빨랐다.
서은오는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는 걸 확인하자 절망이고 뭐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널 웃게만 할 수 있으면 나는 우스워져도 좋으니까.
“손 좀 씻고 올게.”
머쓱하게 웃으며 욕실로 들어왔다. 창문에 비친 흐릿한 모습도 처참했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적나라하게 처참해서 입을 틀어막고 끙끙댔다. 볼 빨간 막내 완두콩처럼 양 뺨이 붉었다. 걘 애니까 사랑스럽기라도 하지. 거울에 비친 여자는 고주망태처럼 코끝까지 붉고 머리는 산발에, 낯빛은 갑자기 노화한 듯 고단하기까지 했다.
뜨거운 물로 손을 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거실로 나오자 티브이를 틀었는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작게 퍼지고 있었다.
『동파되지 않도록 수도는… 열어 두시고……. 한파에 주의하시고…….』
동파에 한파. 내가 지금 한파에 나가자고 한 거네.
우리가 연애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연애였다면 망한 연애의 출발점이고, 연애 직전이라면 출발선에 가지도 못한 채 끝날 테니까. 겨울 산을 오르거나 눈발 날리는 칼바람에 행진하는 고생은 오래된 우정과 산전수전 다 겪은 부부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차를 마시며 뉴스를 보고 있는 서은오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펴진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내 몫의 찻잔을 쥐었다. 살짝 으슬으슬한 것 같다고 느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몸에 달라붙은 찬 기운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한파인 줄 알았으면 안 나갔지.”
어쩐지 말도 못 하게 춥더라니. 별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에 서은오가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차가워진 눈빛에 면목이 없어 시선을 내렸다.
“몰랐다고?”
서은오의 물음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넌 알았어?”
“…….”
“알았는데, 왜 따라 나왔어?”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서은오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침묵을 유지해서 외출 전의 대화를 곱씹어야 했다. 꼭 가야 하냐는 물음 끝에 밥줄이 걸렸다며 인정머리 없이 친구 혼자 보낼 거냐고 구시렁대던 나.
“너 설마, 내 밥줄 끊길까 봐 한파에도 따라나선 거야?”
놀라서 큰 소리가 나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감동이 몰아치는 파도 수준으로 밀려들어 왔다.
…얘는 진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조차 모르겠는데 이런 남자는 다시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서은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하필 너야. 하필 왜 네가. 따질 수 없는 말을 억지로 삼켜 냈다.
말은 무시해도 시선까지는 무시하지 못하겠는지 서은오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뭐.”
“은오야.”
“표정 왜 그러는데. 너 작아서 날아갈까 봐 같이 간 건데.”
“…내가 날아갈 것 같았다고?”
“뭐에 맞을 수도 있고. 제주 바람 세.”
내가 감격한 표정으로 슬슬 거리를 좁히자 서은오는 불쾌한 표정으로,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단 태도로 몸을 피했다.
“아쉽다. 아깝다.”
“…….”
“하아, 내가 너한테 빚만 없었어도.”
내가 탄식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자 서은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가.”
“내가 빚만 없었어도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누구를. 왜?”
대화의 흐름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서은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너지, 누구겠어?”
“뭐?”
“너요, 서은오란 남자를요. 어떤 여자가 가만두냐? 나나 되니까 너 손끝 하나 안 건드리지.”
서은오는 홱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화를 차단했다. 그림 같은 옆모습을 흘끗대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연애를 하긴 했겠지? 사랑하는 사람은 만졌겠지? 어떻게 시작했을까. 상대가 죽은 것처럼 보여도 사랑했다면 정말 모든 걸 초월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런 사람과 어떻게 헤어졌을까. 그런 사랑이 몇 번이나 왔으며 또 몇 번을 보냈을까.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너.”
몰래 훔쳐보던 타이밍에 건너온 말이라 화들짝 놀라며 정면을 응시했다. 서은오의 시선이 느껴져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서은오가 물었다.
“내가 남자로 보여?”
질문하면서 계면쩍어할 줄 알았다. 조금이라도 긴장하거나 붉어진 얼굴일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돌부처처럼 감정이 없어 보였다.
“전에 네가 김 비서님을 다른 남자로 칭하면서 다른 남자 생각하게 두지 말랬잖아. 아까 대화도 그렇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거야.”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서은오는 질문의 이유를 설명했다. 뭘 그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거야.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매혹적인 남자로 보여.”
“…뭐?”
“나 거짓말하고 그런 사람 아니야. 빚쟁이 마음도 흔들어 버리는 너의 매력, 자랑스러워해도 돼.”
충격받은 듯 굳은 얼굴에 어깨를 으쓱했다. 서은오는 하, 하고 헛웃음 치며 어찌할 줄 몰랐다. 나를 보다가 뉴스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말 나온 김에 나도 궁금한 거 물어도 돼?”
“비슷한 거 물을 거면 안 듣고 대답할게. 난 너 여자로 안 보여.”
고백하지 않았는데 차인 기분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찬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서은오의 사정을 알아서 상처가 되진 않았다. 내가 여자는커녕 산 사람으로도 안 보일 텐데. 친구라고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런데도 서은오를 골려 주고 싶어서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나 여기서 홀딱 벗어도 상관없겠네.”
“…뭐?”
서은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보고 와하하 웃었다. 그제야 굳은 얼굴이 풀어졌다. 서은오는 십년감수했단 듯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넌 왜 중간이 없어?”
“넌 뭐 있어? 여름아, 알다시피 나는 널 여자로 보는 게 어렵다, 하고 돌려 말할 수 있는데, 직설적으로 깠잖아요.”
“그래. 내가 잘못했네.”
빠른 인정에 흥미를 잃은 나는 눈을 빛내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너 사랑은 해 봤지? 연애는 어떻게 했어? 혹시 플라토닉?”
서은오는 그게 왜 궁금하냐고 중얼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옷깃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떠서. 내 장난에, 협박 같지 않은 협박에 하얗게 질린 서은오가 서둘러 대답했다.
“없었어. 시체로 보이는데 무슨 사랑을 해.”
가슴 한편이 따끔해지는 걸 애써 외면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이런 대화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밤마다 나를 훈련했다. 내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심각한 태도를 보이면 서은오는 불편해했다. 내가 너 행복하게 해 줄게, 간지럽고도 가벼운 말을 할 땐 싫지 않은 듯 들어 주긴 했다.
“없었다고? 한 번도?”
“그래.”
“그 얼굴로? 그 몸으로?”
서은오가 미간을 좁히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만하라는 뜻인 걸 알아서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야, 그럼 내가 너 책임질까?”
“뭘 책임져?”
“그냥. 너 좀 반반하니까 데리고 살 만한 것 같아서.”
곱게 대답해 주던 서은오는 다시 나를 외면했다. 나는 뻔뻔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네. 책임질게. 내가 줄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내 의사는 안 묻고?”
“은오야, 나 잘 봐 봐. 어디 가서 빠지는 타입은 아니야. 기가 세다고 도망가는 놈은 있어도, 내 얼굴과 몸매에 나가떨어진, 야!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어딜 가는 거야?”
나라는 덫에 갇히기 싫은지 서은오는 특유의 무심한 태도로 그러나 황급히 내뺐다. 나는 키득거리며 찻잎을 꺼내는 모습을 응시했다.
알고 있다. 내가 서은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입에 발린 소리를 남발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웃음뿐이었다.
단조로운 네 일상을 귀찮게 하며 가벼운 코웃음과 기분 좋은 웃음과 편한 웃음과 때론 박장대소할 만한 찰나를 주는 게 전부일 테지.
“은오야.”
서은오가 나를 보았다. 이곳에 온 첫날 그가 아이들에게 했던 말이 가슴에 얹혀 시도 때도 없이 쿡쿡 찔러 왔다. 친구가 없다던 그 덤덤한 말이.
