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축축한 용서
땅거미 지는 시간 아래에 선 채 오르막을 응시하며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서은오가 들어 있을 집을 코앞에 두고 미적거리다가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여름아,
하고 대답하는 도경 언니에게 바쁘냐고 물었고 한가하다는 답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내 상황을 읊기 시작했다.
내가 이 감독의 주문으로 제주에 온 것과 영화팀에서 그토록 섭외하고 싶어 하던 장소의 주인이 어릴 때 친구라는 것, 다 자란 친구가 보기 드문 미남이 되었고, 그 때문인지 그를 자주 훔쳐보게 된다는 사실까지는 진작 얘기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생활에 고백할 내용이란 별것 없었다. 어쩌다 한 숨바꼭질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최신 정보였고 그 말을 들은 나의 유명한 친구들은 웃음기가 밴 목소리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거 밀고 당기기 같은 게 아닐까.
“밀고 당기기?”
-상대는 네가 뭔가를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아?
“어째서?”
-최선을 다해 쫓아다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아서는 거, 무지 신경 쓰이는 일이잖아.
“…전혀 신경 안 쓰던 눈치던데?”
-그럼 뭘 고민해?
“안 써서. 해도 해도, 너무 신경을 안 써서.”
수화기 너머 도경 언니가 하하, 웃었다. 곧 도 배우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유혹의 기술을 이도경한테 물으면 되겠어? 도경인 넘어온 입장인데. 나한테 물어야지, 외사랑이던 장르를 어떻게 바꿨냐고.
…괜히 전화했나.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늘어놓은 고민 상담이 염장질로 흐르는 것 같아 찜찜했다.
“여러 번 말하는데, 나 걔 사랑 안 해. 아니, 사랑은 해. 우정도 사랑의 일종이니까. 근데 연애 감정이 아니라 단순히 친구라니까? 내가 걔 앞으로 마음의 빚을 엄청 달아 놓아서, 지금이라도 그 빚 다 청산하고 싶은, 한없이 퍼 주고 싶은 사이라고.”
-그 남자를 끈질기게 훔쳐본다며?
“그래.”
-어떤 우정이 그렇게 집요해.
“…신기하니까. 잘 자란 모습도 너무 좋고. 게다가 예쁘기까지 해서 시선이 자꾸 가는 것뿐이야.”
-한 감독님,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그거 사랑. 어둠 속에서 본 눈빛이 자꾸 생각나서 뒤척인다? 끝장난 거야. 알잖아.
하아. 긴 한숨을 쉬었다. 숨바꼭질이 다 뭐라고. 장롱 속에 들어앉았다가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경험한 나는 그날부터 밤잠을 설쳤다.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하고 첫닭이 울 때쯤 집을 나섰다. 더는 놀 수만은 없는 찰나라고 아무도 묻지 않은 이유를 대면서.
아침 일찍 나갔다가 해가 떨어지기 직전이나 캄캄한 밤에 귀가하는 바람에 서은오와 오래 마주할 일이 없었다. 어쩌다 완두콩들이 있는 저녁엔 그나마 좀 나았다. 나는 혹시나 서은오가 내 변화를 눈치채고 기겁할까 봐 마주칠 일을 최대한으로 피했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 밤에는 어쩔 수 없이 마주치곤 했는데 그땐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묻지도 않은 일과를 늘어놓았다. 오늘은 오름에, 혹은 바다에, 그리고 시내에 다녀왔다고. 어떤 날엔 녹음한 것을 일부러 재생하기도 하면서 실없이 웃었다. 매번 그렇듯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내가 입을 다물면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못 견딘 나는 피곤하다는 어설픈 핑계를 대며 등을 돌렸다.
무감한 표정으로 서 있던 서은오는 내가 등을 돌리고 나서야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문방구 주인이 아니라 식당 주인인 것처럼 늦도록 주방에서 무언가를 삶고 끓이고 데쳤다.
시장에서 늦은 점심을 먹거나 저녁때를 일부러 건너뛰거나 시간이 늦어 뭘 먹지 못한 날엔 어떻게 알았는지 문을 두드렸다. 아니, 사실 어떻게 알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매번 두드려 와서 저녁 한번 거르지 않았다.
서은오는 내가 문을 열자마자 쟁반을 턱, 안겨 주었다. 쟁반을 넘겨줄 때마다 손끝이 닿았는데 그때마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서은오는 멈칫하긴 해도 나처럼 오버하진 않았다. 쟁반을 넘겨주고, 넘겨받는 일이 며칠 반복되다 보니 이제 어쩔 수 없이 닿는 손끝이라면 서로 모른 척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남자도 뭐 있다.
“있긴 뭐가 있어.”
-관심 없으면 삼시 세끼 챙겨 줄 리가 없어. 무슨 보호자야? 아니면 봉사 활동 좋아한대?
“동네 애들도 다 챙겨 준다니까?”
-희한하네. 짝사랑은 별것도 아닌 일에 의미 부여가 기본인데. 뭐, 착각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겠다는 의지는 좋네.
잠시 침묵하며 지난밤들을 곱씹었다. 서은오가 가져온 쟁반에는 주로 출출할 때 먹기 좋은 요깃거리가 담겨 있었다. 튀겨 낸 가래떡과 식혜, 브로콜리 수프 혹은 문어와 여린 채소, 올리브를 섞은 샐러드 종류의 음식.
먹어 봐라, 잘 먹어라, 하는 그 어떤 생색도 없이 음식을 주고 간 서은오는 늦도록 주방에 앉아 있었고, 나는 서은오가 잠들거나 방에 들어가면 설거지를 하려고 대기했으나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주방 불빛에 매번 항복하고 별채로 향했다.
문을 열면 서은오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거나 그냥 멍하니 있곤 했는데 내가 들어오면 접시 상태부터 확인했다. 음식을 좀 남겼다 싶으면 배가 부른가 보다, 생각하는지 쟁반을 가져가 설거지만 했고, 접시를 싹싹 비운 날이면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겠다는 심정인지 식탁 의자를 뺐다.
나는 삐죽 나온 의자를 외면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와서 앉으라는 권유 한번 없이 착석하게 한 사람은 불 앞에 서서 가스 불을 켜고 냄비를 올리고 채소를 썰어 내고 주문한 적 없는 소담한 밥상을 내왔다.
그 모습이 사람을 얼마나 심란하게 하는지, 당사자는 진짜 모르는 것 같아서 더 심란했다. 밥상 앞에 앉은 나는 그 어떤 농담도 건네지 못하고 묵묵히 그릇을 비운 후 안채로 돌아왔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에야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들이닥친 누군가가 안채를 차지한 후로 매일 자기 뒤만 쫓아다니다가 어느 날 눈에 띄게 달라졌다면?
당연히 궁금할 게 아닌가. 도경 언니의 말처럼 서은오는 내가 밀고 당기는 러브 게임 중인 거라고, 신경 쓰게 하려고 어떤 노력을 하는 중이라고 오해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서은오는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정말 바쁜 게 맞냐고 묻지도 않았으며, 본인의 행동이 사람을 떨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나는 괜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해명하고 싶었다. 목석같이 서 있어도 시선이 가는 남자가 예쁜 짓만 골라 하면 마음이 가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내가 줏대 없이 헷갈리는 게 오로지 내 탓이겠냐고.
그래도.
“사랑은 아냐. 사랑은 오바야.”
-그래.
“아, 아니라고.”
-알았다고.
“…진솔한 충고를 해 줄래? 찝찝하거든?”
-부정이 얼마나 갈 것 같은데? 인정하면 편해. 결국엔 무릎 꿇을 일에 괜히 힘 빼지 마.
“아무리 그래도 사랑이라니. 그냥 좀 매력적으로 보여서 곤란한 정돈데.”
