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겨울 문방구 (2/14)

1. 겨울 문방구

“그래서 아들이래, 딸이래?”

볼 때마다 조금씩 불러 오던 배가 이젠 제법 남산만 하다. 나는 도경 언니의 배에서 시선을 못 떼며 물었다. 그녀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성별은 몰라도 아기 엄마가 아기를 하루빨리 만나고 싶어 하는 것만은 잘 알 것 같았다. 휘어진 눈매와 뺨에 푹 파이는 보조개가 감탄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시간 진짜 빠르네. 그동안 나는 뭘 했나.”

한숨을 내쉬며 집과 일터뿐이던 일상과 고만고만한 인간관계를 떠올렸다. 친한 친구들은 연애하다 결혼해서 2세까지 만들 동안 나는 무얼 했나.

…하긴 뭘 해. 어떤 장면에 음악만 삽입했지. 하아.

무영에서 함께 촬영하며 동고동락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함께 찍은 영화가 개봉하고도 두 사람은 계속 비밀을 유지하다가 평범한 어느 날에 결혼 기사를 냈다. 그날 술집 매상이 아주 좋았다는 소문은 들었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도준을 독차지하게 된 도경 언니가 가루가 되도록 욕먹을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무영에서, 가까운 지인들만 불러서 말이다. 정말 영화 같은 결혼식이었다. 영화인들 아니랄까 봐.

도준은 결혼 전부터 툭하면 신혼을 즐길 거라고 노래를 불렀고 실제로 결혼 이후의 스케줄을 죄다 뺐다. 그러나 결혼하고 얼마 안 돼 아기부터 낳자는 도경 언니에게 졌다. 아기가 없었음 없었지, 신혼은 양보 못 한다며 강경하게 나오던 도준은 6개월 만에 항복했다. 뭐, 그런 것까지 알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임신 소식에 어떻게 된 거냐고 추궁하자 도경이가 너무 예쁜데 어떻게 이기냐는 도 배우의 주접 때문에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을 닮은 아기가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맛있어?”

창백한 얼굴로 물만 마시던 도준이 물었다. 도경 언닌 잘 먹다가도 미안한지 자꾸 눈치를 살폈고 혼자 맛있게 먹어 미안하다고 했다가 아기가 먹고 싶어서 그렇다는 귀여운 소릴 다 했다.

“아기가 이 맛을 어떻게 알아.”

“…….”

“너는?”

도준이 눈치 없이 타박했다. 쟤 왜 저래? 도 배우답지 않은 말이라 잠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도경 언니는 아무 말 없었고 도준은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맛도 모를 아기는 됐고. 너 잘 먹으면 됐어, 나는.”

“너는 왜 더 안 먹어?”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서.”

…집중한 내 잘못이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들 대화에 집중했나. 뒤늦게 도경 언니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도준의 시선도 딸려 왔을 때 나는 물었다.

“왜 나한텐 아무도 안 묻니. 나도 못 먹고 있잖아, 두 사람 때문에.”

“언제 왔어?”

“아, 정말. 같이 들어왔거든? 잘생기면 다냐? 재수 없어, 진짜.”

눈을 부라리며 기겁을 하자 도준이 픽 웃으며 물었다.

“감독님은 내가 아직도 잘생겨 보여?”

거울도 안 보나. 이보세요, 나는 여태껏 이도경이 인상 쓰는 거 본 적이 없다고요. 언니는 화나는 일이 있어도 너만 보면 다 풀린대. 쏘아붙일까 하다가 그냥 다른 답을 내놓았다.

“난 거짓말은 안 해. 잘생긴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팩트고. 너 재수 없는 것도 팩트지만.”

실소하는 얼굴에 전투력을 상실했다. 입덧은 왜 자기가 하냐고. 도준은 입덧으로 살이 내려서 안 그래도 날렵한 얼굴이 더 날렵해졌다.

“음식 떠 올게. 언니 뭐 더 떠다 줘?”

“아냐,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뷔페 음식을 살폈다. 영화인의 축제, 라고 적힌 촌스럽게 큰 현수막을 못 본 체하며 음식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느긋하게 음식을 퍼 담던 나는 허공에 벌레가 날아다니는 듯 시야가 거슬려 고개를 들었다. 벌레는 아니고 창밖으로 하얀 눈발이 흩날렸다.

“또 눈이야?”

“지독하게도 오는구나.”

옆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수긍했다. 해가 지났으니 올해의 첫눈이지만 올겨울엔 정말 툭하면 내렸다. 그렇게 멍하니 눈발을 구경하며 서 있는데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도준, 이 작가, 연예인… 쇼윈도, 어쩌고…….

귀를 찔러 오는 따가운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하.”

훈기가 돌다 못해 후끈한 호텔 연회장에서 나는 차라리 추워지고 싶었다. 올해엔 우아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는 정초부터 재수 없게 바스러졌다. 외출 전 방치돼 시들어 버린 꽃다발이 생각났다. 꽃도, 목표도 나에게만 오면 다 바스러지는구나.

“밥 먹으러 왔으면 음식을 씹어요. 왜 잘 사는 사람들을 안줏거리 삼아.”

열심히 쑥덕거리던 테이블이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는 나를 보고 사색이 된 얼굴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 하, 한 감독이네. 언제 왔어? 온 줄도 몰랐네.”

김 피디의 어설픈 환영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쟤 좀 빨리 보내라는 눈빛이 일사불란하게 오갔다. 나는 한 명 한 명 시선을 마주하며 쉽게 일어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정으로 내비쳤다.

“…여기서 먹으려고? 왜? 한 감독은 이 작가하고 친하지 않나? 저 테이블로 안 가?”

“왜요, 여기 뭐 자리 있어요?”

“어?”

“저, 막 앉았잖아요. 왜 앉자마자 못 쫓아내서 안달이신지. 설마 저 따돌리세요?”

“무슨! 그게 아니라, 음, 하아……. 다 들었니, 여름아? 그래서 이래?”

“뭘요?”

“…못 들었어?”

주도해서 뒷담을 깐 이의 낯빛이 환해졌다. 들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떠든 것치곤 이제 와 너무 발발 떠는 것 아닌가. 정말 간이 콩알만 하시군요. 못 들은 줄 알고 화색을 띠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가증스럽기도 해서 뭘 먹기도 전에 속이 더부룩했다.

그래도 태연하게 빵조각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뭐, 배부르니까 잘해 주지, 뭣 하러 남편이 마누라만 보고 있냐는 김 피디님 말이요? 아니면, 저거 다 쇼다, 저 얼굴로 한 여자만 볼 수가 없다, 루머 생성한 성 감독님 말이요? 아, 아니다. 혹시 남의 남자가 되니까 더 섹시해 보인다는 정 작가님의 정신 나간 얘기 말씀하시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섹시하긴 뭐가 섹시하냐고 질투에 열등감으로.”

“아, 정말! 한여름!”

이 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성 감독이 큰소리쳤다. 덕분에 멀지 않은 테이블의 이도경과 도준이 나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음식 뜨러 간다는 애가 왜 남의 테이블에 앉아 있나. 두 사람의 표정이 딱 그랬다.

“한 감독, 진짜 이럴래?”

주위를 둘러본 성 감독이 이를 악문 채로 다그쳤다. 억울해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선배님들, 우리도 좀 우아해지면 안 돼요? 올해엔 진짜 시늉이라도 해요. 네?”