포트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나는 서은오의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행복을 주겠다는 말이 거창한 거 알아. 너도 그런 내가 우스워서 잔웃음을 지어 주는 거겠지.
“그래. 너도.”
시선을 피하면서도 서은오는 대답했다. 귀 끝이 붉어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뭉클했다. 마음에도 빛깔이 있다면 지금 내 마음은 붉어진 저 빛깔일 것이다.
열심히 차를 우리는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행복까지는 감히 어렵겠지만 함께 있는 동안은, 나를 떠올리는 순간에는 네가 웃기를. 네 일상에 웃음이 끼어드는 날이 많아지길 바라며 은은한 펀치를 날리겠다고.
그러니까, 나는 아마 이러려고 왔나 봐.
* * *
겨울엔 쉽게 앓았다. 앓지 않은 해도 있었으나 어릴 때부터 아팠던 때와 아프지 않았던 때를 나눠 차곡차곡 쌓는다면 골골대던 해가 월등히 앞섰다. 특히 유학 시절의 감기는 마음에도 지독하게 파고드는 아찔한 병마였다. 누운 자리는 차갑고 오로지 공기만 후덥지근하던 방 안. 라디에이터가 달궈 놓은 방에는 그리움에 사무친 나밖에 없어서 서늘한 기운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페인트가 발린 하얀 천장을 응시하며 왜 이국은 사람을 외롭게 할까. 축축 처지는 것은 몸인데, 왜 정신까지 축축해지나. 할 수만 있다면 몸이든 마음이든 따사로운 햇볕에 말리고 싶다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올겨울도 영락없이 뜨거운 숨을 뱉으며 천장을 응시하지만 이번만큼은 왜 아픈지 명확하게 알았다. 옷깃에 찬바람이 묻어 그랬나. 마음에도 겨울이 와 약해졌나. 출처 모를 병의 단서를 고민할 필요 없었다.
겨울이잖아. 겨울. 왜 망각했냐고.
긴 세월 안아 주고 싶던 실체는 무럭무럭 자라 이제 나보다 큰 사람이 되었고 앞서 오는 바람을 막아 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 커다란 등을 방패 삼아 따라 걷고 방공호 같은 집 안에 들어앉아 몸을 녹였는데도 깊은 새벽이 되자 열이 펄펄 끓었다. 나의 오만과 체력을 비웃듯 뜨거운 열이.
잠들기 전 조금 으슬으슬하다고 가볍게 생각한 것을 꾸짖듯 온몸을 부수는 듯한 몸살과 오한이 찾아왔다. 눈을 떴는데도 정신이 없었다. 미치겠다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여기서 아프면 어떡하나, 올해는 조용히 넘어가나 했지, 감기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나, 한파의 위력을, 이제 일기 예보 챙겨 보는 일을 다시는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내가 아파도 되는 건지? 내가 아프면 서은오는? 하고 두서없이 고민하고 떠올렸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서은오의 걱정에 엉금엉금 기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손톱마저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나는 아플 때도 이불을 두른 채 죽을 끓이는 사람이었다. 갈 수 있었다. 안채에서 별채까지 몇 걸음이나 된다고.
아프다는 감각에 잠에서 깬 후 식은땀을 닦아 낼 힘도 없이 끙끙댔으면서도, 앞장서서 세차게 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막으며 걷던 서은오가 걱정돼 누워만 있을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이불이 발치에 떨어지자 서늘한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시야는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렸다. 밭은기침이 쏟아져 몸이 휘청거렸다. 서둘러 벽을 짚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속이 왜 울렁거리는지, 웃풍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살갗은 왜 이리 따가운지.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리를 떼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두통이 심했다.
일어서자마자 다시 쓰러져 이불을 덮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억지로 방을 나왔다. 신발을 구겨 신고 안채 문을 열었다.
기다렸단 듯 매서운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칼에 베이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이가 닥닥, 부딪치고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서두르고 싶어도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바닥이 푹, 꺼진 진흙탕 같았다.
겨우 별채 안으로 들어와 서은오의 방문 앞에서 노크했다.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빴다. 기다릴 줄 모르는 성질 급한 이처럼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힘은 점점 더 빠지고 하늘은 노랗게 보였다. 세상이 빙빙 도는 착각에 어지러워 문고리를 잡은 채 주저앉았다.
“하아…….”
뜨거운 숨을 뱉으며 심호흡을 반복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문고리를 놓친 손이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바닥을 짚은 손에도 힘이 빠져 갔다. 서은오가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알아듣지 못했다. 내내 귓가를 차지하던 이명이 서은오의 목소리까지 먹어 버렸다.
“한여름.”
몸이 자꾸만 기울었다. 바닥으로 쓰러지기 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서은오가 시선을 마주했다. 커다란 손이 이마에 닿았다가 뺨을 어루만졌다.
“너, 너 괜찮은지…….”
괜찮으냐고, 괜찮은지 확인하러 왔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붕 떴다. 아프면 감각 기관이 고장 난 것처럼 분별이 어려웠다. 멀쩡한 바닥에서 굴곡이 느껴졌고, 파도가 몰아치는 듯 시야가 넘실거렸다. 안채에서 별채로 건너오는 그 짧은 거리에도 허공을 걷는 기분을 경험했고 그 때문에 내가 서은오에게 안겼다는 것을, 가볍게 들려 이부자리에 눕혀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서은오의 손이 떠날 때마다 칭얼댔다는 것도.
“…어쩌자고.”
“으응.”
“하.”
폭신하고도 따뜻한 이불이 온몸을 덮어 오는데도 사람의 온기만큼은 아님을 아픈 와중에도, 아니 아픈 와중이라 귀신같이 알아챘다. 서은오의 사정 따위 떠올릴 겨를 없이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팔을 뻗어 서은오를 감싸 안았다. 망치로 머리를 깨고 드릴로 관자놀이를 쑤시는 듯한 두통이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한여름.”
“…싫어.”
“뭐가 싫어.”
“…….”
미간을 찌푸리며 자꾸만 떨어지려는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한여름.”
“…으응.”
“여름아.”
귓가에 한숨이 내려앉고 멀어지려던 몸짓은 이제 원하는 대로 딸려 왔다.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며 품 안을 파고들었다. 가슴팍에서 일정하게 툭, 툭 심장이 박동할 때면 이마에 심장이 달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쩐지 서늘하게 느껴지는 살결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수마에 붙들려 껴안은 상대가 누구인지 망각하면서도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넓은 품은 어떤 자세를 취해도 편했고, 잠결에도 그게 좋아서 자꾸만 꾸물거리며 품속을 파고들었다. 누군가의 다리 사이에 내 한쪽 다리를 끼워 넣은 것은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문 제작한 것처럼 느껴지는, 한 치 어긋남 없이 잘 맞아떨어졌던 몸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을 고열과 졸음에 시달린 내가 알 리 없었다.
오한에는 사람의 온기가 약이라고, 그만한 약이 없다는 생각만을 반복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하얗게 질린 서은오를 두고서.
잠에서 깬 것은 내게서 겨우 빠져나간 서은오가 약과 물수건을 가져오면서였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억지로 눈을 떴으나 아픔이 가신 것은 아니었으므로 미간을 구기며 짜증을 부렸다.
“안 먹어. 그냥 잘래.”
내버려 두라고 떠들어 대는 말을 서은오는 말끔히 무시하며 내 목덜미와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몸이 뒤로 넘어갈 것을 예상했는지 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 눕지 못하게 하곤 조개처럼 다물린 내 입 안으로 약 두 알을 밀어 넣었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적셨다. 약을 넘긴 마당에 여유롭게 목구멍을 적시는 것은 사치였다. 컵을 밀어내자 턱 밑으로 주룩,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젖은 입가를 훔치는 손길에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표정 없는 서은오와 눈이 마주쳤다.
“…….”