-그래? 그럼 해결법이 두 가지 있어.
“뭔데?”
수화기를 반대 귀로 바꿔 붙이며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다.
-일단 거기서 도망쳐. 당장 짐 싸서 서울 와.
“무슨 도망을 쳐? 아직 뭘 해 준 것도 없는데. 오히려 내가 받았어. 빚 청산은커녕, 따뜻하게 잘 있다 가기만 하면 내가 사람이야? 기각이야. 남은 하나는?”
-뭘 물어. 어렵게 갖고 가지 않는 거지.
“뭐?”
-상대가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곤란할 게 뭐 있어. 임자 있는 것만 아니면 됐지. 최선을 다해 한여름을 어필해.
“…….”
도착한 문방구 입구에선 연기와 함께 고기 냄새가 퍼져 올랐다. 오늘은 완두콩들이 문방구에서 저녁을 먹는 날인데 익숙한 세 아이를 제외하고도 인원이 꽤 많았다. 마당과 별채, 그 사이를 잇는 길목이 시끌시끌했다. 성인 여섯에 아이들이 일곱쯤, 아니 여덟 명이었다.
마당은 고기 파티를 한껏 즐긴 후의 파장 분위기였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두꺼운 옷을 껴입은 채 발을 동동 구르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때, 열린 별채 문으로 아저씨 한 분이 나오며 불 앞에 있는 서은오와 마주 섰다.
“누가 와신게.”
나를 발견한 아저씨가 입구를 턱짓하며 서은오에게 내 존재를 알렸다. 등을 지고 서 있던 서은오가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가장 반가운 사람은 뛰어다니느라 바쁜 완두콩을 제외하면 서은오뿐이라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은오는 웃지 않았다. 그저 목장갑을 벗어 내고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밥 먹었어?”
“어? 어.”
대답하자마자 눈치 없이 배에서 밥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리가 말도 못 하게 컸다. 할 수만 있다면 오장육부와 대화라는 걸 하고 싶었다. 점심 먹지 않았느냐고, 왜 고기 냄새에 빛의 속도로 반응하는 거냐고, 아사 직전이냐고.
“정말 밥 먹었어?”
서은오가 기회를 주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당황한 나는 수화기 너머의 친구들에게 화제를 돌렸다.
“으응, 그랬어? 나는 이제 도착했어. 그래, 잘 쉬고. 나중에 다시 걸게.”
서울에서 침묵으로 키득대고 있을 두 사람이 순순히 전화를 끊어 주었다.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서은오를 올려다보았다.
“은오야, 뭐라고? 뭐라고 했어? 통화하느라 잘 못 들었네.”
나는 사실 네가 한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어. 그래서 대충 대답했고, 그 결과로 네 질문과는 판이한 소리가 배에서 났던 거야, 라는 뻔뻔한 태도로 능청을 떨었다.
“손 씻고 나오라고.”
서은오는 장비가 든 묵직한 가방을 허락 없이 가져가며 돌아섰다. 성큼성큼 안채까지 걸어가 가방을 들여놓고는 다시 목장갑을 끼고 불 앞으로 가 고기를 구웠다.
내 쪽을 흘끔대는 사람들이 늘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막내 완두콩이 달려와 큰 소리로 쫑알거렸다.
“이모, 어디 갔당 이제 완? 이모도 빨리 밥 먹어! 나는 콥대사니랑 고기 구워 먹언! 이모는 콥대사니 먹을 줄 알아? 나는 다 잘 먹는데!”
“지율아, 콥대사니가…….”
콥대사니가 뭐냐고 물으려던 나는 말을 삼키고 완두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아무리 겨울 중 따스한 날이라지만 그래도 겨울이었다. 그런데도 아이의 두피가 땀으로 축축하고도 뜨거워서 웃음이 나왔다.
아이의 할 일이란 뛰어노는 것. 자기의 본분을 제대로 지키며 사는 아이에게서 나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본분을 잊지 말 것.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할 것.
서은오가 매력적인 어른으로 자랐다고 출렁이는 배처럼 요동쳐서야 되겠는가. 행운의 절반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내 속이 어지럽든 뜨겁든 그저 이곳에 있는 동안 그를 많이 웃게 해 주다 가야지.
“은오는 그냥 친구랜 하는디, 진짜 애인 아니꽈?”
별채 욕실에서 손을 씻고 다시 마당으로 나오자 서은오와 고기를 굽던 아저씨가 물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서은오는 어른에게도 매서운 눈빛으로 침묵을 요구했다.
“야이는 무신 애들추륵 놀리지 못행 안달함서? 야야, 육지서 온 아기야. 전복 맛 어떵? 그때 전복 보난 얼굴이 새색시추륵, 아이고, 지금도 전복 얘기만 해신디 얼굴이 피엄서. 그렇게 좋으냐? 말만 하믄 호꼼이라도 맨날 갖당 주켜.(얘는 무슨 애들처럼 놀리지 못해서 안달하냐? 서울에서 온 아가씨야, 전복 맛 어땠니? 그때 전복 보니까 얼굴이 새색시처럼, 아이고, 지금도 전복 얘기만 했는데도 얼굴이 피네. 그렇게 좋으냐? 말만 하면 조금이라도 매일 전복 갖다 줄게.)”
완두콩의 할머니가 길게 말씀하셨다. 사투리를 모르는 나로서는 빠르게 지나가는 문장에서 단어 몇 개만 주워듣고, 유추해 대답해야 했기에 긴장하며 집중했다. 어른에게 헛소리하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 사투리를 해석하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 곤란했다. 다시 친구 하자고 노래를 부르는 나를 무시하더니 나 없는 곳에선 친구라고 불렀다는 게 좋아서.
얼른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른을 비웃는다고 오해 살까 봐 필사적으로 입 안을 씹었다. 하지만,
나를, 친구라고 했구나.
서은오, 그랬구나.
아무도 출전하지 않은 경기에 혼자 출전해 금메달을 거저 얻은 기분이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너무 좋아서 메달을 걸어 준 서은오를 껴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상 소감으로는 음흉한 미소를 선보이고 싶었다. 골려 주고 싶으니까.
“전복. 전복 좋아요. 감사해요. 음, 제가 얘 색시는 아니고 친구예요. 얘는 제 타입이 아니라서요.”
동문서답하는 줄도 모르고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내 대답에 가만히 있던 서은오가 피식 웃었다.
“왜?”
나는 혹시라도 질문에 틀린 대답을 했을까 봐 뒤늦게 눈치를 살피며 서은오에게 바싹 붙었다. 서은오는 이제 고기 더 안 구워도 될 것 같다고 전해 온 젊은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쪽 눈썹을 올리며 한 음절을 뱉었다.
“얘?”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내가 뭘 잘못했는지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기껏해야 지금 여기서 타입 얘기를 왜 하냐는 질타를, 시도 때도 없이 농담하지 말라고,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특히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지, 이상한 데서 발끈할 줄은 몰랐다.
“얘, 라는 말이 왜? 여보나 자기라고 할 순 없잖아.”
“…너는 중간이 없어?”
서은오가 다시 나를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속닥거렸다.
“은오야.”
“왜.”
“배고파.”
“하.”
“실은 나 아사 직전이야.”
나를 내려다보는 서은오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 한 점을 가리키며 집어 달라고 강요했다. 서은오와 내 거리가 세 걸음이 아닌 한 걸음 떨어진 거리지만, 닿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여기며 군침이나 삼켰다.