“이게 미쳤나.”

“제가요? 도 배우를 코앞에 두고 떠든 분들이 아니라? 도 배우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요. 제가 간 떨려서 앉았어요. 감독님, 대체 왜 이런 스릴을 즐기세요?”

“너 올해 상 받았다고 막 나가네? 이 작가 눈에 들었다고 아주 무서운 게 없지?”

“올해 아니고 작년. 해 지났잖아요. 새로운 해가 뜬 지 벌써 며칠짼데요. 그래서 오늘 모인 거잖아요. 근데 난 괜히 나와서 귀만 썩고 있고, 잘 사는 부부는 잘났다는 이유로 별 더러운 소릴 다 듣네?”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벌게진 얼굴로 저 쌈닭 좀 어떻게 해 보라는 눈치 싸움을 지켜보다가 일어섰다.

이만하면 됐다. 정초부터 내 사람들을 헐뜯어 내 목표를 깬 값으로. 뭐, 이들도 새파랗게 어린 음악 감독이 정초부터 재수 없게 군다고 여길 테니까 피차 액땜했다 치면 될 일.

“야, 말할 거야?”

하지만 김 피디가 팔을 잡아 오며 공격적으로 애원했다. 애원할 거면 처량하게 해야지, 어째서 성난 얼굴로 하느냔 말이야. 그대로 달려가 불어 버리고 싶게.

“피디님, 요즘 누가 허락도 없이 손목을 덥석 잡아요? 채널 돌려 봐요. 안 나와, 이제 그런 장면.”

“말할 거냐고!”

“아, 그러고 보니 선배 팀, 이번에 도 배우한테 시나리오 보냈죠? 대체 도준이랑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야, 제발. 한 번만 봐주라.”

콧방귀 뀌며 팔을 뿌리친 순간.

“우리 팀 쌈닭이 판을 또 조지고 있다기에 구경 왔는데, 뭐야. 심각한 일이야?”

이 감독이 끼어들었다. 고개를 들이밀고 김 피디와 나를 번갈아 살피는 얄미운 행동에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새벽부터 전화해 다짜고짜 헛소리를 지껄인 동료를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야, 여름아.”

이 감독은 여름아, 한여름, 하며 쫓아오고 있고 도 배우와 이 작가는 나를 잊은 게 분명하고. 여전히 저들끼리 희희낙락. 저것들도 얄미워 죽겠네.

“한여름, 내 말 듣고 있냐고.”

듣고 있고말고. 내 귀는 몽골인 뺨쳐서 또라이의 말뿐 아니라 ‘저러니까 남자가 없지.’ 하고 뒤에서 수군대는 목소리까지 빠짐없이 주워 담는다. 기가 막혀서. 내가 남자가 없다니. 지금이야 없는 거지. 항상 있긴 했거든요? 오래가지 않았을 뿐이지. 구구절절,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만 모양 빠지니까 기각하고.

“메일 보낸 거 확인했던데, 읽었지? 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눈에 초점이 왜 내가 아닌데?”

할 말은 많으나 침묵을 택한 나는 보란 듯이 귀를 후비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감독이 허, 하고 헛웃음 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의를 갖춰 물었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감독님.”

“뭐.”

“혹시 저한테 화풀이하시는 거 아니죠?”

“무슨 화풀이. 내가 화날 일이 뭐 있다고.”

발뺌하기엔 무진장 젖은 눈입니다만. 하지만 역시 사설은 거두절미하고 한 테이블을 턱짓했다. 배부른 여자와 그녀만 응시하고 있는 남자. 이도경과 그녀의 남편인 도 배우는 세상에 둘만 남겨진 로맨스 영화라도 찍는 듯 같은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을 죄다 관객으로 만들었다.

“너 싹수만 없는 줄 알았는데, 배려도 없구나.”

사람은 대개 정곡이 찔리면 버럭 하는 법. 나의 의리란 흑백이 명확해서 미움을 잘 샀다. 이 감독이 살벌한 눈으로 놓쳐 버린 옛사랑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나만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 구겨진 음악 감독 인생을 다리미처럼 쫙쫙 펴 준 저 은인들을 나는 사랑해서, 이 감독 사단에 끼게 된 주제임에도 이 감독을 싫어했다. 그래서 나 또한 이 감독을 위아래로 관람하며 말했다.

“화풀이가 아니라면 더 실망인데요. 이게 무슨 경우예요? 정초부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셨냐고요. 잘 자는 사람 깨워다가. 감독님이 감독이야, 양아치야? 대체 뭐야.”

“뭐, 이 자식아?”

“나 작년에, 아니 며칠 전에 상까지 받은 훌륭한 인잰데, 뭘 녹음하라고요? 고요한 바다의 파도 소리, 그러나 사실은 너무 고요하지 않은 바닷소리? 뭔 개소리예요? 오래된 목조 집에서 나는 삐꺽거림, 키 185의 사연 있는 성인 남자가 오래된 나무 바닥을 밟아 낸 소리? 기름 난로에 올라간 노란 양은 주전자가 김 펄펄 내며 끓는 소리? 그걸 9온스 머그잔에 따르는 소리? 변태예요? 그딴 걸 주문하는 감독이 어딨어?”

“똑똑하네. 그걸 그새 다 외웠어? 우리 영화 주인공 키가 185잖아. 185는 초과해도 되는데, 그것보다 작은 건 안 될 것 같네.”

“그럼 그냥 걜 써! 강 배우 걸음마 시켜서 그 소리 똑, 따내서 음악에 입혀요!”

“신, 35. 여기 사운드가 굉장히 중요해. 사람 하나 없는 오름. 늦은 밤, 새가 우울하게 지저귀는 소리. 마음 같아선 그 오름에 너도 없었으면 싶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또 야박하진 않잖아. 녹음 장비가 한두 푼도 아니고, 그 무게도 무시 못 할 거고. 녹음 버튼 누르고 너 하산했다가 다시 올라가는 수고로움은 내가 뺐어. 감사 인사는 됐어.”

내가 언제 그걸 물었냐고. 기가 막혀서 입만 딱 벌리고 있는데 이 감독은 태평한 얼굴로 노트를 넘겨보며 표시한 부분마다 설명했다. 소름이 끼쳤다. 침을 꼴깍 삼켰다. 여기서 말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눈을 크게 떴다.

“감독님,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상황에 무슨 제주도를 가요. 내가 엔지니어도 아니고. 어?”

“어쭈. 눈 뭐야, 눈깔 안 풀어?”

“내가 진짜 상까지 받았는데, 녹음 장비 들고 허허벌판에 서 있어야 해요? 봄날은 간다, 찍으라고? 유지태는 이영애라도 만났지! 난 뭐 오름 혼자 오르라며!”

억울한 항변이 먹혔는지 드디어 이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이내,

“한여름, 너 안 가면 다른 감독 알아보려고.”

할 말을 잃었다. 정신 차려. 진정해. 선배를 칠 순 없어. 눈을 질끈 감은 채 심호흡하는데 이 감독이 어깨동무를 해 왔다. 눈을 뜨니 다정한 목소리로 꼬드기기 시작했다.

“여름아, 잘 생각해 봐. 내가 일머리 없는 놈한테 일 시키는 거 봤어?”

“나더러 진짜 제주도 한달살이를 하라고요?”