“…….”
눈동자가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혼이 나가자 간지러운 생각이 줄을 이었다. 선택권이라는 게 있다면 저 눈으로 들어가 살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그곳은 아름답고 영원히 사랑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랑의 대상을 따져 보는 여력까진 없었다. 숨고 싶을 땐 네가 눈꺼풀만 닫아 주면 아무 때나 숨을 수 있지 않을까. 혼자이면서 외롭지는 않은 곳, 거기가 바로 내가 원하던 곳이라고.
“누워.”
쓸데없는 상상을 접으라는 듯 서은오가 나를 눕혔다. 곧장 눈을 감았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채 너무 아프다, 서은오는 멀쩡해서 다행이네, 쟤까지 아팠다면 난 정말 쓰레기가 될 뻔했다는 생각을 끝으로 곯아떨어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동이 트는 새벽녘이었다.
창문이 흔들리다 못해 깨질 것처럼 덜거덩댔다. 바람을 잘 타는 동네답게 칼바람이 쉬지 않고 불었다. 바람이 밤새도록 창문을 흔들었을 게 분명하지만 깊은 잠에 빠졌던 나는 약과 수면으로 몸을 회복하느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몰랐다.
눈을 깜빡거렸다. 은은한 무드 등이 존재를 드러내며 어둠을 등지고 있었다. 따뜻한 바닥에 폭신한 이불을 덮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는 그림자처럼 색이 탁해진 사물을 담다가 벽에 기대앉은 인영을 담았다. 흠칫, 놀라는 동시에 그 인영이 서은오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했다.
“이제 좀 괜찮아?”
듣기 좋은 음성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음성의 주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하얀 천장이 아닌 충혈된 눈을.
서은오는 대답 없는 나를 재촉하지 않으며 손을 뻗었다. 이마에 닿는 서늘한 기운에 눈을 감았다. 비누 냄새가 밴 시원한 손이 남은 열기를 식혀 주었다.
“응.”
머리를 쉬지 않고 괴롭히던 두통은 온 적 없는 것처럼 사라졌고 몸살 기운도 떨어졌는지 아프지 않았다. 몽롱한 느낌은 남았으나 정신없이 오한에 떨던 몇 시간 전에 비하면 개운했다.
“그래.”
하지만 이상했다. 단단한 집이 풍랑에 표류하는 배처럼 느껴졌다. 어지럽고 울렁거렸으니까.
정신이 들자 내가 한 짓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알코올에 지배당한 것처럼 내일 없이 굴었다. 어떤 애인도 그런 식으로 안아 본 적 없음을, 아니 안았다 한들 미치도록 좋다고 느낀 적 없음을 깨달았다.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했다.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했고, 생각만으로도 다시 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누군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포옹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오늘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숨을 죽인 채 서은오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말을 서두로 꺼내야 할지 몰랐다. 고요하고도 단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나쁜 짓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가 서은오의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시킨 게 아니었을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머릿속에 재생된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실수라도 안겨 줄 리 없는 사람이니까.
시체를 어떻게 온몸으로 껴안아. 가족도 아닌데.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 친구라지만 총에 맞은 전우도 아니고, 끔찍한 환각을 감내할 만큼 상대가 사경을 헤맨 것도 아닌데.
“…나 만지면 차가워?”
고민 끝에 물었다. 미안하다는 사과는 순서를 밀어 두었다. 사경을 헤맨 것은 아닐지라도 수없이 걸린 감기 중 이번만큼 강렬하고 짧았던 적도 없었으니까. 3일 아플 것을 한 번에 몰아 아플 작정이었는지, 만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릴 여유도 없이 본능에 따른 것 같다는 말은 고마움을 전한 후에 해도 될 것 같았다.
나 만지면 차가워?
만지면 소름 돋지.
그래? 그런데도 나를 견뎌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물었다.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서은오는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대수롭지 않게 수긍하는 답이 나오리라 여긴 나는 꽤 오랜 침묵에 당황했다.
“열은 떨어졌는데 계속 아프면 병원 가자.”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에 맥이 빠졌다. 이제 보니 서은오와 내 사이에는 물수건이 여러 개였다. 수건을 몇 개나 퍼다 나른 것인지, 음식을 할 때도 곧장 주위를 치우면서 요리하던 서은오가 주변이 난자하게 어질러지도록 내버려 두었다니.
많이 놀랐나, 짐작하다가 얼굴이 홧홧해졌다.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허리를 세워 앉았다. 가만히 움직임을 지켜보는 시선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지러운 바닥이 내가 아파서 정신을 못 차렸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눈이 충혈될 때까지 간호한 것, 끔찍한 걸 견디며 온기를 나눠 준 것까지 다 내가 아파서.
“일부러 그래? 순진한 얼굴에, 달콤한 말로 나를 어떻게 해 보시겠다?”
골골대면서도 장난스러운 문장으로 따졌더니 멍하니 듣기만 하던 서은오가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뭐?”
“정신이 드냐, 들었으면 네 죄를 낱낱이 고해라, 무릎 꿇고 각서 써라,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할 짓, 못 할 짓 구분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이외에 할 수 있는 타박이 수백 가진데 타박은커녕 지금 날 걱정하고 있잖아.”
“그래서.”
“찰랑거리지 마. 넘치는 순간 나 못 참아.”
선 넘는 짓은 내가 저질러 놓고 도리어 너는 선 넘지 말라고 경고했다. 서은오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만난 적 없다는 걸 멍하고도 뻣뻣한 반응이 알려 주었다.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살 만한가 봐.”
픽 웃은 서은오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네 덕분이야.”
“…넌 좀.”
말을 하려다가 마는 서은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해 말해 보라고 재촉했다.
“응. 좀, 뭐?”
“…넌 야구도 직구만 치겠다고.”
네 덕분에 살 만해졌다는 말이, 그러니까 고맙다는 인사가 쑥스러운지 서은오는 시선을 피하며 내게 직설적이라고 돌려 말했다. 내리깐 눈꺼풀과 촘촘한 속눈썹이 아름다운 명화처럼 강렬했다. 서은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예뻐 보이는 지금, 팔팔해진 나는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응. 대체로 홈런만 쳐.”
살짝 미소 지으며 우쭐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나를 쳐다보는 서은오의 눈빛이 9회 말 2아웃의 역전승을 바라는 상대 선수 같았다. 촉촉하게 빛나는 눈에 대고 말을 이었다.
“사인볼 원해?”
“…….”
“아무나 안 줘.”
끝내 휘어지는 눈매와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에 나도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로 속닥거렸다.
“고마워.”
고마워, 서은오.
당연하게 오가는 표현에도 면역이 없는지 서은오는 죽을 데워 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다시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내가 잘 동안 이불도, 누울 자리도 다 뺏긴 서은오는 죽을 끓이고 수시로 열을 재며 밤을 지새웠다.
너는 언제 아플까.
사람은 주로 겨울에 아프고 겨울에 우울해진다. 모두 한 움큼의 차가운 눈송이를 가슴 한편에 얼려 두고 산다는 말이다. 저마다의 혹독한 계절을 나 또한 살아 내며 여기까지 왔다.
너는 어때.
혹시 계절을 통째로 오려 내고 싶은지. 그만큼 괴롭고 아팠는지. 때때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웅크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니까 아픈 거 아니지.”
기척도 없이 돌아온 서은오가 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가까이 다가온 서은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이깟 감기에 금이 간 미간을 보고 있자니 욕심이 났다. 친구보다 더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대체 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져.
“은오야.”
궁금한 것을 묻고 실천하는 것을 포기하며 허리를 세워 앉았다. 친구라면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라고 나를 꾸짖었다.
“왜.”
“너 아픈 날 나한테 전화해.”