집게로 고기 한 점을 든 서은오가 고기를 내밀었다. 연기가 나는 걸 코앞으로 들이미는 행동에 놀라 반사적으로 서은오의 팔목을 잡고 입김을 불었다. 후후, 불다가 어느 정도 식었으리라 짐작했을 때 고기를 받아먹었다. 입 안에 넣자마자 터지는 육즙과 부드럽고도 쫄깃한 식감에 고기를 씹으며 발을 굴렀다.
“와, 미쳤다. 입에서 살살 녹아. 한 점만. 한 점만 더 줘 봐.”
“…….”
“하. 은오야, 부탁이 있어. 내가 언젠가 아기를 가지면, 이 고기 맛이 그리울 거 같아. 그때도 구워 주라. 야, 좀 불어서 줘. 연기가 펄펄 나는 걸 무조건 입에 넣으려고 해? 으음, 진짜 맛있다. 이게 바로 흑돼지의 맛이야?”
“백돼지야.”
싸늘한 대답을 고기와 함께 씹어 삼킨 나는 서은오가 그릇에 고기를 퍼 담는 걸 지켜보다가 깨달았다. 내가 서은오의 팔목을 잡았다는 걸. 그것도 두 번이나 잡았다.
사람들 앞이라고 기겁하지 않은 것인지 서은오는 별 반응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뿌리치거나 한 소릴 했을 텐데. 기겁하는 반응이 없으니 서은오가 내건 규칙을 어긴 줄도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미안해진 나는 테이블로 향하는 서은오의 뒤를 밟으며 침묵했다. 익은 고기를 내려놓은 서은오가 이번엔 별채로 향했다. 생각 없이 뒤를 졸졸 쫓던 나는 그걸 또 쫓아 들어갔다. 마루턱을 밟고 올라섰을 때 서은오가 돌아섰다. 눈이 마주치자 정신이 들었다.
“어색해서 따라와?”
어색해서 굳이 졸졸 쫓아다니는 거냐고 묻는다.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과 어색한 거지, 마당을 점령한 아이들과는 친해졌는데도 낯가리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어차피 완두콩들은 바빴다. 이미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진 아이들을 내가 민망하다는 이유로 불러오는 건 꼰대나 하는 짓 아닌가.
“그리고 너 손 부족할까 봐.”
기발한 답변을 생각해 낸 나는 당당하게 외치며 눈을 찡긋거렸다. 서은오는 어련하겠냐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주방으로 들어간 그는 고사리와 명란젓, 고추냉이와 깻잎지를 작은 그릇에 덜어 내고 씻어 놓은 상추를 챙겼다. 그것들을 커다란 나무 쟁반에 한 번에 옮겨 들었다. 앞장서는 등을 따르며 나는 나의 기발한 답변이 얼마나 우스웠는지를 가늠했다.
서은오 앞에선 자주 우스운 사람이 되고 우습든 만만하든 아무래도 상관없으나, 남들 눈엔 우스운 사람으로 남을 수는 없어서 상추와 깻잎이 든 소쿠리를 빼앗아 들었다.
이곳에 와서 허락 없이 어떤 행동을 할 때면 나는 서은오를 지나쳐 앞장섰고 이번에도 그랬다. 다행히 따라오는 한숨은 없었다.
마당을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흩어졌다. 별채를 흘끔거리다가 우리가 나오자마자 빠르게 흩어졌다는 말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잘 알았다. 당사자 빼놓고 몰래 속닥거리다가 서둘러 침묵하는 분위기를.
알지만, 아무리 쌈닭이라 불리는 나라도 서은오의 이웃을 따끔하게 대하진 못한다. 애써 어수선한 분위기를 모른 척하며 그새 미지근해진 고기를 서은오가 가르쳐 준 대로 싸 먹었다.
상추와 깻잎에 고사리 몇 가닥과 으깬 명란젓을 조금 올리고 된장까지 올려 한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다가 눈을 감았다. 감탄사를 뱉으며 열심히 배를 채웠다. 몇 번을 싸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에 서은오를 쳐다보며 입을 뗐다.
“너는 대체 못하는 게 뭐야? 왜, 고기도.”
“입 좀 다물고 먹어.”
한마디만 남기고 떠난 서은오는 불 앞에 있던 아저씨와 바통 터치하며 고기를 구웠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 틈에 나만 시작이었다. 이런 게 바로 군중 속 고독인가. 쓸데없는 감상에 빠진 나는 고기를 싸 먹고 추우면 모닥불 근처를 맴돌다가 다시 테이블로 오는 행동을 반복했다.
코끝과 양 뺨이 차가운데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밖에서 먹어 더 맛있나, 실은 분위기 탓인가. 심심한 의구심에 어이가 없었다. 배가 따뜻해지니 여유로운 생각을 다 했다.
그사이 서은오가 다시 내 앞으로 왔다. 잘 익은 고기와 구운 마늘대, 버섯을 가져왔다.
“근데, 은오야. 입 다물고 어떻게 먹어? 시범을 보여 줘 봐.”
차가운 서은오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 식은 고기를 자기 앞으로 치우고 김이 나는 것만 가까이 끌어다 주는 손길만큼은 따뜻했다. 나는 실실 웃으며 뜨거운 것을 주워 먹었다. 내가 기다란 풋마늘대를 오독오독 씹어 먹자 막내 완두콩이 달려왔다. 나와 서은오를 번갈아 보느라 고개를 한껏 젖힌 아이가 소리쳤다.
“이모도 콥대사니 잘 먹네! 삼촌이 잘 구워! 아삭아삭이야!”
“마늘대가 콥대사니구나.”
“아니이, 콥대사니는 콥대사니야!”
“응. 지율이 말대로 정말 맛있네.”
볼이 빨간 완두콩이 헤헤 웃으며 콧물을 흘렸다. 할머니가 머리에 바구니를 덮어씌우고 잘랐는지, 오늘따라 단발머리가 강렬했다. 웃음이 나오는 걸 막지 않으며 테이블 한쪽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를 집었다.
“지율아, 들어가서 놀아.”
아이의 눈높이까지 몸을 낮춰 앉은 서은오가 목장갑을 벗어 내고 맨손으로 아이의 코 밑을 훔쳤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언니, 오빠를 부르며 삼촌이 안에 들어가라고 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휴지를 뜯어 서은오에게 내밀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지율이, 네 딸이니?”
휴지에 끈적한 콧물을 닦아 낸 서은오가 뭔 소리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취조했다.
“너 사실 유부남이지? 손끝 하나 닿지 말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임자 있으니까 조심하는 거 아니야?”
“재밌냐?”
“네가 애를 되게 좋아하잖아. 특히 지율이를.”
“여기서 제일 작으니까.”
“아, 나도 좀 작을걸. 난 커서 하대하니?”
내 말에 서은오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등을 졌다. 슬슬 술판을 접으려는지 주위 사람들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은오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설화 속 인물처럼 고개를 들면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식사를 다 마치지 못한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상추 한 장에 무리해서 고기를 쌓다가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쳐 머쓱하게 고기를 덜어 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관찰하던 남자가 다가왔다.
“상무님 친구분이시라고요?”
뜬금없는 호칭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입 안에 고기가 남아서 입가를 가린 채 급하게 물었다.
“상무님이요? 쟤 여기 사장님인데.”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는 듯하다가 그대로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상무님이셨죠. 한 달 만에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벌써 일 년 가까이 여기 계시는 거고. 제가 달마다 와서 보고하고, 설득하는데 끄떡없으세요.”
말을 마친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언제부터 친구였는지 여쭤도 될까요?”
“음. 그 전에,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관계인지 먼저 들어도 될까요?”
어릴 때 잠깐 친구였다는 대답을 할 수도 있으나 서은오에 관해 잘 아는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에게 어릴 때, 라는 말을 전하면 서은오에게 일어났던 일을 떠올릴 것이고 내 존재가 더 궁금해질 수도 있었다.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나는 상관없지만 서은오는 함부로 재단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내 안에서도 언제나 소중히 다루고 싶은 친구였다.