“녹음 잘되면 한 달이 뭐야? 하루 이틀 만에 한 감독, 한양 컴백이지.”

“결과물이 감독님 마음에 안 들면요?”

“왜, 너 그렇게 자신 없어? 자기 능력 못 믿는 새끼야? 그냥 그저 그런 감독이냐고.”

헛웃음이 나왔다. 또 시작이다. 이지훈 전매특허. 좋은 소리는 할 줄 모르고 사람을 자극하는 성질머리. 하여간 사람 약 올리는 데 도가 튼 남자다. 실력만 없었음 상종도 안 했다, 진짜. 한숨만 푹푹 내쉬자, 이 감독이 태연하게 입을 벙긋거렸다.

“거기 문방구 하나 있어. 학교 하나, 문방구 하나. 문방구가 바닷가 근처고. 좀 걸어야 학교가 나와. 근데 문방구 섭외가 안 되네.”

안 들어도 알 만했다. 문방구에서도 뭘 녹음하라는 거네. 바닷가에서도. 작은 학교에서도. 해탈한 얼굴로 이 감독을 쳐다보았다. 그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이처럼 조잘조잘 떠들기 바빴다.

“그 문방구가 딱 맞는데, 섭외가 죽어도 안 돼. 우리 스태프가 애걸복걸해도 안 된대. 돈 주겠다니까 되려 주겠다더군. 줄 테니까 오지 말라고.”

“그래서요?”

“근데 내가 보기엔 너 밤낮으로, 틈나는 대로 녹음하게 될 거 같아. 장비 들고 튀어 가기엔 거기가 제격이란 말이지. 위치도 그렇고 문구사 내부가 목조인 것도 마음에 들고. 가서 설득해 봐.”

“하. 감독님, 양아치니, 진짜?”

사람이냐, 진짜? 장소 섭외도 안 된 곳으로 가서 살아남으라고? 따발총처럼 대들 준비하는데, 이 감독이 더 빨랐다.

“문방구 주인이 유명한 사람이라던데. 피디 말로는 뭐, 전에 재벌가 납치 사건 당사자라고.”

벌어진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만 깜빡이다가 겨우 물었다.

“…누구라고요?”

“서은오라고 알아? 나도 어렴풋이 뉴스에서 본 기억은 있는데. 아무튼 부자라 그 얼굴에, 허허벌판에서 애들 상대하는 문방구를 하나. 사람 좋아 보여서 섭외 요청했더니 그냥 재벌이더라. 눈빛으로 사람 괄시에 멸시를, 아무튼 무시해서 나는 물론이고 피디랑 막내들까지 항복하고 올라왔어.”

다들 설득 못 해 돌아왔으면서 나더러 뭘 어쩌란 거냐고 따져야 마땅한 타이밍에 얌전히 눈만 깜빡거리는 게 이상했는지 이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진짜 안 되겠다, 싶어? 안 갈래? 못 가겠어? 안 가는 건 좋은데, 너 그럼 앞으로 나하고 일 못 한다.”

“…갈게요.”

이 감독의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 이 감독은 쉽게 승낙한 게 얼떨떨한지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번복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인사도 없이 호텔을 빠져나왔다.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이번 주까진 스튜디오에 있어야 하니 짐 꾸릴 여유는 충분했으나 마음이 급했다.

창밖으로 스치는 불빛을 응시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모른 체하며 서은오를 생각했다.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행운도 드물게 존재했다. 오랜 세월 나는 내가 그 드문 확률에 들길 바랐다. 가장 후회하는 순간으로 돌아가게만 해 준다면 내 수명 중 10년은 기쁘게 바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적은 오지 않았기에 꿈에서만 그날의 결말을 바꾸었다. 잠에서 깨면 허무하고 처량하기 그지없는데도, 깨고 나면 차가운 현실에 더욱더 아픈데도 잠시나마 행복했다.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는 그 아이를 끌어안고 우리 이제 울지 않아도 된다고 중얼거리던 그 순간만큼은.

여전히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기적과 이해할 수 없는 행운이 드물게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아마 평생이 가도록 그 드묾에 속하지 못하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지금, 내게도 무엇인가가 닥치고 말았음을 예감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동시에 손이 떨리고 입 안이 말랐으며 눈가가 홧홧했다. 내가 서두르는 이유는 너무도 당연했다.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말 다 했냐?”

“했겠냐?”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그래, 쌈닭이 어디 가나. 쌈닭이 날 가리는 거 봤냐. 사건의 발단과 전개가 내 탓은 아닌데 자꾸 쌈닭 탓을 해 대니 듣는 쌈닭 기분이 바닥을 쳤다.

인상을 쓰며 속닥이는 동창들을 흘겨보았다. 신랑과 신부가 멀리 있어 다행이었다. 정신없이 바빠 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각종 경조사에 진상이 한둘쯤은 꼭 있다지만 그게 내가 될 줄은 몰랐다. 나도 남의 결혼식, 아니 피로연에서 깽판 놓기는 처음이라고.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어린 시절 캄캄한 밤만 되면 천장을 응시한 채 골몰했다. 쪼끄만 게 자기비하를 어찌나 잘해 왔는지. 모난 성격은 내가 가진 장점을 다 먹어 치우곤 나를 대표하는 특징이 되었고 그렇게 제 살을 깎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키가 한 뼘 더 자라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어설픈 길이의 교복을 입고, 똑같은 복장을 한 애들과 지루하게 때론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며 꽃다발을 받는 날까지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매사 예민하고 겁 많은 아이로 살았다. 겁이 많으면 곱아드는 줄로만 아는데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쥐도 궁지에 몰리면 깍, 깨문다고.

나는 늘 벼랑까지 내몰린 애였다. 서은오의 이야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가십이었고, 목격자 얘긴 그보다 덜해도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사람을 좀먹었다. 좀먹기도 전에 이미 서은오의 이름에 버튼이 눌려 버리는 게 더 문제였지만.

내게 겨울은 서은오의 계절이었다. 가을이 끝나 갈 무렵부터 그 애 생각에 묶여 살았다. 그 애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머릿속에 그 애의 지분이 현저히 줄어들고 이젠 코끝이 시릴 무렵과 뼈가 시리도록 추운 날에 어쩌다 가끔 떠올리지만, 오랜 세월 겨울만 되면 서은오의 멀어지는 얼굴과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울먹이던 장면을, 무섭도록 잔인했던 기사들을 생각했다.

「서진 그룹, 서정우, 서은오 실종.

목격자 같은 학교 8세 어린이.

유괴범 정체, 서정우의 전 운전사.

목격자 직접 범인 지목해.

서은오 생존. 등산객이 발견.

서정우 사망. 시신 확인해…….」

“한여름, 너는 왜 매번 서은오 얘기만 나오면 지랄이야?”

“지랄?”

수십 년 전 매일같이 쏟아지던 기사의 타이틀을 곱씹던 나는 눈을 치켜뜨며 정정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동창생은 입 다물 생각이 없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지랄!”

마른세수하며 고민했다.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기하지 말자는 소리가 팔을 걷어붙이고, 동그란 배를 내밀면서까지 화낼 일인가? 그래서 나는 어쩔 것인가. 큰 목소리로 거친 말을 뱉으면 이기는 줄 아는 놈에게 손을 저어 보이며 무시할 것인가, 아니면 눈높이 교육처럼 그의 수준에 맞게, 같이 유치해질 것인가.