서은오는 숨 쉬는 법을 까먹은 이처럼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눈만 깜빡거렸다. 흔들리는 눈빛을 오롯한 눈빛으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너 아프다고 하면, 일이고 뭐고 다 뒷전으로 두고 뛰어올게. 너도 마음껏 앓기만 해. 밤새 봐줄게. 중간에 깨워서 약도 먹이고, 죽도 끓일게.”
“…….”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을 피하는, 기어이 고개를 떨구는 서은오를 향해 나는 얼굴을 들이밀면서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그러니까, 일단 번호 좀 줘 봐.”
실실 웃으며 말했다. 친구끼리 번호도 모르는 게 말이 되냐. 어쩐지 빚만 자꾸 늘어 간다고 생각하다가 갚아야지, 똑같이 돌려주겠다고 다짐하는데, 갑자기 네 번호를 모른다는 게 퍼뜩 생각난 거야…….
서은오는 중얼거리는 나를 돌아보며 헛웃음 쳤다.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알아봤으면서도 모른 체하며 원목 쟁반을 다리 위에 얹었다. 김이 오르는 멀건 죽을 후후 불어 식혔다.
나를 보는 서은오의 눈빛이 어제보다 말랑해졌다면 착각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방금 서은오가 웃었으니까.
* * *
갑작스러운 한파에 겨울 문방구는 휴업을 맞았다. 연일 이어지는 추위에 동네는 동면에 들어간 동물의 동굴처럼 잠잠했다. 며칠째 찾아오는 이가 없었고 우리 중 나가는 이도 없어서 서은오와 나는 집 안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다.
언뜻 고립과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막막하진 않았다. 감기 기운은 끝물에 가까웠고 식료품도 넉넉한 데다 전기가 끊긴 것도 아니라서 오히려 남의 별장에 휴가 온 기분이었다. 과묵한 서은오와 지내면서 어색한 순간이 없진 않았지만, 그 어색한 공기가 싫지 않아서 앞으로 한 사나흘은 끄떡없다고 자신만만했다.
서은오는 웃는 얼굴이 말도 못 하게 예쁜 편이었고 나는 그 얼굴을 보려고 어쭙잖은 말과 행동을 특기 삼아 수없이 도전했으니까. 열 번, 스무 번, 백 번 무언가를 시도하면 한 번쯤은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목격할 수 있었고, 걜 웃게 하는 건 집 안에 틀어박혀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내겐 얄미운 지원군이 있었다. 전화 한 통이면 행복의 키워드를 나열할 친구들이. 한파에 겁도 없이 외출했다가 코가 납작해진 밤, 이부자리에 누워 그들이 알려 준 패를 정돈했다. 행복의 지름길로 산책할 것을 알려 준 연인들은 산책 말고도 알려 준 게 있었고 나는 그중에 실내용을 골라 서은오에게 권하기로 했다.
여름용은 마음 깊숙한 곳으로 처넣었다. 여름에 좋았던 일을 겨울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몸소 겪었으니. 사실 실내에서 할 만한 일이 한정적이라는 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다 알지 않은가. 바보상자 앞에 앉아서 작아진 사람들을 감상하는 일이 인간의 유일한 낙이 된 것이 반세기도 지났으니까.
하지만 넘쳐 나는 영상물 중 어떤 영화가 행복을 주는지 고르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영화를 골라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일을 내가 사랑하는 영화인들이 해결해 주어서 나는 밀린 일기를 쓰듯 영화 목록을 작성했다.
“꼭 봐야 해?”
“응. 홍콩 영화 같이 보잖아? 그럼 행복해져.”
“무슨 논리야.”
“실은 나도 몰라. 산 증인들이 있어. 보자, 그냥.”
오래된 영화와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명작을 나열하던 친구들이 홍콩 영화를 말할 때 묘하게 목소리가 간지러웠던 걸 기억해 낸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진짜라는 걸 알아채고 우선순위에 올려 두었다.
진중한 태도로 감상할 목록을 작성하고 티브이 전원부터 눌렀다. 나를 향해 왜 자기까지 영화를 봐야 하느냐고 반항하던 서은오는 언제 싫어했냐는 듯 진지한 태도로 관람했다.
초면인 영화와 지금보다 어린 날 몇 번씩이나 틀어 댔던 영화를 연속해서 재생했다. 집중이 흐트러져 좀이 쑤실 때까지 우리는 주윤발과 장국영의 젊은 날을 관람했고 어쩐지 침잠해지는 기분을 떨치려고 앞선 영화보다 가벼운 장르를 틀었다.
“살벌하네. 소리만 들으면 때리는 게 아니라 찢어 놓는 수준이야.”
화면 속 남자들이 주먹질할 때마다 ‘부-욱, 챙! 쨍! 꽝!’ 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누군가 북을 찢거나 그릇을 깨는 장면에서 나올 법한 효과음이 주먹과 어느 부위의 마찰에서 튀어나와 웃음이 샜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나를 보고 있던 서은오의 미간이 좁아져 있었다. 살벌한데 왜 웃느냐는 표정이라 대꾸했다.
“소리가 귀엽지 않아?”
“…….”
서은오는 내 물음을 이해 못 하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제 또 주먹질하겠다. 잘 들어 봐.”
화면을 가리키며 잘 들어 보라고 중얼거렸다. 주인공이 멋지게 팔을 휘두르자 악당이 나가떨어지는 장면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인위적인 소리가 났다. 이번엔 꽹과리 소리였다.
“어느 부분이 웃긴 건데.”
얌전히 듣고 있으면 웃음이 나와서 실실댔더니 서은오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속닥거렸다.
“우스운 게 아니라 좋아서. 당시엔 세련되고 사실적이었을 소리가 지금은 촌스럽게 느껴지는 게 신기해서 웃어. 내 음악도 그렇겠지. 아마 막내 완두콩이 우리만큼 자라면, 상까지 받은 음악이래도 촌스럽고 귀엽게 들리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
주먹에 얻어맞는 소리가 그릇 깨지는 소리 같지 않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80년대엔 관객을 사로잡을 만한 소리였을 것이다.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과 상황에 빠르게 몰입할 수 있도록, 비유하자면 조미료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운드를 공들여 만들어 낸 누군가의 정성이 눈에 그려졌고 나는 평소 그런 장면을 사랑스럽게 생각했다. 사랑스러운 장면에 웃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촌스럽지만 귀여워. 게다가 현명하게 느껴지기까지 해. 정말 독특한 소리야.”
“야.”
“응?”
티브이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서은오를 돌아보았다. 심각한 표정의 서은오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너 지금 일해?”
“…어?”
“일하냐고.”
“…아니?”
내 대답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은오는 뭔가 할 말이 더 남아 보였는데 다시 입을 열지는 않았다.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라 나도 생각에 잠겼다.
나에게 ‘소리’는 흥미로운 파동이라 아무 때나 슬프고 아무 때나 즐거웠다. 슬픈 음악뿐 아니라 반복되는 어떤 음에도 영화적 상상이 그려졌고, 특정 장면이 떠오르면 서둘러 편곡하거나 도입부를 만들곤 했다.
나와 달리 서은오는 영화나 음악에 관심이 없는, 아니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알 필요도 없이,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니 기준을 나로 세울 필요도 없이 이 상황이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업계 사람들과 있을 땐 혼자 갑자기 침묵하며 다른 세상에 빠져도, 영감이 떠올랐으니 밥이고 술이고 팽개치고 작업실로 뛰어가도 그러려니 이해했다.
하지만 보통 인간관계에선 하면 안 되는 짓이었다. 만나자고, 무언가를 함께 하고 마주 앉아 먹고 마시자고 권한 사람이 나에게 집중하지 않을 때, 이 사람 뭐야? 하고 생각하지 않는가.
약간의 분노와 황당함이 섞인 감정을 느끼는 동시에 가슴 한쪽이 좀 차가워지는데 서은오가 나로 하여금 그 찜찜한 기분을 경험했을 거라고 가정하니 마음이 바빠졌다.