“비서입니다. 상무님이 일선에 뛰어들 때부터 함께 일했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저는 그냥 친구예요. 언제 적 친구인 게 왜 궁금하신지는 모르겠는데, 그 질문, 그쪽 상무님께도 물을 수 있는 질문 맞나요?”
비서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상무님이 왜 친구라고 얘기했는지 알겠네요. 정말 친구 맞으시네요. 다 아시는 거죠?”
“뭘요?”
“아시겠죠. 서슴없이 만지셨으니까. 상무님께서 만지는 걸 허락하시기도 했고……. 아시다시피 살결 닿는 걸 끔찍해하시는 분이잖아요.”
“아, 네. 처음엔 칠색 팔색을 하더니 좀 괜찮아지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을 뿐인데 비서가 이상할 정도로 기뻐했다.
“상무님을 자연스럽게 만지는 사람, 저 꼬마 말곤 처음 봐서 좀 놀랐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실례될 질문을 했네요.”
“좀 유난이긴 하지만 놀랄 것까지 있나요. 닿아 봤자 친구끼리 한 가벼운 터치일 뿐인데.”
“예?”
순식간에 비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개연성 없이 차가워진 반응에 무슨 실수가 있었는지 고민했다.
내 표정을 지켜보던 남자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하지만,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농담이라도 어떻게 유난이라고 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일침에 고개를 틀고 비서를 마주했다.
“때에 따라 유난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진심이십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가 다시 일갈했다.
“친구분은 시체를 기꺼워하며 만질 수 있나 봐요.”
뜬금없이 쏟아진 단어에 미간이 구겨졌다. 충격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 선정이었다.
“…뭐라고요?”
“친구라면서 유난이라고 느끼시는 게 이해가 안 돼서요. 상식적으로 길거리에 버려진 마네킹만 봐도 흠칫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남의 고통은 먼지처럼, 가, 볍…게. …그러니까.”
흥분한 것처럼 떠들던 비서는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선 말끝을 흐렸다.
“왜 말을 하다가 마세요? 계속하세요.”
미간을 좁힌 채 답을 요구했다. 나를 가만히 보던 비서는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제가 실수했네요. 못 들은 거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뭘 못 들은 거로 해요?”
“아, 미치겠네…….”
비서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차분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속에서 열이 올랐다. 코트를 벗어 던지고 싶을 만큼 등줄기가 뜨거웠다. 맛있게 씹어 삼킨 음식을 다 토해 내고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고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 댔다. 별채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비서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울 것같이 흐려졌다. 비로소 나는 급체한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숨을 몰아 내쉬었다.
‘손끝 하나 닿을 생각하지 마.’
‘인간 다 싫어해.’
‘굳이 만질 이유가 있어?’
‘그런 거 아냐. 네가 나 만져서 싫은 게 아니라 나 원래 이래.’
서은오가 했던 말이 제야의 종처럼 댕댕 울렸다. 귓바퀴를 치고 머릿속을 깨부수며 문장 하나하나가 내 안에 각인되었다. 소름이 끼쳤다. 머리가 쭈뼛 서고 발끝으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살결이 닿을 때마다 싸늘해지던 시선을, 뿌리치며 한 소릴 하던 행동을 그저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서은오에게 정신착란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도 나는 현대인이 흔히 겪는 질병 중 하나일 거라고 여겼다.
무서운 일을 겪었으니까. 형제가 죽기까지 한 비극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그 일을 지금까지 떠들어 대는데 당연히 괜찮을 리 없다고, 어떤 우울과 모난 마음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봐요!”
나는 비서의 부름을 무시하고 별채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꼬꾸라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바깥은 사람들의 정리와 인사로 정신없었고 안에선 서은오가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줄여 가고 있었다.
별채 문을 큰 소리 나게 닫았다. 쾅, 하고 닫히는 소리에 서은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루턱을 밟고 올라가는 와중에도 치켜뜬 눈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서두르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흥분에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보나 마나 내 얼굴은 발갛고 딱딱할 것이다. 거울 따위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전쟁에 나가는 용사처럼 후퇴 없이 서은오의 앞에 섰다. 그의 손에서 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마룻바닥에 동그란 흔적이 늘어 갔다.
“뭐, 하는.”
예고도 없이, 허락도 없이 서은오를 껴안았다. 서은오가 물러날 틈도 주지 않고 불시에 안겨 들었다. 양팔로 허리를 감고 가슴팍에 고개를 처박았다.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한 서은오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순식간에 굳어 버린 게 느껴졌다.
“아, 젠장.”
뒤늦게 사태 파악한 서은오가 단번에 나를 밀어냈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린 서은오는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
나는 엉엉 울며 서은오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한 걸음 다가서면 그만큼 물러나는 서은오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왜 우냐고.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초상났어?”
살벌한 표정으로 따져 묻는 서은오는 내가 왜 우는지 다 알아챈 눈치였다. 믿기지 않아서 서은오의 손을 멋대로 잡아 보았다. 그대로 뿌리치는 걸 다시 잡으려고 다가서다가 내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인 서은오의 행동에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어?”
“…은오야.”
“밥 잘 먹다가 어떻게 알았냐고.”
이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정말이지 너무하다고, 네가 왜 이렇게까지 불행해져야 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미간을 구긴 서은오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기만 했다. 누구에게도 따져 물을 수가 없어서 주저앉아 울었다.
잘 지냈냐고, 잘 살아왔냐고, 그 일은 다 잊혔냐고, 그런 게 궁금했던 내가 견딜 수 없이 끔찍해서, 너에게 행운을 나눠 주겠다고 까불던 내가 가소롭도록 잔인해서, 너를 혼자 보내 지옥을 겪게 한 내가 이제 와 다시 친구 하자고 졸라댄 게 징그러워서, 불행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네게 감히 설레어서, 주제도 모르고 내 속이 시끄러워졌다고 생각해서.
“미안해. 진짜 미안해.”
“야.”
“은오야, 미안. 내가, 흐으, 내가…….”
“네가 왜 미안한데.”
“내가, 혼자.”
“네가 왜 우는데!”
서은오가 소리치며 나를 무섭게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목소리가 울음처럼 들려서, 그 목소리가 여덟 살의 어린애가 따지는 것 같아서 더 큰 목청을 내질렀다.
“혼자 행복해서!”
“…….”
“혼자 잘 살아서, 너 혼자 보내서, 네가 같이 가자고 했는데, 몇 번이고 나를 봤는데, 내가 네 손 뿌리치고…….”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바깥은 이미 고요했고 서은오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서 있기만 했다. 이 밤의 소리란 끅끅대는 울음소리만이 전부였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지겹도록 축축한 용서를 빌었다. 우는 일에 힘을 다 써 버리겠다는 듯 그게 나의 일이라는 듯 아낌없이 쏟아 내었다. 살면서 오늘처럼 울어 본 적 없었다.
“마셔.”
한참 만에 서은오는 내 앞으로 투명한 유리컵을 내밀었다. 모든 게 다 꿈인 것 같았다. 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덮어 오는 노란 전구도, 헐떡이는 울음소리만 존재하는 이 훈기 도는 별채 공기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차분해진 눈빛도.
오래 울고 나면 몽롱해진다는 것은 아주 어린 시절에 겪었던 감각이었다. 그런 감각이 있다는 것도 잊고 살았고, 아주 많이 울게 될 날이 온다면 그건 아마 먼 훗날 아빠를 엄마 곁으로 보낼 어느 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인생이란 늘 그렇듯 예상치 못한 일로 사람을 돌게 만들었다.