“서은오 병신이 다 됐더라, 그 말 하자마자 너 지랄 났잖아?”

“병신은 혐오 표현이야. 나이를 항문으로 처먹었니? 입 간수 좀 해.”

“뭐? 항문?”

“어. 입으로 똥 싸지 말라고. 구린내 나니까.”

“이야, 한여름. 너 아직도 걔 편드는 거냐? 첫사랑이라?”

“요샌 여덟 살 소꿉장난도 첫사랑에 쳐주니? 그럼 네 첫사랑은 나겠네. 완벽한 짝사랑으로다가.”

“야!”

“뭐!”

나도 안다. 유치하다 못해 하등 쓸모없는 그저 입만 아픈 대화라는 것쯤은. 다른 주제라면 상종도 하지 않을 일인데, 서은오란 이름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앞장서고, 따지고, 열을 내고 만다. 별수 있나? 가만있지 말라고 온몸이 아우성을 치는데. 심장이 마구 뛰고 가슴은 서늘하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엉켜 난리였다. 언제나 그랬다.

‘여름아.’

어린 서은오의 얼굴이 영상 편지처럼 재생되었다. 같이 뛰어놀고, 웃고, 손잡고, 약속하고, 숨바꼭질하다가 냅다 박력 있게 입술을 박은 장면을 지나 겨울 방학식에 몰래 나가자고 속닥이는 나를 따라 나오는 도련님의 뽀얀 얼굴이.

장면은 오래된 영화처럼 이어졌다. 아무도 없는 문방구 앞에서 게임을 하던 어린 우리 앞에 멈춰 선 검은 세단. 서은오 집안의 전 운전사와 그 안에 타고 있던 그 애의 형. 아직 하교할 시간도 아닌데 서은오를 태워 가려던 그들. 혼자 남는 게 싫어 가지 말라고 만류하던 나와 그런 나를 꾸짖기 시작하는 어른과 집에 가야 한다고 얼른 타라던 그 애의 형. 그 애가 내 손을 놓지 않자 친구도 데려가도 좋다던 허락. 그 말이 왠지 싫어 고개를 저은 나. 망설이던 끝에 결국엔 차에 오른 그 애.

그러니까, 결국 걜 혼자 보낸 것은, 나.

“내, 참. 무서워서 동창 근황 묻겠냐? 어? 득달같이 달려드는 꼴 좀 봐라. 너 그거 신경과민이야. 치료받아. 더 심각해지기 전에. 뭐, 어떻게, 내가 우리 병원 예약 잡아 줘?”

“무서워서 네가 있는 병원을 어떻게 가. 의사가 환자 비밀 보호 의무도 안 지키는데? 게다가 네 환자도 아니라며. 네 아는 선배는 후배가 자기 환자를, 그것도 몇 년 전에 맡았던 환자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는 건 아니?”

“알지도 못하면서 내 선배 함부로 들먹이지 마!”

“왜? 나도 동창 지인 근황 좀 묻자. 어? 득달같이 달려들지 말고 대답이나 해. 네 선배는 짧게 했던 서은오 주치의 경력이 인생의 유일한 영광이라니? 계속 떠들게? 넌 또 뭔데. 서은오 그림자도 구경 못 해 본 게 왜 네가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녀? 결국엔 잘린 놈, 못 본 놈 아니야?”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환자 비밀 보호 의무 조항이 있다는 건 일반인도 다 아는 사실인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서은오의 정신 착란증을 얘기하는 건지. 아무리 술을 마셨다지만 서은오가 재벌이고 그 집안에서 데리고 있는 법조인이 몇 명이며 그들이 얼마나 승률 높은 변호사들인지 잊을 정도로 마신 것 같진 않았다.

“말이 너무 심하네!”

“내가? 너 취했니? 네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닌데. 손 번쩍 들어서 뺨 때려. 정신 좀 차려야겠다, 너.”

“이게, 정신과 닥터한테 정신 차리라니! 야, 너 이 자리에 상관없는 사람 함부로 끌어들여서 떠들지 마. 그리고 말조심해. 내가 무슨 비밀을 얘기했어? 없는 얘기 한 것도 아니고, 지라시에 다 나오는 소리잖아! 서진 그룹 후계자가 안하무인에 착란 증세 있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 안 그래?”

동창생이 애타게 동의를 구하자 그들은 마지못해 알음알음 다 아는 얘기라는 둥, 여름이 말처럼 좋은 날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긴 그만하자는 둥 화제를 돌렸다.

“…하.”

열이 올랐다. 소주잔에 소주를 채웠지만, 마시진 못했다. 곧 저녁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집에 들러 짐을 챙긴 후 공항으로 가야 했다.

“여름아, 와 줘서 너무 고마워.”

한복 차림의 신랑 신부가 내게 인사했다. 오후까지 녹음이 길어져 본식은 보지 못했다. 겨우 결혼식 끝물에 도착했으나 그들은 서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와 줘서 고맙다며 좋아했다. 그럴 만도 했다. 끔찍하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축가 가수로 섭외해 주었으니까.

축가가 끝난 후 유명 가수는 내게 신세 갚았다고 칼같이 메시지를 보냈다. 신랑 신부와 사진까지 찍은 후 메시지에 첨부했다. 확실한 빚 청산이었다.

신부는 기억 못 하겠지만 나는 신부에게 빚을 진 적 있다. 납치 사건이 있고 난 뒤로 나는 외톨이가 되었는데 언젠가 그녀가 편을 들어 준 일이 있었다.

그땐 매일같이 목격자로 서에 불려 다녔고, 신문사와 방송사를 비롯해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찾아왔다. 불행을 목격한 어린이는 불행 그 자체라며 어른이고, 아이고 모두 나를 멀리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벌어질 일을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방조한 것으로 몰았다. 시간이 흐르자 나쁜 어린이가 되어 있었단 말이다. 나는 목격자일 뿐이었는데도 참 쉬웠다, 모든 게.

수십 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진 그룹의 형제를 기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잊고 살다가도 이야기의 진실이라며 지난 사건에 여러 살을 보태어 떠들어 댔다.

과거, 그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고 서은오는 돌아왔다. 서은오의 형은 돌아오지 못했고. 나는 서은오가 돌아온 게 좋으면서도 겁이 났다. 그 애를 마주한 나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나의 잘못을 들키고 말 거야. 내 죄가 들통나고 말 거야.

‘왜 그 시간에 그곳에 있던 거니? 누가 나가자고 한 거니? 왜 너는 따라가지 않았니? 다른 이상한 낌새는 눈치채지 못했니?’

그런 질문들이 쏟아질 때면 입 한번 벙긋대지 못했고 아빠가 대신 목청을 높였기에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목격자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날도 비슷한 질문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서은오에게로.

‘왜 그 시간에 그곳에 있던 거니?’

마치 그 시간에 나간 것이 잘못이라는 듯.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는 듯. 어린 마음들을 지배하고 부수기에 적합한 문장이었다.

‘쟤가 그랬어요. 저 애가 나가자고 한 거예요.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내 손을 확 놓아 버렸어요. 그래서 탄 거예요.’ 아찔한 말들을 상상하며 나는 더 서럽게 울었지만, 서은오는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나가고 싶었어요. 아저씨를 따라가면 안 되는 줄은 몰랐어요.’