“혹시 기분 나빴어?”
잘생긴 실루엣을 곁눈질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서은오는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기분 나빠야 해?”
“…….”
“어느 부분에서?”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정말 모르겠으니 알려 달라는, 바람에 간들대는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빛을 목격하곤 맥이 빠져 웃었다. 거짓말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란 줄 알았더니 그냥 못하는 게 분명했다.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영화 보자고 노래를 부르던 인간이 어쩐지 일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얘 뭐야.
서은오는 지금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하지만 서은오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일하냐고 물은 것은 타박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 물은 거였다.
그래도 나는 모른 척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상황에 집중하지 않았다고 느낀 거 아니야? 일하냐고 물었잖아.”
“일하는 거면 자리 피해 주려고 했지.”
생각지도 못한 답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지난 애인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대단한 예술가 나셨어요. 너만 일하냐? 지금 당장 녹음 안 하면 세상이 무너지냐? 나랑 있는데, 길거리에 나오는 음악이 귀에 들어와? 저 소리가 좋아서, 그래서 지금 작업실에 가야겠다고? 가기만 해. 가면 우리 끝이야.
“할 말이 그게 다야? 일하는 거면, 자리 비켜 주려고 했다?”
“어.”
“그럼 미간은 왜 구겼어?”
서은오는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표정을 세세히 다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 못 했는지 좀 당황한 눈치였다. 소름 돋게 왜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냐고 해도 할 말 없었다. 음흉하게 웃으며 거울을 대령해 드릴 수밖에. 농담하며 웃을 수밖에. 널 앞에 두고 다른 걸 눈에 담을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이상하다. 난 왜 네가 불만인 것 같다고 느꼈지?”
“…….”
“괜히 눈치 봤네. 잘못 봤나 봐.”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리자 서은오는 대화가 끝나는 줄 알았는지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아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혼잣말인 척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밤에 잠 못 자게 생겼네.”
“…….”
“온갖 생각 다 하느라고 뜬. 눈. 으. 로. 날 새겠다고.”
“…….”
“서은오는 사실 기분 나빴는데, 착해서 아닌 척해 준 거 아냐? 난 그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괜히 눈치 봤다고 태평하게 넘겼던 거야? 구겨진 미간에 큰 뜻이 있었을 텐데. 나 왜 그냥 넘어갔을까. 그게 뭘까.”
“…소리가 피곤하진 않냐고. 그거 물으려고 했어.”
졌다는 듯 담담하게 실토하는 서은오를 올려다보았다. 서은오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는데 나는 서은오가 내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긴장한 듯 목울대가 자주 일렁였으니까.
“소리가 왜?”
“세상이 시끄럽게 느껴질 것 같아서.”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주제넘었다면 사과할게.”
바로 대답하지 않는 반응이 신경 쓰였는지 서은오는 주제를 운운했다. 얼른 서은오를 돌아보았다. 이번엔 제대로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서은오는 흠칫하는 나를 진득하게 쳐다보았다. 그윽한 눈길이 더 짙어지는 것을 느끼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래, 너 실례야.”
자기가 필라멘트야, 뭐야. 눈에 필라멘트라도 달고 사는지 티브이에서 송출되는 빛 말고는 캄캄한 거실에서도 홀로 빛이 났다.
“미안해.”
눈치도 없이 재차 사과하는 서은오 때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선 따지고 싶었다. 서은오가 단순한 친구였다면 진작 선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좋아지면 사랑할 수도 있는 거지, 뭐 어때, 하고 덤볐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서은오라서 나는 함부로 까불 수 없다. 따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비워 냈다. 애인도 해 준 적 없는 배려, 함부로 하지 말라고. 애인도 걱정해 준 적 없는 내 시끄러운 세상을 함부로 염려하지 말라고. 내 가슴 너 함부로 뛰게 하지 말라고.
시끄러운 속을 외면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걱정해 줘 놓고, 귀엽게 사과까지 하는 남자는.”
“…….”
“딱 내 타입인데.”
입꼬리까지 씰룩거리면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음흉한 표정에 한쪽 눈 아래를 파르르 떤 서은오가 고개를 홱 돌리며 일갈했다.
“영화나 봐라.”
“너 자꾸 내 눈에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주의해 줘. 내가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이런 식은 곤란해. 한집에서 눈 맞는 전개는 너무 식상하고.”
“배고프냐.”
화면은 여전히 그릇 깨지는 소리로 난리였다. 나의 헛소리를 못 견디겠다는 듯 말을 끊은 것까진 좋은데, 왜 하필이면 배고프냐는 물음인지?
“넌 내가 매일 배고픈 줄 알아? 시도 때도 없이 먹는 줄 아냐고!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사람은 원래 매일 밥을 먹어.”
당연한 소리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술을 말아 물고 티브이를 응시했다. 대화가 끊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갔다. 쟤는 끝까지 얻어터지는구나. 허무하게 끝난 영화를 끄고 리모컨으로 다음 영화를 검색했다. 종이에 써 둔 목록이 반이나 남았지만 밤이 깊어 고민이 되었다.
“한 편만 더 보고 잘까?”
눈치를 살피며 물으니 서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모컨 버튼으로 자음 모음을 꾹꾹 눌러 가며 영화명을 검색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은오야, 이거 만 원이 넘는데?”
“그래서.”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봐.”
안 그래도 영화를 틀 때마다 유료로 청구되는 금액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하필 기대하던 영화가 가장 높은 가격을 자랑했다. 당황한 나는 휴대폰을 켜 빠르게 검색을 시작했다.
“멤버십 할인……. 너 아이디랑 비밀번호 알아? 가입은 했어?”
눈에 불을 켜고 할인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얌전히 있던 서은오가 읊조렸다.
“다 틀어. 네가 보고 싶은 거.”
서은오는 기다림이 지루해서 한 말이겠지만 듣는 사람은 어쩐지 떨렸다. 난로 속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며 거실 공기를 아늑하게 만들었다. 서은오와 나는 종일 거실에 앉아 귤을 까먹고 가래떡과 고구마도 구워 먹으며 시시한 대화를 나눴다.
문득 간지러운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결혼한다면, 지금 같은 순간을 매일 겪지 않을까.
“어우, 목말라.”
뜬금없는 갈증에 벌떡 일어섰다. 쫓기듯 주방으로 와 냉수를 따랐다. 물을 마시며 나의 이상형과 이상향인 두 사람을 떠올렸다. 봄이면 길가에 핀 꿀 꽃을 서로의 입에 넣었고, 여름이면 함께 얼음을 갈아 팥과 연유를 뿌려 먹었으며, 가을이면 작은 수저로 단밤을 퍼먹다가 키득대던, 별거 아닌 말에도 서로를 향한 눈빛 한 번이면 이유 없이 웃음이 번졌다던 그들은 이불을 덮어쓰고 귤을 까먹으며 영원히 둘이서만 살까, 속삭였을 만큼 사랑했다고 말했다.
‘그 모든 것들은 포근해 보이지만 실은 불처럼 뜨거웠어. 부모가 되니 같은 계절을 사는데도 희한하게 따뜻해지더라. 둘이서만 살자던 우리는 우리 아기 뜨겁지 말라고, 덥지 말라고 내내 온도계만 보는 사람이 되었지. 이제 너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다고, 여름아.’
어렴풋이 떠오르는 엄마의 잔상. 어려서는 어리기에 제대로 이해할 수 없던 말이, 다 자라서는 그런 사랑을 한 적 없어 이해할 수 없던 말이 서은오와 고립되며 선명해졌다.
젊었던 두 사람이 평생 둘이서만 살고 싶어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 사랑이 전부이던 젊은 부부의 생활을 추측할 수 있었으니까.