서은오는 나를 기다렸다. 내가 물을 마실 때까지 팔을 거두지 않을 작정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이라도 난 듯 울면서도 나는 그의 팔이 아프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바닥에 내려놓으면 되는데 미련 떤다고 여기며 허리를 세워 앉았다.
훌쩍이면서 팔을 뻗었다. 흐릿한 시야에 컵의 위치가 단번에 초점으로 들어오지 않아 허공에 헛손질했다. 못 봐주겠는지 서은오가 몸을 낮추고 앉아 컵을 대령해 주었다.
“…아.”
손끝이 닿아 흠칫한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며 물을 마셨다. 잦아든 울음을 번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미안한 상대에게 추태를 보인 꼴이 기가 막혔다. 마음의 빚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서은오가 준 물이나 마시고 있는 내가 싫어서 다시 울컥했지만 더한 추태를 막기 위해 입 안을 씹으며 참았다.
“상무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비서가 들어오더니 서은오를 불렀다. 몸을 일으킨 서은오는 대꾸 없이 비서를 쳐다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다 돌아갔습니다. 잘 먹고 간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끝입니까?”
서은오는 건조한 어조로 물었고 비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을 망설였다. 따가운 침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이 바빴다. 좀 전에 비서는 내게 못 들은 셈 쳐 달라고 매달렸다. 흥분한 나는 그의 곤란함을 외면하고 서은오에게 쳐들어와 난장을 피웠다.
“제가 누설했습니다.”
체념조였다. 자진하여 신고하러 온 비서를 향해 돌아선 서은오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입을 열었다.
“과정 보고하세요. 비서님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경위.”
“…친구분과 가까워 보여 주제넘게 추측했습니다.”
“정확히 이 친구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비서는 물론이고, 나조차도 긴장하게 한 질문이었다. 가쁘게 숨을 가다듬던 나는 서둘러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것까지 보고하라는.”
“뭐라고 했길래, 이 친구가 숨도 못 쉬고 우냐고.”
그런 것까지 보고하라는 상사는 꼴불견이라고 농담 같은 말을 뱉으려고 했다. 하지만 서은오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비서를 향해 재차 물었다.
“사람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어.”
비서가 솔직한 답을 내놓기 전에 내가 알아들은 뜻을 얘기했다. 서은오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잘못은 더 묻지 않겠습니다. 표 비서님께 사표 제출하세요.”
서은오는 비서가 아닌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란 나와 달리 비서는 각오한 일인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사표라니? 꼭 그래야 해?”
비서와 서은오를 번갈아 보다가 소리쳤다. 비어 버린 컵을 가지고 개수대로 향하던 서은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 때문에 하루아침에 직원을 해고한다고? 너 그렇게 무지막지한 사람이었어?”
“착각하는 모양인데.”
“저기요! 변명 한번 안 하고 포기하시면 어떻게 해요? 오래 일하셨다면서요. 좋아하셨잖아요. 제가 은오 친구라고 해서, 그래서 얼결에 나온 실수잖아요.”
자기 말을 다 잘라 먹고 비서를 붙잡는 나를 서은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디 얼마나 멋대로 지껄이는지 보자는 표정이라 궁지에 몰린 나는 정신없이 떠들었다.
“은오야, 너도 일정 부분 잘못은 좀 있지 않을까? 난 있다고 생각해. 네가 내 손은 안 뿌리쳤잖아. 물론, 그동안 우리가 불가피하게 살이 좀 닿긴 했어. 그래서 너도 본의 아니게 좀 익숙해졌겠지. 게다가 아까는 내가 너를 제멋대로 만진 거고. 내가 무슨 계획이 있어 만진 게 아니라, 네가 막, 뜨거운 고기를 코앞에 들이대니까, 놀라서 만진 거지만……. 구차한 변명을 제외하면 내 탓이지. 어쨌든 우리가 비서님이 오해할 만한 여지를 준 건 맞잖아. 오래 일해 온 사람이라며. 그런데 한 번의 실수로 사표를 내라고 해?”
“절대 하면 안 되는 실수도 있어. 네가 개입할 문제 아니니까 끼어들지 마.”
“어떻게 안 끼어들어?”
“…….”
“나 지금 진짜 뻔뻔한 거 아는데, 부탁할게. 한 번만 봐줘. 누설하면 안 되는 거, 그거 나한테 한 거니까 안 한 거나 마찬가지야. 난 누가 고문해도 어디 가서 네 얘기 안 해.”
서은오가 헛웃음 쳤다. 나는 마음에 무거운 추 하나를 더 얹어 놓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부탁한다고, 좀. 어? 내가 지금 괜찮아 보여? 네 말대로 나 숨도 못 쉬게 울었어. 다시 울어? 네 생각, 내 생각만으로도 벅찬데, 네 비서님까지 생각하면서 통곡해야 해? 너 진짜 초상 한번 치러 볼래?”
“…하.”
“빨리. 약속해. 그러겠다고 해 줘.”
“너 뭔데 나한테.”
“나 씻고 싶어. 뜨거운 물에 몸 담그고 한 번 더 울 거야. 방에 들어가서도 울 거고, 자다가 깨서도 울 거야. 너 없는 데서 나 다 말려 놓을게. 내가 앞으로 너한테 어떻게 빚 갚을 건지 생각해 내면 슈트 빼입고 브리핑할 테니까, 지금부터 시간 좀 달라고.”
서은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내 눈만 보았다. 턱이나 입술, 어깨 따윈 전혀 내 일부가 아니라는 듯이 오로지 눈동자만 쳐다보았다. 나는 한계점에 달한 눈물샘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코끝이 매워지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서서히 눈가로 물기가 들이찼다.
내 변화를 눈치챈 서은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다시 얘기해?”
“…….”
“내가 다른 남자 생각하게 두지 말라고, 이 멍청한 자식아.”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동공이 커진 서은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의 시선도 마루턱 너머로 향했다. 멍한 얼굴로 굳어 있던 비서가 갑작스러운 시선 세례에 흠칫하며 바닥을 응시했다.
“들으셨죠, 김 비서님.”
“…예?”
“누가 얠 고문하겠어요. 저에 관해 누설하신 적 없습니다. 사표 얘긴 없던 거로 하죠.”
“아…….”
“나가 보세요.”
나는 소리를 꾹 참고 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닦아 내며 고개를 숙였다. 서은오의 비서도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틈으로 찬 기운이 발을 들였다. 서은오의 한숨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고마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서은오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내가 몸을 일으켜 별채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 서은오는 사라지는 내 등만 보고 있었다.
* * *
밤이 저물고 아침이 오고 다시 밤을 맞이하며 시간을 보냈다. 안채에서만 3일을 지냈다. 행동반경이 죽어 가는 이처럼 좁았다. 나는 밤낮없이 골몰하고 뒤척이고 후회하고 울며 화를 내다가도 이상한 결심을 하고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다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이 오면 잤고 눈물이 나면 흘려보냈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이따금 문이 한 뼘 열리고 한 그릇의 음식이 들어왔으나 먹는 법 없이 식게 두었다.
기운을 차린 것은 방에 틀어박힌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오후에 귀여운 침입자가 나타났다. 문방구와 별채를 드나들던 완두콩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이모를 찾아서 허락도 없이 안채로 발을 들였다. 애들이 참다못해 쳐들어올 정도로 나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해가 중천이지만 밤새 한숨도 잔 적 없으니 잠의 시간은 이제 시작이었다. 소리를 죽이고 들어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도 모르던 나는 서은오의 목소리에 설핏 든 잠이 깼다. 눈을 뜨진 않았다.
“안채는 허락 없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지?”