…그 꼬마가 뭘 안다고 그런 대답을 했을까. 어른이 된 지금 그때의 서은오를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폭풍이라도 몰아치는 것처럼.

“자, 그렇게 고마우면 뽀뽀해, 뽀뽀해!”

어수선한 분위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 자리가 파할 때까지 어수선하게 흐른다. 목소리를 높인 일은 없던 일이 되며 다른 주제로 빠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적당히 장단을 맞추며 감사함을 전하고, 모인 이들은 과하게 축하하며 짓궂은 장난을 쳐 댔다.

싸늘하게 식은 마음을 안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사람들 진짜 못됐지.”

혼잣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인간은 모두 뒤에서 씹혀. 그런 게 두려울 나이는 지났지만, 그래도 네가 씹히는 건 여전히 화가 나고 싫다.

“하아.”

하얀 입김이 퍼져 올랐다. 어쩐지 눈물이 고였다. 눈가가 홧홧해지는 걸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은 일을 자기 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평생에 걸쳐 쉽게 떠들었다. 무료할 때, 어쩌다 떠올라서, 어쩌다 유괴 얘기가 나와서, 그리고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손끝과 발끝이 저릿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끌고 집으로 향했다. 심각한 교통 체증에 시계를 확인하며 초조해했다. 제주행 비행기는 자주 있는데도, 놓치면 다음 비행기를 타면 되는데도 마음이 급해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잠시도 쉬지 않고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 * *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바람은 칼같이 매서워서 콧물이 줄줄 흘렀다. 이는 딱딱 소리를 내고 팝핀이라도 추듯 온몸을 떨면서 걷는데 이 와중에 직업병이 도져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가 배경 음악으로 깔리는 상상을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음악은 좋지만 장면은 불행하고 식상했다. 불행하게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고, 감독도 나라서 ‘컷’ 하고 외쳐 줄 이가 추위에 떨고 있는 나밖에 없었다. 그러니 계속 걸을 수밖에.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감독이 컷을 외치면 주인공의 스태프들이 달려와 난로며 담요며 덮어 주는데 그런 장면은 내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캄캄하고 낯선 길 위에 선 나에게 컷 사인을 줄 수 없고 난로와 담요를 덮어 줄 수도 없어서 눈에 불을 켜고 문방구를 찾았다. 한시라도 빨리 바람을 막아 줄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겨울 문방구라고 적힌 간판을 찾을 수만 있다면 행인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후우.”

멀리서 철썩대는 파도를 응시했다. 낮에는 분명히 아름다웠을 바다가 밤이 된 지금은 기괴하였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불행의 기조처럼 보였다. 빛이든 사람이든 모조리 삼키려고 입을 벌린 채 달려오는 듯했다.

8시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곳은 벌써 깊어 가는 새벽같이 어두웠다. 걷는 사람은 하나 없고 가로등도 없으며 간헐적으로 몇 대가 있긴 했으나 불이 나갔다고 착각할 만큼 환하질 못했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한여름.”

짐을 끌며 울먹거렸다. 공항에서 타고 온 택시가, 목적지가 이 근처 어디쯤인 것 같으니 알아서 찾으라며 큰길에서 내려 주는 바람에 이 개고생을 겪는 중이었다. 휴대폰만 믿고 하차한 잘못도 있었다. 그게 문제가 될 줄 몰랐다. 예민한 휴대폰이 극심한 온도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방전될 줄 누가 알았나.

날은 춥고, 시야는 어둡고, 길은 모르고 목적지로 추정되는 그 어떤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죄다 낮은 지붕이거나 돌담을 두르고 있거나 뭐가 자라는지는 모르나 밭으로 추정되는 대지뿐이었다.

“으아, 바람에 날라가켜! 괜히 나왔신게!”

“아냐! 라면보다는 낫네! 빨리 가게!”

“눈이 하영 올까? 왜긴! 눈사람 만들게! 쌓였으면 좋겐.”

거짓말처럼,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어디선가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마자 세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나를 지나쳤다.

“얘, 얘들아!”

다급한 부름에 아이들이 돌아보았다.

“네?”

“혹시 겨울 문방구가 어딘지 아니?”

아이들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제발 살려 달라는 말이 울컥울컥 치솟았지만, 꾹 참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얼어서 감각이 없는 얼굴을 애써 움직여 보았다.

“누구신데, 이 시간에 문구사를 찾아여? 어른이.”

“어?”

“또 귀찮게 하려는 거죠! 은오 삼촌 피곤하게 하려고!”

“아, 아냐. 나 걔랑 친구야! 서은오 친구!”

반가운 이름에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세 아이는 서로 눈을 맞추며 어쩐담? 하고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그리고 허무하게도 몇 걸음 만에 문방구가 나왔다. 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오르막을 조금 오르자, 잔디가 깔린 ㄷ 자 모양의 돌담집이 나왔다. 문구사로 쓰기엔 아까울 정도로 고즈넉하고, 근사했다.

울,

주택 입구에 나무로 된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간판이 아래에 있었구나. 목 빼고 지붕 쪽만 쳐다보고 다녔으니 발견할 리가 있나. 게다가 골목으로 빠지며 오르막을 조금 올라야 한다는 것도 몰랐으니 이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얼어 죽었든지, 아무 집이나 들어가 사정했든지 둘 중 하나였다.

“맛있는 냄새!”

아이의 말처럼 뜨끈하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밥을 짓는 중인지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하늘로 치솟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이들은 주황빛 전구가 켜진 마당을 지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집 문을 열었다. 그 애들이 들어간 입구 옆에도 작게 문방구라 적힌 나무 입간판이 있었다. 문구사로 쓰는 공간인 듯했다.

“삼촌!”

나무 무늬가 사이사이 격자로 들어가긴 했으나 유리문이라 안이 훤히 보였다. 불은 약한 조도로 켜져 있었는데, 지키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안을 기웃거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감각 없는 코 아래를 훔치며 목을 좀 더 빼는데,

“어딨어, 삼촌!”

“삼촌의 친구가 왔는데! 여자 친구야?”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며 천방지축으로 달려 나갔다. 아뿔싸. 놀란 마음에 입만 벙긋거렸다. 뭐라고 해명할 건가. 친구가 아니라고? 여자 친구도 아니라고? 둘 다 아니라고? 그럼 저 애들은 왜 거짓말했냐고 나를 나무랄 텐데. 어린아이들의 미움을 사느니 차라리 서은오의 미움을…….

아니다. 그냥 아이들의 미움을 사자.

“얘들!”

말을 끝맺지 못했다. 허리에 무늬 없이 어두운 남색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나왔다.

“친구?”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어 댔다.

“난 친구 없는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던 남자는 추우니까 들어가 있으란 말로 아이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이들은 키득대며 문을 닫았다.

“안 합니다.”

남자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대로 등을 돌리는 바람에 어어,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걸음을 뗐다. 가까이 다가가는 기척이 느껴졌는지 남자가 다시 돌아보았다.

“안 산다고요. 안 팔고. 하여간 안 돼.”

미간을 좁힌 남자가 이어 말했다. 잡상인 취급에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동안 상상해 오던 재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울거나 빌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다투거나 더럽거나 괜찮게 끝내거나 그런 것들을 공상했지, 잡상인은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다.