빛의 속도로 빠져드는 감정이 우스웠다. 사계절도 아니고 고작 하나의 계절, 서은오와 내가 두려워하던 그 계절 속 겨우 며칠 만에. 엄마와 아빠는 어쩌면 이랬겠구나. 그래도 나 같진 않았겠지. 웃는 줄도 모르고 웃다가 창에 비친 나를 보고 가슴이 덜컥하진 않았겠지. 그저 서로의 웃는 낯에 입이나 맞췄겠지.
분주해진 마음으로 서은오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친구들이 알려 준 행복의 키워드를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애하려고 같이 있으려는 게 아니었는데 자꾸만 탐이 나서.
서은오에게 눈을 못 뗄 때마다, 빠져들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마음이 꼭 혼잡한 도시의 퇴근 시간 같았다. 영화에 집중한 서은오와 달리 나는 헷갈리고 답답해서 평온하게 감상할 수가 없었다. 나의 감상문은 산으로 가는데 서은오는 나 따위 안중에도 없어 하기에 괘씸해서 종종 말을 걸었다.
“서은오.”
“…….”
“은오야.”
“…왜.”
내가 호들갑을 떨며 대사를 따라 하면 서은오는 뭐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보다가 종국엔 픽 웃었다. 그런 웃음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영화 보면서 술이나 마실까?”
멈칫한 서은오는 차가운 표정으로 타박했다.
“너 아픈 애가.”
“아, 다 나았다고. 약도 안 먹어서 술 마셔도 돼. 마시자. 응?”
장국영을 사랑한다면 ‘패왕별희’를 봐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패왕별희를 보고 나면 여운에 못 이겨 술을 마시게 될 거라는 말도. 너는 그런 말도 못 들어 봤냐고, 우리는 명작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약은 왜 안 먹었는데.”
서은오가 싸늘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타박했다.
“너 정말 이럴 거야?”
“뭘.”
눈을 치켜뜨고 팔짱을 꼈다. 철저히 외면하는 서은오의 태도가 술 마시기 싫다는 뜻임을 알아챘으나, 나는 취하고 싶었고 고로 서은오는 마주 앉아 줘야 했다.
“나 오해하게 할 거냐고. 어떤 우정이 감기약 한 번 걸렀다고 눈을 무섭게 뜨고,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벌떡 일어난 서은오가 손을 씻고 주방 불을 켰다. 그리고 배추를 꺼내 칼등으로 억센 밑동을 툭툭 치더니 투명한 볼에 반죽을 만들어 내곤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거실에선 우리가 보다 만 영화가 일시 정지된 채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서은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가 내려놓은 그릇이나 술잔의 위치를 괜히 고쳤다. 강박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옻칠한 나무젓가락까지 나란히 맞춰 놓았다.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나를 보고 있던 서은오가 헛웃음 치며 말했다.
“애도 아니고. 뭐 해.”
“어?”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할 말이 있어 얼쩡거린 게 아닌데. 네가 도무지 뭘 시키는 법이 없잖아.
“나 좀 시켜 먹으면 안 돼?”
김이 오르는 배추전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노릇노릇한 배추전이 식을까 봐 걱정하면서도 식사 때만 되면 만년 손님 취급하며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게 어쩐지 미안하고 서운해 입을 뗐다.
“내가 하는 게 편해서.”
내 속도 모르고 서은오는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요리는 네가 잘하니까 그렇다 쳐도, 잔심부름시키면 되잖아. 그릇 가져와라, 수저 놔라. 너 장 보러 갈 때도 혼자 가고, 카드 주면 눈 무섭게 뜨잖아. 뭐라도 시키라고. 빚 청산은커녕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는 게 얼마나 초조한 일인 줄 알아? 네 마음만 편하면 다야?”
며칠 전 서은오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양질의 식사와 편한 잠자리를 제공하면서도 집세를 안 받아서 재료라도 사 주겠다는 뜻이었는데 서은오는 그날 종일 날 없는 사람 취급했다.
“주는 게 왜 없어. 난 잘 받고 있는데.”
바닥에 뭐라도 있는 건지 서은오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골몰했다. 내가 이미 주고 있는 것, 서은오가 잘 받고 있는 것. 그런 게 있다고?
“그게 뭔데?”
내 물음에 고개를 든 서은오가 답을 미룬 채 술상을 들었다. 꿀을 넣은 막걸리와 배추전이 올라간 술상이 티브이 앞 탁상에 놓였다. 서은오와 나는 다시 나란히 앉았다.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을 깨려고 술병을 들어 막걸리를 잔에 따랐다. 그리고 물었다.
“네가 나한테서 뭘 받고 있는지, 계속 물어도 답 안 할 거지?”
“그게 중요하냐.”
“그럼? 네가 나도 모르게 나한테서 가져간 게 있다는데?”
발끈하자 서은오가 피식 웃었다. 잔잔한 웃음을 거두지 않은 서은오가 말했다.
“빚은 애초에 없는 거고. 여기서 네가 받기만 한다는 건 착각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러니까, 그게 뭐.”
“조금만 가져갈게.”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서은오의 얼굴은 웃음기가 남아 있는 듯하나 진지한 눈빛을 입꼬리로 애써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을 샅샅이 관찰하는데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이미 충분하니까 괜한 마음 쓰지 말라고. 잔심부름도 못 시킬 정도로 값비싸 보여서, 나야말로 빚이 생긴 기분이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말해 주지 않을 게 분명해서 나는 서은오의 바람대로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려운 말이지만 그래, 뭐가 됐든 네가 좋은 쪽으로 하자. 그거면 됐지.”
잠시 크게 난 창을 응시했다. 한파 내내 진눈깨비를 남발하던 하늘이 오늘은 제법 운치 있게 하얀 눈을 뿌렸다.
“천천히 마셔.”
술 한 잔에 창문 한 번. 한 잔씩 마실 때마다 창문 밖 풍경을 안주 삼았다. 바쁘게 들이켜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서은오가 만류했다. 만류한다고 들을 내가 아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홀짝거렸다.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고요했던 거실에 소음이 끼어들었다. 우울한 색감으로 시작된 영화는 마음 아픈 장면을 잇달아 보여 주었다. 울다가 웃다가 공리의 표정에 반하다가 장국영의 눈빛에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말도 없이 긴 시간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화가 끝나고도 우리는 말없이 막걸리를 마셨다. 노곤해질 때까지. 영화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 틀었다. 이번엔 빠르게 지나가는 자막 대신 창밖을 응시했다.
이국의 언어가 음악처럼 흐르고 침묵 사이로 바람이 끼어드는 소리를 듣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순간이 온다면 덤덤하게 얘기하고 싶었는데 볼품없이 떨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며칠 밤 너 가둬 두고 취조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그럼 네가 나한테 질릴 테니까 딱 하나만.”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입을 열었다.
“옛날얘기 싫어할 거 알면서도 못 참아서 미안.”
“…….”
“이번 한 번만 이기적으로 굴게.”
“해, 그냥.”
서은오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서두를 길게 늘여 봤자 싫은 얘기는 기어코 할 게 아니냐고 타박하는 듯했다. 긴장감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바지에 축축한 손바닥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날, 나가자고 한 거 나였잖아.”
“…….”
“너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거짓말도 못 하는 착한 애였는데. 그날은 왜 거짓말했어?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그날만 생각하면 당연한 순서처럼 눈가가 홧홧해졌다. 정신없던 방학식 분위기. 몰래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어린 인영들. 조용했던 거리. 차갑던 공기와 무사 귀환한 서은오의 창백한 얼굴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기억 안 나.”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데 담담한 음성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눈물을 말리는 대답이었다. 서은오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기억, 나지 않는다고? 그게 말이 돼? 내 마음에 응어리를 맺히게 한 날을 넌 잊어버렸다고?
속이 쓰라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시선을 돌려 바닥난 술잔을 응시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리 내지 않으려고 입 안을 씹으며 참았다.