초등학생인 두 완두콩은 조금 의기소침해하며 우물쭈물하였으나 막내 완두콩은 당당하게 걱정돼서여! 하고 큰소리쳤다. 서은오가 애들을 데리고 나가자 익숙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나른했던 나는 어렵지 않게 잠들었다.
다시금 들리는 소란에 눈을 떴을 땐 해가 저문 후였다.
“왜 안 돼?”
문밖에서 볼 빨간 완두콩의 칭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떡잎부터 남다른 완두콩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숨죽여 기다렸다가 수비가 허술해졌을 때 다시 침입을 시도한 듯했다.
“내가 호, 불어 주면 안 돼?”
“안 돼.”
“내가 물수건도 해 주고 안아 주고 싶은데……. 힘 합쳐야 병균 물러가는데!”
“이모는 강해서 혼자 싸우는 게 좋대.”
“방은 뜨끈뜨끈이야? 약은 먹언? 아이참, 삼촌! 창문에 바람님 오시는지 살짝만 보게! 응? 보게요!”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문밖에서 일어나는 완두콩과 서은오의 실랑이에 마른 웃음이 샜다. 며칠 내내 이어지는 강풍에 지금도 무섭도록 창이 흔들렸다. 웃풍이 있는지만 확인하자는 아이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막내 완두콩에게 늘 져 주던 서은오가 웬일로 단호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적막이 찾아왔다. 휴대폰 시계는 밤 9시를 향했다. 몸을 일으키고 옷가지를 챙겨 방을 나왔다. 안채 입구로 다가가니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돌아갈 모양인지 완두콩들이 춥다고, 바람이 많이 분다고 소리를 질렀다.
“삼촌 차 타면 5분도 안 걸려.”
“3분도 안 걸려.”
“0분도 안 걸려!”
“야, 0분은 넘거든?”
“아냐! 빨리 가서 안 넘거든!”
의미 없는 말다툼에 소리 없이 웃었다. 문을 열어 인사라도 할까 했으나 수척해진 몰골을 보면 애들이 걱정할 게 빤해 조용히 돌아섰다.
욕실에 들어와 옷가지를 하나씩 벗었다. 거울에 비친 야윈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헤어진 애인이 술 먹고 전화한 일이 떠올랐다.
‘밥이 넘어가? 아주 살판났더라? 나 사랑은 했냐?’
깊은 새벽, 달갑지 않은 전화에 깬 나는 어이가 없었다. 구질구질한 얘기를 들어 줄 여유와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옛정이고 뭐고 상대의 눈물을 쏙 빼놓는 일에 혈안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로 잠을 깨운 대가는 각오했으리라고 믿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네 겉모습에 속아 너를 만났어. 이온 음료 광고 찍게 생긴 애가 대체 왜 그러냐? 살다 살다 너처럼 병적으로 깔끔 떠는 여잔 처음이다. 누가 애인이랑 자려고 성병 검사를 해? 사람 헤픈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 하여간, 넌 무드도 없고 고분고분한 맛도 없어. 네가 내 상사야? 내가 상사랑 연애했냐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절대 너 안 만나. 너 내면은 하나 쓸데없다고. 알아? 아냐고!’
그러니까 이별 후에 어쩌다 본 내 때깔이 좋아 보여서 술 먹고 주정을 부렸고 나는 끝까지 져 주질 않아서, 그런 내가 미워 헤어진 이유를 구구절절 떠들어 댔다.
우습게도 연애의 종말은 같은 이유로 찾아왔다. 성병 검사가 어때서 그렇게들 난리였는지. 함께 받으러 가자는 말에 여러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뤘고 은근슬쩍 밤을 보내려 했다. 그 속셈을 알아채고 거부하면 자기를 뭐로 보는 거냐고 화를 냈다.
그래서 끝났다. 이별 후 애인들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나와 자지 못한 게 미치도록 아쉬워 시간이 지나도 치근대는 놈과 똥 밟았다고 생각하며 치를 떠는 놈으로.
“애인도 나를 못 굶기는데, 서은오가 해내네.”
칫솔을 입에 물고 픽 웃었다. 일 때문에 하루 정도 식사를 걸러 본 적은 있어도 자의로, 그것도 며칠을 거르다시피 한 적은 없었다. 아프면 밥심으로라도 이겨 내야 한다고 믿어서 기어서라도 죽을 끓여 먹었고 정 안될 것 같으면 아빠를 호출했다.
아빠는 끼니마다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병이 나을 때까지 먹여 가며 간호했다. 아무리 지독한 몸살이라도 사랑이 담긴 음식 앞에선 꼼짝없이 말살되었다.
이별도 아픔도 내 식욕을 꺾지 못했는데 서은오라면, 서은오의 생각이라면 일주일은 거뜬히 단식하다가 실려 갈 수도 있겠다. 한숨을 내쉬며 물 아래 섰다. 머리를 감고 온몸에 거품 칠을 했다.
샤워를 마친 후엔 호텔 수건처럼 폭신한 타월로 물기를 닦고 머리를 싸맸다. 방으로 돌아와선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고 바닥에 떨어진 긴 머리칼을 하나로 모아 버렸다. 그리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이부자리만큼은 단번에 찾았다. 폭신한 이불을 덮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름 씨, 스케치 파일 보냈어요.]
작업 관련 메시지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한 달간은 스튜디오를 비우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일을 쉬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일은 제주에 오기 전에 마쳤고, 중간에 자잘한 문제가 생기면 상주하는 직원들이 해결하거나 이곳에서 틈틈이 확인하기로 했다.
메시지를 보내 온 현지 씨는 두어 번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동료로 까다로운 이 감독의 주문에 난항을 겪던 중에 협업하기로 한 친구였다. 그녀에게 확인하겠다는 답장을 보내며 당장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마음 같아선 일이고 뭐고 다 뒷전으로 두고 싶지만, 어린애가 아닌 어른이라서, 슬퍼하다가도 꼬질꼬질한 몸을 씻어 내고 머리를 말리고 떨어진 머리칼을 모아서 버리는 그런 어른이라 오늘 할 일을 미루지 못했다.
[대충 봐도 좋은데요?]
[에이, 한 감독님 또 나 비행기 태운다. 감독님이 차린 밥상에 반찬 하나 올렸다고요.]
[그 반찬이 메인 메뉴잖아요. 맛있어졌어, 음악이.]
삽입할 음악 얘기를 나누다가 앞으로 만들어야 할 음악이 몇 곡 더 되기에 만날 날짜를 정하고 대화를 마쳤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서은오를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된 서은오를.
사람들은 그와 관계가 있든 없든 쉽게 떠들곤 했다. 서은오와 서은오의 집안을. 안 좋은 일을 겪었으니 정상적으로 살지 못할 거라고 함부로 떠들어 대곤 했다.
‘돈 많다고 행복한 거 아니야. 그, 누구 있잖으냐. 돈 때문에 납치당해서 형은 죽고, 동생은 살아남은 부잣집. 야, 살아도 그게 사는 거겠냐.’
식당에서 다른 테이블의 남자들이 떠드는 말에 나는 당신이 서은오를 아냐고, 당신이 봤냐고, 서은오가 왜 행복하면 안 되냐고, 피해자니까 더 잘 살아야지! 잘 살 거야, 하고 악을 썼다.
친구는 물론이고,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 새로 알게 된 지인이 있는 자리에서도 나는 유령처럼 일어나 남의 테이블 앞에 서곤 했다. 그뿐 아니었다. 유학생이던 시절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들어온 한국에서 딸을 몇 달 만에 봐서 행복해하는 아빠를 등지고 싸늘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말해 보라며 따져 물어 가게 분위기를 흐린 적도 있었다.