그래, 예상에 없던 것이 어디 재회뿐이겠는가. 돈을 처바른 게 분명한 공간에서만 살 것 같은 도련님이 섬의 촌 동네 문방구 사장님이 됐다는 소식도 예상에 없었고, 앞치마를 두른 몸이 누가 봐도 좋아 보인다는 것과 화룡점정 얼굴까지 잘생겼다는 것도 예측에 없었다.

어릴 때 얼굴이 남아 있다면 분명히 좀 생겼으리라, 짐작했어도 이건 너무했다. 영화계의 큰 손실이었다.

“할 말 더 남았습니까?”

남자가, 그러니까 서은오가 싸늘하게 물었다. 아직 한마디도 안 했는데……. 긴장감에 한숨이 나왔다. 멀뚱히 선 내가 답답하겠지만, 나도 내가 입술만 벙긋거릴 정도로 당황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데 어째선지 말이 목에 걸려 넘어오질 않았다. 그저 우물쭈물하기 바빴다.

“…잡상인은 아닌데요.”

“제작사에서 온 거 아닙니까? 여기 빌려 달라고.”

“영화팀이긴 한데…….”

내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돌아선다. 큰 등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쳤다.

“나, 나 한여름이야. 예전에,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잠깐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었는데. 아까 애들이 친구라고 해서 당황했지? 음, 우리가 예전에는 좀 친…….”

서은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아까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싸늘함에 숨이 다 멎는 기분이었다. 좋게 말해 동창생이지, 서은오의 처지에서 나 따위는 과거 일을 들추려고 나타난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적막이 길었다. 뼛속을 파고들던 추위마저 잊을 정도로 두려웠다. 고개를 숙인 채 입술만 말아 물었다.

“그래서.”

낮은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그쪽이 내 친구라서 뭐.”

왜 찾아왔냐는 질타가 섞여 있다는 것쯤은 이해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서은오가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이번만큼은 붙잡을 용기가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순간, 느닷없이 배에서 천둥이 쳤다. 그 소리에 놀라 얼른 고개를 젖혀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구름은커녕 함박눈만 예쁘게 쏟아졌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서은오가 가지가지 한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 날씨가 안 좋네. 막, 천둥 치고 바람 불고.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즐거웠고, 잘 지내고…….”

눈치도 없이 배에서 또 곡소리를 냈다. 밤새워 디렉팅하고 오후까지 녹음하느라 뭘 주워 먹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피로연에서 뭘 먹길 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음식을 입에 넣을 새도 없이 동창생이 서은오 얘길 꺼냈으니까. 종일 먹은 거라곤 기내에서 마신 음료가 전부였다.

배고플 만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니? 고대하던 서은오 앞에서, 그것도 잘 자란 미남 앞에서.

“어디 가.”

돌아보니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는 서은오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서은오는 문을 열고 안을 턱짓하며 말했다.

“밥 먹고 가.”

먼저 들어간 서은오의 등을 보다가 따라 들어갔다. 홧홧해진 얼굴을 애써 추위 탓으로 돌리면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무릎이 꺾여 마루턱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창피했으나 일어설 수 없었다. 따뜻했고 그냥, 좀 살 것 같아서.

“아아! 삼촌! 여자 친구가 넘어졌어요!”

나무 식탁에 완두콩처럼 나란히 앉은 애들이 소리를 질렀다.

“추워서 그래. 수건하고 담요 갖다 줘.”

태연하게 대꾸하는 서은오와 달리 완두콩들은 우당탕거리며 바쁘게 뛰어다녔다. 포근한 수건과 두꺼운 담요, 그리고 빈손으로 달려온 가장 작은 애는 고사리손을 내 뺨에 척 올려 두었다. 누워 있는 내 위로 귀여운 얼굴들이 둘러쌌다.

“화장실이 어디야?”

손이라도 씻고 싶어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이들은 내가 다시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작은 두 팔로 받아 줄 준비를 하며 안내했다.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움찔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마른 웃음이 샜다.

손을 씻으며 거울을 응시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칼은 엉켜서 엉망이고 귀 끝과 코끝, 양 뺨까지 붉었다. 눈은 운 것처럼 촉촉해서 괜히 찝찝했다. 머리를 하나로 묶고 옷매무새도 매만진 후에 나왔다.

나오자마자 완두콩들의 눈이 짠 것처럼 나를 향했다. 픽 웃자 애들도 헤헤 웃었다.

식탁엔 연한 살구색 뚝배기 하나와 나무 목기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작은 인덕션 위에 놓인 뚝배기는 보글보글 소리를 냈고 아이들은 음식과 나를 번갈아 살피기 시작했다. 쭈뼛거리며 식탁으로 다가가는데 수저를 가져온 서은오가 의자 하나를 뺐다. 멈칫하며 그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서은오는 선 채로 애들을 챙기기 바빴다. 시선이 나를 향해 있지 않아서 자기가 앉으려고 뺀 줄 알았는데, 내 자리를 배정해 준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코앞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끓고 있는 음식은 밀푀유나베였다. 그 옆엔 찍어 먹을 소스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레몬으로 절인 것인지 상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다른 간장 종지에는 고추가 들어갔는지 매콤한 향도 같이 올라왔다.

“맛있니?”

서은오가 잠시 돌아선 사이에 애들에게 속닥거렸다. 내 앞에 차려진 음식과 달리, 아이들 앞에 놓인 것은 단팥죽이었다. 완두콩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한술 뜬 팥죽을 후후, 불면서 야무지게 먹었다. 새알까지 짭짭 씹어 대는 모습에 절로 침이 고였다. 요새 애들은 팥을 좋아하나? 하도 배를 곯아서 그런지 팥을 싫어하는데도 죽 냄새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삼촌이 해 준 음식은 다 맛있어여.”

아이의 칭찬이 끝나자 돌아온 서은오가 내 앞으로 목기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제 팥 잘 먹나 봐.”

내 앞에 놓인 그릇이 늘었다. 단팥죽이었다. 애들 먹는 모습을 부럽게 쳐다본 걸 알아챈 모양인지 새알에, 잣까지 올려 가져왔다. 멍하니 시선을 올리자 서은오가 다시 말했다.

“싫어했잖아.”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대꾸도 못 하고 수저부터 들었다. 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서은오는 금세 시선을 거두고 보글보글 끓는 나베를 확인했다.

김이 솟아오르는 죽을 한 입 떠먹었다. 단맛에 눈이 번쩍 뜨였다. 팥으로 만든 게 맞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내가 알던 떫은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숨도 안 쉬고 그 뜨거운 걸 입 안으로 마구 밀어 넣자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바보야. 여자 친구라고 더 준 거잖아!”

“삼촌은 거짓말 안 하거든!”

속닥거리던 목소리가 의견 충돌로 인해 커졌다. 서은오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아이들을 보았고 나는 눈치만 살폈다.

“언니가 팥 못 먹으니까, 다른 거 해 주는 거라면서여!”

제일 작은 완두콩이 팔짱을 끼고 소리쳤다. 서은오는 말이 없었다. 나베는 먹기 좋게 익어 가고, 나는 분위기고 뭐고 나베를 덜어 먹고 싶어진다.

그때 나를 꾸짖듯 서은오가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나는 얼른 완두콩들을 쳐다보며 사뭇 반성하는 척했다. 내가 왜 엄숙한 태도를 흉내 내는지 나조차 모르지만.

“못 먹는 줄 알았어. 아직도.”