하지만 우는 걸 알았는지 서은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한숨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서은오에게 등을 지고 눈가를 벅벅 닦아 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다행이네. 안 좋은 기억이었으니까. 아픈 기억은 잊는 게 낫지.”
“…넌 그날 때문에.”
서은오의 문장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려던 말을 다 듣지 못했어도 유추할 수 있었다. 고작 그날 때문에 빚을 졌다고 생각했느냐고. 서은오를 등지고 있으면서도 마주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나가자고 한 거 나니까. 너 끝까지 붙잡지 못한 것도, 그날 왜 거기 있었냐는 질문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넌 모르잖아.”
“무슨 생각 했는데.”
서은오를 보기 두려웠다. 구겨지는 미간과 경멸 어린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마땅히 치러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해 몸을 틀었다.
“이제 내 잘못을 들키겠지, 내 죄가 들통나겠지. 창백한 너를 앞에 두고 그런 생각 했었어. 네가 돌아온 게 감사하면서도 겁이 났어.”
이제 그의 낯빛이 변할 차례였다. 상처받아도 싸다고, 칼날 같은 눈빛에 베어도 싸다고 여기며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은오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잘 큰 줄 알았는데. 잘 클 수밖에 없는 애였네, 너.”
담담한 어조로 뱉은 말이 칭찬이라는 것을 몇 번의 복기 후에 알았다. 눈을 깜빡이다가 느리게 되물었다.
“뭐?”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었다. 악몽이든 그리웠던 꿈이든 아니면 홀로 한 상상이든 지금 같은 답은 없었다. 그동안 힐난과 비난이 가장 많은 득표를 자랑했다. 끝까지 용서 못 하겠다는 저주가 마지못해 이루어지는 용서보다 많았다.
“너도 겨우 여덟 살이었잖아. 원망과 회피가 당연한 나이. 원망했으면 편했을걸. 왜 다 끌어안고 살았냐.”
“…서은오.”
“울지 마. 너하고 어디든 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내가, 그날도 한발 늦었을 뿐이니까.”
“…….”
“마음으론 내가 먼저 했어, 나가자고. 내 발로 나간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제 놔줘라, 너. 네 일도 아닌데 너무 오래 아팠다.”
눈에 핏발이 서는 기분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낮은 테이블에 팔을 뻗은 서은오가 티슈를 뽑아 내밀었다. 서은오의 눈도 어쩐지 더 촉촉해 보였다. 착각이겠지만.
“기억 안 난다더니.”
새하얀 휴지로 눈가를 닦고 코를 풀며 괜히 서은오를 흘겨보았다.
“울 줄 몰랐지.”
울리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고백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울면 싫어?”
“좋겠냐, 그럼.”
“아, 내가 우는 게 싫어서 실은 좋아했다고 수십 년 만에 고백하는 거야?”
일부러 장난스럽게 얘기하자 서은오가 피식 웃었다. 눈물이나 닦고 말해, 하고 핀잔을 주는데 이런 핀잔이라면 평생 받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정했다.
“뭐라고 하든. 울 거면 차라리 크게 울리고 털어 버리자고 정한 거니까, 지금 다 울어.”
서은오가 차분하게 읊조렸다. 말이 끝나자 단단한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바닥을 한번 응시한 서은오가 손을 내밀었다. 뜬금없는 악수 제의에 굳어 있자 서은오가 말을 이었다.
“악수하고 나면 다 끝나는 거야. 네 잘못 없다는 거 인정하고. 이제 어디 가서 괜히 나 때문에 열 받지 말고.”
“…….”
“…여름아.”
“나 만지면 차가워?”
서은오는 내 대답이 대화의 흐름과 상관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좁아진 미간과 가늘어진 눈매가 그의 생각을 대변해 주었다.
“만지면 차갑냐니까?”
“아니.”
“그럼 눈 감아.”
눈감으란 말에 서은오는 조금 놀란 얼굴로 경계하며 물었다.
“왜?”
그 긴장한 모습이 귀엽고도 가여워서 코웃음이 나왔다. 울면서 웃는 내가 황당했다. 황당한 사람이 되는 건 이다지 쉽다는 걸 경험하며 서은오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가 속삭였다.
“고작 악수로는 못 털어. 진한 포옹 정도는 해 줘야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동자에 후, 하고 입김이라도 불어 넣고 싶었으나 도망갈 게 빤해 젖은 얼굴로 웃기만 했다. 빨리 감으라고, 입 모양 했다.
한때는 유행처럼 초면에 프리허그 하는 시대도 있었지만 서은오의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아서 예고를 반복했다. 서은오는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고 코앞에서 알짱대는 나에게 거부의 말도 하지 않았다.
허락했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포옹하자고 하는 동시에 밀려날 각오부터 했는데. 내 처지에선 포옹 한 번에 숱한 예고와 허락을 구하는 것이지만 서은오의 눈으로 이 상황을 가늠하면 뭘 제안하든 거절을 그림자처럼 여겨야 했다. <죽은 친구가 포옹을 요구한다> 남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몸짓이 서은오에겐 엄청난 노력과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서은오의 세상을 생각하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아 서은오의 앞에선 되도록 그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슴 아픈 생각일랑 네모난 방 안에 혼자 있을 때 하자고 나를 달랬다.
“서은오, 마음 단단히 먹어. 너 으스러지도록 안을 거니까.”
“그만 종알대고.”
“그럼 답을 주시든.”
“해.”
기다리던 대답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서은오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른침을 삼킨 나는 일부러 실실대며 떠들었다.
“오, 포옹 정도는 여유가 있으시다? 그럼 좀 더 과감해도 돼?”
“더 과감할 일이 뭐가 있는데.”
“이를테면, 앞니 나가게 입술을 박는 일?”
“떨어져.”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맞잡은 손을 빼내려는 행동에 웃음이 터졌다. 내 눈가는 마를 만하면 조금씩 젖어 들어서 실시간으로 원맨쇼를 보고 있는 서은오는 내게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마음 약한 아이는 마음 약한 어른으로 자랐으니까.
약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마음에 담을 쌓고 온갖 날카로운 것으로 주위를 경계하지만 그 안에 있는 말랑한 것을 난 잘 알아.
손을 잡아당기며 꽉 끌어안았다. 아예 남도 아니고 친구니까 마음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얼어 버린 얼굴을 눈에 담는 일이 즐겁기도 해서 괜히 시간을 끈 것인데, 자석처럼 착 달라붙는 몸에 여유고 뭐고 그냥 냅다 안아 버리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다.
그깟 몇 초 여유 부린 게 후회할 일인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좋았다. 서은오도 나만큼 좋을까. 그럴 리가 없겠지. 머릿속으로 얘 언제 떨어지나, 초조해하며 물러나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마음 같아서는 서은오의 다리 위에라도 폴짝 올라가고 싶었다. 친구로서는 도저히 취할 수 없는 자세를 상상할 만큼 좋았다. 나 혼자 감정이 생겨서 미친 거라고 하기엔 누구의 품도 서은오의 품만큼 좋다고 느껴 본 일이 없었다.
“넌 사람을 이렇게까지 안아?”
“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획과는 다른 포옹이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안아 주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서은오의 어깨에 뺨을 비비고 목덜미에 코를 갖다 대며 숨을 들이켰다.
눈을 깜빡이며 속으로 나를 힐난했다. 변태야? 욕구 불만이야? 평생 담백한 포옹만 하다가 왜 이래? 진짜 미쳤냐고.
입 안을 콱 씹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애인이 시도 때도 없이 달라붙을 때면 귀찮아하던 한여름이 서은오를 귀찮게 하다니.
“미안. 너무 좋아서.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 향수 뭐 쓰냐, 진짜? 이게 다 네 향수 때문이야.”
“…울면서 별짓 다 한다. 울다가 웃고. 내 옷에 코도 닦고. 농담도 하네.”