그 탓에 아빠는 서은오를 안 좋아했다. 그 집안에서 만들고 파는 것들을 죄다 안 썼다. 사촌에 사돈에 팔촌까지 그 집안과 엮인 거라면, 예를 들면 호텔이나 마트, 식품, 전자제품, 통신사와 최신 휴대폰 같은 것들을 홀로 불매했다.
남들은 나를 또라이라 여겼으나, 아빠는 할 말 다 하고 사는 딸을 자랑스럽고도 당연하게 여겼다. 단 하나 예외인 순간이 있다면 서은오라는 이름 앞에서였다. 그것만은 오래도록 착잡해하셨다.
‘그 애는 외롭지 않겠구나.’
‘…아빠.’
‘이제 청년이라고 해야겠지?’
‘나만큼 컸을 테니까요.’
‘그래. 그래도 여름아, 네가 외로워지진 말아라.’
아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타협 없이 산다는 것은 외로워지는 일이기도 했다. 아빠는 한 아이를 괜찮은 어른으로 길러 낸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회생활을 먼저 한 선배이기도 해서 질타가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계셨다. 네 잘못이 아니니 이제 그만 잊어버리라는, 언제까지 그럴 거냐는 타박 따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것은 어쩌지 못한다는 걸 몸소 겪었으니까. 백번 천번을 얘기해도 마음에 맺힌 일은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으니까.
그 일로 혼난 적이 없는데도, 지난 일 때문에 외로워지진 말라는 한마디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아빠는 긴 설명과 설득 없이도 간결한 문장으로 나를 꾸짖었다. 평소처럼 다정한 얼굴로 반찬을 밀어 주느라 바쁜 아빠를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있을 땐 나의 과업을 잠시 모른 체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일이기도 했다. 인생에는 편법을 써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날이 존재하니까.
그리고 그의 우려대로 나는 모든 인연을 팔 벌려 안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굳이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는, 그러니까 상처 주는 말에 참지 않는 나를 이해 못 할 거고, 굳이 이해를 바라지도 않으니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패악에 질려 떠났고 내가 깽판을 칠 때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만 소수정예처럼 남았다.
“그 사람들이 옳았고, 내가 틀렸던 거네.”
끔찍한 일을 겪고 어떻게 정상적으로 사냐고 했던 아무개의 말이 옳았다. 서은오는 행복했을 리가 없었다. 지난 세월 서은오가 행복하길 바란 것은 오로지 서은오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다 나를 위한 바람이었다. 서은오가 행복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괴로워지니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이기적인 나를 꾸짖듯 서은오는 불행한 눈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나는 더 노력했어야 했다. 상대가 보고 싶다고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평생 볼까 말까 한 상대니까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해선 안 됐다.
서은오가 상무로 있었다는 회사에 입사라도 할걸. 하다못해 회사 앞에 찾아가 죽치고 기다릴걸. 경비원에게 박카스를 바치고 매일 출근 도장 찍으면서 친해지면 서은오의 차가 어떤 건지 언질을 줬을지도 모르잖아.
“왜, 아주 스토커가 되지 못한 것까지 후회하지 그래.”
범죄자가 되지 못해 후회한다는 생각까지 번질까 봐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그 일에서 쉽게 벗어날 순 없으리라 짐작하면서도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랐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이 서은오가 되길 빌었다.
한숨을 내쉬며 어린 서은오를 떠올렸다. 그 당시 기사는 적나라하고 잔인해서 재벌가의 자식이라고 해도 살아남은 아이는 기삿감에 불과했다. 연일 쏟아지는 기사와 뉴스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납치범은 그 집에서 오래 일하던 운전사였다. 도박 빚에 허덕이던 운전사는 빚을 갚지 못하면 처참히 죽을 위기에 놓였고 그가 재벌 집 운전사라는 걸 아는 빚쟁이들이 크게 한탕 할 방법이라며 일을 벌이게 했다.
운전사는 갓난이 시절부터 태우고 다녔던 큰 도련님을 꾀어냈다. 돈만 받으면 아이는 돌려보내고 밀항하게 해 준다던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지 않으면 어선에 팔려 가거나 산 채로 배가 갈라지게 생겼으니까.
무명의 폐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숲속 폐가에 두 아이를 가둔 남자는 예상보다 길어지는 상황에 불안에 떨었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실제로 그가 남긴 종이에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글이 쓰여 있었다.
그러게 왜 꾸물거렸느냐고. 자식을 끔찍이 아끼던 고용인 부부가 금세 돈을 쥐여 주고 아이들을 데려갈 줄 알았지, 방송이며 경찰이며 죄다 불러 시간을 끌 줄은 몰랐다고. 바락바락 대드는 아이를 홧김에 밀었는데, 그 아이가 그대로 나가떨어져 죽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나도 걜 예뻐했다고.
운전사는 종이 말미에 누가 일을 시켰는지 명단을 써 남겼다. 속죄의 의미는 아니었다. 일이 틀어지자 연락을 끊은 것에 앙심을 품었을 거고 일전에 빚 때문에 자기를 괴롭힌 것을 원망하여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되었다.
구겨진 종이와 술병이 나뒹구는 폐가에서 남자는 목을 맸다.
그리고 겨울의 한낮, 숲 한가운데서 쓰러진 아이를 발견한 등산객이 구급차를 불렀다. 살아남은 아이, 라는 헤드라인의 기사 1면은 지금도 눈 감으면 떠올릴 수 있었다. 병원에서 경찰들과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겁에 질린 채 울고 있던 어린 서은오의 사진을.
그 숲은 긴 시간 폐쇄되었다.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두 시신과 며칠을 지낸 아이에게 정신적 충격이 상당해 보인다는 활자와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아.”
숨이 막혔다. 턱이 바르르 떨렸다. 울음의 전조는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발생하였다. 마음의 빚을 어떻게 갚을 건지 정하면 슈트 입고 발표하겠다고 큰소리쳤으나 아마 영원히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걸어도 모자랄 것 같으니까. 갚을 방법만 있다면 평생을 걸고 싶은데, 해결할 방법 같은 것은 사실 없으니까.
“안 자면 얘기 좀 하자.”
노크 후에 딸려 오는 목소리에 흠칫했다. 문밖에서 서은오의 기척이 느껴졌다.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서은오는 멋대로 문을 열었다. 서둘러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버렸다. 내가 잠들었다 여기고 문을 닫길 바랐는데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여름.”
눈을 질끈 감았다. 수십 년 만에 불러 준 이름인데 밝게 대답해 주지 못해서. 이제 이런 것마저 미안했다.
“나중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중에 언제.”
“나중에. 좀 나중에.”
“아니. 우린 대화 필요해, 지금.”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이불이 걷혔다. 깜짝 놀랄 새도 없이 목 뒤로 손이 들어왔다. 서늘한 촉감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비누 냄새가 풍겼다. 눈을 깜빡이며 사태 파악했다. 순식간에 허리를 세워 앉게 되었다. 의지 없이 몸이 쉽게 앉혀져 얼떨떨했다.
“…나는, 나는 괜찮아 보이는 거야?”
마른침을 삼켰다. 서은오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남들과 달라 보이냐고 묻는 거면. 아니야.”
“근데 왜 만져? 끔찍할 거면서 왜 만져?”
서은오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안 봐도 벌게져 있을 눈가를 애써 숨기려 고개를 돌렸다.
“은오야, 나 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
“난 네가 왜 우는지 전혀 몰라.”
내 중얼거림을 가만히 들어 주는 듯하던 서은오가 말했다. 나도 모르게 서은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은오는 미간을 살짝 구긴 채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와. 왜 우는데, 너.”
“얘기했잖아.”