서은오는 가볍게 대꾸하며 인덕션 온도를 최하로 낮추고 국자로 음식을 덜어 주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앞에 놓인 그릇을 응시했다. 내가 음식을 덜어 낼 땐 항상 마구잡이로 헤쳐지던 것들이 서은오의 손을 타자 일정하고도 수줍게 모여 있었다.

소담한 식탁을 둘러보았다. 어린 시절 어린이가 싫어할 법한 콩과 팥 따위의 건강식을 서은오에게 넘겨준 적 있었다. 서은오는 나도 싫은데, 하고 꿍얼대다가도 숟가락에 얹어서 한입에 다 먹어 주었고.

그러니까 팥죽이 메인 메뉴였는데 내가 팥을 싫어했던 걸 기억하고 나만 특별식을 해 준 거라고? 그 짧은 새에?

“나눠 줘도 되지?”

서은오가 내게 물었다. 얻어먹는 주제에 의견이란 게 있을 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 없이 뚝배기를 밀어 주려고 했다.

“미쳤어?”

다행히 손을 뻗자마자 서은오가 잡아챘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도 나는 멍했다. 얽힌 손이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서은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팽개치듯 놓았다.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잡은 줄 알 정도로 치를 떨며 뿌리쳤다. 민망해진 나는 괜히 완두콩들을 의식하며 맑은 국물을 떠먹었다.

“어?”

먹자마자 고개를 들고 말았다. 뚝딱 만든 것도 놀라운데 맛까지 있어서. 얼어 있던 속이 단번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국물을 두어 번 떠먹다가 해장하는 것처럼 그릇째 들이켜 버렸다.

“안 뜨거워요?”

“응?”

“설마 언니도 시원해여?”

“어? 아니, 이건 개운해.”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

완두콩들은 고개를 저으며 어른들의 맛 표현을 비난했다. 개운한 건 또 뭐야? 몰라! 맛있으면 맛있는 거지! 뜨거우면 뜨겁고, 차가우면 차갑다고 해야지! 떠드는 말을 듣다가 서은오를 쳐다보았다. 아이들과 가까운 쪽에 앉은 서은오는 혼자만 식사하지 않았다.

“…넌 안 먹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서은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먹었어.”

식사를 마쳤는지 아이들은 깨끗이 비운 그릇을 개수대에 넣어 놓고 거실에 둘러앉았다. 입구에서 문을 열면 주방과 그 앞에 놓인 식탁이 바로 보이는 구조였다. 그 옆엔 거실과 화장실, 방으로 추정되는 문 하나. 반대편에 방문 두 개.

“다 먹었으면 택시 불러 줘?”

집 안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서은오가 물었다. 직접 둘러보고 나니 이 감독이 탐낼 만했다. 이 감독은 이 안까지는 못 보고 문방구로 쓰는 바깥 집만 봤겠지만. 어쨌거나 살짝 숨겨진 모양의 골목으로 들어와 오르막을 조금 올라야 보이는, 그 골목만 거치면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크게 트여 있는 이 집은 촬영할 영화의 주인공이 사는 곳으로 제격인 분위기와 구조였다.

“안에 이시냐?”

갑자기 문이 제멋대로 열리며 걸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이들은 할머니다! 하고 조르르 달려 나갔고 서은오도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번번이 안 주셔도 돼요. 힘들게 물질하신 건데. 제가 사 먹으면 되는데요.”

“니가 우리 동네 아기들 거둬 맥이는디 이런 거라도 해 줘사 사람이주. 낼랑 전복죽 쒀먹으라.”

“예. 감사합니다.”

서은오가 고개를 숙이자 아이들이 나를 힐끗대며 손을 흔들었다.

“삼촌 내일 봐여! 언니 안녕!”

아이들이 가고 적막이 찾아왔다. 문을 닫은 서은오는 할머니가 주신 전복 더미를 개수대 옆에 올려놓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어쩔 거냐는 눈빛이었다. 더 먹을 게 남아 있냐는 듯한, 대체 언제 갈 거냐고 묻는 듯한 매서운 눈빛.

수저를 내려놓으며 심호흡했다. 나는 저 사람이 서은오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웬만하면 어디 가서 군소리하지 않는 내가, 어디 가서 말문이 막히거나 져 본 적 없는 내가 서은오 앞에선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가 말문이 막혀 꼬리를 내렸으니까. 눈앞에 실체가 없었을 때도 항상 졌다. 누가 서은오란 이름만 들먹여도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그러니 평소의 한여름을 보여 주려면 눈앞의 상대가 서은오라는 사실을 잊으면 된다.

“내가 달갑지 않겠지만, 나도 네가 아주 달가운 것은 아냐.”

침착한 문장에 서은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럼 개소리하지 말고 나가, 라고 할 것만 같아서 서은오가 입을 열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너 혹시 연락하고 지내는 동창이 있니?”

“…….”

“그래.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있다면 전화해서 확인해 보라고. 내 별명이 뭔지.”

“야.”

“그럼 쌈닭이라고 할 거야. 그거 말고 또 있냐고 물으면, 서은오 엄마라고 할 거고.”

“미쳤냐?”

서은오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었다.

“괜히 그런 별명이 붙진 않았겠지? 맞아. 내가 네 얘기만 나오면 자식 감싸고도는 극성 엄마처럼 굴었어. 아마 내가 자식을 낳아도, 너 싸고돌던 때만큼 열정적이진 못할 거야. 한창때랑 같을 수 없겠지. 나이가 있을 텐데.”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소리야.”

“소원이 있다면 아주 늙기 전에 너 만나는 거, 그거 하나였어.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모르겠다, 나도. 너 보니까 수십 년을 곱씹었던 게 하나도 생각 안 나. 다른 건 다 됐고, 나 네 편이라고.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영화 팀이라며.”

“…내가 영화 팀 사람은 맞는데, 여기 빌려 달라고 온 거 아니야. 아니, 빌려주면 좋긴 하겠지만. 녹음을 하러 온 거긴 해. 안 할 수도 있었는데, 네가 여기 있대서 온 거야.”

“그러니 영광으로 알아라?”

비아냥대는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횡설수설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역시나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냐고 따져 묻는다. 여기서 굴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방 한 칸만 내어 줘.”

“…….”

“빌려주라, 좀.”

“뻔뻔하네.”

“숙박비 낼게. 원한다면 청소도 할게. 다 빈방 같은데, 하나만 쓰자.”

“맡겨 놨냐.”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능청 떠는 나를 서은오는 가만히 응시했다. 고민하는 기색인 듯해 마음이 급해졌다. 생각나는 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빨래도 내가 할까? 음식은 하라면 할 수는 있는데, 그냥 네가 하는 게 나을 거야. 맛을 보장할 수 없거든. 나 진짜 죽은 듯이 있을게. 너한테 방해 안 되게 먼지처럼 있을게. 집에선 뭐 안 할 거야. 바빠, 나도. 오름 가야 하고, 바다도 가야 하고. 집에 있다고 해도, 허튼짓 절대 안 해. 그냥 가끔 어떤 소리가 듣기 좋으면 녹음기를 켜는 정도? 네 목소리를 녹음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친구냐, 너하고 내가?”

딱딱한 음성에 기가 죽었다. 고민하는 기색이 아니라 닥치고 나가라는 뜻이었구나.

한숨을 내쉬며 벗어 두었던 코트를 껴입었다. 나의 느린 몸짓을 서은오는 말리지 않았다. 내가 미적거리며 마루턱까지 걸어갔을 때야 비로소 음성이 떨어졌다.