“이렇게 울 때도 있는 거야. 중간중간 할 일 하면서 우는 경우도 있어.”
“이제 그만 떨어질 때도 된 거 같은데.”
슬쩍 몸을 물리려는 서은오를 단단히 휘감았다. ‘안 돼. 아직 할 말 못 했어.’ 하고 중얼거렸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숙여 왔다. 끌어안기 편하라고 자세를 낮춰 주는 행동에 눈치 없이 심장이 뛰었다. 뛰는 가슴을 모른 체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외로웠겠다고 생각해.”
진지한 목소리에 서은오는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힘없이 웃었다. 마주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았다. 짐작이 틀렸다는 듯, 전혀 아니라는 듯 무심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으리라.
하지만 수천 가지의 사연을 담고 있는 눈도 있었다. 서은오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외로운 눈빛은 드러나.”
“…….”
어린 시절 엄마는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안광은 내면의 거울이라서 어떤 생각으로 살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눈빛이 달라진다고. 사람의 동공은 그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압축한 지구본이니 지그시 들여다보면 어떤 세상을 항해하고 있는지 보이기 마련이라고.
서은오에게 묻고 싶었다. 예쁜 눈이라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는지. 오래도록 어떤 감정에 짓눌린 네 눈이 만 가지 슬픔을 담고 있는데.
“나한테 들켰어, 너.”
서은오의 비밀을 알게 된 후로 그의 심정을 자주 상상했다. 하지만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가늠하는 일은 어렵기만 했다. 몸과 마음이 여린 시절, 죽을 만큼 무섭고 괴로운 일을 겪은 후 하루아침에 달라진 세상을 서은오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갑자기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런 상태로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 세월 동안 혼자. 너무 오래 혼자였다. 이제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파고들어 함께하고 싶었다.
“우리 오래 보자, 은오야.”
다짐 같은 말을 전한 후 천천히 몸을 물렸다.
“나하고 있다고 네가 외롭지 않을 리 없겠지만, 나도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지만, 내가 가끔 네 일상에 끼어들어서 실없는 소리 하면 네가 좀 웃을 것 같아서. 나도 웃고. 그럼 좋잖아. 감독이랑 싸웠네, 누가 날 열 받게 했네, 문방구 매출이 몇 년째 바닥이네,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하면서 늙는 거. 다 그렇게 사니까.”
나를 보던 서은오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문방구 매출을 네가 왜 걱정해.”
“친구니까. 내가 걱정 안 하면 누가 해? 사장님이 똑 부러지면 내가 사서 걱정하냐고요. 이왕 말 나온 김에 물어나 보자. 너 왜 여기 있어? 기업 상무님이 직원 하나 없는 구멍가게 사장님으로 만족이 돼?”
“만족하는데.”
“전혀 야망이 없구나?”
“문방구가 어때서.”
“아니, 문방구가 별로라는 게 아니라 네 가게 운영이 이상하다고.”
한숨을 내쉬며 막걸리를 따랐다. 반 조금 못 되게 남은 병을 흔들며 더 갖고 와도 되냐고 물었다. 서은오가 나뒹구는 빈 병들을 눈짓했지만 나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양손에 막걸리를 챙겨 돌아와 말을 이었다.
“네 문방구에서 제일 비싼 게 2만 원짜리잖아. 사장님이 미쳤어요, 대폭 할인. 물건에 이상이 있거나 속임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물건들 제값도 안 받고. 대체 어디에 야망이 숨어 있는지 얘기해 볼래?”
“그러는 넌 있어? 야망.”
“나는 욕망이 있지.”
술을 마시며 대꾸하자, 서은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게 좀 귀여워서 눈을 가늘게 뜨고 협박조로 얘기했다.
“어떤 욕망인지 줄줄 읊을 수 있는데, 어떻게 할래? 욕망덩어리의 외침을 밤새도록 들을래, 아니면 하루아침에 회사 때려치우고 문방구 사장님 된 사연 털어놓을래?”
일개 직원도 아닌 사람에게 회사를 때려치웠다는 표현이 가당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집안에서 순순히 보내 줬냐, 부자는 망해도 삼대까지 놀고먹을 수 있다던데, 그 막대한 재산을 두고 왜 사서 고생하냐는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아 평범한 직장을 관둔 친구인 양 서은오를 대했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
담담한 말투 속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서 수긍했다. 누구에게나 삶은 고단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서은오는 거부하지 않았고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남은 막걸리를 탈탈 털어 마셨다.
슬슬 초점이 흐려지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 정면을 응시하면 서은오가 보였다.
“…….”
긴 정적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기억나는 마지막 장면은 나를 보는 서은오였다. 뒤늦게 깜빡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브이는 하얀 화면을 송출하고 있었고 서은오는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미안하게도 도톰한 이불은 나만 덮고 있었다.
옆으로 돌아누워 잘생긴 얼굴을 관찰했다. 잠든 것 같지 않았다. 누웠는데도 잘생겼네. 눈만 살짝 감은 듯 평온하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갑자기 악몽이라도 꾸는지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내 미간도 서은오의 구겨지는 미간을 따라 좁아졌다.
“…괜찮아.”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소심하게 검지손가락 하나만을 이용해 눈썹 사이를 더듬었다. 살살 매만질수록 빗금이 사라져 갔다. 망설이다가 진한 눈썹까지 만지작거렸다. 긴장돼 죽겠으면서도 유혹이란 늘 그렇듯 겁을 상실하게 해 손가락의 영역을 넓혔다. 눈 밑을 엄지손으로 살짝 쓸어 보았다. 스친 듯 만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루만졌다.
“실은, 내가 은혜도 모르고.”
널 탐내. 차마 뒷말까진 내뱉지 못했다. 오묘한 안광을 덮고 있는 눈꺼풀이 번쩍 뜨인다면 그대로 쫓겨날 테니까. 천천히 손을 내려 나만 덮고 있던 이불을 덮어 주었다. 몸을 일으켜 발꿈치를 들고 별채를 나왔다.
한파가 끝났는지 매섭던 바람이 잠잠했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으나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평균 수면을 채우려면 한숨 더 자야 하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역시나 한참을 뒤척였다. 천장을 보든 허공을 보든 서은오의 얼굴이 떠다녔다.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누워 데굴데굴 구르며 시간을 보냈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묵직하고 답답했다. 오래 보자고 얘기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흑심이 고개를 드는지.
“정신 차리자.”
혼잣말로 심란한 마음을 추슬렀다. 다른 건 다 접어 두고 오로지 서은오를 어떻게 웃게 해 줄 것인지, 그것에만 골몰하기로 정했다. 시내 영화관, 마트, 시장터, 바닷가. 함께 갈 만한 곳을 나열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큰소리쳐 놓고 해 준 게 없어 마음에 걸리니까.
서은오는 내게 애초에 빚이란 없으니 괜한 마음 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서은오의 생각이었다. 서은오가 괜찮다고 해서 나의 해묵은 감정이 없던 게 되나.
이건 내가 해갈해야 하는 감정이었다. 미안하고도 애틋한 마음에 설렘과 떨림과 애정이 달려들어서 혼란해졌지만 긴 시간을 먹고 자란 놈들이 더 강할 거라고 믿었다. 후에 온 것은 덜어 내면 된다. 나만 정신 차리면 될 일이니 할 일만 하자고.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곳에서 다짐한 것을 상기했다. 기껏해야 서은오의 집에서, 서은오의 동네에서 그를 웃겨 준 게 전부였다. 좀 더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하다못해 작은 초등학교의 운동장이라도 가야겠다. 이 겨울에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겠다고 다짐했으니까.
그래도 감히 바랐다. 네게도 함께 보낸 일상이 훗날의 찬란함으로 남기를. 햇볕에 반짝이는 모래알 같기를. 좋았던 기억이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