혼자 행복했고, 혼자 잘 살았으니까. 그날 너를 혼자 보낸 것을, 같이 가자고 한 너를 외면한 걸 아주 오래도록 후회했으니까. 차에 타기 전에도, 차에 올라서도, 차가 멀어지면서도 몇 번이고 나를 돌아보던 너를 나는 끝까지 쫓아가지 않아서 지금까지 그 장면이 아픈 기억으로 남았으니까.
“다시 얘기해. 난 네가 왜 갑자기 나한테 떨어진 건지 그 해답도 못 찾았어.”
“미안해서, 미안해서 이런다고 몇 번을…….”
“네가 나 납치하라고 사주했어? 아니면, 싫다는 내 등을 떠밀기라도 했어?”
미안하다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 서은오가 따져 물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빛을 등지고 앉은 서은오를 응시했다.
“나한테 온 이유가 뭐야. 영화팀 그딴 거 다 집어치우고 말해. 돈 받으러 왔어? 돈 필요해? 아니면, 내가 너 잊고 살았다고 벌주러 왔어? 내가 사과해야 해? 잘못 없는 네가 나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살았으니까, 지금이라도 네게 뭘 줘야 하냐고.”
충혈된 눈이 보였다. 서은오가 지금처럼 길게 말한 걸 본 적 없는 나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서은오가 이를 악물고 따지고 들수록 내 정신은 맑아졌다. 살 것 같았다. 생생하게 원망하는 모습이라도, 이게 진짜 살아 있는 사람 같아서. 네가 살아서 다행이고, 잘 자라서 고맙고, 나는 그냥 너를 봐서 좋은데, 너는.
“겁나?”
속삭이듯 물었다. 서은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있었다.
“내가 진짜 돈 필요해서, 갈취하러 왔다고 할까 봐 겁나는 거지? 아니면, 나한테 사과라도 하라고 악다구니 쓸까 봐 두려운 거지?”
“…….”
“몇 번을 말해. 나 빚 갚으러 왔다고. 마음의 빚.”
“무슨 빚.”
“그날 납치된 게 네가 아니라, 나였다고 생각해 봐. 너는 나를 깨끗하게 잊고 살았을 거야? 그럴 수 있어?”
서은오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낯빛은 여전히 창백했다.
“남들은 억지로라도 잊고 산대도, 나는 못 그래. 못 했어. 그래서 네가 여기 있다는 소리 듣고 찾아온 거야.”
“…….”
“며칠 전까지 나는 너한테 속죄하며 살았다고 생각했어. 겨울마다 네 생각 했고, 누가 함부로 너에 관해 떠들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으니까. 그 정도면 내가 멋모르고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은 충분히 된다고 여겼어.”
서은오의 미간으로 빗금이 그어졌다. 눈빛은 불안했다. 아니, 어쩌면 떨고 있는 듯 애절했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근데 아니잖아. 아니었잖아. 처음에는 몇 년을, 6개월을, 4개월, 2개월, 그러다 그냥 겨울 초입에. 한겨울에 어쩌다 한 번 네 생각 했어. 네 이름 나오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지만, 그 횟수 합해 봐야 얼마나 될까. 수백 번은 되겠어?”
“한여름.”
“나는 그래도 살았어. 잘 살았어. 처음엔 힘들었지만 곧 친구도 사귀었고, 웃고 떠들고 좋았어……. 네 생각에 슬퍼질 때도 있었지만, 그런 날보다 좋은 날이 더 많았어. 근데 넌 아니라잖아. 넌 그날 이후로 죽은 세상을 살았다는데, 내가 어떻게 안 울어?”
“…….”
서은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괴로운지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내렸다.
“난 그날을 후회하며 살았어. 꿈에서 수백 번 결말을 바꿀 만큼 후회했어. 네 손 잡고 도망가고, 아예 너 따라가기도 하고. 하여간 별짓 다 했는데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더라.”
“같이 갔으면 너는 무사했을 거 같아?”
“그만큼 미안했어. 우리가 잘못한 건 없었지만 그래도.”
흐린 미소를 지었다. 같이 갔다면 더 처참한 결말을 만났을 게 분명했다. 알면서도 같이 가지 못한 걸 후회할 만큼 괴로웠다고.
“…잘 모르겠다. 네가 미안해하는 걸 고마워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아니면 도리어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지.”
서은오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대체 왜 미안하다고 해. 너 아니었어도 난 당했을 건데. 네가 그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하면 내가 뭐라고 해야 해.”
내가 대꾸하지 않자 서은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말없이 서로를 보았다. 우수에 찬 눈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단 듯 나를 보면서도 절대 피하지 않는 얼굴이 조각상처럼 완전무결했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예쁘다, 고고하다, 고귀하다, 우아하다, 눈부시다, 강렬하다, 어떤 수식어를 가져와도 모자랄 만큼 선연했다.
한참 만에 시선을 피한 것은 나였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요동쳐서, 촌스럽게 박동 소리를 다 들킬 것만 같아서. 나를 고맙고도 이상하게 여기는 서은오에게 별 감정을 느끼는 게 미안해서.
이런 상황에서 미쳤지, 라고 속으로 꾸짖지만 누구라도 홀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뭐라도 바치고 싶게 생겼다. 내가 빈털터리라 다행이야. 바칠 게 없어 애만 태워서 다행이야. …아니, 정말 다행일까. 뭐라도 주고 싶은데 줄 게 없어서 사흘을 방구석에 박혀 고민했으면서. 서은오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흘이고, 닷새고, 내내 고민했을 게 분명했다.
“너 왜 이렇게 예쁘게 컸어?”
“배 안 고파?”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 서로에게 던진 말의 결이 너무나 달라서 미간을 구겼다. 서은오의 미간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침묵이 길수록 내 쪽이 민망해질 말이라 선수 쳤다.
“나는 뭐, 항상 배고픈 줄 알아? 한참을 쳐다보다가 고작 묻는 말이 밥이야? 여름아 잘 컸다, 아님, 잘 왔다, 네가 와서 기쁘다, 친하게 지내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차라리 그냥 평소처럼 입이나 다물고 있지!”
피식 웃은 서은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서 아사 직전이라고, 아니라고.”
“내내 물만 마셨어. 내가 살아 있는 게 고맙지도 않니?”
버럭 소리 지르며 서은오를 따라나섰다. 신발을 구겨 신고 찬 바람이 부는 마당을 가로질렀다.
“전복죽은 좀 줄었던데.”
“너 설마 밥알 개수 헤아렸니?”
“그것까지 안 먹었으면 진작 쫓아냈어.”
별채 안은 따뜻했다. 한 손으로 식탁 의자를 빼놓고 성큼성큼 불 앞으로 향하는 등을 쳐다보았다. 입꼬리가 간지러웠다. 서은오가 지정해 준 자리에 앉아 소리 없이 웃다가 불시에 돌아보는 기척에 아닌 척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이미 다 봤는지 서은오는 헛웃음을 쳤다.
“먹을 걸 그렇게 좋아하면서 단식투쟁을 왜 했냐.”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눈을 매섭게 뜨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아서 그냥 포기했다. 곧 받아 볼 밥상 때문에 웃는 줄 아는 서은오가 귀여웠다. 이가 보이도록 혼자 웃는 게 민망해 입술을 정갈히 하다가도 자꾸 헤벌쭉, 벌어졌다.
“응? 왜?”
“…뭐.”
요리하다 말고 중간중간 돌아보아서 물었더니 새침하게 대꾸한다. 다시 나를 돌아본 서은오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몸을 돌리던 서은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눈을 가늘게 뜬 나는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괜히 사실을 전했다간 앞으로 치밀해질 게 뻔하니까. 그런 미소를 다시 못 보게 된다면 아쉬운 사람은 나니까.
내가 못 본 줄 알았겠지만 네 계산은 영 틀렸어.
돌아서는 네 몸보다 네 미소가 빨랐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