“동네 좁아서 분명히 말 돌아. 남녀가 한집에 있으면.”

“난 상관없는데?”

사과의 서두인지, 허락의 전조인지 몰라 서둘러 다가갔다. 좁혀진 거리가 불편한지 서은오는 미간을 구긴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남자라는 건 설명 안 해도 알 거고.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을 자신 있으면 써.”

“…진짜?”

흘긋 나를 한번 본 서은오가 문가에 놓인 캐리어를 잡고 문을 열었다. 신발을 구겨 신고 서은오를 따라 나갔다. ㄷ 자 모양의 집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불 꺼진 집으로 들어섰다.

“안채는 내가 쓰는데, 당분간은 네가 여길 써.”

“넌?”

“아까 거기.”

안채만 해도 문이 여러 개였다. 방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쓰던 방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굳이 왜? 차라리 내가 아까 밥 먹은 집을 쓸게. 아니, 거기서 방 하나만 쓸게.”

“별채는 사람들 드나들어.”

서은오는 불을 켜고 빈방을 보여 주었다. 바깥쪽과 안쪽에 있는 문을 하나씩 열었다. 안쪽에 있는 방은 창이 아주 컸고 멀긴 했지만 바다가 보였다. 남은 하나는 적당한 크기의 창문이 달려 있고 그 밖으론 마당이 보였다. 아쉽게도 침대가 있는 곳은 없었다.

“혹시 침대 있는 방은 없어?”

“내 방.”

서은오와 눈이 마주쳤다. 서은오는 있는 사실만 전달한 것뿐인데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가까운 거리라 당연히 들켰다. 서은오가 헛웃음을 쳤다.

“아니, 뭐, 누가, 뭐를 어쩐다고 그렇게 정색을 해.”

“…….”

“근데 너 별채로 가려는 이유가 뭐야? 안채를 통째로 날 주려는 이유가 뭐냐고.”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나 때문에 잠자리를 바꾼다는 사람에게 상관 안 할 만큼 안하무인이 아니라서 묻는 거야.”

“야, 좀 떨어져.”

서은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멀어졌다. 정신 차려 보니 가까워져 있던 건데 정색하며 물러났다. 무안해서 대꾸할 타이밍을 놓쳤다. 좀 전에도 어쩌다 손 한번 잡았다고 치를 떨며 뿌리쳤지.

내게 싹수도 없고 배려도 없다던 이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나보다 더한 놈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중에 서은오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외모만 훌륭한 어른이 되었구나. 내면은 왜 이렇게 된 거냐고, 순진하고 예뻤던 그 도련님 어디 갔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물을 수 없었다. 어릴 때와 딴판이라고 생각하자마자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냐는 생각으로 귀결됐으니까.

“여기서 지낼 거면 하나만 지키면 돼.”

서은오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든 지켜 주겠단 결심으로.

“닿지 마, 나하고.”

“어?”

“밥이고 청소고 다 됐으니까, 네 보폭으로 세 걸음 정도는 거리 유지하라고.”

미간이 좁아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부탁하는 처지고, 함께 있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매달린 거라 싫은 기색을 보이면 안 되는데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이럴 거면 대체 왜 허락했어?”

“안 했으면. 얌전히 꺼질 생각은 있었고?”

“…야, 무슨 말을.”

“장난. 친구 좋다는 게 뭐냐며, 네가.”

서은오는 아무 방이나 쓰라며 잠시 모습을 감췄다. 나는 바다가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캐리어를 눕히고 잠시 창밖을 응시했다. 기척 없이 서은오가 돌아왔다. 그는 향긋한 냄새가 나는 침구를 가져다 놓으며 바로 옆방이 자기 방이고 바깥쪽에 있던 문이 욕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부터 별채로 가겠다고도 했다.

“나 불편할까 봐 옮기는 거면 그냥 있어도 되는데.”

나가려는 서은오에게 다급히 말했다. 서은오는 나를 돌아보며 짧게 대답했다.

“내가 불편해.”

문이 닫히고도 한참을 서 있었다. 느린 속도로 짐을 풀고 옷가지를 챙겨 욕실에 들어가 오래도록 씻었다. 마음대로 욕조도 썼다. 추위와 사투를 벌인 것을 알 테니 허락 없이 욕조를 쓴 것 정돈 눈감아 주겠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시간을 보내며 이 집에 머물게 된 일이 잘된 일인지 골몰했다. 싫다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린 결과로 집주인은 냉기가 흘렀다. 하지만 뭔가 모호했다. 찬바람이 쌩쌩 불긴 하는데 막상 내가 불편할 것은 없다고 해야 할까.

“모르겠다, 나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욕실을 나왔다. 고요한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드라이어가 놓여 있었다. …얘 진짜 이상한 애야. 괜히 꿍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와 머리부터 말렸다. 위잉- 뜨거운 바람이 머리칼을 건조하는 동안 맹렬하게 서은오를 생각했다.

“너무 잘 자랐어…….”

생각의 결론이 왜 잘생겼다는 거로 마침표를 찍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도 서은오의 얼굴을 곱씹었다. 참 신기했다. 서은오를 생각하면 늘 어린 얼굴이던 모습이 이젠 어른의 모습으로 등장하니까. 특유의 가로로 길고 크던 예쁜 눈이, 지금은.

지금은 어쩐지 야했다. 서은오라는 걸 모르고 마주쳤다면 연신 훔쳐보고 머릿속에 저장해 ‘언젠가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를 봤었다’고 오래도록 자랑할 만큼 강렬했다. 이 땅에서 잘생긴 남자를 목격한 일은 구전설화가 되곤 하니까.

여자들이 줄을 섰겠지? 대기표가 있다면 나도 좀 뽑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불을 덮으며 피식 웃었다. 바닥은 뜨끈했고 몸은 노곤해서 별 쓸데없는 상상을 다 했다. 우리가 목격자와 피해자 관계로 남지 않았다면, 나는 네게 약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 거고 우리에겐 겨울의 얼룩 따위 없었을 테지. 매해 눈이 올 무렵이면 앓을 일이.

평범한 아이들이 자라면서 겪는 권태와 상처, 기쁨과 허세를 우리도 통과했더라면 오늘처럼 어쩌다 너를 만나 잘 자란 모습에 치근덕거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네 입술을 훔친 첫 여자는 아니었니. 은오야, 잘 기억해 봐. 숨바꼭질하다가 내가 냅다 입술 박은 거. 지금 너 애인 있니. 근데 싹수는 왜 이렇게 없니. 괜찮아. 너 앙칼진 것도 매력 있어…….

맥락 없는 상상이 꿈으로 번져 갈 때쯤 탁, 하고 조용히 문소리가 났다. 나 때문에 내내 별채에 있다가 들어온 것인지 발소리가 들렸다.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올렸다. 뒤늦게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은오야, 잘 지냈니. 잘 살아왔니. 어떻게 살았니. 그 일은 잊혔니. 혹시 아직도 그 일이 너를 괴롭히니. 아마 그렇겠지. 형이 죽었으니까, 평생을 잊을 수가 없겠지.

있잖아.

왜 그때 내가 나가자고 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어?

너도 어렸잖아. 그런데도 왜. 어떻게 그게 됐어?

오래도록 가슴에 맺혔던 물음을 반복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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